[장편] Exit Music 1부 (上) 전에 올렸다가 부끄러움에 부르르 떨며 한번 내렸던 글입니다. 약속대로 1차 수정의 결과물(과연?...ㅠ0ㅜ;;;)을 올립니다. 우선 1부만 올리고, 2부는 1주일 내지 열흘 안에 역시 완결방(!)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부 완결까지 이제 한 편 남았답니다. (감격의 눈물;;) 아, 그리고 제목인 exit music은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니까..^ ^;;)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앗, 또 하나! 노래 제목을 클릭하시면 음악이 나옵니다. ^-^;;;; ……………………………………………(절취선)…………………………………………… “괜찮아. 상관없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 지해가 웃으며 대답하자, 정욱의 냉정한 눈에 아주 잠깐동안 빛이 스쳐갔다. 그리고 역시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 근육이 살짝 뒤틀렸다. 잘 고정시켜놓은 팽팽한 힘줄들이 순간적으로 주인의 통제를 잃은 것처럼… 지해는 그걸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깎아놓은 조각처럼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스쳐간 웃음의 그림자. 비웃음이 됐든, 냉소가 됐든… 뭐든지 간에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도 신기하고 이상하고 잡스런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 놀랄 일도, 놀라야 할 일도 없더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런 군더더기 말은 안 하니만 못한 것이다. #1. OH, SWEET NOTHING! He ain't got nothing at all, not a thing And not a shirt, shirt on his back No, he ain't got nothing at all ( Oh! Sweet Nuthin' - Velvet Underground) “야, 김지해. 어제 KBS 심야 토론에서 느이 아버지 디게 멋있으시더라? 여야 의원들이 다들 찍소리도 못하고 깨갱하던데….” 지해는 생전 처음 대화해 보는 이 여자애의 금테 안경 속 단정한 눈동자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 멍청하니 내려다 보며, 갑자기 말 시키는 바람에 귀에서 뽑았던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갔다가 교실에 들어오는데, 교실 뒷문 근처 거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 안경잡이 범생이 여학생이 교복 재킷 자락을 잡았었다. 입학한 지 이제 열흘 남짓, 아직 얼굴도 가물가물한 같은 반 애가 갑자기 말을 걸어 반갑기도 하고 무슨 용건인지 호기심도 났는데, 이제는… 더 듣기가 싫다. 지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 여자애는 양쪽 볼이 금세 발그레 달아올라서는 옆으로 시선을 피하며 헤실거린다. 어쨌든 이럴 때는 무슨 속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 뭔가를 몰라서, 착각해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사람을 놀리려고 그러는 것인가. 척 보기에도 비교적 막돼먹지 않은 고지식·똑똑·건실급으로 분류된다. 그럭저럭 명랑쾌활·품행방정·모범착실한, 정상적인 집안의 딸내미. 수줍어하는 표정을 보니 나쁜 속뜻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어제… 텔레비젼 토론에 나오신 서울대 부총장 너네 아버지 아니시니? 좆선일보랑 요새 한바탕 정면대결해서 화제인 정치학과 김창섭 교수…….” 좆선일보는 자신이 전에 새벽 배달하던 신문이다. 지해는 갑자기 발작적인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느라 눈살을 찌푸렸다. “야, 한선경. 3반의 김진해 말하는 거 아냐?” 옆에서 듣고 있던 퉁퉁한 녀석이 한 마디 쏘더니 쌀쌀맞게, 난 또 무슨 소리 하나 했네, 하고 덧붙인다. 아까 화장실에서 본 녀석인데, 얘도 우리 반이었나? “아, 맞다. 김진해! 이름이 비슷해서 내가 착각했네. 미안해.” 지해는 그 애가 당황하면서 사과하는 걸 보며, 이 애도 막 자란 애는 아닌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긴 그런 애니까 고1짜리 지지배가 한밤중에 그 재미없는 시사 토론 같은 것도 보고 그럴 거다. 제법 기특하네, 하는 생각 속에 가슴 한켠이 욱씬하며 괜히 한숨이 나온다. “우리 아바이가 김교수님 막내아들이 우리 학교, 나랑 같은 학년이라고 해서…… 울 아빠는 경제학과시거든. 이름을 얼핏 들었는데 난 넌줄로만 알고… 미안해.” 자꾸만 미안하다고 하니 되려 이쪽에서 더 미안해진다. 뭐가 저 한선경이가 미안할 일인가 말이다. 저 아이의 기대를 못 맞춰준 자기가 되려 미안해야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점점 더 그렇게 생각이 된다…. 아아, 답답하다. 지해는 약간 어색해진 공기를 무마하려, 그리고 어느새 굳어진 듯한 자기 얼굴을 피려, 그냥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땐 아무 말도 안 하고 웃는 게 상책이다. 앞에 선 여자애도 순간적으로 안심했는지, 지해의 얼굴을 뭐에 홀린듯 멍하니 쳐다보며 웃는다. “야, 한…선경…? 너 웃을 때 보조개 들어가는구나. 디게 이쁘다.” 미안한 마음을 달랠 겸 이쁘다고 던져준 말에 그저 좋다고 헬렐레하는 걸 보며, 지해는 다시 한번 하얀 이를 드러내고 길게 웃어주었다. 자…이제 됐지…? 곧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기 시작했다. 창가 자리 맨뒤에서 세번째에 앉은 지해는 어느새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창쪽으로 몸을 틀어 창밖만 열심히 바라보았다. 어쩌다 자기들 자리 근처에서 이들이 하던 대화를 듣고 있던 성빈과 광진이 속닥거리는 것이 앞, 뒤, 옆의 몇 명 애들에게까지 어렴풋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야, 야. 김지해…쟤… 아버지….” “그래… 나 중1 때 김지해랑 같은 반이었잖아….” IMF…부도…파산…자살… 이런 어두운 단어들이 드문드문 튀어나오는 것을 들으며, 그들의 뒷자리인 뒷문 바로 옆에 앉은 정욱은 무심결에 지해를 흘깃 바라보았다. 지해는 아직까지 창밖을 뚫어져라 보고 있어 정욱의 자리에서는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입학식 첫날부터 저 동그스름하게 톡 튀어나온 뒤통수가 눈에 띄었었다. 키대로 줄을 섰을 때 둘 다 키가 큰 편이라 거의 맨 뒤에 섰었다. 190이 약간 넘는 자신보다는 녀석이 좀 작아서 너덧 줄 앞에 섰었는데, 하나로 대충 묶은 어깨 길이 정도의 연한 갈색 머리에 자꾸 눈길이 갔었다. 어차피 지루한 입학식이라 구름이 햇빛을 드러냈다 숨겼다 할 때마다 입체적으로 바뀌는 녀석의 머리색을 바라보기도 하고, 미처 다 묶이지 않고 수두룩 삐져나온 잔머리들이 바람에 날리는 미묘한 모양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녀석이 옆반 줄에서 아는 놈을 발견했는지 문득 몸을 조금 뒤로 틀고서 웃으며 손짓을 할 때, 늘씬한 뒷모습을 결코 배신때리지 않는 앞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안심했던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뒷모습만 그럴 듯하고 앞모습이 꽝이면 괜히 속은 듯한 기분에 불쾌해지니 말이다. 창을 통해 부서져 들어오는 3월 오후의 창백한 햇살이 하염없이 창밖만 쳐다보고 있는 지해의 연갈색 머리에 또다시 금빛 하이라이트를 드리워주고 있었다. “6교시라고 선생 들어왔는데도 아직 자는 녀석들이 있네. 잠도 깰겸 출석이나 한 판 땡기고 시작할까?” 아직도 눈빛이 흐려지지 않은 30대 초반의 국어는 또박또박 출석을 부르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마치 정말로 아이들 얼굴이랑 이름을 매치시켜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중간에 교탁 바로 앞에 앉은 애한테 ‘너희들 아직 서로 이름 다 모르지?’ 하는 열의 만땅 젊은 교사다운 멘트도 날려가며. 여자애들 출석을 먼저 부르면서 남자애들한테 이 기회에 잘 보고 찍어두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자… 아가씨들 얼굴은 다 확인했고… 이제 사내 녀석들 이름이나 불러볼까? 어디 보자… 강명석.” “네.” “강정욱…… 음, 네가 그 강정욱이구나?” 정욱은 ‘어떤 강정욱 말씀이십니까’ 하려던 것을 참고, 그저 꼿꼿하게 등을 편 자세로 고개만 약간 까딱해 보였다. 어차피 뭘 말하는 건지는 뻔하다. 이 학교, 세강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인 아버지와 세강종합병원 원장인 어머니의 외아들. 더 나아가 이 학교를 빙 둘러싼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지은 세강 건설이 속한 거대재벌 세강 그룹 강성철 회장의 3남2녀중 차남의 1남2녀중 외아들. 실질적인 대한민국 최고 갑부인 강회장의 열네 명 손주 중 하나. 손자 일곱 명중 서열 두번째. 이 수준의 재벌 자식이면 고등학교를 한국 내에서 다니는 애는 별로 없다. 정욱도 웬만큼 어릴 때부터 어울리던 녀석들은 전부 유학중이었다. 고리타분한 영감탱이가 송충이는 솔잎 어쩌구, 사자 새끼는 벼랑에서 운운 하면서 대한민국 표준 코스대로 일반인들과 똑같이 공부하길 요구했을 뿐이었다. 궁중 암투를 방불케 하는 이 집안 후손들 사이의 피튀기는 ‘성은聖恩 입기’ 경쟁만 아니라면 이런 왁자지껄한 교실 안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일개 고등학교 국어 선생 따위가 ‘네가 그 강정욱이냐’고 물을 때는 입가에 확연한 비웃음을 달지 않기 위해 신경써야 하는 것이 짜증스러울 뿐, 그런 질문 자체는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김경훈.” “네.” “김민필.” “네.” “김지해.” “………….” “김지해.” “………….” “김.지.해……없나?” 멍청하니 창밖을 쳐다보다 무심결에 들리는 자기 이름에 선뜻 놀란 지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부르면 바로바로 대답해야지 뭘 그렇게 넋을 빼놓고 있어!!!” “죄송합니다.” “네가 혹시 3학년 김지후 동생이냐? 동생이 1학년 들어온다더니 금방 알아보겠네. 내가 작년에 니네 형 담임이었다.” “아, 네…….” “형만한 아우 없다고, 형보다 완성도는 좀 떨어지지만 이 녀석도 만만찮은 꽃미남이구만. 너는 느이 형보다 키가 좀 큰 것 같다. 키가 몇이냐?” “180인데요.” “너도 공부 잘 하냐?” 난처한 질문에 지해는 풍성한 입술을 살짝 벌리고 눈꼬리가 살짝 쳐지며 가늘게 휘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해는 반편성 배치고사에서 전교 35등을 했었다. 이 학교 수준이 상당하기 때문에 전국으로 따졌을 땐 꽤 쓸만한 성적이었지만, 형이 워낙 수재이다 보니 자기가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이런 곤란한 질문도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게 최고다. “니네 형은 여지껏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어. 이번 모의고사 때는 전국 수석 했다던데. 임마. 너도 형만큼 해야지.” 선생님과 아이들의 시선이 빗겨갈 때까지 미소를 유지하던 지해가 곧 휴우 하고 들리지 않는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살짝 떨군 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정욱의 날카로운 눈이 놓치지 않았다. 학기를 시작하고나서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지해가 그 잘난 ‘전교 수석이자 개교 이래 최고의 꽃미남’ 김지후의 동생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입학하고 열흘 동안 하루도 거른 적이 없는 것 같다. 김지후는 어쩌면 올해 대입 전국 수석이 유력시되는 이 학교의 기대주란다. 그러니 그 이외의 정보가 없이 이 학교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인 경우 지해가 괜찮은 집 아들인 것으로 쉽게 생각해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강남에서도 가장 노른자위, 대한민국을 움켜쥐고 있는 중산층들이 밀집해 있는 이 일대에서 모여든 애들이라, 언뜻 보기에는 시커멓고 별 존재감이 없는 것 같은 아이들도 알고 보면 꽤 먹고 살 만한 집 자식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사람은 누구든 처음엔 은연중에 자기랑 같은 집단에 소속된 사람을 일단 자기 수준으로 놓고 보는 버릇이 있으니까. 물론, 이 동네라고 무조건 부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택가에는 어김없이 가난한 집들이 잘 사는 집 사이사이 끼어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는 햇빛 잘 안 드는 반지하 셋방에 사는 지해같은 가난뱅이들도 어쩌다가 하나둘 있었다. 가난뱅이임을 괜히 더 티내면서 대놓고 삐딱해져가는 애도 있었고, 지해처럼 엉겁결에 괜시리 있는 집 자식으로 오해받고 있다가, 언젠가는 다 뽀록나버려 입지가 어정쩡해지는 애들도 있었다. 아무리 이 학교 애들이 서로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우고 성격을 파악하기 전에,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그 다음 단계로 어느 아파트 몇 동인지(평수가 바로 나오니까), 그 다음으로는 뭐하는 집 애인지부터 따지는 종자들이라지만. 아무리 이 학교 학생들의 계급 체계가 카스트 제도보다 더 복잡 다단하다지만. 아직은 입학한지 한 달도 채 안 된, 서로에 대해 충분히 모르는 3월 초였다. BGM : The Boy From Ipanema - Helen Merill “아, 준석이 형!” “김지해! 지후 저녁 도시락 가져왔냐?” 3학년 보충수업이 끝났을 무렵, 지해는 사복 차림으로 쇼핑백 하나를 든 채 3학년들이 쓰는 별관을 들어서다가, 친구들 서너 명과 계단을 내려오던 소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성큼 걸어갔다. 190이 가까울 듯한 장신에 무테 안경을 쓴 온화한 외모. 이미 소년이라기 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성숙한 분위기. 지해의 사촌형이자, 역시 같은 학교 3학년인 민준석이었다. 입가로는 웃으면서도 미간을 찌푸리며 안스러워하는 준석의 표정을 보고, 지해는 말없이 씨익 웃었다. “또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밥 새로 지어갖구 왔나 보구만.” “우리는 아직 럴럴하니까. 나중에 바빠지면 이 짓도 쫑이야.” “너도 고달플텐데, 울 엄마가 지후 것까지 챙기신다니까 왜 이리 말을 안 듣냐.” “됐으…. 우리 형이란 작자가 워낙 입맛이 까다로워야 말이지. 나도 이 짓 때려치고 싶다. 해주고도 맨날 욕만 먹고….” “하하, 너네 하수관이 또 말썽이라더니 그거 주인집에서 고쳐줬냐?” “내일 낮에 기술자 온대. 나 그 바람에 조퇴해야 되잖아. 지후형이 또 쏜살같이 고해 바쳤나 보네.” “지후가 나한테 안 하는 얘기가 어딨냐? 그리고 집이 주인 바뀌면 금방 알아본다고 엄마가 그러시더라. 멀쩡하던 게 주인 바뀌면 여기저기 고장난다고.” “하긴 그래. 형네 이사 나간 다음에 몇 달 동안 수도관 터지고, 멀쩡하던 벽에 물 새고,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그 집이 낡긴 많이 낡았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지은 집인데….” 지해와 지후 형제는 작년 가을까지 3년 동안 이 근처의 큰이모네 집, 즉 준석이네 집에 얹혀 살았었다. 아니, 얹혀 살았다기 보다는 3층 단독주택의 방 둘에 욕실, 부엌까지 딸린 반지하 세대에서 신세를 졌었다. IMF때 연쇄 부도로 파산한 후 4년 전에 아버지가 자살한 이후, 어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어머니의 바로 윗언니인 큰이모가 애들을 돌보겠다는 이유로 일부러 자기 집을 수리까지 해 가며 한 지붕 아래에 불러들인 것이었다. 사실, 소규모로 건축 자재를 생산하던 아버지 사업은 그 몇 년 전부터 휘청휘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IMF가 터지고 건설업 경기가 위축되면서 한 달 동안 몇 차례나 연속적으로 크고 작은 부도를 맞았다. 이미 그 이전부터 빚에 허덕이고 있던 와중에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었다. 결국 석 달만에 회사의 문을 닫았다. 빚잔치를 하고나니 그야말로 전부 거덜나 쪽박찬 신세였다. 집과 세간 살이에 빨간 딱지가 다다닥 붙고 몸만 빠져나오다시피 한 뒤, 변두리 셋방을 전전하다 허름한 여인숙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넓은 정원이 딸린 그럴 듯한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코딱지만한 방 하나에 온 가족이 낑겨서 자야 했다. 며칠을 참고 지내다가 어머니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킨 그 다음날, 아버지가 사라졌다. 사흘 후 아버지는 회사가 있던 동네 야산에서 나무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됐다. 시체 옆에 빈 소주병 세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먼저 가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구슬픈 편지도 있었다. 지후는 중2였고, 지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넋이 나가 있는 상태라 시체 확인을 둘이서 손 꼭 붙잡고 덜덜 떨면서 했다. 생전 처음 겪는 가난과 남편의 자살이라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몇 차례의 호된 난리를 치른 후, 어머니는 지금 3년째 강릉에 있는 정신병원에 요양중이었다. 돌아가신 지해 아버지는 외아들인데다가 친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터라 친가쪽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쪽도 친척은 많지 않았다. 혼자되신 외할머니는 이민간 외삼촌과 함께 호주에 살고 계셔서 2~3년에 한 번씩만 서울에 오셨다. 남은 친척이라고는 이모네뿐이었다. 이모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입장이라 조카 둘을 직접 거두기는 사실상 쉽지 않았다. 한 집안에 같이 살면 꽤나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생활을 따로 하도록 하는 것으로 해결됐다. 애들 엄마가 언제 퇴원할 지도 모르는데 그러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좋아질만 하면 악화되어가는 어머니의 건강은 언제 호전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작년 가을, 이모네가 한참 유행하는 재건축 호화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어 집을 팔게 되었었다. 이모부가 세강그룹 계열사인 세강전자 부사장으로 있어서, 세강건설에서 새로 짓는 100평대 아파트에 그룹 임직원들에게 특혜 분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학교가 바뀌는 것이며 여러가지를 염려해, 지후와 지해가 살던 반지하 세대는 전세를 끼고 파는 형식으로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 집에 살 수 있었다. 이모네 식구들은 그러면서도 자기들만 이사가게 된 것을 미안해 하며, 수시로 밑반찬이며 가재도구며 생필품 등을 날라다 주고 있었지만, 친척들의 도움만 받는 생활에 두 형제는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둘을 친형제처럼 끔찍이 챙기던 준석의 마음 씀씀이는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이사간 후에도 여전히 주말을 거의 지후, 지해와 함께 보낼 정도였다. “우리 둘이서 자~~~ㄹ 살고 있으니까 형도 이제 우리 걱정 좀 그만해.” “하긴 너야 뭐 어디다 내놔도 살아남긴 하겠지만. 인줘. 지후 도시락은 내가 갖다줄게.” “그래주면 고맙고. 형, 토요일날 올 거야?” “맛있는 거 해줄 거냐?” “먹고 싶은 거 있음 전화해. 술이나 많이 사와.” “그래― 어, 너 오늘 그 중딩이 과외하는 날이잖아! 빨랑 가.” “지후 형보다 형이 내 스케줄을 더 잘 꾀고 있구만. 갈게.” “야, 너 그 머리 좀 어떻게 안 할 거냐? 언제까지 기를 거야?” 뒤로 돌아서려는 지해의 머리 끄댕이를 잡아당기며 준석이 웃음섞인 소리로 말했다. 깜짝 놀란 지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훤칠하게 잘생긴 두 녀석이 대화하고 있는 것을 눈요기 삼아 흘끔거리던 3학년 여학생들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으악, 또 잔소리! 이거 지난 주에 다듬은 거야. 어깨 위로 쑥 올라갔잖아.” “뒤에서 보면 기집애같애, 임마. 담탱이가 뭐라 안 그러냐?” “울 학교, 머리는 터치 안 한다며?” “그래도 가끔 가다 꼴리면 한단다. 주의해라.” “아, 시끄러. 담배나 있음 좀 줘.” “반 갑밖에 없는데. 돈 없음 끊어라.” “두 개피만 줘.” “불은 있고?” “어… 형, 나 늦었어. 가야 돼.” 지후는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같은 학년이라도 지후보다 한 살 위인 준석은 사실상 친형제나 마찬가지인 둘의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보온병 안의 국물 새지 않게 살살 들고 가라고 준석에게 신신당부를 한 뒤, 지해는 교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이어폰을 끼고, 책배낭 속 MP3 플레이어를 켰다. 벌써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퇴근길이라 많이 막히기는 했지만, 논현동까지 3, 40분 정도 걸릴 것이다. 역시 이모가 주선해준 과외 자리로, 이모부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어느 변호사님의 갓 중학교에 입학한 딸내미였다. 이제 고1인 자신한테는 과분한 아르바이트. 이것 역시 이모가 억지로 꿰어 맞춰 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발걸음이 무겁다. 오늘은 특히 더 했다. 터벅터벅 교정을 가로질러 가는 지해의 모습이 마침 검도부 연습을 마치고 체육관을 나오던 정욱의 눈에 들어왔다. 입학 첫날부터 눈에 띈 이후 끊임없이 시선이 머물던 결고운 머리칼. 유난히 작고 갸름한 얼굴. 큰 키에 잘 짜인 골격. 호리호리하면서도 탄탄하고 미끈한 실루엣. 낡고 통이 좁은 청바지 속에 길게 죽 뻗은 다리.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긴 속눈썹과 선명하고 육감적인 입술. 등은 쭉 폈지만 고개는 약간 숙인 채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고 있었다. 입모양을 보니 지금 듣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욱은 갑자기 가까이 다가가서 얼마만한 소리로 부르고 있는지, 소리는 안 내고 속으로만 따라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하는 생각에 조금 불쾌해졌다. 정욱은 다시 처음과 같은 페이스로 걷는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아직 시선은 여전히 그쪽에 못박혀 있었다. 지해가 교문 근처에 환히 켜져 있는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였다. 노르스름한 불빛에 그 갈색 머리가 금빛으로 반짝 빛나며, 초저녁 어둠에 가려져 있던 깔끔한 턱선과 날렵한 콧날에 맑은 윤기가 던져지는 순간, 정욱은 갑자기 심장이 발등으로 뚝 떨어지는 듯한 묘한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기분은 솔직히 난생 처음이었다. 화이트 데인가 뭐랍시고 하루종일 학교에 사탕이 둥둥 떠다니고, 달달한 내음과 들뜬 공기가 복도와 교실을 맴돌던 그런 날이었다. BGM : Fake Plastic Tree - Radiohead←CLICK!! 교문을 막 나서면서 낯익은 보라색 BMW Z3를 발견한 지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못본 체하고 지하철 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Z3가 천천히 지해를 따라 붙으며 운전석 유리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그리고 귀에 익은 앙칼진 목소리. “빨리 타, 김지해!” “지하철 타고 가면 돼.” “잔말 말고 빨리 타!!” “일하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데려다 준다잖아.” “행여나 네가 이렇게 집에 일찍 들어갈까? 난 너 못 믿어.” 차가 정지했다. 운전석에 앉은 곱상한 얼굴의 남자가 차문을 연 뒤 왼쪽 다리를 길바닥에 뻗으며 팔로 지해의 옷자락을 있는 힘껏 잡았다. 지해도 걸음을 멈추고 비로소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뺐다. “좋은 말할 때 들어. 오늘 데리러 온다고 어제 전화했잖아.” “내가 분명히 안된다고 했었지? 그리고 나 무면허 차는 안 타.” “일단 타. 타고 나서 얘기하자.” “이주원, 내가 너한테 한두 번 속았냐? 싫어.” 주원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마로 핸들 중앙의 클랙션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소란스런 경적음이 울려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주목됐다. “씹새, 너 지금 학교 앞에서 뭐하는 거야?!!! 미쳤어?!!!” “빨랑 타. 한번 더 하기 전에.” 빨개진 이마를 슥슥 문지르며 생글생글 웃는 주원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지해는 제길, 하고 투덜거리며 옆좌석에 올라탔다. “지금 길 많이 막혀. 안 그래도 늦었는데 너 땜에 한참 늦겠다.” “어서 전화해. 이왕 하는 거 늦는다고 하지 말고 오늘 못 간다고 그래.” “…야~!!!!” “그리고 선배한테 자꾸 ‘야’가 뭐냐? 너라고 하는 것까진 봐주지만 그 이상은 안 돼.” “너 자꾸 이러면 스토커라고 고발할 거야.” “그거 다음 달까지만 참아주면 안될까? 이달 말에 만으로 18살 되니까 바로 면허 딸 거거든. 죄목 하나라도 줄이자, 응?” 주원은 끼여들기에 한 차례 실패하고서도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지해는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시끄러, 새꺄. 운전이나 잘 해. 딴 데로 샐 생각하지 말고 집으로 가.” “주란이한테는 내가 전화해줄게. 오늘같은 날 과외 잡은 네가 멍청한 거야.” “오빠가 되어가지구 여동생 직접 공부 가르치지는 못할 망정 방해를 하냐? 안 돼!” “벌써 예약 다 해놨단 말이야. 지해야, 가자~~~, 응?” “느이 집으로 빨리 가. 공부 두 시간 안에 끝낼 테니까 어딜 가더라도 그때 가.” “그러구 나서 또 그냥 튈 거면서. 나야말로 너한테 한두 번 속냐?” 지해는 대꾸하기도 귀찮아 시트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주원이 저렇게 쫑알거리면서도 결국은 집으로 갈 걸 알고 있다. 안 간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노동시간 대비 소득으로 보나, 소개해 준 이모를 봐서나 놓치기 아까운 알바지만, 가르치는 학생의 오빠라는 작자가 허구헌날 이렇게 스토킹을 해대면 정말 하는 수 없다. 주원은 중학교 1년 선배로 중학교 때는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였다. 작년 겨울방학 시작과 함께 예비 중학생 주란을 가르치러 처음 그 집을 갔을 때, 주원이 그 오빠라는 걸 알고는 선배 대접을 제대로 했었다. 어쩐지 그 날 인사할 때 자기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때 잘 막았어야 했다. 그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간 채 흘러간 지난 넉 달 동안의 일들은 그리 유쾌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경험이었다. 오늘 가서는 그만둔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해는 다시 신문 배달이라도 해야 할까, 전에 일하던 데를 다시 찾아가봐야 할까, 착잡한 심정으로 차창 밖에 스치는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주란이 기집애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애.” “――!” “남매끼리 한 남자 놓고 싸울 순 없쥐. 내가 포기 못하니까 고뇬이 포기해야쥐.” “개소리 하지 마!” “주란이 년이 너 발렌타인 데이 때 초코렛 줬지?” “…인사로 주는 거잖냐, 바보.” “지 오빠도 안 준 게 무슨 과외 선생한테 얼어죽을 인사?!” “………….” “너는 사탕 준비했어?” “………….” “거기 니 자리 앞에 그거 열어봐… 그래. 거기… 하나는 주란이 꺼고 하나는 니꺼야.” 조수석 앞에 글로브 박스를 열어보니 예쁜 포장지로 싼 선물이 두 개 들어 있었다. 주원이 파란 포장지가 니꺼고, 빨간 게 주란이 꺼야, 니가 주는 것처럼 하고 줘, 하고 말한다. “사람을 왜 눈가리고 아웅을 시켜. 니가 직접 줘.” “나는 벌써 줬다, 임마. 너 위해서 그러냐?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 상처받을까봐 그런다. 제발 니가 주는 것처럼 하고 줘라, 응? 부탁이다.” “……알았어…. 대신 내 꺼는 안 받아. 불편해.” “휴우, 이 꽉막힌 자식…그럼 과외 그만둔다는 소리나 하지 마.” “――!” “내가 쪽집게지?” 지해는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대답도 못하고 허허 웃었다. 이 사람의 이런 점 때문에 맨날 말로만 귀찮다, 귀찮다 하면서도 완전히 내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문득문득 엄마가 떠오른다. 자상하고 세심하게 남 챙기기 좋아하던 정 많은 엄마….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아냐? 내 서방인데….” 으윽,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도망가고 싶어지는 거다! 어느새 주원의 집 근처에 와 있었다. 언제나처럼 주원이 또 집에서 떨어진 골목에 차를 세운다. “자, 내리기 전에 이마에 호~ 해줘.” “………….” “빨랑~! 너땜에 자해해서 아파 죽겠어.” 지해는 말없이 주원을 째려보다가 그의 가녀린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이마에 살짝 뽀뽀를 해 주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걸 안다. 역시나 주원이 그대로 그를 꽉 부둥켜 안고 입술을 부딪쳐 온다. 베이비 키스로 시작했던 키스가 서서히 깊어진다. 이제는 누가 먼저 키스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이미 몇 번 같이 잤던 사이다. 물론 주원도 처음이 아니었고 남자와 하는 것이 처음인 자신을 꽤나 능란하게 리드했었다. 치사하게 붙잡고 늘어지지 않겠다고 제쪽에서 미리 선언하고 성립된 관계.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야멸차게 떼어버릴 수 없을 것 같다. 자신의 그런 성격을 알고 이 인간도 이렇게 맘놓고 적극적으로 덤비는 걸 거다. 하지만 도망가야 한다. 벗어나고 싶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스스로 진심이 아닌 관계는 싫다. 어영부영하다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는 것도 싫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2. You Do Something To Me You do something to me somewhere deep inside 너는 내 속 깊은 곳에 뭔가 일어나게 해. I'm hoping to get close to a peace I cannot find 나는 내가 찾지 못할 평화에 가까이 가고 싶어서 Dancing through the fire just to catch a flame 불꽃 하나를 잡으려고 불속을 춤추며 지나고 있어 Just to get close to, just close enough to tell you that… 너한테 이 말을 꼭 할 수 있을만큼 가깝게 가기 위해서 You do something to me something deep inside. 네가 내 속에 뭔가 일으킨다고 말이야. (You Do Something To Me - Paul Weller) ←CLICK! 5교시 시작했을 때부터 지해가 보이지 않더니 수업 시간 내내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지 이 대머리 국사 선생은 빈 자리가 버젓이 보이는데도 묻지 않았다. 6교시 수학이 빈 자리에 대해 묻고나서야 정욱은 지해가 집에 일이 있어 조퇴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차피 그다지 관심없는 학교 수업 시간 틈틈이 며칠째 길들여진 버릇대로 창가 자리를 흘끔거리면서 유독 비어있는 그 자리 하나가 이가 하나 빠진 것처럼 눈에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그의 갈색머리가 어른거리고 운동장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던 긴 다리가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의문의 보라색 BMW Z3도 떠올랐다. 아마 그때 자동차 번호를 무의식중에 외웠었던 것 같다. 적어놓을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바이크를 신나게 몰아 집에 도착하고나니 번호를 신경써서 외웠다는 것, 그리고 오는 도중에 잊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었다. 아무리 이 지긋지긋한 반 아이들 중에 그나마 제일 시선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 ‘김지해’ 하면 ‘연갈색 머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학교 앞 길거리에서 난리 치는 걸 목격하고 나니, 비로소 그 녀석도 나름대로 자기 히스토리가 있는 하나의 ‘생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뭔지 몰라도 캐보고 싶다, 궁금하다, 그런 호기심 같은 것이 근질근질 기어 올라왔다. 자신이 같은 반 동급생 따위에게 흥미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이채로웠지만, 어쨌든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다. 정욱은 따분한 수업 시간을 버티고, 쉬는 시간에 어느새 자신의 아지트가 된 비상 계단으로 나와, 담배 한 대를 피고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욱입니다. 신원조사 하나만 부탁하죠. 세강고등학교 1학년 2반 김지해.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히요. 급한 건 아니지만 빨리 해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나중에 본인이랑 맞춰볼 테니까 틀리는 점 없도록 주의해요.” 본인과 직접 맞춰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너무 빨리 찾아와서 데이타가 미처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방과후 일주일에 세 번 있는 검도부 연습을 마치고 체육관을 지나, 그 옆의 예체능관 구석 후미진 곳에서 담배를 한 대 피고 있는데, 불켜진 음악실의 피아노 앞에 낯익은 사람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예체능관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발성 연습 같은 걸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연극반 학생들이 아직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악실로 다가가니 피아노 소리가 새어나왔다. 뭔가 불균형한 박자에 멜로디가 금세 잡히지 않는 선율. 어느 정도 듣고나니 재즈 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흥겹지만도 않고, 슬프지만도 않은. 마치 슬픔을 비웃는 듯한 경쾌한 리듬에 애절한 멜로디. 흰색으로 선팅이 되어있는 복도쪽 유리창 중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다. 정욱은 잠시 복도에 서서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언제부터 거기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해는 그 곡에 완전히 빠져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발로 계속 박자를 맞추며 의자 위에서 정신없이 엉덩이를 달싹거리고, 허리를 휘저으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리드미컬하게 두 다리를 움직이면서 의자 위에 엉덩이를 뗐다 붙였다 하는 그 모습이 꽤나 선정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본인은 알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정욱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콰과광 하는 마무리로 그 곡을 마친 뒤, 지해는 곧 다른 곡을 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저 잔잔한 전주로 시작하더니,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가사를 잘 들어보니 영어로, 팝송인 것 같은데 처음 듣는 곡이었다. 약간 허스키한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아마추어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실력이라는 생각을 하며 귀기울이다보니, 어딘가 가슴 한 구석을 뜨끔하게 하는 호소력 짙은 노랫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노래와 피아노 소리가 동시에 뚝 멈추었다. 정욱은 갑자기 찾아든 정적에 창문 틈을 들여다보았다. 지해가 누군가 거기 서 있는 걸 발견했는지 이쪽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졸지에 남을 훔쳐본 꼴이 되어, 정욱은 자신답지않게 당혹감을 느끼고 엉겁결에 뒤돌아섰다. “저…, 거기…… 누구…세요?” 얼굴을 들킨 것 같은데 도망가기도 우습고 해서, 할 수 없이 뒷문을 드르륵 열었다. “아…, 난 또 당직 선생님인줄 알고…. 휴우, 살았다……. 전에 한번 혼난 적이 있어서….” 지해가 안심했는지 한숨을 쉬고 씨익 미소 지으며 잽싸게 피아노 바로 옆의 창문을 닫는다. 무슨 소린가 싶어 보니,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희미한 담배 냄새가 알싸하게 공기중을 맴돌고 있었다. 정욱은 뭐라고 말을 해야 될까 하다가 그냥 입을 꾹 닫고 입꼬리만 살짝 치켜 올려주었다. “어어∼! 낯이 좀 익다 했더니만. 저기, 혹시 우리 반…… 아니야? 1학년 2반?” “맞아.” 정욱은 어느새 평소의 냉정을 되찾고, 서서히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거침없이 피아노를 치고, 큰 소리로 노래까지 부르던 걸 들킨 뒤라 못내 쑥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눈을 가늘게 뜨고, 교복 위 명찰 있는 곳을 뚫어져라 보는 걸 보아하니, 이 자식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보군, 하는 생각이 정욱의 머리를 스쳤다. 하긴 수업시간 외에는 이어폰만 꽂고 앉아서 창밖만 쳐다보고 애들과 대화하는 일도 거의 없다시피 한 녀석이니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저… 강….” “강정욱. 넌 김지해 맞지?” “아… 강정욱… 맞다. 그래….” “교복은?” 지해는 어제 정욱이 보았던 그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색 방수 점퍼와 CD 플레이어가 든 얇은 배낭이 교탁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다. 배낭 사이로 이어폰줄이 삐죽 빠져나와 있다. 정욱이 피아노 근처 책상 위에 털썩 앉았다. 지해는 일어서서 피아노에 양팔을 팔짱껴 걸치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뒷문으로 드나들 때마다 가끔 얼굴이나 얼핏 볼까말까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엄청 남자답게 잘 생긴 녀석이구만, 하면서 지해는 정욱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 아아! 집에 갔다 왔거든. 형이 3학년이라 도시락 싸다 주느라고.” “너 오늘 조퇴하지 않았었냐?” “어…, 집에 일이 좀 있어서…. 하하. 조퇴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지. 우리 형이 좀 짜증나는 스타일이란다. 학교식당 밥은 죽어도 못 먹겠대. 맛도 없는 것 돈 아깝게 억지로 먹이느니, 뜨신 밥 해다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고3인데 어떡하냐. 1년만 참아야지.” “니가 직접 밥을 해?” “나… 형이랑 둘이만 살아. 부엌일은 내가 하고, 형은 청소… 하하… 근데 지금 고3이니까 웬만한 건 내가 다 하게 생겼어. 에휴, 이놈의 1년 언제 지나가냐. 인제 시작인데.” 교실에선 말 한 마디 없더니, 시키면 주저리주저리 말도 많은 녀석이다. 그래도 연신 싱글거리는 밝은 얼굴이 정욱은 그다지 싫진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오히려 안심이 된달까?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별 경계심 없이 편안하게 대하는 걸로 보아 이 녀석은 정말 강정욱이라는 놈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다. “너 노래 잘하더라. 피아노도 그냥 아마추어 실력은 아니던데. 음대 지망이야?” “에엑~! 아니야. 음대는 무슨!! 그냥 취미야. 오늘은 형 도시락 갖다주고 지나가다 보니까 음악실에서 실내악반 연습 끝내고 막 가길래 들어와봤지. 으윽, 누가 들을줄 알았으면 노래는 안 부르는 건데….” “아니야. 나쁘지 않았어. 무슨 노래야?” “Coldplay의 Trouble이라고… 내가 좀 좋아하는 곡이야… 하하하… 어째 좀 부끄럽다. 메신저로 Mp3 보내줄까?” “아니, 그건… 뭐 나중에……그 노래 다시 한번 불러볼래? 얼굴이 벌개져서 잠깐 주저하던 지해는 곧 긴 손가락을 건반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음악에 몰입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는 복도 밖에서 훔쳐 듣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낮은 톤에 중량감 있고 울림이 좋은, 남자다운 미성으로, 담백하고 편안하면서도 어딘가 가슴 한 구석을 찌르르 쑤시는 애절함이 배어 있어, 그의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왠지 마음 한켠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슬픈 감정을 오버해서 부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싶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딴 곡을 부르면 좀 다를까 싶어, 정욱이 재촉하여 지해가 몇 곡이나 다른 노래를 부를 때도, 템포가 빠르고 비트가 강한 노래를 부르는데도 그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정욱이 지해에게 아까 쳤던 재즈곡을 다시 쳐 보라고 하자, 지해는 쑥스러운 듯 헤실거리며 다시 건반을 눌렀다. 흥이 나면 두 다리로 박자 맞추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허리를 비틀며 피아노 치는 것은 버릇인가 보다. 온몸으로 피아노를 대하는 그의 모습에 정욱은 까닭없이 숨이 막혔다. “너 꼭 피아노랑 섹스하는 것 같다.” 연주를 마치고 얼굴이 상기되어 숨을 고르는 지해를 보고 정욱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말소리는 무덤덤하면서도 속을 꿰뚫어보듯 강렬한 시선에 지해는 속이 뜨끔했다. “하하하.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아, 나 중학교 때 선생님이 피아노 치는 거 좀 봐줬었거든. 그 선생님 때문에 처음 재즈를 알게 됐는데……. 날더러 피아노 치면서 너무 많이 움직인다고, 버릇 고치랬는데 잘 안돼. 정규대로 배운 게 아니라 나 혼자 멋대로 배워서 그런가….” “고칠 필요 없을 것 같아. 그거 보는 것만도 재밌어.” 별 생각없이 튀어나온 말에 지해가 얼굴이 더 빨개져서 시선을 돌리자, 정욱은 그제서야 자기도 발끝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쑥 올라오는 것 같아 고개를 조금 돌렸다. 지해는 머쓱한 분위기를 덮으려 얼른 다른 곡을 치기 시작했다. 정욱의 그 말이 신경쓰여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연주에 빠지다 보니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틈에 지해는 자신을 핥듯이 주시하는 정욱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정욱도 이제는 나른하게 음악에 취해 자기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는 지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공기 중에 얽히면서 음악실 안에는 뭔가 답답하면서도 끈끈한 분위기가 가득차 올랐다. 숨이 막히는 듯 한없이 끓어오르는 이상한 설레임. 이 공간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달착지근한 재즈의 느슨하게 비틀린 리듬만큼이나. 엇박자에, 즉흥적인, 불협화음 속의 미묘한 조화. 자기가 누군지,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도 하얗게 잊고 서로의 시선에 붙잡힌 둘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드르륵 뒷문 열리는 소리로 끊어졌다. 9시가 다 됐다고 얼른 하교하라는 당직 선생님의 호통 소리에 둘은 긴장이 풀린 시원함에 낄낄거리면서 음악실을 나섰다. ........................................................ ^ ^;;;;; 지해가 치고있던 재즈곡이구요. No Problem - Duke Jordan 부르고 있던 노랩니다. -_-;;;;;; Trouble - Coldplay .............. BGM : Somewhere over the Rainbow & What a wonderful world - Israel Kamakawiwo'ole←CLICK! ! 달빛이 한가득 쏟아지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정욱은 이상할 정도로 유쾌하고 가뿐한 느낌에 가슴이 뿌듯이 차올랐다. 이런 기분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았다. 아니, 처음인가? 이런 기분을 언제 느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언제였더라? 언젠가도 이렇게 무지 기분 좋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느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아, 참. 너 저녁 먹었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자기 옆얼굴을 보며 묻는 지해의 목소리에 정욱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까 검도 연습 들어가기 전에 뭐 좀 먹긴 했지만… “글쎄… 그러고 보니 출출하긴 하다… 넌 어때?” “난 아까 형 도시락 싸면서 밥을 먹긴 했는데… 뭐 먹으러 갈까? 아니, 술 마실래?” “그래.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힘을 뺐으니, 내가 살게.” “들어줘서 내가 고맙지. 그깟 걸 누가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냐? 나 어제 알바 비 받았거든. 내가 살게.” “알바?” “중딩 1학년 하나를 가르쳤었는데… 어제 그만뒀어.” 어제? 아, 그 보라색 Z3!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물어볼까? 뭐 뒷조사를 시켜놨으니 다 나오긴 할 테고…….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그나저나 내가 왜 이 자식 신상조사 따위를 시켰지? 애들 입으로 떠다니는 뒷담화 주워듣는 것보단 정확한 사실을 확실히 알고 싶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괜히 잘못 얽히면 나중에 피곤하지 않을까, 이쯤에서 관심 끊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정욱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으응… 시간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다른 알바 할 거냐?” “구하긴 구해야지. 아~ 몰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 거다.” “너 보기보다 낙천적이다.” “지금까지도 잘 버텨왔는데, 설마 죽기야 하겠냐.” 정욱이 자기 생각에 빠져, 지해의 말을 건성건성 응수하며 걷는 동안 둘은 어느 틈에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골목안에 있는 실내 포장마차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 좀 후져보이긴 해도…. 후져보이는 게 아니라 사실 엄청 후졌단다. 헤헤헤… 이 동네에 교복 차림으로 들어가도 안 걸리는 데가 몇 군데 없어놔서…… 하긴 네 덩치에 교복 입었다고 시비 걸 사람도 없겠다. 야, 너 키가 몇이냐? 190 넘지?” 쑥스러운 듯 쉴새없이 지껄여대는 지해를 보며, 정욱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런 데는 생전 처음 와보지만, 한번쯤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릴 때부터 어울리던 ‘어느 집안의 자제’라는 소위 친구 놈들이 죄다 흥청망청 유학길에 오른 지금, 누가 자기한테 뭔가 사준다고 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따져보면 사실상 처음인가? 정말 허술한 주점이었다. 겉에서 보는 것보다는 안이 의외로 깨끗한 편이었지만, 테이블은 열 개도 채 되지 않았고, 써빙도 주인 혼자서 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둘은 묘하게 막혀 있어 다른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정욱의 교복 때문에 신경이 쓰여 일부러 구석탱이로 들어온 것 같았다. 정욱은 자기가 지금 교복 차림이고 해서 지금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인 호텔 나이트의 룸에 이 놈을 집어넣어 놓고 자신은 방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가 딴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말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아, 벼룩의 간을 내어먹어라. 이렇게 없이 사는 녀석한테 얻어 먹다니……. 그러고 보면 진심으로 지가 한턱 쓰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오늘은 끝까지 이 녀석 페이스에 맞춰줘 볼까? “지해, 오랜만이야?” “형. 안녕하세요. 서비스 많이 주실 거죠?” 주인인 듯 보이는 뚱뚱한 20대 청년이 지해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지해는 그 긴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피아노 치듯이 두드리면서 씨익 웃었다. 지금 자세히 보니 웃을 때 고른 이가 드러나고, 눈웃음 치듯 눈꼬리가 휘어지는 것이 여간 매력적이지 않았다. 넋을 잃고 지해를 바라보는 청년의 표정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욱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형들이랑 안 오고, 친구랑 왔네.” 친구? 내가 누구랑 친구? 정욱은 그 친구라는 말에 드는 거부감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어울리다 보면 이 녀석과 친구가 되야 하는 건가? 내가 왜? 어쩌다 이렇게 됐지? “형들은 3학년이니까 자주 오면 안 되죠. 이 녀석은 우리 반이에요.” “지해가 친구 데려온 건 처음인데, 정말 잘생긴 친구를 데려왔어. 아까 둘이 들어서는 순간, 이 좁아터진 가게에 번개가 번쩍하는 것 같더라. 앞으로 자주 올 거야?” “하하하… 오늘 형 하는 거 봐서요.” 정욱의 굳어진 얼굴을 눈치챘는지 지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걱정스러워하는 그 눈빛이 걸려 정욱은 곧 얼굴을 폈다. 자기가 인상을 피자 곧 얼굴에 화색이 도는 지해를 보고 정욱은 다시 가슴이 찌르르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와, 사실 나 고등학교 들어와서 이렇게 말 많이 해본 거 처음이다.” 두 병째 소주를 마지막으로 자기 잔에 다 따르고 나서 지해는 더 시킬까, 하고 물었다. 정욱이 고개를 끄덕이자 씨익 웃은 뒤 주인에게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벌써 11시였다. 여기는 고삐리 손님뿐 아니라 영업시간에도 구애를 안 받는지 손님들은 꾸준히 들어섰다. 정욱은 둘이 그다지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흐른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도 그래.” “그럼 나 혼자 떠드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또 뭐냐?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니까 굉장히 이상하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그 정도냐?” “야, 나 말 많이 시키지 마라.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다가 괜히 니 앞에서 실수할라.” “왜? 실수할까봐 걱정돼?” “실수라기 보다… 너 많이 어른스러워 보여. 왠지 웬만한 거는 다 애들 장난으로밖에 생각 안 할 것 같은 분위기야.” “너도 마찬가지잖아. 공부시간 외에는 맨날 이어폰만 꽂고 앉아서 한 마디도 안 하던데. 애들이랑 섞이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야?” 정욱은 아차 싶었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도 술이랍시고 좀 마셨다고 이렇게 속보이는 소리를 자꾸 하다니… 나는 너한테 관심이 무지 많았어, 하고 실토하는 격이잖아… 정욱은 괜히 찔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지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느라 정욱이 한 말의 의미는 짐작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 가만히 보면 이 녀석은 어쨌든 묻는 말은 꼭 대답하는 성격인 것 같으니까… “뭐……, 특별히 할 얘기도 없고… 하고 싶지 않은 얘기도 누가 물어오면 대답 안 할 수도 없고… 그리고 또…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 아닌데 귀뚫렸다고 듣고 있는 것도 남의 프라이버시 침해하는 것 같고….” “하~! 넌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너밖에 없을걸? 그렇다고 이어폰 끼고 있으면 안 들리나? 소곤거리지 않는 한 들릴 텐데?” “아니야. 음악 정말 크게 틀어놓고 있으면 안 들려.” “하긴 나도 애들 하는 얘기의 8,90%가 남의 뒷얘기, 집안 얘기 같은 거라 피곤하긴 하더라.” 정욱은 갑자기 답답해져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빨았다. 자기가 왜 이 바보같은 녀석때문에 이렇게 속이 껄끄러워야 하는지… 니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니 뒷조사 같은 거 시킨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뭐가 되는 거냐, 엉? “흠… 넌 중학교 어디 나왔냐?” 한참 동안 침묵이 계속되다가 지해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정욱이 가만 생각해 보니 오늘 지해가 자신에 대해서 물어본 최초의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보중학교.” “그거 한남동에 있는 거 아니야?” “집이 거기야.” “우와, 멀리 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아버지가 이 학교 이사장이라서 여기 왔다는 말은 차마 내 입으로 못 하지. 그래, 더 이상 깊이는 묻지 마라. 하긴 그걸 항상 신경쓰고 있는 내가 더 웃긴 건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그냥 나나 저나 똑같은 고등학생들인데, 뉘집 자식이라는 걸 신경쓰는 게 비정상인 건가? “나 1월달에 그 근처에 있는 바에서 아르바이트한 적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태원.” “무슨 아르바이트?” “일주일에 두 번 피아노 치는 거. 그나마 대타로 한 달 반 동안 잠깐 한 거지만. 거기서 피아노 치는 사람이 갑자기 바빠져서 일주일에 두 번만 초저녁에 내가 메꿔줬어. 그 바람에 머리도 기르고… 헤헤….” “안 걸렸어?” “180이면 작은 키는 아니잖냐… 방학 때 머리가 많이 자랐던 중이라 정말 잘 써먹었지.” “바 이름이 뭔데?” “Over The Rainbow.” 지해가 피아노랑 레슬링(?)하는 광경을 뭇 사람들이 본다고 상상하니 왠지 속이 불편해 담배 연기를 뱉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던 정욱은 지해의 대답에 깜짝 놀라 담뱃재를 터는 것도 잊고 테이블에 떨구었다. “거기 게이 바 아냐?!!”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래서 진짜 놀랐어. 근데 넌 어떻게 알아?” “거기 유명한 데야, 씨뎅아!!!” 정욱의 소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중에 거기 단골이 있었다. 지금은 물좋고 자유로운 뉴욕으로 ‘헌팅’을 갔지만…. ‘유학’이라고 하지 않고 ‘헌팅’이라고 말하던 미친 자식, 조민혁… 그나저나 이 예쁘장한 녀석이 거기서 날 잡아잡슈 하고 ‘피아노 쇼’를 했단 말인가? 조민혁 같은 자식이 이 녀석을 봤으면 완전히 한입감인데. “씹, 목소리 좀 낮춰. 사람들이 쳐다보잖냐.” “너, 거기서 아무 일 없었어?!!!” 서슬이 시퍼래진 정욱이 느닷없이 어깨를 꽉 붙잡고 묻자, 지해는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정욱의 얼굴만 쳐다봤다. 정욱도 자기가 지해의 어깨를 잡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금세 손을 뗐다. “별일 없었어. 사실은 치근거리는 사람들이 좀 있긴 했는데, 사장님이 잘 막아줘서… 생각보다 무서운 데는 아니더라.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도 다 인간이고 좋은 사람들도 많아. 그리고 난 초저녁에만 두어 시간 뛰었던 거라, 오래 다니지도 않았어. 실제로 갔던 날 다 합하면 보름도 안 돼.” 오히려 그곳에서 편견이 사라진 건 사실이었다. 거기서 인간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주원의 대쉬에도 별 거부감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자기 좋다고 덤비는 사람들을 거절 못 하는 성격이 문제였긴 하지만… “위험해. 너 다신 거기 발도 들여놓지 마.” “걱정 마라. 나도 우리 큰형, 아니 사촌형이 나중에 알고 노발대발해서 관뒀으니까… 아, 우리 애물단지 집에 왔을텐데. 전화 좀 해야겠다. 잠깐만.” 지해가 가방에서 폰을 꺼내자, 정욱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폰의 전원을 켜기가 무섭게, 삑삑삑 하며 메시지가 들어와 있다는 신호가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지해는 얼굴을 찌푸리고,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해가 지후와 통화하는 동안 정욱은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지해는 전화에 대고 거의 지랄발광(?)을 하고 있었다. “…어, 그래. 형. 곧 갈 거야. 먼저 자. 준석이 형도 내가 잘 자란다고 전해. 아, 씹! 잔소리 좀 그만해!…… 응……… 네,네,네…… 끊어!!!!…… 으휴, 잔소리 대마왕…… 우와, 너 디게 금방 왔다. 혹시 화장실 더러워서 일 안 보고 그냥 온 건 아니지?” “임마, 사람을 뭘로 보고. 나 저거보다 더 끔찍한 데도 많이 봤어.” “진짜?”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며 장난을 거는 지해를 바라보며, 정욱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실실거리는 자신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저 정돈 약과야. 런던이나 뉴욕 같은 데도―.” 지해가 아차, 하며 자기 폰의 전원을 끄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지해는 발신자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폰의 배터리를 빼버렸다. “누군데… 그러냐?” 정욱은 말을 던지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한테라면 이런 거 절대 묻지 않을 텐데 또 이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는 이 녀석에게 관심이 많긴 많은 거다. 왜? 뭣때문에? “스토커. 진작에 따끔하게 정신 챙겨줬어야 되는데, 내가 칠칠치 못해서 이러고 있다. 그나저나… 엑~! 1시가 넘었어. 야, 이제 그만 나가자.” 밖으로 나오니 장대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가게 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주인 형한테 우산 빌려올게. 꼼짝말고 여기 있어.” “이 빗속에 어딜 간단 말이냐.” 지해는 고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는 자기 집에서 녀석을 재우면 딱인데, 반지하 셋방으로 오늘 처음 사귄 친구를 끌고 들어가기가 좀 그렇다. 자신조차도 어쩌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칠 정돈데, 이 녀석 키로는 등도 못 필 것 같고… 그래도 예의상 물어는 보자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 녀석도 그럭저럭 사는 녀석인 것 같은데(하긴 이 학교에서 자기보다 더 못 사는 애가 있을까마는) 남의 집에서 자는 건 썩 내켜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정욱은 이 비에 한남동 꼭대기까지 학교 근처 주차장에 있는 바이크를 끌고 들어갈 수도 없고, 한밤중에 기사를 나오라고 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그냥 가끔 하던 대로 세강호텔의 자기 방에서 하룻밤 자고 학교를 가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까지 청승맞게 주룩주룩 오는 날 그 방에서 혼자 자는 게 내키지 않는다. 그 방은 놀기 위한 방이지 잠을 자기 위한 방이 아니다. 더구나 여기서 그다지 가깝지도 않다. 지금 날씨로는 거기까지 가는 것도 귀찮아서 어쩔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뭔가를 발견했다. “우산이 하나밖에 없다네. 너….” 골프우산 같은 커다란 우산을 하나 들고 문 밖으로 나오는 지해의 손목을 정욱이 덥썩 잡고 싱긋 웃는 얼굴로 길 건너편 저쪽을 가리켰다. “김지해, 우리 술도 깰겸 사우나나 가지 않을래?” BGM : Night Lights - Gerry Mulligan←CLICK! 아무리 같은 반이라지만, 오늘 처음 얘기해 본 애 앞에서 2시간 생쑈에 술을 같이 먹고, 사우나까지 따라오다니… 그다지 과하게 마신 건 아니었는데도, 지해는 그나마 마신 술까지 확 깨는 것 같았다. 술김에 주절거린 말들도 어쩐지 마음에 걸리고. 이제는 그 앞에서 누드까지 보여줘야 되는 것도 꺼림칙하고. 혼자 가기 싫다는 애를 두고, 넌 사우나에서 자고 등교해라, 난 집에 갈 테니… 이런 말은 죽어도 못 하겠고…… 여기는 전에 가봤던 준석이 형이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의 사우나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좋아 보였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사다리꼴로 특이하게 설계되어 있는 건물 전체가 전부 이 24시간 사우나와 수영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맨 위층에는 사무실, 5층에는 수면시설, 4층은 헬스시설, 2,3층은 사우나, 지하 1층은 수영장, 지하 4층까지는 주차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욱더러 먼저 들어가라고 해놓고 라커룸에서 옷을 한꺼풀씩 벗으면서 지해는 큰거 덜렁덜렁 내놓고 자랑스럽게 왔다갔다 하는 인간군상들을 힐끔거리며 주춤주춤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시간에 사우나에 오는 사람들은 주말에 때 벗기러 대중목욕탕에 오는 종류의 인간과는 좀 틀린 것 같았다. 밤샘 작업하다 쉬러 온 직장인도 간혹 보이는 것 같긴 했지만, 대부분 무리지어 술 먹다가 온 어른들 같았다. 그중 드문드문 몸에 수놓은 깍두기 아저씨들도 섞여 있어, 그 유치한 문양들을 보며 지해는 올라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샤워실에 들어가보니, 정욱은 자기가 라커룸에서 시간을 질질 끄는 동안 사우나 안에 이미 들어간 것 같았다. 비누질을 벅벅해서 몸을 씻고 머리를 감은 뒤 아무래도 계면쩍어 문 앞에 비치된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두르고 사우나로 들어갔다. 여러가지 희한한 이름이 붙어 있는 여러개의 사우나 룸을 기웃기웃하는 중에, ‘Jade Room’이라는 세련된 푯말이 붙은 곳에 정욱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룸보다 이곳이 사람이 가장 적어, 벽면을 빙 두른 나무 의자에는 정욱 말고는 수건을 머리 위에 얹고 있는 배 나온 아저씨 하나뿐이었다. 사방에 거칠게 잘라진 자연석과 옥돌로 도배를 해 놓은 걸로 봐서, 흔히 말하는 옥사우나인가 뭔가인 것 같았다. 머리 윗쪽으로 숨통을 틔어주고 있는지 생각보다 푹푹찌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한참을 버텨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정욱이 지해를 발견하고 자기 왼쪽에 90도로 꺾어진 자리를 가리켰다. 정욱은 두르고 들어온 수건을 깔고 앉아 있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키는 크더라도 다소 마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군살하나 없는 몸에 자리잡은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속살까지 구릿빛인 피부는 원래 그렇게 타고난 것 같았고, 넓은 어깨와 가슴, 긴 팔다리에 자리잡은 근육이나, 배에 새겨진 王자 같은 걸 보면 한평생 온갖 운동을 섭렵한 사람처럼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남자’임을 뿜어내고 있는 정욱의 몸에 맺힌 땀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해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수건 펴서 깔고 앉아.” “어, 그래.” 지해는 쭈빗거리며 수건을 펴서 다리를 쭉 뻗은 채 꼭 붙이고 앉았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기분을 감추려 지해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자신을 향한 정욱의 시선이 느껴졌다. “졸려?” “어? 아, 아니….” 지해는 들어올리기 싫은 눈꺼풀을 억지로 뗐다. 속눈썹 사이에 맺혔던 땀방울이 또르르르 굴러내렸다. 어둑한 실내에서 지해의 크고 긴 눈이 반짝 떠지는 순간, 정욱은 마치 밝은 전등 몇 개가 켜진 것처럼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쿵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사우나 룸 안에서 메아리쳐댔다. 빗속에 커다란 네온사인이 눈에 띄길래 별 생각없이 가자고 했던 것인데, 서로 벗은 몸을 마주 보고 앉으니 면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애써 온 몸에 힘을 주고 태연한 척하고 있긴 하지만, 아까 지해가 날렵한 허리에 수건을 감고 들어오면서부터 심장 박동이 조금 불규칙해져 있는 상태였다. 정욱은 지해의 몸에서 눈이 못 박힌듯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탱탱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배꽃처럼 하얀 피부. 곱고 단아하면서도 탄력있는 살결에는 티 하나 없었다. 가냘픈 듯 하면서도 자로 재어 정확히 맞춰놓은 듯한 길쭉한 골격에 구석구석 은근히 자리잡은 근육에서는 단단함이 느껴졌지만, 털 하나 없이 미끈한 다리는 도무지 남자의 것 같지가 않았다. “너 지금 내 다리 보지?” “………….” 정욱이 어버버하는 동안, 지해는 잽싸게 다리를 들어 가부좌를 틀었다. 다리를 들 때 여린 속살이 드러나 눈앞에 번쩍하는 중에, 둘의 다리가 잠깐 스치자, 정욱은 갑자기 아랫도리로 피가 몰리는 것 같아 당황하며 다리를 꼬았다. 그 때 이 사우나룸 구석에서 눈을 감은 채 열기를 음미하고 있던 아저씨가 스르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Jade Room에는 둘만 남았다. “난 다리가 약점이란 말야, 임마. 사내 새끼 다리에 털도 없다고 얼마나 놀림받는데….” “…너…… 다, 다리…… 장난 아니게 접힌다. 요가라도 했냐?” “초등학교 때.” “――?” “나 피아노를 다섯살 때부터 쳤었거든. 형 배울 때 어깨너머로 배운건데…. 형은 죽어라고 안 하려고 하고, 나만 빡이 돌아서 아무리 떼어놔도 온종일 피아노에만 붙어 있었대. 그래서 나중에 등이 많이 굽고 어깨도 휘고 하니까 엄마가 걱정하다가 억지로 요가를 시켜서 몇년 했었어.” “지금도 해?” “아주 가끔. 몸이 찌뿌드할 때만….” “어쩐지 굉장히…… 흠, 근데 그거 사실이냐?” “뭐?” “요가를 하면 섹스에 도움이 된다는 거…….” “음, 어떤 체위든 자유자재로 오랫동안…… 에이, 이 새끼!!!! 너 무슨 상상해?!!!!!” 지해가 갑자기 얼굴이 벌개지며 정욱의 가슴을 확 밀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지해가 놀라 정욱의 상반신 여기저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야, 너 정말… 돌덩이가 따로 없구나. 이런 근육은 처음 본다… 너 이 몸 만드는 데 도대체 얼마나 투자를 한 거냐? 완전 무쇠 인간―” 지해의 거침없는 탐색은 정욱이 그 손을 확 나꿔채 잡음으로써 끝났다. 지해는 소스라치게 놀라 정욱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조각상같은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눈에서는 강렬한 불길을 내뿜고 있었다. 둘은 그대로 굳어 서로의 눈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 뿜어나오는 열기로 사우나 안이 더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 둘의 얼굴에서,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이 흘렀다. “…저기, 나…… 머,먼저 나간다.” 지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정욱의 손을 탁 놓고는 떨리는 손으로 수건을 집어들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문 앞에서 수건을 놓쳐 엉겁결에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쳐든채 수건을 주워들어야만 했다. 이미 반쯤 성이 나 있던 정욱의 아랫도리는 그 동그란 엉덩이를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불끈 힘이 들어갔다. 정욱은 꼬아 앉은 다리를 풀지 못한 채 한동안 사우나 안에서 나오지 못 했다. 지해는 얼른 샤워실로 뛰어나와 차가운 물을 틀어 뜨거워진 몸을 식혔다. 설마 했는데 역시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몸도 반응하고 있었다. 대충 몸을 진정시킨 지해는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라커룸으로 뛰어들었다. “집에 갔을줄 알았는데…….” 정욱이 라커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20분 정도 지난 후였다. 지해는 옷을 다 입고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욱의 벗은 몸을 흘깃 보자 심장이 두근거려 애꿎은 시계만 바라보았다. 2시가 이미 훨씬 넘어서 있었다. 정욱은 젖은 교복 입기를 포기하고, 사우나에서 주는 목욕가운을 서둘러 걸쳐 입었다. “간다는 말이라도 하고 가야지… 어떻게 그냥 가냐?” 지해가 라커에서 신발을 꺼내들고 현관에 놓으며 신기 시작했다. “얼굴 봤으니까 갈게. 너 여기서 잠자기 편할런지 모르겠다. 내일 아침까지 비올지도 모르니까 우산은 두고간다. 아, 생각해 보니까 내일 체육 들었는데 너 학교에 체육복 있냐? 없으면―” “잠깐만. 담배 한 대만 피고 가라.” 빌딩 한켠으로 따로 마련해 놓은 흡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석에는 음료수 자판기와 담배 자판기가 있었고, 모래를 담아놓은 키 큰 재떨이 겸 쓰레기통이 양쪽 구석에 두 개씩. 한편에는 고급 사우나답게 가죽 소파와 테이블까지 놓여 있었다. 창문 두 개가 빼꼼히 열려 있어 비오는 밤 거리의 자동차 지나는 소리가 뺑뺑 울려왔다. “이쪽으로 와. 감기 걸려. 땀 뺐더니 목 마르지 않냐? 뭐 마실래? 금세 추워질 테니까 뜨듯한 거 마시자.” 지해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정욱은 열린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지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은 조용히 잦아드는 빗소리를 음미하며 캔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 아까보다 많이 편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긴장된 공기가 감돌았다. 그래도 둘 다 ‘자라, 가라’ 따위의 말을 먼저 건넬 생각도 못한 채, 둘만의 공간 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까 니가 간다니까…… 갑자기 할 말이 많은 것 같더니….” 정욱이 씩 웃으며 내뱉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지해도 따라 일어서며 배낭을 어깨에 매고 걸음을 뗐다. “그래, 나 갈게. 너도 빨리 올라가서 자. 여기 너 혼자 놔두고 갈래니 발길이 영 안 떨어진다만 역시 잠은 집에 가서―” 문 손잡이를 비틀어 열던 지해를 정욱이 돌려세웠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바람에 지해는 하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한참동안 둘은 서로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차례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정욱의 혀가 지해의 입술 선 위를 가르다가 입안으로 들어오기 직전 지해가 얼른 입술을 떼며 미소를 지었다. “담배 냄새 나, 임마.” 정욱이 웃으며 양손으로 지해의 얼굴을 가만히 감싸고 들여다보고서 다시 입술을 가져갔다. 저항없이 벌려진 지해의 입 안으로 정욱의 혀가 살짝 들어가 입천장과 치아 하나하나를 샅샅이 핥아낸 뒤 둘의 혀가 얽혀 들었다. 정욱의 손은 이제 지해의 등 위를 사뿐사뿐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해는 정욱의 젖은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쓰다듬다가 조용히 정욱의 고개를 떼어내며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자기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 자신이 정욱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커피 냄새도 나고, 소주 냄새도 난다.” 지해가 얼른 손등으로 입가를 쓱 훔쳐내며 말하자 정욱이 두 손을 지해의 허리에 살짝 올렸다. “둘 다 네가 사준 거야.” 듣기 좋은 바리톤의 울림이 귓가를 간질였다. 지해는 정욱의 어깨를 붙들고 살짝 베이비 키스를 한 뒤, 얼른 입술을 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정욱의 두 손이 지해의 허리에서 떨어졌다. “나… 나보다 키 큰 사람이랑 키스한 거 처음이다. 나 진짜 갈게. 이러다가 밤 새겠다. 내일 보자.” 붙잡을 새도 없이 총알같이 문을 열고 뛰어나간 지해의 뒷모습을 정욱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으로 뛰었다. 계단에서 경쾌하게 타닥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귀기울이고 있다가 정욱은 창가로 가서 반쯤 열린 창문 하나를 활짝 열었다. 창밖을 쳐다보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방수 잠바에 달린 모자를 올려 쓴 지해의 모습이 보였다. 지해는 고개를 들어 건물 위를 훑어보다가 창가에 서 있는 정욱을 발견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빨리 올라가, 감기 걸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쑥스러웠는지 주위를 둘러본 뒤 정욱을 보며 깔깔 웃고 나서 지해는 다시 얼른 손을 흔들고 마구 뛰어갔다. 지해가 한 손으로 모자를 누르고 길을 건너 뛰어가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던 정욱은 뒤늦게 우산을 들려보낼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흡연실을 나와 5층으로 올라갔다. #3. WICKED GAME The world was on fire no-one could save me but you 세상은 불타오르고 너밖엔 날 구할 사람이 없었어) Strange what desire will make foolish people do 욕망은 멍청한 사람들이 희한한 짓을 하게 만들어) I never dreamed that I‘d meet somebody like you 난 너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줄 몰랐어 I never dreamed that I‘d love somebody like you 난 너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될줄 몰랐어 No, I don't wanna fall in love 나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 No, I don't wanna fall in love 나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 With you 너와는 (Wicked Game - Chris Isaak) ←CLICK! “형, 일어나! 준석이 형도 얼른 일어나! 빨랑빨랑~!” 거의 잠을 자지 못 하고 뒤척인 것 같았다. 밤새 굴 속같은 방에 누워서 메트로놈 박자같은 시계소리와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와 불규칙적으로 고동치는 심장의 기묘한 3중주를 들었다. 일어서면 이 커다란 3층집의 마당이 허리께쯤 오는 반지하. 방에 달린 창문을 열면 바로 땅바닥이 만져진다. 축대 위에 올라앉은 집이라 엄밀히 따져서 지하라고는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집의 마당은 너무 높다. 기준이 너무 높다. 예전에는 땅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이렇게 큰줄 몰랐다. 빗방울이 이렇게 아픈 비명을 지르면서 지면에 곤두박질치는 줄 몰랐다. 자명종의 아우성 속에 아침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침 먹기 싫다고 투덜거리는 애물단지 금지옥엽 형님한테 억지로 먹일 밥상을 차렸다. 오늘 아침은 준석의 몫까지 3인분이다. 다행이다. 삐까번쩍하는 호화 아파트의 넓다란 방 놔두고 일주일에 반 이상을 이 퀴퀴한 굴 속에 자러오는 사촌형이 있으니 형과의 아침밥 전쟁은 준석에게 넘기면 된다. “준석이 형, 저 밥 한 그릇 다 못 해치우면 학교 안 보낸다고 지후 형한테 좀 전해 줘.” “지후야, 너 밥 안 먹으면 지해가 너 죽인댄다.” “얌마, 속이 받아야지 소화라도 시킬 거 아니냐. 무조건 쑤셔 넣는다고 피로 가고 살로 가는 줄 아냐?” “둘이 어제 술 먹었어? 쓰레기통에 맥주캔 있더라.” “비가 하도 거창하게 오길래 꿀꿀해서 내가 유혹했다, 왜?”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릴 어찌 저리도 거침없이 지껄일까. 으이구, 내 형이지만 참말로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공부만 잘 하면 뭐하냐.” “공부만 잘 하냐? 얼굴도 이쁘잖아. 지후 녀석도 힘들게 산다. 불쌍하니까 봐줘라.” “어이~!!!! 그딴 소리 하지 말랬지?” “형이 그렇게 역성을 드니까 지후 형 버릇이 나빠지는 거야. 나중에 준석이 형 없으면 어떻게 살려구.” 북어국 그릇을 아예 들고 후루루 마시면서 지해가 지나가는 소리로 내뱉고는 뭔가 공기가 이상해서 둘러보니, 준석은 애꿎은 김치만 끄적거리고 있고, 지후는 젓가락을 입술에 댄 채 밥그릇만 노려보고 있다. 점심 도시락은 필요 없으니, 저녁 도시락만 제 시간에 가져오라며 집을 나서는 형님의 명령에 가운뎃손가락을 쳐들어 대답하고, 설거지를 마친 뒤 학교 갈 채비를 하고 문을 잠그고 터덜터덜 걸었다. 그 녀석 교복이 비를 맞아 다 구겨졌던데 우리 집에서 재웠으면 다려줬을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속으로 자신에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렸다. 제대로 알게된지 하루만에 이렇게 제 속을 발랑까 보여준 사람은 처음이다. 술기운이었는지 서로 홀딱 벗고 땀 흘리다가 맛이 갔었는지 키스까지 했다.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어떤 녀석인지 그 녀석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부모님은 다 계신지,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가정에서 자라왔는지 엄청나게 궁금했지만 하나도 묻지 않았다. 지가 일부러 떠들지 않는데 뭐하러 묻는가. 자신이야말로 스스로 말 안 하는 걸 굳이 캐묻는 사람을 젤루 기피하지 않는가 말이다. 궁금하지만 알기가 두렵다. 그냥 그 어른스럽고 당당하고 멋진 녀석 하나만 똑 떼어서 친구로 삼을 순 없을까?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저렇게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나오는 멋진 녀석이랑 마음이 맞은 건 처음인데… 어떻게 안 되는 걸까? 어젯밤에 했던 다정한 키스를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진다. 그렇게 큰 녀석이랑 키스를 하니 여러모로 눌리는 것 같아서 상당히 기분이 묘하긴 했지만, 뭔가 보호받는 듯 했던 안락함이나 따뜻함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다. 그런 기분 진짜 오랜만이긴 했다. 이러다가 발전해서 사이가 깊어지면 누가 깔리는 거지? 다시 한번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리며, 쓸데없이 비약시키지 마. 정신차려, 김지해! 하고 최면을 걸었다. 이 놈의 ‘귀족’ 학교는 형이 대학만 들어가면 빠이빠이다. 형의 고3 생활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이 학교를 다닐 뿐이다. 처음 입학할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최선이다. 친구 따위는 필요없다. 더 이상 이 동네에 머물면 홧병만 생길 거다. 그런 다짐이 별 효력이 없으리라는 걸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깨달았다. 지각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와서 그런지 교실 안에는 애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앞문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맨날 뒷문으로 다니다 갑자기 앞문으로 가는 것도 웃기고 해서 뒷문 쪽으로 가는데, 복도 창문 너머로 정욱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침 내내 학교 가면 녀석의 얼굴을 어떻게 볼까, 어떤 표정일까 긴장했었는데, 녀석의 보일듯 말듯한 미소에 온 신경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안심했다. 어제 마주 보면서 계속 느낀 거지만 저 딱딱하고 은근히 거만한 녀석에게 저 정도면 꽤나 활짝 웃은 거다. 언뜻 보기에도 교복이 어젯밤의 구김은 간 데 없이 단정하다는 생각을 하며 뒷문을 드르륵 열었다. 교실 안으로 한 발짝 들여놓는 순간, 정욱의 잘생긴 얼굴만 눈에 한 가득 들어왔다. 다른 건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기가 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안중에도 없었다. 심장만 마구 두방망이질 쳐댔다. 제기랄, 중증이다. 미치겠다. 정말 큰일난 것 같다. 4교시 생물시간에 무슨 비디오인가를 봐야 한다고 해서 과학관 시청각실로 가려고 지해가 주춤주춤 교실을 나서는데, 문 앞에 뜸들이며 앉아있던 정욱이 가만히 지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지해는 자기 자리에 뭘 두고 나온 것처럼 애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정욱은 아무래도 끝까지 버티고 있는 주번이 신경쓰이는 듯 눈쌀을 찌푸리다가 지해에게 따라오라며 계단을 성큼성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야, 과학관 가려면 이쪽으로….” 뛰면서 소근거리는 지해에게 정욱이 뒤돌아보며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해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어디 가는지도 모르는 채 최대한 조용히 뒤를 따랐다. 학교 건물 뒷편 한적한 곳에 있는 창고 옆쪽까지 지해를 끌고간 정욱은 주위를 살펴본 뒤, 입술을 겹쳐 왔다. 두 사람의 혀가 급하게 얽히고 서둘러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잠깐 동안의 아쉬운 입맞춤이 끝나자, 정욱이 지해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죽는줄 알았어.” 둘이 뒷문을 빠져나가는데도 수위실에 앉은 수위 아저씨가 아무 말 없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지해는 별 의심없이 학교 건물 옆 주차장까지 따라 걸어들어갔다. 주차장 한켠에 세워진 검은색 에쿠스 리무진의 뒤에 나란히 앉고 나서, 정욱이 기사한테 어딘가 행선지를 말했다. 지해는 정욱이 일부러 국산차를 가져오라고 한 것도 모르고, 설마 했더니 역시 이 녀석도 부르조아긴 했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해의 한숨소리에 깜짝 놀란 듯 정욱이 옆을 보며 물었다. “왜? 수업 빠져서 걱정돼?” “아니… 그 선생 출석도 안 부르잖아. 아마 모르고 지나갈걸.” 정욱이 가만히 지해의 왼손을 끌어다가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그 손을 자기 손으로 덮었다. 손바닥에 닿는 단단한 감촉만도 견디기 벅찬데, 손이 맞닿은 곳에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점심시간엔 원래 어떻게 해?” “집이 가까우니까… 집에 가서 먹고 와.” 정욱은 잠깐 말이 없었다. 지해는 머쓱해서 괜히 차 안만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어제 얻어먹은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점심 시간이 너무 짧아서… 5교시가 뭐였지?” “윤리.” “그것도 제끼자.” “응.” “이따가 체육만 아니면 사실 오늘 오후 전부 제끼고 싶은데… 제기랄… 종례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니…….” “쿡. 빠지고 싶으면 빠져도 돼. 강정욱 의외로 모범생이구만?” “그런 게 아니라. 눈에 띄는 짓 하기 싫어서 그래. 난 이 학교를 조용히 졸업하고 싶어.” “나랑 목표가 똑같구나….” 사실 목표는 조용한 졸업이 아니라, 다음 학년부터는 다른 학교 학생이 되는 것이었지만, 왠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지해는 휴우 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다가 뭔가 낌새가 이상해 정욱을 쳐다보니, 얼굴을 조금 붉히며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왜 그래?” “옆 얼굴….” “――?” “예술이야.” 기사가 들을세라 나즈막하게 말하는 소리에 지해는 기가 막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한데다가 왠지 마음이 우울하던 중에 그런 말을 듣자 더욱 더 커다랗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속시원하게 웃고나서 정욱을 보았다. 녀석은 잔뜩 붉으락푸르락해서는 뭔가 안절부절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지해가 눈을 크게 뜨며 눈짓으로 왜냐고 물으니, 정욱이 허벅지에 겹쳐놨던 손을 천천히 자기 중심으로 이끈다. 겉으로 심하게 표시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단단히 불끈해 있는 상태였다. 불에 덴 듯 놀라 얼른 손을 뗐다. 둘은 동시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돌리고 잠깐동안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까? 지해는 적지않이 고민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막연히 생각해 보긴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급격한 발전이라니…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남자를 안아본 적은 있어도 (물론 이주원 한 명뿐이지만), 안긴 적은 없었다. 여자와의 첫경험은 중2때였다. 문란하게 살아오진 않았으나, 절대로 순진한 맹추는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손을 뻗친 것도 아니었는데 상황이 맞아떨어졌거나 그쪽에서 강력하게 원해서 이루어진 관계들이었다. 사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강렬하게 이끌린 상대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멋있는 녀석에게 안기면 어떤 기분이 들까? 『Over The Rainbow』에서 몇 명이 접근해 올 땐 불쾌하기만 하고 기분 나빴는데, 지금은 조금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지해는 아무래도 기사가 신경쓰여 큰 소리로는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아, 한쪽팔로 정욱의 머리를 잡아당겨 안고 귓속말로 물었다. 「경험 있어?」 정욱이 바싹 다가앉아 지해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기대다가 갑자기 피식 웃는다. 말이라고 하냐, 하는 의미다. 「아니, 남자 안아 본….」 잠깐 망설이다 끄덕끄덕. 살며시 지해의 눈치를 살핀다. 「나도 있긴 한데….」 정욱의 눈이 동그래진다. 「…안겨본 적은 없거든.」 얼굴이 벌개진 채로 상당히 걱정된다는 듯 한숨을 내리쉬며 연신 기사의 눈치를 살피는 지해를 보고 갑자기 정욱이 크게 웃으며 지해의 팔에서 빠져 나와 지해의 머리를 부비부비 마구 헝크려 놓는다. “걱정 마.” 지해가 안심 반 아쉬움 반에 긴장을 풀며 정욱의 옆얼굴을 쳐다보자, 정욱이 지해의 목을 오른 팔로 안고 귓가에 가쁜 숨을 불어넣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도발만 안 하면 참을 수 있어.」 지해의 시뻘개진 얼굴을 보며, 정욱은 큰 소리로 차가 떠나갈 듯이 웃었다. 차에서 내리며 보니, 목적지는 호텔이었다. 지해는 깜짝 놀라 정욱을 쳐다봤다. 정욱은 지해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앞만 똑바로 보며 말했다. “걱정말랬잖아. 밥만 먹고 갈 거야.” 밥만 먹고 가든, 딴짓을 하고 가든, 학교에 있어야 할 학생이 그나마 교복을 입은 채로 이런 어른들의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게 마음 편한 일인가 말이다. 정욱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가 지해와 아무 상관없는 놈이었을 때, 그저 교실 뒷문 옆에 앉은 키 크고 거만한 어떤 녀석뿐이었을 때, 그때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운전기사에게 명령하는 모습이나, 낯선 ‘어른’들이 오가는 특급 호텔의 로비를 당당하다 못해 제왕의 태도로 지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두려움마저 자아냈다. 그들이 지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정욱에게 찬탄의 눈길을 보냈다. 지해 자신이 겁냈던 것처럼 ‘고삐리’들이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에, 온 몸에서 뿜어나오는 지배자의 카리스마에 모두 다 도취되어 알아서 복종의 예를 표하는 것이었다. 어제 음악실에서, 주점에서, 사우나에서, 그리고 조금 전까지 차 안에서의 느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 지해는 과연 지금 이 사람과 내가 알게 됐던 사람이 같은 사람인가 생각될 정도였다. “차가 막힐까봐 예약을 12시로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어.” 그래, 아까 나한테 속삭이던 그 목소리야. 괜히 주눅들 필요없어. 나도 이런 곳에 처음 오는 건 아니잖아. 새삼스럽게 떨 필요없어. 지해가 정욱에게 이끌려 한참 구비구비 돌아 들어간 곳은 화장실이었다. 이 사람은 화장실에 가는 것도 마치 어떤 거대하고 중요한 의식을 행하러 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구나, 싶으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십여 개의 문이 모두 열려 있는 화장실 안에는 정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정욱은 지해를 맨 끝칸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 정말. 키스 한 번 하기도 이렇게 힘드니….” 열에 달뜬 이 한 마디에 지해를 불안하게 했던 마법이 깨졌다. 아까의 범접하기 어려운 ‘제왕’ 강정욱은 꼬리를 감추고, 흥분한 그곳으로 자신의 손을 이끌던 그 강정욱이 나타나 자기의 입술을 격하게 탐하고 있었다. 지해는 제발 이 사람이 다시 돌변하지 않기를, 사라지지 않기를, 하고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도 모를 절박한 기원을 담아 정욱의 뒤통수를 두 손으로 당기고, 온 몸을 열어 그 키스에 답했다. 정욱의 손이 지해의 재킷을 걷어내고,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눈으로만 욕심냈던 지해의 야들야들한 살갗에 손끝이 닿자, 머리끝까지 전율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 그의 가슴과 등과 허리를 연신 쓸어내리며 나머지 손으로 셔츠의 버튼을 풀러냈다. 숨막히던 키스가 잠깐의 휴식을 가지면서 서로 입가에 주르르 흐르는 타액을 핥아 주었다. 정욱이 다시 각도를 바꾸어 지해의 입술을 공격했다.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하얀 이가, 그 애절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입안 구석구석 하나가 자신의 혀가 한번씩 터치해 줄 때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또다른 생물인양 자신의 입안에서 춤을 추는 지해의 혀가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녀석의 목구멍 깊숙히 자신의 혀를 꽂고 모든 생명수를 빨아들이고픈 충동이 일었다. 키스하면서 이토록 강렬한 욕구를 느끼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정욱으로서는 애초에 단지 키스만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전용 VIP 스위트 룸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됐을 때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예상은 딱 들어맞아 있었다. 자기가 어느틈에 그랬는지 지해의 셔츠는 거의 벗겨지다시피 했고, 자신의 셔츠 단추도 거의 다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 지해의 상아색 목덜미와 가슴에 자신이 만들어놓은 빨간 자욱들이 눈에 띄었을 때는 둘다 흥분한 아랫도리를 서로의 허벅지와 아랫배에 부비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미 계속 묵직했던 정욱의 고통을 알았는지 앗 하는 순간에 지해가 얼른 정욱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 뒤 바지를 잡아 내리며 그곳에 자신의 입을 가져갔다. 지해 자신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스스로 놀라면서 한손으로 정욱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오가며, 한 손으로는 페니스를 잡고 빨아댔다. 거의 처음인듯 지해의 펠라 솜씨는 서툴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 받아본 서비스보다도 자극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의 신호가 왔다. 정욱은 지해의 입에서 페니스를 얼른 빼내어 변기 속에 하얀 액체를 쏟아냈다. 사정의 쾌감에 부르르 떠는 정욱의 허리를 지해가 뒤에서 부등켜 안고 뒷목덜미에 입을 맞춰주며 한손으로 탄탄한 가슴과 배를 더듬었다. 사정의 여운이 지나기가 무섭게 정욱이 지해의 바지와 브리프를 단번에 내리고 지해의 것을 빨아주기 시작했다. 지해는 주체할 수 없이 후들거리는 몸을 화장실 칸막이 벽에 간신히 기대고 서서 두 손을 정욱의 머리 위에 얹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아…… 나올 것 같아…… 뺄게…… 빼… 임마……! 빼… 아앗!” 정욱은 그대로 놔주지 않고 입으로 쏙 받아낸 뒤 꿀떡 삼켰다. 지해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쾌감과 부끄러움이 마구 교차하는 가운데, 마치 한 방울도 버리기 아깝다는 듯이 입 주변을 핥아내는 정욱의 유혹적인 눈빛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묘한 흥분을 느꼈다. “잘 먹었어. 이런 맛이구나. 처음 먹어봐.” 바지와 브리프를 올려준 뒤 서서히 몸을 일으킨 정욱의 품에서 나른한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문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긴장하는 지해의 반응이 재밌어 정욱은 다시 한번 그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눈을 크게 뜨고 버둥거리며 키스를 받아내는 지해가 너무 귀여워 정욱은 발소리의 주인공이 볼일을 마치고 나갈 때까지 지해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이 씹쌔끼… 들키면 어쩔려고… 빨랑 먼저 나가.” 악마같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으며 버티는 정욱을 힘껏 떠밀어 내보낸 지해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리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변기의 물을 얼른 내려보낸 뒤 밖으로 나갔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머리까지 말끔히 정돈한 정욱은 화장실 문을 나서기 직전에 문에 지해를 밀어붙이면서 다시 한번 집요하게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실타래처럼 엉켜든 지해의 머릿속엔 누가 문을 밀고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정욱의 키스 속에 자신의 정액 맛이 느껴진다는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예약한 12시보다 35분이나 늦게 간 두 사람은 5분만 늦게 오셨어도 하마터면 예약을 취소시킬 뻔 했어요, 하는 매니저의 군소리를 들었다. 물론 정욱이 한번 눈을 치켜뜨자 그 소리는 쏙 기어들어갔다. 온통 혼이 나가고 기운이 빠져 무슨 맛으로 식사를 했는지조차 기억 못할 지경이었다. 정욱은 교복 차림을 고려했는지 금연석을 예약해 두었었다. 다행히 벽에 붙어있는 자리라 지해는 간간히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아직도 제 것 같지 않은 몸을 쉬었다. 정욱은 다시금 제왕의 탈을 쓰고 앉아 우아한 포즈로 식사를 했다. 이래저래 더욱 친밀해진 사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어쩌다 한번씩 발을 툭툭 치고 손등을 슬그머니 간질이는 장난질 때문인지, 아까처럼 살 떨릴 정도로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너 정말 대단하더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정욱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엉?” “아까 말이야.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난 거냐?” “몰라. 묻지 마. 제발 잊어줘. 나도 잊을 거야.” 지해는 머리를 마구 흔들다가 차창에 쿵소리가 나도록 기댔다. “절대로 싫은걸. 영원히 기억하련다. 그나저나 많이 해본 솜씨던데.” “엥? 생전 처음이다, 임마. 내가 미쳤다고 누구한테 그딴 걸 해주겠냐?” “그럼 타고난 건가?” “장난치지 마. 쓰바야. 받아줄 정신도 없어 지금.” “이리 와. 거기 기대지 말고 여기 기대.” 정욱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나른한 목소리가 뱉어내는 몇 마디를 듣다가 잠이 들었었나 보다. 이미 벌써 도착했다고, 쉬는 시간 종 울렸다고 깨우는 정욱의 목소리에 지해는 눈을 떴다. 6교시 체육시간에 간신히 맞춰 들어온 두 사람은 서둘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을 향했다. 4교시는 인원 확인 없이 바로 비디오 시청에 들어갔었고, 5교시에는 인간 수면제 윤리 선생님의 고공 투하 수면 폭탄에 전멸했었는지 어느 누구 하나 사라졌던 두 사람의 그간의 행적에 대해 묻는 이 없었다. 세강고 제일의 ‘현대의학도 포기한 미친 개’라는 명성답게 체육 선생은 5교시 수면 폭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사 하나 빠진 수업 태도를 보이던 반 애들에게 사기 고취와 의욕 신장이라는 미명 아래 기합을 내려주었다. 평소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던 그 특유의 여학생 편애정신에 발맞춰 여학생들은 스탠드에 앉아 기합 받는 남학생들을 보며 가슴 깊이 반성할 것을 명하고, ‘한 우물만 파기’라는 평소의 지론답게 기합 벌칙은 오직 한 가지, 운동장 50바퀴 뛰기였다. 다만, 체력의 편차를 고려해 10바퀴 이내에서 하나라도 열외하면 리셋, 50바퀴까지 다섯 명 이하로 남으면 역시 리셋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벌칙에 과부하가 걸릴 것을 염려하여, 그에 대해 일언반구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그저 따를 뿐이었다. 1학년 2반 대표 약골 두어 명이 여러 명의 우려와 격려 속에 간신히 10바퀴를 채우고 떨어져나간 후, 바퀴 수가 늘어남에 따라 무책임한 나약분자들이 열외하기 시작하여 40바퀴가 넘어서는 순간에는 트랙에 7명밖에 남지 않았다. 중학교 때 달리기로 신문 배달을 했던 경력의 소유자이니 만큼 이런 비상시에 지해의 지구력은 스스로도 놀랄만 했었는데, 역시 불과 두어 시간 전에 다리가 풀렸다 꼬일 만한 일을 겪어서 그런지 어째 40바퀴부터는 조금씩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몸이 삐걱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엎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42번째 바퀴를 돌던 중 마침 앞에서 달리던 녀석이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도저히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한 페이스도 떨어지지 않고 정확한 보폭과 스피드로 달리던 정욱이 지해의 상태를 간파했는지 서서히 옆으로 맞추어 왔다. “김지해. 힘들면 그만 뛰어.” “헉헉… 괜찮다… 헉헉…… 됐어, 임마.” 지해의 그 말에 용기를 얻기라도 했는지 두 바퀴를 더 돌던 와중에 또 한 명이 다리가 완전 풀려 넘어졌다. 트랙 안쪽에 앉아 있던 나약분자들 중 그나마 양심이 남아있는 몇 놈이 그 녀석을 끌어냈다. 이제는 더 이상 주저앉고 싶어도 주저앉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남은 여섯 바퀴는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 바퀴를 마치고 출발점에 도착하는 순간, 지해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정신과 몸을 한꺼번에 놓아버리고 말았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어떤 강한 팔뚝이 감싸안아주는 것이 느껴지는 듯 했지만, 대답하려 해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BGM : The Thrill Is Gone - Chet Baker←CLICK! 빙글빙글 희미하게 도는 하얀 천장…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의 흐릿한 얼굴… “야, 인제 정신이 좀 드냐?” “그래도 금방 깨어나서 다행이네.” “…어…여기……?” 하나는 남자… 아, 그래…강……정욱… 저 여자…… 안경 쓴 저 뚱땡이 아줌마는… 양호 선생님? 으악, 두 사람 제자리에 좀 있어… 빙글빙글 돌지 좀 말고… 아…… 그만. 어지러워… “양호실이야, 김지해.” “아아… 체…육… 달리기는…?” “끝났어. 걱정 마라. 야, 누워 있어. 일어나지 마. 왜, 속 불편해? 쏠리냐?” 지해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간신히 고개짓을 하며 침대에서 버둥버둥 일어나 운동화를 발에 꿰었다. 보다 못한 정욱이 지혜를 덥썩 들어 안고 양호실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조금만 참아. 화장실 가서 토하자.” “…우욱….” “참아라, 참아… 지해야, 쫌만 참아라.” 정욱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양변기를 부여잡고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쏟아내는 지해 옆쪽으로 쭈그리고 앉아, 지해의 긴 머리칼을 한 손으로 묶은 것처럼 모아쥐고, 다른 손으로 부드럽게 등을 두드려 주었다. 마른 등에 얹은 손바닥으로 오장이 뒤틀리는 진동이 전해져 올 때마다 마음 속에 애잔한 파동이 이는 것 같았다. 어제밤 먹은 안주 찌꺼기에 멀건 위액까지 뱉어낸 뒤 거의 탈진한 지해를 가만히 안아주며 땀에 절은 머리카락에 계속 입을 맞추었다. 둘 다 십여 km를 뛰고난 터라 온몸이 땀투성이로 체육복까지 땀 범벅인데도, 이것저것 다 섞인 냄새든 눈앞의 광경이든 뭐든 하나도 역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기 품안에 축 늘어져 가뿐 숨만 내쉬는 이 녀석이 안스러울 뿐이었다. “…오늘 계속…… 화장실에서 왠 지랄 연타냐….” 지해가 이제 기력을 회복했는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욱은 그 말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녀석이 좀 괜찮아졌나 보다 안심도 돼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내가 토했으면 니꺼 그거 나왔겠다.” “으으…우웩이다 임마.” “하하하…참, 너 아까 점심 먹은 게 체했던 거 아니야?” “체하긴 뭘… 씹, 드러운 꼴 보여서 쪽팔려 죽겠다… 새끼, 가라니깐 기어이….” “네 머리카락 잡아줘야 되는데 어딜 가냐.” “머리끈… 없어졌네… 그러고 보니….” 정욱은 지해를 부축해 세면기 앞에 데려다 놓고는 양호 선생님 책상에서 가그린을 봤다며 탈취를 다짐하고 양호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있던 아이들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둘을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1학년… 2반… 김…지.해.” 정욱이 종례에 들어간 사이, 지해는 힘이 쭉 빠진 상태로 양호실에 누워 있었다. 양호선생님이 양호실 이용객 명부에 지해의 이름을 받아적었다. “너―” “네, 저 3학년 김지후 동생이에요.” 이제는 어느 선생님이든 자기한테 관심만 보이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대사가 됐다. “그게 아니라… 어머! 너 김지후 동생이니? 음, 닮긴 닮았다.” “제가 좀 떨어지죠.” “아니… 뭐… 내가 보기엔 니가 더 매력있는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좀 단정하게 하고올걸.” “진짜야. 지후는 그냥 예쁘기만 하고… 니가 더 멋있어.” “흑흑흑, 내일 형 데리고 올테니까 형 앞에서 한번만 더 말해주세요.” “그나저나….” “……네?” “너, 강정욱이랑 엄청 친한가 보다?” “어, 이름 아시네요?” “걔 다시 봤다. 그렇게 친구한테 자상하게 잘 하는 앤줄 몰랐어. 어릴 때부터 거만하고 잘난척 하는 꼴만 봤었는데…… 너한테 지극정성이더라……아까… 놀랐어, 증말.” “원래 아세요?” “매년 설날 연휴랑 이사장님 생신 때 걔네집에서 교직원들 다 불러서 잔치하잖니.” “왜…요?” “어머, 너 친군데도 몰랐니? 강정욱이 이사장님 아들이잖아! 세강그룹 강성철 회장 손자고.” “――!” 아, 이런… 머리가 띵하다. 이 아줌마는 왜 내가 묻지도 않은 걸 자꾸 지껄일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저녀석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부터 봤는데 그때부터도 애가 애같지가 않고 거만한 것이 어른 뺨치고…… 저런 모습은 암튼 오늘 처음본다.” “………….” “쟤 공부는 어떠니? 잘 한다고 들었는데. 강성철 회장이 손자들 중에서 가장 총애한다잖냐. 젤루 똑똑하고 의젓하고 모범적이고….” “………….” “저번에 자식들 사이에 분쟁 났을 때 그 대왕마마가 열받아갖구 아들들 다 필요없다고, 정욱이만 있으면 된다고 그런 적도 있다더라.” “…선생님은… 어떻게… 글케 잘 아세요?” “그런 거 시사 잡지 같은 데도 나오는 거야. 이 학교에서 10년짼데 당연히 관심이 가지.” “………….” “너 정말 몰랐니?” “………….” “역시 그 강회장님 사람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라더니만…… 그렇게 잘나고 의젓한데다가 자상하기까지 하고… 역시 출신성분이 달라서…… 확실히 일반 애들이랑 틀려….” 지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고 싶었던 건가? 계속 몰랐으면 좋았을걸, 모를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속이 수저로 긁어내는 것처럼 쓰리고, 놀란 심장이 쥐어뜯기듯이 아프다. 별 거 아니다. 먹은 걸 죄다 쏟아내서 허전한 거겠지. 지해는 뭔가 계속 말하고 싶은 듯한 양호선생 곁에 더 있고 싶지 않아서 벌떡 일어나 선생에게 인사하고 반으로 돌아왔다. 가보니 한참 종례 중이라 끝날 때까지 복도에 서 있을까 하다가 교실로 스윽 들어갔다. 정욱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모른 척 했다. 교복으로 도로 갈아입을 기운도 없어서 그냥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으로 집에 가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정욱이 뭔가 말하려고 얼쩡거리다 이쪽으로 오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저, 저기… 김지해.” 웬 여자애 목소리…? 아, 그 한선경이라는… 3반의 누군가와 지해를 헷갈렸던 그 애였다. “몸 괜찮아?” “응.” 뭔가를 쑥 내민다. 어디 흘렸는지도 몰랐던 머리끈이다. “니꺼 맞지? 운동장에 떨어져 있더라.” “고맙다.” “아까 너 쓰러졌을 때 진짜 놀랐어.” “헤헤… 나도 놀랐다.” 둘은 잠깐동안 마주보며 아주아주 어색하게 웃었다. 그 다음 코스로 안녕이라든가, 내일 보자라든가, 몸조리 잘하라든가 소리가 나와야되는데, 아무 말도 없다. 이 기집애 쭈삣쭈삣 할 말도 없으면서, 계속 앞에 딱 버티고 서서 머뭇거린다. “김지해, 이제 좀 살아났냐?” 정욱이 성큼 다가와서 덥썩 한 팔로 어깨를 안으며 말한다. 이 자식… 내가 분명히 애들 앞에서 절대 티내지 말자고 했는데 자꾸 왜 이런다지? 임마, 저 기집애가 눈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잖냐. “가방 다 챙겼으면 가자.” 남의 가방을 당연하다는 듯이 떡하니 집어들고 명령하는 정욱에게서 얼른 가방을 뺏았다. 어깨를 흔들어 정욱의 팔을 떨궈냈다. 정욱은 처음에 약간의 반항이 있었지만 곧 승복했다. 그리고 뭔가 의아한 시선으로 지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해는 그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몇 걸음 앞섰다. “그쪽으로 가지 마. 주차장으로 가게. 집까지 바래다―” “아니야. 나 집 무지 가깝거든. 그냥 걸어갈게. 그럼 내일 보자.” 얼굴도 안 보고 다다다 내뱉고는 냅다 뛰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힘이 풀린 다리가 후들거리고, 명치끝이 콕콕 쑤시는데도, 계단을 두세 개씩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고, 운동장을 전력 질주하여 혼신을 다해 학교를 탈출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벗어던지고 허겁지겁 샤워를 했다. 문득 거울을 보니 자기 몸에 키스마크가 장난 아니다. 그 좁은 데서 언제 이렇게 많이 만들었을까? 재주도 좋은 놈. 잘난 놈. 자기도 모르게 그 자욱 하나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머릿속에 경계 경보가 울린다. 이쯤에서 끝내야 된다. 더 이상 깊이 빠지면 안된다. 더 끌다간 정말 녀석한테 홀딱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익사하고 말 거다. 단 이틀만에 사람을 이렇게 뒤흔들어버린 놈인데…… 무서워. 그 녀석 무서워…… 지금 어서 발을 빼야 돼…… 한 입에 삼켜버릴 것처럼 덤벼들던 키스가 생각나버렸다. 중심을 유혹적으로 빨아대던 뜨거운, 미치게 좋은 그 감촉이, 몸 위에서 정신없이 춤추던 그 손길이… 전부 다 기억나버렸다. 떨리고 지친 몸이 기억을 쫓아 불끈불끈 반응을 한다. 약간 부풀어오른 그곳에 씻다 말고서 손을 가져가 마구 마찰하기 시작한다.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조각상처럼 잘 생긴 그 얼굴이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짓는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검은 두 눈동자가 자기 얼굴로 꽉찬 걸 보니까 세상에 아무 것도 필요없는 것 같던데 어떡하지? 낮게 울리는 부드러운 바리톤이 마냥 좋은데 어떡하지? 그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부르면 머리털이 쭈빗 설 정도로 좋던데…… 그 단단하고 따스한 품안에 안기니까 이제는 힘든 일, 슬픈 일 하나도 없을 것처럼 아늑하기만 하던데…… 이제 난 어떡하면 좋지? #4. TROUBLE Oh no, I see, 맙소사. 이제 알겠어 I spun a web, it's tangled up with me, 내가 모든 걸 얽히게 만들어버렸어 And I lost my head, 난 정신이 나갔나봐 The thought of all the stupid things I said, 내가 한 바보같은 소리들을 좀 봐 Oh no what's this? 맙소사 이게 뭐지 A spider web, and I'm caught in the middle, 온통 거미줄로 얽혀있잖아 I turned to run, 난 도망치려했어 The thought of all the stupid things I've done, 내가 저지른 바보같은 짓들 때문에 I never meant to cause you trouble, 난 널 곤란하게 만들려 할 생각은 아니었어 And I never meant to do you wrong, 널 잘못되게 할 생각도 없었어 And I, well if I ever caused you trouble, 그리고 만약에 내가 널 곤란하게 했다 해도 O no, I never meant to do you harm. 네게 해를 끼칠 생각은 아니었어 (Trouble - Coldplay)←CLICK! “너 나 좋아하냐?” 밤은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깊게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고민의 장막은 대부분 눈부신 아침 하늘 아래 약간의 쑥스러움을 동반한, 조금은 불합리한 낙관과 함께 걷혀버리기 일쑤. 피곤에 찌들은 몸으로도 또다시 밤새 뒤척이며 이 생각 저 생각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던 지해는, 그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부산한 아침을 보낸 뒤 문을 잘 잠그고 초라하고 컴컴한 집을 나섰다. 유난히 맑은 햇살 속에 어느새 간밤의 고민은 거짓말처럼 날아가버렸다. 똑같은 발걸음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터벅터벅 올라가는 등교길.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 즉, 강정욱이라는 재벌3세와 아무 상관도 없었던 시절의 생활. 수업 시간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얌전히―이 날은 이틀 동안의 수면부족을 보충하느라 대부분 졸았지만. 역시 쉬는 시간에도 입을 꽉 다문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역시 조용히―거의 잠에 취해서. 몇 번 자신을 쳐다보는 정욱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척. 그러다가 멍청하게도 무의식중에 그쪽을 마주 쳐다보고 말았지만, 외면. 정욱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기를 쓰고 피하려는 지해의 움직임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일체 접근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지해도 인간인지라 하루종일 교실에 처박혀있을 수는 없었다. 점심 시간, 언제나처럼 집으로 향하려 뒷문으로 나서다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뒷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아찔함과 발이 바닥에 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영원같은 찰나가 흐르고, 또다시 외면. 냉정을 가장한 무시. 지해가 5교시 시작 직전에 자리에 돌아와보니, 그 비오는 밤에 주점에서 빌렸던 멋대가리 없이 크기만한 우산이 자기 자리에 놓여 있었다. 흘끔 정욱을 바라보았지만,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의 그는 묵묵히 수업에 귀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우산 손잡이에 손가락 하나를 대어 아주 잠깐 살며시 쓸어보았다. 가슴 한 구석이 욱씬, 아프다…. 하지만 이 까짓 것쯤이야. 몇 년간 겪었던 아픔들이 이럴 땐 너무나 훌륭한 안전판 노릇을 해준다. 인간 김지해를 모진 놈으로 만들어준 험한 인생에 다시 한번 감사. 이틀이 더 흐르고 나니 무관심과 태연을 가장한 연극도 어렵지 않은 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말을 보내고 다시 등교한 월요일― ―그런데 왜 지금 저 거만한 표정을 짓고있는 자식에게 이런 말 따위를 묻고 있어야 하는 걸까? “너 나 좋아하냐?” 사건의 발단은 5교시 음악시간이었다. 실컷 아그들을 음악실까지 힘든 걸음 하게 만들어 놓은 음악 선생은 한 20분 정도 수업을 한참 하다가 교무실에서 무슨 연락을 받더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반장은 이 상황에서 교실로 돌아가면 중간에 열외한 학생 제군들이 학교 각처에서 일 저지르고 돌아다니다가 괜히 걸려서 음악 선생과 자신한테 욕을 먹이게 될까봐 그랬는지, 종칠 때까지 꼼짝말고 잠이나 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취침’이라는 명령이 전체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음으로, 당연히 떠드는 무리들이 도처에서 생겨나고, 그다지 조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히 잠조차 잘 만 하지 못한 어정쩡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렇게 10분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자, 뒷자리에서 어느 근엄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반장을 불렀다. 정욱이었다. 황태자님의 호출에 쫄래쫄래 달려가 명령을 받자온 반장이 지해를 크게 불렀다. 막간을 이용하여 이어폰을 끼고 혼자만의 천국을 노닐던 지해는 주변 애들의 일깨움으로 비로소 강정욱 바로 옆에 서 있는 반장 나으리가 자신을 부름을 알 수 있었다. “김지해, 앞에 나가서 피아노 쳐.” 석연찮은 표정으로 내키지 않는 듯이 요구하는 반장에게 처음은 웃음, 그 다음은 새찬 도리질로 명령 불복종을 꾀하던 지해는 그 반장 옆에서 싸늘한 비웃음을 머금은 강정욱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종이 울릴 때까지 「Bewitched, bewildered and bothered」와 「Everything Happens To Me」같은 재즈 넘버를 서너 곡 두드렸다. 애들 중 태반이 남이야 피아노를 치던 굿을 하던 아랑곳않고 꿋꿋이 수다 모드를 유지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책을 집어들고 문을 빠져나가던 지해에게 정욱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기계같은 어조. “어디서?” “이 위에 옥상으로 가자. 거긴 아무도 안 와.” “다음 시간 수업은?” “제껴도 돼.” “지금 해.” “여기서 담배 피다간 잘못하면 걸려.” 아직 서늘하다는 느낌이 드는 날씨에 푸르디 푸른 하늘. 이 학교 캠퍼스에서 가장 높은 데 위치한 게 이 예체능관이었기 때문에 시야에 막히는 것 하나 없이 시원했다. 군데군데 피어있는 개나리와 목련이 한눈에 들어왔다. 완연한 봄이었다. 이 비싼 땅 한복판에 평균적인 고등학교의 수준을 훨씬 넘는 너른 교정은 이 학교가 결코 돈벌 생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왜 그러지?” 담배를 피워 물면서 정욱이 다짜고짜 말했다. 그의 이죽거리는 듯 냉정한 태도에 지해는 소름이 돋았다. “뭐…가?” “모르는 척 하지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정확히 좀 얘기해 주라.” “사실 언제까지 이러나 두고보려고 했는데…… 좀 기분이 나빠.” “………….” “이유를 모르겠어.” “………….” “너…, 원래 이렇게 황당한 성격이냐?” “………….” “그렇게 가만있지 말고 얘기를 해주면 좋겠는데.” 지해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저 녀석을 피하고 싶고, 더 이상 가까워지지 말아야겠다는 것은 거의 본능이었지만, 후진 놈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만큼 컸다.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듯 하게, 모양 좋게 얼버무릴 말이 없었다. 정욱의 무표정하던 눈빛이 점점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게 니가 사람 꼬시는 방식이냐?” “――!” “그렇다면 잘못 짚었어.” “………….” “계.집.애.들이 가끔 이러더군. 아주 질색이야.” “………….” “네가 무슨 얄팍한 속셈으로―” “말이, 좀 심하다.” 지해는 정욱이 금세 재밌다는 듯한 비웃음을 띠는 걸 보고, 저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좀 입을 여는군. 계속해 봐.” “…담배 한 대만 줘.” 지해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던져주고, 정욱은 자신도 또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곱지 않은 감정들이 오고가고 있었지만, 조용히 담배를 피는 동안에는 평화로웠다. 가슴 한켠에 접어둔 무언가가 서로 고요히 맞닿는 것을 느끼며, 둘은 차분해졌다. “갑자기 이런 말 물어서 참 미안하다마는….” 지해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지금보다 더 미안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해.” “그래…….” “………….” “너 나 좋아하냐?” “뭐?” 정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마터면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지해는 얼굴이 싯뻘개졌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날 좋아하냐고 물었다.” 정욱이 어안이 벙벙한 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지해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봐, 임마!!” “그러는 너는?” 정욱은 빙글빙글 웃으며 지해의 얼굴을 아주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지해는 점점 화가 났다. 게다가 이렇게 쪽팔리는 개같은 경우라니. “치사하게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하기냐?” 웃음을 삭히며 헛기침을 하는 정욱을 지해는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진 채 마냥 노려보았다. “이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원.” 정말로 너무나 갑작스러운 질문.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라 여기에 대답을 해야 된다는 것 자체가 정욱으로서는 무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한다니? 그럴 리가……. 그럴 순 없지. “거 봐… 대답 못할 줄 알았어.” “………….” “그러니까 더 이상 접근하지 말아줘.” “왜 그래야 되지? 난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냐?” “정말로 이해가 안 돼서 그런다. 정말로.” “너는 우리가 한 게 보통 평범한 친구들끼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냐? 뭐, 넌 그런지 모르겠다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하―” “친구? 누가 너랑 나랑 친구라고 말하는 거지?” 지해의 눈이 모욕감으로 불타 올랐다. 자기도 모르는 새 지해는 정욱의 멱살을 잡고서 흔들고 있었다. “씹팔, 이 나쁜 새끼!” “이거 놓고 얘기해. 학교에서 싸움 따위 하고 싶지 않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정욱의 목소리에 지해는 스르르 손을 놓았다. “너 인제 나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죽을줄 알아. 날 장난감 취급하지 말란 말이다.” “누가 언제 널 장난감 취급했다는 거야? 널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대답 못 해줘서 미안하다만 널 장난감 취급한 적은 없다.” 말해놓고 보니 정말 그랬다. 갖고 놀려고 접근했던 것 같진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좋아한다고 말해야 된단 말인가?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편하게 같이 즐긴다고 생각할 순 없을까? 넌 꼭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그런 걸 하나? 그건 결코 아니잖아.” “난 그럴 마음 전혀 없다. 생각해 보니 그래. 내가 좋아하지도 않고, 날 좋아하지도 않는 놈한테 깔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 누가 널 깔겠다고 했어? 난 그런 말 한적 없는데.”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 그럼 니가 깔릴 생각이었냐? 게다가 넌 날 친구로도 생각 안 한다며!” 최대한 화내지 않고 냉정하게 말하려 하는 듯 했지만, 쉰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에서는 거의 쥐어짜는 깊은 감정이 배어나와서, 정욱은 더 이상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 “………….” “………….” “갑자기 황당하게 해서 미안하다. 화낼 일까진 아니었는데 화내서 미안하고. 어쨌든 내 생각은 충분히 전달됐을 것 같으니까… 난 그만 가겠어. 친구로서도 아니라면 너와는 더 이상…… 별 상관없이 지내고 싶다.” 지해는 황급히 내딛던 발을 옥상문 앞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하나만 묻자. 아까는 왜 나한테 피아노치게 했냐? 우리 반에도 피아노 치는 애들이 한둘이 아닐텐데…… 내가 애들 앞에서 망신당하길 바랬냐, 아니면 킬링타임 용으로 재주부리는 꼴이 보고 싶었던 거냐?” “그런 게 아니야! 둘 다 아닌 건 확실한데… 글쎄… 잘 모르겠다.” “그래, 알았어. 됐다. 계속 쓸데없는 거 물어서 미안하다.” 지해가 총총히 계단을 내려간 다음에도 정욱은 한참동안 그 옥상에 서 있었다. 너무 급작스러웠다. 경솔한 자식이라곤 생각 안 했는데, 저랑 나랑 말 튼 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걸 마구 묻고 그런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왜 아까 애들 앞에서 피아노치게 했을까? 놀리거나 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냥… 애들한테 들려주고……. 자랑… 그래, 자랑을 하고 싶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근사한 놈이라고. 저 속 뒤집어지게 슬픈 소리 좀 들어보라고. 물론 녀석 피아노 치는 거를 몇몇 계집애들이 침흘리며 쳐다보는 거 보고 열만 받았지만. 사실 그 바람에 괜히 얘기나 하자고 시비를 걸게 되긴 했다. 정욱은 담배를 다시 한 대 피워 물고 불을 붙였다. 좋아한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좋아하냐는 말에 예스라고 대답도 못해줘서 미안하다만…… 난 그냥 이렇게 놔줄 생각 없다.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너에 대해서 좀더 많이 알고 싶고, 어느 틈에 눈이 너를 쫓고 있고. 보면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고…. 아까도 무진장 참고 있었는데…… 혼자 울타리치고 고립되려 용쓰는 네 모습 보면 안스럽고…… 어쩌다 잠깐이라도 웃는 거 보면 나도 웃음이 나오고…… 괴로워하는 거 봤을 때는 어떻게든 돌봐주고 싶더라. 내 인생에 다른 인간한테 이 정도로 반응한 적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김지해, 너. 내가 그 이유를 알 때까지는 널 놓칠 생각이 없어. .................................. 혹시라도 위에 지해가 친 걸로 나오는 곡에 관심 있으시다면 Everything Happens To Me - Duke Jordan ←CLICK! .................................. BGM :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 - Brad Mehldau←CLICK! 가슴 한켠이 마비된 것처럼 멍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나 개운한 심정으로 지해는 교문을 나섰다. 이까짓 것쯤이야 하룻밤 푹 자고 나면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심장 놀음 따위가 아니다. 뜬구름 같은 감정의 유희 따위는 지금 처지에 안 어울리는 사치. 그래, 지금 당장 나한테 가장, 최고조로 절실한 건…… 알바구나.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정신차려라, 김지해. 이래서 있는 놈들이랑 어울리면 안 되는 거야. 네가 어떤 입장인지 금방 잊어버리잖아. 신문 배달은 싫다. 쥐꼬리만큼 벌자고 새벽 시간 희생하는 것도 이젠 벅차고, 고3 형 수발까지 해야 되는 이 판국에 시간도 여유로우면서 벌이도 괜찮은 일… 어디 없을까……. 형마저 이젠 전에 간혹 하던 알바도 못 하고 있는데. 학비야 이모가 대준다고는 하지만, 자질구레한 생활비랑 용돈 같은 것까지 손벌릴 순 없다. 엄마 입원비까지 외가 친척들 신세를 지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은 주변 사람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피아노도 바꾸고 싶다. 헐값에 사들인 낡고 후진 디지털 피아노가 있지만, 건반 수도 모자라고. 터치하는 느낌도 너무 틀리다. 제대로 된 진짜 피아노가 갖고 싶다. 하긴 주인집에서 시끄럽다고 싫어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고민에 넋놓고 있었다니. 제 정신이 아니야. 그것도 여자도 아닌 사내놈 때문에. 차라리 정말 잘 됐어. 그녀석이나 나나 좀 있으면 이런 일이 있었던 것도 기억 못할 거다. 이쯤에서 싹을 잘라냈으니 정말 잘한 일이야. 언젠가 반드시 평범한 직업과 가정을 갖고 꼭 남들처럼만 소박하고 무리없이 사는 게 김지해 인생의 궁극적 목표이자 숙원사업인데 말야. 어쩌다 그런 놈한테 정신 팔려서… 정말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그나저나 일거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 지 알 수 없다. 이번 달에 놀면 다음 달 생활이 빠듯한데. 하루라도 서둘러서, 서둘러서 일을……. “김.지.해.” 자기 생각에 푹 빠져서 걷느라고, 교문 근처에 버티고 서 있는 찰거머리 스토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었다! “………엉?! 여긴 왠일이야?! 학교는?” “우리 학교 오늘 개교기념일이야.” “개교기념일은 무슨?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데 너 혼자만 개교기념일이면 다냐? ” “맞아. 3년째 이 날을 개교기념일로 알고 나 혼자 쉬고 있어.” 그래도 좋다고 방실방실. 밟아도 밟아도 꿋꿋하게 일어서는 저 지칠줄 모르는 생명력. 기어코 집안에 먹칠하고야 말 불굴의 의지와 끈기. 이상한 일이었다. 지해는 지금 이 순간 주원을 만난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오늘은 여러모로 좀 이상한 날이다. “왜 왔냐?” “왜라니! 왜라니! 너 지금 ‘왜’라는 소리가 나오냐?!!!!”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그래. 이리 와.” 그러면 그렇지. 반갑다고 느꼈던 것 전부 취소다, 라고 생각하며 지해는 황급히 주원을 인적이 뜸한 골목 안으로 이끌었다. “연락은 죽어라고 안 되지,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은 과외 그만뒀지, 너 어떡할려고 그래?!” “어차피 전부터 그만두려고 했었어.” “왜? 나 때문이냐? 내가 그날 한 말 때문이야?” “어휴, 악 좀 쓰지마, 진짜.” “말도 끔찍이도 안 듣고 증말….” 버럭버럭 악쓰던 기세는 금방 사라지고 주원은 금세 풀이 팍 죽었다. 표정이 많이 어두웠다. “미안해.” 오늘 미안하다는 소리 정말 여러번 한다. 지해는 자기가 왜 미안하다는 소리를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미안했다. 그렇게 허구헌날 구박을 하는데도…. 저 인간은 아무래도 진심으로 김지해를 생각해 주는가 보다. “김지해, 오늘 시간 좀 내.” “나 바빠. 지금 집에 가서 밥해야 돼.” “그 잘난 형 때문에? 그 자식 진짜 너 여러가지로 부려먹는다. 같이 가.” “가긴 어딜 같이 간다고 그래!” “너 밥하는 거 구경 좀 하자. 할 얘기도 있어.” “나 그러구나서 또 어디 가봐야 돼.” “어딘데?! 거기도 같이 가.” “자네는 갈 데가 아니네, 이 사람아.“ 지해는 짐짓 너털웃음을 웃으며, 손을 들어 주원의 팔을 치려다가 대신 한쪽 어깨에 매달린 배낭을 툭툭 쳤다. 어쨌든 이 인간은 요주의 인물! 스킨쉽은 절대절명으로 금물이다. 주원은 필살 야리기로 맞섰다. “얼렁뚱땅 넘길 생각 마! 니가 가는 데를 내가 못 갈 데가 어딨어? 너 어딜 가볼려구 그러는―! 흠, 너 혹시…… 『Over The Rainbow』에 갈려구 그러지? 홍사장한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상황에 니가 갈 데가 뻔하지. 으휴, 애초에 내가 너를 거기 데려가는 게 아니었는데….” 지난 12월 말에 주원이 ‘편견에 찬(?)’ 지해를 ‘계몽’할 겸 『Over The Rainbow』에 데려갔었을 때, 마침 피아노 치는 사람이 그날 안 나와서 하루종일 CD를 틀고 있었다. 피아노가 놀고 있는 꼴를 못 보는 지해가 술김에 나서서 몇 곡을 쳤는데, 그걸 듣고 홍사장이 자기 바에서 스페어로 일해 보라고 제의를 해왔었다. 주원은 감시한답시고 지해가 일하는 날마다 하루도 빼지 않고 거기에서 죽을 때렸다. “한번 놀러오라고 전화왔었어.” “홍사장이 너한테 관심있는 거 너 모르냐?” “지랄 마! 그 아저씨 애인 따로 있잖아. 너 그거 중병이다.” “아무튼 같이 가.” 한숨만 푹푹 내쉬던 지해는 고개를 떨구고 발 끝에 채이는 돌부리를 툭툭 차며 말했다. “……집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와.” “7시에 차 갖구 학교 앞으로 올게~.” “그냥 와! 글구 학교 앞은 안 돼.” 지해의 절규는 아랑곳 않고 주원은 다시 방글거리며 잽싸게 사라졌다. 지해는 멍청하게 서서 이럴려는 게 아니었는데, 이건 아닌데, 하고 뇌까릴 따름이었다. 정욱은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노란 색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토요일에 받아 둔 것이었지만, 아직도 안의 내용물을 읽어보지 못했었다. 주말 내내 할아버지 내외(결코 ‘할머니’라고 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자기 아버지의 어머니도 아니었을 뿐더러 할머니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젊었다),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 중 몇몇 등과 함께 양평 별장에서 보내야 했다. 강성철 회장이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단체 중 하나인 ‘어쩌구저쩌구 연합회’의 주말 골프 모임이 있었다. 애꿎은 멀쩡한 산을 통째로 깎아 만든 할아버지의 개인 골프장에서 정욱은 뭇 상류사회 인사들의 박수갈채 속에 연속으로 멋진 스윙을 보여주어 할아버지를 기쁘게 했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세강고등학교 외에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국내 굴지의 광고기획사 ‘세강애드’를 맡고 있는 아버지는 3남 2녀 중 차남이면서도 몇 번의 중대 실책 끝에 무능력자로 찍혀 일찌감치 자손들 사이의 파워게임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아무리 세강애드가 국내 굴지의 광고기획사라 해도 그룹 내에서 그 지위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매출이나 파워나 어떤 면에서도 이 그룹의 3대 주요 종목인 건설, 자동차, 전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세강애드에서도 그저 보고나 듣고, 결재 도장만 찍는 명색만의 사장이고, 실력있는 중역들과 똘똘한 실무진들의 짐이 될 뿐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나서지 않고 아래에서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보탬이 되는 경영자였다. 그런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강회장이 가장 총애하는 손자, 정욱뿐. 정욱은 이 주말 모임에서도 아버지가 할아버지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무안을 당하고 온갖 비굴을 다 떠는 치욕스런 광경을 몇번이나 목격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봐오던 것이라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것이었지만, 결코 즐겁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욱은 자기 아버지를 보며, 저렇게 개밥의 도토리 취급을 받을 바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지 그럴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그 옛날에 미래를 내다보고 아버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공부를 계속하게 해서 경제학자의 길을 걷게 해 주었으면 모든 사람이 행복했을 것이다. 공부만 들고 파던 착실하고 심약한 둘째 아들이 경영도 너끈히 잘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은 용병술의 천재로 알려진 강성철 회장의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강회장이 원하는 길을 걷는 대신, 아버지는 결혼만큼은 자신의 의지를 최대한 관철시켰다. 정욱의 어머니는 의대 교수의 딸로, 역시 의사의 길을 걸어왔고, 10년전 세강그룹에서 한 종합병원을 인수하여 국내 최고수준의 병원으로 이루어내기까지 가장 큰 공로자로 세간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동안 어머니의 삶은 병원이 우선이고, 가족은 뒷전이 되었다. 서울대 1학년 때 교양과목을 같이 듣다가 만나 재벌 가문답지 않게 캠퍼스 커플로서 결혼에 골인한 걸로 유명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미 화목한 가정과는 완전히 담을 쌓을 만큼 둘 사이의 골은 깊게 패여 있었다. 무능력자로 불리며 암암리에 도태당해 날이 갈수록 황폐해져가는 남편이 자신과는 정반대로 승승장구하는, 유능한, 게다가 매우 바쁘며 그다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없는(연애할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단점이었다)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정욱은 서류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꽤나 자세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번에 걸친 경험으로 볼 때, 이 신상조사 리포트라는 것이 양만 많다고 쓸모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본인과 확인해 봤을 때 완전히 틀린 정보가 끼여들어가 있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 저녁엔 이 리포트를 읽을 것이다. 그중엔 분명히 뭔가 잘못된 정보도 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가. 자기한테 일어났던 일들을 나름대로 해석해 놓고서, 떠도는 소문보다도 정확성이 떨어지는 기억을 지니게 되는 경우도 많다. 어찌 됐든 지금은 이걸 읽을 것이다. 확인은 지해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하면 된다. BGM : Over The Rainbow - Modern Jazz Quartet ←CLICK! 책상 앞에 앉아서 의자에 기대어 잠깐 졸았나 보다. 정욱은 울리는 인터폰 소리에 잠이 깼다. “사장님 퇴근하셨어요.” “…아버지? 아, 아… 네.” 절대로 그 다음날이 되기 전에 귀가하는 법이 없는 아버지가 이렇게 일찍 퇴근하다니.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욱은 계단을 내려갔다. 열린 현관문 아래의 계단 밑에는 집안의 고용인들 중 대여섯 명이 나와서 서 있었고, 키만 껑충하고 깡마른 편인 40대 후반의 남자가 비탈진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차고에 차를 주차시킨 운전기사가 그 뒤를 조심스레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정욱은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한 뒤, 아버지가 팔에 들고 있던 양복 재킷을 받아들고는 뒤에 서 있던 연천댁에게 건네주었다. “집에 너 혼자 있냐?” “네.” “정연이는?” 정욱은 고개를 까딱하며 묻듯이 뒤에 있는 연천댁을 쳐다보았다. “오늘 좀 늦는다고…….” 연천댁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끝을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오.늘. 늦는다고? 걔가 언제 집에 일찍 오는 앤가요, 아버지? 아, 아버지는 걔보다 일찍 오신 적은 없으시니 잘 모르시겠군요…… “연천댁, 나 아직 저녁 전이야. 정욱이 너도 같이 먹자.” ……막내 딸내미 찾은 걸로 끝인가요? 이제 어머니에 대해선 아예 묻지도 않으시는 건가요……? “저는 먹었어요.” “그럼 나 식사할 동안 잠시 앞에 앉아 있어라.” 커다란 12인용 식탁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정욱은 조용히 식사를 계속하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남남보다도 못한 의례적인 몇 마디―학교 분위기는 요새 어떠냐. 나쁘지 않습니다. 너 공부는 잘 하고 있냐. 네―가 오고간 뒤 다시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국물 마시는 소리. 반찬 씹는 소리. 그리고 정원 한 구석에 매어둔 독일산 셰퍼드 두 마리가 컹컹 짖는 소리……. 아, 이런. 다른 집 개까지 같이 짖는구나. “너 낼 모레 유럽에 좀 가야겠다.” “네?” “회장님이(아버지는 자기 아버지를 회장님이라고 부른다) 유럽 몇 개국에 가시는데 이번에 너를 꼭 데려가고 싶으시단다.” “그거… 그저께 말씀하셨던 건가요?” “그래. 부총리랑 국회의원 몇 명이랑 같이 가시는 거 말이다.” “제가 거기 가서 뭘 하죠?” 정욱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렸다. “…회장님… 그쪽 경제 각료들이랑 재계 인사들 만나실 텐데… 노친네 혼자 가시기 적적하신가 보더라. 오늘 갑자기 전화하셨어. 학교는 상관말고. 내가 교장 선생님한테 전화 넣어둘 테니 갔다 와.”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2주일.” “………….” “다른 분들은 1주일만에 돌아올 거고, 회장님은 며칠 더 머무실 거다. 그쪽 사람들 하고 따로 만나야 될 일도 있고… 현지 공장들도 한번 죽 돌아보신다더라.” “………….” “갔다 와. 좋은 기회야.” “………….” “현지 공장 둘러보신다는 거… 너 보여주려고 가시는 거야. 송실장 말이, 원래 일정에 없었던 거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정욱이 생각을 정리한 듯 말을 꺼냈다. “저, 그럼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저 학교 근처로 따로 나가서 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학교가 멀어서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왜 그러냐?” “아침에 한남대교 많이 막혀요. 피곤해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 막히는 길로 출근하고, 할 거 다 한다. 그런 이유라면 안돼.” “어차피 저 이 학교 다니는 거 할아버지 고집 때문이니까, 저도 누나처럼 유학 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네가 나가서 살아도 문제없이 잘 하리라는 건 믿는다만… 휴우, 내가 안된다고 하면 어떡할 테냐?” “유럽 안 갑니다.” “………….” “할아버지도 제가 싫다고 하면 굳이 억지로 가자고 하시진 않을 거에요.” “――!” 굳게 입을 다물고, 한 치 흔들림도 없이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정욱의 얼굴을 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묘한 부러움과 찬탄과 약간의 분노가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이 스쳐갔다. “알았다. 너 좋을 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어디서…… 살 거냐?” “제가 알아보고 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곧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욱도 따라서 일어났다. 등을 돌리고 서재로 가던 아버지가 문득 잠깐 자리에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한숨인지 말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바람같은 말소리. 너무나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너는… 내 자식이지만… 너무 애 같지가 않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는 곧 다시 걸음을 옮겨 서재로 들어갔다. 뒷모습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정욱은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방으로 올라갔다. 아버지, 그거 아세요? 조건이고 뭐고 간에 그냥 무조건 안된다고 하셨더라도 됐을 거란 거요. 그랬으면 저는 따랐을 거란 거요. 지해와 주원은 바의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주스를 홀짝이고 있었다. 주원이 자기가 음주로 걸렸다가 무면허까지 들통나면 피박 쓴다며 지해도 술을 못 마시게 했던 것이다. 홍사장은 어딜 갔는지 한 시간 정도는 있어야 돌아온다고 했다. 전에 일할 때 알았던 웨이터 한 명이 오가며 지해에게 아는 척을 하고 가자, 주원은 열심히 그 뒷모습을 째려 보았다. “씹, 눈 좀 풀어. 너 그거 진짜 병이야.” “저 인간 언제부터 알았다고 말끝마다 형,형 하냐 너는?” “나보다 형이니까.” “그럼 나는?” “언제는 형이라고 부르지 말래매? 선배 소리도 듣기 싫댔잖냐. 왜? 다시 형이라고 불러주리?” “…… 암튼… 저 인간 기분 나빠.” 주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기에도 오싹한 푸른 오오라를 뿜어댔다. 지해는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네 적이지?”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세상 여자들이 다 내 연적인 건 확실해.” 주원은 저쪽 테이블에 앉아서 자기들끼리 열심히 떠들고 있는 여자들 세 명을 날카로운 눈으로 보며, 도대체 여자들이 게이바에 와서 어쩌겠다는 건지 원, 하고 궁시렁거렸다. “전에 보니까 꽤 오던데? 남자들이 안 건드릴 테니까 맘 편해서 오나 보지. 아, 그 왜 사장님 친구… 그 사진작가 아줌마도 여기 자주 오잖아.” “아줌마 아니라더라. 괜히 그 앞에서 아줌마라고 그러지 마라, 너…. 그리구 여기 게이만 오냐? 너같은 바이도 오잖아.” “헉~! 누가 바이야? 난 노.말.이.야~~!!!” 지해는 양손으로 테이블을 잡고 과격하게 흔들며 부르짖었다. 쥬스 엎질러져, 하며 주원이 지해의 손을 탁 때렸다. “나랑 엮였던 그 순간, 아니다. 그 이전부터 넌 바이였던 거야. 이제 완벽한 게이로 진화하는 일만 남았어.” “시끄러!” “너 가장 최근에 여자란 잔 게 언제야?” “――!” “거봐. 넌 이미 넘어왔어.” 지해가 최대한 빨리 여자친구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심각하게 다짐하는 동안 주원은 문으로 들어오는 스포츠 머리의 덩치 큰 남자를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야, 야, 김지해. 저 깍두기 아저씨 좀 봐라. 완전 조폭이다. 저 사람 오늘 짝 못 찾는다는 데 만원 건다.” “조폭? 아~! 내가 접때 사우나를 갔는데 거기 진짜 조폭이 있었거든. 등짝에는 용 문신하고, 별 희한한 걸 다 했는데 말이야. 아랫배에도 했더라.” “아랫배?” “배꼽보다 한참 아래. 거의 그거 근처에. 근데 뭐라고 했는지 알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내가 어떻게 알겠니?” “크크크. 한 일자 마음 심자 써서 일심. 그 야리꼬리한 부위에다가… 웃음 참느라고 죽는 줄―” “허이구, 좋은 구경해서 퍽도 신났겠다. 근데 거긴 또 언제 갔어?” “어, 그거 지난 주에……!” 혼자서 실실거리고 웃던 지해는 갑자기 그날 기억이 머리를 쾅 때리는 것처럼 찾아와 말을 잇지 못했다. 정욱과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좍 펼쳐졌다. 심장이 쇠스랑으로 후벼 파는 것처럼 쓰라렸다. “야, 야. 홍사장 왔다.” “…어?… 아,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 지해를 보고 무지 반가워하는 홍사장을 만나, 여전히 사람을 메꾸지 않고 CD로 시간을 때우던 이 가게에서 전처럼 일주일에 두번씩 피아노를 치기로 얘기하면서도, 주원의 차를 타고 한강 다리 위의 휘황찬란한 야경 속에 강을 건너면서도, 어두컴컴한 집의 문을 따고 들어가 불을 켜면서도, 한번 찾아온 영상은 지해의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저릿저릿한 가슴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BGM : Claire de Lune(Guitar) - Julian Bream←CLICK! 그 다음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서른이 넘었으면 슬슬 정신 차릴만도 하련만 이 국어 선생은 아직도 자기가 청춘인줄 아는지, 창문 한번 싹 열고 머리속까지 환기를 시키자는 둥, 이제 창밖에 완전한 봄이라는 둥, 마음이 싱숭생숭하지 않느냐는 둥 시덥잖은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애들이 저 인간 또 무슨 잡소리야, 하고 생각하는 중에 얘기는 서서히, 이러다가 금방 여름 오고, 가을 오고, 겨울 오면 순식간에 너희는 2학년이다, 2학년 돼서 후회하면 이미 늦는다, 2학년 되면 다들 비슷하게 정신차리기 때문에 느이 딴에는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성적 안 오른다, 고로 지금부터 죽어라 살아라 해야 된다, 이런 방향으로 교묘히 흘러가고 있었다. 사뭇 진지한 경고가 10여분 정도 지속됐다. 지겨워하는 애들도 있었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애들도 있었다. 시큰둥하게 앉아서 짜증을 부리는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한번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것 같았다.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역시 국어답게 말빨 하나는 끝내주는 선생님이었다. 하루 종일 그 분위기가 어느 정도 유지됐다. 면학 분위기라고까지 한다면 과장이겠지만, 마치 둥둥 떠다니는 먼지 속에 찬물을 쫙 끼얹은 다음 잠깐이나마 주위가 착 가라앉은 분위기… 그런 느낌. 하루가 조용히 흘러갔다. “누나, 이거 저기 나름대로 바쁘신 우리 형님 좀 전해주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고3 보충이 끝나기를 기다려, 지후의 교실에 도시락을 들이밀었다. 학생들이 교실을 우수수 빠져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수학 문제를 물어봤는지 열심히 설명하며 풀어주고 있는 지후. 지후의 자리에는 대여섯명이 몰려들어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지해를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문 앞에 앉은 애한테 맡기고 가라는 시늉을 한다. 준석과는 달리 지후는 문과라서 이 반에는 여학생들이 꽤 많았다. “어머, 김지후 동생 또 왔네.” “이 누님들 꺼도 좀 싸다줘 봐라, 야.” “기특한 것.” “착한 어린이 표창장감이야.” 그래, 갖고 놀다가 제 자리에만 갖다 놔라. 지해는 불쌍한 별당 아씨들 장단도 맞춰줄 겸 오른손으로 V자를 그리며 왼손은 절제된 동작으로 몇 번 휘저어 줬다. “학생~, 이리와 봐~. ‘참 잘했어요’ 도장…은 없고, 그 대신 뽀뽀해줄게.” “예쁜 누나, 1절만 하시죠.” 운동장에서는 저녁 어스름 속에 여학생 축구부원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무슨 축구냐고 일부 남학생들의 질타를 받고 있었지만, 연습하는 자세만은 아주 진지하고 씩씩해 보인다. 지해는 스탠드에 앉았다. 돌아가면서 슈팅 연습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도 한번 쳐다봤다.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둥근 달이 검푸른 저녁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좀더 높은 곳으로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해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습하던 여학생 중 한 명이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 자세히 보았더니 같은 반의 한선경이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예체능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층에 불이 켜져 있다.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박자를 두드리면서 ‘하나 둘 셋’을 계속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무용반이 연습중인가 보다. 현관문이 열려 있을 것이다. 음악실 불은 꺼져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음악실 문이 잠겨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뭐, 어차피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우와, 문이 열려 있다…… “기다렸어.” 헛! 지해는 너무 깜짝 놀라 도로 튀어나갈 뻔 했다.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다. 아…… 근데 저건…… “컴컴한 데 혼자 앉아서 뭐하는 거야?” 아까보다 조금 더 떠오른 달이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빛 속에 피아노 의자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저 긴 그림자는…… “아, 불키지 마.” 지해가 서둘러 스위치를 누르려 하자, 정욱이 말했다. “어두운 데서 무슨 청승이야?!” “밖을 봐봐. 보일 건 다 보여.” 정말 그랬다. 운동장 전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연습을 끝내고 도구를 챙기는 여학생 축구부원들도 다 보였고, 건물 전체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고3 전용의 별관도 보였다. 오늘따라 꽤나 맑은 저녁 하늘 멀리, 어슴푸레한 산의 능선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불빛들이 보였다. 그 산 기슭에 자리잡은 키 큰 아파트들도 질서정연하게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꽤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무용반 학생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조용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안에 불 키면 바깥이 안 보여.” 이제 지해의 눈도 어둠에 익숙해졌다. 이 침침한 음악실 안의 모든 것이 웬만큼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해는 나즈막한 정욱의 말에 무의식중에 순응하며, 천천히 발을 떼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말했잖냐. 기다렸다고. 계속 보고 있었어.”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그럼 그냥 갔겠지.” 이 말이 정녕 오늘 내내 자기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자가 할 소리인가? 하루 종일 정 떨어지도록 침착하고 여유있는 정욱의 태도에 지해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났었던 참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딘가 섭섭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 뭔가 좀 안심되는 것 같은 기분은…? 하지만… 좀 무섭기도 하다. 역시 호러는 호러다. “하루 종일 사람을 무시하더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냐?” 앗, 입다물 새도 없이 바보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정욱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무표정.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다. “니가 그래주길 원했으니까.” “그럼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 그것도 내가 원했다고 말할 참이냐?” “아니. 하지만, 그러지 말아달라고 말한 적도 없지.” 소름끼치도록 딱 부러지는 목소리. 지해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뭐… 대충…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너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슬슬 니가 무서워지려고 그런다.” “걱정 마. 니 말대로 너한테 손가락 하나 안 댈 테니까.” “………….” “편하게 생각해. 니가 여기 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기다렸더니 오더군. 그것뿐이야.” “………….” “………….” “좋아. 할 얘기가 있으면 어서 해 봐.”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부터 지해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정말 들키고 싶지 않다. “……딱히… 할 얘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야.” 정욱으로선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캐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가슴 속에 잔뜩 뭉친 채로 가닥이 잡히지 않는 많은 말들이 있었다. 언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머리까지 전달되지 않을 뿐이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듬어지지 않은, 무수한 말들이 마음 속에 온통 풀어헤쳐진 채 가득 차 있었다. 답답했다. 지해의 눈이 자신을 보게 하고, 녀석을 가까이 느끼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줄 알았는데. “그럼 도대체 뭐냐? 뭐하자는 플레이야?” “글쎄…….” 정욱의 목소리가 왠지 쓸쓸하게 들려, 지해는 자기 속에 팽팽하게 들어차 있던 바람이 쑤욱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속에 꼿꼿이 곧추세우고 버티던 뭔가가 일시에 뚝 꺾여버린다. 안 돼. 이렇게 긴장이 풀려선 안 돼. “아, 여기 앉아서 니가 오길 기다리는 거…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어.” “………….” “의외로 재밌었어. 자주 할 일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씩은 괜찮을 것 같다.” “…난 남 기다리게 하는 거 싫어해.” “왜?” “미안하니까…… 더군다나 나는 알지도 못 했는데…… 나중에 가서 갑자기 미안해야 된다니, 얼마나 좆같은 일이냐?” 시선을 내리깐 채로 띄엄띄엄 퉁명스럽게 말하는 지해를 보며, 정욱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마음 속에 따스한 것이 퍼져가는 느낌. 안아주고 싶다. “그래서 지금 기분 좆같냐?” “누,누가 지금 그렇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임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리는 지해의 모습을 보고 정욱은 정말 속이 시원하도록 웃었다. 너 지금 그 말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 알긴 알지? 아, 이 녀석은 정말……. “이리 좀 가까이 와봐.” “――!”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가까이 와봐.” 지해가 성큼 제법 가까이 왔다. 아무래도 자기 말을 믿나 보다.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는 그 눈을 보며, 만약에 녀석이 싫다고 하거나 한 치의 의심이라도 보였다면 용서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이 녀석의 매끄러운 피부 위로 또렷한 얼굴 윤곽을 타고 부드럽게 흘렀다. 살짝 치켜 올라가 꺾인 눈썹, 얇게 속쌍커풀진 긴 눈, 커다란 갈색 눈동자, 높게 쭉 뻗은 코, 좀 큰 듯한 입과 도톰한 입술. 손아귀를 가득 채우던 결고운 머리카락……. 이렇게 하나하나 다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은데, 이 녀석은 왜 안된다는 거지? 이렇게 내 손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전부 다 열려 있는데, 왜 납득 안 가는 이유를 대면서 기어코 거부하는 거지? “난 아직도 니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말?” 지해는 정욱의 목소리가 상당히 냉랭해진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정욱의 존재감에 깊게 취해 있었다. 송두리째 빨려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과 나른한 도취감이 어우러져 묘한 흥분을 자아냈다. 어느 틈에 거의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녀석이 말할 때 숨결이 얼굴 전체에 확 닿았다. 은은한 egoiste의 향기와 씁쓸한 담배 냄새가 코끝에 끼쳤다. 척추 끝에 짜릿한 스파크가 튀면서 지해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괜히 부산한 척 배낭을 뒤져 담배를 꺼내 서둘러 입에 물었다. “임.경.숙. 선생.” “――!” 지해가 깜짝 놀라 라이터를 키던 손을 그대로 탁 멈추었다. 돌처럼 굳은 정지동작 속에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남편이 검사더군.” “작년에 결혼하셨어.” “그 선생… 좋아했던 건가?” “좋은 분이셔.” “그 음악 선생과의 관계―” “나한테는 고마운 분이야.” “좋은 선생이 제자한테 미끼를 던져서 유혹하거나 하진 않지.” 지해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침착해야 돼. 침착해야 돼. 지금 당장 저녀석 아구창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 침착해야 된다. “……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냐?” “그냥 알게 됐다. 크게 소문날 일은 아니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진 않더군.”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비열하다.” “말 조심해!” “나쁜 새끼! 그래서 날 여태 여기서 기다린 거냐? 그따위 말 하려고?” “그런 게 아냐!” “역시 재주가 좋군 그래, 너! 니 말마따나 아는 놈 없다고 생각했거든. 역시 내 착각이었나? 온 사방에서 다 알고 있는데, 나만 아무도 모른다고 착각한 건가?” 머리 꼭대기까지 끓어오른 지해의 분노가 정욱에게도 피부로 느껴졌다. 마음 속에 얼음이 가득 차 오른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상대방이 흥분할수록 냉정해지라고 배워왔다. 흥분으로 허술해진 빈틈을 노려서 공략하라고 배워왔다. 이제는 마치 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기 내부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저 녀석과 마찬가지로 길길이 날뛰면서 화내고 싶다. “진정해. 옛날 일 가지고 너한테 어쩌겠다는 건 아니야.” “뭐, 그렇다면 다행이야. 꽤 오래 전 일이라 나도 뭐가 어떻게 됐던 건지 잘 기억 안 나나니까.” “기억이 잘 안 난다니 나도 기쁘다.” “무슨 개소리야? 알아듣게 우리 말로 해봐.” “난 지금 이 순간도 널 무지 안고 싶거든. 니 머릿속에 다른 사람 남아있는 건 별로 유쾌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농담처럼 이죽거리며 말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는 정욱의 눈빛이 너무나 또렷해서 지해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버렸다. 창밖의 달이 이제 제법 꽤 많이 올라 떠 있었다. 한 귀퉁이가 덜 여문 달을 바라보며, 조금만 꽉 찼으면… 조금만 더 채워졌으면 완벽한 보름달일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상황에 이 무슨 잡생각인가. “미친 녀석… 난 가겠어.” “너 아직 대답 안 했다.” “하~!” “………….” “그 선생님 좋아했냐고? 물론 좋아했지. 너무너무 고마운 분이니까. 그 선생님 아니었으면… 그때 나…… 어떻게 됐을지 잘 몰라……. 그래서 선생님 결혼하실 때도… 정말 기쁘더라.” 중1때 처음 전학간지 얼마 안 됐을 즈음 교무실로 찾아가서, 방과 후에 음악실 피아노 좀 써도 될까요, 하고 물었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 되는데 왜?’ 하고 대답하던 화장기 하나 없는 젊은 여선생. 그러더니 그 다음날 허락해 주었다. 주임 선생한테 허락을 받아야 했다고 했다. 한 달 이상을 들여다보지도 않다가 언젠가부터 띄엄띄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매일 오다시피 하며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는 선생님 집에서 배웠었다. 3학년 올라와서는 음악 선생님이 바뀌었다. 첫 중간고사 볼 때쯤인가 선생님은 선을 보았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음악실도, 선생님 집도 가지 않게 되었다. 신문 배달해서 모은 돈으로 싸구려 중고 디지털 피아노를 샀다. 2학기가 되어 등교해 보니, 방학 동안에 선생님은 결혼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두셨다고 했다. “그리고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생님이 유혹하고 그런 것 아니야. 어쩌다 한순간에 그렇게 돼버렸긴 했지만 나 사실 많이 후회해.” “후회라니, 왜지?” “가끔씩 만나뵙고 싶은데, 그런 일 있었기 때문에 껄끄러워. 그냥 사제지간이었으면 아무 부담도 없을텐데 그럴 수가 없단 말이다.” “………….”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는 짓 하고……. 결국 주위의 좋은 사람만 잃어버려. 계속 실수 투성이야. 그런 실수하지 말아야 되는데, 또 하고 있고.”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다가오는 손길이 있으면 결사적으로 잡고 의지했었다. 떠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매달리다가 결국 잃어버린다. 그러고는 잃어버렸다고 아쉽다고 징징거리고 있다. 이렇게 드럽고 치사하고 이기적인 놈하고 넌 뭘 하겠다는 거냐. 니 녀석 하고도 엮였다가 잃어버리면 정말 힘들 것 같단 말이다……. 지해의 눈에 조금씩 습기가 차 올랐다. 정욱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아, 지금도 진행중인 관계가 하나 있다. 그것도 알고 있냐, 넌?” 지해가 스스로 조롱하는 것처럼 금세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정욱은 뻗던 손을 거두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나한테 이만 관심 끊어라.” 지해는 스스로 이기적인 놈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휑하니 뛰쳐 나가 버렸다. 정욱은 그대로 달빛 속에 앉아,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지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맨날 내 손아귀에서 미꾸라지처럼 쑥 빠져나가고, 난 네 뒷모습만 보는구나. 내가 여기 왜 이러고 있지? 아, 2주일 동안 못 본답시고 얼굴 보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나 잘 갔다올게. 그 동안 잘 지내라. [장편] Exit Music 1부 (中) #5. WISH YOU WERE HERE How I wish, how I wish you were here. 네가 여기에 있길 내가 얼마나 바라는지 We're just two lost souls 우리는 그저 두 길잃은 영혼일 뿐이야 Swimming in a fish bowl, 수조 안에서 헤엄치며 Year after year, 세월이 흘러도 Running over the same old ground. 똑같은 자리를 맴돌아 What have we found? 우리가 뭘 발견했을까 The same old fears. 늘 똑같은 두려움뿐 Wish you were here.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Wish You Were Here - Pink Floyd) ←CLICK! 눈엣가시 또는 앓던 이 또는 치사량의 숙변 같던 황태자의 존재가 시야에서 쑥 빠져준 지 어언 닷새. 솔직히 처음 하루는 정말 뭐 빠진 것처럼 속시원히 보냈다. 그러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자…… 대체 그야말로 정말 뭔가가 빠진 것 같은 이 허전한 기분은 뭐냐……. 그리하여, 그 닷새 동안 지해에게 서서히 늘은 것이 있다면… 일단, 담배. “너, 니 생명의 은인이자 이 집안의 장남이요 세강고의 자랑인 이 몸을 간접흡연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으로 하루라도 속히 보낼 작정이냐?” “보내면 갈 거냐?” 어머니의 정신 상태가 최하향곡선을 그릴 때, 그러니까 모든 관계자가 두손두발 다 들고 병원에 모든 것을 일임하기 직전, 불쌍한 두 아들에게 너희 보내고 나도 가련다, 하며 어머니가 달려든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평소에 편애하던 장남 지후를 제치고 지해에게 먼저 두 손을 내밀었었다. 부들부들 떠는 동생의 앞을 가로막으며, 울부짖던 지후. 그 필사의 몸부림. 역시 평소에 편애하던 장남이 목숨을 걸자, 최고조로 맛이 간 상태에서도 어머니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었다. 생애에 단 한번 형 노릇을 톡톡히 한 그 날 이후, 지후는 지해의 생명의 은인으로 등극했고 지해는 지후의 시다바리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닷새동안 늘어난, 아니 줄어든 것이 있다면… 식사량. “언제는 지가 한 밥이 천하일미라고 허풍을 떨더니, 이제야 니가 현실을 인정하는구나. 좋은 현상이다. 게다가 오늘은 특히나 그 현실이 상당히 구리다. 국은 매우 짜고, 밥은 설익기까지 하였으며, 기타 모든 반찬에서는 무성의의 흔적이 난무하여라.” “아, 시꺼! 밥 굶어.” “내 니 조촐한 성의를 생각하여 오직 시장을 반찬 삼아 먹어주기로 마음 굳혔노라.” “셋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옛말 무시하지 마라.(뿌드득)” “그런 말이 있었더냐? 셋이 먹다 셋이 다 식중독 걸렸다는 말은 내 들어봤다만. 만든 넘이 조리 과정에서 젤루 많이 먹어갖구 사경을 헤맨다더라.” “내가 젤루 쪼끔 먹었어!!!!” 마지막으로, 늘은 것은… 달력을 바라보는 횟수. “아그야, 해지면 섬뜩하고 해뜨면 금즉한 이 고3 형님의 예민한 신경을 사시미 뜰 참이냐? 달력 안 쳐다보고 시계 안 읽어봐도 시간은 흐른단다. 수능 날짜 되기도 전에 실려가는 꼴 보려는 게냐?” “아~, 뎡말 뎡말 시끄러! 준석이 형, 쟤 좀 어떻게 해봐~!” “하하하, 재밌는데 뭘. 귀엽잖아.” “이 인간들 진짜 날이 갈수록 짝 맞춰서 상태 불량해지네.” “어이, 동상~, 날이 간다거나, 시간이 흐른다거나, 그런 언사는 좀 피해주련?” “씹, 고만해 증말~!” “어, 지해야, 어디 가니?”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간다, 왜?” “혹시 담배는 연막이고 실지로는 달거리 용품을 사러가는 것이 아니드뇨?” “김지후, 죽고 잡냐?” “지후야. 너 이제 니 도시락 느이 반에서 젤루 못생긴 애한테 시식 시켜보고 먹어야겠다.” “응, 그렇잖아도 이미 그리하고 있어.” 쾅. 흥청망청하는 일요일 초저녁. 날로 주택가를 침범하는 각종 유흥업소들, 그 중심에 위치한 편의점. 그 앞에 허름한 차림으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는 모습은 사실 누가 보기에도 그리 좋지는 않다. 그것이 설령 방년 17세, 대한민국 표준을 훨씬 웃도는 국가대표급 꽃미남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세상에 다시없이 멋지구리한 그림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 한들, 갈 데가 없다. 준비도 대책도 없이 성질대로 튀어나왔기 때문에 막막했다. 지금이 평일 대낮이라면 염가 할인에 시간 무제한인 노래방이라도 가련만. 때는 주말, 저녁밥 시간. 방황하는 청춘들을 한가득 끌어안은 이 거리의 그야말로 피크 타임. 지해는 발화의 위험이 없는 모래밭, 즉 놀이터에서 더 많은 담배를 더욱 자유로이 태우기 위해 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가끔 전혀 쓸모없지는 않은 찰거머리 이주원에게라도 전화를 걸까 싶어 무릎까지 오는 헐렁한 반바지의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집에 폰을 두고 나왔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반바지 속으로 시린 바람이 스며든다. 춥고 배고프고 서럽다. 돈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이 친구 없는 서러움이라고 누가 얘기하였던가. 친구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는다고 스스로 못박았다 해도, 친구는 시시때때로 귀찮을 적도 많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해도, 최소한 자신의 존재를 신경써주는 또 다른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것이다. 터덜터덜… 모래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래로 떡 치고 있을 꼬마동이들을 기대했던 놀이터…… 얼굴없는 연인들만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외롭다. 서늘한 바람처럼 외롭다. 에이, 덴댱할. 바람 때문에 모래가 눈에 들어갔다. 엉겁결에 눈을 감으니 왕싸가지 황태자 전하의 잘난 면상이 더욱 선명히 보인다. 그 잘난 면상을 가로지르며 ‘DANGER’라고 커다랗게 쓴 딱지를 딱 붙인다. 뭔가 부족하다. 그 대각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접근 주의’라고 써서 붙이고, ‘개조심’, ‘좆선일보 사절’, 그리고 ‘1818’ 등등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을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퍽퍽퍽 붙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WANTED’라고 새겨진 핏빛 낙인을 그 수많은 딱지 위에 치지직 소리가 나게 눌러 찍었다.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눈도 못 뜨게 외로운데… 존심까지 상한다. 정말 제기랄이다. 그 시간, 정욱은 런던 근교의 바스Bath라는 고색창연한 소도시. 그 외곽에 위치한 어느 빅토리아식 대저택의 넓디 넓은 정원 위를 마치 ‘오리지널 유러피안 프린스’처럼 말 달리는 중이었다. 이 곳은 할아버지의 유럽 순방 일행중 한 명인 박환기 의원의 별장. 박 의원은 호남 지방 최고의 갑부집 아들로,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일대 어디를 가더라도 그집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대대손손 전통있는 거부巨富일 뿐 아니라, 그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뒤이어 그 집안이 배출한 세번째 국회의원이기도. 정욱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역시 그만큼이나 우아한 자세로 말 달리는 레이디는 그 박 의원의 세째딸 명주. 소싯적에 캠브리지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박 의원의 강요로 역시 런던 근교에 있는 명문 기숙 여학교에 유학중. 노친네들은 창 밖으로 두 아이들의 말타는 모습을 간간이 흐뭇하게 내다보며, 응접실에서 글라스 한 잔씩을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명주가 저택 쪽을 흘깃 한번 바라본 후, 서서히 정욱에게 다가왔다. “야, 노땅들 눈요기는 실컷 시켜줬으니까 이제 사라져주자.” 정욱은 아까 어른들 앞에서 한껏 조신한 척 하던 명주의 돌변한 태도에 약간 놀랐으나, 고개를 끄덕이고 그 뒤를 따랐다. 둘은 깔끔히 다듬어진 넓디 넓은 정원을 지나, 가까운 숲길에 말을 세우고, 나무에 고삐를 묶었다. 명주는 정욱에게 담배 한 대를 건네고는, 자기도 주저앉아 담배를 물고 불을 붙힌 뒤 말을 건넸다. “언제 출발해?” “내일 아침.” “어디로?”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은행 쪽 사람들 만나시겠지. 유럽 은행들 본점이 거의 프랑크푸르트에 있어. 부총리는 차관 문제 의논하러 오신 거니까.” “너도 미팅에 들어가니?” “거의 안 들어가. 파티나 디너 같은 데만 가서 앉아 있지.” “재밌어?” “재미? 뭐, 가끔은. 그나마 영국 애들은 유머 감각이 있어서 심심하진 않더군.” “유머 감각은 개뿔~. 그게 다 지 잘난 척이지.” 명주는 영국 애들이라면 이가 갈린다는 듯이 조그만 얼굴을 찌푸렸고, 정욱은 앞만 똑바로 보며 입끝을 살짝 올렸다. “이 집 멋있다.” “멋있긴. 이 집이 얼마나 낡았는줄 아니? 완전 속아서 산 거야. 옛날 집주인이 무늬만 귀족이거든. 유지보수비 감당 못하니까 옳다구나 하고―” “불만이 엄청 많군.” “저 안에 있는 그림들도 가짜 엄청 많아.” “어떻게 알아?” “엄마가 우겨서 감정을 의뢰했었는데… 가짜가 많이 나왔어.” 정욱은 훗, 하고 웃고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 여기 하늘은 정말 맑구나. 열흘만에 나타난 햇빛이라더니. 주먹만한 들꽃들도 너무나 아름답다. “별장을 사려면 남프랑스라든가 하와이 같은 데 샀어야지, 이게 뭐냐. 툭하면 노땅들 끌고와서 금쪽같은 내 주말만 뺏고. 안 그래도 여자애들만 바글바글한 시골 학교에 처박혀서 따분해 죽겠는데.” 명주의 푸념이 길어지자, 정욱은 눈치채지 않게 재빨리 시계를 보았다. 생각보다 꽉 막힌 애는 아니라서 불쾌하진 않지만, 이런 식의 넋두리는 질색이다. 몇 마디만 대꾸해 주고 들어가자고 해야 할까? 물론 노인네들 얼굴 보는 것보다야 이러고 있는 게 훨씬 낫긴 하지만…. “아~ 한국 가고 싶다. 요새 서울은 어때?” “여기 온지 몇년 됐지?” “4년.” “크게 달라진 건 없을 거야.” “흠……, 너 애인 있니?” “애인?” “나, 5월말에 여름방학 하면 서울 갈 건데, 나랑 사귀자.” 정욱은 명주를 잠깐 바라보았다― 이런, 어깨에 닿을락말락한 연갈색 단발 머리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근데 이 애 눈동자는 좀 까만 편이다. “너, 머리 염색한 거냐?” 명주가 어안이 벙벙해서 정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피식 웃는다. “사귀는 애 있구나?” “사귄다고는 할 수 없어.” “그럼, 그냥 좋아하는 단계?” “글쎄…….” “어떤 앤데? 재밌겠다. 얘기 좀 해주라.” 정욱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채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던 그의 얼굴 전체에 조용한 미소가 번져간다. 한동안 그렇게 아무 말이 없다. “너, 안에 들어가서 노친네들 썰렁한 대화 상대해줄래? 아니면, 니 사랑스런 애인 얘기 해줄래? 니가 좋은 쪽으로 선택해.” “협박하는 자세가 꽤 진지하구나.” “한국애라고는 나밖에 없는 기숙학교에서 기펴고 살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야.” 왠지 이 애가 싫지는 않다. 괜찮은 애라는 생각이 든다― 뭐, 따로 할 얘기도 없으니까. “글쎄……, 일단… 재밌어. 같이 있으면 시간이 금방 가.” “기본 요건이지. 비주얼은?” “최상급이야.” 명주는, 그거 좀 뜸들이고 대답하면 어디 덧나나, 싶어서 속이 좀 꼬였지만 이왕 말문이 터진 정욱이 입을 닫을까봐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뭐에 제일 끌리는데?” “제일 끌리는 점이라…… 흐음…… 생각 안 해봤는데…….” “………….” “……남 같지가 않아.” “남 같지가 않다?” “하는 행동이나 말 같은 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기대? 니가 예측한 대로 반응한단 말이야? 그럼 재미없잖아.” “아니……, 뭐랄까……. 그거랑은 좀 달라. 반응하는 거 하나하나가… 굉장히 신선하고, 나를 자극해.” “그런데, 남 같지 않다?” “그러니까…… 으음……” 정욱은 딱 맞는 표현이 떠오를 때까지 뜸을 들였다. 왜 이렇게 굳이 열심히 생각할까. 정답을 찾아내고 말아야 할 의무 따위 전혀 없는데. 스스로도 의아하다. “…그러니까……, 내가 만일 저 입장이라면 왠지 꼭 저럴 것 같은….” “호흡이 잘 맞는다는 얘긴가?”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실망을 안 시킨다는 얘기?” “음, 그런 면이 좀 있어.” “아하~~!!!” 명주가 갑자기 뭔가 알았다는 듯이 큰 탄성을 질렀다. 정욱은 호기심에 가득 차 명주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역시 여자라서 뭔가를 알고 있는가 보다. 해답이 나올 것 같은 기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너랑 레벨이 맞는다는 뜻이구나.” “그걸 그렇게 해석해야 되나?” “걔보다 더 맘에 드는 사람 본 적 있어?” “글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어.” “뭐야~! 홀딱 빠졌잖아~!! 아, 짜증나.” 명주가 소리를 빽 지르자, 정욱은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나지막하게 웃었다. “어떻게 결론이 그쪽으로 가냐? 근데, 레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에너지라고 해야 하나, 주파수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게 잘 맞는다는…….” “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정말이지, 이거 원 물리 시간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다. “으휴, 여자들은 생각 안 해봐도 그냥 본능으로 아는 건데, 남자들은 이렇게 일일이 설명을 해줘야 하니……. 야~!! 너, ‘본능’이라고 괜히 수상한 생각하지 마~!” “하하….” “어머, 얘가 얼굴을 다 붉히네. 너 그런 것도 할줄 아는구나?” 명주는 갑자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강성철 회장 손자 강정욱이 이런 애였나? 듣던 바와는 너무 틀리잖아. 이 녀석을 이렇게 흐물흐물하게 만든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괜히 일부러 투덜대는 척 하곤 있었지만, 그 강정욱을 만난다고 해서 엊그제부터 계속 두근거렸던 자신이 너무 우스워졌다. 누군지 모르지만, 좋아하는 상대에 대해 말하면서 서서히 마음이 열리며, 인간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정욱을 보자, 아주 많이, 많이 부럽다. 그 상대도 부럽고, 그런 상대를 가진 정욱도 부럽다. “너 그 사람 참 많이 좋아하나 보다….” “――!” “아까랑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표정도 부드러워지고…….” “……그러냐?” 좀 계면쩍은 듯 부끄러운 듯 웃을락말락 미묘한 표정을 짓는 정욱이 굉장히 귀엽게 보여 명주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가슴 한 구석 어딘가 좀 슬프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이제야 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면 나는… 사람도 아니었다는 말이로군.” “아니었어. 인간 아니었어, 너. 휴우…… 디게, 디게, 디게, 우라지게 부럽다. 으아악~ 부러워라!!” 정욱은 발광을 하며 날뛰는 명주를 잠시 바라보고, 그 발작이 끝나기를 조금 기다렸다. 그리고는, 그만 들어가자,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명주를 일으켜주었다. 아까 말을 타고 달려온 길을, 말고삐를 쥐고 둘이 나란히 걸어서 돌아갔다. 하늘에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노랗고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옅은 바람에 나뭇잎들이 잔잔하게 움직인다. 들풀이 이룬 초록색 물결 속에 이리저리 숨어 있는 화려한 들꽃들. 얼굴을 간질이는 조용한 미풍. 풋풋한 풀내음. 그리움을 담은 저녁 향기……. 일단 한번 그 녀석에 대한 생각을 끄집어내고 나니 떠나지 않는다. 마음이 벅찰 정도로… 그 얼굴이 점점 가득차서…… 숨이 막힐 정도로 행복하고…… 보고 싶다. 월요일이 왔다. 조회가 끝나고 지해가 교실로 돌아와보니 애들이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토요일날 종례 시간에 담임이 월요일 아침에 한 분단씩 오른쪽으로 이동하라고 했단다. 그땐 딴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전혀 몰랐었다. 골고루 돌아가면서 광합성하라는 의미인가? 저 창가 자리가 정말 명당 자리였는데……. 잃고 나니 정말 아깝다. 그 와중에 몇몇 애들이 서로서로 짝을 바꾸고 있었다. 지해의 짝꿍도 다른 애와 자리를 바꾸겠노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서 잘 가라고 했다. 그리고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어 누구랑 앉을 건데, 하고 물어보았다.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이 짝꿍과 나눴던 대화의 수는 손을 꼽을만 했었다. 정말로 지금까지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다. 자신도 교실에서는 워낙 말이 없지만, 이 녀석은 진짜로 조용하고 소심한 녀석이었다. 언제 어떻게 자리까지 바꿔서 같이 앉고 싶은 친구를 사귀었을까? 저 자리로 옮긴다고 가리키는 곳에는 같이 앉을 애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지해는 오전 시간을 혼자 앉아서 보냈다. 호젓하고 좋긴 좋았지만… 조금 쓸쓸했다. 40명 남짓한 이 반에서 하나의 섬―그것도 마라도나 독도―임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이름없는 외딴 섬,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무인도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다. “나 여기 앉아도 되지?” 점심시간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한선경이 자기 옆자리로 이사를 와 있었다. 언젠가 지해가 예쁘다고 말해줬던 보조개를 쏙쏙 집어넣으며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니 짝은 어따 버리고?” “강정욱 짝이랑 같이 앉으라고 했어.” “……자리는 바뀌고, 짝도 달아나고. 와보면 놀라겠구만.” 지해는 1분단으로 옮겨진 정욱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교실 끝과 끝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순식간에 상당히 가까워져 버렸다. 8일 남았나. 다음주 목요일날 등교하는구나, 너…. “어차피 그 옆에 앉기 좀 불편했던 모양이던데 뭐… 글구 걔네 둘 사귀는 것 같더라.” “…?!!….” “아~~ 하하하… 내 짝이랑 강정욱 짝이랑.” 지해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었다. 순간 아차 싶어서 선경을 보았다. 아무 생각 없다는 듯이 깔깔 웃어줘서 안심하긴 했지만, 진짜로 웃겨서 웃는 소리 같지가 않다는 느낌…. “너 잠깐 착각했지? 하긴 내가 들어도 오해할 만하네.” “아, 그래…….” “강정욱 걔가 누굴 사귀고 그럴 애니? 상상도 안 된다, 얘.” “…그렇지…….” “그러고 보니 너 생각이 불순해.” “응?” “걔 짝… 남자잖아~”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저런 것이 지극히 보편적인 일반인의 사고방식인 거다. 지해가 무의식중에 선경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동안, 선경은 웃던 얼굴에 웃음을 거두고 지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조금 옴팡하게 들어가 있는 보조개만 웃음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애들이 제법 교실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여자애들 몇몇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선경에게 다가와 깔깔거리며 귓속말을 하고 두들겨 패고(?) 난리가 났다. 선경이 얼른 애들을 수습해서 교실 뒷편으로 몰고 갔다. 웬 소란인지 싶다. 대충 자유롭게 남녀가 짝이 돼서 앉은 애들도 많긴 하지만, 지가 먼저 와서 앉겠다고 그러고…. 선경은 의외로 대담한 애인가 보다. 뭐 어쨌든 반 애들한테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진 않으니까 좋다. 버림…받는다라……. 전에는 그런 생각 하지도 않았다. 피아노만 칠 수 있으면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괜찮았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걸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지해가 자기를 버림받지 않게 해준 선경에 대한 고마움과, 쉬는 시간마다 선경의 자리로 모여들어 수다를 떠는 여자애들에 대한 짜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와중에 그렇게 한없이 나른한 월요일 오후가 지나갔다. 그 무렵 정욱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너른 공장 부지 입구의 게이트가 열리고, 앞에 잠깐 서 있던 검은 리무진이 사람좋게 생긴 배불뚝이 수위의 한국식 인사를 받으며 유유히 빠져나갔다. 맥주께나 많이 마셨을 것처럼 보이는 수위는 이 차에도 다시 한번 고개숙여 어설픈 한국식 인사를 날린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다른 유럽 사람들 하고는 느낌이 많이 틀리네요.” 정욱이 옆에 앉은 민 부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앞의 차에는 강회장과 그의 수행비서인 송 비서실장이 타고 있고, 이 차에는 한국에서 어제 저녁에 날아온 세강전자의 민흥기 부사장이 앉아 있다. “다혈질이고, 말도 많고, 술도 좋아하고, 욱하는 성깔도 있어. 한국 사람들 하고 정말 많이 비슷하지.” “일하는 건 어떻습니까?” “자기 주장할 거 다 하고, 피곤한 면도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랑 성격이 맞으니까 다루기 편한 것도 있다더군.” “그럼 아까 가장 효율적이라고 하시던 공장장님 말씀은…….” “중국이나 동남아 쪽과는 댈 게 아니지만 스페인과 덴마크에 있는 공장에 비하면 월등하지. 유럽 본토보다 세금도 낮은 편이고, 임금도 비교적 저렴해. 그쪽 공장들은 사실 아직까진 실익을 발생시키는 건 아니고.” “물류에 드는 비용이나 시간을 절약하는 것만도 엄청난 이득일 텐데요.” “그렇지. 그리고 관세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유럽 기술자들 수준이 높기 때문에 우리가 배우는 것도 있지. 하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 할 장점은 별로 없다는 게 문제야.” “그래도 유럽 진출은 꼭 필요한 것 아닌가요. 일본 제품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면.” “그렇긴 하지만 유럽은 정말 까다로운 시장이라 만만치 않아요.” 아들뻘 되는 어린 녀석을 함부로 쉽게 대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민 부사장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역시 아버지 말대로 애가 애같지 않아서일까. 그게 나쁘다고는 아직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정욱은 분위기도 바꿀겸 잠시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굳이 그를 지목해 불러온 목적이 일 이야기만 듣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씀 완전히 낮추십시오. 저 이제 겨우 고1입니다.” “하하…, 고1이라니. 영 믿기지가 않아서…….” “말하는 거 들으면 영감 같다고들 하더군요.” “학교는 어디… 세강…?” “네.” “그렇겠군…… 우리 아들놈도 거기 다녀. 걔는 3학년인데도, 정욱군에 비하면 어린애야.” “고3이요…. 그 선배님 이름은…?” “민준석이라고…. 말해도 잘 모를걸세만.” “아, 민준석 선배, 알아요. 저 검도부거든요.” “그래. 걔가 작년까지는 열심히 했었지. 올해부터는 공부하느라고 내가 못하게 했어.” 전자공학박사 출신으로 오랫동안 회사 산하 연구소의 책임을 맡고 있다가 경영진에 합류하게 됐던 민 부사장은 사흘 전에 갑자기 강회장의 비서로부터 유럽 일대의 세강전자 현지 공장 안내를 하라고 급히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짐도 제대로 챙길 여유 없이 부랴부랴 날아오면서 솔직히 썩 달갑지는 않았다. 현지 공장 안내야 각 지사의 짱들이 더 잘 할테고, 자기 선까지 올라와야 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여기 와서 정욱을 만난 뒤로, 전체적인 시각에서 생산 실적이나 비용 문제, 회사에 미치는 실질적 이익 등에 대해 이것저것 자세히 물으며 회사의 비전까지 관심 보이는 이 당찬 고삐리에게 혀를 내두르면서도, 말귀를 잘 알아먹는 사람에게 자기 전문분야를 설명해줄 때 누구나 일반적으로 느끼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강회장 또한 정욱의 또다른 의도는 모르는 채, 정욱이 저 자식이 누구한테 뭘 물어야 전체 그림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지 이미 꿰뚫고 있다며 아주 흡족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정욱도 지금 당장의 이 주제를 놓고서는 도저히 무슨 말을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물어봐야 할지, 대체 이 아저씨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싶었던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스스로 기분나쁠 만큼 긴장이 되었다. “…준석 선배 얘기는 많이 들었죠. 근데 사촌들도 저희 학교에 다닌다고…….” “그래, 맞아. 조카들도 거기 다니지. 준석이를 알면, 지후도 알겠군.” “전국수석 하는 수재라고 들었습니다.” “대단한 녀석이야. 어려서부터 어찌나 영리하고 똑부러지는지……. 어휴, 고 녀석. 와이프 친구들이 정작 우리 아들놈보다 그 녀석을 더 좋아한다니까. 아주 지후라면 거의 까무러치지. 걔 동생은 그냥 순해 빠져서 제 형한테 치어갖구……. 아, 참! 지해가 1학년이구나. 김지해라고 혹시 아나?” “김지해…….” 정욱은 일부러 시침 뚝 떼며 뜸을 들였다. 괜히 모르는 척. 아무 상관없는 척. 태연한 척.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갑자기 가슴이 떨리는데 어떤 동요도 느끼지 못하는 척.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노릇이다. 나 정말 왜 이러지? “들어본 것 같습니다. 저희 반일 거에요.” “그렇군. 이런 우연도 다 있군.” 민 부사장은 갑자기 뭔가를 생각하는지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겨우 여기까지 대화를 끌고 왔는데…… 정욱은 좀 답답해졌다. “……지해가…, 학교 생활은 어떤가? 잘… 하지?” “네. 굉장히 조용한 편인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래……. 그 녀석은 너무 착하기만 해서…… 걱정이 좀 돼.” 정욱이 안면 몰수하고 모범답안을 내놓자, 민 부사장의 얼굴은 진정한 연민과 안타까움에 젖어든다. 그래요, 아저씨……. 저도 걱정이 좀 된답니다. 그 녀석이 너무 착하다 못해 죽어라고 말을 안 들어서 무지 걱정이 돼요. 또다시 침묵. 짧은 한숨.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자꾸 이야기를 끊는다. 정욱은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얼른 닭살 멘트를 날렸다. 우웩. “부사장님은 조카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시군요.” “우리 준석이가 걔네 둘 하고는 친형제나 다름없이 자라와서…… 나도 그 녀석 둘은 다른 조카들보다 더 정이 많이 가. 하하, 이런 집안 얘기 지루하지 않나?” “아닙니다. 재밌습니다.” “………….” 재밌다는데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아저씨? “지해랑 같은 반이라니까 얘긴데…….” 답답해 죽겠어. 빨리 말 좀 해요!!!! “………….” “네,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목소리가 조금 조급하게 나왔던 것 같다. 이제서야 정욱을 잠깐 지긋이 바라본다. 뭔가 석연찮은 낌새라도 챈 건가. 그러면 또 어떠랴 싶기도 하지만……. 민 부사장이 뜸을 들이며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차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 밖을 내다보니 강회장의 차도 벌써 도착해서 강회장이 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강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민 부사장은 정욱에게 별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같은 층에 묵느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복도를 같이 걷던 민 부사장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정욱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정욱 군이 워낙 어른스럽고…. 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듯 싶어서…. 내가 오늘 사적인 얘기를 많이 했군.” “아니, 괜찮습니다. 재밌었습니다.” 다시 뭔가 탐색하는 듯한 눈빛. 지긋이 관찰하는 시선. 그리고 입가에 스윽 기어 올라가는 미소는 또 뭐지? “그럼, 정욱 군. 우리 지해 좀 잘 부탁해요.” 비로소 이 아저씨로부터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한 마디였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뜻하는 바는 달랐겠지만 뭐 어떠랴. 그 말이 그 말인데. 갑작스레 차오르는 만족감. 드디어 무너지는 포커페이스. “네. 걱정마십시오!” 동공을 확대하며 바라보는 아저씨의 저 의아한 표정.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고마운 듯 신기한 듯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는 저 찜찜한 동작. 약간 거북하긴 하지만, 기분은 좋다. 인간 강정욱, 맨날 미꾸라지처럼 도망만 다니는 고 녀석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망가지는구나. 그래, 뭐 좋아. 일단 서울 가서 보자구. 벌써 4월 첫째 화요일이었지만, 정욱이 서울로 귀환하려면 아직도 며칠 더 남아있었다. 이 날은 지해가 『Over The Rainbow』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찰거머리 파수꾼 이주원이 따라붙지 않은 날이었다. 아무리 학업에 뜻이 없다 해도 고3 주제에 내일 당장 시험인데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굴레를 벗어나 자유의 향기가 느껴지는 상큼한 봄날 저녁. 적어도 지해에게만은. “쟤 말이야. 보면 볼수록 그림이 돼.” “아줌마…. 눈독 들이지 마.” “아~줌~마~?!!!” “그냥 딱 영계 앞에서 침흘리는 욕구불만 아줌마 그 자체야. 윤희원도 나이는 속일 수 없나보지?” “이 늙다리 호모가 드뎌 망령이 났나? 훌륭한 피사체로서 그림이 된다는 건데. 상당히 냉정하게 프로페셔널한 발언을 하고 있는 거였어, 나 지금.” 희원은 다시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네모를 만들어서는 피아노에 열중하고 있는 지해를 그 안에 넣고 꼼꼼히 보며 말한다. “쟤 쉬는 시간이 언제야?” “이제 한 시간 거진 다 됐어. 20분 정도 쉬고 다시 할 거야, 왜?” “홍사장. 나, 차에 가서 카메라 좀 가져올 테니까, 쟤 좀 요기, 요 자리에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고 해줘.” “괜히 라이트 터트려서 손님들 긴장시킬 생각이면 아예 관둬. 여기 손님들 얼굴 팔리는 거 싫어해.” “아니야. 스리슬쩍 몇 커트만 찍을게. 이달 말에 그룹 전시회 하는데 낼만한 게 없어서 그래.” “그 수많은 연예인 사진들 다 어따 쓸려고 그러나?” “그런 뽀샤시한 사진들 내놓을 전시회가 아니야.” “윤씨 아줌마. 지금 찍으면 진짜 영업 방해야. 할려면 이따가 다 끝나고 해줘.” “아.줌.마. 소리 한번만 더 해. 여기 손님 상판떼기 죄다 박아갖고 인터넷에 올릴 거야. 카메라 갖고 올 테니까 쟤 요기다 좀 앉혀놔봐.” 30대 중반 여자로서는 큰 키에 전투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희원이 잽싸게 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금발로 물들인 짧은 머리를 뾰족뾰족하게 세우고, 베이지색의 니트에 그보다 약간 진한색의 헐렁한 면바지를 갖춰 입은, 185 정도 되는 늘씬한 젊은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윤씨 아줌마 왜 저렇게 바빠?” “어, 어!! 이게 누구야! 조민혁이가 웬일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반 년도 넘었어!” “하이! 하우 해브 유 빈?” “넌 미국에 몇 달씩 있었는데도 그 발음 좀 어떻게 교정 안 되던?” “뜻만 통하면 되지 혓바닥까지 굴릴 거 뭐 있어. 이러고도 헌팅도 하고, 싸움도 하고, 할 거 다해.” “안 그러면 조민혁이 아니지. 근데 웬일이야. 언제 왔어?” “랭귀지 코스 지난 주에 다 끝났어. 우리 할멈 칠순 잔치 때문에 서둘러 들어온 거야. 도착한 건 오늘 오전.” “언제까지 있을 건데?” “9월에 새 학기 시작할 때까지. 근데 봐서 안 돌아갈려구.” “언제는 물좋은 뉴욕에서 사냥에 전념할 거라더니.” “그 동네 물이 좋긴 뭐가 좋아. 그 새끼들 그 불그죽죽한 엉덩짝이랑 누린내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나. 난 역시 국산이 좋아.” “안전수칙은 잘 지키고 논 거야?” “당연하지. 애들도 비위에 안 맞는데 병까지 걸릴 일 있어? 내가 아무리 집에서 버린 자식이라도 나까지 날 버리진 않았어.” 홍사장과 민혁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쉬는 시간을 맞은 지해가 서서히 다가왔다. 모르는 손님이 있으니 다가가기도 좀 그래서 뻘쭘하게 서 있는데, 민혁이 눈짓으로 지해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홍사장에게 묻는다. “조금 전까지 저기서 피아노 치고 있었잖아. 지해야, 여긴 조민혁. 여러 방면으로 워낙 악명이 자자하니까 늘 경계하도록 해.” “이름이 지혜야?” “아니, 여이가 아니고 아이요. 지.해.” “지해라니까. 김.지.해.” 지혜로 잘못 알아들은 민혁에게 홍사장과 지해가 동시에 발음을 정정해주었다. 두 사람 목소리가 좀 컸나 보다. 이름을 바로 전달하려는 노력이 너무 지나쳤다. 가까운 데 앉은 사람들 몇이 무심결에 쳐다본다. 지해가 무안해서 웃자, 민혁도 지해가 맘에 든다는 듯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야, 조민혁. 괜히 지해한테 손 뻗치지 마. 얘한테 목숨 거는 찰거머리 하나 있어. 저번 날에도 와서 얘한테 파리 꼬이게 두면 가게 폭파시킨다 그러구 갔다.” “누가 뭐래? 난 미소년보다 미중년이 더 좋아.” 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홍사장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고개를 이리저리 피하는 그에게 계속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장난을 쳤다. 지해는 짖궂은 어린애들처럼 놀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곧, 희원이 새까만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조명 장비가 든 가방 2개를 들고 들어왔다. “윤씨 아줌마, 어딜 그렇게 허벌나게 갔다 왔어? 사람 섭하게 본척만척 하구. 너무해~!” “아까 인사했음 됐지, 얘가 왜 이렇게 오바야? 멀쩡한 처녀 혼삿길 막히게 자꾸 아줌마라 그럴래, 엉? 야, 야, 절루가. 나 지금 너한테 신경쓸 시간 없다. 어이, 피아노 치는 아가야. 이리 좀 와보련?”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곳에 오면 지해는 항상 재밌었다. 좋은 사람도 많이 알게 됐고, 올 때마다 뭔가 희한한 일이 한두 가지씩 벌어진다. 오늘따라 유달리 기분이 좋았던 지해는 희원의 제의를 단번에 오케이했다. 이쁜 사진은 애시당초 기대하지 말랬으니까 어떤 사진이 나올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일류 사진작가가 자기 사진 찍어준다는데 싫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결국 가게를 2시간 일찍 닫기로 한 사장님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지해는 자정까지 피아노를 두드리고 노래도 불렀다. 열심히 쫓아낸 결과 손님도 이제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 이 곡 저 곡 계속 신청곡을 들이대며, 연주를 계속하게 만들었던 주범인 희원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서서 지해를 이쪽 저쪽으로 뜯어보고 있었다. “야, 너 노래 부르는 거 오늘 처음 들었는데 목소리 진짜 멋지다. 말소리랑 디게 틀리네.” “오호호호, 감사해요. 헤헤.” 지해는 ‘디리리링’ 하고 오른손을 세워 건반을 죽 올라가며 훑고 쾅쾅쾅 마무리를 짓고서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한 뒤, 제 손으로 짝짝짝짝 하고 박수를 쳤다. 희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잠깐 웃더니, 곧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너 근데…… 맨날 쏠로만 쳐봤지?” “네?” “아니, 베이스나 드럼이랑 같이 피아노 쳐본 적 있어?” “없어요. 티가 많이 나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재즈적인 리듬감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솔직히 재즈라기 보다는… 그냥 발라드같애.” “그건 그래요. 저도 항상 그게 좀…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거거든요. 아직 연주자들이 친 거 열심히 듣고 외워뒀다가 흉내나 겨우 내는 수준이라…….”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은 실력인데, 실용음악과 같은 데로 진학할 거야?” “에이, 아니요! 그냥 취미에요. 나중에 경영학과든지 뭐… 그런 데 갈 거에요.” “취직 잘 되는 데?” “네. 평범한 회사원 돼서 오손도손 알뜰하게 사는 게 제 꿈이라죠.” 지해는 약한 터치로 「Obladi-Oblada」의 명랑한 전주를 살살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해의 머릿속에서 항상 ‘평범한 가족의 행복을 상징하는 주제가’나 ‘팡파레’쯤을 상징하는 멜로디였다. “그 꿈 한번 졸라 야무지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주의깊게 듣고 있던 민혁이 끼어들며 딱 잘라 말했다. 민혁과 놀아주던 홍사장은 오늘 매상을 따져 보며, 종업원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구요.” “사람들 눈은 다 비슷하니까.” “힘들 것 같아요?” “응. 엄청.” 민혁은 왠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짖궂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옆에서 열심히 야리는 희원의 눈빛 공격에도 아랑곳 않는다. “왜요?” 맞받아치거나 캐묻거나 할만한 게 아니란 걸 알긴 했다. 농담 정도로 흘리면 되는데, 이 사람의 이상하게 시니컬한 태도가 오히려 궁금했다. “너, 오로지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 다른 거 전부 다 포기할 수 있어?” “……못할 것처럼… 보이나요?” “우습게 보지 마. 그거 공짜 아니야. 너 괜히 말로만 그러지 많이 포기 못할 것 같애.” “………….” “정말 절실한 거 꼭 하나만 선택해야 돼. 딱 하나만. 너무 일찍부터 정해 버리지 마. 나중에 얼마나 후회할지… 모르는 일이잖아…….” 민혁은 이제 거의 한숨처럼 들릴락말락 내뱉고 있었다. 대상을 잃고 공중을 떠도는 말. 말하면서 자기 머릿속을 정리하는, 혼자만 그 처음과 끝을 아는 암호. 민혁의 아주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Obladi-Oblada」가 끝났다. 마지막 손님까지 모두 나갔다. 뒷정리도, 청소도 대충 끝났다. 희원은 이 야심한 시각에 얼굴이 시커멓게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조명을 세팅했다. 중대 사진학과 동문들 중에 포트레이트를 전문으로 하는 현역 사진작가 몇 명이 함께 하는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인간’. 4,5년 전부터 패션이나 광고 사진 쪽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한 그녀였지만, 이번 전시회에는 좀더 순수 사진에 가까운, 가식적인 장식없는 자연스러운 느낌의 작품도 구색으로 끼워넣고 싶었었다. 돈 버는 일에 쫓기느라 전시회 생각만 하면 마음이 무지 찜찜했는데, 오늘 문득 침침한 바에서 피아노에 열중하고 있는 행복한 표정의 소년에 시선이 딱 꽂혔었다. 이 곳에서 곧잘 보던 그림이던 차라 진작에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후회까지 했다. 조명 좋은 대낮에 한가할 때 와서 제대로 찍으라는 홍사장의 만류에도, 앞으로 며칠간 계속 바쁜 스케줄 때문만 아니라 굳이 이 밤의 feel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욱 고집을 피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씨뎅할 피사체한테서 아까는 잘만 짓고 있던 그 밝은 표정이 잘 나와주지 않는다. 희원은 ‘10대 소년의 밝은 미소’를 포기하고 그냥 지금의 복잡다단한, 어두운 표정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지해는 다시 「Obladi-Oblada」의 흥겨운 멜로디를 마이너 키로 바꾸어서 길게 늘여 천천히 치고 있었다. 마치 서커스가 끝나고 분장실에 앉아 메이컵을 지우는 어릿광대의 주제곡 같은, 묘하게 언밸런스한 피아노 소리가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와 함께 조용히 울렸다. 6. CRAVE Your eyes, your ears, your mouth, your nose 너의 눈, 너의 귀, 너의 입, 너의 코 Your arms, your legs, your heart, your soul 너의 팔, 너의 다리, 너의 마음, 너의 영혼 Touch me, touch me, touch me, touch me 날 만져줘 My body craves your touch 내 몸은 네 손길에 목이 말라. (Crave - Nuno)←CLICK! 많이 떨렸다. 한 걸음씩 떼어놓을 때마다 괴로운 흥분과 즐거운 통증이 가슴 속에서 한꺼번에 출렁였다. 한 달음에 학교로 달려가고 싶기도 하고, 또한 할 수만 있다면 학교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기도 한, 복잡한 아침.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서 제 자리에 딱 버티고 앉아 있는 녀석을 보자, 그 놈이 없었던 지난 2주일 자체가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잠깐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환자가 기억을 되찾고 나서 기억상실기간 동안의 일들을 하얗게 잊어버린 것처럼, 마치 지난 2주일은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이유인즉슨… 미쳤었어. 미쳤었나 봐. 난 미쳤었던 거야, 지해는 자신의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못한 머리를 끊임없이 저주하며, 줄기차게 교실 벽에다가 대갈통을 쾅쾅 박았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실제로 그러면 정말 미친 놈 되니까 그건 좀 자제하고. …그동안 가슴 속에 품고있던 그놈의 환상적인 이미지와 실제의 그놈의 모습이 눈앞에서 바로 오버랩되는 순간 깨달아버린 거다. 그리움이라는 표백제에 얼마나 저노므새끼가 파스텔톤으로 아름답게 희석되어 있었는지. 강정욱이라는 녀석. 꽤나 고약하고 무서븐 놈이라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지 뭔가. 어제 나왔던 학교를 오늘 또 나온 것인양 변함없는 무표정과 곧고 묵묵한 자세로 별일 없었다는 듯이. 애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전혀 신경쓰는 티도 안 내고. 물론 그 잘난 신경 자체가 그까짓 것에는 쓰일 턱이 없겠지만. 잘 다녀왔냐고 재밌었냐고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어 조심스레 묻는 아이들에게 그거 뭐 닳는 것도 아닌데 대답 한 마디 제대로 해주지 않고 거의 개무시. 다른 애들한테 그러는 거야 지해가 알 바 아니다. 문제는, 지해 자신한테조차 말 한 마디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시종일관 무관심해보이기까지 하는 저 태연한 작태는 도대체……. 유럽에 갔다왔다더니 그동안에 좋은 꼴 많이 보고, 좋은 인간 많이 만나고… 넓은 세상에서 뭔가 좋은 일도 많이 있는 가운데 자신의 훌륭한 처지와 본분을 깨달았음이 틀림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출발 전날까지도 그 컴컴한 음악실에서 기다리며 어쩌구저쩌구하던 녀석이, 그동안 얼굴 안 보는 사이 깨끗이 정신차리고 귀국한 것이 분명했다. 젠장할. 분하다. 억울하다. 뭐가 분하고 억울한 건지도 모르겠고, 과연 분하고 억울해 하는 것이 떳떳하고 당연할 만한 입장인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고. 암튼 머리가 시끄러웠다. 최대한 그 녀석에 대해 신경을 끄고, 전신을 요동치는 가슴속의 태풍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수가 없었다. 접수는 안 되지만 계속 진행되고 있는 수업에 집중하고, 역시 접수는 안 되지만 옆에서 간간이 뭐라뭐라 소곤거리는 한선경에게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쉬는 시간에는 음악이라도 들으며 모든 것을 잊고 싶었지만, 이어폰만 꽂을라치면 안색이 창백해져 자신을 바라보는 한선경의 동그란 눈동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한번 짝꿍에게 소박(?)맞고 기분이 더러워봤더니, 그런 경험은 재탕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란 걸 알았다. 별 수 없이 소곤소곤 수다를 들어주며 다정한 짝으로서의 본분을 이행해야 했다. 점심시간에도 잠시 자유의 종소리와 활력에 찬 주위의 소음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학생식당으로 한선경과 그 친구들에 의해 끌려갔다. 제멋대로 짝으로 눌러앉은 지난 주부터 이 기집애는 계속 자신의 휴식 시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침에, 흑표범처럼 우아하고 늠름한 자태로 버티고 앉은 그 녀석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발견하던 순간,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었다. 정말로 돌아와주었구나, 하고 당장 달려가서 목덜미를 끌어안고 싶었었다. 지금은 그 반가운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가를 알았을 뿐이다. 정욱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제 오후에 도착하자마자, 유럽에 가기 전에 인사도 제대로 하고 가지 못한 어머니에게 아들의 예도 갖출 겸 병원에 찾아갔었다. 아버지에게든 어머니에게든 귀여운 아들 노릇은 해본 기억이 없지만, 겉으로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려고 하는 성격이었다. 정욱은 반항조차도 어리광이라고 생각했다. 자식들의 존재가 항상 뒷전인 부모로부터 그런 저급한 방식으로 관심을 얻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어머니가 수 틀리면 혹시라도 자신이 따로 나가 살려고 하는 결정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치밀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미리 조금만 신경 써 두었으면 좋았을 걸 괜히 게으름피우다가 원하는 바를 망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원장실의 비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비서실을 지나 원장실 앞에 서서 무심코 노크를 하려다가 방문 안쪽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손을 멈추었다. 소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자신의 어머니가 분명했다.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십 여년을 들어온 자기 친어머니의 목소리였으므로 그 파장과 울림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상대편 남자는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기가 지금껏 들어온 소문이 사실이라면 누군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욱은 문을 박차고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며 10분 이상을 지체했다. 두 사람이 안에서 뭘하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당장 문을 부수고 들어가 둘다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짧은 찰나에도 수만 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드디어 현장을 캐치했다, 어머니에 대한 좋은 꼬투리를 잡았다’ 라는 생각까지도 그 잡생각 안에 포함되었음을 깨닫자,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신물처럼 밀려올라왔다. 정욱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서 비서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까, 뭐가 언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에 대해 꽤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비서가 돌아왔을 즈음에는 정욱은 언제나와 마찬가지의 당당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원장실에서 그 남자가 나왔다. 귀로만 듣던 얘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침착한 태도로, 오랜만이라며 피 한 방울 안 섞인 조카에게 꽤나 반가운 척 하는 그의 구차한 형식적 멘트를 댓거리해 주었다. 비서가 어머니에게 아들내미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바깥을 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어머니와 의례적인 몇 마디를 나누면서, 정욱은 바닥에 깔린 짙은 붉은 색의 고급 카펫트에 선명하게 표시된 자기 발자국을 쳐다 보았다. 운동화 바닥으로 발밑의 카펫트를 살살 문질러 결을 바꾸어 보기도 했다. 역시 카펫트의 결을 뒤집으면 훨씬 옅은 색이 나타난다. 집에서 따로 나와 살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바라본 어머니는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말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했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을 했다. 다행히 어머니에게는 조건을 걸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곧 승낙을 했다. 어머니에게, ‘동생의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머니와는 한 집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병원을 나서면서 만약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면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하루 이틀 돌던 소문도 아니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제 알았니’ 라고 대답했을 수도 있다. 아마 일단은 ‘그래서?’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뭐가 됐든 변명을 했겠지. 뭐라고 변명했을까? 같은 병원에서 오래 호흡을 맞춰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을까? 그가 어머니 자신은 미처 다 가지 못한 의사의 길을 성공적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을까? 그의 뛰어난 능력을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다만 그의 섹스 테크닉이 훌륭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했을까? 뭐가 되어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지만 않는다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해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비상계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수업 시작하려면 2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1,2학년이 사용하는 이 본관 건물은 설계가 좀 묘하게 되어 있어서, 건물의 폭은 좁고 길쭉하기만 했다. 교실은 한쪽으로만 죽 붙어 있었다. 풍수지리에 입각해 서향이나 북향인 교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리고 건물의 좌우 끝과 중앙에 제대로 된 계단이 세 군데씩이나 있었다. 이 건물이 좀 길긴 했지만, 넓다란 계단이 세 군데나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인즉슨, 건물의 위치한 곳의 지세(地勢)가 세서 기의 상하 흐름이 시원치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계단을 건물 내부에 많이 두어 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학년 1반과 2반 사이쯤에 교실과는 반대편 쪽으로, 두꺼운 철문으로 된 비상구가 있는데 거기에 비상계단이 또 있었다. (이것은 풍수지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이 비상구는 건물 뒷편의 담과 거의 마주보다시피 해서, 비상계단의 난간에서 허리를 깊게 숙이면 키가 좀 큰 학생의 경우는 머리가 담벼락에 닿을 지경이었다. 자연히 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아저씨들 외에는 이 계단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철문은 닫혀 있는 날이 더 많았는데, 아까 점심 먹고나서 올라오며 보니 그 문이 빠꼼히 열려 있는 것이었다. 지해는 점심식사 후의 담배 한 대를 그곳에서 호젓하게 즐기기로 마음 먹었다. 담배를 계단 위에서 날 좀 보쇼 하고 피우는 건 좀 위험했기 때문에, 지해는 계단 밑과 담 사이의 사각지대를 목표로 하고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1.5미터 쯤 되는 높이에 두 사람 들어가서 앉으면 꽉 차는 공간은, 정말 그 계단을 실제로 내려와서 보기 전까지는 계단 위에서도 복도 창문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의 사각지대였다. 많은 끽연 학생들이 그 환상의 사각지대를 알고 있었지만, 철문이 열리는 일이 좀처럼 없기 때문에 그저 쓸모없는 지식일 뿐이었다. 문이 열려 있는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학교 시설 중 뭐 수리할 게 있는지 학교 소사 아저씨가 외부인 한 명을 데리고 와서 건물 벽면 한 구석 어딘가를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지해가 난간 위에 몸을 기대고 서서 부르자 소사 아저씨가 이쪽을 쳐다 보았다. 학생들이 자기한테는 거의 아는 체도 안 하는 이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몇 명 안 되는 녀석 중 하나인지라, 이 아저씨는 지해가 몇 학년 몇 반 누군지는 몰라도 얼굴은 알고 있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많이 바쁘세요?” “그랴, 엄~청시리 바쁘다.” “아저씨, 부탁이 있는데요. 저 이 계단 밑에서 요거 한 대만 총알같이 피우고 들어갈 테니까 저 문 잠그지 마세요, 네?” “예끼, 학상이 무슨 담배여~!” “아저씨~~~, 식후 3초 이내에 불연초不煙草하면 자손 3대가 재수없대잖아요~.” “누가 그랴~?” “제가요…헤헤… 아저씨도 한 대 드릴까요? 저랑 같이 피실래요?” “뒤얐다. 난 끊었다.” “아저씨~~~, 그럼 가실 때 저 문 잠그시지 말고 사알짝만 닫아 주세요~~~.” “근디 고 계단 밑 자리는 벌써 누가 머언저 자리를 잡었는디? 두 명이 들어가서 앉을 수 있겄남?” 난간 위에서는 아무리 몸을 빼고 내려다봐도 보이지가 않았다. 할 수 없이 터벅터벅 내려왔다. 다 내려와서 그 자리를 선점한 사람을 보는 순간 괜히 왔다 싶었다. 강정욱이 거기 있었다. 둘은 잠시동안 빤히 서로 마주 보았다. “뭐해? 이리 와.” 정욱이 먼저 말을 꺼냈다. 교실에서 봤던 것보다는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지해는 잠시 망설이다가 정욱이 몸을 움직여 만들어준 자리에 가서 앉았다. 둘은 잠깐 말이 없었다. 담벼락을 코 앞에 두고 답답한 구석에 처박혀 담배를 피려니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여기 꼭 감옥같지 않냐?” “뭐?” “이 자리 말야. 사방이 꽉 막혀갖구 하늘은 조기 코딱지만큼만 보이고… 감옥에서 담배피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애.” 좁은 시야에서 담 위로 빠꼼히 보이는 하늘 조각을 쳐다보며 멍하니 내뱉는 지해의 말에 정욱이 풋 하고 웃었다. “감옥을 니가 가 봤어?” “기분이 그렇다는 거야, 임마. 기분이…….” “정확하게 말해야지. 죄수들이 그 말 들으면 별로 듣기 좋다곤 안 할 거다.” “………….” “………….” “…말하는 뽄새는 여전하구나.” “응?” “사람 말꼬리 잡는 건 여전해…….” 지해의 싸가지없는 말투에도 부드럽게 대응하던 정욱이 잠시 조용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한테 밖에 안 그래.” “뭘?” “말꼬리 잡는 거…… 너한테밖에 안 그러는 것 같애.” “왜?” “글쎄…… 너랑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서 그러는가 보지?” “………….” “………….” “새끼, 그러면 그러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러는 것 같은 건 뭐고, 그러는가 보지는 또 뭐냣?” 꽤나 당황했었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되는대로 주워섬기고는 꽁초를 휙 던지고 얼른 일어나던 지해가 위의 콘크리트 천장에 머리를 쾅하고 부딪쳤다. “악!!!” “야,야! 안 다쳤어? 괜찮아?” “아~ 씹팔… 에이~ 씹팔…… 오바하지 마…… 안 죽어.” “물론 죽지야 않겠지.” 정욱이 얼른 조심스레 일어나 그 밑을 빠져나온 뒤에도, 지해는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서 새빨개진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부딪친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정욱은 웃음을 간신히 눌러 참다가 결국 폭소를 터트렸다. “우씨~. 나쁜 새끼. 혹 났어, 임마.” 여전히 끅끅거리고 숨 넘어갈 듯 웃는다. “웃지 마, 이 새꺄! 남은 아퍼 죽겠는데…….” 웃느라고 대답도 못 한다. “씹, 그만 웃어!!! 너 시멘트 바닥에 머리통 한번 갈려볼테냐, 엉?” “……그래… 뭐 그래서 니 속이 풀린다면 함 해봐라.” 간신히 웃음을 누르며 대답한다. “………….” “얼른 해봐.” “………….” 그러다가 다시 푸흑, 하고 터지는 웃음. “나쁜 새끼, 그렇게 웃기냐? 그렇게 웃겨?!” “…미안…하다.” 정욱이 심호흡을 크게 하고 웃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지해는 연신 째려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슬금슬금 엉덩이를 털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다 감옥에 보내야 돼.” “엉?” “건물 설계를 이 따위로 한 새끼들~! 다 감옥에 집어넣어야 돼~!!” 지해가 휑하니 앞장서서는 씩씩거리며 계단을 올라딛는 찰나, 만면에 미소를 띠고 바라보던 정욱이 갑자기 지해를 뒤에서 안았다. 두 팔까지 한꺼번에 꽉 죄어 안겨 지해가 암만 몸을 비틀어도 정욱의 단단한 팔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야~! 이거 놔, 새꺄! 아저씨가 봐~!” “아저씨 갔어.” “언제?” “아까 갔어.” 지해는 아저씨가 있던 곳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언제 사라진 거야, 이 아저씨…… 문득 바로 코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정욱과 눈이 마주쳐 지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거 놔…….” “싫어.” “빨랑 놓으라구…….” “보고 싶었어.” “…….” “많이… 보고 싶었어.” 지해의 머리카락 속에 깊숙히 코를 박고 있던 정욱이 이제 왼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른 음흉한(?) 시도는 하지 않고 그대로 그냥 꼭 안고만 있는다. 지해도 더 이상 반항을 포기하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처음에 걷잡을 수 없이 두방망이질치던 심장이 서서히 제 리듬을 되찾았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평화와 고요가 찾아왔다. 등 뒤로 정욱의 편안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지해의 심장도 하나가 되어 뛰기 시작했다. 앞뒤에서 동시에 똑같이 찾아오는 기분좋은 진동. 몸 전체를 휘감는 삶의 리듬. 두 사람이 한 박자로 호흡한다는 것이 참으로 가슴뭉클한 것임을 깨닫고 있을 때, 5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제 그만 들어가자.” “………….” “빨리….” 정욱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억지로 팔을 풀자, 비로소 신체의 자유를 되찾은 지해는 아직도 등에 닿았던 정욱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한 채 계단을 허둥지둥 올라갔다. 그런데……문이 열리지 않는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해가 정욱을 뒤돌아보았다. “야~!!!” “왜?” “아저씨가 깜빡하고 그냥 문 쾅 닫고 갔나 봐.” “그럼 빙 돌아서 현관으로 들어가야겠네.” 정욱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계단을 내려갈 생각을 안 하고 빙글거리며 계속 지해를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내려가라고 몇 번이나 얘길 하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지해가 얼굴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정욱이 바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열쇠고리를 꺼냈다. 동그란 고리에 비슷하게 생긴 열쇠 두 개가 걸려 있었다. “뭐해, 임마~! 빨리 내려가~!” “일단 올라가봐. 아저씨가 빗장만 안 걸었음 돼.” “그거 뭐야?” “여기 전부터 내 아지트거든. 나는 또 니가 일부러 나 찾아왔는줄 알았지.” ‘밖’이라고 검은 싸인펜으로 쓰여 있는 열쇠를 꽂고 돌리자, 두꺼운 철문이 스윽 열렸다. 다행히 교실의 앞뒤 문들과 선팅한 창문들 모두 굳게 닫혀 있어, 아무도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해는 몇가지 사건(!)을 겪는 바람에 (특히 결정적으로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처음 계단 밑 사각지대에서 정욱과 마주쳤을 때 생각났던 것을 깡그리 잊어먹고 영원히 묻지 못했다. 물론 잊지 않았다 하더라도 쪽팔려서 차마 ‘왜 오늘 하루종일 자기를 본척 만척 했냐’고는 도저히 묻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정욱도 물론 쪽팔려서 ‘니가 왠 기집애랑 짝이 돼서 하루종일 붙어다니는 꼬락서니를 보고 속이 뒤틀려서 그랬다’고는 도저히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BGM : Say you love me (piano solo) ←CLICK! 이 목요일 이후 꼭 일주일간 지해는 자신을 따라붙는 정욱의 집요한 시선을 따돌리며 그 시야를 벗어나느라 진땀을 뺐다. 일단은 시간이 없었다. 금요일엔 알바를 가야 했고, 일이 끝난 뒤엔 주원의 잔소리를 들으며 집에 와야 했다. 주원이 아무래도 자기가 『Over The Rainbow』에 결석했던 날 재밌는 일이 있었다는 걸 얻어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냉정하게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그만 보고싶다」고 말했다. 이제 그렇게 말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원이 울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두 살이나 더 먹은 게…… 아무리 세상 여자들을 다 라이벌로 알고 산다쳐도 사내 녀석이…… 게다가 처음 보는 눈물이라…… 엄청 당황해서 달래주다 보니 오히려 시간을 더 끌게 됐다. 헤어져 집에 들어오며 좀 많이 모질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 암만 해도 지금까지의 자해공갈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신종 무기에 넘어가버린 거다. 일요일은 아버지의 기일이라서 토요일에 지후와 함께 어머니에게 갔다왔다. 어머니는 아직 언제나처럼 멍해 보였다. 겉으로는 평온한 상태였다. 가족들만, 아니, 엄밀히 따져서 지해만 눈에 띄지 않으면 그 상태가 유지된다.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작은아들에게 칼을 들이댔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해는 어머니가 지후와 나란히 앉아서 손을 잡고 멍하니 있는 것을 멀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우두커니 바라봐야 했다. 피해자(?)인 아들들은 그 날의 일을 가지고 ‘생명의 은인’ 운운 하며 농담 따먹기까지 할 수 있게 됐는데, 괜히 칼만 들고 설쳤을 뿐 정작 일도 못 냈으면서 어머니 혼자만 저런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밤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지후가 「어머니 입장에서는 저러고 있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같은 생각을 하던 중이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대로 새벽같이 아버지 산소로 직행했다. 묘지 지기 하는 집에서 낫을 빌려 벌초도 좀 하고 술도 좀 따라드리고 담뱃불도 붙여드리고 왔더니, 현관문 저편에서 울리는 전화소리가 둘을 반겼다. 니네들끼리 이모한테 말도 안 하고 갔다 왔다고 나무라는 할머니와 이모의 전화가 약속이나 한 듯이 교대로 이어졌다. 매년 챙겨주는 게 미안해서 올해 처음으로 이렇게 해 본 건데 큰일난 것처럼 신경들을 쓰시니 부담스럽기만 했다. 월요일 쉬는 시간에 정욱이 지해의 옆자리를 지나며 쳐다보지도 않고 열쇠 두 개를 책상 위에 던지고 가버렸다. 하나는 음악실 열쇠, 하나는 예체능관 현관 열쇠라고 씌어 있었다. 학교 밖에서 만나는 게 싫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까진 대등한 입장으로 부담이 좀 덜할 수 있었지만, 그 울타리 밖에서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나는 그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배길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나마 이렇게 자기가 학교 주인 아들이라는 티를 팍팍 낸다면……. 굉장히 많이 망설이다가 결국은 가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밀린 집안일 한답시고, 옷장 정리하고, 종류별로 나누어 세탁기도 두어 차례 돌리고, 집안 구석구석 샅샅이 쓸고, 닦고, 소독까지 하며 청소를 했다. 하다보니 일이 커져서 낡은 냉장고도 그 내용물을 다 끄집어내서 락스로 벅벅 닦았다. 가스렌지까지 묵은 때를 다 벗기고 새것같이 만들어 놓았다. 물에 젖은 솜처럼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몸을 혹사시키고 자리에 누웠다. 눕자마자 나른한 몸 위로 그 녀석이 남긴 기억이 스며들었다. 또 다시 습관처럼 잠을 설쳤다. 자신이 그 녀석을 원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스스로 숨길 수는 없었다. 화요일은 알바를 가야 하는 날이었다. 어제 녀석이 자기를 기다렸을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가슴 속 어딘가에는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자신이 있었고, 정신이 들면 눈길이 그 녀석의 뒤를 좇고 있었다. 정욱은 분명히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절대 시선을 돌려주지 않았다. 언제나와 똑같은 무표정, 똑같이 여유있는 태도. 지후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고 알바를 가기 위해 교문을 나설 때 정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녀석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고 싶다. 녀석의 체취가 느껴지는 곳에 있고 싶다. 녀석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고 싶다. 그 녀석이 호흡하는 공기와 똑같은 공기가 돌아다니는 이 곳 안에 있고 싶다. 정욱의 존재가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 자기 몸을 억지로 떼어내기가 온 몸의 세포가 찢겨나가 너덜너덜해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 다음날은 방과후 10시가 넘을 때까지 세 시간 이상 음악실에서 정욱을 기다렸다. 녀석은 오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했던 대로 실내의 불을 끄고 밖을 바라보다가 그때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불을 켰다. 안에 빛이 없을 땐 바깥의 빛으로 세상이 보인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내가 처해 있는 입장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제대로 보인다. 그때만 해도…, 그저 어둠을 더듬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줄 확실히 몰랐을 때만 해도…, 참으로 멍청하게 편할 수 있었다. 마취제라도 맞은 듯한 멍한 감각으로 심장을 저미는 고통을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마음속에 불을 밝힌 지금, 바깥 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안과 밖을 가로막는 저 창문마저도 내부의 상황을 반사하고 있을 뿐이다. 창 밖 저 너머에 존재하는 서늘한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현실은 외면하고 싶다. 온통 캄캄한 어둠뿐이라도 상관없다.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만 중요하다. 지금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니까. 그리고 다시 목요일. 5교시가 끝나고 나서였던가 쉬는 시간에 옆자리에서 계속되는 수다에 숨이 막힐 것 같아 그냥 복도로 나섰다. 복도에 나서서 몇 걸음 떼는 순간, 긴 복도 저편에서 성큼성큼 유유히 걸어오던 정욱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다른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그 녀석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가 온통 그 녀석과 자신에게만 비추고, 복도를 지나던 수많은 애들은 어두운 배경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강정욱과 김지해, 단 둘뿐. 두 발이 자기 의지대로 걷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공중에 둥둥 뜬 채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녀석의 타는 듯한 두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녀석이 어깨를 스칠 정도로 가까이 왔을 때, 바보같은 입이 주인을 배반하고 지껄여댔다. “어제…… 널 기다렸어. 오늘도 거기 있을 거야.” 정말 더 이상은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 숨기려고 꾹꾹 눌러 애쓰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숨길 수가 없다. 한 시간 남짓 기다리다 보니 정욱이 들어왔다. 뭐라고 한 마디 해주면 좋으련만 한 30분쯤 아무런 말없이 핥아서 녹일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지금 치고 있는 곡들이 대충 몇 분짜리인지 아니까 시간은 얼추 그쯤 됐을 것이다. 꿰어 입은 옷을 하나하나 눈으로 벗겨내는 듯한 저 시선 때문에 숨이 막힌다. 천천히 얇은 니트 스웨터의 올을 잡아당겨 조금씩 풀어버리고, 감질날 만큼 느린 속도로 청바지의 지퍼를 내린다. 니트 속에 입은 흰색 T셔츠를 돌돌 말아올려 머리칼 하나 헝크러지지 않게 머리 위로 아주 조심스럽게 잡아뺀다. 서서히 바지를 살살 잡아내리는 눈길은 숫제 고문이다. 간이 녹아내리고 위가 타들어간다. 녀석의 눈에 비치는 자신은 분명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뚱이다. 저렇게 남김없이 벗겨낸 다음엔 뭘 하겠다는 걸까? 머리를 갈라 뇌를 끄집어내고, 심장을 열어서 확인해 보겠다는 거냐? 이렇게 애타게 울부짖고 있는데, 내 목소리가 네 귀에 안 들린다는 거냐? “그만 좀 쳐다봐라, 임마.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조용히 해.” 지해가 건반 위에서 손과 눈을 떼지 않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정욱이 나즈막이 대답했다. 공명하는 두 개의 얇은 쇠막대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사르르 떨렸다. “그만 봐. 얼굴 닳겠어.” “안 닳아.” “그렇게 쳐다보지 마. 도망 안 갈 테니까.” “도망갈 수나 있을까?” “모르지. 마음만 있으면 뭔들 못하겠냐?” “어디 해봐. 죽여버릴 테니까.” 쾅~ 하고 되는 대로 건반을 내리 찍었다. 엄청난 불협화음이 음악실 안에 천둥처럼 메아리친다. 이놈의 음악실은 소리가 너무 울린다. 이게 음악실이냐, 목욕탕이지. 야, 임마. 나를 죽일 게 아니라 학교 건물을 이 따위로 부실하게 지은 놈들 먼저 죽여야 하는 거다. 피식, 하고 지해가 웃자 정욱의 굳은 표정도 다소 풀어졌다. “……제발 그만 봐라…… 못 견디겠어.” “입 다물어. 한 대 맞기 전에.” “유단자가 사람 치면 구속이래매? 너… 스타일 구기는 거 드럽게 싫어하잖냐.” “그래, 맞아. 나 그런 거 질색이다. 난 그림이 좋은 게 좋아.” 자신은 너무나 긴장돼서 한 마디 꺼내기도 힘든 판국인데, 저 녀석은 먹이를 앞에 놓고 음미하며 그 주위를 맴도는 사자마냥 잔뜩 여유를 챙기면서 유들유들하게 대답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정욱의 조각같은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로 빛나는 새까만 눈동자. 귀족적인 높은 콧날. 섬세하게 깎아놓은 턱선, 탄력있는 구릿빛 피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다. “보면서 생각하는 중이야. 난 왜 이 그림에 이렇게 집착할까? 어디가 그렇게 좋을까?” 활 모양의 섹시한 입술이 보기좋게 벌어지고 바람 소리 섞인 바리톤을 낸다. 아랫배에서 끌어올린 묵직한 저음이 낮게 깔린다. 첼로 소리보다 조금 낮고 콘트라베이스의 음보다 조금 높은 그 말소리를 따라 지해는 무의식중에 음계를 짚어내며 머릿속에 악보를 그리고 있었다. “객관적으로도 값나가는 그림인 건 확실한데, 남들한테 보여주면서 확인받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냥 어느 구석이 좋길래 내가 이러는지만 알고 싶어.” “그래? 그럼 아예 여기서 그냥 다 벗고 보여주랴? 제대로 한번 볼래?” 꽤나 유혹적인 제안에 정욱은 잠깐 솔깃한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달구고 최대한 녹인 다음에 먹으려나 보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뭐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아니까.” 땅 속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장을 조여대고, 천천히 온몸을 애무하며 탐색하는 시선이 짜릿한 자극으로 깊은 곳을 마구 찔러대고 있었다. 혈압이 상승하고, 호흡이 버거워진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 시선만으로 이렇게……. “네가 그렇게 보면…… 내가 지금… 어떤지… 알고 있는 거야?” “…보여.” “………….” “보기 좋아.” “………….” “아주 예뻐.” 발그레해진 얼굴로 기를 쓰고 덤비는 지해를 보며, 정욱이 욕망으로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에 기쁨을 담고서 말했다.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다. “강정욱, 어서 이리 와.” “네가 와봐.” 지해는 순순히 일어나 정욱에게 느릿느릿 다가갔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긴장을 담고 끓어오르는 흥분을 조금씩 삭혔다. 바위처럼 꼼짝도 않고 버티고 서 있는 녀석의 얼굴선을 두 손으로 감쌌다. 키는 장대같이 꼿꼿이 큰 것이.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작은 얼굴. 지금까지 살면서 본 중에 가장 멋들어진. 가장 탐나는. 내것으로 하고 가끔씩 선심쓰듯이만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 얼굴이 지금 이 두 손 안에 있다. 너무나 흐뭇하게. “네가 좋아.” 누구든 말해야 한다면 지해는 자신이 먼저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속 다 까발려졌는데 기집애처럼 새침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당하고 용감하게 너는 내꺼라고 말할 거다. 정욱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르 떨리고 새카만 속눈썹이 날개짓을 했다. 지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놀랐지, 이 녀석아……. 메롱이다. “널 좋아해.” 부드러운 웨이브를 그리는 조금 긴 듯한 앞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올려주며 지해가 또 한번 말했다. 정욱은 분명히 많이 놀란 것 같다. 목젓이 울컥 떨리는 게 보였다. 너…… 얼굴 빨개졌어……임마……. 아, 기분 좋아…… 내가 이겼어…….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한다. 너무 귀엽다. “강정욱, 근데 너 또다시 이렇게 사람 가지고 놀면 가만 안둘 거야.” “……전에도 말했지만…… 가지고 논 적 없다.” 정욱의 목은 약간 잠겨 있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내가 그랬다면 넌 그런 거야. 정말 가만 안 둘 거다.” “그래? 어쩔건대?” “화끈하게 덮쳐서 열나 깔아줄 거야. 엉엉 우는 꼴 꼭 보고 말 거다.” 지해가 함박 웃음을 담고 말하자, 정욱은 눈을 가늘게 뜨며 보일 듯 말 듯 살짝 웃었다. “재밌겠는데? 도와주진 못하겠지만 말리진 않을 테니까 시도해봐.” “장난 아니야, 임마.” “나도 장난 아니야……. 너, 니 입으로 내가 좋다고 했지? 앞으로 각오해.” 정욱이 지해를 품속에 바싹 끌어당겨 빈틈없이 안으면서 말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마주 닿은 온몸을 통해 들려왔다. 녀석도 어지간히 흥분한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저렇게 침착하게 말하다니…… 녀석의 냉정함에 지해는 다시 한번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무섭다. 새삼스럽게 억울했다.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 니가 처음이야, 새꺄.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을 꿈꿔 왔는데, 그게 너같은 녀석이라니……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전혀.” 정욱이 지해의 어깨를 잡고 살짝 떼어내고서 얼굴을 깊게 바라봤다. 활짝 웃는 그 얼굴에 지해는 혼이 머리 꼭대기로 쑥 솟구쳐 단숨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 이런 느낌이 세상에 있긴 있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을 때는 이런 느낌이. 너무나 부끄럽게도. 이럴 수가……. “생각해 보니까 나 손해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그러게 누가 먼저 말하래?”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정욱이 한 손으로 지해의 뒤통수를 붙잡고 입술을 가져갔다. 이 자식, 이렇게 갑자기 공격하면 어떡해? 지해는 재빨리 몸을 틀고 얼굴을 돌렸다. 정욱의 입술이 지해의 인중과 볼따구 사이쯤에 제법 아프게 부딪혔다. “나 도로 물르면 안 될까?” “이미 늦었어.” 이번에는 용서없다는 듯이 뒤통수를 움켜잡은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간다. 정나미 떨어지게스리 싸가지 없는 말투와는 달리 너무나 정중하고 달콤하면서도 힘있는 키스. 제일 먼저 입술을 두드리고, 그 다음으로 고른 치열을 더듬고, 그리고 혀를 감아 넣고 휘저으면서 정욱은 입안 구석구석 하나하나를 예의바르게 초대하고 허락을 구해왔다.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럽게 빗어내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지해는 머릿속이 텅 비는 전율과 그보다 더한 행복감으로 숨이 막혔다. 더 이러고 있다간 기절할 것 같다. 지해가 있는 힘껏 정욱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밀어냈다. 입술을 떼서 허전한 건지, 너무너무 좋다 못해 허탈한 건지 모르겠지만……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억울함이 마구 밀려온다. 아… 맞다… “근데 무슨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거냐, 너?” “차차 알게 돼. 앞으로 키스할 때 자꾸 말 시키면 혼날줄 알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엄청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굴 전체에 그리고 있는 정욱을 보자 지해는 약이 올랐다. 어쩌자고 내가 먼저 그 따위 소리를 했을까. 또다시 이 녀석의 술수에 말려들어 넘어갔다는 생각이 머리를 쾅 때렸다. 얼굴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부드러운 햇살 같은 키스를 받으며, 지해는 게임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BGM : Clair de lune (Debussy) - Piano : Danny Wright 달빛이 정면으로 들이치는 창밖을 바라보며, 정욱은 다시 한번 자기 가슴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자는 지해의 뒤통수에 입을 맞추었다. 계속 서서 입 안이 다 얼얼하고 입술에 감각도 없을 때까지 키스를 해대다가 이 녀석 얼굴을 보니, 눈이 퀭하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일단은 자신도 등이 아파와서 창문을 마주보는 벽에 기대어 녀석을 자기 품에 가두고 대충 주저앉았다. 아무리 급해도 첫날부터 이런 데서 진도 나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어디를 가더라도 조금만 앉았다 가자 하고 있었는데, 몇 마디 토닥토닥하던 와중에 갑자기 녀석이 조용해졌다. 새근새근 평화로운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 자신도 좀 졸았나 보다.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깨보니, 자율학습을 마친 고3들이 집에 가고 있다. 세상에, 여기 앉아서 얼마나 잔 거야…맙소사…… 당직 선생이 오늘 근무라도 섰던 건가. 학교 한 구석에서 학생 놈들이 이런 불순동성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내버려두는 이놈의 학교는~!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 쌕쌕거리며 정말 잘도 자고 있다. 깨우기가 안스러울 정도다. 아무래도 추울까봐 교복 자켓을 벗어서 덮어주려고 몸을 좀 움직였더니만, 잠깐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잔다. 정말 귀엽다. 이렇게 남의 품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걸 뭘 그렇게 피해 다녔는지 너 그 동안 애쓴 게 참 아깝다, 아까워…. 이 녀석을 깨워서 집에 데려다주든지, 그냥 업고 호텔에 가서 좀더 재우든지 해야 되는데, 안타까워서 어떻게 깨워야 할지 모르겠다. “지해야. 김지해.” “…으응?” “일어나.” “…으응….” 이제 잠이 깨려는지 몸이 움찔한다. 안스럽다. 깨우지 말걸 그랬나보다……. 임마, 이렇게 잠들고 하지 않았으면, 넌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되어있을지 나도 몰라. 나야말로 너 가만 안 둘 생각으로 왔던 거니까. 좋아한다 소리를 네가 했기에 망정이지, 그 말만 안 했어도……. 좋아해,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요며칠 단단히 화가 났던 게 한순간에 스르르 무너져버리며 모든 죄(?)를 사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말 한 마디가 가진 엄청난 파워는 진짜…. 정말 살아남는 법을 아는 녀석이다. 정말로. 본인은 의식도 못 하는 사이에 살아남는 법을 진실로 터득하고 있는 지해가 깼는지 슬슬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지금 몇 시냐?” “몇 시 같냐?” “나야 모르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꾸하고 눈을 비빈다. 참으로 천하태평이다. 낙천적인 성격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욱은 오늘 또 많은 걸 알았다. 나름대로 복잡한 척 하는데 엄청 단순하고, 즉흥적인 구석도 좀 있고, 느닷없이 대담하게 굴어서 남 놀래킬줄도 알고, 은근히 애교도 많고…, 대충 뭐…… 귀엽다고 해두겠지만……. 남들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그 버릇만은 용서가 안된다. 뒤에 앉아서 보고 있으면 은근히 열 받는 버릇. 강정욱이란 놈, 그런 거 다 참아넘길 정도로 참을성 많은 놈 절대 아니다. “김지해.” “어?” “안 일어나?” “아… 일어나야지.” “말만 하지 말고 일어나 봐.” “야, 임마! 네가 팔을 풀어줘야지 일어날 거 아냐~!” 지해가 갑자기 열이 받쳐서 자기 몸통을 아직도 꽉 끌어안고 있는 정욱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당연히 끄떡도 없다. 정욱이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야, 김지해.” “왜 불러, 씹새야.” “너 오늘 집에 가서 잘래, 아니면 나랑 잘래?” 나름대로 짱돌을 굴리는지, 아니면 우선 황당해서 그러는 건지 지해가 대답이 없다. “그냥 잠만 잘 거니까 걱정 말고 빨랑 대답해.” “……집에 가서 잔다구 그러면 팔 안 풀어줄 거지?” “이젠 제법 말귀를 알아먹는구나.” 장족의 발전이로구나, 하고 흐뭇해하는데, 지해가 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너도 집에 가야잖아.” 집은 무슨. “난 호텔에서 잘 거야.” “호텔?!” “나 집 나왔어.” 지해가 깜짝 놀라 움찔하는 게 정욱의 몸까지 느껴졌다. 힘겹게 고개를 뒤로 틀어 정욱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 지해를, 정욱이 갈비뼈 근처를 꽉 잡고 빙그르르 돌려서는 자신과 마주보게끔 했다. 어어… 야, 뭐하는 거야, 하고 놀래 소리를 지르다가 엉겁결에 지해의 발이 정욱의 허벅지를 거의 발로 차는 듯이 건드렸다. 으앗 소리를 지르며 미안하다고 난리다. “짜샤. 그렇다고 발로 차냐?” “우씨~, 네가 갑자기 그러니까……. 그게 어디 찬 거냐? 살짝 스친 거지. 글구 내가 일부러 그랬냐? ” “평소의 감정을 꼭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겠냐, 엉?” 정욱은 지해의 발이 스치는 바람에 발자국이 생긴 교복 바지를 툭툭 털고, 양반 다리를 하며 바싹 벽에 기대 앉았다. 지해는 좀 계면쩍어 무릎을 모아 세운 뒤 팔로 무릎을 안은 채 정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해는 정욱의 가족사항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재벌집 자손이란 기본지식 외에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생각보다 불쌍한가 보구나, 너.” “그렇지. 게다가 너한테 잡혔으니 더 불쌍해졌지.” “미친 새끼!” “아직은 안 미쳤다. 계속 이렇게 발로 차이다 보면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욕이라도 한 마디 하며 덤빌줄 알았는데, 지해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갑자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 녀석이 요런 타이밍에 얼굴을 붉히면 뭔가 살 떨리는 소리를 한다는 걸 이제 정욱은 알고 있었다. “… 야, 근데…” 귀까지 발그레해진 채 주저주저 말을 못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정욱은 답답하기도 하고 저 놈이 또 무슨 희한한 소리를 할까 겁나기도 했다. “말하고 싶으면 빨리 해라.” “……………제기랄. 네가 나한테 잡힌 건 맞는 거냐?” 여전히 팔로 무릎을 한 아름 안은 채, 턱을 무릎에 얹고서 눈은 빼꼼히 치뜨고. 조금은 쪽팔리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묻겠냐는 듯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짜고짜 주먹 꼭 쥐고 덤빌 것처럼 묻는다. 정욱은 정말 웃음밖에 안 나왔다. 저 놈은 꼭 이렇게 티를 낸다. 빼는 것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꼴리는 그대로, 솔직하게 스트레이트로 부딪쳐 오는. 역시 귀여운 놈. 지금까지 이렇게 귀엽고 이쁜 녀석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이런 놈은 처음. 아마 앞으로도. 이 세상에 이런 놈은 딱 하나. 이만큼이나 끌릴 상대는 이 녀석뿐이리라는 강한 예감이 정욱의 머리를 스쳤다. “너 하기에 달렸다고 하던데.” “누가?” “……사람들이….” 틀린 말은 아니다. 서방은 마누라 하기 나름이라고 다들 그러더라. “사람들?!! 설마…….”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얼굴 “설마 뭐?!” 저놈이 얼굴 붉히면 정욱은 이제 무섭기까지 했다. 왜냐 하면, 일일이 대꾸해주기도 민망하니까. “설마…… 애들이 안 건……” 어떻게 벌써 알겠는가. 둘이서 뭘 했다고. 아직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저 놈 정말 바보 아냐? “아니야, 븅신아.” 지해의 표정이 좀 굳어졌다. 안색까지 창백해지도록 긴장하며, 앉아있던 자세를 풀고 황급히 일어선다. “이거…… 누가 알면 안 되는 거잖아…… 나, 거기까지는 생각을……. 너…, 그렇지?” 정욱은 갑자기 둘을 둘러싸고 있던 비누거품이 팡 터지는 것 같은 느낌에 심히 언짢아졌다. “야, 김.지.해~!” “왜?” 도대체 이 녀석은 단단히 각오하라고 한 걸 무슨 소리로 알아들었단 말인가. 어떤 생각으로 좋아한다고 선언했단 말인가. 누구는 입이 없어서 그딴 말을 안 하는 줄 아나. “너 그래서 오늘 나랑 안 잘 거야?!!!!” “――아이, 씨. 친구라니까―― 무슨 친구긴? 같은 반 친구지―― 내가 친구가 왜 없어? 죽을래?―― 아, 씹! 말장난할 시간 없어―― 끊어. 암튼 잘자―― 아, 몰라~!!!! 끊엇!!” 정욱이 샤워를 하고 욕실 문을 나서려는데, 자기보다 먼저 샤워를 했던 지해가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에다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그래도 제 딴에는 소리를 죽인답시고 꽤나 애쓰는 눈치다. 보나마나 그 형이겠지. 자기가 먼저 샤워하면 그동안 도망이라도 갈까봐 먼저 씻으라고 했더니, 의외로 머리카락 한 올 안 떨어뜨리고, 바닥에 물 한 방울 안 튀긴 채 욕실을 말끔히 쓰고 나와서 제법 놀랐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니니까 손이 빠른 건가? 지금까지 이리로 끌고 왔던 것들이 ―사내 새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집애들조차― 욕실 지저분하게 만드는 꼴이 역겨웠었다. 그렇다고 안 씻은 몸에다 박기는 싫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자기가 먼저 씻곤 했었는데…, 뭐… 나쁘지 않다. “누군데 또 그렇게 발광이냐?” “철천지 웬수가 하나 있다.” “나 말고도 또 있냐. 니 웬수가?” “내 말이 그 말이다. 가는 길마다 웬수들이 나타나서 태클을 걸잖냐.” 지해는 생전 처음 와보는 호텔 스위트 룸이라는 데를 둘러 보았다. 하룻밤 자는데도 꽤나 비쌀 텐데, 이 녀석은 여기를 대놓고 쓴다니. 침실 따로, 드레싱 룸 따로, 응접실 따로, 다이닝 룸도 따로 있는데다가, 손상시키면 목돈 물어줘야겠다 싶은 호화찬란한 장식품들까지. 개인적인 짐이라고는 여분의 교복 한 벌이랑 옷가지 몇벌 정도뿐이던데, 정말 집 나온 게 맞는 건가……? “여기 묵은지는 얼마나 된 거야?” “1년 넘었어.” “헥~! 가출한지 그렇게 오래 됐단 말이냐?” “집 나온 건 며칠 전이야. 그전부터 여긴 그냥 쓰고 있던 데고.”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아니, 학교 근처에서 살 거야. 지금 수리할 게 좀 있어서…. 토요일날 이사할 거니까 너 그날 와서 협조 좀 해라.” 정욱이 가죽 소파에 우아하게 파묻혀서 담배를 꼬나물고 하이네켄 캔을 따는 꼴을 보면서, 아무래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무사히(?) 잘 것 같다는 생각에 지해는 안심이 되었다. 분명히 아무 짓 안 하고 그냥 잘 거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러지 않을까봐 걱정이 좀 심하게 된다. 그러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많이 시켜서 시간을 끌자……. “여기 드나들었던 사람들 많았나 보다?” 캔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지해가 물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상당히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사실……,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할 순 없다. 정욱은 잠깐 찔끔하는 것 같더니 역시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한다. “사람 수로 치면 많았다고 볼 수 있지.” “왜?” “한 사람이 두 번 이상 온 적이 거의 없거든.” “왜?” “글쎄……, 왜 그랬지……?” 사실은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고 다닐까봐 싫어서 그랬었다. 꼬리치는 것 좀 몇번 쳐다봐줬다고 십년은 사귄 것처럼 아는 사람 행세하면서 자기 이름 팔고 다니는 인간들한테 몇번 데었었다. 그래서 한 번 같이 잤는데 좀 켕긴다 싶은 인간은 신원 조사를 시켜서 약점을 잡아두곤 했다. 그나마도 귀찮아져서 나중에는 일체 민간인 헌팅은 안 하고, 프로들만 상대하게 됐었다. 그 편이 편하고 뒷탈 없고 테크닉도 훌륭하고…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돈으로 섹스를 사는 생활도 서너 달 이상 계속했더니 금세 질렸다. 전혀 재미가 없었다. 공허했다. 지금까지 거쳤던 인간들 모두 정욱의 나이를 들으면 설마, 하고 놀라곤 했다. 물론 이 방 주인의 출신 배경을 알고 온 사람은 놀라지도 않았다. 놀란 인간이든 안 놀란 인간이든 한번 같이 자고 나면 그 눈동자에서 의문의 빛은 사라진다. 그 대신 다른 생각들이 그 빛을 대신할 뿐. “…… 그러면…… 나도 여기 또 올 일이 없겠네.” “응, 없어.” 지해는 머리를 바윗덩이로 쿵 하고 맞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고, 머리 꼭대기에서 삐삐 주전자가 물 끓는다고 난리를 쳤다. 그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정욱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웃음을 속으로 웃었다. 잠깐 보고 지나가기엔 너무 아까운 광경이라 충격 상태 그대로 조금 오래 내버려뒀더니만, 저러다 끓는 물 들이부으며 덤비게 생겼다. 무지 아깝지만 할 수 없다. “왜냐고 안 묻냐?” “……씹쌔끼, 너 같으면…… 물을 수 있겠냐?” 지해가 얼굴이 벌개져서 버럭 화를 낸다. “나도 이제 여기 안 오기로 했거든.” 딴 년놈들이랑 뒹굴던 데서 너 안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안 나거든. 이 호텔이 멀리 보이면서부터 계속 그런 생각이 들더니, 이렇게 앉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확실해진다. 김지해, 너는 정말 예외긴 예외인가 보다. 너, 내가 갖고 싶고, 내가 챙기고 싶어. 나중에 귀찮아질테니 관두자고 한두 번 생각해본 게 아닌데, 암만해도 그런 역할을 남한테 넘기기가 싫어. 놈이든 년이든 저 녀석의 옆에 붙는다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 생전 처음으로 ‘다 접어두고 지금의 기분에만 충실하기’라는 모험을 이제 시작하는 거다. 처음 해보는 모험이라 사실 너무 두렵다. 나름대로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 이게 나한테는 얼마나 큰 모험인지……. 저 녀석은 전혀 눈치도 못 챌 거다. 뭐……, 굳이 눈치채게 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각자 자기 생각에 빠져서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 맥주 한 캔씩을 다 비웠다. 정욱이 시계를 보더니 이만 들어가서 자자고 말했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둘 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뒤척이며 잠을 못 이뤘다. 초저녁에 늘어지게 한 잠 잘 잤던 지해는 정욱보다도 더 잠들기가 힘들었다. 자기를 이렇게 가만 내버려두고 잠만 쿨쿨 잘 자는 정욱을 심히 신기하게 여기며,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별별 쓰잘데기 없는 망상들 속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의 나래를 피다가 지해가 겨우 잠들었을 때는 이미 아침해가 떠오를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7. CLOSER You let me violate you, You let me desecrate you 내가 널 범하게 해줘. 내가 널 더럽히게 해줘. You let me penetrate you, You let me complicate you 내가 널 꿰뚫게 해줘. 내가 너와 뒤얽히게 해줘 Help me I broke apart my insides 도와줘. 내 안은 무너지고 있어. Help me I've got no soul to sell 도와줘. 난 팔 영혼도 없어 I want to fuck you like an animal 나는 짐승처럼 널 안고 싶어 I want to feel you from the inside 널 속 깊이 느끼고 싶어 I want to fuck you like an animal 나는 짐승처럼 널 안고 싶어 my whole existence is flawed 내 존재 전체가 잘못되어 있어 you get me closer to god 넌 날 천상의 경지에 다다르게 해 (Closer - Nine Inch Nails)←CLICK! 점심시간. 소란스러운 학생식당. 왁자지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뭐 그렇게 할 말들이 많은지. 왜, 무엇때문에, 집에 편히 앉아 유선 방송으로 어젯밤 드라마 재방송 보면서 영양만점의 따끈한 일곱가지 잡곡밥에, 매운 고추 숭덩숭덩 쓸어넣은 뚝배기 된장찌개 보골보골 데워, 겉절이 김치 쭉쭉 찢어갖구 곁들어 먹는 그 천상의 맛과 이따구 돈 받고 먹으래도 싫은, 무미무취의 무개성한 단체 급식과 바꿔야 한단 말인가. 영양가 없는 밥에 영양가 없는 대화의 잔치. 나 여기서 뭐하는 거지? “선경아, 그거 들었니? 강정욱 2주일 동안 결석한 거 결석으로 안 친다더라?” “어? 그게 무슨 말이야?” “현장 학습 명목으로 출석한 걸로 친다던데.” “누가 그래?” “아까 반장이 교무실 갔다가 담탱이한테 들었나봐.” “그런 게 어딨어.” “재수없어.” “이사장 아들이면 다야?” “야, 우리도 2주일 동안 하다못해 괌이나 싸이판 같은 데라도 갔다오고 출석한 걸로 쳐달래자. 걔, 거기 가서 뭘 했는지 알게 뭐야.” “걔는 재벌 2세가―” “재벌 3세.” “그래, 재벌 3세가 모 그렇게 학교 출석 같은 거에 연연하냐?” “유학 갈 건가 보지. 외국 학교는 학생 받을 때 출석 끔찍이 따지니까.” “맞어. 한국 학교에서 받은 성적은 하나도 안 믿어줘도 출석 같은 거는 장난 아니게 챙기잖냐.” “내가 그 학교 담당자래도 한국에서 받은 성적 안 믿어주겠다.” “하긴 나도……. 크크크크.” “그냥 돈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거 아니야? 걔 정도에서 서류가 필요해?” “명문 학교들은 철저해. 쉽게 안 넘어가. 그리고 걔 자체가 형식적인 거 디게 따지는 거 같지 않냐.” “제대로 할 거 다 해서 찍소리 못하게 하겠다는 스타일이잖아.” “암튼 걔 재수 땡이야. 잘난 척은 우라지게 하고.” “원단 왕자병.” “왕자병보다 더 심해. 자기가 왕인줄 알아.” “그래도 무게잡고 앉아있으면 졸라 멋있지 않냐?” “멋있긴 모가 멋있냐?” “그래. 짜증나고 재수없긴 해.” “재수 원단이야.” 우하하하하……… 이런, 너무 크게 웃었다. 그 녀석에 대해 이 애들(정확히 말하면 여자 둘과 남자 하나)이 뒷담화 까는 거 들으면서 이렇게 크게 웃다니. 본인의 인간성에 대해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근데 정말 너무 웃긴 걸 어떡해. “김지해, 뭐가 웃기냐, 너?” 뭐가 웃긴 걸까? 나도 모르겠어. 그냥 웃겨. 니네가 그렇게 욕하는 그 넘. 나 사실 그 넘 무지 좋아하거든. 그 넘이 집 이사하는 문제로 조금 아까 조퇴하기 전에도 으슥한 데 가서 둘이 키스 한 판 하고 왔거든-. 요기 내가 셔츠 단추 답답하게 채워서 가렸다만 그 넘이 내가 지 꺼고, 지 편이라고 도장 하나 찐하게 박아놓고 갔거든. 니네들 때문에 신경쓰여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거를 내가 알거든. 근데 나서서 그 넘을 감싸줄 수가 없는 현실이 너무 화가 난다…… 나 내가 좋아하는 넘이 니네들 반찬거리 돼서 밥상 위에 오르는 거 솔직히 듣기 싫어. 니네들의 객관적인 비방과 나의 주관적인 평가가 일치하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다만. 그래서 더 웃긴다만. 그래도 듣기 싫다. 내가 좋아하는 넘을 욕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는 내 자신이 일단 역겹고, 한심하고. 그 넘이야말로 왜 일케 주위에 깎아내리려고 하는 인간들만 있는지 이 꼴만 봐도 뻔하니까 정말 안됐고. 오래 지켜보진 않았지만 그 넘 왠지 나만큼이나 외로운 넘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 넘도 나 좋아하고, 나도 그 넘 좋아하니까 오래오래 붙어서 그 넘 편이 되어주고 싶은데, 암만 해도 현실은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아서 좀 슬프고나. 이 이상한 관계가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일주일이 갈지, 한 달이 갈지, 아니면 다행히 내년에 2학년 올라갈 때까지라도 갈지 전혀 모르겠지만…… 끝날 때까진 정말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 들었단다. 비장하고 촌스럽고 디따 낯간지럽지 않냐? 그래서 웃었다, 왜? “나 속이 좀 안 좋아서 먼저 올라갈게. 니네들은 천천히 와라.” 지해가 거의 손도 안 댄 식판을 반납하고 식당 밖을 나가자, 참새들이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지해가 반찬거리가 되었다. 솔직히 지해가 집은 어려워도 인물 훤하고 귀티 나는데다 성적도 상위권이고, 막강한 꽃미남 수재 형에 대한 교사 군단의 엄청난 총애 ―이 학교는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들도 빵빵한 인간들이 많아서 애들이 선생들을 완전 함부로 보진 않고 있었다― 까지 은근한 플러스 요인이 되어 이 학교에서도 무시를 당한다거나 따를 당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 워낙 다들 왕자 아니면 공주인지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개인 플레이에 바쁜 나머지 그런 것까지도 단합이 안 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반에서 지금까지 지해의 위치는 그냥 혼자이고 싶어하는 애일 뿐이었다. 관심은 사절하지만, 전혀 적대적이지 않고, 그다지 주눅들지도 않고, 막상 알고 보면 상냥한 애. 고로 사실상 남에게 해를 주거나 신경 거슬리는 일은 거의 없는 애……. 껍데기도 그럴싸하고 내용물도 괜찮으니까, 가난하다지만 참아준다, 그 정도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애가 혼자서 놀고 있을 땐 관심 안 두면 그만이지만, 자기들 범주에 들어와서 조금씩 신경을 긁기 시작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지해 자신도 본능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아이들의 궤도로부터 이탈해 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한선경 급 정도 되는 애들―즉, 중산층 출신의 모범생으로 어떤 계층의 애들과도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부류―과도 같이 행동한지 얼마 안 되는 지금부터, 보이지 않는 이질감으로 이미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더 나아가서 누구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선망의 대상이자 열띤 뒷담화의 대상인 강정욱 같은 존재와 겉으로 친분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는 예측할 수도 없었다. 학교 생활 좀 조용히 해보자고 더욱 더 피해 다닌 녀석이었는데, 이제 자기 감정에 충실하기로 한 이상 어떻게 지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너 아까 왜 그렇게 금방 올라갔어?” 딴 때보다 서둘러 자리로 돌아온 선경이, 책상 위에 다리 쭉 뻗고 뒤통수에 양손 깍지낀 채 멍하니 의자에 늘어져 있는 지해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속이 안 좋다고 했잖아.” “밥도 거의 다 남기고.” “맛이 없더라.” “그래도 먹어야지 이따가 힘빠져서 어떡해.” “나 정말 괜찮거든. 신경쓰지 말아줄래?” 깨끗한 얼굴을 찌푸리고 얇은 금테 안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경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지해는 좀 심하게 짜증을 부린 것 같아 미안해졌다. 여자애한테 신경질 부릴 정도로 옹졸한 녀석이고 싶지는 않다. “너, 요새 좀 이상해.” “어? 뭐가?” “분위기가……. 너 무슨 걱정거리 있니?” “걱정거리? 그런 거 없는데.” “진짜?” “전혀 없었는데 니가 지금 만들고 있잖냐.” 아무리 밝은 척 꾸며대도 선경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다. “아까도 좀 지나치게 예민한 것 같았고…….” “아까?” “강정욱 얘기 나오니까 너 표정이 금방 달라지더라.” “엥?” “니가 걔랑 좀 친한 거 알긴 아는데…….” 지해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때 너 체육시간에 쓰러졌을 때도 걔가……. 글구 둘이서 수업 같이 빠진 적도 몇 번 있었고.” 영리한 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꼭 찝어내면 어떡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되지? “아까는……, 걔랑 친해서라기보다……, 나 원래 누구 뒤에서 욕하고 그러는 거 좀 별로야. 사실 듣기 좋지 않더라. 넌 걔가 그렇게 싫냐?”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야, 음악이나 듣자.” 지해는 화제를 얼른 바꿀겸 가방에서 MP3 CD겸용 CDP를 잽싸게 꺼내서 이어폰 한쪽을 얼른 선경에게 건네고 자기도 한쪽을 꼽았다. 정욱은 새벽에 호텔에서 집으로 데려다주고 유럽 여행 기념 선물이라며 이 CDP와 ‘닥터 비트’라는 전자 메트로놈을 선물로 주고 가버렸다. 이 전자 메트로놈이 꽤나 비싼 물건이라(물론 그 호텔방 하룻밤 숙박비도 안 됐겠지만) 지해로선 정말 받기 껄끄러웠다. 플레이를 시키는 순간, 지해는 아차 싶었다. 아침 시간이 빠듯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MP3 CD를 넣고 왔더니 엉뚱한 것이 들어있다…. “어, 이거 뭐야?” 가사도 없이 흘러나오는 뭔가 생경한 느낌의 간단한 반주곡 같은 것을 듣고 선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해는 반사적으로 선경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악, 왜 하필 이게 들어가 있었지.” “이거…… 처음 듣는 건데…….” “으윽……, 내가 만든 곡이다.” “어, 정말?” “어쩌다 보니 네가 처음 듣게 됐구나…….” “어떻게 녹음한 거야?” “디지털 키보드랑 컴퓨터랑 연결해서 녹음해 갖구 MP3로 변환했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비트랑 베이스 같은 것도 넣을 수 있거든…….” 선경은 연이어 나오는 지해의 습작곡들을 들으면서 너무 멋져를 연발하고 가사가 없으면 자기가 가사를 써주겠다는 둥 방방 떴다. 어쨌든 이 충격이 제법 컸는지 오후 내내 선경은 정욱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BGM : Love is here to stay - Harry Connick Jr.)←CLICK! “홍사장님, 안녕하세요.” “어이, 찰거머리. 어쩐지 오늘 안 온다 싶었더니…….” “안 올래다 왔답니다.” 주원은 자기가 온 것도 모르고 피아노만 열심히 두들겨대고 있는 지해를 힐긋 바라보고, 카운터 가운데의 바 스툴에 털썩 앉았다. “여기 앉으면 사람 꼬일텐데, 저기 구석자리에 앉아있지.” “됐어요. 사람 꼬이면 지해더러 해결하라고 하죠.” “왜 그래? 둘이 싸웠어?” “몰라요. 저 개자식.” 홍사장은 며칠 새 볼이 쑥 들어간 주원을 보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너무 매달리는 것도 역효과야.” “알아요.” “그럼 그러지 마.” 한참동안 주원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 새끼밖에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어떡해요?” 간신히 쥐어짠 정직한 대답. “으이그……, 고3이 그러면 어떡해?” “괜찮아요. 성적 암만 떨어져도 전문대 갈 실력은 돼요.” “좀더 열심히 해서 좋은 데 가고 저 녀석은 좀 풀어주지 그래.” “대학 안 가도 먹고 살만해요, 저.” “그러다가 금방 영장 나온다…….” “손 써서 면제 받을 거에요. 군대 가면 저 죽어요.” “면제 사유는 뭘로 할 거야?” “상사병이라고 하죠 머. 것도 정신질환이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홍사장이 주방 안으로 들어간 다음, 주원은 스툴을 돌려 지해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조용히 피아노 소리에 귀기울였다. 저 피아노 소리를 중3때 처음 들었다. 중3때 부반장씩이나 했던 주원이 방과 후에 담임 심부름을 마치고 복도를 지나다가 임경숙 선생이 음악실 앞에서 안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는 걸 봤었다. 일단 인사를 했더니, 선생은 둘째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주원이 1학년 때 갓 졸업하고 부임했던 그 여선생. 생전 립스틱 하나 안 바르는 맨얼굴에, 긴 막대기 하나 들고 다니면서 남자애들을 거침없이 두들겨 패던 괄괄한 선생이었다. 똑똑하고, 확실하고 꽤 괜찮은 여자였다. 한참을 밖에서 듣기만 하더니 그 선생이 이렇게 말했었다. ‘저 녀석은 음악 하면 안돼. 너무 좋아하고 너무 매달려. 저런 스타일은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안 풀리면 쪽박차. 나중에 폐인돼.’ 그때 음악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키큰 녀석이 저 놈이었다. 알고 보니 학기 초에 주원의 반으로 전학왔던 그 무지 이쁘게 생긴 놈의 동생이었다. 1학년이라는 얘기를 듣고 좀 놀랐었다. 저 녀석 중딩때부터 담배만 안 피웠어도 키가 더 컸을 거다. 하긴 그 때의 그 어두운 얼굴을 생각하면 담배보다 더한 거를 했어도 이해가 갈 것 같다. 그 선생과 지해의 관계…, 눈치채고 있다. 지해 본인은 과연 알긴 하는 걸까 싶은 사실도 알고 있다. 지해가 샐러리맨 운운 하면서 음악은 취미라고 고집부리는 것도 그 선생이 세뇌시켜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다. 저 녀석…,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르는줄 알지만,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다. 혼자서 다 극복한 것처럼 굴어도 아직 부모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언젠가 같이 잤을 때, 악몽에 시달리는 것도 본 적 있다. 그 어머니한테 죽을 뻔한 기억 때문에 여자 사귀기 힘든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뭐든 전부 다 아는데, 다 이해하는데, 저 새끼는 자기를 너무 몰라준다. “결국 나타나셨군.” 지해가 쉬는 시간 됐다고 이쪽으로 와서는 자기 옆자리에 긴 다리를 턱 뻗치고 걸터 앉더니 담배 한 대를 꼬나문다. “내 돈 주고 내가 술 먹으러 왔는데 니가 뭔 참견이냐?” “누가 뭐랬냐? 온 김에 헌팅이나 하지 그래?” “이 싸가지 없는 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너 그러다 천벌 받어, 임마.” “………….” “나쁜 자식아.” “………….” “개새끼야.” “……알았어. 미안하다고 했잖아.” 지해는 서슬이 시퍼런 주원의 기세에 대꾸도 못 하고 담배만 허벌나게 피워댔다. 오늘따라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일진이 사납다. 뭔가 분위기를 띄울만한 얘깃거리가 없을까……? “아~!” 아, 그거다. 그게 있었지. “뭐?” “있잖아……너….” “뭐야? 말해!!” 말 꺼내기가 힘들어 질질 끄는 지해를 주원은 사뭇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 보았다. “너, 첫경험이 언제였냐?” 재빨리 다다다다 묻고 그 즉시 후회하며 지해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하긴 했지만, 괜시리 찔리기까지 했다. “왜? 너 이전에 나 먹은 인간이 궁금해? 나도 한때 잘 나갔었다. 너땜에 완전히 망가졌지만.” “그래, 궁금하다. 무지 궁금해……” 지해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중3때다, 왜?” “많이…… 아팠어, 그때?” 주원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걸 묻고, 얼굴이 벌개져서는 눈도 잘 못 맞춘다. 이상해. 이상해. 얘가 왜 이딴 걸 묻지……? “왜? 너도 한번 박혀보고 싶어?” “……미, 미쳤냐…?”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버벅대기까지. “언제든지 말만 해. 내가 해줄 테니까.” “…으으윽…관두자, 관둬.” 그리고 애꿎은 담배만 뻑뻑. “엄청 아퍼. 진짜 아퍼. 난 테크닉 없는 놈 만나서 죽다 살아났다. 일주일 동안 앓았었어.” 뜨끔, 놀라는 표정에 심증은 더욱 굳어지고. “그거 익숙해지는 데 꽤나 오래 걸리더라.”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몇 달 걸렸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상대를 잘 만나야 돼. 너 잘 하잖아. 너같이만 하면 돼.” “……거기서 내 얘기가 왜 나오냐? 남들이 들으면 엄청 많이 했는줄 알겠다!” 자기 얘기가 나오자 민망한 듯 버럭 큰 소리로 쏘아붙이는 지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주원이 대뜸 입을 열었다. “지해야, 오늘 하자.” “아악~! 이 인간이 왜 이래? 싫어~!!!!” “뭘 그렇게 질색 팔색을 하면서 날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랑 가. 나 이제 쉬는 시간 끝나서 가 봐야 돼.” “아직 남았는데 왜 그래?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야? 너 진짜 요새 왜 그래?” “내가 뭘?” “너 이상해졌어. 진짜 이상해졌어. 뭐야, 너? 무슨 일이야?” 주원은 계속 뭔가 찾아내려는 듯 지해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정말 오늘 이런 표정 많이 본다고 생각하며, 지해는 그렇게 자신의 얼굴에서 표시가 나는 건지 새삼 의아해 했다. 뭔가 이상해졌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얼굴에 ‘연애중’이라거나 ‘사랑에 빠졌음’이라거나 ‘웬놈한테 코가 꿰었음’이라거나 ‘아침부터 밤까지 진종일 어떤 놈을 생각하면서 헤벌레하고 다님’이라고 써있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표시나는 일인가? “무슨 일은 무슨……! 나 갈 거야. 너도 빨랑 가.” 얼른 내뱉고 지해는 냅다 피아노쪽으로 뛰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표시가 난다면, 나중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엄청나게 겁나지만, 솔직히 두근거린다. 궁금하다. BGM : Thelonius Monk - I'm Confessin' (That I Love You) 그리고, 약속한 이삿날. “뭐야, 이사… 다 끝난 거야?” 정욱이 이사했다는 곳은 한강을 굽어보는 세련된 호화 빌라의 8층. 맨 꼭대기층이었다. 1층 경비실 벽에 쫘악 붙어 있는 열몇 개의 푸르뎅뎅한 CC-TV 모니터들부터 사람 주눅들게 하더니, ‘자동’이라고 써 있는 그놈의 유리문은 위에 있는 집주인이랑 인터폰으로 확인을 하거나 비밀번호를 눌러야지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었다. 그 문으로 들어와서 왼편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창밖의 한강 풍경이 그대로 보이도록 창쪽 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밤에 타면 정말 끝내줄 것 같았다.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보니, 다른 층은 한 층에 두 가구씩인데, 맨 윗층만 이 집 하나뿐이다. 아마 여기가 제일 넓은 평수일 거다. 여기에 소위 가출한 고딩 1학년 짜리가 혼자 산다니…….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오늘 이사한다고 하지 않았었어?” 널찍한 현관에는 나무결이 그대로 보이는 고급 목재로 만든 신발장이 천장 끝까지 서 있었다. 검은 대리석이 깔려 있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으며, 지해는 그냥 보기에도 무지 넓어 보이는 집안을 한번 쓰윽 둘러보았다. 어림잡아 준석의 집과 비슷한 평수인 듯 보였다. 그것보다는 많이 좁은 건가…. 그래도 꽤나 넓다 싶은데…. 평범하게 여닫는 방문의 수는, 현관 바로 옆의 화장실을 빼고 서너 개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가만히 보니 마치 일본식 집처럼 거실 양쪽에 활짝 열려 있는 미닫이 문들을 닫으면 그게 두 개의 방이 더 되는 거고, 지금처럼 모두 다 열면 그 방들까지 포함해 거실이 더 넓어지는 것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선 실내의 바닥에는 반짝이는 검은 대리석과 흰색 대리석이 세련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빨리 들어오기나 해.” 정욱은 흰색 나시 티에 헐렁한 아이보리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지 오래되진 않았는지 머리에 아직도 물기가 좀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해는 정욱이 교복 차림이 아닌 걸 처음 본다. 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구리빛 팔뚝과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목에 걸린 얄상한 은색 체인이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 정말 끝났나 보네.” 먼지 구덩이 속에 박스들이 수북히 쌓여있을 걸 예상했었는데, 박스는 커녕 묶었던 끈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도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었고, 웬만한 세간과 짐은 이미 깔끔하게 제자리에 정리돼 있었다. “학교에서 와보니까 거의 다 끝나 있더군.” “주인도 없는데?” “미리 지시해 놓고 다른 사람더러 일하는 거 지켜보라고 시켰으니까….” “그래도…….” “특별히 실수해 놓은 건 없더라. 대충 내가 다시 정리했으니까 됐어.” 그야말로 운동장만큼 넓은 거실에서 기술자 두 명이 흰색 대형 스크린과 빔 프로젝터, 크고 작은 스피커 여섯 개, 대형TV, AV 앰프, 비디오, DVD 플레이어, 위성 튜너 등을 설치하고 선을 연결하고 있었다. 바닥 한쪽에 놓여 있는 리모콘의 숫자만 하나, 둘…… 여덟 개다. 이 작업도 대충 끝나가는지 기술자들이 하나하나 틀어보며 점검 중이었다. TV와 벽에 붙은 대형 스크린에서는 재방송중인 드라마가 나왔다가, DVD에 든 해리포터가 나왔다가,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은 그림이 나왔다가 하고, 소리도 이 스피커, 저 스피커에서 번갈아 우렁차게 울려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술자들은 뭐가 또 잘못됐는지 자기들끼리 어쩌구저쩌구 하며 선을 다 빼서 다시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사한다길래 노가다할 각오하고 왔더니만…….” 하도 오래 입어 무릎이 다 해져서 결국 무릎 길이로 잘라버린 낡은 청바지에 연한 레몬색 티셔츠와 헐렁한 체크 남방을 걸친 지해는 어색한 웃음을 웃으며, 군데군데 닳아서 찢어지기까지 한 바지 표면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일 많이 해야하는 줄 알고 너무 허름하게 입고 왔다. “내가 협조하랬지, 언제 노가다 시킨댔냐.” 늘 학교에서 교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배경도 옷차림도 다 바뀌어서 낯설기 그지 없었지만, 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그 녀석이 틀림없었다. 조금 안심이 된다. “너 혼자 사는 거야? 이 넓은 데서?” “그래도 좁아.” “………하늘이 두렵지도 않냐, 씨뎅아.” 이런 쓰버럴, 세상은 왜 일케 불공평한 거야, 하고 지해가 투덜거리자, 정욱이 씨익 웃으며 지해가 하고 온 헤어밴드를 쑤욱 뽑았다. “너 이거 하니까 디게 귀엽다.” “아, 아~! 아퍼~! 머리카락까지 잡아당기냐, 너? 이리 내~!!” 빙글거리는 정욱의 손에서 헤어밴드를 잽싸게 나꿔채 얼른 다시 하고, 어깨에 멨던 배낭을 거실의 베이지색 가죽 소파에 내려놓았다. 이 배낭에는 양말(바닥이 더러울까봐 청소 다 하고 신으려고), 여분의 티셔츠(땀을 많이 흘릴 때를 대비하여)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지해는 맨들맨들한 대리석 바닥을 보며, 양말을 신고 왔으면 자칫 미끄러져서 망신당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 맨 발자국이 아직 기스 하나 없는 새 대리석 바닥에 찍히니 왠지 미안하다…… 제기랄, 뭐 어때…… 집주인도 그러고 있는데…… “더운데 남방 벗어.” 지해는 대답 대신에 남방 칼라 한쪽 끝을 조금 들춰 아직도 벌그스름하게 남아있는 키스마크를 보여주고, 작업중인 기술자들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정욱은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지해의 손목을 잡아 끌고 안쪽의 방으로 갔다.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는 걸 보니, 정신이 버쩍 난다. 아니나 다를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끌어당겨 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뒷발로 문을 차 닫고, 그대로 지해를 벽에 밀어붙인 채 정신없이 입술을 탐해 온다. 두 사람의 혀가 얽히고 춤을 추는 동안, 정욱은 아까부터 벗으라던 남방을 제 손으로 벗겨내고는 티셔츠 안의 맨살을 더듬으며, 턱선을 따라 버터플라이 키스를 마구 날리고, 입술을 점점 아래로 가져가 목덜미를 빨아들였다. 누가 들을까 무서운 신음이 저절로 토해져서 공중을 떠돌다가 만난다. “야……… 도장………찍지 마.” “키스할 때………… 말…………시키지 말랬지.” 등줄기를 타고 뻗친 전율이 서서히 배꼽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퍼져 내려간다. 갑자기 무릎 사이에 힘이 쭉 빠졌다. 지해의 무릎이 푹 꺾이자, 정욱은 품에 안은 채로 몸의 방향을 틀어서 침대쪽으로 밀고 가 쓰러뜨린 뒤 계속 집요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정욱이 지해의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는 오른쪽 유두를 혀로 핥고 이를 세워 찌르면서, 왼쪽 유두를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간질였다가, 손톱으로 쿡쿡 쑤셨다가 하며 한창 못살게 굴고 있는데 바깥에서 ‘저기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가… 봐….” 정욱은 지해가 언제 그래놨는지 등을 쓰다듬느라 위로 쭉 치켜 올려버린 나시 티를 끌어내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가 야단맞고 반성하는 듯한 자세로 두 손을 모은 채 뜸을 좀 들이자, 잔뜩 흥분했던 아랫도리가 겨우 옷 밖으로 티가 안 날 정도로 가라앉았다. 아직도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 지해에게 한번 보이고 OK 사인을 받은 뒤 정욱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특별히 녀석에게 확인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못된 장난의 공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재밌었다. 이거는 뭐를 눌러라, 이 기능은 뭐다 하며 어쩌구저쩌구 설명하는 기술자들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고 거의 내쫓다시피 보낸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메인 리모콘에 입력을 어떻게 해놨는지도 물어봤어야 했다. 매뉴얼 보고 직접 다시 입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해는 잔뜩 달궈졌던 몸을 겨우 추스려서, 침대 모서리에 한쪽 다리를 접어 올린 뒤 그 무릎 위에 양팔을 느슨하게 팔짱껴 얹고, 다른 다리는 침대 밑으로 늘어뜨린 채 멍하니 앉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욱이 들어오자, 잠깐 쳐다보고 억지로 웃을 듯 하더니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까의 발그레한 얼굴과 열에 들뜬 눈동자는 사라지고 표정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보고 있자니 그다지 기분 좋지 않다. 새로 해서 달아 놓은 커튼 때문에 방 안에 햇빛이 들지 않아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정욱은 얼굴 대신 타이트한 청 반바지 밑으로 이쁘게 쪽 빠진 무릎과 매끈한 종아리를 쳐다 보았다. 군데군데 바지가 찢어진 틈으로 하얀 속살이 보인다. “김지해, 너 일부러 그 바지 입고 왔지?” “어…? 아…, 오늘 일 많이 할줄 알고. 이거 평소 내 작업복이거든.”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쑥스러워서 그런 건가? 정욱은 침대 옆 바닥에 대충 무릎을 꿇고 앉아 드러난 종아리와 가느다란 발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로 그 말이야. 작.업.하러 온 거잖냐.” “………무슨 소리 하는……!!…… 야~!!!!” “암튼 이제 이 바지 딴데서는 절대 입지 마. 여기서 작.업.할 때만 입어라.” 지해가 말뜻을 깨닫고 발광하기 시작하자 정욱은 바지의 찢어진 틈으로 보이는 맨살을 아프게 꼬집었다. “이 새끼~!!! 너 오늘 내 손에 목 한번 졸려볼래?!!! 내 손 우습게 보면 큰코 닥친다, 너~!!!!! 으윽, 이 징그런 새끼…….” “아니, 혹시 모르니까 오늘 벗어놓고 가는 게 좋겠다. 새 거 사주께.” “저 씹쌔끼 저거…!!!! 너 죽어~!!!!” 정말로 목이라도 조를 기세로 덤비는 지해를 가볍게 한 손으로 막아낸 뒤 침대에 내팽개치자, 녀석은 이제 포효하며 침대 위의 베개와 쿠션을 무차별적으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정욱은 일단 문 밖으로 후퇴를 했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다. 저 녀석은 저렇게 좀 깜찍하게 지랄을 떨어야 저 녀석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 손이 진짜 만만치 않긴 하겠다. 숙련된 피아니스트들은 여자라도 한 손으로 성인 남자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저 녀석 정도야 간단히 힘으로 제압할 수 있지만, 불필요하게 힘을 빼면 서로 손해(?)니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는 목을 조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할 정도로 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까운 재미 하나를 놓친다는 사실에 정욱은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런 냉장고 안에 물밖에 없다니….” 지해는 부엌과 그 옆의 세탁실을 면밀히 검사하면서, 고급 식기 세척기에 경악하고, 건조까지 다 한큐에 해결해 주는 드럼 세탁기에 침을 질질 흘리고, 얼음을 냉장고 문 밖에서 받을 수 있는 대형 냉장고를 보고 하늘을 원망했다. 그런데 두어 달 치의 비상식량은 너끈히 저장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냉장고에 물밖에 없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물었더니, 이따가 맥주 두 박스를 사서 채워넣을 거라고 한다. 아무래도 과일이랑 음료수도 좀 사서 넣어줘야 될 것 같은데 오히려 공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하고 진심으로 의아해 하며, 얼마나 사야 될지 냉장고 문을 연 김에 견적 한번 뽑아보라고 하는 인간이 이 집 주인이다. 지해는 침실에서 오래 삐진 채 있지 못하고 얼마후에 저절로 풀어져서 나와버렸었다. 집안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경을 했다. 넓으니까 볼 것도 많았다. 그리고, 말로는 대범한 것처럼 큰 소리 쳐놓고서 가구 위치와 장식품의 배치를 다시 세심하게 점검하고, 기술자들이 해놓고 간 거를 일일이 확인하다가 투덜투덜거리는 정욱을 놀려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니,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자기만의 독립된 공간을 획득한 뿌듯함에 사실 상당히 업되어 있던 정욱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염되어 자기가 왜 난리를 쳤었는지조차 까먹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나름대로 뭔가에 열중해 있는 정욱과는 달리 할 일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기가 좀 어색하다. “야, 내가 협조해야 할 건 뭐냐? 나 심심하다.” “협조하고 싶냐?” “…… 일단 약속은 했으니까….” “물 한 잔만 갖다 줘.” “그걸로 협조사항 종결이야?” “아니.” “또 있어?” “응.” “말만 해라. 나 일 잘해.” “우선 빨리 물이나 갖다 줘.” 그렇게 하여 지금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유리컵(그나마 그냥 컵은 하나도 없고 바닥에 made in Italy라고 씌어 있는 크리스탈 글라스들밖에 없었다)에 담아,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작은 쟁반에까지 받쳐 갖다주고 있는 것이다. 아까는 기술자들이 연결을 잘못했다며 결국 스스로 선을 다시 연결하던 정욱은 지금 매뉴얼을 펼쳐놓고 리모콘의 버튼을 열심히 눌러대고 있었다. “뭐하냐?” “이 리모콘 하나로 여기 있는 게 전부 다 한꺼번에 움직이도록 만들고 있는 중이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 “글쎄…….” “그냥 하나하나 따로 쓰면 되잖아. 지 꺼가 따로 있는데 왜 꼭 그래야 되냐?” “효율적이잖아. 그리고 이게 다 밖에 나와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지저분하냐?” 그렇게 말하는 정욱의 앞에는 나머지 7개의 리모콘이 줄을 딱 맞춰서 정확한 90도 각도로 앞을 보고 있었다…… 우와…질린다. 아까 정욱이 책상 서랍을 열어서 뭔가를 꺼낼 때 어깨 너머로 봤던 서랍속 상황도 그와 마찬가지로 일목요연, 질서정연 그 자체였다. 그걸 가지고 뭐라 그랬더니, 한번 처음에 그렇게 해놓으면 일이 영원히 쉽다는 것이다. 효율적인 길이 있는데, 왜 헝클어 놓아야 하느냐고 반문까지 했다. “환자 같다, 너.” “왜?” “중앙집권 전제군주……독재자…… 히틀러… 편집증 환자…… 뭐 그런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정욱은 전혀 기분 나쁘지도 않다는듯이 하던 일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어휴, 나중에 누가 니 마누라 될지 그 여자도 참 힘들겠다.” “――!” 이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자기가 말해놓고서도 자기가 굳었다. 말을 꺼내놓는 순간 잘못이라는 걸 알았다. 말을 뱉고나서 정확히 1초 안에 가슴 속에서 뭔가 따끔따끔한 것이 밀려왔다. 정욱은 그 자세대로 눈길은 하던 일에 고정한 채, 손만 멈추고 있다. 긴장된 침묵. 누가 먼저 입을 열어야 상황이 정리되는 걸까. 누가 먼저 뭐라고 말을 꺼내야 아까의 편안한 분위기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말이 나올 때 서로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되는 사이인 거냐? “나중 일은 나중 일이야.” 정욱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해는 녀석이 먼저 말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뭔가 속에서 울컥하는 것 같아 대답을 못 하겠다. “그게 너잖아. 나 그거 너한테 배웠다. 난 그런 거 모르고 살았었거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 이제까지 버텼는데 설마 죽기야 하겠냐 하는 거.” “………….” “그거 못 하겠으면 지금 집에 빨리 가라.” “………….” “곱게 놔줄 때 빨리 가.” 그래, 우리는 딱 요만큼 왔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허탈한지 모르겠다. 이 정도 말해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되는 걸까…… 나는……? 지해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정욱의 옆에 놓인 글라스를 뺏어 들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차갑고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친 이태리제 크리스탈이 무참하게 산산조각났다. “씨발, 이 좆같은 새끼! 너 그렇게밖에 말 못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욱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 보는 게 보인다. 입꼬리가 치켜 올라간 채 웃고 있다…… 시팔, 지랄 맞게 섹시하다…… “어떻게 말해줬음 좋겠냐, 그럼?” “말 필요없어! 나 오늘 안아줘. 마음의 준비 다 돼 있으니까 꿰뚫고 들어와!” 정욱이 일어나서 지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엄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래도 계속 떨어지는 눈물을 혀로 핥아낸다. “후회 안 할 자신 있냐?” “시끄러, 이 씹새꺄. 피 한 방울이라도 냈단 봐라. 넌 내 손에 죽을줄 알아.” 정욱이 지해를 그대로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이 자식 저 유리 깨진 거 밟지 말아야 되는데, 그 생각만이 지해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BGM : Gymnopedie I(Satie) - piano : Peter Schindler “야, 여기다 내려놓으면 어떡해?” 눈물을 질질 흘리느라고 눈을 감고 있다가 정욱이 내려놓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침대가 아니었다. 그냥 어중간한 방 한복판이다. 당연히 침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뒤로 기대기라도 했다가 엉덩방아 찧었으면 마음의 준비고 결심이고 뭐고 다 날아갈 뻔 했다. “너 머리 묶을 거 갖고 왔어?” “배낭에 있는데, 거실 소파에… 어디 가?!…… 어? 강정욱!… 바닥에 유리 조각 조심해, 임마!” 정욱이 잽싸게 배낭을 들고오자, 지해는 발바닥 검사부터 했다. 말짱하네, 하고 말하니까, 안 밟았으니 당연히 말짱한 것 아니냐, 하고 대꾸를 한다.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라 썰렁하기까지 하다. 바람 빠지는 허탈한 웃음을 피식 하고 웃다가 생각해 보니, 방금 전까지의 상황은 뭔가 엄청난 거를 하려던 대단한 순간이었었다. 어~ 하는 순간, 정욱이 지해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신중하다 못해 경건한 표정으로 리드미컬하게 티셔츠와 바지와 속옷을 제거해 알몸을 만들어 버리고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샅샅이 바라본다. 뭐랄까, 저 눈빛은…… 너… 떨고 있냐? 아니……, 내가 떠는 건가? “새끼… 뭐하는 거야? 왜 나만 벗겨” “샤워하게 머리나 묶어.” 정욱은 담담하게 내뱉고, 옷을 하나하나 벗어 던졌다. 지해는 배낭을 더듬어 머리끈을 꺼내 하나로 치켜 올려 묶으면서도 녀석의 탄탄한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군살은 조금도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만 뭉쳐진 단단한 가슴과 팔다리. 깎아놓은 듯한 얼굴선. 넓은 어깨. 커다란 손. 강인한 남성의 상징. 역동적인 구리빛 피부… 마치 무슨 청동조각상을 보는 듯한… 저 녀석한테 이제 안기는구나……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저 녀석한테…… 겁이 좀 나긴 하지만 이렇게 미치도록 심장이 뛰는 걸 보면…… 분명 제 정신이 아니다……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인 거다. 정욱은 자신을 향한 지해의 시선을 느끼고 씩 웃더니 지해를 번쩍 안아들고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며 침실에 딸려 있는 욕실로 향했다. “야, 자꾸 번쩍번쩍 들지 좀 마. 내가 여자냐?” “가만히 좀 있어.” “설마 처음부터 이런데서 하자는 건 아니겠지?” “씻어야 돼.”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볼 것 같은 흰색과 연회색 타일로 세련되게 장식된 욕실. 정욱은 커다란 아이보리색 자쿠지 욕조에 지해를 내려놓고, 샤워기를 들어 물을 틀더니 한쪽 손으로 물의 온도를 맞추고 지해와 자신에게 끼얹은 다음 스폰지에 바디샴푸를 묻혀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따뜻한 수증기가 차오르기 시작한 욕실 안에 은은히 기분 좋은 향내가 퍼져간다. 분위기만으로도 확 가버릴 것만 같은데. 아, 정말… 그냥 이 녀석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무지 어색하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되겠구만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왜? 드러워서 그냥은 도저히 못 하겠냐?” “아까 어떤 놈이 네 몸에 침 발라놔서 씻어내는 거야.” 정욱이 지해의 몸 구석구석에 정성들여 비누칠을 해주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에 닿는 손길에 절로 움찔움찔 떨리고 손끝이 저려온다…… 근데…, 잠깐…! 뭐, 뭐가 어째? “어떤 놈이라니?!!! 무슨 개소리야? 사람을 뭘로―” “이런 새대가리. 너 기억 안 나?” “괜히 사람 의심하지 마!!! 그런 거 없어!” “잘 생각해봐.” “없다구!!!! 아까 네가 그런 것밖에―” “그래. 바로 그거. ‘나’ 말이야.” 으윽, 웃기는 왜 웃냐, 이 미친 놈아. 환자야. 정신병자야. 변태야. 엽기남아….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온다. 니 놈이 비누칠 해주는 손길에 좋다고 부르르 떨면서 꼼짝도 못하고 몸 맡기고 서 있는 나도 미쳤지만, 넌 정말 한 술 더 떠서 중증이야. 매우 심각해. 널 진짜 어쩌면 좋으냐, 엉? “아까 그 놈이랑 지금 이 놈이랑 다른 놈이기 때문에 그런다.” “엑?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히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임마?” “지금 이 놈은 너한테 안아달라는 말을 들은 놈이고, 아까 그 놈은 아니란 말야!! 같은 놈이 아니잖아~!!!” 지해는 정욱이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건 처음 들었다. 깜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다가 비누거품이 흥건히 떨어져 있는 욕조 바닥에서 발이 미끄러져 기우뚱하고 말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나동그라질 뻔한 지해를 정욱이 잽싸게 잡아당겨 안고 욕실 한쪽 벽에 기대어 버티고 섰다. 그냥 잠깐동안 아무 말없이 서로 안고만 있었다. 너무 포근하고, 안락하고, 행복해서…… 그냥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지해의 머릿속에 살짝 스쳐갔다. 아까 멎었던 눈물이 또 나올 것 같아서 정욱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았다. 한쪽 손으로 등과 엉덩이를 연신 쓸어내리며 귓가에 속삭이는 애타는 목소리. “휴우, 자꾸 도발하지 좀 마라. 지금 간신히 참고 있는 것 안 보이냐?” 보이는 것도 보이는 거지만…… 아니, 보고 있을 때까지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는데, 밀착되는 순간부터 그야말로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저 상태로 그냥 뒀다가는 급하다고 마구 찔러 넣을텐데 그러면…… 정신이 버쩍 든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정욱이 지해의 손을 잡아 자신의 그곳으로 가져갔다. “이대로 하면 너 다쳐. 일단 이건 네 손으로 해결 좀 해줘라.” 벽면에 붙은 욕조의 턱에 정욱을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한쪽 팔로 녀석의 등을 끌어안고 자기한테 기대게 한 뒤 지해는 손으로 그곳을 마찰해주기 시작했다. 본인이 기어이 해달라니까 하는 거지만, 안 해도 상관없는데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칠갑을 하게 되어도, 며칠 동안 꼼짝 못 하고 기어다니게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의외로 욕실에 꽤 오래 있었나 보다. 녀석의 것을 배출해 주다보니 자신도 흥분이 되어 결국 서로 입술이 부르터라 키스를 하며 차례로 배출해주고 말았다. 멀쩡한 두 다리(사실은 무지하게 긴장했는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놔두고 또 안겨 나가는 것이 너무 민망한데, 정욱이 하도 고집을 피우니 할 수 없다. 이건 마치…… 첫날밤 새색시 같잖아. 정욱은 지해를 침대에 살짝 내려놓고, 지해가 들고온 커다란 타월을 침대 위에 깔고 그 위로 올라가자, 자신도 침대 위에 앉아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입술을 마주 댔다. 보송보송한 타월. 발끝에 닿는 침대 시트. 서로 마주 닿는 맨살의 느낌. 따뜻한 체온. 으으으……, 이건 현실이다. 이제 정말 시작하는 거다. 입술을 핥던 혀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처럼 온몸에 불길이 퍼져나간다…… 아아…. 좋아….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겨드랑이 밑으로 넣어 엄지 손가락으로 가슴께를 살살 애무해주며, 입술을 다시 이마로, 이마에서 콧날로, 다시 입술 위로 가져간다. 닿을락말락 쪼아대는 듯한 입술이 너무 감질나 지해는 정욱의 입술을 핥다가 자기 혀를 쑥 집어넣고 녀석의 혀를 찾아 감고 입 안을 휘저으며 오른손으로 그 등 위에 살살 원을 그렸다. 정욱의 몸이 움찔하며 둘의 입술이 포개진 채로 자신을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는 입술을 귓볼로 가져가 핥고 목덜미를 빨아들이며 천천히 내려간다. 배출한 다음 쪼그라들었던 그곳에도 조금씩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쇄골을 깨물어주고, 그 자리를 핥아주자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나온다. 입술을 조금 아래로 가져가 겨드랑이에 코를 묻더니 혀를 세워 마구 공격한다. “아… 새꺄……. 크큭, 간지러……. 크크크큿. 고만해.” 지해가 간지러워서 팔을 움찔하며 피하자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정욱도 크크 거리는 웃음소리를 낸다. 겨드랑이로부터 옆구리 선을 따라, 그리고 배꼽과 배와 허리를 정신없이 빨고 핥으면서 오른손 손바닥으로 양쪽 유두를 번갈아 살살 문지르고 왼손으로는 사타구니와 허벅지 안쪽을 손바닥으로 훑어내린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과 척추가 시큰한 전율이 끊임없는 파도처럼 밀려와 허리가 계속 튕겨졌다. “와, 이거…… 기분… 디게………… 이상하네.” “좋아?” “……애무를 받는……… 입장이 되니까………기분이 묘해.” “오늘만… 특별이야.” “그럼…… 나중에는?” “그냥 박을 거야.” “차라리……… 죽여라.” 정욱은 천장에다 멍한 시선을 고정하고 웃는 지해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주고, 침대 옆 협탁의 서랍에서 콘돔과 젤을 꺼냈다. “으~ 이제 슬슬 올 것이 오는구나.” “아프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아예 안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만.” 대답대신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하고 다시 지해의 가슴으로 얼굴을 가져간다. 가슴의 중심선을 주욱 핥아내리고 유두를 마구 빨아대는 정욱의 머리카락 속에 지해가 오른손을 파묻자, 그 손의 움직임에 맞춰 정욱이 머리를 살살 흔든다. 강아지 같다. 귀여운 강아지. 덩치만 커다란 아기 강아지. 내 강아지. 지해가 미소를 지으며 그 강아지의 머리를 위로 당겨서는 그대로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정욱은 키스를 멈추지 않으면서 양손으로 지해의 다리를 주욱 벌린 다음, 재빨리 그 다리 사이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처음인데 힘들지 않게 뒤집어서 뒤에서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왠지 싫어할 것 같다. 자신도 싫다. 힘들더라도 눈 마주치면서 하고 싶다. 정욱은 지해의 물건을 한손으로 말아 쥐고서 뿌리에서부터 살짝 훑어 올린 다음, 엄지 손가락으로 그 끝을 자극해 주었다. 으음, 하는 신음을 토해낸다. 다리에 힘이 주우욱 빠진다. “처음이라 굉장히 오랫동안 풀어야겠다.” 지해가 자극으로 긴장이 느슨해지자 정욱은 재빨리 지해가 옆을 보도록 몸을 돌리고 왼손으로 골반을 살짝 눌러 하체만 조금 뒤집은 후, 젤을 잔뜩 묻힌 손가락 하나로 구멍 입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툭툭 건들이자 움찔 몸이 움직인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악~!!” “아퍼?” “기분 진짜 이상한데…… 견딜만…(으윽)…해….” 손가락을 꿈틀거리고 뱅글뱅글 돌리고 내벽을 살살 긁으면서 구멍을 넓혀나가니 몸을 마구 뒤튼다. 그 와중에도 구멍이 움찔움찔 조여들며 개폐를 거듭한다. 손가락에 전해지는 뜨거움과 조임만으로도 미칠 것 같다. “괜찮냐?” “이게…… (흐윽)…… 이런 기분이란 말이지?” “집어넣기만 하다가……쑤셔지니까 감회가 새로워?” “너도 한번………당해 볼래?” “나는 됐다… 이 재미만도 장난 아니야.” 지해가 약이 올라서 정욱을 째려보니, 이마에 벌써부터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다.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 땀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는데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는 자극이 오면서 하체에 경련이 일고, 그곳이 불끈 힘을 받았다. “으으으~” “찾았다~!” 정욱은 한번 찾아낸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손가락을 늘려가며 집요하게 눌러댔다. 지해는 머릿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묘한 쾌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만 있었다. “기분 어때?” “…죽…여….” “진짜?” “…그래……, 너도… 내가…… 해줄게. 환장하게…… 좋다.” 지해는 정욱을 꼬시기 위해서라도 더욱 더 좋다는 시늉을 해대고 있었다. 좋은지 뭔지 모르겠다. 속이 괴로운 것도 같다. 그래도 나중에 언젠가 저 녀석을 먹으려면 좋은 척 할 수밖에 없다. 비극이 따로 없다. 정욱은 지해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짓거리에 웃음밖에 안 나왔지만, 이제 포인트도 찾았겠다, 구멍도 웬만큼 늘려놨겠다, 더 이상 급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덜 커졌을 때 삽입이라는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여드는 구멍의 자극이 아쉬워 손가락을 뽑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콘돔의 포장을 벗기려고 하는 정욱을 보다 못한 지해가 문득문득 터지는 맹렬한 전율에도 굴하지 않고 알루미늄 포장을 찢어 콘돔을 빼냈다. “인 줘.” “아니야…… 내가 끼워줄게.” “됐어. 줘.” “아가야, 이리 온~~~~.”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다. 자신은 이 녀석의 포인트를 찔러대고, 이 녀석은 자기 물건에 콘돔을 끼워주고 있다. 녀석의 손이 닿는 바람에 괜히 더 커졌다. 아까 정도였으면 그리 아프지 않게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녀석이 콘돔 끼워준답시고 낄낄대면서 주물럭거리고, 콘돔 위에 젤을 발라준답시고 장난치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발기해 버렸다. 뭔가 상당히 변태스러우면서도 친밀하고 다정한 행위.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보고 있고, 같이 있으면 때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때로는 그저 가슴이 벅차 오르고 따뜻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어떤 이상한 얘기, 어떤 이상한 짓을 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정말 좋아하는 상대와 은밀한 정을 나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건가? “이제 들어간다. 최대한 힘 빼고 최후로 할 말 있음 해라. 담배 한 대 주랴?” 정욱이 지해의 두 다리를 어깨에 얹고서 각도를 맞추고는 슬슬 입구를 공략하며 말했다. 경건하게 치르려 했던 첫날 의식이 점점 화기애애한 애들 장난이 되고 있다…… 그런데 너무…… 즐겁고 유쾌하다. “피 내더라도 안 죽일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할 것.” “웬일이냐?…… 아까는 길길이 날뛰더니.” “불가능한 걸……(아악)… 아니까……이 씹새……(으앗).” “불가능이라고…… 했겠다. 좋아…… 두고 봐라.”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천천히 삽입해 본 건 처음이다. 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낮은 포복으로 1밀리씩 전진. 고지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 달팽이처럼 기어가는 저릿저릿 애가 타는 느낌. 그런데도 조금씩 더 전진할 때마다 아프다는 소리도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이 녀석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도로 빼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역시 조여드는 자극이 너무 좋아 포기가 되지 않았다. 녀석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간간이 닦아주며 서서히 그 깊고 뜨거운 내부로 들어가다보니 어느새 거의 끝까지 들어와 있었다. 포인트를 쑤시며 공격하고, 피스톤질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살살 해야지, 살살 해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제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몸에서 비오듯 쏟아지는 땀이 녀석의 얼굴과 몸에 똑똑 떨어지는 걸 봤을 때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끈끈하고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피스톤질 중에서도 이 이상한 기분이 대체 뭘까 하고 생각하던 중에, 지해가 느끼기 시작했는지 자신의 등을 끌어안고 허리를 흔들면서 신음을 내뱉자, 거의 마지막 한 자락 남아있던 이성마저 날아가 버렸다. 해질 무렵부터 하기 시작해 이제 제법 컴컴해지도록, 몇 차례나 자세를 바꾸어가며 거듭했는데도, 정욱은 아직도 포기를 못 하고 지해의 몸 속에서 나오지 않은 채, 녀석의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잠깐 기절했었던 것 같은 녀석이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뜨고 두리번거린다. 정욱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지해의 눈을 마주보았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한데 녀석은 웃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반듯한 이마를 드러내주었다. “야~, 나 기절했었냐?” “어.” “얼마나?” “5분? 10분?” “역시~!!” “뭐가?” “아…, 자꾸 정신 나갈 것 같길래, 속으로, 기절하면 안돼, 막 그랬거든.” “왜?” “이렇게 좋은데 그냥 잠들어버리면 너무 아깝잖냐.” “뭐가 그렇게 좋은데?” “내가 너를 품었으니까…. 야, 착각하지 마라. 절대 네가 나를 깔은 게 아니다. 내가 너를 내 속에 받아준 거야.” “그래, 받아줘서 정말 눈물나게 고맙다.” 눈을 반짝이며 자신감 넘치게 당당히 말하는 지해가 문득 눈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이쁜 놈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눈물나게 고마웠다. “뭐, 생각보다 죽을 만큼 아프지도 않았고……. 야, 우리 이거 자주 하자.” “정말?” “익숙해지려면 오래 걸린다니까, 빨리 익숙해지게 자주 자주 하자.” “그럼, 지금 당장 한판 더 할래?” “으악~! 이 짐승같은 새끼!! 누가 지금 하재? 너 빨리 안 빼?” 지해는 쓸데없이 몸을 움직이다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꽥~ 하고 소리를 지르고서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정욱은 지해에게 아플 거다, 한 마디 하고 자기 것을 털썩 빼냈다. 몸을 채우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묘한 충격에 지해가 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콘돔에는 거의 피가 묻어있지 않았다. 쏟아낸 정액은 그득하게 차 있었지만 바깥으로 보이는 핏자국은 대단치 않아 보였다. 침대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그 전리품을 버리고 정욱은 지해 밑에 깔아두었던 타월을 확인했다. 기껏해야 두세 방울 정도 묻어있는 핏자욱. 이만 하면 성공했다고 해야 하는 건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었는데…. 그건 정말 이 녀석 말대로 불가능이었나…. 꽤나 격렬하게 해댔었는지 온몸이 녹초가 되어 정말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말할 수 없이 배가 고프지만, 일어나기도 귀찮다. 그래도 녀석도 좀 씻기고 자기도 씻고 자야 할 것 같아 억지로 일어나려는데, 지해가 그냥 이대로 잠깐 자자고 붙들며 하품을 한다. 잠이 쏟아지는지 자꾸 눈이 감기는 지해에게 바싹 다가가 팔베개를 해주었다.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을 그 팔에 부비부비거린다. 녀석의 배 위에 남아있는 끈끈한 정액으로 아이들이 풀 그림을 그리듯이 자기 이름도 쓰고, 지해 이름도 쓰고 하며 낙서를 하고, 손바닥으로 맛사지(?)도 해주고 쪼물딱거리다 보니 어느새 녀석은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많이 아팠을 텐데 별 내색 않고 만족스럽게 잠든 지해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그 몸 여기저기 자신이 남긴 키스마크에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서 녀석을 꼭 끌어안고 정욱은 쏟아지는 잠에 몸을 맡겼다. 8. MORE TODAY THAN YESTERDAY I don't remember what day it was 그 날이 언제였는지는 기억 못 하지만 I didn't notice what time it was 그 때가 몇 시였는지도 눈치 못 챘지만 All I know is that I fell in love with you 너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확실히 알아 And if all my dreams come true 내 꿈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I'll be spending time with you 나는 너와 함께 하게 될 거야 Everyday's a new day in love with you 너를 사랑하면서 매일이 새로운 날이야 With each day comes a new way of loving you 매일매일 새롭게 더욱 널 사랑하게 돼 Everytime I kiss your lips my mind starts to wander 네 입술에 입맞출 때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 And if all my dreams come true 내 꿈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I'll be spending time with you 나는 너와 함께 하게 될 거야. Oh, I love you more today than yesterday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널 사랑해 But not as much as tomorrow 하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더 할 거야 (More Today Than Yesterday - Goldfinger)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천지가 뒤바뀌지도 않았다. 김지해가 여자가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깨어보니 꿈이라던가, 옆에 누운 놈이 왕자는 왕자인데 개구리 왕자였다던가 하는 불미스런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찰싹 달라붙어 남의 머리에 코를 박고 귓가에 간지러운 입김을 규칙적으로 들여보내며 퍼져 자는 이 놈이 어젯밤의 그 망할 놈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목덜미에서는 소름이 돋고 온몸은 찝찝하고 자연의 부르심에 응답도 해줘야 될 것 같은데, 등짝이 녀석한테 완전 밀착된 채 쇳덩이 같은 팔 속에 단단히 결박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아니, 날씨가 더운 것도 아니고 이 품에 안겨 있는 거야 그리 싫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불평을 할 수는 없다 해도, 아침 인사한답시고 엉덩이를 찌르고 있는 이 녀석 물건도 같은 남자 입장에서 생리 현상으로 이해해줄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 놈의 무쇠팔 무쇠다리 땜에 움직일 수가 없는 건지, 몸에 마비가 온 건지 모르겠다. “야, 강정욱!!!” 묵묵부답. “어이, 강군아~! 강씨~! 미스터 강~! 강선생~!” 전혀 반응이 없다. “왕자님~! 태자 전하~! 마마~!!!!” 귀가 멀었나. “황제 폐하~!!!” 역시 폐하께서는 평민과 다른 귀를 가지셨음이야. 제기랄. “야, 이 개씨발 좆대가리야~~~!!!!” “…… 시…끄러….” 그래. 역시 너는 그거였어. 개씨발 좆대가리. “나 좀 일어날 수 있게 선처해주지 않으련.” 흐뭇한 마음에 분위기를 싹 바꿔 빌어줘도 보고. “………니 힘으로… 일어나봐.” 으, 이 시러베잡놈 같으니. 많이 바라지도 않지만. 그런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저 녀석 지금 어떤 표정인지 눈이나 뜨고서 말하는 건지 보고 싶다 따위나 생각하는 이 몸은 정녕 덜떨어진 인간. 시러베잡놈보다도 상태가 더 안 좋은. 그보다도 하위 개념의…. 에잇, 알게 뭐냐. “야, 강군~! 니 잘난 면상 좀 볼라구 그런다. 뽀뽀해주께 나 좀 뒤집어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팔을 풀고 조심스레 끌어댕겨서 뒤집어준다. 내가 지 얼굴 좀 보자니까 그제야 뒤집어주고,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냐, 나쁜 놈. 몸이야 무진장 아프다마는… 뭐, 영원히 아프지는 않을 테고. 게슴츠레 실눈뜨고 잠깨는 니 얼굴 보는 재미랑은 비교도 안 된다. 정욱은 지해의 자세를 고쳐잡아주면서 그제서야 간밤 내내 팔베개해줬던 왼팔을 움직였다. 팔이 나무토막처럼 감각이 없나 싶더니 곧 수백 마리의 병정 개미가 한꺼번에 집중 사격을 하는 것처럼 저려온다. 눈살이 좀 찌푸려졌었나 보다. 지해가 저 몸 아픈 거는 생각도 안 하고, 자기가 얼굴 찡그렸다고 금세 얼굴색이 변하는 걸 보고 정욱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너무 이뻐서 꼭 끌어안고 이마에다가 쪽쪽쪽 뽀뽀를 해주며 달큰한 사과같은 녀석의 체취를 허파 가득 들이켰다. “야, 숨막혀. 밤새 안고 있었는데 지겹지도 않냐?” ―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새꺄. “따가워 죽겠다. 부비댈려면 이따 면도하고 해.” ― 자고 일어나도 얼굴 매끈한 니 녀석이 비정상이야. “그래, 잘 잤냐?” ― 잘 자다 뿐이냐. 밤새 천국 갔다 온 것 같다. “이 새끼가 간밤에 입이 붙었나. 왜 대꾸도 안 해?” ― 너 지껄이는 거 듣는 게 너무 좋아서 집중하느라고 그런다, 바보야. “그나저나……야, 아침부터 그만 좀 찔러대라. 지금은 못 한단 말야.” ― 앞으로 자주 자주 하자더니 자고 일어나니까 생각이 바뀌었냐? 지해는 스리슬쩍 몸부림을 치기 시작해 밀착된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나더니, 뒤를 찌르던 그곳에서 묻어나온 체액이 좀 찝찝했는지 손바닥으로 슥슥 닦으며 정욱을 째려보았다. “이게… 우씨……! 물까지 찔끔. 야, 니 물건 진정 좀 시켜. 울고 난리 났다. 난 몰라. 신경 끌 거야.” “너 보니까 넘 반가워서 눈물까지 흘리나 본데 글케 야박하게 굴기냐?” “신경써줄 체력이 못 된다. 지금 내가.” “네 꺼도 지금 나를 찌르고 있어.” “그으래?” 전혀 몰랐다는 듯이 지해가 정말로 이불이라도 걷고 볼 것처럼 하다가 으윽~ 하며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부여잡는다. 그렇게나 아픈 건가 싶으니 마음이 좋지 않다. “뭘 그렇게 놀라? 설마 간밤에 꼬추 떨어졌을줄 알았냐?” 정욱이 시침 뚝 떼고 묻자, 지해는 정곡을 찔린 듯 순순히 버벅거렸다. “아니, 굳이 그렇다기 보다는…….” 지가 깔린 게 아니라고 당차게 말은 해놓고도 속이 편하지만은 않았는가 보다. “김지해, 걱정 마. 세상 사내 새끼들 꺼 전부 다 떨어져도 니꺼는 안 떨어질 거야.” “왜?” “………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이나 알어.” “아니, 이유 좀 듣자. 궁금하다.” “말하기 쫌 그런데….” “씨발, 얼른 해~!!!” 지해로서는 딴 때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캐묻지 않을 테지만, 어젯밤에 치른 일과 이 말의 내용이 갖는 야리꼬리한 연관성을 생각할 때 반드시 듣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삐리리한 쪽으로 얘기했다간 저 놈의 아구창을 한 대 날려주리라~~~ 정욱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 지금껏 너만큼 사내답고 괜찮은 놈은 못 봤단 말이다. 이제 설명이 됐냐? 그러니까 행여나 내가 너 여자 취급한다는 생각은 아예 말어라” 대답이 안 나왔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 새끼는 평소에는 신나게 채찍질만 해대다가 가~끔 한번씩 이렇게 엑스라지 사이즈의 당근을 덥썩 물려줘서 그동안 맺힌 한(?)을 전부 까먹게 만들어준다. 채찍과 당근의 절묘한 운용법을 진작에 깨달은 타고난 고수. 정말 옆에 있는 사람이 몸바쳐 충성하게끔 만드는 놈이다. “…이…씹새……, 그거 접대성 멘트면 너 진짜 나쁜 놈이야.” “걱정마. 나, 빈말로는 그런 말 못해.” 지해는 뭐라 대꾸도 못 하고 있었다. “사람의 진심을 의심할 거냐, 너?” 의심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좋아. 저번에는 너한테 선수를 뺏겼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할게.” 두근두근 묘한 예감에 입이 본드 붙여놓은 것 마냥 딱 달라붙어버렸다. “나 너 사랑해.”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합창을 하고, 사방에 꽃가루가 휘날리고……하지는 않았다.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변하는 것은 두 사람의 마음가짐뿐으로, 주위의 모든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온전히 전부 다 그대로이다. 그래도 어쨌든…… 기쁘고 행복하다. 이 듬직한 녀석에게 기대고 싶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마음을 의지하고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다. 그동안 좀 힘들고 외로웠으니까… 그래도 되겠지? 그래, 임마. 나도 널 사랑해. 니가 미치게 좋다. 내일 다시 널 못 보게 돼도 지금은 널 죽어라고 사랑해. “온갖 잡놈 잡년들이 다 쓰는 말이라 찝찝하긴 하지만, 뭐 어쨌든 남들이 쓰는 말로 표현해야 내 감정이 전달될 것 같아서 그런다.” ― 부탁이니 제발 쉬운 말, 흔한 말로 해주라. 니가 또 너만 아는 말로 하면 나 잘못 알아들을지도 몰라… “그냥 너 보면 발정난다는 의미로만 사랑하는 건 분명 아니야.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애.” ― 너는 날 보면 발정이 나는지 모르지만, 난 너 보면 눈물이 난다…… 이 씹탱아…… “너 변하지 마. 난 지금 이대로의 네가 딱 좋아.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어.” ― 난 너한테 변하지 말라는 말도 못해… 그냥 시간이 좀 천천히 흐르기만 바랄 뿐이야……. “……너 우냐?” “…지랄!” 지해는 코를 훌쩍이며 쪽팔림에 떨었다. “그 말이 글케 감동적이야?” “……까불지 마, 개새꺄. 씨발새끼. 느끼한 새끼. 이상한 소리나 해대고. 망할노므 새끼. 나쁜 새끼. 사람이 어떻게 안 변하고 사냐. 너는 그럴 수 있어? 우씨, 졸라 짜증나는 새끼.” 지해는 쑥스러운 감동을 온갖 ‘새끼’들 속에 감추고 쓸데없는 만용을 부려 부축을 거절하며 상당히 보기 좋지 않은 자세나마 억지로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벗은 몸을 뭔가로 가려야 할까 싶어 내려다보다가 어젯밤 정욱이 자기 배 위에 낙서(!)해 놓은 것이 말라붙은 자국을 발견했다. 잠시 의아해 하다가 그것이 뭐였는지 정체를 깨닫고 ‘이 약도 없는 특급 변태야, 너를 정말 어쩌면 좋냐’ 하며 한바탕 쿠사리를 날린 뒤 욕실로 대충 뒤뚱뒤뚱 걸음을 옮긴다. 정욱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걸어가든 기어가든 냅두기로 했다. 사랑한다고 나름대로 고심 끝에 고백했는데 제대로 된 닭살 대답은 안 읊어줄 망정……. 지금까지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확신은 없지만, 이게 사랑 아니면 도대체 뭘 갖고 사랑이라고들 떠들겠냐, 하는 심정으로 결론을 지은 건데…… 게다가 어젯밤에 씻겨준다는데도 그냥 자자고 했던 건 바로 저 녀석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아, 참!! “김지해, 어디 가냐?” “지금 내가 가는 데가 어딜 거 같냐?” “뭐, 어디를 가든 뽀뽀는 해주고 가라.” “엑?” “너 아까 뒤집어주면 뽀뽀해준댔잖아?” 지해는 기가 막히다는 듯 꼬나보기만 할뿐 대답이 없었다. “빨랑 와서 해줘.” “……….” “약속은 지켜야지.” 지해가 어중간하게 서서 이쪽으로 오지도 못 하고 저쪽으로 가지도 못한 채 어버버하고 있는 동안, 정욱이 잽싸게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갔다. 새로 포장 뜯은 쑤세미만큼이나 까실까실한 얼굴을 들이대며 머릿속이 멍해질 것 같은 키스 한 방을 날리고 지해를 그대로 번쩍 들어 안고 욕실로 갔다. 뜨거운 욕조에다 담갔다가 마사지도 좀 해주고 근육을 풀어 빨리 낫게 해서, 매일매일 찍소리도 못 하도록 잡아먹어야겠다는 응큼한 생각을 하면서……. 무진장 배가 고팠다. 당연히 이 집안에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쌀 한 톨 없었다. 없는 것 없이 다 있을 것처럼 허우대는 멀쩡해도, 바깥이랑 차단된 채 며칠만 갇혀 있으면 굶어죽기 똑 알맞은 집이 바로 현재의 이 집이다. 어제 식료품을 사러 나갔어야 하는 시간에 딴짓거리를 해 버렸으니……. 고심 끝에 피자 한 판을 시켜서 거실에 퍼질러 앉아서 먹었다. 평소에 뭘 먹고 사는지 지해로서는 전혀 상상조차 안 되는 정욱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씹는다. 어쨌든 둘 다 현재 뱃속 상태가 이런 종류가 들어갈 상황이 아니란 걸 먹으면서 깨달았다. 지해는 피자 한 쪽을 채 못 먹고 포기하고 피자와 함께 시킨 샐러드도 집어먹다 관두고 콜라만 홀짝이다가 그것마저 귀찮아져서 정욱의 허벅지를 베고 벌렁 누워버렸다. 정욱도 조금 먹다가 지쳤는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고 왼손으로, 다리를 굽힌 채 누워있는 지해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무릎이 정말 예쁘다. 각선미가 쭉쭉 빠진 여자 모델들도 잘 보면 무릎까지 예쁜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자신도 몰랐던 사실인데, 두어 달 전에 같이 잤던 슈퍼 모델이 얘기를 해줘서 알았다. 콜걸을 부르는 기분으로 부른 여자였는데, 마치 정욱이 이제부터 자신의 스폰서라도 되어줄 줄로 착각하던 가증스러운 얼굴이 생각나 담배 맛이 쓰다. 그 한참 잘 나간다는 소위 모델계의 유망주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그 무릎도 지금 이 녀석의 모양좋은 하얀 무릎에 대면 상대도 안 된다. “얌마, 피자 먹던 손으로 자꾸 만지지 마.” “이 손으로 먹은 거 아니다. 왜 그러냐? 글케 찝찝하면 이따가 또 씻겨줌 되잖아. 냅뚸라 쫌.” “니가 씻겨주는 것도 무서워.” 욕실에서 정욱이 마사지를 열심히 해줘서 그런지 근육통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그 마사지는 당연히 공짜가 아니었다. 욕조 안에서 둘이 뭘 했는지는 비밀이다. 직접적인 그 곳의 쓰라림과 골반이 벌어지는 격통도 이제 뭐 그럭저럭 참아낼 만 하다. 자기가 생각해도 회복력이 너무 왕성하다. 어려서부터 요가를 해서 유연한 몸의 진가가 이럴 때 발휘되는 것인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인지…… “야, 근데 저 방 말이야.” “어느 방?” “저기 문 열려 있는 방.” 지해는 정면으로 보이는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방을 가리켰다. 이 집에서 제일 사이즈가 작은 방인 것 같은데,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벽에는 녹음실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화학 재질의 두툼한 방음재로 도배되어 있었다. “저건 어따 쓰는 방인데 벽에다가 저렇게 희한한 걸 발라놨냐?” “아~ 저기….” “가끔 소리라도 지르면서 스트레스 해소할라구?” “지금 약간 후회하고 있어.” “왜?” “방음 효과가 확실하대서 설치했는데, 저 안에 오래 있음 호흡이 곤란할 것 같애. 너 저 안에 너무 오래 있지 마라.” “나? 내가 저 빈 방에 왜 들어가? 설마 날 저기 가둬놀 거냐?” “오홀~ 그런 방법도 있었군. 진짜 가둬놓을까?” “야, 이 미친 새꺄, 정신차려~!!!!” 지해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면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욱이 얼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는, 그 손으로 지해의 뒷목덜미를 지그시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무릎을 쓰다듬던 손으로는 두 다리를 모아서 틀어쥐었다. “뭐, 내가 널 가둘 리는 없지만 니가 들어가서 안 나올까봐 걱정이다.” “무슨 소리야, 또?! 너 그 알쏭달쏭한 말버릇 좀 이제 관두면 안 돼?!” “귀따가워. 침 튀어. 조용히 좀 해.” “알아듣게 좀 말을 해봐. 답답하단 말이닷~!” “시끄러. 바가지 긁지 마.” “뭐?! 바.가.지?!!!! 이 새ㄲ―― 읍” 그다지 화낼 얘기는 아닌데도 억센 두 팔로 신체가 부자유스러워지니 당황하고 어색해져서 지해는 더욱 더 소리를 꽥꽥 질렀다. 결국 길길이 날뛰는 녀석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은 정욱은 부드럽고 따스한 촉촉함을 마음껏 즐기며 입안을 탐했다. 오늘 아침에 눈뜬 이후 계속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상황인지라 지해는 귀찮아서 반항을 포기하고 순간의 쾌락을 즐기기로 했다. 정욱의 손이 지해가 입고 있는 샤워로브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와서는 만지는 것도 안타깝다는 듯한 손길로 여기저기 골고루 살살 더듬어댄다. 점점 애무가 짙어지고 서로가 서로의 손길에 반응해 열띤 신음을 토해내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지해가 놀라 얼른 입술을 떼버리니 정욱이 일어나서 비디오폰의 화면을 확인하고 말한다. “피아노 왔다. 나 피아노는 잘 몰라서 그냥 ‘스타인웨이’로 했다.” “――?” “너 이제 음악실에서 방황하지 말고, 여기서 치라고. 나 같은 놈 또 만나면 안 되니까.” “――!” “원래 어제 오라고 했었는데 하루 늦게 됐거든.” “………….” “이걸로 협조사항 끝이다. 무조건 말 들어. 딴소리 말고.” 저 새끼 저 웃는 꼬라지 좀 봐라. 기뻐할줄 아나 보다. 웃기지 마. 기쁘기는 커녕… “이러지 마, 새꺄. 싫어. 그냥 어제처럼 키스하고 만지고 박기나 해. 그거 이상은 하지 마.” “야!!!” “싫다니까. 이러는 거 싫어.” “야, 내가 무조건……. 좋아, 쫌 이따가 얘기하자.” 지해가 화가 나서 옷이 있는 방으로 걸어들어오기 시작하자, 정욱은 침착한 목소리로 나중에 얘기하자고 한다. 지해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침대 위에 잠시 앉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침대 시트가 너무 더럽다. 자신의 흔적이 잔뜩 남아있는 기분이 든다. 핏자국이 똑똑 떨어져 있는 타월을 보니 기가 막혔다. 시트를 빨아야 될 것 같아 후닥닥 벗겨냈다. 밖에서 낯선 사람들 두어 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거운 걸 옮기는 소리도 난다. 거기 맞추어 정욱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나하나 벗겨내면서 방바닥에 집어던졌던 시트와 이불보와 베갯잇들을 세탁기에 처넣어야겠다는 생각에 챙겨서 집어들었다가 도로 팽개쳤다. 집주인이 알아서 하겠지. 난 몰라.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형에게 대충 전화를 넣어두긴 했지만……, 집에 가야겠다. 배낭을 집어들고 방을 나서는데 그 ‘피아노’방 앞에 서서 인부들이 피아노 옮기고 조립을 하며 위치 잡는 걸 보고 있던 정욱과 눈이 딱 마주쳤다. 무섭게 노려본다. 두 눈에서 말 그대로 불꽃이 튀긴다. 한동안 침묵 속에 둘의 눈빛 전쟁이 있은 후, 저 녀석이 노려보든 잡아먹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지해가 발길을 떼어놓는데, 초인종 소리가 또 울렸다. 정욱은 비디오폰 모니터를 들여다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안에 환하게 웃으며 ‘빨리 열어’ 하고 서 있는 인간 둘은 조민혁과 정욱의 동생 정연이였다. BGM : Brandnew my lover - Mr.Children←CLICK! 정욱이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빰빠빠-빠~~~~」 장난처럼 눌러대는 경쾌한 벨소리. 귀에 익은 리듬. 풋, 베토벤의 운명이잖아. 누가 저런 애기같은 장난을 치는 거야. 「빰빠빠-빠~~~~」 아주 신이 났군. 귀엽다 귀여워. 저런 사람은 실제로 만나보면 재밌는데…. 뭐, 누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일 테니까………. “난 간다.” “가긴 어딜 가.” “집에 가야지.” “안 돼.” 정욱이 지해의 팔을 아프게 쥐었다. 체크무늬 남방의 소맷자락이 얇은 종잇장처럼 비참하게 구겨질 정도로 꽉 쥐었다. 잡힌 살의 피부 표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검도로 다져진 손바닥의 굳은살이 옷을 뚫고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야~!!!! 개지랄 떨지 말고 이거 놔. 난 갈 거야.” “내가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을 텐데?” “그러니까 나중에 얘기해. 내일이든 모레든. 지금 말고.” “아니, 오늘 안에 해야겠어. 그냥은 못 가.” “입씨름할 기운 없어. 시덥잖은 소리 그만하고 손님 문이나 따주지 그래?” 정욱은 비디오폰 모니터 안의 두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자기 둘끼리 얼굴을 마주보고 뭔가 이야기하고 있다. 아까의 웃는 얼굴이 아니다. 상관없어. 강정연. 니가 언제부터 오빠한테 신경을 썼다고 찾아오고 난리냐. 왜 하필 지금 오는 거야. 거기다가 부록으로 조민혁까지 달고서. 타이밍 감각에 파트너 선택까지 아주 이보다 더 절묘할 순 없구나. 경비실에 따로 인터폰을 해서 아무도 없다고 하고 그냥 보내랄 수도 있다. “굳이 꼭 안에 들일 필요는 없어.” “그런 짓거리 하지 마. 너 찾아온 손님이잖아.” “저 사람들 핑계대고 도망칠 생각은 마라.” “그런 생각 안 해, 임마~!!!” “좋아. 도망칠 생각 안 한다고 분명히 지금 니 입으로 말했어.” 정욱은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인터폰의 open버튼을 눌렀다. 모니터 속으로, 어리둥절해 있던 두 사람이 어깨를 으쓱하며 유리 현관문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인다. “그 뜻이 아니잖아~~!!!!” “난 그렇게 알아들었으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지해는 더 이상 대꾸하는 것도 포기했다. 아무 말 없이 불편한 걸음을 현관으로 옮기려는데 정욱이 거칠게 포박하듯이 끌어안고 벽에 밀어붙인다.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피아노 방에서 그랜드 피아노의 다리를 맞추어 조립하고 있던 인부들이 밖에서 계속 시끄럽게 구는 두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야, 강정욱. 지금 사람들 오고 있어. 이러고 있는 거 보여도 되는 거야?” 지해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집에 못 가게 발이 묶여있는 이 상황이 문제가 아니다. 둘이 이러는 걸 보여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너무 걱정이 된다. 눈치빠른 사람이면 자신의 걷는 모양새만 봐도 알아챌지 모른다. 조바심이 난다. “상관없어. 니가 더 중요해. 너 지금 안 보내.” “이거 놔. 너 원래 이렇게 생각없이 행동하는 녀석 아니잖아.” “누가 그래?! 내가 원래 어떤 놈인지 누가 얼마나 안다고?! 니가 알아, 나를?!!! 니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데?!!!” 정욱이 거의 쥐어짜는 듯한 뜨거운 목소리로 지해의 귓가에 바싹 대고 말했다. 전혀 큰 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마치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절규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와닿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할 짓 못 할 짓 같이 했어도 이 녀석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아무 것도 모른다. 근데 왜 지금 갑자기 꼴리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이 녀석을 이대로 쓰러뜨리고 짐승처럼 마구 부벼대고싶은 묘한 갈증이 뱃속 깊은 데서부터 기어올라오는 걸까? 이 자세 그대로 거칠게 키스하고 싶은 욕구를 지해는 간신히 눌러참았다. “알았어. 안 갈 테니까 이거 풀고 얘기해. 정말 안 갈게.” “싫어.” “정욱아……, 제발…….” 바로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정욱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해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뭔가 좀 누그러지는 느낌. 팔에서 힘을 빼진 않았지만, 표정은 많이 풀어졌다. 녀석의 그런 표정이 상처입은 아기 사자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해는 자기도 모르게 그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정욱이 많이 놀란 듯 어린애처럼 물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지해는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몰랐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너무 미안하다. 그래, 뭐든지 할게. 니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미안해. 니가 바라는 거, 내가 퍼줄수 있는 거 다 줄게.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어. 미안해. 너무 내 입장만 생각했어. 미안해. 아무것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소용돌이치던 눈동자가 의문을 담은 채 고요히 가라앉는 것을 들여다보다 보니 자신이 왜 그랬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녀석이 줄 수 있는 걸 똑같이 줄 수 없다는 게 괴로웠던 거다. 병신같이……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는 건데……. 좋아. 내가 똑같이 줄 수 없는 게 있다면 니가 주는 걸 기쁘게 받아주는 것도 주는 거겠지……. 이 녀석을 지켜주겠다고, 이 녀석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생각하고서도 자꾸 자신만을 지키려고 했나 보다. 그냥 내 편만 되려고 했었나 보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그냥 다…….” “그딴 소리―― 좋아. 정말 미안하면…, 이렇게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하는 녀석 그냥 보내는 놈으로 만들지나 마라.” 가슴이 탁 막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넋놓고 있는데, 현관문 바로 밖에서 발소리, 사람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너무나 가깝게 들리는 초인종 소리. 저 사람들은 누굴까. 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연기해야 할 역할은 뭘까. 깜짝 놀랐다. 그쪽도 눈이 좀 커지는 것 같더니 금방 재밌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엉겁결에 아는 척을 하려고 한 지해에게 살짝 눈짓을 한다. 순간, 이 사람이 알면서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나를 못 알아보나 보다 싶기도 했었다. 하루 저녁 잠깐 본 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근데 그게 아니다. “웬일이야, 정욱아? 손님이 있었네. 누구냐? 애인?” “네?!!! 아, 아니요. 같은 반 친구에요. 이사한다고 해서 도와주러 왔어요.” 정욱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지해가 재빨리 대답해 버렸다. 시야의 언저리로 녀석이 노려보는 게 느껴진다. 동네방네 광고할 필요는 없잖아, 임마.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냥 귀찮은 게 싫은 거다. 그래, 너 쓸데없이 복잡해지는 거 싫어. “아~하~! 그렇군. 내가 듣기론 이사는 어제였을텐데.” “……오늘도 좀 할 일이 있다고….” 지해는 쩔쩔매고 변명을 하면서 정욱을 흘끔 보았다. 자신을 그냥 지긋이 주시하고 있다. 저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같이 있던 그 얼굴이 아니다. 다른 녀석 같다. 전혀 딴 사람 같다. “이 오빠가 좀 제 정신이 아니거든요. 아무한테나 다 애인이냐고 그래요, 원래. 미친 놈이겠거니 하면 돼요.”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 잠정적으로 다 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거야.” “이런다구요.” “남녀노소, 지위고하, 인종국적을 막론하고….” “정말 독특한 사람이죠?” “여기서 애인이라 함은….” “민혁 오빠, 입 그만 안 다물면 울 오빠한테 한 대 맞을 것 같애.” 금발머리 남자―이름이 조민혁이었던가―와 같이 온 여자애가 또랑또랑하게 말한다. 정말 키 크다. 170이 훌쩍 넘는 것 같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또릿또릿한 이목구비가 정욱을 엄청 닮았다. 싸가지 없는 말투도 비슷한 것 같다. 누가 보더라도 남매인줄 알겠다. 말을 안 해줘도 알겠다. 여동생이 있었구나……너…. 지해는 정욱을 옆눈길로 슬쩍 봤다. 지금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둘만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다. “오빠. 사람이 왔는데 앉으라는 소리도―” “너 왜 왔어?” “오빠가 나가서 혼자 산다는데 동생이 한번쯤 올 수도 있지, 뭐! 아빠, 엄마도 한번 가보라더라.” “말 같지않은 소리 하지마.” “진.짜.야~!!!!!” “이 남매는 왜 일케 얼굴만 봤다 하면 으르렁거리냐. 내가 너 사는 데 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전화라도 하고 와야지.” “전화하고 오면 재미없잖아.” “그래, 오빠. 전화하고 오면 재미없쥐.” “그 바람에 이렇게 니 애인 얼굴도 보고.” “얼굴 왜 빨개져요? 설마 정말루 애인이에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위기일발. 위기일발. 아까 그냥 갈걸 괜히 또 잡혀버렸어…… 정말 이 녀석을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은 매순간이 후회의 연속이구나. 에이, 제기랄. “……저기, 정욱이 동생이라니까 반말해도 되지?” “네.” “아무리 친오빠라도 그렇지…….” “네?” “……어떻게 이사온 집에 오면서 빈손으로 오냐?” “………….” “그쪽 금발머리 형도 마찬가지에요.” “나?” “네. 지금 나가서 뭐라도 빨리 사와요.” “……아, 난 일단 와보구서 정욱이가 필요하다는 거 사다줄려고 했지. 저 녀석 은근히 까다롭거든.” “그럼, 잘 됐어요. 이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요. 쌀도 없구요.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나가서 뭐든 좀 사와요.”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욱이 덥썩 다가와서 지해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 안는다.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표정. 심지어 싱긋 웃기까지 한다. “그래. 조민혁. 마침 온 김에 이 녀석 말대로 뭐 좀 사다줘라. 정연이 너도 같이 갔다와.” “배달을 시키든지 일하는 사람 시켜도 되잖아~.” “그건 둘이 의논해서 알아서 하든가 하고 일단 갔다 와.” “그러지 뭐. 어이, 정욱이 애인님. 우리 갔다 왔을 때 혹시라도 가고 없으면 알아서 해.” 거의 등을 떠밀리다시피 나가는 마당에도 조민혁은 지해를 돌아보며 윙크를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왠지 섬뜩하다. 둘이 문을 나서자 정욱이 지해를 그대로 품에 당겨 안았다. 머리카락을 살살 보듬는 손길에서 따사로운 정이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는 안정과 평화. 그런데 그나마도 오래 가질 못하니…… “저……, 피아노 자리 잘 잡아놨는지 와서 확인해 보세요… 저기……이거는 AS 번호인데…….” 이 사람들 아까부터 일 다 끝내놓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닌가 몰라. 한번 ‘그 순간’을 놓치고 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 민혁을 아는 척 할 수 있을 때 했어야 했다. 일단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는데, 나중에 원래 안면이 있었노라고 할 순 없는 일이다. 아까만 해도 정신이 워낙 없어 미처 생각도 못했지만, 이제 둘만 남고 보니 가슴 속에서 따끔따끔 계속 켕기기 시작한다. 이 녀석 보기가 이렇게나 찜찜해질 줄 알았으면 그냥 사실대로 얘기할 걸 그랬다. 민혁을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됐는지 정욱이 알면 당장 알바를 관두라며 화낼 것이 뻔했더라도, 방금 한 차례 말다툼을 한 직후라 녀석과 또 싸우게 되는 것이 더 싫었더라도, 그냥 사실을 털어놓을 걸 그랬다. 민혁의 눈짓을 보고 머뭇거렸던 그 1초보다 짧은 순간, 자신은 무의식중에 정욱과의 사이에 벽을 만든 것이다. 그 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두껍게 느껴졌다. 피아노 배달온 인부들이 나간 다음에 정욱이 힘든데 좀 앉아있으라며 끌어당길 때도, 갑자기 심란해져 괜히 생각난 것처럼 침실 바닥에 팽개치고 온 더러워진 시트를 핑계 삼아 빠져 나왔다. 곧바로 따라온 정욱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자신의 피가 똑똑 묻은 타월을 반듯하게 개켜서 따로 챙길 때는 정말 더더군다나 가슴이 덜컹했다. 뭐하는 짓이야, 하고 한 방 야려줬다. 잊지 않기 위해서 고이 간직하겠단다. 뭘 잊지 않겠다는 거냐, 했더니 ‘널 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이라고 대답한다. 피를 봐서 너무 좋다는 뜻은 분명 아닐 테고, 어젯밤을 잊지 않겠다거나 다시는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의 의미 정도 되겠지. 제기랄, 저렇게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녀석이었다니! 에라 이 환자야, 변태야, 하고 일부러 길길이 날뛰어버렸다. 하지만 겉으로 그렇게 몰아붙인다 해도 녀석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정말 변태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지해가 세탁기에 시트를 넣고 대충 버튼 몇 개를 눌러놓고 오니, 정욱은 창밖의 한강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녀석이 피우는 쿠바산 담배의 구수한 향이 거실 전체에 퍼졌다. Cohiba라고 했던가……. 시가 냄새가 나는 이국적인 담배. 꽤 독하다. 처음에 지해는 이 담배를 한번 피워보고 다시는 입에 물지도 않았다. 어른의 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큰 키, 넓은 어깨…. 하는 행동마다 전부 다 남달리 성숙하기만 한 그가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던진다. 저런 눈빛은 자신만의 것이다. 아무한테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니까… 정말 저 녀석한테는 무엇 하나 떳떳하지 못한 건 싫다. 임마, 아무리 그래도 나는 팔자좋은 너랑은 달라서 일을 안 하면 안된단 말야. 거기서 일한다고 별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구. 어쨌든 좋아. 다른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만 잠자코 있자……. “피곤하면 집에 갈래?” 집에 가서 쉬고 싶긴 하다. 근데 그 금발머리가 꼬발릴까봐……. 우웩이다. 정말. 서방 눈치보는 마누라처럼 이게 무슨 꼴이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인간들 돌아오지 말고 그냥 가라고 할까?” 그러라고 하고 싶은 맘은 정말 굴뚝같다. 하지만 그러면 안될 것 같아 또 다시 도리도리……. “오래 안 있을 거야. 지들도 바쁘니까.” 정말 그럴까? 그래주면 오죽 좋으련만. “피아노…… 한번 쳐보지 그래?” 명령조가 아니다.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하고 눈빛에 담고 있다. 아까 지해가 난리쳤던 게 신경이 쓰이나 보다. 이 녀석이 이런 녀석이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이런 세심한 행동, 이런 다정한 얼굴, 가뭄에 콩나듯이 한번씩 보여주는 아이같은 모습……. 본 사람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아아, 이건 내 꺼야. 이 녀석은 내 꺼야. 아무한테도 주기 싫다. 어떡하지… 나 욕심만 자꾸 늘어. 현실은 무엇 하나 따라주지 않는데, 녀석에게 완전히 솔직할 수조차 없는데…, 욕심만 자꾸 늘어난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느낌. 둘의 관계가 명확해지면서 누가 마치 그래도 된다고 허락이라도 해준 것처럼, 이 녀석은 더욱 정말 자상한 ‘애인’처럼 굴고, 나는……. 나는……. 지해가 가만히 있으려니까 정욱이 얼른 팔을 잡고, 피아노 방으로 이끌었다. 아까 거칠게 잡혔던 그 팔이라 자기도 모르게 아얏 소리를 냈다. “왜 그래?” “………….” “너, 셔츠 벗어봐.” “………….” “………….” 원래 속살이 하얗지만, 멍이 잘 생기는 타입은 아니다. 투명해서 잘 벌그스름해지는 피부라기보다는 약간 노리끼리하면서 새하얀, 배꽃처럼 고운 살결에 피부 자체도 탱탱하고 힘이 있어서 상처가 나도 쉽게 아무는 그런 체질인데, 지금 이 붉으락 푸르락한 멍은 정말이지……. 평생 몸에 이 정도 멍은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았다. “금방 없어져.” 정욱은 아무 대답없이 멍 자국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이런 자국 금방 없어진다. 2,3일이면 언제 그랬더냐야.” “…미안하다.” “괜찮다니까, 짜샤.” “…계속 상처만 내고…….” 이 녀석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있다… 이까짓 멍 따위, 피 몇 방울 흘린 거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 자꾸 결심이랑 어긋나기만 하는, 스스로 만드는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야, 그건 그렇고 나 너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빰빠바~빠~~~~」 때마침 ‘운명’의 초인종이 울렸다. 그 인간 또 저런다. “헤에~ 바지 갈아입었네. 정욱아, 니 애인 백만불짜리 다리 안 보여주려고 그새 갈아입혔냐?” 지해가 거실에 나타나자 민혁은 대뜸 이 소리부터 했다. 초인종 소리가 나자마자 정욱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부리나케 멍이 안든 쪽 팔을 살살 잡아 끌어 침실 옆의 워드로브로 데려갔다. 그중 제일 사이즈가 작은 듯한 연한 카키색 면바지를 던져줬는데 역시 좀 길고 크다. 힙합 바지 입은 셈 치면 되긴 했지만……. 알고봤더니 이 녀석은 바지를 워낙 헐렁하게 입는 편이라 남의 바지 빌려입은 티가 확실히 난다. “……아, 아니에요. 뭐를 흘려서…….” “아~, 그런 거야?! 그나저나 아까 이미 다 봤는데 이를 어쩌냐?” “시끄러. 조민혁.” “각선미가 정말 예술이던데. 웬만한 여.자.모델도 그 정도 되기 힘들지.” “입 안 닥칠래?” “진짜 애인이 맞긴 맞나 보다. 울 오빠 하는 거 보니까.” “정연이 너는 왜 일케 자꾸 뒷북이냐. 척하면 몰라?” 또 시작이다. 이런 상황 생각도 안 해 봤었다. 정말 이 녀석이랑…… 세상에 둘밖에 없는 줄 알았던가 보다. “근데, 사온 게 달랑 고거에요? 겨우 그거 갖구 이렇게 오래 걸려요?” “아, 쫌 이따 배달 올 거야. 이건 저녁거리 사온 거고. 내가 솜씨 좀 발휘해 볼게 그쪽도 꼭 먹고 가. 정연이도 약속 확실히 취소시켰지? 너 이런 기회 자주 있는 거 아니다.” “메뉴가 뭔데요?” “스파게티 봉골레. 뉴욕에서 이탤리언 레스토랑 셰프한테 전수받은 거야. 아주 일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데였어. 먹다가 맛있다고 울지나 마.” 이 금발머리가 해주는 저녁까지 먹고 가야만 되는 건가, 게다가 스파게티! 스파게티, 싫어~~~, 하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정연이 지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저기요……. 나는 신경쓰지 마요. 오빠랑 나 원래 서로 일에 절대 간섭 안 해요. 오빠, 이 오빠 이름이 어떻게 돼?” “그래, 정욱아. 니 애인 이름이 모냐?” 저 기집애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도 없지만……. 근데 이 인간은 진짜……! 이건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잖아~!!!!! “이봐요~!! 내 이름 김지해잖아요. 왜 알면서 자꾸 그래요? 한 달도 안 됐는데 정말 기억 못해요? 당신, 머리가 돌이야?” 에이, 씹팔, 젠장, 제기랄, 우라질~!!!! 이젠 다 틀렸어~!!!! 나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이게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이마에 빠직 마크를 그리고 있던 정욱이 낮게 깔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설명 좀 해봐.” “어머, 오빠~!” 금발머리 조민혁이 배를 움켜잡고 주저앉아 집안이 떠나가라 웃고 있는 가운데, 세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에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정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리를 질렀다. “저 방에 웬 피아노야?” 저녁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도 몰랐다. 생각보다는 맛이 있었다. 아니, 솔직히 상당히 먹을 만 했다. 만들기는 전혀 힘이 들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조개랑 홍합을 올리브유랑 화이트 와인에 볶다가 국수 삶은 걸 한데 넣고 향료도 좀 뿌리고 같이 볶는 수준으로 쓱싹쓱싹 날림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는데, 맛은 없지 않았다. 맛을 느낄 수가 없을 뿐. 정욱은 간단한 자초지종을 듣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이따가 얘기하자고 했다. 이 사람들이 가고 나면 또 한바탕의 전쟁이 휘몰아칠 예정인 것이다. “정욱아. 너 이사 선물로 뭐해줄까?” “말했잖아. 아쿠아리움.” 식탁에 앉기 직전에 백화점 슈퍼에서 배달이 잔뜩 왔었다. 쌀 한 푸대, 과일 두어 박스, 맥주 두 박스, 한 병에 몇십 만원이라고 소문만 들어봤던 외제 생수 한 박스. 만들어 파는 정갈한 반찬들에, 모양도 특이한 각종 치즈들, 어딘가 달라보이는 햄과 쏘시지, 와인 몇 병, 그리고 더 이상은 판독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외제 식료품들까지……. 언뜻 보아도 잔돈푼 좀 썼을 것 같은데 이 인간은 돈이 덤비는지 또 선물을 해주겠다고 한다. “정말 저쪽 벽을 다 채울 생각이야?” “반 정도만.” “그 정도 하려면 이천만원 이상 든다.” “형, 그 정도 해줄 수 있잖아.” “이 자식은 지가 편할 때만 형이래. 너, 그리고 아무리 수족관에서 사람 나와서 관리해준다고 해도 니 손 안 가는 줄 아냐? 물도 갈아주고 별지랄 다해야 돼.” “알아. 할 수 있어.” “그 이쁜 열대어들 관리 잘 못해서 죽어 나가면 얼마나 가슴 아픈데. 산호도 잘 죽는단 말야.” “내가 내 손 안에 들어온 거 함부로 하는 거 봤어?” “그래. 너야 원래 징그런 놈이니까. 그럼 나한테 돌아오는 건 뭐냐?” “용서해줄게.” “뭘 용서해, 임마.” “나 속인 거. 이 새끼 놀린 거.” 정욱이 지해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지해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었다. 뭔지 모르지만 지해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지해는 그대로 식탁에서 일어나 나왔다. 식사는 끝난지 오래 되었었고, 정욱과 민혁은 와인을 마시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또 한 명 있다는 정욱의 누나에 대해서도 뭔가 근심스러운 대화를 주고 받았다. 정연은 일찌감치 식탁을 떠나 거실 한구석에 앉아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으르렁대고 서로 은근히 놀리고 갈구면서도 이상한 조화를 이루는 세 사람. 서로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아 보여도 오랜 시간 동안 알아오면서 대충 감잡고 이해하고 넘어가는 사람들. 이 안에 자신이 모르던 정욱의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자기 형제들(준석까지 포함한) 속에서 정욱도 그런 기분을 느낄까? 녀석을 두 형들에게 떳떳이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주어질까? 지해는 거실 창밖의 야경을 홀린듯이 잠깐 바라보다가 담배 한 대를 물고 피아노 앞으로 갔다. 새 피아노에서 나오는 나무 냄새, 칠 냄새. 손자국조차 얼마 묻지 않은 갈색의 완전 신삥 그랜드 피아노. 스타인웨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건데……. 이 녀석은 뭐든지 이렇게 다 쉽구나……. 대체 내가 이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이 녀석이 나한테 바라는 건 뭐지……. 흰색과 검은색의 건반들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살살 건드려보던 지해는 의자를 당겨 앉고 조용히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계속 입에 물고 있던 담뱃재가 극한 상황에 다다른 것 같아 재떨이를 대신할 걸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정욱을 발견했다. 순간, 지해는 떨어지는 담뱃재를 잽싸게 손으로 받았다. 정욱이 얼른 티슈와 재떨이를 가져다 주었다. “이 안에서 담배 피지 마. 환기가 잘 안 돼.” “알아.” “니 몸에 안 좋으니까 그러는 거야.” “그래도 멋있지 않았냐?” 괜히 잔소리한 것 같아 한 마디 덧붙이는 정욱에게 지해가 찡긋 눈웃음을 웃으며 대답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지해는 얼른 말을 이었다. “내가 담배 피게 된 계기가 그거야.” “――?” “옛날에 중학교 2학년 땐가… 음악 선생님이 준 CD가 있었는데, 그 표지에 웬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길게 타들어간 담배를 물고 눈을 슥 감고 피아노를 치는 거야. 걍 홀딱 반했어.” “미친 놈.” “너무 멋있어서 그날부터 물 떠다 놓고 담배를 배웠어.” 정욱은 일부러 눈쌀을 찌푸리며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는 표시를 했다. “……너, 딴 남자한테 반했다느니 멋있다느니 하지 마라. 기분 나쁘다.” “지랄……. 암튼 그 아저씨……, 생계가 어려워서 택시 운전도 하고, 온갖 고생 다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어.” “어떻게?” “겨울에 술에 만취해서 길에서 얼어죽었어.” “………….” “……그 때는 그 인생도 나름대로 멋있는 것 같더라.” “지금은?” “지금도… 멋있긴 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긴 하지만.” “………….” “이런저런 일 겪다보면 세상에 별로 아쉬울 게 없어지잖냐. 어떤 처지에서도 다 살아진다는 걸 아니까. 난 그런 거 솔직히 겁 안나.” 둘은 잠깐 말이 없었다.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먼 눈을 하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지해를 정욱은 그다지 편치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방금 친 곡은 뭐야?” “재즈는 아니야. You and Me라고 그냥 피아노 곡이야.” “……너랑 난데…… 왜 일케 슬프냐?” “응?” “좀 슬픈 것 같애. 그 곡이…….” “너랑 나랑…… 슬프잖아.” “……그딴 소리 하지마.” “………….” “그딴 소리 다신 하지 말라구.” “그래. 그냥……, 기분이 좀 꿀꿀해서……, 미안하다.” 정욱은 똑바로 한참동안 지해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쏘아볼 때마다 늘 그렇듯이 지해는 또 조금 긴장이 되었다. “너……, 그 알바…… 내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음 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이다. “―― 미,미친 새끼! 내가 니 눈치를 왜 보냐?” 지해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소리부터 질렀다. “그럼, 다행이고.” “…오래 할 생각은 나도 없어.” “원래는 말릴 작정이었어. 솔직히 정말 무지하게 싫다. 걱정도 되고. 근데 너를 믿으니까….” 으윽. “그 대신, 니 몸 하나는 니가 지켜.” “……고맙다. 믿어줘서….” 정욱이 지해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하더니, 쓰레기통이 없는 방에서 지해 손바닥에 떨어진 담뱃재를 닦아낸, 구겨진 티슈와 재떨이를 도로 들고 나가며 말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몰라. 너 나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마침 밖에서 왔다갔다하던 정연이 둘의 모습을 보고 우웩, 하고 토 쏠리는 척을 하자, 정욱이 동생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야, 너 집에 안 가’ 하고 윽박지른다. 지해는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아직 다 파헤쳐지지 않은 원석 그대로의 감정마저도 정욱의 것이 더 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어쩜 이 녀석만큼 마음을 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올 마지막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게 방어벽을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 밖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지해는 언제까지나 저 녀석이 항상 이렇게 한 발짝씩 앞서 있게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지해가 치고 있었던 You and Me(<--- CLICK!!!)입니다. [장편] Exit Music 1부 (下) #9. LOVE IS THE DRUG I say go, he say yes 내가 ‘하자’고 하면, 그는 ‘그래’ 그러지. Dim the lights, you can guess the rest 불이 꺼지고, 나머지는 상상에 맡길게. Oh oh catch that buzz 흥분에 취해서 Love is the drug I'm thinking of 사랑은 마약이라니까. 늘 그 생각만 해. Oh oh can't you see 보면 모르겠어? Love is the drug, got a hook in me 사랑은 마약이라구. 완전히 중독됐거든 Oh oh catch that buzz 열기에 흠뻑 빠져서 Love is the drug I'm thinking of 사랑은 마약이야. 그 생각뿐이거든 Oh oh can't you see 보면 모르겠냐구 Love is the drug for me 나한테는 사랑이 마약이야. (Love Is The Drug - Roxy Music) “…하…… 하아…… 하아…으음…으윽!…… 하………후우…….” “후…….으읏……아아……아앗!…… 악!…… 하아…… 학……….” 강한 막판 스퍼트로 밀어붙이며 극도의 자제력으로 참아내던 사정을 마침내 맞은 정욱은, 황홀한 오르가즘에 온몸을 부르르 떠는 지해의 머릿카락 속에 얼굴을 푹 파묻고 나른한 여운에 몸을 맡겼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친 호흡이 진정되고 쾌락의 파도가 완전히 쓸려간 뒤 정욱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 가득히 홍조를 띄고 몽롱한 눈동자를 천장에 고정한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지해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자 서서히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쳐 온다. 다시 고개를 숙여 땀에 절은 머리칼과 이마와 콧날과 눈꺼풀과 입술에 차례차례 입을 맞추고나서, 하나로 맞물린 상태 그대로 그냥 상체만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과 깍지껴 마주잡고 있던 섬세하고 길다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자신의 몸과 겹쳐져 파르르르 전율하던 상반신 구석구석에 깃털처럼 따뜻한 키스를 퍼부었다. “…….하나도… 안 아팠어…임마.” “…그럼… 그냥 좋기만 했냐?” “…그래, 새꺄. 우라지게 좋더라… 이제 얼마든지…… 해도 돼.” “………그래….” “……괜히…몸 사리지 마…….” “…그래.” “…쓸데없이…참고… 그러지 마라…진짜 안 어울린다.” “……그래…….왜 참았나 모르겠다…….” 닷새만이었다. 5일이 힘들게 지나갔다. 당분간 서로 교실에서는 접근하지 않기로 했었지만,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기는 몸의 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산. 월요일 오후부터 벌써 지해는 또 해도 될 것 같다고 당당하게 요구를 해왔다. 그래도, 정욱은 아직도 녀석이 완전히 아물지 않았을 걸 생각하면 무리하게 일을 벌이고 싶지가 않았다. 수업시간에 녀석의 연갈색 뒤통수를 바라볼 때나, 쉬는 시간에 자신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날렵한 몸이 눈 앞에 얼씬거리며 왔다갔다 할 때, 문득문득 치밀어오르는 것을 비상계단 밑의 ‘아지트’에서 짬짬이 몰래 나누는 키스 정도로 간신히 달래며, 주말까지만 참자, 하고 있었다. 정말 초인적인 의지로 억누르던 중이었다. 재작년에 처음 섹스를 알게 된 이래로, 꽤나 그 유희를 즐긴다고 자부해 왔다. 쌓인 것을 풀어 머리를 맑게 해주는 스포츠나 게임 정도였고, 참아야 될 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가뜩이나 더욱 심하게 꼴리던 요며칠간 딴 인간에게 대신 풀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은 훨씬 그 이전부터, 유럽에 가기 직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뭐, 어찌 됐든 한번, 이렇게 영혼까지 타오르는 듯한 진짜 결합, 뼛속까지 즐거운 섹스를 경험하고 나니까 ‘다른 곳’이라는 것은 그저 배설을 위한 공중변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늘 체육시간만 아니었어도 하여튼 주말까지는 버텼을 것을. 가뜩이나 애들 앞에서 허연 다리 내놓고 체육복 갈아입는 걸 봤을 때부터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는데, 눈치 없는 체육선생이 축구하기 전에 준비 운동이랍시고 두 명씩 번호순으로 짝을 지워 윗몸 일으키기와 등맞대고 서로 들어주기 등 각종 밀착형 맨투맨 훈련(?)을 시켜 지해가 다른 녀석이랑 엉켜(?) 있는 걸 목격하자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물론 자신도 어떤 딴 녀석이랑 짝을 지어 그걸 다 했어야 했지만.) 그리고 이 녀석, 눈 마주치자 보라는 듯이 웃으며 지 짝이랑 더 붙었다. 윗몸일으키기 할 때 지 짝 다리 잡아주면서 쓸데없이 상반신 전체로 바싹 끌어안았다. 지는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이쪽에서 볼 땐 분명히 그랬다는 거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체육 시간 끝난 다음엔 뭐가 그리 덥다고 수돗가에서 머리까지 감고 온통 젖은 채로 오후 내내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명백한 도발이자 유혹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부터는 무슨 과목들을 들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생각은 오직 단 한 가지. 그리하여, 학교 파하자마자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곧장 지해를 끌고 온 곳이 집.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CC-TV 카메라야 나 몰라라 하고, 경비 아저씨 돈 주고도 못볼 구경 한번 하쇼 하고 혓바닥 뽑아먹을 것처럼 키스를 시작해서, 현관문 열쇠 돌리는 동안 남는 손으로 내내 속살을 더듬다가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되는 대로 서로 마구 벗겨댔다. 체육까지 해서 끈적거리는데 씻을 틈도 없었다. 땀냄새도 향기롭기만 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침대에 몸이 닿는 순간, 거실 바닥에서 일 저지르지 않고 침실까지 용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지금은 한밤중. 지후의 저녁밥도 물 건너갔고(물론 둘도 여태 굶었다), 정욱은 생전 잘 안 빠지던 검도 연습도 제꼈다. “야, 토요일날 바쁘냐?” 정욱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아직도 아랫도리가 연결된 채로 지해가 상체를 조금 일으키며 말한다. 빼라고 했어도 안 뺏겠지만, 녀석이 입구를 꽉 조이며 놓아주지 않는다. 사실은 힘이 빠진 상태에서 이러면 좀 아프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 협탁에 준비해둔 ‘김지해 전용 담배’ 타임을 꺼내 녀석의 입에도 하나 물려주고 담배끼리 뽀뽀를 해서 불을 붙여줬다. 베개 둘을 겹쳐 등받이로 만들어 비스듬히 눕다시피 기대고, 벌린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헐겁게 감은 나른한 자세. 질펀한 정사 후 묘한 색기를 담은 눈빛. 담배를 끼운 손으로 이마에 붙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연기를 뿜는 모습이 아찔할 만큼 색스럽다. 아랫도리로 다시 열이 몰리는 것 같았지만, 참기로 했다. 배도 고플텐데 더 이상 힘빠지게 하고 싶지 않다. “토요일?” “낼 모레.” “응.” “응?” “응.” “바쁘다구?” “아니, 토요일이 낼 모레라구.” “썰렁한 놈.” 지해는 내가 왜 이런 놈이랑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 궁시렁거리며 담배를 뻑뻑 빨아댔다. 정욱은 그 모습에 다시 반응하는 자신을 느끼고 과연 참아넘길 수 있을지 점점 의심스러워졌다. “토요일은 왜?” “나랑 어디 좀 가자. 그날 바뻐?” “…음…, 약속을 잡아야 될 게 있긴 했었는데….” 지해의 눈빛이 흔들린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의 반응은 참으로 즉각적이다. 길게 관찰할 필요도 없다. “……얘기도 못 꺼내게 생겼다, 이제.” 금세 풀이 팍 죽은 표정. 정말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다. 정욱은 누가 이 재미를 뺏는다면 진짜 그 인간 용서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나 때문에?” “어.” “……중요한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어떡하냐? 그럼 그 약속 그냥 진행해라. 나는 혼자 가도 되니까.” “아니야. 어차피…….” 고개를 갸웃하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 사람이 먼저 얘기를 꺼냈기 때문에…….” 실망과 미안함과 의문이 섞여 들어있는 복잡한 눈빛. “내가 굳이 약속 잡자고 할 필요가 없게 됐다.” 한참 갈피를 못 잡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는 드디어 깨달았는지 눈동자에 불이 번쩍. “그래, 너 말야. 김지해. 이 닭대가리야.” 낄낄거리며 좋다고 웃는 정욱을 지해가 열심히 야리기 시작했다. 그 눈길마저 이뻐 죽겠다. 눈에 뭐가 씌여서 그런 건지, 꽉 잡혀서 그런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욱은 참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다음 라운드로 바로 돌입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우씨~! 너 이거 당장 빼.” 빼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빼, 얼른~! 으으, 이 새끼가!!!! 빼라는데 키우고 난리야~!!!!” 정욱은 얼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지해의 양 손목을 한 손에 거머쥐며 입에 문 담배를 뺏어서 잘 껐다. 물론 그 와중에 꺼진 불도 다시 보기를 잊지 않았다. 한창 좋다가 타죽을 순 없지 않은가. 침대에서 담배 피는 건 원래 안될 일이다. 지해는 약간 반항하는 척 하더니, 금세 솔직한 신음을 흘린다. 정욱은 다음 단계를 척척 진행했다. 서서히 피스톤질의 피치를 올리다 보니 토요일날 어딜 가려고 그러는지 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야 뭐… 일단 이것부터 끝내놓고 물어보면 된다. 어제 너무 무리를 한 탓에, 지해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기가 좀 힘들었다. 등받이가 없어 허리도 더 아프고, 의자에 닿는 부분도 약간 쓰라렸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도 산만하고 그냥 빨리 가고만 싶다. 정욱이 안심이 안 되는지 은근히 따라오려고 폼잡는 걸 간신히 팽개치고 왔으니 가다가 잠깐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핑계고 아무래도 녀석이 보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이 자꾸 그쪽으로 향한다. 하루 종일 한 공간 안에 있고 언제든 보고플 때 뒤만 슬쩍 돌아보면 볼 수 있지만 봐도 봐도 갈증이 난다. 한 시도 떨어져 있기가 싫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그렇잖아도 여기서 사람들에게 오늘 따라 유난히 이쁘다느니, 점점 섹시해진다느니 하는 시덥잖은 소리를 들어 언짢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한 마당에 한동안 잘 따돌려왔던 찰거머리가 언제 왔는지 한 구석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해 속이 편치 않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금 전에 금발머리까지 들어왔다. 눈 마주치자 손을 흔들고… 어쭈, 에어 키스까지 날린다. 저 두 인간을 오늘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단 찰거머리는 야멸차게 딱 잘라서 끊어버리고, 금발머리는 주먹질이라도 해서 사과를 받아내야겠다. 솔직이 그래도 분이 안 풀릴 거다…. 어휴, 저게 강정욱 새끼랑 호형호제 하는 사이만 아니라면……. 요즘 지해의 하루하루는 아슬아슬한 롤러코스터 타기 그 자체. “주원이 형, 오셨어요?” 지해는 자기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조민혁을 견제하며, 먼저 주원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맞은 편에 앉았다. 너는 다음 차례야. 좀 기다려. 아무리 그래도 이쪽이 우선이란 말야. “이 나쁜 자식, 얘가 또 왜 존대를 하고 그래. 사람 겁나게.” “왜요, 형? 왜 저는 형한테 항상 나쁜 자식인 건가요?” “이 그지 발싸개같은 새꺄. 집어쳐. 오랜만에 보면서….” “그러니까요.” 주원이 불안한 얼굴로 지해를 쳐다보았다. 지해는 꿀꺽 침을 삼키며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저는 나쁜 자식에다 그지 발싸개 같은 새끼니까요.” “……무슨 소릴 할려는 거야?”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뜸 좀 들이다가 얘기를 꺼낼 생각이었는데 엉겁결에…… 에이씨, 자꾸 질질 끌면 어차피 이 사람한테도 못할 짓 하는 거니까. “이제 그만 저를 버리세요.” “……이 새끼….” 순식간에 주원의 눈이 흐려졌다. 저러다 울 것 같다. 역시나 맘이 약해지려고 그런다. 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착한 인간이라는 건 안다. 자기한테 그동안 성심성의껏 잘해줬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리다. 더 이상 애인 노릇 하려는 사람은 사절이다. 물론 친구는 환영이지만― 아니, 잠깐. 친구는 환영인가? 내 마음 안에 친구한테 나눠줄 조각이라도 있는 건가? 없다. 없는 것 같다. 정욱이 녀석을 온통 독점하고, 녀석에게 자신을 온통 독점시키고 싶다는 무시무시한 욕심이 마음 속에서 하루도 모르게 독초처럼 자라난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남한테 우정이랍시고 알량한 마음 한 조각 떼어줘 가면서 여유있게 연애를 즐길 만큼 느긋한 사이 아니라는 거 둘이 서로 다 잘 알고 있다. 에이, 씨발. 무슨 욕을 얻어 먹더라도 이 인간 떼어버릴 거다. “형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아시다시피 저 그다지 좋은 놈 아니잖아요.” “………….” “이제 전처럼 형 동생으로 지내요. 그것도 안 되면 학교 선후배로 지내요.” “………….” “그것도 안 된다면―” “그, 그만해. 너 뭐야? 니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자존심 상해서 너 떠날줄 알았어?” “………….” “내가 언제 너한테 자존심 같은 거 차리대?!” “………….” “너 정말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하니?” “………할 수 없어.” 주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지해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다. 말소리가 워낙 작아 들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해는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너무해도 할 수 없다구.” 굳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있는 지해를 주원은 입술을 깨물며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홍사장과 앉아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던 민혁이 슬슬 지해한테 다가왔다. 지해는 딴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가 오는지도 몰랐다가 민혁이 주원이 앉았던 자리에 앉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넌 왜 이렇게 항상 남을 재밌게 해주냐? 니 주위에 있으면 심심할 일은 없겠는데~!” 지해가 째릿하고 보니까, 민혁은 또 재밌다는 듯이 싱글싱글거리며 웃는다. “오늘 너 보러 일부러 왔는데, 너무 그러지 마.” “무슨 소리 듣고 싶어서 그래요?” 얄밉긴 하지만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이 얼굴을 보면, 뭐랄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너도 남자관계가 꽤나 복잡한가 보구나.” “하~!” “계속 지켜 봤는데 말야. 사람 떼버릴 때 그렇게 하면 안돼. 더구나 저런 바텀 중의 바텀 타입은 상처도 크게 받고….” “………….” “……이미 자존심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놈들이 많아서 그럴수록 더 들러붙는다구. 사람 관계가 그렇게 무 자르듯이 잘라지는 것도 아니구 말야.” “………….” “그냥 평소랑 별 차이 없는 것처럼 하면서 서서히 멀어지도록 해봐. 그것도 머리 잘 써야 되는 일이야. 사람 사귈 때는 공들여서 하면서 막상 헤어질 때는 단칼에 쉽게 끊어버리려고 하는 거… 그거 좀 나쁜 일 같지 않냐?” “…어차피 나쁜 일이면 빨리 마무리짓고 싶어요.” “……왜… 정욱이 땜에?”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 “나 너무 미워하지 마.” 민혁이 유들유들하게 말을 꺼냈다. 미워할 건 없더라도 싫은 건 사실. 하긴 이 사람을 얼마나 안다고 싫기까지야 할까. 그냥 뭐랄까, 가까이 하기 꺼려지고 …….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왠지 불쾌한. 묘하게 끈적끈적한. 이상한 느낌. “정욱이한테 남자끼리 섹스하는 맛을 가르쳐준 게 나라구.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되는지도 몰라. 처음이 있었으니까 지금이 있는 거잖냐.” “――!” “너 모르는구나! 정욱이가 처음 안은 남자가 나야!” 그래, 그 이유가 이거였구나. 어쩐지 당신이 영 탐탁치 않았어. 지해가 벌떡 일어나자 민혁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지해의 손목을 나꿔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지해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자리에 그냥 앉고 민혁의 손을 탁 쳐냈다. “아~, 걱정 마. 우린 늘 그렇듯이 그냥 친구야. 그때는 걔가 워낙 까다로운 놈이라 할 수 없이 그런 거구. 나는 더더군다나…… 내가 지금 관심있는 건 너야―” 그 외에도 할말이 굉장히 많았던 민혁은 더 이상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해가 날린 주먹에 정통으로 왼쪽 턱을 맞아 고개가 돌아간 틈에 한 대를 더 맞고 바닥에 의자와 함께 굴렀기 때문이다. 지해는 민혁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그냥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나와 버렸다. 언뜻 홍사장이 쓰러진 민혁에게 달려가고 민혁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낄낄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몽유병자처럼 아무 생각없이 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누군가 자기 어깨를 턱 잡는 것 같아 이 자식도 마저 날려버리려고 주먹을 쥐고 쳐다보다가, 그대로 자신을 끌어안는 그 손길에 그냥 몸을 맡겨버렸다. 언제부터 와서 얼만큼이나 보고 있었는지 모르는 정욱이었다. ................................ 위의 가사는 제멋대로 의역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아, 그리고 위의 he는 노래에서는 she에요. ^ ^;;; .............................................................. (BGM : April front - 영화"4월 이야기" OST) ←CLICK! 아무것도 묻지 않는 정욱의 손에 이끌려 지해는 묵묵히 주차장으로 갔다. 3층 철골 구조로 된 주차장은 바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입구에서 기다리다 보니 곧 정욱이 자신의 애마인 검은색 BMW K1200을 몰고 내려왔다. 바이크마저도 가와사키나 야마하, 할리, 노턴 같은 모터사이클 전문 브랜드를 타지 않고 세련된 BMW를 고집하는 것이 그답다고 지해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일단의 불량 폭주족과 비슷한 부류로 보이기 싫으니 일제는 꺼리는 것이고 모터사이클 매니아로 보이기 싫으니까 할리는 안 타는 것이리라고 짐작했었지만, 정욱은 그저 소리가 맘에 안 들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일제는 너무 앵앵거리고, 할리는 너무 묵직하단다. 사막을 건널 필요도 없는 나라에서 할리가 무슨 소용이냐고 태연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괴퍅하지만 스스로 정한 논리와 원칙을 징그러울 정도로 고집스럽게 지키고,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최상의 질서와 효율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인간. 그래서 남이 그의 행동에 대해 뭔가 복잡한 뜻이 있으리라고 추측하게끔 만들어놓고는, 실제로는 허전할 정도로 지극히 단순명쾌한 이유를 제시하는 인간. 지해는 그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고수부지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시보레 콜벳’ 동호회 사람들이라도 나왔는지 까맣고 하얗고 빨간 콜벳이, 뚜껑 덮은 놈, 뚜껑 연 놈 할 것 없이 고수부지 주차장에 대여섯대 모여 있었다. 바퀴 달린 것만 보면 일단 시선이 쏠리는 정욱이 그 스포츠카들을 보면서 ‘저거 10년전 식이잖아. 낡은 차에 뭐하러 저렇게 튜닝을 했어’, ‘왜 저기다 저걸 달았어’, 하고 궁시렁대며 품평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에 얘기했었나?” 지해가 고수부지 아랫쪽에 자리를 잡고 서서 작은 돌멩이들을 강물 위에 던지며 제비뜨기를 하는 동안, 매점에서 사온 캔커피를 건네주고 정욱이 말했다. “뭐?” 지해는 돌멩이가 강물 위를 통통 튀기며 가는 데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한 번, 두 번……여섯 번 튀었다. 아직 기록은 갱신하지 못했다. “나, 어렸을 때……초등학교 때……자전거를 너무 좋아해서, 세상의 모든 동그라미는 다 자전거 바퀴로 보이던 때가 있었어…….” 먼 눈을 하고 떠듬떠듬 말하는 정욱의 목소리가 우스워, 지해는 풋, 하고 웃고 다시 돌멩이를 강물 위에 던졌다. 한 번, 두 번……여덟 번 튀었다. 아직도 기록은 깨지 못했다. “그 때도 한남동 집에 살았었는데, 축대가 워낙 높아서 대문까지 계단을 꽤 많이 올라가야 했어. 지금은 개축을 해서 그게 없어졌지만. 자전거 타고 우리 동네 그 가파른 길 쌩쌩거리고 다니다가 어른들한테 걱정도 많이 듣고 해서…타고 싶으면 집 안에서만 타라고 하시니까, 차고에다가 두지도 못하고…. 차고는 계단 밑으로 문이 따로 되어 있었거든. 할 수 없이 자전거를 몰래 갖고 나와서 그 계단을 낑낑대면서 들고 내려와가지고는 잠깐 타다가 또 그 계단으로 낑낑대고 올라가는 거야…….” 지해는 추억에 젖은 그의 조용한 옛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제는 돌 던지기를 멈추고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강물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어둔 밤 강가의 정취에 빠져 있었다. “…그게 버릇이 돼서 나중에는 그렇게 안 하면 밖에 못 나가는줄 알고… 바로 옆의 옆집에 놀러가는데도 그 짓을 했었어. 자전거 실제로 타고 그 집에 가는 건 얼마 안 걸리는데,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데는 30분도 넘게 걸리더라.” 지해가 킬킬 웃으며 정욱의 옆에 앉고서 그의 오른팔을 들어 자기 어깨에 턱 걸치고,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욱이 어깨에 얹은 오른손으로 지해의 뺨을 쓰다듬고,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꼭 집어 넘겨주었다. “……그 때 옆의 옆집에 살던 놈이 조민혁이야….” 지해는 순간 흠칫 몸이 굳었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 녀석의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쉬고 있으니 너무 좋다. “민혁이는 우리 누나랑 동갑인데… 우리보다 세 살 많아, 그 자식… 나한테는 거의 유일한 어렸을 적 친구야. 워낙 옛날부터 이상한 녀석이라 세 살 차이 나는데도 어린애 취급 안 했고, 나도 열심히 맞먹어 줬었어.” “아무도 뭐라 안 그랬어?” “니 생각에는……누가 나한테 그딴 거 갖고 뭐라 그럴 것 같냐?” “하긴……. 크크큭. 다들 알아서 기었겠지….” “웃지 마, 짜샤.” 그야말로 어린애같은 그의 말투에 지해는 웃음이 나왔다. 이 자식을 알면 알수록 처음의 인상과는 너무나 다른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민혁이…, 나쁜 자식 아니야. 이상한 놈이라 그렇지……. 뭐랄까, 내 편으로 만들어두면 힘이 되는 녀석이야. 나는 성격이 좀 별나서 친구가 별로 없었는데, 그 새끼는 정말 사교성 만빵이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지 친구야. 인맥도 은근히 엄청 넓어……. 그 새끼 인맥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거야.” “………….” “너도 그 새끼를 니 편으로 만들어.” “아까는…….” “알아. 그 놈이 무슨 소리 하는지 다 봤어…….” “………….” “……그거 너……마음에 걸리냐?” 오히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정욱 자신인지도 몰랐다. 그 녀석이 지해한테 쓸데없이 팔을 뻗치는 것은 정말 싫다. 애한테 괜한 소리를 한 것도 불쾌하다. 숨겨야 될 일도 아니고, 언제든 물어오면 똑바로 대답해줄 일이라도, 지해가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건 싫다. 하지만 남자답지 못하게스리 속좁게 대놓고 질투를 할 수도 없고, 변명을 할 수도 없는데다가, 모른 척 입을 싹 씻을 수도 없는 얄궂은 상황. 정말 엿같다. “그 사실 자체가 맘에 걸리는 게 아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럼…?” “………….” “암튼 그 자식 나보다 처지도 좋아. 친해 두면 나중에 의지할 수도 있고 써먹을 데도 있을 거야.” 알부자로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집안. 이름만 괜히 요란하고 실속없이 빚으로 움직이는 재벌 따위가 아니라 미국에 명목상의 사업체를 두고 부동산이나 현금 운용 같은 그다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물밑 작업으로 큰 돈을 거둬들이는 재계의 숨은 큰 손 중의 하나. 집안의 위신이라든가 하는 면에서 정욱보다는 훨씬 자유롭고, 후손 또한 정욱의 집안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촐한데다 민혁 자체는 둘째 아들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욱만한 거대한 야심이 없었다. 제 나름대로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겉으로는 스스로 집안의 내놓은 자식, 한량을 자처하는 놈이다. 그저 한평생 놀다 가고 싶어하는 놈으로 보일 뿐이다. 어쩌면 지해에게는……민혁이 자신보다 편한 상대인지 모른다……. 아까부터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제 무리를 시킨데다 학교에서도 오늘 내내 골골대는 것 같길래 영 꺼림칙해서 겸사겸사 가봤더니 민혁과 지해가 마주앉아 있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 그림도 그림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둘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이 멈춰졌다. 그리고는 좀 떨어진 자리에서 그냥 둘을 지켜봤다. “무슨 소리야?” 지해가 자기도 모르게 약간 비웃는 투로 되물으니까 정욱이 순간 고개를 돌렸다. 이런 분위기는 싫다. 지해는 정욱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억지로 자신을 보게 했다. “너, 말투가 좀 이상하다? 누가 누굴 써먹고, 누가 누굴 의지하라는 거야? 왜 그래?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해봐, 새꺄.” 정욱은 아무 말도 못했다.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나약함. 자신의 어느 곳에 이런 나약함이 숨어 있었을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소중히 지키고 싶은 것을 갖게 되는 순간, 그와 동시에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알았다. “왜 이딴 얘길 하는 거야? 너 뭘 착각하는 것 아니냐?”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생각했던 자신감은 다 어디로 날려버렸는지. “난 그런 거 필요없어. 니가 그랬잖아. 내 몸은 내가 지키라고. 나 그거 할 수 있어. 니 녀석이든 그 녀석이든 누구든 도움 같은 건 필요없다구.” 이렇게 쉽게 호언장담할 수 있는 이 녀석의 성격이 부럽다는 생각조차 하고. “그딴 녀석이 나한테 수작걸고 그래두 넌 괜찮냐? 난 니꺼 아니었어?” “――!” “……혹시……이제 실컷 따먹었으니까……싫증났다 이거냐?” “말같지 않은 소리 하지―” 더 이상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은 지해가 정욱의 입술에 그대로 입술을 가져갔다. 아무도 혀를 집어넣는다든가 할 생각은 않고 그냥 입술만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간절한 키스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것임을 확인하며 둘다 각자의 불안감을 덮어버렸다. 민혁이 정욱이 처음으로 안았던 남자라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한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한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얘기를 뚝 잘라먹어 버렸으니 그 다음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지해를 열받게 한 것은, 순간 들었던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가 자기들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 같은 생경한 이물감. 그것이 싫었다. 어느 누구도 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은 싫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토요일. 오후 5시의 경복궁 후문 앞. 각종 대형 갤러리들과 프랑스 문화원 같은 겉멋 든 문화 공간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동네. 그중의 하나인 K 미술관의 지하 주차장에 정욱은 바이크를 세우고, 하이바를 벗느라 헝클어진 지해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감기는 부드러운 머릿결의 감촉이 좋다. 나름대로 한 가락씩 하는 사진작가들의 그룹 전시회 오프닝이라 그런지 주차장에는 삐까뻔쩍하는 차들이 꽤 눈에 띄었다. 지해가 같이 오고 싶어했던 곳은 이곳이었다. 전시된 작품(희원의 말에 의하면 그것도 가장 사이즈가 큰 메인 작품이란다)의 모델로서 반드시 나타날 것을 명령받은 전시회 첫날, 혼자 오기는 싫었었다. “넌 그 사진 봤었어?” “아니.” 오는 동안에 길먼지를 탄 진한 남색 재킷의 매무새를 정돈하면서 지해가 대답했다. 가는 코듀로이로 된 스포티한 느낌의 봄 재킷은 윗 칼라와 팔꿈치, 포켓 뚜껑에 같은 진남색의 가죽으로 덧단을 대어 제법 학생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작년 가을 친척 결혼식 때 이모가 사준 옷이라 이제는 더 이상 넉넉하지 않고 몸에 딱 맞았다. 그 재킷 속에 아이보리 색의 셔츠와 물빠진 청바지를 입은 지해를 보고, 정욱도 거기 맞추어 흰색 면티와 좀 짙은색의 청바지를 입었다. 그 위엔 앞이 많이 트이고 단추가 두개 달린 쇼올 칼라의 올리브색 아르마니 가죽 재킷을 걸쳤다. 사진 전시회 오프닝 정도인데 설마 청바지 입고 왔다고 뭐라 그러는 사람은 없을 거다. 지해는 정욱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런 행사에는 정문으로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화환이 잔뜩 들어서 있는 입구에는 길지는 않지만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입구 안쪽에는 손님들의 서명을 받는 방명록 테이블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저쪽으로 주욱 올라가면 청와대 나온다.” 미술관 입구에 서서 정욱이 오르막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나, 이 동네 첨 와봐. 소풍도 맨날 선릉 같은 데만 가고 경복궁 온 적은……아, 한번 있었다. 그래도 이쪽은 안 왔는데…….” “강남 촌뜨기.” “강북만 오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교보문고밖에 몰라.” “이따가 갈 때 저 청와대 앞으로 해서 산길로 한 바퀴 돌고 가자. 거기 호젓하고 경치도 좋아.” “그 앞에 지나가도 돼?” “정문 안으로 돌진만 안 하면 당연히 안 막지.” “야……, 너 혹시…….” “――?” “청와대 안에 들어가본 적 있냐?” 정욱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고 지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서 와. 역시 니 사진이 최고 인기야. 인간들이 보는 눈은 있어 갖구.” “아, 얘가 ‘쟤’구나! 히야~! 너 실제로 보니까 정말 한 인물 한다.” “역시 우매한 인간들은 꼭 이런다니까. 작품을 봐야지 모델을 보냐?” “아무리 작품 사진이라도 그렇지, 쭈그렁바가지 할배 주름살 확대까지 해서 보는 건 좀 괴로워. 그보단 이런 꽃미남 보는 게 기분 좋잖아.” “저 쭈그렁바가지 할배가 누군데, 이 무식한 여자야. 인간문화재란 말야. 이 여자 정말 문화부 기자 맞아?” “인간문화재는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선정하는 거야? 내가 볼 땐 요런 이쁜 커플이야말로 인간문화재야.” “근데 그 옆에 키큰 애 말야. 낯이 좀 익다? 어디서 본 것 같애.” “모델 아냐? 쟤네 민간인 아니지?” 자신과 정욱을 묶어 ‘커플’이라는 말에 질겁을 하고 지해는 쉴새없이 쑤근덕거리는 윤희원과 그의 악녀 친구 일당들을 뒤로 하고, 어느새 자기 사진 앞에 가 서 있는 정욱의 뒤를 따랐다. 거친 입자와 뚜렷한 음영이 두드러지는 세피아 톤의 커다란 사진 속에는 열어젖혀진 검은 그랜드피아노의 뚜껑 사이로, 피아노 앞에 앉은 무표정한 소년이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카메라 렌즈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랜드 피아노 뚜껑에 비춰진 그림자가 약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구석에 놓인 길다란 스탠드가 동그스름한 빛을 만들고 있었고, 그 주위로 부드러운 그림자가 뒤로 갈수록 층층이 깊이를 더했다. 생각보다 몇 배는 훨씬 근사하게 나온 사진에 지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늘상 보아오느라 별 느낌 없던 바의 내부가 이렇게 운치있는 곳이구나 싶을 정도였다. 뒷배경으로 보이는 테이블 위에 거꾸로 얹어놓은 의자들마저 분위기를 위해 연출해 놓은 광경처럼 보였다. “야, 이게 컬러 사진이래. 흑백이 아닌가봐.” 『‘탈출’. 윤희원. 68 X 50. 컬러』 라고 되어 있는 사진 밑의 라벨을 보며 지해가 말했다. “이렇게 나오는 필름이 따로 있어. 근데, 왜 제목이 탈출이래?” 정욱이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하며 무심코 지해의 머리카락 속의 뒷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내가 그 아줌마 속을 어떻게 아냐.”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집요하게 스리슬쩍 셔츠 칼라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자, 지해가 정욱의 오픈된 재킷 속 옆구리를 더듬는 척 하면서 꼬집었다. 앗, 하는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정욱이 손을 쓱 꺼내 다시 지해의 어깨에 두르고 뺨을 살살 건드렸다. 둘은 킥킥 웃으며 다음 사진들로 걸음을 옮겼다. 희원이 아는 손님들 하나하나에게 열심히 인사를 하며 접대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악녀 친구들은 전시장 안의 다른 사람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좀처럼 보기 힘든 눈부신 미남 두 명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쟤네……, 정말로 커플…인가봐…….” “흐음…,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애들끼리 장난하는 거 아냐?” “아니야. 느낌이 틀려. 저거 봐. 서로 거의 손을 못 떼잖아.” “진짜! 장난 아니네. 저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다.” “모델들이면 흔하잖아…, 그런 관계….” “모델 아니야. 나 저 키큰 애 어디서 봤는지 생각났어.” “어디?” “나 문화부로 오기 전에 경제부에 잠깐 있었잖아.” “맞아. 맨날 안 맞는다고 죽는 소리 했었지….” 시간이 좀 지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오자, 슬슬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패션, 광고 사진 전문 포토그래퍼로 유명한 작가들의 전시회 오프닝답게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는 꽤 낯익은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정욱은 그만 가자, 그러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일부러 윤희원을 찾아가서 뭔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해는 뻘쭘하게 서 있다가 전시장 구석에 있는 테이블 위의 샴페인을 홀짝였다. “저기, 너……저 윤희원 작가 사진 속에 있던 애 맞지?” 생전 처음 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늘씬한, 세련된 여자였다. 머리 위에는 썬글래스를 얹고 있었고, 언뜻 봐도 글래머에 화장술은 거의 프로의 솜씨였다. “네, 그런데요.” “너 혹시 어디 에이전시 소속된 데 있니?” “네?” “모델 에이전시 같은 데…….” 지해가 머리를 가로로 붕붕 젓자, 그 여자는 핸드백 속의 명함 지갑을 꺼내 빳빳한 명함을 건네줬다. 「박미현. 실장. 현's 모델 에이전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XX번지 OO빌딩 3F.」 “와~ 이렇게 젊으신데 실장님이세요?” “어머, 너 뭔가 좀 아는 애구나. 사실은… 내가 사장인데 현장 뛰기 불편해서 구라로 실장이라고 한 거란다. 독립한지 얼마 안 됐거든.” “………….” “야, 나 나이 많어. 그리고 수상한 사람 아냐. 저기 윤희원 작가님하고도 일 많이 해봤어. 오늘도 직접 초대받고 온 거야, 얘. 나중에 물어봐. 나 이 업계에서 엄청 베테랑이야. 그러니까 독립했지.” “………….” “카메라 테스트 해보고 프로필 만들게 다음 주 중에 연락 한번 하고 나와라.” “………….” “아니, 아니. 니 연락처 불러봐. 전화번호. 핸드폰 번호.” 엉겁결에 줄줄 불러주고 있는데, 정욱이 조금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지해를 싹 나꿔채 끌고 갔다.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준 게 영 찜찜해서 뒤를 돌아보니, 박실장이라는 여자는 노란 알의 선글래스를 쓰고 베이지색 니트와 바지를 입은 어떤 아저씨와 열심히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강정욱, 너 그 사진작가 아줌마랑 무슨 얘기했어?” “별거 아니야.” “혹시……너도 사진 찍어달랬냐?” “그렇잖아도 찍어주고 싶다는 걸 거절했다.” “――?” “니 사진 샀어.” “아까 그 사진?! 그런 것도 팔어?!!” “그럼 안 파냐? 액자까지 낀 상태로 껴서 샀는데.” “그 큰 걸 어따 걸게?” “걸 데 없을까봐 걱정이야? 밀착 뜬 거 보고 맘에 드는 거 골르면 더 뽑아주기로 했어.” “………….” “근데 필름은 죽어도 안 판댄다.” 필름을 못 산 게 못내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짓는 정욱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 지해의 머리를 정욱이 한번 부비부비해 주고는 주차장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살짝 키스를 했다. 지해는 아직도 어이가 없는 채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BGM : Brother Can You Spare A Dime - Dave Brubeck)←CLICK! 조용히 현관문의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부드럽게 돌아간다. 제기랄… 아무도 없길 바랬는데… 일요일 오후에 이 인간이 집에 없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시립 도서관이라든가 뭐 기타등등 나가서 공부할 만한 데가 찾아보면 없겠는가 말이다. 며칠 동안 동생의 의무(?)도 제대로 못하고 있어서 거의 눈 마주치는 시간이 없도록, 그것도 안 될 때는 상당히 바쁜 체 해서 순간을 겨우 모면하곤 했건만, 오늘은 정말 제대로 걸린 거다. 현관에 놓인 신발을 보니, 준석이 또 와 있는 것 같다. 어쩌면……어쩌면, 이 인간 오늘은 그냥 넘어갈지도 모른다. 남에게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그 잘난 꼬장꼬장한 자존심 때문에 준석 앞에서조차도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동생한테 화내거나 야단치는 일은 없는 종자니까. “지해야. 너 얼굴 보기 힘든다.” 나름대로 살금살금 조용히 자기 방으로 간다고 했지만,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귀까지 밝은 형한테 제대로 걸렸다. 약간 열려 있던 지후의 방문이 활짝 젖히면서, 한 명은 책상 앞에서 한 명은 밥상을 펴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공부하고 있던 두 형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 꽂힌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늘 상황을 부드럽게 무마하고자 하는 준석이 웃으며 농담으로 얼버무리려 드는 한편, 지후는 아무 말 없이 화난 얼굴을 하고 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는 한 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생보다 키도 작은 게 형 노릇은 얼마나 깍듯이 하려드는지 그 좋은 머리로 각종 궤변을 늘어놓으며 상황을 전부 본인에게 유리하게 갖다 붙여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면, 어쩐지 듣는 사람이 큰 죄인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그놈의 헛소리는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예를 들어 전화가 온다거나, 천재일우로 초인종이 울린다거나, 어디서 수상한 인기척이 들린다거나 등등)이 벌어지지 않고는 듣는 사람이 귀가 아파서라도 항복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요 근래 외박을 정말 밥먹듯이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러다가 한 소리 듣지 싶었다. 지후도 이 정도면 한계상황이라고 생각했는지, 어제 새벽에 서둘러 등교를 하면서 ‘너, 오늘밤에 보자’ 그러고 나갔는데, 어찌하다 보니 어제는 정욱과 데이트 기분을 내면서 놀다가 녀석의 술수(?)에 말려들어 그 집에서 또 밤을 지샜다. 목, 금, 토 3일 연짱이다. 그나마 ‘오늘도 자고 가, 나 이제 혼자 못 자겠어’ 운운하며 집에 안 보내주려고 하는 걸 억지로 떨치고 나오면서 스스로 대견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막상 집에 들어와보니 냉엄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너 이제 슬슬 형이랑 얘기 좀 해야겠다는 자각이 들지 않냐?” 지후가 지해의 방으로 따라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답답하게 문은 왜 닫고 그래? 그냥 열어놔.” “내가 아무래도 언성을 높이게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동네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거든. 죄없는 준석이 형 공부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 얘기를 안 함 되잖아.” “그럴 수는 없거든. 얘기는 해야겠거든.” “아~ 그럼 빨랑 말씀하쇼. 나 피곤해. 졸려. 잘 거야.” “나는 일단 니 얘기를 먼저 듣고 싶다. 할 얘기가 있을 걸로 아는데 먼저 해봐.” “싫어. 난 할 얘기 없으니까, 말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얘기해.” 괜히 형 페이스에 말려들어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을 게 지레 겁난 지해가 거칠게 재킷을 벗어 던지며 땡깡을 부리자, 지후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피곤하다고 하니, 어디가, 얼만큼, 무엇 때문에 그토록 피곤한 건지 그것부터 말해.” “피곤한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피곤한 거야. 하루 이틀의 피로가 아니라 그동안 힘들었던 게 누적된 거란 말야.” “그래? 그러면 그건 그렇다 치고……. 너, 정말 요 며칠 네 행태에 대해 나한테 일언반구 한 마디도 할 말이 없냐?” “행태? 행.태?! 행.태.라니?!! 내가 한 행동 중에 행태라고 불릴 만한 게 어디 있었어?!!” 예상외로 사납게 반응하는 지해의 태도에 놀란 것은 지후보다도 지해 자신이었다. “그렇군. 네가 그렇게 생각 안 한다니, 나도 더 이상은 말 못 하겠다.” “………….” “……내가 형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는 건 나도 잘 알아.” 이렇게 나오면 정말 겁난다. 이 인간이 이런 말 한다고 넘어가면 안된다. 어디 한두 번 속았는가 말이다. 지껄일 만큼 지껄이고 빨리 나가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그래도 내가 니 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아버지도 안 계시고 어머니마저 저런데…, 어쨌든 난 이 집안의 장남이고, 너 하고 나 둘밖에 안 되지만, 우리 가족의 손윗사람이야……. 넌 그런 생각 안 하더라도 난 그 생각 항상 해.” 비교적 자주 쓰이는 레파토리. 흥, 안 넘어간다. “나도 나 하나 추스르기 정신이 없어서, 너를 잘 챙기진 못 했지만…….” “…괜히 이상한 쪽으로 비약하지 마.” “비약하는 거 아니야. 형이 얘기하는데 끝까지 좀 들어, 임마.” 별로 끝까지 듣고 싶지 않구만, 제길. “나는 우리 형제가 부모님 없이 자라서 막 나간다는 소린 정말 듣고 싶지 않아. 아니, 남한테 무슨 소리 듣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형, 그러면 말이야. 우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지 결국은 그런 소리 들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지해의 냉소적인 말투에 지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좀 녀석이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 녀석 속은 많이 곪은 채로 남아있다.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다 이제 맨날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웃고 지낸다고 해서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다. 형제끼리 이 정도로 진지하게 얘기해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형은 공부에 파묻혀서 동생은 음악에 파묻혀서 그냥 덮으며 살아왔다. 눈이 마주치면 아주 일상적인 대화나, 뜬구름 잡는 잡담이나, 의미없는 말장난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살면서 점점 잊어가고, 점점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는 건강한 사람들의 대열에 낄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나. 하지만 세상에 상처 하나 없는 인간이 어딨단 말인가. 상처는 사람을 아프게 해도 그걸 견딤으로써 더욱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믿어왔다. 그 믿음이 둘을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런 생각 안 한다. 그러니까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야.” “………….” “……돌아가신 아버지나, 저 지경이신 어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린 더 열심히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돼.” “하~! 난 형같은 효자도 아니고, 형만한 수재도 아니고, 형처럼 주위 사람들 기대 한 몸에 받고 자란―” “너, 괜히 성질 난다고 나중에 후회할 소리 함부로 하지 마라. 진심도 아닌 말 입에 담지 마.” “………….” “니가 피곤하고 졸립고 하대니까 더 이상은 말 안 하겠지만…….” “그럼, 그만해! 그만하고 일단 좀 나가줘.” 전에 없이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고 벌렁 누워버리는 지해를 바라보며, 지후는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문 밖에서 전화벨 소리가 한번 울렸다. 준석이 받았는지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세 끊은 것 같다. 누구 전화인지 알 것 같다. 문을 열고 나가다가 지후는 생각났다는 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너 말야……. 니가 말을 안 해도, 내가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 잊지 마.” “――!” “난 어쨌든 니가 직접 니 입으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 “……그 타이밍이 너무 늦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후는 지해가 미동도 않고 눈을 감고 있는 걸 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지해는 형이 아무리 저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형의 논리에도 익숙해졌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거다. 암만 생각해도 자신은 세상에 별로 두려운 게 없는 것 같다. 누가 뭐라 그래도 자기만 만족하고 좋으면 그만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점에서 형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 기본적인 생각이나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형의 말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그럴싸해도 거기에 헷갈려서 자신을 뚜드려 맞추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누가 옳은지 그른지도 판단할 수 없는 지금, 확실한 건 자신을 감싸주는 따뜻한 손길을 찾았다는 것이고, 그걸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다는 것뿐이다. “지해랑 얘기 잘 했어?” 지후가 방에 들어오자, 문제집에서 눈을 떼지 않고 수학 문제를 풀던 손을 놓지 않은 채 준석이 물었다. “으응…….” “집 얘기도 다 했냐? 여기 빼줘야 한다는 거?” “아니. 그 얘기까지 꺼낼……휴우, 아까 주인집 아줌마가 언제랬지? 6월?” “그래. 이제 5월 다 됐으니까 한 달밖에 안 남은 거야.” “이모한테는 일단 얘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것도 안 할 수는 없군.” “니네 그냥 우리 집으로 들어와라. 우리 할머니 1월달에 돌아가신 다음에 그 방 그대로 계속 비워놨잖아. 그 방이 내 방보다 훨씬 크다. 거의 안방만 해. 욕실도 따로 있고.” “그래도 형네 할머니 유품들 다 남아있잖아. 그냥 둔 거 이모부가 다 생각있으셔서 그런 걸텐데…….” “생각이고 뭐고 없어. 엄마가 할머니 물건 만지기 귀찮으니까 내버려둔 거야.” “우리는 어디가 됐든 이사 가면 돼. 다만 여기 전세금은…… 이모랑 의논을 해야지.” “니네끼리 사는 거 내가 보기에도 힘들어 보여. 어른이랑 같이 안 사니까 지해 녀석도 제멋대로 구는 거다.” 골치가 아팠다. 오늘 오전에 문득 주인집 아줌마가 내려와서 이 집을 부수고 건물을 지을 거라며, 6월 초에 공사를 시작하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하라고 통보를 하고 갔다. 어쨌든 지해랑 의논해야 할 일인데, 어째 이 자식은 오늘 자기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계속 외박하는 것도 그렇고 영 찜찜한데, 도무지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주원 새끼 전화……아까도 왔었다.” “언제?” “너 지해 방에서 얘기하는 동안에…….” “아까 그 전화, 그 놈인줄 알았어. 뭐라 그래?” “뭐라 그러긴? 지해 들어왔냐고 그러지. 핸드폰 안 받는다는 소리 또 하고.” “미친 새끼. 있으면서 안 바꿔준다고 또 지랄해?” “어.” “그래도 어떻게 금방 끊었다?” “한번만 더 전화하면 당장 죽도 들고가서 엉덩이뼈 뽀사질 때까지 패준다고 했거든. 내 말이 신뢰감 만땅이었나 보지.” 준석과 지후는 동시에 키득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당사자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제 오늘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는 공부의 맥을 끊고, 사람 잠도 못 자게 난리를 쳐댄 그 녀석은 몇 대 후려패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새끼 완전히 정신나간 것 같던데……. 저 녀석은 어쩌다가 그딴 새끼한테 걸려서….” “중학교 때는 멀쩡했잖아. 공부도 잘 하고 괜찮았다구.” “나 전학왔을 때 우리 반 부반장이었어.” “성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망가진 케이슨가?” “……확실하지 않은 얘기… 함부로 하지 말자.” 지후가 냉랭하고 똑부러지게 말을 끊는다. 준석은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 자식 지해한테 저렇게 목맬줄 알았으면 그 집 과외를 연결해주는 게 아닌데, 울 엄마 탓이다.” “걸려서 넘어간 놈이 문제지 왜 이모 탓이냐.” 지후는 한숨이 나왔다. 낌새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잘 못 했었다. 정말 자신은 형으로서 빵점이다. 그나저나 지해가 어쩌다 그런 쪽으로까지 나갔을까? 원래 모험심도 좀 있고, 호기심도 많고, 겁도 없고……. 형제라도 원래 많이 다른 녀석이지만, 그쪽으로도 저항감이 별로 없었나 보다. 자신과는 정말……너무나 다르다. “지해한테 이 얘기도 했어?” “뭐?” “뭐긴 뭐야. 이주원 새끼…….” “아니.” “야, 너 아까 가서 대체 무슨 얘길 한 거냐? 넌 안 되겠다. 내가 붙잡고 얘기를 하든가…….” “아니야. 그러지 마. 우리 형제 문제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임마, 너…….” 준석은 상처받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후는 좀 미안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아무리 형제처럼 지내는 사촌간이지만, 친형제는 아니다. 자기네 형제를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지나친 간섭은 사절이다. 어쩔 수 없다. “아니……저 자식 좀 이상해서 그래.” “――?” “믿는 구석이 따로 있다는 투야. 너는 지랄을 떨어라, 난 내 멋대로 할 거다, 딱 그거야.” “………….” “저럴 때는 좀 내버려두다 잘 구슬리던가 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 “………….” “……저기, 형. 일단 오늘은 그만 집에 가서 공부해.” “………….” “…미안해….” 준석이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지해한테만 신경써야 될 게 아니라 이 인간한테까지 신경을 써야 되나 보다 싶어서 지후는 좀 짜증이 났다. “하하. 야, 난 니가 형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왜 소름이 끼치냐?” “………….” “알았어. 에이, 난 오늘도 여기서 자고 학교 가려고 준비 다 하고 왔는데.” 왜 갑자기 준석과 같이 자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할 만큼 껄끄럽게 느껴진다. 지금껏 같이 자라다시피 했는데, 이런 생각이 다 들다니……정말 생전 처음이다. “…왜, 또 잠 안 자고, 괜히 자는 사람 얼굴 들여다 볼려고?” 지후가 어색한 마음을 다스리려 농담조로 가볍게 대꾸를 하자, 준석이 금세 얼굴을 붉혔다. 정말 어젯밤에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코 앞에 사람 얼굴이 하나 떡 놓여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 그,그건 니가 잠꼬대를 심하게 하다가 갑자기 숨을 안 쉬는 것 같길래….”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정말 경끼 일으키는 줄 알았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나는 간다 가.” ‘지해는 잔다니까 인사 안 하고 그냥 간다’ 하고 문 밖으로 나서는 준석을 배웅하고, 지후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가 복잡하다. 집 문제, 지해 문제… 전부 다 쉽게 해결해 버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러고 앉아서 고민만 한다고 하루 아침에 해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그나마 분명한 해답이 있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백번 현명한 일이다. 지후는 아까 들여다보던 참고서와 문제집에 다시 집중하고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복잡한 주위의 문젯거리들이 자아내는 소음은 전부 사라지고, 방 안에는 연습장 위에 샤프 긁히는 소리, 책장 넘어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지후의 머릿속에서도, 하나하나 풀어 나가는 이 책 속의 문제들이 세상 어느것보다 중요한, 절대절명의 과제로 정착해가고 있었다. #10. BIZARRE LOVE TRIANGLE I feel fine and I feel good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잘 지내기만 해. I'm feeling like I never should 근데 사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Whenever I get this way 이런 생각이 들 때면 I just don't know what to say 난 정말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Why can't we be ourselves like we were yesterday 우리 그냥 다 잊고 어제의 우리로 돌아갈 순 없을까 I'm not sure what this could mean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I don't think you're what you seem 너도 지금 보기보다 속이 편한 것 같진 않아. I do admit to myself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할게 That if I hurt someone else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Then I'll never see just what we're meant to be 우리 관계도 결코 잘될 것 같지가 않아. (Bizarre Love Triangle - Frente!)←CLICK! 하지 말라는 것은 오히려 더 하고 싶다. 남들이 말리는 재미 때문에라도 자꾸 더 하고 싶다. 그리고 자꾸 자꾸 더 하다 보면 점점 더 중독이 돼서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정욱은 오른손으로 화학 실험실의 실험 테이블을 살짝살짝 두드리며, 흰 가운을 입고 칠판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화학 선생님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달리 둘 데가 없어서 고정하고 있는 시선. 아니, ‘어딘가’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눈을 떼지 못할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가장 무난한 곳을 쳐다보는 것이다. 아, 리드미컬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이 버릇. 피아노 치는 것처럼 두드리는 이 버릇은 바로 실험 테이블 맞은 편에 앉은 ‘누군가’의 버릇이다. 지금 정욱이 의식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 하지만, 이미 시야의 한 귀퉁이를 차지해버린 바로 그 녀석의 것이다. 사소한 버릇까지 옮을 정도로 그렇게 서로 물들어버린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 잠깐 녀석을 쳐다보게 된다. 창을 등지고 앉은 지해의 등뒤로 해맑은 5월 오전의 햇살이 한 가득 부서진다. 태양을 머금은 갈색 머리가 금빛 가루를 날리며 너풀거린다. 눈이 부시다. 잠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퍼지는 행복감으로 뼈 마디마디가 저리고, 새삼스럽게 가슴이 설렌다. 너무너무 눈이 부신데 눈을 뗄 수가 없다. 녀석이 멍하니 칠판 쪽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추어 온다. 그리고는 등으로 온통 떠안은 햇살보다 더 밝고 화사한 미소를 던진다. 둘의 비밀스런 따뜻한 시선이 한참 동안 조용히 얽힌다.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잠깐 이렇게 눈이 마주친 다음에, 녀석이 혹시 누가 봤을새라 두리번거리지 않는다는 것. 자신은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지만, 이 녀석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지 꼭 그러곤 했었다. 그 때마다 마음이 욱씬 쑤시거나, 좋았던 기분이 나빠지거나 했었지만, 한번도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생각이 전해졌는지 이제는 지해도 주위의 시선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어쩌면 둘 다 전보다 훨씬 뻔뻔해졌는지도 모른다. 비밀이라는 건 처음에는 짜릿하지만, 나중에는 마음 속의 짐으로 남기 마련이다. 하나도 유쾌하지 않고 그저 매사에 불편할 뿐이다. 불편하고 찜찜한 기분으로 자기들 둘 사이에 오가는 감정을 퇴색시키기에는 둘은 너무나 많이 왔고, 둘만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중간고사가 다음 주로 다가왔는데, 시험 범위를 훨씬 앞서나간 부분을, 그것도 실험까지 굳이 해야겠냐며 쑤군덕대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여기까지 들릴 정도니 선생님의 귀에는 분명히 닿을 것이다.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실험 전의 주의사항과 실험을 하는 의미에 대해 끝까지 이야기한다. 이거 기말고사 때 분명히 나온다라는 말을 슬쩍 덧붙인다. 역시 애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던 거다. 필기 강박증에 사로잡힌 많은 아이들이 갑자기 전기라도 통한 듯 열심히 받아적기 시작한다. 지해도 예외가 아니다. 방금 전까지도 자신과 눈싸움을 하며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장난치던 녀석이 심각한 체 하며 끄적거리는 모습을 보자, 정욱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6명 앉은 다른 테이블에 비해서 끄트머리에 서는 키 큰 사내 녀석들로만 구성된 (이 학교는 전체적으로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좀더 많은 편이었다) 이 실험조는 4명밖에 되지 않았다. 실험 테이블마저도 다른 애들과 약간 떨어져서 한켠으로 치우쳐 있었다. 정욱은 주위를 살짝 둘러본 뒤 침착과 냉정을 가장한 채 시침 뚝 떼고서, 필기 삼매경에 빠진 지해의 발을 꾸욱 밟았다. 순간 움찔하고 눈을 끄게 뜬 지해가 금세 작은 악마 같은 미소를 흘리고는 역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정욱의 발을 답례로 밟아 주었다. 잠깐 지해를 바라본 뒤 정욱은 신발을 살짝 벗은 발로 지해의 무릎 안쪽부터 발목까지를 부드럽게 훑었다. 지해도 지지 않고 똑같은 액션으로 보답을 했다. 정욱은 이번에는 허벅지 안쪽을 살짝 쓸어올렸다. 종점까지 무사히 도착했을 때, 지해가 터져나오는 신음을 삭히느라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고 정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여전히 차분하다 못해 근엄하기까지 한 포커페이스를 놓치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계속된 에로틱한 장난 속에 어느새 둘은 의자를 깊숙히 당겨 앉았다. 무릎을 바싹 맞대기도 하고 다리와 다리가 뒤엉키도록 하기도 했다. 신발을 벗은 발로 서로의 발등을 더듬어 주기도 했고, 롱다리를 쭉 뻗어 가급적이면 서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을 노골적으로 집중 공략하기도 했다. 테이블 위의 알콜 램프가 푸른 불길을 내뿜으며 타올랐고, 차례로 시험관 속에 들어간 실험물들은 물질과 물질의 화학 반응을 보여주었다. 가끔씩 주위의 분위기를 의식하면서 정숙을 유지하기도 했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학 선생님은 특별히 총애하는 몇몇 여학생들이 있는 실험조 근처를 배회하며 농담 따먹기와 다가올 중간고사 얘기에 여념이 없었고, 남녀가 섞여 앉은 다른 테이블에서는 나름대로 양이온과 음이온이 번쩍번쩍 스파크를 튀기며 분주하게 주변 온도를 상승시키고 있었다. 또, 같은 실험조인 나머지 두 녀석은 원래 지들끼리만 뭉쳐 상온에서는 기체로 존재하며 둥둥 떠다니는 녀석들이다. 다가올 중간고사로부터 이번주 씨네21에 이르기까지 온갖 삼라만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느라 그것만으로도 매우 바쁜 듯했다. 주위 상황을 파악한 뒤 정욱과 지해는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장난에 전념했다. 그 다음부터 명목상의 화학실험은 어떻게 전개됐는지 둘 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테이블 아래에서 진행되는 실질적인 실험. 또다른 화학 반응을 도출하는 대담하고도 왕성한 탐구. 예를 들어 자기들 둘 사이의 끓는점은 어디인지, 전기 전도성과 결합 에너지는 어느 만큼 되는지 알아보는 중대한 태스크에 깊이 빠져, 둘은 테이블 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조차 문득문득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실험의 궁극적 목표가 ‘물질의 반응과 물질 세계의 규칙에 대한 심화된 이해’였다면, 실험의 궁극적 결과는……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것이었다. 장난의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워낙 아슬아슬한 장난인지라 더욱 더 짜릿하긴 했으나, 그 덕분에 흥분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4교시라서 다음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지해야. 점심시간인데……, 안 가?” 대각선으로 정반대 방향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선경이 다가왔다. 금테안경 속에서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지해와 정욱을 번갈아 향하고 있었다. “어……, 저기……이 자식이……아까 필기를 제대로 못 해서 내 노트 베껴야 된대. 그냥 먼저 가서 먹어라.” 선경이 어느 정도 눈치 깠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해는 차라리 ‘다 알면서 뭘 그러냐. 자리 좀 피해 줘라’ 하고 싶었다. 실제로 노트를 베끼는 척 하던 정욱이 고개를 쓱 들어 위협적인 표정으로 선경을 쓱 한번 바라봐주자, 선경은 예의 상큼한 보조개를 한번 보여주고는 도망치듯이 화학실을 빠져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들 몇 명과 속닥속닥 하는 소리와 통통거리는 귀여운 발소리가 멀어지면서 과학관 전체에 적막이 찾아왔다. 지해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끊임없는 자극과 긴장 속에서 이제 좀 벗어났다고 생각이 되자 자기가 들어도 등골이 오싹한 허허실실한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머리가 띵하다. “야, 너 그 상태로 아직 밖에 못 나간다.” 정욱이 지해의 손을 턱 잡아 테이블 위에 놓고 자기 손을 그 위에 겹치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 손을 들어 지해의 손가락 끝을 일일이 살살 깨물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래?” 내려다 보니 그런 것 같긴 하다. 자기 몸인데도 그걸 잘 몰랐다. 그렇게 말하는 저 녀석도 피장파장이다. 요새 지해는 전보다 훨씬 더 섹스에 매달렸다. 형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지지난주 일요일 이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마음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불안감은 오로지 정욱과 결합할 때에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매번 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이렇게 이 녀석과 하나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는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놓쳐버리고서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정욱이 이끄는 걸 따라 지해는 계단을 올랐다. 아무래도 화학실은 위험했다. 폭발은 무섭다. 과학관 4층은 계단식으로 된 커다란 시청각실 하나가 다 차지하고 있었다. 보아 하니 지난 시간에 이 시청각실에서 수업한 반은 없는 것 같았다. 정욱은 시청각실 안쪽의 좁은 수업 준비실로 지해를 이끌었다. 여기라면 얼마든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른다. 준비실 안에는 녹슨 철제 캐비넷 하나, 고장난 OHP 프로젝터, 바퀴 달린 흰색 칠판, 구닥다리 앰프와 부러진 마이크 스탠드, 접는 의자 몇 개와 낡은 나무 책상, 걸레가 된 교과서 몇 권, 먼지투성이 체육복 등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책상 위에 검은색 가죽 시스템 다이어리와 공통 과학 교과서, 길이 잘든 작은 나무 방망이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약간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던 정욱은 재빨리 바깥의 시청각실 교탁에 그것들을 던져놓는 걸 잊지 않았다. 문을 닫고 안에서 잠그자 ‘잠시 멈춤’ 상태였던 둘 사이의 ‘분위기 급상승’이 다시 재개되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멍하기만 하던 지해의 몸도 4층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르는 과격한 운동으로 제 기능을 되찾고 있었다. 지해는 교복 재킷과 니트 조끼를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정욱이 자신을 벽에 밀어붙이고 키스를 하면서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버리는 동안, 지해는 정욱의 재킷을 벗겨 책상 위로 던졌다. 정욱은 얼굴로부터 서서히 입술을 아래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일어나 온몸에 퍼져갔다. 입술이 배꼽 주변에 닿았을 무렵 정욱이 지해의 교복 바지 지퍼를 내렸다. 아마 간단하게 마무리지을 생각인가 보다. 지해가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정욱이 지해의 것을 꺼내 입 안에 품었다. “야, 잠깐만 있어 봐.” 지해는 재빨리 바지와 속옷을 벗어던지고 뒤로 돌아서서 최대한 상체를 숙이고 엉덩이를 쭉 빼며 벽을 짚었다. 이 녀석과의 사이에 부끄러움이란 이제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괜찮겠어?” “어.” “역시 용감해~!” “시간 아까워. 빨리 하기나 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정욱은 한쪽 무릎을 꿇고 쭈그리고 앉아 곧 자신이 들어갈 곳에 혀를 댔다. 축축 하는 음란한 소리가 좁은 공간에 가득 찼다. “엄청난데! 아닌 게 아니라……이 정도면……그냥 넘어갈 순 없겠는걸.” “시끄러, 씨바……집중해서…(윽)… 잘 해.” 손과 혀로 앞뒤에 한꺼번에 주어지는 자극에 지해는 서서히 이성을 잃어갔다. 곧 정욱이 살살 애태우며 들어왔다. 녀석과 하나가 되는 이 순간이 제일 좋다. 아픈 쾌감과 함께 허전한 내부를 꽉 채우며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오는 이 느낌. 마음 속의, 몸 속의 어떤 앙금도 말끔하게 자취를 감추는 이 절정의 순간이 좋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몸에, 마음에 이 녀석을 꽉 채우고 잔뜩 새겨서 평생 두고두고 곱씹을 거다. 이 순간의 느낌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다. 둘이 대충 옷차림을 정돈하고 담배 한 대씩을 피우고 나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강정욱, 나 배고파. 속쓰려….” “안 고프면 이상하지 않을까.” “앗~!! 야……. 저기……거기 벽에 말이야…….” 지해가 약간 쑥스러운 듯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자, 정욱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 “……우리가 얼룩을 남겼잖냐….” “그런데?” “혹시 나중에 무슨 감정 같은 거 하면…, 있잖냐…. 과학수사 어쩌구…그런 데서 하는 거….” 계단을 앞서 내려가던 정욱은 코너를 돌다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지해를 올려다 봤다. “야, 너 거기 니 샘플 맡겨논 거 있냐?” “어디?” “국과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미쳤냐?” “나도 아직까지는 전과도 없고…. 그런 데랑은 전혀 인연이 없어서 말야. 기록이 없을 거야.” “근데?” “그러니까 괜찮다고.” “――?” “범인을 잡으려면 전교생의 정액을 다 채취해야 될 거 아니냐.” “………….” “그 비용이 얼마겠냐. 니가 교장이면 그거 잡으려고 그 돈을 들이겠냐?” “그렇군!” 정욱은 지해의 뒤통수를 마구 한번 헝클어줬다. 농담하는 게 아니었다니! 어쨌든 이 녀석은 가끔씩 이럴 때 너무 귀엽다.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우뇌에 비해서 좌뇌가 별로 발달을 안 한 것 같다. “그냥 학교 건물에다가 낙서 좀 했다고 생각해라.” “………….” “왜, 찜찜해? 불안해?” “아니…, 그냥….” “기특하게 바지 벗고 나설 때는 언제고….” “그게 아니라니깐~!” “뭐……, 만약에 들키면…….” 과학관 건물을 빠져나오자 꽃향기 나는 상쾌한 바람이 머리 속을 훑고 지나갔다. 갑자기 정욱은 아까 교탁 위로 던져놓은 검은색 다이어리랑 교과서를 나오면서 못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각실 교탁 위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들키면…?” “들키면…….” 나한테 시집와라, 하려다가 왠지 현실성 없게 들릴 것 같아 정욱은 그냥 잠깐 입을 다물었다. 들키면 차라리 잘 된 거지, 하고 중얼거리고 지해를 쳐다보니, 지해는 새파란 5월의 하늘에 먼 눈길을 주고 있었다. 햇살 속에서 녹아내릴 것 같은 하얀 옆얼굴. 왠지 좀 쓸쓸해 보였다. 정욱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요새는 학교 끝나면 거의 지해랑 같이 집에 돌아와서 지해가 해주는 밥을 같이 먹고, 숙제도 하고, 공부도 하고……. 물론 이런 짓, 저런 짓, 그런 짓을 하기도 했었다. 검도 연습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처럼 형 도시락을 가져온 지해와 타이밍을 맞춰서 같이 집에 갔다. 이제 외박하면 형한테 맞아 죽게 생겼다며 밤 늦게라도 꼭 집에 들어가버리지만, 언젠가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습관이 되어, 없으니까 좀 허전하다. 오늘은 청담동의 그 모델 에이전시인가에 가는 날이라 밤에나 잠깐 볼 수 있든가… 아니면, 내일 학교 가서 얼굴 보게 생겼다. 녀석이 자세한 얘기는 안 하니까 자신은 잘 모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가서 무슨 훈련을 받는단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도 벌써 중고생 여자애들이 보는 잡지에 나갈 패션 화보를 하나 찍었다. 다음 달에 이름도 유치찬란한 그 잡지가 나오면 나도 사야 되는 건가 싶으니까 한숨이 나온다. 일단 경계하고 봤던 그 실장이라는 여자(알고 보니 전직 모델이었다)는 자신의 조사에 의하면 수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신체포기각서 따위를 받아 자기 관리하에 있는 모델을 이리저리 굴리는 나쁜 사람은 아니라니까 어느 정도 안심은 했으나,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 치면, 바로 못 하게 할 작정이니 괜찮다 해도, 솔직히 별로 탐탁치는 않다. 옛날 그 알바를 관뒀으니 녀석도 일거리가 필요할 거다 싶기도 하고, 괜히 힘든 일 한다고 설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좀 대견하기도 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내 꺼가 뭇 사람들 앞에 얼굴 내놓고 하는 거……정말 싫고 불안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 받는 걸 보면 은근히 자랑스럽고 기분이 좋다. 이런 심리는 대체 뭘까? 자신은 정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건지 그 녀석의 가능성을 충분히 믿고, 뭐가 되도 분명히 될 놈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객관적인 평가도 과연 그렇게 나올지 확인하고자 하는 걸까? 만약에 이러다가 녀석이 무지하게 떠버린다면…? 그런 일이 흔하게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 이쁜 내 꺼가 안 뜨면 이 세상에 누가 뜰 수 있단 말이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지해 자신은 뜬다라든가 그런 건 아예 관심도 없고, 또 하나의 알바 이상으로는 전혀 생각을 않는데다가 그런 일이 자기 차례까지 왔다는 것 자체를 신기하게 여기는 놈이다. 그 녀석이 그렇게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걸까? 어쨌든간에 녀석이 자기 힘으로 경제적인 여유를 만들고 마음이 좀 편해진다면 자신은 참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접어드는데, 골목길 어귀에 깜박이를 키고서 정차를 해놓고 있는 보라색 Z3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저 차가 눈에 밟힌다 싶으면서 골목 안으로 발길을 꺾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에 백열 전구가 탁 켜지는 것이다.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운전석의 유리문을 내리고 야리야리하게 생긴 곱상한 남자애 하나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둘 중의 하나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둘은 잠깐 그렇게 마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 것 같다.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굳이 자신이 먼저 말을 시킬 필요는 없다고 정욱은 판단했다. 정욱이 발길을 돌리는데,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갸날프지만 굉장히 도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강정욱…? 지해 일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시간 좀 내줘.” “오늘도 거울 보면서 이상한 거 해야 되는줄 알았는데….” “얘는~! 이상한 거라니! 너 니 밥벌이의 기본이 되는 신성한 트레이닝에 대해서 자꾸 그렇게 말할래? ”그래도 쓸데없이 거울 보면서 인상쓰고 후까시잡고 포즈 취하고 하는 거 좀 민망해요. 원래 거울도 잘 안 보는 편인데…….“ ”얘.야.~!“ ”……네?“ 박실장은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에서 간신히 차를 끼익 세웠다. 말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냥 지나칠 뻔한 건지, 원래 스타일이 이런 건지 횡단보도를 반 이상이나 침범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거 뭐야’ 하는 시선으로 둘이 타고 있는 은색 EF 소나타를 째려보았다. 박실장은 빨랑빨랑 좀 지나들 가지 뭐 이렇게 꾸물대, 하고 밖에 거의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거리낌없이 말한다. 신호가 바뀌기가 무섭게 부릉~ 하고 차를 출발시킨다. 몸이 들썩거려 머리가 흔들릴 정도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운전을 와일드하게 하는지……. 지해는 정말 이 여자가 운전하는 차에는 다시 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아. 니가 말하는 그 이상한 거 목돈 쳐들여 가며 배우고, 모델 되고 싶어서 몸부림쳐도 안 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단다. 괜히 사기만 실컷 당하고 지망생으로만 끝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엉?” “……알았어요.” “너 그딴 소리 또 할래, 안 할래?” “안 할게요.” “니가 이렇게 금방 팔릴 수 있게 된 게 누구 덕택이라고?” “실장님이요.” “짜아식~” 박실장은 대답에 만족했는지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창문을 조금 내리고, 한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익숙한 솜씨로 담배를 꺼내 재빨리 불을 붙였다. 아까는 운전하면서 핸드폰으로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니……. 아무튼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서 다 한다. “뭐, 사실 따지자면, 니가 근본적으로 받쳐주니까 되는 거지만. 생각보다 몸도 아주 유연하고, 말귀도 잘 알아먹고, 끼도 좀 있고 말이야. 남자 모델들 처음 시작할 때 로보캅처럼 굳어갖구 한심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그래, 이것아. 마음만 앞서갖고 별 생쑈들을 다 하고 아주 웃기지도 않지.” “근데, 저는 안 그런다구요?” “아, 그렇다니까. 넌 지금까지 내 말을 어디루 들었냐, 엉?” 지해가 쿡쿡거리고 웃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렇게 나이 많은 여자가 훨씬 대하기 편하다. 예전의 임경숙 선생님도 그렇고……. 같은 또래의 여학생들은 좀 불편하다. 엄마 같고, 누나 같은 여자들이 부담없다. “얘야. 근데 말이야. 넌 너무 호리호리해서 헬스 좀 해야 돼.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쳐도……너 저번에 왔을 때 키 재니까 몇 나오대?” “182요. 더 자랄 거에요. 작년 가을에 비해서 2센티 더 컸던데요.” “그래. 딱 5센티만 더 자라라. 더 크면 TV에선 너무 커보이니까. 쇼할 때 런웨이에선 그럴싸해 보여도 너무 크면 역시 TV는 좀 그래. 그리고 말야…….” 지해는 박실장이 갑자기 셔츠 컬러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목덜미를 짚자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했다. “이런 자국 몸에 붙이고 다니지 마.” 손가락을 뗀 곳을 고개를 숙여 바라보고 나서, 박실장이 뭘 말한 건지 깨닫고 지해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가 나중에 검사할 거야. 사귀는 애한테두 잘 말해놔. 키스마크 절대루 만들지 말라구. 너 망신살 뻗친다구. 알았어?” “………….” “너무 놀래지 마. 그냥은 안 보여. 내 눈이니까 보인 거야. 장사 하루 이틀 하냐?” 지난번에 화보 촬영할 때도 옷 갈아입는데 혹시라도 티가 날까봐 차 속에 숨어서 몰래 갈아입느라 진땀 뺐었다. 다른 남자 모델은 아무데서나 척척 벗어 젖히는데 자기만 처음이라 부끄러워서 그러는 척 하고 넘겼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넘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때……너랑 갤러리에 같이 왔던 애말야. 걔 체격 좋더라. 걔야말로 그대로 데려다가 런웨이에 세워놔도 되겠던데, 이쪽에는 관심 없다니?” “글쎄요. 하하…, 아마 전혀 관심없을걸요?” “……걔가…….” “――?” “…걔가… 니 애인이지? 나, 쪽집게지?” “――!” “말해 봐. 야단치는 거 아냐. 이 바닥에 그런 일 흔해.” “………….” “괜히 어설프게 아니라고 할 것 없어. 너, 나한텐 무조건 사실대로 말해야 돼. 내가 독립하고 나서 진짜 맘에 드는 물건 제대로 건진 건데, 시시하게 키울 생각 없다구.” “……그렇게……티가 많이 나요…?” “엄청 티 나. 니네 조심 좀 해야겠더라.” 박실장은 목적지인 ‘세강 애드’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기계에서 주차권을 뽑고 나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1층 로비에는 커다란 프로젝션 TV가 켜져 있어, 최근 TV에서 방영중인 세강 애드 산(産) CF들을 연속으로 틀어주고 있었다. 1층 구석에는 세강증권의 영업소와 은행 지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은행 앞의 ATM 기계 앞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두어 명이 줄을 서 있었다. 10층 건물 전체를 쓰고 있는 이 회사는 보안이 철저하게 되어 있어 1층 안내 데스크에서 ‘어서 오십시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상냥하지만 기계적으로 묻는 사람들에게 어느 직원을 찾아왔는지 말하고 인터폰으로 확인한 뒤 방문증을 받아서 올라가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가면서, 박실장은 오늘 만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가 왜 지해를 데려온 건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꽤나 큰 껀인데 완벽한 새 얼굴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지해의 프로필을 보고는 실물 한번 보자고 말했다고도 했다. 지금 이 사람들이 한두 명 중에서 고르고 있는 게 아닐 테니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고도 했다. “아무리 날라리 직업같지만 말야. 저 사람들도 기성세대라구. 애들 좀 떴다 싶으면 까불고 말 안 듣는 거에 아주 데인 사람들이야. 나도 그건 질색이니까 너도 알아서 잘 해. 일단 오늘은 묻는 말만 대답하고 착실하게 보이는 게 좋아. 그래서 일부러 교복 입고 오라고 한 거야.” 엘리베이터와 화장실이 있는 공간을 빼놓고는 커다란 통유리 벽으로 사무실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유리문에는 ‘제작1부’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고, 방문증(직원들의 경우는 ID 카드)에 붙은 마그네틱을 잠금장치에 갖다대면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사무실 안은 전체적으로 회색톤으로 꾸며져 있었고, 직원들마다 일일이 커다란 파티션 안에 아주 좁지는 않은 자신만의 공간을 이루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ID 카드를 목에 걸고 왔다갔다하던 직원들 중 몇몇이 박실장을 알아보고 인사도 하고, 농담을 걸기도 했다. “요즘 박실장님이 판 휩쓸었다구 소문 파다하던데?” “무슨 소리야? 오픈한지 석달도 안 됐어.” “근데 남자 모델만 대행한다며? 일반인 모델이랑 유아 모델두 남자만?” “애들이랑 아저씨들은 취급 안 해. 수준급인 애들만 소수 정예로. 10명 이상 안 늘릴 거야.” “그래도 장사가 되나? 여자 모델 있어야 되지 않나?” “요새 추세가 많이 바뀌어서 괜찮아. 실속없이 쪽수만 많으면 관리하기만 번거로워. 여자애들은 딴 데도 많잖아. 우리는 될 놈만 골라서 잘 키우자는 주의니까.” “그것도 굿 아이디어다. 한 가지만 특화해서 확실하게 하는 거. 나중에 나 회사 짤리면 박 실장님이 나 좀 책임져줘. 나 차승원보다 잘 나갈 자신 있어.” “어이, 아저씨. 일단 나이 열 살 깎아먹구,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형 싹 하구, 석달 동안 하루에 4시간씩 헬스해서 몸 만들어갖구 와봐. 그러고 나면 한번 생각해볼게.” 박실장은 지해를 벽쪽에 세워두고는 파티션의 행렬 중에서 그중 꽤 넓어 보이는 곳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바싹 들이댔다. 그 안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때 전시회에서 박실장이랑 얘기를 나두던 노란 선글래스의 아저씨였다. “신차장님. 나 왔어요.” “어? 박팀장님. 아참, 이제 사장님이지! 아니, 대외적으로는 실장님이던가? 웬일이야?” “웬일은? 신인 모델 인사시키러 왔지. 왜 그때 실물 한번 보재매?”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쟤야?” 신차장이라고 불린 노란 선글래스 아저씨는 벽에 붙어 서 있는 지해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해는 눈이 마주치자 얼른 거의 90도 각도로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신차장이 쟤 엄청 초짜구나, 하며 웃자 박실장도 같이 웃었다. “아~! 정이사님.” 때마침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수수한 아줌마 한 명이 지나가자, 신차장이 불러 세웠다. 박실장도 아까 농을 주고받던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경직된 자세로 그 이사님이라는 아줌마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세 명이서 자기네들끼리 주고받는 얘기 속에 간간히 세강 텔레컴이 어쩌구, XYZ 캠페인이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그 이사님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몇번 자신한테 꽂히는 걸 느끼며 지해는 등골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아까 그 아줌마가 이사님이세요?” “야,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나라 광고계의 신화적인 인물이구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그래요?” “연봉이 2억 가까이 된댄다. 카피라이터로 출발한 월급쟁이 연봉이 억대로 가면 대단한 거지. 여기 사장님이 그렇게 신임하신다니까. 저 분 없으면 회사 안 돌아가는줄 안대잖냐.” “………….” “니가 캐스팅될지도 모르는 그 캠페인을 총지휘하는 사람이야. 저분이 맡아서 못 따오는 PT(presentation, 다른 광고기획사와 경합을 해서 광고수주를 따오는 걸 말함)가 없다더라.” “………….” “이번 꺼 진짜 잘 됐으면 좋겠다. 자기들 말로는 톱스타부터 초짜까지 남자애들만 500명 이상을 훑어 봤다는데…….” 신차장이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먼저 8층에 있는 회의실에 가 있으라고 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박실장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사실, 지해에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신이 관리하는 남자 모델 두 명의 프로필도 같이 집어넣었다가 그중 지해만 골라졌던 것이다. 지해는 살짝 뒤를 돌아 사무실 안을 보았다. 어깨와 한쪽 귀로 낀 전화로 계속 어딘가와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광고 시안 뽑혀 나온 걸 양손에 들고 비교하며 옆에 있는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신차장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자기 일로 분주히 정신없어 보이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학교에서만 알던 세계, 알바로 체험하던 한토막의 사회와는 또다른 세계가 여기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과 알고 지내고, 같이 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맡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실장을 처음 만나 엉겁결에 이쪽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 일에 대해 현실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도 한번 잘 해볼 수 있는 일인 것 같았다. 둘이 엘리베이터 앞에 당도하자,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땡하고 열렸다. 한 명이 내리고,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키가 꽤 크고 다소 마른 편인 근엄한 중년 신사와 그 보좌 정도로 보이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젊은 직원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중년 신사는 친절하면서도 위엄 있는 말투로 몇 층 가냐고 묻고 손수 8층을 눌러 주었다. 박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지해는 그 신사의 눈길이 교복에 잠깐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본듯 굉장히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체 어디에서 봤을지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8층에 도착했다는 땡 소리가 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내리려는데 그 신사가 입을 열었다. “학생, 세강고등학교?” “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틈으로 그 중년 신사가 지해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실장님. 방금 저 아저씨… 혹시 아세요?” “그분? 여기 사장님. 그 유명한 강성철 회장 둘째 아들이잖아.” 지해는 비로소 그 신사가 왜 그렇게 낯익어 보였는지 감이 잡혔다. 정욱의 공부방 책상 위에 얌전히 올라앉아 있던 액자 속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엄청 뽀대나는 그 가족 사진 속의 사람들은 사진이 찍혔던 그 순간만큼은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보였었다. 그리고 이것이 정욱의 아버지이자 세강고 이사장이기도 한, 세강 애드의 강태선 사장과 지해의 첫만남이었다. 집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했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길게 나눌 얘기는 없지만, 차 안에서 얘기하기도 그렇고, 집 앞에 다 와서 어디를 따로 가기도 귀찮다. 주원이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냉장고에 있는 주스를 글라스 두 잔에 부어서 들고, 정욱은 주원이 기다리는 거실로 왔다. 주원은 환기 때문에 문을 활짝 열어둔 피아노방의 피아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저거……지해가 쓰는 거…?” 정욱은 긍정의 표시로, 거만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며 눈꺼풀만 잠깐 깜박여주고 조용히 말했다.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지……, 빨리 끝내주면 좋겠는데.” “왜?” “일단은, 용건이 그리 길 것 같지도 않고….” “………….” “……지해가 언제 올지 몰라서 말이야.” 주원은 좀 어지러웠다. 거짓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지러웠다. 집안 곳곳에 지해의 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녀석의 태도도 너무 당당하다. 지해 얘길 꺼내니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집으로 들인 것도 그렇고……. 도로 내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지해가……여기서 같이 사는 건 아니지?” “아직은.” “……그럴 계획이라도……있는 거야?” “그런 계획은 없지만……나는 그 녀석이 원한다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정욱은 조용히 허락을 구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렇게 늘어지는 분위기는 정말 싫다. 하지만, 오늘 이 참에 분명하게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 꺼한테 한때 정성을 다 하던 인간인데, 심한 상처를 주면서 내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만큼 자신은 너그러워져 있었다. “……지해를……사랑해?” 굉장히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주원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물론.” 묻자마자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바로 맞받아치는 정욱의 대답에 주원은 또 할 말을 잊었다. “……왜……하필 그 녀석이야?” “글쎄……그건 일단 나도 아직 모르는 거라서… 대답해주긴 곤란해. 그럼 그쪽은 왜 하필 그 녀석한테 이러는 거지?”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야…….” “――?” “네가 누군지 알아. 뉘집 자식인줄 안다고.” “근데? 그게 무슨 상관?” “상관이 왜 없어?!!”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던 주원이 눈을 똑바로 쳐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설명을 자세히 좀 해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으니까.” “너 같은 재벌집 아들이 왜 하필……지해처럼 엄청 힘겹게 사는 애를 뒤흔드냐 말이야? 가난한 애 보니까 신기하대? 갖고 놀기 편해 보여? 왜 그러는 거야?” “이봐.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진 모르겠는데, 이것만은 똑똑히 알아둬…” 정욱은 서서히 차디찬 감정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곱게 타일러서 단념시켜 보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나 정도 위치에서 내려다 보면……, 다들 별 차이 없어 보여.” “――!” “물론 그중에도 형편이 좀 나은 놈이 있을 테고, 그보다 못한 놈도 있겠지만, 난 솔직히 그 차이를 잘 못 느끼겠어. 별로 구별하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지레짐작으로 사람 몰아부치지 말도록 해. 갖고 논다는 말 따위도 가급적 삼가해 주고.” “………….” “이봐. 그쪽이 오늘 나한테 뭘 묻고 싶은 건지는 잘 몰라도, 내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건 대충 다 한 것 같은데……, 더 길게 할 얘기 없으면 그만 얘기 끝내주면 어떨까?” 주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해는 정말 놓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붙잡고 싶다. 이 녀석의 약점을 건드려서 빼앗고 싶다.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정욱은 주스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입맛이 쓰다. “그래서……지해를 끝까지 책임지겠단 말이야? 너희 잘난 식구들한테 허락받을 수 있어?” “어이, 어이.” 정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이렇게 앞서간다지? 피차 아직 고등학생인데. 이러니까 네가 차였지, 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구냔 말이다. 이런 말 따위는 대꾸도 해주기 싫지만, 어쨌든…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몰라. 우린 지금 현재 속에서 사귀는 거고. 그걸 전제로 시작한 관계야.” “나는 지해 책임질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우리 집에서도 지해 인정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유학도 같이 갈 수 있고, 내가 끝까지 고생 안 시키고 책임질 거야.” 주원은 거의 울부짖듯이 쉬지도 않고 내뱉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말투는 거의 애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욱은 백만 광년 이상 앞서나가는 그 얘기들을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어딘가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드는 작은 뭔가가 가슴 속에 숨어 있었다. 그게 뭘까. 정욱은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부러움…일까나. “확실하지도 않은 일 갖고 얘기 길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자신감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근데 그걸 어떻게 보장하지?” “우리 부모님도 내 성향 다 아셔. 내가 지해 아니면 안 된다고 우기면 인정해주실 수밖에 없어.” “이봐. 내가 알기로는 그쪽 아버님이 판사 출신으로 변호사인 걸로 아는데……. 그게 그렇게 쉽기만 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걸 어떻게 믿는다?” 사실은. 믿어진다. 그 점이 아주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니가 아버지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지 짝 찾아 맨날 밤거리 헤매다니면서 망가지는 꼴 보고 싶겠니?” 불쌍하지만, 이런 솔직하다 못해 바닥까지 홀랑 까뒤집어 보여주는 애원 따위 정말 취향이 아니다. “나 오늘 여기 싸우러 온 거 아냐. 너한테 빌러 왔어.” 그런 것 같군. “난 그런 생활 정말로 싫어. 무섭고 두렵고… 아주 신물 나. 난 지해만 내 곁에 있어주면 돼. 내가 사랑할 사람 찾았으니까 그거 하나로 족해.” 주원이 거의 흐느끼며 정욱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정욱은 적지 않이 당황하면서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글세……. 꽤나 가슴 아픈 얘기긴 한데……, 내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당사자한테 직접 얘기해 보지 그래.” “――!” “당사자가 직접 결정하게 해줘. 나는 그 녀석이 판단하는 거에 따를 테니까.” 주원은 어이가 없는지 후후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아주 자신이 넘치는구나….” “내 입장에선 그 정도도 많이 양보한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그리고 자신이고 뭐고를 떠나서……결정해야 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이런 얘기를 계속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 같아서 말이야.” 주원은 힘없이 일어서서 문을 향했다. 더 이상 얘기를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정욱도 피던 담배를 비벼 끄고 따라 일어섰다. 현관문 앞에 서서 주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너 말야……지해 없으면 죽어?” “하하하…이것 참….” “웃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줘. 지해 없으면 죽어?” “아니.” 라고 대답하면서 느껴지는 미묘한 작은 패배감. 하지만 사실인걸. “그리고, 내가 아는 그 녀석은 그런 걸 원할 놈이 아니야.” 그래서 한 마디를 괜히 덧붙인다. “……만약에 그 새끼가 그걸 원한다면?” 기세가 살짝 뒤집혔다고 생각했는지 주원의 목소리에는 조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질문이라 별로 대답해야 될 필요를 못 느끼는데.” 겉으로는 냉정을 가장했지만 정욱은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난 말야……. 그 새끼 없으면 죽을 것 같애.” 글쎄. 두고보자구. 정욱은 속으로 작게 되뇌었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책임지고 힘들게 안 할 것처럼 말하더니. 그 녀석한테 너무 큰 부담일 거라고 생각 안 해?” “부담스러워 하는지 안 하는지는 두고보면 알겠지.” 주원이 문을 쾅 닫고 사라진 다음에 정욱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지해가 빨리 와야 했다. 빨리 얼굴을 봐야만 했다. BGM : Too young to go steady - John Coltrane←CLICK! “안녕하세요? 8층에 불이 꺼져 있네요? 아직 안 들어왔어요?” “아니. 8층 학생 아까 들어왔는데, 밖에도 나가는 것도 못 봤고…….” “그래요? 그럼 잠깐 자나 보죠. 저 그냥 올라갈게요.” 정욱이 며칠 전에 경비 아저씨들에게 단단히 말해 놓은 다음부터 지해는 경비실 무사 통과였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어깨에 맨 책배낭과 양손에 든 반찬거리들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양손에 든 비닐봉지의 끈이 손바닥 속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해물탕에 들어갈 생선 토막이랑 양파니 파니 하는 것들이 원래 값에 비해 무게가 좀 나간다지만, 별로 산 것도 없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아까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설마 집에 없진 않을 거다. 벨 눌러서 안 나오면 열쇠로 문 따고 들어가면 된다. 아직껏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열쇠 한번 써 보지 뭐……. ……아, 역시 그래도 남의 집인데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가긴 싫다. 없으면 올 때까지 문 앞에 앉아서 기다려야겠…. 현관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온 집안에는 불이 다 꺼져 있었고,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아쿠아리움에 들어와 있는 파르스름한 불빛만 눈에 도드라져 보였다. 정욱은 그 앞에 앉아 물 속을 유유히 노니는 열대어들과 쉴새없이 촉수를 오무렸다 폈다 하며 경련을 일으키는 핑크빛 산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깜한 데서 또 뭐하냐?” 저 녀석은 왜 이렇게 가끔 깜깜한 데서 청승을 떠는지 모르겠다. 음침한 놈. “뭘 그렇게 들여다 보는 거야?” 지해가 옆으로 바싹 다가가서 거의 귓가에 대고 소리를 좀 높이자, 정욱은 깜짝 놀란 듯 몸을 흠칫했다. 수조 안을 어찌나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던지 누가 온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언제 왔어?” “방금―” 지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정욱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말 없이 지해를 꼭 끌어 안았다. “……왜 이래?” “그냥 좀 가만히 있어봐.” 어깨에 얼굴을 깊이 묻고 킁킁거리는 것이 꼭 주인 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애완견 같다. 그렇잖아도 박실장이 저녁 사준다며 먹고 들어가라는 걸 집에 있는 강아지 밥 줘야 한다고 둘러대고 왔는데……. 지해는 어느새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덩치만 커다란 이 강아지 녀석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정에 굶주린 놈이라는 걸 이 세상의 누가 또 알까. 아마 나 외엔 아무도 모를 것이란 생각이 들어 지해는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졌다. 지해는 얼굴을 들어 정욱의 어깨 너머로 조금 보이는 수조 안을 보았다. 민혁이 어림잡았던 예산을 훨씬 초과하면서까지 마련해준 전자동 시스템의 커다란 아쿠아리움. 물을 갈아줘야 할 필요도, 먹이를 따로 챙겨줄 필요도 없는……. 따로 손이 갈 일이 전혀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한 또 하나의 생태계(정욱의 말에 의하면 ‘소우주’)다. “불 킬까? 배고프지? 얼른 밥해줄게…….(이 강아지야.)” 정욱이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지해의 시선을 따라 수조를 보았다. 총천연색의 손바닥만한 예쁜 물고기들을 다시 홀린 눈으로 바라본다. 처음 이 수조가 왔을 때에는 완벽하게 열대 바다처럼 꾸며진 인테리어(산호나 바위 등등) 외에는 살아서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그랬던 게 올 때마다 못 보던 물고기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더니 지금은 총 여덞 마리가 그 안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이 녀석 말이야…….” 정욱이 다른 물고기들보다 훨씬 길쯤하게 보이는 밝은 남보랏빛 물고기 하나를 가리켰다. 못 보던 놈이다. 자세히 보니 머리부터 2/3 정도는 보랏빛이고 그 나머지는 오렌지 빛이다. 보랏빛에서 오렌지빛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생긴 신비로운 무늬가 눈에 확 띄었다. 등 지느러미와 항문 지느러미도 살짝 두 가지 색이 섞여 있는 것이 굉장히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지해는 사실 이런 거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다. “……너 닮았어.” “나? 어디가? 내가 저렇게 색깔이 이중적이냐?” “어.” “난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초기부터 있던 놈이야. 굴 속에 숨어 살고 밖에 잘 안 나오니까 니가 못본 거다. 나도 이 놈이 보고 싶으면, 컴컴하게 불 다 끄고 이 앞에서 한참 기다려야 돼. 근데 밖에 잠깐 나왔다 싶으면 금방 안으로 쏙 들어가버려. 이렇게 이쁜 놈이.” “디게 비경제적이다, 야……. 관상용인데 이왕이면 밖에서 계속 얼씬거리는 놈이 좋지.” 지해의 퉁명스런 말에 정욱은 후후, 하고 바람소리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 무지 외톨이야. 지 짝 하나만 딱 정해서 그 놈 하고만 놀아. 자기 영역에 딴 놈이 들어오는 걸 굉장히 싫어해.” “……여긴 한 마리밖에 안 보이는구만.” “워낙 귀한 종류라 짝 구하기가 쉽지 않지. 여기 있는 다른 녀석들은 전부 인도양 출신이라 몰디브 같은 데서 데려오는 건데, 이 녀석은 대서양에 살아. 일부러 구해다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샵에도 잘 안 갖다 놔.” “엄청 비싸겠네….” “뭐 그럭저럭…….” 이 녀석 입에서 비싸다는 말이 나오면 도대체 얼마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해는 그 물고기를 다시 보았다. 그런 설명을 듣고서 보니 그 놈이 좀 더 특별해 보인다. “정말 여러모로… 꼭 너 같애…….” 정욱이 그 우울한 남보랏빛과 명랑한 오렌지색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적인 물고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지해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수조 속의 창백한 조명이 정욱의 얼굴을 우러러보듯이 콧날과 턱선과 검고 진한 속눈썹을 타고 올랐다. 옆에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는 별(형광등 불빛이겠지만……)이 몇 개 반짝였다. 좁은 유리장 안에 소금물 부어놓고 바다에 살아야 할 생물들 가두어 둔 게 뭐가 좋다고 저렇게 난리일까.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지해는 정욱의 옆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너는 이런 게 그렇게 좋냐?” “어. 아름답잖냐. 생명끼리 어울린다는 게.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 안에 완벽한 생태계 하나가 존재하면서 그 나름대로 질서있게 굴러간다는 사실이 쇼킹하지 않냐.” “…쇼킹까지 하냐………….” “너랑 나랑 취향이 좀 다르니까.” 정욱에게 있어 지해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저 녀석이 찬양하는 것은 항상 죽은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남긴 음악, 죽음을 담고 있는 예술, 소위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포기하고 이루어낸 그 무엇에 대해 스스로의 삶 자체보다 훨씬 더 깊이 빠져 있다. 그러면서 뭐든 두렵지 않다고, 더 이상 깨질 게 뭐가 있냐고, 세상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인생의 깊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은 그래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없다던가? 저 녀석의 사람 홀리는 대담성과 무모함(자신이 더욱 지해에게 정신없이 빠지게 된 원인이기도 한)이 혹시 거기서 나오는 건 아닌가 생각이 미쳤던 언젠가부터, 정욱은 자신들 둘의 불투명한 미래보다도 그것이 더 걱정됐었다. 삶이 좋다. 생명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쉬지 않고 굴러가는 역동적인 것들이 좋다. 삶의 에너지와 질서가 좋다. 그리고 저 녀석이 살아서 요동칠 때 온몸으로 발산하는 뜨거운 격정이 좋다. 죽음 같은 절망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스스로를 내던지는 건 싫다. 그런 심정으로 자신과 함께 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자신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옆에 있고자 해야 한다. “야, 김지해.” “어?” “이 산호 말이야.” “어.” “조였다 풀었다 오물오물하면서 꿈틀거리는 게 정말 섹시하지 않냐…….” 어째 말하는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다 싶으면서 지해는 왠지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끼쳐오는 게 느껴졌다. “……꼭 너 거기 같애. 색깔도 그렇고…….” 에이, 이 초절정 변태야. 니가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분위기 잡는다 싶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말할 수 없는 생명력이 느껴―” “너 한 마디만 더 하면 밥 안 줘~!!!!” 있는 힘껏 소리를 빽 지르고서 슁 하는 바람을 가르며 거실 불을 탁 켜놓고 사라지는 지해의 뒷모습을 정욱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절대 장난이나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심각했다. 지해가 오기까지 어둠 속에 앉아 수조 속을 들여다 보며, 아까 주원이 던지고 간 문제들에 대해, 자신과 지해의 관계에 대해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한참동안 그 자세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정욱이 입을 열어 지해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야~! 김지해~!!!” “왜~?” 부엌에서 나와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멀게 들려온다. 정욱은 부엌 안이 잘 들여다 보이는 소파 쪽으로 가서 소파의 팔걸이에 털썩 앉았다. “오늘은 네가 위로 올라가 볼래?!” “풋~, 언제는 안 그랬냐? 그냥 그렇게만 하자고?” “아니, 그게 아니라….” “――?” “…내가 오늘 너한테 깔려준다고~!”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식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지해가 어느 틈에 한 손에 국자를 들고서 입을 딱 벌리고 부엌 입구에 서 있다. 국자에서 뻘건 국물이 똑똑 떨어진다. “너한테 이제 슬슬 미안해서 말이야. 오늘은 내가 대줄게.” 정욱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무감동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가뜩이나뜬금없는 말을 저렇게 담담한 말투로 해대니 현실감이 없다. “야……너…….” “뭐야? 싫어?” “아니……저 그, 그게…….” 만약 이게 진심이라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하지만, 자기 품에 쏙 들어오지도 않는 저 덩치가 과연 얌전히 깔려줄까 싶기도 하다. 도중에 갑자기 저 놈 생각이 바껴서 뒤집어 버리기라도 하면……? “싫음 말구.” “아니, 아니야. 니 떡대가…저기, 시험공부도……아니, 싫을 리가 있냐……. 으아악~ 국물 넘친다…….” 지해가 수선을 떨며 부엌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자, 정욱은 부엌 입구에 떨어진 국물 자국을 크리넥스로 꼼꼼이 닦아내고 다가왔다. 이렇게 지해가 자기 집 부엌에 서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엄마든 누나든 차분하게 부엌일 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나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쑈의 일환으로, 그것도 아주 옛날에, 어렸을 때나 가끔 볼 수 있던 광경이었다. “너…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바싹 다가온 정욱의 기척이 느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지해의 허리를 정욱이 조용히 뒤에서 감싸안고 헐렁한 티셔츠 위로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댔다. 지해는 문득 아까 박실장이 하던 말이 생각나 목을 움츠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정욱이 뭔가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어색함을 감추려 지해는 열심히 둘러대기 시작했다. “야, 아까 내가 뒤져봤는데……쏘주가 없더라. 있는 줄 알고 안 사왔는데 전에 내가 사다놨던 거 다 먹었나봐. 난 아무래도 쏘주 체질이라……이런 날은 쏘주를 한 잔 해야……. 안주도 받쳐주고.” “날더러 갔다 오라구?” “아니…….” 사실 지해는 그래주길 은근히 바랬지만, 솔직히 바랠 걸 바래야지 싶다. 게다가 어줍잖은 심부름 시켰다가 저 녀석 마음 바뀌면 안 되니까. “그럼 니가 갔다 온다구?” “응.” “밖에 비 와. 그냥 위스키……아니, 보드카를 마셔라.” “우씨…, 뭐니뭐니해도……해물탕에는 쏘주가….” 정욱은 지해가 떠드는 동안 어느새 세탁실 쪽으로 가며 베란다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정욱의 표정이 갑자기 순식간에 싹 변했다. “알았어. 내가 나가서 사올게.” “진.짜?!!!!” 지해는 거의 경악에 찬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 “니.가?!!!” 말도 안 돼. 헐헐헐. “그렇다니까, 임마. 담배도 다 떨어졌어. 어차피 나갔다 와야 돼.” “짜아식, 오늘 너 웬일이냐? 무슨 일 있냐?” “……뭐가?” 정욱의 눈동자가 약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뭔가 느낌이 수상쩍다. “어, 진짜 이상하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질 않나. 정말 뭔일 있었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있긴 뭐가 있어. 너야말로 괜히 뭐 켕기는 거 아냐?” 헛! 정곡을 찔렸다. 암튼 나쁜 놈이다. 저 놈. “나 갔다온다.” 정욱이 얼른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바지 주머니에 꿰어넣고 밖으로 뛰쳐나간 후, 지해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깜짝 놀라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국물이 많이 쫄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정신없는 바람에 맛도 제대로 안 봤다. 엄청 짜겠다. 하루종일 어둑어둑하던 하늘에서 하나둘씩 투두둑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제 꽤나 굵어져 있었다. “자, 가자.” 자율학습을 마치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면서 준석이 지후의 어깨에 무심코 팔을 두르려다가 갑자기 팔을 내렸다. 지극히 자연스럽던 일상적인 행동들이 왠지 어색해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저녁 무렵에 새차게 내리던 비는 이제 거의 그쳐 있었다. 운동장에 걸어가는 아이들 중 우산을 받쳐든 애는 하나도 없었다. “왜 그러셔?” “어? 아, 아니야.” “나 참, 별일이네.” “………….” “………….” “아, 맞다. 아까 지해한테 전화왔었다.” “방금 전에 얘기했잖아.” “그랬던가?” “그래.” “오늘 친구 집에서 시험공부 같이 하고, 자고 들어온다고 했던 것도 얘기했냐?” “당.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지후에게 준석이 슬슬 얼굴을 갖다대며 알랑거리기(?) 시작했다. “지해 좀 봐줘라. 한 달만이라잖냐. 너한테 말 좀 잘해 달라고 설설기더구만.” “한 달은 무슨 한 달? 이제 겨우 2주일도 안 된 건데.” “그거나 그거나지.” “그게 어떻게 같냐?” “………….” “어휴, 그 새끼 진짜….” “………….” “………….” “그래도 그 자식이 니 말은 잘 들어.” “잘 들어야지. 아버지 대신인데.” “………….” “무조건 복종해야지.” 준석은 가끔씩 이렇게 지후가 가부장적인 발언을 하면 웃음밖에 안 나왔다. 꼬마 때부터 지후는 가족들 앞에서 재롱이랍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말투를 고스란히 흉내내곤 했었다. 그러면 모두 다 기절할 듯이 웃으며 거의 자지러졌었다. 엄마 동창회 친구들은 아직까지도 ‘그 똘똘하고 이쁜 조카 녀석’에 대해서 물어올 정도다. 여우처럼 깜찍하게 굴던 녀석이 이제 나이 좀 먹었다고 동생을 쥐잡듯이 잡으며 진짜로 어른 흉내 내는 걸 보면 그저 웃기기만 하다. “야, 너 그런 소리는 될 수 있으면 다른 데서는 하지 마라.” “왜?” “일단 지해는 들으면 지랄을 떨 거고…….” “그 새끼는 어렸을 때부터 세뇌가 잘 돼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을걸?” “――?” “우리 아버지가 늘상 밥상 머리에서 하시던 말씀이야. 아버지 없을 때는 형이 아버지 대신이니까 무조건 복종해라.” “아, 맞다. 너 그때 이모부 앞에서 지해 젓가락질 잘못 한다고 야단치다가 혼난 적 있었지.” “아버지 앞에서는 동생 야단치지 마라. 그 대신 없을 때는 니가 아버지 몫을 해야 한다…….” “………….” “……아버지 살아계셨으면 지해 이렇게 엇나가는 거 상상도 못해.” “………….” “사내 새끼랑 연애질 하고 다니다가 난리를 일으키질 않나…….” “야, 연애질은 무슨 연애질이야. 그 자식이 괜히 혼자서 그러는 걸….” “아니야. 그게 아니야. 지금도 수상쩍어.” “………….” “그 새끼, 이주원 말고도 또 있어.” “확실하지도 않잖냐, 그건….” “아니야. 내가 알아…….” 지후가 한숨을 휴우 하고 크게 내뱉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주위에 걸어가던 다른 애들까지 무심코 돌아볼 정도였다. “내 탓이야. 내가 동생 하나 건사 못 해서 그래…….” “괜히 땅 파지 마라. 게이는 유전자부터 다르다는 말도―” “야~!!! 그럼 그 유전자는 나한테도 해당된다는 말이냐?!!!” 준석은 힉, 하고 놀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아니. 그게….”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해 준석은 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었다. 자기 주위에서, 그것도 친형제나 마찬가지인 사촌 녀석에게 이런 일이 있다니. 그리고 그게 그다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스스로가 더욱 놀라웠다. 신문에서 본 대로 ‘게이 유전자’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게 만일 지해에게도 해당사항이 있는 얘기라면, 자신이나 지후에게도……관련이 있는 걸까? “한 때의 호기심일 거야. 아니면, 그냥 아버지의 손길이 그립거나.” “그래도 현대 과학에서는…….” “아냐. 그냥 문화적인 거야. 그럼 소크라테스랑 플라톤도 게이 유전자가 있었단 말야? 소크라테스는 아내도 있었는데?” “엥? 그게 무슨 말이냐?”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스승이었잖아. 그때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성립됐대. 스승의 지혜를 넘겨주는 일종의 의식이었다는 거야.” “…헉, 그러냐?” “내가 지해 때문에 그쪽으로 얼마나 조사를 많이 해봤는지 알아?!” 분하다는 듯이 이를 뿌드득 가는 지후 때문에 준석은 껄껄 웃고 말았다. 역시 학구파라 그런지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일단 학술적으로 접근하고 본다. “그 새끼는 쓸데없는 데만 용감해. 공부를 좀 그렇게 용감하게 해보라고 그래~!!” 지해는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시계는 이제 11시가 넘어서 있었다. 정욱이 쏘주 사러 밖에 나간지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다. “이 씨발 새끼~! 지 입으로 깔려준다고 해놓고~! 깔리기 싫음 싫다고 말로 하면 될 것이지 왜 안 들어와. 안 들어오길~!” 한참 만에 입을 열어서 그런지 말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괜히 말만 이렇게 할뿐, 사실 엄청 걱정하고 있었다.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걱정이 태산. 혹시나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으면 어떡하지……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 노릇이지만 정욱의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 정욱이 집으로 직접 전화를 하지 않는다면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다. 전화 벨소리가 날 때마다 튕겨나갈 듯한 심장을 가라앉히며 오로지 어서 자동 응답기가 돌아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왔던 두어 통의 전화는 전부 다 ‘어느어느 부동산인데 사장님 투자 좀 하시라‘는 전화와 고급 회원제 헬스클럽의 오픈 기념 특별회원 모집 광고전화 같은 텔레마케팅 전화들이 전부였다. 거실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전화기만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날아갈 듯 뛰어가서 모니터를 보니,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정욱이 아니라 조민혁이었다. 「김지해. 빨리 문 열어봐. 정욱이가 너 여기 있다고 연락해 주라고 해서 왔어.」 지해는 불안한 가슴을 감싸쥐고 open 버튼을 눌렀다. BGM : Jeanne - Air “들어오라는 말 안 했는데 들어간다고 또 접때처럼 후려패는 건 아니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민혁이 예의 유들유들한 멘트를 던졌다. “맞을 짓 하면 맞는 거에요.” “그럼 지금은?” “맞을 짓 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다급하게 조바심치던 마음을, 저 인간에 대한 짜증스런 기억이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다. 금세 부루퉁하게 변한 지해의 얼굴이 민혁의 눈에는 재밌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저렇게 능글맞은 표정을 짓다니.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래. 그럼 들어갈게.” 민혁이 거실 바닥에 한 발짝을 디디며 말했다. “아, 역시 들어오니까 좋다.” 자기가 말해 놓고도 느낌이 남달라서 민혁은 너털 웃음을 웃었다. 일상적인 말인데도, 꼭 한번쯤은 파고들고 싶은 녀석 앞에서 말하니까 의미가 전혀 틀려진다. 달콤한 상상을 지해의 조급한 목소리가 깼다. “어떻게 된 거에요?” “뭐가?“ “정욱이요.“ “아~ 맞다. 이제야 생각났어. 여기 내가 왜 왔는지.” 대체 세상에 뭐 이따위 인간이 다 있을까? 혹시 장난치러 온 건가? 이번에 또 허튼 수작 하면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며 지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일 생겼어요?” “사고났어.” “네?!!! 무슨 사고요?!!!” “오토바이 사고.” “누가요? 정욱이가요?!” “어.” 지해는 사고라는 말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무릎이 후들거려서 도로 주저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쏘주 사러 가면서 오토바이 몰고 가는 미친 녀석이 어딨어……이 씹새끼……바퀴 달린 거에 환장한 새끼……. “야, 걱정마. 많이 안 다쳤어.” 넋이 나간 듯 멍한 눈으로 지해는 민혁을 쳐다보았다. “내 얼굴 봐라. 그 새끼 많이 다쳤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창백하게 질려서 사색이 다 된채 차마 더 이상은 아무 말도 못 묻고 있는 지해를 보고, 민혁은 빨리 사실대로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누워있는 놈보다 오히려 이 녀석이 더 탈나겠다 싶었다. 지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맞은편에 앉은 민혁의 옷자락을 찢어지도록 잡아 끌었다. “빨리 가요.” “어딜?” “병원에 빨리 가자구요.” “지금은 가도 못 봐. 이 바보야. 내일 가자. 내일도 면회가 될진 모르겠지만….” “왜 안돼요~?!!!!!” “야~ 소리 지르지 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내일은 또 왜 안 되냐구요~?!!!!” “…그래, 그래. 알았어. 안 되면 다 때려부시구라도 데려다줄 테니까 조용히 좀 해라.” “진짜죠?” 턱을 덜덜 떨면서도 자기 눈을 똑바로 내려보며 묻는 지해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민혁은 뭔가 가슴에 찡한 것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널 믿고 싶어, 하고 바라보는 그런 눈빛. 아주 옛날 언젠가 꽁꽁 묻어뒀던 기억이 가슴 속에서 조금씩 스며나오는 기분이었다. 환영할 만큼 반가운 감정은 아니다. 마주친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약속할게….” 소파에 앉은 채로 중얼대는 민혁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지해는 소파 옆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깜짝 놀라 두방망이질치던 심장 박동이 천천히 제 박자를 되찾고 언제 그랬더냐 싶게 침착해졌다. 이제야 주위의 사물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시간 감각도 되살아난다. 오밤중에 소리 한번 거하게 질렀구나 싶다. 막상 현실 속으로 돌아오고 나니 방금 들은 얘기들이 도무지 현실감이 없게 느껴진다. 사고가 났다니……사실일 리가 없다. “야… 걱정 마. 심하게 다치진 않았어…….” 사실이구나. “씨발. 등신같은 새끼……, 어쩌다가…. 어디를 얼마나….” “정욱이 말로는 골목길 사거리에서 직진하다가, 우회전하는 차랑 부딪혔대. 순전히 그 차 과실인가봐. 얼핏 들으니까 사고낸 놈이 면허 딴 지 얼마 안 됐다던데 보나마나 운전 미숙이겠지. 일방통행인데서 기어이 꺾었나 보더라.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 “비 와서 길까지 미끄럽잖냐. 그래도 양쪽 다 속도 안 낼 때라서. 오른쪽으로 어깨랑 다리뼈 다치고 다른 데는……심하지 않아. 찰과상이야.” “…정말이에요?” “딴 사람 같으면 꽤 다쳤을 텐데…. 그 새끼는 뭐, 원래 징그런 놈이니까.” “…내일 가봐서……다친 데가 또 있는데 거짓말한 거면….” “………….” “형, 내 손에 죽을줄 알아요.” 지해가 휘청이면서 일어나 현관쪽으로 가자 민혁이 일어나서 얼른 팔을 잡았다. 다리가 풀려서 그런지 제풀에 스르르 무릎을 꿇고 한숨을 푸욱 쉰다. “어딜 또 갈려구 그래?” “휴우……. 저……, 부탁이 있어요.” “뭔데?” “내가 지금 쏘주가 너무너무 마시고 싶은데……, 다리가 말을 안 들어서 잘 걷질 못하겠네요….” “알았다 알았어. 내가 사다줄게.” “고마워요.” 다행히도 모처럼 끓여놨던 해물탕이 냉장고로 안 들어가고 사람 뱃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정욱이도 없으니 잠은 집에 가서 자야겠지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잘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이 거푸 계속 들이켰다. 술 못 마셔서 환장한 사람처럼, 운동하고 나서 포카리스웨트라도 마시는 것처럼 소주 한 병을 거의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들이붓다시피 했다. 급하게 마시고 나니 몸에 취기가 금방 돈다. 눈 앞이 알딸딸하다. 세상 일이 다 별거 아니다. 우습다. 강정욱이든 뭐든 다 같잖다. “정욱이 얼굴이 길바닥에 좀 긁혔어. 크크, 그거 흉터 남겠던데.” “길바닥이요?!! 혹시 헬멧 안 썼어요, 그 새끼?!” “안 썼더라. 사실은 넘어질 때 머리를 부딪혀서 기절했었어. 야, 표정 풀어. 척추 같은 데 안 다친 걸 다행으로 알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손끝이 사르르 떨렸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련만 연거푸어 조준에 실패하다가 결국 라이터의 불이 꺼졌다. 민혁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거봐. 내가 죽인대니까 무서워서… 다 불잖아……. 머리는 안 깨졌죠? 머리통 사진 찍는 거… 그딴 건 다 했어요?” “멀쩡해.” “………그 새끼는 면상이 워낙 잘났으니까, 좀 긁히고 그래도 돼요.” 어느새 왼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던가 보다. 자기 말소리가 손바닥에 바로 가서 달라붙는 이상한 기분에 지해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덜덜 떨리는 오른손에 들린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가 매캐한 담배 연기를 깊은 속까지 주욱 빨아들이고 나니, 이제 좀 속이 후련하다. 몽롱한 취기에 불을 당겨, 더욱 더 높은 어딘가로 희미한 연기가 되어 둥둥 떠올라가는 기분. “그 얼굴에 기스 좀 나야……내 경쟁자가 없어져.”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한숨처럼 내뱉는 지해의 말소리에 민혁이 거침없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핫, 경쟁자가 많아?” “어? 엄청 많지. 같이 다니면 신경 쓰여서 열받아 뒤질 것 같애.” “후후후……. 니 입에서 그런 말 나올줄 몰랐다. 넌 진짜 예측불허야. 너 정말 맘에 든다.” “웃지마. 꼴배기 싫어. 당신이 제일 문제야.” “나?” “그래, 이 금발머리야. 내가 모를줄 알아?” “……내가 정욱이를…?” “그럼 왜 자꾸 우리 사이에 끼여드는데? 그 새끼는 기절했다가 정신 돌아왔으면 나한테 직접 연락해야지 왜 당신을 먼저 부르는 건데? 왜 남 통해서 전해 듣게 만드는 거냔 말이얏!” “그건 니가 너무 놀랠까봐―” “이런다고 안 놀래나, 씹새끼. 웃기는 수작 하지 말라고 그래~!” 마음 속에 담아두고 끝내 안 하려던 말들을 던지고 나니까, 눈물이 날 것 같다. 씨발, 그 새끼는 정말 날……뭘로 보는 거야……. “게다가 정욱이 실려간 병원이 정욱이 어머니네 병원이잖냐.” 기가 막힌다. “병신 새끼. 하필 그 앞에 가서 엎어져…….” “야, 이 근처에서 교통사고 나면 다 그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리구 걔는 딴 데서 사고 났어도 결국 거기 입원했을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라……식구들이 다 몰려왔어. 마침 회장님 정기적으로 혈액 투석하러 오시는 날이라서 회장님이 아시고 난리가 나서―” “그만해. 내가 가면 즈이집 식구들 앞에서 지랄떨까봐 그랬겠지. 내가 바보예요? 내가 그 잘난 식구들 앞에서 왜 그래? 부모라고 그 새끼 여기 혼자 나와서 사는 동안 한번 와보기라도 했는 줄 알아요? 사고 좀 나니까 이제야 자기네 자식 같은가?” “………….” “……그 인간들 내일은 다 사라지고 없겠죠?” “………….” “……나, 내일… 그 새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는 거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지해가 많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민혁은 침착하게 대꾸해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아직은 가족 면회밖에 안 된다고 했지만, 나랑 같이 가면 될 거야.” “………….” “그 대신 너무 눈에 띌 행동은 하지마.” “…그, 그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지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정이라도 한듯이 술만 들이부었다. 그 대신 한참 후에 술이 만땅으로 취하자, ‘정말 많이 안 다친 거죠? 나 걱정 안 해요’ 하고 끊임없이 중얼대기 시작했다.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해서 묻는 그 질문에 민혁은 일일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토요일인데… 학교까지 못 가버렸다. 솔직히 그 녀석도 없는 학교. 별로 가서 앉아있고 싶지도 않다. 속만 뒤집어질 거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필름이 끊기는 일도 별로 없고, 다음날 아침만 되면 말짱 다 생각나는 지해는 어제 분명히 식탁에서 술을 먹다가 엄청 맛이 갔던 게 기억났다. 어쨌거나 이 집에 하나밖에 없는 침대에서 얌전히 자고 있었다. 옷은 어제 입은 채이고, 숙취로 인한 두통 외에 다른 데가 아프진 않은 걸로 봐서 최소한 정조(?)의 위기는 없었던 것 같아 천만 다행이다. 어제처럼 미칠 듯이 마신 날엔……아, 그러고 보니 침대 가서 자라고 다그쳐서 이 방으로 부축받아 옮겨지던 것도 기억이 난다. 민혁이 옆에 누워 자려고 해서 정욱이 침대에서 딴 놈이랑 잘 수 없다고 마구 발길질하며 내쫓았던 것도 생각난다. 그럼 이 인간은 어디 있지? 지해는 깨질듯이 아픈 머리를 겨우 들고, 부연 시야를 벅벅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서 대충 몸을 구기고 자는 민혁을 보자 일단 측은한 마음이 인다. 이쁜 놈이건 미운 놈이건 상당히 불쌍한 포즈로 웅크리고 잘 때는 어쨌거나 가엾어 보이기 마련이다. 지해는 정신 차리자고 찬물로 벅벅 샤워를 하고는 북어국을 올려놓고 어수선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파출부 아줌마도 월요일이나 돼야 올텐데, 그 깔끔 떠는 놈이 이 꼴을 보면 입에 개거품을……아아, 암만 조금 다쳤어도 병원에 며칠은 더 있겠지. 그 녀석을 당분간 못 볼지도 몰라. 만지지도 못 하고 아무것도 못해……. “이봐요~!! 형! 일어나요~!” 민혁이 부스스 눈을 뜨며 어어, 하고 의미없는 동물적인 소리를 낸다. “주인도 없는데 남의 집에서 언제까지 잘 거에요? 일어나서 밥 먹어요~!” “……밥?” “그래요. 밥, 밥, 밥~!!!! 빨랑 밥먹고 나 병원에 데려다줘요!” “……조용히 좀 해. 골 울린다.” 민혁은 얼굴을 찡그리며 골을 짚으면서 자기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지해를 슥 올려다보았다. 새빨갛게 충혈되고 푸석하게 부은 눈이 나 어제 술 먹고 울었소, 하고 외치고 있었다. 민혁은 갑자기 어젯밤의 저 녀석 모습이 생각나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왜 웃어요?” “말하면 또 후려팰 것 같애.” “죽을래요?” 병원에서는 항상 이상한 냄새가 난다. 특히 이렇게 영안실까지 딸려 있는 커다란 병원은 정말 이상한 냄새가 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병원은 아프고 다친 사람들이 찾아와 치료를 받고 몸이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병원에는 영안실이 있소이다’ 하고 병원 내에 친히 화살표 표시까지 하며 어디어디로 가야 망자亡者의 곁으로 빨리 갈 수 있다고 안내해주는 큰 병원에 오면, 병원이란 곳에선 살아서 걸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죽어서 떠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닫게 되어버린다. “아, 병원은 정말 싫어.” 토요일의 봄볕을 피해 선글라스를 쓴 민혁이 병원 구석의 병동 쪽으로 진녹색 아우디 TT를 몰고가며 말했다. “정욱이 자식 땜에 연이틀이나 이 병원에 출근하네.” “혹시 다른 약속 있는데 나땜에 여기 오게 된 거면 미안해요.” “아니까 다행이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하는 민혁이 밉살스러워 지해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정욱이한테 후줄근하게 보이고 싶냐며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오랄 때는 언제고……. 넓다란 병원 부지에서도 특히 숲이 우거져 조경이 잘된 곳에 위치한 이 병동은 밖에서 병원을 쳐다볼 때는 결코 눈에 띄지 않던 곳이었다. 자그마한 건물 자체도 다른 곳과는 뭔가 느낌이 틀려 보였다. 주차장마저도 분위기가 달랐다. 몇 배는 더 깔끔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스페셜하우스’라는 멋들어진 현판이 붙어 있는 이 곳은 VIP 전용으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최고급 호텔의 로비를 연상케 하는 호화로운 인테리어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크림색의 대리석 벽에는 곳곳에 갈색 목판에 멋지게 새겨진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합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너스 스테이션도 호텔의 프론트를 연상케 하는 스타일이라, 익숙하지 않은 고급스런 분위기에 지해는 더욱 위축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병원의 빈부차별 운운 하며 VIP 병동이 어쩌구저쩌구하는 걸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그곳이구나 싶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별생각없이 채널을 돌렸던가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오늘 여기 와 있다. “딴 병원에도 다 이런 데가 있어요?” “아니. 여기만 그래. 세강그룹이 원래 욕먹을 짓을 잘 하잖아.” “정욱이는 몇 층―” “2층인데…. 아, 잠깐만.” 멀리 이 병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지해는 이미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빨리 가보고 싶어 마음이 조급하기만 한데 민혁은 딴청을 피우고 있다. 민혁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키큰 중년 신사가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뭔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낯익은 아저씨……정욱의 아버지다. 그 옆에는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수행 비서가 서 있다. 민혁이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지해는 멀거니 서서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버님, 어제 잠 좀 잘 주무셨어요?” “……어? 오, 민혁이 또 왔구나.” “지금 면회 좀 할 수 있을까요?” “원래는 안 된다만……내가 얘기해둘 테니까 빨리 올라가봐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너도 어제 봤잖니. 회장님 노발대발하셔서, 일주일은 다른 사람 얼씬도 못 하게 하라고….” “네.” “자식 관리 잘 못한다고 나도 어제 꾸중 많이 들었다.” “사고난 거 처리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정욱이가 끝끝내 조용히 넘어가자고 고집을 피워서, 우리도 시끄러워지면 골치 아프니까 일단 덮기로 했어. 몸이 크게 상한 것도 아니고….” “네.” 얘기가 길어지는 참에 민혁이 지해쪽을 힐긋 보자, 그렇잖아도 이쪽을 계속 쳐다보고있는 지해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강사장이 일행이냐, 하고 민혁에게 묻는다. “정욱이 학교 친군데요. 저도 아는 녀석이라 데려왔습니다.” “아, 그래.” 민혁이 손짓을 하자, 지해가 천천히 둘의 곁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꾸벅 했다. 교복 차림이 아니라서 그런지 강사장은 지해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너희들도 운전 조심하고 다녀라. 사고낸 녀석이 이제 고3이더구만. 하필 나도 안면이 좀 있는 분 아들인데… 이병선 변호사라고….” “………….” “민혁이……혹시 그분 아나?” “아니요.” 지해는 깜짝 놀라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병선 변호사의 고3짜리 아들이면, 자신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민혁이 옆에서 뭐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말도 지해의 귀엔 그저 웅얼웅얼하는 입짓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뭐라고? 뭐라고 떠드는 거지? “야, 너 핸드폰!” 지해는 황급히 배낭 속에서 빽빽 울어대는 핸드폰을 꺼냈다. 아예 꺼버리려고 꺼낸 것이었지만, 찍히는 전화번호를 보니 받아봐야 할 것 같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건 이주원네 집 전화번호다. 그다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강사장과 민혁을 뒤로 하고 지해는 얼른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11. SHAKE THE DISEASE Some people have to be permanently together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함께 하게 되어있지 Lovers devoted to each other forever 평생을 맹세한 연인들 말이야 Now I've got things to do 이제 난 할 일이 있어 And I've said before that I know you have too 내가 전에 말했듯이 너도 마찬가지야 When I'm not there 내가 니 곁에 없더라도 In spirit I'll be there 마음만은 항상 같이 할 거야 Here is a plea from my heart to you 내 온 맘을 다해 너에게 애원할게 Nobody knows me as well as you do 너만큼 날 잘 아는 사람은 또 없어 You know how hard it is for me to shake the disease 이 병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힘든지 너도 알겠지 That takes hold of my tongue in situations like these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잖니 Understand me 나를 이해해줘 ((Shake The Disease - Hooverphonic) “씹새끼!” 언젠가 정욱과 함께 갔던 그 일류 호텔 스위트 룸에 못지않은 화려한 인테리어의 VIP 특실에 들어서며, 지해는 이미 문소리에 시선을 이쪽으로 두고 있던 정욱과 눈이 딱 마주쳤다. 왜 팔다리에 깁스를 하고 머리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는 녀석을 보고 이딴 소리가 나왔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물론 정욱도 또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욕이었을 테지만……. “쿠쿡… 야, 너는 이 녀석 이 꼬라지 보고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입닥쳐요. 쫓아내기 전에.” “하하하……어쭈~!” “나 저 새끼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형은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줘요.” 주원의 어머니로부터 온 전화를 받고 지해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심기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울먹이면서 급하게 좀 와달라고 하는 아주머니의 말을 일단 무시하고, 여기 온 김에 정욱의 얼굴은 보고 가야 했다. 아니, 설명을 들어야 했다. 심상치 않은 지해의 표정을 보고 정욱이 눈짓을 하자, 민혁은 ‘오냐, 내가 밖에서 망봐줄테니 맘껏 떠들어라’ 넉살좋게 말하며 방을 나섰다. 민혁이 나가고 난 뒤, 비로소 지해는 이 병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자신이 사는 집 전체보다 훨씬 더 넓은 병실 안에는 전용 욕실과 환자의 간병인을 위한 침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페르시아제 카핏이 깔려있는 바닥 위에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진회색 가죽 소파와 고급 마호가니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정욱이 누워 있는 침대도 인체 공학을 고려해 특수 제작된 제품으로 독일어로 보이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마, 많이… 아프냐…?” 아까의 당당한 기세는 어디 갔는지 막상 둘만 남자,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정욱에게 다가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푹신한 카펫 속으로 푹푹 파묻히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장애물 같았다. “민혁이가 말 안 해? 별로 안 다쳤다.” “별로 안 다친 놈이……이러고… 병원에 갇혀 있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때문에라도 병원이라면 정말 신물이 난다. 어머니가 병원 신세를 아주 오래 졌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가 때였던 만큼 몸서리치게 싫었다. 죽을 병 아니면 다시는 병원엔 얼씬도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다니 너무 싫다. 게다가 좀 있으면 또 다른 병원에 가봐야 한다. “이리 와.” 정욱이 멀쩡한 왼손을 내밀었다. 차마 그 손을 잡을 수가 없다. 조금 긁혔다던 오른쪽 뺨 전체가 거즈와 흰색 반창고로 가려져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지해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때문이야….” “왜 너 때문이냐. 어쩌다가 그런 거다.” 자신 때문에 이 녀석이 다쳤다. 아무 도움도 못될 망정……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정욱이 아까 내밀었던 손으로 눈물을 쓸어내려 주고 있었다. “아니야, 임마. 나도 다 알아.” “――!” 정욱은 지해가 어떻게 알게 됐나 싶었다. 어제 하도 소란스럽길래 혹시라도 이 녀석이 알고 충격 받을까봐 못 오게 하려고 일부러 민혁에게 연락하라고 한 거였는데, 별 소용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 자식……사고낸 자식 말야……그 자식이….” “일부러 그런 거 아냐.” “………….” “……너 잠 한 숨도 못 잤지? 눈이 빨갛다….” “임마, 잠을 못 자긴……밖에 있는 저 인간이랑 술 처먹고 니 침대에서 디비 잠만 잘 잤다.” “민혁이랑…….?” “너 기다리는데, 집에 왔어……너 대신 쏘주 사다줬다…….” 눈물은 이제 좀 말랐다. 지해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킥킥 웃음이 나왔다. 왜 이런 순간에도 웃음이란 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정욱은 전혀 웃지 않는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저 새끼 저거……전화만 좀 해주라고 했더니…!” “열과 성이 뻗쳤었나 보지. 야, 임마~! 질투하냐, 너?” “별일 없었지?!” “씹새야. 별일 있었으면 좋겠냐? 아니다. 너 이러고 누워있는 동안 바람이나 좀 필걸.” 둘은 마주보며 잠깐 웃었다. 다친 쪽의 얼굴이 땡기는지 정욱은 맘놓고 크게 웃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찌그러진 웃음을 보였다. 그 꼴을 보니 또 가슴 한 구석이 아프다. “정말 많이 다쳤나 보다…….” “아니라니깐. 할아버지 성화에 이러고 누워있는 거지 사실은 지금 당장 퇴원해도 되는 거야.” “부러진 거 아니야?” “어깨랑 다리 다 금만 갔어. 내가 낙법을 좀 알잖냐. 괜히 손으로 막으려고 용쓰면 손만 박살나거든. 몸 좀 굴리고 마는 게 나아.” “낙법 아는 새끼가 머리나 부딪치냐.” “거기 뭐가 있는 건 또 못 봤지.” “씨팔, 아주 가관이었겠다.” “그래, 임마. 내가 멋지게 한 바퀴 구르는 거를 니가 봤어야 되는데.” “구르긴 뭘? 바이크랑 같이 넘어져서 기냥 깔렸겠지. 좆까, 새꺄.” 다시 울먹울먹하기 시작한 지해를 달래려고 했는지 정욱이 어울리지 않은 허풍을 떨어댄다. 가만히나 있지 왜 괜히 그런 짓을 해서 사람 가슴을 더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 왜 또 울고 그래?” “……나 때문에…너….” “야, 전에 골프치다가 갈비뼈 나간 것도 모르고 며칠이나 지난 적도 있었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진짜 금방 퇴원할 거야.” “………….” “아, 그만 그쳐라. 우니까 이쁘다만……지금 여기서는 아무것도 못 한단 말이다.” “………….” “꼴리면 곤란해.” “씹, 변태 새끼.”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눈에서 흐르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정말 왜 이렇게밖에 안 되는 걸까. 너무나 속이 답답하다. “야, 누가 죽었냐. 왜 자꾸 그래?” 누가 죽긴, 아니 죽을 뻔 하긴 했다. 이주원 자식. 손목을 그었다니……. 거기도 가봐야 한다. 이 녀석이 죽지 않은 걸 확인했으니 이제 그 자식이 죽지 않은 걸 확인해야 한다. “너 얼굴 봤으니까 나 그만 가볼게. 갈 데가 있어.” “가긴 어딜 가. 여기 있어. 오늘 아무도 안 올 거야 이제.” “……아냐, 가야 돼. 일 때문에 연락도 왔고…….” 거짓말을 한다. 자기 때문에 다치게 하고 이젠 거짓말도 하고……. 정말 아주 잘하는 짓이다. 지켜주지도 못하고 해만 끼치면서……. 이제야 현실이 제대로 보인다. 모든 건 안될 걸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현실이 똑똑히 적나라하게 보인다. 키스를 하려는 듯 잡아당기는 정욱의 손을 냉큼 뿌리쳐 버렸다. 그러고는 머쓱해져서 ‘나 아직도 술 냄새 날 거다’ 하고 주절거리다가, 다친 곳이 쑤시는 건 아랑곳 않고 기어이 몸을 움직여 뻗쳐온 강한 팔뚝에 이끌려 입술을 부딪쳤다. 하루만이라고는 해도 한 달처럼 길게 느껴졌던 어제였기 때문에 꽤나 오랜만인 것처럼 안타까웠다. 입술이 닿는 순간 손가락 끝이 아릿아릿 저려왔다. 근데 가슴이 쓰려서 그 키스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그 눈길도 받아내기가 힘들다. “야, 나 정말 가봐야 돼…….” 지해가 애원하듯이 말하자 정욱은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자, 정욱이 조용히 말한다. “니가 오해할까봐 말해두지만, 그 자식이 일부러 사고낸 건 아냐. 내가 따라붙으니까 지딴에는 도망치다가 그렇게 된 거다. 괜히 가서 족치지 마라. 치사한 놈 되긴 싫다.” “족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 “수면제 줏어먹고 손목을 그었댄다. 어젯밤에. 죽지는 않았다는데, 아직 깨어나진 못했나봐.” “하, 그 녀석이야말로 어제 아주 온갖 쇼를 다 했군.” “……그 어머니 말이……나한테 유서까지 써놨더라고…….” 유서라고? 수면제 따위를 먹고 나면 혈압이 낮아져서 손목 그어봤자 피가 잘 안 나온다는 사실은 알고 유서를 써놨을까 싶어 정욱은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렇게까지 간교한 녀석으로 보진 않았다. 그리고 치사하게 그런 걸 일일이 들먹일 순 없다. “알았어. 가봐.” “…갈게….” “지해야!” 문을 열고 나서는 지해의 뒤통수에 정욱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니가 알아서 판단해!” 지해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정욱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짤막한 한 마디는 문소리가 삼켜버렸다. “넌 내꺼야.”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그 녀석이 무슨 미친 지랄을 떨어도 이제는 난 널 놓치기가 싫어. 내가 뭣때문에 그따위 녀석 차에 받히면서까지 기를 쓰는 줄 아냔 말이다. 혼자서 아무리 멋있는 척, 합리적인 척, 신사다운 척 다 했어도 별 수 없다. 그런데도 생겨나길 이렇게 생겨 먹어서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강요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니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말뿐이다. 알아서 판단하라니. 지금 저 녀석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은 뻔한 거 아닌가. 저라도 마찬가질 텐데. 뻔히 알면서……. 혹시 자신은 비겁한 게 아닐까.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그 놈보다 자신은 어쩌면 덜 절실한지도 모른다. 암만 생각해도 똑같이 맞받아칠 순 없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건다든가, 자기를 망친다든가 하는 건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저 녀석과 함께 있을 때의 아스라한 행복감이 아쉬울 뿐이다. 미래에 대해서라면. 아직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미친 녀석. 죽겠다더니 결국 일을 벌이긴 했군. 창 밖으로 그 놈의 차를 보고 지해가 보기 전에 얼른 타일러서 돌려보내려고 내려갔을 때, 그 놈은 분명히 똑바로 눈을 치켜 뜨고서 죽으러 간다고 말했었다. 너무나 치기 어린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왠지 빈 말 같지가 않아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바이크를 꺼내 타고 따라붙었다. 결국 자기를 떨쳐버리려고 발악을 하다가 그 정신나간 놈이 사고를 내버리긴 했어도, 절대로 고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고나는 순간에도 차라리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정신 차리고 머저리 짓은 그만두겠구나 싶었는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나. 그렇게도 포기가 안 되는 거란 말이냐 그게……. 아아, 모르겠다. 어제 할아버지 때문에 혼이 빠지도록 북새통을 치렀고, 지금은 또……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아프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이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한다니……. 침대 머리맡에 있는 의사 호출 버튼을 누른 후 정욱은 조금 일으켜 앉았던 몸을 내팽개치듯이 벌렁 누워버렸다. 다친 팔다리가 순간적으로 쑤셔 왔지만 그 아픔을 느끼는 것조차 귀찮았다. 지해가 문 밖으로 나오자, 심플한 차림이지만 언뜻 봐도 세련돼 보이는 아가씨랑 복도 한켠에서 재밌게 떠들고 있던 민혁이 ‘어이, 얘기 끝났어?’ 하면서, 얘기하던 여자에게 ‘안녕’ 하고 손을 흔들고는 지해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서도 또 아는 사람 만났어요?” “아니. 오늘 처음 만났어. 옆방 환자 가족. 이대 다닌대. 이쁘지?” 민혁은 오랜만에 괜찮은 여자를 만나서 눈보신을 했다는 둥 히죽거리고 있었다. 역시나 좀 이해하기 힘든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지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는 형이 게이라고 들었었거든요?” “나? 굳이 따지자면 섹스는 남자랑 하는 게 백만 배는 더 좋지만. 그건 그거고. 사람을 사람으로 사귀어야지, 남자 여자로 구별해서 사귀면 재미없지 않냐. 그러면 세상 사람 중의 반밖에 못 만나잖아. 인생도 짧은데.” “후후. 근데 아까 그 누나는 정말 10년은 사귄 사람인줄 알았어요.” “난 이 세상 사람 중에 낯선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건 무슨 뜻이에요?” “다시 말하면, 10년을 만나도 사람 하나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뜻.” “……그 공식이 어떻게 그렇게 뒤집혀서 나와요?” “그러게 말이다. 넌 아냐?” 이 사람 하고 얘기하다 보면 뇌세포가 막 뒤엉키는 것 같다. 정욱이 같은 놈하고 이런 사람이 친구라니, 정말 안 어울려도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그것 때문에 한참동안 골 깨나 썩히다가 그냥 처음 보는 사람도 10년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하기로 했다. 나 정말 현명하지 않냐?” “뭐, 결심 한번 잘 했다고 해줄 순 있겠지만. 형은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어.” “대단하네요. 부러워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더라.” 할 말이 없다. 정말 웃기는 인간이다. 근데 어두웠던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봤자 잠깐 잊게 해주는 거에 불과하지만. “형은 나쁜 사람 같진 않네요.” “나쁜 사람으로 보였었냐?” “글쎄요. 형에 대해 그 정도까지 깊이 생각해 보진 않아서…….” “넌 솔직해서 좋다, 임마. 딴 사람들 같으면 일단 ‘아니요’ 하고 볼텐데……. 아, 짜~식. 볼수록 맘에 든단 말이야.” “………….” “나쁜 사람으로 보였을 땐 나쁜 사람인 거고, 좋은 놈으로 보일 땐 좋은 놈인 거고 그런 거지. 사람이 처음부터 한 가지 종류로만 분류돼서 나오는 건 아니잖아.” “………….” “야, 근데 너 이제 나한테 존대쓰지 마. 거북해. 그냥 친구처럼 대해.” “그래도 돼?” 존대하지 말라는 사람한테는 그 즉시 반말하는 게 지해의 습관이다. 잔소리꾼 형은 늘상 못마땅해 하는 버릇이라도, 지해는 이게 훨씬 편하고 좋았다. 존대하지 말라니까 그 즉시 실천에 옮기는 지해를 민혁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더니 씩 웃는다. “그럼. 니가 존대쓰면 내가 웃사람 노릇해야 되니까 부담스럽단 말이다.” “존대는 첨부터 그다지 쓸 생각이 없었으니까 상관없지만, 친구는 아니니까 친구처럼 대하긴 싫어.” “어이쿠, 나는 친구하고 싶었는데…. 쯔쯧. 그래, 니 멋대로 하셔라.”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인다. 옆사람이 기분 좋으면 전염되어 자기도 기분이 업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자기 속마음은 무거운데 옆에 있는 사람 혼자 방방 뜨니 왠지 껄끄럽다. “근데 어디까지 따라오는 거야? 병실에 돌아가지.” “나 오늘 정욱이한테 볼일 없어. 너 데려다주러 온 거잖냐.” “이제 이용가치가 떨어졌으니까 그만 가.” “싫어. 따라갈래.” 어린애처럼 떼를 쓴다. “귀찮아요. 그만 가. 나 지금 놀러가는 거 아니야.” “나도 데려가라. 나 심심하다. 너 여기 모셔오느라고 약속도 다 깨뜨렸고. 이왕이면 니가 책임 좀 져주면 안 되겠냐.” 순간적으로 지해의 머릿속엔 이주원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놀러나 갔으면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가긴 싫어도 가야만 한다. “내가 지금 가는 데가 병원이야. 병원 싫다매?” “뭣이?! 또 병원이라고라고라?” 민혁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정말로 싫긴 싫은 모양. “으윽, 진작 말했으면 데려다준다고 안 했을텐데. 이제 와서 말 바꿀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밑에서 기다려줄게.” “오래 걸릴 거야.” “상관없어. 9월까진 남는 게 시간이니까.” “9월?” “9월부터 학기 시작이니까 미국으로 돌아가야지. 나도 대학은 나와야 될 것 아니냐.” 대학이라……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시험인데 이것저것 정신 없어서 시험 공부는 거의 뒷전이었다. 성적이나 제대로 나올 수 있으려나. 몇 달 전만 해도 고3 형 수발하는 거에 올해 1년을 걸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방황하는 청소년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주원 이 새끼는 지도 고3이면서 어떡하려고, 정말 어떡하려고 이 따위 짓거리를 해대는 건지……. 주원이 입원한 병원은 지해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종합병원이었다. 세강병원보다는 조금 규모가 작은 듯 싶었지만, 단정하고 편안한 10층 건물. 큰 길 한복판에 덩그마니 건물이 삐죽 솟아있고, 주차장은 옆의 주차 타워를 이용해야 했다. 엄청나게 넓은 부지에 녹음이 짙게 깔려 좀 움직일 만한 입원 환자들이 이리저리 산책도 하는 세강병원과는 달리 이곳은 환자들이 돌아다닐 곳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야. 너 핸드폰 줘봐.” “에?” “나 요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테니까 나오면 전화하라고.” 지해가 순순히 내준 핸드폰에 자기 번호를 입력하고, 지해의 전화번호를 또 자기 폰에 입력한 민혁은 지해의 폰에 저장된 번호들을 죽 살펴보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음악만 틀어놓은 채 조용히 데려다준 민혁의 배려가 고마워 지해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사실은 그것까지 신경쓸 정신이 없었다. “어, 없네?” “뭐가?” “정욱이 폰 번호가 없어.” “아, 나 그 자식 번호 몰라.” “엥?” “항상 학교에서 볼 수 있고…….” ……요새는 거의 같이 보냈으니 전화로 연락할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전화한 적이 없다.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위에 올라갔다 와보면 그 답이 나오는 건가? “옛다. 나는 ‘착한 엉아’로 입력해 놨다. 그래 봤자 9월이면 끝이지만, 그 때까진 자주 애용해주라.” 착잡한 마음에 아무 대꾸도 안 하고 차에서 내리려는 지해에게 민혁이 문득 뜬금없는 소리를 던졌다. “야. 너 혹시 지금 보러가는 게 그때 바에서 너한테 짤린 놈 맞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낯이 익더라. 전에 거기서 몇번 본 적 있어.” “――!” ”……아닌가?“ ”맞아.” “사고낸 놈이 그놈 아냐? 보라색 Z3가 걔 아니냐?” “――!” “아니면 말고….”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 “아니, 너랑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정욱이가 한사코 그냥 넘어가자고 우기길래. 걔답지 않게스리……그렇게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거 싫어하는 놈이거든.” “………….” “어제 내가 왔을 때도 난리 아니었는데, 똑부러지게 회장님까지 설득시키고.” “………….” “정욱이 아버님이야 여리신 분이니까 그렇다 쳐도 회장님은 틀려. 무서운 분이야. 기본적으로 엄청 통이 크시지만,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엄청 집요해. 정욱이가 그거 빼다 박았다더라.” “………….” “그쪽 아버지가 아버님이랑 안면 있다니까 그냥 넘어갔을 텐데…….” “………….” “……조심하라구 해라.” “――!―” “야, 왜 이렇게 얼굴색이 싹 변하냐. 너무 걱정 마. 내가 쓸데없는 소리했나 보다. 잊어버려. 일단 한번 결정한 건 절대 번복 안 하시는 분이니까…….” 민혁이 싹싹 빌다시피 하면서 자기 말을 주워담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이미 지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주원이 정말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주원의 아버지가 꽤 명망있는 변호사라고 들었으니 설마 쉽사리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냥 허울만의 존재로만 여기고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정욱의 집안 사람들이 시시각각 실체로 다가온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생각이 부족하고 경솔했는지 깨닫게 되는 오싹한 이 느낌은 그다지 좋은 기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BGM : Voice From The Past - Brian Crain←CLICK! “여기 왜 왔어요?!” 지해가 주원이 입원한 병실 앞에 다다르자, 복도에 혼자 나와 서서 훌쩍이고 있던 주란이가 지해를 보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오빠, 오빠 하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열심히 자신을 따르던 애가 이렇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 당연한 일인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대로 돌이 된 듯 굳어서 죄인처럼 그 다음 말만 기다렸다. “우리 오빠 정말 죽었나 확인하러 왔어요?” “………….” “깨어났어요. 지금 의사 선생님 안에 있으니까 좀 있다가 들어가요.” 꼴도 보기 싫은 듯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애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다. 20센티 이상 차이 나는 지해의 얼굴을 잠깐동안 똑바로 올려다보더니 가느다란 팔을 휘둘러 왼쪽 뺨을 퍽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때렸다. 맞는 순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광대뼈가 얼얼하다. 주먹을 불끈 쥐고서 때린 것 같다. 역시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주란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해진 편지지를 던져주고 휑하니 화장실 쪽으로 가버린다. “엄마가 오빠 오면 주랬어요.” 주원 어머니도 지해의 얼굴 보기가 싫었었나 보다. 『지해에게. 너무 부끄러워서 그냥 조용히 가고 싶지만, 네가 나에 대해 오해하고 끝나버리는 건 싫어서 몇 자 남긴다. 일단 너를 만나서 행복했다는 말부터 할게. 내가 어떤 성향인지 깨달은 다음에 한번도 마음 편하고 즐거운 날이 없었는데, 너를 만나고 나서는 정말 기뻤어.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조차 널 만나고 좋아할 수 있기 위해 그랬던 것 같아서 오히려 다행스럽고 뿌듯하더라. 그게 나한텐 얼마나 행복이었는지 넌 아마 상상도 못 할 거다. 그래서 널 놓치기가 싫었나봐. 계속 네 곁에 있으면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네 마음에 내가 들어갈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네가 날 떠나고 나면, 다시 예전의 공허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죽음보다 더 두려워. 뒤에 남을 사람들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난 이기적인 겁쟁이라서 행복했던 기억만 안고 맘 편하게 가고 싶어. 나에 대해선 부담 느끼지 마. 내가 나 편하자고 하는 짓이니까. 잘 살아. 이제는 네 앞날도 좀 생각해 가면서 살도록 해봐. 너만 좋으면 된다고 무작정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지 말고. 넌 착한 녀석이니까 뭐든지 다 잘 풀릴 거라고 믿어. 피아노 꼭 계속 쳐야 된다. 행복해라.』 지해는 복도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스윽 글자만 훑어 내린 후, 창가로 다가가 한번 더 꼼꼼히 읽었다. 캐릭터 팬시점에서 산 듯한 깜찍한 편지지가 이주원 다웠다. 팬시점 앞에만 지날 때면 그 안을 힐끔힐끔 들여다보는 걸 영락없는 기집애라고 얼마나 쿠사리를 줬던가. 한번 더 읽었다. 따뜻한 정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읽어도 죽으러 가는 사람이 쓴 유서같지 않다. 이상하다. 어디 잠깐 떠나는 사람이 안부 인사 남기고 가는 것 같다. 최대한 주원의 목소리와 말투를 머릿속에 기억해 내서 그 버전으로 한번 더 읽고 있는데, 병실에서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 한 명이 나왔고, 좀 이따가 간호사가 그 뒤를 이어 나왔다. 지해는 읽던 편지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고 병실로 들어갔다. 커튼의 틈 사이로 한 줄기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5월 중순의 토요일 오후. 화창하고 청명하고 놀기 딱 좋은 이런 날씨에 저렇게 침대 위에 파리한 시체처럼 누워서 손목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팔뚝에는 링거를 꽂고 눈을 감고 있다니. 뭐하는 짓일까. 저 붕대 안에는 혈관을 끊으려고 칼로 그었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겠지. 화가 난다. “나 왔어.” 주원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잠깐 천장을 바라보고는 다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야, 분위기 잡지 마.” 다시 눈을 뜨더니, 이번에는 힘없는 눈길로 쳐다본다. 저런 표정은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저 인간한테 저런 얼굴도 있었던가. “……왜 왔어?” “오지 말걸 그랬나?” “………….” “도로 갈까?” 주원이 보일락말락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잘 잤어?” “…오랫만에… 푹 잤어….” “그래, 잘 했어.” 잘 했다는 말이 이 상황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지해는 좀 웃음이 나왔다. 지해가 씩 웃기까지 하자, 주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전에 익히 알던 표정이다. “…나……, 정신과 치료 받아야 된대.” “진작 좀 받지.” “말 좀 이쁘게 하면, 어디 덧나?” 섭섭하다는 말투. 이제 죽는 건 포기한 건가? 제발 죽지는 마라. 옆에 있는 사람들 죽어나가는 꼴은 더 이상 별로 보고 싶지 않아. “너 정신과 치료 받을 때 나도 좀 같이 받으면 안 되겠냐?” 지해가 간이 의자를 당겨서 침대 옆에 앉으며 말하자, 주원이 눈을 좀 크게 뜨고 쳐다본다. 눈은 잔뜩 충혈돼 있고……, 정말 꼴이 말이 아니다. “너 땜에 깜짝 놀라서 나도 지금 제 정신이 아니다.” 지해가 중얼거리자, 주원이 그 와중에도 풋 하고 웃는다. 웃는 걸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때에도 몇번 겪었던 일이지만 자살을 한번 시도한 사람은 한번으로 끝내지 않는다. 하다 하다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죽을 것도 아니면서 구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늉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우습게 봐서도 안된다. 결국은 대화나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기 때문에 만약 이런 제스처를 무시할 경우에는 다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수면제는 어떻게 모은 거야?” “가르쳐주면 너도 사게?” “어.” “안 가르쳐줘….” “그래. 가르쳐주지 마. 그리고 죽지도 마.” “………….” “죽는 거 싫어.” “………….” “니 마음 알았어.” “………….” “너 죽으면 나도 평생 발 뻗고 못 잔다. 그게 사람 하나 죽이는 거지 뭐냐.” “………….”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죽지는 마.” “………….” “나도 죽이지 말고.” 누워있는 주원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해는 눈물을 닦아줄까 하다가 내버려두었다. 둘은 잠시 그냥 조용히 있었다. 한참 동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주원이 입을 열었다. 눈물은 흘릴 만큼 흘렸나 보다. “……지해야.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지해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그게 지금 위 세척한 사람이 할 소리냐?” “그때 우리 처음 같이 잤을 때……밖에 나와서…, 거기 모텔 근처에 배스킨 라빈스 있었잖아. 그때 나는 체리쥬빌레 먹구 너는 고르기 귀찮다고 바닐라 먹구……. 니가 겨울에 추워 죽겠는데 이게 무슨 지랄이냐 그러구…. 차 세워놓은 데 갈 때까지 다 못 먹어서 차 안에서 마저 먹었잖아.” “………….” “다 기억나….” 목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서 지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하고도 몇번 같이 잔 사이라는 걸 어쩜 그렇게 잊고 있었을까. 벌 받은 거다. 결국은 책임져야 하는 자기 행동을 무시하고 있었던 벌을 받은 거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사줄게. 힘드니까 말 많이 하지 말구 더 자.” “……싫어….” “이참에 왕창 쉬어.” “………….” “너 잘 동안 안 갈 테니까 푹 자.” 다정하게 한 마디 해주니까 진심으로 알아들었는지 편안한 표정을 짓고는 곧 눈을 감는다. 죽겠다던 사람이 금세 이렇게 마음 편해 하는 것도 배신감 느껴지는 일이긴 하지만,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어머니 때처럼 울고 불고 소리지르고 시도 때도 없이 자해하고 난동을 부렸다면, 정말 꼭지가 돌아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 생각 말고 잠깐만 머물러 있자. 속는 셈 치고 사람 하나 일단 살리고 보자. 그것 말고는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어차피 늘 이런 식으로 지금 당장 제일 시급하고 중요한 일 땜빵하는 걸 최우선으로 치고 살아왔으니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차가 밀리는 터널 속에 들어와서 조급한 마음을 달래려 억지로 잠을 청하듯이 그냥 다른 건 잊어버려 보자. 그 터널 끝에 도착해 눈부신 빛속으로 내딛으면 어디 와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해답이 있을 거다. 30분쯤 흘렀을까. 조금 전에 맞은 주사 때문인지 주원은 잘 자고 있었다. 편하게 잠을 자기로 마음 먹고 나니 잠이 잘 오는 모양이다. 일 저질러놓고 누워있는 사람은 이제 편한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해의 마음 속은 더욱 더 복잡하기만 하다. 머리를 비우는 일은 쉽지 않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더 어렵다. 담배 연기랑 같이 모든 잡념들을 태워 날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지해야. 안 갔니?” 주원의 어머니가 병실에 들어왔다. 그 꾸미기 좋아하는 화려한 아주머니가 저렇게 추레하게 보이는 날도 있구나 싶다. 지해는 주춤주춤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진 못 하지…….”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지해는 링거에서 똑똑 떨어지는 영양제 방울이 투명한 고무 호스를 통해 주원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걸 쳐다보고 있었다. “저, 좀더 있을게요. 깰 때까지 안 가고 있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모든 걸 체념한듯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지해는 ‘잠깐 전화 좀 걸고 오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픈 표정을 지은 사람들과 바쁜 얼굴로 급히 지나다니는 간호사와 의사들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층계없이 비탈진 계단을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또 내려가, 건물 밖에 나와서 찾아보니 저쪽 구석에 남자들 몇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곳이 있었다. 지정된 흡연장소인 것 같았다. 혼자 서서 피고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여기 몰려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진 모르지만 스스로 가까운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있는 죄인인양 자신의 속을 까맣게 태워 흰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환자를 함께 면회온 듯한 직장인 아저씨들 둘도 보였고, 다리에 깁스를 한 환자 친구를 데리고 나와서 같이 담배를 피우며 실실 쪼개고 있는 대학생도 있었다. 다리에 두른 깁스에 검은 매직 따위로 자질구레한 낙서가 잔뜩 되어 있다. 누렇게 뜬 얼굴이며 까치집이 앉은 듯한 머리며 다 엉망이지만, 밝게 웃는 얼굴은 이제 다 나아간다는 뜻인 듯. 깁스를 보니 문득 누군가 생각이 났다. 생각을 안 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나 버렸다. 어느틈에 그 녀석을 떠올리는 것조차 미안한 일이 되고 말았구나 싶다. 누구한테 미안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아파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자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한 놈이 사고를 내서 자기가 사랑하는 녀석이 다쳤다. 누구한테 더 미안해야 되는 걸까. 왜 죽을 뻔 했던 놈보다 기껏 팔다리에 금이나 조금 간 놈 때문에 더 괴로운 걸까. 다른 꼴은 다 봐도 자신 때문에 그 놈이 다치는 꼴은 못 보겠다. 근데 이런 일이 앞으로 또 없으란 법이 없다. 주원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런 악순환이 계속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고 주원이 죽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이제 어떡해야 되는 거지?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일인 건가? 잠깐 동안이었지만 정말 꿈처럼 행복했는데, 나한테는 사치에 불과했던 걸까? 담배를 피우는 건 포기했다. 이 곳에 오래 서 있기 싫다. 전화를 꺼내 ‘착한 엉아’ 민혁에게 미안하지만 기다리지 말고 그만 가달라고 전화를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러는 걸 가서 정욱이 하고나 놀아주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아마 질투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놈이 혼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건 싫으니까. 안 그런 척 하지만 꽤나 외로운 놈이니까. 누구든 그 속을 아는 인간이 지금 그 놈 옆에 있어줘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이제 나는 그럴 자격도 없는 것 같으니까.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뭔지, 그런 말이 왜 생겨났는지 이제 좀 알 듯 하다. 지해는 우라지게 맑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또 토해내는 병원 건물의 크게 벌린 입으로 다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정욱은 할아버지와 약속한 일주일이 채 못된 닷새가 되는 화요일 오전에 퇴원을 하기로 했다. 이미 금요일부터 나흘씩이나 병원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던 것도 질릴만큼 충분했다.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이까짓 걸로 입원을 하고 있는다니 체면이 안 선다. 게다가 아무리 자신감이 넘치고 배짱이 좋다 해도 중간고사가 코 앞에 닥쳤는데, 병원에 누워 잠만 자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불호령을 각오하고 퇴원하는 대신 혼자 살던 빌라가 아니라 본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혼자서 모든 걸 다 해결하기 불편하고, 거기 가 있으면 집에서 괜히 누굴 보내기라도 할 것 같다. 그러면 귀찮아진다. 그리고 그 집은 이상하게도 자기 혼자 살던 공간 같지가 않았다. 누군가랑 항상 같이 있던 곳인데 줄창 혼자 남게 된다는 기분은 반갑지 않았다. 며칠동안 병원에서 정욱은 자신이 굉장히 허전해 할 뿐만 아니라 외롭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책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뭔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너무너무 바빠서 정신을 차릴 새가 없으면 좀 견디기가 낫다는 사실도 알았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전함이라든가 그리움이라든가 속쓰린 배반감이라든가 기타 등등한 잡생각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 않으려면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야만 했다. 이럴 때 몸이라도 자유롭다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운동이라도 하련만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목발을 짚고 절룩이면서 밖을 왔다갔다하는 것뿐이다. 부자유스런 몸에 대한 짜증까지 겹쳐져서 불쾌한 기분은 어느덧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몸이 묶여 있어서 기분이 우울한 게 먼저인지, 마음이 답답해서 우울한 게 먼저인지도 판단이 되지 않았다. 지해 녀석이 조만간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그 토요일날 문밖을 나서는 뒷모습을 봤을 때 직감했고, 그 날 오후에 민혁이 병원에 들러 넌지시 비추는 말투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병원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며칠이 지나도록 단 한번 코빼기도 비추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이쪽에서 그 정도까지 최선을 다 했는데 이럴 수는 없었다. 그 녀석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내릴줄 알았다. 자기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 선택하리라고 믿었다. 그래도 이렇게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고(물론 절대 혼자가 아니라 귀찮은 인종들이 번갈아가며 수시로 얼굴을 디밀어서 피곤할 적도 있었지만) 모른 체 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소중하게 대해왔던 자신의 정성을 생각한다면 이 녀석이 이렇게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고 싶다, 놓치기 싫다는 안타까움은 이제 상실에 대한 불안감과 약간의 실망을 거쳐 며칠 사이에 기묘한 미움과 분노의 단계로 발전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아낌없이 헌신적인 애정을 쏟은 상대였다. 이렇게 갚는 법은 없는 거다. 연인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라더라도 이럴 수는 없다. 좀처럼 쉽게 남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자신이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서 아주 깊은 곳에 녀석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아니, 친구만도 못한 비즈니스 상의 단순한 거래 관계라고 치자. 이런 식으로 무례하고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절대로 참아넘길 수 없는 문제다. 이 정도의 일 처리라면 계약 파기의 사유가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강정욱이라는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와 자기애가 지독할 정도로 강한 녀석이었다. 그런 만큼, 일단 매우 드물게 자신의 질서 안에 포함시킨 존재에 대해선 철저한 애정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대하듯이 소중하게 여기고 그 존재 자체를 존중했다. 자기 것에 대해 ‘함부로’라든가 ‘대충’이라든가 ‘거칠게’라든가 ‘강제로’라든가 하는 개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녀석을 너무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마음이 끌리고 애착을 느낀 상대라고 해서 너무나 쉽게 자신과 동격으로 대우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기 기분에 취해서, 처음 느끼는 달콤한 감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속아버렸었는가 보다. 정말로 그랬던가 보다. 온갖 허튼 생각으로 분노와 짜증과 두통이 극에 달해 있을 때는, 어쩌면 전혀 자기 것이 될 가치가 없는 걸 겉포장에 속아서 착각했는가 보다고 스스로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 열기가 사라지고, 약간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들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그 나즈막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나 부드러운 머릿결이나 야들야들한 피부 같은, 그 녀석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그립기만 했다. 상상만으로도 다시 온몸이 후끈후끈해졌다. 이렇게 하루 종일 극과 극을 달리는 미칠 듯이 뜨거운 감정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상태는 건강하지 못했다. 혼자서 생각의 끝을 치닫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은 빨리 벗어나야 했다. 그 녀석을 만나야 했다. 얘기를 하고, 얼굴을 보고, 손끝으로 만져보고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BGM : 리스트의 '12개의 초절기교 연습곡'중 "회상(Ricordanza)" “지해야. 퍽퍽 좀 먹어라. 왜 그렇게 밥을 못 먹니.” “………….” “얘. 준석 엄마야. 이제 얘네들 이리 이사오면 억지로라도 챙겨 먹게 신경 좀 단단히 써야겠다. 지해가 부쩍 많이 말랐어.” 20년 가까이 호주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는 가끔씩 한국에 나와서 한동안 머물다가 가신다. 지해의 엄마인 작은 딸이 저 모양이 된 다음부터는 한국에 나오는 횟수는 훨씬 잦아지고, 한번 나왔을 때 머무는 기간은 길어졌다. “아니야, 할머니. 몸무게는 똑같아요.” “똑같긴 뭐가 똑같애. 얼굴이 더 조막만해졌는데.” “아니라니깐 자꾸 그러시네.” 6월달이 오기 전에 결국 이모댁의 빈 방으로 이사를 오기로 했던 지해네 형제는 필요한 짐들을 조금씩 시간 있을 때 미리미리 가져다 두기로 했다. 웬만큼 허접한 세간들은 다 버리기로 했기 때문에 그럭저럭 며칠 하다보면 따로 트럭을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토요일날 병원에서 돌아온 뒤부터 지해는 주말 내내 짐 싸는 데 몰두했다. 형이라는 작자는 아예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라고 내쫓은 뒤 온 집안을 휘저으며 쏟아 놓고, 고르고, 버리고, 싸서 묶고……. 열심히 일에 매달리다 보니 머릿속은 시원해지고 온몸은 노곤해져서 밤에는 아무 생각없이 잠도 잘 왔다. 월요일인 오늘 저녁, 지해는 학교를 마치고 한 꾸러미의 짐을 주인집에서 빌린 대형 마트용 쇼핑 카트(언제 어디서 났는지 그 집에는 이 물건이 있었다. 아마 주차장에서 몰래 쓱싹한 것이 틀림없다)에 싣고 이모댁에 와서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오늘 아침 에이전시에서 받은 연락에 따르면 이번주에는 잡지 화보 촬영 스케줄도 두 개나 들어갔고, 무슨 음료 선전의 지면(紙面) 광고와 캐주얼 의류 카탈로그도 섭외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물론 메인 모델이 아니라 눈에 안 띄는 옆자리에 서는 곁다리지만, 일하는 시간은 메인이나 똑같았다. 뭐라도 할 짬이 있는 날은 거의 오늘뿐이었다. “그래, 너희 짐은 다 옮겨오려면 아직 먼 거니?” 식탁 위의 그릇을 치우면서 이모가 물었다. 어머니의 언니인데도 그다지 안 닮았다. 여자라도 잘 생겼다고 표현해야 되는 외모나,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성격이나 모두 어머니와는 180도 다른 것이었다. “별거 없을줄 알았는데 정리하면서 보니까 알게 모르게 쌓인 게 엄청 많아요.” “이제 아니다 싶은 건 눈 딱 감고 전부 다 버려.” “그러고 있어요.” “어디 쓸데도 없는 거 미련 남는다고 질질 끌면 그게 평생 따라다니는 짐이 된단다.” “알아요.” “버려야 할 거에 애착 두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 그래, 응?” “네.” 지해는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있는 지금 상태가 견디기 힘들어졌다. 얼른 식탁에서 일어났다. 이모 대신 자기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자 외할머니랑 이모가 마구 말린다. 빈 그릇들을 얹은 쟁반을 이모 손에서 우격다짐으로 뺏다시피 했다. 쟁반 위의 그릇들끼리 서로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냈다. 이모가 약간 놀랜 눈으로 씽크대로 가는 지해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낸 뒤 칼과 쟁반과 포크와 접시를 챙겨 식탁에 앉았다. “왜 설거지까지 한다고 그래. 가뜩이나 모델인지 뭔지 그거 하느라고 힘들다면서…….” “아이구, 엄마. 쟤 그거 시작한지 얼마되지도 않았어.” “그나저나 그러면 지해 너도 테레비에 나오고 하는 거니?” “그래. 니 얼굴은 TV에서는 언제쯤이나 보게 되냐?” “헤헤, 아무나 나오나? CF에 캐스팅이 돼야 나오죠. 안 나와도 그만이야.” 이모는 멀찌감치 거실에 켜져 있는 TV에 간간이 눈길을 주면서 과일을 깎고 있었다. TV에서는 이제 막 9시 뉴스가 시작되었는지 요란한 시그널 음악이 나왔다. 이모의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는 부엌데기가 다 된 꺽다리 손주 녀석의 뒷모습이 못내 안스러운 듯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계속 지켜보았다. “느이 할애비 살아계셨으면……우리 집안에서……그렇게 얼굴 팔아먹는 모델 따위는…….” “아휴, 엄.마. 그만 좀 하세요.” 이모는 지해가 들을세라 나즈막한 소리로 할머니를 타박했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품위있는 정장이 어울리고 고운 티가 가시지 않은 할머니는 아직도 백화점 같은 데를 가면 사람들이 너끈히 예순 이하로 봐줄 정도의 세련된 멋쟁이였다. 칠순이 넘도록 스스로 여자임을 잊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여자’의 전파를 쏘아대는 예쁜 할머니.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몹시 따르던 지후나 지해는 할머니같은 여자한테 장가간다고 농담삼아 말하곤 했었다. 일제시대에 경성에서도 유명한 명문 집안에 태어나서 그 시절에 이화여대를 다녔던, 당시의 최고 엘리트였던 할머니는 뛰어난 미모로 도쿄까지도 유명세를 떨쳤었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로서 가치가 절정에 달했을 때 할아버지의 날랜 손에 냉큼 낚아채여 집안에 들어앉았다. 하고 싶던 일은 모두 접어야 했다. 이 집안 자손들의 빼어난 용모는 전부 이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덕택이었고, 그중에 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이 역시 지후였다. 그 덕택에 가장 사랑받고 자란 지후였지만, 똑똑한 척 하느라 가끔씩 ‘혹시 우리 외가가 친일파 아냐’ 하고 까불다가 어른들의 불호령을 듣기도 했었다. 그만큼 외가는 구한말의 사대부 집안치고는 상당히 개화된 가문이었던 것 같았다.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던 외할아버지만 해도 동경제대를 나와 든든한 재산과 지위를 이용해 해방 이후에 사업을 더욱 번창시키며 젊은 사업가로서 탄탄한 길을 걷고 있었다. 단,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 IMF가 지해네 가족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던 것처럼, 외가의 운명은 6.25와 함께 극심한 궤도 수정을 하게 됐었던 것이다. 피난처에서 병을 얻었던 할아버지의 건강은 돌아가실 때까지 끝끝내 안 좋았고, 알고 보니 미모의 본처를 놔두고 또 하나의 첩실(할머니에 비하면 형편없이 못생긴)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 와중에 밝혀졌으며, 서울 수복 후에 망가진 사업을 일으키려다가 몇 번의 실패를 맞으면서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어느날 문득 주위를 살펴보았을 때는 옛날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극히 평범한 신분으로 전락해 있더라……는 그런 얘기다. 어렸을 때 지해는 할머니가 피난갔다가 서울에 돌아와보니 집이라고는 껍데기만 남아있고 (하다못해 장독대에서 김칫독이나 된장독으로 쓰던 커다란 백자 항아리들까지 전부 다) 살림살이를 모두 도둑맞았던 이야기라든가, 충격받은 할머니가 아직 갓난 애기였던 삼촌을 씩씩하게 들쳐업고서, 집안에 내려오던 귀중품이나 서화등을 찾으러 며칠동안 서울 바닥을 헤매 다녔다던 이야기, 그래도 그중 건진 것이 있었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는 이야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도둑들은 전부 다 집에서 부리던 아랫것들이었다는 이야기 같은 걸 심심찮게 주워 듣곤 했었다. 외갓집 어른들이 이런 옛날 얘기들을 하면서 약간의 신세 한탄을 하거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면, 지후는 노골적으로 냉소적인 비웃음을 흘렸고, 지해는 잘은 모르지만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지금 손에 잡을 수 없는, 어긋나버린 과거는 잊어주는 것이 현재를 위해서도, 그 아름다운 과거를 위해서도 가장 현명한 일이니까. “어머, 저거 오늘 준석 아빠 간 거 그거다. 뉴스에 나오네. 저기 참석하기 싫다고 그러더니 기어이 갔구나.” 지해가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탁탁 털면서 돌아섰을 즈음에는 이모와 할머니는 식탁을 떠나 거실로 자리를 옮겨 TV를 보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세강전자에서 새로 발표한 무선 소형 PC에 대한 상세한 리포트에 이어서 세강전자 후원으로 거행됐던 전국 마라톤 대회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기를 관전하는 VIP 석에 앉은 계열사의 중역들과 그 중앙에 앉은 강성철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 귀퉁이에 어정쩡하게 앉은 민 부사장의 어눌한 표정을 카메라가 스쳐 지나가자, 이모와 할머니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우승자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강회장의 모습이 화면이 잠깐 클로즈업된 뒤, 뉴스는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던 지해는 어느새 TV 속 건장한 백발 노신사의 모습에서 가슴 속에 꽂힌 누군가와 닮은 구석을 찾아내려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고 씁쓸한 생각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러, 배낭을 던져둔 준석의 방으로 갔다. “저 사람이 민서방 네 회사 회장이지?” 할머니가 뉴스에 스쳐 지나간 강회장의 모습을 살피면서 이모에게 물었다. 강회장의 이름은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그의 얼굴이나 과거지사 따위는 그리 많이 노출되어 있지 않았다. 매스컴과 대중을 기피하는 재벌 총수 중 한 사람이라 TV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극히 드문 편이었다. “저 강회장 말이에요. 나도 저번에 모임 갔을 때 들은 건데, 대외적으로는 안동의 애국지사 누구의 자손으로 되어 있지만, 머슴이었다는 얘기도 있고, 고아라는 얘기도 있고, 젊었을 때 주먹 쓰는 사람들하고 어울렸다는 얘기도 있고, 야쿠자들하고도 결탁했었다는 얘기도 있고……. 소문이 아주 무궁무진하더라고.” “그 시절에 돈번 졸부들이 다 그렇지.” “그래요. 다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잠깐 말문이 막히고 어색하고 착잡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할머니가 곧 밝은 음성으로 아주 근거없는 농담을 던지듯이 이모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나 처녀때 우리 친정에 잠깐 있던 머슴 중에도 성철이라고 하나 있었는데, 혹시 그 사람 아냐?” “아이구, 엄마. 정말 그럴 것 같으면 본명을 그대로 쓰나요? 이름 바꾸지.” “그래, 그렇겠지?” “그으럼. 그게 뭐 그리 자랑스러운 과거라고. 이왕 숨길 것 같으면 제대로 하지.” 거실과 준석의 방은 꽤 떨어져 있는 편이라, 살짝 열려진 방문 틈으로는 이모와 할머니의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TV 소리가 뒤섞여 그저 언뜻언뜻 의미없는 소음으로만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지해는 잠깐 거울을 보았다. 주란이한테 정통으로 맞았던 뺨이 약간 부었었는데 이제 다 가라앉았나 보다. 눈썰미 좋은 할머니와 이모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다. 일하는 데 지장은 없을 것 같다. 이번 주에 일 스케줄이 많이 늘어나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한숨을 지으며 지해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정욱은 수요일부터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일이 몰렸던 지해는 막상 수요일엔 결석을, 목요일엔 3교시까지만 마치고 조퇴를, 그리고 금요일엔 새벽부터 광고 촬영이 있었기 때문에 금요일 점심때나 되어서야 겨우 교실에 얼굴을 제대로 들이밀 수 있었다. 그나마 그 음료수 광고의 메인 모델인 신인 스타의 눈코뜰새 없는 스케줄로 인해 새벽 일찍부터 들어갔던 광고 사진 촬영이 오전에 끝나주어서 남은 수업이나마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오후 수업도 제껴버리고 싶었지만, 점심이나 먹고가라는 스탭들의 권유에는 막상 ‘저 학교 가야 되거든요’ 하고 착실한 모범생 같은 대답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요새 드물게 순진한 녀석 본다는 듯이 기특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약해지는 각오를 다지며 ‘한번은 거쳐야 할 일’을 향해 지해는 지하철에 올랐다. 규칙적으로 덜컹덜컹 흔들려대는 지하철. 그 위에 올라 앉아 펄떡펄떡 제멋대로 뛰어노는 심장. 그 녀석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또 그만큼 미치도록 보고 싶기도 한, 딱 한 마디로 잘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 녀석에게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흥분되면서도, 그저 중간에 아무데서나 내려 달아나버리고 싶은 야릇한 충동. 몸과 마음이 양쪽으로 잡아당겨져 찢겨나가는 듯한 이런 혼란이 싫지만은 않았다. 잘 알고 있다. 이런 갈등과 떨림과 대상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그런 모든 잡다한 쓰라린 감정들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즐기고 있다. 몹시 두려웠다. 그런데 그 두려움마저도 자신은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해는 정욱이 어느 정도 화가 났으리라는 건 물론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각오까지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그 분노지수가 훨씬 높다는 사실은, 어제 서둘러 조퇴를 하느라 바삐 교실 밖으로 튀어나올 때 눈이 마주치던 순간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언제나처럼 차갑게 굳히고 있는 얼굴. 그 위에 자리잡고 있는 한 쌍의 냉담한 눈동자.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친 순간 섬뜩하게 타오르다가 순식간에 그 열기를 거두어버리고 그저 찌르는 듯이 냉정하게 바라보는 그 눈빛이 던져주던 삭막한 느낌은 지해로서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고, 들추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린 듯한 복잡한 실망감. 그 녀석이 그렇게 감정 조절이 능하고 한 순간에 차가워질 수 있는 놈이라는 걸 몰랐더라면 그저 달콤쌉싸름한 미안함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을……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찢어지는 불협화음으로 교정에 울려펴졌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액션~!’ 사인이라도 던진 듯 일순간에 학교 전체가 들썩이는 소란한 움직임과 함께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의 그림자가 텅빈 운동장에 넘실대기 시작했다. 지해는 멀리 손톱만하게 보이는 교실 창문을 바라보며 이제 더 이상 달아날 여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맞닥뜨리고 싸우든가, 빌든가, 이제라도 찢어져서 각자의 길로 가든가, 뭔가 쌈박한 결론을 확실하게 내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밥은 챙겨먹고 다니는 거냐?” “아….”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정욱이 바로 그 자리, 유럽에 가기 전에 앉던 그 자리에 깁스한 다리를 주욱 뻗고 앉아 있었다. 옆 책상에는 목발 한 짝이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다. 오른쪽 소매를 빼고 어깨에 걸친 재킷 안쪽으로 깁스를 둘러 부자유스런 오른팔이 보였다. 어깨에 팔을 고정시켰던 삼각건은 풀어버린 것 같았다. 다친 모습을 다시 보니 마음이 언짢으면서도 며칠만에 가까이서 보는 그 얼굴이 지해는 일단 반갑기부터 했다. 주책맞게 두근대는 심장을 머릿속으로 나무랐다. “너는…?” “먹어야지.” “………….” “가자.” “너랑 같이 먹던 애들은 어쩌구?” “반장? 내가 안 움직이면 지네들끼리 알아서 가잖냐.” 친구 관계라고는 절대 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주종 관계도 아닌, 그저 필요(숙제, 노트 필기, 점심 파트너 등등)에 의해 어울리는 관계. 정욱이 먼저 말을 건네거나 밥 먹으러 가자는 모션을 취하지 않으면 감히 다가와서 묻지도 못한다. 저렇게 잔뜩 주눅들어 대할 바에야 왜 그 옆 끄트머리에 한사코 붙어 있으려고 할까, 하고 지해는 가끔 반장과 그 패거리들을 희한하게 쳐다보곤 했었다. “………….” “얼른 가자.” “난 졸려서 한숨 자려고.” “먹고나서 자. 기운 빠져.” “……아니, 나 어제 저녁에 체한 게 아직 안 가라앉았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체한 것까진 아니었어도 어제 화보 촬영을 마치고, 같은 에이전시에 소속된 동료 모델들 서너 명이랑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속이 안 좋아서 몇 숟갈 들다가 도로 놨었다. 요즘 계속 배가 고파도 고픈 줄 모르고,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면서 잘 넘어가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디 봐봐.” “――!!” 정욱이 손을 덥썩 잡았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감촉이 혈관을 통해 고스란히 척추까지 찌르르하는 자극으로 전달됐다. 아까부터 불규칙적으로 뛰놀던 심장 박동이 너무나 빨라져서 지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 손이 차―” “됐어.” 지해가 냉큼 손을 뿌리치자, 정욱은 남의 속도 모르고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화가 나 열이 오른 듯한 그 얼굴에서 어제 봤던 그 차디찬 눈빛이 겹쳐져, 섬뜩한 두려움과 묘한 흥분이 교대로 온몸을 휘저었다. “야~!!” “…조그맣게 말해….”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교실에 식사를 마친 애들 세 명이 앞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오자 지해가 반사적으로 쉬쉬거리며 말했다. 이 한 마디가 여태껏 꾹꾹 누르고 있던 정욱의 분노를 폭발시켜버리고 만 걸지해는 뒤늦게 깨달았다. “따라와!!” “………….” “안 따.라.와?!!!” 문을 덜컥 열고 밖으로 나서던 정욱은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지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여학생 두 명이 깜짝 놀라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지해가 목발을 들고 따라나서자, 정욱은 ‘놓고 와’ 하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대신 목발 노릇을 하라는 뜻이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왼팔로 자신의 어깨를 바싹 끌어안다시피 한 정욱의 숨결이 목덜미와 귓가를 간질였고, 온몸이 끊임없이 스치듯이 부딪쳤다. 정욱은 힘이 들어서 그런 건지 다른 의도 때문인지 점점 더 지해에게 체중을 의지하고 있었다. 서로 이렇게 계속 밀착되어 있다보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이미 수십 차례 반복된 경험으로 몸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지해는 조금씩 무릎 안쪽으로 열이 차오르며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에 점점 곤혹스러웠다. 이 녀석이 피는 쿠바산 담배 냄새와 이 녀석이 쓰는 egoiste의 향기와 이 녀석 특유의 은은한 체향이 뒤섞인, 지해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선정적인 살내음이 자신의 피부 표면을 뚫고 세포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평정을 가장하려 무진 애를 썼다. 지해는 정욱에 비해 그 방면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이미 눈치를 깠는지 정욱은 지해를 감싸고 있던 왼손을 마구 오르내리며 귓볼이나 목덜미나 어깨나 등 같은 곳을 애무하듯이 더듬어댔다. 뜨거운 것이 뱃속을 간질이며 온 몸으로 번져서 소름을 돋게 하는 느낌. 의식은 낭패감을 느끼면서도 몸 속 심지에서는 뜨겁고 축축한 열기가 뻗쳐 올라 허리가 저렸다. 지해는 그의 왼쪽에 있었으므로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서 열받은 그곳을 꾹 움켜쥐고 달랬다. 그러나 절대로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힘겹게 계단을 다 내려온 뒤에는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정욱은 잠깐 주위를 살폈다. 식당이나 운동장까지도 가장 멀고 구석진 현관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정욱은 지해를 계단 옆의 벽으로 밀어 붙히고 이마에 맺힌 구슬 같은 땀방울을 하나하나 엄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뭉개고 닦아냈다. 이 녀석의 몸에서 나오는 건 무엇 하나 이쁘지 않은 게 없었다. 정욱은 살짝 구부린 검지 손가락 옆쪽의 여린 속살로, 붉게 달아오른 그 얼굴 표면을 살살 쓸어내리며 지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고요한 욕망에 휩싸인 홍차빛 눈동자가 일으키는 충동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진 고속도로를 번개같은 스피드로 내달렸다. “……어디……가는 거냐?” “집에.”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을 거두지 않은 채 정욱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집?” “난 지금 몸이 불편해서 조퇴하는 거야. 넌 촬영이 늦어져서 오늘 학교에 못 돌아온 거고.” “야~! 그런 게 어딨어?” 지해가 정색을 하고 얼굴에 닿은 손을 잡아서 내리며 말했다. 정욱은 잡힌 왼손을 탁 뿌리쳤다. 지해의 손은 별 저항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런.게. 어.딨.어?!” 한 음절씩 정확하게 스타카토로 끊어 되물으며 정욱은 왼손을 들어 수직방향으로 지해의 목젖 부분부터 아랫도리까지를 강하게 자극하며 재빨리 쓸어내렸다. 피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약간 불끈하게 굳어있던 중심에 손길이 스치자 지해는 움찔하며 허리를 틀었다. 몸의 심지로부터 시작된 불길이 얼굴을 후끈 달아올렸다. “이러고도 그런 말이 나와?!!” 누가 듣던지 상관없다는 투로 정욱이 소리를 높였다. 지해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앗 하는 순간 정욱이 몸을 바싹 들이대서 밀착해 왔다. 이 녀석의 사정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너랑 나는 못 떨어져. 못 끝내. 이렇기 때문에 안된단 말이다.” 열기에 휩싸인 얼굴 속에서 냉정하기만 하던 두 눈동자가 안타까운 애원을 담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욱의 목소리가 약간 떨린다는 생각이 들자, 지해는 그 눈에서 차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 “너, 잔말말고 따라와 봐. 네가 그 대가리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하든지 간에 너는 내 꺼라는 걸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BGM : Tango(Version Castellano) - Ryuichi Sakamoto 정욱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운전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일찍 호출당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를 다녀왔을까. 지해는 묻고 싶어졌다. 아저씨, 어디서 시간 죽이셨나요. 오락실? 만화방? 저런 아저씨들이 주인님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는 곳은 어디일까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지금이 이런 걸 궁금해 해야 할 타이밍이 아니란 건 잘 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그러고 보니 기사 아저씨도 다른 사람이었다……그때 그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차도 다른 차를 가지고 나온 것 같다. 그때는 국산 에쿠스 리무진이었는데 오늘 가지고 나온 차는 은색 벤츠 S320. 그 차는 어쨌을까……누가 타고 나갔을까……차고에 처박아뒀나……나 계속 왜 이렇게 딴 생각만 하고 있는 거지. 아마도 머릿속에 가득찬 다른 생각을 쫓으려고 이러나보다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해는 그냥 일단 모든 게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묵묵히 따르기로 했다. 자기 생각이 천갈래 만갈래 뻗치는 것도 혼자 머릿속에서 탑을 쌓았다 허물었다, 생각의 나래를 맘껏 폈다 접었다 하게 내버려두고, 이 녀석도 무슨 꿍꿍이인지 그것도 그냥 내버려두고 말련다. 일단……이제 와서 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리고 대체 개념이라는 게 없어가지고 괜시리 여러 사람 고달프게 만든 김지해라는 이 븅신 새끼는 벌을 좀 받아야 한다. 정욱이 녀석에게도 결국은 못할 일만 시킨 셈인데 그 녀석이 뭘 원하든, 뭘 시키든 못 견딜까 싶다. 정욱이가 바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몸으로 때우지 뭐, 하는 생각이 든다. 십중팔구 자신이 맘먹은 것과는 어긋날지 모른다. 대충 견딜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즐기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일 것이 뻔했다. 그래도 아마 양보는 하기 힘들겠지. 견디고 즐기는 것과 양보하는 건 천지 차이니까. “네가 저쪽에 타.” 정욱이 왼쪽 뒷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해는 기사가 오른쪽 뒷문을 열어주자 깁스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정욱을 부축해 앉히려고 했다. 그런데 여태껏 계속 자기한테 잔뜩 몸을 기대고 여기까지 걸어온 놈이 부축을 거절한다. 뻘쭘하니 어이없어 하다가 지해는 왼쪽 문을 열고 자리에 올랐다. 햇볕에 뜨끈히 데워진 진회색 가죽 시트에서 열받은 가죽 특유의 냄새가 났다. 가솔린 냄새와 차에 가득 배어있는, 아저씨들이나 쓰는 올드 스파이스(아마도 이 차는 정욱의 아버지가 가끔 타는 차 중 하나인가 보다 싶었다)의 잔향까지 겹쳐서 향수鄕愁 중추를 자극하는 그리운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전에 언젠가도 이런 기억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에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 냄새가 왜 익숙했는지 알겠다. 이건 예전에 자신이 ‘아빠 냄새’라고 부르던, 아버지의 양복 깃에 묻어 다니던 그런 종류의 냄새였다. “야.” 아무말 없이 차창 밖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지해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것처럼 말문을 열었다. “왜?” “너 그 바이크……그때 사고난 거…. 그래서 어떻게 됐냐?” “빨리도 물어본다.” 정욱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번 얼굴을 돌아본 다음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됐을 것 같냐, 엉?” “내가 어찌 알겠―” “야~!!!” 정욱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러 지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가 뭘 건드렸길래 이 새끼가 또 이렇게 화를 내나 싶어 눈을 껌벅거리면서 쳐다만 본다. “……간 떨어지겠다, 임마.” “야, 너는…….” 정욱은 정말 흥분하긴 했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씩씩거리다가 침을 꿀꺽 삼킨다. “………….” “지금 그딴 게 그렇게 궁금해?!!!” “………….” “………….” “……궁금하니까……물어본 건데….” “지금 이 차 집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니야~!! 집에 가려면 벌써 한참 전에 저기서 꺾어야 했다구. 넌 지금 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안 궁금하냐?!!!” 그제서야 지해는 창밖을 제대로 살펴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뇌까렸다. 그러자 정욱은 정말 기가 차다는 듯이 노려본다. 결코 마음 편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줄 방법이 없다. 언제부턴가 심하게 놀래거나 긴장을 하면 의식이라는 놈이 외출을 해 버린다. 현재 상황에 대한 지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아마 지금 꽤나 긴장하고 있나 보다. “내가 궁금해 해봤자 별 수 있겠냐. 오늘은 너한테 다 저당잡혔―” “너 아주 여유가 넘치는구나.” “여유라기 보다―” “넌 여유만만인지 모르겠지만, 난 꼭지까지 열받았기 때문에 아주 맛이 갔거든. 폭발 일보 직전이니까 더 이상 내 성질 안 건드리는 게 너한테 유리할 거다.” 고개를 옆으로 팍 돌리고 애써 화를 삭히는 정욱의 옆얼굴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지해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침착하기만 하던 이 녀석이 이런 귀여운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동안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흐뭇하고 웃겨서 웃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지해가 웃어대자 어처구니없어 하던 정욱이 이윽고 허탈하게 따라 웃기 시작했다. 둘은 눈물까지 맺혀가며 한참을 정신없이 웃었다. 차 안에 커다란 웃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지해보다 먼저 웃음을 가다듬은 정욱이 멀쩡한 왼손으로 지해의 손을 턱 잡았다. 아직까지 끝마무리가 안 되어 끅끅거리던 지해는 가만히 정욱을 쳐다보았다. “이리 가까이 와.”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움직여 바싹 다가가 앉았다. 맞닿은 허벅지로 이 녀석의 야생마처럼 탄탄한 다리 근육이 꿈틀하고 숨쉬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떨린다. 아~ 역시 이 녀석은 가까이 할 놈이 아닌 것 같다. 삽시간에 사람을 동물로 만들어버린다. 딴 생각을 길게 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정욱의 입술이 다가오자 지해는 눈을 감았다. 한참동안 서로 입술만 포개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쿵쾅거리는 소리가 두개골 전체를 울렸다.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모르겠다. 정욱이 조용히 지해의 아랫입술을 애무하기 시작하다가 곧 윗입술로 옮겨갔다.둘은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만끽하며,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교대로 빨아들이고, 이로 가볍게 깨물거나 하며 머릿속의 잡생각을 비워갔다. 정욱이 눈을 감은 채 혀끝을 자신의 입술 사이로 밀어붙이고 잇몸을 혀로 핥아올 때쯤에는 이미 지해는 다른 건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흘끔거리든, 선팅된 차창으로도 빛의 각도에 따라 슬쩍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자기들 모습에 옆 차에 앉은 사람들이 경악을 하든 어쩌든 상관없었다. 아니, 어쩌면 남들의 시선에 더 흥분해서, 보라는 듯이 그 시선을 즐기며 이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잇몸 주변을 핥던 정욱의 혀가 자신의 혀의 아래쪽 부드러운 부분을 자극하자 지해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목구멍 안쪽의 부드러운 점막질 부분까지 혀를 뻗어 간질이다가 혀를 뾰족하게 세워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찔러오는 정욱의 간절한 움직임은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했다. 둘은 거의 정신을 잃고 열띤 신음으로 좁은 차 안을 가득 메우면서 혀를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에 몰두했다. 마주 잡았던 둘의 손이 서로를 떠나 공중을 배회하다가 상대방의 체온을 찾아 옷속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서로를 더욱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시키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는, 혀와 혀의 격전이 계속됐다. 저항하면서 동시에 공략하고, 다가가는 듯 하면서 도망간다. 싸움에 지치면 그저 서로의 혀를 강하게 지그시 누르고 핥으면서, 또는 서로의 입김을 들이마시면서 감미롭고 나른한 무의식의 순간을 만끽했다. “저, 다 왔는데요.” 머뭇머뭇하는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에 둘은 땅 위로 돌아왔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버리고 지해는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았다. 입안이 얼얼하고 감각이 없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바깥에 나와보니 여기는 아마도 남한산성 근처의 별장인 것 같다. 구비구비 흘러가는 남한강이 저 아래쪽으로 시야에 펼쳐졌다. 멀리 보이는 짙은 신록과 푸르른 공기에 지해는 탄성을 올렸다. 시계를 보니 거의 세 시가 다 되어 있었다. 키스를 두 시간 가까이 했나보다 생각하니 문득 허기가 졌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두꺼운 원목을 격자무늬로 짠 대문부터 현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마치 숲속 오솔길처럼 살짝 굽어져 있었다. 비탈진 너른 마당에는 새파란 잔디가 깔려 있다. 예쁘게 정돈된 정원수들 중 특히나 몸체가 굵은 노송이 눈길을 끌었다. 저 소나무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평생 내려다보며, 이 주변에서, 이 별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아이보리색으로 칠해진 아담한 2층 별장. 눈에 도드라지는 검은색 창틀과 군데군데 원목을 덧입혀 장식한 것이 세련된 풍미를 자아냈다. 역시 격자무늬 모양의 원목 난간으로 빙 둘러진 2층 발코니에는 깔끔한 남색 파라솔이 달린 간이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현관 계단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보기보다 제법 넓어 지해는 적이 놀랐다. 마당이 너무 넓고, 주위에 집이라곤 없어서 집채가 작아보였나 보다. 말끔히 정돈된 바깥 만큼이나 집 안도 정갈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나 가구를 다 배제한 넓은 공간. 짙은 고동색 나무가 깔려 있는 마루. 한 면만 빼놓고 전부 다 넓은 통유리창이 차지하고 있는 거실 벽. 그리고 그 아이보리 색 벽에는 단촐한 시계가 하나 걸려있을 뿐이었다. 젠zen 스타일의 깔끔한 응접 세트가 자리잡은 곳은 2층 꼭대기까지 비스듬한 천장이 높다랗게 뻥 뚫려 있었고 태양광이 들어오도록 길다란 창이 나 있었다. 밤에는 저 창으로 별이나 달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ㄷ자 모양을 한 밤색의 커다란 목재 구조물이 두꺼운 쇠줄로 그 천장에 매달려 그 창을 감싸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ㄷ자 사이로 단아한 등 하나가 가느다란 줄에 매어져 달려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부터 여긴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두 시간 동안 신체 건강한 남자애들 둘이서 키스와 애무의 황홀경을 헤매고 난 뒤임을 만방에 광고하는 혈기왕성한 증거(!)를 아무에게도(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는 운전사 아저씨만 빼고) 들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여기서 돌아갈 때는 어떻게 가야 되는 거냐?” 이럴줄 알았으면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오는 길이나 제대로 봐둘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래 전원주택들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랑 이 별장은 꽤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차가 덜컹거리지도 않고 잘 닦인 길로 올라왔던 것 같으니까 내려가는 길이래봤자 뻔할 것이긴 했지만. “……너 정말…! 오자마자 갈 생각만 할래?”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고집을 부리나 싶어 정욱은 또다시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쫌 있으면 니가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해줄 것 아냐? 그러려고 이 구석까지 끌고 온 것 아니었어?” 지해가 창가에 서서 통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창을 뚫고 부서지며 들어오는 햇살이 지해의 온 몸을 감쌌다. 정욱을 고집스레 외면하고 있는 눈동자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길다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 좋아. 딴 생각 털끝만큼이라도 했다간 오늘이 니 제삿날인줄 알아라.” “어디 네 맘대로 해봐. 죽이든지 살리든지…….”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뭐든지 해서……제발……날 되찾아가라…… 화가 잔뜩 나서 노려보는 정욱의 눈길에 지해는 말끝을 흐리며 그 다음 말은 삼켜 버렸다. 이 녀석에게 돌아오고 싶다. 곁에 오래오래 남고 싶다. 같이 있기만 해도 온 몸과 마음이 이토록 달아오르는데, 이 녀석 얼굴 끄트머리만 잠깐 구경해도 그냥 천국처럼 좋은데, 왜 이렇게 망설여야 하는 건지, 도대체 뭘 양보 못 하겠는 건지, 스스로도 그게 뭔지, 어째서인지도 잘 몰랐다. 차를 몰고 사라졌던 기사 아저씨는 마을의 식당에서 공수해 온 식사거리들을 식탁에 올려놓은 뒤, 새벽에 오기로 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곳은 정욱 혼자서만 쓰다시피 하는 별장으로, 가끔 혼자 와서 낚시나 하다가 가는 곳이라고 한다. 여기는 가끔씩 청소하는 아줌마와 정원사가 들르는 것 외엔 따로 상주해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불편함 때문에 다른 식구들은 발길을 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식사를 하고 정욱이 자신은 1층에서 샤워를 할 테니 지해더러 2층에서 씻으라고 했다. 혼자 씻기 힘들 것 같아 도와주겠다고 나서니 자기 깁스는 최첨단 발수撥水 소재로 된 거라 물에 젖어도 상관없단다. 네 도움은 필요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정신 좀 나라고 지해는 한참동안 온몸을 찬물로 두드려 맞다가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정욱은 벌써 침대에 앉아 있었다. 느슨하게 걸친 로브의 틈으로 어깨를 사선으로 감싼 붕대가 눈에 띄었다. 가슴이 아팠다. “나보다도 빨리 씻었네.” “그래.” “이게 그거냐?” “응. 다음 주면 이것도 다 안녕이다. 이제 다 나았어.” “일주일만에?” “그래.” “구라치지 마, 새꺄.” 지해는 다가가 침대에 앉아 허리를 푹 숙이고 발목에 두른 딱딱한 깁스를 두드려 보았다. 설명을 듣고나서 보니 확실히 일반 깁스랑은 좀 틀린 것 같다. 그 날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표면이 촘촘한 그물조직으로 되어 있다. 두드렸다가 쓰다듬었다가 꽉 쥐었다가 하며 장난을 쳤다. 정욱이 간지러운지 발목을 움찔 피한다. “그만해. 그게 니 장난감이냐?” “재밌어. 신기해.” “난 니가 더 신기하다.” 정욱이 몸을 잔뜩 수그린 지해의 등줄기에 입술을 댔다. 지해가 화들짝 놀라서 등을 꿈틀하면서 몸을 일으키자 얼굴을 양손으로 가득잡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한다. 눈 마주치기가 두렵고 괜시리 가슴이 떨려서 지해는 계속 시선을 발목의 깁스로 향했다. “…저런 거… 처음 봐….” “난 너같은 녀석을 처음 봐.” 그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는 안 들어도 뻔한 것 같았다. 더 이상 듣기가 싫어서 지해는 정욱의 젖은 머리를 손가락 사이로 감아서 틀어쥐고 그냥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쳐 버렸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공간의 제약이 없는 맘 편한 곳에서 이러고 있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온몸과 마음이 편안히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뿌듯해 하는 동안 정욱이 지해를 서서히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중지와 약지 사이에 살며시 일어서기 시작한 지해의 유두를 끼우더니 손을 움츠려 자극해온다. 지해는 자신이 정욱의 이런 공격에 약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간지러운 감각에 지해는 허리를 비틀었다. 정욱은 거의 온 몸이 성감대라 할 만큼 민감한 이 녀석이 자신의 아무렇지도않은 손길 아래 곧바로 반응하며 팔딱대는 감각에 가슴이 벅찼다. 자기가 처음 봤을 때 단번에 알아봤던 대로 이 녀석은 확실히 섹스에 소질이 있었다. 게다가 평생을 같이 한 사람들처럼 둘은 호흡이 딱딱 잘 맞았다. 몸과 마음이 한 박자로 움직이는 최고의 섹스 파트너. 정말 놓치고 싶지 않다. 이 녀석을 안을 때마다 평생 어디서도 이런 상대를 다신 못 만날 거라는 생각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정욱이 혀끝을 세워 강약을 조절하면서 목덜미부터 공략하며 온몸을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겨드랑이 체모를 입술로 조금씩 당기자, 지해가 가르릉 소리를 내며 킥킥거린다. 팔꿈치 안쪽을 살짝 깨물어 주고, 손가락 사이도 혀로 자극했다. 정욱은 지해의 온몸에 입술을 미끌어뜨리며 탐하다가도 도중 문득문득 고개를 들고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쾌락에 신음하며 눈부신 알몸을 색스럽게 뒤트는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는 소유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혀끝에 기를 넣어서 단단히 한 후에 정욱은 가슴과 옆구리와 배꼽을 집중 공략하다가 무릎 주변에 천천히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대로 다리선을 따라 내리며 발가락 사이의 여린 속살을 핥아주고는 혀를 아래로 내려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을 진득히 핥아내렸다. “야~! 드, 드럽게…….” “됐어. 하나도 안 드러워.” 정욱은 자신있게 말하고는 엄지발가락을 입 안에 넣고 살살 굴리며 빨아댔다. 쉴새없이 밀려오는 쾌감에 전율하며, 지해는 자신의 몸이 정욱의 입 속으로 전부 빨려드는 듯한 느낌에 머리를 휘저었다. 어느 틈에 정욱은 지해의 다리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벌린 뒤 가슴까지 두 다리를 치켜 올려서 접고, 그 사이에 자신의 왼쪽 다리를 꿇고 깁스한 오른쪽 다리는 주욱 편 채 앉았다. 자신의 오른쪽 발이 지해의 머리까지 가까이 갔다. 지해가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그걸 놓치지 않고는 씩 웃으며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꽉 깨문다. “이 새끼가~! 죽고 싶냐?” 정욱은 얼른 몸을 들어 두 다리를 모으고 크게 무릎을 꿇었다. 아픈 발목에 체중이 실리자 시큰하긴 했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의 목적에 비하면 이 정도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여봐~” 정욱은 복수(?)의 의미로 이미 하늘을 향해 죽 뻗어있는 페니스를 손에 꽉 잡았다. 아픈지 앗 소리를 낸다. 엄지손가락으로 귀두 부분을 가볍게 꾹꾹 누르고 쓸어줬더니 곧 방울방울 맑은 액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내친 김에 허리를 굽혀 고환을 핥아내리다가 혀끝을 세워 회음부를 간질이고 애널 주위를 연속 공격하기 시작했다. 정욱의 두 뺨으로 보송보송한 털이 느껴졌다. 그 털에 얼굴을 부비면서 사타구니 사이로 입김을 후 불어 여린 속살을 간질였다. 다리를 어쩔줄 몰라 하며 버둥거리고 자지러지듯이 웃는다. 애널 주위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참아내기 힘든 쾌감이 몸 전체로 퍼져 지해는 숨이 거칠어지고 양 다리를 꽉 조이기 시작했다. 정욱의 혀가 애널 안쪽의 어느 부분을 건드리자 갑자기 다리의 힘이 쫘악 풀리며 어지러움과 비슷한 찌르르한 느낌이 하체를 타고 맴돌았다.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애무하자 기름샘에서 액이 흘러나와 애널 안이 녹진하니 충분히 젖어든 것을 확인하고, 정욱은 자신의 것을 구멍 입구에 갖다대고는 주위의 근육에 살살 문질러대며 마찰을 시켰다. “아악! ” 정욱이 예고도 없이 단번에 삽입하자, 밀려오는 뿌듯한 고통에 지해는 그만 신음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 온몸이 녹아내릴 듯 내리쪼이던 정성어린 애무와는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잔뜩 방심하게 해놓고 이렇게 공격해댄다. 지금까지 이 녀석이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젤이나 콘돔이 없이 하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준비가 안 된 비상시(!)에는 행여 상처가 날까 항상 조심스러워 하며, 안에다 사정하는 적도 없던 녀석이었다. 심지어 자기 몸의 상태가 안 좋다 싶은 날에는 아예 삽입조차 안 하려고 들어서 자신이 설득(!)해야 할 정도였다. 괘씸한 불쾌감과 원망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곧 이것이 정욱 자신이 느꼈던 배신감을 너도 한번 느껴봐라 하고 그대로 갚는, 일종의 벌이라는 생각이 지해의 머리 한 구석에서 불을 밝혔다. “헉.” 고통으로 온몸을 경직시키며 지해가 꽉 조이는 바람에 정욱도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아팠다. 이 녀석이 괴로워하는 만큼 자신도 같이 괴롭고, 이 녀석을 벌주는 만큼 자신도 같이 벌받고 있었다. 온몸에서 땀방울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마로부터 솟아나온 땀방울은 얼굴에 난 길을 따라 눈으로 쉴새없이 흘러들어갔다. 눈동자가 따끔따끔했다. 지해가 순간적인 고통이 누그러지고, 정욱의 그것이 아랫배 깊숙히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확연히 느끼는 순간, 정욱이 다시 페니스를 잡아 빼버렸다. 그리고는 곧 또다시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정말 박는다는 표현이 딱 맞아들어가도록 순식간에 끝까지 깊숙이 찔러넣었다. “아윽! ” 지해가 바둥거리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비명이 줄어든 것 같았다. 그래도 충격으로 경직되어 힘차게 조이는 것은 여전해서 정욱도 아픔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 끝까지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을 하며 정욱은 그 안에서 몇 번 돌려 휘저어줬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지해가 느끼는 포인트만 살살 피해서 돌려주니, 이 녀석이 환장할 듯 몸을 비틀며 각도를 맞추려 밀착해 온다.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잠깐 계속되고, 정욱은 역시나 그 지점만 교묘히 피해 비스듬히 피스톤질을 하기 시작했다. 고통을 상쇄해줘야 할 쾌감이 닿을 듯 말듯 감질나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지해는 그 쾌감만을 쫓느라 말 그대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스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새끼…… 너, 죽…을래……? 똑바로 못해?” “어떡…할 거야?” “…뭘…어떡― 악!” 정욱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포인트를 찔러들어오자 지해는 고개가 뒤로 퍽 젖혀졌다. 숨이 넘어갈 듯한 갈증 뒤에 온 쾌감이라서 그런지 느껴지는 강도가 다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어떡할… 거냐고!” “새꺄… 뭔지 말을… 하악!” “이래도……모른… 척 할 거냐?” 주위를 빙빙 돌던 정욱의 페니스가 다시 한번 그 지점을 집요하게 공격해대기 시작했다. 허벅지 근육은 팽팽하게 긴장되고 발가락은 정신없이 펴졌다 오무라졌다 했다. 견딜 수 없는 희열이 깊은 곳에서 밀려 올라왔다. 미간이 크게 일그러졌다. 고개를 마구 휘저어댔다. 넓은 창으로 밝은 햇살이 파고 드는 침실을 자기 목소리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울부짖음과 박자에 맞춰서 규칙적으로 삐걱대는 침대의 비명 소리가 가득 메웠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오고, 자신이 누군지도 잊을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어가며 절정을 향해 치닫는 동안, 정욱의 움직임이 갑자기 딱 멎었다. “어떡할 거야?” 행위 중이던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한 정욱의 말소리에 지해는 갑자기 정신이 버쩍 들어 앞을 쳐다보았다. 갈망에 시달려 몸부림치던 자신과는 달리 한없이 냉정한 얼굴. 그 녀석의 얼굴과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랗게 발기한 자신의 것이 한계에 다다른 듯 찔끔찔끔 애액을 토해내며 애원하고 있는 꼬락서니. 찬물 세례를 받은 듯, 모든 사고 회로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겨우 이거였냐?” BGM : Even If My Mind Can't Tell You - Montgolfier Brothers 지해는 조금 상체를 일으키며 침대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둔 담배에 손을 뻗쳤다. 정욱이 그 손을 잡아 꽉 움켜쥐고는 다시 바싹 당겼다.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손아귀 힘이 너무 세어 내쳐지지 않는다. “놔, 이거!!!” 지해는 그냥 담배를 포기하고 정욱을 노려보았다. 녀석의 것을 자기 안에서 빼내려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이 녀석은 자신의 양쪽 다리를 꽉 잡은 채 끄떡 하지 않는다. “난 너 못 놔준다.” 이러다가 혹시라도 심지의 불꽃을 완전히 꺼뜨려버릴 생각은 절대 없는지 안에서 조금씩 감질나게 휘저어대며 호소해 온다. 온몸에 힘이 스르륵 빠졌다. 더 이상 뺄 힘도 없어 지해는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옆얼굴을 베갯 속 깊이 묻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흩어져 내려와, 드러난 오른쪽 옆얼굴을 가렸다.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도 얼굴에 한껏 달아오른 열을 미처 식혀내지 못했다. 자신의 지금 표정을 저 녀석에게 안 들키고 싶다. 아직도 채 풀리지 않은 미칠 듯한 욕망 때문에 몸 속 깊은 곳이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며, 마지막 한 박자 남은 강한 자극을 갈구하고 있었다. 제기랄이다. “……놔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난 니꺼야.” 지독하게 갈라져 쉰 목소리가 방바닥에 낮게 깔렸다. 정욱의 것이 안에서 꿈틀대며 포인트를 건드려 짧은 신음이 앙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눈썹이 찡그려졌다. “……윽…네가 애써서 확인하려고……윽……안 해도……돼……하앗!” 아까보다 좀 더 세게 찍어올린다. 다시 발가락 끝까지 긴장하며 다리 근육에 파닥닥 경련이 일고 눈앞이 컴컴해진다. 흥이 깨져 고개를 숙였던 자신의 것이 다시 힘차게 일어섰다. 젠장맞을…. 이런 상황에서 말하기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맨정신으로 맑은 기분으로 또박또박 말하고 싶다. “…내 몸도 니 꺼고……마음도 니 꺼다.” 자신의 페니스를 뜨겁게 쏙쏙 빨아들이는 깊은 느낌에, 계속 초인적인 의지로 억제하며 필사적인 플레이를 펼치던 정욱도 서서히 이성을 잃어갔다. 정욱이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는지 움직임에 깊이를 더하며 밀어올려붙이자, 지해는 흥분에 겨워 상체를 일으키고 두 다리로 정욱의 허리를 찰싹 감아들이며 절정의 접점을 찾아 각도를 맞추었다. 거세게 찔러올려지는 박자에 맞추어 지해는 크게 몸을 흔들었다. 삐걱거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던 침대 전체가 요동을 쳤다. 방바닥을 둔탁하게 쿵쿵 울리고 긁어대는 침대의 소리. 천장 위에 부딪쳤다 흩어지며 섞여 들어가 넓은 공간을 가득 메워나가는 축축한 신음소리. 서로의 몸에서 소나기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땀방울이 몸의 굴곡을 따라 흐르다가 군데군데 골짜기에서 만나 작은 물웅덩이를 이루었다. 앞에는 손끝 한 자락 안 대고도 뒤만으로도 확실히 도달할 수 있도록 지해의 몸은 이 망할 녀석의 손에 완전히 길이 들 대로 들어있었다. “나도 오늘 정말……하악……확실히 알았어……씨발……하윽….” 자신도 모르게 정욱의 목을 두 팔로 바싹 끌어안고 있던 지해가 거세게 물결치는 흥분에 열띤 신음을 뱉으면서 상체를 뒤로 팽팽하게 당겼다. 고개를 젖히던 지해의 달아오른 시야에, 그 순간 문득 땀방울을 툭툭 떨어뜨리면서 미간을 찌푸린 정욱의 입가가 만족한 듯 살며시 말려 올라가는 것이 똑똑히 들어왔다. 끓어오르는 본능에 잠시 밀려났던 이성이 제 궤도를 찾아 돌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튀어올라 분열을 거듭하며 몸 속을 헤집고 뛰어 돌아다니던 핵원자들의 연쇄 반응이 순식간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차분해진 머리가 분석 결과에 따른 원인과 이유를 냉정하게 들이민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이 자기 마음 속 진실인지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제시한다. 결론을 찾아내기 전엔 방황이 용납된다. 인간의 두뇌라는 건 그 정도의 융통성은 허용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결론이 도출되어 각 신경에 전달되고, 인식되고, 납득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이후엔 반항할 수 없다. 저항할 수 없다.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지해가 다시 정욱의 목을 끌어안으며, 무감동한 어조로 귓가에 나즈막이 속삭였다. 점프 직전까지 반 발짝 남겨놓고, 휘몰아쳐 올 오르가즘에의 기대감에 온몸을 경직시키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가던 정욱은 자신을 지탱해 주던 마지막 끈이 예고도 없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낭떠러지로 밀려 떨어졌다. 허무감과 낭패감이 뒤섞인 어이없는 사정. 그 와중에도 자신의 내벽이 정욱이 비참하게 뿜어버린 정액을 빨아마시다 못해, 내벽을 마찰하는 충격에 바르르 떨며 뒤이어 절정을 맞아버린 것도 그 만큼이나 비참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지해의 머릿속을 스쳤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찰나가 지나고 사정의 여운이 자취를 감췄다. “왜냐…?” 겹쳐졌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나서 정욱은 한동안 지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다가, 힘없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손을 꽉 틀어쥐었다. “이유는 좀 말해줬으면 좋겠다.” 행위 뒤의 나른함 속을 헤매며 조금은 사람같은 표정을 보여준다 싶던 정욱이 냉정한 포커페이스를 다시 원상복귀시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던 그의 손아귀 힘이 약간 느슨해진 틈을 타서 지해는 천천히 그 손을 떨궈내고 사이드 테이블 위의 담배갑을 집은 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맥이 빠진 정욱의 페니스가 툭 소리를 내며 튕겨나왔다. 그 길을 따라 제자리가 아닌 곳에 뿌려진 정액들이 조르르 새어나온다. 그 모양을 정욱은 눈쌀을 지푸리며 쳐다봤다. 썰물이 휩쓸고 간 모래사장처럼 정욱의 머릿속엔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로소 똑똑히 입력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원칙을 무너뜨리게 한 이 녀석을 용서하기가 싫어진다. “너도 알잖아. 나 니 손 끝만 닿아도 반응하는 거. 여기랑 여기도 마찬가지더라.” 지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인 뒤, 그 손으로 가슴과 머리를 차례로 가리켰다. 매캐한 담배 연기 때문인지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눈시울 안에 눈물이 가득찬 것 같다. 눈물이 흘러내릴까봐 눈을 깜박할 수가 없다. 이 눈물이 빨리 말라야 할텐데……. 정욱이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지해의 얼굴을 감쌌다. 지해는 그 위로 자기 손을 겹치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정욱은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는 지해의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쓸어주었다. “근데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어.” “……뭔데?” “나도 오늘까진 뭐가 뭔지 잘 몰랐었는데…….” “………….” “…나, 원래 개념없이 막 나가는 놈이잖냐. 인생에 특별한 계획도 없고…. 뭐, 계획 세워봐야 그대로 안 된다는 거 잘 아니까…….” “………….” “……선생님하고도 별 생각없이 자고…. 같은 사내놈을 안든, 사내놈한테 깔리든……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을 해봐.” “빙빙 돌리는 거 아냐. 끝까지 잘 들어, 씹새꺄.” “휴우, 담배 좀 줘봐라….” 정욱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미 흥이 깨진 만큼 둘 사이의 열기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하지만 정욱의 두 다리는 아직도 지해의 몸을 감싸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지해도 비켜라 어째라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도 몰랐는데……나도 자존심이 있는 놈이더라.” 정욱이 풋하고 비웃으며 연기를 뱉었다.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서? 내가 약 좀 올렸다고 존심이 상했다는 거냐?” “아니. 그 말이 아니야……. 쌔끼~! 말을 끝까지 좀 들어보란 말야. 씨뎅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알았어, 하는 정욱을 지해가 다시 물기가 차오르는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해의 진지한 눈빛에 정욱은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새끼는……이주원 새끼는……나한테 목숨을 맡겼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정욱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 녀석이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넘어왔다고 생각했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정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졌다. “너 그 얘기……끝까지 할 거냐?” “내 얘기…….” “웬만하면 하지 마!!” “해야 돼!” 지해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정욱도 생전 처음 느껴지는 서글픈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엉엉 목놓아 울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 뱃속에서 스물거리며 밀려 올라왔다. 서서히 해가 지려는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한층 무르익어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해가 진다. 나름대로 산골인 이 별장 부근은 금세 컴컴해질 것이다. “나한테 목숨을 맡겼단 말이다. 영원히는 아닐 거야. 언젠간 벗어나겠지만…….” “……그게 언젠데?” “씨발! 너, 사람 말 끝까지 안 들을래?” 끝까지 들을 필요나 있을까 싶어 정욱은 그냥 허파를 찌르며 덤비는 담배 연기에 몸을 맡겼다. 골이 울릴 정도로 깊이 빨아들여서인지 머리가 핑 돌며 옅은 구역질이 인다. “지금 당장은 나한테 책임이 있어.” “………….” “나도 잘 몰랐었는데, 오늘 너 만나구서……확실히 뭐가 뭔지 감을 잡았다.” “………….” “알았냐, 씨발아? 그 책임도 나 몰라라 하면, 나는 정말 존심도 없고 밸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놈이야.” “………….” “너 아니라 그 누구한테라도 사랑받을 가치도 없고, 사랑할 자격도 없는 하찮은 인간이 되어 버린단 말이다!!” 지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욱도 코끝이 시큰하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당혹스러웠지만 이상한 노릇은 아니었다. 이 녀석을 사랑한다는 느낌이 지금만큼 강하게 구석구석을 채웠던 적이 없었다. 온 몸의 세포와 마음의 끝자락까지 전부 벌떡 일어나 지해를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너한테는 정말 염치도 없어. 다치게 해서 미안하고 전부 다…….” “………….” “그래도 난 널……사랑한다, 임마.” “………….” “……너도 그렇다면……날 이해해 줘야 돼.” “――!” “그 새끼……제 자리로 돌려보내고……다시 돌아올게.” 정욱은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 자신도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다. 일단 평정심을 되찾자 끓어올랐던 마음이 냉각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가슴속에 얼음이 가득 차 올랐다. 스스로에게 너무나 익숙한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마음은 상쾌했다. 차라리 홀가분했다. “니 말 무슨 뜻인지 접수는 됐어. 하지만….” “………….” “이해는 해줄 수가 없다.” “――!!” “나도 이번에 많이 걸었었어. 정말 많이 내던졌다….” “………….” “더 이상은 안돼.” “………….” “일단 가면, 다시 오는 건 없는 거야…….” “――!” “그리고 너도 이미 알아챘겠지만, 난 한번 마음 떠나면 그걸로 끝이야.” 마지막까지 둘을 지탱해 주던 최후의 보루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아 지해는 정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싸늘하고 이지적인 얼굴. 저것도 자신이 익히 알고, 존중하는 저 녀석의 모습이었다. 끝까지 자기가 사랑하는 강정욱 그대로의 자세를 잃지 않아주는 게 섭섭한 와중에도 왜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지 자신도 몰랐다. 이 기분을 이 녀석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갈 거냐?” 이미 지해의 대답을 알고 있는 듯, 정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맨 마지막에 잠깐 치밀어오른 격한 감정(분노인지 슬픔인지 애정인지 알 수 없는)을 다잡아 추스르고, 정욱은 점점 가라앉는 냉철한 기분에 빠져들며 스스로 만족해 했다. 지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에도 정욱의 조각같이 싸늘한 무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이 녀석은 탄탄한 구릿빛 알몸을 바위처럼 우뚝 버티고 자신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럼, 이걸로 끝이다.” “……그래….” “안에다 그냥 사정한 건 미안해. 고의는 아니었어.” “……아니….” “아까 너 약 올린 것도 미안하고…….” “………….” “…얕은 수를 써서 부끄럽다.” “………….” “나 이해해주긴 바라지 않아.” 저런 말을 하면서 마치 형식상의 의례적인 인사를 하듯이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저 새끼는 대체 뭘로 만든 인간일까 하고 지해는 언뜻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저 녀석을 이렇게까지 몰아간 건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인지도 모른다. “괜찮아. 상관없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 지해가 웃으며 대답하자, 정욱의 냉정한 눈에 아주 잠깐동안 빛이 스쳐갔다. 그리고 역시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 근육이 살짝 뒤틀렸다. 잘 고정시켜놓은 팽팽한 힘줄들이 순간적으로 주인의 통제를 잃은 것처럼… 지해는 그걸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깎아놓은 조각처럼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스쳐간 웃음의 그림자. 비웃음이 됐든, 냉소가 됐든… 뭐든지 간에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도 신기하고 이상하고 잡스런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 놀랄 일도, 놀라야 할 일도 없더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런 군더더기 말은 안 하니만 못한 것이다. 이 녀석의 입장에서나 자신의 입장에서나, 그런 신기하고 이상하고 잡스런 일을 몰고 온 원흉은 전부 다 자신이니까. 나는 충분히 이 녀석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데,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란 건 원래 없는 건데, 왜 이 녀석은 나를 이해 못해준다는 건지 조금 섭섭하다는 점만 뺀다면, 이런 나를 사랑해 주고, 끝까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아준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았다. 스스로도 그 이유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안타까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안타까울까 곰곰히 되씹어 보았다. 아무 갈피도 안 잡힌다. 그저 후회없을 만큼 맘껏 사랑하지도 못 했는데 그냥 이렇게 얼떨결에 끝나버리는구나 하는 서글픔. 그것 말고 다른 건 아직 잘 모르겠다. 뭔가 또 있는 건가. 그런 건가? “너 뒷처리해야 할 텐데.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냐?” “…혼자 할 수 있어.” 가슴을 저미면서 지나는 후회에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땐 정욱은 이미 등줄기를 곧게 피고, 절룩이는 오른쪽 다리를 살살 끌며 문가로 다가가고 있었다. “차 다시 오라고 전화할 테니까 오는 대로 서울로 출발할 거다.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세 시간 안에 올 거야. 준비하고 있어.” 정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나섰다.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많이 막힌다고 말하며, 기사 아저씨는 트렁크에서 중간 크기의 가방 하나와 백화점 슈퍼의 마크가 찍힌 묵직한 비닐봉지 두 개를 꺼내 집안에 들여놓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직 밖에 나오지 않은 정욱을 기다리느라 지해가 뜸을 들이자 기사는 지금은 학생 혼자 올라가는 거라고, 정욱은 주말을 여기서 보내고 온댔다고 말했다. 차가 격자무늬 대문을 나설 때쯤 지해는 뒤를 돌아보았다. 1층 거실 창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곧 구불구불하던 길이 꺾어지며 그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산기슭 중턱에 위치한 그 별장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해는 계속 눈을 떼지 않았다. 엄지손톱으로도 가릴 수 있을 만큼 집채가 작게 보였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 녀석이 그대로 서서 굽어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시선이 떠나지 않았다. 초여름 저녁의 신선한 내음이 물씬 풍기는 산길과 강가와 논밭을 지나 「어서 오십시오. 서울입니다」 하고 반기는 밝은 네온사인들과 차량의 행렬 속에 합류했을 땐 이미 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아까부터 가슴 속을 헤집던 안타까움의 정체가 뭔지 그 불빛 속에서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것도 같아 지해는 계속 그 꼬리를 잡고 놓지 못 했다. 그 안타까움의 정체가, 끝까지 결국은 서로 ‘나’만을 고집했던 자기들 두 사람이 채 완성시키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한 아쉬움임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꽤나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 여기까지로 1부 완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2부 완결편은 1주일 안에 (수정을 거쳐ㅠㅜ;;) 한꺼번에 게시됩니다. [장편] Exit Music 2부 (上) #12. I TRY I believe that fate has brought us here 난 운명이 우리를 이리로 몰고 왔다고 생각해 And we should be together babe 그러니 우리는 함께 있어야만 하지 But we're not 하지만 그렇지 못해 I play it off, but I'm dreaming of you 난 괜찮은 척 하지만 네 꿈을 꿔 And I'll keep my cool, but I'm feignin'' 냉정을 유지하겠지만 다 가장이야 I try to say goodbye and I choke 안녕이라고 말하려는데 목이 메이고 Try to walk away and I stumble 멀어지려고 하는데 스텝이 꼬여 Though I try to hide it, it's clear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어 My world crumbles when you are not here 네가 없기 때문에 내 세상이 무너진다는 걸 I may appear to be free 난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일지 몰라도 But I'm just a prisoner of your love 사실은 네 사랑 안에 갇혀있어 And I may seem all right and smile when you leave 네가 떠날 때 괜찮은 척 웃기까지 했지만 But my smiles are just a front 그 웃음은 겉치레일 뿐이라구 Just a front. 그저 겉치레일 뿐이야 (I Try - Macy Gray)←CLICK! TV 속에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갈색머리의 소년이 있다. 지중해의 새파란 하늘이 창 밖으로 보이는 흰색 토담집 안에 역시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놓은 뭉툭한 탁자와 의자에 긴 다리를 주욱 뻗고 느긋하게 앉아서 굵은 토마토 껍질 조각이 그대로 얼기설기 보이는 파스타를 포크로 휘저으며 재밌는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놀고 있다. 창 밖에서 목청껏 부르짖는 아마추어 테너의 이태리 민요가 흥겨운 기타 소리와 함께 들려오고, 맑은 햇살을 살짝 빗겨 앉은 소년은 하얀 민소매 티와 무릎 위까지 오는 흰색 반바지에 온통 새빨간 토마토 소스를 이리저리 튀고, 입가에 잔뜩 묻혀가면서도 좋다고 헤실거리며 웃는다. 그 동안 내내 카메라는 어린애처럼 자유분방하게 온갖 엽기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자세로 파스타를 먹는 소년의 모습을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듯 빙빙 돌며 잡는다. 소년이 일어나서 토마토 소스가 잔뜩 묻은 티셔츠를 벗다가 카메라와 눈이 딱 마주치자 카메라를 향해 웃으면서 찡긋 윙크를 하고 얼른 티를 벗어서 카메라에 씌워버린다. 맨몸이 된 소년의 상체가 화면 가득 잠깐 잡힌 다음, 카메라가 티셔츠를 뒤집어쓰면서 화면이 화이트로 페이드아웃되다가 중간중간 붉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화면 전체가 붉게 물든다. 그 붉은 화면에 은색의 작은 핸드폰이 클로즈업되면서 광고 멘트가 나오려는순간, 광고가 방송되던 20초 남짓한 시간 내내 TV 화면에 못박힌 듯 눈을 못 떼던 또다른 소년은 불현듯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의 버튼을 눌러 채널을 바꾸어버린다. 바뀐 채널에서는 아까의 그 갈색머리 소년이 육교를 단숨에 뛰어 올라가 건너서 내려오는 것을 빠르고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교차 편집한 광고 필름이 나온다. 화면 가득 숨을 헐떡거리는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긴 생머리의 예쁜 여학생에게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고는 홱 뒤돌아 가버린다. 뒤돌아서며 “예스~!” 하고 웃는 소년의 얼굴과 함께 ‘젊음은 도전이다 어쩌구저쩌구’ 하는 광고 멘트가 나온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드링크제의 광고다. 또다시 채널을 바꾸자, 이번에는 아까의 그 핸드폰 광고가 이미 시작되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TV 속의 지해가 새빨간 토마토 소스가 잔뜩 튄 티셔츠를 벗어 붙이는 순간, 리모콘의 POWER OFF 버튼이 눌러져 TV가 꺼지고 넓은 거실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TV를 끄고 잠깐 멍하게 앉아 까맣게 텅빈 60인치 짜리 PDP 화면을 쳐다보고 있던 정욱은 손에 쥔 리모콘을 벽에 힘껏 냅다 던졌다. 하얀 벽에 약간 긁힌 자국이 나고 벽에 세차게 부딪친 리모콘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은 대리석 바닥에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이것 봐. 여기 대중문화면 헤드로 『꽃미남 이미지 전격 세대 교체』 얘, 얘. 지해야. 여기 좀 봐라. 니 얼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 어머, 형섭아. 이 녀석 그새 자는 거 좀 봐. 어떻게 된 게 얘는 요새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잠이야.” “실장님. 지해 어제도 거의 잠 못 잤어요.” 로드 매니저 형섭이 운전을 하면서 백미러 너머로 졸고 있는 지해를 걱정스럽게 넘겨보며 말했다. 형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해까지 포함해 모델 세 명의 스케줄 관리와 보조를 맡고 있었지만, 데뷔 7개월이 조금 지난 지금, 부쩍 일이 많아져 눈코 뜰새 없이 바빠진데다가 남들처럼 따로 도와줄 사람도 없는 지해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왜? 어제 밤 새는 스케줄 없는 것 같던데. 나이트 갔었어?” “아니요.” “또 작곡한다고 컴퓨터 앞에서 밤샜대?” “아니, 저기 토요일날 하는 쇼 있잖아요. 새로 런칭하는 수입 브랜드요. 그 이름이 뭐더라, 그게….” “A. J. 와일리?” “아, 네. 그거요. 어제 리허설 했는데요….” “근데 왜?” “남경수 원장님이 디렉션 맡았거든요. 근데 지해 워킹이 서툴다고 자꾸 지적을 해서……, 그래서 어젯밤에 태준이랑 계속 연습했대요.” “어머, 왜 그랬대? 지해가 워킹이 뭐가 어때서?” “그냥 꼬투리 잡는 거 있잖아요. CF만 많이 나오면 다 톱모델인줄 아냐 그러구, 기본이 안 되어 있다 그러구, 체격도 왜소하다고 대놓고 뭐라 그러구… 암튼 말이 좀 심하더라구요.” “그 인간 진짜 웃긴다. 그 개자식! 우리집 애들 하는 일마다 딴지를 걸어, 증말! 만나기만 하면 죽었어, 그 새끼~! 토요일날 쇼 끝나고 내가 손 좀 봐줘야지. 우씨~!!!” “실장님…… 시끄러워요….” 지해가 눈을 비비면서 등을 기대고 있던 시트에서 몸을 조금 일으켜 앉았다. 밝은 연보라빛의 화사한 면니트 스웨터 때문에 거무스름한 눈가와 풀죽은 얼굴빛이 더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야, 너 안 잤냐?” 형섭이 다시 백 미러로 훔쳐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잠깐 졸다 말았어. 실장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아니, 요것이~! 흠…, 너 그 자식한테 그딴 소리 들었다고 밤새 잠 못 잤니?” “――――” “이 동네 살벌하다고 내가 몇번 말했냐. 원래 뜨는 놈 꼴, 옆에서 참고 못 본다구. 그 개자식은 내가 죽여줄 테니까 넌 신경쓰지 마, 엉?”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야. 남경수 그 자식이 학원 나부랭이나 하면서 눈먼 돈 긁어모으는 주제에, 감히 나를 밟을라구 수작을 떠는 모양인데, 내가 절대 그냥 안 놔둘 거야.” “――――” “――――” “진짜죠?” “…그래, 이것아.”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던 지해가 갑자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바싹 다가오자 박실장은 슬며시 몸을 뒤로 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요! 당장 가요! 우리 가서 다 쑥대밭 만들고 조져 놔요~!! 형섭이 형, 빨리 차 돌려. 형도 도와줄 거지, 엉?” 주먹을 불끈 쥐고 휘두르며 열심히 오버하는 지해의 모습에 박 실장은 제 풀에 지친 듯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아~ 이 자식!” “네?” “넌 누가 길렀길래 이렇게 귀엽냐, 엉?” “실장님이요.” “아휴, 말귀도 잘 알아먹고 이뻐 죽겠다니까.” “한결같이 이뻐해 주시기만을 바랄게요.” “말귀만 잘 알아먹나? 말도 아주 잘 해요 또.” 박실장은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지해의 머리를 몇 번 부비부비해주고, 읽던 신문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지해는 모처럼 들었던 단잠만 달아나게 만들어 놓고는 그걸로 자기 볼일 다 본 듯이 구는 박 실장이 조금 괘씸해졌다. “저… 실장님.” “어?” “어떻게 혼내주실 건데요?” “――?” “토요일날 죽여논다면서요. 그 남경수 원장님이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뭐, 그야.” “지금까지 실장님이 혼내준다고 하셨던 사람들처럼 처리하실 거죠? 그죠?” “――그치 뭐.” “궁금해서 그래요. 그 방법이….” “――――” “지금까지 어떻게 하셨는지 제가 잘 모르잖아요. 가만 안 놔둔다는 사람들 허벌나게 많았지만……. 죽여논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 “과연 그동안 그걸 다 어떻게 처리하셨을까. 졸라 궁금하네 진짜.” 지해는 아주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까지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저도 궁금해요, 실장님.” 웃음을 참고 묵묵히 운전에 열중하던 형섭이 킥킥거리면서 백미러 너머로 말을 걸었다. “맞아요. 저희는 실장님의 노하우가 알고 싶은 거라구요.” “실장님, 당신의 ‘죽이는’ 방법을 보여주세요~!!!” “궁금하다, 궁금하다, 궁금하다~!!!!!” “공개하라, 공개하라, 공개하라~!!!!!” 교통체증 속 답답한 차에 갇힌 지루함을 이걸로 풀기라도 할듯 둘이 광분하고 발까지 구르자 박 실장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이것들이 증말 혼날라구!!!! 느이들 조용히 못해?!!!!” “――――” “형섭이 너는 운전이나 잘 하고~! 너 이 새끼 그렇게 장난치다 사고나는 거야, 임마! 글구 지해 너는 이 신문이나 좀 봐. 허접한 스포츠 신문도 아니고 4대 일간지 대중문화면에 니 얼굴 대문짝만하게 나온 거 안 보이냐, 엉?” 지해는 박실장이 ‘팍’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들이대는 신문을 엉겁결에 건네 받아읽기 시작했다. 『꽃미남 이미지 전격 세대 교체 - 10대들의 기호 변화 반영 섬세하고 단정한 모범생. 우수에 젖은 고독한 눈빛. 강렬한 카리스마의 반항아. 이 모두 우리 시대를 강타했던 꽃미남들에 대한 수식어였다. 순하고 서글서글한 이미지로 이웃집 소년같은 친근감을 유발하거나, 여리고 화사한 분위기로 모성 본능을 일으키거나, 카리스마 넘치는 터프함으로 소녀팬들의 동경을 부르거나 하던 기존의 도식적인 꽃미남 이미지가 달라지고 있다. 이제 새로운 세대의 꽃미남들에게 덧붙여진 수식어는 ‘관능적’, ‘색기’, ‘도발적’ 등으로 지금껏 남자 연예인들을 지칭하던 말들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며 좀더 구체적이다. 여성적이라거나 중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남자다움 자체를 무기로 하여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관능과 섹시함’을 대중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 세대 교체의 대표주자는 새롭게 CF 스타로 떠오른 김지해.(사진. 17세. 성환예고 1년). 모 이동통신 광고에서 보여줬던 나른한 색기발랄함이 부각되어 데뷔 몇 달만에 CF계의 강자로 떠올라 10대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10대를 주 소비층으로 하는 각종 상품 광고주들의 지목 1순위로……』 “우와, 이거 엄청 골때린다. 푸하하하하!!!!” “웃지만 말고 잘 보란 말이다. 너는 그냥 자연스럽게 너 자체를 보여주는 건데 대중은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라구. 근데 이걸 네가 네 주무기로 삼아서 의식하기 시작하면 넌 망하는 거야. 남자애가 일.부.러. 색기를 날리면서 도발하려고 한다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냐, 엉?” “――――” “이게 연예계야. 네 이미지가 이렇게 찍힌 이상…… 뭐, 사실 모델로서 나쁘지는 않다마는…… 특히 스캔들 같은 거는 절대적으로 금물이야. 네 일거수 일투족이 저 잣대로 평가된단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넌 정말 남보다 훨씬 조심해야 된다. 응?” “――네.” “학교 생활도 잘 하는 척 해야 돼. 이제 인터뷰도 본격적으로 심심찮게 들어올텐데. 그 동안에는 세강 텔레컴이랑 계약 때문에 일체 신상 공개 못 하게 되어있었지만, 이제 계약 기간도 끝나가니까 그동안 막혀있던 매스컴이 관심을 보일 거란 말이야.” “――네.” “형섭아, 지해 이번 학기에 학교 며칠이나 갔니? 전처럼 출석일수 모자라서 전학 가라고 또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학교에 또 한번 찾아갈까?” “실장님!” 지해가 지금까지 깔깔거리며 장난스럽게 맞받아치던 얼굴을 팍 굳히고 무겁게 말을 잘랐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박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내가 왜 형섭일 네 전담으로 붙여줬는데! 이제부턴 정말 본격적으로 ” “이놈의 똥통 학교는 원래 전교생이 다 개판 5분전이라 괜찮아요. 그리고 전에 그 세강고에서도 출석 때문에 전학 당한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그냥 이유가 있어요. 너무 알려고 하지 마세요.” “왜니? 알면 다치니?” “네. 알면 크~~~게 다치세요.” “…이 자식이 점점….” “제가 다 잘 알아서 할게요. 그리구 저 그렇게까지 뜨지도 못할 테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두 돼요.” 지해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감았다. “야~!!!!! 너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어둑어둑한 검도장에서는 혼자 기합을 지르는 소리와 날카로운 칼날이 바람을 쌩쌩 가르는 소리만이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호구 속에서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정면과 좌우로 내려베기를 연습하는 정욱의 모습을 한켠에 서 있는 지푸라기 장대가 홀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장대는 허공을 향한 베기 연습이 끝나고 나면 최종 마무리로 토막토막 잘려나갈 예정이었다. 좌우로 올려베기를 할 때, 평상심을 벗어난 듯 칼끝이 자꾸 흔들리는 것을 느낀 정욱이 계속 흔들리는 칼끝에 신경을 쓰다보니 안정된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허공을 베고 난 후 허리가 약간 뒤틀리는 느낌에 정욱은 얼굴을 찌푸렸다. “타아앗!!” 더욱 맹렬한 기합 소리와 함께 지푸라기 장대가 수평으로 퍽퍽 잘려 마루 바닥에 툭툭 나가 떨어지면서 연습이 끝났다. 호흡을 고르며 잠시 멈추어 있던 정욱은 허리춤의 검집을 향해 칼을 꽂았다. 엇,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붉은 핏방울이 투두둑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검을 검집에 꽂다가 손을 베었나 보다. “강정욱!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정욱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언제 들어와 있었는지 사범이 한 구석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을 쓸 때 무슨 잡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냐?!” 정욱은 두발을 모으고 사범 앞에 조용히 고개숙이며 차려 자세를 취한 뒤 호면을 벗었다. “칼끝이 너무 들렸더라. 칼날 각도도 안 맞았어. 멈춘 상태에서 자세 점검을 했어야지. 그냥 무턱대고 연속으로 휘두르니까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 아니야?” “…잘못했습니다.” “당분간 진검眞劍은 금지야. 내가 봐서 된다고 할 때까지 안 돼.” “――――” “눈동자가 어지러워. 잘못하면 사고 난다.” “사범님….” “말로 할 때 들어라. 너 계속 컨디션이 영 안 좋아. 심리적으로도 불안해 보이고. 네가 더 잘 알 것 아냐. 진검으로 수련하고 싶으면 마음부터 다스리고 와.” “――――” “이게 지금 동네 아이들 칼싸움인줄 알아? 어디 감히 검에다가 화풀이를 하려고 들어?!” “――――” “너 왜 이렇게 됐냐? 안 그러던 녀석이!” “죄송합니다.” “그만 가봐. 앞으로 일주일간 대련도 금지다. 초보자들 자세나 지도해.” “네.” 정욱은 멀쩡한 오른손에 호면을 받쳐 들고,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손의 주먹을 꽉 쥐면서 탈의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범이 정욱을 다시 불러세웠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어. 지금 그 상태에서 네가 아무리 고단자라도 초보자들 못 맡긴다.” “――――” “내가 왜 이러는지 알지? 지금 네 모든 문제가 너 자신에게 있는 거다. 외적인 문제도 물론 있겠지만 극복하는 건 너 스스로에게 달린 거야.” 정욱은 대답없이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언뜻 눈에 들어온 창밖엔 컴컴한 12월의 초저녁 하늘 위로 깎아놓은 손톱만큼이나 얇고 파리한 초생달이 보였다. 줄줄 흐르던 땀이 식고 나서 헐렁한 도복 틈으로 선뜻한 한기가 밀려 들어왔다. 벌써 겨울이었다. BGM : This Masquerade - Lisa Ono ←CLICK! “수시 모집으로도 서울대 법대에 붙는 놈이 있긴 있구나.” “설마 학생 뽑을려구 만들어놨겠지 그럼 하나도 안 붙이고 다 떨어뜨릴까….”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잖아.” “……뭔데 또? 그 인간 신기한 거 이제 알았어?” 지해가 감았던 눈을 뜨며 몸을 약간 움직였다. 주원은 팔베개하듯이 지해의 목 뒷덜미를 받치고 있던 오른팔을 약간 굽혀 지해를 품으로 끌어들였다. 지해가 다시 눈을 감으며 옆으로 몸을 틀어와 주원의 가슴에 기대는 것처럼 되었다. 주원은 손으로 지해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마치 큰 애기 하나 안고 있는 엄마같은 자세였다. “야, 임마~ 니네 형 얘긴데 남 얘기하듯 하냐?” “형이라도 신기한 건 신기한 거지.” “하긴…… 그 자식, 합격한 거 확인하고 눈썹도 까딱 안 했대매?”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긴 누구겠냐. 우리 엄마지. 니네 이모가 엄청 자랑하셨나 보던데? 1학기는 그냥 학교 생활 제대로 하고, 2학기부터 사법고시 공부 시작한다고 그랬다더라?” “……별 소릴 다 옮기고 다니신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하다. 고3때 별 생난리 다 치고 결국은 수능 점수 안 나와서 애태우는 놈 엄마한테 꼭 그런 자랑을 하고 싶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잘난 조카 자랑의 내막에는 다른 사정이 숨어 있을 것이다. 바로 자기 아들 자랑. 특유의 체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1년동안 피눈물나게 공부한 준석은 막판에 피치를 올려 수능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본 시험 중에 수능을 제일 잘 봤다니 게임 끝난 셈이다. (원래도 공부를 잘 했지만, 준석도 지해와 마찬가지로 지후한테 치어서 공부 잘 하는 애 취급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서울대 의대에 지원해 뒀는데 충분히 안정권에 있는 성적이라 합격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모가 동네방네 자랑할 만도 하다. “그래. 암튼 니네 집은 경사났다. 형은 무사히 서울 법대 붙어, 동생은 스타 돼서 돈을 긁어…….” “스타는 무슨 얼어죽을.” “맞잖냐. 아까도 기집애들이 알아보고 꺄악꺄악 거리던데.” 지해가 등을 보이며 돌아눕자 주원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보름만에야 편한 상태에서 얼굴 한번 제대로 보는 건데 이 녀석은 아까 와서부터 계속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다. 그나마 더 이상 안 되겠길래 자기가 직접 가서 억지로 납치하듯이 태워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도 역시 그냥 흘려보냈을 것이다. 이제 길에 나가면 지해를 알아보는 애들이 제법 있어서 방해 안 받고 호젓하게 보기 위해선 이렇게 집에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주원은 몇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눌러 참고, 뒤돌아 벽을 보고 누운 지해의 어깨랑 팔뚝만 두꺼운 후드 티셔츠 위로 더듬더듬 만져주었다. “꼬집지 마. 아퍼.” “이게 꼬집는 거냐?” “난 연약하기 때문에 그 정도 건드리는 것도 꼬집는 거야.” “지랄~!” 기분이 나빠진 주원이 지해의 어깨를 픽 밀었다. 별 저항도 없이 그대로 얼굴을 파묻고 엎어진다. 뒷덜미를 만져 보았더니 피곤한지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있다. 측은한 생각이 들어 엎어놓은 채로 올라타고 앉아 꾹꾹 눌러 지압을 해주었다. “너 전에는 피곤하면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도 하고 별 쇼를 다하더니 요새는 요가도 안 해?” “……집에 들어가면 잠 자기 바뻐……아아, 아퍼. 거기 건드리지 마.” “…너 종아리 근육도 엄청 뭉쳤다.” “아, 씨발. 드럽게도 아프게 만지네.” “너 이거…… 다리 근육이 왜 이렇게…… 뭉치는 줄 아냐? 응응을 너무 안 해도 몸에 긴장이… 쌓여서 그렇댄다…… 왜 이러구… 사냐, 임마.!” 주원이 원망을 담아 종아리를 힘있게 꾹꾹 주무르며 말했다. 아프다고 쟁쟁 대던 녀석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괜히 이상해서 몇번 뒤흔들었더니 끙, 소리만 내고 더 이상 반응이 없다. “……지해야…… 펠라 해줄까?” “………….” “해줄게. 이쪽으로 뒤집어 봐.” 주원이 지해의 두 다리를 잡고 뒤집으려고 하자, 지해가 슬며시 밀치고 일어나 베개를 양팔과 양 다리로 꽉 끌어안고 타이트하게 책상다리를 하며 앉았다. 주원의 눈에는 그게 무의식중에 방어자세를 취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다. 자신을 온몸으로 거부하면서도 말은 또 이렇게 한다. “……왜? 응응 하고 싶어?” 기분이 더 나빠졌다. 주원은 긍정도 부정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사실 한지 너무 너무 오래 돼서 그게 언제적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상황이 어디 땡길 상황인가 말이다. “하고 싶음 하자.” 지해는 베개를 옆에 내려놓고, 후드 티를 벗으려고 포즈를 잡았다. 주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쯤 올라간 후드 티를 도로 끌어내려줬다. “안 해.” “엥? 웬일이냐?” “………….” “니네 집이라고 가리고 그러지 않았었잖아. 저번때도 아랫층에 식구들 다 있는데 그냥 했 ” “내가 너 의무방어전 치르게 할 일 있냐?! 동정박 타냐, 너 지금?!” 지해가 일어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찬 바람이 슈웅 하는 소리를 내며 휘몰아쳐 들어온다. 얼음날 같은 차가운 기운이 살갗을 때려 정신이 버쩍 들었다. 지해는 담배를 찾아 바지 주머니 위를 더듬더듬거렸다. 생각해 보니 입고 온 파카 주머니에 있다. 문 옆의 옷걸이에 걸린 파카를 향해 걸어가려는데, 주원이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너 똑똑히 말해. 나랑 하는 거 싫지?” “……또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야, 나도 사내 새낀데 그거 마다하게 생겼어?” 지해는 질렸다는 듯이 가던 걸음을 되짚어 와서 그대로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이런 거 가지고 실랑이하는 것도 이제 정말 지겹다. 주원이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는 동안, 문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렸어, 하고 주원은 냅다 소리를 질렸다. 문이 조심스레 빠꼼히 열린다. 어머니다. “얘, 주원아. 이 뚜껑 좀 따봐라.” 조심스럽게 지해의 눈치를 살피다가 주원에게 고추가루가 든 유리병을 내민다. 침대에 누워 있던 지해는 팔을 뒤로 빼서 기대고 주춤주춤 일어나 앉았다. “아~ 왜애~?!” “안 열려서 그래. 어떻게 잘못 닫혔는지 암만 해도 안 돼.” “아빠한테 해달래지!” “벌써 갔다왔어. 안 되신댄다.” “아빠가 이게 안 될 리가 있나?” 주원의 손이 뚜껑에 잠깐 닿는 것 같더니 뚜껑이 쉽사리 열렸다. 매캐한 냄새 때문에 주원은 고개를 돌려 재채기를 했다. “아빠가 이제 그게 안 된단다. 이제 늙어갖구 손목 시큰해서 힘 못 쓰시잖아. 어떡하면 좋겠냐, 이 엄마는? 아들이라고는 너 하난데. 이제 니가 엄마 책임져.” “그러게 아들 좀 줄줄이 낳지. 왜 이렇게 내 어깨에 짐을 지우시나?” “아이구, 이노므 자식 말하는 것 좀 봐. 지해야, 이 자식 어떡할까?” “말 안 듣는 애는 그냥 몇 대 패주면 돼요.” 괜히 편한 척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지해와 주원 어머니의 대화는 어색하기만 했다. 주원조차도 어머니한테 무슨 낌새를 눈치채게 하기가 싫어 일부러 더 명랑을 가장하고 있었다. “닥쳐, 이 새꺄. 그럼 너부터 좀 맞아야 돼. 엄마, 저녁에 뭐해줄 거야?” “글쎄, 지해가 얼큰한 거 좋아한대서 해물 전골 하는데 괜찮지?”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저 부엌일 잘해요.” 지해가 당장이라도 부엌에 내려갈 듯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니야. 아니야. 쉬어. 오랜만에 왔는데….” 여전히 지해에게 앙금이 남아있는 듯 주원 어머니는 다시 편치 않은 시선을 보내더니 서둘러 방을 나섰다. “고춧가루를 얼마나 안 썼으면 뚜껑이 다 안 열리냐….” 어머니가 나간 방문을 멍하니 쳐다보며 지해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우리집 식구들 매운 거 잘 안 먹잖아.” “………….” “솔직히 비린 것도 잘 안 먹는다.” “………….” “순전히 너 때문에 ” “그러실 필요 전혀 없다고 말씀 드려줘. 그냥 예전처럼 대해 달라고. 내가 정말 불편해서 그래.” “……이미 예전이 아닌데…… 그게 되냐….” 씁쓸한 눈빛을 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픽 웃으며 한숨을 쉬는 주원을 지해가 잠깐 바라보았다. 할말 많은 둘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잠깐 마주쳤다. “이리 와.” 주원은 조용히 지해의 옆에 가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둘은 그냥 서로 기댄 채로 한참동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지해야…. 너…… 뭐든 싫으면 싫다고 시원하게 말해도 돼. 나 이제 괜찮아. 치료 받으면서 많이 좋아졌어. 너한테 계속 이렇게 매달리면 나도 별로 득될 일 없다는 거 안다구 이제….” “………….” “의사 말이, 내가 너한테만 집착하면 난 한 발짝도 더 못 나가고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게 된댄다. 너는 너대로 못 잡고, 악순환이래.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애.” 지해가 오늘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을 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지만, 주원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으로 그 표정이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렸다. “…싫은 거 아니야.” “………….” “……안 싫어.” “………….” “싫을 리가 있냐.” 지해는 헛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그냥 얘기를 여기서 끝내 버리고 싶어서 주원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자기 가슴에 묻게 했다. 이런 소모적인 상황 정말 지친다. 이 이상 더 마음을 줄 수 없는 스스로에게도 이미 지친지 오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괜찮다고는 말하고 있다지만, 정말로 그런 걸까? 진짜 괜찮다면 막상 안겨오면서 이렇게 꽉 쥐고 안 놓을 것처럼 바싹 매달리진 않을 거다. “오늘 자고 가라.” “니네 식구들 다 있는데 무슨 소리야~!!!” “괜찮아. 아까 엄마가 너 오랜만에 왔는데 재워서 보내라구 그랬어.” “……생각해 보구….” “생각은 무슨 생각?!” “………….” “너 얼굴 팔려서 다른 데 갈 수도 없잖아. 그냥 집에서―” 주원이 말끝을 흐리는 사이에, 주머니에서 꺼내 탁자 위에 대충 놔둔 지해의 핸드폰이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다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여보세요…… 네, 그런데요…… 앗~! 안녕하세요……그럼요. 기억하죠…… 우와, 영광이에요……… 저야 뭐, 잘 지내죠…… 영화 촬영 때문에 호주 가셨다고 들었었는데…… 아, 뉴질랜드요?…… 하하, 누구야, 유언비어 퍼트린 사람이~!…… 벌금 내라고 그래요…… 진짜, 얼마 받을까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넉살좋게 웃으며 전화를 받는 지해를 주원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제법 프로 냄새가 난다. 귀찮다, 힘들다, 피곤하다, 그저 그렇다, 말로만 그러면서 지금 하는 일을 꽤나 즐기는 것 같다. 점점 더 멀어지고만 있다. 이 녀석은. 목숨을 걸고 어거지로 잡아두었는데, 그저 묵묵히 자신을 참아준다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도 없다. 하다 못해 어둠 속에서 몸을 섞을 때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가끔 절정에 도달하면 정신 나가서 다른 어떤 놈 이름을 열심히 불러제낀다. 자신도 들은 체 안 했고, 이 녀석도 절대로 티를 안 내는 걸 봐서 깨닫고 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가끔 자신이 견디다 못해 그 놈 이름이라도 꺼낼라치면 입을 꽉 다물고 외면을 해버리니까 아무 얘기도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저 서로 암묵적인 동의 하에 너무나 많은 걸 덮어두고 안 보이는 체 하며 질질 끌고만 있는 관계. 언제 제풀에 툭 끊어져버릴 지 모르는 얇디 얇은 끈 한 자락. 지금 둘 사이에 남아있는 전부였다. “몇 시 도착이라고?” “네 시 반.” “근데 왜 나까지 가야 되는 거냐?” “나는 면허증 없잖아.” “좋아. 그럼 너는 왜 가야 되는 건데?” “아무도 안 나온다고 날더러 나와달래.” “넌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국회의원 따님이 모처럼 방학이랍시고 귀국하는데 집에서 아무도 안 나온다는 시나리오가 가당키나 해?” “일부러 어른들 몰래 예정보다 이틀 땡겼다던데. 오자마자 집에 끌려가기 싫다고 살짝 와달라잖아.” “짜식, 알면서 속아 넘어가주냐? 너 그 기집애 말은 아주 잘 듣는다.” “시끄러.” “너도 안 간다고 할 순 없고 혼자 가기 싫으니까 나까지 끌어들이는 거지? 나쁜 자식. 이 귀찮음은 나중에 열 배 백 배로 갚아주마.” 진녹색 아우디 TT 운전석 문을 벌컥 열면서 민혁이 평소답지 않게 짜증을 부렸다. 서울에 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오자마자 뭐 부려먹듯이 해대는 정욱이 얄밉기 그지 없다. 도착하고 나서 곧 전화했을 때는 왠일이냐,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냐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더니, 그 수다스럽고 정신없는 박명주 기집애는 직접 공항에 모시러 나가기까지 한다. 정욱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히터가 제대로 돌기 전의 차 안은 바깥보다도 더 춥게 느껴진다. 얼마 달리다 보니 시트 속의 열선에서 열기가 돌기 시작해 등과 엉덩이가 뜨끈하게 데워졌다. 이미 히터 때문에 텁텁하고 훈훈해진 공기로 충분한데, 등줄기에서 머리 끝까지 뻗치는 열은 별로 달갑지 않다. “이거 좀 꺼줘.” “뭐?” “시트 열선. 너무 뜨거워.” “너무 뜨거울 정도는 아닐 텐데.” “아니. 펄펄 끓어. 거의 온돌방 수준이야.” “잠깐만.” 민혁이 기어 위에 올려놨던 오른손을 뻗어 정욱의 엉덩이 밑으로 손바닥을 쑤욱 집어 넣었다. 깜짝 놀란 정욱이 움찔하며 손을 쳐냈다. “뭐하는 짓이야?” “뜨겁다며. 확인해 봤어. 괜찮은데 왜?” 민혁이 윙크를 하며 정욱을 향해 씨익 웃어주고는 운전석 옆에 달린 버튼을 눌러 열선을 꺼주었다. 정욱은 차 안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져 차창을 아래로 내렸다. 선팅된 차창이 내려오자, 겨울 오후의 하늘이 그 자체의 희끄무레한 색으로서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갈색으로 선팅된 유리가 얼마나 제 멋대로 하늘에 색을 덧입혔었는지, 도드라지는 부분만 강조하고 나머지 흐릿한 디테일은 얼마나 많이 감춰버렸었는지, 정수리를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깨닫게 된다. “난 싫어.” “이 새끼. 이상하게 예민해졌네. 임마. 남자들도 가끔씩 등짝이랑 엉덩짝이랑 뜨끈뜨끈하게 데워주는 게 정력 증진에 좋아. 그 박명주 기집애도 오는데 ”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정욱이 시트를 기울여 좀더 편하게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창밖을 쌩쌩 스쳐 지나가며 얼굴에 와닿는 찬 바람이 시원하다. “여름 방학 때도 걔 본가에도 안 내려가고 우리 주위만 맴돌았잖냐. 하루가 멀게 전화질해대고, 우리 가는 데마다 쫓아오고, 나까지 들볶이고……. 아, 난 걔 정말 질렸어. 보다보다 그런 애는 처음 봤다.” “나쁜 애는 아니야.” “나쁜 애는 아니지. 이 세상에 나쁜 인간이 어딨냐. 연쇄 살인범도, 알고 보면 나쁜 인간 아니라고 변호해서 무죄 선고까지 받아내는 게 요즘 세상이야.” “이제 좀 조용히 해. 난 잘래.” “야, 내가 사람 싫다고 하는 거 봤냐? 내가 좋다고 안 할 정도면 그건 아주 심한 케이스라는 뜻이야.” “내가 보기엔 형이나 걔나 거기서 거기야. 둘이 아주 비슷하던데 왜? 붙여놓고 구경하면 보는 사람은 재밌더라구.” 정욱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민혁의 말을 받아치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는 이제 제법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남들은 춥다고 웅크리는 영하의 날씨를 상쾌한 표정으로 음미하는 무쇠 인간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다가 민혁은 얼굴을 돌려서 앞만 보고 운전에 열중했다. 가뜩이나 몇 달 동안 까먹고 있던 서울 지리인데다가 손수 운전해서 갈 일이 한번도 없었던 신공항을 가려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이 새꺄. 조수석에 앉았으면 조수 노릇 좀 해라. 이러다가 진입로 놓치면 어떻게 가야 되는지도 모른단 말야.” “표지판대로만 가면 되지 왜 그렇게 신경을 써?” “야, 네가 운전해봐.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나.” 카스테레오에 넣어둔 CD 속의 몇 곡이 다 지나가버릴 즈음, 민혁의 차는 어느덧 인천공항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하늘 아래 아직도 채 개발되지 않은 고속도로 주변에선 소박한 시골 냄새가 물씬 풍겼다. 중간중간 길가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광고판들만이 겨울 시골의 한가한 정취를 흐트러놓고 있었다. 평일 낮. 달리는 자동차도 별로 없는 한적한 고속도로. 길 주변의 산에는 뼈만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때가 되면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버티고 있었고, 가을걷이가 다 끝난 들판은 속살을 다 드러내고 차가운 바람에 온몸을 단단히 굳혀가고 있었다. 시간도 대충 여유롭겠다, 주변도 한산하겠다, 이대로만 쭉 가면 더 이상 길 잃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주위 풍경을 슬슬 둘러보며 운전을 계속해 가던 민혁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탁 들어왔다. 어디서 봐도 그 즉시 시선을 잡아당기는 상큼한 얼굴. 보는 사람의 심장을 푹 찌르는 묘한 눈빛과 아기처럼 천진난만한 미소의 언밸런스한 조화. 네모난 광고판 하나 가득 웃음짓고 있는 그 얼굴은 마치 그곳에만 집중적으로 몇천 와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람들의 뇌리에 팍 찍혀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여기도 하나 있었구나, 하며 민혁은 무의식중에 곁눈질로 정욱을 흘깃 보았다. 아직도 눈을 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욱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핸드폰 광고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혁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정욱은 옆으로 고개를 탁 돌리고 주위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바다 낚시가 죽이는데.” “낚시철 다 끝났어, 임마.” “………….” “저 녀석은 눈에 안 띄는 데가 없네.” “………….” “실물도 좋지만 사진발 진짜 죽인다. 저 정도로 뜰 줄은 몰랐어.” “………….” “딴 사람 같애.” “……딴 사람이야.” “그냥 놔둘 거냐?” “뭘 어떻게 해?” “사람들이 가만 둘 것 같냐? 저렇게 이쁜데.” “………….” “벌써 나한테까지도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온다, 임마.” 잠깐동안 공기를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이 바닥까지 깔렸다. 힘겹게 갈라지는 정욱의 목소리가 좁은 차 안을 꽉 메우던 침묵을 산산조각 흩어서 날려버렸다. “……딴 사람이라고 했어.” “……?” “저건 내가 알던 놈이 아냐.” “………….” “그러니까 난 몰라.” “………….” “상관 안 한다는 뜻이야.” 어느덧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시트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정욱을 그만 내버려두기로 하고, 민혁은 마침 지금 이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This Masquerade가 흘러나오던 리사 오노 CD를 툭 꺼버렸다. 아직도 본래의 푸르른 제 빛을 찾으려면 몇 달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 바보같은 겨울 하늘 아래 저 멀리 인천 공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3. IT'S NO GOOD The gods decree 신들이 선포했어 You'll be right here by my side 네가 있을 자리는 바로 여기라고 Right next to me 바로 내 곁 말이야 You can run but you cannot hide 도망은 칠 수 있어도 숨지는 못할걸 Don't say you're happy out there without me 내가 없는 그곳에서 행복하다고 말하지마 I know you can't be. 'coz it's no good 행복할 리가 없어.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I'll be fine. I'll be waiting patiently 난 괜찮아. 참을성있게 기다릴 거야 Till you see the signs and come running to my open arms 네가 알아채고나서 내 품으로 달려올 때까지 When will you realize? Do we have to wait till our worlds collide? 넌 언제 깨달을래? 우리의 세상이 충돌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Open up your eyes. You can't turn back the tide 눈을 떠봐.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 거야 (It's No Good - Depeche Mode) ←CLICK! 또 꿈을 꾸고 있다. 모처럼 평균적인 인간의 평균적인 취침 시간에 때맞춰 들어와 편히 잠 좀 잘라치는 밤이면 늘 꿈을 엄청 심하게 꾼다. 절대로 악몽은 아니다. 꿈을 꾸는 동안 몸이 휘둘리고, 깨고 나면 마음이 찢어질듯 아파서 그렇지 악몽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늘 밤 꿈은 뭐지? 얕은 잠이 밀려들면서 언뜻 눈 앞에 영상이 펼쳐지기 시작하자 지해는 속으로 물었다. 오늘 메뉴는 뭐지? 마치 저녁 먹어야 할 사람이 밥 주는 사람한테 이미 냄새로 감잡고도 그냥 묻듯이. 아니, TV 속의 화면을 보고 대충 기억을 더듬어 무슨 프로그램인지 짐작하고서도 그냥 신문을 펼치고 TV 편성표를 찾아 읽듯이… 오늘 밤 꿈은 뭐지. 아스라한 저녁 무렵이다. 익숙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저쪽 끝에서 뭔가 그리운 기운이 마구 뻗쳐와 속눈썹 끝을 통해 스며들어, 손톱 끝을 저미면서 가슴속까지 파고 들어온다. 다가가는 걸음이 급해진다. 빨리 달려가고 싶다. 그 녀석이 서 있나보다. 얼굴이 보인다. 새까맣게 반짝반짝하는 머리카락이, 깎아놓은 조각처럼 뚜렷한 얼굴 윤곽이 저녁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발하며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마음 속에 새겨진 게 떠오르는 것뿐 정말로 보이는 게 아닌데, 꿈인 걸 알고 있는데, 기분은 너무 좋다. 이 꿈을 꾸고 나서 잠이 깨면 또 다시 뜬 눈으로 잠을 설칠 걸 아는데도 가슴 속에 뭉게뭉게 솜사탕 같은 게 가득 부풀어오르면서 발에 날개가 달린 듯 중력을 무시하고 둥둥 뜬다. 녀석이 손짓을 한다. 입가에 웃음을 달고 이리 오라고 부른다. 어느 틈에 운동장에서 학교 건물 안으로 배경이 바뀌어 있다. 과학관인 것 같다.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며 또 한번 손짓을 한다. 마음 속으로 ‘야, 손짓만 하지 말고 목소리 좀 들려줘’라고 외치면서 쫓아간다. 얼른 듣고 싶어서, 너무 너무 그리워서 꼭대기 층까지 냅다 따라 올라간다. 시청각실로 쑥 들어가버리는 녀석의 교복 자락에 간신히 손끝이 닿을락말락 할 정도로 따라잡았다. 가까워질 듯 가까워질 듯 손에 안 잡히는 녀석을 팍 잡아채려고 팔을 쭉 뻗는데, 옆에서 갑자기 다른 인간이 나타나 가로막는다. 낡은 구두. 양복바지. 흰 가운. 불빛에 비춰 번뜩이는 안경알. 손에 든 까만 다이어리. 교과서 같이 생긴 책……. 싫다. 깨고 싶다. 이 꿈 그만 꾸고 싶다. 눈을 뜨고 싶다. 머리를 마구 흔들면서 몸부림을 치는데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 어느덧 배경이 바뀌어서 상담실이다. 담임이 세상에 이런 미친 놈 봤냐는 듯이 노려본다.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머릿속에 할 말이 꽉 차 뭐라 말하고 싶긴 한데, 말로 나오지는 않고 답답하기만 하다. 손을 내밀어 보니 피아노 건반이 닿는다. 여긴 또 음악실인가? 건반을 하나씩 누를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난다. 사람 말소리가 나기도 하고, 동물 울음소리가 나기도 한다. 분명히 손끝에 익은 대로 아주 익숙한 곡을 두드리고 있지만, 건반을 누를 때마다 이상한 효과음 같은 기괴망측한 소리들만 날 뿐이다. A 을 눌렀더니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가 찌지지직 난다. 소름이 돋는다. E 을 눌렀다. “꺼져버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담탱이의 목소리. 음악실인줄 알았는데 아직도 상담실이었나? 피아노에서 손을 뗀다. 뚜껑을 꽝 닫으며 눈이 번쩍 떠졌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이래서 집에 돌아와서 자기가 싫다. 차안이건 스튜디오 한 구석이건 사무실이건 다른 사람들 지껄이는 잡소리가 웅성웅성거리는 데서 도둑잠을 자거나, 뭐가 됐든 녹초가 될 때까지 몸을 혹사시키고 기절해 버리면 괜찮은데, 제대로 누워서 잠을 청할라치면 꼭 이런 꿈을 꾸고 만다. 그 녀석 꿈도 꾸고, 아버지 꿈도 꾸고, 어머니 꿈도 꾼다. 꿈에서라도 보니 그나마 좋다고 해야 하는 걸까. 창 밖의 침침한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와 어두컴컴한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춘다. 천장 위의 둥그스름한 그림자가 그 녀석의 얼굴로 바뀌어 떠오른다. 행복했던 시절의 얼굴도 많은데 왜 하필 이런 때 보이는 건 마지막에 봤던 그 차디찬 표정일까. 결국 도망가는 거냐, 같은 교실에 있기가 그렇게 싫었냐, 이것밖에 안 되는 녀석이었냐, 하고 비웃던 그 얼굴. 끝끝내 오해를 풀어주지 못했다. 너 피해서 전학가는 거 아니라고. 담탱이한테 너랑 나 사이를 들켜 버려서 소리소문 없이 쫓겨가는 거라고 털어놓지도 못했다. 시계 바늘은 새벽 네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해는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겨울의 새벽 하늘은 컴컴했다. 아침을 일찍 맞은 건지, 아니면 아직도 한밤중인 건지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들의 불빛이 눈앞을 휙휙 지나쳤다. 한참을 그렇게 멍청히 창 밖을 쳐다보고 앉아 있는데, 저쪽 하늘 끝자락에서 갑자기 나타나 뚝 떨어지는 유성이 보였다.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무리를 이탈한 길 잃은 유성이 틀림없는 것 같다. 저게 혜성의 잔여물인지, 행성의 충돌 파편인지, 그냥 우주를 떠도는 먼지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제 지구와는 인연이 끊어진 낡은 인공위성의 파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궤도를 이탈한 고철 덩어리. 진공의 공간 속을 떠도는 우주 미아. 뭐랑 만나서 어떻게 충돌했는지, 언제 흩어져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존재. 그런 가짜 별이 죽어간 흔적. 그게 정답인 것 같았다. “어어, 지해. 머리 잘랐네! 염색도 하고!” “낮에 CF 촬영 있었는데, 이한필 감독님이 너무 길다고 해서 좀 쳐냈어요.” “그 아저씨 머리 긴 거 못 참잖아. 나도 그 아저씨 때문에 저번에 머리 잘렸는데. 하하하. 더 이상은 자르지 마라. 지금이 딱 좋다.” “…그래요?” “새까만 머리도 잘 어울린다. 이미지도 더 선명해 보이는 것 같고.” “헤헤헤. 근데 뉴질랜드는 잘 다녀오신 거에요?” 젊은 나이에 이미 중견급에 올라선 디자이너 박영진의 패션쇼가 있을 H호텔의 행사장에 지해가 허둥지둥 도착했을 때는 특별 출연하는 유명 스타들 서너 명까지 포함해서 오늘 참여하는 25명의 모델들이 거의 다 와 있는 것 같았다. 가장 햇병아리인 자신이 제일 늦은 셈이었다. 언뜻언뜻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모두들 쇼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무대 담당들은 마지막으로 스테이지의 조명을 점검하고 있었고, 일찍 도착한 모델들 역시 이미 세팅된 무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워킹 연습을 하고 있거나, 분장실에서 각자 자기의 이름이 붙어 있는 거울 앞에 앉아 메이컵을 받고 있거나, 자신이 오늘 입고 나가야 할 옷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며 품평회를 하거나 하며 분주했다. 여유가 만만한 베테랑들 중에는 책을 읽는 사람, 십자수를 놓는 사람,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열심히 통화하는 사람,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가장 눈에 많이 띄었다. “다녀오기야 잘 다녀왔지.” “엑~ 무슨 대답이 그래요?” “놀러가야 좋지 일하러 갔는데….” 이제 27살인 모델 출신의 영화배우로 한참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끝발 날리는 윤현규가 보는 사람은 남녀 누구든 절로 무릎이 녹아내린다는 예의 달콤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한 달쯤 전에 지해와 함께 딱 한번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적이 있었다. 워낙에 대스타라서 자기 같은 초짜를 상대해 주리라고는 생각 안 했었는데, 촬영하는 이틀 내내 유난히 친한 척을 하며 잘해주고 나서 며칠 동안 거의 매일 안부 전화가 왔다. 그러더니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자신도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뉴질랜드에 영화를 찍으러 갔다고 했다. 뭐 그런가 보다 했더니만,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날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저 황송할 뿐이었다. “근데 그렇게 좋다면서요, 뉴질랜드가? 거긴 지금 여름인가요?” “응. 경치는 정말 기가 막혀. 나도 처음 갔을 때는 환장하겠더니, 이제는 뭐… 몇 번 가고 나니까 그냥 그래.” “아……그렇구나….” 대화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그 다음에 해야 할 말을 찾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해를 현규가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럼…, 그 영화 개봉은 언제에요?” “서울에서 해야 할 촬영도 아직 좀 남았으니까. 개봉은 내년 초여름? 6월?” “여름 영화인가봐요?” “액션. 바다. 로~~~맨스. 비키니 입은 여자 ” “초특급 블럭버스터!!!” 지해가 장난스럽게 외치자, 둘은 마주보면서 싱긋 웃었다. 지해를 한참 지긋이 바라보던 현규가 V네크 니트 위로 드러나는 지해의 목덜미에 손을 올려 지해는 움찔하며 뒤로 반 발짝 물러섰다. “머리카락.” 현규가 입가의 미소를 놓지 않고서 손가락을 바로 눈동자 앞까지 쳐들어, 채 1센티도 안 되어 보이는 머리카락 조각이 손가락 끝에 붙어 있는 걸 보여주었다. 지해는 어설픈 웃음으로, 머쓱해진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했다. “……아까 열심히 털었는데도 아직 있었네.” “디게 짧다.” “층층이로 쳐냈으니까요. 많이 잘린 데도 있 ” “이게 겉으로 보일 정도면 옷 속에도 많이 붙어 있다는 얘긴데.” “………….” 손가락 끝에 붙은 머리카락을 뭐 신기한 거라도 되는 듯이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 보던 현규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지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안 따가워?” 지해는 갑자기 까닭없이 숨이 막혔다. 이 사람의 집요한 시선이 숨을 턱턱 막는 것 같다. 뱃속에서 뭔가 근질근질한 것이 치밀어오른다. “따가워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받아치며 말했다. 울컥하는 뜨거운 기운이 척추선과 꼬리뼈를 타고 허벅지 안쪽을 징~하고 울리며 빠르게 지나간다. 굉장히 오랫만이다. 몇 달만에 느껴본다. 이런 기분. 잊고 살았다. 현규가 지해를 가만히 바라본다. 지해의 머릿속을 읽으려는 듯이 한참이나 계속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픽 하고 웃고는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배고파 보인다. 너 속 비었지? 가자. 매니저더러 초밥 사오랬는데.” “………….” “올 때 다 됐다.” “…아니, 저….” “이제 리허설 시작하면 어영부영하다가 아무 것도 못 먹고 바로 쇼타임이야.” “…저기…괜찮은데….” “옷 입고 벗는 데만도 체력 소모가 많은데 잘 먹고 다녀야지. 그래야 무대에서 활기차게 걸을 수 있잖아.” 지해는 이 사람의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약간 당황하면서,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쳐다만 보았다. “그렇게 배고픈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는데 어떻게 몰라. 우리들 생활이란 게 다 뻔하지. 나야말로 경력 10년인데.” “10년….” “내가 지금 네 나이 때 시작했거든.” 조금씩 긴장이 풀려가는 것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정말 순간적으로 머리 끝까지 아찔했었다. “……10년 전이면 난 초등학교 1학년….” “…너처럼 금방 스타가 못 돼서 그렇지.” 자기 생각에 빠져 있던 둘의 말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와 부딪치며 서로의 말을 먹어들어갔다. 둘은 머쓱한 채로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다. 고개를 까딱하며 눈짓으로 문을 가리키는 현규를 따라 지해는 밖으로 나섰다. BGM : World In My Eyes - Depeche Mode ☜ CLICK!! “우와~, 패션쇼. 패션쇼. 이런 데 얼마만에 오냐. 비료 냄새 풀풀 나는 촌구석에 파묻혀 있다가.” “남들이 들으면 산간 벽지 분교 출신인줄 알겠네.” “분교나 마찬가지야, 거기는~!!!!” “내가 그 동네를 모르냐? 거기 런던에서 별로 멀지도 않아. 그 학교 지지배들 주말이면 기숙사 빠져나가 갖구 런던 가서 밤새고 노는 거 뻔히 다 아는 사실인데.”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 “아저씨라니?!! 내가 왜 아저씨야?!!!” “20대잖아. 20대면 아저씨야.” “까불지 마. 고삐리.” 기사에게 몇 마디를 일러두고, 일부러 한 발짝 뒤에서 걸어가면서 정욱은 앞에 가는 민혁과 명주가 계속 아웅다웅하는 걸 눈살을 찌푸리고 쳐다봤다. 차에서부터 종알대기 시작해서 서로 한 마디도 안 지고 떠들어댄다. 예정대로 서울에서 이틀을 개긴 명주가 본가에 간다길래 제발 가서 오지 마라 하고 속시원했었는데 하루만에 달랑 올라와서는 지겹게도 쫓아다닌다. 할아버지와 박 의원의 관계도 생각해야 하니 아주 차갑게 내치지는 못 하겠고, 적당히 알아서 빠져주게끔 귀찮은 티를 내는데도 얘는 철판을 깔았는지 끄떡도 없다. 그러다 보니 둘만 같이 다닐 순 없고 민혁까지 껴서 같이 어울려 다니게 되는데, 이 짓도 익숙해져서 그런가, 자연스럽다. 찧고 까불고 귀찮게 굴어도 명주가 싫지는 않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누나를 많이 닮았다. 성격이 정말 비슷하다. 소박한 듯 하면서 화통한 여걸 스타일인 것도 비슷하고, 무심한 듯 하면서 은근히 극성맞은 것도 엄청 닮았다. 누나도 별로 저 좋다고 하지도 않는 남자 쫓아서 어거지로 뉴욕까지 간 다음에 일체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도 저거는 방학이라고 귀국도 하고, 누나에 비하면 오히려 기특하다. “강정욱. 빨리 와. 시작하기 전에 박 선생님 꽃다발 전해드려야 돼.” 명주는 자기 엄마랑 친한 디자이너 선생님이라고, 지금 집안 일 때문에 서울에 못 올라오는 엄마 대신 참석해야 한다며 부득부득 이 패션쇼에 민혁과 정욱을 끌고 왔다. 물론 매일매일 이벤트를 달리 해서 정욱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일주일 남짓. 명주는 지금 런던 근교의 엄격한 기숙 여학교에서는 누리지 못하던 한국식 향락 문화 속에 한번 퐁당 빠져들어 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다지 체질에는 맞지 않는 이런 종류의 문화 유람에 있어서 명주가 택한 최상의 파트너는 강정욱이었다. 허우대 멀쩡하고 기품 있어서 어디를 가도 누구에게나 자연스레 대접받는 남자. 소문 듣고 찾아가 봤더니 영 천박해서 아니올시다 싶은 곳에서도 정욱이 있음으로 해서 그 공간 전체가 삽시간에 업그레이드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타고나지 않는 이상 일부러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같이 돌아다니며 이 녀석을 관찰하면 재밌었다. 냉정하고 무뚝뚝한 듯 싶어도 웃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반응해 주고, 근엄과 거만을 떨면서 사람 꼼짝 못하게 하는 정공법과 허를 찌르는 행동과 말로 경계심을 허무는 변칙 플레이를 동시다발적으로 구사해 주위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다시피 한다. 아마 타고난 듯 싶은 그런 테크닉으로, 집안 배경만 믿고 골은 텅텅 빈 망나니 얼간이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는 요령껏 모든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후져지는 상황을 피하게 해 주고, 그 안에서 지루함과 역겨움에 빠지지 않도록 적당한 선을 지키며 우아하게 놀 수 있는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언제 어디를 가든, 어떤 병신들이든, 정욱을 그 무리 안의 리더로 인정하고 꼬리를 내렸다. 한 마디로 ‘징그러운 물건’이었다. 그런데다가 ‘어른 찜쪄먹도록 겁나게 잘난 놈. 무서운 놈’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처음 만났을 때 사랑에 빠져 있는 소년으로서 그가 풍기던 분위기는 꽤나 강렬한 것이었다. 이렇게 잘나고 멋있는 녀석한테 이토록 진지하게 사랑 받는 게 자신이라면 자기 인생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저절로 일 정도였다.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여자로서의 인생은 성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그가 꽤나 사랑하는 듯 싶던 ‘애인’은 이미 과거의 사람임이 틀림없는 지금, 망설일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슴 속에 남은 앙금을 걷어내고 그 안에 박명주를 채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잠깐만.” 현규의 스타크래프트 밴에서 그 매니저가 사온 초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돌아오던 중,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백스테이지로 들어가는 입구쯤에서 갑자기 현규가 정색을 하고 멈춰섰다. 지해는 한창 뭔가 떠들던 중이었다. 이 사람의 급작스러운 정지 동작에 지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까먹을 지경이었다. 빨리 생각해둬야 한다. 잠시만 틈을 보이면 곧바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이 끊겼다가 다시 분위기가 재개됐을 때 대화의 흐름을 되짚으며 헤매는 잠깐 사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여서 지해가 이 말은 하지 않았더면 좋았을걸, 하고 내뱉는 즉시 후회해버리게 되는 말을 연속으로 이끌어낸다.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아∼, 갑작스레 일이 쏟아져 들어오고 뭇 어중이떠중이 들이 아는 척 해오면서 혼란스러워진 것, 동료들이랑 어느 만큼까지 어울려줘야 잘난 척 한다는 둥, 도도하다는 둥, 뺀다는 둥 그런 소리를 안 듣고 살 수 있는 건지 판단이 안 선다는 것. 뭐 그렇고 그런 얘기들. “네?” “이∼ 해봐.” “네?!!” “이∼ 해보라구.” 지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두 눈동자 속에 물음표만 잔뜩 담아서 현규를 쳐다보았다. 현규는 지해의 눈을 하나 둘 셋 세 박자 셀 동안 조용히 들여다보더니 네번째 박자를 세기 직전, 툭 던지는 듯한 말소리로 리듬을 깨며 분위기를 완전히 역류시켜 버린다. “이빨 사이에 뭐 낀 것 같아서.” 현규는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지해가 무방비해진 틈을 타 재빨리 길다란 오른쪽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 사이를 살짝 찔러 들어왔다. “앗!” 지해는 얼른 자기 손바닥으로 현규의 손가락을 쳐내고 입을 가렸다. 점막을 찌르고 들어오는 손가락의 느낌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평소 같으면 밥 먹고 들어오면서 이빨 사이에 뭐 꼈다는 말 정도로 얼굴 빨개질 지해가 아니다. 그러는 당신도 만만찮아,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그 말을 꺼낸 사람을 더 놀려주는 게 지해의 스타일이다. 지해는 여전히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냉큼 입구 가까이 있는 전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거울 옆에 비스듬히 서 있던 여자 모델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다 마치고, 쇼에 입고 나갈 옷을 점검하고 매무새를 다듬으며 옆의 헬퍼와 무슨 말을 주고받던 모델이 불쾌한 듯 지해를 살짝 째렸다. 지해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댔다. 문득 얼굴이 새빨개진 채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머리 뒤로, 킥킥 웃으며 거울 속 지해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현규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 서서 지해의 양쪽 어깨에 두 손을 꽉 누르고 있다. 주위에 있던 모델들 중 몇몇이 둘의 하는 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밌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놀고 있네, 하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거짓말이야.” 아까 밥 먹을 때부터 시작해서 내내 이 사람의 나이값 못 하는 장난에 지해는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될지 모를 정도였다. “으으∼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었냐구?” “……아니 꼭 그 뜻이 아니라….” “전에 생각했던 거랑 다르다?” “……네.” “어떻게 생각했었는데?” “…그냥 뭐….” “그냥 뭐?” “……어른스럽고……멋있고.” “그리고?” “……좀 대하기 어렵고….” 그리고 김지해 같은 햇병아리 초짜와는 별 상관 없는 사람이고. “왠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 같다.” 나란히 서서 거울을 쳐다보며 하는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자신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까지도 역력히 보게 된다는 것, 둘이 동시에 둘의 얼굴을 한꺼번에 지켜보며 얘기를 나눈다는 것, 모두 굉장히 색다른 기분이다. 지해는 어쩐지 이 사람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집요한 시선을 자꾸 피하게 되는 자신이 편치 않았다. “멋대로 사람을 짐작해 놓고, 생각했던 거랑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하면 안 되지. 그렇지 않아?” 민혁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면, 민혁은 자신을 향한 상태에서도 시선이 빗겨가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사람의 시선은 지금 100% 자신에게 뻗어있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열게 하는 민혁의 태도는 그 안에 뭔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게 했기 때문에 어딘지 늘 석연치 않고 불편했다. 그리고, 아직도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아 어쩐지 불안정했던 민혁에 비해 이 사람은 완전한 어른이다. 자기 입지를 확실히 굳힌 어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느긋하고 편안한 자신감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뿜어대고 있다. 게다가 자타가 공인하는 대스타요, 만인의 연인. 그런 대단한 사람이 지금 확실히 자신에게 특별히 친한 척 해주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조금쯤 우쭐해도 괜찮은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신경 쓰이는 걸까? 뭐가 편치 않은 걸까? 이 사람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깜짝깜짝 놀라며 반응하고 있는 자신은 지금 뭘 두려워하는 걸까? “아, 지해야. 저기 네 자리에 의상 한 벌 더 갖다 놨어. 로테이션도 좀 변경됐다. 빨리 가서 체크해봐. 그리고 오늘 네가 피날레야. 그거 몰랐지? 최종 리허설할 때 그것까지 할 거야.” 마침 옆을 지나던 쇼 스탭 중 한 명이 지해를 보고는 기계적으로 다다다다 내뱉고 가버린다. 피날레라는 말에 지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날레는 보통 베테랑 모델들이나, 아니면 게스트로 초빙해온 슈퍼스타들이나 하는 건데. 이 경력으로는 도저히 안될 말이다. “나랑 같이 하는 거야. 피날레.” 한쪽 눈을 찡긋한 뒤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어제끼는 현규를 보고 지해는 뭔가 어렴풋이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언제 어떤 기발한 발상을 해낼지 모르는 젊은 디자이너답게 재치 넘치는 무대 연출로 매 쇼마다 패션계에 신선한 활력을 더해준다는 평을 듣는 박영진의 이번 콜렉션의 테마는 『투명한 것과 투명하지 않은 것』이었다. 콜렉션의 테마와 성격과 취지를 알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소개되고, 컴컴했던 무대에 화려한 입체 조명이 팡팡팡 들어오며,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관객석에서는 탄성과 웃음 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왔다. 모델들이 걸어다닐 런웨이는 전부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모서리는 형광백색의 얇은 조명등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플라스틱 안에는 커다랗게 확대해서 투명한 비닐 천에 프린팅해 놓은 신문 기사 쪼가리들이 들어가 있었다. 무대 배경에도 ‘비리’, ‘의혹’, ‘조작’ 등의 살벌한 단어들이 눈에 두드러지도록 프린팅 된 신문 기사들이 마구 어지럽게 겹쳐져서 도배되어 있었다. “야, 촌닭. 저 신문에 니네 아빠 이름 있다.” “죽을래∼?” “어쭈. 이게 오빠한테 말버릇 하고는.” “언제는 오빠라고 부르지 말래매. 대책 안 선다고?” “아저씨라고 하란 적도 없는데 잘만 하더구만.” “아, 그래. 아저씨.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 “정말 있다니까. 니네 아빠 이름.” “미친 소리 하지마. 박 선생님이 돌았어? 울엄마가 팔아주는 거랑 손님 몰아다 주는 것만 해도 얼말 텐데.” 정욱은 말빨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민혁이 명주에게 무참히 참패하는 것을 속으로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 보면 민혁은 은근히 페미니스트다. 여자들에겐 절대로 이기려들지 않는다.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여자에겐 그다지 성욕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미안해서 그런다나? 정욱 일행들이나 유명 스타들처럼 특별히 초대된 VIP들은 멀리 떨어진 일반 관객석에서도 잘 보이는 무대 사이드에 앉아 있었고,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객석의 맨앞에는 각종 매스컴에서 나온 기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자선 이벤트로서 수익금은 전액 자선단체에 기탁하기로 한 쇼인데다가, 요즘 잘 나가는 톱스타 윤현규가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언론의 취재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방송 3사와 각종 케이블 방송국, 신문사 등등에서 나온 카메라들이 특수 장비까지 동원하여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었고,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들뿐 아니라, 일반 관객들도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어, 패션쇼로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만원 사례였다. 박영진이 해외 명품 브랜드들과의 싸움에 역부족을 느끼고, 상류층과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시그너처 브랜드뿐 아니라 세컨드 라인으로 좀더 대중적인 영young 브랜드를 런칭 준비중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번 쇼는 브랜드 네임으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폭넓은 대중에게 알리려는 사전 포석인 셈이었다. “어차피 주고객은 부유층이면서 괜히 의식 있는 척, 젊은 척, 세련된 척 하고 말이야.” 뒷자리에서 수다 떠는 소리가 제법 또박또박하게 들려왔다. 말끝을 질질 끌면서 묘하게 잰 체 하는 느낌을 주는 아줌마 세 명의 이야기 소리가 주위의 웬만한 소음을 다 덮고 있었다. ―다 상술이지 뭐. 이미지 메이킹을 저렇게 하지 않으면 안 팔린다는 것 아니야. 놔둬 봐. 아무리 있는 집 애들이라구 해서 구태의연하고 보수적인 디자이너 옷 입고 싶어하는 줄 알어? ―속 뻔히 들여다 보이는데 웃겨 정말. ―외국 브랜드처럼 정키 이미지 안 팔아먹는 것만도 다행이야. ―정키? 마약중독자? ―비쩍 말라갖구 머리는 부시시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있잖아. 눈동자는 붕 뜨고 눈 주위는 멍든 것처럼 시커멓게― ―근데 자기, 그 재킷 속에 입은 탑 괜찮다. 페라가모? ―조용히 해봐. 시작한다.” 작게 스며들던 나른한 음악 소리가 요란한 비트로 쾅쾅 울리면서 눈부실 정도의 새하얀 스포트라이트가 무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울한 마이너 키의 멜로디에 어울리지 않는 흥겨운 리듬의 배경음악에 또각또각 박자를 맞추어 무표정한 인간 마네킹들이 차례대로 하나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아주 잠깐 동안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가 일반 관객석으로부터 환호성에 가까운 시원한 휘파람 소리가 삐익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다시 분위기가 술렁술렁해지면서,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쉴새 없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콜렉션의 제목이 왜 ‘투명한 것과 투명하지 않은 것’인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노출 범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 한 벌 한 벌마다 두루 쓰인 소재는 옷으로 만들어 입을 수 있는 소재 중 가장 투명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비닐’이었다. 업비트의 우울한 음악에 맞춰 나른한 듯 쭉쭉 내뻗는 걸음걸이. 방금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헝클어지도록 연출한 베드헤드룩의 새까만 단발 머리. 가늘고 섬세한 근육이 길쭉길쭉하게 자리잡은 우아한 자태, 짙은 스모키 컬러의 아이섀도를 가득 펴바른 깊고 그윽한 눈매 속의 도발적인 시선. 이날 패션쇼 무대에서 지해는 다른 어떤 톱스타들도 다 제치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무대 위의 지해에게서는 확실히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특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완전히 다 자란 남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상큼한 소년의 가녀린 이미지. 그러면서도 문득 문득 아주 남자답기도 하고, 또 어딘가 여성적이기도 한 기묘한 양성적 아름다움은, 남자든 여자든 보고있는 사람에게 온몸의 솜털이 다 쭈뼛 설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던져 주었다. 다른 남자 모델들보다 훨씬 선이 가늘기 때문에 처음 쇼 무대에 서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해에게 돌아가는 의상은 주로 묘한 유니섹스 느낌의 옷들이었고, 그게 또 애초에 지해한테 맞춰서 만든 듯이 딱 잘 어울렸다. 얼핏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가느다란 체형이, 오히려 일반적인 남자 모델이나 여자 모델이 소화할 수 없는 야릇한 분위기를 기막히게 소화해내는 모델로서 짧은 시일에 껑충 주가를 뛰게 한 요인이 된 것이다. 지해가 무대에 서면 모든 관객의 시선이 오직 한 사람, 지해의 손짓과 몸짓, 얼굴 표정에 쏠려 들었다. 장내의 분위기를 조금만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 날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피부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꼿꼿이 무표정한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최대한 묵묵한 태도로 무대 위를 노려보고 있는 정욱이었다. 백스테이지의 풍경은 한마디로 난장판, 아수라장 그 자체. 무대 위에서는 세상에 다시없이 거만한 자세로 느긋하게 폼을 잡다가 무대 뒤로 들어서자마자 꽁지에 불붙은 닭처럼 후다닥 뛰는 모델들. 무대 뒤로 들어서면서 풀기 시작한 앞단추는 이미 반쯤 열린 상태. 바로 구두를 벗어던지고 황급히 옷을 갈아입으러 뛰어들어간다. 모델들은 우왕좌왕 뛰어다니고, 행거 위에는 브래지어와 모자와 옷들이, 바닥에는 신발과 가방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무려 100여 점이나 되는 옷들을 수도 없이 입고 벗고, 다시 입고서 바로 무대로 뛰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옷 한번 갈아입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모델에게 따라붙는 것이 헬퍼들. 콘티 순서대로 모델이 정확하게 옷을 입고, 장갑, 가방 등의 소품들을 빼먹지 않도록 챙겨주는 사람들이다. 모델들이 마구 서두르다가 다른 모델의 것과 바꿔서 끼고, 들고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이들도 정신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태준씨. 모자 쓰고 나가야지! 어딜 그냥 가!!!!!”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비닐 트렌치 코트 위에 매치되는 모자를 빼먹고 무대 입구로 달려나가는 태준을 헬퍼 한 명이 간신히 붙잡았다. 무대로부터 뛰어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지해와 태준의 눈이 마주쳤다. 태준은 지해와 같은 에이전시에 소속한 선배 모델로, 지해와는 가장 친한 동료였다. 좋다고 깔깔거리는 지해에게 태준은 가운데 손가락을 스윽 쳐들어 보였다. “지해야. 너 오늘도 뒷풀이 안 오면, 경서 형이 가만 안 둔대. 너 잡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더라. 오늘은 절대로 도망갈 생각 마.” “알았어.” 피날레의 마지막 의상으로 서둘러 갈아입고서 지해는 맨발로 나와 헬퍼가 넘겨주는 신발을 신었다.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아까부터 왼쪽 팔뚝 윗부분에 빙 둘러 붙여둔 가짜 문신이 영 신경 쓰여 지해는 무대 입구 근처의 거울 앞으로 갔다. 하나밖에 없는 전신 거울 앞이 이미 만원 사태라서 조명이 반사되는 흰 벽면을 보며 매무새를 고치고 걸음걸이와 자세 연습을 하고 있는데, 피날레 무대에 같이 나가야 될 현규가 다가왔다. “이쁜데.” “뭐가요?” “옷이.” “문신 보고 말씀하신 줄 알았어요. 이게 어디 옷이라고 할 수가 있어야죠.” “하긴…… 그 정도면, 어른들은 아예 벗고 다녀라 그러시지.” “그러게요. 추워 죽겠어요.” “원래 옷 복 없는 모델이 있단다.” 지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절대 입었다고 말할 수 없는 자기 의상과 현규의 것을 비교했다. 커플 룩으로 같이 디자인된 것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차이가 날까. “알고 계셨었죠?” “응?” “………….” “……아아…… 피날레….” “네.” “응.” “근데……왜….” “미안. 내가 박선생님께 최종 리허설까지 너한테는 꼭 비밀로 하자고 했거든.” 이미 지해는 그 대답에 관심이 없었다. 무대 밖에서 갑자기 요란한 박수 소리가 나는 바람에 엉겁결에 밖을 내다보다가 VIP석에 낯익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강한 조명이 집중되는 무대 위에 서 있으면, 무대 밑은 그냥 어두컴컴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직도 포즈나 워킹 같은 것에 바짝 긴장하는 초보이다 보니, 무대 아래를 제대로 훑어볼 여유는 전혀 없었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을 쳐댔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곁에 서 있는 현규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지해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동안, 피날레 끝에 직접 무대 인사를 해야 할 박영진이 급히 걸어 왔다. “어디…… 지해 좀 보자.” 뭔가 마음에 안 찬다는 표정을 지으며 찬찬히 살펴보던 박영진은 구석에 놓여 있던 생수병을 들더니 지해와 현규에게 가차없이 뿌려댄다. 한겨울에 얇다 못해 옷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걸 걸치고 있던 지해는 졸지에 물벼락까지 맞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추워서 떠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갑자기 너무나 긴장되어 떨고 있는 건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좀 분위기가 사는 것 같애. 자∼ 순서됐다. 빨리 나가.” 물방울이 뚝뚝 미끄러져 내리는 투명한 비닐 반바지 위로 퍽퍽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까지 두드려주는 박영진의 채근에 지해는 로보트처럼 기계적으로 무대를 향해 나섰다. “김지해∼!!! 부케∼!! 부케 들고 나가야지!!!!!” 헬퍼 한 명이 잽싸게 뛰어와서는 얼른 화사한 흰색 공단 리본이 길게 늘어져 있는 신부용 부케를 쥐어준다. 그 와중에도 ‘부케라는 게 꽤나 무거운 거구나’ 하고 멍청히 생각하며 지해는 현규와 나란히 무대 밖으로 나섰다. 이 쇼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여느 패션쇼와 마찬가지로 웨딩이었다. 물론 여느 평범한 패션쇼와는 아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웨딩 복장으로는 그 의상이 엄청나게 파격적일 뿐 아니라, 신랑 신부가 마치 성수로 세례를 받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듯이 물벼락까지 맞았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 신부가 남자라는 것. 쇼 아나운서의 위트 넘치는 설명 멘트가 끝나고, 펑키한 테크노와 랩으로 편곡된 결혼 행진곡에 발 맞춰 현규와 지해가 손을 잡고 무대로 나서자, 마른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우박이 쏟아지는 듯한 엄청난 박수 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기사 꺼리를 발견한 기자들의 손도 같이 바빠졌다.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와 함께 불꽃놀이 같은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연속으로 터졌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관객 반응과 ‘남자들끼리의 결혼식’이라는 쇼킹한 이벤트가 몰고올 엄청난 매스컴 홍보 효과를 생각하며, 무대 입구에 서서 둘을 지켜보는 박영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탄탄한 근육질의 맨살 위에 투명한 비닐 턱시도 재킷과 흰색 새틴 바지를 입고, 목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달린 굵은 흰색 초커 목걸이를 한 ‘신랑’. 그리고 이미 물에 푹 젖어 옷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하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놓은 심플한 흰색 쉬폰 슬리브리스 탑에 역시 투명한 비닐 반바지(물론 그 속에는 가느다란 흰색 T자 팬티를 입었다) 차림의 ‘신부’. 그 ‘신부’의 물에 젖은 새까만 머리는 푸른 기운마저 도는 밝은 조명 아래에서 아까보다도 더욱 검게 보였고, 스모키한 아이 메이크업도 군데군데 물에 얼룩져 마치 결혼식 직전에 눈물을 지은 것처럼 보이는, 드라마틱하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박영진이 둘에게 생수를 들이부을 때 거의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이를 어째, 하고만 있던 어시스턴트들과 헬퍼들도 더욱 축축한 섹시함을 불러일으키는 둘의 모습을 무대 뒤에서 찬찬히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랑’과 ‘신부’가 무대 끝에 다다르자, 지금까지 쇼에 등장했던 모델들이 모두 한꺼번에 줄을 지어 걸어나왔다. 모델들이 줄을 지어 마지막으로 무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민혁은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정욱의 옆얼굴을 근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고 있었다. 한 바퀴를 다 돈 모델들이 무대 양쪽으로 갈라섬과 동시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 디자이너 박영진이 쑥스러운 미소를 띠고 어기적어기적 걸어나왔다. 민혁은 겉으로는 일체 표시는 않고 있지만, 속으로는 거의 폭발 직전임이 뻔한 정욱이 걱정되어, 아무 것도 모른 채 무대 위에 넋을 빼놓고 환호성을 지르던 옆자리의 명주를 툭툭 치며 넌지시 눈짓을 했다. 무대 맨앞의 오른쪽 끝에 선 지해가 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박영진에게 넘겨주자, 박영진은 쇼맨쉽을 발휘하여 객석을 향해 부케를 던졌다. 몇몇 주책맞은 관객들의 부케 쟁탈전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지해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정욱이 앉아있는 자리를 곁눈질했을 때는 이미 세 명이 앉아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순간, 그저 무턱대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지해의 눈에 곧이어 들어온 것은 명주가 정욱에게 찰싹 붙다시피 팔짱을 끼고 입구를 향해 같이 나가는 모습,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민혁이 뒤를 돌아보며 자신과 눈이 딱 마주쳤을 때 입가에 흘리던 뒤틀린 미소뿐이었다. BGM : Barrel Of A Gun - Depeche Mode ☜ CLICK!! “아, 조형∼∼!!! 안녕하세요. 이게 얼마만입니까. 너무 오랜만에 오신 것 같아요. 오늘 물 좋∼∼∼아요. 마침 잘―” “‘짱구아빠’가 이제 「인터내셔널」로 갔다구?” “네. 해운대 쪽으로 옮긴지 석 달쯤 됐죠. 서울이 이제 싫다고 강남 바닥을 아예 떠버렸어요. 조형은 여름에 오고 통 안 오셨으니까―” “이봐요, 웨이터 아저씨. 아저씨가 훨씬 더 늙어보이는데 왜 형이라구 그래요? 그것 참 듣기 심히 거북하네.” “앗, 조형이 여자 분을 데려오신 건 처음 뵙는데요.” 웨이터가 민혁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제딴에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듯한 웃음을 보내자, 민혁은 아무 말 없이 눈살만 찌푸렸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부킹의 지존! 부킹의 제1인자! 오직 부킹만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치는 ‘액숀가면’입니다.” 자칭 ‘부킹의 황제, 부킹의 대왕, 부킹계의 획을 긋는 액숀가면’은 한바탕 민혁에게 온갖 친한 척을 하면서 세 사람을 안쪽의 룸으로 안내했다. 소속되어 있는 호텔 자체보다 부설 나이트가 더 유명한 이 곳은 「라임라이트」. 700평이 넘는 규모에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최첨단 시뮬레이션 인테리어와 환상적인 조명 시스템으로 사이버틱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강남 최고의 막강 나이트 클럽이다. 500인치 멀티비젼의 현란한 영상과 머리가 터져나갈 것처럼 쿵쾅대는 화려한 디지털 사운드. 계단식 스테이지에서는 춤과 관능에 취한 사람들의 열기가 쉬지 않고 뿜어나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황금같은 주말 밤이라 홀 안은 이미 거의 꽉 차 있었다. 입구에서 뺀찌맞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예정에도 없던 나이트를 갑자기 가기로 하고서 무턱대고 예약도 안 하고 왔는데 그 동안 민혁이 쌓아뒀던 공이 실제로 엄청나긴 했던지, 남이 이미 예약해뒀던 VIP 룸을 웨이터가 알아서 중간에 쓱싹해서는 내어준다.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뉴욕은 클럽들이 어때요, 하고 묻는다. “거기 잘 나가는 클럽들은 여기같지 않아. 사람들이 허름할수록 좋아한다구. 너무 유명해지면 오히려 물이 나빠지고 금방 새 거가 뜨니까 따라잡기 힘들더라. 그리고, 일단 너같은 웨이터도 없고. 수고했어.” 민혁은 지갑에서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수표 몇 장을 꺼내 액숀가면의 손에 쥐어 줬다. 액숀가면은 얼굴이 환해지면서 고개를 몇번 꾸벅꾸벅하고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하고 우렁차게 큰 소리를 치고 나갔다. “지해야. 너 오늘은 꼭 끝까지 가야 돼. 도망갈 생각 하지 마.” 패션쇼가 열렸던 호텔 지하의 재즈 바에서 있던 애프터 파티에서 적당히 얼굴을 비추고 그만 슬쩍 사라지려는 지해를 어떻게 눈치챘는지 태준이 문 밖까지 따라 나와서 꽉 붙잡는다. “아니, 형. 나…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니가 이러니까 맨날 튕긴다, 뺀다 소리 듣는 거야. 선배들이 가자는데 말야. 원래는 지옥까지라도 따라가야 되는 거다, 임마.”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아. 머리도 좀 아프고, 으실으실 떨리고….” 지해는 갑자기 더욱 더 지끈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마가 훨씬 뜨겁다. 태준이 지해의 손목을 턱 잡아 팔을 내리고 대신 자기 손을 올려 지해의 이마를 짚어본다. “야, 너 혹시 감기 걸린 것 아니냐? 아까 물벼락 맞아서?”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핑계거리가 생긴 것 같다 싶어 지해는 맞장구를 쳤다. 이만 놔줬으면 좋겠다. “잘 됐다!” “응?” 태준이 얼굴까지 환해지면서 반색을 하자, 지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 볼 때 폭탄주만한 감기약이 없다. 폭탄주 두어 잔 마시면 감기도 바로 도망간다는 것 아니냐.” “………….” “야∼! 너 안 가면 나 경서형한테 정말 혼나. 가뜩이나 회사도 달라서 이런 때나 가끔 보는 건데….” “………….” 경서가 자기한테 섭외가 들어왔지만 시간이 안 되는 일거리를 같은 에이전시 소속도 아닌 태준에게 몇 번이나 연속으로 패스해줬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더 이러는 거다. 준재벌 축에 들 정도로 집안 빵빵하고 오만방자하기로 소문난 경서는 지해로선 왠지 피하고 싶은 선배 1순위였다. 경서와 태준 자기들 두 사람끼리 서로 알아서 할 일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말했잖냐. 경서 형 오늘 순전히 너 때문에 자리 마련한 거란 말이야.” “어휴……형!!!” “라임라이트에 룸까지 잡아 놨댄다. 오늘 거하게 한판 쏜다잖냐.” “그냥 형만 따라가서 재밌게 놀아. 난 아파서 빠진다고 그러고.” 정말 피곤하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심신이 피로하고 만사가 귀찮은 마당에 무슨…. 그냥 이대로 쓰러졌다가 영원히 안 깨어나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너 말야…… 몸만 아픈 거 아니지?” “………….” “뭔진 모르겠지만 안 좋은 일 있으면 오늘 신나게 놀고 다 털어 버려라.” 약간 귀가 솔깃해진다. “잊어버릴 정도로 한번 정신없이 놀아봐. 그러고 나면 감기도 떨어지고, 잠도 잘 올 것 아니냐.” 그래, 이대로 가봤자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싶었는데. 속는 셈 치고 한번 가볼까. 가서 술이나 진탕 마시고 잔뜩 취해갖구 쓰러져서 잠이라도 푹…… “…좋아…… 그 대신 난 오래 안 있을 거야.” “오늘 댄스 경연대회 한다는 게 저거야?” 명주가 홀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도록 세팅된 멀티 스크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춤에 몰두한 사람들의 터져나갈 듯이 후끈한 열기가 스크린을 뚫고 나와 룸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왜? 재밌어 보이냐, 촌닭?” “재밌어 보이는 게 아니라. 애들 실력이 왜 저 모양이야.” “어쭈∼! 그러는 넌?!” “아저씨가 내 실력을 못 봐서 그래. 난 라틴 댄스를 정식으로 배운 몸이야. 야, 강정욱. 나랑 저기 나가자. 나가서 우리가 본때를 보여주자.” 명주는 좀이 쑤셔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는지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깥의 음악 소리에 두 발로 연신 리듬을 맞추고 있었다. “난 춤 안 춰.” 정욱이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투명한 황금색 액체가 막 마개를 열어낸, 꽉찬 병으로부터 둔탁하게 쿨렁쿨렁 소리를 내며 크리스탈 잔에 담긴다. “정욱인 칼춤 외엔 안 춰. 그것도 사람들이 춤으로 안 봐줘서 그렇지……하하하. 솔직히 그냥 칼 쓰는 걸로밖에 안 보이니까….” “아니야, 내가 리드하면―” “아∼!! 그러지 말고…!” 아까부터 죽 기분 안 좋아보이는 정욱을 어떻게든 끌고 나가려는 명주가 계속 떼를 쓰자, 민혁이 갑자기 무슨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엉?” “나랑 나가자.” “……아저씨랑?” “야, 촌닭. 빨리 선택해. 여기서 그냥 모니터로 남들 노는 거 구경이나 하면서 이 자식 얼굴 구기고 술 먹는 거나 쳐다보고 있을래? 아니면 나랑 스테이지에 나가서 애들 입에 거품 물게 해줄래?” “선택의 여지는 그것뿐이야?” “당근이쥐. 뭐 또 있는 것 같냐?” 민혁이 대뜸 일어나 문 앞으로 성큼 나서며 채근을 하자, 명주는 정욱과 민혁과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쪽으로는 단 한번 눈길도 주지 않는 정욱은 여전히 술 외에는 세상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고, 민혁은 자기가 안 따라나서면 혼자서라도 문 밖으로 나갈 듯한 기세다. “에이씨∼! 좋아∼!! 결심했다. 나가서 놀자!!!” 문을 열자마자 고막이 터질 듯한 음악 소리가 그대로 새어 들어왔다. 룸에 달린 문의 방음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 잠깐만. 뭐 놓고 왔다.” 민혁은 명주가 복도로 나오자 과장된 앗, 소리를 내더니 금세 룸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 속으로 사라지는 민혁의 뒤통수에 대고 명주가, 빨리 안 나오면 가만 안 있을 거야, 하고 지르는 소리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테크노 사운드에 고스란히 묻혀 버렸다. “야, 내가 저기 액션맨한테―” “액숀가면이래매?” 정욱이 비로소 민혁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담배 연기를 민혁의 얼굴에 쭉 내뿜는다. 민혁은 천천히 손사래를 쳐서 얼굴 앞의 희뿌연 연기를 흩어냈다. “아, 그래. 액숀가면!! 걔한테 삼삼한 애 하나 찾아다가 들여보내라고 할 테니까 괜히 모르는 일이라고 돌려보내지 말고 좀 놀다가 데리고 위로 올라가. 아예 방도 잡아두라 그럴 테니까.” “됐어. 하지 마.” 잠깐 멍하게 쳐다보던 정욱이 다시 술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이 새꺄! 형님 말 좀 들어라.” 민혁은 조니 워커 블루의 금테 두른 파란 라벨을 쳐다보며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얼음도 안 넣고 오로지 스트레이트로만 마시는 이 녀석이 그 사이에 벌써 몇 잔을 마신 건지 모르겠다. 어둑한 조명 속에 갈색으로 보이는 술은 라벨이 붙어 있는 끝자락 정도에 간신히 닿을 정도로만 차 있었다. 저 만큼이면 어림잡아도 벌써 1/3 이상을 마셨다는 건데, 이러다가는 이 녀석 오늘 큰 일 내지 싶다. “나 여기 오래 있으면 저 촌닭이 도로 들어올지 모른단 말야. 간신히 떼어놨는데 이럴래? 엉?!!!”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정욱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면서도 일단 문고리를 잡았다. “꼭 말 들어라. 박명주는 내가 좀 놀아주고 집에 들여보낼게. 여기 안 들어오게 할 테니 걱정 말고.” “그래. 빨리 나가기나 해.” 문을 열고 나가려던 민혁이 갑자기 정욱을 다시 뒤돌아보고 나지막하게 부른다. “…정욱아……” “왜?” 잠깐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정욱아…” 또 한번 부른다. 정욱은 이번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시원하게 기분 풀고 다 잊어버려라. 응?” 약간 열린 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음악 소리. 밖에서 쩡쩡 메아리치는 시끄러운 웃음 소리. 홀에서 타오르는 열기 때문에 하루 종일 틀어놓는 에어콘 바람. 아무리 감추려 해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복도에 밴 술집 특유의 매캐한 냄새. 막힌 공간 안에 혼자 이렇게 앉아 술이나 죽이고 있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 정욱은 안타깝게 자신을 바라보는 민혁의 눈빛을 느끼며, 왠지 오늘은 저 자식 말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나이트에서 만나갖구 하룻밤 같이 진짜 허벌나게 잘 놀았는데, 으으∼ 씨발. 나중에 방송국에서 떡하니 마주친 거야. 가수로 데뷔했다고 CD 한 장 턱 주는 거 있지. 얼마나 놀랬는지.” “그게 누군데? 잘 나가는 애야?” “잘 나갈 리가 있냐? 그렇게 날림으로 데뷔했는데. 그 왜 있잖아. 여자애들 한 서너 명 나와서 아동틱한 춤추고 립싱크하는 허접떼기. 이름도 까먹었어 이제. 몇 달 좀 지지부진하게 활동하는 것 같더니 요새는 어디 박혀 있는지 코빼기도 못 보겠더라.” “그런 애들이 한둘인가.” “야, 거기 너희들 중에도 데뷔할라구 하는 뇬 있냐?’ 모델같이 쫙 빠진 녀석들 룸에 부킹되어 왔다고 기뻐하다가 실제로 모델이라니까 입에 거품을 물면서, 룸에는 난생 처음 들어와봤다고, 부스에 있으면 음악 소리 땜에 시끄럽고 머리 아프고 얘기하기도 피곤하고 짜증나는데 정말 좋다고, 계속 지해의 귓가에 뭐라뭐라 조잘대던 여자애가 제딴에는 기분이 나쁜지 입을 싹 다물었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니, 지해 옆에 앉은 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여자애들 중에 제일 언니로 보이는 애가 이게 무슨 좆같은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제 파트너인 경서를 째리고 나서, 다른 여자애들을 쳐다본다. 물론 그중 두 명은 옆에 있는 녀석들이랑 벌써 엉겨서 이미 서로 설왕설래하고 이리저리 주무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태준아. 너 옆에 앉은 애 안주 못 먹게 해. 이제 좋은 거 줄 거니까. 배 부르면 약 기운 빨리 안 돌거덩.” 태준이 열심히 경서의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사이, 그 파트너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홀로 멍하니 술만 죽이면서, 태준과 경서의 열띤 대화를 무심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화살이 자신한테 날아왔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벌써 꽤나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지해는 주위 사람들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술이건 무엇이건 따라주는 대로, 입에 넣어주는 대로, 받아먹었더니 이미 자신도 맛이 꽤 갈 만큼 간 상태였다. 오늘의 물주이자 다섯 명 중 최고 선배인 경서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빼고, 벗어놓은 재킷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내다 말고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룸에서 즉석으로 한 판 벌이려고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왔다며 의기양양하게 한 바퀴 턴을 한다. 테이블 주위로 웃음소리가 웨이브 응원이라도 하듯이 한 바퀴 물결치며 돌아서 지나갔다. 따져보면 그다지 웃기지도 않은 얘기에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지해는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근데 기분이 뭔가 나른한 것이 붕 뜨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굉장히 선명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쏙쏙 귀에 들어온다.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그 음절이 표시하는 음표 하나하나가 일일이 손에 잡힐 것처럼. 천장의 불빛은 무지개로 보이고, 벽지 속의 꽃들 하나하나가 벽을 뚫고 날아올라 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처럼 보인다. 온몸이 두둥실 날아오르는 것 같다. 머릿속이 온통 아름다운 멜로디와 신비로운 하모니로 가득차서 마냥 행복하고 벅차오르는,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이 기분은. ―이게 도대체 뭐지. 왕언니랑 지해의 파트너인 막내. 단 둘만 죽상을 하고 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 정도가 아니다. 표정이 팍 질려 있다. ―왜들 저러지. 나는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좋아 죽겠는데. 쟤네들은 왜 저러지. 지해는 물에 젖은 솜처럼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리와인드시켜 원인을 찾아 내려 애썼다. 맨처음에 웨이터가 갖다준 주사위를 각자 굴려서 나온 숫자만큼 마시기 할 때도, 회오리주 만들면서 썼던 냅킨을 천장이나 벽에 과녁 삼아 던진 후 적중도가 낮은 사람이 벌주를 마시게 했을 때도 모두 소리지르며 신나 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여자들이 많이 걸렸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들은 아니었다. 원자폭탄도 아닌 수소폭탄주를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벌로 한 잔씩 마시게 할 때까지는― 그래도 분위기가 괜찮았었다. 여자애들은 흑기사를 부를 수 있게 해줬었고, 자기 파트너가 연거푸어 두 번 걸렸을 때 지해가 두 잔 다 대신 마셔줬었다. 경서부터 시작해서 대마초를 한 모금씩 돌릴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싫다고 패스한 애도 있었지만 피운 애들은 다들 낄낄거리고 오히려 색다른 경험에 즐거워 했던 것 같았는데…… ―그렇구나. 저 두 명은 담배도 안 핀다고. 대마초는 싫다고 그랬었지.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대마초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안 멈춰지는 게. “얘들아∼ 주목! 오늘의 하이라이트!!!! 짜자자잔∼!!!!!!” “안 되겠어.” 정욱은 몸을 일으켜 소파에 등을 푹 기대어 앉고나서 지퍼를 올렸다.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여자를 쳐다보니 확실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괘,괜찮아. 뭐.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 여자가 얼른 블라우스의 소매에 팔을 꿰면서 시선을 피한다. 아직 채 가려지지 않은 브래지어 위로 팽팽하게 삐져 나와있는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느낌이 없다. “저기, 근데……” 정욱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눈썹을 약간 위로 치켜올렸다. “……혹시 원래 여자랑은 안 되는 거야?” 액숀가면이 부킹해다 준 여자는 여대생이었다. 모 여대 3학년이라고 했는데, 웬만한 연예인들 뺨치는 미모와 쭉 빠진 몸매는 어떤 남자가 봐도 뻑갈 만했다. 자기한테 매력이 없어서였다고는 죽어도 인정할 수 없으니까, 롱다리에 허우대 멀쩡하고 가만있어도 부티가 폴폴 나는 이 자식이 아깝게도 원래 여자한테는 잘 안 서는 놈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은가 보다. 정욱이 아무 대답 없이 피식 하고 웃자 여자는 잠깐 정욱을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룸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헝클어진 매무새라도 다듬으려는 건지, 유사시에 스페어로 불러내는 다른 남자 한테 전화라도 할 생각인 건지…. 알 바 아니다. 갑자기 모든 세상이 고요해진 느낌과 함께 잠시 잊고 있었던 옆방의 시끄러운 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떤 년놈들이 들어와있는지 정말 소란스럽다. 정욱은 소파 등에 뒤통수까지 푹 파묻어 기대고 천장을 올려 보았다. 천장 위에 대롱대롱 달린 매달린 유럽풍의 모던한 조명등. 어째 을씨년스럽다. 꼭 떨어질 것 같다. 그래, 떨어져버려라. 다 박살을 내버려라. 깨질 듯 아스라한 그 불빛에 뽀뽀라도 날려주듯이 담배 연기를 뻥뻥 소리가 나도록 내뿜었다. 천장을 향해 둥둥 떠올라가는 도너츠 구름 하나, 둘, 셋…… “아∼ 씨발!! 너희 둘!! 택기하고 상민이!! 이 씨뎅할 쌔끼들! 그만 안 둘래? 앙? 오늘의 목표가 뭐야? 잊었어?” 한참 옆의 여자 파트너들이랑 농염한 페팅에 열을 올리던 두 놈들한테 경서가 손에 쥐고 있던 넥타이를 휘둘러대며 화를 버럭 냈다. “아, 미안해. 형.” “형, 잘못했어. 좀 봐줘.” “이 새끼들 진짜∼” 갑자기 공기가 싸∼해진다. 여자애들 사이에 이제는 뭔가 잘못 들어온 것 같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조금만 더 오버하면 눈치껏 알아서들 도망갈 게 틀림없었다. 경서는 룸 안의 그런 분위기를 오히려 만족한 듯이 둘러보고는, 어느새 소파 위에 다리를 올린 채 새우처럼 쪼그리고 기대앉은 지해를 쳐다보았다. “태준아. 지해 좀 깨워 봐. 오늘의 메인 요리가 잠들면 어떡해.” “지해야, 일어나. 얼른!” 지해는 약 기운, 술 기운으로 기분이 붕붕 뜨다 못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되어 꾸벅꾸벅 졸다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치뜨면서 무슨 일인가 주위를 살폈다. “자, 남자애들은 내가 맥주 한 잔씩 따라 줄 테니까……” 경서가 남자애들 앞에 놓인 맥주 잔에 맥주를 2/3 정도씩만 따르면서 말했다. 다섯 개의 잔을 덥썩덥썩 들어 맥주를 다 따른 후, 경서는 술병을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놓으면서 벌떡 일어나 지퍼를 내렸다. “……빨리 거시기들 꺼내서 담궈.” 뭔가 상황을 알고 있는 듯한 택기와 상민만이 키득키득 억지로 웃음을 참았고, 나머지는 모두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담주 몰라? 담주?!! 여자분들은 이제 남자 파트너의 소중한 거시기가 목욕하고 간 귀한 담주를 원샷하시는 거야. 원샷 못 하시는 분은 벌칙으로 10초 내에 브래지어 벗으시기. 10초 내에 브래지어 못 벗으시면 또 벌칙이 기다리고 있음!!! 실시∼!!!” 경서가 완전히 지퍼를 내려서 물건을 꺼내 주위에 한번 보여준 뒤, 자기 앞의 맥주잔을 높이 쳐들었다. 이제 드디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왕언니가 냉큼 그 잔을 빼앗아 경서의 얼굴에 확 쏟아 부었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여기가 지금 룸살롱인줄 알어?!! 우리가 호스티스로 보이냐, 이 씹탱아?” 왕언니가 여자 파트너들을 순식간에 전부 챙겨서 데리고 나가버리자, 룸 안의 남자들은 잠깐 멍한 상태로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쏟아지던 잠이 홀딱 달아나버린 지해는 깜짝 놀라 선배들의 눈치만 살펴 보았다. 어디선가 갑자기 킥킥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주목 됐다. 경서였다. “큭큭큭큭…… 아, 씨발….” “왜 그래, 형?” “아. 씨발씨발 개씨발.” “왜?!!!!!!” “저 기집애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몇달 전에 나 한참 ‘필터’ 다닐 때 같이 논 적 있었어. 나이트 바닥도 그 물이 그 물이야. 필터에서 만난 것들은 라임라이트에서 죄다 또 만나잖아. 하하하하.” “……?” “어쩐지 아까부터 똥 씹은 얼굴 하고 있어서 왜 그러나 했더니만… 그새 또 뜯어 고쳤는지 얼굴만 봐가지고는 전혀 생각이 안 났는데, 저 희한한 걸음걸이 보니까 이제야 기억나네.” 경서가 웃음을 간신히 끅끅 참으면서 주워섬기자, 잠깐 벙쪄 있던 나머지 멤버들 은 갑자기 확실히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걸음걸이를 생각해내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경서 형이 너무하는 것 아닌가 싶던 지해도 엉덩이를 실룩실룩거리며 묘하게 뽐내는 듯한 그 뒷모습이 떠오르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야. 우리끼리 술이나 마시자.” “그래, 형. 오늘 재수 똥 씹었다고 생각하고 술이나 먹자.” “좋아. 그냥 마시면 재미없으니까……” 경서가 손에 들고 있던 화려한 핸드페인팅의 폴 스미스 넥타이를 양손으로 팽팽 하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 게임을 하면서 먹자구. 요 넥타이로 눈 가린 다음에 옆사람이 부르는 대로 키위면 키위, 바나나면 바나나. 이쑤시개로 집어내기∼!” “못 하는 사람은 또 술 먹기야?” “술도 먹고,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하기. 그 이전에 이거 하나씩 삼켜.” 경서가 바지 주머니에서 손가락 만한 굵기의 작은 유리병을 꺼내 맞은 편에 앉은 택기에게 던졌다. 병에는 노리끼리한 유백색의 작은 알약들이 담겨 있었다. “엑.스.터.시∼!! 오우 예∼!!! 너 오랜만이다!!! 그렇잖아도 형이 왜 이거 빨리 안 꺼내나 했지.” 택기가 짤랑짤랑 흔들어대는 병 속의 알약을 지해는 가만히 쳐다 보았다. 택기가 그 병을 열어 알약을 하나씩 나누어줄 때까지, 마치 최면술사가 코 앞에 갖다대고 흔드는 회중시계처럼, 짤랑거리던 그 병의 잔상이 눈 앞에 계속 어른거리고 있었다. BGM : Stripped - Rammstein☜ CLICK!! “자, 상민이 다음에 이번엔 지해.” “왜 또. 나야?” 지해는 두번째 손가락을 들어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눈을 찌르기라도 할듯 하나씩 가리키며 순서를 되짚기 시작했다. 아무리 취했어도 자기 차례가 아닌 건 안다. “이 자식 혀 꼬이는 것 봐.” “맛이 갔군! 반말 찍찍 까대고!” “야! 이 씨발. 개같은 선배 새끼들아!!! 내가 반말 까는 데. 불만 있냐? 썅∼!” 별거 아닌 일에 괜시리 열받은 데다, 약 기운을 빌려 터무니없이 대담해진 지해가 테이블을 쾅하고 내리쳤다.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다들 흐뭇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지해는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어이구, 저 새끼. 이제 약발 좀 받나본데.” “기대가 커. 기대가.” “벌써 한 바퀴 다 돌았잖아. 다시 네 차례야.” 아까 자신이 한 다음에 두 명밖에 더 안 했는데 한 바퀴를 다 돌았다니 말도 안 된다. 그것도 모를 정도로 취하진 않았다. “…진…짜? 에이…. 아~닌 것 같은데.” “맞다니깐.” 경서가 잠깐의 틈도 없이 딱 잘라서 대답했다. 저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해버리면 이쪽에서 할 말이 없다. 어차피 막 가는 날이다. 될 대로 되라다, 젠장. 될 대로 되라 “좋…아… 그럼. 이번엔… 뭔가를 보여주지!” 지해는 태준이 내미는 넥타이를 눈가에 갖다대고 뒤통수에 한 바퀴 빙 둘렀다. 제 딴에는 질끈 동여맨다고 하는데도, 벌써 손에 힘이 빠졌는지 잘 되지 않는다. “야, 야! 태준아. 네가 다시 묶어줘! 애들 장난하냐 시방?” 보다 못한 태준이 옆에서 다시 매어준다. 너무 꽉 맨 것 같다. 눈가와 머리통이 조여드는 것 같은데…… 말하기도 귀찮아서 내버려뒀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아프면 어떻고 간지러우면 또 어떠냔 말이다. 눈을 가리니까 오히려 좋다. 너무너무 좋다.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정말 좋다. 계속 이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면… 아무런 다른 생각도 안 떠올랐으면… 그냥 정신없이 마시고 떠들면서 머릿속을 깡그리 비워버렸으면…. “파인애플.” “파인…애플? 좋아. 기다려라, 빠인 애뿌울… 내가 완벽하게 먹어주마.” 이쑤시개를 들고 과일 접시 위의 허공을 휘젓기 시작했다. 손에 뭐가 잡히지를 않는다. 너무 취했구나 싶다. 냄새도 안 느껴진다. 사실 감각이란 건 상실한 지 오래. 그냥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는 기분과 귓전이 따가울 정도로 요란스레 쿵쾅거리는 심장이 지금 느낄 수 있는 것의 전부다. 그리고 발에 땅이 닿지 않을 때 느껴지기 마련인 오싹오싹한 불안감. 거기에 그 불안감이 몰고 오는 묘한 쾌감까지. “누가 완벽하게 먹는다는 거야. 네가? 우리가?” 경서가 허리춤에 찬 청회색의 구찌 벨트를 재빨리 풀러 지해의 왼쪽에 있는 택기에게 던지면서 말했다. “저 새끼 손목 빨리 묶어.” “옆방 정말 시끄럽네요. 주의 좀 줬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됐다 싶었는지 액숀가면이 깨끗한 새 재떨이와 얼음통을 갖고 들어왔다. 처음에 가져다 두었던 얼음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녹은 얼음이 거의 물이 되어가고 있었고, 두 개의 재떨이 모두 지저분해져 있었다. “남자 모델들 몇 명이 왔어요. 연예인들 노는 게 좀 시끄럽잖아요. 저희 클럽은 원래―” “모델들?” “네. 저희 클럽은 원래 연예인들은 예약을 잘 안 받으려고 하는데. 연예인들 오면 문제도 많이 일어나고, 시끄럽고, 물도 나빠지구요. 그래도 그중 한 분이 워낙 여기 단골이라서….”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나이트는 용돈 모아 큰 맘 먹고 오는 부킹용 여자애들은 늘어날지 몰라도 궁극적인 물주인 귀공자님들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더듬거리면서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웨이터의 얼굴을, 정욱은 이제야 비로소 쳐다보았다. 비굴함이 진정한 상품 가치로서 인정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구두닦이나 짱개 배달부조차 깍듯하면서도 당당하게 굴어야 은근히 대접받는 사회에서 나이트클럽 웨이터가 자존심 좀 세우는 척 해봤자 눈꼴신 일일 뿐. “단골이라 조용히 좀 놀라는 말도 못 한다…?” “저…… 단골이라도 점잖으신 분이면 말씀을 드리겠는데, 성격이 워낙 좀… 그래서요.” “알았어. 나가봐요.” “아아∼ 놔요, 이거! 갑자기 왜 이래!!” 테이블 위에 있던 접시며 술병이며 술잔들이 한꺼번에 밑으로 와장창창 쓸어 내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리운 채, 양 손목은 머리 위로 잡아당겨져서 벨트에 꽉 묶인 채로. 손에 들고 있던 유일한 흉기(!)인 이쑤시개부터 살포시 뺏기고, 그나마 온전히 발버둥치지도 못하고 흐느적대기만 하는 다리를 두 놈한테 한 짝씩 꽉 붙들린 상태에서 저런 소리를 듣는 건…… 정말 무섭다. 더 무서운 건, 그 소음만이 가득한 암흑 속 한켠에서 새어나오는 사람의 웃음 소리. 어이가 없다는 듯, 아니 정말 재밌다는 듯 픽픽 던져대는 웃음 소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을 늦추면서 이 상황이 현실임을 깨우쳐준다. 약기운으로 몽롱하고 무감각하게 붕 떠 있는 상태에서 문득문득 생경한 현실이 느껴지는 건 차라리 더 비참하다. “그만들… 둬! 장난도. 너무 오래 끌면… 재미없어.” 이 목소리가 누구 목소리지? 이게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맞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질질 흘리는… 빙구같은… “자­앙난이∼♬ 아∼닌데∼♬” 장난은 아니었다. 와장창창 한큐에 치워진 테이블 위에는 이제 술병과 안주 접시 대신 오늘의 메인 요리인 지해가 올려져 있었다. 크림색 셔츠는 단추가 전부 끌러져 위로 젖혀지고, 은회색 시거렛 팬츠가 속옷과 함께 거칠게 잡아당겨져 왼쪽 발목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장난일 것 같고, 실제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이기를 바라게 된다. 이러다가도 갑자기 ‘깜짝 놀랬지?’ 하고 묶인 손과 가린 눈을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가망성 없는 기대를 하면서. 이런 일까지 일어나다니. 이건 아니야. 몇 개의 손인지 알 수 없는 손들이 유두를 비틀고, 사타구니를 더듬는다. 목덜미와 귓볼을 빨아대는, 흥분에 찬 목소리들이 온 몸을 질척하니 핥아내린다. 이렇게 노리갯감처럼 마냥 당하기는 싫은데, 점점 몸이 처지고 의식이 가물가물 하면서 꼼짝할 수가 없어진다. “임마, 살살 귀여워해줄 테니까 너도 즐겨. 반항해봤자 너만 다쳐.” “어차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으면서 왜 그래.” “이 새끼 몸 뒤트는 것 봐. 존나 요염하네.” “좋으면서 왠 앙탈이야? 이런 기회 흔하게 오는 거 아니래두.” “눕혀놓고 보니까 이렇게 섹시한데 말야. 진작에 튕기지 말고 말 좀 잘 듣지 그랬냐.” “아까 피날레 때 그 반바지 속의 끈빤쓰. 쥑이더라! 그대로 덮치고 싶더라니까.” “와, 하하하. 이것 봐. 젖꼭지 좀 건드려줬다고 여기가 금방 단단해졌다. 이 자식 타고났어. 타고났다구!” “난 첨 봤을 때 단박에 알아챘지. 이 새끼는 남자 맛을 아는 놈이야.” 차라리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지해는 온 몸에 힘이 주욱 빠지면서 숨이 턱턱 막혀왔다. 머릿속이 점점 아득해져만 간다. 주위의 모든 소리는 동굴 벽을 웅웅 울리는 메아리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음으로 변해, 깊은 어둠 속으로 흩어져가고 있었다. 저 컴컴하고 길고 긴 굴의 끄트머리에 누군가 밝은 빛을 내뿜으며 서 있는 것 같았다. 저게 누구지? 누군지 모르지만, 어서 데려가주면 좋겠다. 여기로부터, 이 질식할 것 같은 어둠으로부터 데려가줬으면… 빨리…… 밝은 곳으로…… 어서. “이상하다. 이쯤이면 완전히 약발이 올라서 지가 먼저 좋다고 날뛰어야 될 텐데. 태준아, 너 저 새끼 벌주에 아까 내가 준 약 다 탔지?” “타긴 다 탔는데….” “근데 왜 이렇게 잠잠하지?” “형. 잠깐 이쪽으로 와봐.” 태준이 경서의 남색 실크 셔츠 소매자락을 잡아당겨 문쪽으로 이끌며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 좀 겁나. 그게 양이 얼마나 많았는 줄이나 알어? 처음인데 위험하잖아. 술도 잔뜩 먹인데다가 대마초에 엑스터시에, 거기다 물뽕까지 그만큼씩이나…… 잘못하면 애 잡을까봐―” “이 새끼가∼!! 누가 너더러 그딴 걱정 하래!! 그까짓거 갖구 씨발∼!! 새꺄, 너 지난 주에 방콕 갔을 때 생각 안 나? 다 저만큼 했어도 멀쩡했다구.” “멀쩡하긴 누가 멀쩡해. 형은 옆방에서 딴짓 하느라 몰랐지만, 진선이는 죽다 살아났어. 게워내구, 찬물로 샤워시키구, 뒷처리는 내가 다했다구. 저 녀석은 처음이잖아. 가뜩이나 몸도 안 좋던데. 나 계속 신경이 쓰여서….” “너, 이제 와서 왜 이래! 너두 저 새끼 노리고 있었잖아.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먹고 싶다구 했지 약으로 죽이고 싶다고는 안 했어!” “거기 두 분 이제 그쯤 해 두시고 여기나 동참하시지.” 나머지 셋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입씨름에 열중하던 경서와 태준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테이블 쪽을 돌아보았다. 상민은 거의 까무러쳐 있다시피 한 지해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마요네즈를 듬뿍 바른 손가락으로 엉덩이 골짜기 사이 주름을 문지르며 배꼽 주변을 핥고 있었고, 택기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지해의 머리맡에 앉아 입 안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쑤셔 넣으려 하고 있었다. 지해는 이미 정신을 잃었는지 택기의 애처로운(?)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 입에서 그의 커다랗게 발기한 페니스가 자꾸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얼마나 재미가 없으면 잠이 들었겠냐. 그만 쪼물딱거리고 뒤집어 봐. 니네 우선 다 비켜. 이제 한번 본격적으로 놀아봐야지.” “형, 저것 봐!! 애 상태가 이상하잖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잠든 거야.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던 거 못 봤냐. 깨우면 돼.” “아니야. 쟤 헐떡거리는 게 암만해도 이상해. 그 눈 가린 것 좀 풀어봐. 얼굴 좀 자세히 보게.” “이 새끼가 점점……!!! 너 자꾸 이럴래, 앙?!!” 혼자 빈 방에 앉아 술이나 들이붓는 게 별 재미가 있을 까닭이 없다. 옆방의 괴성은 점점 커지고, 급기야는 싸움까지 시작했는지 와창창창 깨부수는 소리, 목청 높여 질러대는 큰 소리들이 언뜻언뜻 새어들어왔다. 액숀가면이 룸을 나서자마자 정욱은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는 알 수 없었다. 우선 여기부터 빠져나가고 보자 싶었다. 명주는 민혁이 알아서 데려다 준다고 했으니, 타고온 차는 자기 혼자 타고 돌아가면 될 것이다. 혼자서 적막함 속에 이런 저런 생각 하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명주랑 민혁이 쨍알쨍알 툭탁거리는 거라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아니. 지금 이런 기분으로 명주의 귀찮은 수다를 받아주다보면 폭발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별 느낌없는 애라도 흉한 모습까지 보여줄 순 없다. 정욱이 있던 VIP 룸은 통로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정욱은 옷걸이에서 코트를 챙겨입다가 모니터 속에서 신나게 춤추고 있는 민혁과 명주의 모습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역시 그냥 잘 놀라고 놔두고 가는 게 서로 좋은 일이지 싶다. 방문을 나서서 좁은 통로를 걷는데, 아까부터 내내 시끄럽게 하던 문제의 그 옆방 문이 덜컥 열리며, 키가 거의 정욱만한 훤칠한 녀석 한 명이 튀어 나오더니 급히 바깥쪽으로 걸어가면서 손에 움켜쥔 핸드폰의 버튼을 찌익 누르고 귀에 갖다댄다. “현규형!!! 금방 받으시네요. 저 태준인데요.” 모델들이라더니 키는 크군, 하며 도대체 뭘하고 놀았길래 그렇게 시끄러웠었나 싶어, 정욱은 무심코 한 뼘만큼 빠꼼히 열려진 문 안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한 놈을 홀딱 벗겨서 테이블 위에 눕혀 놓은 채로 세 녀석이 앞, 뒤, 옆에 들러붙어 있다. 지저분하게도 노는군. 분명히 사내 녀석이 틀림없는데 애새끼 하나를 놓고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저 짓거리들 하느라고 그렇게 시끄러웠나. 왠지 쉽사리 눈길이 떼어지지 않는다. 호기심인지 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이 열려져서 누가 들여다보는 것도 모르고, 세 놈 다 굉장히 열중해 있었다. 도대체 가운데 뉘어놓은 놈이 어떤 녀석이길래……. 그냥 축 늘어져서 기계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은회색 바지는 바닥에 떨어져 있고, 흰색 T자 팬티가 한쪽 발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리와 같이 흔들리고. 온통 풀어헤쳐진 크림색 셔츠는 손목 끝까지 벗겨져 젖혀 있고. 이런~ 손목이 묶여 있다. 얼굴이나 한번 보자…… ……! 머리가 멍해졌다. 일단 드는 생각은…… 저게 누구지. 그리고…… 저 녀석이 왜 저기 있지…. 대체 언제부터 저기서 저런 모습으로…… 뭘 하고 있는 거지. “야, 너! 뭘 훔쳐 보는 거야? 씨발, 빨랑 안 꺼져?” 지해의 입에다 지 물건을 쑤셔 박고서는 안 되는 피스톤질을 억지로 계속하던, 남색 실크셔츠를 입은 녀석이 제일 먼저 정욱을 발견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계속 보고 싶으면 봐도 좋긴 한데. 보려면 들어와서 보든가. 아니면 나가든가” 중간에 앉아서 가슴팍을 빨아 제끼던 놈이 뒤를 스윽 돌아보며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너도 끼고 싶어? 어차피 한 명 나갔으니까 들어와. 그 대신 니가 맨 끝이야.” 지해의 두 다리를 어깨에 메고 뒷구멍에 지 물건을 들이박고 밀어붙이던 녀석이 윙크를 찡긋 던진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손짓을 해댄다. 갑자기 정신이 버쩍 든다. “이 씹쌔끼들!!!!! 당장 못 비켜!!!!!” “갑자기 또 왜 저래?” “이봐, 아무래도 룸을 잘못 찾아왔나본데 우리는 바쁘니까 조용히 좀 꺼져주시지.” “너부터 꺼져, 이 개새꺄!!!!!” 말과 동시에 손부터, 그 다음엔 발이 나갔다. 지해의 뒤를 유린하던 녀석의 뒷덜미를 낚아채 냅다 던져버리고는 번지르르하게 젖은 채 밖으로 덜렁덜렁 드러난 물건을 발로 힘껏 내리깠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녀석이 몸을 움츠리며 바닥을 구른다. 축늘어진 지해의 입안에다 억지로 피스톤질을 하던 남색 실크셔츠의 녀석은 재빨리 물건을 꺼내 바지춤부터 추스린다. 문쪽으로 등을 보이고 쭈그려 앉아서 가슴팍을 핥던 또다른 녀석이 어느새 일어나 옆에서 덤벼든다. 휘두르는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 녀석의 안면에 팔꿈치로 한 방 단단히 먹였다. 순간 피가 팍 튀면서 빠직, 하고 뭐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분이 풀리지 않는다. 테이블 위로 쓰러지려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오른쪽 턱을 주먹으로 갈겨서 바닥에 넘어뜨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통수를 찧으면서 뻗어버린다. “뭔데 이 개지랄이야?!! 너 누구야?!!!!!”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지기나 해!” 엉거주춤하면서 문쪽을 쓱 보던 놈이 그래도 술발인지 약발인지 버티려 해 본다. 싸움이라고는 별로 해본 적도 없던 것 같은 이 무리 중에 그나마 제일 체격이 있어보이는 놈이었다. 남색 셔츠를 입은 이 녀석이 슬며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은제 포크를 집어들고 일어선다. 아직도 불룩한 바지 앞섶이 보이는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살려서 내보내지 않을 거다. 죽여버릴 거다. 문득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 있던 지해가 헐떡이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틀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푸르스름한 핏발이 섰다. 약이라도 먹인 건지 뭔가 심상치 않다. 그냥 오래 두면 안 될 것 같다. 문 옆에 서 있던 옷걸이를 집어들어 잽싸게 걸린 옷들을 털어낸 뒤, 포크를 들고 덤벼드는 녀석의 머리통에 내리찍었다. 그대로 쾅하고 나자빠진 녀석의 손목을 발로 차서 포크를 날려버리고, 가슴팍을 다시 한번 으스러지도록 밟아줬다. 쓰러진 녀석의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 약병이 또르르르 굴러나오는 게 눈에 띄었다.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지해를 얼른 안아들어 어깨에 멨다. 발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속옷이 거추장스러워 잡아채서 던져 버렸다. 허벅지 사이를 타고 흐르는 한 줄기 피가 안아든 손끝을 적셨다. 코뼈와 턱뼈가 부러진 채 쓰러져 있는 놈 위를 넘어가며 분이 안 풀려 아랫배를 힘껏 걷어찼다. 컥 소리를 내며 입에서 피를 내뿜는다. 다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쓰레기 같은 놈들. 감히 어디다 손을 대. 감히…… 이대로 홀랑 벗긴 채 사람들 앞에 데리고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다시 원래의 룸으로 들어갔다. 바지며 속옷이며 저 방에 있지만, 다시는 그 옷들은 걸치게 하고 싶지도 않다. 소파에 눕혀놓고 손목을 묶고 있던 벨트를 풀러냈다. 하얀 팔목에 선명하게 붉은 자국이 생겨 있다. 기가 막힌다. “씨팔. 니 몸 하나는 니가 지킬 수 있다더니…… 이게 다 뭐냐.” 겨우 이렇게 되려고, 그 잘난 자존심 찾아가면서 떠났던 건가 싶다. 이꼴 보자고 놔줬던가 싶다. 행여라도 이런 일이 있을줄 진작에 알았으면 절대로 안 보냈다. 차라리 직접 이 손으로 죽였으면 죽였지 절대로…… 갑자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감이 전혀 없다. 몇 달 만에 보는 녀석의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하얀 속살을 정신없이 매만져 봤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돌아오다니……… 추운지 피부 표면에 소름이 죽 돋아 있다. 얼른 집에 데려가서 뜨거운 물 속에 집어 넣어야겠다. 깨끗이 씻겨서 아무 생각없이 푹 재워야지. 확실히 전보다 더 마른 것 같다. 아까 무대 위에서 봤을 때도 그렇게 느꼈었지만, 가뜩이나 호리호리한 녀석이 팔도 다리도 허리도 더 야위어져 있다. 머리는 왜 이렇게 잘랐을까. 검은 머리… 하나도 안 어울린다. 손목에 매달려 있던 셔츠를 잡아당겨 제대로 입히고, 단추를 채워줬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수건을 집어서 다리 사이에 말라붙은 피부터 닦아냈다. 가슴 속에서 울컥 하는 뜨거운 덩어리가 치민다. 혹시나 싶어서 다리를 들어보니 피 말고 달리 흘러내리는 건 없는 것 같다. 피도 그나마 이제 멎은 것 같다. 자신이 입고 있던 진회색 코트를 벗어 팔에 꿰어 입혔다. 단추를 채우기 전에 갈비뼈가 앙상히 만져지는 가슴팍을 한번 쓸어내려 보는데, 심장 뛰는 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이 아주 없다고는 생각조차 안 했었지만, 지금은 숨을 쉬는지 아닌지조차도 알 수 없다. 헐떡이던 신음이 오히려 잦아들어 있었다.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지해야, 지해야!!! 정신차려.” 몇 번이나 계속 부르면서 흔들어 봐도 아무 반응이 없다. “나야, 나!! 눈 좀 떠 봐, 이 새꺄∼!!!!” 뺨을 툭툭 치고, 팔다리를 흔들고……. 별짓을 다 해도 묵묵부답이다. 전혀 못 듣나 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일단 얼음통에 있는 얼음을 한 움큼 덥썩 집어, 안 쓴 채 그대로 있는 새 물수건 사이에 끼워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어떡해야 하지.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이렇게 망가진 꼴을 남한테 보이긴 싫은데 어쩌지…… 도대체 무슨 약을 얼마큼이나 먹인 걸까. 뭐가 뭔지도 모르고 병원에 데려갔다가 덜컥 이상한 소문에라도 휘말리는 건 아닐까. 민혁이! 민혁이를 불러와야겠다. 약에 대해선 줄줄 꿰는 놈이니까 응급 처치도 알겠지. 나중에 병원에 데려갈 때 데려가더라도 일단 빨리 손을 쓰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통로를 지나 홀로 뛰쳐나갔다. 느낌이 이상해서 손등으로 볼을 쑥 훑어내리니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나 보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쳤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서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까 모니터로 볼 때는 분명히 홀 한복판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었는데, 민혁이 없다. 이 새끼 어디 있는 거야. 명주도 눈에 안 띈다. 둘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거야. 삐죽삐죽 솟은 금발머리를 찾았다. 냉큼 달려가 뒷덜미를 잡아채는데 전혀 다른 얼굴이다. 죄송합니다 하기도 전에 불쾌한 눈초리를 거둔다. 부스 사이사이를 일일이 뒤지고 다니면서 좌석에 앉은 사람들마다 얼굴을 확인했다. 기분 나쁜 듯이 고개를 들어 대답하는 눈길. 눈길. 웨이터 한 명과 부딪쳐서 쟁반 위의 술병들을 깨빡치게 했다. 미안하다 소리 할 틈도 없다. 길 한복판에서 엄마를 잃은 어린애의 심정이 이런 걸까.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어디 있는 거야. 주저앉아서 목놓아 울고싶은 심정이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응급 처치는 포기하고 그냥 병원부터 달려가야 하나…… “정욱아∼!!! 너 여기서 뭐해?!! 뭐야, 왜 그래?!!!!” 이제 살았구나 싶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대답할 사이도 없이 민혁의 팔을 낚아채고 급한 걸음을 재촉했다. 눈이 똥그래져서 쳐다보는 명주가 잠깐 눈에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황급히 홀을 가로질러 가는데, 똑같은 초미니 원피스에 똑같은 긴 생머리를 한 아가씨 셋이서 늘쩡늘쩡 앞길을 가로막고 천천히 가고 있다. “야∼, 나 오늘 여기서 윤현규 봤다.” “언제?” “조금 아까 전에 화장실 갔다오다가. 윤현규 맞더라.” “뭐야?! 어디?! 어디 앉았어?” “몰라. 안 보여. 룸에 들어가 있나.” 어울리지 않는 신사도로 무장한 민혁이 아가씨들의 느린 행보에 맞춰 갑자기 페이스를 늦춘다. 그러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다. “잠깐만요.” 여자들 틈을 뚫고서, 민혁의 팔을 붙잡고 쏜살같이 지나갔다. 높은 힐을 신었던 여자 한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해 앞으로 꼬꾸라졌다. 뒤돌아보며 고개를 숙이는 민혁을 얼른 잡아끌었다. “야, 임마!!! 정욱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중에 얘기해 줄게. 지금은 말할 시간도 없어. 그 새끼가 내 손 안에 다시 들어 왔어. 이제 안 놓칠 거야. 모델 따위 당장 그만두게 할 거야. 가둬놓고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할 거야. 내가 보호해야 돼. 나밖에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 룸으로 가는 통로에 접어들었다. 아까 치고 박고 난리 부르스를 췄던 옆방 문이 또 열려 있었다. 엉겁결에 안을 들여다보았다. 홀에서 민혁을 찾느라 꽤나 시간을 지체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이 거짓말처럼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세 녀석이 온데 간데 없다. 깜짝 놀라 문 앞에 우뚝 섰다. 카펫 위를 치우던 청소부가 고개를 들어 정욱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베이지색 카펫에 방울방울 떨어져 있는 핏자국만이 아까 일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여기서 얼쩡거릴 시간이 없다. 왜 그러냐고 계속 묻는 민혁을 놔두고 자기들이 있던 룸으로 뛰어들어갔다. 아까 지해의 몸에 입혀놨던 코트만이 덩그마니 소파 위에 놓여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14. A WARNING SIGN A warning sign 경고신호였어 I missed the good part then I realized 좋은 시절을 다 놓친 다음에 깨달았지 I started looking and the bubble burst 주위를 둘러보니 거품은 깨졌고 I started looking for excuses 난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어 Come on in 이리 와 I've got to tell you what a state I'm in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말해줘야겠어 I've got to tell you in my loudest tones 아주 크고 확실한 목소리로 That I started looking for a warning sign 경고 신호를 찾고 있었다고 말해줄게 When the truth is 사실은 말이야 I miss you 난 네가 그리워 Yeah the truth is 그래 사실이야. That I miss you so. 난 네가 무지 그리워 And I'm tired 그리고 난 지쳤어 I should not have let you go 널 떠나게 하는 게 아니었지 So I crawl back into your open arms 그래서 난 너에게 돌아가고 있어 Yes I crawl back into your open arms 네 품 속으로 돌아가는 거야 (Warning Sign-Coldplay)☜ CLICK!! 지해가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천장이었다. 흰색 바탕에 오톨도톨한 엠보싱이 도드라지는 발포 벽지. 동그란 형광등을 불투명한 흰색 사각 플라스틱 하나로 달랑 덮은 모양의 심플한 조명등. 너른 창에 드리워진 두툼한 자카드 지의 아이보리색 커튼이 살짝 팔랑거리면서 스며드는 한 줄기 햇빛. 오후였다. 부옇게 흐려진 머리가 정상 가동을 시작하기까지 지해는 눈을 껌벅껌벅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협탁 위에 놓인 모던한 디자인의 은색 스탠드 외에 별다른 장식품이라고는 없이 오직 취침만을 위해 사용되는 듯한 방. 침대 머리맡의 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 액자를 발견하고, 비로소 이 방의 주인이 누구였던가 깨달을 즈음 포스터 속 인물이 방문을 빠꼼히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네?” “…아아… 네….” 갈라진 목소리로 한숨을 쉬듯 대답하면서 지해는 방 주인이 손에 말아쥐고 있는 영화 대본에 의미없는 시선을 고정했다. “너 이틀 동안 내리 잠만 잤던 거 알아?” “중간에 깬 적도 있긴 있었어요. 오늘…, 무슨 요일이에요?” “월요일.” 연한 카키그린의 폴로 셔츠와 헐렁한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에, 얇은 금테 안경을 낀 현규는 침대 중턱에 걸터앉아 지해의 이마를 짚어보고, 열은 이제 내렸군, 하고 중얼거리다가, 지해가 협탁 위 쟁반에 놓인 물통에 손을 뻗으려고 하자 재빨리 컵에 물을 따랐다. “자, 마셔.” “제가 마실게요. 이리―” “됐어.” 현규는 지해의 등 뒤로 손을 넣어 베게를 세운 뒤 몸을 일으켜 앉게 하고 입가에 컵을 대주었다. 허리를 찌르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자기 손으로 컵을 잡으려던 지해는 현규가 완강히 고개를 젓자, 그냥 포기하고 하는 대로 따랐다. 방 안에 오래 있어 아주 차갑지는 않게 된 시원한 물이 멍한 뒷골을 뻥 뚫는 듯한 자극을 주며 식도를 넘어갔다. 이제 좀 정신이 난다. 태준의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현규가 출발하며 미리 불러놓았던 앰뷸런스로 응급실에 실려간 뒤 지해는 곧 의식을 회복했다. 순간적이나마 위험할 정도로 떨어졌던 심박수도 의사의 빠른 조치로 정상으로 돌아오고, 위세척과 상처의 치료를 끝내고 링거까지 한 병 맞고 난 다음 병원을 나섰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현규가 소속된 기획사와 협약이 된 병원이라 약물 문제가 밖으로 알려진다거나 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냐, 감기 기운까지 있으면서 아무 약이나 넙죽넙죽 받아 먹냐’ 하는 의사의 잔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비밀이 지켜진다 해도 병원에 있던 사람들의 비공식적인 입방아까지 피하기는 사실 힘든 것이다. 상태를 봐서 며칠 입원시키는 게 어떨까 생각하던 현규는 쓸데없이 병원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한시라도 빨리 병원을 벗어나고자 하는 지해를 일단 자신의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병원에서 지해의 의식이 회복되고 한숨 돌리고 나자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집에 전화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니, 필요없다고 딱 잘라 거절해버린다. 유일한 가족인 형은 대학 합격 기념으로 사촌과 여행을 갔다고 했다.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다시 잠들었던 지해는 일요일 내내 죽은 듯이 잠만 자다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저…… 그만 가볼게요….” 지해가 이불을 들추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는 동작을 취하자, 현규는 애를 도로 침대 속 깊이 집어넣고 이불을 폭 뒤집어씌운 뒤 자기가 이불 끝자락을 단단히 깔고 앉았다. “가긴 어딜 가. 집에 아무도 없다며.” “혼자 있을 수 있어요.” “꼼짝 하기도 힘들어하면서 무슨! 여기 그냥 며칠 있어. 나도 마침 1월 초까지는 촬영 없으니까 한가해.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원래 어디 가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프랑스……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현규가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렇게 뜨고 지해를 쳐다보더니, 보기 좋게 웨이브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어떻게 알았어?” “어제 차 안에서 매니저 형한테 전화하시는 거 들었어요. 비행기랑 호텔 예약 취소시키라고.”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만.” 몸은 아직 힘이 없었지만, 지해는 이제 정신은 꽤나 또렷해져 있었다. 말을 자꾸 많이 하니까 정지 상태였던 두뇌 엔진이 금세 풀 가동을 시작한 듯 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가세요.” “됐어. 시간 남는데 할 일도 없고 해서 스키나 타러 갈까 한 거였는데 뭐. 마음 안 맞는 사람들이랑 다니느라고 신경 쓰는 것보다 이게 더 나아.” “프랑스에 스키를 타러 가요?” “프렌치 알프스. 알베르빌 알지? 옛날에 동계 올림픽 했던 데. 그 동네 근처에 「트와발레」라고 세계에서 제일 큰 스키장 있어. 나도 세 번이나 갔었는데도 아직 안 가본 코스들이 수두룩할 정도니까. 거긴 구석구석 다 섭렵하려면 한 달은 잡아야 돼.” 피부로 잘 안 와닿는 얘기에 지해가 그냥 아아, 하고 있자 현규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안 가도 된다구. 처량하지 않냐. 크리스마슨데 별 재미도 없는 사람들이랑 추운 데 가서 덜덜덜.” “처량한 것까진 잘 모르겠고 굉장히 아쉬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쉬울 거야 없지만.” 현규는 흐음, 하고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 한숨을 뱉었다. 지해는 괜히 미안해졌다. 자기 땜에 이 사람은 모처럼 맞는 휴가를 뺏긴 거다. “옳거니∼! 바로 그거닷∼!” 옳거니?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노땅스런 대사다. 지해는 자기 몸 상태도 잊고 슬며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너도 이제 내년 초까지는 스케줄 없지?” “…네.” “하긴 연말연시에 인간들이 마감하느라고 바쁘니까 일거리들은 잘 안 만들지. 가수가 아니고서야….” “오락 프로 두어 개 섭외 들어왔나 보던데 다 거절했다나 봐요.” ‘넌 좀 비싸게 굴어도 돼. 허접한 데 얼굴 내밀 필요 없어’ 하던 박실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걸 알면 길길이 날뛸 텐데. 그 급한 성격에 화 좀 내다가 금방 풀어지겠지만, 태준이 관련됐다는 걸 알면 정말 무슨 난리를 칠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기억이 안 난다. 눈 가리고 손 묶이고 옷 벗겨지고…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암흑이다. 필름이 끊겼다. 무슨 일이 얼마큼 있었는지 짐작도 안 간다. 뭐, 안 봐도 비디오지만. 차라리 생각 안 나는 게 다행일까나. “…나랑 며칠만 갔다 오자. 춥지 않은 데로.” “네?” 딴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제대로 못 알아들은 지해가 큰 소리로 묻자, 현규는 약간 열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레든 글피든 너 움직일만 해지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이나 가자구. 기분 전환도 할 겸.” 그런데 왜 저 말이 따뜻한 남쪽 나라로 귀순하자는 말처럼 들리는 거지. 현규가 한 말의 내용을 깊이 생각해보기 앞서 지해는 풋 하는 웃음부터 먼저 나왔다. “왜 웃냐? 여행 가자는 말이 그렇게 웃기냐?” 느닷없는 웃음에 현규는 어이가 없다가도 마음이 좀 놓이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캐물었다. 지해가 아무 대답도 않고 그저 웃고만 있자, 현규는 뭐야, 왜 그래, 하고 계속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보채기 시작했다. 꽤 기뻐하는 것 같다. 좁다란 창문 틈을 파고드는 매서운 겨울 바람에 커튼이 가끔씩 팔랑거릴 때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 창백한 오후의 햇살이 한 줄기 실낱처럼 스며들었다. “됐어요. 살려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너무 신세지고 싶진 않아요.” 현규의 얼굴에서 웃음이 스르르 걷혔다. 입을 꾹 다물고 두 뺨을 움푹할 정도로 빨아들이더니 조금 열려진 문 틈을 슬쩍 쳐다본다. “저기…… 밖에 태준이 와 있거든.” “……!” “조금 전에 왔어…… 만나기 싫으면―” “아니요. 만나야죠.” 머뭇거리는 현규의 말을 자르며 지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빨리 얘기 끝내고, 빨리 추스리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자. “저… 그 전에.” “응? 뭐?” “좀 씻고 싶어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한 걸음 떼어놓기가 힘들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리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도와주겠다는 현규를 억지로 떼어놓고, 입고 있던 파자마를 벗고 욕실 거울 앞에 섰다. 파자마 입혀줄 때 다 봤겠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 좀 찝찝했다. 하지만 어차피 모델끼리는 백스테이지에서 옷 갈아입을 때 서로 벗은 몸쯤 보는 거야 흔한 일 아닌가. 새삼스럽다. 더구나 남자끼린데…… 남자끼린데…… 그래. 같은 남자끼리 이런 꼴이나 당하고…… 너도 보통 남자들처럼 남녀를 구분할 자격이 있는 거냐. 너는 보통 남자들이랑 틀리잖아. 너는 남자도 아니야. 그렇다고 여자는 더더욱 아니야…… ……그러면 너는 대체 뭐지? 눈 주위가 시커멓고, 누렇게 뜬 얼굴에, 입술은 허옇게 갈라진 낯선 녀석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아니, 그 녀석에게 자신이 묻고 있는 걸까? 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하지 말자.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거야, 정말. 최소한 얻어맞지는 않았나 보다. 불그스름한 자국이 몇 개 눈에 띄긴 했지만, 저게 맞아서 생긴 게 아니란 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간신히 욕실 벽을 짚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욕조 턱을 넘어섰다. 다리에 어찌나 힘이 안 들어가는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기만 하고 당최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정말 적응 안 된다. 짜증난다. 샤워기의 물을 틀고 상처 부위에 가까이 갖다 댔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에 잔뜩 긴장을 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치료를 받았는데도 물이 들어가니 너무 쓰라리다. 병원에서 상처를 드러내놓고 죽을 만큼 창피하던 순간이 떠올라 눈을 감고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치료까지 받았는데 왜 아직도 아픈 거야. 씨발, 이거 계약에 위배되잖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뒤 뚫리는 게 처음도 아닌데 처음보다 더 힘들군,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빠져 스르르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 자신의 뒤를 처음으로 뚫었던 그 새끼. 그 새끼가 쇼에 왔었다. 어떤 여자애를 옆에 끼고 와서는 눈도 한번 안 마주치고 가버렸지. 쇼가 끝난 다음에 어디로 갔을까. 그 여자애랑 어떤 사이일까. 지금 이런 꼴을 보면 그 새끼는 뭐라고 말할까……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은 그 상태 그대로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지해는 한참동안 일어날줄 몰랐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물이 다리를 적시고는 배수구 주위를 한 바퀴 휘몰아치며 쏟아져 들어갔다. “잘못했어, 안 했어?” “미안하다, 지해야.” “대답부터 먼저 해봐.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 “됐어. 그럼 빨리 꺼져. 당분간 내 눈에 띄지 마.”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미안한 거 필요없어. 실컷 잘못해놓고 미안하다면 다야? 씨발!” 얼굴을 보면 볼수록,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화가 난다. 남의 집에서 이러는 게 실례인 것 같아 꾹 누르고 있는데 미치겠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사라질 것이지 저러고 앉아서 뭘 어쩌자는 건가. 가끔씩 얼굴이나 볼까 말까 했던 그 세 명한테 당한 것보다 실제로 직접적으로 당하진 않았다지만 가장 친한 선배라고 믿고 따르던 이 인간한테 뒤통수 맞았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라고 구구하게 설명이라도 해야 할 참인가. “지해야. 정말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정말로 미안하긴 미안한가 보다. 험한 소리 듣고 스타일 좀 구길지언정 그냥 넘어갈 순 없다는 건지. 저렇게 나오면 마음 약해진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더 이상 못 믿겠다. 모델이든 배우든 연기가 몸에 밴 사람들이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얼굴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젠 정말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할 거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게.” “뭘 어떻게 할 건데? 구체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 봐.” “………….” “형도 나랑 똑같은 일 당하라고 하면 할 수 있어? 그 씹새끼들 세 명. 최경서, 주상민, 심택기. 다 조져놓으라고 하면 할 수 있어?” “………….” “거봐. 대답 못하잖아, 씨발. 관둬.” 지해는 남의 집이라는 것도 잊고 일단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부터 빼어 물었다. 이집 주인은 필립 모리스를 핀다. 이 담배는 다 좋은데 포장이 꽝이야. 전혀 지금 상황이랑 관계 없는 생각을 하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위세척하느라 엉망이 된 목구멍이 쓰라렸다. 혀가 얼얼했다. 입안도 다 헐었다. 입안이 까지고 헐은 건 위세척 때문만이 아닐 거다. 무슨 짓을 얼마큼 한 거야. 제기랄. “그 녀석들 이미 꽤 혼 좀 났던데.” 끼어들지 않고 옆에서 보고만 있던 현규가 한 마디 거들었다. 지해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냥 멀뚱히 쳐다보았다. “태준이가 조져놓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게 아닐걸. 이미 누가 너 대신 반 죽여 놨더라.”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도 몰라.”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준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중에 가보니까 다 여기저기 깨져갖구 자빠져 있더라구.” “넌 옆방에 옮겨다 놨더군.”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경황이 없어서 알아볼 시간도 없었구.” “우리는 네가 급하니까, 그 새끼들은 일단 웨이터들한테 맡기고 그냥 나왔지. 그 다음은 난 잘 몰라.” “많이 다쳤어요. 상민이는 코가 부러졌구, 경서형은 머리가 깨졌구, 택기는 불알 한 쪽이 터져서….” “지해 넌 누가 그랬는지 모르니?” 테니스 경기 관객이라도 된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지해는 얘기의 화살이 자신한테 날아오자 갑자기 할 말이 없었다. 어떤 의협심 강한 시민이 지나가다가 불의를 못 참고 주먹질 한판이라도 한 건가. 모르겠다. 전혀 생각 안 난다. “기억 안 날 거에요. 물뽕 먹인 애들 쳐놓고 그 다음날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하는 애 없더라구요.” “그게 GHB인가 그거지? 24시간 내에 인체를 빠져나가기 때문에 사후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거.” “네.” “요샌 별게 다 있어. 나 어렸을 땐 그런 약 없었는데.” “그때도 있었어요.” “그때가 언젠지 니가 알기나 해?” “그 약은 20년 전부터 있었어요.” “야, 임마. 20년 전에는 나도 초등학생이야.” 어,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이게 아닌데. 태준을 좀 갈구는 분위기여야 하는데, 이거…… 저 둘이서 뭐하는 거지? “태준이 형!” “………….” “웃으면서 얼렁뚱땅 넘길 생각 하지 마. 형 덕택에 안 죽은 건지도 모르지만 나 아직 형 용서 안 했어.” “미안하다.” 태준이 금세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게 역력히 보인다. 아까 꽤나 미안해 하는 것 같던 그 새끼는 어디 간 건지. 지해는 슬며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선배님도 괜히 분위기 초치지 마세요. 저 아직 화 안 풀렸어요.” 현규도 이미 얼굴을 반쯤 뒤로 돌린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역시 남의 일이다. 안 당해봤기 때문에 모르는 거다. 제기랄, 하는 지해의 목소리만 담배 연기처럼 공허하게 거실 안에 흩어졌다. “근데 태준이 형이 왜 하필 선배님을 부른 거죠?” “네가 내 색시니까.” “네?!” “우리 토요일날 결혼했잖아. 기억 안 나?”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택시를 불러서 혼자 가겠다고 박박 우기는 지해를 결국 현규가 직접 차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태준이 다녀간 다음, 열이 뻗쳐서 파자마 바람으로라도 당장 나서려고 하는 지해의 고집을 결국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주소가 노출된 집은 따로 있고, 여기는 가끔 어쩌다 한번씩만 머무는 아파트라는데도 어떻게들 알았는지 빠순이 몇 명이 진을 치고 있다가 차에 오르는 둘을 보고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현규도 이제 만성이 됐는지, 또 옮겨야겠군, 하며 지해에게, 니네 동네 아파트 값은 얼마나 하냐, 하고 물어올 뿐이었다. “까불지 마시고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죠.” “진짜야.” “저 기운 없어요.” 싱글벙글하며 앞만 보고 운전하던 현규가 선글라스 너머로 지해의 얼굴을 스윽 살펴봤다.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것 같던 녀석이 언제 그랬더냐 싶게 살아나서 움직이고 말하고 화도 내고 하니 너무 신기한가 보다. 무엇보다 자기가 살려놨다는 사실이 가장 대견할 것이다. “경서 녀석이 말 듣는 사람이 이쪽 동네에 몇 명 안 되거든.” “그 중에 하나가 선배님이라구요?” “아, 그 선배님 소리 좀 빼라. 그냥 형이라고 해.” “그러죠 뭐. 그럼 그 중 하나가 형이라구요?” “응.” 보통 애들이라면 현규 앞에서 쭈삣쭈삣 감히 선배 소리도 제대로 못 하는데, 이 자식은 정말 거침이 없다. 현규는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떠올리며 또 한번 지해를 곁눈질했다. “왜요?” “고등학교 후배니까.” “그 자식이요?” “아마 그렇겠지? 내가 후배일 리는 없지 않겠냐?” 으으∼ 하고 잠시 할 말을 잃은 지해를 또 곁눈질하며 현규는 또 웃고 있었다. “어느 고등학교 나오셨는데요?” “상원.” “그….” “응, 그 깡패 학교. 학원 비리의 온상. 서울 시내 인문고 중 조폭 배출 비율 1위. 우리 학교 선후배 관계는 엄격하거든. 아무리 개망나니라도 선배 말 안 듣는 후배란 있을 수 없지.” “그 자식이….” “경서가 굉장한 개망나니지. 그래도 그 녀석이 선배 말은 잘 듣는다. 이쪽 동네에 상원 출신이 몇 안 되니까 단결 화합이 더욱 확실히 되는 편이야. 우리 학교가.” “그게 과연 단결 화합일까… 하는 생각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큰 싸이클 중 하나가 그 지랄같은 학연 아니냐. 학연을 무시하는 놈은 어떻게 보면 사회의 순리를 거스르는 낙오자라구.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잘 몰라요.” “몰라도 되는데 알면 더 좋아.” “어떻게 좋아요?” “살기가 더 편하지.” 가만히 그 말의 울림을 음미하는 듯 지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편하게 사는 게 좋으세요?” 잠시 뜸을 들이던 지해가 창밖을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이사온 지 석 달이 넘었어도 여전히 주변 길이 눈에 채 익지 않았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아, 저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힘들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엘리베이터도 없이 계단식으로 된 다세대 주택인 걸 알고, 현규가 3층까지 업어다 주겠다는 걸 펄쩍 뛰며 말린 뒤 지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쉽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프라이드만한 크기라 문제 안 될 거라고 큰소리 땅땅 치던 현규의 포르셰 911 카레라도 이 좁은 골목에서는 영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오던 트럭과 동시에 지나가질 못해 서로 비켜주고 어쩌고 하느라, 현규는, 골목 어귀에 서서 자기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해에게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 대충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 버려도 별 무리가 없겠다 싶은 타이밍에 지해는 건물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일이 많아지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불규칙해지면서 지해는 더 이상 이모 댁에 얹혀있기가 영 불편했다. 아무리 살금살금 들어와도 새벽에 문 열리는 소리는 꼭 이모나 이모부 중 한 분을 깨우곤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서면 방을 함께 쓰는 형을 또다시 깨우게 되는 것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나중에 돈을 더 모으면 좋은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무조건 에이전시 사무실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얻는다고 얻은 집이었다. 땅값 비싼 동네라 전세값이 비싸다든가 하는 불만은 있었어도, 자기가 직접 번 돈으로 얻은 곳이라는 사실에 마냥 좋기만 했다. 잠깐이라도 집에 있을 때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지후는 남은 고3 기간 동안 여전히 이모댁에 머물렀었다. 전처럼 지해가 수발을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험 끝날 때까진 꼭 거기 있으라는 이모의 엄명도 있었지만, 이 집에 정을 못 붙이는 것 같았다. 이제는 수험생도 아니고 자유로운 신분인 주제에 여전히 그 집에서 자는 일이 더 많았다. 왠지 이 집은 지해 혼자 사는 집처럼 되어 있었다. 걸어오면서 보니 건물 바로 옆에 붙은 한 뼘만한 주차장에 근사한 할리 한 대가 세워져 있다. 몇천만원씩이나 되는 오토바이를 탈 사람이 이 건물에는 없을 텐데, 하며, 밖에서는 안이 거의 안 보이는 진한 갈색의 반투명 유리 현관문을 밀고 들어섰다. 순간 거의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을 뻔하다가 지해는 간신히 유리문의 기다란 철제 손잡이에 의지하여 버티고 섰다. 1층 맨 아래쪽 계단에 정욱이 긴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BGM : Playground Love - Air☜ CLICK!! “…여긴…… 어쩐 일이냐?” 잠깐 동안 찌르는 듯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던 지해가 서서히 눈길을 내리깔며 먼저 입을 뗐다. 정욱은 회색과 갈색과 검은색이 교묘하게 섞인 심플한 디자인의 밍크 점퍼 속에 검은색 니트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냥 진한 회색으로만 보이는 모직 바지는 자세히 보면 흑백의 자잘한 하운드투쓰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왜 왔을 것 같냐?” 남자 옷이라 너무 반지르르하게 보이지 않도록 밍크털의 숨을 죽이는 가공을 한 것이었지만, 밍크 특유의 광택은 여전히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컴컴한 이 공간 안에서 정욱의 탄력있는 구릿빛 얼굴은 좀 어두워 보였고, 칠흑처럼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와 검게 윤이 도는 머리카락만 겉옷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며 도드라졌다. 기억 속에서 가끔씩 꺼내보던 얼굴. 그 기품있고 세련된 실루엣. 지해는 새삼스럽게 마치 잊어버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정욱의 모습을, 그리고 처음으로 저 녀석 때문에 가슴 떨렸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정욱은 서너 계단에 걸쳐서 다리를 비스듬히 뻗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대고 앉아 있어, 검은색 닥터 마틴 밑창에 조그만 자갈이 하나 박혀 있는 것까지 눈에 띄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지해를 천천히 주욱 훑어보고나서 정욱이 벌떡 일어섰다. 순간, 지해는 움찔 하며 반 발짝 물러서다가 이번에는 후들거리던 무릎이 정말로 꺾여 유리문을 타고 스르르 반쯤 미끄러지던 걸 간신히 엉거주춤 멈췄다. 하지만 한번 중심을 잃고 나니 똑바로 서기가 영 쉽지 않아 계속 휘청이다가 결국은 주저앉고 말았다…… 제기랄…… “업혀.” “무슨 소리야.” “업히라면 업혀. 그냥 둘러메고 올라가기 전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말 들어.” 대답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이 정욱은 말을 뱉자마자 곧바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등을 보이며 쭈그리고 앉았다. 싫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얕잡아 보인다 해도 너한테만은 그러고 싶지 않아. 너한테만은 지저분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아무리 비참하게 망가져 있어도 네 앞에서만은 최대한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너한테 내가 해준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후줄근한 모습 따위나 기억하게 하기는 죽기보다 싫다. “발 좀 헛디딘 것 갖고 오버하지 마.” “그래?” 정욱이 아직도 엉거주춤 구부린 채로 고개만 뒤로 돌려 지해를 잠깐 쳐다보더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일어선다. “그럼 일어나. 올라가자.” 한 층 올라가는 계단이 이렇게 많았던가? 이 건물 천장이 이렇게 높았었나? 힘없는 다리에 체중을 싣고, 자꾸만 축 늘어지는 몸에 억지로 채찍질을 해서 한 계단 한 계단 발걸음을 디뎠다. 처음 1층은 그래도 제법 평범한 속도로 올라갔던 것 같았다. 물론 한 달음에 두어 계단씩 파닥닥 뛰어오르내리던 그 페이스는 전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있는 힘껏 사력을 다해. 일생일대의 명연기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정욱은 한 계단쯤 아래에서 보조를 맞춰 천천히 따라 올라왔다. 결국 손도 안 대려던 난간에 겨우 몸을 의지해서 3층까지 다 올라왔을 때는, 등산이라도 한 것처럼, 현규에게 빌려입고 온 티셔츠 등짝이 역시 현규가 빌려준 파카 속에서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딩딩 울리는 머리. 뱃속에서는 옅은 구역질까지 인다. 문 옆에 있는 소화기 밑에서 열쇠를 꺼내는 척 하면서 벽에 머리와 몸을 기대 가쁜 숨을 몰래 몰아쉬었다. 그런다고 눈치채지 못할 정욱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땀 흘리는 것 좀 봐라.” 허리를 구부린 채 벽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지해를 정욱이 일으켜서 벽에 등을 기대게 하고, 땀에 젖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며 말했다. “시끄…러.” “뭐?!” 정욱이 기가 막힌 듯, 부아가 치미는 듯, 꽤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네 신발 밑창.” “……?” “……자갈… 때문에… 계속 소리 나.” 정욱은 그제서야 신발 바닥을 들어서 보았다. 공기알 만한 자갈이 하나 박혀 있었다. 발을 내리고 살짝 걸음을 디뎌보니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돌 긁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내내 몰랐었다. 온 신경이 이 고집스런 녀석의 안타까운 뒷모습에 집중돼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안 나는지 전혀… “이 등신아.” 정욱은 지해의 한쪽 어깨를 왼손으로 꽉 잡아 벽에다 그대로 기대 놓고 차갑게 축축해진 이마를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더듬었다. 손가락이 관자놀이 근처쯤 가자, 팔딱팔딱 뛰노는 맥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살아있다. 손가락을 떼고 그 자리에 입술을 갖다댔다. 생명의 리듬이 입술을 통해 파고 들어 머리 끝까지 솟구쳐 오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천천히 입술을 떼면서 마주친 갈색 눈동자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담고 정욱의 눈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들어와.” 이틀 비워놓았는데도 12월의 날씨 탓인지 집안은 썰렁했다. 생각보다는 안이 좁지 않았다. 크기는 다 작아도 방이 세 개. 넓진 않아도 TV 앞에 대여섯명 모여 앉을 공간은 충분히 되는 거실엔 길다란 소파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거실과 그대로 이어진 부엌엔 싱크대의 붙박이 간이 식탁 앞에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지해는 방에 들어가 보일러를 켜고,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정감 때문인지 이제 겨우 좀 버틸만 했다. “추운데 커피 마실래?” “뭐, 아무거든.” 침침한 거실 한구석에 놓인 전화기의 자동응답기에 연신 빨간 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핸드폰도 잃어버렸고, 집도 꼬박 비웠으니 전화통에 불이 났을 만도 하다. 차라리 이 숨막히는 분위기를 응답 메시지로라도 메우는 게 나을지도. 아니지. 딴 때 같으면 몰라도 지금 와 있는 메시지들은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저 녀석이 듣게 할 순 없어.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집안을 휘휘 둘러보던 정욱도 자동응답기에 눈길을 주고 있는 걸 보고 지해는 괜시리 찔려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보일러가 충분히 달구어져 집안에 냉기가 가시고 훈훈해질 무렵, 커피 머신도 드르륵 소리를 내며 고소한 블루 마운틴의 향을 뿜어냈다. 지해가 머그컵 두 잔에 커피를 따라서 거실로 가지고 나오는데 거실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동응답기가 받게 그냥 둘까 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지해의 전담 매니저 형섭이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었냐, 수십 번도 더 전화했었다, 도대체 어디 있었냐, 하는 속사포처럼 퍼부어지는 뻔한 질문들을 지해는 그냥 대충대충 건성으로 받아쳤다.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을 하고 정욱이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턱 버티고 앉아 있는데, 형섭의 말이 귀에 잘 꽂힌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정욱은 밍크 점퍼를 벗어 옆에 대충 놓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운 냄새. 그리운 향기. 그리운 체취. 「아참, 윤희원 작가님이 너 여러 번 찾던데, 통화했냐?」 “아니. 왜?” 「몰라. 그냥 널 꼭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만.」 “알았어.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나자 갑자기 주위가 굉장히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겨울 해는 이미 오래전에 모습을 감췄고, 바깥은 제법 어둑어둑했다. “저녁 먹고 가라.” 정욱은 지해를 바라보며 얼굴을 약간 찌푸리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6시가 넘었다. 지해는 빨리 저녁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앗. 좀 천천히 일어날 것을……아차 싶었다. 갑자기 눈 앞이 팽그르르 돌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바닥은 거센 풍랑을 만난 것처럼 마구 흔들리고, 집채만한 돌덩이가 어깨를 꾹꾹 짓눌러댔다. 중심을 잡으려고 얼른 벽을 짚으면서 다른 손으로 눈을 가렸다. 팽글팽글 스핀을 먹고서 빠른 속도로 굴러내려가는 공 속에 갇힌 느낌. “야!” 정욱이 눈치를 까고 잽싸게 일어나 지해를 부축해 소파 위에 뉘었다. 눈 앞이 휙휙 돌아가는 느낌에 지해는 눈에서 손바닥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됐어.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새꺄!!” “…… 그냥 잠깐―” “닥쳐!!!!” 정욱이 순간적으로 폭발하자, 지해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흥분해서 화내는 건 아주 드물게 보는 것 같았다. “잠깐이고 자시고 간에, 너 내일 당장 내 아파트로 옮겨!” “…무슨 소리야?!” “한국말 못 알아들어? 나 더 이상―” 정욱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딩동∼’ 하고 초인종이 커다랗게 울렸다. 초인종이 두어 번 울리고 나서도 아무 대답이 없자, 거침없이 열쇠를 꽂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뜻밖에도, 엊그제부터 지해와 연락이 안 되어 계속 애가 타던 주원이었다. 진작부터 열쇠를 복사해 갖고 있던 주원은 이 집 형제가 늘 열쇠를 두는 곳인 소화기 밑에 열쇠가 없자, 혹시나 하고 몇 번 초인종을 눌러봤지만 대답이 없어 그냥 문을 따고 들어온 것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집이니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들어서다가, 거실에 있는 둘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양손에 들고 있던 식사꺼리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정욱은 중요한 순간에 들이닥친 주원을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언젠가 한번은 거쳐야 할 일. 어쩌면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토요일 밤에 지해가 감쪽같이 없어진 다음,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민혁과 명주를 한 마디 대답 없이 일단 돌려보내고, 지해가 어디로 사라졌을지 찾기 시작했었다. 한사코 대답을 안 하려는 웨이터들에게 돈을 좀 집어주고, 누가 와서 데려간 건지 알아냈다. 웨이터들을 닥치는 대로 붙들고 추궁을 했다. 그 시간대쯤에 주차장에서 어느어느 병원의 앰뷸런스를 봤다는 녀석이 나타났다.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그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더니 그 앰뷸런스로 실려온 환자는 지해가 아니라, 경서 3인조였다.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어느 녀석의 말에 지레짐작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어느 병원으로 들어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그 근처에서 갔을 만한 병원들을 샅샅이 뒤져 몇 군데나 더 쫓아가 봤지만 헛수고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안에 날이 밝았다. 이렇게 해가지고서는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새벽같이 세강 병원으로 달려가서는, 결국 원무행정과의 전산 직원 한 명을 일요일 아침부터 출근하게 만들었다. 그 직원 덕택에 확실히 알아낼 수 있긴 했다. 다만 세강 병원이 자랑하는 병원간 전산 네트워크를 이용하거나, 하다 못해 다른 병원의 전산망을 해킹해서 알아낼 것이라는 정욱의 학생다운 순진한 발상대로가 아니라, 다른 병원 행정과에 근무하는 지인들 몇 명에게 대충 전화를 때리다가 우연찮게 얻어걸린 것이긴 했지만. 이미 병원을 떠난 후라고 했다. 그 병원과 기획사 간의 협약으로 밖으로 알려 주지 않게 되어있는 걸 겨우 알아냈다고 공치사를 잊지 않는 직원에게 역시 사례를 잊지 않았다. 살아서 걸어나갔다는 사실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윤현규의 아파트를 알아내는 일은 차라리 쉬웠다. 그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성거리며, 당장 올라가서 끌고 내려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상태의 지해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자신이 다 안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일지 불 보듯 뻔했다. 이미 상처 입은 녀석을 더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다. 사람을 시켜 그 앞에서 감시를 하도록 했다. 예상보다 지해는 빨리 집을 나섰다.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바이크를 몰아 집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린지 얼마 되지 않아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지해가 나타났다. 그 얼굴을 보면서, 멀쩡하게 살아나줬구나 하는 안도감과 아파트로 쳐들어가 끌고 내려오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 곧장 자기 손으로 병원에 데려갔어야만 했다는 후회, 그 지경까지 스스로를 방치해놓은 지해 자신에 대한 분노…. 수만 가지 상념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잔뜩 긴장해 바르르 떨며 앉아 있는 주원에 대한 여러 갈래의 원망까지. “길게 얘기하지 않겠어. 너희 둘 사이의 사정에 대해선 난 몰라. 그건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결해.” 셋 사이에 감돌던 침묵을 정욱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며 깨뜨렸다. 지해는 소파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주원은 베란다를 향해 무릎을 감싸고 앉아 자기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저 녀석을 포기 못 하겠으니까. 그것만 말해두지.” 거역하기 힘든 오만함, 스스로에 대한 확신, 오랫동안 길게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담은 목소리. “……나도. 포기 못해.” “좋아. 그건 니 사정이니까…… 난 상관 안 해.” 주원이 여전히 외면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응수하자, 정욱이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주원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하지만 확실한 불안감이 얼굴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아, 그리고… 나 이젠 니가 죽든 살든, 또 자살 소동을 벌이든 어쩌든 신경 쓰지 않아.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차갑지만 정확하게 꽂히는 정욱의 말에, 순간 등에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주원의 몸이 딱 굳었다. 비디오 테이프에 정지 모션을 걸어놓기라도 한 듯 경직된 그대로 숨도 쉬지 않았다. “강정욱. 그만해. 말이 심해.” 소파에서 등을 떼고 바싹 당겨 앉은 지해가 깍지낀 두 손에 이마를 묻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라…… 오늘은 둘 다 그만 가.” 정욱과 주원 둘 다 아무 대꾸도 없었다. “나 좀 쉬게 해줘. 너무 피곤해.” “너. 이제는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싫대도 상관없어. 지구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씨발∼! 빨리 가라고 했지!!!!” 정욱이 한숨을 뱉으며 중얼거리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문을 열고 나섰다. 머리카락 속 깊이 두 손을 묻은 지해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넌 왜 안 가? 빨리 가, 제발!” “지해야. 어디 아파? 어떻게 된 거야. 얼굴색이….”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혼자 있게 해줘. 나 좀 내버려둬.” 주원은 눈물이 글썽한 채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해를 쳐다보았다. “이젠 제발…… 나 좀 놔줘.” “지, 지해야. 너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구. 사람이 말을 하는데, 왜 이렇게 모르냐….” 지해가 머리를 마구 도리질치면서 애원하듯이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우리는 끝났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이젠 더 이상은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 꽤 오랜 동안 조용했던 것 같다. 실제로는 1분도 채 흐르지 않았지만, 10년은 지났지 싶었다. 방 안에 무겁게 깔린 정적을 헤치고, 주원의 갈라진 목소리가 침착해진 눈물 자욱에 섞여 비어져 나왔다. “그 자식 때문이냐.” “아니.” “………….” “나 때문이야.” “………….”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나 때문이었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원이 가고난 뒤, 소파에 벌렁 드러누운 채 선잠이 들었던 지해는 희미하게 들리는 이상한 기계음에 잠을 깼다. 이 집안 구석 어디에선가 <미션 임파서블>이 신경 건드리는 자명종 소리로 둔갑하여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치기를 기다려도 지칠줄 모르고 계속 되는 둥두루루둥둥∼♬ 인내심의 극한에 다다른 지해가 천천히 억지로 일어나 집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곧 자신의 방… 침대 위에 벗어둔 파카의 주머니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해는 파카 주머니에서 낯선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그냥 끊어버리려다 보니 문득 액정 화면에 ‘윤현규’라고 찍힌 것이 눈에 띄었다. “여보세요.” 「오오, 11번의 시도 끝에 이제야 받는구만. 나다.」 술마시는 분위기 속에 있는 듯 꽤 시끄러운 소리가 주위에서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응, 나야 나. 나 맞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거 빨리 갖다드려야 되는 거….” 「내가 얼마 전까지 쓰던 건데, 너 옷 빌려주면서 묻어갔나 봐. 아는 사람들은 새 번호를 다 알긴 하지만, 아직도 그리 전화하는 인간들이 좀 있으니까 니가 잘 알아서 해결 좀 해줘. 받고 싶으면 받아도 되는데 전부 무시해도 아무 문제 없음.」 “그럼 그냥 꺼둘게요.” 「아니지. 액정에 내 이름 뜰 때는 총알같이 받아야지. 아앗, 충전기를 깜빡 했다. 나중에 갖다줄게.」 “아……네….” 엉겁결에 대답하고 보니 어딘가 상당히 찜찜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 핵심이 되는 문제를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 앗, 그러고 보니…! “근데 형이 전에 쓰시던 전화에 어떻게 형의 새 번호가 입력되어 있을 수가 있죠? 그럴 필요가 꼭….” 「좋은 거라 그래. 좋은 거라.」 “네?” 「그 전화랑 이 전화랑 사귀거든.」 “예?” 「지네들끼리 자주 연락하고 그러나 봐…… (알았어요. 잠깐만)…… 그만 끊어야겠다. 그 밧데리 그대로 사흘은 가니까 암튼 전화 꼭 켜두고 내가 걸면 필히 받아라. 끊는다.」 속사포처럼 다다다다 자기 할 말만 내뱉고 현규는 전화를 똑 끊었다. 뭐에라도 홀린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 있던 지해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손에 쥔 전화기를 바라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파워를 껐다. 또 전화 걸면 귀찮다. 어쨌든 지금은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좀 쉬어야 한다. 지해는 전화기를 침대 옆 탁자에 던져놓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정식으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한번 달아나버린 잠은 여간해서 되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천 갈래 만 갈래 수많은 불안감과 설렘과 아픈 후회들이 저희들끼리 꼬여졌다 풀어졌다 하며 지해의 지친 심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참 잠과 씨름을 벌이다가 어느덧 평화로운 잠에 스스르 빠져들어갈 무렵엔, 지해는 이미 손바닥을 따뜻한 심장에 올려놓고 딱 하나의 얼굴만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BGM : How Soon Is Now - The Smiths☜ CLICK!! “어!! 꺄아아아악!!! 지해다!!! 오늘 촬영 있었니? 너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아니요. 저 내년까지 스케줄 없어요.” 메이컵 아티스트인 혜경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와 지해를 덥썩 끌어안았다. 청담동에 헤어와 메이컵 전문의 샵까지 갖고 있는 혜경은 30대 후반의 아줌마로, 이 분야에서는 최고로 통했다. 수더분한 외모에 적극적인 성격과 열성적인 태도로 누구와도 친숙한, 한 마디로 좋은 여자인 그는 특히나 지해를 예뻐해서 어디서든 광적인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처음엔 남들 보기 면구스럽고, 얼굴 뜨뜻할 때도 있었지만, 자기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뿐 아니라, 이제 서서히 익숙해질 때도 되었었다. 게다가 지해는 오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1월달까지 스케줄 계속 없어? 웬일이야, 우리 지해가.” “그러게요. 큰일났어요. 흑흑. 저 이제 굶어 죽어요.” 어젯밤에 마음 편히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거짓말처럼 한결 가뿐해져 있었다. 호되게 앓고 난 뒤 몸이 자기 몸 같지 않고 어딘가 허하면서 괜시리 후들후들 떨리는, 그런 기분은 여전했지만 어제에 비하면 많이 괜찮았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평소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개운하게 일어난 후 오전에 정욱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끌고갈 듯 했던 정욱은 급작스런 할아버지의 호출로 오늘, 내일 이틀은 꼼짝없이 몇 군데 행사에 끌려다녀야 한다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대신 모레인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부터는 자유를 주는 조건이란다. 중요한 행사들은 진짜 명절날보다 약간 앞서서 치러지기 마련이다. 할아버지가 자유를 준다고 해봤자, 결국 별일 없는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애들끼리 어울려 놀라는 것이고, 본격적인 어른들끼리의 망년회에는 솔직히 넌 필요없다는 뜻이었다. 24일 저녁에 시간 비워놓으라는 정욱의 딱부러지는 명령에 지해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말았지만, 그 녀석 성격에 그 말을 거역했다간 이젠 정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지해는 생각지도 못하게 정욱과 처음 같이 보내게 된 크리스마스가 기대되는 것인지, 최소한 오늘내일은 녀석을 보면서 이런저런 기분으로 괴롭지 않아도 되어 더 홀가분한 건지 스스로도 구별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던 지금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굶어죽긴 누가 굶어죽니? 우리도 다들 1월까진 일 없어. 너같이 잘 나가는 애가 그러면 우리는 어떡하라구?” 혜경의 감시 하에 혜경의 어시스턴트로부터 파운데이션을 받고 있던 여자 모델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냥 넘어갈 순 없을 정도로 말 소리 하나하나에 뽀족하게 날이 서 있다. 상당히 귀에 거슬린다. 토요일날 박영진의 쇼에 같이 무대에 올랐던 모델이었다. 나이도 어린 신출내기가, 그것도 남자애가 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영 고까운 모양이었다. 혜경은 그런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는 모른 척 할 셈인지, 어시스턴트가 피부 톤 정리를 끝내고 뒤로 물러서자, 커다란 화장솔을 들고 본격적으로 모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 메이컵을 해나가면서 어시스턴트에게, 이때는 여긴 이 컬러로 칠하고, 끝은 이렇게 살리고, 각은 요렇게 맞추는 거라며 간간이 몇 마디 가르쳐주는 혜경의 말소리만 계속 이어졌다. 조수들이 조명 세팅하는 걸 살펴보며 잔소리하느라 한창 바쁘던 윤희원이 대충 짬이 생긴 것 같았다. 일하는 중간에 누가 건드리면 무지하게 화내는 사람이라 옆에서 빙빙 돌며 틈만 노리고 있었는데, 스탭과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한 걸 보면 이제 말을 걸어도 되는 타이밍이었다. “지해, 넌 메이컵 안 받아?” 지해가 그쪽으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혜경이 메이컵하던 손길과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저 오늘 일하러 온 거 아니에요.” “아참, 그랬었지? 그럼 왜 왔어?” “윤 작가님이 얼굴 좀 보자구 하셔서요.” “희원씨가…… 아, 조명 세팅 끝났다보다. 지금 얼른 가봐.” 지해가 자리를 뜨려는데, 혜경이 토요일 쇼 얘기를 꺼냈다. 지해 정말 대단했어, 멋졌어, 하고 연신 탄성을 지르자, 메이컵을 받던 모델이 살짝 코웃음을 친다. “하긴. 부케가 엄청 잘 어울리긴 하더라. 너 시집 갈 때 됐나보다, 얘.” “안 어울리는 것보단 낫죠.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결혼이야 빨리 하고 싶지만, 저 아직 어리잖아요.” 지해는 뾰족하게 가시 돋힌 그녀의 말에 눈 하나 깜짝 않고 웃으며 대답하고서, 아예 찡긋 윙크까지 덤으로 한 방 날려주며 덧붙였다. “그나저나 제가 시집 가면 선배는 장가 가셔야겠네요.” 다음 주쯤에 꼭 머리 다시 다듬으러 오라는 혜경에게 지해는 큰 소리로 ‘넵!’ 하고 대답한 후 희원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등 뒤로 ‘너 어린애한테 왜 그래, 그러지 마’ 하는 혜경의 목소리와, ‘몰라요. 쟤만 보면 괜히 신경질나’ 하는 모델의 쉬쉬하는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윤희원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데, 한쪽 구석에 태준이 스타일리스트랑 행거 앞에 서서 잡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학생들의 술 파티같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홍대 근처의 지하 맥주 바를 통째로 빌려서 촬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낮이고 조명이 있어도, 조명을 밝혀 둔 곳 이외에는 좀 어두운 편이었다. 게다가 여기저기 서 있는 장비들이며, 서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며, 한쪽으로 몰아놓은 테이블이며 의자들이 마구 쌓여 있어서, 이곳저곳 묘한 사각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지해도 이 안에 들어오고나서 태준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솔직히 오늘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었다. 어제는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얘기를 듣다보니 얼이 빠진데다가 남의 탓만 할 순 없이 자기 책임도 만만치 않다 싶어서 대충 넘어갔지만, 사람을 함부로 나락으로 떨어뜨려놓고서 별일 없었다는 듯이 시시덕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가서 주먹이라도 한 대 먹여줘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지금까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무조건 허허거리면서 지내왔다. 시기 어린 시선과 흠집이나 내려는 동작들이 눈에 뻔히 보여도 참고 참고 또 참고, 자신이 누군지 잊을 정도로 스스로를 눌러왔다. 이젠 정말 참지 않아. 더 이상은 당하지 않아. 설마 설마 했었는데 사방에 온통 적이었다. 겉으로 좋은 척 할 때까지만 좋고, 뒤돌아서는 순간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관계들. “어, 지해. 언제 왔니?” 희원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태준 쪽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제서야 지해가 온 걸 알고 이쪽을 쳐다보는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실실쪼개던 얼굴에 웃음이 싹 가시고, 어쩔줄 몰라하며 굳은 표정으로 쳐다본다. 연기하지 마, 이 새꺄. “태준이 옷 다 갈아입었으면 저기 가서 서 있으라고 해. 폴라로이드 찍어보게.” 희원은 조수에게 지시하고, 카메라 가방을 놓아둔 벽쪽으로 가며 손으로 지해에게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안녕하셨어요.”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었니. 현규씨랑 신혼여행이라도 갔었니?” “앗! 어떻게 아셨어요? 히힛.” “난 그날 바빠서 못 갔는데, 난리도 아니었다며?” “몰라요, 전. 토요일날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생각나는 대로 뱉었는데, 이보다 더 맞는 말이 없다. 더 이상은 알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얘 좀 봐.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그날 주인공이었다면서….” 하긴 주인공이긴 주인공이었다. 그것도 엄청 화끈한 파티의…. 역시 이대로 없었던 일로 할 순 없겠지.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보긴 봐야 한다. “근데 누가 절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건….” “응. 이리 오기로 했는데 좀 늦네. 길이 막히나? 왜 너도 한번 봤으니까 알 거야. 기억 안 날까? 전에 너 이태원에서 일할 때 전시회 사진 찍던 날― 아! 저기 온다!!” 희원이 입구의 계단을 쳐다보며 ‘야, 임마. 여기야’ 하고 손을 흔들자, 지해는 엉겁결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계단을 반쯤 내려온 남자 한 명이 난간을 붙들고 허리를 조금 숙여 얼굴을 내밀 고서 희원에게 ‘윤씨 아줌마∼!’ 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 특히 희원의 스탭들이 ‘유명’ 사진작가 윤희원을 그녀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의기양양하게 불러 제끼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삐죽삐죽 솟은 금발 머리. 장난기 가득한 개구장이 같은 표정. 훤칠한 키에 대충 걸쳐입은 듯한 껄렁껄렁한 옷차림. 그 뒤를 따라 지해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 한 명이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170이 될까말까 하는 호리호리한 키. 조그맣고 깨끗한 얼굴에 깔끔한 이목구비. 등까지 오는 길다란 갈색 생머리. 어딘지 모르게 꽤나 귀티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날씬한 여학생. 민혁과 명주였다. “그 새끼들 병원이 어디야?” 광고 사진은 어떻게 찍는 건지 구경하러 왔다던 민혁과 명주가 잠깐 머무르면서 촬영장 안의 시선을 다 받으며 또 한 차례 티격태격 아웅다웅 떠들다가 돌아간 뒤, 지해가 태준에게 조용히 물었다. 태준은 자기가 해야 할 촬영을 중간 정도 마치고, 여자 모델의 촬영분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구석에 앉아 쉬고 있었다. “빨리 가르쳐 줘. 많이 다쳤다며? 병문안이라도 가봐야잖겠어? 나 때문에 다쳤는데.” “………….” “불알 터지고 코 뿌러지고 난리도 아니라고 했던가? 가서 사과라도 해야지.” “………….” “아니지. 일단 내 눈으로 확인부터 해야지? 안 다치고 쓸데없이 허풍 떠는 거면 들었던 대로 어떻게든 만들어놓으면 되는 문제고.” 뭔가 어제와는 너무 많이 변한 듯한 지해의 태도에 태준은 두려움마저 느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아직도 환자처럼 창백하기만 한 지해의 얼굴에서 눈동자가 이상한 광채를 내며, 섬뜩하게 반짝였다. “말하기 싫으면 관두던가. 알아내려고만 들면 형한테 안 물어봐도 알아낼 수 있어. 그 방법이 귀찮아서 그렇지.” “………….” “이왕이면 자발적으로 얘기하는 편이 마음 편할지도 모르는데? 형이 벌인 일을 생각하면!!!!” 나직하니 차분하게 말하던 것이 뒤에 가서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지해를 쳐다보았다. 지해는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사람들의 시선 자체가 접수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겉은 싸늘하고 차분한데 속으로는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느낌. “……지해야……거,거기는 왜…… 뭘 어떡하려고?” “병문안.” “………….”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말해.” 윤희원은 너무나 바빠서 인사 받을 겨를이 없어 보였다.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면 옆에서 누가 굿을 해도 모르는 사람이다. 지해는 챙겨서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이 오히려 낯간지러울 것 같아서 잠깐 망설이다가 조용히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땅 속에 있다가 햇빛 속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머릿속이 아득했다. 배낭 속에 있던 야구모자를 꺼내서 깊이 눌러썼다. 비탈진 길을 내려와 노상 주차장이 있는 편의점 앞 4거리로 나왔다. 이 길이 로데오 거리였던가, 피카소 거리였던가. 말하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삼삼오오 짝을 짓고서 큰 소리로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여대생들의 얼굴이 너무나 밝아 보여서 모자를 더욱 더 푹 눌러썼다. 「얘가 너 실물 좀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날 쇼에 따라왔던 여자애였다. 아주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누가 보더라도 꽤 괜찮은 외모에 이지적이고, 세련되고, 당당하고, 부티가 줄줄 흐르고……. 「얘가 내가 말했던 걔야. 인사해라, 촌닭. 네가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지해야. 이 물귀신은 명주. 실크야 실크.」 「그 명주 아냐. 무식하긴.」 「그럼 뭐냐? 유명한 술? 술 주짜냐?」 민혁에게 질세라 한 마디마다 면박을 주고 쥐잡듯이 잡으면서도, 눈으로는 집요하게 자신을 관찰하던 시선. 뭘 알고 있었던 걸까. 「야, 이제 실물 구경 다 했지? 가서 저기 혜경이 누나랑 놀아. 미용 상담이나 받던가. 내가 볼 땐 틀림없이 그 처녀귀신 같은 헤어 좀 정리하라고 할 거다. 빨랑!」 민혁과는 말을 많이 할 새가 별로 없었다. 둘은 또 어딜 가는 중이라며 1시간도 채 머물지 않았고, 그 안에서도 아는 사람을 몇 명 찾아낸 민혁은 두루두루 인사하느라고 바빴다. 심지어 혜경과도 꽤 친숙한 사이인지, 누나 동생 하며 수작을 떨어댔다. 「진짜 오랜만이다. 어떻게 이 엉아한테 그동안 연락 한번 없고….」 그냥 의례적인 얘기들뿐이었다. 토요일날 쇼 잘 봤다, 어느새 그렇게 떴냐, 축하한다, 잘 됐다, 언제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 기억하기조차 머리가 아까운 평범한 이야기들. 「너 혹시 토요일날 쇼 끝나고 ‘라임라이트’ 안 왔었냐……? 훔…,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했나?」 단, 그중 스치듯이 머릿속을 쾅 울리고 지나갔던 한 마디만 빼고. 「토요일날 밤에 나랑 쟤랑 댄스 경연대회 나가서 2등 했다는 것 아니냐. 1등 한 건 나중에 보니까 직업 백댄서더라구. 그런 애가 아마추어들 노는 데 껴서 상 타고 그러면 사기 아니냔 말야. 언제 한번 너도 같이 놀러가자……… 어?…… 당근 정욱이랑 셋이 갔지. 미쳤다고 거길 내가 쟤랑 둘만 가냐…… 우리 춤출 동안 정욱이는 룸에 있었고……」 지해가 잠깐 멍해 있는 사이에, 어느새 옆에 다가와 빨리 가자고 채근을 해대던 명주에 이끌려 민혁은 간다 소리도 제대로 못하고 밖으로 퇴장했다. 사실은 토요일날, 정욱의 너무나 예기치 못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명주가 민혁에게 정욱이 옛날 애인 좀 구경시켜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얼굴만 잠깐 볼 테니까, 그 외에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딱 한번만 보여달라고 심각한 목소리로 애원하다시피 했었다. 민혁은 나름대로 자기도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정욱이가 그렇게 빡이 돌 만한 일이 이 세상에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정욱이가 사귀던 게 남자라는 걸 알면 이 기집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꽤 궁금했고. 얼굴 처음 보는 자리에서 너무 놀라면 곤란하니까 미리 귀띔을 해줬다. 명주는 아주 잠깐 패닉에 빠진 듯하다가, 속이야 어쨌든 세련된 태도로 쿨하게 넘겼다. 그래? 난 연상의 여잔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냐? 그냥 그때 말하는 느낌이… 말하는 느낌이 어땠는데? 몰라… 그냥 느낌이…… 정중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같은…… 후후, 그 새끼가 좀 그렇지. 그래…… 그렇게 보여…… 참 좋겠다 그 사람은. 정말 좋겠어…… 빈 택시가 하나 들어오는 게 보여, 지해는 얼른 불러세워 탔다. 행선지인 병원의 이름을 대고 지해는 시트에 깊숙히 기대앉았다. 피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눈을 감았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눈을 감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경서의 병실 문 앞에 서서 지해는 아주 잠깐이지만 망설였다. 노크를 할까? 그냥 벌컥 열어버릴까? 이런 것 갖고 망설이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대뜸 문을 발로 차서 밀어버렸다. 넓은 특실에 경서는 혼자 있었다. 병원에서는 분명히 금지되어 있을 핸드폰으로 누군지 모를 사람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걸로 봐서 다친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모르지. 붕대를 까고 그 속을 후벼파서 확인해 보지 않는 한, 저것만으론 알 수 없는 거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천연덕스럽게 맞이한다. 웃으면서. “병문안 왔죠.” “나를?” “네. 여기 또 누가 있어요?” “아니. 당근 나밖에 없지. 영광이야.” “아니까 다행이에요.” 지해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경서가 약간 멈칫했다. 얼굴에 잠깐 웃음이 멈추는가 싶다가 곧바로 다시 한쪽 입술을 찌그려 올려붙이며, 뒤틀린 미소를 짓는다. 저게 나름대로 반항아적인 섹시한 미소랍시고 비싼 돈 받고 팔리는 거다. “병문안 오면서 빈손으로 오면 쓰나.” “그러게 말이에요.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요……” 지해가 경서의 곁으로 가까이 가서 침대 중턱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맨손으로도 값을 하겠더라구요.” “그래? 뭘 해줄 건데?” “뭘 해드릴까요?” 이제는 이까지 드러내면서 씨익 하고 예의 느끼한 미소를 짓는다.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어디 한번 보자구. 다시는 그따위로 입 벌리고 웃을 생각은 못하게 해주겠어. “나야 저번에 미처 다 못한 걸 하면 좋지.” “그래요? 그것도 좋겠죠. 저도 아쉬웠어요.” “정말? 근데 보다시피 내가 지금 환자라서 말이야.” “뭐, 저도 따지고 보면 아주 성한 몸은 아니니까요. 피장파장이에요.” 경서가 유들유들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말이 자세를 가다듬는 거지, 본능적으로 방어를 하려는 것이다. 개망나니라는 말이 딱 맞는군. 멋대가리 하나 없이. 그 주제에 감히 어디다 그 드러운 물건을 쑤셔넣으려고 했단 말이냐. 이 되먹지 못한 새꺄. “근데 이거 나 혼자만으로 괜찮은 거야? 택기랑 상민이한테 좀 미안한데?” “나눠먹고 싶으세요?” “………….” “대답하시죠. 빨리.” “아니.” “그럼 더 생각해볼 것도 없네요. 전 꼬붕들은 상대하기 싫어요.” “그래? 왜?” “왜겠어요? 뻔하잖아요……” 침대 중간쯤에 앉은 지해가 얼굴을 바싹 들이밀자, 경서는 점점 코너로 몰리는 자기 위치가 불안했는지 몸을 빼고 침대에서 일어나려했다. 지해는 얼른 일어나, 다리 한 짝을 밑에 내려놓은 녀석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꽉 누르면서 녀석의 가슴팍을 팍 밀어서 침대에 넘어뜨렸다. “……불쌍…하니까요.” 녀석이 약간 자유로운 왼쪽 다리를 들어 꺾은 무릎으로 뒤쪽을 공격하려하자 지해는 왼손으로 녀석의 목을 잡고 누르면서, 오른손을 뒤로 뻗어 발목을 낚아 채고 무릎을 구부린 그대로 잡아당겨 녀석의 가슴팍 께까지 끌어올렸다. 뒤틀린 다리에서 관절 어긋나는 으드득 소리가 나고 경서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젠 맨정신으로 제대로 좀 즐기자, 이 새꺄.” 목을 꽉 움켜잡은 왼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자, 녀석이 온몸을 휘저으며 버둥대기 시작했다. 힘없이 버둥거리는 녀석의 몸을 단단히 깔고 앉으면서 남은 오른손으로 같이 목을 잡고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했니?…응?…… 한번 대달라고 애원이나 해보던가 말야. 치사하게……약은 왜… 먹이고 개지랄이냐…… 씨팔, 드러운 새끼.” 10년 넘게 건반을 두드리며 단련된 악력으로 이 녀석 목 졸라서 골로 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녀린 체격과는 전혀 딴판으로, 손가락 마디가 유난히 발달된, 힘있는 손을 보면 모두들 놀라곤 했었다. 녀석의 얼굴이 싯뻘개지고, 입은 비정상적으로 크게 벌려졌다. 눈자위에 빨갛게 핏발이 서며 고통스런 물기가 일었다. 혀가 뽑혀 나올 것처럼 밖으로 길게 뻗어 나왔다. 살아보겠다고 버둥대는 반항의 몸짓은 어느덧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죽여. 죽여. 죽여버려’ 하는 소리만이 커다란 진동이 되어 귓전을 쨍쨍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 힘을 더 주고, 이대로 조금만 더 조르면 이 녀석은 죽는다. 녀석의 몸이 약간 경직하더니 스르르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혼이 빠져나가듯이 도망나갔던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덜컥 목에서 손을 떼어 놓았다. 죽었나? 죽은 건가? 만일을 몰라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콧구멍에 손을 대보았다. 옅게 숨을 쉬고 있다. 그냥 기절했을 뿐이다. 이따위 드런 새낄 죽이고, 내 인생을 망쳐? 재밌었던 장난에 갑자기 바람이 빠져버린 것같은 기분. 저 녀석이 죽어버리느니, 자기 인생을 망치느니, 그딴 것들은 아직 두뇌 회로 속에서 온전히 대뇌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더 이상 저 따위 녀석 때문에 힘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 꼴도 보기 싫다. 입을 있는대로 헤∼벌리고 축 늘어져 정신을 잃은 모습. 저런 병신같은 모습이 무슨 정복욕이고 나발이고를 불러일으킨다고 내 몸에 그 드러운 물건들을 신나게 쑤셔 박았단 말인가. 머릿속에 찬 바람이 통하고 흥분이 가시자, 온몸이 쑤셔왔다. 빨리 이 드러븐 놈의 드러븐 병실을 벗어나고 싶다. 죽지는 마라. 네가 죽으면 내가 곤란하거든. 침대 사이드에 붙은 간호사 호출 버튼을 친절히 눌러줬다.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올리는데, 녀석의 벌린 입 속으로 하얀 이가 보였다. 순간, 이빨을 드러내며 입술을 비틀어 붙이던 같잖은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렇게 웃지 못하게 해주지. 침대맡 테이블 위의 꽃병이 눈에 띈 순간,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은 사라졌다. 꽃병 가득 꽂혀 있는 꽃들을 뽑아 내던지고, 길쭘한 사기 꽃병을 그대로 힘있게 입 위에 내리쳤다. 꽃병 깨지는 소리가 나고, 이빨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시트가 삽시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녀석의 입 안에 꽃병의 파편을 꽂아둔 채 지해는 병실을 유유히 빠져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주머니 속에서 ‘삐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머릿속을 한 바퀴 돌아 그 의미가 깊숙이 전해질 때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핸드폰에 문자가 와 있었다. 『통화하기 너무 어렵구나. 니네 집 근처다. 긴급 연락 요망. 현규』 지해는 아무 생각없이 ‘발신’ 버튼을 눌렀다. “저예요. 무슨 일이세요?” 「여행 가기로 했었잖아. 정말 어렵게 예약했다. 너 여권 있지?」 “네……?” 「따뜻한 남쪽 나라 말이야. 가서 쉬고 오기로 했었잖아.」 지해는 한참 동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하도 몇몇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뇌리에서 깡그리 사라졌었다. 머리 속이 온통 백지가 된 것 같다 어? 아아. 그러고 보니…. “…신혼…여행…?” 「응??…… 하하하하하. 그래, 그래. 신혼여행이다 그래.」 지해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현규는 큰 소리로 웃으며 못내 즐거워했다. “그래요. 가죠…… 언제 출발해요?” #15. HERE COMES THE SUN It's been a long cold and lonely winter 이 겨울은 너무 길고 춥고 외로웠어. It feels like years since it's been here 햇볕을 본 지가 몇 년은 된 것 같아. The smiles returning to the faces 얼굴마다 다시 미소가 돌아오는군. It seems like years since it's been here 웃는 얼굴 본 지도 너무나 오래 됐는데. I feel that ice is slowly melting 이제 서서히 얼음이 녹는 게 느껴져. It seems like years since it's been clear. 세상이 똑똑히 보이는 게 얼마만인지. Here comes the sun, here comes the sun 태양이 떠오른다. 태양이 떠올라. And I say, it's all right. It's all right. 그리고 난 말하지. 괜찮아. 괜찮아. It's all right. 이젠 다 괜찮을 거야. (Here Comes The Sun - Nina Simone)☜ CLICK!! “야. 지해야! 김지해!!” 현규가 옆자리에 앉은 지해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가위에 눌려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심하게 고개를 저으며 끙끙거리던 지해의 시야에 어렴풋이 주위의 모습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를 덮고 있던 헤드폰도 치워졌다. 귀를 통해 새어 들어와 머릿속까지 간질이던 음악이 사라지고, 갑자기 웅∼ 하는 꾹 눌러진 답답한 기계음이 확실하게 들려온다. 아…… 여기는… 비행기 안이었지. “왠일이야! 꿈 꿨냐?” 급하게 스튜디어스한테 받아온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과 눈가에 흘러넘친 눈물을 닦아준다. 살갗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이 거슬린다. “……이리. 주세요.” 물수건이 귓가에 목덜미쯤 닿았다고 생각됐을 때 얼른 뺏다시피 수건을 현규의 손에서 낚아챘다. 그 와중에 손길이 스치면서 잠깐 눈이 마주쳤다. 탐색하는 듯, 걱정스러운 듯 살펴보는 눈길. 얼른 시선을 피했다. 아주 잠깐의 어색한 침묵. “너…… 뭐…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 아니요. 아니에요.” “갑자기 소리를 막 지르길래 무지 놀랐다, 임마.” 뭐라고 소리를 질렀을까. 차마 물어볼 수가 없다. 지해는, 저 화장실 가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하고 시트의 다리 받침을 접어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통로로 한 발짝 내딛으려는 찰나, 땡∼ 하고 천장에 붙은 표시기의 안전벨트 착용 표시에 불이 들어오면서, 곧 착륙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잠시 후면 목적지인 마닐라 공항에 도착합니다. 현재 마닐라의 시간은 오후 3시 38분. 기온은 영상 27도입니다. 비행기가 안전하게 공항에 내릴 때까지 안전벨트를 풀지 마시고 자리에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captain speaking……」 잠시 머뭇거리다가 모른 척 화장실 쪽으로 가던 지해는 뒷쪽에서 스튜어디스 두 명이 승객들의 안전벨트 착용 여부를 확인하며 걸어오는 걸 보고, 그냥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아버렸다. 담요를 개키는 등 주변 정리를 하며 내릴 준비를 하던 현규가 입으로는 씨익 웃으면서 눈초리에는 걱정을 담은 채 쳐다본다. 부담스럽다. “너 아직도 몸이 안 좋은가 본데, 괜히 오자고 그런 것 아닌가 모르겠다.” “……아니, 괜찮아요.” “근데 왜 그러냐?” “그냥…… 꿈 꿨나 봐요.” “………….” “원래 가끔 그래요.” 무슨 꿈이냐고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소리 지르는 것 듣고 다 알아챈 걸까? 설마……. 죽어, 죽어, 죽어 하고 목을 졸랐다. 꿈 속에서 사람을 죽일 때는 그 이유 따윈 중요치 않다. 이유도 기억하지 못한 채 계속 목을 조르는 행위 자체에만 몰입했다. 목을 암만 졸라도 분이 풀리지 않아 옆에 있는 꽃병을 집었다. 냅다 내리치려고 얼굴을 보는데…… 아버지였다. 길게 늘어뜨린 빨랫줄을 목에 감고 아버지가 이미 숨이 끊어진 채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당황해서 손에 든 꽃병을 보았다. 꽃병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버지의 시체 주위를 굴러다니던 녹색 소주병. 아마 그때부터 소리를 막 질렀겠지. 꿈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너무 안타깝고 속상해서 통곡이 절로 나왔으니까. 장례식 날만 해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아 어린 녀석들이 무지 모질다는 소리 들었었는데. 그날 왔던 어중이떠중이들 다 울었지만, 참 이상하게도 어머니랑 형이랑 자신만 울지 않았었다. 누가 알 수 있었을까. 그토록 의연하게 손님들을 맞고, 장례 절차를 꼼꼼히 챙기고, 슬픈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어머니가 49제까지 잘 마치고 나서 그 다음날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흐느껴 울기만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야, 이제 다 왔다.” 몇 번 덜컹거린다 싶었더니 어느새 비행기가 착륙해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서자 에어콘도 막을 수 없는 열대 지방의 후끈한 공기가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한겨울에 맞는 여름. 그 생경함. 국내선 청사로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 했다. 터미널간에 실내 통로가 없다니 뭐 이런 공항이 다 있다냐. 창문을 열어놓고 뜨거운 바람을 호흡하며 신나게 달리는 택시. 차창 밖에서는 눈덮힌 앙상한 나뭇가지 대신 야자수들이 여유 있게 푸른 그림자를 흔들어댔다. 윈드서핑하러 몇 번이나 보라카이 섬을 찾았었다는 현규의 익숙한 손에 이끌려 지해는 어리버리 적당히 한눈을 팔며 국내선 터미널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공항 구석구석마다 흥겨운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열대 야자수에 꼬마전구들을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 반소매와 반바지에 땀을 흘리며 맞이하는 성탄절이라…… 잠깐……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으악! 이런~ 어쩐지 뭔가 잊어버린 것 같더라니. 이 노릇을 어떡한다지. 연말연시만은 칼처럼 가족과 보내는 한국인들 특유의 습관 덕택에 평상시에는 한국 사람들로 미어터진다는 이 곳도 제법 외국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도 윤현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눈치가 느껴질 때마다 지해는 ‘저 사람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하는 제스처로 괜스레 딴 곳을 쳐다보며 야구모자를 더 깊이 꾹 눌러 썼다. 스타 노릇을 오래 해온 사람이라 그런지 현규는 태연해 보였다. 인간은 여러 가지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생물임에 틀림없다. 정신이 온통 딴데 팔려 있어, 라이터는 가방 속에 넣어두라는 현규의 충고를 깜빡했다가 짐 수색, 몸 수색할 때 바지 주머니 속의 라이터가 적발되어 뺐겼다. 필리핀 공항들은 일회용 라이터는 무조건 압수란다. 배낭 안에 하나 더 가져왔던가 아니었던가 최대한 집중해서 걱정스레 기억을 더듬으며, 새삼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면세점 봉투 속의 담배 2보루를 꼭 끌어안았다. 그나마 미성년자라서 담배를 못 사기 때문에 면세점 안에서 만난 여대생 누나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산 거다. 니들 없으면 나 죽어. 까띠끌란 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어슬렁거리고 다니다가 지해는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체크인 카운터 위에 있는, 글자 한칸이 반으로 접혀 넘어가면서 ABCD 한 글자씩 표시해서 비행기 편명이나 시간을 표시해주는 전광판이 어쩐지 너무너무 늦게 바뀐다 하고 유심히 봤더니 완전히 수동이었다. 수동도 수동 나름이지 다이알 같은 걸 돌려서 맞추는 것도 아니라 한 글자씩 눌러서 넘겨서 맞추는 거다. 「Sea Air Caticlan 16:40」 스무 글자도 채 안 되는 이 정도를 표시하는데 남자 직원이 알파벳을 잘 모르는지 정말 한 10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답답하기보다는 유쾌한 기분. 이런 게 이 나라 사람들 국민성이라면, 왠지 자신이야말로 여기서 살아야 될 것 같은. 10분 전만 해도 당장 서울로 돌아가면 그 녀석의 분노를 어떻게 뒷감당할지 걱정에 사로잡혀 있던 본인의 처지를 망각하고, 불과 한 시간 전에 비행기에서 악몽을 꾸며 눈물을 흘리던 기억도 이미 납작하게 접어 가슴 속 한 구석에 깊숙히 묻어둔 채…… 지해는 킬킬 웃어버리고 말았다. 재미없게도 생각보다 별로 안 흔들리는 19인승 경비행기(비행기라기보다는 거의 봉고 승합차에 가까운.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초등학생 스케치북처럼 유치찬란하게 칠해놓기까지 한)를 타고 1시간 반만에 시골 간이 기차역 같은 까띠끌란 공항에 도착한 뒤, 또 배를 타고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갔다. “하느님께 감사해라.” “네?” “우리 타고 온 그 울긋불긋 무당 비행기 말이야.” “네….” “작년도에 추락사고 나서 전원 사망했었거든. 한 일년동안 사고가 없었으니까 이맘쯤 떨어질 때도 됐는데 말야.” “………….” “아무 일 없었잖아?” “비교적 무사했죠.” “그렇지.” “그 얘길 왜 지금에야 하세요?” 지해가 제법 인상을 쓰자, 현규가 약간 긴장한 척 하는 연극적인 표정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안 탄다고 그럴까봐. 차 타고 오면 엄청 오래 걸려. 그리구 먼지에 뭐에―” “아니, 그게 아니구요.” 지해는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아깝잖아요.” “뭐가?” “알고 탔으면 더 스릴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런 재미를 놓치다니.” “………….” “엄청 아깝네요, 진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지해는 다시 수평선으로 먼 시선을 돌렸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물결 위로 잘게 부서지는 따사로운 햇살. 겨울을 거슬러 여름을 찾아온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지나고 석양이 진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는 온통 불그스름한 빛으로 새 단장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늦여름, 초가을 날씨쯤에 불과한 남쪽나라의 아름다운 겨울 하늘 아래 바다 냄새, 시골 냄새, 동남아 특유의 묘한 향취가 밴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둘이 묵을 곳은 섬에서 가장 높은 산 속에 위치한 호화 회원제 리조트였다. 아무리 특급 호텔이라도 야자수 높이 이상은 지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이 섬의 규정상 철저하게 인공미가 배제된,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지어진 독립 빌라들이 호텔의 메인 빌딩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다. 현규가 윈드서핑하러 올 때마다 이용한다는 최고급 디럭스 빌라는 방이 셋에 욕실 두 개, 그리고 전용 개인 수영장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널찍한 테라스까지 딸려 있었다. 일반 관광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며 은근히 의기양양해 하는 현규에게 꾸벅 감사하다고 염치없는 인사를 하고 지해는 자신의 방에 짐을 풀었다. 굳이 테라스까지 나갈 필요도 없을 만큼 지해의 방에서도 코발트빛으로 넘실거리는 저녁 바다와 해가 진 후에도 윈드서핑을 계속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리조트 바로 옆의 골프장도 한눈에 들어왔다. 열대 야자수로 둘러쌓인 그린이라니……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다. “수영 안 할래?” 지해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방에서 나오자, 현규가 커다란 푸르스름한 돌로 벽을 장식한 빌라 옆쪽의 통로를 가리킨다. 아이보리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세면대를 지나니 바로 전용 수영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해는 머리를 흔들었다. “배고파요.” 꺼져 있을 때는 시계 역할도 겸하는 TV의 디지털 숫자판을 둘은 동시에 쳐다보았다. 거진 일곱 시가 다 됐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해가 졌어도 적도에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초저녁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대여섯시만 되어도 컴컴한 서울의 겨울에 익숙해져서 시간을 느끼지 못했다. 서울이라. “저 서울에 전화 한 통만 해도 되죠?” 지해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들며 말했다. 뻔뻔스럽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몰래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물론.” “걱정마세요. 공짜나 마찬가지에요.” “공짜?” “네.” 외국에 촬영 나오면 늘 하는 버릇대로 지해는 지후에게 콜렉트 콜로 전화를 걸었다. 국가 번호와 지역번호가 합쳐진 복잡한 전화번호를 누르면, 전화 받을 사람, 즉 전화비를 낼 사람과 3초간 확인 통화를 한다. 그 때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혀엉!! 나야!!! 전화 받지 마!! 도착했어!!” 「그래!!! 메리 클스마스다!!」 뚜뚜뚜뚜….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니, 현규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끅끅거리며 웃고 있었다. 지해는 그게 웃을 일인가 싶어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저기요. 방금 국제 전화 한 거는 당연히 안 들어가지만, 호텔 요금에 시내 통화 한번 한 걸로는 포함될지도 몰라요.” “걱정마. 난 호텔 전화로 서울까지 몇 시간씩 통화할 때도 있어. 상관없으니까 마음껏 통화해라.”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지해에게 현규는 여전히 웃음 자국이 남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됐어요.” “왜?” “이제 출발하는 날만 한번 더 하면 돼요.” “………….” “아, 그때도 ‘형, 나 오늘 가’ 한 마디면 땡이에요.” “………….” “하긴 그때는 집에 붙어 있다가 전화나 받으면 다행이구만.”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한지 쩝 계면쩍은 입맛을 다신 뒤, 옆에 들리지 않도록 조그맣게 니미럴 하고 중얼거리는 지해를 현규는 가만히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도착한 첫날이라, 저녁은 밖에 나가서 헤매고 다니지 않고 그냥 호텔 안의 레스토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갓 잡아올린 해산물과 야채로 만든 샤브샤브, 먹음직스럽게 구워놓은 커다란 새우, 필리핀식 고기 볶음,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향기로운 과일들을 앞에 두고 지해는 잠시 기가 질렸다. “저기 내가 그저께 너 집에 데려다주고, 조승훈 감독님을 만났지.” “………….” 커다란 새우구이의 속살을 발려 먹느라, 지해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대답할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래서 어쩌라구?’ 이럴 순 없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영화 촬영도 다 끝나가는데, 내가 아직 다음 영화를 안 정했었거든.” “…빨리 하셔야겠네요?” “전부터 얘기가 있던 시나리오가 몇 편이 있었는데, 그냥 아주 썩 맘에 드는 건 없어서 가만 있었는데 말이지….” “………….” 지해는 왕새우 한 마리를 작살내고 갑자기 호강한 뱃속을 달래면서 산 미겔San Miguel을 홀짝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가 그 조 감독님이 준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어보니까 주인공한테 고등학교 다니는 남동생이 하나 있더라구.” “…어떤 내용인데요?” “그냥 심각한 거야. 주인공이 평범한 회사원으로 장남인데…… 아버지는 딴 집 살림하느라 같이 안 살고, 동생 녀석은 말 안 듣고 시시껄렁한 말썽이나 부리고, 곗놀이 하던 어머니가 하나 있는데, 곗돈 크게 떼이고 시름시름 앓다가 나중에 보니까 암에 걸려있어. 그것도 말기.” “헐…….” “뭐 대충… 그 와중에 장남이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 사귀던 여자랑도 헤어지게 되는데…… 식구들은 하나도 몰라. 동생 녀석은, 맨날 말썽을 부려도 쫌스럽게 놀던 놈이 우연찮게 실수로 된통 큰 사고 하나 저질러서 형더러 땜빵해 달래고, 아버지는 작은 집에서 낳은 이복동생 시집가게 생겼으니 장남한테 와서 결혼자금 대달라고 하고…… 한 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재난이 우루루 닥치는 거야.” “우와, 디게….” “응?” “디게 재미없겠는데요? 히히히” 지해가 장난으로 넘겨버리려고 하자, 현규는 아주 잠깐 희미한 웃음으로 맞장구쳐주고 금방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정색을 하면서. “흥행은 좀 안 될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게 딱 일주일 동안의 얘기야. 굉장히 리얼하게 다큐멘터리 기법을 이용해서 만든대. 시나리오가 꽤 괜찮아.” “그래도 재미없겠어요.” 관심이 전혀 안 생기는 남의 얘기만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도 고역이다. 마음을 비우면 즐길 수 있는 일이지만. 지해는 창 밖으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 리조트 안의 모든 야자수를 뒤덮은 크리스마스 꼬마 전구들. 깜깜한 밤하늘에 별가루를 흩뿌려놓은 것처럼……. 혼자 보긴 아까운 광경이다. 뭘 하고 있을까, 그 녀석은…… 가슴 한 구석을 갈고리 같은 걸로 사정없이 쑤셔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근데 중요한 사건은 그게 아니야. 엔딩도 좀 의외고.” “……어떤 건데요?” 이 사람 고집도 장난 아니다. 그래, 졌다 졌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생각하며 좋은 분위기 망치느니, 지금 당장 앞에 앉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현명하겠지……. “장남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무지무지 고생하다가….” “………….” “완전히 빡이 돌아서 다 버리고 가출해.” “헉!” “근데 며칠 동안 가출해서 온갖 희한한 경험을 하고 돌아와 보니까…” “와 보니까?” “………….” “뭐가 어떻게 되어있는데요?” 지해가 제법 자기 얘기를 귀담아듣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현규는 갑자기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한 호흡을 쉬었다. “네가 내 동생으로 나온다면 가르쳐주지.” “네에?” 잠깐 멍하다가 무슨 말인지 깨닫고서 지해는 좀 놀랐다. 수저 하나 가득 담았던 부슬부슬한 밥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크랭크인은 3월 초. 시나리오는 지금 다시 부분 수정 보는 중. 네 얘기 하니까 조 감독도 대환영. 서울 가면 한번 만나기로 했다. 너도 같이.” “어어, 그렇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야, 이 정도는. 조 감독 입장에서는 내가 출연해주면 고마운 거거든.” 그리고, 현규 자신에게도 나름대로 가치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연기력을 인정받을 만한 영화에 출연해 본 일이 없다. 꼭 장애자라거나 암 환자라거나 싸이코라거나 등등의 튀는 역할을 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정도는 아직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껏 이 수려한 외모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역할을 맡아본 적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 영화는 자신으로서도 모험이 될 것이다. 어떤 모험이든 문득문득 지칠 때마다 자신을 위로해줄만한 유쾌한 동반자(애완동물이든, 친구든, 아니면 또다른 무엇이든)가 필요한 법이다. 현규는 몇 가지 준비해둔 무기들을 사용하며 그 동반자 후보 1번인 지해를 살살 꼬드겼다. 언제까지 쬐그만 모델 에이전시에 있을 거냐, 비전 없다. 우리 기획사로 와라 ― 전 그냥 여기가 편한데요 ― 언제까지 너 편한 것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대답을 못 한다. 1초, 2초……16초― “뭐. 아직까지는요.” 유효 하나. 그럼 계속 모델만 할 거란 말야? ― 잘 모르겠는데요 ― 이젠 슬슬 앞날 계획도 좀 세워야 하는 때가 오지 않았냐 ― 생각 안 해 봤어요 ― 잘 생각해봐. 이런 기회가 너 정도 레벨 애들에게 쉽게 주어지는 것 아니야. 억지로 생난리를 쳐도 안 되는 애들이 더 많다구… 역시 이쯤에서 묵묵부답. 1초, 2초…. 18초― “알고는 있어요.” 유효 둘. 모델 노릇만 매달리다 보면 네가 꼴보기 싫어하는 그 놈들 앞으로 줄창 봐야 할텐데? 더 많이 보게 될지도 모르지. 예상했던 대로 대답이 없다. 1초, 2초……… 8초, 9초― “그건 정말 그렇군요….” 근데 저 이상한, 복잡한 표정은 뭐냐. 우씨, 10초 미만의 누르기는 ‘공격'으로 간주해야 하는 거라구……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린 것이 피곤해 보이니까 오늘은 그냥, 얌전히, 일찍, 푹 재우자.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서두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달궈서 꼼짝 못하고 넘어오게 만드는 그 자연스러운 진화의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알게 된다는 점도. 저 녀석이 없던 재주를 갑자기 부려 한판이든, 절반이든 따내지 않는 이상 심판은 자신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있으므로. “근데요.” 앞에 놓인 음식과 맥주 외에는 다른 데 관심이 없던 것 같은 녀석이 문득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지하게 묻는다. 현규는 순간적으로 섬뜩하게 번쩍이는 녀석의 눈빛을 보고 심장이 덜컹하며 무의식중에 긴장을 했다. 자신의 얼굴이 많이 굳었었나 보다. 살벌하던 눈빛이 금세 흐려지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치를 살핀다. 역시 어린 녀석이다. 제법 어른스러운 척 하지만 아직은 분명히 애야. “응?” “아니에요.” “왜?” “아니요…… 저…” “………….” “별거 아니에요.” 이 사람이 자신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걸까 갑자기 묻고 싶어졌던 지해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현규도 더 이상은 말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전에 들었던 대로 옛날 자기 생각이 나서 잘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된다. 더 이상 캐묻는 것은 너무 버릇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한번 호되게 당했다고 접근하는 사람마다 의심하는 버릇을 키운다면 그거야말로 그 사건의 가장 큰 피해가 아니고 뭐겠는가 말이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 못 하고 있을 때 그 안에서 안심하며 모르는 채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것도 있다. 뭐든지 너무 자세히 속속들이 알고 나면 그런 즐거움은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일단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자. 레스토랑 안에 저녁 내내 연이어 흐르던 캐롤이 어느새 「White Christmas」로 접어들었다. ‘그린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이 사람들 분명히 장난하는 거겠지? 서울에서 성탄절을 맞았다면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볼 수 있었을까. 지해의 생각이 바다를 건너 영하의 서울 하늘 아래를 떠도는 동안 「White Christmas」는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으로 바뀌고 있었다. BGM : Looks Like December - Ana Caram☜ CLICK!! 크리스마스라는 게 선뜻 믿기지는 않지만, 오늘은 어쨌든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어젯밤,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들었던 지해가 눈을 떴을 때는 10시가 넘어 있었다. 일어나보니 빌라 안에 현규는 없었다. 지해가 곤히 자니까 깨우지 않고 혼자 나갔나보다. 대충 씻고 나오면서 문에 걸린 ‘do not disturb방해하덜 말어’를 ‘please make the room청소해주구려’로 바꾸고 있는데, 때마침 그 앞에서 청소하러 온 메이드가 청소용구가 가득 담긴 수레를 끌고와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하이’ 하고 수줍게 웃는다. 얼굴이 어찌나 까무잡잡한지 이빨만 도드라져 보인다. 조금만 더 꾸물거렸으면 청소 못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지해는 밖으로 나섰다. 아침 서비스 시간이 거의 끝나가기 직전에 가까스로 아침을 먹고 리조트 주변을 한참 걷다 보니, 베개 위에 팁을 안 놔두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도로 들어갈까? 으이그, 벌써 한참 전에 끝났겠다. 내일 두 배로 주지 뭐. 어제에 비해 날씨가 썩 덥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낮부터 웃통 벗고 수영복에 산타 클로스 모자를 쓰고 해변을 누비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지해가 그 유명하다는 산호가루 백사장에 누워 광합성이나 할까 자리를 잡는데, 이미 그 옆쪽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필리피노가 무슨 뜻인지 모를 말로 막 뭐라고 떠든다. 자세히 들어보니 영어다. 햇볕이 세다는 소리인 것 같다. 햇볕이 스트롱하니까… 뭐라구? 뻔? 뻐언? burn이겠지. 화상을 입는다는 소린가 보다. 화상을 입어서 아야야 한단다. 양 옆의 눈꼬리를 두 손가락으로 쭉 밑으로 내려서 울상을 만들어 보이기까지 하며 온몸으로 ‘아야야함’을 표시하는 그 사람에게 지해는 두 손 모아 합장하는 포즈로 장난스럽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설마 겨울 햇볕에 화상까지야, 하고 열대 지방의 강한 햇살을 얕잡아보며 어쨌든 선블럭을 가지러 호텔로 돌아왔다. “스노클링하러 갈 건데 같이 안 갈래?”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조깅과 헬스와 수영을 벌써 마치고 가뿐한 얼굴로 돌아와 앉아있던 현규가 묻는다. “아니요. 전 괜찮아요.” “아니, 물에 들어가기 싫으면 배에 앉아서 그냥 구경만 하지? 섬 한 바퀴 돌 테니까.” 뭐랄까. 의욕이 없다. “아니에요. 됐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이 섬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에게서도 잊혀진 채 뒹굴뒹굴 뭉개다가 가고 싶다. “그래? 어차피 오늘은 오래는 못해. 딴 때 같으면 저녁때까지 할텐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여기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엄청 대단한 명절이거든.” “그럼 언제 갔다 언제 오는데요?” “글쎄. 아직 얘기를 확실히 해둔 건 아니라서. 점심을 배 위에서 먹어야 하니까 그 사람이 장보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 최소한 한 시간 후쯤에 출발을 하면…… 오늘은 늦어도 네 시 정도까진 들어와야 할 거야.” “………….” “이런…… 그래봤자 세 시간이면 땡이네.” 섬 전체가 서서히 하나의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명절 분위기가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지해의 마음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까 해변에서 봤던, 수영복에 산타 모자를 쓴 사람들이 이제 티셔츠 위에 딸랑거리는 은종을 몸에 붙이고 달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즐거워 보인다. 그 중에는 작은 막대 사탕이나, 싸구려 플라스틱 디즈니 장난감들을 준비하고선, 지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가득한 미소와 함께 나눠주는 사람도 보였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면서. 배를 몰고 나가줄 사람과 선착장에서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현규는 여기에 놀러와 있던 한국 관광객들 대여섯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 특히 두어 명의 여자들이 어쩔줄 모르며 연신 환호성을 터뜨리는 것이 지해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들려왔다. 귀찮을 텐데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대꾸를 해주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아주 좋던가 아니면 몰고나갈 배가 아직 준비가 덜 되어있든가 그런가 보다. 지해는 그냥 백사장에 누워서 쉬기로 했기 때문에, 앉아서 쉴 비치 의자를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 선블록도 제대로 챙겨왔겠다, CD 플레이어에 건전지도 새 걸로 빵빵하게 채워왔겠다, 얼음을 가득 넣은 시원한 망고 쉐이크도 사다놨겠다, 읽을거리로는 현규가 억지로 손에 쥐어준 그 영화 대본도 가지고 있겠다, 준비 완료였다. 잠수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어 마치 검은 돌고래처럼 보이는 현규가 마침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 지해는 손을 흔들어주고,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펼쳐 얼굴을 가렸다. 파라솔이 아무리 빛을 막아주고 있다지만, 빈틈으로 따가운 햇볕이 교묘하게 얼굴 위로 스며드는 걸 전부 막아주진 못했다. 물론 처음부터 정말 읽을 생각으로 대본을 가지고 나온 건 아니었다…… 책처럼 작지도 않고, 잡지처럼 무겁지도 않고. 얼굴 가리개 용으로 이보다 더 적합한 건 없으니까. 결국 그 영화에 대해 지해가 알게 된 것은 제목뿐이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나른한 삼바 음악과 살갗에 와닿는 짭짜름한 햇살에 취해, 눈앞에 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지해가 어느새 금방 달콤한 잠에 빠질락말락할 무렵, 사각사각 모래를 딛고 오던 인기척이 바로 옆에서 멈추는 게 느껴졌다. 옆 의자에 앉는 사람인가? 의자에 앉는 소리는 안 들린다. 분명히 배타고 바다로 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왔을 리는 없을 테고…… 아, 아까부터 주위를 왔다갔다 하던 산타클로스 모자 쓴 사람인가 보다. 막대사탕이면 괜찮다고 해야지. 이 쉐이크만 해도 이미 너무 달아서 혀가 깔깔할 정도니까. 디즈니 장난감이면 받아둘까…… 근데, 그걸 어디다가……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야… 이건… “일어나. 김지해.” 그래. 알고 있었어. 이건 너야. 냄새로 알고, 네가 뿜어내는 체온으로 알고,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너의 느낌으로 알아. 네가 따라올줄 난 알고 있었나 보다. 그대로 돌처럼 딱 굳은 채,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지해를 굽어보던 정욱은 녀석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대본을 집어내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 모래밭에 살짝 떨어뜨렸다. 갑자기 환해진 시야. 바로 머리 위의 하늘에서 내리쪼이는 눈부신 태양을 한가득 등지고 서서 자신을 굽어보는 얼굴 하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세상이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바람도 가던 길을 잊으며 제자리에 서고, 쉼없는 파도도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갈라진 구름 사이 바다로 내리뻗은 한 줄기 햇살을 타고, 잔잔한 겨울 노래가 미끄러지듯 흘러내린다. 남쪽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12월의 노래. “왔냐?” 아직도 CD 플레이어가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면서, 하늘에서 음악이 울려퍼지던 것 같은 기분이 환청은 아니었다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지해는 귀에 꼽았던 이어폰을 뺐다. “너 아주 여러가지 한다?” 정욱이 얼음을 깨고 물 속 깊이에서 건져올린, 무게를 달면 10톤은 족히 될 듯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잊고 있었어’ 라고는 대답 못한다. 이 녀석을 보는 순간,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으니까. 그럼, ‘기다렸어’ 라고 해야 하나? 이건 더 나쁘잖아. 이럴 땐 그저 입 다물고 있는 게 최곤데…… “너도 이 리조트에 묵는 거냐?”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다. “아마 그렇겠지? 널 따라왔으니까?” “언제 도착했―” “시끄러. 입 다물어.” 뭐, 그러고는 싶었다만.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거야.” 여전히 무게 잡으면서 화를 누르는 목소리. 봐주기 싫으면 봐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봐주는 저 녀석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노릇이다.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간다고 그랬었지?” 풋.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여기가 지구 끝인지는 모르겠지만, 산 넘고 물 건너 따라온 건 정말 확실하구나.” 정욱은, 계속 시선을 피하는 지해의 턱끝을 잡고 팍 소리가 날 정도로 자신을 바라보게 고개를 꺾었다. “너 정말 왜 이러냐?!” “내가 뭘?” 눈이 부셔서 시선을 피하는 건데, 저 녀석은 정말 딴 꿍꿍이가 있어서 그러는줄 아는가보다. 네가 얼마나 눈부신지 너는 아마 잘 모를 거야. 넌 너무 눈부셔서 널 보고 있으면 내 눈이 시큰거려. 너무 아파. “빼는 것, 튕기는 것도 정도껏 해라. 나도 지쳐.” 움켜쥐고 있던 지해의 턱을 거칠게 놓은 정욱은 정말 지친 목소리로 말하며 옆의 의자에 털썩 걸터 앉았다. “……그래. 제발 그래라…. 지쳐서 나를 그냥 내버려 둬.” 지해가 우악스럽게 잡혔던 턱끝을 매만지며 말하자, 정욱은 대답하기도 기가 막힌지 ‘하∼’ 한숨을 내뱉는다. “그렇게 못 한다면?” “………….” “내가 포기 안 한다고 했지?” “………….” “너 날 허튼 소리 지껄이고 다니는 놈 만들면 좋냐?” “………….” “그게 니가 바라는 거야?” 아니, 아니. 니가 왜 그래야 되냐. 니가 왜 그래야 돼. 지해는 잠깐 멀리 옥빛으로, 에메럴드 빛으로, 코발트빛으로 계속 색깔을 바꾸며 찬란하게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잇는 수평선. 녹음이 우거진 작은 섬 조각들. 청색과 남색과 녹색의 물결 속에 한가로이 떠 있는 하얀 요트. 정말 그림 죽여준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옆얼굴에 와닿는 정욱의 시선이 느껴진다. “내 이름의 ‘해‘자 말이야. 바다 ‘해‘다?” “………….” “너 몰랐지?” 정말 급히 산 넘고 물 건너 날아오느라 지칠 만큼 지쳤는지, 이제는 화낼 기력도 없는지, 정욱은 한숨만 푹푹 내쉬고 말이 없었다. “하긴…… 그것 말고는 별로 없구나. ‘해’ 자가.”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아! 이해할 ‘해’자 쓰는 사람도 가끔 있―” “야! 너 말야…… 이제 나 그런 수법에 안 넘어가. 얼렁뚱땅 얼버무릴 생각은 하지 마!” 이번에는 지해가 입을 다물었다. “진지하게 말을 할 땐 좀 알아듣는 척이라도 해봐∼!” 정말 담배 한 대 생각이 절실하다. 백사장에서 담배 못 피우게 되어 있지만 않으면…… “아! 그 날은 고마웠다.”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너 아니었으면 나…… 큰일날 뻔 했다며?” 최대한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고 했지만, 맨 끝에는 목소리가 약간 떨려버렸다. 깜짝 놀라 쳐다보는 정욱의 표정을 보니 혹시나, 혹시나 하며 아니길 바랐던 짐작이 맞는군 싶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 아니, 이미 무너져 내렸는데 폐허 속에 서 있으면서도 몰랐었던 건가. “어떻게 알았어?” 에휴. “너 그때…… 깨어 있었냐?” 어이, 이봐. 그렇게 확인 사살까지 할 필욘 없잖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로 설레설레 저으며 조금씩 뒷걸음질치고 있는 지해를 정욱이 얼굴을 찡그리며 쳐다보았다. “왜 그래?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뒷걸음질이 점점 빨라지다가 나중엔 아예 등을 보이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래사장에서 달린대봤자 그게 그거다. 부처님 손바닥이고 뛰어봤자 벼룩이다. 괜히 힘만 들고 얼마 뛰지도 못하고서 곧 손목이 잡혀버렸다. “하아, 하아……. 뭐야?! 너?!!” “…헉‥헉…… 이거 좀… 놔.” 손목을 잡은 손에 오히려 더 힘을 꽉 넣는다. “놓고 얘기해.” “싫어!” “놓으라면 좀 놔∼!!!!!!!” 있는 힘껏 뿌리치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제기랄. 오후가 무르익으면서 흥겨운 캐롤 소리는 높아만 가고, 웃고 떠들며 즐기던 사람들이 무슨 신기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이쪽을 쳐다본다. “넌 니 생각만 하지?”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지해를 바라보다가 정욱이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둘은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지해는 주변의 젖은 모래들을 토닥토닥 모으기 시작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지?” 글쎄. “……그런 일 좀 당한 게 무슨 상관이야.” 어찌 상관이 없을까나. “네가 죽는 것보단 낫더라.” 지해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너 많이 변했어. 넌 내가 알던 놈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었다.” 너는 그대로야. 그래서 겁이 나. 아주 많이. “너 잊었다고 생각했었어, 나는. 실제로도 그랬었고.” 정말 이 녀석다운 말이다. “근데……, 아니야. 다 상관없더라. 네가 죽는 것보단 뭐든지 나아.” 정욱의 시선은 아스라히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네가 무슨 짓을 당했어도 상관없고, 네가 엄청 많이 변해서 나쁜 놈이 되어 있어도 괜찮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살아있으면 돼. 내 눈앞에서 없어지지 않고, 언제든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으면….” 누가 죽겠다고 했냐. 바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그래.” 나쁜 자식……. “이거 이기적인 거냐?” 지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계속 크게 끄덕이다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녀석 앞에서 이렇게 우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정욱은 위로도 하지 않고, 울고 있는 걸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옆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강렬하게 내리쬐기만 하던 정오의 태양이 이제 서서히 오후의 황금빛 태양으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좀 줘.” 눈물 콧물을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슥슥 훔쳐내고 지해가 일어나며 말했다. “무슨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거야?!” “내가 변했어도 상관없다며? 나도 이젠 생각이라는 걸 하면서 살아야겠어. 전처럼 바보같이 되는 대로 살고 싶진 않아.” 정욱은 잠깐 지해를 슥 쳐다보는 듯 하다가 다시 먼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뭘 이제 또 하겠다는 거냐? 너 좋자고? 네 마음 편하자고 다시 해보자는 거야?” 갑자기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해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 이 근처에 한국 사람 많으려나. 들으면 안 되는데. “그럼 나는 어떡해? 내 맘은 하나도 안 편한데 난 어떡하냔 말이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묻고 있는 거야?” 정욱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제서야 지해를 정면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건 네 문제야.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 “네가 알아서 해결해.”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다. 할 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었다.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따라오지 않는다. 잘 생각했다. 이 자식아. 소름끼치게 논리적인 놈, 이성적인 새끼. 넌 너무 징그러워. 무서워. 널 누가 견디겠냐, 이 인간같지 않은 놈아. 날더러 내 생각만 한다고? 그러는 너는? 너는? 아니다. 이건 아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생각이 극을 향해 치닫다 보니 문제가 뭐였는지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다 까먹고 말았다. 모든 걸 다 제쳐두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쁘다는 것.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녀석에게 그런 꼴을 들켜서 죽고싶을 정도로 쪽팔리고 부끄럽긴 하지만. 끝까지 놓치지 않겠다고 말해줘서 어쨌든 행복하고, 여기까지 따라와줘서 가슴 속 깊이 안심도 했고, 그래도 개운치 않은 뭔가가, 그 녀석이 내미는 손을 선뜻 잡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아직 어딘가 한 자락 남아있었다. 속으로 왜? 어째서?를 외치며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걷다 보니 리조트 앞의 해변을 벗어나 꽤 멀리 떨어진 화이트 비치까지 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벤트 때문에 비치에 야외 스테이지를 거창하게 세팅하고 있는 걸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지해는 자잘한 상점과 까페들이 줄줄이 이어진 비치로드로 접어 들었다. 군데군데 푹푹 빠지는 모래 때문에 사람의 다리 말고 다른 교통수단이 통하지 않는 것인지, 자동차 따위가 섬의 자연을 훼손할까봐 일부러 길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뭏든 길 주변으로 죽 줄지어선, 소박하고 토속적인 멋이 넘치는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니 시간이 꽤 많이 흘러 있었다. 뚜렷하게 뭘 봤냐고 누가 묻는다면 절대로 꼬집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술에라도 걸린 양, 발이 부르트도록 아무 잡생각없이 오로지 걷는 것에만 열중했다. 아까 백사장에서 소리지르고, 울고, 뛰고, 싸우고 한 것이 먼 옛날의 일인 듯 아득하기만 했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는 걸 깨닫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갑은 그대로 있는데 뭔가 잊은 것 같다. 이런. 리조트 비치에 CD 플레이어랑 대본이랑 아까 준비해갔던 살림살이들을 다 놓고 와버렸다. 바보, 바보, 바보. 지해는 다리도 쉴 겸 비치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산 미겔을 주문했다. 서울에서 마시려면 8000원이나 하는데 여기서는 겨우 600원 정도. 취할 때까지 맘껏 마셔야지. 잠깐…… 현규 형은…… 몰라. 안 보이면 없어졌나보다 하겠지. 지금 그 사람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카페 안에서 누군가 통기타 라이브로 캐롤 메들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잘 하는 편은 아닌데도 명절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다. 맥주를 세 병째 비우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웬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을 더 자세히 보려는 사람들이 맥주잔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지해는 엉겁결에 따라나섰다. 적도에 가까워서인지 해가 바다 속으로 잠기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 어제 본 저녁노을은 구름 한 점 없이 완벽하고 깔끔했는데, 오늘은 수평선에 가득한 구름 때문에 또 느낌이 달랐다. 구름에 빛이 반사되어 그 현란한 색깔과 모양이 한 폭의 추상화다. 그 밑에 떠있는 못생긴 작은 보트들까지 합치면 멋진 풍경화. 괜히 온몸에 찌릿 소름이 돋는다. 맥주를 마셔서? 아니면 서늘한 갯바람 탓? 아주 잠깐 사이에 태양은 찰랑거리는 수면에 하루를 마감하는 은은한 오색 광선을 가득 내뿜으며 바다 속 깊이 들어가 버렸다. 뭐에 쓰인 것처럼 노을의 여운에 젖어 꼼짝도 못 하고 있다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갑자기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깜깜해졌다. 가만 보니 섬 전체에 전기가 다 나간 것 같다. 크리스마스라고 요란들 떨더라니,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장관에 자기도 모르게 아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가 발전기가 있는 가게들에는 다시 띄엄띄엄 불이 들어오고 나머지 대부분의 가게는 코코넛 오일등을 여러 개 밝혀 내놓고 있었다. 부드러운 갯내음. 혼탁한 머릿속을 개운하게 씻어주는 철썩철썩 파도 소리. 그리고 깜깜한 하늘 아래 하나 둘씩 늘어가는 은은한 불빛들. 어두운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는 건 이 분위기 때문이겠지. 카페 안에서 통기타 반주에 맞추어 손님들이 캐롤을 합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거구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뭉클하면서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갑에서 집히는 대로 돈을 꺼내 서둘러 맥주값을 치르고, 지해는 호텔을 향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BGM : Safe and Sound - Swan Dive←CLICK! 분명히 지름길이 있었을 거다. 지금 이 길이 엄청 돌아가는 길이라는 건 알지만, 낯모르는 곳에서 섣불리 아무 길로나 갈 수도 없고. 결국은 왔던 그대로 되짚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백사장을 따라 서늘한 바닷바람을 온몸에 받으며 뛰다가 지해는 아까부터 좀 거북하던 샌들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들게 돌아갈줄 알았으면 애초에 이만큼이나 많이 헤매나오지도 말걸, 하고 후회……할 수가 없다. 너무 염치없는 짓이니까. 햇볕이 정면으로 내리쪼이던 대낮의 바다와 태양이 쉬러 들어간 다음의 저녁 바다는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른 건지. 지해는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서서히 검푸른 빛을 띠기 시작하는 바다를 잠깐 바라보다가, 아픈 발도 잠깐 식힐 겸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인데도 물이 정말 따뜻하다. 저녁 하늘에는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낸 별들이 주변의 어두움을 틈타 평소보다 몇 배는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발을 간질이는 파도 거품 속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야광생물이 빛을 내고 있었다. 뭘까 하고 집어보려는데 파도가 밀려와 쓸어가 버린다.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얕은 바닷물 속에 그런 게 꽤나 많이 깔려 있다. 꼭 별이 하늘에서 쏟아진 것 같잖아……멍하니 생각하는 동안, 나갔던 전기가 갑자기 섬 전체에 한꺼번에 들어왔다. 어스름 속에 가리워진 채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던 바닷가 주변 자잘한 건물들에 차례로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전기가 돌아온 다음 곧바로 왁자지껄한 비치 파티가 재개되었다. 섬이 떠나갈 듯한 음악 소리. 스테이지 위의 전문 댄서들과 DJ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공중에 술과 물을 뿌려대면서 옷을 벗어던지고 서로 몸을 비비며 격렬한 춤을 추는, 바닷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그 광란의 도가니 사이를 간신히 헤치고 지해가 리조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섬 안에 여기저기 흩어진 큰 호텔들에서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예쁜 불꽃들을 하늘에 쏘아올리고 있었다. 보트를 띄워 그 위에서 불꽃놀이를 보여주는 곳도 있었다. 마음이 이렇게 급하지만 않으면 느긋하게 해변에 앉아 그 환상적인 불꽃놀이만 감상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해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Hi.” 지해는 호텔 메인 빌딩 1층의 프론트 앞으로 다가가 안 떨어지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이제부터 중학 영어를 박 터지도록 활용해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마침 프론트에 교대를 하고 있는지, 방금까지 자리를 지키던 직원이 바톤 터치를 하며 새 직원에게 뭐라뭐라 인수인계를 해주고 갈 때까지 지해는 잠깐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프론트에 세 명은 서 있을 텐데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런가 한 명뿐이다. 그나마 나이도 어리고 어설퍼 보이는 것이 왠지 좀…… 불안하다. “Hi. How may I help you, sir? 안녕하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I'm…… I'm looking for…… 저 찾고 있는데요….” 에이, 씨발. 쫄지 마! 쫄지 마! 중학 영어! 중학 영어! 지해가 주위를 설레설레 둘러보며 얼굴이 시뻘개져서 버벅거리자, 지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인 직원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으훔?’ 하는 소리를 내며 어서 다음 말을 마저 하라는 듯이 쳐다본다. 얌마, 눈 똥그랗게 뜨고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주눅들잖아. 손님이 뭐 묻는데 눈 안 깔아∼!!!!! “I'm looking for…… His name is Mr. Kang. Jung-wook Kang. 누굴 찾는데요. 이름은 강정욱이구요.” “And do you have his room number, sir? 방번호를 아시나요?” 이 자식 이거 바보 아니야? 새꺄.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이러고 있겠냐. “Unfortunately, I don't. 불행하게도 모른다!” “………….” “Um… can you tell me… his room number? 음, 방 번호 좀 가르쳐줄 수 있겠수?” 미심쩍은 눈길에 괜히 찔려서 지해는 시선을 내리 깔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대답이 빨리 안 나온다 싶었다. 직원은 지해의 머리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하는 기분으로 지해가 휙 뒤를 돌아보니 뒤에 웬 시커먼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 속으로는 으윽, 제기랄, 하면서도 경로사상에 길들여진 대한민국의 남아답게 지해가 한 발짝 옆으로 비켜주면서 먼저 용건 보시라고 손짓을 하자, 그 할아버지는 대충 웃으면서 쌩큐 그러더니 절대 영어가 아닌 것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를 직원에게 쏼라쏼라 퍼붓는다. 직원이 할아버지의 쏼라쏼라에 응대해 주며 컴퓨터로 뭔가를 타닥닥 두드리고, 쏼라쏼라 대답해주자, 할아버지는 다시 쏼라쏼라 퍼부어대고 가버린다. 초조한 심정으로 계속 서서 쳐다보고 있던 지해에게 직원이 다시 말을 걸려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디리링 울렸다. Sorry 하고 난처하게 웃더니 전화를 받고서 어쩌구저쩌구 떠들어댄다. 역시 사무적인 전화인가 본데도 통화가 꽤나 길다. 어설픈 녀석이 혼자서 바쁜 건 안 됐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다 싶다. 서서히 인내의 한계점까지 올라갔을 즈음, 전화를 끊고 돌아와 다시 웃는 얼굴로 지해를 본다. “Oh, I'm sorry, sir. You were looking for Mr……… Kam, right? 아, 죄송합니다. 손님. 찾으시던 분이…… 깡 선생님이시죠?” 그 녀석 발음 한번 진짜 안 좋네, 하면서 지해는 예스라고 대답했다. “May I have your name, sir? 성함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 이름은 왜 물어봐 이 새꺄. 바뻐 죽겠다. 그냥 갈쳐 줘 쫌∼!!!! 지해가 애타는 의아한 심정을 눈빛에 실어 쏘아 보내고 있는데, 어설픈 직원이 태연하게 다시 묻는다. “Your name, sir. And your relationship with Mr. Kam? 성함 말입니다. 그리고 깡 선생님과의 관계는?” 이름은 김지해고, 자신은 그 새끼의…… 친구라고 지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잠깐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컴퓨터로 타다닥 체크를 하고 인터폰을 든다. “Hello, this is front, Philip speaking. We have a gentleman who's asking for you. His name is Mr. Kim. 안녕하십니까. 프론트의 필립입니다. 여기 남자분 한 분이 손님을 찾으시는데요. 성함은 킴씨이십니다.” 그리고 전화를 바꿔준다. 두근두근. 전화선 너머로 Hello 하는 묵직한 소리가 들린다. 이 자식이 영어를 쓰는 건 처음 들어서인가. 아무튼 뭔가 낯설다는 느낌. “나다. 지해.” 「……」 “나라구.” 「%&^_^/*#$%@&!$.」 “……?” 「*&ㅆ%#@-ㅠ-&∼…」 헉! 이것은 또 어느 나라 말이란 말인가? 중국말인 것 같기도 하고. 억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희한하게 끄는 것이…… 광동어인가? 아니면 베트남……? 이 자식이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하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간신히 화를 참고 얼빵한 프론트 직원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자, 생글거리며 고개를 갸웃한다. “Isn't he the person you're looking for, sir? 찾으시는 분이 아닌가요?” “Mr. Jung-Wook Kang from Korea. 한국에서 온 강정욱 말이야.” “Pardon?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지해가 답답한 속을 꾹꾹 누르면서 J-U-N-G…하면서 알파벳을 하나하나 천천히 끊어 말해주고 있는데, 누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지해의 어깨를 턱 잡았다. “어, 지해야!” 하루 사이에 꽤나 많이 그을은 것 같은 현규였다. “너 왜 여기 있어? 어디 갔었니? 한참 기다렸는데!!!!” “……저기 돌아다니다가……길을…… 잃어서….” 역시나 거짓말은 어렵다. “그렇잖아도 너 찾는 방송 내달라고 해야 되나,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되나 해서 여기 온 거야!” “죄송해요.” “어디 가면 간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지!!” “많이 걱정…하셨어요?” “혹시 사고라도 난 건지 별 생각을 다 했잖니.” “Sir…… 손님. ” 미안한 마음에 지해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못한 채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둘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던 직원이 드디어 말을 시킨다. “Does he really stay in here? 그분이 여기 묵으시는 게 맞나요?” 이게 또 뭔 소리냐 싶어서 지해는 어안이 벙벙했다. 현규는 현규대로 무슨 얘길 하는 건가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해를 본다. “I can't find any guest whose name is Jung-wook Kang on our list. 손님 리스트에 강정욱 씨라는 손님은 안 계십니다.” “지해야, 누구 찾어?” “저… 낮에 친구 녀석을 우연히 만나서. Can you… check… one more time… please? 한번만 더 체크…… 해봐, 엉?” “친구?” “네. 여기 묵는다고 그랬거든요…… Korean…… Is there any more Korean…? 한국 손님…… 또 없어? ” 두 명한테 동시에 떠들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당황하니 영어는 더욱 더 생각 안 나고…… 지해는 뒤집어질 것 같았다. 지금 묵고 있는 한국 손님이 총 5명인데(지해와 현규까지 포함해서) 그 중에 강씨는 아예 없단다. 분명히 여기 묵는다고 했었는데,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친한 친구야?” “네. 저. 아까 낮에 해변에서 만났는데….” “꼭 다시 만나야겠으면 방에 돌아가서 호텔마다 전화해 보자. 방에 다른 호텔들 전화번호 있더라.” 지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발길을 옮기는데, 뒤에서 직원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Oh, I'm sorry, sir. We had one more Korean guest, but he has checked out just an hour ago. 앗, 죄송합니다. 손님. 한국 손님이 한분 더 계셨는데, 한 시간 전에 체크아웃하셨네요.” 자기가 방금 교대를 해서 몰랐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까지 더 들을 새도 없이 지해는 용수철처럼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일단 리조트 입구로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배 타는 데. 어제 뭍으로부터 타고 왔던 배가 서는 곳. 거기까지 가야 한다. 리조트 입구로부터 큰길까지 이어진 비탈진 가파른 길을 구르듯이 뛰어 내려갔다. 멀리 선착장이 시야에 들어오고 배에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 아주 작게나마 보인다. 기다려, 조금만 기다려.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배에 오르고 맨 마지막 사람까지 다 승선하는 모습을 보자, 지해는 미칠 것 같았다. 아직 가면 안돼. 조금만 기다려. 지해가 마음 속으로 피를 토하며 부르짖는 것과는 상관없이 마지막 손님까지 다 태운 배는 유유히 선착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안 돼, 하고 외치면서 뛰어갈수록 배는 더욱 빠른 속도로 멀어질 뿐이었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 생각없이 마구 내달리던 지해는 뾰족한 돌뿌리가 왼발 끝에 채이면서 앗, 하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벗은 맨발에서 따끔따끔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이제 어쩌면 좋은지. 정말 어떡하면 좋은지……… 더 이상 억누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쪽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멀어지는 배가 더 이상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던 지해는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언덕길을 다시 터덜터덜 올라오다가, 문득 리조트 입구의 철문을 지나 내려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해는 걸음을 멈추고 못박힌 듯이 우뚝 제자리에 섰다. 언덕길 양옆의 우거진 나무들에 빼곡히 장식해놓은 크리스마스 꼬마 전구 불빛 덕택에 어둠 속에서도 두 사람의 얼굴은 똑똑히 보였다. 둘 중 키가 약간 작은 쪽은 현규. 또 한 명은…… 지해는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언덕길을 달음질쳐 올라갔다. 이게 도대체…… “너 뛰쳐나가고 난 다음에 내가 그 직원 붙들고 늘어져서 결국 찾아냈지.” 현규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정욱을 슬쩍 쳐다보자, 정욱은 제법 공손한 얼굴로 답례의 웃음을 웃는 척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녀석답지 않은 표정이 웃기다는 생각보다도 일단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목덜미를 꽉 끌어안고 매달리고 싶은 어질어질한 충동을 간신히 다잡으며 지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간 거… 아니었냐?” “가긴 누가 가?” “체크아웃 했다던데.” “체크아웃을 하긴 누가 해.” 정말 너로구나. 네가 맞구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해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 그 체취를 온몸으로 흠뻑 들이켰다. 피부 표면의 구멍 하나하나가 다 열리면서 이 녀석의 존재감을 빨아들이고, 몸 속 어딘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세포들이 전부 깨어나 팔딱팔딱 제멋대로 뛰놀고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얼굴을 계속 쳐다봤다가는 그대로 달려들어버릴 것 같아 겁이 났다. 문득 현규와 눈이 마주쳤다. 친구라는 녀석을 대하는 지해의 태도에서 뭔가 석연찮은 것을 읽기라도 했는지, 현규는 웃을락 말락 기묘한 표정으로 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발이 왜 그래?” 하루종일 섬 안을 헤매며 뛰어다니느라 엉망이 된 지해의 꼬락서니를 살펴보던 정욱이 말했다. “어?” 아까 돌부리에 채였을 때 생각보다 상처가 컸었나 보다. 특히 엄지발가락 쪽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엄지발톱이 빠진 것 같다. “신발은 또 어디다 잃어버렸어?” “몰라.” 더 이상 대꾸할 사이도 없이, 엇 하고 소리 지를 사이도 없이, 정욱이 덥썩 지해의 허리를 번쩍 안아 짐짝처럼 오른쪽 어깨에 둘러멨다. 거꾸로 매달려 머리끝으로 피가 몰린 지해가 버둥거리면서, 야, 이거 내려놔, 하자, 정욱이 가만있으라는 듯이 지해의 허리를 고정시킨 오른팔에 타이트하게 힘을 주고, 왼손으로는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다리 안쪽으로 엄지손가락을 미끌어뜨려, 허벅지 사이 여린 속살을 슬쩍슬쩍 간질이며 오르내리는 녀석의 손길에 지해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이 녀석 바빠지고 나서 몇 달만에 보는 거거든요. 너무 오랜만이라 할 얘기도 많고, 오늘은 꼭 제 방에서 재우고 싶은데, 괜찮겠죠?” 지해가 뭐라 한 마디 하려니까, 노골적으로 민감한 곳을 용서없이 건드려댄다. 한 자락 옅은 파도가 몸 속을 훑고 지나갔다. 신음을 참기 위해 입을 꽉 다무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아, 뭐. 나야 상관 없지만….” “발 다친 거는 방에 가서 치료하면 돼요. 내일도 바다에 나가시나요?” “그래야지 뭐.” “그럼 내일 뵙죠. 안녕히 주무세요.” 양해를 구하는 말투가 결코 아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현규를 뒤로 하고 정욱은 성큼성큼 로비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걸 의식하며, 지해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는 내려달라고 할 입장도 못 되었다. 아예 작정을 한듯 누가 보든말든 집요하게 공격하는 정욱의 손장난은 계속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려서 자신의 그곳이 이 녀석의 단단한 몸에 주기적으로 마찰되며 조금씩 불끈해져가는 상태였다. 그렇잖아도 온 신경이 정욱의 몸과 마주닿은 부분에 예민하게 집중되어 있는데, 이 녀석은 일부러 어깨를 더 움직이며 그곳을 리드미컬하게 자극해 온다. 으윽∼ 나쁜 자식. 이 놈이 이런 놈이란 걸 잊고 있었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마자, 지해는 정욱의 엉덩이를 꽉 꼬집었다. 아야, 하고 웃으면서도 내려놓을 생각을 안 한다. “야, 이 나쁜 새꺄…… 멀미날 것 같애. 좀 내려놔봐.” “너 그 발 자꾸 땅에 대면 안 좋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잠깐만.” “안돼. 내려놓으면 너 도망갈 거잖아.” “씹. 무슨 말 같잖은 소리냐?” “쫌만 참어. 다 왔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목적지인 5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땡∼ 하고 열렸다. 정욱이 묵고 있는 디럭스 룸의 문을 따고, 문 옆의 키 홀더에 카드키를 꽂자 사방에 불이 밝게 켜지면서 웽∼ 하는 에어콘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머리가 바닥을 쳐다보도록 거꾸로 매달려 있는 지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연히 오크빛 천연원목 바닥뿐이었다. 정욱은 리빙 룸에 있는 깔끔한 디자인의 푸르스름한 소파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지해를 앉히고, 비취빛 탁자 위로 다리를 뻗게 하고는 발부터 살펴본다. “너 이러고 어떻게 돌아다녔냐?” “아, 그거 조금 아까 전에 그런 거야.” “언제?” “리조트 입구에서 너 만났을 때…… 그 직전에.” 혼자서 난리치던 걸 생각해 보니 진짜 쪽 팔린다. 아직도 바닷가에서는 떠들썩한 불꽃놀이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해가 베란다 창문 너머 화려하게 팡팡 터지는 불꽃을 멍하니 쳐다보며, 아까의 그 절망적인 심정을 잠깐 회고하고 있는데, 정욱의 시선은 이제 다친 발에서 발목과 종아리로, 허벅지로, 점점 윗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발끝에서 불을 당긴 도화선을 타고 불꽃이 춤을 추며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앗!!!” 예고도 없이 바지 위로 덥썩 그곳을 거머쥔다. 이제 좀 한풀 꺾여 슬슬 수그러들던 찰나에 다시 자극을 받게 되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지금 하고 있는 손장난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주 근엄한 얼굴을 한 채, 몇 번 쓰다듬고 문질러 팽팽하게 만들어놓고서 손을 딱 놓는다.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하마터면 계속해 달라고 말할 뻔 했다. “빨리 씻고 소독부터 해야겠어. 상처 덧나겠다.” 정욱이 지해의 오른팔을 들어 자신의 목 뒤쪽으로 걸치게 하고, 지해를 안아 들었다. 엉겁결에 두 팔로 정욱의 목을 끌어안게 된 지해가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정욱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밀착시켰다. 서로 머리를 좌우로 살짝 움직이며 서로의 입술을 꾹꾹 누르고, 또 빨아들이다가 숨이 가빠지면서 입술이 열렸다. 입술 윤곽을 혀끝으로 애무하며 더듬던 정욱이 열려진 입술 사이로 혀를 들여보내는 순간, 지해는 자기가 뭘 한 건지 비로소 깨닫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어? 크크크” “왜 웃냐니까?” 퉁명스런 말투에 비해 표정은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상기된 표정. 열에 들뜬 눈동자. 태연한 척 하려 해도 슬금슬금 비어져 나오는 입가의 미소. 이걸 왜 이제야 봤지? 넌 너무 귀여워. 네가 정말 정말…… “……좋아서.” “하∼!” 기가 막히다는 듯이 시선을 위로 돌린다. 창밖을 향한 정욱의 칠흑같은 눈동자 속에서 오색 찬란한 불꽃들이 팡팡 터지고 있었다. 어쩌면 좋냐. 난 네가 너무너무너무 좋다.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좋긴 뭐가 좋아. 이 등신아. 넌 이제 죽었어.” 정욱에게 달랑 안겨 욕실로 옮겨지면서 지해는 괜시리 자꾸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정욱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끅끅거리면서 참았다. 욕실은 굉장히 넓었다. 일단 거실에서 욕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나면 그 안에 공간이 또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깥쪽으로는 드레싱 룸과 짐을 보관하는 러기지 스페이스가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상아빛 대형 욕조와 화장실, 투명한 유리로 만든 샤워부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욕조 옆의 한쪽 벽은 거대한 통유리로 되어 있어 리조트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으∼ 쓰라려.” 욕조에 물이 채워질 동안 샤워 부스에 둘이 같이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아주 좁지는 않았지만, 키 큰 사내 녀석 둘이 들어가니 제법 안이 꽉 찼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마주 닿다보니, 어느덧 둘은 씻는 건 뒷전이 되고 샤워 비누를 서로 뿌려대면서 킥킥거리며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샤워부스의 유리벽에 습기가 뽀얗게 차오르고, 동글동글한 물방울이 맺혔다. 한참 장난을 치다가 서로 몸을 밀착시키고 진지하게 애무를 하게 되도 또 한순간에 깨물고 간질이는 장난이 되어버린다. 열렬한 키스로 정욱이 제법 흥분해 이제 뭔가 벌어질 듯한 찰나에 지해는 갑자기 아까 자기가 당했던 복수가 하고 싶어졌다. “야, 욕조에 물 넘치는 것 아냐.” 정말로 물이 넘치고 있었다. 정욱이 물을 잠그러 나간 사이 지해는 쭈그리고 앉아 발을 들여다 보았다. 정욱에게 말은 안 했어 발톱이 빠진 부분이 아까부터 몹시 쓰라렸다. 물과 비누가 스며들어가 핏물이 다시 배어나오던 건 이제 멎은 것 같았지만 쓰라려 죽겠다. “많이 아프냐?” 정욱이 부스의 문을 열어 바깥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뿌옇던 공기가 좀 맑아졌다. 문쪽으로 등을 돌린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있던 지해는 고개만 돌려 정욱을 쳐다 보았다. 바로 저기 녀석이 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저 완벽한 얼굴. 넓은 어깨. 조각상처럼 강인하고 우아한 알몸. 매끄럽고 탄력있는 구릿빛 피부. 새삼스럽게 녀석에게 다시 반하면서, 지해는 환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표정을 굳히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정욱의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다 싶었더니, 곧바로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거칠게 입술을 탐하며 엉덩이에 손을 가져간다. 쫄깃쫄깃 탐스러운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무르던 손에 어느 순간 힘이 더해졌다. 두 언덕를 양 옆으로 벌렸다 놓았다를 몇 번 반복하던 정욱은 샤워비누를 언덕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쏟아 붇고, 가운데 손가락을 천천히 비누가 덮여지는 애널 속으로 천천히 돌리면서 집어넣었다. 괄약근 주위의 주름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스치며 원을 그리기 시작하자, 간지러움과 함께 소름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손가락이 하나씩 하나씩 더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란 괄약근은 당장 문을 닫으려는 듯이 연신 꿈틀거리며 몸 안을 채우고 있는 정욱의 손가락들을 휘감고 조여댔다. 정욱이 왼손으로 지해의 페니스를 강약을 주어가며 훑었다. 그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지해가 부르르 떨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바람에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정욱은 지해의 목을 타고 입술을 미끌어뜨렸다. 목젖 밑의 오목한 부분을 빨아들이고 다시 뭔가 마시기라도 하듯 살며시 핥는다. 코끝에서 나오는 따뜻한 숨결이 목을 간질여 지해는 그 와중에도 또 웃음을 터뜨렸다. 정욱은 웃음소리에 자극이라도 된 듯, 미칠 듯한 희열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 벽을 보도록 지해를 돌려세우고, 천천히 녀석의 속으로 들어갔다. 지해의 애널은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침입자의 방문에 놀라 반사적으로 힘껏 오므려 침입자를 거부했다. “괜찮아. 괜찮아. 힘빼.” 나즈막이 귓가에 속삭여주는 젖은 목소리에 안심하며, 지해는 최대한 몸을 열려고 노력했다. 녀석과 떨어져 있는 몇 달 동안 잊고 있던 느낌인데다가 그런 일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정욱이 지해의 페니스를 말아쥔 손가락에 힘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부드럽게 마찰해주고, 엄지손가락으로 귀두 옆으로 한 번 원을 그렸다. 자극되기 시작한지 꽤 오래된 지해의 페니스는 금세 절정을 토해냈다. 지해가 쏟아낸 정액을 자신의 페니스와 지해의 애널에 잘 바르고, 정욱은 다시 진입을 시도했다. 아직도 자꾸 거부하려고 하는, 강하게 닫혀진 문을 이번에는 제법 힘을 주어서 아주 천천히 끈질기게 비집고 들어갔다. “힘들어?” “아…… 아니. 계속해….” 페니스의 머리가 들어가고, 목이 들어가고, 몸체가 들어가고…… 뜨겁고 부드럽고 힘있는 조임 속에 정욱은 뇌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뿌리까지 천천히 밀어넣었다가 완전히 빼고 다시 천천히 밀어넣고…… 몇 차례를 계속한 후부터 점점 박자를 빨리 했다. 이제는 충분히 젖어 오히려 스스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지해가 낯익은 쾌감에 달아올라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허리를 뒤틀기 시작하면서 정욱도 더욱 흥분하여 피치를 올렸다. 빨판 같은 흡착력으로 페니스를 꽉 잡은 채 뽑을 듯한 기세로 빨아댈 때마다 피스톤질의 강도가 점점 세어졌다. 정욱의 깎아놓은 듯한 엉덩이 근육이 타이트하게 조여졌다 풀어졌다 하고 있었다. 지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쾌감과 함께 격렬하게 흔들던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고, 다리가 뻣뻣하게 펴지면서 온몸이 경직되어 덜덜 떨어댔다. 정욱도 이윽고 절정을 맞으면서 움직임이 둔탁해졌다. 그대로 몸을 겹친 채 벽에 기대 숨을 고르던 둘은 그냥 바닥에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오랜만에 하나가 된 감격은 욕조 안에서도 계속 되었다. 오늘 새벽에 도착한 정욱이나, 하루 종일 맨발로 헤매고 다닌 지해나, 둘다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은 욕조 속에서도 또 하나로 엉켜 있었다. 분명히 욕조 옆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밤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떡하다 그렇게 되었는지 둘 다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어지러움마저 느끼며 욕조를 빠져나와 서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려주다가 장난스럽게 키스를 주고 받던 것이 또 그 다음 단계로 이어졌다. 차가운 원목 바닥에서도, 거실의 소파 위에서도, 테이블 위에서도, 그리고 테이블 밑에서까지 셀 수 없는 절정을 맞았다.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룸서비스를 시켜 늦은 저녁을 때우고 난 뒤, 방 안을 온통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재회의 세레모니를 재개하던 둘은 어느 틈에 드레싱 룸에 들어와 짐가방 옆에서 일을 벌이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배를 움켜쥐고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야, 근데 왜 강씨가 없다고 했지?” “누가?” “프론트 직원이.” “스펠링을 뭘로 물어봤는데?” “K-A-N-G.” 침실의 단아한 킹 사이즈 베드에서 방금 지나간 오르가즘의 여운에 휩싸여 축 늘어져 엎드려 있던 지해는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정욱은 옆에 비스듬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없대지.” “엉? 뭐 다르게 쓰기라도 하냐?” “나는 강씨야. 캉씨가 아니라.” “엥?” “울 할아버지 말씀. 미스터 캉이라고 불리는 거 싫다고 G-H-A-N-G로 쓰신지 꽤 됐어.” “………….” “영자 신문 같은 데 보면 다 그렇게 나와.” “………….” “옛날에 세강건설 입사시험에 우리 할아버지 나온 신문기사를 영역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렇잖아도 그거 갖구 많이 틀렸다더라.” “………….” “그리구 나는 여권에는 ‘정욱’으로 안 올라있어. 외국 나올 때 쓰는 이름이 따로 있어.” “………….” “나 미국에서 태어났잖냐. 그래서.” “………….” “야, 너 자냐?” 멍하니 옆쪽을 쳐다보고 엎어져 있는 지해의 어깨를 정욱이 흔들었다. “……아니. 하도 기가 막혀서.” “뭐가?” “그것 땜에 그 생난리를 친 게.” “무슨 난리를 얼마나 쳤는데?” 만면에 미소까지 머금으며 얼굴을 바싹 들이대는 정욱의 표정에, 순간 지해는 아차 싶었다. “어? 아, 아니…… 뭐 별 거 아냐.” “뭔데? 말 좀 해봐.” 우씨∼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쪽팔린다. “별 거 아니라니까. 야! 그나저나 저기 창 밖이나 좀 봐라. 우와∼∼ 진짜 죽인다.” 지해는 말을 돌리려고 언뜻 창 밖을 가리켰다. 그런데 말을 꺼내놓고나서 보니 바깥의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해가 뜨기 바로 직전 신비한 파란빛이 감도는 해변과 바닷가. 곧이어 수평선을이글이글 불태우며 물 속에서 천천히 솟아오르는 오렌지빛 태양. 커다란 통유리창을 통해 방 한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일출의 아름다움에 잠시넋을 잃고 있던 둘은 곧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죽음같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침대 머리맡의 라이트 박스―날이 이미 밝았는데도 미처 끄지 못하고 잠들어버린―에서 은은하고 따스한 불빛이 흘러나와 두 사람의 벗은 등 위로 부드러운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장편] Exit Music 2부 (中) #16. I AM YOU You have bound my heart with subtle chains 너는 정교한 사슬로 내 심장을 묶어놨어 So much pleasure that it feels like pain 너무 커다란 쾌락이라 오히려 고통스럽고 So entwined now that we can't shake free 너무나 심하게 얽혀 이제 풀어버릴 수도 없지 I am you and you are me 내가 너고 네가 나야 No escaping from the mess we're in 이 혼란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So much pleasure that it must be sin 이만큼 대단한 쾌락이면 분명히 죄일 꺼야 I must live with this reality 그래도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겠지 I am yours eternally 나는 영원히 네 꺼야 Dark obsession in the name of love 사랑이라는 이름의 어두운 집착 This addiction that we're both part of 우리가 같이 빠져든 이 중독 Leads us deeper into mystery 한없는 미스테리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Keeps us craving endlessly 끊임없이 갈구하게 만들지 Strange compulsions that I can't control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이상한 욕망이 Pure possession of my heart and soul 내 마음과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어 I must live with this reality 그래도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 I am you and you are me 내가 너고 네가 바로 나야 (I Am You - Depeche Mode)←CLICK! 확실히 공기가 다르다. 비행기에서 걸어나와 터덜터덜 짐짝 찾으러 가는 침묵의 행렬. 오로지 앞만 보고 걷는 데 묵묵히 열중한 사람들. 각자 일행들끼리는 뭔가 이야기가 오고갈 법도 하건만, 냉랭한 현실 속으로의 ‘컴백홈’이라는 시원섭섭한 상황에서 다들 할 말을 잊었는지 분위기는 되려 숙연하기까지 하다. 목적지인 짐 찾는 곳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다다르자,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기 직전 무심코 창밖을 힐끔 쳐다보니, 빛자락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스산한 겨울 하늘 아래 메마른 회오리바람이 회색 활주로 바닥에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서늘한 기분에 지해는 흠칫 몸을 떨었다. 공항 안에 제법 난방이 그럴싸하게 되어있는데도, 역시 천연의 더운 날씨에는 미치지 못하는가 보다. 새삼 깨닫게 되는 그곳의 따뜻함. 온화함. 평화로움. ……행복한, 행복한, 행복한 기억들…. “야, 춥냐?” “에?” “추워서 그래?” 옆에 서 있던 정욱이, 추우면 이 안으로 들어와, 하고 헐렁한 국방색 프라다 누비 파카의 오픈된 앞섶을 벌리면서 다른 한쪽 팔로는 지해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긴다. 목덜미와 어깨에 와닿는 녀석의 감촉이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하마터면 별 생각 없이 히죽히죽 그 품안에 파고들 뻔 했다. 두 칸 아래에 서 있던 현규가 뒤를 스윽 돌아보며 눈치를 주지 않았더라면 또 실수를 해버렸을 거다. ……아, 정말! 여기는 이제 한국이니까. 돌아왔으니까. 별로 거칠 게 없던 따뜻한 남쪽나라의 외딴 섬이 아니니까. 조심해야 한다. “됐다, 임마…… 어엇, 저거 네 가방 아니냐?” 이제 슬슬 짐가방을 하나둘씩 뱉어내기 시작한 컨베이어 벨트 주위로 같이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막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해가 빈티지 스타일의 커다란 루이비통 슈트케이스를 알아보고 소리를 지르자, 정욱은 별말없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좀 나빠보인다. 세 사람 모두 가방을 찾아서 이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찰나― “어이, 줄리언.” 정욱이 순간적으로 불쾌함이 드러났던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현규를 쳐다보았다. 현규는 보라카이 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정욱을 영어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겉으로야 ‘정욱아∼’ 하고 다른 애들 부르듯이 막 대하기는 영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정욱군∼’ 하기는 또 우습기 때문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어딘지 놀리는 듯한, 그리고 묘하게 국외자로 제외시켜 버리는 듯한 뉘앙스가 숨겨져 있어서 정욱은 썩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부르는 당사자도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둘 사이의 팽팽하게 당겨진 미묘한 분위기에 일주일이나 끼어있던 지해로서는 참으로 난처한 입장이 아닐 수 없었다. “노파심에서 자꾸 하는 얘긴데…… 이 녀석 생각해서라도 너무 티 내지 말고 조심해라, 응? 너희 둘 정말 걱정 많이 된다.” 어제 저녁부터 눈 마주칠 때마다 저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뭐, 놀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신경이 쓰여서 그런다는 건 안다. 말이야 바른 말로, 사귄다고 여기저기 광고내고 다녀봤자 이로울 일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지금 한창 불타올라서 들떠 있는 마당에 자꾸 찬물 끼얹는 소리가 들리면 선선히 받아들이게 되질 않는 것이다. 더구나 현규의 속셈을 내심 간파하고 있는 정욱에게는 그가 하는 무슨 말이든 곱게 들릴 리가 없다. “걱정 마세―” “저, 그러면 안녕히 가십시요!!!!!!!!” 지해가 선뜻 나서서 얼버무리려는데, 때마침 같이 도착한 여행객 중 몇 명이 현규에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며 악수를 청하러 다가왔다. 그 바람에 그냥 아무 생각없이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악수 대열에 참여하고, 다른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까지 사인을 받으러 몰려들기 시작해 현규의 주위는 경찰의 통제가 필요할 정도로 제법 혼잡해지고 있었다. “형,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현규가 바빠진 틈을 타서 지해는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정욱과 함께 잽싸게 밖으로 향했다. 현규는 차마 대꾸도 못하고 엄지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세워 입과 귀에 갖다대며 전화할게, 하는 포즈를 취했다. “가자, 치타!” “이 쉐이가∼!” 또다시 겁없이 까불며 앞장서는 지해의 뒤통수를 정욱이 마구 흐트러트리며 꾹 내리누르더니 겨드랑이에 머리를 끼고 팔꿈치로 목을 조르는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키득키득 버둥거리는 지해를 그대로 질질 끌고 유리문을 나서는 와중에도 누가 볼세라 재빨리 정수리에 입술 도장을 꾹 찍는 정욱의 뒷모습을 현규는 걱정과 은근한 질투를 담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야, 나는 집이 없는 줄 아냐. 내가 왜 니네 집에 가야 된단 말야.” “잔말 말고 오늘만 자고 가.” “일주일 동안 시달렸으면 됐지 뭘 더 어쩌라구. 지금 내 몸이 멀쩡한 것 같냐?” “멀쩡하지 않으니까 자고 가라는 거다, 새대가리야.” “………….” “모레부터는 나도 바빠. 오늘만 자고 가.” “……안돼. 우리 형이 기다려.” 지해는 잠깐 주저하는 듯 하다가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고개를 돌리다 언뜻 기사 아저씨와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편치 않았다. 전에 이 녀석네 별장에 갈 때 자기 둘을 데려가고 데려왔던 그 아저씨다. 묻지 않아도 이미 둘 사이를 잘 알고 있기야 하겠지만, 은근히 켕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진짜 기다리냐, 니네 형이?” “그…래… 임마….” “진짜루?” “…그렇다니까.” “니네 형, 너 오늘 오는지도 모르잖아?” “………….” 큰소리 땅땅 치던 지해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젯밤에 오늘 출발한다고 전화했을 때 형이라는 작자가 예상대로 집에 없어서 결국 통화도 못하고 말았던 걸 저 자식도 뻔히 알고 있으니…… “여기 누워.” 입을 댓발은 내밀고 앉아있는 지해의 옆모습을 쳐다보고 빙그레 웃고는 정욱이 탁탁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됐다 그래∼” “발도 아프잖아. 신발 벗고 누워.” 미처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정욱이 잡아끄는 바람에 지해는 결국 정욱의 허벅지를 베고 뒷자석에 길게 드러눕게 되고 말았다. 반항도 잠시, 솔직히 비행기 안에서부터 줄기차게 쑤시던 허리가 좀 편해지는 것 같아서 그냥 시키는 대로 못 이기는 척 허리를 죽 피며 나름대로 편한 자세를 찾았다. 샌들만 신고 돌아다니다가 꽉꽉 막힌 운동화를 신으니까 엄지 발톱 빠진 부분이 눌려서 은근히 아팠었는데…… ……아∼∼∼ 좋구만. 천국이 따로 없다. 이렇게 누워서 올려다 보니 저 녀석은 정말 잘 생겼다. 저 턱선이며, 입술이며, 우뚝한 콧날이며…… “이러고 누우니까 네가 나 귀 파줘야 될 것 같애.” “귀?” “어렸을 때 엄마가 귀 파주는 자세잖아, 이거.” “파주랴?” 애완동물이라도 쓰다듬듯이 지해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시선은 차창 밖을 향하고 있던 정욱이 스윽 눈을 내리깔며 물어온다. “차 안에서 귀 파다가 피 볼 일 있냐.” “하긴.” 지해는 다시 창 밖으로 도망가는 시선을 갑자기 절실히 붙잡아두고 싶어졌다. 자신은 이렇게 저 녀석만 쳐다보고 있는데, 저 녀석이 딴 데 한눈 팔고 있는 게 싫다. “줄리언.” “어?” “줄리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근데?” “존 레논 아들 이름이 줄리언이다. 너 아냐?” 갑자기 정욱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리며 눈에서 장난기를 번쩍 뿜어대기 시작했다. “좆 내논?” “…그래. 비틀즈의….” “누가 좆을 내놓고 비틀었다고?” 무슨 말인가 이해를 못 하고 있던 지해는 불현 듯 그 의미를 깨닫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으악, 이 개좆같은 새끼. 남의 이름을 갖고.”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했단 말이냐?” “절루 가, 씹새야. 징그러.” “제 정신 가지고는 그런 짓 못할 텐데.” “아악. 이거 좀 놔. 으앗. 흐흐흐.” “이 자식이 왜 이럴까. 정신차려, 임마.” “크큭……아앗… 간지러!…크크큿…… 그만해. 이 새꺄∼” 인정사정없이 티셔츠 속으로 침범해 들어와 간지럼을 태우고 괴롭히는 손길에 지해는 몸서리를 치며 웃어 제끼다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험악한(?) 몸싸움의 끝을 장식하는 키스를 나누면서, 녀석의 손길을 다시 온몸 구석구석에 느끼면서 엄청엄청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때까지 마냥 이렇게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까스로 입술이 떨어지고 지해가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동안, 정욱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는 두리번거리더니 뒷쪽을 계속 쳐다보았다. “왜 그래?” “방금 지나왔어.” “뭐를?” “네 얼굴.” “엥?” “광고판 말야. 너 나온 거.” 아아∼ 난 또 뭐라구. 지해는 피식 웃고 두 팔을 뻗어 다시 정욱의 뒷목에 깍지를 끼고 잡아당기면서 귓가에 간질간질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까짓 거…… 엿이나 바꿔 먹으라고 그래.” 부시시 눈을 뜨니 벌써 해가 중천에 닿아 있었다. 아직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정욱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지해는 이 녀석 자는 얼굴 보는 게 진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내내 먼저 일어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기는 커녕 온종일 손가락 하나 까딱도 못 하고 축 늘어져 있는 날도 있었다. 녹초가 되도록 시달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동안 꼭꼭 막아두고 있던 긴장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졌는지 몸과 마음이 온통 풀어져버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둘이서 겨우 다시 하나가 된 감격의 재회, 그 다음날 저녁때가 다 되어 눈을 떴을 때 맨처음 발견한 정욱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해는 지금도 웃음이 나왔다. 말 안 듣는 허리를 억지로 추슬러서 침실 밖으로 기어가다시피 해서 나갔더니, 정욱은 등을 보인 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어찌나 열중했는지 허연 시트를 몸에 칭칭 감은 이상한 물체가 가까이 왔는데도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욱은 구할 수 있는 온갖 연장들을 동원해서 지해가 바닷가에 깜빡 잊고 왔던 CD 플레이어에 끼인 모래 알갱이들과 먼지를 빼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낄낄거리고 놀리다가 괜히 붙잡혀서 노인네 같은 잔소리만 잔뜩 들었다.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지 좀 마라, 물건 좀 곱게 써라, 표면에 기스가 엄청나게 나 있다, 내일 당장 신제품이 나와서 새 걸로 바꿀지언정, 오늘 쓸 때까지는 깨끗이 써야 될 것 아니냐…… 어떻게 고쳤는지 몇 번 떨어뜨려서 맛이 갔던 기능들도 말끔히 작동되게끔 만들어둔 것을 보고 지해는 솔직히 정말 깜짝 놀랐다. 역시 그냥 속으로 놀라고만 말았어야 될 것을. 괜히 말로 했다가 몇 마디를 더 얻어 들어야 했다. ‘기계는 정직한 거야’ 하면서 스스로 흐뭇해 하던 그 표정이라니. 기가 막혀서 너네 집 식구들은 다 이러냐 그랬더니, 할아버지 닮아서 자기만 이렇고 다른 식구들은 아무 개념 없다며 씁쓸하게 웃고 만다. 정욱의 아버지는 실제로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지만, 할아버지는 TV로밖에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그냥 점잖은 신사로만 보이던 그 아버지보다는 카리스마 만빵으로 인상이 강렬한 할아버지 쪽이 저 녀석과 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 판박이라더니 정말 그런 건가. 쌕쌕거리며 자는 얼굴을 쳐다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에 잠겨있던 지해는 괜히 이 녀석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붙잡혀서 귀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버쩍 들어 서둘러 침대를 빠져나왔다. 어제 오후 늦게 도착해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러쉬아워에 딱 걸리는 바람에 길이 많이 막힌데다가 오랜만에 펄펄 끓는 한식을 배터지게 먹고 들어와보니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대충 씻고 빨랫거리만 세탁기에 휙 던져 넣고는 그냥 쓰러져 잠들어버렸었다. 지해는 살금살금 세탁실로 나가 세탁기를 작동시켜 놓고 거실로 나왔다. 며칠 비워놔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걸 빼놓으면 그 동안 이 집에 별로 변한 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전에는 이렇게 먼지가 앉은 건 본 적도 없는데. 오히려 신선하기까지 했다. 눈에 익은 대로 배치되어 있는 가구들. 두꺼운 유리로 된 TV 다이 아래 한 칸씩 차지하고 있는 전자제품들. 천장 모서리 한켠에 파인 홈으로 말려 올라간 채 숨어있는 전동 스크린. 아침이라 아직 불이 꺼져 있는 수조. 베란다 옆쪽 좁은 벽에 걸린 펜싱 마스크…. 모든 것이 다 예전 그대로다. 그리고 익숙한 문까지……. 문고리를 잡는데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문 뒤가 혹시 바뀌었더라도 너무 놀래지 말자, 이딴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좀 한심해서 문고리를 팍 꺾어 문을 열었다. 이 방 특유의 답답한 냄새. 뭔가 바뀐 것이 있다면 한쪽 벽에 의지해 비스듬히 세워둔 커다란 액자 하나. 회갈색 원목 액자 속에 담긴, 세피아 톤으로 깊은 음영이 두드러지는 그 사진이 누구의 얼굴인지는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걸 아직도 잘 모셔뒀구나 싶어 가슴이 좀 뭉클하기도 한다. 피식 하는 웃음을 흘리며 지해는 낯익은 갈색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나가 자는 녀석을 깨울까 싶어 하나하나씩 건반을 살살 눌러 보았다. 오랜만에 손끝에 닿는 나무 건반의 또박또박한 느낌. 손목이 시큰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그리웠던 감촉. 건반을 한번 만져보고나니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 집주인이 보증하는 이 방의 확실한 방음 효과를 속는 셈치고 다시 믿어보기로 하면서 지해가 방문을 꼭꼭 닫으려는데, 부시시한 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부엌에서 물 한 컵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해는 그대로 한 달음에 그 강아지에게 달려가 희한하게 뻗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려주고는 살짝 발돋움을 해서 아직도 잠이 그득한 두 눈에 속사포같은 뽀뽀를 퍼부었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정욱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물컵을 옆에 놓인 장식장 위에 올려놓았다. 투명한 아침햇살이 커다란 창으로 가득 들어오는 거실. 새해에는 둘의 앞길에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올해의 마지막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BGM : It's Always You - Chet Baker←CLICK! 지해는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넘기던 묵직한 잡지를 탁 소리가 나게 덮고, 잠깐 눈을 감았다. 무거운 머리를 뒤에 기대기라도 하고 싶지만, 염색한답시고 머리에 이고지고 덮어 씌운 게 너무나 많아서 그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뜨거운 열을 내뿜는 이상한 장치 밑에 머리통을 얌전히 갖다대고 있어야 하니…… 미용실 특유의 약품 냄새도 냄새지만, 이게 진짜 고역이다. 서서히 연갈색 뿌리를 드러내기 시작한, 까맣게 염색했던 머리가 보기 싫다며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필.히. 원상복귀 시켜놓으라던 그 누군가만 아니었던들 구태여 없는 시간 쪼개가면서 이러지 않아도 되었다. 광고 모델이라는 직업은 어찌나 자유가 없는지, 머리모양 한번 바꿀 때에도 에이전시와 광고주, 광고대행사 모두의 컨펌을 받아야 한다. 막상 검은 머리로 염색하게 만들어놓았던 광고주와는 단발성이라 계약이 끝났고, 다른 곳들이 그나마 허락들을 해주어 천만다행이었다. 얘기 꺼내놓고 어찌나 대답들이 없는지 지해는 답답해서 그냥 저질러버릴 걸 그랬다고 후회까지 했었드랬다. 밤 11시로 예약해 붙잡아 놓았던 미용사 두 명은 한참 지해 옆에서 떠들다가, 접대용 맞장구도 이만했으면 됐다 싶어진 지해가 잡지 삼매경에 빠진 척 하자, 멀리 떨어진 계단 옆쪽의 손님 대기용 소파로 자리를 옮겨 TV를 보고 있었다. ―어머, 저거 뭐야. 맛있겠다. ―진짜요, 선생님. ―이 한밤중에 TV에서 먹을 걸 자꾸 보여주면 어쩌란 말이야, 정말∼ ―그러게요. ―배고프지 않니? ―배고파요. ―떡볶이 사다 먹을래? 순대랑? ―이맘때까지 하는 데는 지하철 역 근처밖에 없는데, 제가 갔다 올까요? ―거기까지 어떻게 혼자 보내. 같이 갔다 오자. 한바탕 쑥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해야 너도 먹을 거지, 하고 둘은 앳된 여고생들처럼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며 겉옷을 들춰 입고 가게를 나섰다. 지해는 졸지에 듬성듬성 몇 군데만 불이 켜져 유난히 더 썰렁한 실내에 혼자 남았다. 세련된 5층 건물의 2층부터 4층까지를 다 쓰는 이 미용실에는 이 시간까지도 각 층마다 한두 명 정도씩 손님들이 있었다.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아가던 기계가 시간이 다 됐는지 틱 꺼지고, 지해는 자유의 몸이 되어 얇은 가운을 둘러쓴 채, 널찍한 플로어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창밖의 제법 화려한 야경 속에선 겨울 청춘들의 물결이 사거리 길 건너편 극장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광경을 조금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데 목에 걸어둔 핸드폰이 심장 속 깊은 곳까지 기분 좋은 진동을 전해왔다. “여보셔.” 「나다.」 “나가 누구셔?” 「번호 안 떴냐?」 “떴어.” 「더 이상 까불면 별로 안 귀엽다는 거 알지?」 “지랄 옘병∼” 「지금은 어딨냐?」 “미장원.” 말투는 험악하게 하면서도 입가엔 웃음이 고인다. 며칠째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전화 통화만 수시로 하고 있었다. 전화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긴 얘기를 하는 것도 없다. 어디냐, 밥 먹었냐, 뭐하냐, 왜 빨리 안 자냐……하다가 특별히 할 얘기 없으면 끊는다. 다만 문제는, 길바닥에 디굴디굴 굴러다니는 그 흔한 레파토리 몇 마디에 바보처럼 흐물흐물해진다는 것, 개새끼, 소새끼 하고 서로 주고받는 욕지기가 무슨 사랑의 밀어인양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 우리 미쳤다. 우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하고 길 한복판에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고픈 심정이 되고 만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일까……. 「머리 이쁘게 했냐?」 “아직 개봉 안 해서 모른다.” 「서울 올라가서 보고 이쁘게 안 했으면 다시 하라고 할 거야.」 “이 씹새가 점점∼” 「많이 잘랐으면 안 되는데……」 “우씨∼ 그렇게 신경쓰이면 니 손으로 직접 해, 임마∼!”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한다, 내가.」 그 말이 너무나 진짜같이 들려서 지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저 녀석은. 지해가 대꾸를 못하고 있자, 정욱이 킬킬거리고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선을 타고 전해지는 나직한 바리톤의 관능적인 울림에 갑자기 몸 속 심지에 스위치가 켜진 듯한 충격이 짜릿하게 흘러내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지해는 슬며시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민감해진 피부 위에서 옷이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옷가지 하나하나의 생경한 감촉이 아플 만큼 야릇하게 살갗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 개새끼. 사람을 이렇게 병신을 만들고…… 정말 재주도 좋구나. 보고 싶어 죽겠다. 빨리 와라. 연초부터 바빠진다더니 정욱은 큰아버지의 별장에서 해마다 있는 스키 모임에 가 있었다. 그 집안 자손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 할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매년 계속되고 있는 것이어서, 그 자손들의 (선택된) 친구들까지 포함해서 애들끼리 모인다 해도 평소 실력대로 화려(?)하게 놀 수는 없는 모임이었다. 강회장은 이 때에 하루 저녁 한 끼는 반드시 애들과 같이 하도록 하고 있었고, 언제 또 다른 어느 어른이 얼굴을 디밀지 몰랐다. 당연히 애들이 죽도록 가기 싫어하는 모임이었다. 큰아버지가 스키로 대학을 간 둘째딸을 위해 별장 근처에 지은 완벽한 시설의 개인 스키장만이 유일한 위로가 될 뿐이었다. 세강 그룹에서 최고의 알짜배기 회사였던 세강 자동차를 다른 몇개 방계 회사와 함께 그룹으로부터 분리해서 국내 재계순위 6위의 독자적인 자동차 전문 기업으로 벌써 3년째 이끌고 있는 큰아버지는, 건설과 전자의 지분도 10% 이상을 가지고 있어 집안에서 할아버지 다음으로 세력이 막강했다. 이 집에 비교하면, 본 궤도에서 밀려나 주변부를 맴돌고 있는 둘째 아들(정욱의 아버지)의 집은 그 ‘능력’에 있어서 발 뒤꿈치도 따라잡기 힘든 상황이었다. 똑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 사이라고 해도 힘의 논리에 의해 강자와 약자는 자연스럽게 구별이 되고 있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정욱은 이런 작은 모임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잘 해내야만 했다. “야∼ 왕자 마마야!” 「왜?」 “……예정대로 모레 오는 거지?” 「이변이 없는 한.」 “이변도 있을 예정이냐?” 「어쩌면.」 “………….” 「할아버지가 내일 오신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될지 잘 몰라. 작년에는 여기서 바로 벳부로 끌려갔었어.」 “……너 혼자만?” 「많이 안 데리고 다니셔. 주로 나 아니면 큰집의 형……. 그 정도.」 “………….” 창밖이 잘 보이는 소파에 대충 자리를 잡고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지해는 그 듣기 좋은 바리톤을 음미했다.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음절 하나하나가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에 달콤한 자극을 전해주고 있었다. 예민하게 곤두서버린 가슴돌기가 옷에 쓸려 따끔거리자, 지해는 무의식중에 엄지 손가락으로 그곳을 문질러 보았다. 희미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어디서 요상한 소리가 난다?」 “……!” 「너 지금 뭐하냐?」 “하, 하긴 뭘해? 전화 받지!” 창피함에 얼굴을 싯뻘겋게 물들이며 더듬더듬 소리를 지르자, 전화기 너머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째지나 보다. 「나 보고 싶지?」 “………….” 「이틀밤만 잘 참고 버텨라. 곧 간다.」 “으아∼ 느끼한 새끼∼! 너 오지 마. 거기서 아주 살어∼!” 말로만∼, 그러면서 정욱이 다시 나직하게 웃었다. 섹시한 바람 소리가 많이 나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 소리에 섞인 입김이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몸서리처지도록 생생하게 와닿았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느끼고 싶었다. 몸과 마음의 안테나가 다 그쪽만을 향해 있었다. 자신의 이런 반응이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뒤, 지해는 무거운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어둑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정욱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열정적인 연인. 가족도 형제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는 동지.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등을 돌렸을 때도 자기 편이 되어주었던 녀석. 때로는 아버지처럼 든든하게 받춰주는 마음 속의 기둥이고, 때로는 자신이 챙겨줘야 하는 응석받이 강아지.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구실도 없어졌다. 성벽이 깨끗이 무너져내려, 성은 완전히 함락되고 말았다. 알량한 자존심보다 훨씬 정직한 몸과 마음에 순순히 백기를 든지 이미 오래였다. 단 한 사람이 던져주는 파장에 의해 부채를 펼친, 수백, 수천가지 감정의 스펙트럼으로 심장을 꽉 메우고 살아가는 하루하루. 그런 충만한 뿌듯함에 일단 중독되고 나면, 그 행복이 없어졌을 때의 허전함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이 녀석 없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자기네들 둘 사이에 약속된 미래는 얼마만큼일까? 아니, 그 미래 자체가 있기는 한 걸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지해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 피워물었다. 예전에는 둘의 관계에 대해 훨씬 대범하고 담담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 척 할 수 있던 시절도 있긴 있었던 것 같다.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열정을 조금씩 나누어 평생 동안 아껴가며 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해는 길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이 불안한 느낌은 불안한 대로 그냥 손대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불안하고 초조하다고 자꾸 툭툭 건드리고 헤집으면 그나마 단단하던 것까지도 부스러져버린다. 안 어울리는 짓 하면 괜히 쓸데없는 고생만 한다. 내버려 둘 거다. 어떻게 되든…… 흘러가는 대로…… 이제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되돌아갈 수도,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막다른 벼랑 끝까지 자신은 이미 와 있었다. 정욱이 방에서 전화 통화를 끝내고 아래층으로 내려와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열 명 가까이 몰려있던 것이 썰물 빠진 듯 사라져 있고, 자신과 같이 온 민혁과 명주 그리고 큰아버지의 아들로 이제 대학 2학년인 정수, 이렇게 셋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정욱이가 내려왔으니 이제 우리는 그만 자러가야겠다?” 1층 전체를 비스듬히 반 바퀴 도는 나선형 계단에 정욱이 모습을 나타내기가 무섭게 정수가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의를 구하듯이 과장된 제스추어로 민혁과 명주를 돌아보았지만, 둘 다 좀더 앉아있겠다는 자세를 보이자 정수는 둘에게 인사를 하고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네 손님은 네가 관리해야지 내팽개쳐두고 네 볼일만 보면 어떡하냐.” 계단에서 정욱과 스치면서 정욱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대단한 일이라도 해준 것처럼 생색을 낸다. 정욱은 지해와 전화하면서 붕 떴던 기분이 삽시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느슨하게 이완됐던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차가운 기운이 발끝부터 치달아 올라온다. 말로 대꾸할 가치도 없는 터라, 겉치레용 스마일을 입꼬리에 대충 달고 고맙다는 제스추어로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정연이는?” “걔야 뭐…… 공사가 다 망한 애 아니냐. 너 올라가자마자 금방―” “너, 또 애인이랑 전화하고 왔지?” 정수가 앉았던 맞은편 자리에 정욱이 털썩 앉으며 동생부터 챙기자, 명주가 볼멘 소리를 내며, 민혁의 대답을 잘랐다. “우리 둘 다 이제 낼 모레 가면 여름방학이나 돼야 볼 텐데―” “어허이∼, 나까지 끌어들이지 마. 나는 우리 할매 생신 땜에 3월말에 죽었다 깨나도 나와야 되니까.” “그래∼? 대학생이라고 아주 여유 만빵이시구만?” “억울하면 너도 빨리 대학 가라. 강군도 아까 그러지 않던.” 민혁이 방금 퇴장한 정수의 얘기를 들먹이자, 명주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으으윽, 그 아저씨… 야, 강정욱. 너 없는 동안 얼마나 웃겼는지 아냐?” “그 강군이 좀 썰렁하지. 이 강군에 비하면 매력도 전혀 없고.” 머리도 좀 나빠, 하고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조그맣게 덧붙이고는 민혁은 마시던 맥주캔을 입에 탈탈 털어넣고 새로 캔 하나를 땄다. 민혁이 캔을 따면서 내용물이 조금 튀어 자신의 왼손 등에 떨어지자, 명주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그 물방울을 민혁에게 도로 튕겨 보냈다. “……남이 귀찮아하는 것도 모르고 끝까지 버티고 앉아서……어떻게든 자기 자랑하려고 기를 쓰고. 너는 또 은근히 엄청 깎아내리더라.” “고만해라. 원래 그런 사람이야.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 “누가 많은 걸 바란대?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민혁과 명주가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는 걸 정욱은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못 들은 척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인 이야기다. 친척들끼리 서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할퀴기 시작하면 남만도 못한 법인데, 이 집안의 사촌들이 좀 그런 경우였다. 더구나 큰아버지의 아들 정수와 정욱 사이에는 어려서부터 항상 미묘한 라이벌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수는 자신이 집안의 장손으로서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항상 정욱을 우선시하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많은 불만을 느꼈다. 그런가 하면 정욱은 정욱대로, 언젠가 자연스럽게 ‘세강자동차’를 물려받게 될 정수에 대해 은근한 부러움을 갖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동차광이자, 기계와 관련된 것이라면 유난히 손과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정욱으로서는 자동차 회사란 마음 속 깊이 숨겨놓은 짝사랑 같은 것이었다. 정욱은 오랫동안 학생다운 열정으로 머릿속에서 자신의 꿈의 차를 설계해 보곤 했었다. 한국 실정에 맞으면서도 세계적인 수준급 브랜드로 발돋움할 만한 차…… 만약에 자신이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게 된다면 꼭 생산해내고 싶은 차. 외국에서는 아직 싸구려로 인식되는 한국차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켜줄…… 마치 ‘렉서스’가 그랬듯이…… 재작년에 세강 자동차가 그룹 계열로부터 분리 선언을 했을 때 정욱은 가슴을 찌르는 상실감을 속으로 삭혔더랬다. “몇번씩 했던 얘기를 치사하게 또 하잖아. 애들 앞에서.” “무슨?” 명주가 입맛이 쓰다는 듯이 말을 꺼내자, 정욱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전용기 함부로 쓰지 말라구. 애들 ‘놀러’다닐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니라구.” 필리핀으로 지해를 뒤따라갈 때, 암만 해도 비행기에 자리가 없어서 마침 놀고 있던 회사 전용기를 타고 나갔던 걸 정수가 끝끝내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전용기 두 대 중에 한 대는 정비중이라, 남은 19인승기 한 대를 썼었는데, 제일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어른들 다 계신 앞에서 핀잔을 준 것도 정수였다. 평소엔 절대로 책잡힐 일을 하지 않는 정욱의 실수 하나를 ‘마침내’ 발견하고 신나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우려먹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자기야말로 ‘놀러’가는 데 쓰려다가 정욱이한테 선수 잡혀서 틀어졌다던데?” 민혁이 입에 다 털어넣은 맥주캔을 찌그러뜨리고는 명주한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어머, 진짜야? 디게 웃긴다. 어디서 들었어?” “그때 같이 가려던 친구놈한테 들은 거니까 확실한 거야. 나하고도 친구거든, 그 새끼가.” 명주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이틀 연짱으로 술 먹고 포카치고 놀고 있었는데, 정수가 갑자기 나가서 놀자고 그러더래. 라스베가스 가기로 했다가, 어떤 새끼가 피곤하다고 가까운 데 가자 그래서, 마카오 가자고 저만 따라오라고 큰소리 땅땅 쳤다는데. 쪽만 팔린 거지 결국.” 자신도 처음 듣는 얘기에 정욱은 어이가 없어 피시식 웃고 말았다. 정욱은 웃으며 앞을 보다가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명주와 눈이 마주쳐 약간 놀랐다. 명주는 뭔가 슬픈 듯한 얼굴로 정욱을 잠시 보더니, 곧 씩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옆에 앉은 민혁에게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빠. 얘도 알고 보면 힘들게 살어, 그치?” “누구 말이야?” “얘.” “얘가 누구야?” “으이그, 여기 누가 또 있어? 강정욱 말이야.” “아아? 저 새끼? 이제 알았냐? 원래 그래.” “……그래도 왠지 불쌍해.” “성격 탓이야. 저 새끼 성격이 지랄맞아서 그러니까 냅둬. 하나도 안 불쌍해.” “………….” “으악, 저 새끼가 뭐가 불쌍해?!! 내가 볼 땐 니가 더 불쌍하다.” “못됐어….” 명주는 느닷없이 맥주캔 하나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취기가 돌기 시작했는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빠도 못됐고, 얘도 못됐어…… 둘 다 못됐어.”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한 명주를 민혁이 끌어다가 토닥토닥 위로를 해주었다. 순식간에 맞은 편에서 벌어진 촌극에 정욱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찌푸리자, 민혁이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너트를 집어 정욱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정욱이 눈을 크게 뜨고 항의하려고 하자, 너트 한 알이 또 날아와서 뺨을 맞춘다. 민혁의 표정이 생각보다 훨씬 진지해서 정욱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 이 기집애야. 주책맞게 울고 그러냐. 너 땜에 힘들어 죽겠다.” “……내가 뭘?” 명주는 그제서야 좀 진정이 되는지 손등으로 얼굴을 슥슥 문지르며 어깨에 얹힌 민혁의 팔에서 벗어났다. “술 먹고 우는 년이 젤 밥맛이야.” 치, 하면서 명주가 민혁을 째려보았다. “나는 술 먹고 옷 벗는 애가 젤 좋더라. 이왕이면 놈이 좋지.” “으으, 징그러.” “너야 뭐. 벗어도 별 볼일 없겠지만…… 우는 것보다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명주가 자기 등 뒤에 있던 쿠션을 꺼내 들고 민혁을 인정사정 없이 펑펑 내리치면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방방 뜨기 시작했다. 때 아닌 소란을 지켜보면서, 정욱은 저 환상의 콤비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당분간 떨어지게 된다니 참으로 안된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세 명 다 2층으로 자러 올라가면서 명주가 문득, 너 이제 나 안 보니까 속 시원하지, 하고 물어오자, 까닭없이 속이 뜨끔해졌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대답대신 그저 명주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왜 손이 척 먼저 나갔는지는 자신이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BGM : Sea Song - Tears For Fears←CLICK! 그 다음날 오후, 지해는 현규의 전화를 받았다. 그저 심심해서 뜬금없이 안부전화 한번 했겠거니 했지만, 저녁 사줄게 나오라는 목소리 속에는 묘하게 강압적인 분위기가 숨어 있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압구정동 광림교회 근처에 있는 포토그래퍼의 지하 스튜디오 앞까지 일부러 데리러 나온 현규는 지해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대뜸 뭐 먹으러 갈까, 하고 물어왔다. 아무거나, 라고 말하면 정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머릿속만 분주해지고 차는 방향을 정하지 못해 옴짝달싹 못한 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초래하며 애꿎은 시선만 받게 된다. 그건 또 싫다. 저녁 먹기에는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해는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낙지요, 하고 총알같이 대답했다. 특별히 먹고 싶었다기보다는 바로 눈에 띄는 곳에 ‘낙지 어쩌구저쩌구’ 하는 간판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규는 금세 얼굴이 밝아지며 ‘낙지? 좋아. 낙지 먹고 펑펑 우는 꼴 한번 보자’ 하고 대답했다. 워낙 맵기로 유명한 집이기 때문이란다. 러쉬아워를 피해 현규는 골목 사이사이로 재주좋게 차를 요리조리 돌려 빠져나갔다. 한때 이 동네에 살았던 지해조차 감탄할 만큼 골목 지리에 훤한 것 같았다. 대단하시네요, 하고 칭찬해 주자, 골목은 골목 나름대로의 공식이 있기 때문에 일단 ‘길의 도道’를 깨우치고 나면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눈에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나중에 정 할 게 없으면 택시 운전을 해도 된다고 어깨를 으쓱한다. 지해는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기로 했다. 몇 달 전까지 살던 동네를 지나며 새로이 감회에 젖어있던 지해의 눈에 언뜻 예전에 살던 집이 들어왔다. 아니, 그 집은 이미 다 때려부수고 그 자리에 건물을 짓고 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집터가 눈에 들어온 셈이다. 그 터가 저렇게 넓었었나? 벌써 거의 공사가 끝나가는 듯, 외장재 마감은 다 되어 있었고, 창틀에 을씨년스럽게 붙어 있는 비닐 조각이나 창문의 지저분한 페인트 자국, 채 정돈되지 않은 주위 부지 등등을 빼면 말끔하기만 한 신축 6층 건물은 제법 넓어 보였다. 몇 사람들의 몇년에 걸친 기억을 허물어 부수고, 그 얼어붙은 터전 위에 새로이 지은 건물. 조만간 꽃피는 봄이 오면 또다른 새로운 사람들의 발소리로 가득 채워지겠지만…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 그 건물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지해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데로 데려가기에 이렇게 오래 가는 건가 싶었는데, 저기다, 하고 가리킨 그 곳은 다 쓰러져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허름한 곳이었다. 세련된 미남 배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고 누추한 가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가게 근처의 유료 주차장(그래봤자 비포장된 허름한 공터에 불과하지만)을 입추의 여지없이 메우고 있는 자동차들의 목적지는 모두 한 군데뿐이라는 사실. “너 맛있는 집의 3대 조건이 뭔줄 아냐?” 바깥에서 보기와 별 차이없게 촌스러운 내부를 앉을 자리가 없어보일 정도로 꽉 채운 손님들에 아연해 하며 지해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자 현규가 웃으며 말했다. “알아요.” “뭔데?” “첫째도 맛. 둘째도 맛. 세째도 맛!” 푸하하, 그것도 뭐 말이 되긴 하지만, 하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현규는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대뜸 ‘2인분’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주문을 한 뒤, 담배를 꺼내 물고 지해에게도 피고 싶으면 피워라, 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는 원래 국사발이었음직한 스뎅(!) 그릇. 등받이조차 없는 딱딱한 의자는 바로 뒷 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등이 마주 닿을 정도로 좁다. “첫째 조건은 말이야. 척 봤을 때 가게가 무지 오래됐다는 표시가 팍팍 날 것. 간판 한 귀퉁이가 찌그러져 있다거나 글자가 하나쯤 빠져 있다거나 하는 건 옵션이고.” “이 집도 뭐.” “응. 그런 의미에서 아주 만족스럽지. 그리고 두번째는…” 멀뚱히 앉아있던 지해가 플라스틱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어 놓는 동안, 다른 테이블의 손님이 아는 척이라도 했는지, 현규는 말을 하다 말고 그쪽에 억지 웃음을 지어 보내고 있었다. “아, 두번째는 메뉴가 딱 한 가지뿐일 것. 이때 중요한 점은, 그거 하나 팔기도 바빠서 딴거 만들 시간이 없다는 거만한 뉘앙스가 충분히 전해질 것.” “세번째는 뭐에요?” 지해는 종업원이 쾅 소리와 함께 날라다준 차디찬 물을 벌컥 마시며 물어봤다. 물컵도 따로 없는 집인지 물그릇 또한 재떨이와 똑같은 재질과 사이즈의 스테인레스 사발이다. “세번째는 서비스가 개판일 것.” “지금처럼요?” 지해가 종업원 아줌마가 물그릇을 쾅하고 내려놓을 때 테이블 위에 흘러넘친 물을 냅킨으로 닦으며 물었다. “응. 너 하나쯤 또 오든말든 우리 영업에 전혀 지장없다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숨어있어야 돼. 그리고, 그릇이나 컵 같은 건 반드시 이가 하나 빠져있다든가 기타 등등.” “멋있네요.”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맛을 못 잊어서 그 집을 찾고 찾고 또 찾는다! 이 정도는 되어야 맛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그렇군요.” 지해의 마지못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대화는 일단 정지. 둘 사이에는 휑한 침묵이 감돌았다. 머쓱한 분위기를 무마시키려는 듯 현규가, 너 소주 마실래, 하고 묻는다. 운전하셔야죠, 하고 지해가 대답하자, 그러니까 나 말고 너만, 한다. 이래서야 소주 마시고 싶어도 못 시킨다. “이래뵈도 제가 아직 고등학생이거든요. 미성년자가 감히 어디서 술을∼!!” “얼씨구∼!” 어색한 공기도 잠시, 둘이 킥킥거리며 사이좋은 선후배를 연출하고 있는 동안, 말그대로 펄펄끓는 싯뻘건 낙지볶음 한 양푼(!)이 날라져 왔다. “너야 그렇다 쳐도 그 녀석은 정말 고등학생 같지가 않아.” “……누구―?… 아…… 정욱이요?” “응. 그 녀석은. 잘 있지?” “아…… 네….” 매워서 눈물 날 거라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직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그 존재만으로도 벌써 눈과 코가 매캐하다. 언뜻 보기에도 고춧가루가 한 됫박 넘게 들어갔지 싶다. 저게 뱃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위가 쓰릴까. “그렇게 엄청난 집안 자식인 줄은 내가 또 몰랐잖냐.” “………….” “엊그제 우연히 알았다.” “………….” “전에 같은 반이었다고 했던가?” “네.” 지해는 더 이상 그쪽으로 대화를 발전시키는 게 싫어서 이 엄청나게 매운 낙지 볶음에 심취한 듯 열심히 퍼먹기 시작했다. 맵다 못해 아프다 못해 감각조차 없어져가는 혀를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겨우 깨워가며, 눈물인지 뭔지 흐릿한 시야를 손등으로 계속 훔쳐내며, 두피에까지 송글송글 맺혀오는 땀을 연신 닦아가며,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매운 ‘그것’을 거의 자학하는 기분으로 삼켜댔다. 지해가 묵묵히 먹는 동안, 현규는 열심히 얘기에 전념했다. 정욱에 관한 얘기는 그걸로 끝. 주로 일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너 우리 회사로 오라고 내가 한참 꼬시던 거 기억하지?” “네….”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그렇군요….” 그것 봐, 아저씨. 나같은 애송이한테 스카웃이라니 가당키나 하냐구. 지해는 이 사람이 괜히 쓸데없는 말 꺼내놓고 잘 안 되겠으니까 미안해서 오늘 불러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너 몰라?” “네?” “니네 에이전시가 우리 회사에 합병되기로 했잖아. 다음 주쯤 계약서에 도장 찍는다고 들었거든.” “그럼…… 저…… 없어지는 거에요? 저희 회사가?” “그게 아니고, 말하자면 복잡한데…… 사무실 같은 건 지금대로 유지하면서 일종의 계열사가 되는 거야.” 금시초문…… 아니, 엊그제 형들이 떠들던 얘기가 이 얘기였나? 차라리 잘된 일이라느니, 조건이 좋다느니 어쩌구 하면서 심각하게 떠드는 걸 남의 일처럼 흘려 들었었는데…… 그러고 보니 요새 사무실에 변호사니 회계사니 하는 사람들이 드나들길래 이상하긴 했었다. “박실장이 애들 골라내는 눈도 좋고, 부지런하고 한데 말야. 너무 정석대로만 하려드니까…… 힘들지. 좀 키워놓으면 금방 딴데서 애들 빼가려고 작업하고, 모델쪽 말고는 자기가 커버할 능력도 안 되니까 애들이 빠져나가도 막을 수가 없고….” 하긴 요새 형들 중 두어 명이 딴 데로 간다는 뒷소문이 퍼지기도 했었고, 그것 때문에 사무실에서 큰 소리가 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실장님과 어디를 갈 때마다 자주 듣던 소리가 모델 에이전시 하면서 학원 장사를 병행 안 하고 어떻게 운영하냐는 말. “서로 잘된 일이니까 표정 좀 풀어라. 박실장도 자기 좋은 일만 할 수 있고, 우리 회사는 괜찮은 신인 몇 명이랑 박실장이 애들 찝어내서 키우는 능력까지 같이 사는 거니까.” 그리고 지해의 핸드폰 벨이 갑작스레 울릴 때까지 현규는 일 얘기를 계속했다. 그때 출연 제의를 했던 영화에서 주인공 동생 역할은 형식적으로나마 오디션을 보기로 했으니 준비를 잘 하라는 것이다. 물론 누가 맡을지는 반쯤 확정된 상태나 마찬가지라고 장난스레 덧붙이면서. “알았어. 그래…… 거기? 추운데 왜 하필?…… 알았다 알았어.” 어두운 표정으로 지해가 전화를 끊자, 현규는 가는 데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그만 일어서자, 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택시 타고 가겠다고 극구 사양하는 지해를 어차피 그 방향으로 가야 하니까 상관없다며 현규는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해서 차에 태웠다. 가게를 나서며,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 뒤 지해는 약속 장소인 한강 둔치에 다다르도록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묻지도 않더라?” “네?” “그 녀석이 어느 집안 자식인줄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아….” 별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들은 척 만 척 빨리 넘어갔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누구한테 들었을까. “그저께 경서한테 문병 갔다왔다.” “……!” “딴 것들은 다 퇴원했는데 그 놈만 아직 병원에 있다길래 학교 선배된 도리로 한번 가봤지.” “………….” “어디서 당했는지 얼굴이 아주 엉망이 됐더라. 이빨 다 나가고 입 주위가 완전히 망가졌어. 턱뼈랑 혀도 좀 다쳤는지…… ” “………….” “정말 장난 아니던데. 수술을 몇 차례 더 해야 할 거래. 모델 노릇은 이제 틀린 것 같고…… 그보다도 거의 죽다 살아났나 봐.” “………….” “아직 말을 못해서 글로―” “말을 아예…… 벙…어리가… 되는 건가요?” “설마 그러진 않겠지.” 지해는 계속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정신이 아득하다. 불규칙하게 헐떡이는 심장 고동만 귓전을 울릴 뿐. 한강 둔치로 가는 길목 앞에 차를 세우고 현규는 잘 가라는 인사 대신 조심해라, 하고 말했다. 조심해. 경서 녀석 잔뜩 벼르고 있어. 그놈이 어떤 놈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생각보다 빨리 오네.” 한강 둔치 주차장에서 낯익은 보라색 Z3를 발견하고 지해가 어슬렁 다가서자 주원은 운전석 창을 내리며 반갑게 웃었다. 조수석을 가리키며 차에 타라는 손짓에 지해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주원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리 쉰다. “전화 받자마자 곧 출발한 거야.” “머리 원상복구했구나. 보기 좋다. 옛날 모습 보는 것 같애.” “옛날이라고 해봤자….” 겨우 1년전. 고작 1년 사이에 굉장히 이상해진 둘의 관계. 처음부터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면 좋았으련만. 지해는 어색한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툭 찼다. 살을 에이는 강바람에 땅은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엄청 춥다. “할 말 있다며?” 주원은 대답은 않고 잠깐 고개를 돌리더니 차에 타라고 다시 손짓을 한다. 지해는 또한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 얘기 끝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해 차에서 내린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주위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조금 내려가서 보니 강물도 겉으로 보이는 표면은 꽁꽁 얼어있다. 어느 만큼이나 깊이 얼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차가운 강바람에 주원은 목을 움츠리며 두꺼운 더플 코트 주머니에 넣고있던 손을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 녀석하고는 다시 잘 해보기로 한 거냐?” 지해는 멈칫하며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너무 난처한 질문이다. 최소한 이 사람에게 대답하기에는. “나, 너랑 확실히 끊기로 결심했어.” “………….” “너랑은 오늘 이걸로 끝이야.” 뭐라 대답할 말이 없다. 고맙다는 한 마디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일지도 몰라. 지금 기분 같아서야 꼴리는 대로 막 나가고 싶긴 해도. “연말에 너 죽어라 연락이 안 되길래….” “여행 갔었어.” “알아. 그 녀석이랑 같이 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아니라고만 할 수도 없다. 일이 참 웃기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해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별 생각을 다 했었어. 속이 뒤집어져서….” 주원은 코트 주머니에서 계속 만지작거리던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꺼내 칼날을 탁 세웠다. 일반적인 아미 나이프보다 훨씬 사이즈가 큰 칼날이 가로등 불빛에 차갑게 반짝였다. “…… 너 죽이고 나도 죽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지해는 저 인간이 또 무슨 일을 벌일 셈인가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떤 식으로 공갈을 치든지간에 또 놀아날 수밖에 없겠지. 이 인간한텐 늘 약하니까. 이번엔 또 뭘까…… 그런데 문득 이 상황이 아주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언젠가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 적이 있었다. 잠깐 스쳐가는 해프닝인줄 알았는데 섬뜩한 현실로, 리얼한 공포로 다가온 적이 있었다. ―어,엄마, 왜 이래!!! 그만 해!!!! 이러지 마!!!!! 울부짖던 자신의 어린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쳐 왔다.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옅은 구역질이 일었다. 왠지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런 식으로 그 악몽같은 기억이 재현된다는 게…… 어째 좀 너무나 바보같은 패러디처럼 느껴진다. 「스크림」이 「무서운 영화」가 된 것처럼. 「쉬리>가 「재밌는 영화」가 된 것처럼. 사는 것도 귀찮아. 더 이상 별로 아쉬울 것도 없어. 죽이고 싶으면 죽여 봐. 그 따위 칼로 네가 정말 확실하게 죽일 수나 있으면. “……난 상관없어. 너 하고싶은 대로 해봐.” “글쎄….” 지해가 담담하게 말하자, 주원은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런 짓은 바보같은 짓이잖아, 그치 지해야?” “그렇지. 니네 부모님을 생각하면….” 왜 이 순간에 이런 대사가 나올까. 마치 남의 얘기라도 하듯이 지해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키워주셨잖냐. 두 분 다 좋은 분들이시고…… 솔직히 말해서 니네 집 엄청 화목한 가정이잖냐.” 부모님 얘기를 꺼내자 주원은 금세 양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딴에도 그런 소리는 또 듣기 싫은 건지. “부모님 얘기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어. 걱정 마. 내 인생이 아까워서라도 그딴 짓은 안 해.” “………….” “사실은 너 오기 전까지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 정하지를 못 하고 있었어.” “………….” “그냥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기는 왠지 좀….” 아까의 도발적인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주원은 점점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지해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름대로 계속 숨을 죽이고 있었나 보다. 갑자기 담배 생각이 절실해져서 급히 파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한 바람 때문에 겨우 라이터 불을 붙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주원은 아직도 칼날을 그대로 세운 채, 지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 “………….” “말을 해봐.” 한참동안 지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주원이 대답했다. 네 몸의 일부분을 잘라줘. 기념으로 갖고 싶어. 굉장히 웃긴다고 생각했는데, 지해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데도 이 말은 묘하게 사실적으로 들린다. 어디가 됐든 꼭 잘라줘야 할 것 같다. 진짜로. 주원이 서서히 다가오는 동안, 지해는 무방비하게 서서 멍청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라도 잘라줘서 완전히 끝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근데 잘라도 아무 상관없는 곳은 어딜까. 손가락? 귀? 다 안 되는데… 설마 거시기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그건 좀 상당히 곤란하지. “진짜 잘라갈 거야? 보관은 잘 할 수 있어? 냉장고에다 얼음 채워서 둘 거냐?” 주원은 피식 웃으며 지해에게 칼을 내밀었다. 잠깐 머뭇거리자, 얼른 받아, 한다. “무슨 엽기스런 상상을 하는 거야, 너? 잔말말고 머리카락이나 좀 잘라줘.” “………….” “빨랑∼!” “결국 내 털을 원한다 이거지?” “그래, 임마. 맘 변하기 전에 빨리 하기나 해.” “가만 있어 봐. 담배 마저 피고.”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한 웅큼 덥석 잘라서 준 머리칼을 소중히 받아 차에 있던 크리넥스로 잘 싸서 주머니에 넣은 후, 주원은 조수석 앞의 글로브 박스에서 뭔가를 꺼내 가지고 왔다. “손바닥 좀 벌려 봐. 아니, 이렇게.” 주원은 지해의 손을 억지로 끌어가더니 하늘을 향해 평평히 벌린 손바닥 위에 동그란 양철통에 든 빨간색, 흰색, 노란색의 과일사탕 세 알을 올려놓는다. “뭐야, 이건.” “잘라냈으니까. 상처 덧나지 말라고. 약이야. 빨간 거는 소염제. 흰색은 진통제.” “노란색은 뭔데?” 지해는 어처구니없어 웃으며 노란 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며 단물을 쪽쪽 빨았다. 편의점에서 파는 흔하디 흔한 외제 사탕이다. “노란색은…… 진정제야.” “진정제가 왜 필요해?” “너무 놀라지 말라구.” 주원은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어뒀던 비디오테입을 꺼내 지해의 손에 쥐어 주며, ‘심심할 때 가끔 봐봐, 재밌어, 특히 딸딸이 칠 때’ 한다. 엉겁결에 테입을 받아든 지해의 머릿속에 불길한 느낌이 스쳐갔다. “이게 뭔데?” “이거…… 사실은 이걸로 널 협박할까 생각도 했었어.” “뭐냐니까?!!!” “전에 몰래 찍어뒀었지. 너랑 나랑 우리집에서 했을 때. 벽장 안에 카메라 숨겨놓고. 잘 나왔을지 자신 없었는데, 예상외로 엄청 확실하게―”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꽁꽁 언 손으로 얼어서 굳은 뺨을 철썩 때리고 나니 손에 찌르르 전기가 왔다. 손이 아프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새끼를 때리는구나. 라스트 한번 화려하다. 주원이 가고나서 지해는 테입 안의 줄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테입 껍데기를 마구 밟아 박살을 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듯이 뒤늦게 애꿎은 테입에 화풀이를 하고 숨을 돌리다 보니 지금 자기 꼴이 얼마나 우스울까 싶다. 이 머리 때문에도 여기저기서 잔소리 좀 듣게 생겼다. 배낭에 넣어두었던 벙거지 모자를 꺼내 푹 눌러쓰고 지해는 큰길로 올라와 택시를 잡았다. 주원이 준 테입이 원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김지해!”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동네 포장마차에서 한 잔 걸치고 그것도 모자라 편의점에서 소주를 세 병 사들고 집 앞 골목으로 꺾어지려는데, 낯익은 키 큰 그림자가 삐까번쩍한 할리를 세워놓고 기대어 서 있었다. 지해는 술기운에 정신이 알딸딸한 와중에도 내일 온다던 자식이 이 늦은 시간에 여긴 왠일인지, 그 잘난 할아버지가 올해는 그냥 고이 보내준 건가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하루 빨리 왔네.” “전화는 왜 꺼놨어?” “추운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누구 기다리냐?” 이 녀석이 제 정신인가 싶어 어이없어 하던 정욱은 지해가 좀 취한 상태라는 걸 알고 한숨을 내쉬고는 헬멧을 꺼내 지해에게 던져주고 바이크에 올라 앉으며 시동을 걸었다. 시동 걸리는 소리부터가 벌써 예사롭지 않다.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발끝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울린다. “가자. 빨리 뒤에 타.” “어딜 가?” “집.” “우리 집은 바로 저긴데?” “너 내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어?” “내가 언제 기다리랬냐? 누가 사서 고생하래?!” “이 쌔끼가 진짜.” “………….” “맞고 탈래 그냥 탈래?” 지해는 우두커니 서서 헬멧 속에 손을 넣고 휘휘 돌리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에 다시없이 반가운 놈이더라도 오늘밤은 조용히 혼자서 쉬고 싶다. “안 맞고 안 탈란다. 이 엉아가 오늘 좀 피곤하다. 내일 보자.” 정욱은 헬멧을 도로 건네는 지해의 손을 팍 나꿔채 잡더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비닐 봉투를 빼앗아 벽에다가 냅다 던졌다. 병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독한 술 냄새가 팍 끼쳐왔다. 바이크 시동 거는 소리에 이미 동요하고 있던 동네 개들이 경쟁적으로 짖어대기 시작했다. 담벼락에 난데없는 술 세례를 받은 집 현관에는 불이 탁 켜졌다. “쒸바. 이 씨방새가 피같은 술을∼!” “너 오늘 왜 이래? 말로 할 때 빨리 타. 성질 돋구지 말고.” “싫다, 씹새야∼!!!!!” “이 씨뎅할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너 죽고 싶냐?” “그래. 젠장! 오늘은 이 새끼든 저 새끼든 다 죽인다고 난리냐? 죽여라, 죽여!!!” “너 니네 집 앞에서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아가리 닥쳐!” 정욱은 잽싸게 바이크에서 내려 갑자기 발작이라도 하듯 길길이 날뛰는 지해의 어깨를 잡아챘다. “싫어, 싫어!!!! 이거 놔!!!! 내가 왜 너 하라는 대로― 읍.” 바이크 위로 밀어붙여지며 지랄발광을 하던 지해도 한참동안 거칠게 입술을 탐해지면서 점점 반항의 도가 약해졌다. 술기운 탓인지, 입 안을 물어뜯을 듯 헤집는 격한 키스 때문인지, 아니면 아랫도리를 저릿저릿 달구는 바이크의 대단한 진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너 머리 꼬라지가 뭐 이 따위냐?” 뒷덜미를 꽉 움켜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입술을 떼지않은 채, 정욱은 헬멧을 씌우려고 한 손으로만 지해의 털모자를 벗겨버리다가 한쪽 귀퉁이만 귓가부터 싹둑 잘라진 머리를 보고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지해는 아무 말도 않고 손등으로 입을 싹 닦은 뒤, 황급히 도로 모자를 나꿔챘다. “쥐가 파먹었냐, 어디서 뜯겼냐. 이게 뭐야?” “지나가다가 짤렸다.” “어디서? 왜?” “약 먹었으니까 됐어.” “뭔 소리야?” “짤리자마자 상처 덧나지 말라고 약 먹었다구. 그러니까 괜찮아.” “이 새끼. 아까부터 왜 이 지랄이야? 무슨 일 있었냐?” “없어. 없으니까 좀 내비둬.” “내비두긴 뭘 내비둬. 말을 해봐.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야.” “됐어.” “야∼!!!!!” “얼굴 봤으니까 이제 용건 끝났지? 나 들어간―” 정욱이 잽싸게 잡아챈 팔을 확 뿌리치면서 무심코 자기 집인 3층 창문을 올려다 보던 지해는 눈이 딱 마주친 찰나 즉시 창가에서 멀어지는 사람의 그림자를 얼핏 발견하고 씁쓸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형이라는 인간이 오늘따라 집에 일찍 들어와 있었나 보다. 제기랄. 지해는 말없이 헬멧을 뒤집어쓰고 바이크 뒷자리에 앉았다. 정욱은 지해가 하는 꼬락서니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집에 들어간다며?” “빨리 출발이나 해.”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냐∼?” “시끄러. 개새꺄.” 정욱이 한숨을 내쉬며 바이크에 올라타자 지해는 뒤에서 그 허리를 꼭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기대며 속삭였다. “너 땜에 쪽팔려서 이 동네도 이제 다 살았다, 임마.” BGM : 初戀 (First Love) - Kotaro Oshio←CLICK! 하늘에서 던져준 동앗줄에 의지해 수직방향으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직육면체의 좁은 공간. 지해는 한쪽 사이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통유리로 되어있는 창쪽 면이 향해 있는 한강의 야경(밖이 컴컴하다 보니 유리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 봐야 제대로 보이지만)과 거울처럼 반딱반딱한 반대편 사이드(통유리면만 빼놓고 이 엘리베이터는 나머지 세 면이 모두 말갛게 또렷이 비추어내는 금속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했지만 꼬락서니가 정말 가관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조금만 자를 것을…뭐하러 그렇게 선심쓰듯이 뭉탱이로 퍽 잘라버렸을까. 바보. 등신. 바보가 하는 짓은 결국 뭐든 바보같은 짓밖에 안 되어버리는구나. “야, 엘리베이터 스펠링이 어떻게 되더라?” 아까부터 문만 열리면 바로 튀어나갈 사람처럼 문 앞에 바싹 붙어서서 앞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정욱은 한 마디 대꾸도,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끝이 -er이냐, -or이냐?” “………….” “응? 뭐였지? 생각이 안 난다 갑자기.” 대답없는 메아리가 오히려 재밌어서 지해가 집요하게 묻자, 정욱은 잠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지해를 슥 쳐다보고 다시 앞을 봤다. “한 가지만 해라, 김지해.” “…………?” “사람 정신 사납게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 가지만 하라고.” 전기톱으로 반듯하게 썰어놓은 얼음에서 햐얀 얼음가루가 폴폴 날린다. 순간적으로 주위의 온도가 영하로 뚝 떨어지며 등골이 오싹했다. 으윽, 이거 장난 아닌데, 이 녀석 정말 화 많이 났잖아, 지해가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동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정욱이 척척 걸어나갔다. 안에 탄 사람들이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히고 곧장 1층을 향해 다시 수직하강하는 디지털 숫자판을 보며, 지해는 올라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려가기도 하는데 왜 ‘엘리베이터’라고 이름 붙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 이중삼중 철통방비된 현관문을 따고, 정욱은 뒤에서 꾸물럭대던 지해를 먼저 앞세워 들여보냈다. 집안에 들어서자 나른한 안도감으로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저녁때 서울에 막 도착해서 짐가방을 들고 텅빈 집에 홀로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 누군가’의 온기가 더해짐으로써 이제야 이 집이 완전한 ‘home’이 되었다. 지금 마음 편히 그 안락함에 흠씬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저 무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에게 관대한 심정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저 녀석이 무사히 옆에 있음으로 해서 덜어주는 불안감의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저 녀석만이 줄 수 있는 휴식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너 오늘 상태가 좀 안 좋다?” 이 새대가리야. 그 눈치를 이제야 깠냐, 하고 크게 외치고 싶다. “왜 또 이렇게 저기압인 건데?” 제딴에도 생각해 보니 열받는가 보다. 목소리에 나름대로 점점 가시가 돋친다. “편히 쉬지도 못하게 억지로 끌고와 놓고….” 그래서 어쩌라고? 막판에 마음 바꾼 건 너잖아, 임마. “……이게 뭐냐?” 투정 섞인 볼멘 소리를 낸다. 그나마 당당하게 화내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눈치도 좀 보면서 조그맣게. 으이그, 빙구야. ‘그래, 죽여라∼’ 하고 바락바락 덤빌 때는 언제고. 끝마무리를 잘 해야 될 것 아니냐. 아예 처음부터 가만히나 있던가. 저 녀석 성격으로 보건대 아까 지네 집앞에서 해프닝 벌이던 때의 마음 자세는 이미 저 하늘 멀리 훨훨 날려버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귀여운 자식. 휴우∼ 며칠간의 긴장을 허무는 나른한 기운. 끊어질듯 팽팽하던 신경줄 하나하나를 어루만져주는. 남만도 못한 사촌들 사이에서 시달리고, ‘누구누구’랑 떨어져서 있는 것이 신경쓰이다 못해 힘들기까지 했던 일주일이 드디어 끝났다. 가뜩이나 오늘은 할아버지가 대낮부터 일찌감치 들이닥치는 바람에 통 전화할 참을 못 찾다가, 저녁때 틈을 봐서 슬쩍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안 되는 거였다. 자꾸만 초조해지는 마음을 아마 지금 촬영중이라서 그러겠지, 하면서 달랬다. 나중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머리가 꽉 찼을 때는 이미 안절부절하며 몇 번이나 응답없는 전화를 시도한 뒤였다. 대체 내가 왜 이래야 돼,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혼자 내버려두기는 불안한 놈이니까. 그리고 이 굴레는 자기 스스로 좋다고 자청해서 뒤집어 쓴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정했으니까. 결국 민혁과 명주의 출국을 핑계로 할아버지가 서울로 돌아오는 헬리콥터에 꼽사리껴서 단숨에 날아왔다. 그리고는 한밤중까지 핸드폰도 안 터지고, 시다바리 매니저도 그 행방을 모르고, 집에도 아직 안 들어왔다는 녀석 집 앞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어떤 잡생각들이 춤을 추어댔었는지 무신경하기로 세계 일류인 저 새끼는 아마 영원히 짐작도 못할 거다. 아니, 몰라야 한다. 모르는 편이 낫다. “내일 온다더니 어떻게 하루를 땡겼냐?” 지해는 벗어붙인 파카와 모자를 소파 위에 던져놓고, 소파에 털썩 기대 앉으며 물었다. “왜? 일찍 와서 불만이냐?” “아니, 자칫하면 며칠 더 잡혀있을 것처럼 말하더니만….” 정욱은 대답없이 녀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묻고 있는 거냐. 그 이유를 정말 몰라? 그래, 네가 존나 걱정돼서 온갖 쪽팔림과 뒷다마를 무릅쓰고 허겁지겁 날아왔다. 어쩔래? 너 땜에 생전 안 하던 짓도 천연덕스럽게 연짱으로 해대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천국과 지옥을 지긋지긋하도록 오가는 나는 할아버지 말마따나 지금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머리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정욱은 암갈색의 후드 재킷을 벗어 지해가 옷을 벗어놓은 곳에 던졌다. 지해의 표정이 금세 바뀌며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어버린다. “대답 안 하지?” “………….” “빨리 말해라. 그냥 안 넘어갈 테니까.” “………….” “변명 지어낼 생각은 하지도 마.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불어.” 지해는 한참 동안 깍지낀 양손의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떨군 채 등을 굽히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정욱을 탐색하듯이 찬찬히 뜯어 보며 말했다. “너 오늘 진짜 좀 이상해.” “딴청 부리지 말고.” “딴청을 부리다니? 묻는 말에 대답 안 하는 게 누군데?” “네가 뭘 물어봤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냐고 물었잖아. 너 무슨 일 있었지?” 정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라…… 글쎄 그게 ‘일’ 축에나 드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자신이 이 녀석한테 전화를 하러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명주가 강회장에게 입을 잘못 놀렸단다. 정욱이 지금 연애하잖아요, 라고. 어쩐지 본사 옥상에 헬기가 랜딩한 다음에 할아버지가 굳이 집무실로 불러들인다 싶었다. 별장에서도, 헬기 안에서도 얘기하려고만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얘기를. ‘그 나이에 연애 한번쯤은 해봐도 좋지. 너무 깊게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도 전처럼 부지런히 폭넓게 어울려 노는 건 게을리하지 말고. 예방주사 맞는 셈 치고 웬만한 놀이는 미리 겪어봐야 해. 그래야 나중에 무슨 유혹이든 쉽게 넘어가지 않아.’ 그 뜻인즉슨 자신이 지금 무얼 어떻게 하든지, 면역력을 키우는 한때의 놀이 이상으로는 용납해줄 수 없다는 것. 그 정도쯤이야 조용히 오버하지 않고 눈치껏 굴면 크게 간섭하지는 않을 테니, 처신만 잘 하면 문제될 게 없는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찜찜한 건지. 자신의 현실적인 장래와 이 녀석을 연관지어서는 정말정말 진지하게 제대로 고민해본 적조차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도 조금은 충격적이고. 아마도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회피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이런 곰팡내나는 얘기는 이 녀석이 꼭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 들어서 기분 좋을 얘기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 일 없었어!! 괜히 화제 돌리지 말고 너나 빨리 대답해.” “별거 아니야!” “절대로 별거 아닌 거 아니야. 빨리!!” 지해는 잠깐 숨을 고르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자리를 피하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넌 몰라도 돼.” “뭐가 어째?!!!” “네 알 바가 아니야, 씨팔―” 머리끝까지 폭발한 정욱은 갑자기 지해의 멱살을 움켜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등을 벽에 세게 부딪친 지해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녀석의 표정이 험악하게 이지러지며 얼굴께로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 느껴져 지해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귓전에서 쾅∼ 하고 벽이 부서질 듯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 울림에 몸서리를 치며 천천히 눈을 떠보니 눈에 한가득 들어오는 건 험악한 열기를 내뿜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어느 녀석의 얼굴. 서로 완전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는 답답함이, 스스로를 향해 활활 타오르는 분노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왜 애꿎은 벽을 치고 난리냐? 나를 치지?” “내가 너를 왜 쳐?!!” “왜 못하냐? 지금같이 하면 되잖아!” “내가 왜, 무엇하러, 너를 때려? 내가 진짜 널 때릴 수 있을 것 같애?!” “좆까지 마! 해∼봐∼! 할 수 있잖아! 왜 아닌 척 해?” 정욱의 목구멍 깊이로부터 ‘하∼!’ 하고 허탈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째깍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가득 메웠다. 지지 않겠다는 듯이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지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욱은 천천히 글자를 뱉어냈다. “넌 정말 날 모르는구나.” “………….” “넌 아직 나를 잘 몰라.” “………….” “나도 널 몰라.” 지해는 방금 전의 독기가 다 빠져 달아났는지 좀 슬퍼 보이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숨기는 게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무슨 재주로 알겠냐.” 눈에 보이지 않는 흉기에 의해 구멍이 뻥 뚫려버린 둘의 가슴 속을 시린 바람 줄기가 휑하니 할퀴며 지나갔다. 거실 안의 가구 하나, 공중을 떠도는 의미없는 먼지 조각 하나까지 모두 숨을 죽이고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서로 소리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후, 지해가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는 눈물이 나올 만큼 다정하게 들렸다. “너…… 거기 가서…… 무지 기분 나쁜 일 있었지?” “………….” “많이 쌓인 것 같다.”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야.” “그래….” “………….”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상관없어.” “………….” “꼭 말로 해야 되는 건 아니잖냐.” 창 밖을 향해 서성이던 정욱의 시선이 다시 지해에게 꽂혔다. 조용히 말을 잇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흔들리던 두 눈동자가 차분히 원래의 따뜻한 자리를 찾아갔다. “거기서는… 그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아까처럼 못 하지, 너?” “………….” “이성을 잃고, 흥분하고…… 그런 건 못 하지?” “……친척이라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 아니야.” 정욱이 지해의 시선을 피하며 나즈막이 대답했다. “그래….” “………….” “있잖냐……. 이런 말하면 좀 주제넘지만…… 그 사람들 앞에서는 계속 하던 대로 잘 해라.” “………….” “다 마찬가지야. 다른 데서는…… 쿨한 모습, 잘난 모습…… 넌 그럴 때가 역시 제일 폼나거든…… 그런 것만 보여주고….” “………….” “화내고 열내고 소리 꽥꽥지르고 하는 건…… 내 앞에서만 해라.” “………….” “딴 사람들 때문에 열받고 쌓이는 건 전부 나한테―” 한참 수줍은 듯 더듬거리며 말하던 지해가 불현듯 뭔가 생각났는지 하던 말을 멈추고, 제기랄, 하면서 욕실로 달려갔다. 정욱은 뭐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벙찐 채, 지해가 사라지는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정신없다, 임마. 한 가지만 해라. 정욱은 담배를 꺼내 물고, 시큰해진 코끝을 지그시 눌렀다. 역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이라는 결론이다. 따지고 보면 저 녀석이랑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는 그만큼 이성을 잃을 일도, 흥분하고 화낼 일도 자신에겐 별로 없는 것을…… 지해는 티셔츠의 목둘레가 거의 다 젖은 채로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빨개졌던 눈은 이제 좀 진정이 된 것 같다. 이 정도면 눈치 못 챌 거다. 자기 감정(물론 순도 100%의 진심이 담긴)에 취해서 다른 사실은 까맣게 잊고 주절대다 문득 현실을 깨닫고 보니 좀 슬퍼져버렸다. 죽었다 깨어나도 털어놓을 수 없는 착잡한 생각만 가슴에 한가득인데, 달뜬 감정만 앞서서 말로만 떠들어대봤자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너무 답답해. 너무 한심해. 왜 맨날 이렇게밖에 못 하는 거야.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는 거냐. 지금 나가서 얼굴 마주볼 자신도 없고, 무슨 얘기가 계속될지 두렵기도 해서 지해는 여기까지 들어온 김에 아예 시간을 죽이고 나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에 치약 거품이 안 튀게 조심하면서(이 집 주인의 지랄맞은 성질 더 이상 안 건드리도록) 이부터 벅벅벅벅 닦고, 샤워기를 틀었다. 저 녀석이 피곤에 지쳐 자빠져 잘 때까지 이 안에 짱박혀 있고파라, 하는 헛된 소망을 품다가 절대로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며 구석구석 정성들여 씻어댔다. 씻을 때마다 신경쓰이는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속속들이 비누칠해대고 헹궈내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샤워헤드를 뽑아 호스를 그 안으로 들이밀다시피 한 채 씻어내렸다. 세상에 다시 없이 깔끔 떠는 그 놈이 어떻게 여기를 핥고 빨고 할 수 있는 건지 자신의 상식으로는 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도 결국 그게 현실인지라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이 비참함! 이런 구차한 기분은 차라리 나 혼자 느끼고 말자 하고 작정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 깔리는 게 의외로 적성에 맞는 건가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런 야리꾸리한 찝찝함과 아픔과…… 기타 등등의 부수적인 귀찮음은 별로 저 녀석에게 알게 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주원이도 그랬던 건가……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면서, 잠시동안 잊고 있었던 더러운 기분과 쓰디쓴 후회들이 가슴 속을 짓밟고 지나간다. 다 잊어버리고 싶고, 다 씻어내버리고 싶다.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으면 맨처음으로 리셋해서 새 인생을 살고 싶다…… 근데 그러면…… 저 녀석을 못 만나잖아……! ……저 녀석이 없으면……안 되는 거잖아……!! …………아무 의미가 없잖아……!! 지해는 뭔가에 홀린듯이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 한참을 서 있다가, 정신을 수습하고 샤워를 껐다. 물기를 닦아내고 주위를 말끔히 정리한 뒤에 보니 티셔츠는 홀딱 젖어서 도로 입을 수가 없는 상태. 욕실장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는 흰색 샤워로브를 하나 꺼내 입고 달칵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다시 나온 세상은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 당연한 사실에 새삼스럽게 감격하며 벽에 붙은 스위치부터 우선 내리는데, 그 아래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던 그림자가 덥썩 손목을 잡는다. 갑자기 눈앞의 세계가 흐릿해져갔다.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돌아가는 시계, 무심하게 늘 똑같은 표정으로 자리잡고 있는 소파, 그 위에 자신이 무책임하게 던져둔 파카…… 모든 것이 희미하게 뭉뚱그려진 형체로 일렁인다. 손목을 꼭 잡힌 채로 그 자리에 서서히 쭈그리고 앉다가, 조금씩 끌어당기는 손길에 맥없이 이끌려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무릎을 세워 앉은 길다란 두 다리 사이에 꼼짝없이 가두어진 상태로, 그냥 털썩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버렸다. 좀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방해가 되는 자신의 다리를 녀석의 허벅지 위로 뻗어 걸쳤다. 그리고 그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자,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늘 듣기 좋은 낮은 음성이 나직한 속삭임이 되어 귓가에 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화내서 미안하다’ 라고. #17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행길 한복판에서 해보면 어떨까? No one will be watching us 아무도 우릴 쳐다보지 않을 텐데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길 위에서라고 무슨 상관이냐구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 Strawberry Girls (Beatles))←CLICK! 1월도 막바지로 접어드는 영하의 일요일 오후. 지해는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수만 가지의 감정을 담아 건반을 마구 두드려대고 있었다. 자신의 집에 못 들어가고 이 집에서 먹고 자고 눌러앉은 지가 거의 2주일째. 뭐, 그 사실에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자기 집에서 쫓겨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집 앞 골목길에서 한바탕 쇼를 벌였던 그 다음날. 요때쯤이면 형이 집에 없지 않을까 나름대로 짱돌을 굴려 오후가 훨씬 지나 어기적어기적 집에 들어갔더니. 웬걸, 지후는 떡 하니 거실에 버티고 앉아있다가, 지해가 열쇠를 따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고 있던 책을 집어던졌다. 하드커버로 된, 그것도 꽤 두꺼운 책의 등이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제법 아팠다. ―들어오지 마. 유사시에는 책이라는 것도 꽤 괜찮은 무기가 되겠구나 싶어 지해가 오히려 흥미진진한 태도로 책을 집어들고 있는데, 그 한 마디로 끝냈어도 좋을 것을 이 인간이 또 한 마디를 더했다. ―나가. 그래서 그 말이 그 말이구만, 왜 똑같은 말을 두번씩이나 하느냐고 비웃어줬다. 형답지 않다고도 해줬다. 평소같이 하던 대로 하라고, 이래서야 원, 집에 온 기분이 안 난다고 빈정거리며 대꾸를 해줬다. 그러면서 아차 싶었다. 화 나면 말 많아지는 인간(뭐, 평소에도 말이 많긴 하지만)의 숨은 콧털을 건드린 거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오지 말라는 말과 나가라는 말이 어떻게 같냐는 장황한 반론을 필두로 쏟아지는 청산유수같은 입발 까기.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된 화려한 잔소리의 향연. 지 생각에는 곧 죽어도 지가 옳다고, 어른 노릇 좀 해 보겠다고 떠드는 거겠지만, 듣는 말썽꾸러기 동생 입장에서는 그저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그 잘난 수다와 짜증나는 간섭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 듣기 싫어. 고만 좀 해. 귀 아퍼. ―그러니까 듣기 싫으면 나가라구. 당분간 들어올 생각 마. 나가라니까 나가냐, 시끄러워서 나간다, 씨팔, 하고 진짜 나오면서 생각하니 열받는 거다. 어차피 나올 거 뭐하러 그 일방적인 말지랄을 끝까지 고스란히 다 받아주고 있었지? 나가란다고 대꾸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것도 화나지만, 그보다 이 점이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래도 형이랍시고 아버지 대신이랍시고 무의식중에 엄청 존중해 주고 있었던 거로구만!!!! 저 인간은 그걸 알까?!!!!! 앙?!!!!!!!! 이대로는 억울해서 죽어도 그냥 못 가, 하며 건물의 유리문을 나서다가 말고 다시 튀어올라가려 폼을 잡는데, 문으로 들어오던 아줌마랑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다. 2층인지 1층인지 사는 사람이다. 계단에서 여러번 마주친 적 있어서 얼굴은 대충 낯이 익은데…… 아아∼ 느낌이 왠지 너무 이상하다. 벌레라도 닿은 것처럼 찡그리며 화들짝 피하는 저 표정은 대체 뭐냐 말이다. 죄송합니다, 하고 미처 말 끄내기도 전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총총걸음으로 올라가버리는…… 그래서 그 인간이 그딴 소리를 했던 건가 싶었다. 네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널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대한민국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TV 보고 사는 사람이면 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대충 알아본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헤벌레 하고 다니다간 나중에 무슨 소문이 나서 그게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웃기지 마!!!!!!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쾅쾅콰광 피아노를 때려부수는 듯한 불협화음이 방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지붕을 뚫고 나갈 것처럼 요란뻑적지근한 소리를 냈다. “왜 그러냐? 왤케 시끄러?” 거실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하던 녀석이 문을 버럭 열어 젖히며 묻는 바람에 지해는 후딱 정신이 돌아와…… 조금 민망해졌다. “……드, 들리냐?” “그럼. 그렇게 소리까지 꽥꽥 지르는데 안 들리고 배기냐?!” “…우씨…… 방음벽이고 뭐고 다 구라 아냐?” “방음을 했으니까 그나마 소리가 약간 새는 정도에서 끝났지.” 흥분이 안 가신데다가 무안하기까지 해서 두 뺨이 벌개진 지해가 못 들은 척, 오른손으로 건반을 슬슬 건드리다가 왼손도 본격적으로 얹고 제대로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정욱이 옆으로 다가와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 본다. 형이라는 작자가 하던 말들이 문득 생각날 때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것조차 상쇄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지난 며칠간 둘의 사이는 최고조. 그 며칠 동안에 둘이 한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이었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아주 작은 이야기 하나에도 더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 샘솟았다. 이 녀석이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 온몸에 분비되는 나른하고 행복한 기운.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화학물질에 중독된 것처럼 천국같은 그 쾌락을 계속 느끼기 위해 또 서로에 대해, 자신에 대해 빛바랜 추억담들을 끄집어냈다. 새로이 발견한, 또는 다시 확인한 중요(사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하잘것없는) 사실의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둘의 키가 같았다는 것, 초등학교 때 둘다 반 대표로 운동회 때 릴레이를 뛰었다는 것,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건 똑같이 중2때, 첫경험도 마찬가지로 중2. 정욱의 경우는 여자를 처음 알고 나서 한 달쯤 후에는 민혁의 꾀임에 빠져 또다른 첫경험(남자와의)을 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작년 겨울 이맘때 지해는 형들과 어울려서 소주짝 떼기를 하고 숙취로 이틀간 헤롱헤롱 정신을 못 차렸으며, 정욱은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장장 3주일간 새벽같이 할아버지 집무실로 출근해선 몇 시간씩 본사 사무실에서 직원들 일하는 걸 견학했었다는 것. 지루한 시간이라도 때울 수 있는 빈 책상 전화 받아주기나 잡무 보조 등 일체의 ‘딴짓’이 금지되고, 오로지 ‘회사’라는 조직의 구조 파악과 업무의 흐름 읽기만이 명령됐던, 그 속뜻을 알듯 모를 듯 하던 사무실 견학(때때로 직원들로부터 ‘감시’로 오해받기도 했던)으로부터 올해는 놓여난 대신, 그룹 산하 경영 연구소 연구원의 지도 편달 하에 경영 전반에 관한 기초이론서부터 해외 비즈니스 리더들의 최신 대중서까지 일주일에 두 권씩 읽고 일대일 토론 수업을 하는 강행군이 계속되고 있었다. 세상의 일로부터 해방되어 집에 있을 땐 둘이서 꼭 붙어 있는 시간만큼이나 같은 집안 어느 구석인가에 따로 처박혀 각자 할 일에 몰두하고 있는 시간도 소중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공간과 시간을 같이 공유하며 누리는 그 평화와 안정감. 꼭 지금처럼. 지해가 피아노와 레슬링을 벌이는 동안, 정욱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가 쓴 어쩌구저쩌구 리더쉽인가 하는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랑 씨름을 하던 참이었었다. “어쩐지 얌전하다 싶었더니 이제 슬슬 발광할 때가 됐나보다?” “발.광.이라니…… 감히!!! 무엄하다, 이눔아∼!” “아니, 발광이 아니고 발정인가?” 정욱은 한 걸음에 턱 다가와서 피아노 의자를 다리 사이에 끼운 자세로 지해의 옆을 보고 털썩 걸터 앉았다. “너는 피아노를 계속 쳐라. 나는….” “넌 뭘할 건데?”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목덜미에 닿을락말락 간지럽게 숨결을 내뿜는 바람에, 지해는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그걸 그냥 봐줄 정욱이 아니다. 그대로 목덜미의 라인을 따라 샤르르 핥아내리고는 티셔츠 위의 어깨에 ‘쪽’ 소리도 요란한 뽀뽀를 하더니 살짝 깨문다. “나는… 널 먹을게.” “으윽…… 껍질도 안 까고 그냥 먹냐?” “이렇게 먹으나 저렇게 먹으나 다 맛있거든, 너는.” 으아악!! 느끼 중년같은 저 대사! 인간이 점점 망가져가누만!! 날이 갈수록!!! 저 새끼가 어제 저녁에 즈이 집에서 뭘 잘못 먹고 왔나? 이 모든 혐오의 감정을 살벌한 눈빛에 담아 전심전력으로 흘겨보며 지해가 옆으로 몸을 빼자, 정욱이 팔로 허리를 가까이 당겼다. “야야야, 이 팔 좀 치워봐. 피아노를 못 치겠잖냐.” 정욱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기특하게도 제깍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 녀석이 웬일이야, 하는 찰나, 지해의 뒤로 가서는 무릎을 세워 90도로 꿇고 앉는다. 그리고는 뒤에서 티셔츠를 훌렁 걷어올리더니 가늘고 매끈한 등줄기에 깊게 패인 물길을 따라 혀 끝을 본격적으로 미끄러뜨리기 시작했다. “으음…… 야…… 고만 좀… 음.” 따뜻한 숨결에 감싸인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피부 위를 기어내려오는 느낌에 상체가 움찔움찔 떨려왔다. 등골이 오싹하며 목덜미와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작은 자극들이 차곡차곡 쌓여가 점점 상체가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이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손을 멈추지 않고 피아노를 계속 칠 수 있긴 있구나. 비록 박자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고, 터치의 강약도 엉키고는 있지만. 지해는 스스로 대견해 하며, 나는 혹시 천재가 아닐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희고 매끈한 등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을 한 발짝씩 천천히 확인하면서 날개뼈 사이로부터 꼬리뼈까지 내려오는 느리고 느린 여정이 끝나자, 정욱은 헐렁한 고무줄 반바지를 최대한 쭉 잡아내리고(지해가 필사적으로 의자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버텨 어느 이상은 내려가지 않았지만) 그 주위 조금의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본격적으로 자리를 제대로 잡고서 꼬리뼈 주변으로 입술과 혀를 놀리며 손까지 앞으로 뻗어 주요 약점 지대의 언저리를 슬금슬금 공략한다. “으으… 야∼!!!! 너 자꾸 그렇게… 아래에서 깔짝대면 방구 뀐다.” “그래? 그러면 이쪽도 신경써줄게.” 정욱은 장난꾸러기같은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고 지해의 티셔츠 앞판 속으로 두 손을 쑥 집어넣어 꼿꼿이 서 있는 두 개의 돌기를 집어 비벼 올렸다. 이 장난이 생각보다 재밌었는지 정욱은 가슴을 지분거리는 손장난을 멈추지 않고서, 굽혔던 무릎을 하나씩 차례로 피며 일어섰다. 균형이 앞에 쏠린 부자유스런 자세다 보니, 일어나면서 아무래도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쬐끄만 유두가 짜부라지는 듯한 강한 자극이 지해의 몸 위를 달렸다. “아욱∼! 섀꺄!! 아퍼!! 손모가지 못 치우냐? 앙?!!” “싫어. 넌 정말…… 내가 잠깐이라도 기뻐하는 꼴을 못 보는구나.” 이제는 아예 귓속에 바람까지 훅훅 불어넣으며 태연하게 대꾸를 하고 노골적으로 속살을 쓰다듬는다. 지해는 심장 속까지 근질근질한 듯한 야릇한 쾌감에 대꾸도 못 하고 진저리를 쳤다. 언젠가부터 엉망이 되어가던 연주는 드디어 끝이 났다. “이……, 이 변태색마야!!!!! 아까 아침에도 한 판 했잖아!!!!”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지.” “………….”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 지해가 고개를 훽 돌려 노려보는 눈길에, 천연덕스럽게 뻔뻔한 소리만 골라서 주워섬기던 정욱도 순간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열이 오를 대로 올랐는지 눈꼬리까지 발그스름하게 물들인 얼굴은 한껏 격앙된 색기를 물씬 발산하고 있었다. “네가 정녕 오늘 죽고 싶은 것이렷다?” “죽여줄 거냐?” “………….” “화끈하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지해의 눈에 스위치가 탁 켜졌다. “좋아. 내가 확실하게 죽여줄 테니까….” “오홀∼♬” 정욱은 은근히 유쾌해져서 휘파람을 불었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겠다는 거지? 기대가 크다. 기대가 커…… “그대신 넌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안돼.” 지해가 도도한 페르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모델 다운 포즈로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정욱은 너 지금 사진 찍는 줄 아냐,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꾹 참고,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누르며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손끝이라도 닿으면 바∼로 게임오버.” “오키∼!” OK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해가 둘째 손가락을 길게 뻗어 정욱의 이마와 콧날과 인중과 입술의 굴곡을 따라 깃털처럼 닿을 듯 말 듯 쓸어내렸다. 육감적인 입술에 한참 머물며 입술 윤곽을 따라 곡선을 그리던 손가락이 거두어지고 대신 촉촉하고 포근한 입술이 그 자리에 닿아 혀끝으로 조용하게 더듬는다. 부드러운 입술 안쪽을 돌아가며 핥고, 이의 안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간다. 그리고 서로의 혀를 누르고 핥는 동안 마침내 몸 안팎에서 파도치는 수만 가지 감각만이 전부가 되는 무념무상의 순간이 찾아왔다. 둘 다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지해는 정욱을 거의 홀랑 벗겨 바닥에 눕혀놓고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 올라앉아 목덜미와 가슴팍에 정신없이 입술 도장을 찍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모처럼의 수동적인 자극을 즐기며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던 정욱도 긴 머리카락과 속눈썹이 드문드문 예민한 곳을 스칠 때마다 간지러움에 못 견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배꼽 속으로 혀를 뾰족히 세워 말아넣고 간질이자, 정욱은 엉겁결에 지해의 뒤통수를 잡고 떼어놓으려 했다. “씨뎅, 손!!!” 우우∼ 대단한 정신력! 하도 미친듯이 난리를 치길래 모를 줄 알았더니만……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조진다∼” 그래도 그걸로 끝이야, 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까는 손끝만 닿아도 게임오버라 하지 않았던가. 정욱은 이 녀석을 좀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지해가 올라타 있는 허벅지를 힘차게 튕겨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굶주린 들고양이처럼 배와 옆구리 근처를 깨물고 핥고 빨아들이던 녀석이 고개를 쳐들고 노려본다. 거의 인간의 눈빛이 아니다. 심장을 정통으로 푹 찌르는 서늘한 들짐승의 눈빛. 머리가 아찔하고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이상하게 가슴이 마구 뛴다. 이 새끼 정말 별거별거 다 하는구나. 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악의없는 장난이 관능적인 실전이 되어버리기 직전의 묘한 설레임을 정욱은 킥, 하는 웃음으로 날려버렸다. “어……, 너 왜 웃어?” 멈칫멈칫 사람의 표정으로 돌아온 녀석이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며 묻다가, 지가 생각해도 계면쩍은지 덩달아 바람빠지는 듯 허탈하게 픽픽 웃는다. “왜 웃는 거냐, 이 나쁜 새꺄!!!!!” 정욱은 아무 대답 않고 복근만으로 벌떡 일어나 앉아 무턱대고 녀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미꾸라지처럼 재주좋게 쏙쏙 달아나다가 갑자기 기습공격이라도 하듯이 요란하게 덤벼들기 시작한 지해의 혀를 잠시 팽개쳐두고, 녀석이 입은 티셔츠를 손으로 살짝 당기며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빨리 옷 벗어.” “엥, 나 안 벗었었나?” 양팔을 X자로 교차해 하얀 티셔츠의 끝자락을 붙들고 허리를 뒤틀며 만세를 부르는, 티셔츠로 얼굴과 두 팔이 결박당한 그 상태로 녀석의 양 손목을 모아 한 손에 꽉 거머쥐었다. 하얀 티셔츠 속에 갇힌 채 마구 꿈틀대며 뭐라뭐라 고함을 지르는 녀석의 입을 즐겁게 입술로 막고 보드라운 맨살을 쓰다듬다가 또 다시 시야가 온통 하얗게 물드는 무아지경에 빠지며 화이트 아웃. 입술과 입술 사이를 가로막고 젖어드는 얇은 면 티셔츠에서 섬유 린스 냄새와 잘 익은 사과같은 녀석의 살내음이 뒤섞인, 영원히 잊지 못할 그리움의 향기가 묻어났다. #17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행길 한복판에서 해보면 어떨까? No one will be watching us 아무도 우릴 쳐다보지 않을 텐데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길 위에서라고 무슨 상관이냐구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 Strawberry Girls (Beatles))←CLICK! 1월도 막바지로 접어드는 영하의 일요일 오후. 지해는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수만 가지의 감정을 담아 건반을 마구 두드려대고 있었다. 자신의 집에 못 들어가고 이 집에서 먹고 자고 눌러앉은 지가 거의 2주일째. 뭐, 그 사실에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자기 집에서 쫓겨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집 앞 골목길에서 한바탕 쇼를 벌였던 그 다음날. 요때쯤이면 형이 집에 없지 않을까 나름대로 짱돌을 굴려 오후가 훨씬 지나 어기적어기적 집에 들어갔더니. 웬걸, 지후는 떡 하니 거실에 버티고 앉아있다가, 지해가 열쇠를 따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고 있던 책을 집어던졌다. 하드커버로 된, 그것도 꽤 두꺼운 책의 등이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제법 아팠다. ―들어오지 마. 유사시에는 책이라는 것도 꽤 괜찮은 무기가 되겠구나 싶어 지해가 오히려 흥미진진한 태도로 책을 집어들고 있는데, 그 한 마디로 끝냈어도 좋을 것을 이 인간이 또 한 마디를 더했다. ―나가. 그래서 그 말이 그 말이구만, 왜 똑같은 말을 두번씩이나 하느냐고 비웃어줬다. 형답지 않다고도 해줬다. 평소같이 하던 대로 하라고, 이래서야 원, 집에 온 기분이 안 난다고 빈정거리며 대꾸를 해줬다. 그러면서 아차 싶었다. 화 나면 말 많아지는 인간(뭐, 평소에도 말이 많긴 하지만)의 숨은 콧털을 건드린 거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오지 말라는 말과 나가라는 말이 어떻게 같냐는 장황한 반론을 필두로 쏟아지는 청산유수같은 입발 까기.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된 화려한 잔소리의 향연. 지 생각에는 곧 죽어도 지가 옳다고, 어른 노릇 좀 해 보겠다고 떠드는 거겠지만, 듣는 말썽꾸러기 동생 입장에서는 그저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그 잘난 수다와 짜증나는 간섭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 듣기 싫어. 고만 좀 해. 귀 아퍼. ―그러니까 듣기 싫으면 나가라구. 당분간 들어올 생각 마. 나가라니까 나가냐, 시끄러워서 나간다, 씨팔, 하고 진짜 나오면서 생각하니 열받는 거다. 어차피 나올 거 뭐하러 그 일방적인 말지랄을 끝까지 고스란히 다 받아주고 있었지? 나가란다고 대꾸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것도 화나지만, 그보다 이 점이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래도 형이랍시고 아버지 대신이랍시고 무의식중에 엄청 존중해 주고 있었던 거로구만!!!! 저 인간은 그걸 알까?!!!!! 앙?!!!!!!!! 이대로는 억울해서 죽어도 그냥 못 가, 하며 건물의 유리문을 나서다가 말고 다시 튀어올라가려 폼을 잡는데, 문으로 들어오던 아줌마랑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다. 2층인지 1층인지 사는 사람이다. 계단에서 여러번 마주친 적 있어서 얼굴은 대충 낯이 익은데…… 아아∼ 느낌이 왠지 너무 이상하다. 벌레라도 닿은 것처럼 찡그리며 화들짝 피하는 저 표정은 대체 뭐냐 말이다. 죄송합니다, 하고 미처 말 끄내기도 전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총총걸음으로 올라가버리는…… 그래서 그 인간이 그딴 소리를 했던 건가 싶었다. 네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널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대한민국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TV 보고 사는 사람이면 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대충 알아본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헤벌레 하고 다니다간 나중에 무슨 소문이 나서 그게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웃기지 마!!!!!!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쾅쾅콰광 피아노를 때려부수는 듯한 불협화음이 방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지붕을 뚫고 나갈 것처럼 요란뻑적지근한 소리를 냈다. “왜 그러냐? 왤케 시끄러?” 거실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하던 녀석이 문을 버럭 열어 젖히며 묻는 바람에 지해는 후딱 정신이 돌아와…… 조금 민망해졌다. “……드, 들리냐?” “그럼. 그렇게 소리까지 꽥꽥 지르는데 안 들리고 배기냐?!” “…우씨…… 방음벽이고 뭐고 다 구라 아냐?” “방음을 했으니까 그나마 소리가 약간 새는 정도에서 끝났지.” 흥분이 안 가신데다가 무안하기까지 해서 두 뺨이 벌개진 지해가 못 들은 척, 오른손으로 건반을 슬슬 건드리다가 왼손도 본격적으로 얹고 제대로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정욱이 옆으로 다가와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 본다. 형이라는 작자가 하던 말들이 문득 생각날 때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것조차 상쇄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지난 며칠간 둘의 사이는 최고조. 그 며칠 동안에 둘이 한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이었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아주 작은 이야기 하나에도 더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 샘솟았다. 이 녀석이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 온몸에 분비되는 나른하고 행복한 기운.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화학물질에 중독된 것처럼 천국같은 그 쾌락을 계속 느끼기 위해 또 서로에 대해, 자신에 대해 빛바랜 추억담들을 끄집어냈다. 새로이 발견한, 또는 다시 확인한 중요(사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하잘것없는) 사실의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둘의 키가 같았다는 것, 초등학교 때 둘다 반 대표로 운동회 때 릴레이를 뛰었다는 것,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건 똑같이 중2때, 첫경험도 마찬가지로 중2. 정욱의 경우는 여자를 처음 알고 나서 한 달쯤 후에는 민혁의 꾀임에 빠져 또다른 첫경험(남자와의)을 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작년 겨울 이맘때 지해는 형들과 어울려서 소주짝 떼기를 하고 숙취로 이틀간 헤롱헤롱 정신을 못 차렸으며, 정욱은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장장 3주일간 새벽같이 할아버지 집무실로 출근해선 몇 시간씩 본사 사무실에서 직원들 일하는 걸 견학했었다는 것. 지루한 시간이라도 때울 수 있는 빈 책상 전화 받아주기나 잡무 보조 등 일체의 ‘딴짓’이 금지되고, 오로지 ‘회사’라는 조직의 구조 파악과 업무의 흐름 읽기만이 명령됐던, 그 속뜻을 알듯 모를 듯 하던 사무실 견학(때때로 직원들로부터 ‘감시’로 오해받기도 했던)으로부터 올해는 놓여난 대신, 그룹 산하 경영 연구소 연구원의 지도 편달 하에 경영 전반에 관한 기초이론서부터 해외 비즈니스 리더들의 최신 대중서까지 일주일에 두 권씩 읽고 일대일 토론 수업을 하는 강행군이 계속되고 있었다. 세상의 일로부터 해방되어 집에 있을 땐 둘이서 꼭 붙어 있는 시간만큼이나 같은 집안 어느 구석인가에 따로 처박혀 각자 할 일에 몰두하고 있는 시간도 소중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공간과 시간을 같이 공유하며 누리는 그 평화와 안정감. 꼭 지금처럼. 지해가 피아노와 레슬링을 벌이는 동안, 정욱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수가 쓴 어쩌구저쩌구 리더쉽인가 하는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랑 씨름을 하던 참이었었다. “어쩐지 얌전하다 싶었더니 이제 슬슬 발광할 때가 됐나보다?” “발.광.이라니…… 감히!!! 무엄하다, 이눔아∼!” “아니, 발광이 아니고 발정인가?” 정욱은 한 걸음에 턱 다가와서 피아노 의자를 다리 사이에 끼운 자세로 지해의 옆을 보고 털썩 걸터 앉았다. “너는 피아노를 계속 쳐라. 나는….” “넌 뭘할 건데?”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목덜미에 닿을락말락 간지럽게 숨결을 내뿜는 바람에, 지해는 간지러워 목을 움츠렸다. 그걸 그냥 봐줄 정욱이 아니다. 그대로 목덜미의 라인을 따라 샤르르 핥아내리고는 티셔츠 위의 어깨에 ‘쪽’ 소리도 요란한 뽀뽀를 하더니 살짝 깨문다. “나는… 널 먹을게.” “으윽…… 껍질도 안 까고 그냥 먹냐?” “이렇게 먹으나 저렇게 먹으나 다 맛있거든, 너는.” 으아악!! 느끼 중년같은 저 대사! 인간이 점점 망가져가누만!! 날이 갈수록!!! 저 새끼가 어제 저녁에 즈이 집에서 뭘 잘못 먹고 왔나? 이 모든 혐오의 감정을 살벌한 눈빛에 담아 전심전력으로 흘겨보며 지해가 옆으로 몸을 빼자, 정욱이 팔로 허리를 가까이 당겼다. “야야야, 이 팔 좀 치워봐. 피아노를 못 치겠잖냐.” 정욱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기특하게도 제깍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 녀석이 웬일이야, 하는 찰나, 지해의 뒤로 가서는 무릎을 세워 90도로 꿇고 앉는다. 그리고는 뒤에서 티셔츠를 훌렁 걷어올리더니 가늘고 매끈한 등줄기에 깊게 패인 물길을 따라 혀 끝을 본격적으로 미끄러뜨리기 시작했다. “으음…… 야…… 고만 좀… 음.” 따뜻한 숨결에 감싸인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피부 위를 기어내려오는 느낌에 상체가 움찔움찔 떨려왔다. 등골이 오싹하며 목덜미와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작은 자극들이 차곡차곡 쌓여가 점점 상체가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이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손을 멈추지 않고 피아노를 계속 칠 수 있긴 있구나. 비록 박자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고, 터치의 강약도 엉키고는 있지만. 지해는 스스로 대견해 하며, 나는 혹시 천재가 아닐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희고 매끈한 등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을 한 발짝씩 천천히 확인하면서 날개뼈 사이로부터 꼬리뼈까지 내려오는 느리고 느린 여정이 끝나자, 정욱은 헐렁한 고무줄 반바지를 최대한 쭉 잡아내리고(지해가 필사적으로 의자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버텨 어느 이상은 내려가지 않았지만) 그 주위 조금의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본격적으로 자리를 제대로 잡고서 꼬리뼈 주변으로 입술과 혀를 놀리며 손까지 앞으로 뻗어 주요 약점 지대의 언저리를 슬금슬금 공략한다. “으으… 야∼!!!! 너 자꾸 그렇게… 아래에서 깔짝대면 방구 뀐다.” “그래? 그러면 이쪽도 신경써줄게.” 정욱은 장난꾸러기같은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고 지해의 티셔츠 앞판 속으로 두 손을 쑥 집어넣어 꼿꼿이 서 있는 두 개의 돌기를 집어 비벼 올렸다. 이 장난이 생각보다 재밌었는지 정욱은 가슴을 지분거리는 손장난을 멈추지 않고서, 굽혔던 무릎을 하나씩 차례로 피며 일어섰다. 균형이 앞에 쏠린 부자유스런 자세다 보니, 일어나면서 아무래도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쬐끄만 유두가 짜부라지는 듯한 강한 자극이 지해의 몸 위를 달렸다. “아욱∼! 섀꺄!! 아퍼!! 손모가지 못 치우냐? 앙?!!” “싫어. 넌 정말…… 내가 잠깐이라도 기뻐하는 꼴을 못 보는구나.” 이제는 아예 귓속에 바람까지 훅훅 불어넣으며 태연하게 대꾸를 하고 노골적으로 속살을 쓰다듬는다. 지해는 심장 속까지 근질근질한 듯한 야릇한 쾌감에 대꾸도 못 하고 진저리를 쳤다. 언젠가부터 엉망이 되어가던 연주는 드디어 끝이 났다. “이……, 이 변태색마야!!!!! 아까 아침에도 한 판 했잖아!!!!”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지.” “………….”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 지해가 고개를 훽 돌려 노려보는 눈길에, 천연덕스럽게 뻔뻔한 소리만 골라서 주워섬기던 정욱도 순간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열이 오를 대로 올랐는지 눈꼬리까지 발그스름하게 물들인 얼굴은 한껏 격앙된 색기를 물씬 발산하고 있었다. “네가 정녕 오늘 죽고 싶은 것이렷다?” “죽여줄 거냐?” “………….” “화끈하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지해의 눈에 스위치가 탁 켜졌다. “좋아. 내가 확실하게 죽여줄 테니까….” “오홀∼♬” 정욱은 은근히 유쾌해져서 휘파람을 불었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겠다는 거지? 기대가 크다. 기대가 커…… “그대신 넌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안돼.” 지해가 도도한 페르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모델 다운 포즈로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정욱은 너 지금 사진 찍는 줄 아냐,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꾹 참고,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누르며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손끝이라도 닿으면 바∼로 게임오버.” “오키∼!” OK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해가 둘째 손가락을 길게 뻗어 정욱의 이마와 콧날과 인중과 입술의 굴곡을 따라 깃털처럼 닿을 듯 말 듯 쓸어내렸다. 육감적인 입술에 한참 머물며 입술 윤곽을 따라 곡선을 그리던 손가락이 거두어지고 대신 촉촉하고 포근한 입술이 그 자리에 닿아 혀끝으로 조용하게 더듬는다. 부드러운 입술 안쪽을 돌아가며 핥고, 이의 안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간다. 그리고 서로의 혀를 누르고 핥는 동안 마침내 몸 안팎에서 파도치는 수만 가지 감각만이 전부가 되는 무념무상의 순간이 찾아왔다. 둘 다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지해는 정욱을 거의 홀랑 벗겨 바닥에 눕혀놓고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 올라앉아 목덜미와 가슴팍에 정신없이 입술 도장을 찍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모처럼의 수동적인 자극을 즐기며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던 정욱도 긴 머리카락과 속눈썹이 드문드문 예민한 곳을 스칠 때마다 간지러움에 못 견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배꼽 속으로 혀를 뾰족히 세워 말아넣고 간질이자, 정욱은 엉겁결에 지해의 뒤통수를 잡고 떼어놓으려 했다. “씨뎅, 손!!!” 우우∼ 대단한 정신력! 하도 미친듯이 난리를 치길래 모를 줄 알았더니만……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조진다∼” 그래도 그걸로 끝이야, 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까는 손끝만 닿아도 게임오버라 하지 않았던가. 정욱은 이 녀석을 좀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지해가 올라타 있는 허벅지를 힘차게 튕겨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굶주린 들고양이처럼 배와 옆구리 근처를 깨물고 핥고 빨아들이던 녀석이 고개를 쳐들고 노려본다. 거의 인간의 눈빛이 아니다. 심장을 정통으로 푹 찌르는 서늘한 들짐승의 눈빛. 머리가 아찔하고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이상하게 가슴이 마구 뛴다. 이 새끼 정말 별거별거 다 하는구나. 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악의없는 장난이 관능적인 실전이 되어버리기 직전의 묘한 설레임을 정욱은 킥, 하는 웃음으로 날려버렸다. “어……, 너 왜 웃어?” 멈칫멈칫 사람의 표정으로 돌아온 녀석이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며 묻다가, 지가 생각해도 계면쩍은지 덩달아 바람빠지는 듯 허탈하게 픽픽 웃는다. “왜 웃는 거냐, 이 나쁜 새꺄!!!!!” 정욱은 아무 대답 않고 복근만으로 벌떡 일어나 앉아 무턱대고 녀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미꾸라지처럼 재주좋게 쏙쏙 달아나다가 갑자기 기습공격이라도 하듯이 요란하게 덤벼들기 시작한 지해의 혀를 잠시 팽개쳐두고, 녀석이 입은 티셔츠를 손으로 살짝 당기며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빨리 옷 벗어.” “엥, 나 안 벗었었나?” 양팔을 X자로 교차해 하얀 티셔츠의 끝자락을 붙들고 허리를 뒤틀며 만세를 부르는, 티셔츠로 얼굴과 두 팔이 결박당한 그 상태로 녀석의 양 손목을 모아 한 손에 꽉 거머쥐었다. 하얀 티셔츠 속에 갇힌 채 마구 꿈틀대며 뭐라뭐라 고함을 지르는 녀석의 입을 즐겁게 입술로 막고 보드라운 맨살을 쓰다듬다가 또 다시 시야가 온통 하얗게 물드는 무아지경에 빠지며 화이트 아웃. 입술과 입술 사이를 가로막고 젖어드는 얇은 면 티셔츠에서 섬유 린스 냄새와 잘 익은 사과같은 녀석의 살내음이 뒤섞인, 영원히 잊지 못할 그리움의 향기가 묻어났다. “우와∼ 이 옷 디따 더워요.” 지해가 ‘세강 애드 창립 30주년’이라는 로고가 붙은 간이벽 앞에 서서 옆에 서 있는 현규에게 말했다.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로 눈이 부셨지만, 이 정도 빛에 눈을 깜박이지 않고 편안한 표정을 짓는 건 이제 쉬운 일이었다. “저기 안쪽에 클로크 룸 있잖아. 거기다 맡겨두면 돼.” 현규의 말에 지해는 비로소 행사가 있을 홀 입구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제복을 깔끔히 차려 입은 남녀 직원들 여러 명이 초대장 체크와 함께 두꺼운 겉옷들을 맡아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삼엄한 표정을 한 짙은 양복 차림의 사설 보디가드들 몇이 무전기를 손에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홀 안쪽에서는 높은 천장에서 내리쪼이는 거대한 샹들리에의 대낮같은 조명발 아래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창립 30주년이라고 꽤 행사를 크게 하는 모양이었다. 딴 때 같으면 회사 사옥 1층 로비에 출장 뷔페와 잘 나가는 라이브 밴드 불러다 놓고 메이저 광고주들과 주요 광고 모델들까지 모두 참석해서, 캐주얼 정장 차림의 가벼운 칵테일 파티 정도로 끝냈다는데, 올해는 규모가 달랐다. 코디가 골라주는 옷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하얀 바탕에 황토색과 갈색이 드문드문 섞인 모피로 안을 댄 아이보리색의 날렵한 양가죽 재킷, 밑위가 짧고 무릎 부분까지 타이트한 크림색 나팔바지, 재킷 속에는 목부분을 접지 않은 채 턱까지 루스하게 세우고 소매가 팔꿈치까지 오는 흰색의 얇디 얇은 울실크 목폴라. 이게 여자옷이지 남자옷이냐 싶어 기겁을 했었지만, 옆에서 이뻐 이뻐를 연속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몰려 결국은 입고 말았다. 그랬더니 스팀 빵빵하게 틀어주는 이 호텔 안에서 재킷을 그냥 입고 있긴 너무 덥고, 벗자니 남사스럽다. 뭉쳐서 잡았을 때 한 줌밖에 안 되는 이놈의 목폴라가 왠지 속이 훤히 비치는 것 같고, 길이도 배꼽에 간신히 걸칠락말락 하는 수준이라 골반까지도 안 오는 이 망할 바지와 맞물려서 허리 둘레의 속살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판이다. 어차피 쇼 무대에서도 남자 옷인지 여자 옷인지 아리까리한 건 거의 자신의 몫이니까, 이것보다 백배는 더 아슬아슬한 옷을 걸치는 것도 다반사지만, 그래도 이런 때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튀는 옷은 싫다. 재킷을 벗어서 맡기고, 현악 4중주가 라이브로 은은히 흐르는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옆에 있던 현규가 너 대체 허리가 몇이냐, 한다. 몇이었더라 하고 머뭇거리자 27은 되는 거냐, 하고 또 묻는다. “27이야 넘죠.” “안 될 것 같애.” 아마 그럴 지도…. 근데 이 아저씨는 어떻게 딱 보고 그런 걸 아는 걸까? “너 전보다도 더 마른 것 같다?” “아닌데요.” “저 녀석이 많이 괴롭히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누구……요?” “저기 있잖아. 저 녀석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어디요, 하고 물으려는데 누군가 다가와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현규는 그쪽에 인사 치레 하느라고 정신없다. 누가 어디 있다는 거지? 뭘 말하는 거야……? 지해는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어!!! 저기…!!! 저기 멀리 가장 앞쪽에 있는 테이블에 창립 30주년을 맞은 이 회사 사장님이 몇몇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옆에, 아버지보다 10센티는 더 큰 아들내미가 훤칠한 체격에 꼭 맞는 가쿠란 스타일의 검은 벨벳 슈트를 입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걸까. 왜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정욱을 알아채지 못한 걸까. 녀석에게서 저렇게 눈부신 광채가 뿜어 나오는데. 눈이 부셔서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넋을 잃고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선을 돌려 정욱이 이쪽을 바라본다. 역시 이상한 기분이다. 오늘 아침까지도 봤으니까 기껏해야 열 몇 시간 만에 보는 것뿐인데, 이렇게 수많은 남들 속에서 마주치면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애틋한 느낌이 되어버리는 거다. 이토록 반가울 수가. 근데 오늘 여기 올 거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자기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오늘 뭐 ‘했다’는 얘기는 해도, 오늘 뭐 ‘한다’는 얘기까지 일일이 서로 보고하지는 않으니까. 어떻게 보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늘 함께 있고 주절주절 떠들며 보내는 시간도 적지 않지만, 서로 정작 해야 할 말은 못 하고 있는지도…. “오오, 지해도 왔구나.” 왠 아저씨가 아는 체를 하며 시야를 가로막는다. 얇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던 둘의 시선이 뚝 끊어졌다. 누구인지 확인하기 전부터 벌써 불쾌한 적대감이. “아, 하전무님.” 지해가 미처 인사를 하기 전에 옆의 현규가 먼저 그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속 기획사의 전무. 사장의 동생이라고 했던가. “요새 계속 둘이서 같이 다니네. 잘 어울려서 보기 좋아.” “영화 홍보 차원에서. 제작 발표회만 아직 안 했다 뿐이지 기사도 나갈 거 다 나갔고 크랭크인까지 이제 한 달도 안 남았거든.” “형제로 캐스팅한 거 정말 잘 한 일이야. 얼굴 느낌도 많이 비슷하잖아. 지해 보면 자네 처음 데뷔할 때 생각나.” “그래요. 진짜 다들 그러더라구……. 역시 귀여워, 이 녀석.” “조 감독도 기대가 크더라. 오디션 때 지해가 그렇게 잘 했으니까.” 잘 하긴 뭘 잘 해. 엉망진창이었는데. 어차피 그 영화는 이 기획사에서 공동 제작하면서 주요 캐스트를 전부 자기네 소속 배우로 쓰는 것 아니냐 말이다. 뻔히 다 아는 사실을 한솥밥 먹는 식구들끼리 이렇게 눈가리고 아웅하다니 웃긴다고 지해는 생각했다. 메이저 회사에 소속된다는 게 이점도 많았다. 회사가 합병되자마자 곧 차부터 바뀌었다. ‘꼬진 트라제(그것도 스케줄에 따라 두어 명이 나누어 쓰던)에서 스타크래프트(비록 중고였지만)로’라는 획기적인 발전. “아니, 근데 너 노래도 잘 하고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친다며?” “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지해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현규가 웃으며 지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저번 날에 『블루 문』에서 향수 런칭 쇼 했을 때…… 기억 안 나?” 아. 일주일쯤 됐나……. 청담동의 재즈 카페에서 남성용 향수 런칭 행사겸 패션쇼를 했었는데. 그때 칵테일 몇 잔 마시고 맛이 좀 가는 바람에… “얘 정말 실력 대단하더라구. 작곡도 한대요 글쎄.” “어…, 그거 별거 아닌데……. 아마추어 수준이에요. 그냥 키보드랑 믹서 하나 놓고 컴퓨터에 연결해서…. 요즘 그런 거 하는 애들 많아요.” 손까지 내저으며 아니라고 하는데도, 하전무는 제법 흥미가 간다는 듯 지해를 찬찬히 쳐다보고 있었다. “글쎄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나는 잘 모르니까. 일단 그쪽 담당이랑 한번 미팅을 해 보자. 우리 회사 음악 파트도 만만치 않으니까. 너 알아? 우리, 레코딩 스튜디오도 서울 시내에 두 개나 갖고 있어. 연기 부분이랑 가수 부분이랑 전부 다 제대로 돌아가는 회사는 대한민국에 우리 회사뿐이야.” “이야∼! 너 영화 개봉하기도 전에 음반부터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설마…… 또 김칫국부터 마시는군, 하고 멍하니 있는 지해의 어깨를 현규가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끌어당긴다. 그러자 하 전무가 그 영화가 개봉이 추석 때였나, 크리스마스였나, 하며 현규에게 묻고 둘 사이에 비즈니스 토크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현규의 팔은 계속 지해의 어깨에 둘려져 있었다. 정욱이 다가오기 전까지. BGM : Before It All Went Wrong - Spain←CLICK! “언제 왔어?” 한 발짝 비스듬한 뒤에서 다가오는 목소리에 지해는 깜짝 놀랐다. 어깨에 얹혀 있던 손에 강한 힘이 주어진다. 아∼ 소리가 나올듯이 꼭 잡는 손길도 지해가 어깨를 살짝 비틀어 떨쳐내자, 곧 힘을 잃고 스르르 물러났다. “…방금. 넌, 언제 왔어?” “난 아까부터 와 있었어.” “여기 온다는 말―” “예정에 없었어. 아버지가 갑자기 전화하셔서 오게 된 거야.” 몇 마디가 오고가는 동안, 왠지 날이 시퍼렇게 서 있던 것 같던 정욱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익숙한 온기가 둘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다. 어깨가 딱딱해지는 긴장도 잠시. 마음이 놓인 지해는 입꼬리가 슬슬 말려 올라갔다. “잘 됐네.” 아무 생각없이 그저 기뻤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이렇게 만나니까 너무 반갑고 주책 맞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얼굴만 봐도 마냥 좋다. 혼이 쏙 빠질 것처럼 좋다……. 어떡하냐. 나 정말 바보 같아. “잘 되긴 뭐가?” “그냥.” 눈을 반짝거리며 베시시 웃는 지해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욱도 스르르 표정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 녀석만이 가진 신기한 재주. 자신의 가슴속에 뭔가 살벌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을 때, 눈빛 하나로 간단히 녹여버리고 주위에 꽃바람을 날리는 정말 정말 기가 막힌 재주. 짧게 잘렸던 지해의 머리 한 귀퉁이가 문득 눈에 걸렸다. 그걸 감춘답시고 미용사가 솜씨를 부리긴 했지만, 내용을 알고 보는 사람 눈에는 늘 그 부분만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살짝 삐친 듯한 그 부분을 밀어넣으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무의식중에 머리통을 찰싹 들이대는 이 녀석 정말…… 너무 귀여워. 너무 이뻐. 제각기 할 말들이 뭐 그리 많은지 끊임없이 웅성웅성 조잘대는 소음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둘은 잠시 세상과 차단되는 커다란 투명막을 둘러쓰고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홀 전체가 약간 어두워진다 싶더니 위잉∼ 하는 마이크 소리와 함께 맨 앞의 무대에 환한 조명이 들어오고,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시작하겠으니 내방하신 귀빈 여러분은 착석해 주십시오,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해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무심결에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TV에서 낯이 익은 아나운서 출신의 남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손바닥으로 막고 얼굴을 뒤로 돌린 채, 헛기침을 한두 번 하고 있다. 주위에는 이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점잖지 못하게 서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기회도 비즈니스 내지는 친목 도모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톱스타 윤현규씨. 일행 챙겨서 빨리 자리에 앉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는 지명도 있는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친한 척 들먹이며, 서서히 무대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장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지해야, 우리 자리 저기다.” 현규는 사회자 쪽을 향해 한번 손을 들어 웃어주고 나서, 누군가와 한참 얘기 중이던 하 전무와 지해를 챙겨 자신들의 테이블로 이끌었다. “도련님도 어서 아버님 옆으로 와서 앉아주세요.” 사람들 사이에 작은 웃음이 일고, 호기심어린 눈초리들이 정욱을 향했다. 그룹 내에서 이 정도 규모의 큰 행사가 있을 때는 계속 사회를 맡아왔던 사람인지라 두어 번 봤다고 아는 척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건넨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정욱의 모습을 집요하게 좇는 시선들 속에, 누군데, 하는 말소리들이 드문드문 들리자, 사회자는 대답이라도 하듯이 한 마디 더 보탰다. “이 회사 사장님 아드님이시죠. 오늘 여기 오신 남자분들 중에 제일 잘 생긴 분이잖습니까.” 이미 우아한 포즈로 자기 자리에 앉아있던 강 사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뭐라 대답을 하자, 그 자리 주위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 호텔 4층에 있는 연회장 세 개의 문을 다 열어 완전히 터놓고 지금 하나로 만들어 쓰고 있다는 걸 지해는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알았다. 테이블 사이에 여유를 두어 널찍하게 자리를 마련하긴 했지만, 어림잡아도 손님 수는 몇백 명 수준인 것 같았다. 세련된 이동식 무대의 계단 바로 밑에서 한두 걸음쯤 지난 양쪽 사이드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특대 사이즈의 얼음 독수리가 에펠탑 모양의 높다란 철제 받침대 위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기회만 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한 자세로 각각 버티고 있었다.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연회장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는 12인조 실내악단이 벽을 등지고 앉아 모짜르트와 하이든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얀 제복을 갖춰 입은 웨이터들이 테이블 사이를 조심스레 오가며 따라주는 최고급 와인을 홀짝이며 지해는 식이 진행되는 동안 정욱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익숙하고 당당한 자세로 전혀 어색함 없이 무대 위를 지켜보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이런 화려하고 포멀한 분위기를 위해 태어난 듯. 묘한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설레면서도, 새삼스럽게 저 녀석과 자신은 신분이 정말 다르구나 하는 생각에 지해는 조금 우울해졌다. 식이라고 해봐야 별것 아니었다. ‘사람도 서른 살은 진정한 어른이 되는 시기로, 세강 애드가 이제 바야흐로 성숙한 회사로서 그 날개를 펼칠 때’ 운운 하는 강 사장의 인사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회사의 30년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여주었다. 10년, 20년 전의 구닥다리 광고들이 나올 때는 장내에 웃음이 일기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그 시절의 스타로서 그런 광고들을 장식했던 노장 연예인들과 그때부터 주욱 메이저 광고주로 자리잡고 있는 대기업 인사들도 같이 자리한 탓에 크게 마음껏 웃지도 못하는 숨죽인 웃음이 계속됐다. 그 다음에는, 자칭 최대 광고주라는 어느 기업의 대표가 세강 애드와의 파트너쉽을 강조하는 의례적인 몇 마디를 했고, 그 다음으로는 ‘대한민국의 어머니’ 상을 자처하며, 십여년 째 모 식품 회사의 ‘얼굴’ 노릇을 하고 있는 원로 여배우가 단상 위에 올라갔다. 이 자리를 빌어 형식적인 명예 이사 임명장을 받은 그녀를 위해서는 후배들의 꽃다발 증정까지 있었다.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옆자리에 커다란 꽃다발이 놓여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같은 기획사의 최고 윗대가리 선배인 그 아줌마에게 꽃다발을 배달하는 게 지해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얼른 튀어 올라가’하는 출발 신호에 맞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 머리가 아찔하고 무릎이 휘청거려 지해는 깜짝 놀랐다. 한창 목마르던 참에 와인이 입에 짝짝 붙길래 물 마시듯이 꼴깍꼴깍 마셔댔는데…… 그래도 일찌기 중딩 때부터 쐬주로 단련된 술 실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니라서, 와인 몇 잔쯤 별 문제는 아니었지만, 몸의 움직임이 약간 둔해진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꽃다발을 한 아름 가득 안고 무대 위를 스르르 오르는 지해의 뒷모습을 맨앞자리에 앉아 바라보며, 정욱은 녀석의 걸음걸이가 왠지 좀 느슨해 보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평소 같으면 훨씬 잽싸게 움직일 놈이 어쩐 일일까 싶다. 게다가 제딴에는 눈에 안 띄게 빨리 주고 내려온답시고 허리를 깊숙히 숙이고 있는 바람에, 가만히 차렷 자세로 있어도 허리 주위 맨살이 보이는 아슬아슬한 골반 바지 틈새로 꼬리뼈 부분의 엉덩이 골짜기까지 만천하에 훤∼히 드러나버린 거다! 이런 상황만 아니어도 당장 쫓아가서 재킷이라도 벗어 가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 이따가 두고 보자, 하며 눈을 못 떼고 있는 동안 무대에서 뛰다시피 내려오던 지해와 덜컥 눈이 마주쳤다. 뭔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정욱의 눈길에 놀라 언뜻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지해는 녀석에게 계속 한눈을 팔며 계단을 내려와 사이드로 빠져 나가다가, 얼음 독수리 조각을 받쳐놓은, A자 모양으로 길게 뻗은 받침대의 한쪽 다리 끝에 발이 살짝 걸리고 말았다. 그 때였다. 아까부터 지나치게 옆으로 뻗친 독수리에 비해 그 얼음 조각을 높이 고여놓은 받침대가 너무 가늘고 높아서 영 위태해 보인다 싶었는데, 지해가 다리 끝을 건드리자 기우뚱하면서,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얼음 독수리가 날아오른 것이다! …………!!! ………!! ……! … 차라리 정말 공중으로 날아올랐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있을 리가 만무… 대형 얼음 독수리는 곧장 바닥을 향해 착륙을 시도했고, 지해는 사람들이 앗 하고 있는 찰나 간신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정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100킬로에 가까운 육중한 얼음덩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카페트 위로 다이빙하며 처참하게 흩어졌다. 앞을 가로막고 밀려드는 사람들을 제치고 뛰어가 보니 지해는 얼음의 잔해가 잔뜩 뒹구는 바닥에 몸을 둥글게 말고 나동그라져 있었다. “다친 데 없어?!!!!!!” 저도 깜짝 놀랬는지 넋을 놓고 있다가 정욱의 손길과 목소리에 비로소 반응을 하고 쳐다본다. 언뜻 봤을 때 위아래로 두루 멀쩡한 걸로 봐서 얼음 덩어리랑 정통으로 충돌하는 사태는 가까스로 모면한 것 같은데…… “어휴, 이 사고뭉치….” 정욱이 부축해 안아 일으켜주면서 한숨 섞인 소리를 한 마디 던지자, 긴장이 풀렸는지 피식 웃기까지 하고…… “아욱∼!” 그런데 오른쪽 발을 영 땅에 디디지 못해 계속 주저앉고 만다. 아무래도 일단 급하게 피한답시고 넘어질 때 자세를 잘못 잡아 발목을 삔 것 같았다. “앗, 됐어! 그만해∼!!!!!!!!!” “시끄러. 사고 쳤으면 가만히나 있어.” 수백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욱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부축해 일으키던 자세 그대로, 됐다고 난리치는 녀석을 안아들고 2층 의무실을 향해 홀 바깥으로 뛰쳐 나갔다. 흘끔거리고 참견하는 사람들이나 카메라 따위들이 귀찮아서, 정욱은 사람들이 얼쩡대고 있는 엘리베이터 앞을 피해 구석의 비상계단으로 냅다 뛰어 들어가 홀과 연결되는 철문을 잠가버렸다. 계단까지는 난방이 되지 않고 있어 오히려 서늘하니 시원해서 좋았다. 작년 이맘 때만 해도 거의 살다시피 하던 곳이라, 이곳 지리라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이 호텔도 그룹 계열 중 하나라서 계열사들의 큰 행사라든가, 회사 귀빈들의 숙소라든가, 강씨 집안 자제들의 ‘보안이 잘 되는’ 조용한 놀이터로 이용되어 왔었다. 나중을 위해서는 향락조차도 어릴 때부터 충분히 훈련해야 한다는 강회장의 방침에 따라 정욱도 이곳에 자기 몫의 놀이방을 지급 받았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껏 어느 무엇 하나, 하다 못해 놀 때조차도, 정욱은 집안의 굴레를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셈이다. 지금 등에 업고 있는 이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야, 내가 맛이 가서 네가 안고 뛰는 게 이번이 몇 번째지?” 아무리 60킬로를 채 못 넘는 녀석이라지만 180이 넘는 기럭지가 있다. 계단을 내려가려면 아무래도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이렇게 기다란 녀석을 안고 내려가기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아서, 잠시 내려놓고 문에 기대게 한 뒤 들춰 업어버렸다. 처음에는 계면쩍은지 걸을 수 있다고 똥고집을 부려 보더니, 안된다는 걸 알고 나자 순순히 업혀온다. 업히고 나니 쑥쓰럽기는 해도 기분이 좋기도 한가 보다. 등에 찰싹 밀착해서는 목을 꼭 끌어안고 부비거리며 조잘거린다. “세 번째……인가?”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잘 내려가는 데만 신경쓰면서 정욱이 대답했다. “엥? 왜 세 번이야?…… 작년에 체육시간에 그랬을 때랑……… 또…….” “………….” “……아!”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계속 한번도 잊은 적은 없어도 입 밖에 내어본 일 없었던 어떤 사건을 둘은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다. “… 그래도 제 정신이었을 때는 이번이 처음이네.” 지해가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정욱은 대꾸하지 않았다. “차라리 정신없었을 때가 낫다.” “왜?” “최소한 쪽팔리지는 않잖냐…… 그리구.” “또 뭐?” “너도 덜 힘들잖아∼♬” 지해가 갑자기 낄낄거리며 깡충깡충 몸을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정욱은 계단을 내려가던 발길을 멈추고 난간을 양손으로 잡았다. “야, 야∼!!! 가만히 좀 있어! 너 자꾸 이러면 여기다 버리고 간다?” “헤헤헤, 설마∼” 하긴 그렇다. 요렇게 되는 대로 내뱉고 나서는 제가 한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생각도 안 해 보고, 재빨리 찰싹 붙어 볼따구에 뽀뽀부터 쪽∼ 해버리는 녀석. 땀방울이 또르르 구르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네 냄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고 키득거리는… 이런 녀석을 어떻게 버리고 갈 수 있을까. “될 수 있는 대로 이 발목 움직이지 말고 안정 취하구요. 찬물이나 얼음주머니로 냉찜질해 주고 다리를 높이 올려두세요. 뜨거운 찜질은 2, 3일 뒤부터 하는 게 좋아요. 그때까지 붓기가 가라앉지 않고 발목 움직일 때마다 아프면 병원에 가봐야되구요.” 호텔 의무실의 간호사가 탄력붕대를 감아 고정시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할 일이 끝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웃고는 손목의 시계를 보며 얼굴을 살짝 찡그린다. 지해가 눈치를 살피다가 이제 나가봐야 되는 건가 싶어서 치료대 위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정욱이 가만있으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흔든다. 다친 녀석은 여기서 좀 쉬라고 하면 딱 좋지만, 혼자 두고 연회장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지금쯤이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저녁식사 중일 텐데…… 혼자 놔 두고 가면, 같이 온 그 배우 새끼가 채 가버릴 것 같아서…… 그때처럼… “퇴근 시간 지나신 것 아닌가요. 괜히 저희 때문에.” “아니에요. 교대할 사람이 오늘 좀 늦는댔어요.” “그분 오실 때까지 저희가 여기 있을께요.” “두 시간은 더 있어야 되는 걸요. 그럴 순 없죠.” 두 시간이라… 그냥 이대로 집에 데리고 갈까… 아버지 차를 같이 타고 왔으니… 이 녀석도 하필 그 윤현규 새끼랑 한 차로 왔다니까… 그냥 택시를 타고 가야되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무실 문이 빠꼼히 열리고는 여직원 한 명이 ‘언니, 저녁 안 먹어요?’ 하며 들어온다. 간호사가 잠깐 난처하게 웃더니 금방 돌아올 테니까 30분만 여기 있어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정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버지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의무실에 있는데 별일 없으니 안심하시라는 말을 간략하게 전했다. “저기…… 혹시 굵은 테이프 같은 것 없으세요?” 정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지해가 막 문을 나서려는 간호사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테이프?” “네, 스카치 테이프 말구요. 누런 테이프 같은 거요. 이렇게 두꺼운 거요.” “아∼!” 간호사는 옆방 자기 책상의 맨 아랫 서랍에서 두꺼운 테이프를 꺼내 건네주고, 그럼 조금만 실례할게요, 하고 나갔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정욱이 문을 잠갔다. “문은 왜 잠궈?” “그냥.”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 지해는 옆으로 몸을 비켜, 정욱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며 테이프를 부욱 잡아당겨 빼내 한 바퀴 둘둘 말았다. 그러고는 정욱을 자기 앞에 앉게 하고, 한 바퀴 돌려 둘둘 말은 테이프를 들고 검은 벨벳 재킷 등에 앉은 하얀 먼지를 테이프 끈끈이로 떼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입고 있던 하얀 스웨터가, 속이 훤히 비치게 얇은 주제에 그래도 꼴에 울이랍시고,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던 이 녀석 옷에 지저분한 먼지를 많이도 붙여 놨다. 아까 한참 업혀 올 때는 미처 몰랐었는데…… 왠지 싫다. “이제 집에 갈 건데 됐어.” “너 돌아가봐야 되잖아.” “아니야. 너 데리고 그냥 갈 거야.” “나 혼자서 갈 수 있으니까 넌 올라가.” 갑자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어느 남자직원이 간호사를 찾는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대답해주니 미간을 찌푸리고 가버린다. 정욱은 문을 닫으며 재킷을 벗어, 멀리 떨어진 진홍색 가죽 소파 위로 던졌다. “왜 그래. 이리 줘봐―” “됐어.” “먼지가 뽀얗―” “됐다니까.” “네 성질을 내가 모르냐? 그러고 다니는 거 너 싫어하잖아.” “시끄러. 너 데리고 집에 곧장 갈 거야.” 이렇게 말씨름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아는 지해는 그냥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고 벽에 탁 소리가 나게 기댔다. 움직임이 너무 컸는지 온 몸이 울리면서 삔 발목까지 찌르르 통증이 왔다. 자기도 모르게 으읏∼ 하는 신음이 새어 나오자, 등돌리고 서 있던 녀석이 뒤를 돌아보고 다가온다. 지금 보니 재킷 속에 흰색 스탠드 컬러의 연보라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보라빛 광택이 살짝 도는 검은색 벨벳 바지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많이 아퍼?” “아니.” 발목을 살펴보던 정욱의 시선이 허벅지쯤에서 딱 멎었다. “어? 너 여기 바지 찢어졌다.” “오잉?” 이놈의 바지가 얼마나 타이트했었는지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옆선 한 귀퉁이가 3센티 정도 튿어졌다. 넘어질 때 그랬나 보다. “으아∼ 이거 내 옷 아닌데.” “아니야?” “몰라. 코디 누나가 어디서 줏어온 거야.” 그러길래 제대로 된 걸 가져와야지, 하며 투덜대자 정욱이 웃으며 다가와서는 머리를 마구 흐트러놓는다. 하지 마, 새꺄! 하고 노려보니 한쪽 팔로 머리를 꼭 끌어안고 반대편 팔로 더 심하게 헝클어댄다. 버둥거리며 반항하던 게 언제부터 키스로 이어졌는지는 둘 다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이 있다면, 키스하는 데 어찌나 열중했었는지 문이 열리는지도, 누가 들어오는지도 전혀 몰랐다는 것 정도. 그리고 그 사람이… “정욱…아…?” …정욱의 아버지였다는 사실 정도. 옆에서 현규가 뭐라고 떠들고 있었던 것 같긴 하다. 들리긴 들리되 귀로 접수되지 않는 소리를 뭐라고 하더라? 뭐였지? 소음? “……응? 그게 낫겠지?” “네?” “………….” “죄송해요. 잠깐 딴 생각을….” “………….” “………….” “고민이 있으면 말을 해.” “………….” “말을 안 하면 귀신도 모른댄다. 고민거리는 그냥 털어놓고 의논하는 게 제일이야. 딴 방법 없어.” “………….” “혼자서만―” “몰랐으면 좋겠어요!” 지해가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뭐가 터진 것처럼 감정 제어가 안 되는 목소리로 내뱉자, 현규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무도 몰랐으면…… 귀신도 몰랐으면 좋겠어요.” “혼자서만 끙끙 앓아봤자 해결 안돼.”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 녀석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가볍던 목소리에 제법 걱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 설마 아까 넘어졌던 것 때문에 그래?” “………….” “절대 네 잘못 아냐. 그 사람들이 허술하게 설치해놔서 그렇지. 그 무거운 걸 멋부린다고 그렇게 놓는 게 말이 되냐? 누굴 잡으려고.” “………….” “네가 크게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지. 자기네 회사 행사에 초대한 손님을.” “………….” “하여간 그…… ‘세강’ 자 들어가는 회사들은 하나같이…… 남들 안 하는 짓만 여우같이 골라하면서도….” “………….” “으으…… 맘에 안 들어.” 지해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영 반응이 없자, 현규는 기분이 영 머쓱했는지 창문을 살짝 열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너…… 그때 갔던 너희 집으로 데려다주면 되지? 잠깐만, 그럴려면 여기서 우회전해야 되나? 다음이던가? 네가 쟤한테 얘기 좀 해줄래?” 앞에서 운전하는 자신의 매니저에게 길을 가르쳐주라는 현규의 말이 지해는 한참이나 후에 입력이 됐다. “아, 아니에요. 집엔 못 가요.” “그럼 어디로?” 말문이 딱 막힌다. 쫓겨난 마당에 집으로 기어들어갈 순 없고… 어디로 가야 하나? 좋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면서, 말없이 아버지를 따라나서던 그 순간에도 정욱은 ‘딴 데로 새지 말고 일단 아파트에 가 있어. 말 안 들으면 가만 안둬’ 하고 엄포를 놓았었다. 하지만 그러랬다고 어떻게 정말 그러냐 말이다. 그 당당한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르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는 묘한 낭패감으로 뒤죽박죽되어 새파랗게 질린 표정. 그런 얼굴은 생전 처음 보았다. 그 녀석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조차 몰랐었다. 그리고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그 잘난 놈이 그런 얼굴을 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집엘 못 간다니, 무슨 뜻이야?” “………….” “하이고∼! 말을 해라, 말을!! 답답하다!” “………….” “그러면 이렇게 해. 너 오늘 우리집에 가서 자자.” “네에?” “집에는 못 간다 그러고. 따로 갈 데도 없나본데, 우리집으로 가.” “………….” “이만큼 왔는데 또 딴데로 길 돌리려면 운전하는 놈 고생해. 오늘은 일단 우리집에서 자. 쟤도 피곤한 애야. 좀 쉬어야 돼.” 모르겠다. 그럴까…… 그냥……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암튼 오늘은 일단 어디가 됐든…… “근데요.” “응?”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현규는 슬며시 놀래는 눈치였다. “너무 잘해주세요, 항상.” “왜? 부담스러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늘 죄송해서.” “글쎄… 왜 그럴까?”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짓던 현규가 정말 답을 찾고 있는지 눈동자를 허공으로 또록또록 굴린다. 본인도 모르는 이유를 저렇게 한참동안 열심히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도 어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고…… “아니. 별 뜻 없었어요. 그냥 괜히요.” 지해는 손까지 저으면서 됐다고 하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이제 봄이 오려는지 촉촉한 보슬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봄인가 봐요. 이제.” “엊그제가 입춘이었잖아. 그래도 아직은 추워.” “아직 춥다고들 하긴 하던데, 벌써 공기가 달라요…… 봄 다 왔는걸요, 이제.” “………….” “저 3월에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이맘때부터는 기분이 싹 틀려져요. 뭔가 희망 같은 것도 생기구요. 그 왜……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들뜨는 기분 있잖아요. 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요.” 자기가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지해는 피식 하고 웃었다. 현규도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요. 살아남을 거에요. 어떻게 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거에요.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잘 알아요.” 어린 녀석이 갑자기 센치해져서는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현규는 그래도 왠지 안쓰러워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어 가면서 크는 거다.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전화에서 벨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해는 가슴을 졸이며 발신번호를 보았다. 이모네 집 번호다. 이 전화만 받고 꺼버려야겠다. “여보세요?” 「야, 임마! 너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혀엉∼!!!” 오랜만에 듣는 지후의 목소리. 동생한테 보름만에 전화 거는 주제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하고 자연스럽고, 늘 그렇듯이 얄밉기 그지없는 말투. 그 목소리가 왜 이리도 반가운 건지 지해는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 어디냐?」 “어딘지 몰라.”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내가 있는 지금 이 곳이 어디인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차 안인가 본데. 어딘지 모르는 게 어딨어, 이 밥통아. 밖을 잘 살펴봐.」 “몰라. 그냥 길 위야.” 어디로든 이어지는 길이겠지. 이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어디로든 가겠지. 정말 몰라. 여기가 어딘지. 「이리 와.」 “어디…… 집에?” 「발신번호 안 봤냐? 집 아니야. 이모댁이다. 집은…… 암튼 집엔 가면 안돼. 일단 여기로 와.」 멀쩡한 집 놔두고 왜 남의 집으로 오라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안 해 보고, 지해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연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BGM : O Mio Babbino Caro(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 Grover Washington Jr.←CLICK! “야, 임마! 너 다리는 또 왜 절어?!!” 다리를 절룩거리며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지해를 보고 지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 아….” 얼굴이 마주치면 아마 다른 말부터 마구 해대리라 생각했던 형이 의외의 말을 예상치 못했던 기세로 하자, 지해는 잠깐 멍해졌다. “이보게들, 나 오늘 완전히 동물의 왕국 한 편 찍었다네.” 지해는 끈을 풀어야 해방될 수 있는 까다로운 구두 때문에 등을 돌리고 현관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준석과 지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냥 지해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다. “투명 독수리가 달려들어서.” “………….” “…아마 내 간을 노렸나봐. 내가 간뎅이가 좀 부었잖아.” “동물의 왕국 찍었다더니 별주부전 찍었냐?” 준석이 사람좋은 웃음을 웃으며, 눈치없는 대꾸를 했다. 지후가 한번 날카롭게 야려보자, 준석은 시선을 피하고 뒷머리를 슥슥 긁었다. 구두를 벗은 지해가 한쪽 손으로 벽을 짚으며 간신히 일어났다. 형님 눈에서 레이저 빔이 발사되고 있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입을 다물지 않는다. “아니, 그거 말고 그 왜…… 시지프슨가? 독수리가 간 쪼아먹으면 그 다음날 또 나는….” “프로메테우스. 띨빵아. 시지프스는 산꼭대기로 바위 굴려 올리는 애고.” 지후는 잠깐 ‘이 녀석이 정녕 제 친동생 맞습니까’ 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기 같으면 실수로라도 어렴풋한 사실을 입에 담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이 자식은 뭐든 그렇다.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 과연 생각을 하기는 하는 놈일까. 너 때문에 나야말로 간이 오그라든다, 이 새꺄.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인데 어떻게 이리도 다르지? “아…… 뭐 어쨌든…… 그거나 그거나….” 지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헛고생인 거 알면서도 맨날맨날 그 짓거리 반복하는 거…… 똑같잖아.” 또 한번의 큰 한숨. 방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물어본다. “근데 이모랑 이모부는 안 계셔?” “여행 가셨어.” “여행? 우와∼! 어디? 두 분만? 언제 오셔?” “북유럽쪽. 핀란드랑 스칸디나비아 반도. 이주원네 부모님이랑 같이 가셨어. 이제 일주일 있으면 오실 거야.” “오호∼!! 그래서 집 놔두고 이리로 오라고…” 별 생각없이 밝게 대꾸하던 지해는 두 형들의 떨떠름한 표정을 눈치채고 숨을 삼켰다. “……한 게…아닌가.” 들릴락말락 덧붙이다가 그나마 말끝을 흐리고. “…뭐… 또다른 이유라도… 있는가 보구만…?” 씩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지만 정체모를 불안감으로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너 들어가서 씻고,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라.” 지후가 둘이 여기 얹혀 살 때 쓰던, 옛날 준석이 친할머니 방을 가리켰다. “짐 좀 갖다 놨으니까. 가방 안에 보면 옷 있어.” “지해야, 호프집에 치킨이랑 생맥주 시킬 건데, 노가리 먹을래? 번데기도?” 착 가라앉은 지후의 목소리와 일부러 더 밝게 띄운 준석의 목소리가 동시에 부딪쳤다. 둘이 잠깐 서로 마주보는 동안, 지해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왜 그럴까? 밖에서는 잘 돌아다니다가도 막상 신발 벗고 방에 들어오면 피곤이 몰려온다. 지해는 온몸이 쑤셔서 그냥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며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대충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와, 방 한구석에 놓인 낯익은 스포츠 백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티셔츠와 헐렁한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가방을 두 개나 가져다 놓았다. 지후의 책꽂이에 꼽혀 있던 책들도 대여섯 권 눈에 띈다. 며칠 지내러 온 사람처럼 이게 웬 짐보따리냐. 방문을 열다가 문득 다시 돌아가서, 옷걸이에 잘 걸어놓은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아까 분명히 껐던 대로…… 잘 자고 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깐 망설이던 지해는 서랍장 위에 얹어 놓았다가…… 다시 집어들고 바지 주머니 속에 쓱 쑤셔넣은 채 방을 나섰다. 밖에 나오는데, 마침 호프집에서 배달이 와서 준석이 받아 챙기며 돈을 치르고 있었다. 뭘 저렇게 많이 시켰는지. 저 두 인간은 저녁밥도 안 먹었나? 하긴 이모도 안 계신데 저 인간들이 밥을 제 손으로 해 먹었을 리가 없지. 왕년의 부엌데기가 이렇게 돈 벌러 밖으로 싸돌아다니고 있으니. 그나저나 지금 9시가 다 되어가는데. 저것들, 배고프겠네. 어, 그러고보니 저녁 굶었기는 자신도 마찬가지. 근데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도 안 들고. 그냥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지구 멸망의 날까지 잠만 퍼질러 잤으면……. 이꼴 저꼴 안 보고, 아무 소리도 안 듣고, 그냥 좋은 꿈이나 꾸면서……. 깨어있기가 지금 너무 겁나서……. “지해야, 뭐해? 빨리 와서 앉어.” 준석이 거실 테이블 위에 치킨 세 마리와 생맥주가 들어있는 2리터 페트병 둘, 알루미늄 호일로 잘 싼 노가리를 펼쳐 놓고, 번데기가 들어있는 1회용 그릇을 칭칭 감은 랩을 끌르며 말했다. 지후는 맥주를 따라마실 컵을 가지러 부엌에 가 있었다. “젠장, 무슨 랩을 이렇게 많이!!! 드럽게 안 되네.” “이리 줘봐.” 지해가 준석이 어설프게 비틀어대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솜씨로, 대여섯겹 칭칭 감긴 랩을 떼어냈다. “역시 나보다 낫다.” “그걸 무작정 힘으로만 하려고 하면 안 되지.” 옆사람이 바뀌면 역할 또한 달라진다. 정욱이랑 같이 있으면 이런 일이 있을 때 옆에서 보다 못해 달려드는 건 항상 정욱이다. 무작정 힘으로만 하면 되냐, 바부야? 이러면서 마술사 같은 손재주로 뭐든지 눈깜짝할 새에 뚝딱……. “야, 받아.” 어느새 지후가 부엌에서 유리컵을 세 개 가지고 와서는 페트병에서 생맥주를 따라 건네준다. 지해는 지후가 마지막으로 자기 컵에 맥주 따르는 걸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욱이 같았으면 벌떡 일어나서 유리컵은 도로 갖다놓고 주석잔 가지고 왔을 텐데……. 뭐 그렇게 따지는 게 많은지……. 까다로움을 떨다 못해 가끔은 그런 모습이 귀엽기까지 한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해는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지후가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웃었어?” “그래.” 지해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담배 어딨냐? 담배. 근데 이쯤에서 꼭 잔소리 한 마디 덧붙일 형님이 조용히 계신다. 워쩐 일이냐 싶어 쳐다보는 순간, 문제의 형님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조용히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집 내놨어.” 갑자기 가슴이 덜컹해서 지해는 들던 맥주컵을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계약기간 아직 몇 달 남았는데?” “집주인하고 미리 얘기했어. 어차피 300만원 더 올릴 거였으니까 올린 값으로 새 사람 구해주면 상관없는 걸로.” “그래서 들어올 사람이 나타났어?” “물론! 내가 새 사람도 안 정해졌는데 너한테 얘기하겠냐?” 재주도 좋다. 근데 그러면 대체 집을 언제 내놨단 얘기야? 아니, 그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그것도 구해 놨어. 오늘 계약금 100만원 걸어놨고, 잔금만 치르면 돼.” 나한테 한 마디 의논도 없이, 하는 원망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들어갔다. 염치가 없다. “그래서 너랑 의논하려고 오라고 한 거야. 방법은 두 가지야. 내가 봐둔 집으로 우리 둘이 같이 이사를 가던가…” “………….” “나는 아예 학교 앞으로 하숙 들어가고, 너는 너대로 네가 살 곳을 찾던가.” “………….” “그 집 이사갈 때 네가 번 돈으로 들어간 거라서. 사실 내 마음대로 일 처리해놔서 미안하다. 나도 이제 내가 벌어서 하숙비 내고 학교 다닐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도 상관없어. 이미 과외 두 개 하기 시작했고. 마음만 먹으면 하나 더 구할 수도 있어. 네가 새 집 싫다고 하면 양쪽 복덕방에는 내가 위약금―” “아니, 잠깐만!” 속사포같이 지껄이는 저 소리가 다 뭔 말인지. 뭘 어떻게 하자고 지금? “애초에 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건지 설명을 해줘야 할 것 아냐! 뭐야?! 형, 그 집에 불만 있어? 이유가 뭔데? 설마 겨우… 그 날 그…” 말을 채 마저 잇지 못하는 지해를 놔두고 지후는 벌떡 일어나서 방으로 갔다. 방에서 나오는 지후의 손에는 노리끼리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뭐야?” 형이 넘겨주는 봉투를 받아들고 지해가 물었다. “열어봐” 느닷없이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지해가 봉투의 입구를 단단히 봉하고 있는 테이프를 뜯었다. 그리고 그 봉투에서 나온 건…… 5 x 8 인치 사이즈로 뽑은 사진 다섯 장. 얼마나 성능 좋은 망원렌즈로 찍은 건지, 아니,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찍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날 한밤중의 골목에서의 키스 씬이 조금씩 시간 차를 두고 찍혀 있었다. 두 장은 뜨거운 키스 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한 장은 둘이 입술을 막 뗐을 때, 나머지 두 장은 얼굴을 가까이 두고 보면서 뭔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다섯 장 모두 벽으로 몰린 지해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나도록 교묘히 잘도 찍혀 있었다. 정욱의 얼굴은 옆얼굴이 확실히 찍힌 두 장 빼고는 거의 뒤통수만 보인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 이게 어디서…… 났어?” 아랫입술이 덜덜 떨리는 걸 이를 악물어 참으며 지해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그 다음다음날 밤. 그러니까 네가 집에 왔는데 내가 쫓아내고 난, 다음날 밤이 되겠군.” “………….” “그날 사실 골목에서 그 소동을 부리는 거 보고, 나 정말 어이가 없었다. 너도 잘 알 거야. 우리 집 그 창에서 보면 앞집이나, 그 아랫집, 옆집에서 내다보는 것까지 다 보인다는 거. 집집마다 창가에 사람들 다 붙어서 보고 있는데…… 나 많이 화나고 부끄러웠어.” 지해가 마주쳤던 시선을 떨어뜨리는 동안, 지후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얘기를 풀어나갔다. “너, 근데 나랑 눈 마주치니까 그 녀석 오토바이 올라타고 가버리더라.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해하려고 했어.” “………….” “좋아. 흥분했을 때 얘기하지 말고, 피차 머리 식힌 다음에 얘기하자, 그렇게 생각했지.” “………….” “근데, 너희들 가버리고 조금 있다가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는지 새까만 차한 대가 너희들 간 방향으로 가는 거야. 우리 집에서 내려다봐도 골목 끝이나, 저쪽 후미진 구석이나 우리 건물 바로 밑이나 뭐 이런 데까지는 안 보이니까. 아마 그런 데 서 있었겠지. 괜히 기분 켕기고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 “어쨌든 나 그날 밤에 한숨도 못 자고 고민했어. 네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더라. 이 녀석은 어쩌면 이렇게도 생각이 없을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오후나 돼서 어슬렁 나타났으니 화가 더 나셨겠군.” 이제 떨림이 완전히 멈추고 진정이 된 지해가 평소의 톤을 되찾아 빈정대듯 대꾸했다. “그래. 우선 꼴도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2차적으로는 아직 내가 너한테 냉정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네가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는 생각도 있었고.” 번호까지 붙여가며 장황하게 말하기 좋아하는 형의 버릇이 또 다시 나오자, 지해는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자신은 저 사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났는지 그걸 묻고 있었었다. “무슨 뜻이야?” “네가 나를 형으로서 얼마나 생각하는지, 내 존재가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그걸 보자는 것 말이야.” “씨팔, 알아듣게 잘 좀 말해봐. 형은 형이 하는 말을 세상 사람이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 지해의 말투가 거칠어지자, 옆에서 가만히 있던 준석이 ‘지해야!’ 하면서 팔을 잡았다. “나는 말이다. 네가 날 정말 형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한테 그 ‘일’에 대해서 설명하고 내 이해를 받고 싶었다면, 나가란다고 정말 뛰쳐나가서 계속 안 들어왔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 “그 녀석…… 이랑 너, 얼마큼 깊은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둘이 장난이 아니고 나름대로 진지하다면, 내가 널 때려죽인다고 했어도 넌 날 설득하려고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 “내 말이 틀린 거냐?” 지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반쯤 떨구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형이 옳다.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다. 형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만 생각했지, 자신이 형을 설득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해봤다. 근데 왜 형을 설득하겠다는 생각조차 안 해봤을까? 왜 그냥 녀석의 품 안으로 쏙 숨어들어가 버렸을까? 혹시 그 녀석과의 관계에 대해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형한테 인정받아봤자 어차피 소용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뭐, 어쨌든, 네가 일부러 날 불쾌하게 하려고 그랬다고는 생각 안 하니까. 그냥 피하고 싶었겠지. 충분히 이해해.” “………….” “저 사진은…… 너 그렇게 가고나서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리고 만약 네가 중간에 어디로 없어지기라도 했으면, 에이전시에서 집으로 연락이 당장 올 텐데, 연락 없는 걸로 봐서 일은 하고 있나보다 했지. 그래서 일단 좀 두고보자 하고서 하루가 갔는데….” 밖에 나갔다가 밤늦게 집에 와보니, 문 틈으로 밀어넣고 간 봉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고, 그날부터 매일 사진 한 장씩 들어있는 봉투가 닷새동안 배달되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소리없이 스르르 밀어넣고 가는 사진. 나중에는 현장을 잡기 위해 집에서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정말 언제 밀어넣고 갔는지 문 밑에서 빳빳한 서류 봉투가 발견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번째 날에는 사진 대신 지해와 같이 사진에 찍힌 ‘인물’의 간단한 인적 사항이 프린트되어 있는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이날도 종일 집에 틀어박혀 문만 지켜보고 있다시피 하는데, 뭔가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쫓아서 뛰어나갔는데도 한 발 늦어, 밖에 다다랐을 때는 그 날 봤던 그 검은색 차가 골목을 꺾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차번호마저도 확인하지 못했다. 고민 끝에 준석과 의논했다. 준석이 그날 저녁에 와서 그 다음날까지 내내 같이 기다렸지만, 사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 그걸로 끝인 듯 싶었다. 일단, 준석의 권유대로 집을 복덕방에 내놓았고, 워낙 학군이 좋은 동네라서 새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쉽게 구해졌다. 평소 성격대로, 이사갈 집까지 물색해서 완벽히 준비한 다음, 지해를 불렀다. 솔직히 그런 상태에서 집에 돌아오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해는 어디 눌러앉았는지는 모르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괘씸하다고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고 정리되고 차분히 설득해서 데려갈 수 있을 때 불러들어야 했다. “너 어디 짚이는 데라도 있냐? 뭘 원하는 거지? 돈인가? 돈이면 여태까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계속 가만있던 준석이 조심스럽게 지해에게 물었다.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짚이는 데라…? 있으면 어떡할 건데. 지금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여기저기 짚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그리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형한테 털어놓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지해가 고개를 숙이고 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지후가 담담한 목소리로 준석의 말을 잘랐다. “지해, 너 어떡할래? 나랑 같이 갈래, 따로 갈래?” 마치 퍼뜩 섬칫한 느낌에 어느 한쪽을 열심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어거지로 반대편으로 고개를 꺾여 돌려지는 기분. 머릿속에서 춤추며 떠도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 어느 것에 우선권을 부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모르겠어….” “………….” “…꼭 그래야 될까 싶기도 하고. 그러는 게 무슨 소용이냐 싶기도 해.” “………….”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금 사는 집을 알아냈으면, 이사간 집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감시당하고, 협박당하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그런다면… 집을 옮기는 게 최선의 방법인지 잘 모르겠어. 난 이해가 안 가.” “꼭 그놈들 때문만 내가 이러는 것 같니? 어차피 안 될 걸, 그냥 바보같이 도망가는 것 같애?” 차분하던 지후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유를 대자면 끝도 없이 많다. 그래, 너 나름대로 얼굴 알려진 놈이야. 사는 동네에서까지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 그리고, 강정욱인가 하는 그 녀석. 그 녀석도 그 집을 안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 “………….” “좋아. 어떤 쪽이든 이사간다고 우리 못 찾는 것도 아닐테고. 그래도 앉아서 고스란히 받아낼 수만은 없어. 이건 최소한의 내 의지 표명이야. 네 형으로서 내가 널 보호하겠다는 의지라구. 물론 찾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못 찾을 수도 있어. 확률이란 건 그런 거다. 그 집에 가만히 있으면, 그냥 날 잡아잡슈 하고 넋놓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될 확률 100%라구. 하지만, 이사를 간다고 치자. 여러가지의 근거와 정황으로 추정해 봤을 때, 이 사진 갖다준 놈들이든 누구든, 우릴 못 찾을 확률은 사실 극히 미미해. 그래도 0%는 아니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 “그때 가서 또 이상한 놈들이 이상한 짓거리로 찝적거리면 나는 그 다음 단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야.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는 마.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면 한다는 거야.” 지해는 마음속에서 솓구쳐오르는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애써 눌러 참았다. 탁상공론이고 궤변이고 자기 만족이다. 그리고 뭘 기대하지 말라는 것인가. 애초에 형에게 ‘기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저런 것이 형의 방식이다. 형이라는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식. 그런 ‘자신의 방식으로’ 동생을 ‘보호’해 보겠다는 갸륵한 의지의 표명. 그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동생으로서 그것 하나 존중해주지 못한다면 대체 뭘 해줄 수 있다는 말이냐. 게다가 어찌 보면 타당한 것 같기도 하고. 왜냐 하면, 사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은 아무것도 없는지도 몰라. 그저 도망치는 것. 회피하는 것.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는 것. “경찰한테 말하거나 할 순…… 없잖냐.” 조심스러운 준석의 말에 지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그…… 기획사에는 말할 수…?” 지해는 맹렬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 사람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던가? 오히려 먼저 알까봐 겁나는 일이다. “아직 이 정도에서는… 어른들께도…… 숨기는 게 좋다고 보는―” “지해야. 네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준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후가 아까보다 훨씬 더 격앙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어른들 귀에는 이런 일이 조금이라도 안 들어가게 했으면 한다.” “………….” “이모랑 이모부께 더 이상 폐 끼쳐선 안돼.” 지해는 걱정하지 마, 하고 나직하게 대꾸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형이 가장 우려하는 게 뭔지 잘 안다. 그리고 이사를 감으로써 누구로부터 피하려고 하는 건지도 잘 안다.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찬물을 가득 받고 얼굴을 담궜다. 아직은 시원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진다. 그 냉랭함에 얼굴 표면이 경직될 즈음까지 숨을 참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머리칼과 얼굴에 묻은 물방울이 사방으로 마구 튄다. 수건을 집으려 팔을 뻗는데, 손이 바지 주머니를 스치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핸드폰에 손이 닿았다. 지해는 핸드폰을 꺼내 잠깐 들여다보다가 파워를 살짝 켰다. 삑삑거리면서 메시지가 여러 개 들어와 있음을 알려준다. 누구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들어와 있는지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잠깐 핸드폰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안테나 끝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집고 물이 꽉 차 있는 세면대 위에서 대롱대롱 흔들어주다가 그대로 손을 놓아버렸다. 안녕. “어, 이런∼ 씨부럴∼!! 핸드폰을 물에 빠뜨렸잖아∼!” 거울을 바라보면서 과장된 연극의 한 토막같은 대사를 했다.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까지 갸웃하며. 무슨 싸구려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배우라도 된 양. 액정화면 안까지 물이 완전히 차오른 것을 확인하고 지해는 수장된 핸드폰을 도로 꺼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들 속에 온도를 달리하는 뜨듯한 물줄기 하나가 뺨 위를 흘러내렸다. “…지후 형은…… 많이 바쁜가봐.” “잘 나가, 그 녀석 요새.” “나보다도 더 바쁜 것 같애… 가만 보니까.” 소파에 등을 축 늘어뜨려 기대고 바닥에 널부러져 앉은 채, 지해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면서 뜬금없이 말하자, 준석이 피식 웃었다. 2리터짜리 생맥주 두 병은 거의 둘이 다 비운 셈이었고, 지후는 이미 오래 전에 준석의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자기 할 일은 반드시 하는 인간이 김지후다. 말썽꾸러기 동생 문제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런 날도 예외는 아니다. “뭐하는데 저렇게 바쁜 거야? 그때 말하던 그 서클…인가?” “오늘이 정팅이래나 뭐래나. 학교 입학도 안 했는데 신입생 모아놓고 저러는 서클은 처음 봤어.” 지후는 고2 여름에 학교 대표로 2박3일 짜리 학력경시대회 캠프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4분기마다 한번씩 치러지는 이 대회는 모 언론사와 어느 재벌 그룹에서 후원하는 것으로, 전국에서 각 학교마다 학교장 추천을 받은 학생 한 명씩을 매년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분기별 대회의 1등에는 대학 4년간의 전액 장학금이 주어지고, 그때의 입상자들 4명을 모아놓고 연말에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 1등한 사람에게는 대학원까지의 장학금과 더불어, 그 학교까지 장학금 2000만원, 2등을 차지한 학교에는 1000만원이 지급되는 엄청난 이벤트였다. 지후는 분기별 대회에서는 1등을 차지해서 4년 장학금을 확보했지만, 연말 대회에서는 아슬아슬하게 한 문제 차이로 2등을 하고 말았기 때문에 막상 학교만 좋은 일 시키고 말았다. 만약 대학원을 가게 된다면 제 돈을 내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물론 사법고시를 대학 재학중에 패스하는 것이 목표였으니 대학원 갈 일은 없을 테지만. 아무튼 그 대회에 출전했던 학생들끼리 서클을 만들었는데, 그 서클의 역사가 이미 20년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대회 참가자들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시키는 이 서클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초 엘리트들만이 모인, 무서운 아이들의 집단이었다. “그때 형이 거기 갔다와서, 애들 수준이 끝내준다고 막 자랑하던 생각이 난다. 그중에 진짜 괜찮은 여자애도 하나 있었다고 그러던데.” “걔랑 가끔 메일 주고받았었잖아.” “어, 진짜야?” “걔도 이번에 서울로 대학 왔어. 연대 영문과.” “전부 다 서울대는 아닌가봐.” “서울대가 젤 많긴 한데, 생각보다 다양한가 보더라구.” “형도 그 누나 얼굴 본 적 있어?” “어. 걔네 집이 제주도야. 그래서 이번에 같이 여행갔을 때 만나보고 왔어.” “이뻐?” “괜찮아. 날씬하고 얼굴도 작고 하얗고.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지후가 훨씬 더 예쁘던데 뭐.” 후후후, 지해가 담배 연기를 훅 내뱉고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여자애들이 그렇게 극성을 떨어도 눈 하나 깜짝 않던 형이 이제 대학 들어갔다고 여자친구 하나 만들 셈인가 보다.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게 정석인지도 모른다. “형은 여자친구 없어?” “없어.” “안 만들어? 형 인기 많았었잖아.” “관심없어.” “왜?” “맘에 드는 애가 없어.” 지해는 몸을 일으켜 앉고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었다. 이렇게 남자답고 멋있고 따뜻하고 자상한 준석이 형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그나저나… “나, 형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 봐.” “형, 혹시…” “응?” “…동정이야?” 그 순간 준석은 정말 귓볼과 목 뒷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스스로도 벌겋게 익은 얼굴이 느껴지는지 차가운 유리컵을 뺨에 갖다댄다. 서둘러 갖다 댄 유리컵에 안경테가 부딪혀 쨍∼ 소리를 냈다. “우와∼ 이럴 수가∼!!” 지해는 일부러 더 크고 밝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에는 뭔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현실을 잊게 해주는 얘깃거리가 필요하다. 재미가 없더라도 있는 척 하면, 곧 즐기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놀리지 마, 이 새꺄.” “형이 그러니까 우리 지후 형은 말할 나위도 없겠구만!” “내가 알기로는 그럴걸? 모르지. 또 뭐가 있는지는. 하여튼 내가 아는 한은 그래.” “하긴 내가 아는 한에서도 그렇긴 해. 하핫.” 이런 형들에게 자신은 얼마나 더 이상하게 보일까.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중딩 때부터 종횡무진…… 인간끼리 즐길 수 있는 결합의 종류는 대충 거의 다 경험해 본 셈이니……. 그들의 순수함이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꼭 내가 걸레가 된 기분이야.” “잘난 척 하지 마.” “아니야. 진짜야. 걸레 중에 젤루 더러운 걸레. 화장실 바닥 닦는 똥걸레.” “그런 소리 마라. 할머니 늘 하시는 말씀 있잖아.” “응?” “걸레보다 사람 손이랑 입이 더 더럽다구.” “………….” “걸레는 빨아서 그냥 놔두면 깨끗한 채로 가만히 있거든. 근데 사람 손이랑 입은 쉴새없이 움직이면서 더러운 것도 많이 묻히고 다니고, 옮기고 다니고.” 지해가 그 말의 뜻이 자신에게도 해당이 되는 걸까 헤아려 보고 있는 동안, 준석은 뭔가 생각났는지 헛기침을 했다. “근데 말이다.” “어?” “너, 여자한테는 관심 없냐?” “으잉?” “여자는…… 몰라……? 저기…그…… 관심이 안 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형들이 그나마 그 옛날 사실은 모르니 얼마나 다행인가. 정욱이 녀석은 초창기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 놈이야 워낙 수단이 좋으니까. 정보통이 확실하니까…… 아~!! 정욱아…… 정욱아… 정욱아…… 지해의 표정이 갑자기 뚜렷하게 어두워진 걸 보고, 준석은 자기 질문에 대한 긍정으로 오해를 하고서 오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 녀석이 쓸데없는 걸 묻길래 복수할 겸 큰 맘 먹고 물어봤는데 괜히 물어본 건가 싶기도 하다.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야.” “……?”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 어릴 때부터 쭉 같이 자랐는데 정말 몰랐어.” 지해는 담배를 깊숙이 빨았다. 담배를 피면 참 좋은 점이… 불필요한 대꾸를 안 해도 된다. 그냥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입이 바쁜 것으로 누구에게든 납득시킬 수 있다. “근데 사실 넌 항상 그랬어.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렇고. 알면 알수록 신기해. 내가 몰랐던 부분이 계속 튀어나와.” “………….” “꼭 양파껍질 까는 것 같애.” “………….” “네 속엔 대체 뭐가 들은 거냐?” 나도 잘 몰라. 내 속에 뭐가 들은 건지. 누가 그걸 알겠어? 근데 그보다도 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까도, 까도, 끊임없이 뭔가가 또 튀어나와. 이 지랄맞은 상황 자체가 정말 형 말마따나 양파 같애……. “형, 양파나 한번 까보고 그딴 소리 하는 거야? 우리집 원조 부엌데기는 나야.” “하하, 뭐 이를테면 그렇다는―” “내 경험에 의하면 양파 아무리 까봐야 나오는 거 하나밖에 없어.” “……?” “눈물.” BGM : O Mio Babbino Caro - 조수미←CLICK! 새벽부터 서둘렀더니 피곤했다. 어젯밤에는 정말 한숨도 못 잤다. 게다가 집에 가 있으라고 한 녀석이 신경쓰여 계속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자동응답기만 돌아가고 받지를 않았다. ‘지해야, 나야. 전화 좀 받아’ 하고 아무리 소리를 내질러도 헛수고였다. 핸드폰도 불통이었고, 혹시 즈이 집으로 간 건가 싶어 거기로도 열심히 걸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되어 다들 잠든 틈을 타서 새벽 세 시쯤 집에 가 보았다. 없었다. 역시 말을 안 들어먹은 거다. 이 놈을 정말!!!!! 내친 김에 녀석의 집까지 가보았다. 벨을 암만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게 분명했다. 이 녀석은 대체 어디로 또 숨어버린 걸까? 그 다리를 하고…… 잠깐 생각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헬리콥터가 착륙장에 도착했다. 새벽의 섬은 조용했다. 남해안의 2월 아침. 짭짜름한 갯냄새가 물씬 피어오르는, 물기 어린 뿌연 새벽 안개. 어젯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내뱉은 말은 딱 한 마디뿐이었다. “내일 바다 낚시나 가자.” 새벽 다섯 시에 집을 나서기로 되어 있어서 정욱은 간신히 시간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왔을 때가 4시 반. 이미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서 CNN을 보고 있던 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다른 날보다 한 시간 반 일찍 시작된 하루에 집안의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몇 시간을 못 참고 밖에 나갔다 온 아들을 보고도 아버지는 그때 아무 말이 없었지만…… “너 기억나니? 어렸을 때, 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데. 나랑 같이 여기 낚시하러 몇번 왔었지.” ……지금은 소풍가는 아이처럼 마냥 들떠서 얼굴에 홍조마저 띄우고 말을 멈추지 않는다. “네.” “너 땜에 수심깊은 갯바위로는 못 가고, 얕은 데만 골라서 포인트 잡느라고 힘들었었다.” “네.” “그래도 정말 재밌었어.” “………….” “민장대에 찌 달아서 수심 80센티 딱 맞추고 낚시하라고 너를 건네주는데, 글쎄 내가 건네주기가 무섭더라구.” “………….” “선장님, 이 녀석이 말이에요. 내가 낚시대 채비 준비하면 미끼 끼워달라고 하고, 던지려고 하면 고기 잡았다고 하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하하, 그러셨어요, 사장님?” “내가 낚시할 시간이 없더라니까.” 아버지는 반응이 딱딱한 아들의 맞장구는 포기했는지 자신들을 갯바위까지 실어다주는 배의 선장을 붙들고 어릴 때부터 남다른 낚시꾼으로의 재질을 엿보이던 아들에 대해 몇 마디를 더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비가 와서 추울 때도 춥다는 내색없이 꼼짝도 않던 녀석. 한번 가르쳐 줬더니 잡은 고기는 무조건 놓아줘야 되는 건줄 알고 전부 방생해 버리던 기특한 녀석. “내가 회쳐 먹으려고 꿍쳐둔 씨알 굵은 놈들까지 죄다 놔주더라구, 이 녀석이.” 아버지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랑 같이 낚시하러 올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서 잠이 다 안 와서 애먹었어. 오늘 새벽에도 눈이 번쩍 뜨이는데 이 녀석하고 낚시 간다 생각하니 어찌나 기분이 들뜨던지.” 정욱은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척 하면서 시야 끝에 살짝 잡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도 추우면 활동을 많이 안 하는 거랑 똑같아. 물고기들 하는 짓도 꼭 그래. 봄이나 되어야 산란하려고 짝 찾아 헤매다가 낚시에 걸려드는 거지. 겨울에는 뭐, 큰 기대는 안 해. 그래도 나도 늙었는지 고기 잡지 못해 안달하던 시기는 다 지났다. 잡히지 않아도 기분 나쁠 것 없고, 잡혀주면 기분 조금 더 나은 것뿐이야.” “………….” “이 바다가 좋으니까 이렇게 오는 거지. 바다가 좋으니까.” 갯바위에 자리를 잡고, 장비를 챙기며 조용히 뇌까리는 아버지의 바다 예찬을 들으며, 정욱은 이름 속에 바다를 품은 그 녀석을 떠올렸다. “내 이름의 ‘해’자 말이야. 바다 ‘해’다?” 하며 재미있는 사실이라도 가르쳐주듯이 웃던 녀석. 그 녀석이랑 같이 봤던 바다는 따뜻한 여름 나라의 푸르디 푸른 바다였는데. 이 바다도 좋다. 철썩하고 부딪칠 때마다 냉기를 내뿜는 쓸쓸한 겨울 바다도 좋아. 바다라면 다 좋아. 쉴새없이 변하는 네 모든 모습이 다 좋아. 달빛에 네 속살이 은은하게 빛나는 밤에도 좋고, 태양을 머금고 잠에서 깨어나는 이런 새벽에도 좋아. 깊이를 알 수 없는 물길 속에 네가 품고 있는 그 수많은 생명들도, 삶의 에너지도 다 좋아. 너를 정말 사랑해. 너의 모든 게 다 좋아. “오늘…… 저한테 별다르게 하실 말씀은 없으신 건가요?” 연천댁이 정성껏 준비해준 도시락으로 허기를 때우고 그릇을 덮으면서 정욱이 드디어 아버지에게 물었다. 점심 때가 될 때까지 서로 한 마디도 없이 낚시대 드리우고 부서지는 파도만 바라보면서, 간간이 이어지는 고기들의 입질에 끌어올리고 놔주고만을 계속 반복했었다. “너…” 찬합을 도로 짐가방 안에 챙겨 넣고서 아버지는 정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학 갈래?” 정욱은 머릿속이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어떡할 테냐?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대학을 미국으로 가는 게 좋을 듯 싶다만. 지금 네 성적으로는 서울대 가기는 힘들 것 같고.” “여기서 공부해서 시험 보고 대학 가겠습니다.” “언제가 됐든 갈 거 차라리 빨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회장님이 너무 고집을 피우셔서 내가 가만있었지만, 너는 공부만 들고파는 스타일도 아니고, 아무래도 여기 학교랑은 맞지 않아.” “그래도 할아버지 말씀 거역하고 싶지 않아요. 충분히 생각이 있으셔서 그러시는 건데요.” “많이 달라졌구나.” 아버지가 생전 처음 보는 처연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너 분명히 유학 가고 싶다고 했었다. 네 소위 친구라는 녀석들도 다 유학 떠나고, 너만 왜 여기서 학교 다녀야 되는지 이유가 납득이 안 간다고 분명히 네 입으로 말했었어.” “………….” “내가 아까 한 말.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네가 했던 말 그대로야. 네 스타일로는 여기서 좋은 대학 가기 힘들다. 여기 학교랑은 맞지 않는다. 언제가 됐든 갈 거 차라리 빨리 가고 싶다.” “………….” “뭐가 네 마음이 바뀌게 한 거냐?” “………….” “너 나가서 살면서부터 예전에 비해 생활 패턴이 많이 바뀌었다는 건 언뜻 듣고 있었어. 난 처음에는 네가 철이 나나보다 생각을 했지.” “………….” “그런데 느낌이 좀 다르더구나. 그러다가 한동안은 다시 예전이랑 비슷한 느낌이다 싶었는데….” “………….” “며칠전에 회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정욱이가 요새 연애를 한다며?’ 하시더라. 회장님도 아시는 일을 애비가 모르다니 많이 부끄러웠다.” “………….” “그 상대가 설마―” “맞습니다.” 정욱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대답했다. 이게 아니란 거 알고 있다. 그냥 색다른 놀이 상대라고만 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징그럽다. 그런 건 하지 마라’ 하실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의 추궁은 없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다. 이제는 너무나 분명한, 그 소중한 마음을 걸레짝 꾸겨 던지듯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걔가 그 모델 녀석 맞지? 광고에 나오는.” “작년에 같은 반이었어요. 일이 바빠져서 출석을 멋대로 해도 괜찮은 학교로 전학갔죠.” “그래, 그렇구나. 경위야 어찌 됐든, 너희 둘이 시작은 어떻게 됐든, 이쯤에서 그만 정리해라.” 정욱은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절대로 헤어질 수 없어요.” 아버지는 잠깐 한숨을 쉬고 멀리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지금 내가 네 애비로서 그걸 받아들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 “네가 지금 내 입장이라면 넌 어떻게 하겠니? 넌 분명히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난 널 잘 알아∼! 넌 내 아들이니까!!!” 정욱은 갑자기 목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로 해서 설득이 안 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네 말을 듣게 만들 놈이 바로 너라는 녀석이야.” “그건 아버지께서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아니라고? 그러면 네가 지금 나랑 꼭 같은 입장이라면 넌 그대로 잘 한다 하면서 내버려둘 거냐? 그럴 거야?” “………….” “솔직하게 사실대로 얘기해 봐라. 네가 거짓말하는 것쯤 난 다 알 수 있어. 그런 자신이 있었으니까 네가 혼자 나가 살겠다고 했을 때도 허락을 한 거다. 물론 너에 대한 신뢰감도 절대적이었고. 너를 너무나 믿기 때문에, 내 아들인 너에 대해 충분히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 “……!” “너는 네가 나한테 어떤 아들인줄 아니?” “………….”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지금까지 키워왔는 줄 알아?!!” 아버지는 흥분으로 팔을 휘두르다가 손끝에 턱 맞은 낚시대가 제 자리를 잃고 바다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데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정욱은 수면 위로 둥둥 떠가는 낚시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자신들이 있는 갯바위 바로 밑으로 돌렸다. 발밑 수심이 15∼17미터 정도 나간다고 했었다. 물밑이 시퍼런게 누가 보더라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다. “그런 말씀을 왜 이제야 하시나요?” “………….” “그동안의 무관심이 지나친 신뢰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실 참인가요?” “………….” “너무 비약이 심하지 않습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제 머리로는 따라잡기가 힘들어요!!” “………….”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되지 못할 거라면 그깟 신뢰 따위 필요없단 말입니다!!!” “………….” “좀더 솔직해지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정욱을 잠깐 바라보다가 한 걸음 다가와 뺨을 힘차게 후려 갈겼다. “너 왜 이렇게 어리석냐?” “………….”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해?” “………….” “한때의 감정으로 왜 모든 걸 그르치려고 해?” “………….” “지금까지 모든 게 다 너를 위해 완벽하게 되어가고 있었는데 왜 자꾸 망치려 드냔 말이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난 듯, 아버지는 머리가 휙 돌아갈 정도로 정욱의 뺨을 다시 한번 온힘을 다 해 쳤다. 온몸의 중심을 다 한데 몰아 힘껏 올려붙이는 그 힘에 정욱조차도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울퉁불퉁한 갯바위 위에서 중심을 잃은 아버지는 허공에 크게 허우적허우적 헛손질을 하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몸이 옆으로 나갔던들 바위의 가파른 경사로 구르면서 차가운 바닷물 속에 빠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욱은 문득 이 순간 아버지가 바다에 빠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아버지는 아마 죽었겠지. 자기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어가는데도 침착을 유지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게다가 이 섬은 강씨 집안의 사유지다. 고용인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지금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던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섬칫한 느낌이 들었다. 놀랍고 충격적인 깨달음의 순간에는 뜻밖의 엉뚱한 생각도 같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한 가지 생각으로, 지금껏 의미를 잃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갑자기 실타래처럼 줄줄 엮이면서 하나의 연관성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욱은 바로 이 순간, 자신이 김지해라는 생물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던 첫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눈으로 익숙해진 다음에 처음으로 귓속으로 뛰어 들어왔던 그 녀석에 대한 정보 중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사업에 실패한 ‘굴욕’을 못 견뎌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는 것. 자신은 그때 명백히 그 녀석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 녀석은 그 한순간에 자신의 뇌리에 그토록 깊이 박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 커다란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본능이란 게 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이든 잠재의식이든 자신에게는 결코 없을 줄 알았던 ‘그것’이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내가 사랑하는 ‘바다’에 내 죄의 흔적을 새길 수는 없다. 그 잔상조차 남길 수 없다. 그러기에는 이 바다가 너무나 아름답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 상태에서 망연자실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키면서 정욱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18. BIRTHDAY It's my birthday 오늘은 내 생일. No one here day 아무도 없는 날 Very strange day 진짜 이상한 날 I think of you day 네가 생각나는 날 Go outside day 밖에 나가는 날 Sit in the park day 공원에 앉아있는 날 Watch the sky day 하늘만 바라보는 날 What a pathetic day 무지하게 한심한 날 I don't like this day 나는 이 날이 싫어 It makes me feel too small 나 스스로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거든. I don't like these days 나는 요즘이 싫어 They make me feel so small 내가 엄청 초라하게 느껴지니까. (Birthday - Blur) “……그래… 뭐 그럭저럭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은데 말야.” 마치 더 이상 듣기도 싫다는 듯이 몇 소절 들어보지도 않고 바로 페이더를 내려버리며, 소위 요새 최고의 줏가를 올리는 작곡가라는 주성신이 말했다. 지해는 한껏 거드름을 피며 말하는 그의 말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의 찡그린 표정이나 현란한 손짓 같은 것을 멀뚱하게 잠깐 바라보다가 곧장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모니터 안에서는 방금 지해가 부쓰 안에서 노래를 불렀던 소리가 녹음된 것이 계속 삐쭉삐쭉한 그래프를 그리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스피커의 볼륨을 완전히 죽여버렸으니, ‘소리’는 더 이상 소리로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주파수와 크기를 가지고 있는 청각 신호 데이터로서 그래프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나마 그 청각 신호의 음원인 지해가 이곳을 나서자마자 곧 delete될 데이터. 저 사람이야 아까 녹음을 해보면서 들었을 테지만, 자신은 지난 열흘간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장이 꼬이도록 연습한 결과가 객관적으로 어떻게 들리는지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으로서 그런 작은 권리조차 거부당하고 있는 기분.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느낌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저 사람은 분명 자신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 일단 일련의 테스트를 거친 후, 기획사에서는 영화 개봉 시기에 맞추어 6월 말 내지는 7월 초쯤에 지해의 데뷔 음반을 발매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 동안엔 탤런트, 배우 쪽에 치중하여, 드라마 외주 제작이나 영화 제작 참여에만 열을 쏟던 이 회사였지만, 충무로 쪽의 거품이 조만간 꺼질 것이며 쏟아지던 ‘눈먼 돈’도 줄어들 것임을 예상하고, 상대적으로 회사 내에서 열세에 있던 음악 분야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2년이 채 안 되었다. 음반 시장도 지금 장기적인 불황을 맞고 있었지만, 뭐든 잘 나간다고 개나 소나 다 끼여들 때가 아니라, 바닥을 쳐서 기존의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타이밍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오히려 신인 가수들의 스카우트와 훈련에 열을 올리는 이 회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 됐든, 회사 내의 음악 분야 활성화 작업은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지금까지 소속 가수(주로 연기자로서 가수까지 병행하고 있는)들의 매니지먼트만 맡고 음반 제작은 거의 다 기존의 레코드사에 맡기고 있던 것을, 아예 자체 레이블을 강화해서 음반의 제작 전체를 책임지고 배급, 유통만 위탁하는 방식으로 규모를 키웠던 것이다. 일을 벌일 때는 크게, 확실하게, 제대로 벌여야 한다는 회사의 방침 아래 남산에 있는 레코딩 스튜디오를 증축하고 장비를 완전히 새로 구비하면서, 그것만으로는 모자라겠다 싶었는지 강남에 또 하나를 더 만들었다. 스튜디오 둘을 세팅하는 데에만도 반 년이 넘는 시간과 엄청난 돈이 들었다. 회사 사옥의 지하1,2층을 전부 노래와 춤 연습실로 다시 꾸몄다. 그리고 국내 음반업계의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출발은 생각보다 괜찮아서 작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해 지금까지 모두 예상했던 것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이미 입지가 굳혀진 소속 스타들의 음반이었으므로, 크게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제부터는 서서히 대박 신인을 터뜨려서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야 하는 때가 오고 있었다. 지해가 보이스 코치의 지도 아래 노래 연습을 하면서 열흘에 한번씩 주성신의 홈 스튜디오에 와서 그 동안의 성과를 체크 받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 음반에 들어갈 곡을 서너 곡 던져주고, 편곡과 프로듀싱까지 맡아주기로 했던 그와 첫 기획회의 때 인사했던 것까지 합치면 이번이 세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물론 TV에서는 숱하게 본 얼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고 보니 TV에서의 발랄하고 여유있는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에, 낯이 익었던 것만큼이나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를 볼 때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구나 하는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이, 첫 기획회의에 들어가서 인사를 한 이후, 지해는 그 다음 몇번 있었던 회의에 아주 당연한 듯 제외되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음반의 컨셉이 만들어지고, 수록될 곡들이 골라지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음반이고, 자신의 곡도 반 이상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모델 출신의 17살짜리 고등학생 놈이 알고보니 작곡도 한다더라 하는 ‘홍보’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이는 주성신이 첫 기획회의 때 한 말이었다―하더라도, 그 정도의 권한조차 없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그날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키보드와 믹서로 작업한 데모 CD에다가(그동안 작곡해 두었던 60여 곡 중에서 스무 곡만 딱 추려서),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나름대로 편곡한 악보들(스트링 앙상블이나 리듬 섹션, 브래스 파트의 애드립까지 고려한)까지 챙겨 가지고 가서 보여주었는데, 그때 그의 반응은 딱 이거였다. “너 지금 악보 읽고 쓸줄 안다고 나한테 자랑하냐?” 그 순간 지해는, 아차 실수했구나, 싶었다. 이 사람은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신인이 흥분한 나머지 엉겁결에 주제넘게 나선 거라고 너그럽게 봐줄 만한 아량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엉겁결에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나, 또한 우연히 영화 출연이 결정되었을 때(비록 몇 장면 등장하진 않지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열의를 갖고서 욕심을 내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제외된다는 것은 애써 이해하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이라는 것이 이미 뚜렷이 눈에 보이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너 말야. 춤 연습은 좀 하고 있니?” 하아…… 춤이라…… “뭐, 기초 트레이닝은 하고 있지만…… 춤이 들어갈 만한 곡이….” “응?.” 지해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리자, 주성신은 짜증난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안 들려. 큰 소리로 말해 봐. 그렇게 뱃심이 없어서 어떡하니? 발성 연습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아……? 제기랄…… “춤이 들어갈 만한 곡도 포함되는 건가요?” “물론! 당연하지.” “………….” “주구장창 발라드로만 앨범 하나를 어떻게 만들어? 누구 잠 재울 일 있냐? 수면제 만들고 싶어? 요새 애들 취향이 어떤데 누가 그런 판을 사?” “…꼭 발라드만 한다는 게 아니라요….” “아,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너 TV 쇼에서 템포 빠른 노래 할 때는 뭐하면서 할래? 그때도 마이크 두 손에 쥐고 발등만 쳐다보면서 부를래? 아니면, 피아노 치면서 다리나 좀 흔들 거야?” “………….” “네가 엘튼 존이냐? 빌리 조엘이야?” “………….” “아니, 네 취향으로 보면 토리 에이모스에 더 가까운 건가?” 지해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자기도 모르게 불끈 쥐어진 주먹을 뒤로 감췄다. 할 수만 있다면 꼭 한 대만, 정말 꼭 한 대만 때려주고 싶다. “그런 스타일 우리나라에서는 안 먹혀. 안 팔려. 대한민국 음반 시장에서 뭐가 먹히고 안 먹히는지는 나만큼 잘 아는 사람 없다∼!” “………….” “최부장이 얘기 안 했니? 나는 내 말에 100% 완.벽.하.게. 따라오지 않는 애들이랑은 작업 안 한다는 거.” “뭐야? 무슨 일이야? 성신씨. 또, 내 욕 하고 있었군?” 갑작스런 전화를 받으러 잠깐 나갔던 최부장이 얼굴에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들어왔다. 회사 내 A&R부서의 책임자로 레코딩을 기획, 감독하며 예산 관리와 프로모션까지 총지휘하는 그는 올해에 크게 터뜨릴 신인으로 지해에게 기대를 걸고서, 부하 직원에게 이번 일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총대를 메고 나선 참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알아듣는다더니, 이 아저씨는 귀도 밝아. 하긴 평소에 나한테 지은 죄가 많으니 켕기는 것도 많으시겠지.” “지해야, 들었냐? 이 사람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야. 맨날 웃고 다닌다고 함부로 보면 나중에 큰 코 닥친다.” 상황을 금방 결코 웃을 수 없는 희극으로 만들어서 은근슬쩍 넘겨버리려는 두 ‘어른’들의 작태를 지해가 어리벙벙해서 쳐다보고 있자, 최 부장이 살짝 눈짓을 하며 말했다. 지해야, 얘기 끝났으면 너는 먼저 가 봐. 나는 성신씨랑 의논해야 될 게 많으니까. “네 일이 끝나고 나니까, 이제 내 일이 시작이구나. 느이들이 이 고충을 알아? 노구를 이끌고 여기저기 날품팔러 다니는 이 노인네의 고충을?” 이제 겨우 30을 넘긴 자칭 ‘노인네’의 잡소리를 뒤로 하고, 지해는 스튜디오의 문을 닫았다. 지해의 기준으로는 거의 저택이라 할 수 있는 집의 아담한 별채에 꾸며져 있는 주성신의 홈 스튜디오는 집 안으로 통하지 않고 바로 마당을 통해 대문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빨간 벽돌담이 빙 둘러진 너른 마당에는 이제 3월 초임을 알리는 목련이 하얀 꽃잎을 끄트머리나마 살짝 보이고 있었고, 길게 늘어뜨린 개나리 가지에도 파릇파릇하게 돋은 새싹들 사이로 아주 엷게 노란 빛이 언뜻 비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새학기를 시작하는 개학날이었다. 아무리 만만한 학교더라도 이런 날쯤은 학교를 가 줬어야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싶다. 그래도 그 동안 가뜩이나 한가하지도 않은 스케줄에 영화 크랭크인이다 음반이다 해서 주위에서 사람 혼을 쏙 빼고 로보트 굴리듯이 몰아치다 보니 날짜 가는 것도 몰랐다. 바쁘기라도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안 그랬으면 심장이 터져서 죽었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이번에는 정말 끝나버렸거든. 길을 나설 때마다 주위를 살피고, 집에 가까워질 때마다 다시 한번 둘러보고,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뛰고…… 아무리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집을 옮겨버리더라도 그 녀석이 설마 자신을 안 찾겠냐 하는 희망이 남아있긴 했었나 보다. 그것도 시간이 이만큼 지나고 나니, 전혀 아니올시다라는 걸 깨달아 버렸지만. 세상에는 꾸지 말아야 할 꿈이라는 것도 있다. 예전부터 익히 알던 사실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마음 속에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동안 정욱은 배웠다. 그 날 낚시를 하고 갯바위에서 섬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동안 아버지는 갑자기 심하게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금방 부두에 닿을 텐데 조금만 참지 하던 것도 잠시, 분명 단순한 멀미인줄만 알았던 아버지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졌다. 혼비백산해서 섬에 대기해 있던 헬기에 아버지를 태우고, 병원에 급히 후송해 가던 그 시간이 정욱은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졌었다. 저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사람 하나를 실제로 죽음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버지라든가, 어머니라든가… 그런 생각을 품어서는 절대로 안될 사람일 경우에는. 인근 병원에서 겨우 응급 조치를 하고 간신히 한숨 돌린 다음, 세강 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겼다. 진단 결과는 급성 심근 경색증. 조치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정말로 사망할 뻔 했다는 것이었다. 병세가 생각보다 나빠, 발병 1주일 이내에 사망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해서, 그 며칠동안 정욱의 집은 거의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뉴욕에 있던 누나까지도 학교를 며칠씩 빠져가며 급히 들어와 완전히 안심이 될 때까지 머물다가 돌아갔다. 다행히 별다른 합병증이 없어 보름이 지난 다음에는 거의 원기를 회복했지만, 좀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주치의의 권유로 거의 4주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아버지는 일단 병원에 머물러 있는 참이었다. 개학식을 마치고 요새 죽 그래 왔던 대로 정욱은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았다. 『스페셜 하우스』라는 이 VIP 전용 병동의 현판이 이제는 자기 집의 문패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크림색의 대리석 벽 곳곳에 붙은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합시다」라는 갈색 목판도 1+1=2 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생각된다. 일정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세뇌작용의 결과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호전되어가는 아버지의 병세를 살피고 안심하며,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지 않게 해준 것을 어디 있는지도 모를 신에게 감사한다. 그 외의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사치에 불과했다. “아, 어머니….” 2층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아버지의 병실이 있는 쪽으로 꺾어지려는데, 마침 그 병실에서 나오던 어머니와 마주쳤다. “지금 오니?” 어머니는 정욱의 교복과 가방을 잠깐 지긋이 바라보다가, 곧 ‘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정욱이 집에서 살 때는 아버지와 각방을 쓸지언정 형식적으로 매일 아주 늦게라도 집에 들어오던 어머니였는데, 막상 1년을 나와서 살다가 다시 집에 들어가고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실상 별거중이었다. 아들의 교복 차림을 잠깐이나마 의아해 했다가, ‘아, 오늘쯤 개학이지’ 했던 생각을 그대로 들킨 걸 깨닫고 어머니는 조금 멋쩍은 얼굴을 했다. “아버지 방금 잠드셨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 “네.” “점심은 먹었니?” “네, 먹고 왔어요.” 원장실까지 가려면 4층으로 올라가 구름다리를 지나 본관까지 가야 한다. 그게 귀찮아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지하 카페테리아로 내려가 커피를 한 잔씩 테이크아웃해서 병동 옆의 온실로 가자고 했다. 아무리 온실 안이라지만 아직 꽃이 활짝 피는 때가 아니라서, 습기와 온기로 은근히 숨막히는 이곳 안에는 주로 서양란 같은 종류들만 꽃을 피우고 있었다.별말 없이 온실 안을 찬찬히 한 바퀴 둘러본 어머니는 이파리가 노래지고 뭔가 낌새가 안 좋은 대만 고무나무를 발견하고, 정원사를 불러 상태를 살펴보라고 지시를 한 후에야 아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요새 너 좀 핼쓱해진 것 같다?” “그럴 리는 없어요.” “너 키가 몇이니?” “작년에 190이었는데, 더 큰 것 같지는 않아요.” “190이라…… 그 정도면 요새 애들 사이에서도 큰 축에 드는 거지?” “그렇죠.” “그 정도는 커야지. 어차피 넌 한국 안에서만 비즈니스 할 애가 아니니까.” “………….” “전에 너희 아버지랑 나랑 미국에서 공부할 때, 너희들 막 태어났을 때…… 그때도 보면 그것보다 더 큰 사람들 많았었다? 너희 아버지 친구 제닝스 교수 그이도… six-foot-four 라던가 그랬는데… 그 정도면 몇이니?” “193, 4 정도 되는 거죠.” “그래. 너도 아주 훌쩍 커버려라. 큰 키로 양키들을 꽉 제압하고, 네 맘대로 휘둘러 봐. 너희 아버지도 옛날에 젊었을 땐 굉장히 키가 큰 편에 속했는데 이제는 뭐.” “지금도 큰 편이세요.” “그래.” 겉도는 대화가 좀 답답해지다가 문득 어머니는 이 이상의 깊은 얘기는 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욱은 그냥 가만히 어머니에게 맞추기로 했다. “너희 아버지는 원래 마음이 약하셔.” “………….” “심약하다는 거. 내가 환자들을 겪어보니까 정말로 심장이 약하다는 뜻이더라.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들 잘 알고 말을 만들어냈는지.” “………….” “너희 아버지 참 온순하고 여린 분이야.” “…알아요.” 어머니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넘기느라 대화의 맥이 잠깐 끊겼다. 정욱은 괜히 머쓱해서 역시 커피를 한 모금 꿀꺽 삼켰다. “그냥 내버려뒀어야 하는 건데.” “……?” “회장님 말이다. 너희 아버지, 그냥 공부만 하게 내버려두셨어야 했어.” 정욱은 눈쌀을 찌푸렸다. 알고 있는 바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듣기가 싫다. 어쩌구 했어야 했는데, 어쩌구 할 수 있었는데, 어쩌구 했을지도 모르는데. 한탄과 후회의 가정법. 좋아하지 않는다. “그랬으면―” 불쾌함에 정욱은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의 말을 막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우리 집안에서는―” “그게 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해야 될 일이니까, 당연히 잘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갑자기 어머니는 불쾌한 듯 정색을 하고 정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씨 집안 아들들은 전부 다 경영을 해야 한다고 누가 그래? 안 하면 또 어때? 누구든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되지, 안 그래?” 정욱은 어머니의 노기어린 말투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너는 느이 할아버지 손자인 거야.” 어머니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완전히 와닿지는 않아 정욱도 무의식중에 어머니를 정면으로 내려다보았다. “내가 모임 같은 데 나가서 사람들이랑 얘기를 해보면, 너는 나나 너희 아버지 아들이 아니라, 강회장 손자로만 통해.” 무슨 소린지. “다들 이러지. 정욱이가 그렇게 의젓하다면서요? 강회장님도 당신 젊었을 때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고 자랑이 대단하시던데요?”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가. “그럼 내가 이러지. 그럼요, 제 아들인데요.” “………….” “그 다음에 뭔가 어색해지는 느낌 있잖니. 내가 쓸데없는 말 한 것 같고 말야.” 그러니까 이제는 그런 소리도 잘 안 하지, 하며 어머니는 시선을 슬쩍 피하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말에 너희 아버지랑 무슨 만찬에 갔다가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말이다. 그때가 크리스마스 되기 조금 전인가 그랬어….” “………….” “성당 앞을 지나는데, 문득 너희 아버지가 그러는 거야. 자기는 요셉이 참 불쌍하대. 그 심정을 알 것 같대.” “………….” “예수는 아마 틀림없이 요셉의 친아들일 거라는 거야. 근데…… 자기 아들은 아들이긴 한데, 자기 아들이 또 아니잖아.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어선 안 되는 거잖아…… 종교 하나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거잖아.” “………….”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 “나는 그때처럼 그 사람이…… 불쌍한 적이 없었어.” 어머니가 눈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살짝 훔치는 동안, 정욱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뭘 바라는 건지 도대체 아들을 뭘로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부모이고 혈육이기 때문에 결코 저버릴 수 없다는 사실만이 이제는 확실할 뿐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등교한 학교는 훌륭한 도피처 같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 때문에 아직 모든 결정이 유보된 상태에서,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르는 이 교정 안은 차라리 감개무량하기까지 했다. “저…… 강정욱.” 3교시가 끝나고, 교실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따라나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작년에 이어 또 같은 반이 된 한선경이었다. 금테 안경 속의 겁먹은 눈동자와 그냥 입만 좀 꽉 다물어도 금세 양볼에 도드라지는 보조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 뭣 좀 물어보려고.” 정욱은 아무 표정의 변화없이 긍정의 표시로 턱끝을 살짝 까딱 올렸다 내렸다. 그랬더니 뭐가 겁이 나는진 모르겠지만, 묻겠다고 해놓고서도 여전히 엄두를 못 내는 눈치― “…뭔데?” ―결국은 입을 열고야 말게 하는군, 싶었다. “저기…… ” “………….” “…혹시……… 너…” 꾸물거리는 꼴에 견디다 못해 자신이 나름대로 험악한 표정을 지었었나 보다. “김지해랑 계속 연락되니?”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다다다 묻는다. 정욱은 선경이 냅다 뱉어버린 그 이름에 가슴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지금은 연락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아……, 그렇구나.” “왜?” “아, 아니…… 전에…… 작년까지는 가끔 통화도 하고, 멜 보내면 답장도 오고 했었는데.” “………….” “…… 핸드폰 번호 바뀌었나봐. 전화가 안 돼. 메일도 아예 바꿨는지 자꾸 되돌아와서….” 정욱은 기분이 나빠져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이 기집애랑은 제법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군. “왜?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아, 오늘 지해 생일이거든. 그래서 전화라도 해주고 싶어서….” “……!” “아마 이제 바쁜가 보지. 저번에 음반 준비한다고 기사도 났던데.” 우물쭈물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뜸들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쿵하고 내려앉은 가슴에 불이 붙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머리도 아프다. “…그럼… 나한테 할 말은 끝난 건가?” 글자 하나하나가 고드름이 되어 우두둑 쏟아질 듯이 차디찬 목소리로 정욱이 대답하고 등을 돌리는데, ‘저기, 잠깐!!’ 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정욱은 천천히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너 모르겠구나?” “뭘?” “지해가 왜 전학 갔는지?” 선경은 뭔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정욱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의 겁먹은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출석 상태가 안 좋아서. 아니었던가?” “아아, 넌 정말….” 선경은 진정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 때문이야!” “……!” “너 땜에 쫓겨간 거라구!!” BGM : What I Live For - Yukiyo Nakamura 지해가 기획사 사옥의 지하 연습실에서 오전 연습을 마치고, 건물 앞 옥외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주차장에 세워놓은 흰색 시보레 스타크래프트 밴 앞에서 서성대는 여학생들 두 명이 보였다. 꽃다발 같은 것들을 들고 서 있다. “오빠, 생일 축하해요.” 광고에는 심심찮게 얼굴이 보인다 하더라도, 막상 자기 이름을 걸고 뭐가 나온 건 전혀 없는 신인이다 보니 팬클럽이나 공식 홈피는 커녕 팬 사이트도 없다. 그저 기획사 홈피 한 구석에 간략한 프로필과 쬐끄만한 갤러리와 게시판 정도 있을 뿐이고 팬이 많다고도 결코 말할 수 없었지만, 이런 날 요렇게 찾아와줄 열성 팬들 두어 명 정도는 있었다. “우∼와∼, 니네…… 어! 근데 학교 안 갔냐?!” “단축수업이에요.” “단축수업 좋아하시네. 구라까지 마. 오늘은 또 무슨 이유로?” 췻, 누가 안 간대요? 이따 갈 거에요. 오빠나 제대로 학교 가면서 그딴 말해요. 생일 축하해 주려고 기껏 찾아왔더니…… 오빠는 그 살벌한 말버릇 안 고치면 못 떠요…… 1집 준비 잘 돼가요?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말랐어요. 밥 좀 많이씩 먹고 다녀요…… 즈이 친오빠한테도 저렇게 살뜰하게 할까 싶을 정도로, 번갈아가며 한 마디씩 재잘재잘 아주 난리가 났다. “난 밥 많이 먹으면 안돼. 살 빠져.” “에에?” “많이 먹을수록 신진대사율이 높아져서 살이 더 빠져. 쪼금만 먹어야 돼.” “그런 게 어딨어요?” “여깄잖냐. 하늘이 내린 훌륭한 체질. 왕 부럽지?” 헤헤거리면서 선물을 받고, 사이좋게 얼굴 나란히 모으고 포즈까지 잡아가며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시야의 끄트머리에 언뜻 누군가 묵직한 굉음을 내는 바이크를 몰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잡혔다. 설마……! 말 그대로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머리가 띵 울린다. 옆에서 떠드는 소리도 하나 안 들린다.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쏠리는 것만 같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진동이 정수리 끝까지 요동을 치며 울려왔다. “오빠, 여기 싸인해 달라구요.” “……으응?” “싸인!!! 내 친구 갖다줘야 돼.” “전에 안 해줬냐, 느이들?” “이건 친구 꺼라니까. 빨리∼∼∼”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여자애가 내미는 잡지책 속의 자기 얼굴 위에, 역시 여자애가 손에 쥐어준 싸인펜으로 슥슥 이름을 갈겨썼다. “어?! 이게 뭐야? 왜 자기 이름 놔뚜고 남의 이름을 쓰고 그래요. 강…정‥욱? 이건 누구에요?” 엉? 지해가 멍해 있는 사이에 운전석에 앉아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로드 매니저 원일이 바깥으로 나왔다. “얘들아, 지금 지해 바쁘거든. 빨리 이동해야 하니까. 미안. 다음에 보자.” 예전에 맡아주던 형섭이 형이 둥글둥글하니 수더분하고 좋았었다. 회사가 바뀌고 차가 바뀌며 같이 바뀐 이 사람은 빠릿하고 부지런한 면은 있는 반면, 쉽게 정이 가지 않는다. 아쉬운 신음성을 지르는 팬순이들에게 간신히 인사를 한 뒤 차문을 드르륵 열고 막 올라타려는데, 어깨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얘기 좀 하자.” “…미안해. 지금 얼른 이동해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어서….” 정욱이 꼼꼼한 눈으로 9인승 밴의 내부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지해는 두 명이 따로따로 앉게 되어 있는 중간 좌석의 안쪽으로 들어가 앉고, 정욱에게 문 바로 옆의 자리를 가리켰다. 빨리 가야 한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원일에게 사정사정해서 잠깐만 차안에서 얘기하겠다고 30분만 봐달라고 한 참이었다. 지해가 정욱의 집에서 머물던 2주일 동안에 딱 한번 마주친 적이 있어 원일도 정욱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97년식이네.” “그런 건 난 잘 몰라. 그냥 타고 다니라니까 타는 거지.” “이 모델 나쁘지 않아. 밖에서 볼 때는 그것보다 더 오래된 건줄 알았었는데, 안을 보니까 신형 디자인이야. 4만 킬로면 생각보다 많이 뛰지도 않았고.” 정욱이 운전석의 주행 계기판을 넘겨다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 좀 문제가 많아.”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지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정욱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다짜고짜 ‘넌 문제가 많아’라니……. 모르던 사실은 결코 아니지만, 막상 영문도 모르고 무조건 문제 많은 놈이 되어버린 지해는 그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일단 황당한 기분이었다. “왜 말을 안 했지?” “뭘 말이야?” 대답이 곱게 안 나간다. “한선경한테 들었어.” “뭘 들었길래?” 지해는 정욱 쪽을 쳐다보느라 옆으로 틀었던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푹신한 회색 가죽시트에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너 전학간 이유.” 아주 잠깐 움찔 등을 곧추 세웠다가 다시 원위치. 들릴락 말락 코웃음을 치며 지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걸 왜 나한테는 얘길 안 해?” “걔한테도 얘기한 건 아니야. 지가 엿듣고 감잡은 거지.” “어찌 됐든!!” “그래. 어찌 됐든 말 안 해서 미안하다. 됐냐?” “………….”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역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고 앞좌석 유리창, 와이퍼가 닿지 않은 곳에 눌러앉은 먼지를 보고 있던 정욱이 급히 고개를 돌려 지해를 노려보았다. 지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건 내 일이야. 너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게다가.” 갑자기 목이 메이는지 지해는 잠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와서……. 그게 언젯적 일인데 이제 와서 왜 그러는데?” “………….” “그리고…… 뒤늦게 그런 얘기 할 필요나 있냐? 다 끝난 마당에!” 지해는 지금 자기 목소리에 원망섞인 톤이 엉켜들어가고 있는 꼴이 뻔히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제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잘 되지 않는다. 대꾸도 하기 싫다는 듯이 정욱은 지해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어둑한 차 안에서 새까만 두 눈동자를 둘러싼 잡티 하나없이 깨끗한 흰자위가 서늘한 푸른 빛을 내뿜었다. “넌 그것도 문제야.” “………….” “뭐가 끝났다는 거야? 이미 일 저지를 건 다 저지르고 전학은 가버렸으니 끝이라는 거냐?” “………….” “아니면, 이사가고, 전화번호, 핸펀 번호 다 바꾸고, 너 혼자 일방적으로 나를 따돌려 버렸으니 끝이라는 거야?” 뭔가 대꾸를 할듯 말듯 하다가 관둬버리는 지해를 보고 정욱은 화내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내가 끝끝내 너 있는 데 알아내서 뒤쫓게 되어 있었냐? 그게 네가 쓴 시나리오였어?” 싸가지없는 내용에 비해 어쩐지 말하는 목소리는 쓸쓸하고 허탈하게 들려서 지해는 정욱의 얼굴만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좀 까칠해 보인다. 입술도 갈라지고……. “미안하다. 각본대로 못 해서. 이번에는 그렇게 됐어. 좀 많이 바빴어. 상황이 안 도와주면 그럴 수도 있더라. 처음 알았어.” 그 말이 꼭, 나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 라는 것처럼 들려서 지해는 눈 앞의 이 녀석을 향해 뭉클한 진한 감정이 다시 샘솟는 것을 느꼈다. 역시나 귀여운 녀석이다.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단 말이지. 저나 나나 아직 17살짜리 별 수 없는 고등어 두 마리에 불과하다는 걸……. 제딴에는 바닷물인줄 알고 펄떡펄떡 누비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커다란 수조 안에 갇혀 바닷물 흉내낸 소금물 속을 뱅뱅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집에서…” “………….” “…많이 들볶였냐? 혼났어?” 계속 가슴 속에 담고 있던 무거운 걱정. 어깨를 짓누르던 고민거리가 입에서 내뱉는 순간, 꼭 한번 분량의 무게만큼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몇 번이고 계속 입 밖으로 뱉으면 그만큼 가벼워지는 걸까?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다 깎여 날아갈 때까지 계속 밖으로 내보내면 언젠가는 전혀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못하게 될까? “아니.” 정욱이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지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밖에서 차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가야 할 때가 되었다. “너 바쁘다며? 나 갈게 그만 가봐라.” “아, 잠깐!!” 문을 열고 나가려는 정욱의 옷자락을 지해가 꽉 잡았다. 정욱은 문에 손을 얹은 채 그대로 고개만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살짝 열려진 문 틈으로 서늘한 바깥 바람과 함께 알싸한 담배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너 입술에 피 난다.” 정욱의 갈라진 아랫입술에서 핏방울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손가락을 가져다 닦아주려다가 지해는 그냥 몸을 일으켜 얼굴을 갖다대고 입술을 살짝 핥았다. 찝찌름한 쇠맛이라도 이 녀석의 것이라 달콤하기만 하다. 지해가 얼굴을 떼면서 보니, 정욱은 그대로 몸이 굳은 듯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얼굴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너 오늘, 일이 몇 시에 끝나?” “몰라. 가봐야 알어. 아마 밤 늦게 끝날 거야. 지금 가서 화보 하나 찍고, 저녁 때는 연습이야. 영화에 싸움씬이 있어서 액션스쿨―” “뭐가 됐든. 아무리 늦더라도 전화해. 꼭 해. 잠깐만 보면 되니까.” “………….” “내 번호는 안 바뀌었어. 그대로야. 전화 안 하면 네가 더 이상 마음이 없는 걸로 알겠어.”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굵은 가시가 하나 박혀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튀어오르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솓았다. 이건 진짜다. 장난이 아니다. “이번에는 네가 쫓아와 봐. 네가 날 잡아줘.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정욱은 문을 드르륵 열면서 쐐기를 박듯이 이따가 전화 꼭 해라, 하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선 뒤 고개를 딱 들다가 바로 차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원일과 눈이 마주쳤다. 정욱은 순간적으로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지만, 고개를 가볍게 까딱, 인사를 해 보이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정욱이 가버린 뒤 열려진 문을 사이에 두고, 지해와 원일은 1초 남짓 마주보고 있었다. “그 친구 이따가 또 만나기로 했나 봐?”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 길에 진입하고 나서 원일이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창 밖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지해에게 물었다. “네……? 아, 일 끝나구요. 할 얘기가 있나봐요. 잠깐이면 된다고.” “오늘 늦게 끝날 텐데….” “형, 오늘 그거 액션스쿨… 다른 날로 바꾸면 안 돼요?” “그 사람들도 스케줄이 있고, 시간표가 다 짜여있는 건데 우리 맘대로 바꾸면 안 되지.” “그럼 조금만 짧게 하면….” “글쎄. 내가 일단 물어보긴 해줄게. 그래도 아주 일찍 끝나진 못할걸. 씬115 찍기 전에 마지막으로 맞춰 보는 거잖아.” “네…….” “너 나오는 씬 중에서는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감독님이 그랬던 것 아니야?” “네…….” “다 합해봐야 몇 번 나오지도 않는데, 잘 할 생각을 해야지.” 지해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창틀에 걸친 왼손으로 이마를 슥슥 문질렀다. 애초에 이런 영화 나부랭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스타? 별로 되고 싶지도 않다. 남들한테 신세 안 질 생활비 정도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주위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한다. 꼭대기까지 오르겠다는 정신으로 죽어라 살아라 열심히 해야 겨우 현상유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 참! 지해야! 차 엔진에서 잡소리가 좀 나는 것 같아서 이따가 정비소에 한번 가봐야겠거든. 너 촬영 끝나기 전에 갔다올게.” “그러세요.” 끝나기 전에 갔다온다면서 그냥 다녀오면 될 것이지 쓸데없는 것까지 말한다, 생각하며 지해는 무심코 운전석을 넘겨다보다가 백미러를 통해 원일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언제 봐도 기분 찜찜한 눈초리. 역시 옛날 형섭이 형이 좋았다. 옛날이 다 좋았다. “생일 임자도 없는데 우리끼리 생일상 차려 먹는 것 같네.” 이모가 쟁반에 받쳐 온 미역국 그릇들을 상 위에 옮겨 놓으며 말했다. “지가 뭐 혼자 태어났나? 다 내가 있고 지 엄마가 있었으니 태어났지. 안 그러냐?” 할머니가 웃으면서 지후를 바라봤다. “그럼요. 근데 그 녀석이 아직 그걸 몰라요.” “너는 알고?” 지후가 얄미울 정도로 딱부러지게 대답하자, 옆에 앉아있던 준석이 맞받아쳤다. 그러자 이모가 대뜸 자기 아들한테, 그러는 너는, 하고 묻는다. 그래도 매년 지해와 지후의 생일 때마다 외할머니도 될 수 있는 한 일부러 날짜를 맞춰 나오시고, 이모도 미역국이라도 끓여주고 엄마 맛이 나는 생일상을 차려 먹이며 아쉽지 않게 해주려 애썼는데, 올해는 어떻게 된 게 생일 주인공 자체가 자리를 비웠다. 어린 것이 돈 벌러 다니느라 밥도 못 얻어먹는다고 할머니가 한참동안 혀를 끌끌 차신 다음에야 모두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이모는 지해 형제가 새 집에 이사올 때 와 봤었지만, 할머니는 엊그제 한국에 오신지라 오늘이 처음이었다. 전보다 평수가 조금 넓은 편이라 은근히 대견해 하면서도, 바로 큰 길가에 있어 차 소리가 윙윙 하고 나는 것도 그렇고, 자꾸 집을 옮겨 다니는 것이 영 마땅찮으신 모양이었다. 물론 탁 트인 큰 길가에 집 얻을 생각을 한 건 지후였다. “지해, 걔가 사주에 지살地煞이 껴서 그래.” “그게 뭐에요?” “역마살보다 더 심한 거야. 역마살은 그 사람이 떠돌아다니는 거고, 지살은 그 사람이 있는 땅 자체가 움직이는 건데, 지해는 그게 굉장히 심해. 걔는 무슨 남자애가 도화살까지 심하게 꼈어.” “얘, 얘!” “요즘은 도화살이라고 그렇게 나쁘게 볼 건 아니래, 엄마. 그래서 걔가 연예계로 나가게 된 거야. 그쪽으로 다 풀어버리면 괜찮아요. 다만 정도가 좀 심해서 문제지.” 전국 방방곡곡의 용하다는 점집, 무당집을 꿰고 다니며, 점이라면 한 일가견 있었던 시어머니 밑에서 살다가 어느새 자연스레 옮아버린 이모가 입찬 소리를 하자, 할머니가 안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 그런 소리 자꾸 하는 것 아니다.” “아니에요, 엄마. 그게 일리가 있어요. 지해 낳기 전에 내가 대명 스님한테 시時까지 받아다 줬는데, 부득부득 안 믿더라구. 그 시에 맞춰서 낳았더라면 그 사주가 깨끗하고 얼마나 좋은데.” “그런 게 마음대로 돼요?” “그럼∼! 나도 준석이 낳을 때 진통 억지로 참아가면서 시간 맞춰서 낳았는데.” 준석이 아무 말 않고 묵묵히 밥만 먹으며 못 들은 척 하자, 이모가 아들을 밉살맞게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욘석아, 넌 엄마한테 백 번 절을 해도 모자라. 내가 그 고생을 해서 네 사주가 얼마나 좋은지 아니?” 저녁식사 내내 이모의 역학 강의가 계속 되고, 이모는 지해가 자신이 연초에 받아다 준 부적을 갖고 다니는지 궁금해 했다. 올해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이다. 지후는 지해가 당연히 그걸 챙겨 갖고 다닐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버리지만 않았어도 다행이겠지만 말이다. “아, 엄마! 글쎄, 주원이네에 도둑이 들었었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이모와 할머니는 부엌에서 정리를 하며, 지해 생일상을 옆에 따로 차려 놓고 있었고, 지후와 준석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거실에 느긋하게 널부러져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주원이네가 누구야?” “저번에 준석 아빠랑 북유럽 여행 갈 때 같이 간 집이요. 이 변호사네.” “이 변호사네? 듣긴 많이 들었는데 얼굴이 생각 안 나네.”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사람인데…… 아! 접때 엄마랑 나랑 갤러리아에서 쇼핑할 때, 만났던 사람 있잖아. 아이그너 핸드백! 엄마가 맘에 든다고 집었다 놓고 가시니까, 그 사람이 그거 보구서 엄마 사드리겠다고….” “아∼! 그이? 얼굴 자그마하고….” “응. 어제 대치동 샤브샤브집에서 점심 모임 있었거든. 나도 어제서야 들었어. 우리 여행간 사이에 도둑 들었었대요.” “세상에∼! 애들은?!!” “딸내미는 부산 친척집에 가 있었고, 아들내미는 일본에 갔었대. 둘 다 우리 도착한 다음날 왔다네요. 집 비울 때 한꺼번에 비우길 차라리 잘 했지.” “많이 털렸대니?” “아니요. 털린 건 별로 없나봐요. 워낙 철저하니까 여행 가기 전에 보석 같은 거는 은행 금고에 다 맡겨놔서 괜찮았대나봐. 근데 그놈들이 얼마나 기술적인지 세콤도 감쪽같이 뚫고, 아무 신호도 안 들어갔더래요.” “아휴, 그래도 사람이 안 상해서 다행이다.” “혹시라도 도둑 들면 가져가라고 화장대 서랍에 300만원 넣어놓고 간 것도 안 가져갔다는데, 뭐. 그냥 애들 쓰는 2층만 좀 뒤진 것 같더래요.” “그럼 왜 들어왔대?” “모르죠. 뭐라도 많이 있을줄 알고 들어왔는지. 암튼 아들놈들 대학 보냈다고 기념으로 여행갔다가 아주 난리 치를 뻔 했다니깐.” “그러게! 근데 정말 없어진 게 없대?” “없대나봐요. 주원이 방만 잔뜩 뒤집어 놨다는데, 지가 다 치우고 나서 보고 없어진 건 없다고 그랬다던데?” 정말 늦게 끝났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늦게 끝나서 정욱에게 전화했을 때가 이미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쌀쌀맞게 들리지 않는 것에 내심 안심하며, 전화를 끊자마자 지해는 맨 뒷좌석에 널부러진 채 어느새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흔들어 깨워졌을 때, 아직도 차 안에 있다는 사실과 눈 앞에 정욱이 있는 것에 좀 당황했다. 원래는 약속 장소인 (정욱의 집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곳인) 남산 공원 근처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하고 차를 보낼 작정이었는데, 곤히 자는 놈을 놔두고 그냥 갈 수 없었나 보다. 둘러보니 핸드폰은 운전석 옆으로 도망가 있었다. 아마 어디에 차를 세워뒀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러 정욱이 전화를 걸었을 테고 원일이 대신 받았었겠지. “저…… 매니저 형은 어디……?” “내가 오래 안 걸릴 거라구 했더니, 밖에서 기다린다고 나갔어.” “아아…… 이런….” 황급히 창 밖을 내다봤다가, 밖에 펼쳐져 있는 아찔한 야경에 깜짝 놀랐다. 총천연색의 네온 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사람들이 밤에 남산을 찾는 건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그나저나 차는 공원 산책로 위에 다른 자동차들과 같이 세워져 있는 것 같고,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곤 개미 새끼 하나 안 보인다. 저 많은 차 안에서는 지금쯤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너 많이 피곤한가 보다.” “아니야. 그냥 요새 계속 잠을 잘 못 자다가….” 지해는 말을 지레 그만 멈추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솔직히 지난 한 달간 정말 피곤하게 살았다. 그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아까만큼이나 달게 잠을 잔 것은 진짜 굉장히 오랜만의 일. “이렇게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그냥 자면 감기 걸린다.” 연습 후에 샤워를 하자마자 급히 달려 오느라 제대로 말리지도 못 했던 지해의 축축한 머리를 매만지며 정욱이 말했다. 지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씩 웃기만 했다. 사실 가슴이 너무…… 뛰는 건지 아픈 건지 답답한 건지…… 그냥 뭔가 가득찬 듯한 느낌에 아무 말도 못 하겠다. “자, 이거… 생일 축하해. 하루 지나버렸지만.” 왼손을 끌어간다 싶었는데 주머니에서 뭔가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걸 꺼내더니 잠깐 주저하다가 손바닥에 그냥 스윽 쥐어준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녀석의 손이 살포시 떨린다고 생각한 건 지나친 착각일까. “이게 뭐야?” 손을 펴서 뭔지 확인하고 정욱의 얼굴을 보니, 마냥 쑥스러운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다. “보면 모르냐, 빙구야?” “반지잖아.” “…이거랑 똑같은 거다, 임마.” 한쪽에 은근히 감추고 있던 자기 왼손을 보여준다. 똑같이 은색으로 빛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녀석의 반지를 보고, 천장의 등을 하나 더 켠 뒤 자신의 것을 잘 들여다봤다. 자세히 보니, 반지 앞부분 전체가 두 개의 손이 맞잡고 악수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5밀리 정도 되는 너비의 품위있는 남자용 반지. 제법 묵직하다. 우정 반지인가? “18세기 프랑스의 어느 귀족 집안에서 결혼 반지로 내려오던 거래.” “이게?!!!!” 지해가 깜짝 놀라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소리를 버럭 지르자, 정욱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진짜 반지는 박물관에 있고, 이건 그 모양을 따서 만든 거야.” “아….” “은 아니야. 백금이니까 녹도 안 슬어.” “어….” “비싼 거 아니니까, 일단 아무렇게나 막 끼고 다녀. 나중에 좋은 걸로 사줄게.” “으응….” “나 요새 집도 뺏기고, 카드도 한도액 없는 건 다 뺏기고, 궁핍해졌어.” “음….” “괜찮아. 두어 달만 얌전히 있으면 다시 만들어 주겠지.” 정욱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해가 ‘돈은 내가 많이 버니까 걱정 마’ 한다. ‘그래, 앞으로 니가 나를 먹여 살려라’ 대답하고 정욱이 또 피식 웃어버렸다.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이 손가락 저 손가락 끼어 보던 지해가 헐렁한 티셔츠 소매가 자꾸 손등까지 침범하는 게 귀찮았는지 팔뚝 위까지 쭈욱 치켜 올리자, 미끈하게 빠진 상아색의 매끄러운 팔이 차 안의 어둑한 조명 안에서 빛났다. 정욱은 무심결에 그 하얀 팔을 스윽 들어올려 가까이서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팔의 원래 주인이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게 곁눈길로 들어왔다. “정말 신기해.” “……?” “어쩌면 이렇게 털이 하나도 없을까. 솜털도 없어.” “………….” “다리도 그렇고. 팔도 그렇고.” “완벽한 진화를 해서 그래.” “뭐가 어째?” “완벽한 진화를 해서 그렇다구! 새꺄!!! 원래 진화가 덜된 종족일수록 털이 많은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정욱의 손아귀에서 자기 팔을 쑥 빼내는 지해의 너무나 평소 그대로인 낯익은 표정을 보고, 정욱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이렇게 마음 놓고 웃는 게 얼마만인지…… 그동안 웃는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도 잊고 있었나 보다. 너무나 오랜만에 웃어서 그런지 갑자기 봇물 터진 듯 터져나온 웃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 속에 꽝꽝 얼어붙어 있던 단단하고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녹아내리면서, 감정이 북받친 듯 온 몸에, 가슴속에, 물이 흘러 넘치는 것 같았다. “야아…?!! 너 왜……울어…?” 지해가 당황해서 정욱의 머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고, 지해가 입은 티셔츠의 가슴팍이 젖어들어가면서야 비로소 정욱은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웃음이 쉽게 멎지 않았듯이 눈물도 빨리 멎어주지 않는다. 울지 마, 애기야. 바부야. 강아지야. 호칭도 참 여러 개다. 황태자 전하, 왕자 마마로부터 강씨, 강군, 강아지, 멍멍이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입에 씹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제끼는 이 목소리도 얼마나 그리웠는지. “♬How much is that doggy in the window∼♬” 이제는 주절주절 이상한 애들 동요같은 노래까지 부른다. 더 이상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 숨이 끅끅 막혀와 고생하며, 이 웃기지도 않는 넘, 하고 자기가 펑펑 적시고 있는 티셔츠 주인을 정욱이 마냥 욕하고 있는 동안, 지해는 창 밖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듯이 계속, 저 유리장 안의 강아지 얼마면 사나요, 하고 노래를 불렀다. 이 칠칠맞은 개새끼는 얼마면 살 수 있는 건지. 뭘 갖다 바쳐야, 뭘 희생해야 이 개새끼를 곁에 꽉 붙들어 매어놓고 다시 안 놓칠 수 있는 건지. 지금 가진 것도 얼마 없는데, 목숨이라도 내놓으면 가능한 일인 건지. 목숨을 치르고서 이 녀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따위쯤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지해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맹세를 소리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장편] Exit Music 2부 (下) #19. DON'T DREAM IT'S OVER Hey now, hey now, don't dream it's over 이봐, 끝났다고는 꿈도 꾸지 말라구. Hey now, hey now, when the world comes in 이제 세상이 끼어들어서는 They come, they come to build a wall between us 우리 사이에 벽을 쌓을 차례거든 (Don't Dream It's Over - Crowded House) “… 그렇게 된 거야, 씨발.” “그러게 차 끌고 갯벌에 들어가는 미친 새끼가 어딨냐.” “그래도 명색이 뉴 레인지로번데 빠져나올 수 있을줄 알았지. 정수 새끼가 된다고, 들어가 보자고 큰소리 땅땅치잖아.” “얌마, 그 정수 또라이 새끼 말을 믿냐. 그게 수륙양용인줄 알어? 니가 제임스 본드야? 그래서 견적 얼마 나왔는데.” “7천.” “정수가 물어준대?” “…그 얍쌉한 놈이 행여나!” “야, 야, 야!!!! 그냥 폐차해. 소금물에 담가먹은 걸 고쳐서 뭐한다고 그래.” “아깝잖냐. 뽑은지 한 달도 안 됐던 건데……. 씨발. 이제 좀 정이 들려던 참이란 말야.” “정 암만 들었어도 소금물 먹었으면 고쳐봤자 땡이야. 너 돈 개념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지 7천 작은 돈 아니다. 괜히 돈만 버리지 말고 차라리 그걸로 새 걸 뽑아.” “너, 우리집 노인네가 또 차 바꿨냐고 잔소리하면 얼마나 골치 아파지는데. 그 잔소리 듣느니 까짓 7천 버리고 만다.” 민혁은 한심하기가 그지 없는 소위 ‘친구’라는 녀석에게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문득 멈칫!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실내에서 담배 피워도 아무 지장이 없잖은가. 여긴 한국이지 미국이 아니니까. “아, 젠장할! 한국 오니까 느무느무 좋잖아.” 대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시원하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오장육부가 다 좋다고 요동을 친다. “민혁아, 어떡할까?” 고국에 (잠깐이나마) 돌아온 감격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맞은 편에 앉은 아이큐 한 자리 짜리가 엄청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마주쳐 온다. 이 새끼는 언제 이 버릇을 고칠까. 지 문제를 남들한테 떠넘기고 수습하고 결정하게끔 하는 버릇. 그러고 나서 잘못되면 항상 또 탓을 하지…… 차 끌고 제부도 갯벌에 들어갔다가 결국 빠져 나오지 못한 채로 밀물 들어오는 바람에 1억 넘는 쇳덩어리를 소금물에 수장시키고…… 이런 등신 같은 놈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지가 그러자고 해놓고 일이 이렇게 되니까 입 싹 씻으며 모른 체하는 그 강정수 씹쌔는 증말! 남은 옆에서 울상이 되서 발 동동 구르는데, 좋다고 그 꼴을 비디오로 찍고 있었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새디 아냐, 그거? “한 소리 듣기 싫으면 똑같은 놈으로 새로 뽑으면 되잖냐.” “그건 좀 기분상….” “기분상 뭐?” “…왠지 좀… 꺼림칙해서.” “뭐가?” “나, 징크스 있거든. 샀던 물건 똑같은 거 또 사면 일 잘 안 풀리는 거.” “어떻게 안 풀리는데?” “그러니까…… 갑자기 생각할래니까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암튼 좀…… 찝찝했었고……. 하여튼 싫어, 그런 건.” “………….” “민혁아, 어떡하는 게 좋을까, 응? 네가 결정해주라.” 뭘 어떡해, 짜샤, 네가 알아서 해. 하긴 옷 한 벌도 지 손으로 못 고르는 놈에게 뭘 기대하겠는가. 지난 번처럼 여자 하나 임신시켜놓고 혼자 끙끙앓다가 뉴욕까지 민혁을 찾아왔을 때보다는 백만배 천만배 쉬운 일이다. 결국은 그때도 민혁이 아는 사람들 동원해서 그 여자 뒤를 캐보니 그녀의 사기극이었다는 게 드러나지 않았던가. 으휴, 그래. 이 정도는 그냥… 귀엽다고 해주마. 그저 나중에 결과에 대해 무슨 불평 불만을 하든, 괜히 그랬네 어쨌네 저쨌네 탓을 하든 흘려듣기만 하면 되니까. “알았다, 알았어. 나한테 맡겨라. 너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거긴 할 거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그런단다. 내일은 도저히 시간이 안 된다. 낼 모레 얘기 끝내고 해결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야, 나 일주일도 못 있다가 다시 가는데, 네 녀석 꾸진 면상을 이틀씩이나 보게 생겼다. 뭘로 보상할래, 엉?” 그저 기쁨에 겨워 ‘그래, 세상에 내가 의지할 놈은 너뿐이다’ 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큐 한 자리. 혼자 일 저질러 놓고는 갈팡질팡하고 있다가 누군가 옆에서 관심을 좀 보이는 것만으로도 벌써 숙제 다 한 기분인가 보다. “우씨. 너 너무하는 거 아니냐. 정욱이 그 놈한테는 입의 혀같이 몸바쳐 충성 봉사하면서.” “내가 언제?!!” “안 그랬냐? 옛날부터 그러잖아… 맨날 정욱이, 정욱이… 정욱이 this, 정욱이 that.” “임마! 그 새끼는―!” “그 새끼는 뭐?” “그 새끼는…… 잘 생겼잖냐.” “나는!!!” “넌 임마…… 못 생겼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민혁이 진실을 말하자, 맞은 편의 아이큐 한 자리는 입을 딱 벌렸다. 누구든 남이 미처 몰라주는 자기 얼굴의 귀여운 비밀 한 가지씩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우와∼, 이런 씨발스런 경우를 봤나.” “정욱이는 잘 생겼고, 멋있고. 한 마디로 완벽한 내 취향이야. 그런데 어떻게 내가 감히 잘해주지 않을 수 있겠냐.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봐라.” “………….” “아참, 너는 머리가 없으니 좀 무리가 있겠구나. 잠시 잊었다. 미안하다.” 남같으면 아주 쉽게 내뱉지는 못할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대면서, 민혁은 여유있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솔직히 농담도 진담처럼 하고, 진담도 농담처럼 하는 녀석이지만, 민혁을 조금이라도 잘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일이 없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법도 없다. 자기 스스로의 마음 속, 머릿속을 100% 파악하고 있는 인간. 언제 어디서든지 있는 그대로 까발려 보여줄 여유와 준비를 갖추고 있는 인간. ―물론 그것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것이 그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었다. “야, 너… 그 개싸가지가 아직도 좋냐?” “누구?” “누구긴? 정욱이 씹쌔 말이쥣. 세상에서 지가 젤 잘난줄 아는 새끼.” “당연히 좋지! 싫을 까닭이 있나?! 잘난 놈이 잘난 척 하는데 뭐가 잘못됐냐. 대견하기만 하더만.” “………….” “오호∼! 너 질투하는구나? 섭했냐?” “뷰,븅신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리 와. 오랜만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뽀뽀나 한번 하자.” 민혁이 큰 소리로 웃으며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녀석의 팔을 끌어당기자, 카페 안에 앉은 사람들의 눈길이 이쪽으로 쏠렸다. “으악∼!!! 절루 가!!! 변태야!!!!” “이리 와. 내가 너도 얼마나 좋아하는데. 비록 머리도 나쁘고, 성격도 별루고, 생긴 것도…… 영 아니지만. 뭐, 너는 너 나름대로 맛이 있어서.” “흐익!” “하하핫.” 재밌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민혁이 흐뭇하게 웃고 있는 동안, 앞에 앉은 친구 녀석은 부끄러움에 겨워 주위를 계속 둘러보다가 아는 놈이라도 발견했는지 또 히익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뜬다. 아직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채, 민혁이 왜 그러냐고 묻자,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창가 쪽을 향한다. 전체가 갈색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밖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는 5개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각각 두세 명씩 모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암만 봐도 이 녀석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세번째 자리인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는 그 자리에 마주 앉은 사내 녀석 두 명의 옆모습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언뜻 봐도 대학생이다.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엉?” “어느 쪽이 네가 아는 쪽인데?” “왼쪽.” 확실히 뭐 아는 것처럼 물으니까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며, 언제부터 있었지? 아까는 못 봤는데, 연신 궁시렁궁시렁댄다. 왼쪽이라… 금테 안경 끼고, 그냥 해사하게 생긴. 키는 좀 큰 편인 것 같지만… 별 특징없는, 잘 자란 범생이…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녀석은… 오호!! 민혁은 득의만만한 휘파람을 불었다. “야, 너 가서 아는 척 좀 해봐라.” “싫어. 별로 친한 녀석도 아니었다구.” “어떻게 아는 사인데?” “고2때 우리 반 반장. 공부하는 기계지 뭐. 서울대 갔을걸? 경제학과였나? 쟤네 아버지가 장미은행 부행장이잖아.” 자신한테 꽂히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 예의 공부하는 기계가 눈을 이쪽으로 돌렸다. 아이큐 한 자리와 눈이 마주치자 곧 알아보고서는 주저없이 손을 들어 아는 체 한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펼쳐놓고 같이 보면서 얘기를 하고 있던 그 맞은편의 놈도 이쪽을 쳐다본다. 앞얼굴을 제대로 보니… 진짜, 말 그대로, 코피 한 사발이다. 저런 대단한 미인이랑 같은 카페 안에 있었는데 통 눈치도 못 챘더란 말이지. 물 건너에서 촌스럽게 살다보니 조민혁 슈퍼 레이다도 녹이 슬 대로 슬었구만. 언제 날 잡아서 대대적으로 수리 좀 해야겠다. 이쪽에서 일부러 아는 척 하러 갈 필요도 없게 됐다. 앞에 앉은 코피 한 사발한테 뭐라뭐라 속닥거리더니 공부하는 기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알아서 먼저 이쪽으로 올 태세다. 코피 한 사발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민혁에게 아주 잠깐 눈길을 되돌렸다가 다시 테이블 위의 뭔가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소 닭보듯 하는 무심한 표정이 언뜻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다지 무례하지도, 불친절하지도, 딱히 적대적이지도 않으면서 슬프게도 그저 무심할 뿐인. 정말 자신이 잘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데. 누구지? 누굴 닮았지? “야, 오랜만이다.” “잘 사냐?” 공부하는 기계치고는 스스럼없는 성격인지 제법 태도가 유쾌하고 자연스럽다. 의외로 어깨도 넓고, 웃는 얼굴도 괜찮고… 이 녀석도 나쁘지는 않군, 하면서 민혁은 대충 소개를 받고 의례적인 악수를 나눈 뒤 선심쓰듯이 웃으며 ‘천천히 얘기 더 나누세요’ 하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꼼짝없이 괜히 시간을 더 끌게 된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두 명은 순간 난처한 기색을 띠었지만, 민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빨리 볼일을 보고 나와보니, 공부 기계는 아직 이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웃고 떠드는 품새가 그리 우중충하진 않아 보인다. 서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친했었는지도 모른다. 민혁은 주저없이 코피 한 사발이 외로이 홀로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예기치 않았던 사냥은 항상 즐거운 법이다. 오후의 햇살 속에 반짝이는 연한 갈색머리. 깨끗하고 우아한 목덜미. 여리여리 하면서도 강단이 있어 보이는 꼿꼿한 허리선. 뒷모습에서조차 타고난 귀티와 도도함이 줄줄 흐른다. ‘나는 귀하신 몸이야. 함부로 굴지 마’라는 오오라를 온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이런 스타일은 또 이런 스타일대로 자신의 취향이다. 민혁의 취향은 매우 다양하다. 다양하다 못해 잡다하기까지 하다. 어떤 사람을 봐도 그 속에서 자기 맘에 드는 점 하나 찾기는 식은 죽 먹기다. 아직까지 자신이 매력 한 가지쯤 발견해낼 수 없었던 사람은 본 일이 없다. 인간은 재밌는 동물이다.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놀라는 것도 많고. 깨닫는 것도 많다. 그 경지에 일단 도달하고 나면 매일매일이 새로운 이벤트가 되고, 매 순간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연극이 시작된다. 뒤에서부터 걸어와 그 테이블을 스쳐 지날듯 하던 민혁이 돌연 앞의 빈 자리에 앉아버리자, 코피 한 사발은 읽고 있던 프린트 물로부터 잠깐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누군가를 닮았다. 굉.장.히. 낯이 익다. 혹시 어디서 만난 적이라도 있나? 언제 어디서 봤지? 이런 미인을 잊어버릴 리는 없겠지만, 만일을 몰라서 민혁은 잠깐 기억 속을 마구 뒤져보았다.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조민혁, 슈퍼 레이다뿐 아니라 슈퍼 브레인까지 썩었군. 레이다 손 보는 날, 대갈통 속도 꼭 청소 좀 해야겠다. “Do I know you?(내가 너 아니?)” 내가 기억이 안 나면 할 수 없지. 상대방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I hope not.(아니길 바래.)” 잠깐 다시 고개를 들어서 쳐다보더니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간단히 대답하고 다시 프린트 물에 정신을 쏟는다. 히야∼ 제법인데. 맘에 들어. 새로운 발견! 민혁은 괜시리 기분이 좋아져 히죽거리며 웃었다. 요새 부쩍 드는 생각이지만, 자신은 아무래도 사냥꾼이라기보다는 발굴가, 또는 수집가, 또는 애호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슬슬 과외하러 갈 시간이 다가오는데, 서클 회지 편집일을 인수인계해주기로 했던 선배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며 잠깐 인사나 하고 온다더니, 거기 눌러붙었는지 올 생각을 안 하고, 어디서 이상한 놈만 나타나서 껄떡거리고 있다. 이제 30분 정도 있으면 일어나야겠다. 만일 그때까지 안 오면 자기가 가져갈 것만 챙겨가지고 먼저 떠야겠다고 생각하며, 지후는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또 한번 절정에 달한 지해가 내벽을 파르르 울리면서, 자신의 내부 깊은 곳을 힘차게 찔러 올리고 있는 정욱을 빠듯하게 흡착해 조이며 더 깊이 빨아들였다. 격렬한 오르가슴의 물결에 뒤덮여 몸부림을 치며 지해가 무의식중에 허리를 흔들어대는 움직임의 장단이 휘모리에서 자진모리로, 자진모리에서 중모리로 바뀜에 따라 조금씩 맛을 달리해가는 내벽의 떨림과 조임. 사정 직전의 그 오묘한 쾌감을 마지막 한 자락까지 음미하던 정욱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이른 듯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절박함과 함께 활화산같은 흥분을 분출해냈다. 온몸을 뒤흔들며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내던지고 지나가는, 폭풍같은 전율이 잦아들어 여운이 완전히 가실 때까지, 둘은 빈틈없이 하나로 맞물린 채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잔잔한 파도 속을 둥실둥실 떠 다녔다. “…무거워….” “시끄러.” 호텔 방 천장의 베이지색 실크 벽지에 촛점없는 시선을 고정한 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단단한 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지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촉촉한 입술을 벌려 숨이 넘어갈 듯한 깊은 입맞춤을 퍼붓고, 정욱은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에 흥건히 맺힌 땀이 또르르 굴러내리며 기분 좋은 현기증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참을성있게 품고 있던 욕망을 쏟아내고난 뒤의 상쾌한 허탈감. 은은하게 젖은 색향을 풍기며 나른히 늘어져 있던 녀석이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아찔한 미소를 입가에 흘린다. 순간, 뱃속에서 뭔가 다시 펄떡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아랫도리의 뻐근함은 욕심같아서는 사실 아직 채 절반도 풀어내지 못한 셈이었다. 그래도 정욱은 일단 녀석의 깊은 곳을 지나칠 정도로 괴롭힌 자신의 것을 빼내려 허리를 뒤로 틀었다. 그러자 꿈틀, 아플 정도로 꼭 조여댄다. “왜? 빼지 마?” 웃으며 고개를 서서히 젓는다. 누굴 잡을 셈이냐, 하고 덧붙인다. 아마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을 거다. 그저 몸이 원하는 것일뿐. 머리에선 이제 그만 쉬자, 해도 몸이 놓지를 못 하는 거다. 언제나 꼭 붙어 있어야 하는 두 개의 자석을 억지로 떨어뜨려 놓으니까. 통제력을 잃어서. 언제 또 하나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거의 4주만이었다. 25일 동안 서로를 굶었다. 커플링을 나눠 꼈던 지해의 생일날 밤. 결국 어찌어찌하다 차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정신없이 요란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이를 두드려 떨면서 깨어보니 벗은 몸에 얇은 군용 담요 한 장을 나눠 덮은 채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정욱이 지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자세 그대로 지해를 쓰러뜨린 것인지 지해가 뒷자석 아랫쪽의 버튼을 눌러 침대로 만들어놓고 먼저 유혹한 것인지 (이 차에는 9인승 고급 밴답게 뒷좌석을 침대로 둔갑시킬 수 있는 전동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었다) 각자의 의견이 매우 달랐기 때문에 정확하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창에 블라인드라도 칠 정신이 있었으니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서야 그러면 간밤에 매니저 형은 대체 어찌 된 것일까에 생각이 미쳤다. 그날 차에 와봤다가 밖으로 새어나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길래 그대로 걸어서 남산 중턱에 위치한 모 호텔(지금 정욱과 지해가 정욱이네 부모님의 외유를 틈타 밀회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는)에서 잠을 잤다고 대답한 원일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호텔 영수증을 들이밀며 방값을 청구했다. 그리고 더 이상 뭐라 하지도 않았고, 지해가 그날 이후 열이 펄펄 끓는 감기에 걸려 열흘 넘게 끙끙 앓느라 일에 지장을 줄 뻔 했는데도 잔소리 한 마디 없었다. 오히려 이따금씩 부탁을 하면, 집에 돌아가는 밤길에 남산으로 데려다줘서, 꽤 감시가 심해진 탓에 멀리 나오기가 힘들게 된 정욱의 얼굴이라도 잠깐 볼 수 있게 해줘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해는 그에 대해 안 좋게 느꼈던 것은 이제 완전히 쓸데없는 오해로 치부해버리고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묵인해 주는 사람이 있다 해도, 더 이상은 차에서 일을 벌일 순 없었다. 그저 잠깐의 틈을 타서 얼굴이나 구경하는 정도로 감지덕지해야 했다. 그것도 뭐 그리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이런 고문이 계속되면 어딘가 한 군데 고장날 것만 같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떨어져 있을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서로를 몰랐던 시간은 이제 기억 속에 없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지쳐 쓰러져 잠드는 순간까지, 아니,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격렬한 꿈속에서조차 생각의 끝은 서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지의 저주일까. 아침에 일어나니 오히려 기진맥진할 정도로, 밤새 격한 꿈에 시달렸던 어느 날 아침, 지해는 문득 세수를 하다가 이런 황당한 생각을 했다. 이 반지는 내꺼면서 또 내꺼가 아니야. 내 것이 아니지만 그래서 동시에 내 것이기도 해. 내 것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에, 또 항상 끊임없이 내 것이어야만 하는 거다. 두 손을 마주 잡은 무서운 모순. 그 모순에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 영원히 놓치지 않기로 맹세했으니까. 지해는 비스듬히 누운 채,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침대 한복판에 앉아있던 정욱이 정액이 가득 담긴 콘돔을 벗겨내서 침대 옆의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저 수많은 씨앗들 중에 정욱이 녀석만큼 근사한 놈도 하나 있을지 모르는데, 때를 잘못 만나서 쓰레기통으로 직행이구나. 아니, 때를 잘못 만난 게 아니라, 씨 뿌릴 밭을 잘못 만난 건가. 밭이고 뭐고…… 이건 완전히 불모지잖아. 그래도… 어림없어. 저 녀석은 이제 평생 내꺼니까 헤어져달라고 애원을 해도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야. 지해는 몸을 조금 틀어 슬쩍 엎드린 자세로 팔을 뻗어 정욱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더 녀석의 가슴 속에 가까이 닿고 싶어서 손바닥을 피부 위로 바싹 겹쳤다. 이 세상에 확실한 일이란 하나도 없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알아. 내쪽에서 먼저 포기하고 먼저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이 가슴 속에서 내가 사라질 일은 없으리라는 것. “너, 뭐하냐?” “…어?” “또 유혹해?” “………….” “여기서 더 하면 너 내일 못 일어나.” 지해가 하는 양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보고 있던 정욱이 살짝 지해의 손을 떼어내고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생수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시고 병을 든 채 침대로 돌아오면서 보니, 지해는 등을 돌리고 다리를 살짝 구부린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침대 양 옆과 위의 은은한 조명 아래 늘씬한 알몸이 눈부시다. 새하얀 목덜미, 곧고 매끄러운 등, 낭창한 허리, 동그랗게 올라붙은 탄력있는 엉덩이, 쭉 빠진 기다란 팔다리. 가슴이 철렁한다. 번개 같은 것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관통하고 간다.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게 분명하긴 한 것 같다. 보통 눈꺼풀에 뭐가 씌인다고 그러지, 아마……? 정말 예뻐. 어쩌면 저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왜 그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녀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잠들었는 줄 알았던 녀석이 고개만 살짝 돌려 뒤를 돌아본다. 불끈. 온몸의 피가 한 곳으로 집중된다. 너 자꾸 이러면 반칙이야. 정욱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이 얄미운 녀석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다짜고짜 꽉 깨물어버렸다. “으아악∼! 이 개새끼!!!! 너 죽어!!!!!!” 아프다고 인상을 구기며 길길이 날뛰는 꼴을 보고나니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아까의 그 요염한 그림은 지나치게 위험해서…… 지나치게… “이 나쁜 섹히! 너 주사는 맞았어?” “주사? 무슨 주사?” “광견병 주사지 뭐냐!! 이 광견아∼!!!!!!!!!” 푸하하하하, 정욱은 큰 소리로 웃고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팔베개를 해주겠다는 포즈로 한쪽 팔을 베개 위로 쭉 뻗는데, 비스듬히 엉거주춤 앉아 있는 이 녀석은 ‘왜 이 정도로 끝내고 말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는다. 왼손의 손목을 잡아 조금 끌어당겼더니 왠일로 저항 없이 스르르 딸려온다. 여전히 뚫어져라 쳐다보는 얼굴. 무슨 똘빡을 그리 열심히도 굴리는 거냐, 띨빵아. 정욱은 잡고 있는 녀석의 손등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턱 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이 선뜻하다. 마음 속 깊이 숨긴 불안을 위로하는 작은 담보물. 결국 또 이 녀석한테는 한 마디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만 가슴에 한가득이다.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다 잊고 싶다. 부드러운 피부에 휘감겨 뜨거운 네 안으로 깊이 헤엄쳐 들어가 벗어나고 싶어. 이리 와. “여기.” “……!” “…아직도 아쉬운가봐.” 아직도 불끈 힘을 받은 채로 단단하게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 정욱의 중심을 검지 손가락으로 살살 건드리며 지해가 말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어.” “………….” “터지기 일보 직전.” 아주 평범한 말투로 나직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가 지독히 음탕하게 느껴져서 더 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어진 정욱은 그 다음 액션을 취하려 몸을 일으켰다. “가만 있어봐.” 지해는 자신을 끌어당겨 안으려는 정욱의 가슴팍을 가만히 밀어 저지한 후, 등뒤로 베개 둘을 겹쳐 편안히 기대어 앉게 하고, 다리 께에 비스듬히 엎드렸다. “내가 해줄게.” 지해는 정욱의 그것을 오른손으로 둥그렇게 감아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음낭을 가볍게 감싸며 살며시 흔들어주었다. 순간 거칠게 내뿜는 녀석의 숨소리에 덩달아 자신도 머리가 터지도록 흥분되는 것을 느끼며, 지해는 페니스의 정점에 입김을 불어넣듯 부드럽게 자극하고 나서, 입 안에 살짝 넣었다가 뺀 뒤, 다시 귀두 언저리를 혀 끝으로 간질였다. 그리고는 다시 뿌리 부분에 입술을 대고 좌우로 머리를 살짝 돌리면서 비스듬히 지그재그로 핥아 올리고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허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뒤로 높이 빼어 엎드린, 날렵한 고양이 같은 자세로, 흘깃 색기 넘치는 눈웃음을 치며 자신의 것을 약올리듯 낼름거리는 지해를 보자, 당장이라도 폭발한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정욱의 온몸에 감돌았다. 다가오는 아득한 절정에 몸을 맡기려 정욱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가…… 갑자기 움직임이 요란해진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떴다. 지해가 어느새 일어나 바짝 다가와 있었다. 녀석의 가슴팍이 얼굴에 거의 닿을 듯 하다. 지해는 정욱의 허벅지를 자기 다리 사이에 끼우고 무릎을 굽혀 걸터 앉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페니스를 오른손으로 쥐고 그 끝을 애널에 조준하며 왼손으로는 정욱의 어깨를 잡고 체중을 의지해 온다. “잠깐만. 콘돔―” “싫어. 그냥 할래.” 이렇게 덤벼들 때의 녀석은 완전 막무가내라는 것 익히 잘 안다. 정욱은 지가 나중에 고생을 하건말건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 대신 녀석의 허리를 한 손으로 버텨주며 눈 앞에서 들썩들썩하는 가슴에 입술을 가져갔다. 이미 실컷 희롱당해 발갛게 부어올라 있던 유두를 혀 끝으로 축축하게 간질이며 강하게 빨아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벌써 흥분에 겨워 부들부들 경련하는 녀석의 것을 훑었다. 지해가 순간 힘이 빠져 균형을 잃고 ‘으흑’하는 신음과 함께 정욱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자, 정욱은 녀석의 허리를 틀어잡고 끝부분만 살짝 삽입되어 있던 애널로 단숨에 진입했다. 숨가쁜 고통과 쾌감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울렸다. 둘은 서로에 대한 갈증으로 온몸을 부딪쳐 더욱 결합을 깊게 굳히며, 거리낌없이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는 둘만의 세상 속으로 다시 빠져들어갔다. BGM : Oh My - Arnold ☜ CLICK!!! “…현규씨!” “쉿!” 현규는 누군가 등을 두드리며 소리죽여 부르는 소리에 얼른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모두 감독의 큐 사인만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이 삼엄한 순간에 감히 소리를 내는 간 큰 아줌마가 누군지 쳐다보았다. 제일일보 문화부 대중문화팀 기자다. 몇 년간 계속 줄기차게 얼굴을 보다 보니 나름대로 누나처럼 말 놓고 편히 지내는 사람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촬영장에서 인터뷰하기로 했었지. 오늘 찍을 분량 중에 자신이 나오는 장면은 딱 한 컷, 그것도 맨나중에 찍을 예정인데다가 아주 잠깐, 대사조차도 없어서 부담이 없길래 순순히 응낙했었다. 깜빡 잊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코믹한 표정을 짓는 여기자에게 일단 씩 웃어주고 나서 옆에 끌어다 놓고 친한 척 어깨에 팔을 얹어 몇번 툭툭 쳐주었다. 동시녹음이라 잡소리 하나라도 들어갈세라 조심하고 있는데다가, 지해가 계속 NG를 내서 지금 같은 씬의 리테이크만 12번째인지라 스탭들의 신경이 모두 날카롭게 곤두서있는 판국이다. “액션!” “123에 1의 12!” 감독의 뒤를 이어 연출부 막내가 우렁찬 구령과 함께 슬레이트를 ‘탁’ 찍자, 스톱 모션을 취하고 있던 껄렁한 교복 차림의 불량학생 1,2,3,4가 한가운데에 등을 둥그렇게 만 채 쭈그리고 있는 지해의 등짝을 거침없이 밟아대기 시작했다. 공덕 오거리에서 한겨레신문사 사옥을 거쳐 서부역 쪽으로 넘어가는 비탈진 큰길 사이사이, 꼬불탕꼬불탕한 후미진 골목길들 중 하나에서, 초저녁부터 쓸데없는 사고를 친 쫄따구 한 놈에 대해 처벌이 가해지는 중이다. 비리비리해서 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게 맞으면서도 할 말 다 하다가 오히려 매를 벌어 결국 치명적인 상황까지 가는 걸 연기해야 하는 이런 씬을 지해같은 신삥이 제대로 소화해낼 리가 만무하다. “컷! 안돼, 안돼!! 지해야, 이것 봐봐!!!! 이렇게! 이렇게 하라구!!!” 다혈질인 감독이 소리를 냅다 지르면서 직접 연기 시범을 보인다. NG가 거듭되는 사이에 벌써 여러 번 보여준 것이지만,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제법 길어진다. 지해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자세로 감독의 열정적인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 지친 얼굴에 잔뜩 주눅든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고∼∼∼, 우리는 저∼쪽 가서 인터뷰나 합시다.” 현규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한숨을 쉬더니, 옆에 서 있던 여기자와 사진기자를 이끌고 구비구비 골목을 벗어나 큰길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밴으로 안내하며, 따까리 담당인 제작부 막내에게 커피 세 잔을 부탁한다. “제일일보 기자님이셔. 잘 보여야 기사 좋게 써주시니까 알아서 맛있게 타와.” “내가 언제?”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지.” “현규씨 나오는 영화는 항상 구구절절이 좋은 말만―” “설마.” 둘은 썰렁한 우스개소리를 주고 받으며, 여기저기 털썩 주저앉아 궁시렁대고 있는 스탭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나름대로는 소근거린다고 하고들 있는 것 같은데 다 들린다. ―오늘 촬영분량 다 못 채우겠는데. ―감독님 좀 지나치신 거 아냐? 짜서 나올 데서 짜내야지. ―아까 일곱번째 테이크가 괜찮던데. 모니터 볼 때는 OK 놓을 것처럼 그러더니. 맨날 꼭 저러더라. 나중에 어차피 그걸로 쓸 거면서. ―이렇게 일정 오바해서 언제 다 찍으려구. 원래 씬의 시간 설정이 어둑어둑한 저녁 때였지만, 조명을 조정하고 카메라에 필터를 끼워서 오후부터 찍고 있었는데, 워낙 NG가 거듭되어 시간을 끌다 보니 얼추 시간대가 비슷하게 맞게 되었다. 세팅을 다시 해야 한다. 감독은 스탭들에게 잠깐만 쉬었다 가자고 하고, 지해를 옆으로 따로 불러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욱 더 열정적인 제스추어로 연기 지도에 임한다. “이쁜 꼬마가 고생하네.” “누구? 지해?” “응.” “이제 시작인데, 저 정도야 뭐. 다들 거치는 거잖아. 신인 때는.” “그래도.” 사진 기자가 조감독의 양해를 얻어 촬영장 풍경부터 찍겠다고 사라지고, 둘은 밴 안에 앉아 문을 열어놓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현규는 아무래도 오늘 자신이 나올 씬은 못 찍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을 또 쉬었다. 지해가 흠씬 두들겨맞다가 엉겁결에 담벼락에 머리를 박아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을 때 비몽사몽간에 형이 구해주러 왔다고 착각하는 장면이다. 물론 가족을 다 버리고 가출한 형이 실제로는 거기 와 있을 리가 없고, 동생은 완전히 의식을 잃는다. 오늘 이 씬이 지해로서는 이 영화의 마지막 촬영이었다. “꼬마 아니야. 저 녀석. 나이는 어려도 다 컸어.” “알어. 할 짓 다 하고 다니는 거.” “……?” “데뷔하기 훨씬 전부터 봤다구.” “……?” “작년에 윤희원이 그룹 사진전 했을 때… 첫날에… 현규씨 거기 왔었던가?” “아…… 일이 바빠서… 나중에 늦게 갔잖아. 술자리에만.” “아, 맞다. 그랬지.” 현규는 뭔가 말을 할듯 안 할듯 의미심장하게 머뭇거리는 기자를 쳐다보았다. 괜히 이상하게 켕기는 기분이다. “쟤 최초로 발견한 게 희원이잖아. 그거 몰라요? 희원이한테 못 들었어?” “글쎄, 몰라… 난 처음 듣는데.” “훔… 그러면 어디서 발견했는지도 모르겠구나.” 대충 얘기는 들어 알고 있지만, 절대로 기자 앞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간지 기자니까 스포츠 찌라시 녀석들처럼 싸구려로 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기자는 기자다. “임기자님! 우리 일이나 신경씁시다! 일! 인터뷰 안 할 거유? 저 바빠요!!” 무슨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까 싶어 말을 돌리는데도 끄덕도 않는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현규씨가 쟤 많이 챙긴다는 소리 들었는데… 신경 좀 쓰고 살라고 따끔하게 타일러줘.” “……?” “회사에서 투자 많이 하고 있는 애라며? 잘못되면 큰일이잖아. 현규씨도 거기 주주니까.” “……?!” “안 좋은 소문이 돌아.” “무슨?” “나만 아는 건줄 알았는데, 역시 인간들이 눈치가 빨라서 제법 구체적으로―” “임선배!” 마침 사진기자가 돌아오면서 임기자를 밖으로 불러내 말이 뚝 끊겼다. 노트북에 보도용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를 연결해서, 찍어온 사진을 살펴보고 골라내고는 또 어떤 사진을 찍을지 의논한다. 현규가 캐릭터에 몰입해 있는 연기파 배우처럼 보이도록 폼을 잡고서 사진을 잔뜩 찍고 본격적인 인터뷰 모드로 돌입해 한참 의례적인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 그리고 인터뷰가 다 끝난 후에도, 더 이상 아까 이야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나 나오는 씬까지는 못 찍을 것 같고, 이따가 몇 명 꼬셔서 술이나 한 잔 하러갈까 하는데 두 분 다 같이 갑시다. 여기 근처에 진짜 좋은 데 있어.” “이 근처에 좋은 데 있어봤자 대포집이지.” “아니야. 진짜 좋아. 분위기 죽여.” “현규씨가 좋다고 그러면 그거 엄청 허름하고 이상한 데 아니야?” “헉, 누가 그래?” “뻔하지. 그 특이한 취향 어디 가나.” “아니야. 내가 전에 한참 여의도에서 눈칫밥 먹을 때 뚫은 덴데 한강이 한눈에 보이고 허름하다기보다는 진정한 낭만이 넘치는 곳이야. 싫으면 강남으로 가던지.” 현규의 과장된 말투가 웃겼던지 임기자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말하는구나? 강북 강변도로 지나가다 보면 있는 쬐끄만 데? 마포대교 위에서도 보이고.” “알어? 거기 회원제인데?” “전에 같이 갔었잖아. 기억을 못 하시는구만요.” 현규는 그랬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화려한 톱스타면서도 의외로 소박하고 진정한 멋을 아는 놈 정도로 어필하고 싶을 때 자주 이용하는 곳이긴 하지만. 이 여자를 데려갔던 기억은 없다. “그래. 거기 괜찮았어. 나도 가고 싶긴 해.” 임기자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선배, 마감 안 해요? 지금 때가 그럴 때가 아닐 텐데.”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젊은 사진기자가 웃으며 끼어든다. “맞어. 회사로 기어들어가서 마감해야지. 맨날 농땡이치고 다닌다고 어저께도 한 소리 들었어.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야 그게 다!!” “………….” “마감 시간을 좀먹는 악의 축!” 자신들에게는 그다지 관심도 없던 스탭과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서, 임기자는 현규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작게 한 마디 흘리고 갔다. “아까 얘기는 나중에 조용할 때 따로 하자구요.”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온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어렸을 때는 여기서 자주 놀았었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코끝이 싸아해지는 파이프 담배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것이 참 좋았었다. 겨울에도 항상 창문이 약간이라도 열려 있어서 집안의 어느 곳보다 서늘한 느낌도 좋았었다. 사방의 벽에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차있는 각양각색의 장서들을 보면 마음이 괜시리 뿌듯했다. 책의 제목을 더듬더듬 읽어내리며 한자와 알파벳과 친해졌다. 유난히 빨리 쉽게 외워진 단어는 나중에 보면 그때 제목 속에 있던 단어들이었다. 책상 바로 오른쪽 옆 책꽂이의 세번째 칸에 눕혀져 있는 책들은 아버지가 현재진행형으로 읽고 있는 책들이었다. 두툼한 체리원목으로 맞춘 책상 앞의 커다란 검은색 물소가죽 의자도 참 좋아했었다. 아버지가 없을 때에도 그 의자는 묘한 존재감을 풍겼다. 어슴푸레한 저녁때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켜놓고서 그 의자에 등을 파묻고 앉아 있노라면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어른 냄새를 풍기는 이 방이 좋았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언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왜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닌 걸까. 정욱은 서재를 나서며 생각했다. 대체 저 안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아버지와 마라톤 회담을 했던 건지, 거실 한켠의 괘종시계를 쳐다보다가 소파에 앉아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유학 말씀 또 하시지?” 세 시간, 거의 세 시간이었구나. “나랑 잠깐만 좀 얘기하자.” 피곤해. “아버지 잠자리 좀 봐드리고, 네 방에 올라가마.” 전화위복이라더니, 어머니와 아버지는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는 다시 제대로된 부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바람에 밖으로만 나돌던 정연이까지 나름대로 착실한 딸이 되어간다. 모처럼 갖게 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그것이 제아무리 불면 날아가버릴 모래성 같은 것이든간에) 깨지는 것을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 이제 이 집안에서 문제거리는 자신 하나뿐인 셈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누구 하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 정욱은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방에 올라갔다. “저기 좀 봐봐.” 한강 쪽으로 노트 하나 만한 크기로 조그맣게 나 있는 창을 가리키며 현규가 말했다. 다리 길이가 안 맞아 덜컹거리는,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 손에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지해는 시키는 대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한강의 야경 너머로 여의도의 불빛이 찬란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 하긴 옛날이래봤자 기껏해야 3년 전이지만…… 막 제대하고 나니까 끈 다 떨어져 있고…… 드라마 단역이라도 따내보려고 기를 쓰고 여의도 바닥빗자루질 하고 다닐 때.” 지해는 이 사람이 그런 적도 있었나, 싶어 현규의 얼굴을 쓱 한번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너무너무 일이 안 풀렸던 적이 있었거든. 주말드라마를 하나 하게 됐는데, 가면 갈수록 처음하고 얘기가 틀려지는 거야. 역할이 점점 작아져. 대사도 줄어들고. 어떤 편에는 코빼기 한 번 안 비치는 적도 있고.” “………….” “하도 기가 막혀서 대본 연습 끝나고 초저녁부터 여기 와서 술을 마시는데…… 그때도 이 자리에 앉았었거든…… 요 코딱지만한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야경이 너무너무 아름답더라.” “………….” “그리구 여의도가 참 작구나 싶더라구. 새삼스럽게. 한 눈에 다 들어오잖냐. 요 작은 창으로 봐도.” “………….” “저렇게 작은 데서 지지고 볶고, 부대끼고, 죽일 듯이 미워하기도 하고, 원망도 하고…. 얼마나 같잖은 짓이냐.” “………….” “근데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 오히려 일이 술술 잘 풀려. 사람 일이란 건 정말 모르는 거야.” 말뜻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지해가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현규가 지해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어주었다. “여기 정말 좋지 않냐?” 지해는 가게 안을 한번 휘이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좁고 허름한 맥주바 같은 분위기. 한쪽 벽면은 양철판으로 되어 있어 이 가게 회원이라는 단골 손님들의 폴라로이드 사진들과 각종 낙서들이 자석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또 한쪽 구석의 무대랍시고 한턱 높게 고여 놓은 곳에는 이 가게 안에서 유일한 고급품인 (낡은) 볼드윈 피아노와 드럼과, 기타, 마이크 대가 놓여 있었다. 인기 스타가 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는 쿨하디 쿨한 손님들(물론 지금 이 좁은 가게를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은 영화 스탭들이었지만)은 아무나 내키는 대로 올라가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피아노 좀 쳐주라. 네가 치는 거 또 듣고 싶어.” 겉으로 보기보다 상태가 훨씬 좋은 피아노에 흥분해 연이어 몇 곡이나 치고 쏟아지는 박수갈채 속에 지해가 양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갑작스레 현규가 충동적으로 대뜸 꼭 끌어안으면서 ‘엉아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이제 촬영장에서 너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너무 아프다’ 운운 하며 중얼댄다. 그 목소리에 이상하게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해는 이 사람도 자신도 많이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들 피곤했는지, 내일의 촬영을 위해선지, 생각보다 술판이 일찍 끝났다. “저…… 집 안 가요…… 갈 데가 있어요.” 아까부터 보고 싶은 얼굴이 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계속 발길질을 당하고, 몇 시간 동안 감독에게 줄기차게 큰 소리로 야단맞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취기까지 잔뜩 돌고 나니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당장 못 보면 죽을 것처럼. “가긴 어딜 가.” 오늘따라 원일이 집안에 일이 있다며 촬영시간까지만 맞춰주고 일찍 가버렸기 때문에 차도 없다. 차가 없으면 택시를 타고, 택시를 못 타면 걸어서라도 간다. “가야 돼요.” “어딜?” “정욱이한테 가야 돼요.” 이제 밤 12시가 조금 넘었다. 택시 잡기 제일 힘든 시간이다. 더구나 이 가게가 있는 위치는 빈 택시가 지나가주는 길목이 아니다. 데려다 줄게 일단 타 ― 아니, 됐어요 ― 말 들어 ― 택시 타면 돼요 ― 택시 지금 못 잡는다니까 ― 모범 부르죠 뭐 ― 모범도 지금은 안 와 ―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 내 차가 빨리 빠져줘야 다른 차가 나간단 말야, 어서! 손목을 꽉 잡고 안 놔주는데다가 결국 뒤에서 계속 빵빵거리는 소리에 당황해 일단 타버리고 말았다. 어디라고 했지? 한남동? 하고 묻는 말에 또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만다.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될 대로 되라다, 젠장. 그래도 집에 그냥 갈 마음은 없다. 치사하지만 남의 차를 얻어 타고라도 가서 그 놈의 얼굴은 꼭 봐야 쓰겄다. 대충 그놈 집으로 올라가는 길 근처에 내려 달라 하고 잠깐 얼굴만 본 다음에 이태원쪽으로 내려와서 택시 타고 집에 가자, 마음 먹으니 조금 편해진다. 전화를 해야 하지만. 지금 길이 뻥뻥 잘 뚫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괜히 밖에 나와 기다릴까봐 못 한다. 자기가 기다리고 있을 동안 나오는 걸 보는 게 낫지, 길가에 서서 기다리는 거 봤을 때 괜히 불쌍해 보여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게다가…… 전화를 안 받을까봐 두려워서. 전화를 5분 간격으로 세 번 걸어서 안 받으면 나올 사정이 안 된다는 뜻이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기로 되어 있다. 얼굴 보러 간다고 생각하고 가는 그 동안만도 너무 좋기 때문에, 작은 기쁨이나마 미리 포기해야 할 상황이 두려운 것이다. 항상 그 집 근처에 다 와서 전화하고 나올 때까지 그 시간을 즐기며 기다린다. 통화가 안 될 때는 멀리서 정욱이 방만 쳐다보다가 그 집 앞으로 차를 지나 돌아온다. 꼭 성 안에 갇힌 공주님 만나러 가는 것 같다. 웃긴다, 정말. 지해는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삭신이 쑤신다.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쏟아지는 가짜 주먹질, 발길질에 실수로 몇 대 맞기도 했다. 등짝도 아프고, 엊그제 밤에 무리한 허리가 아직도 아프다. 나중에 안에다가 그냥 막 내보내서 어제 하루종일 설사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볼 수만 있으면 전혀 상관없다. “아까 다쳤다고 그러더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허리 아프다고 그랬잖아.” “어,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내가 다 들었어, 뭘.” 그랬던가 싶어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다가 밖에 시선이 닿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 슬슬 이쯤에서 전화를 걸어보면 될 것 같다. 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단축번호 0번을 누르고 신호가 가길 기다렸다. 컬러링만 줄기차게 나오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린다. 혹시나 해서 한번 더, 또 한번 더. “전화를 안 받아?” “아니요. 좀 있다 다시 해보면 될 거에요.” 어휴, 너무 많이 왔다. 이쯤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계속 전화하다 보면 언젠가는 받겠지. 그 집 마당이 그렇게 우라지게 넓지만 않아도 창밖으로 얼굴만 내밀라고 해도 보일 텐데. “저, 조∼기서 내려주시고 쭉 가세요. 더 가면 좌회전하시게 돼요.” “왜?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냥 제가 적당한 데까지 가서 전화하면 돼요.” “약속 장소 안 정했어?” “뭐…… 그냥… 요 앞에서.” “가는 데까지 가.” “아니에요.” “그럼 전화 받을 때까지.” 이상하다. 오늘 이 사람 좀 이상하다. 유달리 집요하다. 몇 번 거절하면 더 이상 권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상하다.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서 버렸다. 아까 내려줬으면 좀 좋냐 말이다. 미안하고 거북하게스리. 전화를 계속 안 받는다. 이젠 뻔히 보는 앞에서 전화 거는 것도 슬슬 눈치가 보인다. 혹시 모르니까 한번만 더. 역시 안 받는다. 안 받으려나? 혹시 오늘 못 보는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별 생각이 다 든다. 눈치 보지 말고 일찍 나오는 건데 하는 생각부터 촬영 끝나자마자 그냥 내빼버릴걸 하는 생각까지. 물론 현실성 제로지만. 어쨌든 봐야 돼. 보고 싶을 땐 봐야 된다. 남의 차까지 얻어타고 땡깡 부려 겨우 왔는데 억울해서라도 안 된다.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밤을 새더라도 얼굴은 보고 가자. 좌회전을 하는 순간, 잘못이다 싶었다. 이 한밤중에 길이 막힌다. 역시 이 동네는 이태원이라서 그런가. 아까 내려달라는 데서 세워줬으면 그냥 뛰어갔을걸. “저, 아무래도 이쯤에서 그만 내려야겠어요. 차 안이라 전화가 잘 안 터지는 것 같아요.” 거짓말. 현명하신 형님. 물론 눈치 채셨겠지만 좀 봐주십쇼. 나 급해요. 문을 열려고 문의 손잡이를 잡는데, 현규가 별안간 뒤에서 허리를 꽉 끌어당겨 안으며 소리를 지른다. 앞자리 운전석에 앉은 현규의 매니저도 똑같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오토바이 오는데, 그냥 내리면 어떡해!!!” 정말 놀랄만큼 화를 버럭 낸다. 오토바이라니? 오토바이 오는 거 전혀 못 봤다. 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라서 안 보인 건가. 정말 술기운이 다 안 풀리긴 안 풀렸나 보다. 문득,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이 거북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허리를 틀어 팔을 풀어내려고 했다. 오히려 팔에 힘이 더 세게 가해진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에 좀더 큰 동작으로 몸을 틀려고 해보았다. 더 꽉 죄어온다. 왜 이러나 싶어 어쩔줄 모르고 머뭇거리는데, 이제는 꽉 죄어오다 못해 나머지 오른쪽 팔까지 동원해서는 숨이 막혀 ‘윽!’ 하는 소리가 절로 터질 정도로 품에 꼭 끌어안는다. 자신의 등과 현규의 가슴팍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갈비뼈를 바스러뜨릴 것처럼 힘껏 옥죈 팔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끄떡하지 않았다. 뒷목덜미에 헐떡이는 거친 숨결이 닿아온다. “…지해야……지해야…!” 넋이라도 나간 듯 주문처럼 이름을 불러대던 뜨겁고 축축한 입술이 별안간 목덜미를 강하게 빨아당기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도망가야 한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원조라도 구하듯 앞의 운전석을 힐끗 보았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의 기이한 몸싸움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장에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배와 가슴을 결박하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티셔츠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격렬하게 반항하는 맨살을 쓰다듬으며 점점 위를 향해 올라온다. 피부를 매만지며 유두를 더듬어 찾는 데 열중해 결박이 좀 느슨해진 틈을 타서 지해는 혼신의 힘을 다해 현규를 밀쳐내고는 튕겨나가듯이 차문을 열었다. 느릿느릿하게나마 앞으로 움직이고 있던 차에서 뛰어내린 탓에 중심을 잃고 보도 블럭 위에 나동그라졌다. 등 뒤로 쌔앵∼ 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스쳐지나간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 했다. 아니, 조금만 늦었으면 빠져나오지 못할 뻔 했다. 그 생각이 머리를 지나간 순간, 지해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서 냅따 뛰기 시작했다.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스쳐가는 행인들이 무슨 일인가 쳐다보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일단 정욱의 집 가까이까지 뛰고 보는 거다. 한참 달리다보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괴로워져 지해는 헉헉거리며 가로수를 붙잡고 허리를 굽힌 채 숨을 골랐다. 문득 떠올랐다. 핸드폰이 아직 그 차 안에 있다. 제기랄. 공중전화라도 걸어야겠다 싶어, 바지 뒷주머니를 만져보니 지갑이 없다. 이건 또 언제 어디서 흘린 걸까. 이래서야 연락할 방법이 없다. 집에 갈 차비가 없는 걸 더 걱정해야 한다는 건 머리로 알겠는데, 지금 떠오르는 건 정욱이를 불러낼 수 없다는,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절망감뿐이었다. 담을 넘으면 경보장치가 신나게 울려댈 것이고, 창문에 돌멩이를 던져넣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집도 아니다. 더구나 사설 경비원들이 아직도 그 집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면 어느 이상은 접근할 수도 없다. 정말 동틀 때까지 골목 어귀를 지키고 앉아서 기다려야 되나,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 동안, 조금 전부터 꽤나 거슬린다 싶었던 클랙션 소리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도드라져 귓전을 때렸다. “김지해!! 지해야!!! 여기서 뭐해!!” 교통 체증에 묶여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반갑게 웃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은 민혁이었다. BGM : Zero Hour-("Noir" O.S.T)☜ CLICK!! 새벽 2시 반. 민혁은 모니터 속의 얼굴을 확인하고, 별채 현관으로 곧장 이어지는 뒷문의 오픈 버튼을 눌렀다. “어서 와라.” “어딨어?” 비어져나오는 하품을 삼키며 현관문을 열어주자, 다짜고짜 다급하게 묻는다. 몰래 빠져나오기가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사람을 잠도 못 자게 1시간 이상이나 기다리게 해놓고서 대뜸 묻는다는 것이…. “손님방.” “어느 쪽?” “2층. 오른쪽 맨끝.”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뛰어 올라가려다가 갑자기 멈칫하며 뒤를 돌아본다. 그러면 그렇지. 한밤중에 남의 집에서 시끄럽게 굴다니,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절대로 정욱이 녀석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걱정 마. 별채에 아무도 없으니까. 작은 형 부부, 형수네 친정 쪽에 뭐 있어서 갔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도 안 돌아보고 2층으로 쏜살같이 올라가는 뒤통수에 대고 민혁은 섭섭한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그래도 너무 큰 소리는 내지 마. 우리집 노인네들 잠귀 엄청 밝단 말이다. 특히 부부싸움은 직빵이야. 작은 형이랑 형수 때문에….”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침대 위에 엎어져서 베개를 부둥켜안고 잠들어 있는 지해를 보고서 정욱은 문이 잠겨져 있지 않아 잠든 녀석을 괜히 깨우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 하다가,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10년을 알고 지내도 속을 읽을 수 없는 저 늑대랑 한지붕 아래 둘만 있으면서 문단속도 안 하고 이렇게 무방비로 뻗어서 잔다. 자신이 올지 못 올지 어떻게 알고. 이래서 문제다, 이 녀석은. 원래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저한테 조금만 잘 해줘도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며 고마워하고. 약간이라도 의심스럽다는 눈치를 보이면 화부터 낸다. 넌 정말 걱정스러운 놈이야. 그래서 두고 갈 수가 없어. 정욱은 지해가 달랑 샤워로브 차림으로 엎어져서 자고 있는 옆에 비스듬히 털썩 앉았다. 침대가 한번 출렁거리는데도 끄떡없이 잘도 잔다.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 끝이 아직도 젖어있다. 독한 감기 걸렸다 겨우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이불도 다 차내고. 느슨하게 묶인 샤워로브는 잠결에 움직여져 등짝을 ⅓ 가량 훤히 드러내보이면서 거의 어깨에 걸쳐 있는 수준이다. 이러다 또 감기 걸리지 싶어서, 드러난 등이라도 제대로 추스려 주려고, 일단 젖어서 뭉쳐 있는 머리칼부터 한 손에 그러모으던 정욱은 뒷목덜미 한귀퉁이에서 수상한 벌그스름한 흔적 두어 개를 발견했다. 피부 표면을 힘차게 쭉 빨아들였을 때에나 생기는, 빨갛게 피가 몰린 자국. 느낌이 좋지 않다. 혹시나 해서 옷자락을 내려 등판을 확인해 봤다. 그러고 보니, 등짝 한복판에 검푸른 멍자국들이 몰려 있다. 어디서 몇대 맞거나, 심하게 부딪쳤거나…. 아무튼, 키스마크라고밖에 볼 수 없는 목덜미의 것과는 종류가 완전히 다르다. 곤히 곯아떨어져 있는 놈을 흔들어 깨워서 따져 묻고픈 충동을 누르며, 정욱은 재빨리 옷을 목까지 끌어올려주고 이불을 휙 끌어다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 아주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제법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서야 ‘끄응’하는 잠에 취한 소리와 함께 지해의 눈꺼풀이 스르르 조금 열렸다. “금방 도로 튀어나올줄 알았지.” 민혁은 1층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세상일이 다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한 그 여유작작한 태도에 정욱은 속이 또 뒤틀리는 것을 느끼면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잘난 척 하지마.” “나는 해도 돼.” ……그래, 조민혁. 너 잘났다. 대꾸하기도 싫어진다. “오밤중에 어디서 어떻게 저 녀석을 주웠는지 묻지도 않고. 너답지 않게.” 할 말이 없다. “너는 저 녀석 일이라면ㅡ” “그.만.해.” 이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약점’을 남의 입을 통해 확인하기는 싫다. 그래, 잘 안다. 머리는 마비되고, 감정이 먼저 폭주한다.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세상 모든 일에 다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거 딱 한 가지에만 그러는 거잖아. 좀 봐줘. 그냥 내버려둬. 이것만은 그냥 이러는 게 훨씬 더 재밌으니까.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마냥 붕뜬 채로 두근거리는… 이 상태가 좋아. 다들 내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아줘. “그러면 안돼. 좋을 게 없다구.” “그딴 얘기 그만하자고 했어.” 날이 시퍼렇게 선 칼로 내리긋는 듯한 단호한 표정. 민혁은 걱정스런 생각을 픽, 하는 웃음으로 날려버리고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애가 새파랗게 질려가지구 땀으로 범벅이 돼서……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헥헥거리는데. 핸드폰이랑 지갑도 다 잃어버렸다고 그러고. 자초지종은 안 물어봤어.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던가.” “됐어.” “………….” “알고 싶.지.도 않아.” “………….” “챙겨주고 나한테 연락해준 거 고마워. 거기까지만 해.” 10년을 알아오면서 이런 상황은 자주 있던 거라 남이 보기엔 살벌할 것 같은 분위기도 둘에겐 익숙하기만 했다. “뭣땜에 오늘밤엔 그렇게 연락이 안 됐던 거냐?” 정욱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는 동안, 민혁은 화제를 돌렸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살아도 이번엔 얼굴 보기도, 연락하기도 힘들다. 오늘은 더더군다나. “아~! 그거. 어머니랑 또 얘기가 길어져서.” “무슨?” “유학 얘기.” “어디로?” “보스턴 근교의 기숙학교로 가라고 하시는데… 설득중이야.” “누가 누구를?” “서로.” “가라, 못 가겠다?” 정욱은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 있어?” “무슨 자신?” “설득할 자신.” “할 때까지 해봐야지. 가기 싫은데 억지로 끌려갈 순 없잖아.” 집으로 쫓겨들어오고 금족령까지 내린 걸 보면 사태가 꽤나 심각한 모양인데 남의 얘기 하듯이 태연하게 받아치는 거만한 모습에 민혁은 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아무리 저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 해도 결국은 아직 어린애면서. 지가 무슨 힘이 있다고. “무조건 죽어도 안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 가고 버틸 거냐?” “………….”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욱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민혁을 그저 노려보다가 약간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나, 그렇게는 말 안 했어. 최대한 노력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겠다고 했지.” 은근히 고지식하고 요령없는 모범답안. 저래가지고 뭘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하고 있다는 건지. 하기사 땡깡도 부리던 놈이 부리는 거고, 요령도 피우던 놈이 잘 피우는 건데, 이 녀석은 그쪽하고는 원래 거리가 머니까. 정공법으로만 올곧게 밀어붙여도 전부 제 뜻대로 되어 왔던 운좋은 놈 아닌가. 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넌 요즘 뭐하고 노냐?” 무슨 뜻이냐는 듯이 눈썹만 까딱 올려 묻는다. “학교 가는 시간 말고 집에 갇혀 있을 때 뭐하냐구.” 오토바이 몰고 나가는 것도 못하고, 검도든 뭐든 운동도 집에서만 해야 하고, 집안 행사 외에는 바깥 나들이 엄금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연애질도 못 하는데. “모형 범선 만들어.” “………….” “요새 만드는 건 거의 이 소파만 할 거야 아마.” 정욱은 자기가 앉아있는 1인용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그 정도면 꽤나 큰 모형이다. 트라팔가 해전에 쓰였던 유명한 군함이라나 뭐라나, 설명이 한참 길다. 그거 만드느라 먼지 엄청 먹었어, 하면서, 나무 깎고, 사포질하고, 접착제 붙이느라 손에 입은 영광의 상처들을 보여준다. 상처보다도 손가락의 반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주 잠깐, 금속성의 반사광이 번뜩 눈을 찔렀다. 설마 부모님 앞에서도 저걸 희번덕거리진 않았겠지. “선체는 도장까지 다 끝냈고, 이제 돛대 세우고 돛만 달면 되는데.” “그럼 거의 다 한 거네?” “아니야. 보기는 그렇게 보여도, 그게 또 지금까지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려. 엄청 어려워.” “그럼 빨리 해야지.” 민혁이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 끄면서 뭔가 준엄하게 나무라는 투로 덧붙였다. “돛을 안 달면 바다로 못 나가잖냐. 항구에 영원히 짱박아 놓을 것도 아니고.” “………….” “겉으로만 그럴 듯하고 완성품 같이 보이면 뭘해.” “………….”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눈빛이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린다. 어울리지 않게시리 풀 죽어있는 정욱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혁은 벌떡 일어나서 그 입에 느닷없이 기습 키스를 감행했다. 놀란 것은 순간일 뿐 아무런 반항도 움직임도 없는 목석 같은 놈의 입안을 집요하게 공략하다가 놓아주자, 손등으로 쓱 입술을 닦고 똑바로 쳐다본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침착하게 정돈된 눈빛과 장난기가 다분한 악동같은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리고 곧 둘은 거의 동시에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게 아무 느낌이 없냐?” “…글쎄, 그렇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그랬었지.” “이젠 확실한 임자가 있다 이거냐?” “……그런 건가?” 눈을 껌벅껌벅거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하다는 얼굴이다. “이 징그런 놈!!!” “………….” “소름끼쳐, 넌!!” 풋, 하는 웃음을 머금고 소파에서 일어난다. 어쩐지 기분이 좀 좋아 보인다. 아까보다는 보기가 훨씬 낫군. “집에 가게?” 고개를 가로젓고, 정욱은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자고 갈 거냐고 묻자,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봐서’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오늘 고마웠다는 인사를 다시 제대로 하며 얼른 들어가서 자, 하고 정중하지만 차갑게 덧붙인다. 저럴 때는 정말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야~!!”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살짝 돌려 쳐다본다. “일르지 마. 맞아죽기 싫어. 지해 녀석 손 맵더라.” “걱정 마. 나도 그 새끼 날뛰면 골치 아퍼.” 살그머니 문을 열어보니, 지해는 아까보다는 좀 다듬어진 단정한 포즈로 벽을 바라본 채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저렇게도 잠이 잘 올까. 아까까지만 해도 파김치가 되어 축 늘어져 자는 모습이 좀 측은해 보였는데, 지금은 어디서 뭔짓을 했길래 저리도 피곤에 절어서 잠만 자는 건지 은근히 밉살스럽― “언제 왔어?” ―드디어 깼군. “방금.” 지해는 눈을 비비며 몸을 부시시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디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았다. 감자마자 대충 말리고 자버린 머리가 완전히 까치집이다. 머리는 어차피 일하기 전에 전문가가 만져주는 것이 되어버린 이후, 오히려 더 신경쓰지 않고 살게 되어버렸다. “방금?”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았음을 일부러 과시하듯이 연타로 하품을 해대면서도 되묻는 목소리는 제법 또렷했다. “야, 빨리 잠이나 더 자라.” 정욱은 왠지 썩 상쾌하지 못한 기분을 감추려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너는?” “나도 잘 테니까.” “여기서?” 당연한 사실을 묻는다. 목소리 속에 한 자락 석연치 않은 울림이 엉켜든다. 그러고 보니 당연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럼 어디서?” “………….” “도로 갈까?” “………….” “너 혼자 편히 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주변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는 달리,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하냐?!! 누가 그렇대?!!” 행동이든 말이든 곱게 나와주지 않는 것은 피차일반인 듯. “한밤중에 어디서 소릴 질러? 남의 집이야.” 제기랄! “그래서?!!!!” 지해는 크게 터져나오려는 소리를 간신히 눌러 이빨 사이로 흩어 내보내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정욱의 멱살을 덥썩 움켜잡았다. “그래! 오밤중에 남의 집에 민폐 끼치고 이 지랄까지 떨어서 미안하게 됐다, 젠장!” “이거나 놓고 얘기하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싸늘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지해는 더 지체할 것도 없이 힘껏 움켜쥐었던 멱살을 탁 놓아버리고 돌아섰다. 옷을 어디다 벗어뒀더라. 아, 저기. 한구석에 놓여있던 티셔츠와 바지를 집어 들었다. 아까만 해도 못 느꼈는데 땀에 쩔어 축축한 것이 여간 찝찝하지 않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 벌거벗고 집에 갈 순 없으니까. 그나마도 걸어가려면 몇 시간은 족히 걸릴 테니. 뒤에서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든 말든, 이 잘난 ‘남의 집’ 물건을 벗어 던지고 ‘내’ 꺼로 갈아입으려 샤워로브의 끈을 풀기 시작한 찰나, 뒷덜미를 우왁스럽게 잡혀 그대로 상체가 침대에 처박혔다. 엉겁결에 접혀진 무릎이 바닥과 충돌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짓이야!! 이 씹―” 잽싸게 커다란 손으로 입을 막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아 한 손에 틀어 쥐며 등 뒤에서 덮쳐 내리누른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반항해 봐야 이 무쇠인간은 끄떡도 않는다. 머리를 뒤흔들면서, 입을 꽉 틀어막은 녀석의 커다란 손바닥을 덥썩 깨물었다. 작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손을 치우지는 않는다. 굳은 살이 잔뜩 박혀서 아프지도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입 안에 비릿하게 혈향이 퍼진다. 절대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오른쪽 뒷목덜미에 놈의 입술이 닿는 순간, 갑자기 아까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다른 곳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그곳만 한참동안 집중적으로 물어뜯을 듯이 빨고, 깨물고, 핥아낸다. 하얀 목덜미에 새겨진 붉은 흔적 위를 새로운 자국으로 완벽하게 뒤덮어 놓고, 정욱이 고개를 들며 몸을 떼었을 무렵에는 지해는 진저리를 치다 못해 탈진한 상태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침대 위에 물먹은 솜처럼 축 널부러져 있는 녀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정욱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 얼굴에 손끝이 닿자마자 고개를 팩 돌려 눕는다. 젖은 머리카락들이 손등 위를 살짝 때리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 달아난다. “개새끼. 너는 개야. 알아? 이 개새야.”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다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중얼거리는 터라, 뚜렷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뭐, 대충… 접수는 됐다. 옷이 흐트러져 드러난 갸날픈 등에 검푸르딩딩한 멍 자국들이 도드라진다. 안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런 걸 눈에 띄게 하지 말란 말이다. 정욱이 손가락으로 멍 자국을 꾹 누르자, 지해는 제법 아픈 신음을 내뱉고서 튕겨내듯이 몸을 일으키며 손을 쳐냈다. “건들지 마!!!”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는 순간, 지해는 아차 싶었다. 저 무지막지한 놈의 얼굴에 잠깐 스쳐간,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 가슴에 콱 박혔다. 가뜩이나 요즘 상황도 안 좋은데 싸움까지 해선 안 돼. 잘못하면 그러다가 정말 끝이다. 누르고, 삭히고, 참아야 한다. 그리고… “손 줘봐.” 아까 있는 힘껏 깨물었던 녀석의 왼손을 덥썩 잡아 눈 앞에까지 끌어 올렸다. 엄지 밑의 불뚝 튀어나온 부분에 새빨간 이빨 자국이 나 있다. 꽤 아팠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해는 피가 배어있는 상처에 입술을 갖다대고 부드럽게 핥았다. 움찔 도망가려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정욱이 무릎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무릎과 무릎이 조금씩 맞닿고, 뺨을 감싸는 정욱의 오른손에 얼굴을 기댔다. 소중히 붙들려 있던 왼손을 빼내어 정욱이 조심스럽게 뒤통수와 등을 쓸어내려준다. 서서히 침대 위로 등이 닿고 자신의 입술로 살포시 내려앉는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천국처럼 나른한 안도감. 궤도를 벗어나 거침없이 질주하던 탈선한 기관차에 가까스로 제동을 걸고 난 후 맛보는 정당한 휴식. 더러운 것에 오염된 것을 소독이라도 하듯이 녀석의 입 안을 샅샅이 건드려주면서, 지해는 제발 이 녀석이 자신 아닌 다른 사람과 또 키스 따위를 하는 일이 없었으면, 최소한 또다시 방금 전과 같은 광경이 자신의 눈에 띄는 일은 없게 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 속에 한 점 켕기는 것 없이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그 언젠가도 꼭 오게 되기를. “됐어요. 혼자 갈 테니까.” “아니야. 얼른 타. 우리 집에서 묵은 손님인데 그럴 순 없지.”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지갑 잃어버린 것 뻔히 아는데?”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집에 들어가서 갖다주면 돼요. 정말 괜찮아요.” “택시 타려면 한참 내려가야 돼.” “슬슬 걸어내려 갈게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았는데 벌써 아침이었다. 정욱은 이미 집에 가고 없었다. 언제 간 건지도 도저히 모르겠다. 잠을 자기나 한 건가. 암만 생각해도 자신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그냥 가버린 것 같다. 다행히 일찍 일어났으니 더 폐 끼치기 전에 빨리 사라져 주자, 하는 생각으로 서둘러 옷을 꿰어 입고 문 밖으로 나오다가, 이미 준비를 끝내고 거실에 앉아 기다리던 민혁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자동차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끼우고 빙빙 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 데려다 준다, 괜찮다, 한참동안 이 모양으로 옥신각신이다. “말 좀 들어. 무조건 사양하지만 말고. 너땜에 일부러 나가는 거 아니야. 나도 지금 어차피 운동하러 가야 돼.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 준다는 거야.” “………….” “오랜만에 봤는데 얘기도 제대로 못했잖냐. 너는 나한테 할 얘기 없어?” “………….” “아마 있을 텐데?”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민혁의 차 조수석에 앉아 강을 건너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을 거라는 말에 ‘그래!’ 하고 속으로 무릎을 치며, 이 참에 더 이상 자기들 사이에 끼어들지 말아달라고 확실하게 말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하려고 보니, “말하기가 싫어졌나 보구만!” 싫어졌다기 보다… “해도 소용없는 얘기다 싶으면 안 해도 되고.” 지금 소용없다고 하셨나요? “설마 창피해서 그러는 거야? 나한테는 그런 생각할 필요 전혀 없는데.” 맞아. 바로 그거야. 굳이 따지자면 자신한테 창피해서 말이다. 왠지 치사하고 계면쩍고. 둘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익히 아는데. 그깟 키스 한번 한 것 갖고 남자가 돼서 쪼잔하게 일일이 신경쓴다는 게 영 우습다는 생각이 점점 드는 거다. “남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나봐요?” “헉! 꿰뚫는다~!! 그것 참 아름다운 말이다.” “………….”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단어야. 내 삶의 활력소! 역시 너도 내 맘을 눈치채고 있었구나.” “………….”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혼자서 연신 싱글벙글. 이 사람은 싸이코야. 왕싸이코. 역시 쓸데없이 건드리지 말고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어. “내가 네 속을 꿰뚫고 있을 리가 없지. 너랑은 해본 적이 없잖냐. 나한테는 넌 아직 미지의 영역이야.” “………….” “으아아~! 아침부터 엄청 땡기네. 정욱이 놈 무서워서 넌 애시당초 단념하고 있었다구! 왜 또 생각나게 만드는 거야아아아~.” 그래. 아예 말을 말자,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마치 진담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얘기를 꺼낸다. “정욱이 성격에 즈이 집안 얘기 같은 거 안 해줄 것 아니냐. 궁금한 것 없어? 너도 알고 있어야 되는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나한테라도 물어봐. 별 도움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 에이, 뭐야? 그런 거였나? 왕싸이코 도사님, 이번에는 번짓수를 틀리게 짚으셨군요. 쓸데없이 체면 깎이는 소리 안 하길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괜찮아요. 그 녀석이 굳이 말하지 않는 거면, 나도 알고 싶지 않아요.” “그래?” “일일이 까발리기 귀찮은 사정이 있겠죠. 그런 거 별로 건드리고 싶지 않아요.” “오호~! 너네는 항상 그런 식이냐?” “글쎄요. 서로 일부러 말 안 하는 것까지 캐묻고 하는 일은 없지만.” “으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지 어울리지 않게 심각해져서는 입을 꽉 다문다. 어이, 당신같은 사람이 갑자기 그러면 이쪽에서 불안해진다구. “뭐, 다들 그러는 것 아닌가요? 형은… 사귀는 사람하고… 어때요?” 왠지 조용해진 분위기가 싫어서 지해가 말을 꺼냈을 때에는 이미 사거리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꺾어들고 있었다. 운전에 열중한 건지, 아니면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 척 하는 건지 대답이 없다. 알 수 없는 비웃음 같은 걸로 살짝 입가 한귀퉁이를 찌그러트리면서. 거봐. 역시 본인 스스로 말하지 않는 걸 괜히 물어보고 그러는 것 아니잖아. 단박에 이런 반응이 오지 않느냐 말이다. “근데….” 엄숙하게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연다. “네.” “어젯밤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던 건데….” “네.” “너 말야….” “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지해는 답답하기도 하고, 또 이 사람이 이번엔 무슨 폭탄을 터뜨릴까 두려워 슬슬 불안해졌다. “전에 나랑 약속했었잖아….” 약속? 무슨? 전혀 기억이 없는데. “기억 안 나?” “………….” “조금도?” 뭐지? 뭘 말하는 거지? 대체 뭐길래 이렇게 말을 못 꺼내는 거지, 이 사람? “정말 기억을 못하는구나. 섭하게스리.” 우우, 섭해~ 하고 연신 중얼대는 꼴을 지해는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뭔데, 무슨 약속인데? “너 약속했었잖아.” 글쎄, 그게 뭐냐니까? “나한테 존대말 안 쓰기로. 말 그냥 편하게 놓기로.” “다 왔어. 바로 요기야. 그 스포츠 센터로 가려면 여기서 차 돌려서 저쪽 일방통행 길로ㅡ” “아, 괜찮아. 나 이쪽 길 잘 알아.” 머쓱해진 지해가 어깨를 으쓱하며 차에서 내리고는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민혁이 갑자기 잠깐만, 하고 붙들더니 메모지를 꺼내 뭔가 재빨리 적어준다. 자기 연락처란다. “뉴욕 아파트 전화번호랑 핸드폰 번호. 그리고 이건 아까 우리집 내 방 번호. 이건 한국에 나왔을 때 쓰는 핸드폰 번호.”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꼭 제일 먼저 연락하라는 표정이 너무 진지하다. 지해는 마음 속의 불안을 들켜버린 것 같아 멋쩍어 시선을 피하다가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어~! 형!!” 그때 마침 집에서 나오고 있을 건 또 뭔가. 괜히 아는 척 했나 싶다. 태도를 보아 하니 모른 체 그냥 지나치려던 모양인데. “이제 오냐?” “학교 가는 거야?” “그래. 너….”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잠깐 차 안의 민혁과 지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동생의 어깨를 툭 치며, 이따가 저녁때 집에서 얘기하자, 한다. 그리고는 민혁에게, 학교에 늦어서 이만 먼저 실례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가버린다. “친형이야?” “어” “대학생?” “1학년.” 아까 전의 나름대로 꽤 진지했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굉장히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듯한 엽기발랄한 표정으로 둔갑한 민혁은 손을 흔들며 차를 몰고 사라졌다. 지해는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메모지를 꽉 구겼다가 암만 둘러봐도 주위에 적당하게 버릴 곳이 눈에 띄지 않아 그냥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그날 아침, 세강그룹 본사 건물의 34층에 위치한 회장 비서실에서는 그 전날 오후에 또 다시 택배로 배달되어온 정체불명의 비디오 테입을 놓고 쉬쉬하는 가운데 의견이 분분했다. 똑같은 발신자로부터 이번이 세번째였다. 본사로 보내지는 모든 우편물들은 일단 최첨단 검색 탐지기를 이중삼중으로 통과한 뒤에 각 사무실로 전달되도록 되어있어, 물리적인 위험성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렇지만, 보낸 사람의 신원이 확실치 않은 배달물일 경우에는 비서실장 전결로 폐기처분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이 테입도 예외일 수 없어 그 동안 어느 누구의 눈에도 그 내용이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폐기실로 직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신자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인지, 세번째로 보낸 택배 상자 안에는 좀더 많은 정보가 들어있었다. 예를 들면, 테입을 틀어놓고 화면을 직접 카메라로 찍은 듯한 흐릿한 사진들이라든가, 발신자의 좀더 구체적인 연락처, 미처 화면에는 담지 못했지만 대신 오디오로 녹음된 음성 자료, 그리고 기한 내에 아무 연락이 없을 시, 또는 경찰이나 그밖의 기관으로 수사가 의뢰됐을 때 자신이 취할 상세한 다음 조치에 이르기까지. 누가 보더라도 그냥 장난으로 넘겨버리기엔 위험성이 크다 싶은 물건이었고, 비서실장이 직접 자신의 사무실에서 테입의 내용을 확인한 지금, 최소한 회장님께 보고도 하지 않고, 자기 혼자 함부로 처리해 버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따라 수행비서 한 명만을 데리고 간소한 조찬 모임에 참석한 강회장이 빨리 출근하기만을 송 실장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0. BLASPHEMOUS RUMOURS I don't want to start any blasphemous rumours 불경스런 헛소문 따위는 퍼뜨리고 싶지 않아 But I think that God's got a sick sense of humor 하지만, 하느님! 당신 유머 감각이 아주 글러먹었어. And when I die I expect to find him laughing 내가 죽으면 당신은 아마 좋아라 웃겠지? (Blasphemous Rumours - Depeche Mode)☜ CLICK!!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날은 새벽부터 날씨가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 청량하고 상큼한 바람. 그 바람을 타고 아침 이슬에 젖은 싱그러운 풀잎 내음이 살갗으로 스며들던. 아름다운 4월의 봄날. 싱싱한 젊음의 아침. 그 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너 말이야. 담배 아직도 피지?” “………….” “솔직히 말햇!” “……많이 줄였어요, 헤헤. 아예 안 피는 날도 있다구요. 어저께도.” 회사에서 키우는 다른 훈련생들 서너 명과 함께 발성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데, 보이스 코치가 다짜고짜 대뜸 지해의 뒤통수에 꿀밤을 먹이며 묻는다. “근데 왠 헛기침을 그렇게 해? 가래가 끓으니까 그런 것 아냐. 너 자꾸 그러면 성대에 안 좋다고 내가 몇 번이나 끊으라고 했어, 안 했어?!” “…하셨죠. 근데 그게 어디 맘대로 쉽게 돼야 말이죠.” 어떻게든 천연덕스럽게 웃음과 애교로 얼버무리려는 녀석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보면서, 나이가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냐, 하면서 또 잔소리를 한다. 열심히 하고, 실력 좋고, 준비된 스타로 한참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면서 뜨는데도 잘난 척 절대 않고, 눈웃음 살살에 늘상 헤헤거리는 녀석이 미울 리가 없다. 귀여워서 그러는 거다. 다른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일들로 얘기가 이어져서 화기애애한 수다모드가 전개될 무렵, 연습실의 인터폰이 힘차게 울렸다. 다 끝났으면 지해는 빨리 7층 전무님 방으로 좀 올라오란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서, 아니, 사실 처음 있는 일이라서 지해는 약간 얼떨떨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주머니 속의 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도로 깊이 쑥 집어넣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새거라서 뭔가 착오가 난 걸 거다. 기계라는 게 원래 주인을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지 않는가. 기계 주제에… 감히… 버릇 없는 것! 언젠가 조만간 이 주인님의 손끝에서 놀아날 날이 올 것이다! 오늘은 평균적으로 따져봤을 때 기분 좋은 날이다. 날씨도 좋고, 아침부터 목소리 컨디션도 좋았다. 딴 때에는 삑사리나던 높은 음정까지도 확실하게 꽂아 줬다. 스케줄도 럴럴해서 모처럼 한가한 오후를 보낼 수 있다. 뭘하고 시간을 때울까. 뭘하고 놀아야 금쪽같은 시간을 잘 보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연습실들이 있는 지하 1,2층에는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1층으로 걸어 올라와야 한다. 계단을 올라오며 귓전에서 맴도는 기분 나쁜 목소리를 눌러 지워버리기 위해서 지해는 무의식중에 휘파람을 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휘파람을 불려니 아무 멜로디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이 새카매지는 당황스런 정적 속에서 터벅터벅 계단을 디디는 발자국 소리만 요란스레 울려댔다. 일부러 더 시끄럽게 쿵쾅거리며 뛰어 올라왔다.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 반질반질한 1층 로비 바닥을 한 달음에 유연하게 미끄러져 절도 있는 동작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면서 버튼을 눌렀다. 타이밍과 리듬 모두 절묘해줬다. 아깝다. 이런 멋진 모습은 비디오로 찍어 길이길이 기록에 남겨야 하는데.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있는 유리로 된 정문 바깥쪽에서는,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 너덧 명을 경비 아저씨 둘이 필사적으로 막으며 열심히 지껄이고 있는 게 보였다. 기자들 같은데… 아무래도 뭔 일이 있는가 보다. 무슨 일일까. 여기 선배들 중 누가 스캔들이라도 터뜨렸나. 요새 딱히 별다른 얘기 들은 적 없구만. 곧 문이 열리고 올라타자마자 지해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이런 일들은 머릿속으로부터 털어버리고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또다시 만지작거리며 기를 불어넣었다. 번호를 잘못 눌렀던지 암튼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다. 분명히. 이따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시 해보면 될 거다. 그 외의 다른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싶지도 않았다. 미디어 창을 닫은 뒤에도 정욱은 한참이나 멍한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다. 점심시간이 반쯤 지났을 무렵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들인가, 불러세워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반 아이 한 명이 누가 전해주랬다며 CD-R 한 장을 건네 주었다. 누구였느냐고 물으니, 그냥 교문 앞에서 만난 퀵서비스 아저씨였다고 한다. 일단 전해준 녀석의 얼굴과 이름을 머릿속에 입력해두고, 정욱은 CD를 들고 학교 밖으로 나와 후문 근처의 피씨방으로 들어갔다. 학교 컴실을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오가던 심상찮은 소리와 CD 표면에 검은 매직으로 휘갈겨 쓴 글씨로 봐서 직감적으로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손님이라고는 단 두명. 어쨌든 가장 구석 자리를 찾아 들어가 앉아, 갖고 온 CD를 틀었다. 동영상이 플레이되고 있는 한 시간 남짓 동안, 몇 번이나 스톱을 시킬 충동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일단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저절로 멈춰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치밀어오르는 구역감을 버텼다. 끝까지 보다 보면 뭔가 다른 점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자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굉장히 닮은 녀석이지만 그 녀석은 절대 아닐 터. 오늘 오전부터 갑자기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다는 문제의 동영상의 주인공은 딴 사람이어야 했다. 행여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빈 화면을 넋놓고 바라보던 정욱은 시간이 꽤 지났음을 상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5교시는 시작된 참이었지만, 학교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집에서는 민혁이 뉴욕으로 돌아갈 때 같이 가는 것으로 결정해버리고 차곡차곡 유학 수속을 밟고 있었다. 안심 안 되니까 밖에 내보내기 싫어서 굳이 학교에 나갈 필요가 뭐 있겠냐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고집부려 학교에 나온다. 수업에 미련이 있어서는 절대 아니다. 원래 생겨먹길 고지식하게 생겨먹은 놈이라 그런다. 유학갑네, 어디갑네 하면서 떠나기도 전부터 지금 당장 발 붙이고 있는 이 곳의 생활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놈들 많이 봐왔다. 정욱의 성격에 그런 것이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길게 설명 안 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상황으로서는 아무리 정욱이라 해도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일단은 집에 하루종일 갇혀 있기가 졸라 짜증난다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이유. 그리고, 학교에 있으면 좋으니까가 나머지 이유다. 녀석은 지금 여기 없지만 곳곳에 그 녀석과 함께 하던 가슴 벅찬 추억이 살아 있어서. 문득문득 그 녀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서. 그런데, 그 소중한 추억을 흙발로 짓밟는 이 그림은. 대체 이건…, 이건 뭐냔 말이다. 꼴도 보기 싫은 징그러운 물건이긴 해도, 일단 CD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케이스에 CD를 도로 집어넣는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도대체 누구에게 먼저 자초지종을 알아봐야 할지 머릿속으로 헤아려보면서 바지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플립을 열었다. 피씨방 문을 밀어서 열고 액정 화면을 내려보며 번호를 누르는 일련의 동작을 한번에 기계적으로 처리하던 정욱은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미등록된 단말기이므로 등록해서 사용하라는 건 무슨 말인가.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던 건지. 아침에 습관적으로 그냥 파워를 켜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등교할 때만 해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는 기분은 굉장히 오랜만에 경험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어리둥절한 충격과 걷잡을 수 없는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니터 속의 하얀 나신이 불러일으키던 익숙한 욕망, 그리고 이제는 불안과 공포에까지 마음을 온통 점령당한 채, 정욱은 한동안 그렇게 갈 길을 잃은 채 서 있었다. 어리버리하고 매사에 흐릿한 사람들이 살기에는 이 세상은 좀 무서운 곳이다. 실제로 지해와 주원의 낯뜨거운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몇몇 유명 사이트의 게시판에 머물렀던 것은 새벽녁 20분 남짓 했지만, 그날 정오쯤에는 이미 인구에 회자되는 그날의 얘깃거리가 되어 있었다. 끝도 없이 눈덩이처럼 부풀려지는 소문들은 대체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으나 그 중에는 어떻게 알았을까 싶은 사실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보력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급작스레 쏟아지는 매스컴의 포화를 피해 지해가 휴식중이라던 그 ‘모처’가 영동대교만 건너면 바로 보이는 이 별 네개짜리 호텔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요새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 비교적 보안이 잘된 특급 호텔에선 취재진이 몰려들어 복잡해질 걸 예상해 받아주질 않았기 때문에, 사무실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점 등을 들어 급하게 이곳으로 애를 대피시켜 놓았다는 것까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실제로 정욱은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 몇몇이 호텔 로비와 주차장 근처를 왔다갔다 하는 걸 목격하고는 기획사측의 무성의한 대책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룸 넘버를 알아내고 키를 얻어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호텔 측에서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나름대로 엄중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사람을 시켜 객실 청소부를 매수해 필요한 정보와 수단을 받아내게 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의 제재를 받는 지금, 전보다 행동이 엄청나게 부자유스러워져서인지,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이상하리만큼 힘겹게 느껴졌다. 자신이 아직 부모의 그늘 아래에 머물러 있으며, 스스로의 같잖은 능력을 얼마나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자기 힘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별로 없다는 걸 점점 확연히 깨닫게 되는 현실이 반가울 리는 없었다. 더구나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든 그 원인을 생각하면. 미리 챙겨두었던 카드키를 호텔 방 문의 잠금쇠에 꽂자,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해는 얄쌍한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테이블 위로 다리를 쭉 뻗고 의자 위에 길게 앉아 TV 화면을 쳐다보며 조그맣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몇 번이나 노크를 했는데도 대답이 없던 것이 이해가 간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 좀 허탈해진다. 귀가 아니라 눈까지 꽉 막혔는지 바로 옆에 누가 다가왔는데도 전혀 모른다. 밖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나 몰라라 세워둔 채로 계속 이 상태였다고 생각하니 가뜩이나 그리 좋을 수 없는 기분이 더욱 더 맹렬히 불쾌해진다. 정욱은 그 옆으로 가 헤드폰을 벗겨버렸다. 벗겨진 헤드폰에서 기관총같은 기타 소리와 절규하는 보컬이 찢어질 듯 새된 소리로 제법 크게 새어나온다. 구닥다리 미니 카세트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키워놓은 정도의 음량이다. 미친 놈. 귓구멍이라도 찢고 싶은 걸까. 저 정도면 귓구녕이 문제가 아니라 잘 하면 뇌까지도 터뜨릴 수 있겠다. 그냥 놔둘 걸 그랬나. 정욱은 손에 들고 있던 헤드폰을 자신의 어깨 높이 정도까지 쑥 끌어올려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헤드폰은 지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뒹굴고 있던 CD플레이어와 분리되고, CD플레이어는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내놔.” 멍한 시선을 TV 화면의 요리 프로에 고정시킨 그대로 지해가 표정의 변화없이 입술만 움직여 말하자, 정욱은 헤드폰을 뒤로 던져버렸다. 넓지 않은 방 안에서 헤드폰은 불쌍한 소리를 내며 온몸으로 벽에 부딪치고 침대 모서리 끝에 헤딩을 한번 한 뒤 바닥에 풀썩 떨어졌다. 기계적인 동작으로 지해는 이제 리모콘을 들어 TV의 볼륨을 키웠다. 16인치 TV 브라운관 속에서는 하얀 주방장 모자를 뒤집어쓴 전문 요리사가 아직 채 죽지 못하고 꿈틀대는 생선의 목을 과감히 치고 익숙한 솜씨로 껍질을 쓱쓱 벗겨내며 영양성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정력과 스태미너에 좋으니 가끔 ‘필요’할 때 남편들께 해 드리라고 말하자 방청객 아줌마들 사이에서 웃음이 스쳐갔다. 갑자기 뭔가 참을 수 없어진 정욱은 리모콘을 뺏아 Power를 눌렀다. 파르르륵 뒷편의 흰색 발포 벽지와 강한 정전기를 일으키면서 TV가 꺼졌다. 그리고, 깊은 물 속에 처넣어진 듯 귀가 먹먹한 정적이 방 안에 무겁게 깔렸다. 거무튀튀한 브라운관 속의 볼록하니 왜곡된 방 안을 멍하게 쳐다보던 지해가 소파에서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정욱에게도 확연히 들릴 만큼 관절 어딘가에서 우지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대로 몇 시간만 더 앉아 있었더라면 소파와 영원히 한 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정욱은 생각했다. 아무렇게나 하나로 묶은 머리는 잔머리가 잔뜩 삐져나와 있었고, 작은 단추가 가운데 한 줄로 죽 달린 품이 좁은 니트 셔츠는 중간중간 단추가 풀려 있어서, 입었다기 보다는 걸쳤다는 표현이 어울려 보였다. 아래에 입은 짧은 블루진 반바지도 허리 라인의 단추는 오픈되어 있었다. 속살이 다 보이는 단정치 못한 옷차림과 넋이 반쯤 나간 듯 무표정한 얼굴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평소 같았으면 뭐라고 한 마디 하거나, 아니면 하반신이 반응하는 대로 조치를 취했을, 어쨌든 절대로 그냥 넘어갔을 리 없는 느슨한 매무새에 정욱은 갑자기 당황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저 다리와 팔이 다른 누군가의 벗은 몸뚱이와 휘감기는…… 머릿속에 뚜렷이 남은 영상이 겹쳐져 보였다. 애써 지워버리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저 그랬으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 증거를 목격하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애처롭게 강제로 당하고 있는 걸 본 것과도 또 다르다. 그 영상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뒷골이 띵해왔다. 또 다시 구역질이 이는 것을 가까스로 다스렸다. 정욱은 시선을 피하는 바람에, 잠깐 지해의 눈동자를 스쳐간, 착잡하고 안타까운 눈빛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정욱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앞에 있는 녀석을 똑바로 응시했을 때, 지해의 눈빛은 아까의 그 마네킹같은 무표정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뭐하러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지해가 먼저 말을 꺼내며 바지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렸다. “…마침 잘 왔어.” 번쩍하는 순간에 기습적으로 던져져온 것을 정욱은 무의식중에 반사적으로 캐치했다. 손바닥을 펴볼 것도 없이 ‘그’ 반지다. 금속 특유의 차가운 느낌이 전혀 없이 미지근하게 달궈진 듯한 촉감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주머니 속 깊은 곳에 한참동안 모셔져 있었나 보다. “그거 갖고 빨리ㅡ” 말을 맺지 못한 채 지해는 앗, 하는 비명과 함께 왼쪽 눈을 감싸쥐었다. 정욱이 던진 반지가 눈썹 위를 정확히 강타했다. 정통으로 맞은 얼얼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굴에서 손을 떼는 찰나, 철썩 소리와 함께 왼쪽 뺨에서 불이 나며 고개가 옆으로 훽 꺾였다. “닥쳐. 까불지 마.” 삐긋 젖혀진 고개를 지해가 간신히 앞으로 추스르자, 이제는 오른쪽 귀싸대기에 또 한 방이 날아왔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고 했거늘 이 경우는 그 순서가 거꾸로 됐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왼쪽 뺨에 또 한 대가 날아왔다. 눈 앞에서 불꽃이 번쩍하며 중심을 잃고 넘어지다가 침대 발치 모서리에 등을 부딪혔다. 아프다. 그러고 보니 정욱이 놈한테 이렇게 맞는 건 생전 처음이다. 광대뼈 나가는 줄 알았다. 너무 아프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지해가 정욱은 이상하게 낯설다고 생각했다. 평소같으면 손끝만 갖다대도 팔딱 반응을 보일 녀석이다. 나중에 쩔쩔매며 수습을 할 지언정 일단은 지가 잘했건 잘못했건 성질 뻗치는 대로 바락바락 대들 놈이다. 이렇게 맥아리없이 휘둘리고, 갑자기 얻어터지고도 한 마디 대꾸도 않고…. 이건 그 놈이 아니야. 어디 갔을까. 내가 아는 그 녀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드레날린이 넘쳐 흘러 흥분으로 들끓는 가슴 한 구석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서늘하니 촉촉한 슬픔이 새어들어온다. 슬픈건지, 아픈건지,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이젠 정말 지친건지, 마구 뒤엉킨 자신의 감정을 정욱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웃옷의 단추는 이제 모조리 풀려 손바닥만한 소매만 팔에 간신히 끼인 채 걸쳐 있었다. 무심코 한쪽 무릎을 세워 자세를 고쳐 앉자 매끄럽게 빠진 하얀 허벅지 안쪽이 드러났다. 담배라도 찾는지 몸 위를 툭툭 건들이다가 숙였던 머리를 들고 두리번거린다. 눈에 익은, 묘하게 색스러운 몸짓에 그동안 길들여진 아랫도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두리번거리던 지해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순간 몸 속의 에너지가 전부 눈으로 몰려 불을 뿜는 것 같았다. 당황하는 기색도 전혀 없이 뭔가 말할 듯 쏘아보던 지해가 한숨을 쉬며 먼저 시선을 피하자, 정욱은 머릿속의 퓨즈가 나가버렸다. 녀석의 팔을 잡아당겨 거칠게 일으키고 뒤로 돌려세웠다. 발은 바닥에 둔 채 침대에 머리를 눌러 엎어놓고 바지를 끌어내린 뒤 그대로 돌진했다. 좁고 메마른 곳이 피눈물을 흘려대며 격렬한 분노를 힘겹게 받아들이는 동안, 정욱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영상들과 승산없는 싸움을 벌였다.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며 익히 잘 아는 몸을 기계적으로 찔러올리다 보니, 고통스러워하던 지해도 어느새 리듬을 맞추며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원래 느끼기 쉬운, 음탕한 몸이기 때문일까, 상대가 자신이기 때문일까. 정욱은 이것마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본인에게 물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섹스라고도, 폭력이라고도 할 수 없는 행위는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좀처럼 사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몸과는 달리 머릿 속이 점점 차디차게 가라앉았다. 마침내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인식이 되었을 즈음, 먼저 지해가 절정에 달하고, 정욱도 질투와 분노와 원망과 자책이 온통 뒤섞인 감정의 찌꺼기들을 깊숙한 곳에 토해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냉정하게 자신을 추스르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제대로 저항조차 않고 어중간한 자세로 꿰뚫린 채 흔들리던 지해는 지탱할 곳을 잃고 침대에서 털썩 미끄러져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는지, 각종 체액으로 범벅이 된 아랫도리를 가리려고 힘겹게 몸을 뒤트는 모습이 안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대상이 불분명한 혐오감이 머리를 스쳤다. 또 다시 걷잡을 수 없는 구역질이 일어 욕실로 급히 뛰어들었다. 지난 이틀 동안 거의 아무것도 뱃속에 집어넣지 못한 터라 쓴물밖에 넘어오지 않는다. 찬 물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뒷처리를 해줄 요량으로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가지고 나오는데, 지해가 욕실 바로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무시하고, 욕실 쓰려고 기다렸으면 들어가라며 몸을 비켜주자 고개를 젓는다. “너 그만 가봐라.”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 입에서 나온 소리란 고작 이런 거였다. “회사 사람들 지금 온다고 전화왔어. 전무님까지 온다니까 얘기 길어질 거야.” “………….” “난 어쨌든 그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해야 되니까…” “………….” “…이 바닥에서 먹고 살아야 되잖냐, 나는…” “………….” “…잘 보여도 뭐가 될까말깐데 이번에 이런 사고를 쳐서…” “………….” “…너도 당분간은 안 만났으면 좋겠어. 제발 부탁이니까ㅡ”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정욱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 유학 가. 다음 주에 출국해.” 부모님의 생각일뿐 아직 마음을 정하고 있지 못하던 일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내뱉는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가소로웠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아아, 그래. 잘 됐네’ 안심한 듯 웃는 지해를 보며, 대체 뭣때문에 힘들게 여기 왔던 건가 싶었다. 이 녀석의 태도 여하에 따라 결심을 달리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도 한심했다. 온통 난장판으로 뒤집혀진 바깥 세상만 미쳐 돌아간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소금기가 배추 속에 배어들어 물기를 빼고 숨을 죽이듯이, 자꾸만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세상이 무섭고 원망스러웠다. 무방비하고 멍청한 지해 녀석이 미웠다. 이제는 더 참아 넘겨줄 수 없는 자신의 옹졸함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절대 아프게 하지 않고, 절대로 피 흘리게 하지 않겠다던 스스로의 맹세를 깨뜨린 것이 무엇보다 가장 분했다. 뭘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결국은 녀석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장 사랑하고 있었으면서. 그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이면서. 스스로 선택한 상대의 헛점과 실수와 과오까지도 사랑한다는 허영심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헛점과 실수와 과오가 묵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결과는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욱이 문을 나선 뒤, 지해는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던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회사 사람들이 곧 온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사실 앞으로 희망이 있을까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어찌어찌 해결이 잘 된다 하더라도 이런 동네에서 더 이상 가슴 졸이며 지내고 싶지 않다. 미련없이 모두 버릴 준비는 언제나 그렇듯이 얼마든지 되어 있다. 정욱과의 소문이 두려울 뿐이었다. 예전에 집으로 날아들었던 그 사진들이 신경 쓰였다. 대체 그건 누구였을까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자들이 대충 눈치까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강회장이 두려워 감히 기사화를 못 하고 있다지만, 그것도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날 때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기사화되지 않더라도 암암리에 떠돌아다니는 입소문들은. 정욱이 던지듯이 건네주고 간 물수건으로 이런저런 흔적이 남은 카핏 위를 닦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방 안에 떠도는 풋내도 없애야 한다. 더럽혀진 시트도 벗겨내고, 몸이라도 씻어두려면 시간이 없다. 창문을 열어야겠다 싶어 아픔을 참고 가까스로 일어섰다가 결국 두어 걸음도 못 내딛고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왜 이러지. 병신처럼.’ 어처구니가 없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웃을 일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 부옇게 흐려지는 눈가를 손등으로 스윽 닦아내고 다시 일어서려 바닥에 손을 짚는데, 은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손 끝에 잡힌다. 내일 아침 청소기로 빨려들어가지 않고 지금 자신한테 발견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를 주머니에 다시 넣고, 지해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일으켰다. “어이~!” 눈 앞에서 딱 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정욱은 움찔하며 눈을 껌벅거렸다. 어느덧 공항 청사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한 동안에는 시간이 금방 간다. “내려, 다 왔어.” 웬만한 짐은 이미 먼저 다 보냈기 때문에 둘다 비행기 안에 갖고 들어갈 작은 배낭이 짐의 전부였다. 출입국 심사할 때 줄 서는 것과 baggage claim에서 가방 나오길 우두커니 기다리는 건 밀폐된 공간 안에서 열몇 시간 버텨야 하는 것만큼이나 짜증스런 일이다. 전용기를 썼더라면 최소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여행해야 하는 수고라도 덜 수 있었으련만, 정욱이 애초에 확실히 날짜를 잡지 못하고 미루는 바람에 결국 공항 활주로 스케줄과 맞지 않아 캔슬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정욱은 민혁의 농담섞인 궁시렁을 한참이나 감수해야 했다. “야, 담배나 한 대 피고 들어가자.” 둘을 내려준 뒤 꾸벅 인사를 남기고 사라지는 검은 벤츠의 뒷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민혁이 말했다. “한 대?” “맞어. 흑흑. 내일이나 돼야 겨우 또 필 텐데. 생각 같아서는 한 갑 다 피워주고 들어가도 성이 안 차지만.” 햇볕은 쨍쨍한데 바람은 찼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 실외에서 피우는 담배는 타기도 빨리 탄다. 둘은 다른 여러 끽연 동지들과 함께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부적응자들처럼 묵묵히 흡연 행위에 집중했다. 그저 얼토당토않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피우는 담배. 당연히 별 맛도 없다. “너 그거 기억나냐?” 하핫, 하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으며 민혁이 말했다. 이렇게 수선을 피우며 말을 꺼낼 때는 대체로 별 내용없는 쓰잘 데 없는 소리라는 걸 정욱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민혁은 물론 대답 없는 메아리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옛날에 우리 초딩 때, 니네랑 우리랑 같이 여행갔을 때 말야.” 두 가족이 모두 함께 여행 갔던 일이라곤 딱 한 번, 민혁 네에서 제주 도 별장을 처음 사고 초대했을 때뿐이다. 그 옛날 초딩 3학년 때 얘기를 하는 건가 싶어서 정욱은 얼굴을 찌푸렸다. “도착하자마자 너 가방 끌르고 짐 정리한다고 빨리 안 내려와서 혼났었잖아. 다들 저녁도 못 먹게 기다리게 만들고.” “별로 오래 걸리진 않았어.” “어찌 됐든.” “………….” “그때부터 알아봤지. 하늘을 찌르는 그 피곤한 성격.” “………….” “쬐끄만 게 고집만 쎄서.” 가만히 듣자하니 좀 불쾌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사물에는 이치라는 게 있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잖은가. 학교 갔다 오면 가방 정리하는 거고, 여행지에 도착했으면 짐부터 풀르는 거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해야 될 일이면 해야되고,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안 하는 거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저 혼란스런 삶에 제 나름대로 질서와 규칙을 부여하려는 것뿐인데. 대체 고집이니 피곤한 성격이니 하는 말을 왜 들어야 하는 건지. “당연한 거 아니야? 짐도 안 풀렀는데 어떻게 밥이 뱃속에 들어가냐?” “그러니까 네가 이상하다는 거야. 나는 열살 때 그런 생각 전혀 안 했거든.” 한 술 더 떠선 그 성격 때문에 될 일도 안 될 거라는둥 살기 힘들지 않냐는둥 쓸데없는 소리를 해댄다. 더 듣기가 싫어서 정욱은 방금 불 붙인 장초를 모래 재떨이에 쑤욱 쑤셔박고 안으로 먼저 들어와버렸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저런 잡소리 따위에 신경쓰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고 싶지 않다. 게이트가 열려 승객들의 탑승이 시작되고,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가는 민혁과 정욱은 거의 제일 먼저 들어갔다. 게이트로부터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간이 통로를 지날 때마다 구불구불 내장 속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렸을 때 한번 못박힌 이미지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출입구에는 승무원들이 죽 늘어서서 승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문 앞에 마련되어 있는 신문대에 습관적으로 손을 뻗던 정욱은 앞에 선 민혁이 스포츠 XX과 월스트리트 저널을 빼드는 걸 보고 관두었다. 스포츠 찌라시조차 제대로 안 읽을 것 같은 저 노랑머리 개망나니가 보수적인 경제 신문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는 놈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아까 차 안에서 민혁이 터뜨린 가장 큰 불만은 ‘놀랍게도’ 정욱 때문에 출발이 늦춰져서 본의 아니게 수업을 사나흘 빠졌다는 것이었다. 기내의 2층 일등석으로 계단을 올라가,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를 잡았다. 민혁이 창쪽이고, 정욱은 복도쪽이다.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머리 위의 짐칸에 넣은 뒤 좌석에 앉았다. 나머지 승객까지 다 탑승하고 출발하려면 앞으로 30분은 더 걸릴 거다. 창밖에 끝없이 펼쳐진 회색 활주로를 잠깐 쳐다보던 민혁이 정욱에게 두 신문중 하나를 고르라는 제스추어를 취하자, 정욱은 고개를 가로젓고 눈을 감았다. 민혁은 졸릴 때를 대비해 심심풀이로 가져온 스포츠 신문을 옆에 제쳐두고, 월스트리트 저널을 펼쳐, 전부터 챙겨읽던 시리즈 기획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아시아 전반을 휩쓸고 있는 장기적인 불황에 대해 미국의 입장에서 분석한,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사실상은 어거지인 기사를, 접수 안 되는 부분은 일단 건너뛰어가며 눈에 힘을 주고 열심히 집중해서 읽어내리던 민혁은 문득 뭔가 허전한 느낌에 옆을 보았다. 정욱이 자리에 없다. 막간을 이용해 화장실이라도 갔나. 이제 곧 이륙하겠으니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기장의 메시지가 나오고, 스튜어디스가 이 좌석 손님은 어디 가셨냐고 물을 때까지 정욱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녀석이 화장실 변기통에 빨려들어갔나 싶어 화장실 문을 다 두드려 보았다. 전부 다 비어 있다. 승무원들끼리 서로 속닥속닥하는 와중에 출입구 앞에 있던 여승무원 하나가 ‘아까 전에 남자 승객 한 분이 바깥에 뭘 두고 왔다면서 나갔다’고 한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 머리 위의 짐칸을 열어보니 둘의 배낭이 모두 그대로 있다. 그러면 그렇지 설마. 그런데 뭘 두고 왔다는 거지. 짐칸을 쾅 닫고 나서 무심코 고개를 숙인 민혁의 눈에 정욱의 자리에 놓인 신문이 들어왔다. 아까는 왜 이걸 못 봤을까. 1면은 1면이지만 반으로 접혀진 아래쪽이었기 때문에 미처 못 보고 지나쳤었나 보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여자 탤런트와 남자 가수의 센세이셔널한 스캔들이 당당히 초특급 특종으로서 1면 전체를 거의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아래쪽에는 그것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충격적일 수 있는 기사가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조작-합성’된 ‘가짜’임이 ‘밝혀진’ 동영상 파문 후 꿋꿋이 활동을 재개하여, 정해진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던 김지해군의 밴이 충돌 사고를 당했으며, 운전을 하고 있던 로드매니저는 중태라는 것. 그리고, 뒷자리에 타고 있었으므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사고 현장에서 병원으로 후송되기를 기다리던 지해가 응급차량이 도착하기 직전에 돌연 잠적했다고. #21. SAVE ME You will come to save me 너는 나를 구하러 올 거야. C'mon and save me 어서 와서 날 구해줘. If you could save me 네가 날 구할 수만 있다면 (Save Me - Aimee Mann)☜ CLICK!! “잠깐만. 우리 전에 어디서 만난 적 있죠?” 어떤 일이 있어도 강의는 빠지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딴 생각을 하는 적도 없다. 학문은 신성한 것이다. 지후에게 공부가 신앙이라면, 수업시간은 매일 매순간 드리는 예배와도 같았다. 지후는 공부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 그것이 평범한 우등생과 그의 차이였다. 딴 생각에 한눈 팔지 않는 이유는 또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수업시간에도 떠오를 정도의 일이라면, 십중팔구는 그다지 좋지 않은, 또는 생각하기 싫은 괴로운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수업시간엔 항상 수업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다른 모든 현실로부터 놓여난다. 지후는 공부 외에 그런 괴로운 생각들로부터 해방될 다른 돌파구를 알지 못했다. 만약 공부만이 눈앞의 가장 큰 현실인 순탄한 환경이었다면 그 현실로부터 다른 도피처를 찾았을까. 글쎄. “나 기억 안 나요?” 당장 어떤 복잡한 일이 머릿속에 들끓고 있든지 간에, 지후는 어김없이 학교에 갔다. 세상과 유리된 상아탑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으면 편안했다. “어, 이상하다. 나는 기억 무지 잘 나는데.” 지후에게 있어서 학교란, 어느 누구보다도 절대 우위에 설 수 있는 홈그라운드요,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자신을 건드릴 수 없는 성역. “뭐. 기억 안 난대도 하는 수 없지만.” 지후는 그제서야 자신의 갈 길을 막아선 목소리의 주인공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법정대 건물 현관앞 돌계단의 얕으막한 난간에 앉아있다가 일어서며 머리 꼭대기에 헤어밴드처럼 얹고 있던 선글라스를 한 손에 빼들고 휘휘 흔들어대는 키 큰 남자. 껄렁함과 패셔너블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자유분방한(좋게 말해서) 옷차림. 다음 강의를 향해 바삐 걸음을 내딛는 법대생들을 휘휘 둘러보며 호기심 광선을 쏘아대는 장난스러운 얼굴. 강렬한 햇살 아래 언뜻 하얗게 보이기까지 하는 삐죽삐죽 노랑머리는 마구잡이로 헝클어진듯 싶으면서도 뭔가 묘하게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전문가(그것도 꽤 수준급인)의 손길이라는 것은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슬픈 일이야. 나를 기억 못 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기억을 못 한다? 공부 잘 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 중 하나가 공부밖에 몰라서 다른 일에는 관심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모르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는 몰라도, 지후에게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기억을 ‘안’ 하는 척 할뿐, 웬만큼 사소한 것도 기억 못 하는 법이 없으니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일들로 머리가 꽉 차서 그게 불/쾌/할/ 정도로. “어쨌든. 덕분에 내 생전에 서울대를 다 와보네. 이 강의 세 시간 짜린지 몰랐잖아, 젠장. 끝날 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앉아 기다렸다구요. 힘들게 찾아온 성의를 봐서라도 너무 그렇게 생까지는 말았으면 하는데~” 얼굴 전체를 주름잡는 일곱살 개구장이같은 웃음도 그 뒤에 숨은 진지한 눈빛은 다 감추지 못했다. 힘들게 찾아왔다고 한다. 기억의 회로가 열리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인지 떠올랐다. 지금까지 두번 본 사람이다.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요 며칠 전혀 상관없을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이제 그만들 좀 하시지. 지후는 한쪽 어깨에만 느슨히 걸쳐져 있던 배낭끈을 잡아당겨 양어깨로 짊어지도록 고쳐 매고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봐라. 이 몸이 얼마나 바쁘신가'’하고 온몸으로 웅변하며. 다만 너무 티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쫓겨서 도망치듯 하는 건 싫으니까. “죄송하지만 다음 강의까지 빨리 가야 해서요. 건물이 멀어서 뛰어야 하거든요.” “어~? 진짜요?!!!” 뭐야, 이 인간. 수업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한다는데 그게 그리 놀랄 일인가. “그렇구나…….” “…….” “그러면 뭐, 하는 수 없지.” 이상한 사람. “근데 말이에요. 내가 왜 찾아왔는지 감 잡았죠?” 이런 질문에는 대답 않는 것이 상책. “동생이… 지해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길게 상대해줘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지후는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며 계속 말을 붙인다. “우리 정욱이. 강정욱 아시죠? 지해랑….” 그 다음 나올 말이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아 귀를 꽉 닫고 거의 뛰다시피 계단 내려가는 속도를 빨리했다. “어이~ 거기 이~쁜 오빠아아~~!”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 대신 소리를 크게 지른다. 지후의 이름도 부르고, 학번도 고래고래…. “중요한 얘기가 있는데에에~!!!” 아, 정말 한숨 나오게 시끄럽구만. “안 들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껄~~~!!!!” 지나가는 학생들이 슬쩍슬쩍 쳐다본다. 지후는 한 순간 걸음을 늦추고 잠깐 멈칫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까와 같은 페이스로 빨리 걷기 시작했다. 조용해져서 포기했는가 보다 싶었던 것도 잠깐. 별안간 어깨를 턱 잡혀 뒤를 돌아보니 이상한데다가 시끄럽기까지 한 노랑머리 양아치, 즉 아까 그 또/라/이/다. “생각보다 걸음 별로 안 빠르네?” “…….” “날렵하게 생겼는데.” “…….” “공부만 너무 열심히 해서 운동신경이 개발 안 됐나? 지해는 빨라요. 형이니까 잘 알죠? 힘도 세더라. 전에 한 대 맞은 적 있는데 미처 피할 새가―”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시죠.” 지후가 드디어 입을 열자 민혁은 얼른 대답할 생각은 않고 썩은 웃음만 씨익 지어보였다. “정욱이가 없어졌어요.” 글쎄. 그것 때문에 여길 찾아왔다면 완전히 번짓수 잘못 짚은 거다. 표정 관리고 자시고 간에, 자연스레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어이없음과 비웃음. 그리고 약간의 짜증. “쳇, 허세 좀 부리지 말지…” 민혁의 웃는 얼굴 속에서 매서운 눈빛이 또 한번 번뜩였다. “…동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면서.” 지후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민혁을 쏘아보았다. 쏘아보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빙글빙글 웃는 이 인간은 정말 밥맛이다. 이상한데다가 시끄러우면서 또라이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밥맛이기까지 하다니. “그나저나 정말 대단해. 동생이 행방불명인데 학교부터 챙기고.”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저까짓 인간이 뭘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 일이다. “수업은 들어가야 하잖을까요?” 대답 대신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다음, 씨익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한다. 천 마디의 비난보다 그 표정이 더 신경 거슬렸다. 지해가 종적을 감춘지 사흘 남짓. 사람 하나가 끝내 사망한 교통사고에 뒤이어 그 차에 타고 있던 지해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뻑적지근하게 난 참이라, 몰라도 좋을 사람들까지 모두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역시 사흘 남짓. 인사人死 사고에서 가장 유력한 증인인 동승자가 안 나타나니 경찰에서까지 꾸준히 연락이 온다. 이대로 가면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모양인 듯 해서 만에 하나 지해 자신에게 어떤 불리한 결론이 나더라도 반론의 여지가 없어진다. 게다가 이런 사정까지 전부 까발려진 터라, 언론 플레이 하나는 확실한 기획사에서 ‘합성 비디오’에 뒤이어 만들어낸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로 인한 잠깐의 잠수 & 휴식’ 따위의 변명은 씨도 안 먹히고 있었다. 인사이더들 사이에서는 ‘스스로’ 잠적한 거냐 ‘실종된’ 거냐 아니면 관심 돌리기 해프닝이냐 하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고, 모모 재벌집 손자랑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 하는 신빙성 있는 소문부터 원래 남창 출신이라더라 하는 과장된 소문까지 온갖 썰들이 난무했다. 모두 의견을 조금씩 달리하는 말과 말 사이에도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이 있었다. 이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해의 커리어는 당분간 내지는 영원히 되살리기 힘드리라는 것. 그리고 ‘영원히’쪽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 그거 알아요? 매니저, 지해 차 운전했던 그 사람 말이에요. 사망까지 갈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구요. 물론 중상이긴 했지만. 수술실에서 나오자마자 곧 죽었다니 그것도 좀 이상해.” 처음 듣는 얘기다. “근거 없는 억측은 별로 재미없는데요.” “억측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억측이 아니라는 근거도 없지만, 꼭 억측이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나한테 협력 안 할래요? 나는 정욱이를 찾아야 하고 그쪽은 동생을 찾아야 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지나친 경계는 아니 함만 못하고, 이런 인간의 숨은 꿍꿍이 정도야 얼마든지 대처 가능하다.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해 주세요.” 노랑머리가 아주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빙그레 웃는다. “벌써 그 쪼끄만 대갈통 굴려서 답 다 나왔잖아. 뭘 또 그리 새삼스럽게.”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지, 하고 픽 웃으며 민혁은 계속 흔들고 있던 선글래스를 꼈다. 자기는 이만 가볼 테니 수업에 들어가란다. 가던 길을 재촉해서 가는데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어이, 반말 까. 일일이 존대 붙이기 귀찮으니까. 지해도 반말 까기로 했다가 다시 올리니까 듣기가 좀 그렇더라구.” 벌써 한 시간째 이러고 앉아 있다. 등이 아프다. 회장님 앞은 항상 불편하다. 자신이 이 집안의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왜 회장님, 즉 할아버지 앞에서는 이렇게 한량없이 주눅들어야 하는지 한참 생각하다가 한쪽 벽에 붙어있는 오밀조밀한 액자들 몇 개에 시선이 갔다. 대가족이 한 데 모였을 때 찍은 단체 사진도 있고, 평소에 강회장이 스승이자 목표라고 말해 오던 일본의 원로 기업인과 찍은 사진도 있다. 회사 초창기에 창업 공신들과 현장에서 찍은 한창 젊었을 때의 사진도 있다. 그리고, 정욱이와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수많은 자손들 중에 유일하게, 그것도 단체 사진이 아닌 개인과 단 둘이 찍은. 또 하나 다른 사진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언제나 중심에 서서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던 강회장이 살짝 뒤로 물러서서는 늠름하게 옆에 버티고 선 손자 녀석을 자랑스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하필 저런 사진을 걸어놓았을까. 사진 속의 당당한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정수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래. 아침부터 무슨 용건이냐.” “아, 네…….” 자기 앞에서 주눅 드는 걸 영 마땅찮게 생각하는 어른 앞에서는 더욱 더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산같이 쌓여 있던 결재판들과 두툼한 보고서 두어 개를 강회장이 꼼꼼히 따져서 다 읽고 사인을 하자, 내내 옆에 서 있던 송실장이 챙겨 가지고 집무실을 나갔다. 비서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강회장은 문이 닫히자 곧 소파에 앉아있는 정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회장은 아무리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비서실장이라 할지라도, 직원 앞에서 사적인 대화를 하는 걸 달가와하지 않는다. 굳이 사생활이 직원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느슨한 태도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닌 사적인 용무로, 그것도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손주 녀석이 집무실로 찾아오는 것은 하나도 환영받을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회장님을 만날 수가 없다. “정욱이 오토바이가 성남시 외곽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모델 녀석 교통사고가 났던 곳 근처에요. 거기 바이크 샵에서 국산이랑 맞바꾸었답니다.” “기종은?” 강회장은 휙휙 넘겨보고 있던 두툼한 기획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네?” “뭘로 바꿨냐고.” “아~ 그건….” 들었는데 까먹었다. 싸구려 국산이라길래 그러려니 하고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얘기를 하려면 정확히 해야지.” 회장님은 대충 넘어가는 걸 싫어한다. 정수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전화를 걸어서 물어볼까. 하지만 회장님이 정말로 그 사실이 중요해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머리는 있다. “그래서. 그게 다냐?” 정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욱이에게만 유독 관대한 할아버지.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야 할 놈이 출발 직전에 내려서는 배짱 좋게도 집에 다시 숨어들어와서 유유히 할리를 몰고 나갔다는데, 오토바이 시동 거는 소리를 듣고 일하는 사람들이 뛰어 나갔을 때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는데, 화를 내기는 커녕, 그놈 한번 참, 하며 혀 한번 차고 말았다는. “그 근처 은행 ATM에서 카드로 500만원 인출했구요. 부러뜨린 카드는 그 안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됐답니다.” “그리고 또?” “…일단 그 부근을 집중적으로 찾아볼 생각입니다.” “뒤늦게 거길 뭐하러?” “봤다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거긴 이제 됐다, 잠깐 고개를 들었던 강회장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정수는 좀 머쓱해졌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직접 발로 뛰는 것도 아니고 귀 밝고 손 빠르다는 놈들 시켜 보고나 듣는 정도지만, 그래도 집안의 장손으로서 할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하는 참인데. 정욱이 일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하고 나섰을 때, 회장님도 허허 웃으면서 선뜻 그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걸 보면 이번 일에 아직까지 따로 손을 쓰고 계시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모두 수수방관만 하던 일 자진해서 하고 있는 자신에게 격려는 못해줄지언정. “작은 아버지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이 녀석은 제 정신인지.” “…….” “이번에 정말 정욱이 때문에 집안 망신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서류를 보던 시선이 다시 한번 정수에게 꽂혔다. 정수는 괜히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과장해서 말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집안 망신. 사실 그대로다. 집안 망신. 집안 망신. 갑자기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한참을 전화선 너머 상대방의 말에만 조용히 귀기울이며 간간이 ‘그래’, ‘알았다’, 정도만 내뱉던 강회장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정수에게 말했다. “더 이상 찾지 말고 놔둬봐라.” “네?” “정욱이, 당분간 그냥 둬봐.” “왜…….” 너한테 대답해줄 만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강회장은 읽던 서류에 다시 집중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가운데 정수는 한동안 그렇게 할아버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을 떠보니 어둑어둑한 실내다. 잘 가다듬어지지 않는 정신으로 여기가 어디인지 멍하니 생각해 본다. 아. 잠들기 전과 똑같은 콘크리트 바닥. 역시 꿈은 아니다. 전신을 부자유스럽게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도 마찬가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쇠붙이끼리 부딪혀 나는 새된 소리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다. 누굴까. 어딘가 아침부터 상태가 의심스러워 보이던 원일이 어느 순간엔가 괴로운 신음 소리와 함께 갈 지 자로 차선을 마구 넘나들며 폭주를 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정면으로 달려드는 승용차를 보고 앗 소리를 낼 사이도 없이 차체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그 순간, 이렇게 죽는 거구나 생각했던 것과 피범벅이 된 채 배를 움켜잡고 괴로워하는 원일을 보고 다급히 119를 누르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그런데 그 다음은 완전히 백지 상태. 누굴까. 자신을 이런 곳에 데려다가 이런 모습으로 묶어놓은 사람은. 누가 됐든지 간에, 무슨 꿍꿍이이든 간에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주면 좋겠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보니 곰팡내나는 컴컴한 지하실이라는 상황은 길게 즐길만 한 게 아니다. 이만큼이면 이미 충분하다. 끼익끼익 쇳소리가 섞인 불쾌한 문소리가 나더니, 센서로 작동되는 문 앞의 전등이 희미하게 불을 밝혔다. 그 빛에 의지해 난간도 없는 위험천만한 계단을 누군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남자인 것 같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남자. “오랜만이야.” 말하는 데 장애가 있는 듯 부자유스런 말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앞으로 바싹 다가와 모자를 살짝 올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선배야말로.” 기회가 있었을 때 저녀석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놓지 못했던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며 지해가 대답했다. BGM : (Facades - Phillip Glass)☜ CLICK!! “그동안 잘 지냈나봐. 때깔이 더 좋아졌는데.” 웅얼웅얼 소리가 샌다. 저렇게 불완전한 사운드인데도 말의 뜻은 제대로 전달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성가시기도 하고. 내가 네 말을 알아듣는 건 아마 네 마음을 내가 이해하기 때문이겠지. 이런 곳에서 이런 꼴을 당한 채, 나를 잡아다 묶어놓은 놈의 마음을 이해한다 따위의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한다. 이쯤 되면 이것도 능력이라고 할 수 밖에. 대체 뭐라고 부르는 능력일지는 별로 알고싶지 않지만. “무슨 그런 싱거빠진 개소리를~” 눕는 것도, 앉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다. 허리가 아프다. 양손이 수갑이 채워져 등 뒤로 묶인 채, 상체가 팔까지 빙 둘러 로프로 단단하게 묶여 있고, 양쪽 발목에 채워진 쇠고랑은 2미터 남짓한 쇠사슬로 바로 옆의 기둥에 고정되어 있다. 저 미친 놈, 나름대로 꽤나 신경써서 준비했나 보다. 암만 그래도 불편하긴 하지만 두려울 정도는 아니다. 김지해 아직 안 죽었다. “개소리로 들리나 보지?” “그럼 아니라고 생각해?” 이봐. 좋은 말 고운 말 듣고 싶으면 착하게 굴면 되잖아. 이쁜 짓을 해도 좋게 봐줄까 말깐데, 이 황당한 짓거리는 대체 무슨 경우냔 말이다.. “아구창 멀쩡하다고 존나 마구 지껄이시네?” 한 걸음 더 다가오며 경서가 말했다. 여전히 바람이 픽픽 새며 알아듣기 힘든 발음. 입 안에서 혓바닥이 제멋대로 춤을 추나보다. 훗, 그 신세도 나름대로 딱하게 됐군. 안됐어. 지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지 않잖아? 지금 네 처지에. 자꾸 나를 자극하면.” 혼자서 지껄이게 내버려둔다. 그래, 좋지 않지, 지금 이 꼬라지는. 아주 더럽게 됐어. 더럽고 더럽고 더럽고 더러워. 왕창 왕창 더러워. 픽 웃어버렸다. 목구멍을 간질이고 빠져 달아나는 허탈한 바람 소리. “뒈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이 지경까지 왔는데 그건 또 뭐 그리 대수로울까. “그때처럼 또 그 놈이 나타나서 구해줄줄 알고?”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이 시발새끼를 죽도록 미워해도 될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 놈 짓일까. “전부 다 네 놈이 꾸민 짓이냐?” 물어볼까 하다가 ‘에이, 관두자’ 생각했는데, 이미 어느새 묻고 있었다. 낯선 음성. 도저히 자신의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스스로도 이상하다. 물을 필요조차 없이 뻔한 걸 물으면서. 이렇게 생경한 목소리. 대답 따위 기대하지 않고 그 점에만 집중한다. 이상하다, 이상해. 이런 와중에 이런 생각만 계속 하는 내가 더 이상한 건가. 나 왜 이러지. 대체 왜 이렇게…… 한심할까. 너도 그렇고 나도. 지해가 가만히 노려보자, 경서는 피식 소리가 뚜렷이 들릴 정도로 일부러 웃으며 옆에 놓여있던 몇 겹으로 두껍게 접힌 신문을 지해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신문지는 어깨쯤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신문 쪼가리 한 귀퉁이에는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지해의 로드매니저 원일이 세강병원에서 수술을 했으나 결국 사망했다는 기사가 짧게 실려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저건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입술을 깨물며 지해가 다시 경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놈 시키야 어차피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그 놈은 만에 하나 쓸데없이 나불대고 다니면 귀찮아지겠더라구.” 죽일 생각까지는 안 했는데 죽어줬으니 얼마나 고마워, 경서가 야구모자와 마스크 사이에 숨어있던 삵쾡이같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이죽거렸다. 한심한 놈. “운전하는 사람한테 그딴 약 나부랭이나 먹이고. 그게 탄로 안 났을 것 같냐?” 너는 알고 있었구나, 귀여운 것, 하며 성큼 다가와서 바로 눈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리고는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그 등으로 닿을 듯 말 듯 살살 턱선을 따라 더듬는다. 살갗 위에 작은 뱀이 아주 천천히 기어가는 것 같은 징그런 느낌. 소름끼치는 혐오감. 지해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피하자 손가락이 쫓아온다. 벽으로, 벽으로, 더 이상 물러설 여지가 없을 때까지 계속 몰려, 벽과 벽이 맞닿는 코너에 뒤통수가 맞물렸다. 음습한 지하실 벽의 곰팡내나는 냉기가 두개골 속으로 쭈뼛 스며든다. 지해는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하고 턱 끝을 쳐든 채 온몸에 힘을 주며, 살기 섞인 애무를 나무토막인양 받아내기 시작했다. 경서가 이제 재미없다는 듯이 손을 거둔다. “어차피 손 잘 써놔서 걱정없었거든? 신문에도 그런 말 전혀 없잖냐. 어때, 감쪽같지? 죽이지?” 지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서는 더 기분이 좋은 듯 나불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탄로날 일이 아예 없단 말이지∼♬” “…….” “그 정도는 커버할 수준이 되주신단 말이지.” 더러운 놈. 이렇게 눈 마주쳐주고 있을 가치도 없는 새낀데. “아, 물론 그 강씨 집안의 모정욱인가 하는 새끼만큼은 안 되지만.” “닥쳣!!!!”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렇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 입에 잠깐이라도 그 녀석이 오르내리는 것 싫다. 저런 놈의 생각 끝자락 한 점에 몇만분의 일초 동안이라도 스치게 하는 것 싫다. 나는 어떻게 되더라도 그것만은 싫다. 정욱은 초인종을 눌렀다. 지해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가장 먼저 그 형에게 찾아갔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익숙지 않고, 자신이 묻는 것을 ‘감히’ 대답해주지 않는 시추에이션에 아직도 서툴렀다. 아무리 다급하다 해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남’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을 정도로 껍질을 많이 깨지도 못했다. 정욱의 속에서 그 모든 예외가 기꺼이 용납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고, 이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모른다고 야무지게 딱 잘라 말하면서도 못내 불안하게 일렁이는 표정에 일단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자신이 알기에도 그다지 친밀한 형제간은 아니었다. 지해가 형에게 한 마디 없이 잠수를 타고 있다는 건 좀 의외였으나 그놈 성격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획사에서 빼돌린 건가 하는 생각이 한 순간 들기도 했었지만, 그것도 아닌 듯 싶었다. 평소에는 웬만한 소문 같은 것, 중요한 회사 내부 사정 같은 것들이 비밀이 없다 싶을 만큼 뒷구멍으로 쏠쏠히 흘러나오는 곳인데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과는 굉장히 사정이 달랐다. 매니저 사망 문제 때문에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근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정말로 모르는 것 아닐까. 그렇다한들 과연 그런지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과 사정이 굉장히 다른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가출해서 혹시라도 꼬리를 밟힐까 조심조심 다니는, 그나마 손에 쥔 돈도 많지 않은 고딩에게 선택의 폭이란 매우 좁았다. 생각 끝에 혹시나 싶어 마지막으로 현규에게 희망을 걸었다. 일이 바쁜 건지 좀처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전에 지해를 재워줬던 아파트에도, 원래의 공식적인 집인 분당 근교의 삐까뻔쩍한 전원 주택에도 돌아오지 않던 사흘만에 현규의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모습을 보였다. 이곳은 경비가 그리 엄하지 않은 건지, 유달리 이 라인 경비 아저씨만 일을 데데하게 하는 건지, 거의 자리에 있지를 않고 이리저리 마실을 다니고 있었다. 현관에서 패스워드를 입력해야 하는 시스템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이 닫히기 전에 잽싸게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띵동∼ 한 번 누르자 한참 대답이 없어서 다시 한 번 눌렀다. 그러고 나서 또 한번을 누르고나니 문이 열렸다. “오, 어서 들어와.” 이미 비디오폰으로 확인한 듯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이렇게 반기는 척을 할 거면서 왜 세 번이나 벨을 누르도록 기다리게 했을까. “미안. 내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오느라고.” 믿어야 할까. “굉장히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어른들의 뼁끼라는 것은… “이야, 더 멋있어졌는데?!” 때로는 징그럽고…, “그래, 어쩐 일로 여기까지?” 때로는 서글프다. “어쭈?!!” 그저 퀴퀴한 바퀴벌레 소굴일 뿐인 지하실 안을 무슨 거사의 현장이라도 되는 양 감개무량하게 둘러보던 경서가 다시 지해에게 시선을 돌렸다. “열녀 났네?” “씨발, 닥치지 못해!!!” 화를 내면 말려들고., 일정 정도 이상 말려들면 뭔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고 있었지만, 제어가 되지 않았다.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몰랐던 스타트 버튼을 누른 것이다. 이 놈이. “화내니까 너무 이쁘잖아, 젠장.” 턱선에 다시 닿은 아까의 예의 그 손가락이 목덜미 위를 지그재그로 살살 돌아다니다가 쇄골을 따라 사뿐사뿐 원을 그린다. “아까워지잖아. 이렇게 이쁜데.” 그냥 잘 보존해주고 싶어지잖아, 경서가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콧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등골이 오싹한다. “니기미, 이 씹-할 색햐!!! 그 냄새나는 손모가지 당장 안 거둬들여?!!!”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이 너무나 분하다. 지해는 과히 좁다고는 할 수 없는 지하실 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냄새? 냄새라니? 냄새가 나나?” 경서는 제 손바닥을 코에다 갖다대고 크게 소리가 날 정도로 킁킁 냄새를 맡았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주위를 둘러보며 개처럼 킁킁거리다가 점점 지해 쪽으로 다가온다. “똥걸레 남창 새끼 냄새밖에 안 나는데.” “미안한걸. 도움이 못 돼서.”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글쎄, 그걸 내가 알 리가 있나' 하고 대답한 후 현규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매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정욱은 탁자 위의 컵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갓 끓여 내온 거라 노리끼리한 빛을 띠는 하얀 커피 거품이 커피의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거품이 꺼져 가라앉으면 서서히 거무튀튀한 액체가 본색을 드러낸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로군요.” “그렇게 되나….” 제3자의 매우 무성의한 답변. “그 회사에서는 애가 없어졌는데 찾을 생각도 안 하나 보죠?” “안 한다기 보다…” 현규는 잠깐 말을 끊고 난처하면서도 씁쓸한 심정을 드러내 보이는 미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연기 좋다. “…여력이 없는 거지.” 걱정들도 안 되나. “관리해야 할 사람은 많고, 인력은 한정되어 있으니. 지해 하나한테만 신경쓸 순 없잖아.” 단물 다 빨아먹고 이제 쓴물 올라오니 뱉는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좋을텐데. “더구나 이번 일이 꽤 커서 말이야. 타격이 적지 않거든. 지해한테는 기대가 컸으니까 투자도 많이 했었다구. 음반이다 영화다…” 또다시 강조하듯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쉰다. “…이번 영화 거의 파토났어. 촬영 다 끝나고 후반 작업 중이었는데, 이거 어디 개봉이나 하겠냐는 말도 나오고.” “………….” “지해가 맡은 역할만 배우를 바꿔서 다시 찍자니, 돈도 돈이지만 대목 시즌 다 놓치게 생겼어. 보통 일이 아니야.” 이제 좀 본론으로 접어들고 있는 듯. “그렇게 해서 개봉한대도 문제지. 이미 나쁜 일로 실컷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데….” 거의 틀린 거라고 봐야겠지, 하며 웃는다. “이번에는 나도 정말 입장이 곤란해. 지해 적극 추천한 것도 나고.” 입장이야 곤란하기도 할 테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다. 이번 영화에 나름대로 기대가 크다고 보라카이에서도 무지 여러번씩 얘기하곤 했잖은가 말이다. 하지만 그건 댁의 사정. 내가 알 바는 아니야. 그러면서도, 나라면 어땠을까, 정욱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판단이 서지 않는다. 가슴속에 뜨거운 덩어리만 이리저리 쏠리는 것 같고, 손끝 발끝만 부르르 떨린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생각이란 것 자체를 할 수가 없어. 이것저것 자로 재고, 줄 맞추고, 나누고, 자르고, 정리하기. 태생이 그건데, 몸 속에 흐르는 피가 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는데, 그 놈에 관한 것만은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자신에게 이런 구석이 있을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그 누군가가 끌어내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몰랐을지도. “사업가 집안이니까 잘 알겠지만, 일은 혼자서만 하는 게 아니야.” “……” “나한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한테는 그게 일생 일대의 프로젝트일 수도 있어.” 현규의 말투는 단호하고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야 그렇다쳐도 감독은 2년 넘게 매달려서 준비한 거라구.” 가슴이 답답해져 정욱은 커피를 들이켰다. 뜨겁고 쓰디 쓴 액체를 당장이라도 토해져나올 듯한 온갖 생각들과 함께 사약처럼 꿀꺽 삼켰다. “아직 어려서 우습게 봤는지 모르는데, 세상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그 녀석이 세상을 만만하게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이야말로 우리가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세상이 다 너한테 등을 돌리고, 네가 죽을죄를 짓고 거꾸러져야 한다고 해도 나는 너고, 너는 나야. 나를 버릴 순 없지. 그러니, 너를 찾으러 갈 수밖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정욱에게 현규가 말했다. “미안해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정욱이 냉랭하게 대답하자, 현규는 어깨를 으쓱하며 씨익 웃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그 웃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럼 안녕히 계시라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현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 잠깐’ 하고 외친다. “그래, 그러고 보니까…” “…….” “…아니, 그냥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고개만 살짝 뒤로 돌리고 있던 것을, 몸을 완전히 틀어 마주보고 섰다. “이경서라고, 전에 지해한테 몹쓸 짓을 했던 녀석이 있어.”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그 녀석이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그 사실도 알아?” 정욱의 양미간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다. “……어쩐지 이 궁뎅짝에 자꾸 눈길이 가더라니. 경력이 아주 화려하더라구?! 라이브 비디오까지 다 있고 말이야.” 경서는 지해가 자기 발밑에 이렇게 꼼짝 못하고 묶여 있다는 게 너무나 흡족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지해를 수렁에 빠트린 자신의 '멋진' 무용담을 신나게 지껄이고 있었다. “굳이 비디오를 찍으려면 파트너를 입 무거운 새끼로 잘 골랐어야지. 술집에 와서 술주정하는 놈이랑 찍으면 어떡해. 결국 내 귀까지 들려오잖아. 씨발, 나는 가만히 있는데도 다 들려온다니까. 아∼ 미치겠어.” 경서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모양이었다. 원래 수다스러운 새끼다. 지해도 결코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니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해의 찬란한 욕발이 자신의 스피치에 방해가 된다고 경서가 입에 청 테이프를 붙여놓은 탓이다. 테이프를 붙여놓고는 깨끗한 피부색이랑 잘 어울린다고 한참을 쓰다듬고 감상하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지해는 또 다른 의미로 모골이 송연했다. 이 새끼는 맛이 갔다. 확실히. 그리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나. 배경음으로 계속 깔려주던 CD가 포터블 플레이어의 건전지가 다 되었는지 버석거리는 모래 먼지로 한 꺼풀 덧씌운 것 같은 잡음을 내다가 순식간에 뚝 끊겨버렸다. 헐떡이는 자신과 정욱의 신음 소리가 골고루 뒤섞인 민망한 이중창에 이제는 오히려 귀가 익숙해져 있어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이 당황스러울 정도다. 좆터지게 재밌는 거 들려줄게, 하면서 플레이어의 스위치를 켤 때 물론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려나 싶었지만, 설마 그 누구를 시켜서 이런 짓까지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가지고 탓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의 의도를 순수한 친절로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을뿐.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이 생생한 카섹스 녹음 실황의 몰카 버전이 강회장의 손에 건네져 있다는 얘기는 진위 여부를 따지기 전에 얘기만으로도 악 소리가 절로 나는 충격. 물론 그 테입의 또 하나 카피본은 이 습기찬 지하실 안에도 있다. 틀지 못 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이 지하실 안에 콘센트가 제 구실을 못 하고 있기 때문. 그 점은 예상을 못 했었는지 경서는 짜증을 벼락같이 냈고, 밖에 있던 꼬붕 한 놈을 불러 길게 이을 전선을 사러 보냈다. “아, 니미럴. 분위기 좋은데 왜 갑자기 꺼지고 지랄이야!” 경서는 아무래도 이 BGM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다. 심부름 보낸 놈이 빨리 안 돌아온다고 계속 신경질을 부리다가 결국은 툴툴거리며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갔다. 문이 세차게 쿵 소리를 내며 닫히고, 이윽고 문 앞의 센서등이 꺼졌다. 지해는 몇 시간만에 얻은 정적에 휴우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빛자락 하나 들어오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하실. 요새도 이런 집이 있나 싶을 정도로 휑하게 넓기만한 죽은 공간. 요즘 같으면 이런 공간이라도 어딘가에 이용하지 않을까. 낡은 등나무 소파 한 세트와 나무를 땔 수 있도록 만들어진 커다란 구식 난로, 녹슨 연통. 간간이 눈앞을 지나가는 바퀴벌레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쥐새끼들. 그리고 이 침침한 공간 전체를 장악한,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을 자랑하는, 수십, 수백 종류의 컬러풀한 곰팡이들. 서울이 아닌 건 분명하고, 사람들 많은 번화가와도 좀 떨어져 있는 듯. 아까 꼬붕 놈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도 외진 시골 구석이 어쩌구하며 이 근처에 그런 거 살 데가 어딨냐는 등의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다. 어디일까. 여기는. 그리고 언제까지 이 상태로 놔둘 셈인지. 제기랄. 준비 체조 10분 이상 하는 거 봤냐. 뭘 원하는 거야. 날 어떻게 할 셈이냐. 사실은 좀 무섭다. 정욱이 할배 손에 그 테입이 전해졌다는 뉴스가 너무 쇼킹해서 귓전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 아직도 머릿속이 얼얼하다. 너무 놀라서 힘이 빠진 심신에는 그놈의 히스테리컬한 웃음소리가 무수한 유리 파편처럼 아직도 촘촘히 박혀 있다. 무서워. 정욱아, 나 무서워. 무덤 속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봤자, 들리지 않는다. BGM : (Pirate Jenny - Nina Simone)☜ CLICK!!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이 어깨 위로 무겁게 느껴지더니, 어느샌가 굵은 빗방울이 투두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잠깐 사이에 좍좍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로 발전, 현재 상태는 세찬 바람을 동반한 폭우. 이렇게 비가 엿같이 오는 날, 오토바이로 강원도의 국도를 달리는 건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구비구비 험난한 고갯길에서 몇 번이나 장렬하게 미끄러질 뻔한 고비를 넘긴 정욱은 결국 속도를 줄이고 말았다. 망할 놈의 싸구려 오토바이. 이럴줄 알았으면 너무 눈에 띈다 싶건 말건 바꾸지 말고 그냥 둘걸 그랬다. 그때는 될 수 있는 대로 튀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생각이었고, 마음이 너무 급한지라 이것저것 따질 새도 없었건만.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이 이렇게 다르다. 팔당대교를 지나 양평을 거쳐 홍천까지 다다랐을 때는 길이 수월한 편이라 그나마 빗길에도 이 정도로 힘겹진 않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정표도 잘 안 보이고 길도 어렵다. 빗줄기 사이로 희미한 그림자만 어른거리던 해가 그나마 고개 너머로 푹 가라앉았는지 순식간에 주변이 어둑해졌다. 간혹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심어놓은 것처럼, 없다는 소리 결코 못할 정도로만 사이드에 세워져 있는 야광패널들이 드디어 그 존재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한강 다리의 소란스런 야경에 익숙해진 눈에는 너무나 낯설고 답답하기만 하다. 게다가 이 악천후. 용서없이 퍼붓는 비. 살갗을 뚫고 들어와 혈관으로 스며들어 심장까지 뚝뚝 듣는 빗물. 머릿속에도 마음속에도 온통 비가 내린다. 피할 수가 없어. 이 비는. 그래도 언젠가는 그치겠지. 그 때까지, 이 비가 멎을 때까지 그냥 계속 간다. “씨발, 웬 놈의 비가!” 경서가 들릴 듯 말 듯한 욕설을 내뱉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머리와 어깨가 온통 젖어 있다. 그 뒤로 스르르 문이 아주 천천히 닫히면서 쏴쏴 맹렬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경서의 꽁무니를 따라 서서히 들어오고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해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로테스크한 무늬로 얼룩진 눅눅한 벽면, 있으나마나한 침침한 불빛, 바닥에서 올라오는 을씨년스러운 냉기. 뭔가 굉장히 낯익다 싶었더니 중학교 때 수학여행 가서 봤던 옛날 고분 속과 비슷하다. 왕이든 왕 할아버지든 죽은 자가 누워있던 곳이라는 생각에 괜히 머리끝이 쭈뼛 서는 듯 기분 안 좋던 기억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자신을 위해 마련된 바로 그곳인가 생각하니 어이없는 웃음만 나온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여기 묻히게 된다면 결코 혼자 가지 않아. 살아서 나간다면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네놈이지만, 이 다음 행선지가 저승이라면 절대 나 혼자 갈 수는 없어. 너도 같이 데려가주마. “뭘 그렇게 봐∼∼ 아가씨∼?” 노려보는 지해의 시선을 느꼈는지, 경서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징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테이프로 입이 봉해져 말 한 마디 내뱉을 수 없는 지해의 얼굴이 혐오감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자꾸 열불을 내? 여유를 가져, 여유를.” 비 때문에 성질 부리던 건 어디로 갔는지 천연덕스럽게 눈웃음을 치고, “천천히 즐기자구. 시간 많으니까.” 얼굴을 바싹 코끝이 서로 마주닿을 정도로 가까이 들이민다. 지해가 반사적으로 눈쌀을 찌푸리며 얼굴을 옆으로 돌리자 머리채를 꽉 움켜잡아 억지로 고개를 틀어 자신의 얼굴을 보게 한다. “왜 그래. 벌써 지친 거야? 그러면 안 되지. 난 너랑 이것저것 다 해 보면서 오∼∼랫동안 놀고 싶거든? 시시하게 빨리 끝낼 생각 추호도 없거든?” “………….” “그럴려면 네가 오∼래 버텨줘야 돼.” 눈알이 튀어나갈 정도로 힘을 주고 노려보는 지해의 눈을 지그시 마주 보더니, “우리 지금 뭐하고 놀까?” 분명치도 않은 발음으로 아주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묻고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 그래!’ 하며 지해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밧줄을 끌르기 시작했다. “우리 줄긋기 놀이하고 놀자.” 밧줄을 다 끌른 후 경서는 허리에 걸친 힙합 청바지 주머니에서 날렵한 잭 나이프를 꺼내 탁~ 하고 접혀진 날을 세웠다. “그 다음은 의사 놀이.” 철컥. 끝에 다다른 비디오테입이 되감기는 소리로 1,2 초 남짓하던 팽팽한 침묵이 어이없이 깨어졌다. 지나온 발자취를 되밟아 윙~ 달려가는 기계음을 들으며 지해는 그제서야 아까부터 TV가 그냥 컴컴한 진공 상태로 아무 그림도 띄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초의 충격도 잠깐, 아침부터 온종일 똑같은 그림을 보고 있다 보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완전히 무감각해졌다. 어떤 상황이든 익숙해지는 것은 의외로 쉬운 일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래도 이 허기만은. 아, 배고파. 배가 고프다 못해 이젠 감각도 없고 뭐가 뭔지도 잘 모를 지경. 잡혀온지 사흘인데, 그동안 물 몇 모금 외에는 아무 것도 못 얻어먹었다. 긴장과 공포와 분노로 배고픈 것도 잊었었지만, 문득문득 치고 올라오는 공복감은 마냥 잊고만 있기에는 너무 괴롭다. 인간은 이런 난관에서도 배고픔을 느끼는 서글픈 동물. 그나저나 이 새끼는 오랫동안 놀고 싶다면서 왜 먹을 걸 안 주는 거지. 촌스럽게 굶겨 죽일 셈인가. “어이, 아가씨! 무슨 생각해?” 잠깐 맥이 끊겼던 사이를 손가락을 튀겨 탁탁 소리를 내며 경서가 다시 비집고 들어온다. “어따 한눈을 팔아. 나를 봐야지.” 비열한 새끼. 가래침이라도 퉤 뱉어주고 싶은데.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입을 이렇게 막아놓았으니. “썅. 누가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보래? 이쁘게! 다소곳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화를 버럭 내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 지해는 이 미친 놈을 멀건히 쳐다보기만 했다. 비웃는 듯한 시선에 더욱 울화가 치밀었는지 벼락같이 달려들어 멱살을 잡는다. “하긴, 그러면 좀 재미가 없으려나?” 금세 표정을 싹 바꿔 픽 웃으며 멱살을 잡았던 손을 좀더 위로 번쩍 쳐든다. 헐렁한 T셔츠가 붕 떠서 옷 속으로 서늘한 공기가 기어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 미지근한 손등. 까끌까끌한 소맷부리. 턱 끝에 뾰족한 아픔이 달리고, 지해는 순간 숨을 삼켰다. “쎈 척 하면서 무섭긴 무섭나 보네?” 꽤나 기분이 좋은가 보다. 흡족한 콧소리를 내며, 칼날로 턱 주위를 면도하는 것처럼 살살 건드리던 경서는 별안간 칼끝을 90도로 세워 콧잔등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들이댔다. 칼날이 스치며 또 베었는지 턱선이 따끔거려 지해가 인상을 쓰자, 칼자루 끝으로 쇄골 사이 움푹 파인 곳을 꾹 누른다. 컥 숨이 막혔다. 「엄마∼! 잘못했어요! 살려줘요∼!」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망령같은 옛날 기억에 등골에서 식은땀이 나고, 눈밑의 얇은 피부가 파르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가씨는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었어?” 지해의 반응을 굽어보며 매우 만족한 듯, “나는 말이야. 꼰대들이,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래, 그러면…” 경서는 칼끝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빙글빙글 돌려댔다. 그러더니 놀고 있던 왼손으로 갑자기 T셔츠 끝자락을 팽팽하게 당겨서는, 칼날을 셔츠 목둘레의 중간쯤에 세워 순식간에 북 뜯어 내려온다. “…뭐라 그랬∼게?” 가운데에서 찢겨져 갈라진 T셔츠 자락을 양쪽으로 확 펼쳐 가슴팍이 드러나도록 해놓고,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감상하며, “의사. 의사가 된다고 그랬거든?” “………….” “의사 될려면 얼마나 공부를 해쳐먹야 되는지 애새끼가 뭘 알겠어? 그치?” “………….” “그래서 그따구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씨부린 거야.” 칼을 수직으로 살짝 던졌다 캐치했다를 반복하다가 언뜻 칼이 옆으로 엇나가 지해의 몸 위로 떨어져 꽂힐 뻔하자, 웁스! 하고 받고는 쏘리∼ 라며 웃었다. 비릿한 눈웃음 속에 저급한 악의가 가득차 있다. “그래도 이거 한 가지는 꼭 해보고 싶더라.” 배가 홀쭉해졌네. 쯔쯔. 배고팠지? 따위를 지껄이며, 드러난 배를 살살 쓰다듬는 끈적끈적한 손길. “욕 중에 그런 말 있잖아. ‘창자 끄집어내서 줄넘기할 놈’이던가? 그런 말 몰라? 몰라? 진짜 몰라?” 지해는 이를 악물고 두려움으로 뛰는 가슴을 억눌렀다. “몰라도 할 수 없어. 어쨌든 그런 말이 있거든? 어디서 내가 들어본 것 같다 이 말씀이야.” 뭐, 없어도 할 수 없고, 하고 덧붙인 경서는 칼날 끝으로 지해의 가슴팍 정중앙을 가볍게 찔렀다. “우선 줄긋기 놀이부터.” 가느다란 빨간 핏줄기가 서너 줄 새하얀 피부 위를 달렸다. 산 속의 저녁은 어둡고 춥다. 비가 오지 않아도 춥다. 하물며 하늘에서 물을 빠께쓰로 들이붓고 있는 것 같은 지금이야. 속옷까지 완벽하게 풍덩 젖어서 커다란 물주머니 몇 개를 몸에 두르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싸늘하게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어 얼음장같이 차갑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운동화 속에서는 쿨쩍쿨쩍 물소리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그치지 않는 비. 빗속을 가고 있는 것인지, 옷을 입은 채 물 속을 헤엄치고 있는 것인지 점점 알 수가 없어진다. 초저녁인데도 한밤중처럼 깜깜한 고갯길. 길 오른쪽 옆, 혼자 덩그마니 서 있는 주유소와 그보다 훨씬 멀리 보이는, 산 중턱 깊숙한 곳에서 내보내는 작은 불빛 하나만이 지금 느낄 수 있는 인간의 흔적의 전부. 그 빛에 의지해서, 그 빛을 향해, 온몸에 달라붙는 어둠을 헤치고 달렸다. 구원처럼 여겨지는 주유소의 불빛 안으로 빨려들 듯 다가가서 사무실의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자, TV를 틀어놓은 채 뭔가 챙기며 부산을 떨던 40대 아저씨가 깜짝 놀라 뛰쳐나온다. 바이크에 휘발유를 넣어주면서 이 빗속에 어쩐 일이냐고 수선을 떠는 주인에게 그 산중턱 또 하나의 불빛이 목표지임을, 자신이 맞게 찾아온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학생, 그 별장까지 정말 가는 거야?” 젖은 지갑 속에 들어있던 젖은 지폐로 기름값을 내고 바이크에 올라앉아 헬멧을 고쳐 쓰는 정욱에게 주인이 물었다. 정욱은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지금 올라가면 위험해. 이눔의 비, 이대로 계속 오면 산사태 나기 십상이야. 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막 챙겨서 대피하려던 참이라구. 그리구 거기 아까 오전에도 차 한 대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 같던데, 올라가봐야 아무도 없을지 몰라.” 산사태니, 위험하니,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차 한 대가 왔다갔다 했다니, 혹시 거기서 뜨기라도 한 건가, 벌써 무슨 일을 저질러버린 건 아닌가. 잠깐이라도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쨌든 감사하다고 중얼거리고 시동을 거는데, 번쩍 전기가 나갔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둘이 황망하게 서 있는 동안 몇 초만에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마음이 급해져 얼른 출발하려는 정욱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아저씨가 사무실 안에 뛰어들어가 조그만 손전등을 가지고 나왔다. 이러다가 전기 또 나가면 큰일이라며 받아두란다. “이 빗속에 무슨 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 조심해.” 그러면서도 웬만하면 그냥 자기랑 같이 내려가자고 하는 아저씨에게 정욱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주유소를 빠져나왔다. 처음 말을 걸었던 날, 처음으로 키스를 나누었던 날도 비가 왔었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던 경쾌한 발자국. ‘빨리 올라가, 감기 걸려’하고 손을 흔들며 깔깔 웃던 얼굴. 방수 잠바에 달린 후드 모자를 한 손으로 눌러쓰고 횡단보도를 건너 뛰어가던 그 모습. 속도를 올리자, 부웅∼ 하는 엔진음이 빗소리를 뚫고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꽉 채워진 머리는 더 이상 어떠한 설명도, 어떠한 분석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비오는 날에는 특유의 비린내가 있다. 끈적끈적한 습기가 몰고 오는, 공기 중을 떠돌던 오만가지 잡냄새들. 맑은 날 그냥 지나치던 냄새들도 비오는 날이면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업그레이드되어 콧속 깊이 들러붙는다. 그래서일까. 지금 코 끝을 찌르는 피 냄새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역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 이제 좀 보기가 좋구만~” 두 개의 유두 사이를 잇는 빨간 줄에서 쉴새없이 뚝뚝 방울져 흐르는 핏줄기를 보며 경서가 말했다. 이미 셀 수 없이 얕고 길게 베여 무질서한 줄이 난잡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가슴팍을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는 시선으로 훑어보다가, 이번에는 여기, 하면서 배꼽과 옆구리의 중간쯤 되는 곳을 푹 찌른다. 잔뜩 긴장한 복근 때문에 어느 이상 칼이 들어가지 않고 걸리자, 인상을 잔뜩 쓰며 힘을 준다. 단단한 근육을 찢으며 칼날이 박혀 들어오는 순간, 날카로운 동통과 함께 뜨뜻한 기운이 상처의 주위를 맴돌았다. 딱딱하게 움츠려든 피부층 속에서 칼끝을 억지로 한 바퀴 돌려주고 불시에 세차게 잡아 뽑자, 피가 주르르 뿜어나온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오는 아픔. “앗, 쏘리쏘리∼! 힘 조절을 못 했나 봐. 너무 깊이 박혔었잖아.”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즐거운 듯이 말하는 놈의 얼굴을 아픔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려본다. “니미. 이러다가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골로 보내겠네. 줄넘기 한번 해보려고 창자도 비워놨는데.” 이 씹어먹어도 모자랄 노무시키. “드러운 건 싫거든.” 죽여버린다! 정말 죽여버릴 거야!! 지해는 말이 되지 않는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상처 입은 부자유한 몸을 있는 힘껏 거세게 틀고, 족쇄에 묶인 발을 허공에 뻥뻥 차며 요동을 쳤다. 놈은 유유히 팔짱을 끼고 여유있게 그 모습을 관망하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상처가 벌어지고, 출혈만 심해져 몸의 고통만이 더해갈뿐 사슬은 풀리지 않는다. 비참한 현실에 지해는 이를 악물었다. “거봐∼ 왜 설쳐. 아프잖아∼∼.” 경서가 빙글빙글 웃으며 몸을 굽히고 눈을 맞춰와 지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허리를 더 깊숙히 숙여 시선을 따라붙는다. 언뜻 눈을 돌리는데, 바싹 다가와 깊이 수그린 경서의 잠바 주머니가 벌어져 그 속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안에 들어있는 것이 쏟아져 떨어질 듯 말 듯 한다. 지갑과 핸드폰. 그리고 열쇠 하나. 정신이 버쩍 든다.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눈치채일까 싶어 지해가 고개를 돌리자, 놈이 또 시선을 따라붙느라 몸을 더 숙인다. 주머니 속에 위태위태하게 자리잡고 있던 열쇠가 떨어질락말락 한다. 가슴 속에 번지는 묘한 두근거림. “이번엔 여기랑 여기를 이어볼까?” 왼쪽 유두를 아프게 집어 올리며 칼끝으로는 방금 생채기를 낸 곳을 건드린다. 살갗에 또 하나의 줄을 긋는 동안, 지해는 아픔도 잊고 아슬아슬하게 주머니를 벗어나 낙하하는 열쇠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칼부림에 도취한 경서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열쇠는 바닥에 널부러진 지해의 찢어진 티셔츠 자락에 조용히 착지했다. 조금만 빗나갔어도 콘크리트 바닥에 쨍강 소리와 함께 떨어졌을 것이다. 지해는 뒤로 묶인 손으로 옷자락을 조심스레 당긴 뒤 허리를 살짝 틀어 열쇠를 가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살살 뻗어 열쇠를 천천히 엉덩이께까지 끌고 왔다. 어디 열쇠일까. 문? 수갑? 아니면…. 난자당한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는 자신도 잊은 채, 지해는 마음의 술렁거림을 감추고 태연을 가장하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최대한 안 보는 척 하며 옆눈길로 기둥의 사슬을 살핀다. 천장의 하중을 충분히 받치도록 기둥의 굵기는 성인 남자 팔로도 한 아름이 족히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 기둥을 감고 있는 사슬은 두툼한 자물쇠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칼로는 뱃가죽 뚫기가 생각보다 어렵단 말야.” 경서가 칼을 휘휘 휘둘러보며 말했다. “이왕 의사놀이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지? 그치?” 지해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내내 밖에 있던 꼬붕 녀석이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지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듣자 하니, 산사태의 위험이 있다고 대피하라는 전화가 왔나보다. 전화를 직접 받은 놈이 겁을 먹고 다급하게 말하는데, 경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한참의 옥신각신 끝에 꼬붕 녀석이 저 혼자서라도 차 몰고 뜰 거라고 버럭 고함을 지르고 계단을 쿵쾅쿵쾅 올라갔다. 경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뒤를 쫓아 올라갔다. 경서가 올라가자마자, 지해는 얼른 열쇠를 집어 수갑의 열쇠 구멍에 맞춰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당연히 잘 되지 않는다. 두 손이 같이 묶여 있기 때문에 열쇠구멍 입구에 열쇠 끝을 갖다대는 것조차 어렵다. 게다가 손목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점 수갑이 조여드는 느낌이 든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뒤로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톱니가 일반적인 것과 반대 방향으로 되어 있다. 힘을 줄수록 오히려 톱니가 하나씩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이다. 지해는 일단 수갑 열쇠를 맞추어보는 걸 포기하고, 전력을 다해 엉덩이를 질질 끌어 기둥으로 다가갔다. 간신히 기둥까지 가자, 땀이 비오듯이 흘렀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다. 경서 놈이 이걸 보면 단박에 눈치를 까고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놈이 돌아오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한다. 자물쇠가 지금 주저앉은 자리에서 가슴 높이 정도 되는 곳에 있어 지해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세워야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상처난 곳들이 아프긴 하지만 참을 만은 하다. 아마 서서히 레벨을 높여가며 여기저기 찔러대다 죽일 생각이었는지 아직 깊은 곳까지는 다치지 않은 듯. 사투 끝에 가까스로 자물쇠의 열쇠구멍에 열쇠 끝을 맞추어 꽂아 넣었다. 들어간다. 자물쇠 하나 따는 게 이렇게 힘들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고 지해는 혀를 찼다. 왼쪽으로 돌리자, 자물쇠가 어이없이 너무나 쉽게 열렸다. 열린 걸 도로 잠글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저 놈을 끝장내고 여기를 나가야 한다. 이 길다란 쇠사슬을 질질 끌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전에. 등 뒤로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 방법은 단 하나. 지해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이를 악물고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손가락의 방향을 잘 맞추어 비틀며 있는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엄청난 아픔. 용을 쓰느라 몸에 주어진 압력 탓인지 벌어진 상처에서 다시 피가 뚝뚝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생리적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삼키며 왼손을 수갑에서 빼냈다. 사흘 내내 부자유스런 자세로 틀어진 채 삐걱거리던 어깨와 등을 겨우 피고 잠깐 심호흡을 하는데, 끼익 하고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탈골된 손가락뼈를 다시 맞출 새도 없이, 지해는 오른손에 수갑을 꽉 움켜쥐며 숨을 죽였다. BGM : Perfect Drug - Nine Inch Nails 긴장으로 뻣뻣하게 곧추세운 등에 땀방울이 도르르 굴러내렸다. 철벅철벅 운동화 속에 스며든 물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지해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기둥의 사슬은 자물쇠만 살짝 열렸을 뿐 아직 기둥을 둘둘 감은 채 그대로 였다. 몸을 기대기 위해 움직인 것처럼 자물쇠 부분을 등으로 가리고 있으면 금방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혹시라도 열쇠 떨어뜨린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 지해는 긴장하며 경서의 기색을 살폈다. 하지만 저놈으로서는 지금 여기에 신경쓸만한 상황이 아닌 듯. 힙합 청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는 새빨간 피로 온통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머리에 뒤집어쓴 흰색 야구 모자와 입과 턱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에도 피가 잔뜩 튀어 있었다. 눈언저리는 그나마 소매부리로 쓱쓱 문질렀었는지 얼굴을 가로질러 미처 다 닦아지지 않은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빼꼼히 유난히도 푸르스름하게 번뜩이는 두 눈동자. “너 사람 안 죽여봤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묘하게 들뜬 목소리. “피가 돼지처럼 많이 나와.” 아아, 이 새끼는 정말……. “피바다라고 들어봤냐? 피바다.” 피바다, 피바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지 몇번이고 중얼중얼거리다가, “나 거기서 미끄러졌잖냐.” 슬라이딩 세이~~프, 하고 과장된 소리를 지르면서 펄쩍 뒤로 돌아 엉덩이를 쑥 빼고 싯뻘겋게 피로 물든 등판과 바지 뒤쪽을 보여준다. “너는 그만큼 나올랑가 모르겠다. 이미 쪼매 뽑아놔서리.” 천천히 다가오는 젖은 발소리. 빨갛게 질퍽하게 젖은 소리. 맹렬히 쏟아지는 빗소리도 씻어내려주지 못하는, 새빨간 핏물이 운동화 깔창에 스며들며 발바닥 밑에서 질척거리는 소리. “확실히,” 웃으며 핥듯이 쳐다보는 끈적끈적한 눈초리.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으로 충혈되어 묘한 광기를 뿜어대고 있는. “너는 어떻게 해 놔도 입맛 당긴단 말야.” “…….” “이 꼬라지를 하고도 이만큼 먹음직스럽기 정말 쉽지 않지.” 온몸에 피로 물든 상처투성이에 웃옷은 갈기갈기 다 찢어져 넝마조각처럼 되어 있고, 꼼짝도 못 하게끔 쇠사슬까지 채워 묶어둔데다가 입까지 꽁꽁 막아놓은 비참한 형상. “너무 이뻐서 요대~로 계속, 영.원.히, 길러주고 싶을 정도야.” “………….” “그럴까?” “………….” “응?” “………….” “그냥 그래버릴까?” 거의 코 앞까지 다가온 경서의 바지 앞섶은 눈에 확연히 띌 정도로 팽팽하게 불룩해져 있었다. 지퍼도 반쯤 느슨하게 내려가 있고, 단추도 제대로 안 채운 것이…… 사람을 죽여놓고 그 앞에서 무슨 짓을 하다가 온 걸까. 설마. “역시 뒈진 놈은 싫어. 똥이나 질질 싸고.” 지해는 경서에게 머리채를 확 움켜잡혀 억지로 얼굴을 쳐들렸다. 미친 눈. 어느 한 구석 끄트머리 손톱만큼이라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인간은 완전히 빠져달아나고 오로지 악귀만이 점령해버린. 눈빛. “나, 섰거든?” 여전히 머리채를 꽉 틀어잡은 채로 지해의 얼굴을 끌어다가 바지 앞에 불룩 텐트친 자신의 물건에 뺨을 살살 문지른다. 옷 너머로 딱딱한 쐐기가 살짝 닿은 얼굴에 소름이 오싹 끼치며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혐오감으로 뱃속에 토기가 일었다. 경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노려보는 지해를 흥분에 겨운 눈으로 잠깐 내려다보더니 입에 붙여놓았던 테입을 단숨에 찌익 잡아당겼다. 살갗이 벗겨지는 듯한 따가움에 반사적으로 얼굴에 손이 올라갈 뻔한 것을 지해는 아차하며 순간적으로 참아냈다. 여전히 수갑이 잘 채워져 있는 것처럼 양손을 뒤에 모으고 얌전히 열중쉬어를 하고 있는데. “빨아.” 아직은 들킬 때가 아니다. 정면으로 들이대는 ‘그것’. 솟구쳐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누르려 일단 눈을 잠시 감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입을 갖다대려는데, 갑자기 이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머리채를 꽉 움켜쥐며 얼굴을 떼어놓는다. “아니지.” 지해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너는 못 믿어.” 뭐야. 정신 든 거야. 미치긴 잔뜩 미쳤으되 딱 제 몸 상하는 건 아직 겁날 정도까지만 미쳤는지. 아까워라. 지해가 피식 웃자, 경서는 내동댕이치듯 머리채를 탁 놓았다. 그 다음은 귀싸대기 한 방 철썩 올려붙이고 어깨에 거칠게 두 손을 얹는다. 이런, 이런. 명백히 몸을 뒤집으려는 의도다. 뒤로 받게 할 셈이겠지. 제딴에는 그 편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테니. 모 아니면 도다. 지해는 오른쪽 손목에 아직 끼어진 채로 오른손에 모아쥐고 있던 수갑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촉촉히 배어나와 미끈거렸다. “근데 말이야.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경서가 지해의 귓전에 얼굴을 아주 가까이 대고 물었다. 목덜미에 감기는 후끈한 입김이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빴다. “…너 왜 여기까지 와 있어?” 경서의 눈길은 지해가 질질 몸을 끌고 기둥까지 오느라 바닥에 길게 난 핏자국에 향해 있었다. “쓸데없이 까불지 말랬지?!!!!” 어깨를 잡은 두 손아귀에 비트는 힘이 강하게 주어지는 순간, 지해는 경서의 왼쪽 눈을 겨냥해 오른손을 힘껏 내질렀다. 아아아악, 동물같은 비명과 함께 경서는 손으로 눈 주위를 덮은 채 잠시 주춤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손바닥 밑으로 뺨를 타고 몇 줄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경서가 얼굴을 옆으로 돌려, 손에 틀어쥐고 있던 수갑은 눈을 빗겨나가 눈썹과 귀의 중간쯤, 관자놀이와 광대뼈 사이쯤에 빗맞고 그대로 얼굴을 깊게 주욱 할퀴며 턱까지 내려왔다. 수갑 끝에 경서가 지금까지 절대로 벗지않고 고수하던 마스크 끈이 걸려 벗겨졌다. 지해는 잠깐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잔뜩 비틀려 어그러진 채 퉁퉁 부어오른 입 주위와 턱. 한때 잘 나가던 모델 최경서의 얼굴이 정말 저것인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이 얼굴과 청바지 광고로 한 끝발 날리던 그 얼굴을 매치시켜낼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지체할 겨를이 없다. 지해는 저 밑바닥에 마지막 남겨 있던 힘을 다해 일어나 계단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어정쩡한 포즈로 꼼짝도 못하게 묶여있던 다리는 뜻대로 민첩하게 움직여주지 않았어도 주인의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둥에 감긴 사슬이 철커덩철커덩 풀려 바닥에 기분 나쁜 쇳소리를 새기며 끌려왔다. 몇 걸음이나 뗐을까. 계단쯤까지 다 왔을 때,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씨발, 어딜 가, 이 새꺄!!!!!” 정신을 추스린 경서가 사슬 끝을 팽팽히 잡아당기고 있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전진하려고 해봤자 발목이 단단히 얽어매인 사슬은 절대로 지해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상체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발 한쪽은 뒤로 세게 당겨져서 몸의 균형만 무너지고 있었다. 뒤에서 당기는 거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해가 털썩 고꾸라지자 경서 놈이 사슬을 끌어당겨 지해는 그 힘에 조금씩 뒤로 딸려 갔다. 어떻게든 쉽게 끌려가지 않으려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며 안간힘을 쓰는 손톱 끝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너, 이 씹새끼. 네가 감히…!!!!! 감히!!” 낡은 소파의 깡뚱한 다리를 간신히 꽉 잡았던 것도 잠시, 지해는 무섭게 당기는 힘에 의해 서서히 질질 끌려갔다. 난자당한 상처가 바닥에 쓸리는 아픔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너한테는 안 죽어. 살아서 여기를 나갈 거다. “일루 와!!! 당장 죽여버릴 거야, 씹쌔끼!!!!!” 경서는 발버둥치는 지해의 다리를 양손으로 한쪽씩 각각 붙잡아 팍 잡아당기고는, 옴짝달싹도 못 하도록 자신의 무릎으로 두 다리를 찍어뭉개듯이 꽉 눌렀다. “조까지마!!! 죽더라도… 네놈부터 먼저 죽이고…!!!!!! 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빗소리는 점점 더 요란해지고, 계단을 타고 빗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은 습한 열기와 둘이 내는 격한 소리들로 가득찼다. 경서는 지해가 스스로 엄지손가락 관절을 뽑아 수갑을 벗어던졌던 왼쪽팔을 잡으러 손을 뻗었다. 지해는 손가락에 집히는 부스러진 작은 시멘트 조각이나 바닥에 굴러다니던 자갈, 모래 따위를 닥치는 대로 뒤로 던져댔다. 그러던 중 모래 알갱이가 눈에 들어갔는지 경서가 눈을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씨바, 이 독한 쌔끼! 누구 맘대로 감히…!!! 누구 맘대로!!!!!!!” 어디선가 희미하게 오토바이 엔진 소리 같은 것이 난다 싶었을 때, 지해의 움직임이 잠깐 멎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경서가 지해의 왼팔을 뒤로 꺾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뼈가 어긋나며 꺾이는 아픔과 다친 왼손을 꽉 쥐고 비트는 무시무시한 고통에 지해는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비명을 울렸다. “어디 맛 좀 봐라, 이 새끼.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 줄 테니.” 경서는 연신 중얼중얼 주문같은 욕을 지껄여대며 뒤쪽 허리춤을 잡아당겨 지해의 바지를 쭉 내렸다. 찬 공기가 맨살로 드러난 엉덩이에 닿는 것이 느껴지고, 지해는 필사적으로 몸을 버둥거려 경서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경서가 왼손으로는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늑골 측면 부분을 움켜쥐고 지해의 상체를 들어서 오른손으로 옆구리에 주먹을 몇 방이나 세게 강타했다. 지해는 욱 하는 신음과 함께 쿨럭쿨럭 마른 기침을 하며 힘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경서는 그 사이를 틈타 지해의 바지를 발목까지 한번에 잡아내렸다. 뒷통수에 둔탁한 충격이 달리면서 온 세상이 단숨에 껌껌한 눈꺼풀 안으로 쑥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엉덩이 사이 굳게 닫혀진 입구에 와닿는 그 무엇. 좁은 문을 비집어 꽂아 넣으려고 억지로 쑤셔박을 듯이 찢으며 들이미는. 거의 그와 동시에. 엄청난 기세로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문짝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활짝 열어젖혀진 문으로 지면을 뚫을 것처럼 요란하게 퍼붓는 빗소리,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천둥번개가 볼륨을 한큐에 맥시멈으로 높인 양 급작스럽게 확대되어 들렸다. 그 사이로 철벅철벅 물웅덩이가 생긴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다급한 발소리.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 무슨 일일까. 누굴까. 지해는 자꾸만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귀를 기울여보려 했지만 의식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듯 정확히 머리로 전달되지 않았다. 몸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휘둘리다가 바닥에 가차없이 내동댕이쳐지는 느낌. 그리고는, 엎치락뒤치락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소리가 스폰지 뭉치로 머리를 한 겹 감싼 것처럼 멀고 답답하게 들려왔다. 퍽퍽 살가죽에 주먹 부대끼는 소리,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과 욕지거리와 다른 또 한 사람의 낮은 말소리. 그 말소리의 울림과 파장이 귀에 익다고 막연히 느낀 순간, 문득 그것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지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환각일까. “정욱…아……” 흘깃 되돌려주는 눈길 속에 번뜩 불꽃이 일더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가 스러진다. 몇분의 일초에 불과한 짧은 순간 동안에도 그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나고, 저 놈이 저 놈이기 때문. 특유의 차가운 듯, 근엄한 듯, 화난 듯, 슬픈 듯 복잡미묘한 무표정도 그 껍질 속이 다 들여다보여. 너무나도, 너무나도, 너무나도 익숙하게. 환각 따위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 것이냐. 맨처음 뇌리를 스치는 안도감에 뒤이어, 그 다음은 가슴 저미는 감격. 비맞은 생쥐꼴로 쫄딱 젖어 나타난 놈에 대한 일차적인 걱정. 그리고 그 모든 잡다한 감정의 잔물결들을 순식간에 덮어버리는 해일같은 수치심. 죽은 사람도 일으켜 펄쩍 뛰게 할 수 있을 만한 엄청난 굴욕감에 지해는 황망히 몸을 추스르려 애썼지만 애달픈 시도는 번번이 떨리는 무릎에 꺾였다. 왜 이런 꼴을 보여야 할까, 왜 하필. 저놈한테. 잠깐 정욱이 한눈 판 새를 경서는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뜨려진 채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던 경서는 그 틈을 타 벌떡 튕겨 일어나 정욱의 목을 끌어안으며 와락 덮쳐 눌렀다. 정욱은 중심을 잡으며 반 발짝 기우뚱 뒤로 물러나다가 발치에 있는 소파 팔걸이에 걸려 소파에 등을 대고 쓰러졌다. 그 위로 경서의 무게가 실리며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경서는 양손으로 열심히 정욱의 목을 조르는 한편 한쪽 다리로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칼을 질질 끌어오고 있었다. 양 어깨를 꽉 틀어잡아 떠밀며 봉쇄하는 정욱의 손힘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경서는 최후의 발악인 듯 온몸의 혈관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힘을 주며 손아귀에 가득 움켜잡은 정욱의 목에서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지해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몸을 일으켜 꿈틀꿈틀 낮은 포복으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반쯤 다가갔을까 갑자기 세상이 반으로 쩍 쪼개지는 양, 주위가 번쩍하는 요란한 번개와 함께 지하실 안은 캄캄한 암흑으로 변했다. 원래도 그다지 밝지 않은 곳이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갑자기 순식간에 그 빛을 모두 잃고 보면 더욱 더 어둡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지해가 본능적인 감으로 칠흑같은 어둠 속을 그대로 전진해 손이 경서의 발치에 닿을 정도까지 기어갔을 즈음에는 이 갑작스런 암흑 상황에도 눈이 웬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지해는 경서의 발에 꽉 밟혀 있는 칼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왼손은 전혀 쓸 수 없이 완전히 무용지물인 채 오른손 한 손만으로는 조금 벅찬 노릇이었지만, 그 실랑이 와중에 경서의 발끝이 균형을 잃으면서 엉겁결에 칼을 차냈다. 그리 멀리 미끄러져 나가지 못한 칼을 지해가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해 경서의 목뒤 가운데 움푹한 급소에 내리꽂은 것과 밸런스가 무너져 손끝의 힘이 빠진 경서의 명치를 정욱의 무릎이 강타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끊임없이 퍼붓는 비도 비였지만, 아까부터 몇번이나 계속 우르르꽝꽝 치던 천둥 번개 때문에도 이 주위에 뭔가 말썽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지하실 안으로 빗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폭포수처럼 밀려내려오는 물줄기를 거슬러 저 계단을 오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로 보였다. 둘이 잠시 지칠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몸을 추스르며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삽시간에 지하실 안은 무릎까지 물이 차 올랐다. 그 위로 엎드린 경서의 시체가 망가진 마네킹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리 와.” 정욱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아직까지 서먹서먹하니 시선을 피하고 있던 둘은 그제서야 제대로 눈을 맞추었다. 팔을 들어 그 품 안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추어를 하는 정욱을 잠깐 바라보다가 지해는 그냥 두 말 않고 그 몸짓을 따랐다. 지해가 옆으로 다가오자 정욱은 힘을 주어 그 몸을 감싸 안았다. 둘의 눈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꽉 잡아, 라고 정욱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염치불구하지만 이 품은 정말 안심이 된다고 지해는 다시 한번 생각하며 정욱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둘은 거센 물살의 용서없는 힘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22. EXIT MUSIC Today we escape, we escape 오늘 우리는 도망치는 거야. Pack.. and get dressed 짐 꾸리고 옷을 입어. Before your father hears us 네 아버지가 눈치채기 전에 Before all hell breaks loose 온통 지옥으로 변하기 전에. Exit Music (For A Film) - Radiohead ← CLICK !!! “음…, 저기 왼손 때문에 그러는데 말이지.” 읍내에서 약간 외곽으로 빠지는 후미진 동네. 이 근처에는 하나밖에 없는 작은 의원의 진료실. 내과와 외과와 소아과와 정형외과를 한꺼번에 보는 60대 초반의 의사 선생은 대뜸 처음부터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정욱은 약간 긴장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 병원에 데려왔을 때 지해의 손을 보고는 혀를 끌끌차면서 뭘 어떻게 하다가 이런 식으로 다쳤냐고 희한하게 둘을 번갈아 보던 그 시선을 기억한다. 그러다가 지해 손목의 긁힌 상처며 몸에 가득한 칼자국들까지 봤을 때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도리질을 치며, 어이없는 웃음을 웃으며, 무슨 변태나 깡패를 보듯이. 상처가 심각하니까 치료는 해주겠다마는 아무튼 너희 둘은 이상한 놈들이야, 하는 시선. ‘학생들, 집나와 헤매다니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지’ 라고도 했던가. 이 근처에 병원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여긴 안 왔을텐데. “일상생활 하는 데 큰 지장은 없겠지만.” 정욱은 안 좋은 예감에 눈썹을 찌푸렸다. “일단 관절 맞추고 치료는 했는데 말이야. 신경이 좀 건드려졌더라구. 심각한 건 아니지만 큰 병원 가서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나중에 좀 고생할 거야.” “…….” “습관적으로 탈구가 될 수도 있고, 좀 피곤하거나 무리했다 싶으면 마비나 경련이 올 수도 있어.” “저―” 의사 선생은 정욱의 말을 막았다. “심각한 건 아니야.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어요. 근데 힘을 많이 줘야 하는 일이라던가 아니면, 손을 오래 쓰는 일이라던가, 타이핑 같은 거 말이야. 그런 건 까딱 오래하면 잠깐씩 마비나 경련이 올 수 있단 얘기지. 어차피 늙으면 멀쩡하던 데도 다 고장나게―” “저, 저 녀석은 피아노를 치거든요.” “피아노?” “네.” “전공이야?” “네.” “오오.” 의사 선생은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뱉었다. “피아니스트가 될 거래?” “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욱이 대답했다. “글쎄…… 피아노라….” 잠깐 허공을 보며 생각하는 듯 하다가,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맨날맨날 하루종일 연습하다시피 해야잖아.” 뭔가 새로운 생각이 난 것처럼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 “그럼 어렵지.” 느긋한 말투 때문에 초조한 기분이 더 배가되었다. 마치 기정사실인양 늘쩡늘쩡 느긋한 영감 말투. 정욱은 자신의 손이야말로 조금씩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정욱의 그런 마음 상태는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는다. “수술을 하면―” “수술이라 수술…….” 말끝을 길게 빼며 한숨 한번 쉬고, 다시 허공을 보고. “…….” “수술을 해도 예전이랑 완전히 똑같을까?” 누가 누구한테 물어야 할 일을, 이 영감탱이는! “똑같다는 보장은 못할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일단 빨리 큰 병원 가서 정밀 검사부터 해보라구.” “…….” “춘천에 세강 의료원이라고 있거든. 춘천 세강. 거기 정형외과에 리퍼refer 넣어줄 테니까 그리로 가봐.” 익숙한 이름에 정욱은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돌처럼 얼어붙은 정욱은 아랑곳않고 허름한 시골 의원의 늙은 원장은 국내 최고의 병원 체인과 진료 의뢰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운지 연신 세강병원을 들먹였다. 오후의 병실에는 농익은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얇은 유리창이 따땃했다. 정욱은, 원래는 흰색이었겠지만 손때가 꼬질하게 앉아 누르스름한 회색으로 변한, 까실까실한 싸구려 재질의 낡은 커튼을 죽 잡아당겨서 햇살을 가렸다. 평생 이런 커튼은 처음 만져 보았다. 이런 병실도 처음 들어와 봤다. 촌스러운 모노륨이 엉성하게 깔려있는 바닥. 누렇게 변색한 벽지. 그나마 한쪽 벽은 새까만 곰팡이가 먹어들어가 그 부분은 ‘축 발전 1981년 5월 6일 XX군 향우회’라는 색바랜 금박 글자가 붙은 거울로 불완전하게 가려져 있었다. 뿌옇게 얼룩이 늘어붙고 울퉁불퉁해진 거울 표면. 그 속에, 가뜩이나 한귀퉁이가 퉁그러져 찌그러진 사각형을 하고 있는 병실이 더욱 더 이지러진 모양새로 기우뚱 비스듬하게 담겨져 있었다. 이런 거울에 이렇게 초췌한 자기 모습을 비춰볼 날이 있을 줄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이 살지 않는다는 건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터득해 왔다. 평균이 어떤 것인지, 표준이 어디 있는지 짐작이 잘 가지 않고 그다지 개념도 없지만 어쨌든 있다는 것도 안다. 자신이 태어난 좁은 세상, 몸을 담그고 있는 한정된 틀, 그것만 알면 그것 자체가 약점이라고, 그만큼 나약해진다고 할아버지에게 배워왔다. 남들 먹는 것을 먹고, 남들 다니는 세상을 같이 돌아다니라고 늘상 들어왔다. 모든 것을 알아라, 최대한 흡수해라, 라고 했다. 모르는 만큼 진다고 했다. 하지만. 절실하게 겪어보지 않은 일은 일단 모를 수밖에 없다. 낯선 것들을 낯설다고, 적응 안 되는 일들을 적응 안 된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할 수도 없다면, 무엇을 터득할 수 있느냐 말이다. 사흘째인데도 여전히 눈에 설기만 한 초라한 실내를 불만스러운 기분으로 둘러보다가, 흰색 칠이 다 벗겨진 낡디 낡은 철제 침상에 눈길이 닿았다. 자고 있는줄 알았던 지해가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걸 깨달은 순간 가슴 속이 찔끔했다. 저 녀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느낌도 절대 몰랐겠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랐을 거다. 아마 평생이라도. “나, 당장 퇴원해도 된다 그러지?” 그렇게 억지로 웃지 마. “이제 멀쩡한데.” 멀쩡하긴 어디가 멀쩡하다는 거냐. 정욱은 지해의 팔뚝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링거액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며칠이나 물도 제대로 못 얻어먹어서 탈진에 탈수 증상에, 피도 워낙 많이 흘려 심각한 빈혈로 헤모글로빈 수치가 뚝 떨어져서 혈액 450cc짜리를 4팩이나 수혈 받았다. 칼 맞은 자상이나 크고 작은 찰과상들이나 상처가 덧나 염증이 생긴 것들이나 모두 그렇다 쳐도 갈비뼈도 석 대나 나가고, 왼손은 관절 빠진 것 말고도 또 어디가 얼만큼 고장났는지 권투 장갑만큼 부었던데다가 그리고는 40도 가까운 고열로 어젯밤까지 거의 정신도 못 차리지 않았잖은가. 오늘 아침에야 겨우 눈 뜨고 멀건 미음 한 숟가락 입에 넣은 주제에, 아직 기운이 딸려 휘청휘청 잘 걷지도 못 하면서 지가 멀쩡하댄다. “뭐 좀… 먹었냐?” 지해가 뭔가 살피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정욱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면 ‘예스’라고 지해가 안다는 걸 자신도 안다. 사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별로 입맛도 없다. 아무리 한참 나이에 기본 체력 확실한 무쇠 인간이라 해도 요 며칠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이란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 근방에서 마땅하게 들어가 앉아서 밥 한 그릇 먹고 싶어지는 데를 찾지도 못 했다. 외부 관광객을 끌어들일만한 요소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곳이다. 길도 엉망이고,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시커먼 산과 또 그 옆의 산과 또 그 옆의 산과 또 산. 여기는 그나마 그래도 좀 번화한 곳이고, 여기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집집마다 외양간에 소 한 마리씩 기르면서 농사지어 먹고사는, 그런 동네다. 그리고 좀더 깊이, 깊이,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 보니, 과연 동네라고 말해야 할까 싶어졌었다. 집 한 채, 한 채 사이가 무지무지하게 떨어져 있었다. 담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지붕 밑에는 땔감 해다 놓은 것이 그득 쌓여 있었다. 그 중에 아무도 살지 않고 텅 비어, 버려져 있는 집들도 몇 채 발견했다. 설마 전기는 들어오겠지. 요새 전기 안 들어오는 곳이 있을까마는, 사실 확인해보지 않아서 조금 불안하기는 하다. 지해가 좀 나아지면 그중 쓸만하다 싶어 찜해놓은 집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다음을 생각해보려 작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시골이라도 역시 사람 많은 곳은 위험해서. 자신들 둘 다 너무 튀고, 지해는 TV 광고 때문에 사람들 눈에 익어서 그런지 이 병원에서만도 ‘저 놈 어디서 많이 본 놈인데 누구지?’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최대한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가야 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산 속이든 어디든 아주 깊이 깊이. 외국보다 더 낯선 곳에서 앞으로 감당해야 할,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일상. 신나는 모험도 아니고, 잠깐의 여흥도 아니다.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 동안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머리를 칠 때마다 정욱은 계속 조금씩 놀라고 있었다. “밖에 나가고 싶다.” 창문 틈으로 살짝 새어들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커튼의 미세한 율동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지해가 말했다. “담배도 피우고 싶고.” “아직 안돼.” 정욱은 지해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을 따라, 살살 나부끼는 커튼 끝을 보며 중얼거렸다. “거기도 가봐야 하는데.” 지해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다. 범죄자는 범죄 현장에 꼭 다시 나타난다고 했던가. 그 말은 정말 정말 사실이다. 가뜩이나 걱정이 한가득인 둘의 가슴 속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것이다. 일부러 더욱 더 후미진 이 곳을 찾아 들어온 것도 전부 다 그 때문이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더 좋은 병원으로 갔을 것이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치료를 받게 해줬을 것이다. 사실, 조만간 여기를 빨리 떠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해뿐이 아니다. 사람을 죽였다. 그날, 가까스로 지상으로 올라와보니, 방금 전 겨우 거슬러 올라온 지하실 계단의 물살은 장난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산기슭 한켠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걸쭉한 흙탕물이 급류를 형성해, 한때 사람과 차와 오토바이가 다니던 길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던 굵은 나무들이 허리가 푹 꺾여 땅 속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빗줄기가 어찌나 굵고 심하게 쏟아져 내리는지 잠시 그 밑에 서 있었는데도 곧 두피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언뜻언뜻 어슴푸레 보이는 산자락의 드문드문한 불빛 외에는 별도, 달도 이 비가 모두 앗아가버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산기슭 바로 아래의 이 집이 언제 산사태로 매몰될지 알 수 없는 형편이기도 했지만, 무모하게 산을 내려가다가 사고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똑바로 눈뜨고 있기도 힘든 빗속을 뚫고 산길을 둘이 바이크로 내려가는 건 또 그 나름대로 목숨을 건 모험. 게다가 지해의 몸 상태로는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만도 힘겨운 일이었다. 꽤 오래 전에 지은 듯 낡은 냄새를 풍기는 이 별장 집채 옆에는 차를 넉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간이 주차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벽과 바닥은 시멘트로 발라져 있고 그 위에는 쇠파이프로 연결해 둥근 아치 모양의 틀을 만들고 두꺼운 재질의 푸른색 방수천이 지붕으로 씌워져 있었다. 그 한 구석, 이리 오라고 유혹하듯 문이 활짝 열어젖혀져 키까지 꼽힌 채 세워져 있는 검은색 포드 픽업을 정욱은 입술을 깨물고 쳐다보았다. 그 옆으로 다가가기까지는 약간의 결심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시체가 차마 눈뜨고 보기 끔찍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차로 몇번 지그시 즈려밟아주기까지 했는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형상을 하고 있는 그 시체를 둘러싸고 그 주변은 거대한 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 피를 신발 바닥에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차까지 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지 않을까 싶을 정도. 정욱은 시체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이 시체와 저기 지하실에서 검붉은 핏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악귀의 사체. 땅에다 파묻고 가기에는 시간도 없고 빗물에 흙이 쓸려내려가면 오히려 더 눈에 띄게 된다. 이 빗속에 이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은 불가능하고, 그 외에는 마땅한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일단은 자신들이 여기를 살아서 산을 내려가는 것이 훨씬 큰 문제다. 또 다시 우지끈 하늘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번개가 내리꽂혔다. 사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일단 지해를 부축해 보조석에 태운 다음, 차에 시동을 걸고 차 앞머리 위에 붙어있는 네 개의 써치라이트를 켰다. 주위가 환해졌다. 그리고 정욱은 주차장 밖으로 한 걸음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기슭에서 빗물에 섞여 내려오는 흙의 양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많아져 있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사방을 끝도 없이 빙 둘러 에워싼, 높고 위압적인 검은 산의 그림자를 막막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주차장 시멘트 벽에 갑자기 쿵 하고 뭔가 거세게 부딪치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흙더미와 함께 쓸려내려온 직경 2미터 가량의 커다란 바위. 부딪칠 때의 충격이 제법 컸는지 벽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금이 쩍쩍 가 있었다.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정욱 차 옆에 뒹굴고 있던 두껍고 기다란 나무판자를 픽업 뒷편의 짐 싣는 칸에 비스듬하게 댄 다음, 바이크를 타고 그 위로 해서 짐칸으로 올라갔다. 시동을 끄고 내려와서 바이크를 옆으로 눕혔다. 간간이 내리치는 웅장한 천둥 번개를 배경음으로, 차창에 흘러넘치는 빗물을 신들린 듯 가르는 와이퍼의 움직임 사이사이 앞을 간신히 보면서, 빗속을 뚫고 구비구비 산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도중에 어느 한 모퉁이를 끼고 코너를 돌자마자 집채만한 바윗덩이가 굴러 떨어지고 흙더미가 우루루 맹렬한 기세로 쏟아져 내려왔다. 다행히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여 차가 지나간 바로 그 뒤로 쏟아지긴 했지만, 너무나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가슴 철렁한 순간들을 몇 번 더 겪고나니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국도를 타고 길 뻗는 대로 무작정 한참을 달려 닿은 곳이 이 동네. 한적하고 인가가 띄엄띄엄한 것이 우선 됐다 싶었다. 아직 셔터도 올리지 않은 병원에 그날의 첫 환자로 지해를 얼른 입원시키고 정욱은 차를 타고 또 몇 시간을 달렸다. 그리고는 인적이 드문, 알맞은 지점에서 짐칸에 실었던 바이크를 내린 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차를 버리고 바이크를 타고 돌아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병원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오후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지해가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려 정욱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정욱의 찌푸린 얼굴과 마주치고는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한다. “아무래도 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원래 말수가 많지 않은 편이지만 요즘만큼 말이 말로서 나와주지 않는 적도 드물었다. 자기 말소리가 귀에 설게 들릴 지경이다. 지해와도 딱 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어느 만큼 이상은 말이 끄집어내지지 않는다. 꼭 사람 하나 누운 길이만큼의 거리. 그만한 길이의 굵은 밧줄을, 서로 양쪽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빙빙 돌고 있다. 둘중 어느 누구도 덥썩덥썩 앞으로 다가오려 하지 않고, 그 끝만 놓지 않은 채 그렇게. 서로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탐색전을 벌이는 두 마리의 야생 동물처럼 어슬렁어슬렁 주위를 그냥 빙빙.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 본능적으로 잘 알면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아무래도 뭐냐니까?” “아니야.” 지해가 또 억지로 웃어보이며 머리를 젓는다. “말을 해.” 지해가 입가에 어색하게 부자연스러운 웃음의 끝이 걸린 채로 정욱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다.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해.” “아, 됐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아주 단호하게, 됐댄다. 빗장을 꾹 닫아건 입을 억지로라도 열어서 조 머릿속에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 건지 불게 만들려고만 들면 못할 것 없는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들으나마나 뻔한 소리. “나,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좀더 쉬어라.” 정욱은 링거를 맞느라 이불 밖으로 나와있는 지해의 붕대 감은 왼손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음 속에 짙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답답하다. 옆의 벽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지해를 두고 방을 나서다가 문득 정욱이 한 마디를 던졌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잠이나 자고 있어.” 제발 아무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네 몸 생각만 해라. 너 상태 그다지 좋지 않아.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단 말이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마음 편하게 먹고 푹 쉬고만 있어. 전부 나한테 맡기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구구절절 차고 넘치는데도. 가슴 속을 잠깐 열어서 보여줄 수만 있다면. 계면쩍게 이 말 저 말 할 필요 없이.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어색함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전혀 걸림돌이 되지 못하도록. 한 방에 확 까서 싹 보여주고 그걸로 쌈빡하게 끝. 정욱은 문을 닫고 좁은 복도를 빠져나와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 부근에 하나밖에 없는 병원이래지만 워낙 병원도 병원 나름인지라 입원 환자가 거의 없다. 이 상황에 얼마나 다행인가. 그 별장 근처까지 길을 되짚어서 또 한번 가볼 생각이다. 그 주변이야 산사태 때문에 지금 난리도 아니지만. 혹시나 그 사이에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막혔던 길은 뚫렸는지. 뭐가 발견된 거라도 있는지. 무슨 소문 같은 거라도 돌고있는 것은 없는지. 정욱이 병실을 나선 후, 지해는 말 안 듣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았다. 사실 지금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쉬기도 힘든 형편이다. 아직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팔자 좋게 마냥 누워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몸이 부자유스럽다 보니 움직임이 부드럽지 못했는지 링거 꼽힌 자리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바늘을 뽑아버렸다. 아무래도 말이다… 정욱아. 암만 생각해도…. 암만 생각을 해봐도…. 지해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지 못할 것도 없다. 어쨌든 걸을 수도 있다. 며칠동안 악으로 버티다가 긴장이 풀어졌다고 몸이 좀 늘어져서 그렇지, 이만 하면 다 나은 것 아닌가. 방 안을 휘휘 걸어서 문 옆에 바로 붙은 벽장까지 갔다. 원래 입원 환자 전용으로 쓰여야 할 벽장 안에는 고장난 소형 텔레비젼이며 낡아서 쓰지 않는 환자복 같은 자질구레한 물품들이 대충 들어가 있고, 맨 아래 칸만 환자용으로 남겨져 있었다. 원체 짐이라는 게 없었으니, 입고 들어왔던 옷들만 덩그마니 그 칸을 차지하고 있다. 웃옷은 피로 물들어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채 잔뜩 찢어져 차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넝마조각이 되어 있었고,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된 더러운 청바지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빗물에 쩔은 옷을 간호사가 대충 넣어줬나 보다. 시큼털털한 비린내가 났다. 그래도 뭐, 청바지가 다 이렇지. 웃옷이야 이제 완전히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쳐도, 바지는 보기가 좀 험악할 뿐 충분히 입을 만 하다. 만져보니 이 날씨에 아직도 축축한 기가 좀 남아있는 듯 싶어 지해는 습관적으로 접혀진 밑단을 피고, 구겨진 부분을 툭툭 만져 펴고, 바지 주머니를 쑥 잡아 뺐다. 어. 주머니 속에서 종이조각 구겨놓은 것 같은 게 잡힌다. 뭔가 하고 꺼내봤더니 무슨 쓰잘데기 없는 메모지 쪼가리. 에이, 돈인 줄 알았는데. 괜히 좋다 말았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지해는 호기심에 그 종이 쪽지를 한번 펼쳐 보았다. 바지 속에 넣은 채로 빨래를 돌렸었는지 푸르딩딩한 청바지 물이 들고 너덜너덜해진 종이에 볼펜으로 적힌 전화번호같은 숫자들이 거의 형체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쓰인 이름. 조민혁. 지해는 그 쪽지를 붙들고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잘 접어 바지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BGM : 달려 II (Run II) - 이병우☜ CLICK!! 길이 많이 막힌다. 이번 폭우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었던 이 지역은 아직도 수마가 할퀴고 간 후유증으로 온통 난장판이었다.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가 도로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가 하면, 길을 가로질러 전신주들이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아스팔트 포장해놓은 것이 케익 조각 무너진 것 마냥 떨어져 나가버리고 도로가 끊겨 통행이 불가능한 곳도 드물지 않았다. 너무나 피해가 엄청나서 아예 복구 작업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정욱이 애초에 가보고자 했던 그곳의 상태는 그 중에서도 다른 곳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산 속의 별장은 산사태로 토사에 매몰되어 지붕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나마 그 지붕이 저 멀리 손톱만하게 보이는 산길 어귀부터 통제가 되고 있어, 사실상 그 근처는 갈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피해 상황은 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산을 뚝 깎아먹은 것처럼 흙더미가 길을 쓸어내리며 아래쪽으로 밀려와 있었고, 길 주변에는 뿌리를 드러낸 커다란 나무와 바윗돌이 뒤엉켜 있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고 속으로 타이르면서도 어쨌든 며칠은 시간을 더 벌 수 있겠구나 마음을 놓으며 정욱은 다시 발길을 되돌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적으로 길이 너무 막힌다. 올 때보다 백만 배는 더 막힌다. 아무리 싸구려 오토바이라지만 산길을 달릴 수 있는 산악용으로 덩치가 제법 되는 터라 좁은 길에서 자동차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저 앞 차의 꼬리를 밟으며 굼벵이처럼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이제 겨우 절반 좀 넘게 왔나 싶은데, 아까 올 때 걸린 시간보다 한 시간 넘게 오버하고 있었다. 하필 이쪽 차선으로만 도로가 심하게 파손된 곳이 저 앞에 있어 차 두 대가 지날 길을 한 대도 겨우겨우 지나가는 형편. 게다가. 아직도 갈 길은 한참 남은 이 상황에서 오토바이가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않고 길 한복판에 딱 서버린 것이다. 무슨 이상이 생긴 걸까. 일단 길 옆으로 비켜난 뒤 당황해서 계속 한쪽발로 바닥을 힘차게 구르며 시동을 밟아보았지만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혹시 연료가 떨어진 것? 그럴 리는 없다. 게이지 판의 바늘이 가리키는 눈금을 보면 아직 기름이 반 이상 남아 있다고― 아! 정욱은 혹시나 싶어 몸을 깊게 숙이고 발을 땅에 댄 채 오토바이 몸체를 양 옆으로 흔들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연료 탱크의 뚜껑을 열고 구멍에 귀를 가까이 가져간 채 다시 한번 시도. 역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게이지 판 대로라면 안에서 기름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야 정상인데. 아무래도 게이지 판이 고장난 모양. 그러고 보니 그날 별장에 올라가기 직전에 기름을 넣고……. 그렇군. 기름이 떨어질 때도 되었다. 어떻게 할까.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주유소가 여기서부터 아주 끔찍할 정도로 먼 곳에 있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고개 하나는 넘어야 한다. 이 무거운 쇳덩이를 밀고 비탈진 오르막길을 올라……. 눈 앞이 캄캄하다. 이노므 고물 오도바이. 아무리 그동안 이놈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굴렸다 해도. 정말 당장 저 벼랑 밑으로 팽개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지금 상황에선 이나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도 갈 수 없으니. 혹시 빈 트럭이라도 지나가는 게 있으면 주유소까지만 태워달라고 흥정을 해볼까 싶어 암만 두리번거려봐도 정체된 차량의 행렬 속에 빈 트럭이라는 건 자취도 없다. 트럭이야 꾸준히 옆을 스쳐간다지만 죄다 뭔가 잔뜩 실려 있는 상태라서. 그러던 중, 반대 차선을 쌩~하고 지나가는 시외버스에 문득 눈이 이끌렸다. 흠뻑 뒤집어쓴 흙탕물이 누렇게 덕지덕지 말라붙은 중에도 춘천행이라고 마빡에 써붙여놓은 것은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버스 옆구리에 붙어있는 경유 지역 이름들 중에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의 이름이 또 도드라지고. 하긴 당연한 일. 원래 자기가 아는 것은 더 눈에 띄는 법이다. 어디도 가고, 어디도, 또 어디도 지나간다는데, 거기가 어드메인지는 하나도 모르겠고 그 중에 아는 것은 춘천이랑 고 촌동네 이름뿐. 그런데 말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뜬금없이 뭔가를 봤을 때 퍼뜩 가슴이 쿵 내려앉고 등골에 부르르 한기가 달리며 머리털이 쭈삣 서는 듯 묘한 기분. 이런. 아무래도 많이 피곤하긴 한 모양이다. 별게 다 신경쓰인다. 그래도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 가시지 않아, 시커먼 매연을 뱉으며 털털 지나가는 버스를 고개를 뒤로 쭉 빼고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앞길을 재촉했다. 쓸데없는 데 낭비할 시간 없다. 왜 이러냐, 강정욱. 갈 길이 멀다. 정욱은 이제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고물 쇳덩어리를 온몸의 남은 기력을 끌어모아 밀며 힘겨운 걸음을 뗐다.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로 병원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고개를 넘자마자 곧 주유소가 보였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주유소를 그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만 하고. 기름을 넣고 정체 구간을 가까스로 벗어난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달려왔지만, 무시무시한 쇳덩이를, 그것도 끄는 것도 아니라 밀면서, 무시못할 산 고개를 넘느라 얻은 데미지는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있었다. 지해 얼굴만 잠깐 보고 여관방에 처박혀서 자야지 하는 마음뿐. 허름한 방의 낮은 천장이든, 찝찝한 이부자리든, 퀴퀴한 냄새든, 시끄러운 옆방 소리든 전혀 상관 안 할 테다. 씻고 잘 수만 있으면 감지덕지. 많은 것 바라지 않는다. 그래. 지해 녀석한테도 마찬가지. 그 녀석 살아있기만 하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던가. 비행기에서 내리던 그 순간부터 그 녀석 찾아헤매느라 얼마나 가슴을 졸였었냐 말이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살아만 있어달라고 빌고 또 빌고. 그 지옥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녀석한테 정말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따뜻한 말 한 마디 제대로 해주지도 않고 퉁명스럽고 무뚝뚝하기 그지없게. 지금 그 녀석 몸도 마음도 다 다쳐서 엉망진창인데. 얼마나 아픈데. 얼마나 힘든데. 그 동안 얼마나 무서웠을텐데. 상큼한 산바람이 정욱의 이마에 또록또록 맺힌 땀방울을 위로하듯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이 동네도 다 나쁜 건 아니다. 이토록 맑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끔찍하게 맑은 공기가 가뜩이나 비 개인 다음이라 더더욱 상쾌하다. 빨리 들어가서 그 녀석 얼굴을 보고 싶다. 다친 데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꼭 보듬어 안고― “정욱아!!” 순간, 바람에 날리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돌처럼 굳었다. 오토바이를 병원 옆 공터에 세워 놓고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던 도중, 입구에서 딱 맞닥뜨린 사람. “너, 임마―” 민혁은 목이 메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굉장히 반가운 모양이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이쪽에서는 반갑기는커녕 ‘숨는다고 숨었었는데도 그렇게 찾기 쉬웠던 걸까. 어떻게 찾았을까’ 하는 궁금증만― 갑자기 소름이 확 끼쳤다. 은연중에 앞을 막아서는 민혁을 확 밀치고 정욱은 지해의 병실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정욱아!!!! 야!!!!! 잠깐만!!!!”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문을 쾅 열었을 때,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틈에 깔끔하게 정리된 침상. 환기를 시키고 있었는지 활짝 열린 창. 춤추듯 하늘거리는 커튼 자락. 얼른 다시 복도로 나갔다. 마침 계단을 올라오던 간호사가 정욱의 얼굴을 보고는 당황한 듯 고개를 떨군다. “여기 있던 환자…, 어디 갔어요?!!” “………….” “어디 갔냐니까요!!!!!”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부답. “왜 대답을 못 해요!!!!!!!” 천둥치는 것 같은 노성에 간호사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정욱은 그 와중에도 지금 상황은 잠시의 착각일 뿐 지해가 이 병원 어느 구석엔가 있다는 증거를 찾아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바삐 둘러보았다. “그만해, 임마. 나도 아까 물어봤었어. 이분은 아무것도 모르신대.” 어느 틈에 쫓아온 민혁이 정욱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너무 괴롭히지 마라. 일단 퇴원 수속은 내가 했―” 정욱은 거칠게 어깨를 흔들어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서서 민혁을 마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분노로 덜덜 떨리는 이를 앙다물고 잇 사이로 소리를 뱉으며 정욱이 물었다. 민혁은 그 기세에 질렸는지 한숨을 푹 쉬고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나는 아냐? 나도 방금 도착했어. 전화 받고 놀라서 득달같이 달려와보니까 병실에 이거 한 장 달랑 남겨놨더라.” 그리고 딱지 접듯 접다가 마지막 꼬리만 안 접고 남겨둔 종이쪽지를 건네준다. 정욱은 두근거리다 못해 울렁울렁 들썩거리는 듯한 가슴속을 간신히 억누르며 쪽지를 받아들었다. 전혀 읽고 싶지 않은데도 기계적으로 쪽지를 펼치는 손이 원망스럽다. 병실에 있던 메모패드에서 뜯었나 보다. 귀퉁이가 누렇게 변색되고, 밑자락에는 제약회사 이름과 약 이름과 고색창연한 광고 문구가 촌스러운 활자로 인쇄된 낡은 메모지. 그리고 그 위에 재빨리 휘갈긴 듯이 옆으로 살짝 누운, 그러면서도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아 보기 괜찮은 글씨체. 아주 많이 눈에 익은. 『정욱아.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 지해. 꼭 행복해라.』 꼭 행복하랜다. 그냥 행복하지도 말고 꼭. 글자의 느낌도 약간 다르고 한참 아랫쪽에 살짝 삐뚜름하게 붙어있는 것이, 덧붙일까 말까 주저하다가 써넣은 표시가 확실히 난다. 꼭 행복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븅신아. “거짓말하지 마.” 정욱이 민혁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많이는 못 갔을 거야.” “………….” “어디 갔을지… 너, 짚이는 데 없냐.” 그 잘난 조민혁이도 급하니까 저런 소리를 한다. 짚이는 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 한들 너라면 거기 가겠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져 정욱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현기증이 멎은 다음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깨끗이 정리된 병실. 그리고 방안 한 가득 하얀 햇살. 창틈으로 들어오는, 이슬을 머금은 상큼한 풀내음에 코가 시큰거렸다. 민혁은 벌써 몇번째나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다음에도 시동 걸 생각은 않고 핸드폰 리다이얼부터 눌렀다. 그리고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플립을 닫더니, 조금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리다이얼을 누른다. 상대편에서 영 전화를 받지 않는 건지…. “산 때문에 그런가? 이 부근이 원래 전화 잘 안 걸리지?” 글쎄, 그렇게 묻는다면. 여기서는 핸드폰을 써본 일이 없어서 알 턱이 없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이렇게 안 되냐, 제길.” 일단은 출발부터 하자고 생각한 듯 시동을 걸고 악셀을 밟더니, “제기랄. 통화 꼭 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도 또 한번 시도를 해보고는, 역시 묵묵부답인지 걱정스럽게 투덜거리기 시작. “혹시 뭔 일 있는 거 아냐, 이거?”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계속 궁시렁궁시렁. “누구한테 거는 건데?” 물어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묻는다.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다. 운전이나 똑바로 했으면 좋겠고, 좀 조용히 해줬으면 더 좋겠다. “지해 녀석 형.” 아. “같이 찾고 있었거든, 니네 둘.” 별짓을 다 했군. “사실 니네가 춘천 외곽으로 어느 구석인가에 처박혀 있는 것 같다는 얘기는 나도 오늘 아침에 들었었어.” “………….” “누가 니네 둘을 그 언저리에서 봤다고 그랬다더라구.” “………….” “정확하게 어디쯤인지 조금만 더 자세한 게 들어오면 지해 형이랑 같이 와보려고 그랬는데 마침 전화가 온 거야…” “………….” “……지해한테서.”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은지, 지해의 이름을 꺼낼 때에는 목소리의 볼륨이 좀 잦아들어 있었다. 이 녀석의 차는 컨버터블인데다가 그나마 하드 탑도 아니라서 바깥 소음이 은근히 많이 들어온다. 시끄럽다. 그래서 말할 때 목소리도 더 크게 내게 되고. 시끄러워. “안 갔었나봐?” “어딜?” 민혁은 눈에 물음표를 잔뜩 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정욱을 쳐다봤다. 정욱은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뉴욕.” 벙 쪄서 차마 대꾸도 못 하고, 이런 정신나간 놈이 다 있나, 하고만 있는 얼굴이 곁눈길로 보였다. “돌아가는 중이었잖아. 뉴욕에.” 확실히 기분이 좀 나아진다. “이런, 썩을 놈 같으니.” 지가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화는 나겠지. 물론, 당연히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고. 기분이 좀더 나아진다. “괜히 심술 부리지 마. 이 나쁜 새꺄.” 후후후. 정욱의 입가가 슬쩍 풀어졌다. “지해 녀석 도망간 화풀이 나한테 하지 말란 말이다, 앙?” 정욱은 표정을 굳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네, 제기랄.” 고래 싸움도 아니고, 민혁이 새우도 아니다. 차라리 고래 싸움 같은 거면 좋겠다. 지금 상황은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둘 사이의 밀고 당기는 숨바꼭질 따위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은. 민혁이 뭘 얼만큼이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참아.” 무슨 소린가 싶어 또 쳐다보는 눈길.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고 참으라고.” 안 그러면 저 인간의 효용가치가 없잖은가. 지금 기분 같아서는 눈에 보이는 건 다 때려부수고 애꿎은 사람 요절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억지로 누르고 있는 거니까. “에구에구, 그래. 참으마.” 성격좋은 내가 참는다고 그랬는지, 천사같은 내가 참는다고 그랬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암튼 참는단다. 그러든지 말든지. 지금 그런 게 신경 쓰일 계제가 아니다. 이 동네에 계속 있을 순 없으니까 어디를 가든 일단 차부터 타라고 하길래 차에 탔다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봐야 좋을지 막막한 상태. “지금 지해 입장에서 누구 생각이 제일 많이 나겠냐?” 민혁이 문득 물었다. 암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글쎄.” 물론 언뜻 생각나는 답은 ‘나’라도, 자신을 버리고 간 마당이다. 그렇게 대답하기는 좀 곤란했다. “어머니가 아닐까?” “……!!” 말도 안 된다. “나라면 그럴 거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그 녀석의 어머니가 그 녀석한테 어떤 짓을 했었는지 안다면 절대 그런 생각은 안 들걸?” “아, 알고 있어. 그렇더라도 엄마니까 보고 싶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안 들텐데, 하니까, 그건 너니까, 란다. 그럼 이 강정욱이는 뭔가 결핍된 인간이란 뜻인가.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는 말일 거다. 화가 나면서도 왠지 쓸쓸해져 민혁의 얼굴을 슬금 살펴보았다. 스스로 집에서 버린 자식이네, 내놓은 자식이네, 나불거리고 다녀도 저 인간도 막상 유사시에는 엄마가 보고 싶고 가족이 그리워진다는 건가. 자신한테 가족이란 의무와 책임. 그 개념인데. 그것뿐인데. 그나마 지금은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뛰쳐나와 있는 상태. 정욱의 우울한 반응을 알아챘는지, 민혁이 쾌활한 목소리로, 사실 어머니한테 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건 지해의 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어머니가 입원한 강릉의 정신병원으로 가봤었지만 그때는 헛수고였단다. 물론 헛수고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 그때 지해는 엉뚱한 곳에 갇혀있었으니까. 민혁은 지금 당장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고 우선 생각나는 곳이 거기라 그렇게 말했다고 무마하려 하지만 정욱은 알고 있었다. 일단 차에 타라고 했을 때부터 저 인간은 거기 갈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다. 조촐한 시골길을 신나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추다시피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정욱은 감았던 눈을 떴다. 완전히 잠들었던 것은 아니더라도 눈을 감고 있다보니 어느 틈에 반쯤 의식이 끊겨 있었나 보다. “이야~, 저 앞에 봐라. 길 왜 이렇게 막히냐.” 아까는 저쪽 차선이 막혔었지, 이쪽 차선은 안 막혔었는데 웬일인가. “저기 봐. 저~~기. 교통사고가 나도 크게 났나 본데. 장난 아니다. 이 길로 못 가겠다.” 하긴 길이 그렇게나 엉망이었으니 사고가 났을 법도 하다. 정욱은 창문을 조금 더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 무슨 사고가 났다는 건지. 그런데 사고난 현장이 눈에 띄기도 전에 문득 ‘그’ 별장이 있던 산이 저쪽으로 조그맣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별장은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크기로 보일락말락하는 정도지만, 기분이 나빠져 창문을 완전히 닫고 정욱은 눈을 감았다. 생각하기 싫은 것이 기억나버렸다. 속이 느글거린다. 이 인간에게 차멀미하는 꼴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다. 눈을 감으니 지해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거기에 가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가봐도 없으리라는 걸 안다. 그래도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없겠지. 그래도 있었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 싸우는 끊임없는 생각들 속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지해의 옆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일은 벌어져 있었다. 그 몸을 하고 넌 또 어딜 가버린 거냐.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무섭다고 정욱은 생각했다. 이 녀석과 몇번이나 해왔던 술래잡기지만, 이번에는 정말 된통 걸렸다. 지금까지 하던 중에서 가장 지쳐떨어진 순간인데 절대로 지쳐서 더 못하겠다고 그만하자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 녀석은 대체 뭘 어떻게 할 작정인 건가. 무슨 위험한 생각을 하고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찌 됐건 살아만 있어줘. 제발. 정욱은 진심으로 무섭다고 생각했다. BGM : And No More Shall We Part - Nick Cave☜ CLICK!! “안녕하세요.” 데스크에 앉아있던 당직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머리를 하나로 묶으셨네요?” 민혁이 사람 좋아보이는 친근한 눈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아는 체를 하자, 간호사 아가씨는 발그레해진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이영은 환자님 아드님이랑 같이 오셨던 분이죠?” “앗!” 기억해주셨군요, 하는 의미로 탄성을 지르며 반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오버를 한다. 간호사는 완전히 경계심이 허물어진 듯 밝게 웃었다. “면회오셨나요?” “네, 뭐 그렇죠.” “환자분이랑 어떤 관계……?” “아, 그게―” “맞다. 이모라고 하셨었죠? 조카라구요.”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다른 누군가와 착각을 했는지 컴퓨터에 탁탁 뭔가를 쳐 넣으며 이름을 묻는다. 얼떨결에 조카가 되어버린 민혁으로부터 두어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 있던 정욱은 속으로 들릴 듯 말 듯 코웃음을 쳤다. “옆에 계신 분도 조카세요?” 민혁은 환하게 웃기만 하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정욱을 흘깃 뒤돌아보며 코를 찡끗 애교스런 미소를 짓는다. 하나도 안 귀엽다. “아, 이 녀석 이름은―.” “괜찮아요. 일행 중 한 분 성함만 있으면 돼요. 강릉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교외의, 저 멀리 넘실넘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성聖 시몬 신경정신병원. 병원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있는 안내 데스크 앞에 약간 긴장된 자세로 서 있던 정욱은 비로소 로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종합병원의 로비와 다를 게 없다. 한쪽 구석에는 현금인출기, 공중전화기, 음료자판기 따위들이 늘어서 있고, 맞은편 벽에는 약간 낡음직한 괘종시계가 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천장까지 닿을락말락한 커다란 관엽 식물 화분이 있고, 벽 군데군데에는 모던한 서양화 액자 몇 점이 걸려 있었다. 흰색 인조 가죽을 씌운 소파들에는 진료 접수를 하러 온 사람들, 면회하러 온 가족들,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앉아 있었다. “지금 병실에 안 계시고 산책 중이시라는데요? 밖에 계시거든요. 이 건물 뒷편으로 가셔서 오른쪽을 보시면 작은 언덕이 있어요. 거기가 산책로에요. 그 앞에 벤치에 좀 앉아 계시면 곧 내려오실 겁니다. 거기서 기다리시겠어요?” 민혁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면회 오는 환자 가족들 얼굴을 다 기억하시나 봐요?” 발걸음을 돌리려는 척 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꼭 그런 건 아닌데요. 그 환자분은 입원하신지도 오래 됐고, 아드님들이 워낙 눈에 띄어서….” 그러는 그녀의 눈에는 당신들 둘도 만만치 않아, 라고 씌어 있었다. 민혁과 정욱 둘 다 그런 눈빛에는 아주 익숙하다. “저, 사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상태가 워낙 안 좋으셔서 직계 가족 아니면 면회가 허락 안 됐었거든요. 그나마 힘들 때도 많았지만요.” 그냥 보내기는 좀 아쉬웠는지 묻지 않은 말까지 한다. 민혁은 건성으로 아, 네, 하고 대답하고, 상태가 호전되셔서 참 다행이라는 둥 썰을 풀었다. “아참, 혹시 그 동안에 막내 녀석 안 왔었나요?” 네? 하고 간호사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자, 민혁은 환자분 작은아들 말이에요, 하고 설명했다. “아아, 아니요. 최근에는 못 본 것 같네요. 안 온지 꽤 한참 됐을 텐데……. 잠깐만요.” 컴퓨터로 다시 확인을 하더니 확실히 작년 여름 이후로는 면회 온 적이 없다고 대답을 한다. 당연히 예샹했던 대답이었지만 정욱은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난 저 밖에 나가 있을게.” 산책로 입구라는 데 가 있겠다고 말하고, 정욱은 먼저 현관을 나섰다. 건물을 돌아 옆쪽으로 가니 그야말로 탁 트인 시야에 멀리 수평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푸른 바다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고깃배들. 이 병원 부지가 약간 높은 곳이라 철조망 너머로 바로 바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비탈진 잡목숲과 모래사장이 제법 길게 이어져 있다. 철조망만 넘으면 바로 바다로 풍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미친놈들뿐일 거다, 하고 나니 여기는 정신병원. 위험해, 하고 정욱은 생각했다. 바다는 위험하다. 항상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품어본 모든 감정들이, 자신도 자기 속에 있는줄 몰랐던 그 모든 감정들이 철썩철썩 서로 부딪쳐 부서지는 거품의 미세한 물분자 입자 하나마다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았다. 수천 수만 갈래 감정의 물줄기들이 흘러 흘러 바다로 모여든다. 차곡차곡 켜켜이 끊임없이 쌓여간다. 바람의 손짓에 따라 물결처럼 출렁임은 그 표면일 뿐.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심해 밑바닥 가득 두텁게 깔려 있는 것은 침묵보다 더 무거운 안타까움. 그리고 깊고 단단한 그리움. 이제는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보고 싶어. 네가 보고 싶어. 너는 어디에 있니. 대체 어디에― “혹시라도 보이면 연락해 달라고 하고 왔어.” 민혁이 정욱의 등을 탁 쳤다. 둘은 데스크의 간호사가 얘기했던 건물 뒷편 산책로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걷기시작했다. “에휴, 하지만 굳이 면회를 할 게 아니라면 데스크에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 몰래 숨어들어와서 지 엄마 얼굴만 슬쩍 보고 가는데 누가 알겠냐.” “………….” “환자 아들로만 알더라. 연예인인 건 전혀 모르는 눈치야. 역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건 아닌가봐.” “………….” “일단은 이 주변을 샅샅이 찾아봐 달라고 전화는 해놨는데…….” “………….” “마음먹고 숨어버리면 찾기 힘든 곳이 강원도 산골짝이라고 전문가도 그러더라만…….” “………….”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 “저 여자야?” 민혁은 말을 멈추고 정욱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산책로라는 그 얕으막한 언덕을 두 명의 여자 환자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욱이 가리킨 사람은 오른쪽에 있는 40대 후반 가량의 아주머니로, 누가 보더라도 지후와 지해의 어머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었다. 어, 그래, 하고 민혁이 대답하자마자, 정욱은 옆에서 말릴 새도 없이 용수철 튀듯 그쪽으로 뛰어올라갔다. 정욱이 앞을 딱 막아서자, 옆의 다른 환자와 웃으며 얘기를 나누던 지해 어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이 청년을 쳐다보았다. “어딨어요?!” “…………?” “당신 아들.” “………….” “당신 아들 말야, 어딨어?!!” 곧바로 쫓아온 민혁이 팔을 잡아 끌어도 정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겁에 질린 표정만 지을뿐, 무슨 상황인지 잘 인식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어딨냔 말야!! 당신 작은아들!!” 지금까지 억눌러오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한 듯, 정욱은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지해 어딨어?!!!” “…………!!” 아들의 이름을 알아들었는지, 어머니의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지해 어딨냔 말야!!! 찾아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눈만 크게 뜨고 있는 그녀의 야윈 어깨를 정욱이 양손에 움켜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산책하고 있던 환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해, 당신 아들이잖아!!! 당신, 지해 엄마잖아!!!!! 왜 몰라?!!! 어딨는지 왜 몰라!!!! 당장 찾아내!!!! 당장 찾아내란 말야!!!!” 정욱이 실성한 사람처럼 고래고래 울부짖는 동안, 어머니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 갸냘픈 목소리로 뭔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정욱의 흥분한 목소리가 잦아들고, 갸냘픈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확실히 들렸다. “……죽었는걸.” “…………” “…지해는 죽었어. 내가 죽였어.” 서서히 주위가 조용해졌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 “…지후야. 이제 됐어. 지해는 내가 죽였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야.” “…………” “…걔가 살아있으면 너한테 해를 끼친대. 네가 위험해진대…. 그래서……, 내가 죽였어.” “…………” “이제 넌 괜찮을 거야…. 안심해도 돼……. 지해는 죽었으니까.” 모두 얼어붙은 듯한 정적 속에 더듬더듬 이어지던 그녀의 목소리는 그 옆에 얌전히 서 있던 또다른 여자 환자의 하늘이 째질 듯한 비명과 함께 중지되고 말았다. 이윽고 구경꾼들을 헤치고 건장한 남자 간호사 세 명이 나타났다. 간호사 두 명이 각각 두 환자를 데려갔고, 또 한 명은 얼이 빠진 듯 꼼짝도 못 하고 있던 정욱과 민혁을 재촉해 끌어냈다. 차가 병원 정문을 지나칠 무렵이 되어서야 정욱은 모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언제나와 같은 냉정한 마음 상태로 돌아와 있을 수 있었다. 차갑게 식은 머릿속에 방금 일어났던 일들이 또렷이 인식이 되어 왔다. 갑자기 눈이 시려와 두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걷잡을 수 없이 눈자위가 시큰거려 닫은 두 눈꺼풀 위를 손등으로 거칠게 부볐다. 서로에게는 서로만이 필요할 뿐 다른 어느 누구도 필요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필요가 없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 진작 알고 있었는데, 이제 정말 확실히 알아버렸다. 이 바보야. 너한테는 정말 나뿐이야. 나밖에 없어. 나없이 넌 어떡할래. 너 어떻게 살래. 제발 돌아와. 주위는 이제 컴컴해져 있었다. 민혁은 도저히 배가 고파서 손가락 하나도 못 움직이겠다며 밥부터 먹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정욱은 자신이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았다. 먹을만한 식당을 찾았을 때는 8시가 다 되어 있었다. 대충 주문을 하고 한숨 돌리고 나자, 식당 한켠의 TV에서 8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보통 제일 먼저 등장하는 정치판 뉴스들을 건너뛰고 곧바로 무슨 큰 교통사고에 관한 뉴스가 바로 튀어나왔다. 「오늘 오후에 발생한 춘천행 시외버스 추락화재사고로 중상을 입고 춘천 세강의료원에서 치료를 받던 45세 문강선씨가 조금 전에 숨져 이번 사고로 사망자가 29명으로 늘었습니다. 부상자 12명은 현재 춘천 시내 3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정욱은 퍼뜩 기분 나쁜 예감에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수사중인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교통안전관리공단 관계자들과 함께 사고 원인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경찰은 며칠간 강원도 일대에 계속됐던 폭우로 인한 도로 상태 불량과 제동장치 고장 등 차체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사고 차량을 서울로 옮겨 정밀 감식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난 시외버스가 브라운관에 비춰졌다. 정욱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암만 봐도 낮에 길에서 보았던 그 버스인 듯 싶었다. 경유지역이 똑같았고, 마빡에 ‘춘천행’이라고 붙은 글자의 ㅇ받침이 유난히 삐뚜름한 것까지도 똑같았다. 물론 번호만 같은 다른 버스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어찌됐건 차 자체는 다른 것일지 몰라도 종류는 같은 버스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차가 그 차인지 아닌지 확실히 구별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버스는 맨앞쪽의 신기할 정도로 멀쩡한 극히 일부분만을 빼고 본다면, 원래 버스였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찌그러진 채 불에 타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었다. 「…사망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춘천기독병원에 8명. 현승용 24세, 김재준 39세, 이갑순 62세, 고광모 56세, 김병삼 47세, 윤희경 18세, 정대홍 29세, 민철용 36세. 춘천세강의료원에 15명. 공인숙 53세, 신병찬 38세, 황희문 25세, 구민지 16세, 김지해…」 정욱은 그 다음 상황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김지해 (18세)’라는 자막과 더불어 그것이 최근에 연락두절로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떠돌던 모델 겸 영화배우인 고교 2학년 김지해군임을 기자가 친히 확인시켜주었고 그와 동시에 세상이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온세상이 암흑의 진공 상태로 변하던 순간 누군가 정욱의 이름을 불렀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정욱이 애타게 듣고 싶어했던 누군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는 열흘 남짓만에 돌아오는 자신의 집이었는데, 마치 몇 년만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대문도 낯설었고, 정원도 낯설었다. 현관도, 계단도, 자신의 방문고리조차 생경하기만 했다.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라는 사실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왜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일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이 죽었는데, 심장이 이제 뛰지 않는데, 한때는 뜨거웠던 피도 다 차갑게 식어버렸는데 세상은 그대로이다. 해가 뜨고, 달이 진다. 하루 세끼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발기도 되어있고, 밤에는 잠도 온다. 이상한 일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정욱은 문고리를 잡았다. 열려진 문 저편의 방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밤에 짐을 완전히 꾸린 다음 정리해 두었던 그대로. 얄미울 정도로 그대로. 모든 것이 다 제 자리에. 아.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 평소같으면 절대로 달가와하지 않았을 변화에 정욱은 오히려 위안을 느꼈다. 근데 이게 왜 이렇게 됐을까. 무슨 조화로. 한때 나가서 살던 아파트에 설치했었던 아쿠아리움을 이 방으로 옮겨온지는 꽤 되었었다. 본가로 다시 귀환하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비록 이 나라를 떠나도록 되어 있었을지언정 아쿠아리움을 처분할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완벽한 자동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물을 갈아줄 필요도, 먹이를 챙겨줄 필요도 없었다. 전기 공급만 확실히 되어준다면 수조 속은 완전한 하나의 소우주를 이룬다. 먹이도 그 작은 생태계 안에서 자급자족되고, 수조 안의 물도 끊임없이 일정한 온도와 염도를 유지하며 자동정화된다. 사람의 손이 전혀 필요없다. 그냥 놔둬도 전혀 지장이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저 한 마리만 유독 저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일까. 아무리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던 컬러풀한 해수어라도 일단 생명을 잃고 나면 시멘트 빛의 거무튀튀한 색깔로 바뀌고만다. 원, 사체가 이렇게 험악하게 변해있어서는 원래 어느 것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뭐지? 뭐가 죽었지? 남아있는 물고기들을 헤아려 보며 정욱은 죽은 놈이 어느 녀석이었는지를 따져보았다. 이런. 왜 이제야 눈치를 챘을까. 수조 한 귀퉁이를 철저하게 자신만의 공간으로 점령하고 자신의 영역에 함부로 아무나 들이지 않으려 하던 그 귀하고 비싼 놈. 신비한 남보라빛과 달콤한 오렌지빛이 공존하던 그 이쁜 녀석만 혼자 안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사체의 지느러미 모양이…. 수조를 채우고 있는 소금물보다 더 짭짤한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정욱의 모습을 키 작은 장식장 위를 어중간하게 차지하고 있던 미완성의 범선이 굽어보고 있었다. epilogue 8월도 이제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늦여름의 어느 날. 선경은 학원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패스를 긋고 마침 비어있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운전사 아저씨가 틀어놓았던 라디오에서는 마침 젊은 아이돌 가수들이 떼거지로 출연했는지 왁자지껄 굉장히 시끄러웠다. 지네들끼리만 아는 농담을 하면서 지네들끼리만 웃는, 이런 시끌벅적한 가요 프로그램을 선경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곧, 그 무리들 중 한 명으로 신나게 떠들고 있던 현직 아이돌 가수인 DJ가 웃음의 들뜬 여운을 채 삭히지 못한 불안정한 목소리로 신곡에 대해 출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고생 3명으로 이루어진 신인 댄스그룹이었다. 하늘같은 주성신 선생님이 작곡, 프로듀스해주었다는 가을용 발라드 곡에 대해 낯간지러울 정도의 작위적인 대화가 오고간 후에 오늘 이 시간이 방송에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라는 그 노래가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귀담아 듣고 있지는 않았지만, 열린 귀로 저절로 들려오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던 선경은 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듯 귀에 익은 멜로디의 저 노래가 지금 이 순간이 최초 공개라니 정말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저 노래를 어디서 들었었는지 누구의 노래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유명한 외국 노래의 표절이겠거니 해버린 선경은 더 이상 그 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1학년 1학기 때 잠깐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아이. 그 아이가 어떤 변덕스런 봄날 오후에 실수로 들려주었던 자작곡들 중 하나였다고는 조금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 즈음, 정욱은 서울 시내 어느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보스턴 교외의 기숙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전에 꼭 한번 얼굴을 보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곧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부인이 두 돌이 좀 안 된 듯 아장아장 걷는 예쁜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고 정욱이 앉아있는 벤치 앞을 지나갔다. 정욱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잡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욱이 인사하자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교사직을 그만둔 그녀에게 선생님이라는 소리는 멋쩍으면서도 반가운 말이었겠지만,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저 훤칠한 학생이 아마도 자신의 제자이긴 제자였나 본데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욱은 그녀가 재작년까지 3년 남짓 교편을 잡았던 그 중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정욱은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오, 그래, 하고 웃으며 대꾸를 해주었다. 정욱의 시선은 아이에게 향했다. “아기가 참 예뻐요.” 정말로 예뻤다. 티없이 깨끗한 피부에 발이 고운 연한 갈색머리, 역시 커다란 갈색 눈망울,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길다란 속눈썹, 앙증맞은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어느 한 군데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여자는 기쁘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정욱은 아기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우리 나이로는 세 살이지만, 아직 19개월밖에 안 되었다고 대답했다. 슬슬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에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고, 정욱은 여자와 아기가 가는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가다보니 아이에게 한번 직접 말을 걸어볼걸 싶어졌다. 나중에 또 우연을 가장하고 한번 만났을 때 말 걸어보지 뭐. 저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젠가 받아뒀던 보고서에 있었는데. 찾아보면 나오겠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저 아이의 이름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저 어느 누군가를 빼다 박은 얼굴. 똑같은 눈동자, 꼭 닮은 미소. 그것이 중요할 뿐. 가슴이 벅차다 못해 터져버릴 듯한 아픔에 정욱은 잠시 손바닥으로 예전에 심장이 있었던 곳을 문질렀다. 자신에게 심장 따위는 없다. 심장을 한 바퀴 돌아 온 몸 구석구석으로 이동하는 더운 피도 없다. 남은 것이라곤 그냥 하루하루 기계적으로 잘도 살아지는 얼어붙은 목숨 정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가고, 날짜가 지나고. 세월이 흐른다. ............................................................ 말많고 탈많았던 2부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시원섭섭하군요 ^ ^;;; 3부가 있다는 것 기억하시죠? (지겨우실 겁니다. 아마.........^ ^;;;;) 애초에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1,2,3부의 내용과 흐름은 대충 정해져 있었고, 바꿀 생각은 (능력 부족으로) 감히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1부의 테마는 만남. 2부의 테마는 시련. 3부의 테마는 재회와 성공 입니다. 저에게 혹시 궁금해 하실지도 모를 것에 대한 해답이 모두 저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 ^;;;;; -- 23. LOGICAL SONG When I was young 내가 어렸을 때 it seemed that life was so wonderful 인생은 너무나 근사해 보였어 a miracle, oh it was beautiful, magical 마술처럼 아름다운 기적과도 같았어 And all the birds in the trees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도 well they'd be singing so happily 행복하게 지저귀며 joyfully, playfully watching me 즐겁게 나를 바라보았지 But then they sent me away 하지만 곧 나는 멀리 떠나 보내져 to teach me how to be sensible 똑똑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웠어 There are times when all the world's asleep 세상이 모두 잠든 밤에 때때로 the questions run so deep 가슴속 깊이 떠오르는 의문들 Won't you please, please tell me 제발 나에게 좀 가르쳐줘 I know it sounds absurd 말 안 되는 말인 건 알지만 but please tell me 내게 말 좀 해줘 who I am 내가 대체 누군지를 Logical Song - Supertramp <--- CLICK !!! "앗, 땡큐~!" 뒤죽박죽인 핸드백에서 아이디 카드 꺼내야 할 생각에 한숨 나오려던 찰나, 마침 사회부의 정 기자가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틈을 타 선경은 얼른 잽싸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아 베리베리 웰컴." 이라고 싱글거리며 모처럼의 미니스커트 정장 차림을 위아래로 훑는 사내의 눈빛이 또각또각 7센티 하이힐 굽에 달라붙어 한참동안 불쾌하게 뒤를 따라온다. 운동장만한 사무실에 조밀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백 몇십 개의 책상들.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기나긴 여정. 반사적으로 별뜻 없이 뒤돌아보는 드문드문한 시선들은 모른 척, 선경은 가장 구석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문화부 말단――까지 무사히 전진했다.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노트북을 열고 모니터를 노려보며 열심히 기사를 두드리거나 또는 삼삼오오 의자의 방향을 반쯤 틀고 미지근한 잡담을 주고받는 무리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 외에는 아직 취재 나가서 안 돌아온 사람들이 더 많아 책상 대부분이 비어있었지만 그다지 허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책상마다 각종 책자나 프린트물들이 켜켜이 탑을 쌓아 사람없는 공간의 허전함을 채워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선경의 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의 책상을 바라보고 선경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반나절 취재 나갔다 들어와보니 아침에는 보지도 못했던 두툼한 보도자료 봉투들이 가뜩이나 좁은 책상에 시골 마을 어귀의 서낭당 돌무더기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다. 저 책들 중에서 하나라도 손톱만한 곁다리 토막기사로나마 지면에 실릴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일단 뜯어보긴 다 뜯어보아야만 한다. 이 사람 나눠주고 저 사람 나눠주고. 탐나는 건 집으로 가져가고. 처리하는 것도 일이다. "다녀왔습니다." 요새를 방불케 하는 책상 위로 잠깐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다시 자기 할 일로 돌아가는 불특정 소수들에게 인사를 던지고 선경은 책상 한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보도자료 봉투들을 하나하나 쳐들어 겉봉을 들여다보며 또 한 손으로는 가방 속을 더듬어 소형 녹음기와 수첩을 꺼냈다. 오늘은 인터뷰가 있었다. 자기 생각에 빠져서 속사포처럼 동문서답만 해대던 중견 신인 작가. 학연으로 줄 좀 잘 서서 시류를 탄 것 외에 그다지 취할 것 없는, 그렇고 그런 얄팍함. 얕은 물은 빨리 흐른다. 선경은 그 작가와 대단히 심도 깊은 대화라도 나눈 양 부풀려서 기사를 써야 했다. 마치 그 사람에게 반한 것처럼. 앞으로 21세기 한국 문학계를 이끌고 갈 기린아로 그를 둔갑시켜야 함은 물론. 기계적으로 봉투를 들어 겉봉 안팎을 확인하고 그 옆에 새로이 두 개의 탑――오늘 뜯어볼 것과 내일 뜯어볼 것――을 쌓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가장 얇고 작은 봉투. EXS 레코드 한국 지사의 로고가 찍혀 있다. 자리 잘못 찾아왔군. 선경은 옆자리를 스윽 쳐다보았다. 대중문화 담당인 신 선배는 또 어디를 헤매다니고 있는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봉투 속의 내용물이 쬐끔 궁금하다. 피곤한 심신을 잠깐 동안 내 일 아닌 남의 일로 달래고 싶다. 저만 잘난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 쓸 일도 머리 아프고, 한 번씩은 펼쳐라도 봐야 하는 열 권 넘는 책들도 무겁다. 신 선배 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 그 때쯤이면 이미 흥미를 잃을텐데. 20대 후반쯤 되고 보니 선경은 땡길 때 먹고, 떠오르는 순간 해치우고, 궁금할 때 들춰봐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슬슬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야 재밌게 산다. 나중을 기약하며 미뤄두면 잊어버린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지만, 게으름은 인생을 무미건조심심하게 만든다. 이거 그냥 살짝 뜯어보고 잘 붙여놓을까? 아니, 그건 왠지 너무 처량하다. 당당하게 뜯어서 꺼내보고, 내 책상에 있길래 어쩌구저쩌구. 몰랐어요, 선배. 호호호. 재밌던데요. 그나저나 신 선배는 좋겠다. 책은 웬만큼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있어서 늘 부담스러운데. CD 한 장 듣는 데 길어야 70분. 영화 한 편 보는 데 한 시간 40분. TV 드라마 한 편은 러닝타임 50분. 부럽다. 봉투를 뜯자 안에서는 검은색 플라스틱 케이스에 든 DVD와 열 페이지 남짓한 보도자료가 두 개 나왔다. 하나는 미국 본사에서 온 듯한 영어판. 하나는 한글판. DVD 케이스에는 심플하게 『Indulgence. Another Declaration』 이라는 작은 스티커 하나만 달랑 삐뚜름히 붙어 있었다. 종이로 된 보도자료를 슬쩍 컨닝하니 인덜전스가 오랜 동면 끝에 4년만에 새 앨범을 발표했단다. 이건 그 EPK(*electronic press kit. 비디오 테이프나 DVD 등 화상 매체에 담겨져 있는 시청각 보도자료. 음반업계나 영화계에서 많이 쓰임)인 모양. 선경은 외국 대중 음악 쪽에 별로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인덜전스는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았다. 꽤 유명한 영국 출신――오오, 영국이었구나. 보도자료를 보고 처음 알았다――의 그룹으로 데뷔한 지도 이미 10년――역시 보도자료를 보고 안 사실――씩이나 된 고참이란다. 선경은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반짝반짝하는 은색 원반을 꺼내 스크린세이버가 장악하고 있던 휴면 상태의 데스크탑에 밀어넣고는, 때묻은 줄이 라면 가닥처럼 돌돌 말려 서로 엉킨 채 책상 위에 뒹굴고 있던 작은 헤드폰을 뒤집어썼다. 삐~ 하는 전자 신호음과 함께 칼라 바가 뜨며 5, 4, 3, 2, 1 카운트다운. PG 13이라는 시청가능 연령 표시, 그리고 다국적기업인 EXS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낯익은 화려한 시그너처. 그리고 인덜전스의 레이블 이름인지 MESS라는 글자들을 가지고 생동감있게 꾸민 영상이 차례차례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암흑으로 돌변한 화면. 몇 초 후 간결한 하얀 활자가 어둠 속에 작은 백열 전구 하나 탁 켜지듯 조심스레 뜨며 제작사와 연출자, 촬영기사 등 주요 스탭의 이름이 순서대로 나오더니 영상이 시작되었다. 초겨울의 스산한 런던 거리를 하늘에서 높이 인간세계를 굽어보듯이 잡다가 천천히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온다. 거리를 지나는 무표정한 사람들을 한참 보여주면서 서서히 그 중의 한 명에게 클로즈업. 코트깃을 세우고 거리의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밴드 멤버의 얼굴이다. 그 다음 카메라는 바로 그 뒤에서 신호를 받아 길을 건너는 무리들 속에 또 한 명의 얼굴을 포착, 점점 가까이 다가간다. 그 다음은 그 어깨 너머로 신문 노점 앞에 서 있는 사람. 카메라를 약간 옆으로 돌리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또 한 명. 증폭, 강조되어 커다랗게 들려오던 거리의 소음은 점차 잦아들고, 멀리 뒤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은 스테디한 드럼 비트에 맞추어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음악이 시작된다. 애절하게 비틀린, 냉소적이지만 조금 서글픈 분위기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네 명의 밴드 멤버들은 부슬비가 한 차례 지나간 거리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전진한다. 멤버 네 명의 궤적을 따라 얼기설기 편집된, 입자가 거친 흑백 필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흔한 영상인 듯한데, 잘 보면 크게 표시나지 않게 그들이 지나는 거리의 풍경이 문득문득 조금씩 평범을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간판이 맨밑바닥으로 가도록 전체적으로 거꾸로 뒤집혀 세워져 있는 가게에 그 안의 사람들도 모두 극히 자연스럽게 거꾸로 서서 천장을 디디고 돌아다닌다거나, 갑자기 그곳에만 햇빛이 쨍 하고 비치는 것처럼 어느 한 군데만 유별나게 컬러풀한 밝은 모습을 띤다거나, 직립 보행하는 개가 사람의 목에 목줄을 씌우고 네 발로 기게 하며 끌고 간다거나 하는 이상한 장면들이 전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필름에 담겨져 있다. 서정적인 멜로디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울부짖음과도 같은 그 노래가 1절을 마무리할 무렵 멤버 네 명은 다시 처음 출발했던 곳의 건너편으로 돌아와 있다. 길을 따라 걷던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고, 길은 건너가던 사람은 이쪽 길로 건너온다. 서서 신문을 보던 사람은 다 본 신문을 쓰레기통에 넣고 걸음을 재촉하고,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던 사람은 도착한 이층버스를 타고 가버린다. 그리고 음악은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대충 용건만 마치고 중간에 끊긴 전화처럼 일단락된 상태에서 페이드 아웃, 그와 함께 화면도 암전暗轉. 다시 빛이 들어온 화면에는 아까의 그 이층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그 버스를 탔던 사람이 아닌, 장대같이 키만 큰 낯모를 중년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잡힌다. 자막이 떠서 그의 이름과 함께 그가 BBC 라디오의 인기 DJ임을 알려준다. 카메라는 그와 함께 런던 시가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고풍스런 5층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건물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는, 적당한 거만함과 적당히 소탈한 웃음으로 10년차다운 여유를 보여주는 멤버들과 따로 또 한꺼번에 만나 새 앨범에 대해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인덜전스라는 밴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총정리하는 그의 나레이션이 인터뷰 사이사이 이어진다. 그 와중에 화면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와 함께 새 뮤직비디오의 클립과 그 촬영 장면을 보여주다가 자연스럽게 레코딩 작업 광경을 찍은 기록 필름들로 넘어갔다. 홈 무비 같은 불안정한 카메라 워크. 초라한 세련됨으로 무장한, 실상은 무지무지 화려한 외모의 싱어가 커다란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양손으로 헤드폰의 귀 부분을 누른 채 커다란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에 몰입하고 있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 레코딩 부쓰 바깥, 마치 비행기 조종실처럼 기계로 가득찬 녹음실에는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부쓰 안을 주의깊게 쳐다보며 싱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밴드 멤버들중 두 명――기타와 드럼――은 맨 뒤 벽에 붙은 인디언 핑크의 페이즐리 무늬 소파에 기대어 편한 자세로 앉아 있고, 메스 레이블의 사장이라는 자막을 달고 잠깐 인터뷰를 했던 양복 차림의 남자는 그 앞 어중간한 위치에 팔짱을 끼고 서 있다. 그리고 기계 앞에 앉아있는 것은 세 명――하나는 키보드를 맡은 밴드 멤버. 나머지 두 명은 아마도 프로듀서와 사운드 엔지니어일 테지. 그중 한 명에게 카메라가 포커스를 맞추며 줌인되는 순간, 건성으로 나레이션을 흘려들어가며 그냥 눈에 힘 쭉 빼고 멀거니 모니터에 시선만 주는 정도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선경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유리창 너머 부쓰 안에서 한참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싱어와 컴퓨터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며 집중한 표정으로 살짝살짝 기계 위의 버튼 몇 가지를 조작하는 젊은 남자. 푸르면 어깨 정도 내려올 듯 보이는 밝은 갈색머리를 대충 질끈 묶고, 앞단추를 세 개 풀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올린 새하얀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네모난 하늘색 렌즈의 무테 선글라스를 낀 그는 아무리 봐도 동양인이었다. 앉아있는 모습만 딱 봐도 팔다리가 길고 키가 꽤 큰 것을 알 수 있는 늘씬한 역삼각형의 체격이나 옆으로는 좁고 앞뒤로 기다란 짱구스러운 머리통, 갸름한 얼굴형 따위의 전체적인 실루엣은 서양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이목구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확실히 이질적이다. 혼혈인가 하고 자세히 보는 순간, 싱어의 노래가 끝났다. 그는 들쑥날쑥 물결치는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천천히 기계의 페이더fader를 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다. 완전히 끝까지 내린 다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쓰 안의 싱어에게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모두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싱어가 그에게 손으로 키스를 불어보내는 장면을 끝으로 곧 다시 싱어의 인터뷰로 화면이 바뀌었다. 마치 인터뷰를 하는 DJ에게 건물 안을 안내해주는 것처럼 둘은 복도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싱어는 이번 앨범의 녹음 세션 중에서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오케이가 됐던 유일한 노래였다며 방금 전의 그 노래에 대해 얘기하고, 프로듀서이자 그 곡――뿐 아니라 이번 앨범에 수록된 전곡――을 자신과 둘이서 같이 작곡한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눈을 빛내며 얼굴에 환한 웃음을 가득 담은 싱어의 입에서 온갖 최상급의 화려한 형용사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그 와중에 마침 그들이 지나가던 복도 저쪽 끝의 사무실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한참 싱어가 입에 올리고 있던 '그'가 메스 레이블의 사장과 함께 나왔다. 싱어는 거의 충동적으로 단숨에 뛰어가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키스를 한다. 마우스 투 마우스. 혀를 쓰는 딥 키스. 능란한 혀놀림이 멀리서도 적나라하게 보인다. 사장은 뒤에 서서 그냥 웃고만 있다. 버둥거리던 '그'가 싱어를 간신히 두 팔로 밀어 떼어놓으며 "Get off! you bloody old creep!(떨어져, 이 징그러운 인간!)" 하고 반농담으로 욕을 해댄다. 둘이서 같이 서 있으니 거의 키 차이가 없다. 그 동양인 청년은 생각보다도 훨씬 훤칠한 듯 했다. 어찌 보면 그쪽이 키가 더 큰 것도 같아 보일 정도로. 싱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웃는다. "He talks so sweet.(말도 이쁘게도 하지)" 그러자 뒤에서 그가 "And you kiss like shit.(그리고 당신은 키스를 못하고)" 하고 맞장구친다. 싱어는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가슴에 손을 얹는다. "I'm in love.(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누가 보더라도 즉흥적인 장난에 불과한 이 해프닝을 끝으로 선경은 플레이어를 스톱시켰다. 왠지 손끝이 조금 떨렸다. 어쩐지 낯익은 인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가 자신이 예전에 알던 누군가를 참 많이 닮았기 때문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비슷한 외모. 비슷한 체격. 그대로 아무 일 없이 자랐으면 지금쯤 저렇게 근사한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선경은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보도자료를 휘휘 넘겨 레코딩 프로듀서의 이름을 확인했다. 쥴스 J. 슬레이니Jules J. Slainey. 너무나 영국적인 이름에 조금 실망하며 선경은 데스크탑에서 DVD를 꺼내 케이스에 넣고 보도자료와 함께 봉투에 다시 넣어 신 선배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슬슬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오늘 안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두 가지나 있었다. * * * * * "벌써 가요?" 침대 사이드에 앉아 바지를 다 입고 일어나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셔츠를 집어들어 팔을 꿰는데 카이가 물었다. 류신은 흘깃 옆을 쳐다보고 대답없이 거울 앞으로 가서 넥타이를 맸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채로 맨몸뚱이는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멍청하니 침대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는 카이의 모습이 거울 속에 비췄다. 류신은 아무 감흥없이 시선을 다시 넥타이에 집중했다. 안 보고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맬 수 있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 카이가 체념한 듯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조용하던 방 안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소리로 북적였다. 언제나처럼 M-TV.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의 MC가 스튜디오에 밴드 하나를 데려다 놓고 속사포같은 말투로 쉴새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그 백그라운드에서는 그다지 잔잔하다고 할 수 없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열댓 명은 떼로 한꺼번에 몰려든 것 같은 부산스러운 느낌에 류신은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는 쉬러 오는 곳이다. 이제 가야 할 시간.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협탁 위에 100달러 짜리 열몇 장을 놓고 류신이 문 앞까지 나오는 동안 카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그 자세 그대로 TV 수상기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다." 쳐다보지도 않고 문을 열며 기계적으로 류신이 말하자, 카이는 네 하고 대답했다. 문을 닫는 동작과 동시에 카이가 침대 위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벌러덩 눕는 것이 언뜻 보였다. 바깥으로 나오니 날씨가 제법 푸근해진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3월의 뉴욕은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 엊그제는 눈이 엄청 쏟아졌다. 햇살이 닿지 않는 구석에는 시커멓게 얼어붙은 눈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날이 맑게 갠 편이라 차디찬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긴 했지만 춥다고까지 느껴지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 류신은 추위를 잘 타지 않기 때문에 날씨를 논할 자격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영하 몇십 도까지 내려갔던 지난 겨울에도 류신은 그다지 추워하지 않았었다. 추위만큼 더위도 타지 않아 40도를 육박하는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더워서 힘들다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날씨에 둔감하다기 보다는 자신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체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일로 흔들리기에는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껍질 자체가 남보다 좀더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갑옷으로 단단하게 무장하고 언제나 항상 기민한 전투 태세. 카이의 아파트는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류신의 사무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다. 걸어서 왔다 갔다 할 정도의 거리는 아니지만 제법 가까운 거리. 맨해튼 금싸라기 땅의 비교적 나쁘지 않은 스튜디오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열 아홉살짜리 일본 아이. 처음에는 영어가 어눌해서 유학생인줄 알았는데 학교는 다니지 않았고 특별히 어학 연수를 받는다거나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별다르게 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뉴욕에 산다. 그것도 혼자서. 목적이 무엇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본인은 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류신의 기억에는 없다. 그러고 보면 그 어느 것에도 의문조차 가져본 일이 없다. 그냥 그 아이의 현재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이 그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구분을 지어본 적이 없다. 사실상 류신은 카이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중요한 점이라고는 딱 하나. 처음 만났을 때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누군가를 닮았다고 느꼈었다는 것. 그것이 돗때기시장 같은 파티장 한복판에서 그 아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이라는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여 눈길을 더욱 자세히 주게 되었고, 이름이 카이(海)라고 들었을 때는 몸이 저절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류신은 카이의 아파트에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일 년. 시간이 맞을 때 찾아가서 편리하게 몸을 탐하는 상대. 아직도 생생한 어떤 느낌 속으로 비교적 용이하게 빠져들게 해주는 매개체. 지금껏 그나마 가장 성능 좋고 효율적이다. 일주일만의 섹스로 조금 나른해진 등을 시트에 기대고 류신은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섹스의 여운이 남아있는 동안은 아련한 그리움도 같이 남아 내장 이곳저곳을 쑤시고 할퀴며 몸속을 돌아다닌다. 그것 때문에 카이를 안는다. 가슴이 조금 따끔따끔하니 속이 쓰리고 목이 콱 메이는 것――이것이 아마도 슬픔이라는 것이겠지만――쯤은 감수할 수 있다. 이 아득한 여운이 워낙 마음에 들기에. 이것보다 더욱 깊게 파고들면 아픔의 강도가 더 세어질 테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10년의 세월 동안 통각痛覺은 닳을 대로 닳아 무뎌져 있었고. 아픔을 아픔으로써 느낄 심장은 애초에 죽은지 오래. 카이의 아파트에서 나온지 15분 정도만에 류신은 자신이 근무하는 세강전자 뉴욕지사의 빌딩 앞에 도착했다. 걸어서 왔더라면 이 여운을 좀더 길게 맛보았을 텐데라는 잠깐의 아쉬움도 차에서 내리는 순간 사라졌다. 돌계단 몇 개를 걸어올라 로비의 정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오후부터 저녁까지의 스케줄이 차곡차곡 순서대로 정리되어 한 줄로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Celebrating another declaration of Indulgence(인덜전스의 또다른 선언을 축하하며)』 앨범 발매 기념 파티 겸 소규모 공연이 있는 런던 남부 배터씨Battersea의 대형 클럽 마인드블로우Mindblow에는 길 건너편 저 멀리서부터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현수막과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고, 초대권을 가진 입장객들의 줄이 입구 앞으로부터 두 블록 이상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구불텅구불텅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애타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바로 옆으로 이름만 대면 다 알 듯한 유명인사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속에 하나 둘씩 안내되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영국 록음악계의 빅 네임들과 인덜젼스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했었던 슈퍼 모델을 비롯, 잘 나가는 배우들과 톱 모델들이 섞여 있었고, 요즘 한창 젊은 층에 인기 있는 패션 디자이너와 사진작가, 영화감독과 유명한 화가 등등 문화계 인사들과 런던 사교계에서 한가락씩 하는 상류층 파티 걸들의 모습도 보였다. 입구에 있는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대면 스스로도 그다지 확신할 수 없는, 그저 입에만 발린 말들을 한 마디씩 해주는 그들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별처럼 빛나는 존재. 다른 세계의 생물들. 처음부터 저런 빛을 타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 그 북적거리는 틈을 타 클럽의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와 빙 돌아서 길을 건너던 그는 고개를 돌려 VIP들의 화려한 행차를 길 건너편에서 잠깐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자신은 전혀 그들과 같은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들 사이에 섞여 있다고 해도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않겠지만, 일단 카메라 플래시가 팡팡 터지는 곳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그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진 찍히는 것도 여전히 꺼려졌다. 그래도 떠오르는 일말의 불편함 때문에 잠깐 걸음을 멈추었던 그는 결심한 듯 미련없이 클럽을 등지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꺼내 번호를 확인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폴더를 열었다. 「제이! 어디로 사라졌어? 빨리 와!」 제이가 그의 이름. 그리고 다짜고짜 전화통에 대고 찌렁찌렁한 소리로 그의 행방에 대해 외쳐대고 있는 것은 인덜전스라는 유명한 밴드의 리드 싱어이자 송라이터인 나이젤 리처드슨이었다. 제이로서는 사운드체크도 다 마쳤겠다, 리허설도 다 끝났겠다, 모든 것이 준비 완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은 다 끝났고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들만 남았기 때문에 됐다 생각하고 빠져나왔는데 역시나 나이젤은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잠깐 뭐라고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어이, 전화 잘못 거셨수다." 목소리를 좍 깔고 대답했다. 「오, 그래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나는 제이가 아닌디요―" 「알아.」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웃음섞인 목소리로 나이젤이 대답했다. 이 정도 멘트는 이제 이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다. 어서 새로운 멘트를 개발해야― 「너는 제이가 아니야.」 "우후후, 아니까 다행―" 「이봐, 잘 알잖아. 네가 누구이든, 제이이든 제이가 아니든 나는 너를 사랑해.」 "……." 습습한 찬바람이 옷 속으로 슬며시 파고드는 거리 한복판에서 그는 완전히 석상이 되어버렸다. 무릎을 덮는 길이의 옅은 회갈색 가죽 코트도 온몸을 달려가는 소름을 막아주지 못했다. 이 기름진 '알라뷰' 공격. 지난 몇년 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역시나 순전히 착각. 「빨리 와. 이제 곧 시작이야.」 "……." 「네가 있어야 돼.」 "……." 「네가 없으면 난 안 돼.」 달칵. 폴더를 닫고 멈추어서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좋을까.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동전을 하나 꺼냈다. 반 파운드짜리 백동전. 두툼한 7각형의 각진 테두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그는 허공으로 살짝 던져 양손으로 김일성 박수를 한번 가볍게 치며 받아냈다. 겹쳐진 손바닥 뚜껑을 떼어보니 50이라는 숫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면이 하늘을 향해 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동그랗게 줄을 지어 손목을 잡고 또 잡히고 있는 아홉 개의 손. 축축하게 가라앉은 길먼지를 쓸면서 스르륵 다가온 차가운 바람이 길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어깨를 슬쩍 휘감고 스쳐 지나갔다. 그는 트렌치 코트의 깃을 세우고 클럽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아주 천천히. 귀밑 여린 살에 와닿는 가죽의 느낌이 차가웠다. 아까 빠져나왔던 뒷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후끈하는 열기가 얼굴을 스쳤다. 안경알에 김이 뽀얗게 서렸다. 순간적으로 장님의 기분을 경험하며 그는 안경을 코 끝에 걸쳤다. "어디 갔다왔어?" 밴드 전체의 행정 담당 매니저 겸 메스 레코드의 중역이자 나이젤의 고향 친구인 데릭이 마치 그가 나타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뒷문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데릭을 한번 쓰윽 쳐다보고는 못 들은 척 코트를 벗고, 목에 슬쩍 걸쳐 둘렀던, 청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복잡한 빛깔의 니트 목도리를 잡아당겼다. 실내는 더웠다. "나이젤이 찾고 난리가 났었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 그는 코트를 걸어두러 드레싱 룸을 향해 걸어갔다. 데릭은 보조를 맞추어 같이 걷기 시작했다. "지난번 앨범때도 겪었었잖아. 지금 한참 스트레스 최고조일 때야. 쓸데없는 짓 하지 않게 네가 도와줘야 해." 안경알에 부옇게 서렸던 김은 가시었지만 물얼룩이 진 것같은 답답함이 그 대신 남았다. 닦아내려고 안경을 벗다가 문득 떠오르는 어떤 기억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짓. 절대 웃고 넘길만한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었다. "5월에 콘서트 투어 시작하기 전까지 이제 곧 홍보 때문에 눈 돌릴 틈없이 바빠지는데 나이젤이 무너지면 안돼. 그 녀석한테는 네가 만병통치약이니까 특별히 부탁할게." "그럼 모든 걸 다 따라다니란 말씀이신가요? 홍보 투어도?"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이든 파리든 뮌헨이든 전부 다. TV 토크쇼든 신문 인터뷰든 한구석에 있어줘." "엄밀히 따져서 나는 이제 메스의 직원이 아니에요." "알아. 그래도 일단 부탁한다. 이번 앨범은 네 작품이기도 하잖아. 너를 위해서도," 데릭은 잠깐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커리어를 위해서도 이번 일이 아무 차질없이 잘 되어야 하지 않겠어?" "……." "다음 주 월요일에 뉴욕에 간다. 기자회견하고 인터뷰 하고 뉴욕에 닷새는 있을 거야. 너는 그 동안 나이젤이랑 그 녀석 아파트에서 묵어. 그 변덕에 또 제 집 놔두고 호텔에서 묵겠다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네가 옆에서―" "어, 제이! 어디 갔다 왔어요?" 지난 번 투어 때부터 같이 일해 왔던 조명 담당 스태프가 반갑다는 듯이 다가와서 그의 등을 툭 쳤다. 그리고는 데릭의 얼굴을 스윽 한번 쳐다보고 뭔가 분위기가 아니다 싶었는지 슬금슬금 옆으로 샌다. "제이, 너도 잘 알지? 나이젤은―" 그 다음 단어는 갑자기 홀에서 터져나온 그르르릉 하는 기타의 인트로와 그에 연이은 VIP 관객들의 환성에 먹혀 들어갔다. 데릭이 하려던 말은 중지됐다. 둘은 말없이 복도를 따라 걸어나와 홀과 이어지는 복도 어귀에 멈춰섰다. 무대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데다가 그나마 뒷모습밖에는 안 보이는 위치였지만 어쨌든 무대 위 상황이 똑똑히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박력있는 전주에 맞추어 카리스마 넘치는 보폭으로 무대 위를 시원하게 한번 왕복하고 다시 중심으로 돌아와 마이크대를 와일드하게 잡아채서 환호하는 팬들에게 흔들어보이는, 부지깽이처럼 깡마른 리드 싱어. 홀린 듯 그윽한 시선을 그곳에 꽂아두고 있는 데릭의 옆모습을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젤은 너무 여려. vulnerable. 지금 한창 무대를 달구는 록 넘버의 제목이었다. "타이틀은 뭐라고 뽑을 거에요? 내가 맞춰볼까? 『Their another declaration : We're getting old(그들의 또다른 선언: 우리는 늙어가고 있어요)』 맞죠?" 예전 하던 일의 버릇이 남아 그가 음향 장비들 해체해서 실어 내보내는 것을 도와주고 백스테이지로 돌아와보니 나이젤은 기자와 한창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멜로딕한 느릿느릿한 억양이 넓지 않은 실내에 울렸다. 그는 불붙은 장작이 탁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 나이젤 특유의 t자 발음을 좋아했다. "아니다. 이쪽이 낫겠네. 『Their another declaration : We're indulging into being boring(그들의 또다른 선언: 우리는 재미없어지는 재미에 빠졌어요)』" 기자는 '그것도 좋은 생각' 하고 나직하게 웃으며 수첩에 받아적었다. 근본적으로 광대 기질이 있는 나이젤은 뭔가 해냈다는 듯이 흐뭇하게 웃다가 문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 "제이! 언제 왔어!" 나이젤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기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누구냐는 듯이 나이젤을 향해 고개를 갸웃한다. "우리 이번 앨범 프로듀서요." 나이젤은 제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제이, 이분은 Q매거진의……." 소개를 한다고 나서다가 이름을 까먹었는지 나이젤이 잠깐 멈칫하자 기자는 알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가와서 제이는 엉겁결에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둘은 짧은 악수와 통성명을 했다. Q매거진의 기자라는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이 역시 방금 들은 그의 이름이 기억에 새겨지지 않았다. "제이가 이번에 우리 곡을 다 써줬어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나이젤이 말했다. 턱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제이는 얼른 가서 그 옆에 앉아 눈에 띄지 않게 그를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아니요. 같이 썼죠. 우리 둘이." 제이가 말하자 나이젤은 얼른 받아쳤다. "제이가 없었으면 이번 앨범 못 나왔을 거에요." 기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갈색 티 테이블 위에서 열심히 직무를 다하고 있는 소형 카세트 레코더를 바라보았다. 카세트에서 전해지는 진동으로 두껍지 않은 테이블판은 살짝 바르르 떨며 작게 그르릉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멤버들이 다 탈퇴한 상황에서도 이번 앨범이 무사히 나올 수 있었군요." "네." "『Another Declaration또다른 선언』이라……. 데뷔 앨범이 『The Declaration선언』이었잖습니까? 그럼 밴드가 10년만에 재정비를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의미도 있는 건가요?" 나이젤은 자신의 무릎에 놓인 베이스 기타를 신경질적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살짝 떨리는 나이젤의 손을 제이가 자신의 손으로 가만히 감싸주었다. "글쎄. 재정비라고까지 할 것도 없죠. 솔직히 말하자면 멤버가 바뀌길 원했던 게 결코 아니니까요. 그냥 지난번 투어가 끝나고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다 나가버린 것뿐이에요. 워낙 길고 끔찍한 투어였어요. 싸우기도 엄청 싸웠죠. 투어 끝날 때쯤 되니 서로 얼굴도 보기 싫더군요. 바로 옆방에 있는데 전화로 회의를 했었다고 하면 할 말 다 했죠. 다들 도망갈 만도 합니다. 나도 도망가고 싶었는데 결국 붙잡히고 말았지만." "……." "나까지 나가면 인덜전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거죠. 그래도 상관없다 싶은 적도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시 그건 싫었어요." 나이젤은 불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이 일단 정리가 된 다음에 제이가, 아니, 우리 둘이서 석 달 동안 열 두 곡을 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단 둘이 내 홈 스튜디오에서 일단 레코딩을 시작했죠. 그리고 얼마 후에 드러머 알렉이 들어오고, 기타리스트 올리버가 그 다음. 어떻게 된 게 키보드를 가장 마지막에 찾게 됐어요. 뭐, 그건 제이가 있었으니까 녹음에는 지장이 없긴 했죠." 그는 나이젤이 말을 끊지 않는 것이 초조했다. 빨리 인터뷰를 끝내고 기자를 보내야 했다. "그러면 제이를 밴드에 참여시킬 생각은 안 했던가요? 원래 사운드 엔지니어였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기자가 물었다. 질문이 떨어지기도 전에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나이젤이 아쉬운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건 상관없어요. 키보드 실력이 수준급이니까요. 난 정말 제이가 들어와준다고만 하면 좋았지만―" "저는 스튜디오 체질입니다. 그리고 무대 아래는 좋아하지만 무대 위는 불편해요." 그가 딱 잘라 말하자 나이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양손바닥을 뒤집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제이는 얼굴 팔리는 걸 싫어해요. 이상하죠?" 기자가 카세트를 챙겨 방을 나서자 나이젤은 으으음 소리를 내며 소파 속으로 무너졌다. "피곤해." "그럼 집에 가서 쉬어요." "아직 파티가 한창인데?" 나이젤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앉아 문 밖을 가리켰다. 오늘은 그들의 파티였고 파티의 중심은 나이젤 자신이었다. "나, 잠깐 화장실 갔다올게." 그리고 나이젤은 제이의 눈을 피해 살짝 기타 케이스에서 뭔가를 꺼내 옷자락 속에 감췄다. 작은 갈색 주머니. "그거 뭐예요?" 그가 묻자 나이젤의 등이 움찔 떨렸다. "별거 아니야." "뭔데요? 한번 봐봐요." "별거 아니―" 나이젤이 채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는 손에서 그 주머니를 잡아챘다. "별거 아니라니까. 파우더(*가루로 된 마약. 코카인이나 헤로인 등)는 이제 정말 안 한다구. 그냥 마리화나(*대마초의 일종)야. 이 정도는 좀 봐주라."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며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나이젤을 그는 지긋이 노려보았다. 손이 아까보다 훨씬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딴데 가지말고 여기서 피워요." 그는 주머니를 휙 던졌다. 나이젤은 가까스로 캐치했다. 그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동안 서둘러 담배를 돌돌 말아 불을 붙이는 소리가 뒤로부터 들렸다. "너도 피울래?" "몰라서 물어요?" 그는 볼멘 소리로 외쳤다. "그래. 넌 약도 안 하고 대마초조차 절대 안 피우지." "……." "좋겠다." 좋을 것도 많다. 약이라면 예전에 심하게 데인 기억 때문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 즐거움을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참 안됐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이 즐거움을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또 부럽기도 하고 말야." 그래도 난 네가 참 좋아. 사랑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날 버리지 마라. 떠나지 마라. 아무데도 가지 마라. 주문처럼 중얼거리다가 나이젤은 점점 행복한 구름속으로 빠져들어가는지 간헐적으로 기침소리와 웃음소리를 번갈아 뱉어낼 뿐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모락모락 실내에 번지는 매캐한 연기에 취해 그는 자신도 머리가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어지럽고 조금 슬펐다. 대마초는 해피 드럭인데 왜 항상 슬퍼질까. 아마도 자신이 직접 피우지 않고 그저 냄새만 맡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슬픔은 두 배가 되었다. 슬픈 이야기다. 어스름이 땅거미가 지고, 푸르스름하니 설익은 어둠이 거리에 빠른 속도로 내려앉고 있었다. 눅눅한 초저녁 공기 속에 점점 또렷해져가는 안온한 불빛들. 본격적인 활동시간을 맞아 한층 더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 눈부신 소음을 앞뒤로 뿜으며 하루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자동차들. 잠들지 않는 도시에 서서히 또 한 번의 밤이 찾아든다. 류신은 그 화려한 북적임 속에 아트 갤러리들이 밀집되어 있는 첼시 지역을 걷고 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갤러리 곳곳마다 안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이 커다란 쇼윈도우 너머로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과 집중력을 아울러 삼킨 갤러리들의 행렬을 주욱 따라 성큼성큼 걷다가 류신은 블록 끄트머리쯤에 다다라 조금 천천히 보폭을 좁혔다. 그리고는 유난히 천장이 높은 널찍한 1층 건물 앞에서 비로소 발걸음을 멈추었다. 『유나이티드 인해비턴츠 오브 뉴욕, 버즈 앤드 인섹츠 인클루디드 United Inhabitants Of NY, birds and insects included(뉴욕 거주자 연합, 조류와 곤충류 포함)』이라는 길고 거창하고 장난스러운 이름의 이곳은 원래 대형 창고 건물이었던 곳을 갤러리로 개조한 공간이었다. 건물 바깥은 원래의 허름한 창고스런 외양과 틀을 거의 그대로 놔두고 전면유리로 쇼윈도우만 만들어놓은 것 이상은 손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얼핏 쇼윈도우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갤러리 내부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펑키한 분위기와는 달리 불필요한 장식을 최소화한 채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건물 자체의 높이와 넓이에 눌려 안에 있는 사람들――지금은 기껏해야 두어 명 정도밖에 없었지만――이 상대적으로 매우 왜소하게 보일 만큼 규모가 컸다. 갤러리 안에서는 온통 새하얗게 칠해진 벽면 한쪽을 거의 천장까지 가득 메운, 그저 우울하고 컬러풀한 낙서 같다는 느낌 외에 도저히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상상조차 안 되는 거대한 사이즈의 그림 앞에서 한 젊은 남자가 샤넬 정장 차림의 귀티나는 중년 여성에게 열심히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말을 멈추지 않은 채 우연히 시선을 돌리다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류신을 발견하고 기다리라는 듯이 살짝 고갯짓을 했다. 류신은 군더더기 없이 빠른 동작으로 다크 베이지색 버버리 방수 코트를 벗고 세로로 깔끔하게 반 접어 오른쪽 팔꿈치에 걸었다. 문득 손끝에 닿는 코트 표면이 꽤 축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과 마찬가지로 습습한 바깥 내음을 묻혀 들어온 검은 머리카락을 류신은 왼손으로 살짝 쓸어올렸다. 저녁의 거리에는 어둡고 스산한 물기가 감돌았다. 밖에 있을 때는 이 정도까지 습하다고 그다지 생각지 않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실내가 아주 쾌적하다고 느껴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비어있는 하얀 벽에 문득 반사되는 조명 때문에 때때로 눈이 아플 뿐. 이 곳은 모든 쾌적지수가 미술품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습도와 온도와 조도照度. 모든 것이.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른 갤러리들의 두세 배는 거뜬히 되고도 남을 듯한 너른 공간에 걸려있는 그림들이라고는 딱 여섯 점이 전부. 걸려있는 그림들이 적으니 쓸데없는 구경꾼도 그다지 없었던 것인지도. 그가 들어오기 전에는 심심할 정도로 휑하니 비어 보이던 갤러리가 2미터에서 겨우 대여섯 센티미터 모자랄 뿐인 훤칠한 체격과 굳게 다문 턱선과 거만한 무표정이 뿜어내는 존재감으로 가득 메워졌다. 갤러리 안의 그림을 들여다보려 기웃거리던 창 밖의 시선들이 오히려 그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류신은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냐?" 짙은 잿빛에 가까운 회색 슈트에 연한 핑크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받쳐입고 강렬한 자줏빛 꽃이 일필휘지의 핸드페인팅으로 그려진 실크 넥타이를 맨 민혁이 걸어오며 물었다. 손님 둘은 다 나가고 없었다. 문 앞의 사인은 어느 틈에 「OPEN」이 안에서 보이게끔 돌려져 있었다. 류신은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기껏해야 30분 남짓. 그다지 많이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저기 붙어있는 빨간 딱지는 뭐야?" 류신은 대답대신 가장 가까운 위치에 걸려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림 바로 밑에 '팔렸음'을 의미하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걸려있는 그림들 중에 딱 하나만 빼고 저 딱지가 다 붙어있다. 그 단 하나가 바로 아까 민혁이 금발의 상류층 귀부인과 같이 쳐다보고 있던 벽화 수준의 대형 그림이었다. 민혁은 대답없이 웃었다. "저런 그림은 대체 누가 사가는데?" "글쎄. 그게 내가 앞으로 힘써 알아봐야 할 일이겠지." "……." "알게 되면 제일 먼저 너한테 알려주마." 민혁은 계속 못된 장난을 머릿속에 잔뜩 감추고 있는 일곱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우리 나이로 서른 하나. 10년 세월에도 퇴색되지 않는 그 특유의 웃음이다. "안 팔린 걸 팔렸다고 또 쇼를 하고 있었군." "응. 저걸 꼭 팔아야 됐거든." 민혁은 턱 끝으로 딱지가 안 붙은 유일한 그림을 가리켰다. 벽에 걸려있는 다섯 점의 그림들은 모두 일맥상통한 분위기――대체적으로 뭘 그리고자 했는지 알 수 없는――와 통일된 색감――역시 한 풀 가라앉은 듯 하면서 이상하게 현란한, 하지만 유치하지 않은――을 지니고 있었다. 한 작가의 작품인 거다. "팔았어?" "물론!" 민혁은 자랑스레 큰 소리로 대답하더니, "나는 역시 시간 오래 안 끌고 잽싸게 구매 결정하는 여자가 가장 예쁘더라." 휴우~ 작게 휘파람을 불며 덧붙였다. "아름다우신 싸모님." 그리고는 이미 가고 없는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은밀한 시선을 보낸다. 이곳 첼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축에 든다는 일류 갤러리에서 4년간 일하면서 실력있는 아트 딜러로서 발판을 굳히고 이제는 어엿하게 자신만의 샵까지 오픈한 그였지만, 역시 그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는 듯 했다. 본성이란 그다지 세월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십쇼' 하니까 '그래요' 하고 30만 달러를 선뜻 지르시는데, 그 순간 정말 그 싸모님이 어찌나 아름답게 보이시는지 확 끌어안고 키스해버리고 싶어 혼났다니까." "……." "근데 참았지. 네가 올 거니까." "……." "네가 보고 질투하면 내 인생이 피곤해지지." 일이 성사된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민혁이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더 이상 그에게 질릴 것도 놀랄 것도 발끈해줄 것도 남지 않은 류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잠깐 사이에 바깥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시간은 참으로, 참으로 빨리 간다. "30만 달러 받아도 미안하지 않을 만한 작품이야?" "어이!" 민혁은 정색을 했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거냐? 사기는 안 친다." "아주 안 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류신은 이제 담당자가 퇴근하고 비어있는 인포메이션 데스크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책상에는 다가올 전시회를 알리는 팜플렛과 전시할 그림을 가지고 만든 홍보용 엽서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뭐, 양념을 좀 치긴 하지만, 값어치는 충분한 작가야. 아직 젊고 신인 축에 들어서 그렇지. 조만간 최고가 될 거다." "……."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반짝이는 자신감.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류신이 팜플렛을 팔랑팔랑 넘겨보며 심드렁하게 말하자, 민혁은 대답없이 우후후후 웃기만 했다. 류신은 팜플렛을 내려놓고 갤러리 안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그럼 투자하는 셈 치고 나도 하나 사둘까? 저 그림. 너무 크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데." 하고 저쪽 코너에 걸려있는 작은 그림을 가리켰다. 상큼한 오렌지빛과 투명한 남보라, 그리고 톤을 약간 눌러준 핏빛의 다크 레드가 주조를 이루는, 지금 이 안에 걸려있는 그림들 중 그나마 가장 사이즈가 작은 것이었다. 색상 대비도 극적으로 화려하고 그림의 형상 자체도 따사로운 느낌이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가 서려 있어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아, 저거……." 민혁은 난처하게 웃었다. "팔릴 예정이야." "안 팔렸다더니?" 류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팔리진 않았는데……." "살 사람이 나섰어?" "아니, 굳이 말하자면…," 민혁은 말하기가 좀 곤란한지 뜸을 들였다. "…내가 팔 사람이 생긴 거지." 류신은 누구? 하고 묻듯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왠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너 혹시……. 하긴 네가 알 리가 없지. 암튼 꽤 잘 나가는 유명한 록스타가 하나 있는데, 이번에 며칠 뉴욕에 머물게 됐다고 집안 분위기를 좀 바꾸고 싶단다." "며칠?" "런던에 살고 뉴욕엔 일 있을 때만 온대. 싹 뜯어고치고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는데 그 정도까지는 시간이 없어서 일단 가구랑 그림 정도―" "그래서 여기 와서 그림을 보고 갔다고?" 자신이 미적지근하게나마 한번 사보지 하고 생각한 물건을 이미 찍어놓은 사람이 따로 있었다니 괜히 불쾌해졌다. 이상한 경쟁심 비슷한 것이 불쑥 솟는다. "아니, 그건 아니라 그 사람의 대리인이 의뢰한 데코레이터가―" 흠, 하는 낮게 깔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류신은 민혁의 말을 툭 잘랐다. "그러면 그림을 벽 장식품 하나 바꾸는 기분으로 그냥 보지도 않고 산다는 얘기 아닌가?" "……." "그 화가는 자기 작품이 그렇게 팔려도 괜찮다고 할지 모르겠군. 물론 딜러님께서 잘 알아서 하시는 일이겠지만." 민혁은 살짝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옆으로 비켰다. "전문 콜렉터들 손에 들어가는 것도 좋긴 한데, 그런 사람한테 하나쯤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경우에 따라서는 그 팬들한테 선전도 될 수 있고……." 그리고, 속여먹기도 좋겠지. 부르는 게 값일 테고. 류신은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하고 싶지도 않다. 그림 장사도 장사니. "야, 그만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예약 시간에 늦겠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민혁이 겉옷도 가지고 나올 겸 안쪽의 사무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류신은 자신이 눈길을 줬던 시점에 이미 찜을 당한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진 그 그림 앞으로 갔다. 남의 것이 되었다고 들어서일까. 가까이서 본 그림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무엇을 그리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은 너무 멀리서 본 탓이었고, 가까이 들여다 보니 그림 중심에 있던 희끄무레한 형체는 너른 들녁 한복판의 좁은 사잇길에 오도카니 서 있는 아이였다. 핏빛 얼룩이 진 길 위에 서서, 땅바닥에 떨어진 붉은색의 뭔가를 주우려고 하는지 등을 약간 굽히고 한쪽 팔을 늘어뜨린 채로, 오렌지빛 굵은 덩어리가 안개구름처럼 번져가는 하늘을 문득 바라보는 아이. 그 아이를 둘러싼 푸르스름하니 투명한 보랏빛 기운. 간결하고 섬세한 터치. 따스하고 서정적인 느낌. 자잘한 디테일을 다 걷어내고 전체적인 인상만 본다면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아득하고 아련한 분위기.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 그 제목처럼. 문단속을 모두 하고 보안장치를 작동시켰는지 샵 안에 경보신호음이 우렁차게 울렸다. 빨리 나가자. 한쪽 손에 가방, 한쪽 손에 열쇠꾸러미를 든 민혁이 걸음을 빨리 사무실로부터 나왔다. 둘은 얼른 밖으로 나왔다. 캄캄해진 하늘. 싸늘한 공기. 어중간한 위치에 홀로 던져진 창백한 저녁별이 인간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출입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리는 동안 안에서부터 요란히 울려오던 신호음은 멈추었다. 시간을 채찍질하는 듯한 다급한 소리 속에 덩달아 가쁘게 달음박질치던 그 무엇이 갈비뼈 사이에서 조금 꿈틀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History repeats itself 역사는 되풀이된다 Coiling down into the future 꼬이고 꼬여서 미래로 When it's one second to twelve 시한時限을 1초 남겨둔 바로 그때 The hands touch and follow deeper 누군가 건드려 속속들이 파헤치지 History repeats itself 역사는 되풀이된다 I didn't learn, I wouldn't listen 나는 알지도 못했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어 I couldn't see the books were on the shelf 그저 한 구석에 밀쳐져 있을 뿐인 걸 나는 몰랐어 For my good sense, I never missed 'em 기특하게도 난 그걸 아쉬워하지 않았으니까 History repeats itself - A.O.S. ← click! 길고 긴 검문을 끝내고 JFK 공항에서 마침내 나이젤 일행이 빠져나왔을 때는 오후 한 시 반이 조금 넘어 있었다. 공항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어둠의 자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부신 태양빛에 미약한 거부의 몸짓을 보냈다. "녹는 것 아닐까, 우리?" 이미 얼굴을 거의 반쯤 덮은 70년대식 잠자리테 선글래스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팔꿈치로 가리며 나이젤이 말했다. 실핏줄이 비춰 보일 정도로 얇고 창백한 피부와 퇴색한 금제金製 장신구 위에 뿌연 회갈색 먼지가 내려앉은 듯한 잿빛 블론드. 거침없이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정말 언제라도 쉽사리 녹아버릴 수 있을 듯 애처로운 실루엣. 전체적으로 기다란 프레임에 야윈 몸은 마치 키만 껑충하니 비쩍 마른 10대 소년같은 인상을 풍겼지만,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른 두 살의 백인 남자다운 잔주름이 눈가와 입가에 깊고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평생 나이를 먹지 않을 것 같던 금발의 아도니스도 세월은 빗겨갈 수 없었다고 엊그제 선데이 타임즈에 실렸던 그의 인터뷰 기사는 끝맺고 있었다. 나이젤은 그 기사를 읽고 아무 말 없이 고요히 신문을 덮었다가 정확히 30초 후에 갑자기 신문을 박박 구겨 바닥에 힘껏 내던져버렸었다. "녹는다기보다는…," 그리고 그 다음 이틀 동안 그를 달래고 기분을 맞춰주느라 진이 다 빠지다시피 했던 한 사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가 되겠죠." "재?" "우리 둘 다 언데드undead(*불사자不死者. 죽었으되 죽지 않은 자. 픽션, 특히 흡혈귀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함. 사실상 사망한 인간 또는 생명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원래의 모습 그대로 인간 세상에 존재하고 움직이고 행동함을 뜻함) 잖아요." "맞아, 제이. 너도 전에 한 번 죽었었다고 했지!" 나이젤은 갑자기 연극적인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은 전혀 없지만. 어차피 그에게 말이란, 말로서 말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네." 그러나 상대방은 기사가 슈트케이스들을 하얀 진줏빛 캐딜락 리무진의 트렁크에 옮겨 싣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심드렁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는 조심해야 돼."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엄숙한 체 하던 나이젤의 얼굴이 상대방의 너무나 무덤덤한 반응을 흘깃 곁눈질하고는 살짝 굳었다. "네." "햇빛은 특히나 더." "네." "아주 조심해야 돼." 괜히 다시 한번 강조. "네." 또 한번의 무덤덤한 '예스'를 들으며 나이젤은 리무진에 올라탔다. 그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옆자리로 비켜나자, 제이가 등을 굽히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정말 조심해요. 들키지 않도록." 하면서, 차 안에서 앉은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는 서슬에 어느새 손목보다 조금 위 정도로 걷어 올려진 왼쪽 소매를 쓱 내려준다. 나이젤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오른손으로 그 소맷부리를 꽉 잡았다. "시계는 언제 풀었어요?" "아까 비행기에서 답답해서……."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그리고 둘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이젤은 위에 걸친 두꺼운 니트 스웨터의 소맷부리 속을 슬쩍 만져보았다. 상처는 많이 아물었지만 흔적은 남아있었다. 1년 반쯤 전에 그는 손목을 그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멤버들이 서로를 견디다 못해 차례차례 탈퇴해 나가고 마지막 남아있던 나머지 한 명마저 탈퇴 의사를 자동응답기에 남겨놓았던 그 날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쉬쉬했었으나 발없는 말은 살금살금 천리를 달려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 다만 공식화되어있지 않아 암암리에 소문만 무성할 뿐. 그것은 그의 마약 사용 경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 역시 양쪽 팔뚝의 무수한 주사 바늘 자국으로 증거가 남아있었다. 손목의 흉터는 시계로 가리고, 거무스름해진 팔뚝의 자국은 문신으로 감추었다. 하지만 그 일들을 모두 같이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요 며칠 밤마다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면서도 다른 승객들 모두 잠자기 바쁘던 새벽 다섯시 비행기 안에서조차 겉으로는 유유자적 명랑쾌활한 스타를 연기하며 속으로는 날카롭게 신경날이 서 있던 나이젤이 제이와 차 안에 단 둘이 되자 금세 잠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잠들지 못하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역시 자지 못한다.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곤히 잠든 그를 잠깐 내려다보고 제이는 다시 창 밖을 쳐다보았다. 자신은 어쩌면 손목을 긋는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의 복잡다단함을 단칼에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 자신은 지난 10년간 단 한번도 스스로 죽겠다고 마음 먹어본 적은 없었다. 때때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죽을 수가 없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야만 했다. 삶과 바꾼 죽음. 죽음과 바꾼 삶.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현재 제이라고 불리는 그가 처음 나이젤과 인연을 가진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 8년 정도. 법적 성인이 된 다음 그는 런던과 기후가 비슷한 축축한 안개의 도시 시애틀 한구석으로부터 런던으로 건너왔다. 비록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이라도 미국 가정에 입양된 입양아 신분으로 완벽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법적 성인이 된 이상 몇 가지 절차만 밟으면 해외 장기 체류에 큰 제약은 없었다. 다만 외국으로 뜨는 마당에, 그를 미국에 데려다 놓고 감시의 고삐를 완전히 거두지 않았을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오히려 가장 큰 걱정거리였으나, 그들은 생각보다 다른 일로 바빴던지, 아니면 생각보다 너그러워졌는지, 그것도 아니면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배짱이었는지 별다른 방해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내버려두었다. 몇 달 동안 이리저리 발바닥이 닳도록 쫓아다니며 알아본 끝에 그는 작은 레코딩 스튜디오에 시다바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말이 취직이지 일을 배우고 경력을 쌓기 위한, 거의 무보수나 다름없는 일용직에 불과했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는 옆에서 지켜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열심인 애송이였다. 그렇게 조금씩 그 바닥 사람들 눈에 띄어가던 무렵, 스튜디오에 가끔 드나들던 프리랜서 사운드 엔지니어의 뒤를 따라, 당시에 막 두번째 앨범을 발표하고 갑자기 인기몰이를 하며 무명으로부터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던 인덜전스라는 밴드의 전국 투어에 스탭으로서 참여하게 됐다. 석 달 반에 걸친 투어 초기에는 그저 거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으나, 런던 팰러디엄에서 피날레 공연을 할 때쯤에는 제법 한 몫을 단단히 해낼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제 나름대로 궤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는 이 정도 위치에 오기까지 몇 년이라는 시간이 그냥 대충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외국인, 게다가 피부색과 인종마저 다른 완벽한 이방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아니다. 멀리 차창 밖으로, 뾰족뾰족 누르팅팅한 건물들의 들쑥날쑥 높은 숲과 뚜렷한 경계를 이루며 갑자기 아래로 푹 가라앉은 듯 보이는 센트럴 파크가 모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옆의, 나이젤이 일년에 다 합쳐봤자 한 달도 채 머물지 않는 5번가의 아파트 건물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착했군, 하고 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닷새. 뉴욕에는 5박 6일간 머물 예정이었다. 그 다음은 LA. 그리고 그 다음은 파리, 로마, 그리고 쾰른에 들렀다가 다시 런던으로 간다. 숨가쁜 일정. 바쁜 생활.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도 잘 몰랐다. 그는 이번에 나이젤과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해 상당히 그럴싸한 프로듀싱 제안을 두 건이나 거절해야만 했다. 그중 하나는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날 만한 아까운 것이었다. 한참 상승세를 타며 인기의 물이 오른 젊은 실력파 밴드와 스위스의 평화로운 호수 도시 몽트로에서 녹음 작업을 하며 보낼 석 달. 밴드의 리더가 직접 보내온 데모 테입은 차마 거절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한숨이 날 만큼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이번에 또 다시 대박을 터뜨릴 것이다. 신호를 받아 차가 끼익 멈춰서자 그 충격이 차 안까지 살짝 둔하게 전해졌다. 그 바람에 나이젤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려 그는 왼팔을 뻗어 비쩍 마른 몸을 바싹 끌어당겼다. 잠결에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더욱 깊게 기대어오는 윤기 잃은 머릿결. 말린 강아지풀처럼 부스스한 그 감촉이 턱끝에 와닿자 왠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는 역시 자신도 잘 몰랐다. "많이 늦네요." 기다리기 시작한지 거의 한 시간째. 민혁이 연신 시계를 쳐다보며 말하자 인테리어 데코레이터인 빌은 어깨를 으쓱,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후 늦게 일정이 있어서 새벽에 출발한다고 들었는데요." "새벽에 출발하지 않았나 보죠." 민혁의 퉁명스런 대꾸에, 빌은 알록달록 요란한 무늬의 커다란 셔츠로 덮은 뚱뚱한 몸을 출렁거리며 웃었다. "아닙니다. 새벽에 출발했어요. 5시 04분. 브리티쉬 에어라인." 전화기를 귀에 대고 새로이 깔끔하게 정리된 아파트 안을 걸어다니던 나이젤의 미국 에이전트인 조셉 크리그먼이 거실로 들어서면서 자기 손바닥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전화기를 재킷 호주머니에 탁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늦죠? 그러면 정오 되기 전에 도착했을텐데." 민혁이 순진하게 묻자, 그는 후후후 씁쓸하게 웃었다. "나이젤의 마약 이력 때문에 공항에서 워낙 검색을 샅샅이 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는군요." 거실 안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설마 걸린 건 아니겠죠?" 사람 좋은 빌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농담처럼 물었다. 그러나 오히려 역효과로 실내에 감도는 정적만 깊어질 뿐이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하고는 연락이 됐어요. 방금 호텔에 도착했답니다. 나이젤도 곧 올 거에요……" "아, 그렇군요." 빌이 안도한 듯 말하는 찰나, "……중간에 어디로 새지만 않으면." 크리그먼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워낙 기분 내키는 대로인 성격이라서……" "……." "이번엔 확실한 베이비시터가 하나 딸려서 꽉 믿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친구도 역시……." 더욱 더 가라앉는 분위기. "저기,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여전히 스마일을 유지한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유명인사 클라이언트와 안면도 익혀둘 겸, 반응도 볼 겸 필요에 따라서는 그림과 아티스트에 대해 약간의 부연 설명도 해줄 겸, 겸사겸사 손수 그림을 가져와서 자리를 잘 잡아 걸어두고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더 이상 지체하는 건 무리였다. 자신의 스케줄도 바쁘다. 해야 할 일도, 돌아보아야 할 곳도 너무 많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빌도 합세해, 둘은 크리그먼에게서 피드백을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참. 혹시 숨길 곳이 필요하다고 하면……" 거실을 나서다 말고 민혁은 문득 그림 앞에 섰다. "……여기를 추천해 주세요." 그리고는 못에 걸린 액자를 살짝 들어 뒷면을 보여주었다. 액자 자체의 독특한 디자인 탓인지 그림은 액자틀보다 훨씬 오목하게 안으로 깊게 들어가 있었다. 그 뒷면도 그만큼, 거의 10센티미터 가까이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혁이 가리킨 지점은 그림 부분 뒷면의 얇은 원목판이었다. "여기 이중으로 되어 있거든요. 보기보다 여유공간이 꽤 돼요. 그리고 특수 수지가 발라져 있어서 습기와 먼지, 그리고 어떠한 냄새든지 확실히 차단합니다. 냄새가 들어가지도 않지만 나오지도 않죠. 아무리 잘 훈련된 마약탐색견이라도 못 맡을 거에요." 무심히 쳐다보고 있던 두 명은 다소 눈을 크게 떴다. 크리그먼의 유태계다운 숱많은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뜯어보면 아실 겁니다." "……." "물론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상황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미소짓는 민혁의 머릿속에는 신문기사의 쇼킹한 헤드라인 바로 밑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그림의 사진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런 게 있었나요? 신기하네요." 아파트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 타워 앞으로 와 엘리베이터의 요란한 기계음을 들으며 차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빌이 소근소근 물었다. 혈색 좋은 퉁퉁한 얼굴에 호기심이 담뿍 담겨있다. 민혁은 대답없이 그저 살짝 웃기만 했다. "하지만 뉴욕 경찰 마약반이 거기 숨긴다고 못 찾을 리는 없다고 보는데요?" "물론이죠." 민혁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문득, 고색창연한 아파트 현관 앞에 커다란 진주색 리무진이 섰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도어맨 두 명이 유니폼 코트 자락을 너풀거리며 뛰어간다. 한 명은 차 문을 열어주고, 또 한 명은 트렁크에서 슈트케이스를 내린다. "아, 이제 왔네." 빌이 말했다. 워낙 떨어져 있는지라 똑똑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검은 양복 차림의 덩치좋은 보디가드 한 명을 제외하고, 선글라스를 쓴 호리호리한 두 남자 중 하나는 그 유명한 나이젤 리처드슨이 틀림없었다. 민혁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으면 한때를 풍미하던 그 화려한 미모를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사람이 아까 크리그먼 씨가 말한 베이비시터인가 봐요." 민혁의 시선이 그 옆의 남자에게로 옮겨졌다. 금발을 너풀거리는 나이젤 리처드슨보다 2,3센티 정도 키가 더 큰 듯한 늘씬한 남자. 암갈색의 벙거지모자를 푹 눌러쓰고 두꺼운 검은테의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어 얼굴은 자세히 뜯어보기 힘들었지만, 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채 거의 소매만 꿰다시피 걸치고 있는,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무릎 길이의 적회색 손뜨개 니트 코트와 낙타색의 통 좁은 코듀로이 팬츠, 모자와 같은 재질인 암갈색의 니트 풀오버 모두 몸매에 웬만한 자신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소화하기 힘든 아이템이었다. 그 외에 걸음걸이나 몸의 움직임 같은 것들이 언뜻 보더라도 묘하게 당당하고 세련된 느낌이라서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빨려드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이쪽을 쳐다보았다. 멀리 떨어져있어 제대로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정면으로 마주치자 선글라스 뒤에 숨은 얼굴의 윤곽이 어느 정도는 눈에 들어왔다. 민혁이 '어라, 동양계였나?'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빌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하고 얼른 차를 몰고 아파트 앞을 지나치면서 민혁은 그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그와 나이젤 리처드슨은 산더미같은 짐과 함께 막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며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굉장히 낯익다는 느낌이 들어 민혁은 운전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소문난 마당발 조민혁의 기억 속에는 이루 숫자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남아 있었다. 기억의 페이지를 모두 훑어올라 그 낯익은 느낌의 뿌리를 파헤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달만에 찾은 서울은 3월의 꽃샘추위가 한참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날씨가 좀 풀리는가 싶다가도 막상 신학기가 시작되어 아이들이 쭐래쭐래 등교를 시작하면 갑자기 추워진다. 이상한 전통이었다. 그 이상한 전통은 또 한해 변함없이 되풀이될 예정이었던가 보다. 하긴 줄창 계속되니까 전통이다. 몇 번 그러고 말았으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을 테니. 변덕스런 초봄 하늘 아래 작은 연둣빛 새싹을 틔우던 나무들은 예고도 없이 쏟아진 함박눈에 많이 놀랐는지 허공에 불쑥 팔을 내민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반투명한 흰색의 눈서리가 소복하니 앉았다. 쓸쓸한 겨울 엽서 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주위에 펼쳐진다. 류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한 바퀴 빙 둘러, 사방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야트막한 산줄기를 눈으로 좇았다. 그다지 높이 솟지도 않았지만 중간에 끊기지도 않은. 끊겼나 싶으면 꿈틀 일어나 비스듬히 등을 세우는 끈질긴 산세山勢. 서울이구나, 하게 되는 모습. 익숙한 너무나 익숙한. 아, 나 돌아왔구나. 류신은 잠깐이나마 막연한 감회에 젖었다. 팽팽하게 감아둔 태엽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자 긴장을 한 고삐 늦춘 가슴 한 구석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 주위 풍경만큼이나 익숙한 어떤 것. 가슴속 깊이 꽁꽁 묻어두고 가끔씩 이렇게 우물물 길어올리듯 꺼내보는 기억. 지금의 류신에게 있어서 휴식이라는 것의 의미를 규정하고 그 시간과 공간 전체를 장악한 그것. 아련한 아픔을 동반한 은밀한 설렘. 갑자기 싸늘한 회오리바람이 느닷없이 불어와 널따란 정원을 맹렬한 속도로 한 바퀴 휩쓸고 지나갔다. 후두둑. 나뭇가지에 하얗게 쌓였던 눈서리가 류신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효율적인 큰 손짓 한 번으로 어깨를 깔끔히 털어내면서 류신은 다시 각잡아 깎아놓은 얼음처럼 빈틈없는 자신으로 되돌아갔다. 잠깐, 아주 잠깐 생각이 미끄러짐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할 만큼 그는 점점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 "왔으면 들어와야지 거기서 뭐하고 있냐고 그래." 유리문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류신은 언뜻 멀리 그곳을 쳐다보았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문 앞에 서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오랜 수족(手足)이자 친아들보다 더 가까운 존재인 송 실장. 그 뒤의 휠체어에 앉아있는 강 회장에게서는 기운 없는 희미한 쇳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볼륨도 작고 정원까지의 거리도 굉장히 멀었지만 특유의 울림으로 류신에게는 그 말이 소리가 아닌 소리로서 또렷이 들려왔다. "얼른 들어와요. 회장님 기다리십니다." 목청을 한껏 돋운 송 실장―할아버지의 은퇴후 현재는 그룹 계열사중 하나인 세강 증권의 부사장으로 재직중이었지만―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류신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추운데 밖에서 무슨 궁상을 떨고 있었냐." 강회장은 힘든 숨을 토해내듯 한 음절씩 천천히 뱉었다. "별로 춥지 않습니다." 류신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춥던데." "난방을 좀 더 올리라고 할까요?" 류신이 묻자, 강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바깥이 춥다고 했지, 안이 춥다고는 안 했다." 류신은 대답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거실은 충분히 따뜻했다. 아무리 덥던 춥던 적극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무덤덤히 지나치는 그조차도 안이 조금 텁텁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실내가 조금 건조하다는 증거다. 노인의 건강에 좋지 않을텐데라는 막연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에 대해 어떤 제스추어를 취해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누가 나서기 전에 알아서 스스로 챙기는 노인네이기 때문에. "몸은 좀 어떠세요?" 아무리 이제는 나이를 속일 수 없이 완전히 늙어버렸다 해도. "안 좋아." 나이를 먹는 대로 그에 비례하여 마냥 끝없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어른을 버티어주는 어떤 선, 그 한계 이상을 넘고나면 다시 조금씩 어린애가 된다. 물론 사람마다 그 분수령이 조금씩 다르지만. 강회장의 경우에는 그 분수령이 평균보다 조금 늦게 찾아왔다. 그래도 찾아온 것은 찾아온 것으로 그도 피할 수 없이 조금씩 어린애가 되어 유치해져가고 있었다. 물론 진짜 어린애와의 차이라면, 이쪽은 그다지 귀엽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어. 멀쩡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거지." 옆에 있던 송 부사장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아직은 충분히 괜찮다는 신호라고 류신은 판단했다. "너는 좀 어떠냐?" "저도 별로 안 좋습니다." "잘 안 들린다. 크게 말해라." 노인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지 작게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런 정도의 소리도 시원하게 들리지 않는가 보다. 류신은 볼륨을 조금 높여 다시 한번 똑같이 말했다. "왜?" "저도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거든요." 소리지르다시피 하는 류신의 답변에 강 회장은 주름진 얼굴을 더욱 심하게 우그러뜨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크게 소리지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죽기 전에 얼른 애부터 만들어라. 장가 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말과는 달리 노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언제나와 같은 류신의 대답이 상당히 불만족스러운지 노인은 흐음, 하고 낮은 신음을 뱉었다. "너 죽기 전이 아니라 내가 죽기 전을 말하는 거다, 이 녀석아. 신 원장한테 맡겨봐야 백날 감감무소식이니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라." 신 원장은 류신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네." 이 화제를 길게 끌기 싫어서 류신은 짧게 대답했다. 언젠가 결혼을 해야 한다면 할아버지 생전에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해야 할 상황이 오면 받아들여야 하리라고 생각도 하고 있다. 다만 달갑지 않을 뿐이다. "네가 올해 몇이냐?" "우리 나이로 스물여덟입니다." "명주가 너랑 동갑이지, 아마?" 명주 이름이 나오자 류신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네." "너무 늦었어. 여자 나이 스물여덟이면 혼기가 많이 지난 거야." "명주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데요? 그리고 저희 둘 다 아직 만으로는 고작 스물여섯입니다." "아니다. 내가 보기엔 많이 늦었다." "누나도 스물여덟에 했어요." 강회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건 네 어미 잘못이지. 서둘렀어야 할 일을 너무 마냥 내버려뒀어. 아무리 병원 일이 바빠도 자식 혼사는 제대로 챙겼어야지." 신 원장이라고 했다가 금세 또 네 어미라고 한다. "회장님, 신 원장님 잘못만은 아닙니다. 그때는 한참 시기가 안 좋을 때여서 두 번이나 뒤로 미뤄진 거였습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송 부사장이 마치 오류를 지적하듯 한 마디 끼어들자 강 회장은 그때의 일들이 떠올랐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둘째 아들이 세상을 뜨고, 그 다음해 겨울에는 연이어 첫째 아들이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기억들을 아무리 세간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알려진 강성철 회장일지라도 편하게 삭혔을 리가 없다. "어쨌든 류신이 넌 올해 결혼하는 게 좋겠다. 박 의원하고도 그렇게 결론을 지었어." "……." "내가 내년까지 살아있을 자신이 없어서―" "할아버지!" 류신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다급한 나머지 호칭까지 바뀌어버렸다. 평소에는 물론 정중하게 회장님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올해 안에 마무리를 지어. 5월에 약혼하고 가을에 식 올리도록 해라." "누구랑 말입니까?" "누구랑 하고 싶으냐?" "명주를 염두에 두고 결혼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그건 싫습니다." "그럼 누구랑 하고 싶은데?" "명주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할 결혼, 누구와 하든 별로 다를 것도 없지만 진심으로 명주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주랑 결혼하라는 거야." "……." 류신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네가 곰곰이 잘 생각해 봐." "굳이 싫다는 사람이랑 결혼시키시려는 의도는 뭡니까?" 손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노인은 싱긋 웃으며 똑바른 시선을 되돌렸다. 메마른 낙엽같은 얼굴에 눈빛만은 한없이 날카롭다. "명주를 위해서가 아니야. 너를 위해서―" "저는 그렇다치고 만약에 명주가 따로 결혼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서 저와는 하기 싫다고 나온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따로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다. 만약에 있다 해도 상관없지. 너를 위한 결혼이니까. 열심히 설득해서 명주 마음을 되돌려봐야겠지?" "……." "명주보다 더 조건이 좋은 상대는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조건으로 따지자면 그 집안이 특별히 뛰어난 혼처는 아냐. 박 의원도 이미 정치적으로 한참 내리막길이고. 예전에야 재산가로 날렸다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야. 남은 재산도 대부분 뭉텅이로 주식과 부동산에 묶여 있는 실정인데, 내가 볼 때는 그다지 재밌는 것도 아니다. 그 주식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노인은 한꺼번에 말을 많이 해서 좀 힘이 드는지 중간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숨쉬던 게 얹혔는지 쿨럭쿨럭 기침까지 한다. 류신이 어깨를 움찔하며 바싹 앞으로 다가가자 검버섯이 잔뜩 낀 주글주글한 손을 들어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주욱 눈여겨본 중에 명주만한 애도 없다. 똑똑하고 유능하고 인물도 그만하면 봐줄만하고. 게다가 너와는 각별한 친분도 있잖니. 기왕이면 너도 일말의 정이라도 있는 상대랑 결혼하는 게 낫지 않겠냐?" 강 회장의 말에는 더 이상의 대꾸를 불가능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류신조차도 그 앞에서는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90이 가까운 이 나이에도 아직까지 실질적인 힘을 손에서 놓치지 않고 있는 이 집안 최고의 권력자였다. 면전에서 대놓고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제 그 얘기는 이쯤 해두자. 저 바쁜 송 실장, 아니 송 부사장을 일부러 이 구석진 데까지 시간 맞춰 오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회장님." "됐어. 가져온 거나 어디 꺼내보게." 강 회장이 눈짓을 하자 송 부사장은 암갈색 서류 가방을 열고 하늘색 투명 플라스틱 커버로 바인딩된 서류를 꺼냈다. 곁눈질로 표지만 넌지시 본 것만으로도 류신은 할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강 회장이 진짜 용건을 펼쳐놓기 시작하자, 류신의 머릿속에서는 결혼 문제는 뒷전이 되었다.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지금 류신의 결혼 문제를 이 안건보다 더 우위에 둘 사람은 없었다. ******************************************* "힘겨워 보이네요." 옆에 선 크리그먼에게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물론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서 원기왕성한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크리그먼을 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 앞에서 등을 꼿꼿이 세운 채로 열심히 사회자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하는 나이젤의 야윈 등에 변함없이 꽂혀 있었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잘하고 있는걸요." 오늘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생방송 아침 TV 프로그램의 인터뷰는 유리로 된 오픈 스튜디오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뉴욕 한복판에 있는 이 스튜디오 주위에는 각양각색의 피킷을 든 팬들이 발디딜 틈 없을 정도로 모여들어, 유리벽 바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경찰들의 통제가 없다면 유리를 깨부수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태세였다. 카메라의 사정거리를 피해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방송 스탭들과 함께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는 그에게도 나이젤이 느낄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죽어도 하기 싫다고 한 사람치고는요." "죽어도 해야 했어요. 이 인터뷰는. 이 프로그램 평소 시청율이 38%예요. 이 시간대에서 최고죠. 지금 미국 전역에서 1억이 넘는 사람들 이 나이젤을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크리그먼이 스스로 감탄하면서, 그러나 여전히 속삭이듯 조그맣게 그에게 대답했다. 그는 그 1억명 중에 정신차리고 집중해서 이 인터뷰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겠으며, 그 사람들 중에 나이젤의 짐짓 명랑한 목소리 뒤에 숨은 피곤한 울림이나 잘게 떨리는 손의 움직임, 불안한 눈빛 같은 걸 캐치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나이젤은 어제도 프레스 정킷press junket을 치루어내느라 하루 종일 기자들에게 시달렸다. 호텔방에 자리잡고 앉아있으면 각처의 자잘한 방송국, 신문, 잡지 등등에서 나온 기자들이 순서대로 끊임없이 들어와 질문 공세를 펴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신기한 것은 수십 건에 이르는 인터뷰의 질문들이 거의 다 같다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질문에 맞춰 똑같은 대답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나이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차라리 첫 인터뷰를 녹음해서 그대로 틀어주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딴 때 같으면 다른 멤버들과 어느 정도 분담되었을 일들이 온통 나이젤 혼자의 몫이 되어 있었다. 대중 인지도도 전혀 없는 신입 멤버들에게 밴드 홍보를 맡길 수는 없었으므로. 오늘 하루만 해도 이 인터뷰 이후 쉴 틈도 없이 뉴욕 주위의 몇몇 라디오 스테이션을 돌며 인터뷰를 서너 개 녹음하기로 되어 있었고, 오후에는 롤링스톤 지紙의 표지와 스프레드에 쓰일 사진 촬영이 있었다. 뉴욕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인 내일 낮에는 레잇 나잇 토크쇼 녹화를 하고, M-TV 인사이더와 인터뷰를 하고 나면 내용도 알 수 없는 무슨 자선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다분히 사진 찍히기 위한 용도로 얼굴이나 들이밀고 적당히 머물다가 시간 봐서 빠져나오면 되는 것이라지만, 그걸 일일이 따라다녀야 하는 그로서도 피곤한 노릇이었다. "개인 질문은 좀 자제해 달라는 말 미리 안 하셨나요?" 멤버 교체 문제에 연이어 작년에 있었던 인기 여배우와의 파혼 문제를 질문받고 잠깐이나마 당혹스러워하는 나이젤의 모습을 보며 그가 크리그먼에게 물었다. 보통은 저 질문은 피해달라고 해서 잘 안 하는데, 1억 명의 시청자가 받쳐주는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질문 내용에 거침이 없다. "저것도 나이젤에게는 일종의 홍보 꺼리가 되는 것이니까요. 이 프로그램 시청자들은 음악팬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일반 대중이라서 아무래도 관심사가 그런 쪽에 있을 수밖에 없죠." 크리그먼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크리그먼은 밴드 인덜전스 전체의 에이전트가 아니라 엄밀히 따져서 나이젤 리처드슨의 개인 활동을 대리, 홍보하는 에이전트다. 인덜전스의 음악보다는 나이젤 개인의 대중적 인지도를 부각시켜 활동의 영역을 넓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자신의 일인 것이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는 사이, 나이젤이 또 인터뷰어에게 그에 대해 뭐라고 얘기를 했는지 갑자기 카메라가 그를 향했다. 그와 동시에 나이젤이 느닷없이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Say hello to camera, Jay! (카메라에 인사해, 제이!)" 하고 소리친다. 깜짝 놀란 그가 엉겁결에 웃으며 멋쩍게 손을 흔들고 나자 카메라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는 인사를 하며 인터뷰어와 악수를 하는 나이젤을 바라보며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무지 바보같이 찍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근두근 가슴 속 깊이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두려움을 눌러 삭히려 애썼다. 10년이 지나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일. 류신은 하교시간에 맞추어 교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하교하는 학생들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어딘가 몸에 딱 맞다 못해 빠듯한, 낡은 티가 나는 교복을 입은 학생은 3학년. 그와 반대로 애기가 어른 옷 빌려입은 듯 크고 헐렁헐렁하며 몸에 익지 않은 티가 나는 깨끗한 교복은 1학년. 덩치도 어중간하고 교복 상태도 어중간하고 얼굴의 성숙도도 어중간한 학생들은 2학년이다. 1, 2, 3학년 전체가 같은 시간에 교문 밖으로 와글와글 쏟아져 나오는 오늘은 토요일. 토요일답게 발바닥에 스프링이 달린 듯 통통 가뿐한 걸음으로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들의 수는 아주 많았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고만고만한 남자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떼로 몰려나온다. 한 순간 조금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류신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 아이를 발견해냈다. 구별해내는 데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그 아이는 눈에 띄었다.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 평범치의 생김새들 속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작고 하얀 얼굴. 뚜렷하고 깔끔한 이목구비. 호리호리한 키. 가느다란 몸매. 길게 뻗은 팔다리. 옅은 갈색의 찰랑찰랑한 머릿결. 그리고, 삽시간에 다른 아이들을 배경으로 만들어버리는 특유의 존재감까지 그 아이는 누군가를 그대로 닮아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빨리 자란다. 류신은 속으로 감탄하며 1년만에 보는 그 아이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이제 중학생이 되어서일까, 작년 이맘때쯤 보았던 모습과 비교하면 여름 땡볕에 옥수수가 자라듯 훌쩍 성장해 있었다. 저렇게 컸구나. 저 아이가. 3년만 있으면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녀석과 저 아이가 같은 나이가 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3년 후에 저 아이는 얼마나 더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많이 닮았는데.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닮았는데. 류신은 어제 가까스로 짬을 내어 춘천 교외에 혼자 차를 몰고 다녀왔다. 10년전 그 길은 차선도 두 개 더 늘고 깨끗이 닦여 자동차들이 쌩쌩 고속도로를 방불케 하는 속도를 내게끔 하고 있었다. 교통사고가 났던 바로 그 자리 옆에 차를 세워두고 류신은 한참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로부터 호기심 섞인 시선이 던져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휘우의 묘에 들러 꽃다발을 놓고 그 앞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왔다. 하늘은 파랬고 구름은 하얬다. 건너편 산 중턱 멀리 보이는 작은 목장에서는 젖소들이 음매음매 꼬리를 휘저어 달라붙는 파리떼를 쫓으며 좁은 우리 안을 어슬렁어슬렁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가까스로 휘우의 생일에 맞춰서 귀국할 수 있었는데 올해는 도저히 시간이 허락지 않아 보름도 넘게 지나버렸다. 서늘한 봄바람에 부대끼는 하얀 국화꽃잎을 바라보며 '이해해 줘. 사는 게 바쁘다' 하고 중얼거렸다. 류신은 1년에 한 번만 휘우를 찾는다. 갈 때는 복잡한 마음에 가기가 싫고, 올 때는 혼자 두고 올 수 없어 발길이 안 떨어지기 때문에 아예 일년에 딱 한 번만 가기로 하고 있었다. 찾아가기로 정한 날은 푸릇푸릇한 봄 새싹이 돋아나는, 새학년이 시작되는 3월 초. 휘우의 생일. 기일忌日 대신 생일에 사고현장과 묘를 방문한다. 죽어버린 날보다는 태어난 날을 휘우는 더 좋아할 것이다. 삶이 머문 마지막 장소에서 생애 첫날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꼭 던진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보고싶다든가 그립다든가 아직도 사랑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시끌벅적 어울려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 하고 차의 시동을 거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할 얘기가 있으니 병원에 들렀다 가라고 하신다. 병원은 그새 C.I. 디자인을 바꿔서 전체적으로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간판 같은 것들까지 새로 만들어 달았는지 훨씬 말끔하고 산뜻해 보였다. 심지어는 언뜻 보면 새로 지은 병동들 같기까지 할 정도로. 하지만 이른봄의 메마른 수목으로 둘러싸인 그 건물들이 세월의 비바람에 닳고닳은 오래된 것들임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용건은 아마도 결혼이 아닐까하고 류신은 막연히 생각했다. 어쩌면 혹시 다른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류신이 짐작할 수 없는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어머니가 특별히 자신을 따로 불러서 얘기할 만한 것들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5년전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삼남매의 관계는 일견 그전보다 호전된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부모와 더욱 더 무관해지고 무심해졌기 때문일 뿐으로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향한 그 무관심을 각자 전혀 아쉬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이러닉하게도 이 가족을 가족으로서 연결하고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원인은 아버지의 유산――어느 누구의 예상보다도 훨씬 많았고 규모도 컸다. 아버지는 형제간의 알력에 밀려 경영에는 영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개인 재산을 지키고 불리는 데는 신중하게 처신해 소리소문없이 큰 이득을 보아왔던 것이다――을 둘러싼 상속 분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재산 분배 외에 승계 문제는 세강고등학교를 비롯한 몇개 학교가 포함되어있는 세강학원 이사장직은 일찌감치 아버지 생전에 아직 학생이던 자식들을 대신해 일단 어머니가 이어받는 것으로 처리했었고, 아버지에게 맡겨져 있던 유일한 사업체인 세강기획의 경우는 강씨 가족은 대주주로만 남아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지 오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었던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미리부터 정리가 되기도 했었고, 어머니를 비롯하여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해 섣부른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그것은 몸과 머리를 잘 못 쓰게 되었을 뿐 아직 엄연히 생존해 있는 큰아버지의 재산 분할과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큰집과는 커다란 대비가 되는 것이었다. 차남인 류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 다음해 겨울 어느 새벽에 장남인 큰아버지가 갑작스레 뇌졸중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뇌의 일부분이 손상되어 오른쪽 반신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누가 누군지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지각 장애와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게 되었다. 육체적인 불편은 말할 것도 없이 정신적으로도 너댓살 어린아이보다 못한 수준으로 퇴행하여 고용된 간병인의 도움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모든 일이 예고도 없이 단 한 순간에 일어났고 가족들은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다. 큰아버지가 새로이 작성중이던 유언장이 있었지만 그 내역이 두루뭉실한 아웃라인만 잡혀있을뿐 세세한 부분은 언급마저 되지 않은 것도 많았다. 원래 10여 년 전에 작성되었던 첫 번째 것이 있었고 이것은 공증까지 되어 있었으나, 최근에 대폭 수정하고 있던 것과는 거의 내용이 같지 않았다. 법적인 효력을 갖는 첫 번째 유언장은 너무 옛날 것이라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최근의 것은 그 동안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비교적 현실적이라고는 하나 아직 정식으로 공증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가족내에 법적으로 엄청난 소모적 분쟁이 야기될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혼란은 가족에게만 닥쳐온 것이 아니어서 큰아버지가 홀로 제왕처럼 진두지휘하던 세강자동차그룹까지 소란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2인자를 만들지 않고 모든 길은 회장에게 통하도록 방사형으로 조직을 구축하는 그의 경영 스타일은 카리스마틱하게 회사를 끌고 나가는 데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막상 느닷없이 그 구심점이 사라지고 난 다음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세강자동차는 세강그룹으로부터 분리된지 13년이 되는 2012년말 현재 총자산 85조에 이르고 방계 회사만도 20개가 넘는 전체 재계 서열 4위의 대그룹이었다. 여기에는 장남인 큰아버지와 종손인 정수 외에도 강성철 회장의 셋째 사위, 몇몇 조카와 조카사위들과 손주들이 각 방계 회사에 두루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간부진들과 뭉쳐져 나름대로 복잡한 라인을 형성하고 심각한 세력다툼 중이었는데 그중 큰 줄기가 전前 회장의 맏아들인 기획본부장 정수의 라인,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새로 회장직을 맡은 셋째 사위 라인, 아직도 최대주주로 군림하는 강성철 명예회장의 라인 등이었고, 오랫동안 회사에 몸담아온 간부진들은 각자 자신의 입지에 맞추어 각각의 세력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강성철 회장이 생존해 있어 파벌간의 알력도 아슬아슬하게 가까스로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강회장이 타계하고 나면 이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옛말 그대로 경영진 사이의 분란은 회사의 실적에도 서서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회사의 이익이 아닌 개인들의 이익에 맞춰 사업 행정이 좌지우지되다 보니,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무모한 기획이 강행된다든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문제점들이 오히려 상호 비난과 책임 추궁을 위한 증거자료로만 신나게 이용될 뿐 실제로는 개선되지 않아 궁극적으로 큰 손해를 가져온다든가, 부서간에 사전에 한 마디 논의된 바 없는 빅 프로젝트가 갑자기 마구 진행되어 업무 흐름에 혼란을 빚는다든가 하는 등등의 각종 폐해가 잇따르고 있었다. 특히 젊은 나이에 전혀 실력도 검증되지 않은 채 회사의 핵심인 기획본부장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정수가 이러한 무모한 기획의 주범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여 출시한 신차 [라크샤]였다. 이 차는 출시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엔진 결함으로 연이어 참사에 가까운 대형사고들의 원인이 되었는데, 이로 인해 무책임한 세강자동차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사회적으로도 떠들썩한 이슈가 되자 결국은 회사측에서 전량 리콜하여 폐기시키는 사태가 일어났고 그룹내에서나 투자자들 사이에서 크나큰 빈축을 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었던 [라크샤]와 비슷한 시기에 개발에 들어갔던 JS-II가 출시를 거의 눈앞에 두고 있는 실정에서 [라크샤]와 유사한 설계상의 근본적 오류들이 비밀리에 속속 지적되어 내부자들 사이에서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거센 논란이 일고 있었다. 강 회장이 송 부사장과 류신을 함께 부른 것은 결혼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류신으로서는 큰집의 일에 관여할 마음은 없었고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도 조금은 의외였다. 비록 아버지가 개인으로서는 드물게 세강자동차의 주식을 4%나 꾸준히 보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모두 류신이 상속하였으므로 그 자신이 어느 정도 말발이 서는 대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다 아버지 사후에 드러난 비밀 차명계좌 주식들까지 합한다면 거의 6%를 육박하게 되어 현재 세강자동차 그룹의 명목상 회장인 셋째 고모부의 주식보유량을 앞지르는 수준이었지만, 애초에 자신의 강력한 희망과는 상관없이 자동차 쪽이 아닌 전자 쪽으로 자신을 입사시킨 것은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거기 네 자리는 없다. 강 회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 밑으로 와. 그의 판단은 정확했고 명령은 합당했다고 류신은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것이다. 류신은 어른이 되었고 이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차를 세워두고 원장실이 있는 본관쪽을 향해 걷다가 류신은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얘기를 나누며 토요일 오후의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두 명을 발견했다. "아, 이게 누구신가. 오랜만이에요. 웬일로 병원엘 다? 설마 어디 아파서 온 건 아닐테고, 어머님 뵈러?" 흰 가운을 걸친 풍채 좋은 40대 중반의 남자가 웃으며 묻자 류신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는 이 병원의 신경정신과 과장으로 예전에 병원에 행사가 있었을 때 몇 번 안면을 익힌 사람이었다. "류신씨, 여기는 우리 과의―" "아, 아는 분이에요." 류신이 웃으며 대답했다. 류신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키가 크고 훤칠한 젊은 닥터는 얇은 금테 안경을 밀어올리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미국에선 언제 돌아오셨나요?" "수요일에 왔습니다." 류신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이제 아주 돌아오신 건가요?" "아니죠. 내일 다시 출국합니다." "그리고 또 월요일 아침부터 다시 출근?" "네." "바쁘시군요." "그 정도 가지고 바쁘다고 할 게 있나요." 둘의 얘기하는 양을 보고 있던 40대 중반의 닥터는 좀 놀랐다는 듯이 둘을 번갈아 보며 웃고 있었다. "어떻게들 아는 사이야? 신기하네." "닥터 민 아버님께서 저희 회사 어른이시죠." 아아, 맞아. 그렇지. 류신이 얼른 대답하자 그는 이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생활가전부문 총괄하시는 사장님이시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 류신씨도 그쪽에?" "아니요. 전 정보통신 쪽입니다. 휴대폰을 팔지요."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준석을 흔들림없는 눈길로 똑바로 응시하며 류신이 대답했다. 샤워실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자 낡은 소파 위에서 녹초가 되어있던 민혁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방 안 가득한 뜨뜨미지근한 정사의 공기 속에 어렴풋하지만 확실한 유화물감 냄새가 났다. 아까와 다름없이 여전히. 마치 이곳의 원래 용도가 무엇인지 민혁에게 명확히 일깨워주겠다는 듯이. 민혁은 소파에 대충 걸터앉아 까치집이 된 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정돈했다. 그리고 허리만 잔뜩 굽혀 총천연색 물감 자국이 다닥다닥한 바닥에 떨어져있는 옷가지를 집어들고 그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긴 꼬리를 뒤틀며 천장으로 올라가는 담배 연기가 유화물감 냄새와 몸의 노곤함을 잠시 잊게 해주는 듯 했다. 민혁은 무심코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언제나처럼 고정되어 있는 M-TV에서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즘 '그'가 흥얼거리기 시작한 멜로디였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항상 M-TV를 켜놓고 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마음의 위안이 된다고 변명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무아지경에 도취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의 그 썰렁한 외로움이 싫다고 했다. 땅 속 깊이 깊이 파인 구덩이에 홀로 뚝 떨어져 맥없이 하늘만 쳐다보는 심경이라고 말했다. 스위치를 끄면 한 순간에 꺼져버리는 TV 속의 소음이나마 유일하게 자신이 창작의 함정에 완전히 빠지지 않도록 한 자락 현실로 이어주는 끈이라고 했다. 창작의 대가로 치르는 고독이 싫고 완성으로 가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이 두려운 그는 아직도 그림 그리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고 그림이 그를 외로움으로부터 꺼내주는 것인지 더 외롭게 함정 속으로 밀어넣는 것인지 민혁은 판단할 수 없었다. 창작에 대한 압박감과 막연한 공포로부터 그가 벗어나면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지 아닐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아티스트로서나 인간으로서나. TV속에서는 이제 뮤직비디오가 페이드 아웃되고 화면이 바뀌어 카메라는 원색으로 요란하게 꾸며진 스튜디오 안을 비추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소파 위에 앉아서 얘기하는 두 사람. 민혁은 그중 하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자신이 그림을 팔았던 록 싱어. 나이젤 리처드슨. 민혁은 흥미가 생겨 TV의 볼륨을 몇 단계 키웠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몸을 소파에 바싹 기대어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유유히 방송에 집중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던 그들은 새 앨범을 레코딩하던 때의 얘기로 화제를 옮겨갔고 화면은 그 녹음할 때 찍힌 자료필름 같은 것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그 자료필름에 스튜디오에서 진행중인 인터뷰 말소리가 덧씌워진 채, 녹음실에서 나이젤이 부쓰 안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왔다. 밴드와 프로듀서, 엔지니어 등은 부쓰 밖에서 주의깊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혁은 새하얀 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하늘색 무테 선글라스를 낀 장신의 늘씬한 프로듀서에게만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느꼈다. 나이젤과 사회자의 인터뷰를 듣자 하니 그 프로듀서의 이름은 아마도 제이인 모양이었다. 이제야 먼 발치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낯익은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굉장히 닮았다. 어쩌면 닮아도 저렇게 닮을 수 있을까. 동양인인 건 분명한데 어느 나라 출신일까. 궁금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민혁은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휴대폰을 들고 버튼을 꾹꾹 눌러 번호를 확인한 뒤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크리그먼 씨. U.I.N. 갤러리의 조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나이젤이 며칠간 자기 방에 차곡차곡 쟁여두었던 쇼핑백들―눈에 들어오는 순간 충동적으로 사들인 다음에는 다시 끌러보지도 않은―을 주섬주섬 하나씩 둘씩 들고, 발끝으로 밀고, 팔뚝에 걸고 질질 끌며 나오기 시작하자 현관문앞 복도는 금세 발 디딜 틈도 없어졌다. 단 5박 6일 동안, 쉬는 날도 없이, 거의 하루 종일 일만 했는데도 이렇게 짐이 많이 늘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긴 그 장본인이 나이젤 리처드슨인 다음에야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응? 뭐?" "아니에요." 어린애처럼 귀를 쫑긋,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순진한 얼굴에 대고 차마 말할 수 없어 관두려 했지만,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지?" 발밑의 짐을 죽 둘러보면서 한숨을 쉬는 것을 보니 본인도 눈이 있는 이상 느끼고는 있었던가 보다. "그러게요. 제대로 싸지도 않았잖아요. 이걸 다 어떡하냐구요. 비행기 출발 시간도 빠듯한데." 올 때도 짐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의 그 두 배. 게다가 새로 늘어난 짐은 온통 자잘한 봉투들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어서 그대로 한 번에 딱 들고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이따가 사람들이 와서 운반해줄 거니까 괜찮아. 자기들 일하기 편하게 알아서들 하겠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천하태평. "그럼 뭐가 문젤까요?" 깐죽거리는 말투에도 나이젤은 뭔가 다른 생각에 골몰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일단 다 내가 방에 갖고 들어가서 다시 정리할 테니까 제이는 그 동안 쉬고 있어." "정리요? 어떻게요?" "내 기억에 의하면 이 집 어느 구석인가에 예전에 한번 쓰고 내버려뒀던 큰 가방이 하나 있을 거야. 세 명은 족히 들어가서 텐트도 치고 놀만한 크기니까 이거 다 쓸어담아도 공간이 남을걸. 안 들어가는 건 두고 가지 뭐." "도와주지 않아도 돼요?"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어. 어린애도 아니고." 그는 갑자기 조급하게 서두는 것 같았다. "내가 도와줄게요. 같이 해요." "아니, 됐어." 두 번씩이나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을 보면 진짜로 싫다는 뜻. 뭐 본인의 의지가 정 그렇다면야.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중간 크기의 슈트케이스 하나에 다 들어가는 간소한 짐은 이미 깨끗이 꾸려서 현관문 앞에 얌전히 내놓은 상태. 몇 년간 순회 공연 스탭으로 쫓아다니던 버릇이 있어 짐 챙기는 데는 선수가 되었다. 단체 행동에는 무엇보다도 시간을 지키면서 신속하게 움직여주는 게 최고다. 하지만 막상 자신보다 더 순회공연 베테랑이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저 지경이 되어버렸다. 과거의 빠릿빠릿하던 나이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서는 망가진 현재의 상태로 그냥 포기해버릴 수가 없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침대 위에 누워있으려니 괜히 잠이 오는 것 같아 머리를 쳐들고 벌떡 일어났다. 불필요한 낮잠을 자거나 잠을 너무 많이 잤다 싶으면 영락없이 그 다음날은 골치가 아프다. 차라리 밤을 샐지언정 쓸데없는 잠은 안 자는 편이 나중에 후회가 없다. 그는 응접실로 가서 한 귀퉁이를 점령하고 있는 흰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건드리다가 이번 앨범 레코딩을 하던 중에 장난으로 만들었던 [You Need A Servant and I'm Not The One 너에게 필요한 건 하인 그리고 나는 그게 아냐]이라는 경쾌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이 노래는 굳이 따지자면 어느 특정인 한 명에게 바치는 노래다. 어디든지 따라다니면서 수발 들어줄 몸종이 절실히 필요한 그 누구. ―그런 거 골치 아파서 싫어. 하인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지만 메이드가 사생활을 황색 언론에 폭로하는 바람에 귀찮은 소동을 겪은 다음부터 나이젤은 극도로 낯선 사람들을 기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웬만큼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보디가드도 싫다고 하고 먼지구덩이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주위 사람들이 떼로 나서 들고일어나기 전까지는 메이드도 들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 원인을 따지고 들다보면 결국은 나이젤 자신이 남들에게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할 뭔가를 집안에 두고 있었기 때문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약. 가까스로 약을 끊고 금단 현상에 시달리던 그와 함께 작곡 작업을 한답시고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던 작년 이맘때를 생각해내고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몇 번이나 이 프로젝트는 끝이다 생각하고 짐을 쌌었는지 모른다. ―이제 난 너만 있으면 충분해. 하지만 그는 항상 이런 것에 약했다. 네가 필요해. 나한테는 네가 없으면 안돼. 날 도와줘. 부탁이야. 우주 미아처럼 세상에 홀로 떨어진 사람에게 이런 말들은 최면술사의 주문과도 같았다. 훨훨 단신 아무것도 없는 삶에 붙잡을 끈이 하나 생긴다.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누군가에게 절실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원해진다는 것. 누군가의 인생에 진정 필요로 해진다는 것. ―나한테는 네가 마약이야. 그 말에 그도 서서히 길들어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중독이다. 나이젤이 나락까지 떨어진 폐인이 된 상태에서도 끝끝내 음악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를 필요로 했듯이 그 자신도 그 필요에 중독된지 이미 오래. You need a servant and I'm not the one You want a lover but you will never win me over 원래는 가벼운 보드빌vaudeville 풍인 이 노래를 즉흥적인 재즈 버전으로 바꾸어 복잡한 애드립을 구사하며 흠뻑 빠져 치고 있는데 나이젤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오오, 탄성을 지르며 피아노에 몸을 살짝 기대고 선다. 몇 년을 알아왔지만 이 정도로 열렬히 피아노 연주에 빠져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일 터. Don't you ever say you really need me 'Coz you know what my answer will be 스윙 리듬에 맞춰 얼마 안 되는 가사 부분의 마지막 음절을 방점을 찍듯 튕겨내며 마무리한 뒤 중단없이 재즈곡 [One O'clock Jump]로 연결하여 온몸을 흔들면서 격하게 피아노를 두드리던 그가 별안간 건반에서 손을 딱 놓아버렸다. "왜……?" 느닷없이 중단된 연주에 당황하며 나이젤이 물었다. "이 녀석이 말을 안 들어요." 그는 씨익 웃으며 왼손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무능한 게 협동심도 빵점." 그리고 피아노 뚜껑을 탁 닫았다. "웬만한 건 아예 이 녀석을 빼놓고 치는데, 지금처럼 제대로 치기 시작하면 그게 또 안 되거든요." 엄지손가락을 까딱까딱거리며 말하는 모양이 우스꽝스러웠는지 나이젤이 좀 웃었다. "왜 웃고 그래요. 이거 진짜 가슴아픈 이야긴데." 겉으로는 전혀 가슴 안 아픈 이야기인 것처럼 보였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안 웃었어." "웃었어요." 그는 확실히 지금 더 이상 피아노를 칠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응접실을 나서며 문 앞에 서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나이젤은 어쩐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듯 안절부절하는 분위기를 풍기면서 새로 응접실에 사다 건 그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 그림 자체도 괜찮지만 제목도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던 그림. 겁먹은 강아지처럼 주위를 살피는 눈빛이 어쩐지 이상했다. 어제 초대되어 갔던 클럽의 파티에서 언뜻언뜻 보여주던 석연치 않은 눈빛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한구석에서 인상이 좋지 않은 낯선 남자와 뭔가 은밀한 대화를 속닥속닥 주고받으며 주위를 살피던. 노골적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불안의 눈초리.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설마 드럭 딜러는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어제부터 지금까지 그다지 이상한 낌새는 없었는데. "나이젤." 그가 부르자 나이젤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손은 그림의 액자를 붙잡은 채 그대로. "딱 한 번만, 이라는 건 없다는 거 잘 알죠?" 잘못을 저지르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아이처럼 애처롭게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의 나이젤은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 거칠 것 없이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아름다운 금발 청년이었다.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바닥까지 미끄러지는 거예요. 벌써 몇 번이나 겪었잖아요." 오랜만에 딱 한 번만 해보자. 이제 완전히 끊었는데. 딱 한 번이면 괜찮겠지……. 절대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사 한 방에 그 동안의 노력들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다시 원점으로 도돌이표. "알고있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분명한 의지는 담겨 있었다. "빨리 준비해요. 한 시간 정도 있으면 나가야 할텐데." 그는 나이젤과 다시 한번 눈을 맞추고 응접실 문을 닫았다. 비행기가 예정보다도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마중나와 있어야 할 기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 전화를 걸어보니 지금 오고 있는 중이란다. 길이 좀 막힌다며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데는 괜찮다는 대답 외에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시간이 붕 떠버린 일요일 오후. 멀거니 서서 사람을 기다려야 할 일이 생긴 류신은 카트를 슬슬 밀며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일요일이지만 공항 안과 주변이 유난히 어수선한 것 같다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 사람―대부분 젊은 여자―들 손에 피켓이나 플래카드 같은 것들이 부쩍 눈에 띈다. 류신은 거기 씌어 있는 문구들을 보고 웬 인기 스타가 입국하거나 출국하거나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것이 싫어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며 류신은 휴대폰을 열어 번호를 눌렀다. "아, 난데. 지금 도착―" "야! 강류신!" 뒤에서 탁탁탁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누군가 류신의 등을 쾅 친다. 류신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민혁이다. "아까부터 긴가민가 했더니만. 너, 오늘 오는 거였―?" 민혁은 류신이 전화 통화중이던 걸 그제서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류신은 조용히 손만 들어 민혁에게 '잠깐만'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별일 아니야. 조금 있다가 그리로 간다." 전화를 탁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 동안 민혁은 찬찬히 류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카이라는 일본 아이?" 류신은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어쩐 일이야, 여긴?" 묻는 말엔 대답 않고 다시 질문을 되돌린다. 민혁은 얼굴에 묘한 표정을 담고 류신의 얼굴만 유심히 쳐다보며 딴 생각에 빠진 것처럼 잠깐 뜸을 들였다. "어디 가?" 채근하듯 류신이 다시 묻자 비로소 정신이 되돌아온 듯 화들짝. "아, 오늘 출발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배웅 좀 하러 나왔지." "배웅?" 누군지 모르지만 조민혁이 공항에 나와 기다렸다가 배웅씩이나 하다니 별일 다 있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배웅이라기 보단 그냥 잠깐 얼굴보고 확인할 일이 있는데 그 분께서 워낙 VIP이신데다가 많이 바쁘시다보니 여기서밖에 만날 새가 없다잖아. 아쉬운 사람이 쫓아나와야지. 별 수 있냐?" 흐음. 류신은 더 묻지 않았다. 일 관계인 사람이거나 중요한 고객이겠거니. 그 이상 관심 없다. "그나저나 너, 오늘 오는지 몰랐다……." 민혁은 조금 섭섭한 것 같은 뉘앙스로 말꼬리를 끌었다. "왜?" 류신은 짐가방이 올라선 카트를 바깥으로 밀며 물었다. 민혁도 그 뒤를 따랐다. "나, 갑자기 서울 가고 싶어져서 표 끊었거든." "오늘?" 어.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여기 오니까 갑자기 가고싶어져서. 마침 너도 가 있을테고. 물어보니까 자리도 있다고 하고." "난 지금 여기 있는데." "그러게 말이야." "그럼 도로 무르던가." "됐어. 귀찮아. 내친김에 그냥 갔다올래." 동네 산책이라도 가는 것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나와있는 민혁은 작은 가방 하나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비행기를 탈 거라는 건 여권을 가지고 왔다는 얘기다. "며칠 예정?" "몰라. 일주일? 가서 일 되는 거 보고." 겉으로는 누가 보더라도 충동적인 여행이지만 사실은 용건과 목적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민혁은 항상 이런 식이다. "서울 어떻대?" 잠깐의 침묵을 깨고 민혁이 물었다. "어떠냐니. 뭐가?" "그냥 전반적으로 두루두루." 류신은 민혁을 흘깃 바라보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똑같아." "하나도 안 변했어?"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류신은 의미가 불분명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의 변화는 있겠지." 둘이 멍하니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저쪽에서 류신을 데리러온 검은 차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갈게. 잘 다녀와." 바로 앞에 자동차가 스르르 정차하자 류신은 기사에게 짐을 맡기고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잠깐!" 류신이 차 안에 들어가 앉아 문을 닫으려는 순간, 민혁은 느닷없이 문을 나꿔채 잡았다. 때맞춰 저쪽 어딘가에선 소녀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류신이 너……, 행복하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느 누가 납시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빨리 출발하고 싶었다. "묻고 있잖아. 너 행복하냐고." 민혁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찌푸려졌던 류신의 얼굴은 그대로 조금 굳었다.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런 질문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느 정도 두렵기도 하다. "물론."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행복하냐는 질문에 NO라고 대답하는 자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 강류신은 자신은 모른다. 스스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정말?" 다짐이라도 받아두겠다는 듯이 민혁은 재차 물었다. "왜 이런 걸 묻는지 이유는 궁금하지 않아. 어쨌든……," 류신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일정한 톤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제 어디서 묻더라도 마찬가지야." 자신이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지만, 분명한 것은 행복하지 않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걸로 끝. 더 이상은 생각할 필요도, 여지도 없다. "그래, 알았다." 넌 그런 녀석이었지. 민혁은 중얼거리며 차문을 닫았다. 이미 주위는 꺄꺄거리는 함성으로 시끄러워져 그 정도의 작은 말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카이의 아파트가 있는 거리의 이름을 기사에게 말하고 류신은 뒷좌석에 푹 파묻혀 앉았다. 겹겹이 쌓인 구름 속에서 해가 모습을 드러냈는지 강렬한 햇살이 창유리를 찌르며 파고들었다. 눈이 부셔 류신은 눈을 감았다. 준석이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오자 현관에는 낯익은 구두가 보였다. 벌써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맨발로 한 달음에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매끈하고 하얀 맨다리가 현관 앞을 딛고 섰다. 목소리 속에서 묘한 교태와 성급함이 묻어났다. "한참 기다렸는데." 벗은 것이나 다름없이 단추를 모두 푼 셔츠 한 장을 나른하게 두 팔에 꿰고 있는 그는 이미 허리 아래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올라와." 최면에 걸린 듯이 준석이 현관 위로 올라오자, 그는 그 앞에 바싹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재빠른 손길로 준석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재킷은 네가 벗어." 준석은 시키는 대로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서류 가방과 함께 소파 위로 멀리 던진 뒤 셔츠의 맨윗단추를 푸르고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했다. "아, 좋아." 준석의 물건을 꺼내 두 손에 소중히 받쳐들고 그는 흥분에 겨운 탄성을 질렀다. "역시 네 거가 가장 마음에 들어.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제일 굵거든. 길이도 제일 긴 축에 들고. 빛깔도 좋고 냄새도 최고야." 새침하고 금욕적인 아름다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노골적인 말들이 오싹할 정도의 색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음, 맛있어." 먹음직스럽다는 듯이 그것을 혀끝으로 길게 한번 핥아내리고 요염한 눈웃음을 보내는 그는 이미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던지 그 자신의 것도 웬만큼 일으켜져 있는 상태였다. 어디선가 조그맣게 덜덜거리는 모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한껏 곧추세운 페니스를 입 안에 가득 삼키고 솜씨좋게 혀를 휘감으며 흡착판처럼 집요히 빨아댈 즈음에는 준석의 머릿속에서도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그의 입 안에서 열렬히 왕복 운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타임." 절정의 고개에 오르기 직전에 그는 부들부들 성이 날대로 난 빳빳한 페니스를 뱉어냈다. "이대로 가면 안 되지. 아깝게." 그리고는 마치 작은 사슴처럼 마루바닥을 짚고 엎드려 엉덩이를 높이 쳐들었다. 그 와중에도 한 손으로는 양쪽 유두에 피어싱한 작은 링을 번갈아 잡아당기며 젖은 신음을 흘린다. "얼른 박아." 명령에 따라 준석은 그의 낭창한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질척질척하게 준비되어 뻐끔거리는 작은 구멍에 그대로 힘있게 삽입했다. 그는 한 번에 강하게 박아넣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아아. 흥분과 희열과 아픔과 괴로움이 뒤섞인 교성이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이미 한 발 앞서 항문 속에 들어와 있었던 작은 로터가 달달 떨며 준석을 반겼다. 페니스 끝에 느껴지는 로터의 진동, 페니스 전체를 주무르며 찰싹 달라붙는 습한 열기, 형태를 맞춘 듯 꽉꽉 눌러 죄어오는 능숙한 탄력.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모든 것을 다 잊을 정도의 맹렬한 쾌감 속에 준석은 조금은 서글픈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쾌감이 크면 클수록 가슴도 그만큼 아팠다. A foggy day in London town 어느 안개 낀 날의 런던 it had me low 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and had me down 우울함에 젖어있었지 How long, I wondered, could this thing last 이게 얼마나 오래 갈까 의심스러웠지만 but the age of miracles hadn't past 기적의 시대는 아직 지나지 않았더군 For suddenly 그러다가 갑자기 I saw you standing there 네가 거기 서 있는 걸 보게 되었거든 And through foggy London town 런던의 안개 낀 하늘에 the sun was shining everywhere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순간이었어 (A Foggy Day - Ella Fitzgerald) ← click! 하루의 시작부터 불그죽죽한 잿빛을 띠고 있던 하늘은 이제 묵직한 수분을 머금고 도시로 가라앉고 있었다. 콘크리트 속으로 물기가 스며 건물과 도로와 보도블록이 온통 짙게 젖어들었다. 스프레이처럼 공기 중에 흩뿌려져 내리는 축축한 안개비. 빨간 이층버스를 가득 뒤덮은 광고 프린트 속 모델의 얼굴에서는 도록도록 맺힌 빗물이 마치 눈물처럼 굴러떨어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던 사람들은 목덜미 사이로 스며드는 척척한 느낌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가방 속에서 하나둘씩 우산을 꺼내 펴들기 시작했다. 희뿌연 습기가 유리창 귀퉁이를 조금씩 점령해가고, 실내에 있는 사람이 어둑한 유리창에 불빛과 함께 비치는 자신의 얼굴에 문득 놀라듯, 우산 하나만으로 하늘을 가린 사람들은 방수천이 받아내는 빗소리에 놀라며 걸음을 바삐 재촉했다. 어느 틈에 바닥까지 깔린 불투명한 어둠을 또박또박 밟고서. 류신을 태운 자동차가 유서 깊은 애비 로드 스튜디오Abbey Road Studio 앞을 막 지나 세인트 존스 우드St. John's Wood의 고급 주택가로 접어들었을 무렵 날은 완전히 컴컴해져 있었다. 서구권 해외지사들의 총본부 역할을 하게 된 뒤 서울의 본사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날로 비중과 세력이 커져가는 뉴욕 지사에서 정보통신부문 마케팅기획실장으로 최근 승진한 류신은 승진한 뒤 첫 번째의 해외출장으로 오늘 새벽 일찍 런던에 도착한 참이었다. 앞으로 일주일간의 런던 출장 기간 내내 계속 눈코뜰새없이 바쁠 예정인데다가 출장 준비를 하느라 어제 그제 이틀간은 꼬박 새우다시피 해서 오늘밤은 빨리 호텔로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이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명주의 성화에 못 이겨서라도. 오늘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현재 런던 사교계의 핵으로 한참 주목받고 있는 젊고 잘생긴 카레이서 트레버 레이우드Trevor Raywood와 그의 아내 펠리시티Felicity. 한 달 전에 결혼한 펠리시티는 명주의 기숙여학교 동창이었다. 둘은 여학교 시절의 기숙사 룸메이트로 줄곧 베스트프렌드였었고, 레이우드는 마침 류신과 비즈니스적으로 아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사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우드는 작년 한 해 영국과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판매고 1위를 기록했던 세강전자의 휴대폰 「스피도스SpeedO.S.」의 광고 이미지 모델이었다. 영미권을 겨냥한 「스피도스」를 디자인한 것이 바로 명주가 공동운영하는 디자인 펌. 「스피도스」의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사이가 진전되어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그 파티에 펠리시티를 초대했던 명주는 부지불식간에 중매쟁이 노릇을 했던 이유로 결혼식에서 신부의 부케까지 넘겨받았고, 결혼 후 이 부부가 소수정예의 중요한 친구들만 빅토리안 양식의 화려한 자택으로 불러모은 디너 파티에도 빠질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제일 늦었나 봐." 류신의 뒤를 이어 차에서 내리던 명주가 집 앞 도로에 죽 늘어선 열 몇 대의 자동차들을 쳐다보았다. "내 탓은 아니야……," 운전사가 큰 우산을 높이 쳐들어 둘이 비를 맞지 않도록 하는 사이, 명주가 입은 실크 크레이프 소재의 검은색 칵테일 드레스 자락이 빗물에 젖지 않게끔 신경써주며 류신은 말을 이었다. "……여기 올 생각이었으면 금요일밤 늦게까지 일을 붙잡고 있지 말던가, 일이 더 중요했으면 계속 그냥 일을 하던가." "아무것도 포기 못하지~~" 명주는 낼름 혀를 내밀었다. "박명주. 한꺼번에 한 가지만 해. 둘 다 망치지 말고." "아, 정말! 그노므 잔소리!" 명주는 6년 전에 런던의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oyal College Of Art를 졸업하고 1년 반 동안 디자인 펌에서 근무하다가 이미 디자이너로서 잘 나가던 선배 두 명, 그리고 경력 8년차의 메카니컬 엔지니어 한 명과 함께 「오브Orb」라는 프로덕트 디자인 전문 회사를 차렸다. 마침 실력이 뛰어난 선배들이 독립하는 데 참여하는 기회를 잡았을 때는 명주 스스로도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다 쓰러져가는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꼴딱꼴딱 밤새기를 밥먹듯 했던 초창기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던 「오브」는 요 몇 년 사이 연이어 히트작을 발표함으로써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스피도스」로 작년 말에 비즈니스 위크Business Week 지紙가 선정한 '올해의 혁신적 디자인Innovative Designs Of The Year'에 당당히 꼽혀들어가고 그 외에 권위있는 상들을 몇 개나 수상할 만큼 성공을 거두어 「오브」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던 것이다. "듣기 싫으면 안 듣도록 행동을 잘 좀 해봐." "괜찮아. 난 네 잔소리 듣는 거 나쁘지 않거든. 기분이 막 좋아져. 나 아마 매저인가봐." 매저라서가 아니라 어리광이 아니냐고 하려다가 류신은 입을 다물었다. 전처럼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요즘 미묘하게 양상이 달라져버린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좀 내뱉기가 껄끄러웠다. 지상 3층, 지하 1층의 우아한 회갈색 벽돌집을 둘러싼 야트막한 철제 펜스. 열린 대문 안쪽의 잘 다듬어진 정원을 가로지르는 진입로는 부슬부슬한 빗물 때문에 조금 미끄러웠다. 뾰족한 하이힐을 신은 명주는 조심조심 걷다가 오히려 미끄러질 뻔한 두어 번의 위기를 겪고 나서 막판에는 부리나케 뛰다시피 우산 속을 벗어나 현관 계단으로 폴짝 올라섰다. "목걸이 고마워……," 현관 바로 위, 앞으로 돌출된 모양을 하고 있는 2층의 작은 발코니가 열 칸 남짓한 계단 끝까지 길게 뻗어 현관의 지붕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명주는 아직 운전사가 받쳐주는 우산 밑에 있는 류신을 뒤돌아보며 자신의 목에 걸린 우아한 디자인의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살짝 들어보였다. 다면체로 커팅된 좁쌀알만한 크기의 투명한 다이아몬드 비즈가 플래티넘 줄 전체에 처음부터 끝까지 촘촘히 박혀 있는 이 목걸이는, 2.5캐럿짜리 오렌지색 다이아몬드 세 개가 투명한 다이아몬드 알갱이가 박힌 플래티넘 스트링 사이에 함께 엮여 가운데에서 Y자 모양을 이루며 쇄골 사이의 움푹 패인 부분부터 가슴골까지 길게 늘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류신의 어머니가 본드 스트리트Bond Street의 보석상에 직접 주문한 것이 완성되어 오늘 낮에 명주에게 배달되었다. "나한테 고마워할 것 없어." 류신은 명주를 힐긋 바라보고 다시 발밑을 조심하며 또박또박 걸음을 옮겼다. "알았다, 그래. 어머님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명주는 웃는 듯 우는 듯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직접 말씀드려. 그리고 다른 의미는 없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냥 선물로 보내신 거니까." "그냥 선물? 나는 약혼 예물 중에서 미리 주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너한테 반지 하나 못 받은 내가 좌절할까봐." 명주는 계단 한 칸을 남겨두고 멈추어 뒤돌아섰다. "결혼한다니까 다들 반지 보여달라고 난리지.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냐고들 물어대지.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너한테 직접 프로포즈 받은 것도 아니잖아……." 명주는 조금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릎꿇고 반지 주면서 윌 유 매리 미 하는 거……. 넌 그거 그렇게 어려워? 다이아몬드 아니라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플라스틱 반지라도 나는 상관없단 말야." "……." 류신과 명주의 약혼식 날짜가 잡혔다. 실제로 약혼을 할 사람 둘의 의지는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어른들끼리 얘기가 오고가더니 날짜가 정해져 당사자들에게 통고되었다. 5월에는 명주의 집안에 제사가 많다고 하여 다음 달인 6월 중순에 약혼식을 하고 결혼식은 12월초에 올리기로 했다. 올해 안에 당장 명주와 결혼하라고 했던 할아버지의 뜻은 시간적 차이는 조금 있었지만 이루어진 셈이었다. 일에 빠져서 그 동안 결혼이나 연애 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줄 알았던 명주가 어른들 사이에서 결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류신은 적지않이 놀랐다. 그는 명주가 이 결혼에 찬성할 리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십대 시절에 처음 알게 된 뒤 적당히 어울리는 사이 정도로 지내던 둘은 류신이 학부 시절 1년을 런던에서 보낼 때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고등학교 때처럼 사귀자고 졸라댄다던가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본다던가 하는 곤혹스런 일이 일체 없이 쿨하게 자신을 대하는 명주에게서 류신은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안도감을 느꼈고, 그 이후로 둘은 계속 좋은 친구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다가 명주가 이쪽과 관련이 없을 수 없는 일을 시작한 뒤 비즈니스 면으로도 이해관계가 생기면서, 류신은 새삼스럽게 명주가 매우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호감이란 친구이자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박명주라는 인간에 대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이제부터 결혼 상대자로서 그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 큰 부담이었다. 류신은 명주를 정말 좋아하는 만큼 그녀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많이 아껴줄 남자에게 시집가서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랬다. 진심으로. "그러니까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 다시 한번만 차분하게 잘 생각해 보자." 류신의 말에 명주는 휙 째려보며 원망스런 눈길을 던졌다. "차분하게? 뭘?!" 류신이 한 마디 더 대꾸하려는 찰나, 두 사람이 도착한 것을 안 이 집의 안주인 펠리시티가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둘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환한 미소로 레이우드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간, 애비 로드 스튜디오의 2층, 스튜디오 3에서는 인덜전스의 두 번째 싱글 「Happenstance생각지도 못한 일」의 리믹싱 작업이 한창이었다. 두 번째 싱글은 투어가 막 시작되는 6월초에 발매될 예정으로, 투어 시작까지 한 달 반 남짓 앞둔 지금 밴드는 목하 맹연습 중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리믹싱 작업은 프로듀서인 그의 손에 모두 고스란히 떠맡겨져 있었다. 현재, 싱글 CD에 수록될 오리지널 싱글 버전 외에 함께 들어갈 세 가지의 리믹스 버전 중에서 두 가지는 믹싱이 모두 완료되어 마지막 단계인 마스터링mastering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고, 마지막 하나만 영 마음에 들게 나오지 않아 그의 속을 태우고 있었다. 원래는 느릿느릿한 발라드 풍으로 작곡되었던 이 노래는 녹음된 결과물들이 영 흡족하지 않아 떨구어버리기로 결정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몇 달 후 앨범 레코딩을 마감할 무렵 그가 시험삼아 BPM(beats per minute, 1분간 박자수)을 확 늘려 속도를 조정해 보았던 것이 오히려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발랄한 이미지의 곡으로 분위기를 쇄신해 재녹음을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리지널 버전 말고도 리믹스 버전 두 가지 모두 빠른 리듬으로 속도를 맞추었는데 네 번째 트랙으로 들어갈 이 버전만은 원래 작곡된 느낌을 살려보고자 속도를 올리기 이전에 레코딩되었던 애초의 녹음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 곡의 느린 테이크들은 레코딩 작업을 막 시작했을 때 녹음되었던 것으로 나이젤의 보컬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당시는 약을 끊고 재활원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목소리가 좀 망가져 있었다. 결국 열흘 동안 레코딩 작업을 한 결과 이대로는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 달 여 동안 보이스 레슨을 따로 받게 한 뒤 다시 레코딩을 진행해야만 했었다. 이 보이스 레슨 전과 후의 보컬 수준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고, 열심히 소리를 깎고 다듬고 톤을 맞추어 놨어도 그 차이는 완벽히 메워지지 않았다. 물론 작업을 직접 한 본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것이지 웬만한 사람은 전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는 아주 조그마한 결함이었다. 그리고, 이 버전의 믹싱 스타일 자체가 리듬섹션의 인스트루멘털 위주라서 보컬은 이미 여러 마디 과감히 생략해버린데다 보컬이 뜨는 부분도 웅웅대는 이펙트를 넣어 소리가 작게 뒤로 물러나게 하고 둥둥거리는 베이스 음이 전면으로 나오도록 해두었기 때문에 보컬 상태는 어쩌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원래 음악에 대해서라면 철두철미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인간의 귀에 거의 들리지 않는 미세한 잡소리 하나도 절대로 그냥 넘기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인 그는 삐쭉삐쭉 불규칙한 그래프로 소리가 표시되고 있는 모니터 스크린을 노려보면서 아무래도 내일 보컬을 새로 따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일은 일단 끝내야 할 참이다. 기지개를 켜듯 팔다리를 쭉 펴자 온몸에서 삐그덕 소리가 났다. 피곤하다. 쓰고 있던 안경을 콘솔 위에 던져놓고 푹신한 회전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감은 눈두덩 위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지압을 하고 있는데, 희미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들어온 것은 이미 불혹을 넘긴 베테랑 뮤지션으로 음악계에서는 인텔리로 통하는 스티븐 페어팩스Stephen Fairfax였다. 그와는 아주 예전에 녹음실에서 엔지니어 보조로 있을 때 최초로 알게된 뒤 같이 일을 한 적은 없었지만 업계 사람들과 같이 어울릴 때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만나면 몇 마디 인사 정도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베스트 앨범 리마스터링re-mastering 작업 때문에 아래층에 와 있었는데, 마침 여기 있다고 해서……." 페어팩스는 자신이 여기까지 올라와 이 방의 문을 두드린 이유를 설명했다. "작업은 잘 되어가요? 바빠요?" "아니요. 조금 쉬려던 중이었어요." "할 일이 많은가요?" "큰 일은 아닌데 미리 해두어야 할 일들이 좀 있네요." "아주 급한 일?"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그는 씩 웃었다.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아직……." 그는 무심코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가 조금 넘었다. 그러고 보니 좀 출출하다 싶다. "여기 바에 내려가서 간단히 뭣 좀 먹을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1층으로 내려와 로비 안쪽 깊숙이 자리한 레스토랑 겸 바로 들어갔다.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오로지 이곳에서 작업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편의시설이다. 아주 북적이지도 썰렁하지도 않는 바 안에는 열 두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쪽의 유리문은 바깥의 정원과 연결되어 있어 원하는 사람은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비가 오고 있기 때문에 정원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을씨년스런 빗물에 축축히 젖은 어둑한 정원과 대비되는 따뜻하고 안락한 실내는 부드러운 빛을 내뿜는 작은 할로겐 조명등이 곳곳에 달린 오크 재질의 나무 천장과 연한 적갈색의 벽으로 한층 편안하고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는 상아색 대리석으로 만든 바 카운터가 있었고 나머지 공간에는 동그스름한 작은 철제 테이블들 여러개를 중심으로 등받이와 좌면坐面에 적자주색 융단을 덧댄 슬림한 철제 의자들이 빼곡이 채워져 있었다. 이 곳에 오래 앉아서 시간을 죽일 사람들도 없고 오케스트라 멤버들이라도 한꺼번에 내려올 경우에는 자리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눈에 띄는 몇몇 지인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보내고 비어있는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인덜전스의 새 앨범 평판이 정말 대단히 좋던데요?" 각각 클럽 샌드위치와 타이 그린 커리Thai Green Curry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페어팩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으음, 하고 뜸을 들이다가 고맙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Another Declaration』은 영국과 미국, 유럽 곳곳의 차트에서 1위를 달리며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물론, 비평가들의 리뷰도 상당히 좋았다. 그들 대부분 이번 앨범을 인덜전스 역사상 최고로 꼽고 있었고, 올해가 낳은 가장 뛰어난 레코드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나도 들어봤는데 진짜 좋았어요.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느낌이랄까. 곡의 구성도 전반적으로 독특하면서도 안정적이고, 멜로디도 굉장히 쉽고 귀에 쏙쏙 박히는데도 불구하고 흔한 느낌이 전혀 없이 새롭더군요. 그러면서 우아하고……." 거듭되는 칭찬에 그의 얼굴은 조금씩 홍조를 띠고 있었다. "……편곡도 아주 노련하고 깔끔했고. 딱 필요한 타이밍에 적재적소에 모든 게 배치되어 있고 너무 오버하지 않아서 참 좋았어요. 욕심부리다 보면 지저분해지기 십상인데. 나도 알지만 그거 알맞은 순간에 끊고 조절하기가 참 어렵죠. 자꾸 붙들고 앉아서 이리 틀고 저리 꼬고 더덕더덕 덧입히게 되고……. 공 많이 들인 게 분명히 느껴지는데 너무 손을 대서 김샜다는 느낌이 전혀 없더군요. 사운드 레이어가 겹겹으로 장난 아니게 쌓였는데도 소리가 전혀 둔탁하지가 않은 거예요. 아주 생생하고 투명해. 그걸 제대로 잘 해내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거든요. 대부분 너무 날탕이라서 심심하거나 너무 두껍게 덧칠을 많이 해놔서 텁텁하거나 둘 중의 하나지." 아하하하. 생각도 많고 말도 많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긴 했었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니, 정말이에요. 사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난 10년 동안 들었던 레코드 중에 최고예요. 어느 곡 하나 버릴 것 없이 훌륭하고 앨범 전체 흐름도 처지거나 튀는 곳 없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너무나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데 완벽해서 식상한다는 느낌이 없다는 거야. 대부분의 완벽한 레코드가 가진 치명적인 결점. 그게 없어요. 확실히 대단해. 질투가 나서 가만히 듣고 있지 못할 정도로 대단해……." "……." "딱 듣는 순간, 아, 졌다……, 그런 느낌. 이 친구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 그는 끝없는 과찬의 말씀들을 늘어놓는 이 사람의 속뜻이 슬슬 궁금해지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찬사들. 이렇게 잔뜩 띄워준 다음에 무슨 용건을 풀어놓으려나. "……그래서 사실 꼭 한번 따로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처럼 오늘 여기 와있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더군요. 할 얘기도 좀 있고……." 할 얘기가 있다니 그게 뭔지 물으려는 찰나,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칠면조 햄과 치즈와 베이컨, 양상추, 토마토, 양파, 치커리가 들어간, 쳐다보기만 해도 버거울 정도의 두툼한 샌드위치는 그의 앞에 놓이고, 희뿌연 연녹색의 태국식 카레는 페어팩스의 앞에 놓였다. 고소한 코코넛 냄새와 이국적인 매캐한 향신료 냄새가 어우러져 혀끝을 자극했다. 행복한 표정으로 카레를 라이스에 붓는 모습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태국 음식 좋아하시나요?" "아주 좋아해. 사실 아시아 음식은 거의 다 좋아해요. 파스타보다는 쌀국수가 좋고, 빵보다는 밥이 좋아요. 사실 이것도 내가 직접 해 먹는 게 훨씬 맛있지만, 여기도 전문점 아닌 것 치고는 꽤 괜찮게 하는 편이라 여기선 꼭 이걸 먹죠. 언제 한번 기회가 닿으면 내가 직접 만든 걸 맛보여주도록 할게요. 나는 인스턴트 카레 가루는 안 쓰고 닭 육수도 직접 내거든요."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웃었다. 이번에는 페어팩스가 그를 유심히 바라본다. "이런 질문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저, 어느 나라 출신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는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콧등을 찌푸렸다. "일단 국적은 미국이에요. 그리고 출신은……." "……?" "그냥 지구라고 해둘까요?" "하하하." "어느 날 깨닫고 보니 저는 시애틀에 살고 있었고……, 그게 다예요. 그 이상은 뭐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장난스러운 윙크 "왜……?" 어깨를 으쓱, 양손바닥을 펼쳐보여주며 고개를 갸웃하는 것으로 그는 대답을 대신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모른다'도 되고, '말하기 싫다'도 된다. "……." 페어팩스는 뭔가 껄끄러운 부분을 건드린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듯 후회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는 조금 더 밝은 톤으로 명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외계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요. 이거 하나만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죠." "무슨 근거로?" "일단은 지구 밖으로부터 어떠한 신호를 받은 적도 없고, 이상한 징후를 느껴본 적도 없거든요. 특별난 슈퍼파워도 없구요. 외계인인데 그렇다면 좀 비참한 케이스가 되겠죠. 그러니 역시 스스로 지구인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좀 의심이 가는데?" 페어팩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저도 생각해 보니까 좀 그렇군요." 하하하. 둘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화제를 얼른 다음으로 돌렸다. 그는 창밖의 비오는 정원에 멍한 시선을 잠깐 주고, 입안 가득 베어문 샌드위치를 씹기 시작했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축축하고 음산한 날씨. 청명한 파란 하늘이 그리웠다. 높고 높은 푸르른 가을 하늘. 서늘한 햇살. 다시는 갈 수 없는 곳. 게스트는 넉넉잡아 서른 명 정도. 레이우드 부부의 가까운 친구들이라지만 모두 나름대로 여러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상류층 인사들이었다. 그 중에는 명주와 펠리시티의 학교 동창도 두어 명이 더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명주는 아는 사람들이 많아 활발히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국인이라고는 자신 한 명뿐이던 학교에서 손톱만큼도 기죽는 일 없이 언제나 당당하게 자기 앞을 잘 헤쳐나가던 진취적인 성격과 몸에 배어있는 서구식 사교 범절은 이런 상황에서 특히나 빛을 발했다. 류신은 저런 점들 때문에 어른들이 명주를 자신의 짝으로 점찍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명주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며 집안간의 역학 관계, 하다 못해 키나 외모 같은 외적인 조건까지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이만큼 자신과 잘 맞아떨어지는 배우자를 찾기도 힘들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그런 것만 가지고 결혼을 할 순 없었다. 자신은 이미 결혼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입장상 언젠가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으로 스스로 내적인 타협을 보았고, 최소한의 한도 이상은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방침을 정해둔 참이었다. 그런 결혼에 걸맞는 배우자의 제일 조건은 '자신이 미안한 마음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집안이라든가 성격이라든가 외모라든가 여타의 조건들은 그에게는 그 다음 얘기였다. 그 쉽지 않은 제일 조건을 어떤 식으로 구현해야 할지는 상당히 막막한 일일지라도 여하튼 명주는 첫번째 조건에서 이미 탈락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명주 자신에게 납득시키기는 생각보다 훨씬, 훨씬 쉽지 않았다. 왜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부터 하느냐고 무조건 흥분하는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정말 이런 식으로 이 결혼에 끌려가게 되는 것인가. 왜 자신은 좀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거부를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인가. 할아버지 말씀대로 강씨 집안 일원인 이상 결혼을 안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렇게 누군가와 꼭 결혼을 해야 한다면, 명주처럼 의심의 여지없이 안심할 수 있는 상대와 결혼하기를 자신도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은 줄 수 없지만 안락한 결혼은 바란다.' 이것은 모순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 그러면 사랑을 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는 해결책이 아니다. 이미 그 재료는 오래전에 고갈됐고 공장은 가동을 중지했다. 자신이 아무리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는 비즈니스맨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장래를 놓고 거래를 하고 싶진 않았다. 거래를 한다면 자신과 내놓을 카드가 같은 사람과 거래하고 싶었다. "나 왔어~" 문득 눈이 마주치자 목하 사교 토크 중이던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명주가 한달음에 응접실을 가로질러 류신의 옆에 다가와 섰다. 류신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파스칼 듀블라시Pascal DuBlasi는 명주와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울린 휴대폰를 받기 위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원래 유명한 포토그래퍼인 그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포토그래퍼 시절보다 몇 배는 더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작년에 「스피도스」의 CF를 연출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집주인인 레이우드와 친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둘이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아, 이번에 영화를 만들었나봐. 촬영은 다 끝났고 한창 편집중인데 하도 지겨워서 요며칠 런던에 와서 좀 쉬고 있다더군. 그러면서 지금 그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새 영화 얘기를 좀 하던데." 류신은 별 관심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스폰서를 해주길 바라나?" "아니. 그런 얘긴 없었어." 솔직히 광고 효과가 확실히 나타날만한 영화라면, 화면에 제품 많이 들이밀게 하고 스폰서링을 해줘도 나쁘진 않겠지만, 자신이 직접 나설 일은 아니다. 정식으로 컨택이 들어오면 담당 팀에서 알아서 따져보고 보고를 올릴 것이다. "어떤 영화래?" "으음. 대충 들어보니까 전화기가 거의 주연급 정도 되는 모양이야. 휴대폰이 두번째 주인공보다 더 등장하는 씬이 많다고 하니까." 진지하지 않은 이야기를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류신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명주는 풋, 하고 웃었다. "전화 통화로 얘기 다 진행시키는, 뭐 그런 건가? 전화 없으면 스토리가 안 이어지는 것?" 글쎄. 길게 끌 만큼 흥미가 있는 얘기도 아니고 해서 류신은 묵묵히 손에 들고있던 글라스를 입술에 대고 내용물을 입 안으로 흘려넣었다. 명주와 해야 할 얘기는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이따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확실히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류신은 속으로 다짐했다. "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 페어팩스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아닙니다." "그럼, 아까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거……." 이제야 본격적인 용건을 털어놓기 시작할 모양. "네." "혹시 소문 들은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요새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어요." "아, 들은 것 같아요." 그는 손가락을 퉁겨 딱 소리를 냈다. 작년 언젠가 음악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기사의 논조는 신랄했고, 페어팩스가 속한 3인조 그룹의 멤버들을 싸잡아 비웃고 있었다. 『스티븐이 영화를 만들고, 제프리가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에 전념하면 월터는 아마 그 레스토랑에서 죽 때리며 스티븐의 영화를 TV로 볼 것』. "이쪽 기자들은 잔인하고 무모해." 페어팩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이 좀 먹고 각자 다른 일에 신경 쏟는다고 해서 우리를 당장 폐기처분해야할 고철덩어리 취급하다니. 이번에 베스트 앨범 내는 것 가지고도 이제 너희들은 해산밖에 안 남은 것 아니냐고 떠들어대고 있더군요." "……." "물론 그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라는 것이 더 분하지만……." "……."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해산을 고려한다거나 내가 영화 제작에 손을 대는 게 앞날이 불안하기 때문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네." "그냥 재밌어서 하게 된 거예요. 재작년에 파스칼이 너무 좋은 스크립트를 찾아냈고 그걸 꼭 영화화하고 싶다고 했어요. 나도 그 스토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하자! 재밌을 것 같다! 이렇게 된 거죠. 나도 제작비를 보태고, 전부터 파스칼에게 영화 만들자고 어택하던 헐리우드 제작자도 참여하게 됐고, 조나산 배스커필드와 요시마루 노리코가 꼭 출연하고 싶다고 나섰고……. 투자자들도 금방 확보됐어요. 대본 수정작업도 만족스럽게 끝났고, 스탭들도 잘 선정됐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촬영 다 마치고 지금 편집중이예요. 촬영된 러쉬들을 보면 솔직히 결과물이 기대가 많이 돼요." 페어팩스는 들뜬 어조로 말했다.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산 배스커필드Jonathan Baskerfiled와 요시마루 노리코吉丸紀子는 요새 정말 잘 나가는 스타로 특히 조나산 배스커필드는 영화 고르는 안목이 까다롭다고 들었다. 대충 이 영화에 참여하는 인원들의 네임 밸류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성공은 보장된 셈이라고 봐도 좋았다. "사실 파스칼이 자네 얘기를 했어." "왜요……?" 갑자기 이야기의 화살이 정통으로 자신에게 날아와 그는 조금 당황했다. 파스칼 듀블라시는 인덜전스의 뮤직 비디오를 몇 편이나 만들었었고, 지난 번 투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때도 같이 작업을 했기 때문에 웬만큼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이젤의 마약중독과 그로 인한 밴드 멤버들간의 마찰로 매일매일이 지옥과도 같이 끔찍했던, 다시 되돌려 생각하기도 싫은 투어였지만 파스칼의 미려한 영상에서 한 차례 걸러진 그것은 퇴폐적인 절박함을 담고 너무나 쿨하고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었다. 투어 자체는 괴로웠어도 그걸 영상에 담은 다큐멘터리의 사운드트랙 작업은 즐거웠었다. 파스칼은 소리와 영상의 밸런스를 잘 아는 뛰어난 연출자였고 그와는 의견이 잘 맞았었다. "우리 영화의 음악을 맡겼으면 하고." "……!" "큰 부담은 갖지 말아요. 조나산과 노리코가 출연했다지만, 헐리우드 기준으로 보면 우리 영화는 어디까지나 아주, 아주 작은 영화에 불과해." "저, 저는 그냥 뮤직 프로듀서일 뿐이에요. 투어 다큐멘터리의 사운드트랙 작업은 해봤지만 아시다시피 그것과 보통 영화는 완전히 다르죠. 그건 라이브 사운드를 최대한 깔끔하게 편집하는 게 주목적이었고 그 외에는―" "아까 내가 한참 얘기하던 건 어디로 들었어?"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앨범을 딱 듣고 내가 찾던 건 바로 이런 분위기구나 싶었으니까." "그건 인덜전스의 앨범이지 제 것이―" "이봐요. 이번 앨범이 제이 당신 혼자 다 만든 것이라는 사실, 웬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어요. 공동작곡가로 되어있다지만 나이젤이 이번에는 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도 다 알아요. 새로 들어온 밴드 멤버들도 사실상 투어 뮤지션들에 불과하구요. 심지어는 나이젤을 객원 싱어로 써서 만든 제이 슬레이니의 원맨 밴드 앨범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던데……." "그건……, 그렇게까진……." 그는 당황하여 마구 손을 내저었다. "이쪽 바닥도 의외로 좁아요. 내가 듣기로는 악기 세션도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하던데? 대부분 혼자 연주하거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낸 전자음이라는 말 듣고 나조차도 정말 놀랬어요. 특히 그 세번째 트랙과 네 번째 트랙 사이의 브릿지로 들어가는 클라리넷이나 첼로 같은 건 진짜 어쿠스틱 음색으로 들렸거든. 몇 번을 들었는데 정말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어." "……." "사실 인덜전스 같은 인기 밴드의, 더구나 이번처럼 대박난 앨범인 경우에 공동작곡가로서 받는 인세에 비하면 영화 일은 수입이 상대적으로 낮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페어팩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는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제이가 받아들인다면 커리어의 범위를 넓혀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한숨을 뱉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벌써 편집중이시라면서 아직도 음악을 맡길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나요……?" "아, 사실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대답을 조금 주저한다. "……미리 작업을 조금 진행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 파스칼과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스케줄도 좀 안 맞았고……." "……." "하지만 대타라는 개념은 아니예요. 그 사람 스타일은 내 마음에도 그다지 들지 않았었거든." 그는 네,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누구를 먼저 컨택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할 의향이 있는 것인가였다. "만약 하게 된다면 본격적인 작업은 언제쯤 해야 할까요?" "편집이 다 끝나려면 대충 서너 달 정도 남았어요. 물론 좀더 걸릴 확률이 높지만." 서너 달 후라면……. "그 즈음이면 아직 8, 9월인데,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무슨 다른 스케줄이라도?"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묻는다. "투어에 제가 같이 가줘야 해서요." 누구의 투어인지는 설명하지 알아도 이미 알리라 생각했다. "설마 투어 스탭으로?" 의아하다는 표정.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나이젤이 많이 힘들어해서 제가 옆에 있어주기로 했습니다." "언제까지?" 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 그 옆에 있어야 할 것이냐 도대체. 자신도 모른다. "이런 말 하면 미안하지만, 언제까지나 도와줄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더구나 이번 앨범 진행이 그런 식으로 됐는데……. 나이젤의 상황은 이해하지만 나이젤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에요. 그 상황은 충분히 알아요.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영원히 그 상태에서 못 일어났으리라는 것도 알고." "……." "하지만 이번 앨범을 끝으로 서로 갈라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음 앨범도 또 이런 식으로 진행할 순 없을 것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면 나이젤도 상태가 나아질 거고. 그러면 오히려 더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 못할 것 같은데? 이건 정말 막다른 골목까지 온 거라고 보이거든. 제3자의 눈에는……." 그는 대답없이 물이 담긴 유리컵의 표면을 뽀드득뽀드득 손가락 끝으로 더듬고만 있었다. 페어팩스는 남의 일에 너무 주제넘게 나섰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헛기침을 서너 번 했다. "자, 혹시 오늘 시간이 괜찮다면 파스칼과 잠깐 같이 만나는 건 어떨까? 시간은 많이 뺏지 않을테니." "LA에 계신 것 아니었나요?" 조심스럽게 그가 물었다. "편집하느라고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다고 해서 잠깐 좀 쉬라고 런던으로 데려왔어. 지금은 친구네 집에 저녁 먹으러 갔고. 이 동네에 있어요. 나올 때 나한테 전화를 하겠다고 했는데……." 때마침 페어팩스의 전화벨이 울렸다. 응. 알았어. 두 마디로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제 나갑시다. 곧 출발한다니까." 바깥에 나오니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불그스름한 밤안개는 여전히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차는 가져왔어요? 집은 어디쯤이에요?" "아, 차는 안 가져왔어요. 버스를 타던지 택시를 불러서 갈 생각이었던 터라…….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거든요. 파딩턴Paddington 역 근첩니다." "마침 잘 됐네. 그러면 이따가 내가 데려다줘도 될 것 같은데. 파스칼과는 오랜만일테니 얼굴만 보고 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양할 땐 사양하더라도 일단은 파스칼에게도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럼 난 차를 꺼내올테니 이 앞에서 잠깐만 기다려줘. 그 동안에 파스칼이 올 것 같으니까." 그리고 페어팩스는 자신의 차를 세워둔 건물 뒷쪽으로 걸어갔다. "창문 좀 잠깐만 열자." 불그레해진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며 명주가 말했다. "멀미 날 것 같아?" "약간." 류신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사가 먼저 알아서 버튼을 눌러 뒷좌석 양쪽의 창문을 열었다. "아예 활짝 열어주세요." "네." 반주 치고는 좀 과하게 마신다 싶더니 명주는 취기가 이제서야 오르는가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었는데, 나름대로 긴장이 풀어지자 술기운이 확 퍼지는 듯 싶었다. "으이크." 애비 로드 스튜디오 앞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받고 차가 멈추어서자 명주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끙 소리를 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차가 빨리 달리면 차라리 나을텐데 천천히 가니까 좀 어지럽네." 주택가라 제한 속도가 매우 낮았고, 횡단보도 주변에는 차선부터 이미 속도를 낮추라는 의미로 지그재그로 그려져 있었다. 몇 블록 지나 대로로 들어갈 때까지는 속도를 전혀 낼 수 없었다. "견딜 수 있겠어?" "괜찮아. 그냥 네 앞에서 약한 척 좀 하는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기분은 좋지만 양심에 찔려." 명주는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비비 틀어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앗!" 목걸이가 무릎으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바닥으로 착지했다. 뒷좌석 천장의 등을 켜고 류신은 허리를 굽혀 목걸이를 주워들었다. "뒤에 고리가 끊어졌는데? 손힘 한번 엄청나군." "아니야. 그 고리가 허술한 거야." 류신은 끊어진 고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다지 튼튼하지는 않아 보인다. "어떻게 이리 약하게 만들었지?" "그러게. 이만한 다이아몬드를 지탱하려면 그런 정도 가지고는 안 됐을텐데." "무거워?" "아니, 그건 아닌데 심리적인 무게가 장난이 아니야. 내가 대체 얼마짜리 목걸이를 걸고 있는 거냐 생각하면 목이 절로 앞으로 푹 꺾이는 느낌." 류신은 훗, 하고 웃으며 가방 속의 손수건을 재빨리 꺼내 목걸이를 깔끔하게 쌌다. "내일 내가 보석점에 가서 수리해다가 갖다주지. 내가 직접 수리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네 맘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됐어. 내가 갈게." "아니. 어차피 근처에 들를 일도 있고 가서 한 마디 해야겠어." 류신은 차내 등을 다시 껐다. 파란 신호를 받은 차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강류신." 계속 류신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명주가 말했다. "나, 좋은 마누라가 될게." "……." "아니. 정말 정말 좋은 마누라. 네 기준에서 좋은 마누라.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그냥 네 마누라라는 타이틀만 줘. 그 이상은 욕심부리지 않을게." 류신은 명주를 쳐다보았다. "나도 일이 있고 야망이 있어. 일단 지금은 내 일이 더 바쁘고 소중하니까 너한테 목매고 있을 여력도 없을 거야. 너는 굳이 결혼해야 한다면 나와는 하기 싫다고 했지만, 나는 굳이 결혼해야 한다면 너랑 하고 싶어. 그게 편리해." "나중에 맑은 정신일 때 다시 얘기하자." "아니야. 이게 내 진심이야. 전에 내가 했던 헛소리들은 다 잊어버려. 그냥 식장에 와서 신랑 노릇만 해줘. 그 외에 네가 어디 가서 누구랑 무엇을 하고 다니던지 일체 상관하지 않을 거야……." "……." "아예 관심조차도 두지 않을게." "……." "……각서를 써도 좋아." 떨리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류신은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깃이 마구 흩날렸다. 문짝에 붙은 버튼을 눌러 창유리를 조금 올리고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아무 대꾸 없이 계속 바깥에만 시선을 고정해두었다. 저만치 앞에서 기다리던 차창밖 풍경이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곧 뒤로 밀려나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흐르는 시간은 다가오는 매순간을 과거로 만들어버린다. 큰길로 들어서자 조금 속력이 붙은 차는 이제 베이커 스트리트Baker Street로 접어들었다. 영업 시간이 끝난 상점들에는 하나둘씩 불이 꺼지고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제이!" 스튜디오 건물을 빙 둘러싼 흰색 담장옆, 가로등 바로 밑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파스칼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딴 생각에 골똘히 빠져있던 휘우는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이 크게 불린 다음에야 알아채고 인사를 되돌리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간신히 걸을 수는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이 정확하다면 아까 검은색 재규어 안에 앉아 있던 사람은 강류신이었다.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자신이 그 녀석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파딩턴 역 부근 주택가에 있는 자신의 플랫flat에 돌아온 것은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 말재주가 좋은 두 사람과 어울리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가 주었다. 사실 오늘 같은 날은 혼자 남는 것이 좋지 않다. 생각이 한 군데로 쏠려서 어디까지 치달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맨처음 눈길이 닿았던 순간 하늘이 번쩍 갈라지는 듯한 놀라움. 애틋한 반가움. 그리움. 질투. 아픔. 그리고 곧이어 모든 감정의 편린을 일시에 덮어버린 두려움. 두렵다는 생각이 들고나서는 더 이상 아무 다른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 아직까지도 주기적으로 악몽에 시달리고 문득문득 심장이 쿵쾅거려서 제대로 숨쉬기가 힘들 정도니까. 이런 상황은 상상하는 것조차 피해왔었다.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과 실제로 다시 만날 것을 바라는 건 다르다. 상상 속에서조차 그 녀석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원래부터가 다시 만나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혹시나 만날 수 있더라도 만나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계약'의 기본 전제조건이었고 어길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10년의 힘든 세월이, 언어조차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홀로 뚝 떨어져 항상 무엇이든 혼자서 결정하고, 해결하고, 헤쳐나가야 했던 외로운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얼굴들. 마지막으로 봤던 형의 끔찍한 모습과 노인의 악마같은 웃음. 다시금 상기하자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죽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죽음으로 도피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벌이었고 피붙이를 그런 나락에 밀어넣은 자신에게는 과분한 처사였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괴로운 기억을 송두리째 끌어안은 채 형벌처럼. 두고두고 자신을 책망하며. 인생을 바꾸어놓은 대단한 연애 사건의 맨밑바닥 마지막 남은 것은 결국 후회와 두려움이란 말인가. 휘우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것만은 아니다. 그것 이외에 불쑥 기억의 자락이 닿을 때마다 따뜻하기도 하고 울컥 가슴저리기도 하는 무언가가 솟아오름을 알고 있다. 다만 그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을 뿐이다. 과거의 일이고 이미 돌이킬 수도 없다. 류신에게 자신은 죽은 사람이고 자신에게도 거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얄궂은 노릇인지. 지금쯤이면 공부 다 마치고 당연히 한국에 돌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가. 10년만에 이토록 난데없이.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괜찮을 줄 알고 여유 부리던 시점에 누군가 '아니야, 임마. 착각하지 마!' 하며 뒤통수 한 대 후려갈기듯이. 그는 입고있던 옷을 미련처럼 훌훌 벗어 던지며 욕실로 갔다. 일 외에 이렇다 할 친구도 없고 손님 한 명 들이지 않는 혼자 사는 곳이지만 일단 방은 두 개. 그 중 하나는 자신의 침실이고, 나머지 방 하나는 신디사이저와 피아노, 기타 등의 악기와 음향기기들이 들어차있는 작업실이다. 거실과 부엌도 꽤 넓다. 위치도 좋고 플랫 자체도 고급인 편이다. 넓고 편리할 뿐 아니라 인테리어도 말끔하고 세련되게 잘 정돈되어 있다. 물론 처음 거의 맨몸으로 런던에 도망쳐오다시피 했을 때는 이런 집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살 곳을 찾는 것 자체부터가 몹시 어려웠고 간신히 구질구질한 변두리 무허가 건물의 침대 하나 놓을 자리도 없는, 붙박이장 수준의 쪽방에 끼어살 수 있게 된 다음에도 얼마 안 되는 집세나마 마련하기 힘들어 때때로 끼니 거르기가 다반사였다.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힘겹게, 힘겹게 여기까지 왔다. 투명한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샤워부스 안에서 일부러 요란하게 물소리를 내며 샤워를 하고 나와 새 로브를 꺼내어 팔을 꿰고 스킨을 바르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류신은 예상했던 대로 너무나 멋진 남자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이미 당당한 한 몫의 남자였던 녀석이다. 우아한 유선형의 클래식 카 안에 파리가 낙상할 듯한 고급 수트를 입고 궁궐밖에 행차한 왕자님처럼 앉아있는 모습은 자신이 막연히 어떠하리라 떠올려보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상상 속의 모습보다 더 멋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휘우는 스스로 인정하고자 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류신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으려 애쓸 뿐. 한번 마음의 문을 열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쏟아져나올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제어가 불가능하니까 미리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내지 않으려, 떠올리지 않으려 항상 신경을 쓰다 보니 오히려 언제나 생각하고 있게 된다. 지겨울 정도로 집요하게. 사소한 자극에도 생각의 끝은 어김없이 그곳으로 향한다. 잠복기의 병원체처럼 머릿속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자리잡은 채 한 순간도 자신을 놔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지 않아, 하고 속으로 다짐한다. 너를 떠올리지 않아. 그리워하지 않아. 너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거야.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된 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너에 대해선 이미 오래전에 모두 잊었어. 왠지 시야가 그렁그렁 희미해지는 것 같아 서둘러 스킨병을 기울여 손바닥에 덜다가 세면대와 바닥에 주루룩 쏟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던가 보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서 병을 쾅 하고 내려놓고 스킨이 묻은 두 손바닥으로 양볼따구니를 책망하듯 세게 찰싹 때렸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하고 광대뼈가 얼얼하니 코가 시큰할 만큼. 젖은 머리를 말리고 욕실을 나서다가 뜬금없이 진작 성형수술이라도 해버렸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할 마음이 털끝만큼이나마 있었다한들 돈도 없었지만. 게다가 이제는 이미 좀 많이 늦어버렸고. 그런데 뜬금없는 이 생각이 곱씹으면 씹을수록 영 뜬금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불안한 마음에 휘우는 다시 거울 앞에 와 섰다. 10년 전과는 자신의 얼굴이 많이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설마하니 만에 하나 오늘같은 일이 또 생긴다면, 만약 거꾸로 저쪽에서 이쪽을 보게 된다면 그 녀석은 자신을 알아볼까? 워낙 눈썰미 있는 녀석이라 안심할 수 없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격적인 색으로 물을 들일까? 그 정도로는 통할 리도 없겠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볼까?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흘에 한번 면도해도 별 문제없을 만큼 잘 나지 않는 수염, 조금 현실성이 없다. 아니. 이런 생각할 필요 전혀 없을지도. 그 녀석은 자신을 잊었을 것이다. 언제나 합리와 효율을 부르짖던 녀석 아닌가. 죽은 놈은 죽은 놈으로서 접어두고 잘 살고 있겠지. 아마도 차 안 옆자리에 아름답게 앉아있던 그녀와. 휘우는 욕실문을 부서져라 쾅 닫고 거실로 나왔다. 바닥에는 자신이 벗어 내던진 옷가지들이 탈피한 뱀의 허물인양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는다. 모든 것을 태워 날려버렸으면 그걸로 끝. 지금은 현실이 중요했다. 당면한 일들을 수습하는 것만도 큰일이다. 마음이 약해져 떠들썩한 두 사람과 예정에 없던 시간을 보낸 결과 가슴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지만 덕분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 둘에게 가장 절실한 공통의 화제라면 지금 편집 진행중인 그들의 영화였고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딴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둘의 대화에 열심히 맞추는 척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그들의 제의에 OK를 한 셈이 되어 있었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 페어팩스의 말대로 인덜전스의 이번 앨범은 발매 전부터 업계 소식통들 사이에 좋은 소문이 두루 퍼져 휘우에게는 프로듀싱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케줄 관계상 계속 거절을 하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맡아달라는 제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튜디오 뮤지션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작업이어서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오던 만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돈을 안 준다고 하더라도 하고 싶었다. 10년 가까이 사생활이라고는 전혀 없이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만 전념한 결과 나름대로 궤도에 들어섰고 돈도 웬만큼 모았다.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1, 2년쯤 전혀 일을 하지 않아도 집세 걱정없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충분히……. "아, 차라리 이 참에 어디든 처박혀서 좀 쉴까." 휘우는 답답한 마음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언젠가부터 혼잣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것조차 안 하면 한국어를 쓸 일이 없다. 10년 동안 그 누구와도 한국어로 대화해본 적이 없다. "한적한 시골 같은 데. 응? 어떨까?" 혼자서 묻고 혼자서 대답한다. "몇 달만이라도 조용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 쉰다는 말보다는 숨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당분간. 당분간만. 지금의 난감한 스케줄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발상이지만, 원래 자신의 입지라는 것이 남들과 같지 않지 않은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오늘같은 우연이 또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해도 류신이 지금 런던에 있다는 것을 몰랐으면 또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그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녀석이 자신을 다 잊어버려 코앞에서도 알아보지 못한다한들 자신의 입장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다. 일단 급한 일들을 빨리 마무리짓고 향후 일정을 조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휘우는 TV를 켰다. 잠이 올 때까지 시간을 때워줄 단 하나의 친구. 시시껄렁한 토크쇼와 뉴스와 재방송 드라마들 사이 '채널 4'에서는 자체 제작한 영화가 방송되고 있었다. 칠흑같은 검은색의 헝클어진 머리에 약간 길쯤한 얼굴. 매부리코. 사파이어 블루 아이즈. 남자배우의 얼굴이 낯이 익다고 생각하고 가만 보니 바로 오늘 얘기가 오갔던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조나산 배스커필드다. 지금보다 인상이 훨씬 앳되어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가 헐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 아직 영국에서 브라운관과 스크린과 연극 무대를 오가며 활동하던 시기에 찍은 것 같았다. 영화의 스토리는, 모종의 사고에 의한 기억상실증으로 과거와 단절된 젊은이가 기억에 없는 과거에 얽힌 미스테리들을 조금씩 파헤치며 기억을 잃기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 만나고 끔찍한 사건이 있었음을 발견해나가다가 거의 진실이 밝혀지기 직전에 조사를 중휘우버린다는 것이었다. 시청자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지만 주인공만 모른다. 그래도 주인공이 겁쟁이로 보인다기보다는 절로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는 게 이 영화의 묘미랄까, 요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는 자신의 것이라 볼 수 없으므로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망령에 얽매여 새로이 주어진 삶을 망치지 않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인 듯 싶었다. 어렴풋이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을 안고 영화를 보면서 휘우는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영화가 다 끝나고 이제는 더 이상 볼래야 볼만한 것이 없어진 지경에서도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휘우는 거실 창문을 빠꼼히 열고 야경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반지 안쪽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한가로운 금요일 오후. 올드 본드 스트리트의 보석상 스마이드 앤드 선즈Smythe & Sons. 호화로운 소파에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팔꿈치를 팔걸이에 걸치고 느슨히 앉아 유리문 바깥을 바라보며 류신은 주인인 미스터 스마이드가 옆에 와서 서도 모를 정도로 딴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작은 헛기침 소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제서야 깨닫고 문득 위를 쳐다본다. 류신은 스마이드가 건네주는, 100도 정도의 각도를 이루며 오픈되어 있는 조그마한 검은색 벨벳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어머님께서 주문하셨을 때는 목걸이 안쪽에 신부 이름을 새겨달라고 하셨었는데, 이번에 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반지를 주문하실 때는 아무 말씀 없으셨지요." "……." "일단은 통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신부 되실 분이 티아라tiara 때문에 여기 나오셨을 때 여쭈어 보았더니 그렇게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남자분들은 아무래도 그런 걸 잘 놓치시거든요." 류신은 케이스에서 엄지 손톱만한 오렌지빛 다이아몬드와 좁쌀만한 클리어 다이아몬드 알갱이들이 촘촘히 박힌, 목걸이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꺼내어 불빛에 플래티넘 링의 안쪽을 살펴보았다. 『Myungjoo Park Ghang』.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보석상 주인이 살짝 류신의 눈치를 살핀다. "아닙니다." 류신은 케이스를 탁 닫고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반지와 함께 주문했던 귀걸이와 팔찌, 약혼식 때 쓸 티아라 등은 완성이 되는대로 명주에게 연락해서 보내달라고 하고 류신은 가게를 나섰다. 그 다음에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새빌 로우Savile Row의 단골 양복점까지 걸어가서 월요일에 맞추었던 수트 세 벌과 약혼식에 입을 턱시도의 가봉을 하고 그 근처의 셔츠 전문점에 들러 완성된 셔츠 열두 벌을 확인한 뒤 호텔로 배달을 부탁했다. 이 샵은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절대 기성품 라이센스를 내주지 않고 국내든 해외든 지점도 만들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다. 300년 이상 오로지 이 가게 한 군데에서만, 전 과정을 숙련된 기술자들의 손으로 고집스럽게 이끌어오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의 셔츠는, 입고 싶은 사람이면 영국 왕자라도 최소한 한 번은 샵을 직접 방문해 치수를 재두어야 하는, 한 벌 값이 웬만한 브랜드의 셔츠 몇 벌을 합친 정도가 되는 최고급 수제품이다. 여기서 만든 셔츠밖에 입지 않는 류신은 일년에 한두 차례 이 곳에 들러 한꺼번에 여러 벌씩을 맞추거나 전화로 주문을 해서 대서양 건너 공수해다가 입거나 하고 있었다. 이 근처에서 볼일은 이제 다 끝났는데 시티City에서의 다음 약속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 출장기간도 이제 다 끝나고 런던에서 처리해야할 일들도 모두 마무리되었다. 내일이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간다. 류신은 천천히 걸어 소더비 경매장 근처의 안티크 시계점에 들러 안을 구경하다가 전부터 찾고 있던 1947년형 한정판 투톤two-tone 롤렉스를 샀다. 요즘은 이런 빈티지 시계들을 모은다. 다른 수집품에 비해 부피가 작아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는 면이 일단 좋다. 거실 한구석에 콜렉션을 주욱 늘어놔도 될 정도의 간단, 소박한 미덕도 갖추고 있다. 사봤자 활용도 못하고 금고에만 쟁여놓는 수준의 지나친 고가품은 아직 류신의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예전과 비교해 자신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셈이다. 검도도 아직 하고 있고 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주말에 시간이 날 때면 모터싸이클도 계속 탄다. 종목을 바꿔가며 항상 뭔가 특별한 컨셉의 물건들을 수집하고, 만들고, 심심하면 전자 제품이나 기계 같은 것들을 뜯어서 살펴보고 재조립하고, 여전히 자신이 사치를 부린다는 의식조차 전혀 없이 지독하게 사치스럽고, 유난스레 깔끔을 떨고, 친구를 가린다. 전혀 변함이 없다. 어쩌면 사람은 근본은 결코 바뀌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어떠한 큰일을 겪더라도. 아마도 근본까지 흔들릴 정도로 인생의 큰 쓴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나름대로는 커다란 상처라고 생각했던 일생일대의 사건도 변함없이 부유하고 변함없이 빈틈없는 세강그룹 강성철 회장 손자 강류신의 관성을 이겨낼 만큼 대단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상관없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건 대단하지 않은 일이었건 시간을 되돌려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죽은 녀석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다 바칠 수 있다는 마음 또한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으니까. 류신은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천천히 벌링턴 아케이드Burlington Arcade로 들어섰다. 차를 세워둔 길 건너 알링턴 스트리트Arlington Street의 주차장은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휘우는 그린 파크Green Park역의 계단을 두어 칸씩 힘차게 뛰어오르며 약속 장소를 향해 뛰다시피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올버말 스트리트Albemarle Street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페어팩스와 파스칼과 늦은 점심을 같이 하며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하기로 했는데 이미 약속 시간에 늦을락말락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뮤지션들은 대체로 올빼미 생활을 하는 어둠의 자식들이라 평소 한참 작업할 때 같으면 오후 두 시인 지금은 오전 열 시 정도의 느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휘우는 오늘 따라 아침 일찍부터 바빴다. 약간 전문가 취향인 음악 잡지에서 인덜전스에 대한 기사를 크게 실으면서 웬일인지 모르지만 휘우와도 따로 인터뷰를 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녹음 작업의 기초공사가 대부분 이루어졌던 나이젤의 홈 스튜디오에서 두 시간 가량 진행됐다. 사진까지 찍어가야 한다기에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뒷모습만 실어달라고 요구하자 대뜸 순순히 응해주어서 별 것 아닐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인터뷰가 길어져서 휘우는 좀 놀랬다. 기껏해야 몇 마디 거들고 보충설명하는 수준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터뷰어가 당혹스러울 만큼 세세한 것까지 휘우 개인에게 물어온 것이다. 중간에 사정 얘기를 하고 재촉해, 끝나자마자 서둘러 복잡한 시내를 가장 빨리 주파할 수 있는 지하철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약속 시간에 맞추지 못할 정도로. 휘우는 약속에 절대 늦는 법이 없다. 이 일을 시작한 이후 어떤 경우든지 시간을 지키지 못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초조하게 피카딜리 라인을 따라 걸어 올라와 알링턴 스트리트 입구 앞의 횡단보도에 섰다. 날은 잔뜩 흐린데도 휘우는 굳건히 굵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짙은 베이지색 트위드 재킷 속에 흰색 티와 겹쳐 입은 얇은 흑백 스트라이프 후드 티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안으로는 흰색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써 얼굴 윗부분을 가렸다. 여차하면 얼굴 아랫부분까지 가릴 예정으로 가방 안에 마스크까지 갖고 나왔지만 비가 올 듯한 이런 날씨에 선글라스도 웃긴데 그 정도까지 하는 건 좀 코미디 같았다. 지명수배된 범죄자도 아니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휘우는 신호등만 쳐다보고 있다가 삑삑 신호음과 함께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귀기울여 보니 삑삑 소리는 신호등뿐 아니라 자신의 휴대폰에서도 나고 있었다. 무심코 청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휘우는 아차 하며 대각선으로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은색 프라다 크로스백에서 요란히 울어대는 휴대폰을 꺼냈다. "Hello―" 전화기를 귓가에 갖다대고 무심코 정면에 시선을 주며 걸음을 재촉하던 휘우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손에서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요 며칠 동안 내내 자신을 잠못 이루게 하던 장본인인 그 녀석이 바로 맞은편에서 길을 건너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귀신을 본 듯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순간적으로 지구가 자전을 멈추고 시간도 멎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동작 중지. 지나가는 차들도. 구름도. 바람마저 빛을 잃고 소리도 잃고 돌처럼 굳었다. 자신과 강류신 그 녀석만 빼고. 삽시간에 생기를 쑥 빨린 채 진공상태가 된 세상. 다리가 후들거려 철푸덕 주저앉을 것 같은 자신을 가까스로 가다듬고 휘우는 애써 동요하지 않은 척 평정을 유지했다. 심장이 가슴을 찢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들썩들썩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들통나서는 안 된다. [――제이? 제이?] 아아. "……아, 네." 세상이 다시 북적북적 소란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우는 태연함을 되찾았다. [갑자기 아무 말이 없어서 끊어진 줄 알았어요. 지금 어디에요?]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파스칼이었다. "네, 거의 다 왔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휘우는 거의 뛰다시피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지금 나랑 스티븐이랑 같이 있는데 우리도 좀 늦어지고 있어요. 미안해요. 먼저 도착하면 우선 안에서 조금만 기다려줘요. 예약은 내 이름으로 했어요.] 알겠다고 대답하고 휘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가방 안에 다시 넣는 척 하면서 슬쩍 뒤를 쳐다보았다. 류신은 약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어쨌든 되돌아오지 않고 길은 끝까지 건너갔나 보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휘우가 빨리 걷기 시작하자 류신은 무슨 생각인지 다시 횡단보도 앞에 섰다. 길을 건너올 모양이다. 휘우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경보라도 하듯이 속도를 내어 걷는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고 류신이 엄청난 속도로 길을 건너기 시작한 순간 휘우는 방향을 꺾어 샛길로 들어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구불구불 샛길을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틀며 계속 걸었다. 샛길이라고 해봐야 이 곳은 모두 번화가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한참을 무작정 걷다 보니 다시 도버 스트리트Dover Street로 들어서게 되었다.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돈 셈이다.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휘우는 큰 길쪽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 순간, 두리번거리며 저 아래쪽으로부터 방향을 꺾어 걸어 올라오는 류신이 보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둘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치는 건 확신범이 될 뿐이다. 휘우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목적지인 레스토랑을 향해 걸었다. 뒤에서 류신이 점점 가까워오는 것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폭발이라도 해버릴 듯 쿵쾅거린다. 차라리 냅다 뛰었으면. 숨이 턱에 닿도록 마구 내달리는 편이 이 근질근질 두근거리는 상황보다 견디기 쉬울 것 같았다. 온몸의 촉각이 곤두서서 등 뒤로 류신이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몇 발짝 남지 않았다. 다섯. 넷. 셋. 둘― "제이!" 휘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이!" 휘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파스칼과 페어팩스가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요? 바로 옆이야." 그제서야 옆을 돌아보았다. 아담한 가게 문앞 조그만 하얀 간판에 꾹꾹 눌러 새겨지듯 쓰인 검은 글씨. 『Moirai』. 만나기로 약속한 레스토랑이 바로 이곳이다. "어딜 그렇게 도망치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가요? 아까부터 불렀는데 전혀 못 들었――, 어?" 파스칼의 시선이 휘우의 어깨너머 뒤에 머물렀다. 휘우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되돌렸다. 류신과 눈이 마주치기 바로 직전에. 그리고 휘우로서는 굉장히 놀랍게도, "이런, 미스터 강! 이런 곳에서 다 만나는군요!" "네. 안녕하세요." 파스칼은 류신과 구면인 듯한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페어팩스와 자신에게 류신을 소개시켜준다. 페어팩스와 류신이 간단한 초면 인사와 악수를 주고받는 동안, 휘우는 세차게 뛰는 가슴을 붙잡아 누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이지 않게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고 나자 파스칼이 류신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가까스로 조금은 의연한 표정을 지어낼 수 있었다. '아주 유능한 작곡가이자 요즘 가장 촉망받는 뮤직 프로듀서'라는 파스칼의 말에 휘우는 류신의 눈빛이 반짝하는 것을 느꼈다. 선글라스 너머로도 확연히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따갑게 얼굴에 꽂혀오는 시선. 뭔가를 부지런히 탐색하는 듯한. 차르륵차르륵 하드디스크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과연 지금 저 머리통속에서는 어떠한 연산이 펼쳐지고 있을까? 기억은 순식간에 10년을 거슬러 올라가 묘한 기시감을 끄집어냈다. 그 옛날 언젠가도 저 똑바른 시선 앞에 코너에 몰린 생쥐처럼 안절부절못했던 적이 있었다. 꽤 여러 번씩이나. "……제이는 이번에 개봉할 우리 영화의 음악을 맡아줄 예정이랍니다." "아, 그러시군요." 류신은 웃으며 휘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니, 별로 반갑지 않아.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은 생전 없을줄 알았거든. 휘우는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은 채 류신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가, "……아, 저도 반갑습니다." 문득 싸해진 분위기를 깨닫고 정신을 추스려 그 오른손을 맞잡았다. 자신의 존재 전체를 잡아채어 끄는 듯한 크고 뜨겁고 억센 손. 손바닥에는 거칠고 딱딱한 굳은살이 여전했다. 칼을 다루는 남자의 손이다. 휘우는 그 이상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서 약속이 있으신가요?" 파스칼이 류신에게 물었다. "아니요. 모처럼 시간이 남아서 구경이나 할겸 거리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라는 이쪽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류신은 씩 웃으며 휘우를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를. "그럼 점심식사는? 하셨나요?" 류신은 손목시계를 슬쩍 내려다보는 척 하더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아직 전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는 것은 거짓말과 페이크. 하긴 그 옛날에도 대외적인 제스추어는 제법 능수능란했던 녀석이다. "혹시 특별한 약속이 없으시면 저희와 같이 하시겠어요?" 파스칼은 페어팩스를 쓰윽 의미깊게 한번 쳐다보고 다시 류신에게 시선을 향했다. 보통 인간의 심장은 자신의 주먹과 비슷한 크기라고 한다. 휘우가 그때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본 것과 그 사실은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안 돼. 절대 안 돼. 파닥파닥 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꼭 틀어잡고 제어하려는 듯이 불끈 쥔 손. ――안 된다고 말해. 시간이 없다고 말해. 덜덜 떨리는 손끝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휘우는 더욱 더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제발. 부탁이야. 손바닥에 손톱이 깊숙이 파고들어 피가 맺힐 지경이 되었어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제가 끼어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심장이 벼랑 끝으로 뚝 떨어져 거친 파도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여기는 제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에요. 그도 항상 늘 보던 지겨운 얼굴이 아닌 새로운 손님을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페어팩스가 류신을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휘우는 약간 얼이 빠진 채 멀거니 세 명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이?" 파스칼이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부르자 휘우는 그제서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뒤를 돌아본 류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조금 숙이고서. 가게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오픈한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는지 깨끗했다. 지난 번에 이 거리에 왔을 때는 못 보던 곳이라고 류신은 생각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류신은 생각났다는 듯이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명함집을 꺼냈다. 역시나 자유로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명함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파스칼 듀블라시뿐이었다. 듀블라시는 단순히 창작하는 아티스트라 보기에는 상업적인 면으로도 두뇌 회전이 빠르고 잇속도 잘 챙기는 사람으로 류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명함이라는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짓던 나머지 두 명을 바라보며 음악하는 사람들은 명함 같은 것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류신은 잠깐동안 했다. 휘우가 살았어도 그랬겠지.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간 뒤 테이블 토크가 진행되는 동안 류신은 맞은편에 앉은 제이 슬레이니라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여기까지 따라오게 만든 원인인 그는 한 손으로 류신의 명함을 들고서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특별히 한쪽 면은 영어로, 다른 한쪽 면은 한글로 되어있는 명함을 주었다. 받은 명함을 뒤집어서 한글로 되어있는 면에 얼핏 눈길을 좀 주는 듯 하더니 어깨에 메고 있는 작은 크로스백에 집어넣는다. 왜 선글라스를 벗지 않을까. 무례하기 짝이 없게스리 모자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고. 얼굴을 보고 싶은데. 얼굴을. 좀더 자세히. "미스터 강은 언제 뉴욕으로 돌아가십니까?" 듀블라시가 물었다. "내일 돌아갑니다. 밤 10시 비행기로요." "그럼 런던에 오신 용건들은 이제 거의 마무리가 되셨겠군요?" "네, 그래서 모처럼 여유를 부리고 있었죠." "혹시 호젓한 시간을 보내시는 걸 저희가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마침 혼자 놀려니 좀 쓸쓸하던 참이었는데 정말 반가웠습니다." 류신은 마치 듀블라시가 아닌 제이에게 대답하듯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참. 전에 말씀하셨던 다음 영화는 현재 어느 정도나 진행된 상태인가요?" 류신이 묻자 듀블라시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아직 한참 대본 수정중이죠. 일단 로케이션 헌팅 정도 하고 있는 중이고 캐스팅은 현재 몇몇 배우들과 논의중인 상태이구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럼 본격적인 작업은 대충 언제 시작됩니까?" "아무래도 지금 편집중인 게 다 정리되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겠죠. 일단 올해 말까지 대본 수정을 모두 마칠 계획입니다." "그럼, 다음 영화도 역시 이번처럼 두 분이 같이 제작할 계획이신가요?" 류신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묻자 듀블라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하면서 매우 기분 나쁘게도 저희 둘의 팀웍이 상당히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 한 계속 함께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별탈없이 넘어갔다고 해서 다음 번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겠죠." "어이,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외람된 말씀이지만 다음 번에도 두분 팀웍이 깨질 염려는 없어 보입니다." 류신은 두 사람과 적당한 수준의 대화를 주고받는 내내 제이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제이는 그 시선이 무척 의식되는 듯 불편하게 어깨를 틀고 무의식중에 이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 눈길을 돌려버리기를 반복한다. 겉보기와는 달리 수줍음을 타는 성격인가.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사람. 처음 길을 건너다 이 남자와 마주쳤을 때는 커다란 해머로 머리에 직격타를 맞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휘우의 유령이 나타났다고까지 생각됐을 정도로 느낌이 비슷했으니까. 카이를 처음 보았을 때에도 너무 닮아서 놀랐었는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그 느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조차 구체적으로 납득시키기는 힘들지만, 카이는 단지 닮아 '보였던' 것이고 이 사람은 마치 휘우 본인처럼 '느껴진다'는 차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왠지 자신에게 작살을 던져 정통으로 맞히고 그 끝에 이어진 줄을 끌어잡아당기는 양, 잔뜩 의식하며 보일 듯 말 듯 꼬리를 감추던 뒷태. 따라오라는 유혹처럼 달아나던 그의 뒷모습을 부지런히 쫓는 동안, 혹시 유령인지도 모른다는 망상은 점점 망상이 아닌 것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파스칼 듀블라시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커다랗게 둥실 부풀어올랐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쉬쉬쉭 바람 빠져 찌그러진 풍선 신세가 되어버렸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생각했었는데. 휘우야 네 유령이라도 보고 싶다 잠 못 이루며 주문처럼 되뇌던 그 시절에는 얼씬도 않더니 세월 이만큼 지나 느닷없이 런던 거리 한복판에 이렇게 나타난 거냐, 하고. "아, 제이. 조감독에게 지금까지 편집된 분량을 조금만 카피해서 보내달라고 했었는데 오늘 도착했어. 배우 이미지랑 전체적인 분위기 파악 정도 할만큼은 될 거에요. 그리고 이건 최종 수정된 스크립트. 현장에서 대사 몇 마디씩 빼고 집어넣고 한 건 있지만 거의 이 대본 그대로 갔으니까 이것도 한번 읽어보고." 듀블라시가 제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에게 작은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그는 작고 낮은 톤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아까의 짧은 '저도 반갑습니다'에 이어 두 번째로 듣는 그의 대사.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게 좀더 길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서양인의 이름과 동양인의 얼굴. 지금으로서는 어느 나라 혈통일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왠지 네이티브 브리티쉬는 아닐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 정도. "8월말에 유럽 투어 끝나고 북미 투어 들어가기 전 휴식기간이 3주라고 했었던가요?" "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우선 주문한 음료부터 나와 각각 자리를 찾아가는 어수선한 상황이 종료된 후, 페어팩스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역시나 짧고 나직한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목소리도 휘우와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영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의 음성이 아주 다르게 들리는 사람들도 의외로 꽤 있어서 사실상 정확한 비교근거는 없는 셈이지만. 사실 휘우가 영어로 말하는 건 저답게 매우 창의적인 콩글리쉬로 따따부따 발악하는 것밖에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때가 갑자기 떠올라 류신은 자신도 모르는 새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죽은 연인을 두고 있다는 건 항상 상실감으로 가슴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다. 문득 즐거웠던 기억이 떠오르면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웃기도 한다. 만약 늘상 슬프고 괴롭기만 하다면 그건 이미 연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평생 지고 가야 할 마음의 짐일 뿐. 류신의 마음은 여전히 진행형이었고 이런 순간에 그 자신도 그걸 절실히 깨닫게 되곤 했다. "파스칼, 시간이 너무 빠듯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미리 생각 좀 해두라는 의미에서 자료를 주는 거지. 제이, 필요하다 싶은 게 더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이왕이면 내가 런던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제이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데 말을 아끼느라 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갑자기 끼여든 불청객은 빠져달라? 하지만, 이봐. 내가 이 자리에 합석한 것은 오로지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아니었다면 굳이 내가 아까운 시간 죽이며 여기 앉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당신은 대체 누구지? 선글라스에 가려져서 얼굴을 자세히 뜯어볼 순 없지만 생김새도 꽤 닮은 것 같고. 체격이나 목소리도 은근히 비슷하고. 음악을 한다는 것까지 똑같고. 특히 무의식중에 나오는 몸짓이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아주 신기하게도――― "어, 이런! 제이, 괜찮아?" "죄송합니다." "아니, 난 괜찮아요. 다행히 컵의 물이 쏟아지진 않았으니까. 근데 그 손이 왜 그래? 어디 아파요?" "저……." "아, 스티브. 나도 전에 한번 봤었는데. 가끔 그런다더라구. 피곤하거나 하면." "……." "그럼, 별 이상은 없는 건가? 진찰 받아봐야 하는 것 아냐? 뮤지션들은 손이 재산인데……." "예전에 왼손을 좀 다쳐서 그렇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지, 제이? 별안간 엄지손가락에 경련이나 마비가 올 때가 있다고." "……." ―――휘우 본인이라고 해도 통할 정도. 딱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왼손 엄지의 경련은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멎지 않았다. 한쪽 손으로 덮어 가리고 있는데도 손가락 틈새로 그 안타까운 떨림이 눈에 들어온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가방 속에 손을 넣으며 엉덩이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류신이 그에게서 미심쩍은 눈길을 떼지 못 하는 사이, 그는 휴대폰을 꺼내 귀에 대고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치 급한 전화라도 온 것처럼. "죄송합니다. 지금 나이젤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자리에 돌아온 제이는 오늘 만난 후 처음 듣는 가장 긴 대사를 총알같은 스피드로 뱉어냈다. 나이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필 지금 이 순간에 그를 불러낸 것일까. 우연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 "나이젤이? 왜? 무슨 일이에요?" 나머지 두 사람이 심상치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곧 출시될 싱글 음반 때문에……. 저도 가봐야 아는 일이라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원래 그런 것인지 지금 정말 다급하기 때문인지 굉장히 말이 빨랐고 그만큼이나 행동도 빨랐다. 잠깐 사이에 그는 이미 가게 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아, 저런! 저걸 놓고 가신 것 같은데요." 그가 아까 듀블라시가 건넸던 자료들을 두고 간 걸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류신이었다. "제가 전해드리고 오죠." 류신은 다른 두 명의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쇼핑백을 낚아채어 가게 밖으로 나왔다. 제이는 아직 많이 간 편은 아니어서 류신은 그를 부르지 않고 그냥 그 뒤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 등을 두드렸을 때 그는 크게 헉 소리까지 내며 놀랐다. "이걸 두고 가셨더군요."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류신은 후드 속에서 조금 삐져나온 그의 머리칼을 쳐다보고 쇼핑백을 받아드는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닮음' 필드의 항목들이 계속 늘어간다. 어쩌면 단순히 닮기만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불과 20여 분전에 그는 인생 최고의 수수께끼와 맞닥뜨렸고 아직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럼 이만." "네." 제이는 이쪽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서둘러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류신은 그 뒷모습을 눈동자 속으로 빨아들일 것처럼 계속 놓치지 않고 있었다. "또 봐요." 류신이 한국말로 소리치자 갑자기 발을 우뚝 멈추는가 싶었던 그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길을 재촉했다 "손님. 다 왔어요." 콧수염을 두껍게 기른 대머리의 운전사가 운전석과 손님석 사이에 가로놓인 두꺼운 투명 플라스틱판을 똑똑 두드리고 열었다. 휘우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지갑을 꺼내 요금을 지불했다. 운전사가 영수증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됐어요. 잔돈은 가지세요. 손짓으로 거절하고 굴러떨어지듯이 차에서 내려왔다.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뭐라고 꾸며서 둘러댔는지 레스토랑에서 어떻게 뛰쳐나왔는지 블랙 캡을 언제 잡아탔는지 몽롱한 꿈속처럼 아무 기억도 없는데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어이, 이봐요!"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고집센 런던 사투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휘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거 뭐요? 저거 가져가요!" 뒷좌석에 오롯이 놓여있는 쇼핑백을 가리키며 말한다. 오늘 두 번이나 버려졌던 가엾은 녀석. 그러고 보니 결국 원인은 너였어. 그 원인이 영 원망스럽기라도 하다는 듯이 휘우는 거실 소파에 던져 놓은 채 몇 시간 동안이나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서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이 무위로 돌아간 후 차라리 저거나 들춰보자 하고 쇼핑백 안의 자료들을 꺼냈을 때 휘우는 그 밑바닥 구석에서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물건을 발견했다. 검은색 벨벳의 작은 상자. 상자 바닥 한켠에는 금박으로 『Smythe & sons』 라는 상호가 붙어 있었다. 휘우는 당황스런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뚜껑 안쪽에도 역시 똑같은 글자체의 상호가 보석상의 전화번호와 주소까지 함께 조그맣게 찍혀있었다. 그리고 상자 안의 곱게 물결치는 공단 천 위에 자리잡고 놓여있던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반지 하나. 반지는 작았지만 반지에 달려있는 다이아몬드는 결코 작지 않았다. 고급스럽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보나 몇 캐럿인지 짐작도 안 되는 희한한 빛깔의 다이아몬드 알로 보나 링 표면에 다닥다닥 모래알처럼 달라붙어있는 다이아몬드 알갱이들로 보나 이게 보통 비싼 반지가 아니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파스칼이 여기다 넣어놓고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빨리 연락해줘야겠다 생각하던 순간, 휘우는 이 반지의 주인이 파스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은색의 링 안쪽에 새겨진 이름. 『Myungjoo Park Ghang』 순간 뱃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솟아오르는 것 같아 휘우는 자신도 모르게 반지를 내동댕이칠 뻔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반응에 그것보다 더욱 거센 강도로 경악했다. "나쁜 놈!" 그것이 정확하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물론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자기 마누라에게 선물할 반지를 그 녀석이 어쩌다가, 그리고 언제 자신의 쇼핑백에 떨구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한참을 서성거리며 고민하다가 휘우는 침실로 가서 침대 옆 협탁의 맨 아랫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 주저하다가 그 안 깊이 모셔져있는 초록색 주머니를 꺼냈다. 가느다란 줄로 입구가 굳게 여며져 있는 제법 뚱뚱한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휘우는 잘 알고 있었지만 주머니를 열어볼 엄두도 내지 못 했다. 작은 은색 반지 하나를 몇 겹이나 꽁꽁 싸매 감싸고 있는 그 뚱뚱한 천과 끈들을 풀어내는 것만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고는 풀어내기 전처럼 도로 꽁꽁 묶어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더욱 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다시 거실로 나와 반지를 상자 속에 얌전하게 꽂아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휘우는 집 전화기를 부여잡고 또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어 선글라스를 껴도 덜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8일만에 보는 햇살. 지난 주 내내 흐리고 안개가 자욱하니 비가 추적추적 오던 걸 생각하면 이런 드문 날씨는 마치 긴 굶주림 끝에 만나는 한 끼 식사처럼 반갑기만 했다. 휘우는 서둘러 올드 본드 스트리트까지 자신의 진녹색 랜드로버를 몰았다. 터무니없이 비쌀 것이 분명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신경쓰여 대중교통을 이용할 엄두는 감히 나지 않았다. 휴일인 만큼 편한 마음으로 가게 바로 앞에 차를 세워놓고 휘우는 문을 두드렸다. 어제 약속한 것과 마찬가지로 휴일 아침 일찍부터 일부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보석상 주인 스마이드 씨가 문을 열어주었다. 가게 안에 한 발짝 들여놓음과 동시에 반지 상자를 억지로 그 손에 쥐어주다시피 한 뒤, 분실한 반지 주인이 사례를 할 수 있도록 실명과 연락처를 적어주십사 하는 스마이드 씨의 청을 극구 사양하며 휘우는 도망치듯 가게를 나섰다. 그러나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앉으려는 순간, 누군가 뒷덜미를 확 잡아채어 휘우를 거칠게 끄집어 내렸다. 그리고 마치 형사가 범인을 체포하듯이 강한 힘으로 차체에 밀어붙여 세운다. 당황하고 놀란 순간도 잠시, 보지 않고도 휘우는 이미 직감적으로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채고 있었다. 누구일까 구태여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류신은 휘우가 엇, 하고 소리지를 사이도 없이 어제에 연이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잡아뽑듯이 벗겼다. 휘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격한 흥분과 놀라움, 그리고 온갖 자질구레한 감정들이 가득했다. "너 대체 누구야?" 그리고 눈동자 속으로 뚫고 들어갈듯 똑바로 쏘아보며 묻는다. 익숙한 한국말로. "넌 대체 누구냔 말이야?!" "……." "얼른 대답해!" 한껏 격앙된 어조. "어서!!" 토요일 아침.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고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텅빈 거리에 류신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찌렁찌렁 울린다. 소득없는 메아리. 류신이 흥분된 모습을 보여줄수록 휘우는 점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던 어제와는 달리 머릿속이 너무나 맑다. 생각이 또렷해진다. 왜 이럴까.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될 리가 없을텐데. 이상하다. 더 이상 떨리지 않아. 10년만에 만난 너와 이렇게 단둘이 마주 서 있는데. 서로 고개를 동시에 숙이면 정수리가 콩 맞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귀기울이면 서로의 심장 소리도 들리고 훅 끼쳐오는 복사열도 간질간질 내뱉는 숨결도 피부 끝에 닿아올 만큼 아주 가까이. 이 녀석 역시 더욱 멋있어졌구나. 달라진 것도 별로 없고. 엄청난 클로즈업 덕분에 절실히 깨닫게 된 지극히 당연한 사실. 하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찬찬히 눈으로만 그 사실을 확인한다. 감상은 할 수 있으되 만져서는 안 되는 전람회의 미술품을 음미하듯이. 직선과 곡선. 양각과 음각. 형태와 빛깔과 명암. 아, 그리고 냄새. 냄새의 향과 맛. 기억은 기다랗게 펼쳐져 있던 시간의 병풍을 차곡차곡 접어들여 납작하게 압축, 차원의 막을 찢고 트랙을 넘나들며 껑충껑충 마구잡이로 점프를 해댄다. 두서없이 눈앞을 스쳐가는 기억의 썸네일들. 1000배속, 10000배속 맹렬한 기세의 리와인드, 패스트 포워드와 마치 엊그제인양 생생한 리플레이의 무한반복. 이 녀석 몸속을 한 바퀴 훑고 나오는 날숨만 마시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간절히 그것을 바라던 자신이 있었다.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내가 마시고 나는 너를 위한 산소를 뱉고 싶었어. 네 집 거실에 있는 활엽수 화분들에게조차 질투했었어. 그래. 내가 그랬었어. 자꾸만 네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하는 나보다 차라리 그 나무가 네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을 때 완전히 절망했었어. 그 절망의 모든 요소, 모든 원인, 모든 결과가 가슴 한 구석을 가득 차지하고 있다. 오랜 세월 청소되지 않은 채 방구석에 데굴거리는 먼지덩어리처럼. 가벼운 먼지들이 차곡차곡 너무나 오랫동안 뭉쳐지고 다져져 이제는 어찌 해볼 도리조차 없이 마구잡이로 얽혀버렸다. "Pardon? 뭐라셨는지요?" 휘우는 최대한 냉랭한 태도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자신은 이 녀석을 놓고 더 이상 떨림과 두근거림을 느낄 자격도 권리도 근거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랬던 거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것이다. 이 녀석은 변함없는 강류신이지만 자신은 이제 김휘우가 아니므로.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Sorry I couldn't make out what you've just said. Would you be kind enough to say it one more time please? 죄송하지만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세월이 지났어도 너는 여전히 너고,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을 멋들어지게 살아내고 있었어.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래서 슬프다. 화가 나. 내가 알던 너는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네가 알던 나는 죽었으니까. "……."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존재를 팔았고, 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었다. "Wouldn't you? 안 될까요?" 그러니 더 이상 내 테두리 안으로 접근하지 말아줘. 10년 동안 내 손으로 쌓아올린 새로운 인생. 0부터 시작해서 다시 만들어낸 내 존재의 기반. 이게 망가지면 나는 또 나를 잃어. "……." 류신은 말을 잊은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놓지 않는 손. "If you've got no intention to, I'm fine with it. So……, 말씀하시기 싫으시면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휘우는 끊어져라 꼭 잡힌 손목을 스윽 내려다보았다. "……would you please let go of me, Mr. Ghang? 좀 비켜주시죠, 미스터 강." 이름이 불리자 류신의 표정이 달라졌다. "I said, Who the hell are you. 네가 대체 누구냐고 물었어." 어금니 사이로 씹어뱉듯 던지는 질문. "I don't know what you mean to do with me but if I remember correctly we've been introduced only yesterday. Don't you think this is rather being rude of you? 제게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신과 나는 겨우 어제 처음 만났습니다. 지금 이러시는 게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떨림, 두근거림, 아련한 추억. 그리움과 닮은 것들은 모두 배제한 감정의 여백들을 서서히 분노와 불쾌감이 메우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예의를 갖춰 말할 수 있을 때 그만 비켜줘. 너랑 이렇게 마주 쳐다보고 있는 거 아주 부담스럽고 헷갈리는 노릇이야. 설사 우연으로라도 너를 다시 만나는 일 같은 건 내 남은 인생 예정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란 말이다. "Just answer it. Who the Fuck are you? 대답이나 해. 도대체 넌 누구냐 말야." 격한 감정이 배어나오는 목소리와는 달리 류신의 눈빛은 조금 전과 달리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한 완력으로 밀어붙인다. "You are beginning to be slightly annoying. I think I'm entitled not to answer whatsoever to this kind of rudeness. And if it's not asking too much, I'd be really pleased if you'd just……, 사람을 점점 불쾌하게 만드시는군요. 이런 무례한 행동에 제가 일일이 대꾸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무리한 요구를 드리는 게 아니라면 제발 부탁이지만……,"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던 휘우는 잠깐 한 호흡을 쉬고 얼굴을 좀더 가까이 들이대며 천천히 음절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덧붙였다. "……fuck off. 꺼져주시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류신은 휘우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당장 한 대 치기라도 할 듯이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Hey, you wanna make a scene? Do I really have to call the bloody police? 이봐요, 구경거리 되고 싶어요? 망할 놈의 경찰을 꼭 불러와야겠어요?" 그리고 휘우는 류신의 손힘이 약간 빠진 것을 이용하여 멱살을 잡은 손을 확 밀쳐 떨구어냈다. 그 반동으로 류신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졌다. 휘우는 도로 잡힐새라 얼른 차에 올랐다. "I'd rather want to think you had taken me for some other person you know. 당신이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이러셨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부르릉 시동 걸리는 소리. "And this time don't forget to take that frigging ring……, 이번에는 그놈의 반지 꼭 챙겨가도록 해요." 휘우는 반쯤 열려진 운전석 차창 틈으로 내다보며 집게손가락으로 보석상을 가리켰다. "……your wife's diamond ring with you. Good-bye. 당신 아내한테 줄 다이아몬드 반지말이요. 잘 가요." 갑자기 허를 찔린 듯 류신은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휘우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고개를 훽 돌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류신은 잡지 않았다. 큰길로 진입하기 직전 휘우가 사이드미러로 언뜻 돌아보았을 때에도 류신은 그대로 못박힌 것처럼 꼼짝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6.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I can still feel the breeze 아직도 그 산뜻한 바람이 느껴져 that ruffles through the trees 나무 사이로 산들산들 불어오던 그 바람 and miss the memories of days gone by 지나간 시절의 추억들이 그립지만 But we could never see tomorrow 그 시절의 우리는 내일을 볼 수 없었지 when no one ever told us about the sorrow 다가올 슬픔에 대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 Al Green "나이젤, 이번에는 맨뒤까지 올라갔다가 앞으로 걸어와 보세요." 저녁 여덟 시의 공연을 앞두고 사운드체크가 한창인 베를린Berlin의 발트뷔네Waldbuhne. 뻥 뚫린 야외의 계단식 원형극장에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그르렁 울리자, 나이젤은 마이크 테스트 용으로 흥얼흥얼 성의없이 읊조리던 노래를 멈추고 커다란 대형 스크린 여러 개를 탑처럼 쌓아 놓은 무대 맨 뒷쪽으로 계단을 올랐다. 유럽 투어 대장정의 첫날, 팽팽한 긴장 속에 지루한 반복작업이 계속된다. "너무 빨리 움직이지 말고 천천히. 계단 중간쯤에서 아주 높은 고음 한번 부탁해요." 그러자 비명에 가까운 괴로운 고음으로 마이크가 찢어져라 도레미파솔라시도. 음이 올라갈수록 지지직거리는 약간의 잡소리가 섞여 나온다. 스탭들은 사운드 컨트롤러의 레버 몇 개를 올리거나 내리고 버튼 몇 개를 바꿔 누른 뒤 다시 고음을 요구했다. 찌렁찌렁 시원하게 제자리에 가서 꽂히는 그 다음 레. 이번에는 잡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거나 다른 노래 하나 부르면서 무대 앞 끝까지 걸어나오세요." 엔지니어의 주문에 나이젤은 이제는 또 뭘 불러야 할까 잠깐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My fair lady~♬ " 프랭크 시내트라 풍으로 다소 기름지게 노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손가락을 딱딱 퉁겨 리듬을 타면서 부른다. 그리고는 무대 바로 밑 맨앞 좌석에 느슨하게 푹 파묻혀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휘우를 향해 헤벌쭉 웃어보인다. "런던 브리지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겠는데요? 마이크를 오른쪽 왼쪽 크게 흔들어주세요." 나이젤은 엔지니어가 시키는 대로 손에 든 마이크를 괘종시계 추처럼 양옆으로 크게 흔들었다. 그러자 절로 몸서리가 처지는 마이크의 하울링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우이이이잉~ 하고 찢으며 달려나갔다.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귀를 막는 사람도 있다. "제기랄. 잠깐만요." 스탭들이 하울링을 없애기 위해 음향장비 세팅을 다시 조정하는 틈을 타 나이젤은 마치 정교한 교량橋梁처럼 보이는 철근 구조물로 된 무대 앞턱에 털썩 앉았다. "하이, 제이. 오늘도 러블리하군." 그리고 손바닥을 쫙 피고 방정맞게 슥슥 손을 흔든다. "힘들어요?" 좌석에서 일어나 가까이 걸어오며 휘우가 물었다. "아니, 뭐……. 아직은 괜찮아." 실없는 분위기는 수그러지고 조금은 진지한 대답. "첫날이라서 이래요." "응." "내일부터는 오늘보단 빨리 끝날 거예요." "응." 무대 밑으로 늘어뜨린 두 다리를 덜렁덜렁 흔들며 무심히 끄덕끄덕. 둘 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리허설을 충실히 했더라도 연습과 실전은 다른 것. 투어 초기에는 스탭이든 밴드든 무대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익숙해지고 나면 그 다음은 솔직히 기계적으로 설렁설렁 쉽게 가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아무리 베테랑이더라도 무대 오르기 전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투어를 개시하는 첫날에서야.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응. 그래야지……," 나이젤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피식 웃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근데 떨려." "떨지 말아요." "응. 나도 안 떨고 싶어……." 그리고 나이젤은 뭐라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잽싸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따가 공연 시작하기 전에 브랜디 한 잔만 마셨으면." "안 돼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브랜디가 안 되면 위스키." "안 된다구요." "위스키가 안 되면 보드카라도. 에이, 많이 봐줬다." "그것도 물론 안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힝, 안 된다니까 더 마시고 싶네.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섞인 투정을 부린다. "안 된다는 것 알면서 왜 자꾸 그래요? 계약서에 분명히 사인했잖아요. 이번 투어 동안에는 술도 안 하고, 약도 안 하고, 대마초도 안 피우기로. No Alcohol, No Drug, No Pot," "……." "And No Party." 나이젤은 야단맞는 강아지처럼 뿌루퉁하게 있다가, "하나 더 있잖아. 그건 왜 빼." 하고 쏘아붙였다. "뭐요?" "No Women!" "……." 휘우는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가끔씩 이렇게 마치 즐기는 것처럼 화제를 이쪽으로 유도한다. 스스로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 아주 재밌다는 듯이. "그럼, 여자가 안 되면 남자는 되는 걸까?" "……." "아, 참! 그것도 내가―" "나이젤, 다 끝난 것 같아요." 휘우는 그의 말을 끊으며 사운드 컨트롤러가 있는 왼쪽 사이드를 가리켰다. 스탭들은 마침 세팅 조정을 막 마친 참이었다. 나이젤이 흘깃 그쪽을 쳐다보자 메인 엔지니어인 라울이 이쪽을 쳐다보며 손으로 무대 중앙을 가리킨다. 어서 다시 올라가라는 뜻이다. "빨리 가봐요." "……으응." 밍기적밍기적 가기 싫은 눈치를 보이다가 나이젤은 휘우가 뒤돌아서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마침내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제이, 근데……!" "응? 뭐요?" "……너, 요즘 좀 살벌해." "나는 원래 살벌해요." "물론 그렇지. 원래 살벌하긴 해. 모든 면이 무섭지. 철저하고. 그야 그렇긴 한데……," "……." "……요즘 부쩍 강도가 세졌어." "전혀 못 느끼겠는데요." 휘우가 딱 잘라 부인하자, "난 느껴." 짧게 끊어 대꾸하는 한 마디에는 일말의 진지함이 엿보였다. "네가 왜 그러는지 너를 괴롭히는 그것이 뭔지 나는 전혀 모르겠어. 하지만……," "……." "지금의 나는 그걸 케어해줄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어. 손톱만큼도 없어. 그야말로 정신적인 파산상태. 게다가 당장 앞으로 진행해야 할 투어까지……. 너무 벅차." 고개를 떨군 채 자조적으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 "알아봤자 위로도 못해주고 도움도 주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에 물어보지도 못해. 무지 궁금한데." 휘우는 가슴이 좀 답답해져 자신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숲의 무대' 발트뷔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공기마저 녹색인 것 같았다. 6월의 여름 숲으로부터 향기로운 푸르른 미풍이 한 장 한 장 나뭇잎을 들추고 불어온다. 한번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 속 시스템으로 속속 스며드는 싱그러운 공기. 그러나 허파는 맑게 정화시켜줄지언정 심장과 답답한 머릿속까지 깨끗이 해주진 않는다. "물어봐도 대답해줄 것도 없어요. 아무 일도 없으니까요." "아니야. 아니야. 지금 그런 얘길 하자는 게 아니야." 그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휘우는 스윽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 누가 듣고 있지 않은지 살폈다. 다행히 모두 자신들의 일에 바빠서 이쪽에 귀기울이거나 신경쓰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이젤이 빨리 무대로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는 오디오 스탭들조차도 잠깐 틈을 타 컨트롤러 주위에 서서 뭔가 한참 의논중이었다. "항상 네가 필요하다고 응석만 부리고 정작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땐 아무 도움도 못 돼, 난. 잘 알아, 나 한심한 거."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휘우는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처음 듣는 종류의 얘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듣기가 싫다. 아니, 듣기 좋다고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티를 내지는 않았었다. 확실히 요즘 부쩍 참을성이 없어졌다. 듣기 싫은 얘기 얼른 표시를 내서 더 못 하게 하고 싶고, 보기 싫은 꼴 오래 참아주지 않고 싶고. 어쩌면 이런 걸 갖고 살벌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만약 원인이 있다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즐기는 것 아니야. 아무리 나라도 즐길 리가 있나. 그냥 걱정돼서 그래." "……." "힘들어도 혼자서 조금만 참아줘. 곧 일어날테니까. 곧 일어나서 내가 네 든든한 빽이 되어줄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때까지만 날 기다려줘." "그런 얘기 이런 데서 자꾸 길게 하지 마요.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얘기도 아닐 뿐더러……," "……." "그다지 내가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구요." "……." "괜히 공연 때문에 긴장되니까 이런 소리나 해서 도피하려는 생각이면 정말 한심한 인생인 거고." "헉! 말이 너무 심해!" "심하긴 뭐가 심해. 빨리 올라가. 스탭들 기다려요. 네 시간 반 후면 공연 시작! 사운드 체크 얼른 끝내고 낮잠 한 시간만 자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휘우는 백스테이지로 연결되는 통로 지점에 높이 붙은 커다란 디지털 시계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다다다다 말했다. "너는 잔인해." "당신은 이기적이야." 볼멘소리로 우물거리는 나이젤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쏘아붙인다. "그래. 이기적이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자, 그러니까 빨리 올라가요. 올라가서 그 이기적인 자의 저력으로 남의 사정 볼 것 없이 일 끝내고 남의 사정 볼 것 없이 가서 쉬어요. 그리고 이따가 공연할 때 누가 까무러치든 실려나가든 사정 봐주지 말고 2만 2천명 관객 전부 다 기절초풍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줘. 그럼 되잖아요? 뭐가 문제죠?" "……." "라울! 얼른 와서 이 게으름뱅이 좀 끌고 올라가! 자꾸만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니 시끄러 죽겠어." "빨리 올라와요!" "얼른 마저 끝냅시다, 나이젤!" "나이젤, 어서요!" 「Declaring a state of Indulgence!」라고 가슴판과 등짝에 프린트되어있는 검은색 투어 티셔츠를 똑같이 입은 스탭들이 한 마디씩 던져온다. 나이젤은 너, 이따 두고 보자 하듯이 집게손가락으로 휘우를 몇 번 가리키고 씨익 웃으며 무대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휘우는 뒤돌아 객석의 계단을 하나둘 밟고 올라가 극장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들어줄 방종의 도가니와도 같은 인덜전스의 공연을 가장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자신인지도 몰랐다. 류신이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카이는 또 M-TV를 켜놓고 있었다. 아직 섹스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탁한 눈동자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본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알아듣고 류신은 텔레비전 앞으로 고개를 디밀어 화면의 영상에 주의깊은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카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류신을 올려다보았다. 그 동안 한번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TV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많이 이상했을 것이다. "내가……,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밴드예요." 류신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계속 화면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이런 밴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번에 갓 나온 신곡이에요. 잘 모르시겠지만." 저 음반을 자신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놀랄까 "9월에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서 나도 한번 가보려구요. 그저께 예매했어요." "……." "노래도 좋은데 직접 가서 보면 더 좋다고……. 공연 한번 갔다오면 다 꺼뻑 죽는다고 하더라구요. 특히 저 싱어가 아주……." 카이는 슬금슬금 곁눈질로 류신의 눈치를 보다가 왠일인지 말을 딱 멈추었다. "그런 곳에 한번도 안 가보셨죠?" 류신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저도 자주 가진 않거든요. 몇 번 가보지 않았는데……, 사실은 오사카에 살 때 딱 한번 가봤는데……, 재밌었어요. 막 신나고, 소리도 지르구요……." 오사카에 살았었다고 한다. 아, 그랬었나. 자신과 정기적으로 관계를 가지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의례적으로 조사를 시켜 정보를 받아두고 있을 뿐 한번 제대로 읽어보지조차 않았다. 계속 오사카에 살았던 건지 잠깐 살았던 건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궁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류신은 문득 카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이제 화면에서는 다른 밴드의 비디오가 플레이되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안 하던 짓을 하니 당황했는지 더듬거리기까지 하며 묻는다. "안 씻어?" 류신이 조용히 묻자, 카이는 얼굴을 확 붉혔다. "사실은……," "……?" "……일어날 수가 없어요. 오늘 좀 많이 심했기 때문에……," "……." "……아니, 그게 싫었다는 게 아니라, 전 좋았거든요. 사실 아주 좋았어요. 진짜로." 얼굴이 새빨개진 와중에도 기쁜 표정을 하고 정말 좋았다고 강변한다. 다소곳한 일본 여자같은 카이. 휘우와 얼굴은 흡사했지만 성격은 아주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 휘우라면 어떻게 했었을까. 이새끼 저새끼 거침없이 욕을 해대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마구 집어던졌겠지. 그래도 자신은 좋아라 키득거렸을 것이다. 류신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사랑스러움의 척도가 첫사랑의 대상을 기준으로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얌전한 반응은 팔뚝 위로 뭔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처럼 생경하기만 했다. 상대방에게 미안할 만큼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 없었다. 게다가 그 '심했다'는 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앗! 괜찮아요." 류신이 덥썩 카이를 안고 욕실로 향하자, 카이가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일어날 수가 없다며?"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가만있어." 욕실 문 앞까지 가자 카이는 괜찮다며 자기 손으로 씻겠다고 내려달라고 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단다. 생각해보니 그것까지 해주고싶은 마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류신은 욕실 문을 열어주는 정도로 돌발 행동을 마무리지었다. "저, 할 얘기가 있어요." "해." 일어설 수 없다던 카이는 욕실 문지방에 굳건히 버티고 선 채 류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류신은 가운을 벗고 속옷을 다리에 꿰면서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보다는……, 제가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 없을까요?" "글쎄? 이왕이면 지금 했으면 좋겠는데." 바지를 입고 셔츠 소매에 손을 집어넣는다. "금방 하고 나올게요. 잠깐이면 돼요." 류신은 셔츠 앞섶의 단추를 끼우고 소매의 커프스를 채웠다. "지금 해." "정말 금방이면 되는데……." 얌전한 카이는 의외로 고집이 셌다. 하지만 류신에게 플러스 방향으로 작용하는 귀여운 고집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언젠가부터 부쩍 휘우 본인과 그 대타를 열심히 비교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조금 닮은 것만으로 적당히 만족하고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었는데. "그냥 통고냐, 아니면 내 대답이 필요한 거냐?" "네?" "통고를 할 거면 씻고 나와서 해도 좋아. 하지만 내 대답이 필요하다면 지금 하는 게 좋을 거야." 류신은 빠른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매고 재킷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고 하자 욕실 문 앞에 서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던 카이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에요. 그건 괜찮아요. 돈은 됐어요." 류신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평소대로 협탁에 100달러 지폐 스무 장을 올려놓았다. "내가 괜찮지 않아." 카이는 조용히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킷을 걸친 뒤 잠깐 망설이던 류신은 소파에 앉았다. 무슨 얘기를 할 생각인지 들어주긴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아까 조건을 걸었던 대로 그에게 대답해줄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류신은 문득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또 들려오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그 새를 못 참고 인덜전스의 신곡 뮤직 비디오가 같은 채널의 전파를 또 타고 있었다. 류신은 리모콘을 들어 TV의 전원을 껐다. 나이젤인가 뭔가 하는 이름의 저 싱어를 보고 있노라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불쾌감을 애써 꾹꾹 누르며 굳이 뉴욕에서 왜 이렇게 버티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가끔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무작정 공항으로 차를 몰고 갔다가 자신을 타일러 그냥 돌아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런던행 티켓 예매를 지시했다가 결국 도로 리턴하고 말았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일주일만에 런던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그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찾아낼 길이 없었다. 가까스로 알아낸 그의 플랫에는 사흘 내내 단 한번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당장 런던으로 날아가서 다시 한번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꺼지라"고 외치던 처연한 눈빛과 아무런 수확없이 허탈한 마음을 안고 히스로우를 통과하며 스스로에 대한 조소를 금치 못하던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치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마음이 냉정해지곤 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런던에 있는 그 때문에 이성이 마비되는 기분을 맛볼 때마다 죽은 휘우를 향해 미안한 마음을 품게 된다는 점이었다. 마치 바람이라도 피우고 있는 것처럼. 정작 다른 사람과 육체관계까지 나눌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인데. 자신의 안에 죽어있는 옛사랑의 존재는 너무나 크고 단단해서, 살아있는 다른 사람에게 일말의 무게를 싣는 것조차 용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쨌든 류신은 아직 자신 앞에 놓여있는 장애물들을 건너뛰고 그 뒤를 쫓아야만 할 합리적인 이유를 자신의 안에서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 현재 자신으로서는 여러모로 꽤나 대단한 인내심이 발휘되고 있는 상황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서쪽으로 난 창가 양쪽 귀퉁이에 각각 허리가 묶여있는 하얀 커튼 위로 풍성한 노을볕이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울룩불룩주름진 흰색 곡면이 천의 거친 재질에 따라 조금씩 음영을 달리하며 오렌지빛으로 흠씬 물들었다. 류신은 창가로 성큼 걸어가 창문을 조금 밀어 열었다. 스위치를 켠 듯 좁은 창틈으로 잡다한 세상 소리가 한꺼번에 새어들어온다. 24층. 저 아래로는 성냥개비만한 사람들이 또박또박 각자 제 갈 길을 향해 가고 있었고, 세월이 때가 되어 앉은 거무죽죽한 지붕들 위로는 이름 모를 희끄무레한 새 한 마리가 팔딱팔딱 날갯짓을 하며 이 지붕 저 지붕 옮겨다니고 있었다. 「만났어.」 그동안 계속 마음에만 담아놓고 있던 얘기를 어제 저녁에야 비로소 민혁에게 처음으로 할 수 있었다. 「누구를?」 민혁은 와인글라스를 입에 가져가며 캐주얼하게 물었다. 「휘우……」 「엥?」 「……랑 엄청나게 많이 닮은 사람.」 「우와, 짝퉁이 또 있어? 휘우 닮은 사람 정말 많네. 휘우 얼굴이 그렇게 흔한―」 「그냥 닮은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민혁은 아주 작게 숨을 헉 들이켰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결코 눈치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류신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닮았어?」 류신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얼마나?」 다른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어디서 만났는데?」 「런던.」 「언제?」 「지난 달에 출장갔을 때.」 「뭐야? 그럼 벌써 꽤 오래 된 거네? 왜 이제 얘기하냐, 너! 그나저나 어쩌다가 만났어?」 「그냥 우연히.」 민혁은 조심스럽게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서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해?」 였다. 「무슨 소리야?」 류신은 약간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닮았다는 게 뭐가 중요하냐구. 휘우 닮은 사람 의외로 흔한 건지도 모르잖아. 너 벌써 한 명 발견했기도 했었고. 카이말야.」 「그냥 좀 웬만큼 닮은 수준이라면 이런 얘기 꺼내지도 않는다고 말했잖아!」 류신이 날카롭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민혁은 포크와 나이프를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채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혹시 유령이 아닐까?」 「유령은 아니었어.」 「그걸 어떻게 알아?」 「중간 지인을 통해서 만난 거야. 나름대로 직업도 갖고 있었고 주위에 사람도 많았어. 확실히 살아있는 인간이야.」 류신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 격한 흥분으로 가슴이 뿌듯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일에 관해 입밖으로 말을 꺼내는 것조차 꺼려졌다. 현실임을 분명히 확인했음에도 자신이 꿈을 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계속 들었고 왠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민혁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동안에도 류신은 괜히 말을 꺼낸 것이나 아닌지 끊임없이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민혁은 좀더 소상한 정황을 얘기해줄 것을 요구했고 류신은 만나게 됐던 상황들을 비롯해 그저 비슷하다고만 볼 수는 없는 몇 가지 희한한 유사점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중간 지인에게 물어서 구매했던 음반의 크레딧에 그의 퍼스트네임이 쥴스Jules로 되어 있더라는 사실을 말할 때는 그때의 놀라움을 생각하며 류신은 조금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실로 오싹한 충격이었다. 「그럼 혹시 숨겨진 쌍둥이?」 「그것도 아니야.」 「어떻게 알아?」 「이름이랑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조사를 좀 시켜봤는데 오늘 아침에 그 결과를 받았어.」 민혁은 '오오' 감탄사를 뱉었다. 눈빛이 반짝거린다. 「그래서? 어떤데?」 「이렇다 할 점은 없어. 그냥 중국계 고아로 어렸을 때 미국 가정에 입양돼서 자라다가 법적 성인이 된 다음에 런던에 건너갔다. 이게 다야. 양부모는 그 후에 이혼했다가 각각 재혼했고. 양부는 3년 전에 암으로 죽었어. 양모는 재혼해서 플로리다에 살아.」 「중국계?」 「어릴 때 중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케이스야. 말이 좋아 입양이지 거의 팔려간 거나 다름없는 거지.」 「글쎄 뭐 그건 우리나라에도 자주 있던 일이니까 그렇다치고, 그 외에 특기할만한 사항은?」 민혁의 목소리 톤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없어. 일단 알아보는 절차도 까다로웠지만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모두 찾아봤어. 눈에 띄는 점은 없었어. 중국에서는 그렇게 오래된 입양관련서류는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하더니 어떻게 간신히 찾았다고 하더군. 모두 다 낱낱이 뒤져본 결과를 말하자면 서류상으로는 흠잡을 만한 구석이 없다……야.」 「서류상으로야 뭐……, 그럼 실제로는?」 「아직 시간이 부족해서 그쪽으로는 계속 조사중이야. 양모는 플로리다로 옮겨갔다는 것까지만 확인됐는데 아직 찾지 못했어. 이웃 주민이나 학교 친구들도 별로 많이 찾아내지 못했다는데 집을 워낙 자주 옮겨다닌데다가 외진 동네로만 돌아다녀서 일단은 기억을 하는 사람보다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어. 학교도 하이스쿨 이전까지밖에 기록이 없어. 그리고 이름은……,」 「……?」 「런던으로 건너오면서 예명처럼 이름을 바꿨어. 본명은 전혀 다른 이름이야.」 둘 사이에는 제법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민혁이 갑자기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럼 휘우랑 꼭 닮은 사람이 중국과 일본에 한 명씩 있는데, 그 두 사람을 다 네가 발견했다는 얘기네?」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혹시 홍콩, 대만이나 몽고에는 없는지 그것도 알아봐라. 사하린 같은 데도 알아보고. 베트남, 태국 이쪽은 좀 확률이 낮겠지?」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야.」 민혁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장난 아니라구. 정말 별 것 아닌 일에 네가 과민하게 신경쓰고 있을 뿐이야.」 류신이 말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동안, 「정말 그 사람이 휘우를 닮아서 그렇게 인상적이면 접근해 봐. 카이처럼 잘 꼬셔보던가.」 민혁은 혼자서 묻고, 「왜? 유령일까봐 두려워? 아참, 유령은 아니라고 했었지.」 얼른 혼자서 대답해 버리기를 반복했다. 「아, 알겠다! 류신아, 그건……」 그러다가 느닷없이 너무나 자신있게 말을 꺼내길래 뭐라고 하나 했더니, 「도플갱어야.」 정말로 뜬금없는 소리. 「말도 안―」 「아참, 너 근데 그거 아냐?」 민혁은 류신에게 도무지 입을 열 틈을 주지 않았다. 「도플갱어를 만나면 곧 죽는다는 거. 어, 근데 그건 당사자들에게 해당되는 얘기 아닌가? 둘다 발견한 제3자가 어떻게 됐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어봤는데. 야, 혹시 네가 그 사례가 되는 것 아닐까? 도플갱어 한 쌍을 모두 목격한 제3자의―」 「실없는 소리 그만해.」 류신은 어이가 없어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목이 타는 듯해 물컵을 들었지만 컵 속에 들어있던 얼음은 이미 모두 미지근하게 녹아있었다. 생기를 잃은 매력없는 물. 식사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상태로 차갑게 식어버렸고 먹을 마음도 나지 않았다. 「실없는 소리 아니야. 그게 휘우 본인이고 휘우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보다 실없지 않아. 아니, 그건 실없는 소리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얘기지.」 「……!」 「그렇지 않아? 지금 시점에서 휘우가 살아있더라, 하는 일보다 더 무서운 얘기는 없는 것 같아.」 오랜만에 보는 사악한 꼬마같은 눈웃음. 「…….」 「여러가지 의미에서 정말, 무서운 얘기야.」 류신은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잔이나 들었다. 목구멍으로 꿀꺽 흘려넣고 나서야 물이 아니라 와인인 것을 알았다. 「너무 앞서가지는 마. 내 입으로 그게 휘우 본인이 확실하다고 말한 적은 없어.」 갑작스레 들어간 알코올 때문인지 맥박이 조금 빨라지는 것 같았지만 눈을 내리깔고 태연하게 대답. 「아니면 뭐야? 그게 아니면 지금 네가 빙빙 돌려서 하고 있던 얘기의 요점은 뭐냐? 나는 그 이상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거든? 알기 쉽게 얘기 좀 해줘봐라.」 민혁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쨍그랑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민혁도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겉으로 태연한 척 장난스러운 대화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방금 전까지도 배고파 돌아가시겠다던 사람이 식사에의 의욕을 완전히 잃을 만큼 이 화제에 몰두하고 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너 말이야. 나한테서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거의 한 달만에 이 얘기를 털어놓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딱 두 가지뿐이야.」 「…….」 「꼴리는 대로 한번 부딪쳐봐라. 아니면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두고 살아라.」 「…….」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미안할 정도지만 말이다. 그 이상은 해줄 말이 없어. 분명한 건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네 자유라는 거야. 하지만 부딪쳐보려면 어설프게 잠깐 대충은 안 돼. 그렇게 해도 될 사안이 아니야, 이건. 끝까지 제대로 철저하게. 그리고 그 결과는 네가 전부 책임져야만 하고.」 「…….」 「한 마디 정도만 더 덧붙인다면, 세상에는 없었던 걸로 덮어두고 살아도 나쁘지 않은 일들, 아니 없었던 걸로 덮어두는 편이 훨씬 나은 일들이 꽤 있다는 거야. 마음 가는 대로 열심히 부딪쳐본 다음 결과가 어땠었는지는 너도 익히 겪어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번 같은 경우는 부딪쳐 본 다음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도 가지 않아…….」 그래, 짐작도 가지 않아.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될 그 무엇. 하지만 이대로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절대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폭주하는 기관차에 한 발을 디디고 막 올라서는 듯한 느낌. 10년전 바이크를 타고 폭우속을 질주하던 그때와 닮은 절박함을 느끼며 류신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붕 위를 넘나들던 새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아직 계셨군요." 가운을 입은 카이가 욕실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낸다. "가셨을줄 알았어요."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류신은 창에 달린 커튼에 먼지가 있지 않은지 주의깊게 확인하고 등을 기대어 섰다. 흰색 커튼에는 의외로 눈에 띄지 않는 먼지가 잔뜩 쌓여있기 십상이다. "시간 여유가 많지 않으니 빨리 해줬으면 좋겠어." 류신의 바로 등뒤로 보이는 저녁 노을 물든 하늘을 카이는 눈이 부신 듯이 쳐다보았다. "결혼하신다고 들었는데……," "……!" 류신은 처음 듣는 사실인 것처럼 놀랐다. 요 근래 런던에 있는 그 녀석의 일에 온 정신을 빼앗겨 거의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자신의 일인데 거짓말처럼 잊었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어떻게 알았을까. 카이와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지?" "우연히 알게 됐어요. 우연히요. 2주 후에 약혼하신다고……." "……." "저, 결혼하시고 나면 저는 어떻게……, 저하고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굿 이브닝, 미스터 강."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의 흰색, 베이지색, 적갈색, 검은색 대리석판들이 규칙적으로 커다란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고 있는 널찍한 로비 플로어를 뚜벅뚜벅 가로질러 걸어들어가자 데스크 앞에 앉아있던 제복 차림의 남자가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어퍼 웨스트 사이드Upper West Side의 리버사이드 불러바드Riverside Boulevard에 위치한, 허드슨 강과 리버사이드 파크를 굽어보는 55층짜리 최고급 아파트. 강화유리로 전체가 덮인 이 유리탑 맨 꼭대기, 7200평방피트(≒약 203평) 넓이의 복층형 펜트하우스에 류신이 살고 있다. 류신은 자신의 집 안으로 곧장 직행하는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눌렀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금색 금속재질의 문이 열려 자신이 들어가면 닫히고 나서 곧 몇 초만에 55층에 닿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방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걸어들어와, 널찍한 현관 입구 양 사이드에 버티고 있는 추상적인 형태의 청동 조각상 한 쌍을 지나고 역시 대리석으로 된 계단 두 개를 내려오면, 윤이 반짝반짝 도는 짙은 퍼플 브라운색 마호가니 플로어가 깔려있는 포이어foyer가 나온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는 복도를 지나자, 운동장처럼 넓은 거실에서는 숨막히는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거실 부분은 복층 구조에서 제외되어 그냥 꼭대기까지 뻥 뚫려 있기 때문에 천장까지의 높이가 무려 5미터를 육박한다. 그 천장에는 마치 온실처럼 투명한 유리로 된 커다란 천창天窓이 있고, 또 120도 정도의 완만한 호弧를 이루는 거실 벽면도 온통 유리로 되어 있어 밤하늘과 맨하탄의 스카이라인과 유유히 흐르는 허드슨 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빼곡이 들어찬 크고 작은 빌딩들. 강을 가로지르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 부두에 정박되어 있는 유람선과 요트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뉴저지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내뿜는 부드러운 불빛이 출렁이는 물살에 어른어른 일렁이며 물과 같이 흐르고 있었다. 류신은 불도 켜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소파에 앉아 20분 정도 야경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바깥의 경치는 아름다웠지만 마음 속 경치는 여전히 어수선하기만 했다. 각각 별도의 드레싱 룸과 욕실이 딸린 손님방 두 개와 키친, 다이닝 룸 앞을 지나 집안 가장 안쪽에 있는 마스터 베드룸에 들어서서 류신은 전등 스위치를 탁 켰다. 그리고 왼손으로 넥타이를 잡아 헐겁게 빼며 드레싱 룸을 향해 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자신의 침대에 누웠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그 벽면에는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생기가 쑥 빨려나간 고목枯木 같은 느낌을 주는 조촐한 잿빛 나무액자.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세피아톤의 무채색 사진. 사진 속의 소년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이쪽을 무심히 쏘아보고 있었다. 류신은 그 소년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가만히 덧그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동그란 이마. 끝이 살짝 올라갔다가 휘어져 내려오는 숱많은 눈썹. 속쌍커풀이 진 반달눈. 오똑한 콧망울. 도톰한 입술. 갸름한 턱선. 가는 선 하나, 작은 굴곡 하나, 손끝으로 모두 외우고 있는 그리운 얼굴. 무질서하고 소란한 마음이 마술처럼 가라앉았다. 그 어떤 실체보다 자신에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주는 존재. 아직도 자신에게는 최고 우선순위인 녀석. 떨쳐버리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현실로서 받아들여 진행형으로 품고 있는 사랑.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가장 사랑한다. 이대로도 충분히 내 사랑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만약 실체인 너를 다시 느낄 수 있다면 훨씬 좋겠지. 사는 게 조금 덜 허무하고 조금 더 충만할 수 있겠지.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아마도 없겠지. 허락해줘. 혹시나 하는 마음. 류신은 사진 속의 소년과 조금 더 눈을 맞추다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액자 유리에 다닥다닥 지저분하게 묻은 지문을 깨끗이 닦아내고는 드레싱 룸으로 걸어갔다. 휘우는 호텔방 문을 닫고 카드키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은 이곳 프랑크푸르트에서 공연이 있고 오늘은 일주일만에 모처럼 공연이 없는 날. 체크인한지 두 시간. 100명이 훨씬 넘는 일행들 중 웬만한 사람들은 호텔을 벗어나 밖에 나갔거나 객실에서 쉬고 있을 즈음이었다. 안에서 별다르게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도 호텔 밖을 에워싸고 있다가 멤버든 스탭이든 눈에 익은 사람이 나온다 싶으면 소리부터 질러대는 팬들 때문에 밖에 나가기는 싫고, 몸도 마음도 찌뿌드드해서 운동이나 해서 풀어버릴 생각으로 휘우는 톰과 제리가 그려진 흰색 반팔 티와 허벅지를 반쯤 덮는 연한 소라색의 트레이닝 반바지를 입고 나섰다. 발목 조금 위까지 오는 흰 양말. 밑창이 폭신폭신한 스니커즈. 머리는 질끈 하나로 동여매고 거의 항상 끼고 있던 무테 안경은 벗어두었다. "이런, 거기가 아닐텐데요." 지하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 문이 불쑥 열려서 무심코 내리는데,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며 노래부르듯이 말한다. 언뜻 밖을 보니 아직 객실 층이다. 마주보는 방들의 행렬 사이로 조명이 낮게 깔린 고요한 복도. 휘우는 도로 안으로 들어왔다. "하이, 제이." 문이 닫히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이, 롤랜드." 공연 오프닝 밴드인 로컬 빌레인즈Local Villains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롤랜드 스튜어트Roland Stewart다. 자신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이는 차림새를 보니 그도 피트니스 룸 행인 것 같았다. "운동하러가요?" "옙." 롤랜드가 자신의 울뚝불뚝한 이두박근을 가리키며 힘차게 대답했다. "유휘우야죠, 이거." 그는 근육질인 자기 몸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우리 밴드의 유일한 셀링 포인트인데." 자신을 너무 잘 아는 사람과는 오히려 대화하기가 힘들다. "다른 멤버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요?" "아직 세상을 모르는 거죠. 뭐가 뭔지." 둘은 조금 웃었다. "어디 가서 소문은 내지 않을게요." 휘우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띈 채 대답했다. "팔을 보아하니 나처럼 근육 유지 보수 작업차 가는 건 아닌 것 같고," 롤랜드는 자신보다 키는 2,3 센티미터 가량 크지만 훨씬 슬림한 휘우의 몸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무슨 운동을 주로 해요?" "난 그냥 뛰어요." "오호. 그것도 좋죠." "…앞이 안 보일 때까지." "그건 좀 안 좋다." 그리고 그가 연이어 뭐라 말하려는 찰나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둘은 객실 플로어의 것보다 훨씬 색이 짙은 카펫을 밟으며 어깨를 나란히 목적지인 피트니스 룸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말이죠." 롤랜드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네." "당신 혹시 나이젤과 사귀는 사이인가요?" "네에?" 황당한 질문에 휘우가 목소리를 조금 높이자, 질문을 던진 당사자는 난처한 듯이 웃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 소문이 돌던데." "……그런가요? 왜, 왜 그런 소문이 돌죠?" "아니면 다행이고." 그가 왜 다행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는 다행이므로 휘우는 고개를 확실하게 가로저었다. "걱정말아요. 나이젤에 대해 떠도는 루머가 워낙 많으니, 이것도 그것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휘우는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어떤 루머가 돕니까?" "뭐, 그렇고 그런 것들이죠. 흔한 것들." "예를 들면?" "그냥 평범한 거예요. 뮤지션에게 잘 따라 다니는 소문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신경쓰지 말아요." 신경쓰지 말라고 하니까 더 신경이 쓰인다. "아니오. 난 그 본인을 늘 보는 사람이라 루머에 대해선 오히려 잘 모릅니다." "……." 그는 눈에 뜨이지 않게 히죽 웃었다. "만약 마약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는 이제 깨끗해요. 누가 물어보거든 확실히 그렇게 말해주세요." 반농담삼아 아무렇게나 흘리는 얘기들도 그 사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칫 진짜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휘우는 걱정을 담아 성의있게 말했다. "마약……. 과연 그럴까요?" "네?" "과연 이제 깨끗할까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늘 보는 사람이라고 했었죠. 요즘은 거의 항상 같이 다니고 있어요. 확실합니다." "에이, 지금은 같이 있지 않으면서."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같이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24시간을 완전히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방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안다고 할 순 없을걸요?" "……." "그렇다면 늘 보는 사람이라고 나이젤은 당신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던가요?" "그, 그건……." 휘우는 그토록 오랫동안 알아왔어도 나이젤이 자신의 왼손 엄지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것을 떠올렸다. 몇 번 본 적 없던 파스칼조차도 알고 있던 사실을. "당신은 나이젤 옆에 오래 있었던 것에 비해 그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것 같군요. 나이젤과 데릭 사이에 대해서도 심심찮은 얘기들이 오가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나이젤의 고향 친구인 데릭은 오랫동안 밴드 전체의 행정 담당 매니저를 맡아왔고 메스 레코드의 중역이기도 했다. 산적한 업무 때문에 그는 이번 투어는 동행하지 못하는 대신, 드문드문 꼭 중요한 때에만 찾아오기로 되어있었다. 그는 밴드의 훌륭한 조력자였고 나이젤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였다. 이런 비슷한 소문은 얼핏 들은 적이 있지만 그들을 오랫동안 주욱 보아온 휘우로서는 그 이야기는 전혀 근거없는 헛소문에 불과했다. "하긴 그것도 옛날 얘기일까요? 지금의 나이젤에게는 뭐가 됐든 가능하지 못한 일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 "오호, 이건 반응이 전혀 다른데? 당신도 알고 있군요?" "……." "그렇게 쏘아보지 말아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가르쳐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들을 가치도 없는 얘기인 것은 분명하군요. 이제 그만하시죠." "나이젤을 예전부터 아주 '잘' 아는 어떤 여자분에게 들었죠. 엠마 오브라이언." 휘우는 숨을 헉 들이켰다. 엠마는 한때 잠깐이나마 나이젤과 약혼한 적이 있었던 여배우였다. 그녀는 나이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뭐라고 해야할까. 아, 구멍동서! 나이젤과 내가 바로 그런 사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 "아니, 과거형으로." "……." "있었거든요." 순간 휘우는 치솟는 분노로 움찔 떨었다. "그런 얘긴 이제 그만합시다. 나는 당신한테 이런 얘기 들었다는 사실을 다 잊을테니 당신도 그렇게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니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뻔뻔한 면상을 한 대 후려갈겨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휘우가 천천히 말했다. 남의 사생활에 대해 뒷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사람들을 휘우는 참아내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한낱 흥미거리일 뿐인 입놀림이 본인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글쎄, 그게 과연 가능할런지?" 이죽거리는 비웃음을 본 순간, 휘우는 갑자기 시야가 아득해지며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생각할 사이도 없이 주먹이 나갔고 곧 둘은 바닥에 맞붙어 요란하게 뒹굴고 있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이 비열한 자식!"을 외치며 퍽퍽 연타를 날리는 그 와중에도 휘우는 이것이 단순히 나이젤하고만 관계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요 근래 자신의 속에 억눌려져 있던 깊고 깊은 응어리들이 이 머저리같은 녀석의 촉발로 뻥 터져버린 것이다. 사실상 그는 가장 안 좋은 타이밍에 자신을 건드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점은 좀 안됐지만 용서해 주기에는 그의 잘못도 사뭇 컸고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자신을 제어하기에도 역시 늦은 감이 있었다. 말가죽같은 근육질의 피부에 주먹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주먹끝에 달라붙는 그 짜릿한 시원함은 점점 휘우의 머릿속을 맑게 해주고 있었다. 높고 단단한 둑이 무너져 폭포수 같은 물이 걷잡을 수 없이 마구 쏟아져 내려온다. 자신의 허벅지만한 팔뚝을 가진 상대에게 악착같이 달라붙어 거의 때려죽일 듯이 주먹 세례를 퍼붓는 그의 서슬에 기가 질렸는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감히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밴드의 안전을 위해 호텔에 배치되어 있던 검은 양복 차림의 보디가드들이 달려와 싸움은 끝나고 말았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입술이 조금 찢어진 것을 제외하면 휘우는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부러진 코를 움켜쥐고 피를 한 됫박 쏟으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상대방에 비하면. 그 다음날 아침, 휘우가 유치장에서 반 나절 구류를 살고 풀려나와보니 언제 런던에서 달려왔는지 경찰서 로비에서 데릭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젤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서른 셋의 그였지만 어른스러운 분위기 덕택에 실제 나이보다 다섯 살은 족히 더 많아 보였다. "굿 모닝. 하우아유 투데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웃기까지 하는 휘우를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합의를 안 해주겠다고 해서 진땀 뺐어." "합의라뇨! 같이 싸운 건데!" 가뜩이나 그 소리 때문에 열받고 있던 휘우가 씩씩거렸다. "네 생각에는 같이 싸운 건지 몰라도 주위 사람들 눈에는 일방적 폭행으로밖에 안 보였다던데." "인종 차별이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멀쩡한 네 얼굴 거울로 한번 보고나 말해. 그쪽은 코뼈가 나가고 이도 세 개나 부러졌어. 다 합해서 전치 6주." 휘우는 에헤~ 하고 혀를 쑥 내밀었다. "까딱 잘못 했음 프랑크푸르트 경찰서 유치장에서 썩어문드러질 뻔 했군요." "합의 안 해줬으면 구속이야, 바보야." "그럼 구치소 행인가?" "그런 셈이지. 그 다음에 재판하고 교도소." "좋은 구경 할 기회를 놓쳤네. 내 평생 희한한 경험 많이 해봤지만 그래도 감옥은 안 가봤는데." "유치장으로 만족하도록 해." "그러려구요. 별로 오래 할 일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독일 교도소의 수감 생활이 어떤가 좀 궁금하긴 한데 아쉬운 대로 그냥 다큐멘터리 같은 거나 좀 찾아보고―" 신나게 지껄이던 휘우는 데릭의 굳은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 말을 딱 멈추었다. "미안해요." "어쨌든 합의가 됐으니 다행이야." "벌금이랑 합의금 얼마 들었나요? 제가 당장 드리죠." 신용 카드가 든 지갑을 찾아 몸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휘우가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현재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호텔에 손해배상해준 것도 있어." "헉! 아무것도 안 부서졌는데!" "영업 방해." "뭘 얼마나 방해를 했다고!!" "……." "그, 그건 얼마나……?" 휘우가 비굴하게 말을 더듬자 데릭은 씩 웃었다. "됐어. 투어 부대비용으로 전부 다 영수증 첨부해서 정산할 거야. 나이젤더러 책임지라고 하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 "대충 얘기는 들었어." 으흐음. 휘우는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놈이 술술 불어요?" "그럴 리가 있나." "그럼요?" 데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문제야. 롤랜드 그 녀석." "빈 수레가 요란하죠." "너는 너무 다혈질이고." "인간적이고 남자답다고 해줘요." 경찰서 정문을 막 벗어나기 직전 휘우는 바로 건너편에서 아이스크림 집을 발견했다. "저, 목마르고 배고픈데 아이스크림이나 좀 먹고 갑시다." "그런 녀석을 오프닝 밴드로 내세운 내 잘못이 가장 크지, 결국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나서면서 초콜릿과 바닐라가 적당히 섞여있는 아이스크림 콘을 덥썩 베어물며 데릭이 말했다. "그러게요." 휘우가 스트로베리 바나나의 상큼한 달콤함을 음미하며 볼을 우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빛이 번쩍했다. 이게 대체 뭔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찍혔군." 데릭이 말했다. "뭐가요?" "사진." "사진?" "응." "어떤 사진?" "우리 사진." 휘우가 눈을 크게 뜨고 입모양만으로 '우리?' 하면서 손으로 자신들 두 사람을 가리키자 데릭은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왜요?" "왜인지는 나중에 여기 지방신문에 기사 나오는 거 보면 알겠지만……," "기사요?" "좋은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 "……." "거기다가 둘이서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까지. 엄청 웃기겠군." 데릭이 어처구니없이 웃고만 있는 동안 휘우는 아이스크림을 멍청히 들고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뭐하러 나같은 일반인을?" "어쨌든 인덜전스 일행이니까. 공연하러 온 인기 밴드 일행 중에 누가 사고를 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사가 되니까." "……!" "그런데 마침 그게 한참 촉망받는 작곡가, 프로듀서, 올 어라운드 뮤지션." "……." "런던에서도 음악잡지 기자들한테 전화 왔었어." "……." "앞으로 몇 년간 너랑 롤랜드 기사에는 꼬리표처럼 이 얘기가 따라붙을 거다. 각오해." 휘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나한테 미안할 건 없지만, 알면 됐어." "아니, 정말 미안해요. 저, 나이젤은 뭐라 그래요?" "아무 말도 안 해." "……." "정말 아무 말도 안 해.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방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고 있으니까 무슨 말을 했을 리가 없지." 으으으으. 한숨만 푹푹. "오늘 공연은……." "당연히 지장 없어. 그건 걱정 마. 잘 알잖아. 지난 투어 때도 어땠었는지." 무박 3일의 마약 파티를 새벽녘의 심장마비로 화려하게 마무리짓고 앰뷸런스로 실려갔다 와서도 그날 저녁의 공연을 끝까지 해냈었다. 그런 사람이니까……. 아니, 그런 사람이라서 오히려 더 걱정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작정하고 뭔가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휘우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데릭도 말릴 수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정해진 한도 이상은 개입할 수 없는 자신을 잘 아는 나이젤이― "저, 데릭……." "……?" "역시 난 안 되겠어요." "뭐가?" "따지고 보면 이게 지금까지 당신이 해오던 일 중 하난데, 난 역시 자격도 없고 능력도 안 된다 싶군요." "……." "전처럼 스탭으로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수발 들어주는 개인 어시스턴트도 아니고, 하다 못해 티셔츠랑 기념품 파는 일이라도 돕고 싶지만 그것도 절대 못하게 하고, 오로지 나이젤 옆에서 기분만 맞춰줘라 그러는데 그것도 완벽하게 24시간 보호 감시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 "게다가 이런 일이나 벌여서 밴드 이미지나 실추시키고 말이죠." "원래 이미지가 깨끗한 밴드는 아니지만, 어쨌든 잘 했다고 볼 수는 없지." 데릭은 아이스크림을 우걱우걱 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 계속 우걱우걱. "허락해줘요. 미안하지만." "……나이젤은 어떡하고?" "이봐요. 방금 말했잖아요. 도움이 되어야만 하는데 별로 못 되고 있다고."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는데?" "아뇨. 안 되고 있어요. 게다가 사고친 인간이 별 제재없이 계속 같이 다니는 것도 다른 스탭들 보기에 안 좋다구요.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 이거죠."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아니, 뭐가 됐든……. 좋아요.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내가 문제예요. 나도 좀 쉬고 싶거든요. 그 동안 너무 달렸어요. 이제 앞이 안 보여요." "……." "나로서도 이제는 내 인생을 과연 이런 식으로 계속 보내야 할 것인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요즘 좀 지쳐서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쉬고 싶기도 하고." "어디?" 데릭이 부드럽게 물었다. "글쎄요. 어디가 좋을까요. 한적한 촌일수록 좋을 것 같은데. 깊은 산골이라든가 외딴 섬이라든가……. 섬이 좋겠군요. 관광지로 개발도 안 되고 주민 수도 적고 교통편도 아주 나빠서 함부로 누가 찾아올 수도 없는 진짜 외딴 섬." 휘우가 먼 눈을 하고 신이 나서 읊어대는 순간 데릭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손에 묻은 콘 부스러기를 탁탁 털어냈다. "그거 진심이야?" "뭐요?" "쉬고 싶다는 거." "정말이에요. 설마 거짓말로 들리나요? 아니, 내가 뭐하러 그런 걸 거짓말을―" 갑자기 데릭이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해서 휘우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하. 너한테서 쉬고 싶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저, 그게 웃긴 얘깁니까?"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다들 너는 기계라고 했었던 것 알아? 자가발전해서 365일 24시간 풀가동하는 기계." "……그거 별로 썩 마음에 드는 비유는 아닌데요." 휘우는 조금 뿌루퉁해졌다. "생각해봐. 내가 너를 알게된지 거의 9년이 되어가고 있어. 그 중에 같이 일했던 것만도 꽉 채워서 6년이야. 난 그 동안 네가 휴가는커녕 토요일, 일요일도 제대로 쉬는 걸 별로 못 봤어. 투어 때야 그렇다 치지만 평소에도 말야. 일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한 것처럼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항상 일을 했지. 애인을 만드는 적도 없었고. 데이트라도 한번 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동료들이랑 가끔씩 펍에서 술 한 잔 하는 게 전부야. 그 외에는 온종일 스튜디오에 짱박혀서 일하고 집에 가서도 또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어이, 나도 나름대로 개인 생활이 있다구요. 너무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지 마요." 왠지 창피해져서 휘우는 얼굴을 붉혔다. "그 정도 오래 알았으면 네 패턴은 다 짐작하고 있어. 뻔하다고 생각해. 안 그랬으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겠어." 휘우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할 수 없지. 하기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일을 맡기는 것도 한계가 있고." "미안해요." "오늘 미안하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 한 줄 알아? 자꾸 말하지만 나한테 미안할 건 없다구." "……." "그 대신 이렇게 하자. 조건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어떻게요?" 휘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선 아이스크림부터 다 먹어. 녹잖아." 휘우는 문득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의 존재를 깨닫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시간과 체온에 녹아내린 빨갛고 노란 물이 한 줄기 두 줄기 흘려내려와 손등과 손바닥에 끈적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근데 말이야. 왠지 많이 밝아보인다." "에?" 찐득찐득해진 손에 신경쓰느라 휘우는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아까부터 그렇게 보여. 어떤 놈을 죽도록 패주고 났더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갔습니다, 하는 얼굴인데?". 무슨 말인가 정신이 팔려 멍해져 있는 순간 녹은 아이스크림이 한 방울 톡 무릎 위로 떨어져 주르륵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하얀 다리를 천천히 타고 내려온다. 성분은 그대로인데 상태는 변하기 시작한 얼음, 또는 이미 변해버린 물. 고체일 때보다 색과 점성이 더욱 짙어진 달콤한 액체. 호텔방에 돌아오자마자 휘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샤워였다. 짐부터 챙기고 싶었지만 일단은 씻는 것이 급했다. 아주 최소한의 위생관념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거리의 부랑아, 소매치기 및 소액 강도, 가벼운 폭행범 등등 각종 경범죄자들과 열 시간 이상 같은 유치장에 갇혀 뜬눈으로 밤을 새다 나온 다음에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몸을 씻는 일일 것이다. 샤워를 하고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 천천히 목욕까지 하고 나오니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엄청난 허기가 밀려왔다. 룸서비스를 시켜서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노곤하니 꾸벅꾸벅 잠이 온다. 먹는 둥 마는 둥 침대 속에 파묻혀서 잠이 들었던 것이 11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잠깐 눈을 붙였다 떴나 싶었는데 잠을 깨어보니 이미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휘우는 깜짝 놀라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이 호텔 바로 옆에 있는 페스트할레Festhalle에서 공연이 시작될 것이다. 아무리 이제 그만 이탈하기로 했다지만 그렇다고 코빼기도 안 비치는 무성의한 뒷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휘우는 후다닥 놀라운 스피드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청바지에 다리를 쑤셔넣고 티셔츠를 뒤집어쓰려는 찰나 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웅얼웅얼하는 문 뒤의 대답은 급히 머리를 통과시키던 타이트한 티셔츠 목부리에 가려져 거의 잘 들리지 않았다. 휘우는 한 손으로 티셔츠를 쑥 뽑아내리고 한 손으로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문을 열었다……가, 문 밖에 서 있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도로 닫았다. 그러나 그는 잽싸게 문 안으로 발 한 짝을 들이밀어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문 앞에서 한참을 옥신각신한 끝에 휘우의 거센 저항에도 소용없이 결국 문은 열리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휘우는 그가 작정을 하고 덤비면 그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얘기 좀 하자." 등 뒤로 문을 닫으면서 류신이 말했다. "얘기 좀 하자." 등 뒤로 문을 닫으면서 류신이 말했다. 휘우는 못 들은 척 방 한 구석의 서랍장 앞으로 가 전화 수화기를 집었다. 프론트로 연결되는 0번을 누르는 순간 뒤에서 따라온 류신이 전화기를 낚아채 잡아뺀다. 연결된 전화선이 확 뽑혔고, 전화기는 졸지에 끈 떨어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휘우가 달려들어 빼앗기 전에 류신은 전화기를 구둣발로 콱콱콱 힘있게 밟았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깨지고 그 안의 부속들이 튀어나와 류신의 발밑에서 무참하게 부러지고 뽀개졌다. "What are you doing, you bastard!! 뭐하는 거야, 이 나쁜 자식!!" 경악과 분노에 차 그 모습을 바라보던 휘우가 급히 침대옆 1인용 소파 위에 내던져져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들자 류신은 마찬가지로 민첩하게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휘우는 침대 헤드보드에 뒤통수를 쾅 부딪치고 침대 위로 자빠져서 뒹굴었다. 그대로 진행된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몸싸움 끝에 결국 휴대폰은 류신의 손으로 넘어갔다. 류신은 잽싸게 배터리를 빼내 창가로 뛰어가 창을 밀어 열고 밖에 휙 던져버렸다. 본체는 다시 침대 위로 던졌다. "You could fucking hurt someone with that!! 누가 맞으면 어떡할 거야!!" 침대 위에 나동그라져 숨을 몰아쉬고 있던 휘우는 일어나 창가로 달려가 바깥의 동정과 배터리의 행방을 살폈다. 최소한 애꿎은 행인의 몸에 맞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Get out!!" 꼭지까지 열받은 휘우가 연거푸어 소리를 질러대도 류신은 꼼짝하지 않았다. "Get the fuck out!!" 쿠션, 수건, 옷가지, 볼펜, 잡지책, TV 리모콘 등의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물품들을 비롯해 유리 재떨이, 머그컵, 컵 옆에 놓여있던 커피포트 등 잘못 맞으면 다칠 수도 있는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날아와 몸에 퍽퍽 부딪치는데 미동도 없다. 적갈색 카페트가 깔린 바닥은 물과 커피와 담뱃재로 엉망이 되었다. 류신의 감색 스트라이프 슈트와 크림색 실크 넥타이는 말할 것도 없고. 류신은 더러워진 재킷을 벗어 넥타이와 함께 근처의 의자 위에 포개 놓았다. "얘기 좀 하자고 했어." "If you don't, I will. 네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가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검은색 셔츠의 단추를 두 개 풀며 침착하게 던지는 류신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휘우는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류신은 오른손으로 잽싸게 휘우의 티셔츠 뒷자락을 잡아당겼다. 거의 목이 켁 졸릴 뻔한 상황에서 휘우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겨우 티셔츠 목부리를 간신히 두 손으로 잡아늘일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Let me go!!" 떨쳐내 버리려고 발광에 가까운 온갖 몸부림을 쳐도 절대로 떨쳐지지 않는 손. 휘우는 차라리 티셔츠를 벗어버리기로 하고, 자신의 몸통을 잡아끌어당기려는 류신의 왼손을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피하면서 가까스로 오른쪽 소매에서 팔을 빼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문을 향해 그 손을 있는 힘껏 뻗으며 요란스레 뻥뻥 뒷발질을 해댔다. 손끝에 도어록이 닿을 듯 닿을 듯 하며 닿지 않는다. 마치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듯 몇 번의 뒷발질 중 한 방이 뻐걱! 소리와 함께 정통으로 류신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윽!" 옷자락을 움켜잡고 있는 손힘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휘우가 류신의 손을 떨치고 문을 향해 몸을 날리자, 류신은 휘우의 왼쪽 정강이를 잡아챘다. 중심을 잃은 휘우가 앞으로 반쯤 기우뚱한 사이, 류신은 꽉 붙들고 있던 휘우의 다리를 뒤로 확 잡아당겼다. 휘우는 거의 꼬꾸라질 듯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류신의 손을 떨구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러자는 게 아니야! 잠깐 얘기 좀 하잔 말이야!!" "What talk?! What the fuck is there to―! 무슨 얘기?! 무슨 놈의 할 얘기가 어디 있―!" 갑자기 류신의 손에서 거짓말처럼 힘이 딱 풀렸고, 둘의 움직임은 거의 동시에 정지했다. 휘우는 내동댕이쳐지다시피 앞으로 넘어진 채 깜짝 놀라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휘우가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튕겨오르듯 일어난 찰나, 류신은 놀라운 힘으로 어깨를 잡아채어 벽에 턱 밀어붙였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날개뼈가 벽에 쾅 부딪쳐서 휘우는 아픔에 얼굴을 찡그렸다. "방금 뭐라 그랬어?!" "……." 못 들은 척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내가 하는 말 다 알아듣고 있지?!" "……I don't understand what―" "닥쳐!" 류신은 왼손으로 휘우의 턱끝을 잡고 얼굴을 강제로 앞으로 돌렸다. 오른손은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도록 마치 대못인양 어깨를 벽에 찍어눌러 고정시켜두고 있었다. "똑바로 보고 말해!!" "……." "날 똑바로 봐!" 류신과 눈이 마주칠 듯한 순간, 휘우는 머리를 힘껏 흔들어 다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턱에 또 손가락이 닿자 휘우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결사적으로 뿌리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 다음 리액션이 없다. 애꿎은 천장과 벽 사이 몰딩만 째려보던 휘우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얼굴을 조금 돌려 곁눈질로 류신을 쳐다보았다. 류신의 시선은 이미 얼굴보다 훨씬 아래에 꽂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휘우의 반쯤 드러난 가슴팍과 배 주변. 휘우는 그제서야 소매 한 짝이 벗겨져 티셔츠 한쪽이 둘둘 말려 오른쪽어깨 위로 기어올라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옷을 내리려던 동작은 류신에 의해 민첩하게 저지되었다. "가만 있어봐!" 벽에 바싹 찍어눌리던 어깨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뀌었다. 손힘이 어찌나 센지 어깨가 으스러질 듯, 손가락 마디마디가 피부를 뚫고 어깨뼈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다. 하지만 옷 속에 가려져 있던 반쪽까지 활짝 들추어진 지금으로선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격렬한 몸싸움으로부터 겨우 한 숨 돌렸던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Look, I've got no idea why―" "조용히 해." 다급한 마음에 주의를 돌리고자 말을 걸어봤지만 이제 소용이 없다. 오래된 흉터에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이제 틀렸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이제는 세월과 함께 아물어 희미해진 상흔傷痕. 어린아이의 무자비한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죽죽 그어진 하얀 칼자국들. 가슴과 배를 온통 뒤덮은 옛 상처들은 언뜻 보면 미세한 실오라기가 다닥다닥 들러붙은 듯 피부 위로 가늘게 지글거리며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류신은 이제 길게 벌어진 상처를 중간중간 봉합한 선명한 흔적들을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레 더듬고 있었다. "…why you're doing this―" "휘우야." 커다란 종이 가슴속에서 뎅뎅뎅~ 울렸다. 환청이 아닌 그 소리를 휘우는 분명히 들었다. "…to me." 잠꼬대처럼 웅얼웅얼 힘없이 말을 마쳤을 때, 휘우는 류신과 눈이 마주쳤다. 하품과 눈물 중 더 전염성이 강한 것은 어느 쪽일까. 휘우는 문득 생각했다. 최소한 눈병보다는 눈물이 몇백 배 더 강하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웃음보다도 더욱. 새까만 눈동자와 희다기보다는 푸르다고 해야할 서늘한 흰자위. 그리고 그 앞에 그렁그렁 드리워진 투명한 물의 막. 까마귀 털처럼 검고 촘촘한 속눈썹에 살짝 맺혔다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김휘우." "……." 마치 바이러스처럼. 가장 무방비한 부분으로 침투하여 면역이 약한 곳을 집중 공략하는. "휘우야." "……." "아, 휘우야……." "……." "휘우야. 휘우야……." 뚝뚝 떨어지는 녀석의 눈물이 스며들어 어딘가 아직 채 아물지 않았던 상처까지 닿았는지 가슴 안쪽 깊은 곳이 화끈화끈 쓰라려 온다. 어깨를 밀어붙이던 손에는 이미 힘이 빠졌고, 자신을 붙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휘우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끊임없이 주문을 뇌까리듯 부르는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10년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죽은 이름. 피부 위에 새겨진 악몽같은 기억을 다독거리던 따뜻한 손이 이제는 얼굴로 올라왔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손끝으로 형태를 확인하듯 천천히 어루만진다. 아니,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무엇 하나 똑똑히 보이지 않는다. 가슴속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찬 강풍을 동반한 거친 폭우. 목표를 희미하게 만들어 본래 의지를 꺾고 현재 상황에 젖어들게 만드는 아주 나쁜 상황. 여기서 휩쓸려서는 안 되는데 그냥 주저앉아버리고픈 마음이 조금씩 생겨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는 류신의 손가락 끝에서 물기를 느끼고 그것이 무엇때문인지 깨달은 순간, 휘우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I, I must……go." "……."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던 류신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 주변을 감도는 공기조차 달라질 정도로. "…really have to go." 정말 가야한다. 단순히 피하고자 함이 아니다. 늦기 전에 공연장에 가봐야 한다. 지금의 내게는 그게 너보다 몇백만 배 몇천만 배 더 중요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우리말로 해." 류신은 조금 전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우리말로 하도록 해." "……." 휘우는 묵묵히 류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달리 할 말은 없어.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정작 해선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이제 그만 가야 한다는 것 외에는. "I've got to go right now. Got something real important to do. 지금 당장 가야 해. 중요한 일이 있어." 티셔츠를 내리고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휘우가 말했다. 티셔츠 목부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제 그만 버려야겠다. 원래부터 '럭키 셔츠'랍시고 줄기차게 입어대서 많이 낡기도 낡았다. 이걸 입으면 꼭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럭키 셔츠였는데 이제는 너무 낡아 그 효력이 다 닳았나 보다. "안 돼. 너한테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옛날 그대로인 명령조의 말투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일단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Let's talk later. Where are you staying? I'll come over, I promise. 이따가 이야기하자. 어디 묵고 있지?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약속할게. " "안 된다고 했어!" 류신은 문을 막아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Then you can wait for me here. Won't be too long, really. Got my passport here anyway. You know I can't go anywhere without it. 그러면 여기서 기다려도 좋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정말로. 어차피 여권도 여기 있으니까. 여권 없이 떠나지 못 하는 것 알잖아." "그만 좀 해라. 안 된다고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하지?! 말로는 통하지 않는 건가?!" 류신이 마른 하늘에 울리는 천둥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휘우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복도까지 들리고도 남을텐데 이 정도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층뿐만 아니라 위층, 아래층 전부 투어 일행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공연이 임박한 이 시간에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 고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우리말로 하라고 분명히 말했다, 김휘우.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이건 아니야. 이 이상은 안 돼. 잊혀진 이름이 다시 불린 순간, 갑자기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녀석과 뭘하고 있는 거냐. 자신에게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까딱 잘못했다간 큰일날뻔 했다. 이대로 어물쩡 휘말려버리면 안 된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모든 것이 물거품. 어쩌면 이미 잘못 디뎌도 한참 잘못 디딘 것일 테지만. 정해진 트랙을 벗어난 것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나가는 눈먼 말처럼. "I don't know what came over you but……,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려. 약속은 무슨 약속? 갔다오긴 어딜 갔다온다는 거냐, 하고 생각을 다잡으며 이리저리 굴리던 눈에 문득 방 한구석 덩그마니 놓인 룸서비스 카트가 들어왔다. "……you are very much mistaken, obviously. 넌 확실히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어." 휘우는 곧장 그리로 뛰어가 물이 반쯤 든 유리컵을 집어 맞은편 벽을 향해 냅다 던졌다. 콘크리트 벽에 부딪치자 컵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 보기 좋게 깨졌다. 휘우는 그중 가장 뾰족하고 긴 조각을 하나 집어들고 조용히 말했다. "Move off from the door. 문에서 떨어져." 보일 듯 말 듯한 코웃음과 함께 류신이 꼼짝도 하지 않자, 휘우는 자신의 목에 유리조각을 갖다댔다. "Want to see some blood? 피라도 보고 싶은 거냐?" 턱 바로 아래, 목젖보다 조금 위, 연약한 피부 표면을 가로로 스윽 긋자 상처에서 방울방울 배어나온 붉은 액체가 살갗을 타고 옷 속으로 흘러내렸다. 뜨끈하던 피가 잠깐 사이에 금방 차갑게 식는다. 생생한 온도의 변화를 피부로 체감하며 휘우는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뭐하는 짓이야!!" "Stay away. 다가오지 마." 놀란 류신이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휘우는 자신의 목에 유리조각을 더욱 가까이 갖다대며 침착하게 말했다. "Just move aside. Do it as I said. 어서 물러서기나 해.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그리고 여권과 지갑, 관계자용 출입 패스 등 주요 소지품이 든 검은색 크로스백을 챙겨 어깨에 맸다. "Don't you come near me. One step closer and―, 가까이 오지 마.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그 순간 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약간의 사이를 두고서 똑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 둘은 문 너머에 신경을 집중하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또 다시 한 차례 더 노크를 하고 안으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자 발소리가 뚜벅뚜벅 멀어진다. "왜 가만히 있었지?" 누구였을까를 휘우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류신이 물었다. 비웃는 듯한 어조에 휘우는 은근히 심사가 뒤틀렸다. "좋은 기회였잖아? 이상한 인간이 들어와서 괴롭힌다고 도움을 청해도 되는데 왜 그냥 보낸 거지?" 아, 그렇군. 정말 그랬어도 됐는데. 도움을 청할 다시없는 기회였는데. 왜 그랬을까? 그저 이 아수라장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아래위층 앞방옆방에 아무도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진정하고 말도 안 되는 짓 좀 그만해라. 나 이런 꼴 보자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류신이 천천히 걸음을 떼자 방심했던 휘우의 어깨에 다시 바짝 긴장이 들어갔다. "걱정하지 마. 이거 복도에 내놓으려고 그런다. 쓸데없는 방해는 받고 싶지 않아." 류신은 왼손을 위로 쳐들어 안심시키며 조심스럽게 카트를 끌어당겼다. 그제서야 휘우는 '아, 아까 그 노크소리는 저걸 찾으러 온 거였겠구나' 하는 데에 막연히 생각이 미쳤다. 머리의 반은 류신의 움직임에 일단 경계 태세에 접어들고, 나머지 반은 멍청히 딴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어느 구석인가에서는 왜 이런 시점에서조차 긴장감 없이 쓸데없는 헛생각에 넋을 빼놓느냐고 자신을 책망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생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본성이라는 게 있고 휘우의 경우, 그것이 약간의 긴장감 부족과 때때로 좀 무모하다싶은 돌발 액션, 늘 머리 한구석에 구름 한 조각 두둥실 띄워놓은 듯한 잡생각, 그리고 음악을 제외한 모든 면에 있어 어딘가 똑 떨어지게 야무지거나 치밀하지 못함이었다면, 마치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휘우는 류신이 문을 열듯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척 하다가 갑자기 발로 확 차서 밀어굴린 카트를 채 피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카트는 옆으로 넘어졌고 휘우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새를 놓치지 않고 확 달려들어 덮친 류신에게 휘우가 깔아뭉개졌음은 물론이다. "You bloody bastard! Fucking dirty bastard! 이 후레자식! 치사한 새끼!" "이제 그만 좀 하시지?" 류신은 유리조각을 꽉 움켜진 오른쪽 손목을 꺾으며 말했다. 휘우가 허우적허우적 안간힘을 쓰며 무릎으로 등짝을 퍽퍽 찧는데도 류신은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휘우의 왼쪽 무릎을 꽉 움켜잡아 꼼짝 못하게 하고 오른쪽 다리는 살짝 비틀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서 깔고 앉았다. 결국 위협 겸 자해 수단이었던 볼품없는 유리조각은 뼈가 꺾이는 고통에 못 이긴 신음소리와 함께 카페트 위로 툭 떨어졌다. "그 정도 했으면 됐어. 네 노력은 인정하마." "Shut the fuck up! 닥쳐!" "가만히 좀 있어 봐. 여기 좀 잘 보게." 휘우가 쉴새없이 휘두르는 왼쪽 주먹을 반은 맞고 반은 피하면서 류신은 한 손으로 휘우의 양손목을 모아쥐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저항이 좀 진정되자 목에 난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피는 오래 전에 멎었고 상처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다. 긁혔다기보다는 살짝 베였다고 할 만한 상처이긴 하지만 꿰매야 할 정도는 아니다. 검을 만지다 보면 이 정도 베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크게 걱정할만한 건 아니야. 소독하고 약 바르고 반창고 좀 붙이면 되겠어. 그래도 당분간은 고생 좀 하겠는데? 그러니 대체 애초에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Shut up, fucker! You're not a doctor. 시끄러, 잡놈아. 네가 의사냐?" 손발이 다 묶여 발길질도 주먹질도 멎었지만 대신 입만큼은 쉬지 않는다. "거봐. 다 알아듣고 있잖아. 어차피 들통난 거 이제 그만 우리말로 하지 그래?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왠지 들뜬 듯한 류신의 말에 휘우는 움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신 차려. 상황에 휘말리면 안 돼. 말려들면 안 돼. "너 말이야. 어디 가서 은행 강도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겠더라. 아주 어설펐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버럭 소리를 질러대던 강류신은 어디로 가고 방 안에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히죽히죽 웃고 있는 녀석만 남아있었다. "그래도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하하하."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진 휘우는 류신이 웃느라 힘이 좀 빠진 틈을 타 몸을 약간 움직여 보며 고개를 옆으로 확 틀다가 외마디 비명을 꽥 질렀다. 바로 얼굴 옆에 포크가 얌전히 누워있던 걸 몰랐던 것이다. 카트가 넘어지면서 우루루 쏟아졌던 내용물 중 하나였던 날카로운 은빛 포크. 다행히 눈가를 긁히는 것 정도로 끝났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눈을 찔릴 뻔 했다. "왜 그래? 어디 봐!" 류신은 고집스레 얼굴을 들지 않는 휘우의 눈가를 살펴보느라 상체를 제법 많이 굽혀야 했고, 그 반동으로 휘우의 오른쪽다리를 깔고 앉았던 하체가 약간 붕 떴다. 휘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무릎으로 힘있게 류신의 등허리를 가격했다. 지속적인 연타에도 굴하지 않았던 류신이지만 예기치 못한 기습공격에는 버티지 못했다. "이 자식이!" 미꾸라지처럼 옆틈으로 빠져나와 두어 걸음 기어가다가 그만 일어서려는 찰나, 휘우의 한쪽 발목을 류신이 탁 잡았다. 그 바람에 다시 균형이 흔들려 무릎이 쪼개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납작 넘어지고나서도 휘우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채 낮은 포복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혼신의 힘을 다해 전진하려 애썼다. 물론 아직 자유로운 한쪽 다리를 연신 휘저어대고 바닥에 잡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뒤로 집어던지면서. "Let me go! Let me fucking go!! Leave me fucking alone!! 놔! 이거 놔! 날 내버려둬!!" 류신은 간신히 휘우의 나머지 허벅지까지 같이 끌어안는 데 성공했고 휘우가 반항하며 미친 듯이 발버둥치는 와중에 발길질 한 방이 '뻑' 소리를 내며 류신의 가슴팍 중앙을 가격했다. "크헉!" 순간 류신이 한 손을 가슴에 갖다대며 허리를 푹 꺾자 휘우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달려들어 붙잡는 움직임이 없는 것이 오히려 찜찜하기만 하다. 결국 휘우는 한두 걸음 떼놓다 말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류신은 놓친 녀석을 잡으려 하기는커녕 상체를 깊이 둥그렇게 만 그 자세 그대로 숨이 넘어갈 듯한 기침만 하고 있었다. 암만 해도 뭔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상황. 휘우는 어쩔줄 몰라 그 자리에 멈춰섰다. "……Hey!"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되는 기침소리. "Are you……alright?" 괜찮다, 안 괜찮다, 하다 못해 손짓이든 뭐든 대답이 있어야 하는데. 이거 뭔가 큰일이 난 게 아닌가 싶어 휘우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지? 네가 괜히 나 때문에 어디 다치기라도 했으면 난, 난 어떡해야 되는 거냐……. 그러던 류신이 갑자기 앞으로 풀썩 꼬꾸라지기까지 하자 휘우는 기겁을 하고 달려갔다. "Hey, are you hurt? 이봐, 다친 거야?!" 쿨럭쿨럭 "Hurt somewhere or what?! Where's the pain? Come on! 다쳤냐니까?! 어디가 아픈 거야? 이봐!!" 쿨럭쿨럭쿨럭. "야, 강류신! 임마!!" 휘우가 애타게 류신을 부르며 그 옆에 쭈그려 앉은 순간, 류신이 기침을 딱 멈추고 번뜩 고개를 들었다. 등을 굽히고 기침을 해대느라 시뻘개진 얼굴과 섬뜩한 눈빛. 하지만 자유자재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보아, 어디든 크게 부상당한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너 이리 와!" 금방이라도 다 죽어갈 것처럼 기침을 해대던 류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놀라운 완력으로 자신의 팔을 질질 끌고 침대를 향해 가기 시작했을 때, 휘우는 비로소 이 여우같은 녀석한테 속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내가 이 짓만은 안 하려고 했었는데……," 류신은 휘우의 양손목을 모아 침대 기둥에 넥타이로 꽁꽁 묶으며 말했다. "……정말 이러지 않을 수가 없구나. 원인 제공자는 너야. 그것만 알아둬라." "시끄러. 빨리 풀기나 해!" 휘우는 한없이 발악에 가까운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야, 이거 당장 집어치우고 말 듣지 않으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버릴 거야. 진심이야." "하?! 다리를 뭐 어쩌고 저째? 네가 놀부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약간 걱정이 되기는 하는지 휘우는 마치 급작스럽게 시동이 꺼진 동력 엔진처럼 움직임이 스르르 늦추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것도 아주 잠깐일 뿐, "그래, 해봐! 어디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분지를 수 있으면 분질러봐!!" 금세 열렬한, 그러나 어딘가 조금 적중률이 무뎌진 발길질 또는 헛발질 리스타트.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류신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스스로도 잠깐 의심해봤지만 어쨌든 진심이다. 가슴속이 뒤죽박죽 피가 들끓는 기분이다. 화가 난 것도 같고 기쁜 것도 같고 억울한 것도 같고 여하튼 혼란스럽다. 그저 확실한 것은 이놈의 팔다리를 몽땅 부러뜨려서라도 꼼짝 못하게 잡아두고 싶다는 것뿐. 류신이 묵묵히 휘우의 오른쪽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자신의 다리로 고정시키고 왼쪽 다리를 안아 발을 겨드랑이에 꽉 낀 다음 한 손은 무릎 뒷편을, 한 손은 발목을 움켜잡아 빨래를 짜듯 반대 방향으로 비틀기 시작하자 휘우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아픔을 참는 눈치였다. 이런 식으로는 다리를 부러뜨리기 힘들다. 그저 아픔으로 겁이나 좀 주는 정도. 류신은 그래도 휘우가 전혀 굽혀드는 기미가 없자, 양손을 탁 놓았다. 다리가 침대 위로 탁 떨어지며 스프링에 턱 튕겼다. 류신은 자신의 무릎으로 눌러 휘우의 무릎을 고정시키고 발을 잡아 들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어." 발목을 단번에 정말로 힘껏 뒤집어 꺾어버릴 태세를 취하자, "자, 잠깐만!" 휘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왜? 마음이 변했냐?" 류신은 여유있게 대답했다. "얌전히 말 잘 들을 거야?" "……." "앞으로 계속?" 휘우는 금방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그게 아니라……." 어딘가 발음이 어눌하고 느려진 한국말로 더듬어가며, "그럴 거 아니면 방해 말고 가만히 있어. 시간 끄는 수작 따위 나한테 안 통해." 휘우가 불안한 눈빛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류신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흐뭇하게 치켜올렸다. 그러자 일 초도 안 되어 바로 반응이 터져나온다. "너, 너……." "말해." "……누가 남의 침대에 구둣발로 올라오래!!" 류신은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시트에는 앞부분 반 토막 정도만 선명한 구두 발자국이 몇 군데 찍혀 있었다. "미안하게 됐군." 타조 다리 가죽으로 만든 검은색의 고급 핸드메이드 구두를 벗어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그 김에 발 밑에서 상당히 걸리적거리던 시트와 얇은 덧이불 뭉치도 휙 던져버렸다. 안 그래도 이미 발 디딜 틈 한 뼘조차 없이 난리가 난 방바닥에. 류신은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수라장도 이런 아수라장이 없다. "굳이 침대에 묶어놓은 건 다른 뜻은 없어." 류신은 갑자기 뜬금없이 튀어나온 스스로의 말에 꽤 당황했다. "너도 한번 봐. 지금 이 방이 얼마나 엉망인지." 왠지 변명같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휘우와 눈 마주치기가 좀 어색하다. 쓸데없는 시선을 방 안에 한번 더 휘휘 준다. "아주 참기 힘들어 죽겠지?" 휘우의 말에 류신은 깜짝 놀랐다. 깜짝 놀란 자신에게도 또 한번 놀랐다. "당장 치우고 싶어 좀이 쑤시겠구만. 머리카락 하나 떨어진 것도 못 참는 인간이." 놀리는 듯한 어조로 휘우가 덧붙이고 나자 류신은 자기도 모르게 어딘가 허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그렇지 싶은 기분. 왠지 안심도 조금 되며 한숨이 다 나온다. 그리고 갑자기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오른다. "아주 잘 아는데?" 류신은 휘우의 겨드랑이 사이께로 두 손을 짚으면서 허리를 잔뜩 숙여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맞아. 지저분한 방 안에 있으니 못 참겠어. 미칠 것 같아. 돌아버릴 것 같아." 녀석의 눈빛이 불안하게 출렁거리는 것이 제법 통쾌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아니, 잘 기억하고 있지?" "……." "옛날 일이잖아. 아주 옛날일." "……." "설마 관속에 누워서 내 생각만 한 거냐?" 순간 휘우의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고 마치 얼어붙은 듯 몸이 완전히 경직되자 문득 좀 안됐다 싶기도 했지만 그런 사정을 봐주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괴롭히고, 괴롭히고, 또 괴롭혀주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듯하다. "무덤에서 언제 나왔어? 어떻게 나온 거야? 누가 꺼내줬지? 목숨은 누가 다시 붙여줬냐? 바다는 어떻게 건넜으며, 국경은 어떻게 넘었어? 출입국사무소에서 죽은 놈이라고 그냥 통과시켜주던? 산 사람한테 붙어서 묻어가라고?!" "……."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가. 지금 이 게임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다. 처음에는 그 놈이 이 놈이 맞는지 확인해내는 미션 외에 다른 것은 일부러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었다. 혹시나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그 놈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고까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그리고 결국 이놈이 그놈이더라는 사실을 확실히 입증하며 화려하게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던 순간의 감격과 기쁨. 하지만 막상 그 다음 단계에 대기하고 있는 미션은 패턴이 또 다르다. 일단은 해결해야 할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분명히 죽어서 땅속에 묻힌 놈이 어쩌면 이렇게도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남의 이름과 신분을 뒤집어쓰고 전혀 다른 사람 행세를 하면서. 10년 동안이나 자신을 감쪽같이 속이고. "너, 네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아냐?!" 그 동안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자 시간이 대폭발을 일으킨 것처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하루라도 이 녀석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먹고, 배출하는 모든 생리작용의 와중에. 공부하고, 일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든 일상생활 중에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하루의 끝에 누워 잠들기 전에. 그리고 꿈속에서조차. 계절이 오가고 해가 바뀌어도. 언제나. 늘. 항상. 문득 스치는 매 순간마다. 10년을 초단위로 환산한 높이만큼의, 하늘 꼭대기까지 닿고도 남을만한 그리움의 탑. "용서할 수 없어." "……." "나를 속였어." "……."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독소를 품은 검은 연기와도 같은 감정들이 몸속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서 마구 뿜어나오는 것 같다. 어디에 어떻게 풀어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배신감과 원망. 분노. 마음속으로 쑤시고 들어온 좀비와 몬스터를 다스리는 게임에는 공략조차 없는데. 게임은 끝까지 가보고 나서야 끝이 어떤지 알 수 있는데. 이래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난 네 시체도 봤었다." 생각하니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류신은 웃고 말았다. 어금니사이로 실실 바람이 새어나온다. "다리 한 짝이랑 머리통 반쪽이 전부였지만. 그나마 부서지고 새까맣게 그을려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어……."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데 그게 휘우라고들 하니까.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사고는 컸었고 끝끝내 수습되지 않은 시체도 상당수에 달했었다. 쫓겨가듯 유학길에 오르고 나서도 혹시 언제 살아돌아올지 모른다 생각하고 계속 촉각을 곤두세운 채 기다렸지만 세월은 점점 휘우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할 뿐이었다. 땅에 묻고 가슴에 묻고 시간에 묻고 나서 한참 후 어느 날 자연스레 그 사실을 받아들인 자신을 깨달았다.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그랬는데, 그렇게 살아왔는데, 시체라고 내놓은 검은 뼛조각 몇 개를 바라보던 그 참담한 심정을 회상하며 스스로를 비웃을 도리밖에 없는 지금 상황. 평생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힌트로도 기억은 순식간에 과거를 바로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낸다. 어린 나이에 겪은 모진 충격. 인생관을 바꿔놓을 정도의 강렬한 패배감. 오랜 세월 동안 생활 전반에 드리워져 있던 음울한 그림자. 아직도 생생한 그 모두가 헛지랄이었다니. "아주 대단해." "……." "넌 항상 번번이 날 물먹였었지." "……."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전부 그냥 깜찍할 정도야." "……." "근데 이번 건은 너무 컸어." "……." "도저히 용서가 안 돼." 10년 동안 꾸준히 차곡차곡 쌓아올린 감정의 역사가 한낱 공중누각에 불과했다. 거짓에 뿌리를 두고 허공에 붕 떠 있는, 언제 쓰러져 무참히 깨어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유리탑. "……용서해달라고 안 했어." 머리를 창가쪽으로 돌리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휘우가 입을 열었다. 순간 류신은 휘우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닥쳐!" 영 용서가 되지 않는다면 완전히 끊어내고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네가 뭘 알아! 뭘 안다고 떠들어! 입 다물어!!" 무방비 상태로 묶여있는 녀석을 미친 듯이 마구 흔들어대고 있는데 문득 목의 상처가 빨갛게 조금 부어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고 해서 소독도 안 하고 내버려뒀다간 자칫 덧날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제서야 제 정신으로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뭘 하더라도 저 상처부터 어떻게 좀 한 다음에 얘기를 계속하든지 말든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프론트에 전화를 걸려고 전화기를 찾는데 없다. 자신이 깨부수어버렸다는 걸 조금 후에야 깨달았다. 의자에 포개놓은 재킷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깐 망설이다가 방에 비치되어 있는 호텔 비품인 메모지에서 전화번호를 보고 대표전화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끊었다. 이 호텔을 나설 때까지는 별 잡음없이 조용하게 있다가 나가고 싶었다. 그 대신 이쪽 지사에 있는 부하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의 홋수를 말하고 상처에 바를 구급약품 몇 가지를 사다 달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방에 약 있어. 됐다고 해." 휘우가 가리키는 옷장 안을 열어보니 하얀 상자에 빨간 십자 마크가 그려진 구급약상자가 있었다. 됐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네 거냐?" 상자 안에는 소독약과 약솜, 연고, 반창고, 붕대 외에도 웬만한 상비약품은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두통약, 소화제, 멀미약부터 시작해서 신경안정제까지. "일행 중에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한 명 있어. 그 사람이 내 소관이기 때문에 일단 갖고 다니는 거야. 뭐, 앞으로는 상관없는……." 뒷말은 혼잣말하듯이 우물우물하며 넘겼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는지 채근해서 물어볼까 싶었지만 굳이 그럴 마음은 없었다. 류신은 약 상자 안에서 12개들이 콘돔곽을 발견했다. 케이스 겉포장의 테이프도 뜯지 않은 새것. "이것도 구급약에 해당되는 건가?" 갑자기 불쑥 열이 치밀어서 휘우의 얼굴에 확 던졌다. 작은 종이상자가 얼굴에 탁 맞고 옆으로 떨어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윙크하듯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류신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눈길을 휙 돌렸다. "손 씻고 올게." 류신은 출입문 바로 옆의 욕실로 들어갔다. 지저분하거나 어지럽혀져 있지는 않았지만 방금 청소하고 난 다음 같은 청결하고 건조한 느낌은 없었다. 확실히 누군가 사용한 자취가 물씬 남아있다. 산 사람의 생활작용의 흔적들이. 욕조와 샤워커튼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물방울, 습기로 조금 늘어져 빼뚜름하게 걸린 타월, 휴지통 안에 버려져있는 젖은 머리카락 뭉치, 세면대 위 거울 앞 선반에 놓여있는 반쯤 쓴 스킨과 로션병, 물 묻은 유리컵과 그 안의 칫솔. 류신은 촉촉하게 젖은 칫솔을 만져보았다. 왠지 손이 조금 떨렸다. 아니, 손만이 떨린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떨리고 머리가 떨리고 혈관의 피가 발끝으로 몰렸다가 솟구치기를 거듭하며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갑자기 가슴이 터질 듯 벅차와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 류신은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불규칙한 두근거림과 떨림을 가라앉히도록 심호흡을 거듭했다. 살아서 돌아온다면, 하는 실없는 생각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혹시 이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나 왔어" 하고 멋쩍은 듯 웃으며 일어나 자신을 반기는. 달콤하고 서글픈 상상.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는데……, 나는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류신은 감전된 듯 벌떡 일어나 세면대의 수도를 틀었다.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고 차가운 물에 손을 적신 뒤, 역시 사용한 흔적이 엿보이는 타원체의 비누를 집는다. 손 안에 쏙 들어왔다고 꼭 쥐면 잠깐 힘 조절을 놓친 사이에 여지없이 미끄러져 달아나는, 잡아도 잡을 수 없는 물체. 류신은 그 비누로 손가락 틈새, 손톱 속까지 깨끗이 씻고 맑은 물로 손을 말갛게 헹구었다. 무심함 속에 행해지는 일련의 정갈한 동작들. 류신은 젖은 수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위의 선반에서 보송보송한 새 수건을 꺼내어 물기를 닦고 욕실을 나왔다. 힘있게 닫히는 문이 일으킨 작은 바람에 끝을 맞춰 반듯하게 걸어놓은 수건 자락이 살랑 흔들렸다. 류신은 침대 사이드에 걸터앉아 알콜을 솜에 흠씬 적셨다. 휘발성의 매캐한 액체가 방울방울 침대보에 뚝뚝 듣는다. "근데 이노므 손은 언제까지 묶어놓을 거냐?" "따가울 거다." 류신은 휘우의 묻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주색으로 굳은 기다란 상처에 솜을 가져갔다. "대답부터 해!" 몸을 옆으로 한껏 비틀며 굽힌 팔꿈치로 휘우는 류신의 손을 탁 쳤다. 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류신은 바닥에 떨어진 알콜솜을 잠깐 보다가 새 솜뭉치 조각을 봉투에서 꺼냈다. "그건 됐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손이나 풀어줘." 류신은 휘우를 흘깃 쳐다보았다. "왜?" "팔이 저려. 어깨도 아파." 솜에 다시 알콜을 묻힌다. "아파도 돼." "……." "그 정도쯤 얼마든지 아파도 돼." "……." "손목 좀 잠깐 묶어놨다고 그 팔 어떻게 되지 않아. 묶여 봤었으니까 잘 알잖아?" "몰라. 기억 안 나.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풀어줘." 발버둥칠 조짐을 보이자 류신은 조용히 휘우를 노려보았다. "자꾸 그러면 발목까지 묶어놓을 거야. 알아서 미리 미리 조심해." "야!" 류신은 벌떡 일어나 방 안을 한 차례 둘러보고,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있는 전화선을 뽑아왔다. "이것도 역시 네가 자초한 거야." 반항하는 다리를 강제로 꺾듯이 잡아채 바짓단을 걷어 붙였다. 꽉 조여진 가느다란 발목이 눈에 확 들어오는 순간, 뜨거운 국물을 단숨에 들이킨 것처럼 가슴이 요란하게 펄쩍 한 번 뛰었다.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이어지는 선이 여전히 곱고 손끝에 닿는 피부는 여전히 매끈하다. 하지만 바짓단을 더 올리자 하얀 정강이께 자라잡은 보기 흉한 검붉은 피멍이 보였다. 방바닥에 뒹굴던 자잘한 유리조각들에 어느 틈에 베였었는지 무릎 전체에도 심각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꽤 아파 보인다. 청바지 안쪽으로도 피가 묻어 있다. 몸싸움이 제법 치열했던 만큼 구석구석 이만한 상처가 여러 군데 생겼겠구나 싶다. 류신은 일단 무릎의 상처에 재빨리 알콜솜을 척 갖다댔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공격에 휘우는 탄성과 같은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가 귀에 정통으로 꽂혀 들어와 등줄기가 찌릿 울렸다. 맥박이 조금 빨라지는 것 같다. "또 아픈 데 없어?" 스스로에게 태연한 척 류신이 재빨리 물었다. "있어." "어디?" 또 어딘가 싶어 팔, 다리, 몸통을 스윽 훑어보고 있는데, "손목." 휘우가 묶인 손목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한다. "팔, 어깨." "……." "아파. 풀어줘."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가 나온다.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야." "……." "근데 장난 아니게 아파." 왠지 웃고 말아버릴 것 같아 류신은 너풀거리는 입가의 근육에 잔뜩 힘을 주고 휘우를 노려보았다. '웃어. 웃어버려 어서 웃고 그만 풀어줘.' 하는 듯한 간질간질한 표정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녀석의 얼굴에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받쳐 올라왔다. "풀어주면 어떻게 할 건데?" "……." "그것부터 말해 봐라." "……." "또 내 뒤통수치고 도망갈 거냐?!" "……무슨―" "너는 꼭 도망친다고 깝죽대다가 사고를 치잖아!!" 류신은 일어나 방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빽 질렀다. 골이 흔들리고 귀가 따가울 만큼.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 하지 마라." "아니. 정말 몰라." 휘우는 정색을 하고 분명히 말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었지?! 너, 내가 하라는 대로 내 옆에만 가만히 붙어 있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 몰라?!"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다, 나는." "시끄러워!!" 류신은 방 안을 두서없이 종횡무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발에 뾰족한 것이 밟혀 따끔거렸지만 신경쓸 여유도 없었다. "말해봐. 왜 그랬어? 왜 도망쳤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냐? 아니면 싫었어?! 더 이상 내 옆에 있고 싶지가 않았던 거야?!" "그런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듣기 싫어." 마치 귀찮은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말투에 울컥 격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을 류신은 스스로 납득하기 힘들 정도의 인내력으로 다스렸다. "할 수 없어. 듣기 싫어도 들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사고로 죽은 놈이 아무도 모르게 남의 나라에 가서 감쪽같이 딴 놈 행세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단 말이냐? 이게 대체 무슨 조화야? 나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대답해줄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자초지종을 말해봐." 어느새 휘우는 고개를 옆으로 완전히 돌려 외면한 채 아예 눈까지 감고 있었다. 귀찮음과 짜증을 애써 참는 것처럼. 얼굴에 잔뜩 드리워진 피곤한 그늘. 흥분으로 시야가 어른어른거리는 와중에도 류신은 휘우를 다시 본 후 처음으로 그 얼굴에서 세월을 진하게 실감했다. 예전 기억에는 없는 낯선, 지친 어른의 표정.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옛날일에 연연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둘 사이에 흘러간 10년이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골짜기처럼 뚜렷하게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사실은 10년 전에 대체 어떤 귀신 곡할 일이 벌어졌던가보다 10년 동안 이 녀석이 어떻게 변했는가가 더 중요한 일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문득 들었다. "뭔가 있긴 있었겠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지. 나도 알고 싶어." "수작 떨지 마!" 류신이 조급하게 다시 침대를 향해 다가가자, 휘우는 묘한 미소까지 띠고 류신을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알고 싶은 것보다 내가 알고 싶은 게 더 크지 않을까? 근데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쉽게도 정말 기억이 안 나거든. 미안해." "……."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내 기억이 완전치가 않아. 군데군데 조각났어.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생각이 안 잡히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가 믿을 것 같아?!" "정말이야. 네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기억나는 것도 없고 너한테 해줄 얘기도 없어. 이상 끝."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여운으로 마침표를 외치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류신의 머릿속에서는 이 어지럽혀진 방보다도 더한 혼란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한 날이다. 감당하지 못할 센세이션이 몸에서 머리에서 번갈아 빵빵 터지고 있다. "적당히 넘겨서 피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 안 통한다 그딴 거. 말을 해. 해야 해." "기억 안 난다고 말했잖아." 안타까움 때문인지 초조함 때문인지 목이 바짝 탄다. 류신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물어보자." "그만 물어. 아퍼. 온몸에 이빨 자국 난 거 안 보여?" "……." "미안해. 오랜만에 한국말을 했더니 말장난이 하고 싶어서." "……." 상큼하게 웃는 얼굴에 이상하게 점점 맥이 빠진다. "미안해. 근데 재밌네." "한 가지만 묻겠다고 했어." "묻긴 뭘 묻어? 어디에? 하핫. 아, 미안해. 뭔데 그래?" 휘우는 조금 소리내서 웃기까지 했지만 류신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심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묻고 싶지만 묻기 힘든 모든 일들. 하나씩 묻고 속시원한 대답을 듣고 나면 완전히 묻을 수 있을까. "너, 현재 생활에 만족하냐?" "응? 무슨 말이야?" 얄미운 미소를 계속 머금은 채. "김휘우로서가 아닌 지금, 제이 뭐시깽인지로서의 생활에 만족하냐구. 이게 더 행복해?" "물론." 주저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이 나온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야 이거. 이름 따위 국적 따위 상관없어. 이 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다. 꿈만 같애. 이것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해." 입술에 기름친 것처럼 술술 나오는 답변에 좀 멍해졌다. 그 동안 이 녀석,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사람들과 무엇을 얼마큼 어떻게 하면서. 문득 생각이 들자 가슴이 덜컹했다.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시제는 상대적. 내가 여기 서 있다고 너도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니란 걸 류신은 충격속에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 "조각났다는 네 기억 속에……," "……." "……나는 얼마나 있는 거냐?" 비내리는 창 밖 먼 하늘을 향해 황망히 시선을 굴리며 묻고 류신은 천천히 휘우를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술술 대답을 뱉어낼 것처럼 벌어졌던 입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됐어. 이쯤 해두자." 땅속으로 두 발이 쑤욱 꺼져들어가는 기분으로 류신이 중얼거리자 휘우가 얼른 "아니. 아직 대답 안 했는데." 한다.. "그게 정 궁금하면 이거라도 풀어주고 묻던가." 그리고는 머리 위로 묶인 팔을 흔들면서 나른하게 씨익. 못된 녀석. 류신은 자석에 이끌리듯 천천히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나도록 해주겠어. 죽었다가 깨어났대도 네가 나를 잊을 수는 없어. "풀어줄까?" "응." 묶인 손목에 류신이 손끝을 가져가며 묻자, 휘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가만히 있어." 귓가를 거쳐 턱선을 따라 서서히 목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리자 살을 찢고 튀어나올 듯 파닥파닥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혀끝에 닿는 붉은 상처에서는 익숙한 쇠맛이 났고, 숨을 죽인 채 몸을 비틀며 흘리는 가녀린 신음은 귓속에 딱지처럼 붙어있던 기억 속의 소리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걸로 소독 끝?" 휘우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류신은 제 정신이 돌아왔다. "아니.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몸을 일으켜 휘우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른 어떤 것을 연상케 하는 그 자세를 굳이 취할 필요는 없었지만 류신의 의도는 명백했다. 상처에 알콜솜이 닿자 따가운지 휘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또 어디 다친 데 없어?" "글쎄. 없는 것 같은데……." "한번 보자." 나름대로 열심히 반항하는 녀석을 몇 대 쥐어박아가며 티셔츠를 걷어올리고 바지를 끌어내린 다음 보니 온몸에 자잘한 상처들이 아주 많았다. 긁히고 찢어져서 피도 좀 나고 군데군데 오색찬란한 멍도 들고. 하지만 이 정도들이면 요란 떨면서 굳이 소독까지 할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웃옷을 마저 벗기려다가 묶인 손목을 깨닫고 내버려두었다. "풀어 줘……." 낌새를 알아챈 휘우가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아직 안돼." 류신은 들썩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말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가볍게 오른쪽 유두를 쥐었다. 어느 미친놈의 장난으로 반동강났었던 그곳은 못생긴 콜리플라워처럼 기묘하게 일그러져 부푼 모양으로 아물어 있었다. 류신은 자극으로 딱딱하게 솟아오른 유두에 젖은 혀끝을 살짝 갖다댔다. 휘우가 팔딱 등줄기를 젖히며 놀라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세포 모두가 온통 팽팽하게 곤두서 경련을 일으켜댔다. 코가 시큰하고 입 안이 얼얼할 만큼. 놀라서 비비꼬며 자꾸 도망가는 몸통을 꽉 붙들고 양쪽 유두를 번갈아 빨고 깨물고 비틀고 꼬집었다. "말……했잖아. 기억 안 난다고." "거짓말하지 마. 나한텐 안 통해." 거짓말 아니야, 하는 말은 류신의 입술 속으로 삼키어졌다. 벌리지 않는 입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억지로 벌렸다. 거짓말과 변명만을 내어놓는 혀를 벌을 주듯이 휘감아당기며 실컷 괴롭혀주었다. 냉정하게 자제하며 행위를 하려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분위기에 넘어와 모두 술술 불어버리게 만들려던 애초의 생각은 언젠가부터 멀리 달아난 것만 같았다. 휴화산이 터진 듯 펑펑 뿜어나오는 격렬한 욕망을 제어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류신은 마음을 가라앉힐 겸 둘 사이를 막고 있는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가슴에……." 휘우가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시선이 자신의 가슴팍에 닿아있다. "멍이 엄청나네." 류신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프랙탈 이미지와도 같은 현란한 멍이 가슴 정중앙에 커다랗게 맺혀 있었다. "미안해." 더욱 더 힘없는 목소리로. 류신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품에 꼭 끌어안고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 입을 막았다. 겨우 살갗에 생긴, 겉으로 보이는 멍 따위 가지고 저딴 비실비실한 소리를 하다니. 내 가슴을 갈라서 보여준다면 과연 너는 뭐라고 할까. 키스는 점점 더 진한 애무로 발전했다. 서로 맞닿아 비벼지고 마찰되는 피부로 무언가가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휘우는 발기하지 않아 류신은 조금 초조해졌다. 한 손으로는 휘우의 얌전한 페니스를 꾹 움켜잡고 한 손은 엉덩이 둔덕 사이로 가져갔다. 깜짝 놀라 펄쩍 뛰는 녀석의 항문 주위를 손가락으로 살살 부드럽지만 힘있게 눌러주니, 당황해 몸을 굳히면서 비명과도 같은 기묘한 신음소리를 낸다. 참을성 있는 손길에 반응이 서서히 부드러워지기까지 류신은 꽤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뭐 없냐?" "……뭐?" 발갛게 충혈된 눈자위 속의 갈색 눈동자에는 순진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뭘 말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여기 바를 거."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혀서 류신은 자신까지 덩달아 얼굴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이 녀석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얼굴에 바르는 로션이라도 괜찮다면 그것밖에……. 욕실에 있어." "됐어." 욕실까지 갔다오기는 귀찮았다. 류신은 휘우의 두 다리를 허공으로 높이 쳐들고 몸을 반으로 접은 다음 항문에 혀를 댔다. 몸둘 바를 몰라하며 움찔대는 반응이 재미있었다. 괴로운 포즈로 힘들어하는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혀로 구멍을 충분히 적신 다음 손가락 하나를 찔러 넣었다. 단단한 근육이 깜짝 놀라 결사적으로 자신을 거부하고 있었다. 손톱끝 하나 겨우 들어갈락말락 더 이상 길이 뚫리지 않는다. 한동안은 이곳을 쓰지 않았는가 보았다. 괴로움에 겨운 한숨 소리가 묘하게 자신을 자극했다. 왠지 기분이 좀 느슨해졌다. "말해 봐. 어떻게 된 건지." "……무, 무슨?" 느슨해진 자신을 채찍질하며 느닷없이 질문을 던지자 휘우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내가 계속 묻고 있던 거. 말할 때까지 안 놔줘. 안 하면 억지로라도 하게 할 거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촉촉히 젖은 눈에 얘기의 알맹이와는 달리 말투가 부드럽게만 나간다. 류신은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좀더 냉정할 수 있을 줄 알았었다. "……억지로라니. 억지로 뭘……? 어떻게?" 나름대로 꾸준히 반항모드를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기백은 없었다.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손가락으로 항문을 쑤셔지는 행위 그 하나만으로도 휘우는 충분히 힘겨워 진땀을 빼고 있었다. 류신 또한 대답할 여유가 없어져가고 있었다. 자신이 꺼낸 말을 스스로 먼저 무시하고, 몸을 나누는 지금의 상황에 매달려 몰입하게 된다. 흐르는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흐르는 충동을 거스르기보다 훨씬 하드한 노동이었으므로. 빡빡한 항문이 손가락 하나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자세가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 휘우는 전혀 발기하지 않고 있었다. 류신은 휘우의 다리를 다시 내리고 벌려 그 사이에 엎드렸다. 페니스를 덥썩 입 안에 품자 물고기가 펄떡거리듯 놀라는 반응이 재밌었다. 손사래까지 치며 거부한다. 물론 그걸 들어줄 용의는 없다. 페니스를 입으로 애무하며 왼손엄지로는 유두를 쓰다듬고 오른손으로는 항문을 길들였다. 턱이 아플 정도로 빨고 핥아도 변함이 없어서 혹시 이 녀석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조금 더 성의를 보이자 차츰 단단한 모양새를 갖춰나간다. 휘우는 어쩐 일인지 부들부들 떨었지만 류신은 내심 안심했다. 이미 항문은 손가락 네 개를 받아들이게 되어있었고 휘우는 연신 신음을 내지르느라 녹초가 되기 직전이었다. 다리를 다시 올리고 그 앞에 바싹 V자로 무릎을 꿇고 앉아 더 이상은 내버려둘 수 없는 자신의 페니스 끝을 구멍에 맞추었다. "자, 잠깐. 그냥 할 거야?" 휘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 "날 뭘 믿고? 내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잖아. 무슨 병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분위기를 깬다. "너 병 있어? 난 없어. 안심해." "그게 아니라……. 여기 침대 주위 찾아보면 나올텐데 굳이……." 제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침대 아래 언저리를 마구 방황하는 눈이 우습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했다. "됐어." "저기, 만약 내가 정말 병이 있으면 어쩔 거야?" 가만히나 있지 말도 많다. 귀찮아서 류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야……." "괜찮아. 병 걸렸으면 나도 옮겨줘. 같이 가자." 자신의 대답이 너무나 진심인 것이 스스로도 조금 놀라웠다. "……." "너 없이 사는 거 별로 재미없더라." 고개를 돌린 휘우의 눈에서 눈물이 조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한 자락 끈이 머릿속에서 뚝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류신은 완전히 자제력을 잃었고 그대로 안으로 단번에 진입했다. "아악!" 휘우의 고통에 찬 비명과 더불어 뜨겁게 조여드는 압박감에 하마터면 그만 터뜨려버릴 것 같은 느낌을 류신은 필사적인 심호홉으로 자신을 다스려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우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숨소리를 높였다. "누구야? 누가 꾸민 일이지?" 류신은 서서히 속도를 내어 잘게 허리를 움직이며 물었다. "……." "네가 말을 안 한다고 해서……내가 끝끝내……모르리라고는……생각하지 마." 그렁그렁한 눈으로 무섭게 이쪽을 노려본다. "놔, 놔 이거!" 반항하며 벗어나려는 몸을 꽉 붙잡고 가혹할 정도로 격렬하게 밀어붙이자 휘우는 다시 괴로움과 흥분에 겨운 신음을 토해냈다. 기억에 남아있는 지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에 휘우가 갑자기 눈을 확 떴다. 눈꺼풀 펄럭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기억나는 것은 급하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가슴과 거친 숨소리. 흐느끼는 교성. 솟구치는 격렬한 진동. 신들린 듯 삐걱거리는 침대소리. 끊임없이 샘솟는 옛 기억. 다른 시간. 다른 장소. 그러나 한결같은 감각. "아, 그만……. 그만……."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며 휘우가 울부짖었다. 그만하라고 해서 그만할 수 있을 리 없다. "또 나를 떠날 거야?" "……." "대답해!" 절정을 한 계단 앞에 두고 류신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흥분의 고삐를 조금 늦추고서, 부들부들 떨며 최후의 애액을 흘리는 휘우의 페니스를 막으려 손을 가져갔다. 요도에 손가락이 살짝 스치는 순간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를 내며 휘우가 예기치 못한 절정을 맞았다. 갑자기 자신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 류신은 자신의 것을 얼른 빼내어 휘우의 사타구니 위에 급하게 쏟아냈다. 방출의 여운이 진정되고 둘은 어이가 없어 마주보고 웃었다. 꽤 한참을 웃었다. 눈을 반짝거리며 거침없이 큰 소리로 웃어대는 하트모양의 입술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류신은 아무 말 없이 휘우를 품에 끌어안았다. 갑자기 허탈감과 함께 피곤이 밀려왔다. 둘은 한참을 죽은 듯이 포개어져 있다가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풀어줘." 나도 너를 끌어안고 싶어. 애원하는 휘우의 팔을 풀어주자 아플 만큼 온몸으로 꽉 안아온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 안고 둘은 열띤 입맞춤을 재개했다. 금세 페니스의 단단함을 회복한 류신은 휘우의 몸을 뒤집어 엎드려 1자로 쭉 뻗게 하고 목덜미와 등줄기에 입술도장을 꾹꾹 찍으며 천천히 삽입했다. 이번에는 좀더 느긋하게 엉덩이를 들었다 내렸다 자세와 각도를 조금씩 바꿔가며 격하게 찔러 올리고 한 박자 늦추었다가 다시 찔러 올리기를 한참동안 반복한다. 휘우의 호흡이 가팔라지며 사정의 조짐이 보이자 류신은 자신의 페니스를 단번에 완전히 빼내었다. 그리고는 자극이 사라져 당혹해하는 휘우의 오른쪽 다리를 높이 쳐들고 옆으로 뉘어 다시 삽입했다. 서로의 등과 가슴이 찰싹 맞닿고 다리가 얽혀 하나의 몸처럼 밀착되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귓가를 핥으며 휘우의 몸을 간질간질 애무했다. 휘우의 몸을 만지고 있으면 마치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도감과 두근거림. 즐거운 흥분. 너무 좋아서 가슴이 아플 정도의 쾌감. 옛날에 잃어버렸다가 오늘 되찾은 것들이다. 스피디한 왕복 운동을 하던 페이스를 늦추고 류신은 휘우의 오른쪽 다리를 쳐든 채 왼쪽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무릎을 꿇었다. 서로 Y자로 비스듬히 포개어진 자세가 되어 손으로 휘우의 등과 옆구리와 가슴을 애무하며 깊고 천천히 휘저어 돌렸다. 속도를 높여 맹렬하게 찔러 올리기 시작하자, 휘우의 페니스는 류신의 허벅지에 마찰되어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다가 녹아내리는 듯 분출했다. 목이 마르다 못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침대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참았다. 휘우를 네 발로 엎드리게 해서, 허벅지 위에 마주 앉히고, 기승위로 체위를 계속 바꿔가며 더 이상 내보낼 것이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의 절정을 더 맞은 뒤 류신은 탈진해서 침대에 벌렁 누웠다. 휘우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처럼 T자로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라도 들리지 않았다면 무서웠을 것이다. 새까맣던 창 밖 하늘에 이제 어스름한 주위 윤곽이 비치고 있었다. 하늘이 점점 부옇게 밝아오는 것을 쳐다보며 뒹굴뒹굴 휘우를 끌어안고 밍기적거리다가 류신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바닥을 디디는 다리의 감각이 예사롭지 않아 류신은 조금 웃었다. "먼저 씻을래?" 휘우는 혼이 쏙 빠진 듯 멍청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먼저 씻겠냐구." "아, 아니. 너부터 해." 딴 생각에서 비로소 깨어난 듯 휘우가 대답했다. 표정이 복잡해 보여 얼핏 신경이 쓰였지만 류신은 그냥 욕실로 향했다.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 미안하지만 냉장고에서 물 좀 꺼내다줄래? 꼼짝도 못 하겠어." 냉장고에서 에비앙을 꺼내다가 주고 이마에 키스를 했다. 시작은 분명히 이마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엎드려있는 휘우의 꼬리뼈 근처를 핥아내리고 있었다. 그대로 또 한번의 섹스로 이어져 가볍게 한 번 더 하고 류신은 행복한 여운 속에 한참 동안 휘우를 만지작만지작 품에 안고 있다가 일어났다. "같이 씻을까?" "아, 아니. 난 졸려……." 휘우는 물병의 마개를 따고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래도 좀 닦아야 할텐데? 뒷처리도……." "우선 잠부터 좀 자고."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힘들어서 그런지 밝지 않은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기도 멋쩍었다. 어서 씻고 휘우의 몸은 잠든 동안에 수건으로 닦아주던가 해야겠다고 류신은 생각했다. "설마 내가 씻는 동안에 냅다 튀는 건 아니겠지." "……그건 걱정마. 마지막 한 방으로 완전히 확인사살됐으니까. 지금 가라고 해도 못 간다. 졸려. 나 잘게." 휘우는 물 한 모금을 꿀꺽 마시고 보란 듯이 누워 피곤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눈꺼풀을 닫았다. 류신이 욕실에서 나와보니 휘우는 잠들어 있었다. 물수건을 사이드 테이블에 놓고 그 옆에 있던 에비앙을 마셨다. 집에서는 다른 것을 마시지만 밖에 나오면 특별히 가리지는 않는다. 목이 너무나 탔기 때문에 물맛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수건으로 휘우의 몸을 닦아주고 있는데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밀려왔다. 사실 오늘은 엄청나게 피곤한 하루이긴 했다. 어제도 잠을 거의 못 자다시피 했는데 출근하자마자 경찰서 어쩌구 하는 소식을 듣고 바로 열두 시간 반을 날아와서 소모적인 몸싸움과 몇 시간에 걸친 섹스까지. 녹초가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닫히는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올리며 몸을 닦아주고 류신은 휘우의 옆자리로 파고들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편안히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휘우는 움직여지지 않는 허리를 억지로 일으키고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다리가 완전히 말을 듣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물체를 발끝으로 살짝 차고 말았다. 튕겨 날아가 테이블 다리에 탁 맞는다. 결코 작지 않은 소리에 옆을 살폈지만 류신은 전혀 미동도 없이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가까스로 침대를 빠져나오고 나서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가 떨리는 것은 단순히 10년만의 섹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픈 허리를 다독거리며 일어나다가 발끝에 튕겨 날아갔던 그 물체가 콘돔곽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게 저기 떨어져 있었나? 아까는 왜 눈에 안 띄었을까. 진작 갖고있다가 들이밀었으면 저걸 썼을텐데. 조금이라도 너를 덜 느끼도록. [괜찮아. 병 걸렸으면 나도 옮겨줘. 같이 가자.] […….] [너 없이 사는 거 별로 재미없더라.] 너 없이 사는 건 나도 재미없었어. 전혀 재미없었어. 하지만 재미있기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닌 만큼 언제까지 여기 넋놓고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류신의 눈치를 간간이 보면서 휘우는 익숙한 솜씨로 재빨리 짐을 꾸렸다. 원래 투어할 때는 기껏 하루이틀 묵을 호텔방에 슈트케이스의 짐을 완전히 다 부리지 않기 때문에 챙겨서 꾸려넣어야 할 짐은 많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 들어있던 작은 물약병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느라 약상자에서 따로 챙겨 침대 옆에 항상 구비해 놓던 수면제가 이렇게 유용할 줄 몰랐다. 유치장에서 밤 새고 오는 바람에 오늘 그냥 뻗어버렸기에 망정이지 까딱하면 동나버릴 뻔 했다. 무색무미무취의 투명한 액상 수면제 병을 가방 한 구석에 밀어넣고 휘우는 류신의 머리맡에 섰다. 류신이 마셔서 물이 줄어든 분량으로 볼 때 최소한 10시간은 누가 옆에서 굿을 해도 모르고 죽은 듯이 잘 것이다. 세상 모르고 깊이 잠든 모습이 참 평화롭다. [또 나를 떠날 거야?] 녀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냉담하고 가혹한 폭군으로 끝까지 남았으면 좋았을 것을 녀석은 애처롭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런 안타까운 바람을 들어주지 못하는 자신을 이 녀석은 이제 정말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 살아. 행복해라. 사는 거 재미없다고 하지 마. 너는 먹여살려야 할 마누라도 있잖아. 마누라랑 애들이랑 알콩달콩 살다보면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돼야 해. 휘우는 옆으로 흐트러진 류신의 새까만 머리칼을 살짝 쓸어 올렸다. 정갈한 이마. 완벽한 눈썹. 길게 드리워진 부채살같은 속눈썹. 멋있게 잘 늙어라. 가끔씩 매스컴 타서 내가 네 얼굴도 볼 수 있게 해주고. 절대로 대머리 되지 말고. 주문을 걸 듯이 휘우는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댔다. 하긴 이 녀석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이 녀석이 대머리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건강해라. 행복하게 잘 살아. 휘우는 슈트케이스를 끌며 조심스레 문을 밀고 나왔다. 안녕. 영원히 안녕. I had a dream last night 어젯밤 꿈을 꾸었어 A nightmare to be exact 정확히 말하자면 악몽을 We couldn't take the heat 우리는 더위를 감당할 수 없었고 And the sweat dripped from our backs 등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 I didn't go I waited for the midnight sun 그래도 나는 가지 않고 한밤의 태양을 기다렸어 I didn't want to leave you 너를 떠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Cause I don't have anyone 왜냐면 내겐 달리 아무도 없기 때문에 Don't paint the sun anymore 태양을 그리지 마 Paint the moon and the stars in an autumn sky 차라리 가을하늘의 달과 별을 그려 Paint me cool blue waters with shades of gray 그리고 시원한 파란 바다를 회색 물감으로 내게 그려줘. Just don't let me live my life this way 그저 내가 이런 삶을 살게 내버려두지만 마 Without you 너 없는 삶 Paint The Moon - Czars "하마터면 장소를 못 잡을 뻔 했었는데 운이 좋았지." 형선이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로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결혼한지 이제 겨우 9개월인 그는 채 1년도 안 된 사이에 이미 총각때의 샤프하고 야성적이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 라인이 무너진 퉁실퉁실한 얼굴과 투덕투덕 욕심살이 오른 손등을 지후는 징그러운 것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 몇 년째 계속 그랜드 임페리얼 크라운홀에서 했었으니까 당연히 자동부킹되어있을 줄 알았더니 작년 집행부가 바보같이 올해 예약을 안 해놓았던 거야. 근데 올해 회장놈도 똑같은 놈이지 뭐냐. 아니, 그 사실을 겨우 일주일 전에야 알고 나한테 연락을 했더라구……." 그는 혀를 끌끌찼고 한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최명석이구나, 최명석이. 명석이 놈이 영 이름값을 못해. 왜 그렇게 띨띨한 짓만 골라 하냐. 따위를 주절거리며 웃었다. 지후는 주위에서 지껄이는 소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잔에 든 폭탄주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술의 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단지 미친 듯이 취하고 미친 듯이 속을 버리는 용도에만 최적합한, 말 그대로의 폭탄. 뻥뻥거리며 터지고 나면 그것으로 끝, 남는 게 없는. 어떻게 하면 이 구정물을 마시지 않고 없앨 수 있을까. 지후가 손에 든 잔을 노려보고만 있노라니 옆의 옆자리에 앉은 정선배가 등을 툭 친다. 김변, 어서 마셔. 알았어요, 선배. 지후는 잔을 입가에 갖다대고 향을 음미하는 척 멈추어 있었다. 잡탕짬뽕술에 향이랄 게 있을 리 없다. 괴로울 뿐이다. 어서 마시지 뭐해. 이제 그 옆의 다른 녀석까지 거들어댄다. 지후는 할 수 없이 역한 독기가 코를 찌르는 액체로 입술을 축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이미 안내장은 다 나갔다는데. 장소 바뀌었다고 다시 비상연락망 돌려도 행사 당일날 또 거기 가 있을 사람들이 수두룩빵빵할 게 뻔한데." "그건 그래요. 우리 써클 사람들이 좀 그렇죠 뭐. 딴데 가서는 머리 열심히 굴리면서도 써클 일에는 한번 이상 생각을 안 하죠." "옛날부터 그랬잖아. 여기가 머리 식히는 데지 머리 굴리는 데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다들 여태껏 남아있는 거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폭탄주 제조와 스피디한 소비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이 테이블의 이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 화제에 몰입되어 있었다. 지후는 싸늘한 무심함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고등학교 때의 우월감에 가득찬 인연이 대학으로, 그리고 중견 사회인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 '리더스 소사이어티'.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 한 명씩 선발되어 이루어지는 학력경시대회 출전자들의 모임으로서 법조계, 의료계, 재계, 학계, 예술계, 언론계 등에 무한대로 뻗친 막강 인맥의 산실인 이 써클은 대한민국 각계각층 굴지의 야심만만한 엘리트들만이 모여있다는 자부심 속에 벌써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여서 하는 것이라곤 그저 오고가는 술잔 속에 친목을 다지는 일뿐. 오늘처럼 써클의 서울법대 OB 모임이 있는 날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1차에서 추려진 인원 열 댓 명이 서초동의 호젓한 클럽 룸에서 2차를 벌이며 습관처럼 독주를 목구멍 속으로 들이붓고 있었다. 1차에 잠깐 얼굴만 내밀고 사라질 생각이었던 지후는 이런 자리가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또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2차까지 모셔져 와서 자리를 빛내고 있어야 했다. 서른을 바로 코앞에 두고서도 전혀 퇴색되지 않은 지후의 미모는 선후배동기들 사이에서 우중충한 자리를 환하게 만드는 등불 정도로 인식되는 듯 했다. "근데 왜 하필 너한테 연락을 했다는 거야?" 무리 중 한 명이 형선에게 물었다. "그랜드 임페리얼 쪽으로는 내가 라인이 좀 닿는 걸 그 녀석이 알아. 우리 펌에서 계속 그쪽 법률 고문을 맡아왔고 최근에 내 담당으로 바뀌었거든." 그랜드 임페리얼. 어제 거기서 밤을 보냈던 기억이 떠올라 지후는 절로 입맛이 찝찌름해짐을 느꼈다. 지후에게 있어 섹스는 다른 사람들이 물을 마시는 것과 거의 등가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 언젠가부터 지후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있었고 어젯밤에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급하면 해골바가지 안에 든 물도 달게 마시듯이 맛없고 재미없고 의욕없고 의미없는 섹스도 한 가닥 지푸라기 잡듯 처절하게 매달리는 자신에게 빛바랜 찝찝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하긴 요즘은 다운 기간이다.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뭘 봐도 짜증이 난다. 세상이 온통 푸르딩딩 어두운 보랏빛으로 깊이깊이 암울하게 가라앉고 있다. 일도 섹스도 다 시시하다.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마땅찮고 모든 것이 엉망이다. 살아있음 자체가 버겁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직도 살아있음을 느끼면 한숨이 나온다. 또 근근히 하루를 때워 살아내야 할 생각을 하면 지겨움부터 앞선다. 억지로라도 일어나서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서야 할 이유만 없다면 눈을 뜨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잠들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극심한 병적 우울憂鬱에 납작 깔려 엎어져 있는 사람이 천근만근 무거운 이불을 떨치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은 40도가 넘는 고열 환자가 휘청거리는 몸으로 폭풍우 속을 헤치며 집을 나서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악'을 필요로 한다. 이제까지 김지후를 잘 버텨주었던 초인적인 자기통제력과 오기와 끈기로 이 기간만 잘 넘기면 얼마 안 있어 햇살 반짝이며 붕붕 솟구쳐오르는 옐로오렌지빛의 시간이 오겠지만 지금 기분 같아서는 그날이 과연 오려나 싶다. 바닥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울증鬱症 주기. 하이와 로우의 끊임없는 순환곡선에서 최저점(지후는 이를 할멈 젖꼭지라고 표현하곤 했다)이 거의 눈앞에 다가왔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정신과 마음의 작용이 마비된 것처럼 컨디션이 최하로 떨어질 것을 지후는 알고 있었다. 몇년 동안 반복적으로 겪어온 주기적 변화. 하지만 아직도 우울의 절정은 버텨내기 고통스러웠다. 의사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때때로 조만간 이 병에 자신이 삼켜질 것만 같은 공포가 소름끼치도록 생생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조증燥症 주기에 찾아오는, 세상이 전부 다 내 것 같은 그 황홀한 흥분감을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얼마간만 더 견디면 바닥을 치고 무드는 상승하게 되어있다. 조금만 참아내면 된다. 조금만. "선배. 아까운 술을 왜 안 마셔요?" 옆자리를 억지로 비집고 누군가 앉으며 지후에게 물었다. 특유의 긴 기럭지가 주는 존재감과 향수 냄새만으로도 누군지 지후는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옆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안 마시면 내가 마셔야지." 냉큼 술잔을 낚아채간다. 입술만 살짝 축이고서 어떻게 버려야 할까 고심하던 술이다. 사실 고심할 필요도 없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버리게 될걸 알고 있었다. 지후에게 그는 이래저래 쓰레기통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주는 쓸만한 후배 녀석이었다. 마시기 싫은 술도 기꺼이 마셔주고 시도 때도 없는 비정상적인 욕망도 즐겁게 감당해준다. 조증이 최고조에 달해 너무 기분 좋아 머리가 홱 돌아버릴 것 같던 어느 반짝반짝한 봄날 오후, 사무실 건물 옆 공터에서 한 시간 반 동안 술래잡기를 함께 해줬던 녀석도 이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대한 보답은 그 날 초저녁부터 새벽에 걸쳐 확실히 해주었으므로 자신이 진 빚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기분이 최고 하이를 친 날의 섹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되돌이켜 그 느낌을 기억해내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의 환희 그 자체. 열 번도 스무 번도 가능하다. 섹스를 위해 태어난 기계처럼 하루 종일 발정하고 몇 명이라도 어떠한 체위라도 상관없이 상대할 수 있다. 적당한 길이와 적당한 굵기를 가진 것이면 무엇이든 쑤셔넣고 흥분하고 사정할 수 있다. 그 와중에 여자든 남자든 자기 밑에 깔린 상대를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 절정의 순간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 나는 섹스의 신이다. 이렇게 저 잘났다는 놈들 여럿 모여 거들먹거리는 자리에서는 문득 좌중을 둘러보며 유치한 우월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너희들 중 그런 느낌을 아는 놈이 몇이나 되겠냐. 그리고 오늘같이 기분이 극도로 가라앉아 스스로 버러지처럼 느껴질 때는 그 우월감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신을 강타한다. 법이 있는 것은 결국 법대로 살면 편리하기 때문이다. 매뉴얼이 있는 것은 매뉴얼을 따라 하면 쉽기 때문이다. 상궤를 벗어나지 않은 지극히 보편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안정감과 작은 여유. 그것에 기인한 저력과 집중력에 대한 갈망. 복잡한 부러움과 질투. 자신이 누군가에게 느낀다는 것을 아직도 용납할 수 없는. "그럼 어떻게 된 거냐. 그냥 밀어붙여서 장소를 만든 거야?" "아니." 형선이 고개를 저었다. "행사장 부킹 담당자한테 얘기가 내려가도록 말을 좀 해뒀더니 그쪽에서 나중에 연락이 왔어. 마침 우연히도 우리 행사시간에 예약되어있던 약혼식 하나가 취소됐다고." 아, 그래. 뭔가 드라마틱한 걸 기대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흥미를 잃은 듯 안주를 집어먹거나 다른 지역방송 쪽에 귀를 기울인다. 술자리는 화제에 따라 나름대로 서너 파트로 나뉘어져 계속 시끌벅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로를 믿는 만큼 또 믿지 않는 그들은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여배우 이야기도 하고 골프 얘기도 한다. 아이들 커가는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애 아빠들도 있다. 이쪽 사람들만 그 뒷사정을 아는 최근 민감한 사안들도 도마 위에 오르지만 대화는 교묘하게 심각한 수준을 피해간다. 마치 물속에 잠겨드는 것처럼 모든 회화들이 귓전에서 웅웅거린다는 생각이 지후는 들었다. 바닥까지, 깊고 깊은 밑바닥까지 가라앉고 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편안해지겠지. 물살의 움직임조차 둔탁하고 진중한 심해深海. 강이라도 좋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히 깊기만 하다면. 문득 옆에서 들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단번에 수면 위로 끌어내어지는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쓰레기통 후배 녀석이 '아, 네. 나갈게요.' 한 마디로 전화를 끊는다. "대리운전 불러놨는데 왔답니다. 지후 선배도 같이 나가죠? 우리집 가는 길이니까 내가 모셔다드릴게요." 집이 가깝다는 이유는 핑계에 불과할 뿐, 포장된 제안 속의 계산은 지후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어젯밤과 같은 지리멸렬한 섹스만 아니라면 누구와 자도 상관없었다. 솔직히 어제는 누구와 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근데 그게 누구 약혼식이었냐면……," "누군데?" 지후와 후배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형선과 그 주위의 서너 명은 잘 가라 또 보자 인사와 함께 까딱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의 화제로 되돌아갔다. 형선의 옆에 앉아있던 동기가 추임새를 던져준다.  "박환기 의원 딸이랑 강성철 회장 손자." "어? 어느 손자?" 지후는 왠지 등줄기가 오싹해져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죽은 둘째아들 있잖아. 그 아들의 아들." "아하! 강류신이요? 저랑 같은 중학교 나왔어요. 그 녀석 아마 전자에 있을걸요? 뉴욕지사에 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머리끝이 쭈뼛 일어섰다. 이유는 자신도 전혀 모른 채. 그냥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서 얼굴 근육까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6월 초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후는 등교길에 ㄱ자로 구부러진 좁은 골목의 코너를 돌다가 무심코 죽은 쥐를 밟을 뻔 한 적이 있었다. 운동화 바닥으로 지긋이 즈려밟기 직전에 바로 자신의 발밑에 닿아 있는 쥐의 통통한 사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얼른 한 걸음 물러섰다. 가까스로 밟아 터뜨리는 것만 면했을 뿐 발바닥으로 전해지던 물컹한 느낌. 그리고 생생한 잿빛털로 그 녀석의 숨이 끊긴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곧이어 머리털이 쭈뼛 일어선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았다. 죽은 쥐를 밟을 뻔 했다는 경악스런 놀라움보다도 책 속에서만 보았던 말이 무엇인지 몸소 체득했다는 데에 대한 기쁜 놀라움이 더 컸다. 지후는 우리 나이로 네 살 이전에 이미 한글과 알파벳과 덧셈뺄셈을 모두 깨쳤고 유치원에 다닐 무렵에는 고학년들도 어려워서 싫다고 할 깨알같은 글자가 가득한 두꺼운 책들을 읽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열일곱권짜리 학생백과사전을 각권 몇페이지 몇째줄에 무슨 글이 써 있는지조차 줄줄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 책속에는 세상의 온갖 삼라만상에 대한 지식들이 단순명쾌한 언어로 나열되어있었고 지후는 뛰어난 두뇌로 그 모든 글자와 문장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마음과 몸으로 직접 느끼며 깨닫는 것이 어떤 느낌이라는 것을 몸소 알아챌만한 절대적 경험치는 확연히 모자랐었다. 몰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갈증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반인과 천재의 중간보다 약간 아래 정도, 대한민국이 원하는 표준규격에 딱 들어맞는 사회적 수재군단 중에서 최상급, 장래가 촉망되던 똑똑한 일곱 살 김지후는 죽은 쥐를 밟을 뻔했던 그 순간 책에서 개념으로만 읽던 머리털이 쭈뼛 곤두선다는 느낌이 뭔지 몸으로 알아버렸던 그때, 진심으로 배우고 깨치는 것을 좋아하는, 공부를 사랑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취소야, 연기야?" "말로는 요번 박의원 사건 때문에 연기했다고 하는데 혼담 자체가 깨졌다는 얘기가 있어요." "이야, 근데 연기가 아니라 취소라면 강회장 정말 잔인하다." 공부를 즐기고 그만큼 시험의 흥분과 그 결과의 쾌감에 익숙하던 머리좋고 요령도 좋은 어린이는 그대로 무럭무럭 자라나서, 역시나 자신이 최고로 일가견 있는 '공부'와 '시험'으로 진로의 관문을 뚫는 방식의, 개인적으로 가장 손쉬운 인생 코스를 선택했다. "박의원 요번에 뇌물수수 또 걸린 게 타이밍이 상당히 안 좋긴 안 좋았지. 액수는 얼마 안 돼도 예전처럼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기엔 걸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한동안 고달플 거야. 게다가 이제 정치생명도 다 끝난 마당이라……." "당에서야 입지가 예전같지 않지만 아직 그 지역구에선 박의원 끗발이 살아있어요. 우리 큰형이 이번에 그쪽 지청에 차장검사로 부임했는데 서울에서 생각하는 거랑 많이 다르다고……." "그래도 강회장 박의원 사이가 한두 해 된 친분도 아닌데 그렇게 가차없이 돌아설 수도 있는 거군요." 항상 모든 면에서 일률적으로 남들보다 한 바퀴 이상 앞서 달리던 인생도 30년 정도 지나고 나니 복잡다단한 각과 골이 생겼다. 까마득한 뒤에서 쫓아오던 인간군상들과 차츰차츰 거리가 좁혀지기도 하고 저 발밑 아래에 놓고 굽어보던 무리들에게조차 부러움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지후는 이미 트랙을 벗어난 자신의 삶이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갇힌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턱 막힐 때가 있었다. 평생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위협을 진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영원히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네? 내가 알기로는 세강쪽에서 박의원 사건 터질 거 이미 올해 초부터 알고서 막으려고 무지 노력했는데 결국 못 막은 걸로 알고 있거든?" "못 막은 거야, 슬슬 막는 척만 한 거야?" "막는 거야 진심으로 막으려고 했을 거에요. 박의원 이번 껀이, 걸리면 세강도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껀이었어요. 실제로 지금 건설쪽 간부진 몇 명―" "강 회장이 건설에서 손 턴지가 언젠데." "그래. 건설은 이제 이름만 세강이고 사실상 강성철 회장이랑은 관계가 없어." 뭐해요. 빨리 나와요. 문을 빼꼼 열고 밖에서 얼굴만 들이밀며 속삭이는 소리에 지후는 갑자기 다 닳은 건전지가 새것으로 교체된 장난감 로봇처럼 룸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김변호사님, 남변호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지배인과 웨이터 서너 명의 깍듯한 배웅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오자 조금 많이 어지러웠다. 지후는 벽에 기대어섰다. "……깊은 강은 고요하다." "네?" 지후가 중얼거리자 대리운전기사에게 키를 건네던 녀석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깊은 강은 고요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몰라?" "뭐를요?"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대답. 하긴 네가 알 리가 있냐. 차가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말해준다. "깊은 강은 고요하다." "……?" "모르면 됐어." 지후는 차문을 열고 상체를 반쯤 들이밀다가, "지후 선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재미있는 사람이 됐어요." 재미라……. "까불지 마." 담담하게 대꾸했다. "학교때는 참 딱딱하고 잘난 척만 디립다 하고 엔간히 재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보면 볼수록 재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좀 귀여운 것도 같고." 지후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차 속으로 몸을 깊이 파묻었다. 밤인데도 차 안은 후덥지근했다. 지후는 높아진 기온보다도 습기로 성큼 다가온 여름을 체감했다. 후배 녀석은 지후가 곁눈질로 아주 잠깐 눈길을 주고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고개를 돌렸던 신경정신과 의원 간판을 넌지시 올려다보고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 병 고치지 말죠?" 조금 뜨끔했지만 그냥 앞만 쳐다본다. "멀쩡한 정신으로 사는 거 어차피 재미없잖습니까? 얼마나 사는 게 지리멸렬하고 따분했으면 그 병에 다 걸렸겠어요. 애써서 치료해 봤자 결국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할텐데 뭐하러 치료하나요? 그냥 재밌게 사시죠." 조울증이라는 놈을 변호한다.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호할 수 있다. 절도범도 사기꾼도 살인자도 모두 마찬가지로. "두 명 더 불러. 너 혼자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 "너하고는 오늘 내가 박을 거니까. 특별히 굵고 단단한 놈으로 하나 불러. 나머지 하나는…… 아, 저번에 불렀던 그 마사지 잘 한다는 애. 걔 괜찮았어. 잘 빨더군." "……." "부를 수 있으면 여자도 하나 더." 지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갑작스레 손을 뻗어 후배 녀석의 바지춤을 옷 위로 꽉 잡고 몇 번 주물럭주물럭 쓰다듬어 올렸다. "그럼 그 동안 눈 좀 붙인다." 당황해서 앞뒤를 번갈아 쳐다보는 녀석은 아랑곳 않고 지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올해는 여름이 빨리 왔다. 류신은 대문으로부터 길게 이어진 돌계단을 올라와 집채를 향해 너른 정원을 가로지르면서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목구멍과 가슴 사이 중간쯤 뜨거운 점액질의 뭔가가 두텁게 끼인 것처럼 요즈음 계속 그르렁그르렁 답답하다. 정원 한켠에서 마침 자신을 맞으려는 듯 이쪽으로 다가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류신은 까딱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아주 오랜만에 와보는데……, 여전히 멋있는 집입니다. 정원도 아름답고." "많이 낡았죠." 류신이 대답했다. "그런가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지을 때 워낙 확실하게 잘 지어놔서." 그냥 쓴웃음으로 답을 대신하고 류신은 그와 나란히 집을 향해 걸었다. 자세히 들여다볼 것도 없이 손 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주인들은 손님처럼 가끔씩만 다녀가고 일하는 사람들만 있으니 작정하고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가장 잘하는 일이 있다면 몇 년째 한남동 집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있는 것. 결혼한 큰딸 외에 류신과 정연 남매 둘 다 외국에 있고 어머니마저도 사실상 병원 근처의 아파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참에 오랫동안 집에서 일해온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지속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물론 가장이 타계했다고 해서 본가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도 남 보기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지만, 각자 자신의 인생을 좇아 뿔뿔이 흩어져서 일년에 딱 한 번 아버지 기일에나 가까스로 한 자리에 모이는 가족에게 구심점이란 이 집 하나뿐이었다. "회장님은 서재에 계십니다." 그는 강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송 비서실장이 증권회사 부사장으로 간 뒤, 강 회장을 가장 측근에서 모시고 있는 비서였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비서가 체질에 맞는 사람이라고 류신은 생각했었고 웬만한 비서실 직원들 중 대부분은 회장 퇴임 후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지만 그는 명예회장 그늘에 남은 몇몇 중에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류신은 서재 창을 물끄러미 보면서 물었다. 햇살을 가리기 위해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언뜻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았다. 바로 저 서재에서 자신은 어젯밤을 꼬박 새웠다. 혹시 그곳에 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지 못한 채로. 잠깐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서 또 다시 바쁜 하루를 시작했던 류신은 한창 점심식사 중에 급한 연락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한남동 집에 와 계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며 서둘러 얘기를 마무리짓고 이후의 약속은 모두 캔슬한 뒤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용건이 있으면 언제나 당신 자택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던 어른이 예고도 없이 죽은 둘째아들 집에 들이닥쳤다. 그 아들이 세상을 뜬 이후로 처음이다. 자신도 전화를 받고 약간 당황했을 정도였으니 집에 있던 일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얼마나 우왕좌왕했을지는 상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병원으로 직접 나오셔야 할 일이 있어서 출타하셨다가 갑자기 한남동에 들르겠다고 하셔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류신은 좀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오후의 노곤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들어와라." 노크를 하자 문 너머에서 아직도 강단이 남아있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류신은 서재 안을 잠깐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자신이 새벽에 정리해두고 나간 그대로 있었다. 회전의자의 방향을 틀어 문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백발의 노인을 제외하고. "류신이 너……, 안색이 안 좋은 것 같다. 어디 아프냐?" 옆의 소파로 옮겨 마주앉은 뒤 강 회장이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감기 조심해라. 여름 감기 개도 안 걸린다지만 한번 걸리면 그만큼 무섭고 지독해. 평소에 잔병치레 안 하는 사람들이 꼭 그런 감기 걸리는 거야. 조심해야지." "……네." 류신은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 치받쳐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꾹 눌러 삼키면서. 고개를 조금 수그린 것은 눈빛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척 숨겨야 하는 것도 많아진다. "별다른 말씀은 없으시던?" 뒤 미처 집에 들어온 어머니는 막 출발하려던 강 회장의 자동차 뒤꽁무니에 간신히 인사 정도 할 수 있었다. "네." 잊고 있던 피로가 갑작스레 몰아닥치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하룻밤 샜다고 피곤을 느낄 류신이 아니지만 어젯밤에는 여러 가지로 많이 부산했다.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사실은 오늘 병원에 검진 받으러 오셨을 때 뵈었었다." "……." "내 방으로 먼저 올라오셨더라. 다른 때는 내가 내려가는데 한 시간이나 일찍 오셔서는……." 그 다음에 이어질 얘기들은 왠지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약혼식 날짜 다시 잡으라고 하셨어. 다음달 중으로." "누구 약혼식 말입니까?" 류신은 뭔가 캐내듯이 어머니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누구겠니?"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는 지친 음성. "네가 뭐라고 하든 무조건 추진하라신다. 무조건." 오랜만에 제대로 본 어머니는 무척이나 나이 들어 보였다. 작년에 이미 외손주를 보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 어디 가서 할머니 소리를 듣더라도 웃고 넘길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올해 하반기는 정말 바쁘다구요. 한다고 하더라도 내년 여름 전까지는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일말의 정 또는 존경 또는 그 외 어떤 종류의 호감을 느낀 적도 없었고 누가 보호해줘야 할 만큼 약한 사람이라고 느낀 적도 없었지만 자신이 굳이 대항해서 싸워야 할 상대라고 느낀 적도 없었다. 갱년기 여인네를 상대로 소모적인 실랑이를 길게 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은 더더욱. 마주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롭고 싫었다. 자라면서 내내 겪어야 했던 '어머니라는 요소의 만성 결핍'을 스스로 그 요소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끔 화化하는 것으로 대처해왔던 만큼 어머니에게는 최소한의 인식, 적절한 수준의 예의 그 이상은 주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녀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잘라낸 동안에도 그녀는 때때로 이렇게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자신을 속이는 일에조차 일조를 하면서. 무관심이 최선의 대응책이었던 상대가 무관심만으로 대응할 수 없는 일을 자신에게 저질렀음이 드러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미워해야 하는 걸까.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연이도 내년까지는 꼭 짝을 지우라고 말씀하시고……." "그럼 정연이 혼사 준비부터 우선 시작하시면 되겠군요." 하지만 화를 낼 수도, 이야기를 쉽게 매듭지을 수도 없는 이 상황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냥 성격대로 딱 잘라서 결혼은 절대 하기 싫다고 끊어내면 속이 후련하겠는데 그럴 수도 없다. 섣불리 지나치게 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진작 안 하겠다고 하지 왜 이제 와서 저럴까 하는 의심의 꼬투리를 남겨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자칫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린다. "회장님 입장도 있잖니. 명주 아버님 일이 그렇게 돼서 당장 식에 참석도 하실 수 없게 생겼었으니 어쩔 도리 없었다지만 빨리 새로 날짜를 잡지 않으면 좋지 않은 소리들 나올 게 뻔해. 그러면 나도 곤란해진다. 회장님은 그쪽 사정이야 어쨌든 그냥 예정대로 강행할까 생각도 하셨었노라고 이제 와서 그러시니, 이러다가는 마치 내가 우겨서 연기했던 것처럼―" "두 분 입장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 사정도 있어요. 약혼이든 결혼이든 당사자는 바로 접니다. 두 분 체면을 따지기에 앞서서 일단은 제 문제란 말입니다." 짜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상황.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어머니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말씀드리는 게 좋을까요? 그게 사실인 걸요. 제 결혼이고 제 약혼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이렇게 어수선한 상태에서는 별로 마음이 당기지가 않아요. 이 혼담 자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구요." 어머니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류신을 쳐다보았다. "명주 아니면 절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이 기회에 다시 차근차근 잘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눈을 뜨고 뭔가 탐색하듯이 계속 쳐다보는 시선이 류신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말을 고르는 듯 주저주저하면서 한참을 끌다가 어머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야. 이왕이면 더 좋은 조건의 신부감도 많은데 굳이 명주를 고집할 필요는……. 솔직히 말하자면 순전히 회장님의 뜻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아니라면 글쎄? 너, 나한테도 얼마나 여기저기서 혼담이 많이 들어왔는 줄 아니? 내가 모임에 나가면 온통 네 얘기들뿐이다. 너만큼 퍼펙트한 신랑감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라고……." 딴에는 무척 자랑스러운지 만면에 미소가 번진다. 류신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명주 같은 경우는 워낙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고 그 아이 자체도 똑똑하고 야무지고 이쁘고 다 괜찮은데 그 집안은……. 과연 이제 그 집안이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괜한 걸림돌만 되지 않아도 좋으련만." "……." "집안의 위신이란 게 일단 추락하기 시작하면 되돌리기 참 힘든 거야. 가세가 클수록 더 심하지. 겉으로 웬만큼 표시가 날 정도면 이미 속으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곪고 있었다는 거거든. 내가 주변을 다 둘러봐도 혼사는 상승세를 타는 집안이랑 해야지 사양길에 접어든 집안이랑은 안 하니만 못 하더라. 문제만 산더미같고. 부채며 뭐며…….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 있느라 식구들도 패기가 없고 불만만 많고 말이야. 잘못 얽혔다가는 너만 힘들어져." "……." "너도 그런 생각이었니?" "……." "류신아?" "네?" 길게 이어지는 장광설은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에 골몰하던 류신이 번뜩 눈을 크게 뜨자, 어머니는 그 모습이 좀 우스웠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근데 말이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내 아들이라고 내가 오히려 널 잘못 봤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 "무슨……말씀이신가요?" "너는 안 그럴 줄 알았거든. 네가 좀 대쪽같이 원리원칙을 따지는 면이 있잖니. 어쨌든 일단 하기로 결정됐던 거니까 중간에 어떻게 일이 틀어졌었든지 간에 다른 생각 않고 그냥 끌고 갈줄 알았더니 조금 의외이긴 해." "아주 안 하겠―" 류신은 조금 움찔하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갈 뻔한 대답을 삼켰다. 무슨 의도가 있어서 저러는 건지 별뜻 없이 말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다. 긴장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되었다. 이쯤 되면 대화가 진행되어가는 방향키는 반드시 자신이 쥐고 있어야 했다. "……아마도 결혼이라는 것이 마냥 원리원칙만 따지고 있을 순 없는 일이라서겠죠. 어머니가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런가……." 어쩐지 힘이 없는 대답. "신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업하는 놈은 일단 주판알을 잘 퉁겨야 한다고 회장님께 누누이 들어왔습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할아버지에게 화살을 돌리는 자신이 상당히 치졸하게 느껴져 불쾌했지만 지금은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이 일말의 미안함을 느껴야 할 사람은 명주뿐이다. 류신은 일단 노인네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당장 시간을 버는 일이 급선무라고 자신을 달랬다. "그렇구나……." 기어들어가듯 작은 소리로 덧붙인다. "역시 너는 강씨 집안 핏줄이라……." 류신은 벌컥 치솟는 것을 꾹꾹 누르며 시계를 보았다. 확실히 이런 대화는 길게 끌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올해 안에는 안 됩니다. 도저히 여유가 없어요. 그런 와중에 좀더 천천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노발대발하실텐데……." 역정을 내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야단을 맞더라도 내가 맞아야지. 자식 하나 못 다스린다고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별 수 있니." "별로 그러실 필요까지는―" "됐다. 내가 네 애민데." "……." "애미 빼놓고 회장님이랑 너랑 둘이서 의논해서 얘기 끝내버리는 거 솔직히 좀 재미없거든, 나는." 어머니는 쓸쓸히 웃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너한테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나는 네 엄마야. 너는 내 아들이고." "……." "그것만은 꼭 알아둬라." 류신은 자리에서 일어선 어머니를 똑바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눈동자는 다소 불안하게 일렁이는 듯 했지만 아들의 강한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물 속에 어찌나 오래 있었는지 백사장으로 걸어나오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기분이랄까 지면에 닿는 발의 느낌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고작 두 시간 남짓 수영하고 나서도 이 모양인데 물고기 지느러미와 인간의 다리를 맞바꾼 인어공주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고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 많이 아팠을 거다. 아무리 뛰고 날아도 중력의 압박을 벗어날 수 없는 뭍이 뭐가 좋다고. 언제라도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자신은 주저없이 바다를 택할 거다. 두둥실 띄워주며 포근히 속속들이 온 몸을 감싸 안아오는 부드러운 물결. 하루 온종일 바다 속에서 놀고 해변에서 뒹굴거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바다 하나이다 보니 언뜻 떠오르는 것도 바다와 관련된 것뿐. 기억 저편에 숨겨져 있던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도. 이제껏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동화들까지 모두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나는 이야기들만. 그 외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람 사는 세상에 관한 일은 모두 비웠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하나로 이어진 파란 하늘과 바다만 눈에 들어오는 이 조그만 무인도에선 해도 달도 저쪽 바다에서 떠서 이쪽 바다로 진다. 이 섬 어디에도 잠시라도 닿아주지 않는다. 조촐한 공원 정도 크기의 정말 작은 섬이다. 하루 종일 바다 안팎을 들락거리며 그 주변을 맴돌며 놀다가 해가 져서 어둑해지면 저기 제법 가파른 언덕 꼭대기 덩그마니 예쁘게 지어져 있는 하얀 집에 들어가 잔다. 마음껏 목청 높여 노래 부를 수도 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밤새 뚱땅거리며 피아노를 쳐도 누구 하나 뭐랄 사람 없는, 하루종일 벌거벗고 돌아다녀도 훔쳐볼 이조차 없는 외딴 곳. 이삼일에 한 번 부앙~하고 달려와서 우편물이나 신문이나 식료품 같은 것을 던져놓고가는 작고 하얀 배 외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얼씬도 하지 않는. 노리끼리한 붉은 빛의 투명 수채화처럼 하늘을 가득 물들인 석양이 수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비탈진 모래언덕 중턱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하루의 가장 찬란한 이벤트를 경건히 관람한 휘우는 희미한 햇살의 솜털 끝까지 완전히 물 속에 잠긴 것을 확인하고 바지 자락과 맨다리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섰다. 젖은 머리칼이 까칠한 바닷바람에 들썩거리다가 간간이 뺨과 목덜미를 슬쩍 건드린다. 터덜터덜 언덕을 오르는 등뒤로 순식간에 어둑해진 하늘에선 희미하게 별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계속 잠만 잤다. 그리고 심지어 차 안에서도 잤다. 눈을 잠깐 감았는데 뜨고 보니 집 앞이었다. 맑지 않은 머리로 차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질렀다. 쏜살같이 내려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도착했구나?] 다소 뜻밖의 발신자에 류신은 잠깐 대답을 잊었다. [나 사실 길 건너편에 있거든. 너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 봤어.] "어느 쪽 길을 말하는 거야?" [음, 여기가……프리덤 플레이스?] 약간 뜸들인 대답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류신은 자신이 방금 들어왔던 유리문 앞으로 다시 걸어갔다. 로비의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앉아있는 직원 두 명이 흘끔 류신을 쳐다본다. 명주가 어디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편 어디?" [카페에 있는데 지금 나가.] 곧 길 건너 맞은편 위쪽에 있는 노천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안에서 명주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농담이 아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런던에 있어야 할 애가 여긴 어쩐 일일까. 명주는 약혼식 취소가 결정되자마자 곧장 런던으로 날아가 버렸었다. [설마 문전박대는 하지 않겠지? 집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명주의 목소리는 쾌활하지도 아주 어둡지도 않았다. 친근하지만 다정하지 않은 느낌. 양옆을 둘레둘레 둘러보며 길을 건너오는 모습을 확인하고 류신은 마중하듯 문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거실에 이르자 명주는 통유리 벽면 하나 가득 펼쳐진 멋진 전망에 넋을 잃은 듯 신음같은 탄성을 질렀다. "네가 아무리 혼자 산다 한들 적당히 허술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만……," 명주는 류신의 뉴욕 아파트에 와본 것이 처음이었다. "상상한 것 그 이상을 보게 되는구나." 과장된 어조로 단어 하나하나 힘주어 말한다. "앉아있어." 류신은 창을 향해 배치된 심플한 디자인의 연한 베이지색 가죽 소파를 가리키고 부엌으로 갔다. 보름 가까이 비워두었던 집에 갑작스런 방문객에게 대접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커피 마실래?" 큰 소리로 묻자 지금 카페에서 두 시간 이상 짱박혀 있다가 나왔다는 대답이 역시 큰 소리로 들려왔다. 거실과 부엌에 각각 떨어져서 대화를 하기에는 이 아파트는 좀 많이 넓다. 소리를 크게 지르지 않으면 전혀 들리지 않는다. "향후 몇 시간 동안 물 종류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아무 것도 필요없으니까 여기 와서 앉아." 류신은 냉장고 깊숙이 숨어있던 맥주캔 두 개를 찾아들고 거실로 나왔다. 하나를 건네주자 물 종류는 싫다던 명주가 '고마워' 하고 받아들었다. 하지만 마개도 따지 않고 테이블에 그냥 놓을 뿐이다. "할 얘기가 뭐냐?" 단숨에 반 캔 이상을 비우고 류신이 물었다. "그렇게 궁금하니?" "무슨 소리야?" 미안함은 미안함대로. 어색함은 어색함대로. 귀찮음과 불쾌함은 또 귀찮음과 불쾌함대로 전부 다 따로 논다. 미안한데도 불쾌할 땐 불쾌하다. 한 사람에 대한 감정들이라도 좀 뭉뚱그려 합쳐서 적당히 배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쉽지 않다. "우선 워밍업부터 좀 하고 말야. 뉴욕엔 언제 왔냐, 왜 왔냐, 요즘 어떻게 지냈냐, 밥은 먹고 다니냐 등등등. 그 다음에 용건이 뭐냐고 묻는 게 순서가 아닐까?" "그 순서는 누가 정하는데?" "내가." 말은 농담같이 하면서도 내심 진짜로 섭섭한 것 같았다. 류신은 말없이 캔을 마저 비웠다. "그래. 밥은 먹고 다니냐?" "굶지는 않아." "요즘 어떻게 지냈는데?" "그냥저냥." "뉴욕엔 언제, 왜 왔고?" "오늘 아침. 이유는 없어." 잠깐의 썰렁한 침묵이 감돌고, "그래서 할 얘기란?" 류신이 다시 냉랭하게 묻자, 명주는 갑자기 핸드백 안을 뒤적거리더니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담배를 두 모금 빨아들일 동안의 침묵. "저……, 나 다시 대답할게. 생각해보니까 나 밥 못 먹구 다녔어. 하루 종일 물 종류만 마셨거든. 담배 연기 들어가니까 눈앞이 핑 돈다. 배고파. 밥 줘." 뭔가 대꾸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뉴욕에는……, 오늘 아침에 왔어. 왜 왔는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담배를 낀 오른손 엄지를 구부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는다. "에구구. 이 담배 오늘 처음 사봤는데 연기가 맵네." 명주는 류신을 흘깃 쳐다보고 난처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일어나." 류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밥 먹으러 나가자." "……." "배고프다며?" "그냥 한 말인데?"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눈을 초롱초롱뜨고 어리광 부리듯 대답해온다. 류신은 난감해졌다. "어쨌든 나가자." "나 이대로 내쫓으려구?" "그런 거 아니야!" 짜증이 나서 목소리도 높아지고. "그럼 얘기는 언제 해?" "밥 먹으면서." "그렇게 오픈된 데서는 싫어." "알아듣는 사람도 없어. 잘 들리지도 않겠지만. 원하면 룸을 잡을 수 있는 곳으로 가던지." "예약도 미리 안 하고 지금 나가서 괜찮은 데 갈 수 있겠어? 별로야. 별로 안 내켜." 후……. "말해두지만 일단 나가야 뭐라도 먹는 거다. 난 집에서 음식 냄새 나는 거 싫으니까." "알았어! 알았다구, 이 환자야!" 명주는 질렸다는 듯 소리를 꽥질렀다. "……." "알았으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생각 좀 해보게. 어떻게 해야될지 아직 삘이 안 왔어." 류신은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삘 오면 말해라." 눈을 감고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얹고 등을 기댄다.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해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른다. "왔다, 왔어! 삘 왔어." 류신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반쯤 올렸다. "집 구경 좀 시켜줘." 명주는 입꼬리를 양 옆으로 길게 올려 찢으며 웃고 있었다. 조커처럼 인위적인 웃음. "밥은?" "금강산도 식후경." "……." "어? 잘못 말했나?" 떨떠름한 기분으로 류신이 집 안을 안내해주는 동안 명주는 내내 열광적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 사건 없이 그냥 결혼이 척척 진행되었더라면 어쩌면 자기 집이 되었을지도 모를 곳을 돌아보며 마냥 웃고 있는 명주를 류신은 도저히 편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찾아온 것일까. 할 얘기란 게 뭘까. 약혼이 취소되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영리한 녀석답게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였었는데. [아주 고마웠어. 숙원사업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 같아서 정말 뿌듯했었어. 잠깐 동안이었지만 참 신났었어.] 라고 하면서 명주는 약혼 예물들을 모두 돌려주었었다. [사실 요건 좀 돌려주고 싶지 않은데. 두고두고 생각날 거야. 그 반지 진짜 이뻤지 하고.] 하지만 약혼반지 케이스를 열어 그 안의 반짝거리는 내용물을 들여다보며 명주가 말했을 때도 류신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몰랐더라면, 그냥 전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더라면 아마 명주와 그대로 결혼하게 되었을 것이고 저 반지에 새겨진 대로 명주는 Myoungjoo Park Ghang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도 안에 들어가보지 못한 그의 집에 다녀온 반지 케이스를 받아들어 류신은 꾹 움켜쥐었다. 복잡한 심경을 대변해주듯 손아귀에 힘이 가득 들어간다. 휘우가 살아있음을 알고 다시 만나 또다시 놓쳐버린 이후로 류신은 그 안과 밖, 속과 겉,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항들에 골몰하여 뇌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가슴속을 갈퀴로 긁고 후벼파는 것 같고 목구멍이 바짝바짝 말라 쩍쩍 갈라지는 것처럼 아프다.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더라도 밤이 되면 너무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고 생전 의식해본 적조차 없는 6월말 초여름 더위에도 진이 빠진다. 그것에 비하면 의외로 조용히 진행됐던 약혼 취소는 극히 사소한 일이었고 그의 안에서 재빠르게 소화되었는데도 류신이 최근 안색이 좋지 않고 표정도 밝지 못한 것을 이 일과 관련시켜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류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특별히 나서서 해명할 만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들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무엇이 됐든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추측과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는 일이라면 류신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네 침실은 안 보여주니?" 맨 끝 코스로 윗층의 테라스를 구경하고 들어오면서 명주가 물었다. "별로 볼 것도 없어." 류신의 관점으로는 거실과 윗층 테라스의 탁 트인 전망 정도가 이 집에서는 좀 괜찮고 그 외에는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다. "볼 게 왜 없겠어? 네 침실이잖아." 아래층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지? 나 어딘지 알 것 같애. 말릴 사이도 없이 명주는 재빠르게 뛰어내려갔다. 오랜만에 올라온 윗층은 낯설고 마땅찮게만 보였다. 왜 이렇게 해놨지? 어제가 분명히 메이드가 오는 날이었을텐데 계단 바닥에 슬리퍼 자국이 보인다. 섬세하게 세공된 난간의 금속 장식도 구석구석 잘 닦지 않아 뿌연 먼지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사실 아까 거실에서도 소파와 테이블이 자신이 잡아놓은 위치와 각을 비뚜스름하게 벗어나 있는 걸 발견하고 상당히 불쾌해진 참이었다. 테이블 유리에는 지문이 마구 묻어있었고 키친 싱크는 물기를 빨리 닦지 않아 말라붙은 물방울 자국들이 보기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이번 메이드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 번에는 자신이 집에 있을 때 오게 해서 청소의 ABC를 확실히 일러줘야겠다 하면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침실 쪽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류신은 쏜살같이 달려갔다. "류신아!!" 열린 문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명주는 류신이 오자 얼른 그 뒤에 숨었다. "초, 총을……!" 명주가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호주머니에도 들어갈 만한 크기의 44구경 단발單發 데린저였다. 침입자는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아서 생산된 지 150년이 넘은 골동품 권총을 양손으로 꼭 부여잡고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부들부들 어깨까지 마구 떨리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카이." 류신이 두 손을 어깨 정도 위치까지 들어 손바닥을 보여주며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명주가 등뒤에서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뵈도 그 총 제대로 작동되는 거야. 장전도 되어있고." 부드러운 말소리에 카이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알아요." "위험해. 우선 내려놔."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괜찮아. 내려놔. 허락없이 내 집에 들어온 것도 용서해주고 맘대로 뒤져서 내 수집품을 꺼낸 것도 아무 말 하지 않을 테니까 우선 그것부터 내려놔." "야, 너 그렇게밖에 말 못해?!" 뒤에서 명주가 속삭였다. "넌 가만있어." 솔직히 그 정도도 많이 봐주는 거라고 류신은 생각했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돈이 필요해서라면―" "아니에요!!" 카이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두 사람의 시선은 순식간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왜지?" "전 대답을……" 모기 소리만한 힘없는 소리.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대답을 못 들었어요." "대답?" "……." "무슨 대답?" 류신이 물었다. "전에 여쭤봤었는데……." 카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뭘 말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류신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미안하다. 다시―" "결혼하시면……," 둘의 말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류신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결혼하시면 저는 어떻게 되냐구요." 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언젠가 저렇게 물어왔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최근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다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그 무렵의 일이 지금으로선 까마득하게 예전 일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고 뒤죽박죽 혼란스럽기만 했던 시절. 그때 자신이 대답을 해주지 않았었단 말인가? 만약 정말 카이가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집에 몰래 들어와 기다렸다가 따질 정도라면 자신이 해줬다고 생각했던 그 대답을 이렇게 총부리가 겨누어진 상태에서 선뜻 내놓기는 좀 리스크가 따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류신은 이 몇년간 요즘만큼이나 절실하게 삶에의 집착을 느낀 적이 없었고, 이 상황에서 그것은 더욱 확실해졌다. "결혼이라니? 너 결혼하니?" 류신이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명주가 옆으로 반 발짝 디디며 빼꼼 머리를 디밀었다. "혹시 얘가 직접 자기 입으로 결혼한다고 하던가요?" "너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류신은 소리를 조금 높이고 명주의 팔을 확 잡아 자신의 뒤로 다시 끌었다. "이거 놔봐!" 명주는 좀 들떠있는 것 같았다. 들떴다기보다는 화가 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카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총구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바닥을 향했다. 류신은 그걸 놓치지 않고 앞으로 서서히 걸음을 뗐다. "그 말이 맞아. 나는 일단 결혼은 하지 않아." "하지만 결혼하신다고……." "정확히 말해서, 약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취소됐죠." 명주는 조용히 류신의 뒤를 따르는 듯 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처량한 '전' 약혼자구요." "박명주, 이리 와!" 류신은 명령하듯 짧게 끊어 말하고 재빨리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 부드럽게 덧붙였다. "이봐, 카이. 저 여자는 아무 상관없으니까 거실에 가 있으라고 하면 어떨까?"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가만있어. 내가 거실에 가서 경찰에 전화라도 하면 어쩔 거야?" 류신에게 감히 함부로 굴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인 명주는 류신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시겠어요? 깨졌어요. 모든 준비 끝나고 우리 둘 다 서울 가서 얌전히 대기중이었는데 약혼식 나흘 전에 파토가 나버렸다구요. 그래서 말인데―"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카이가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덜덜 떨며 말했다. 그리고 어설픈 폼으로 총구를 다시 쳐들었다. 잘 따져보면 명주도 류신도 아닌 모호한 지점을 겨누고 있는 것이었으나 그것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저 문득 총이 바닥을 향해 있음을 깨닫고 좀 위로 치켜든다고 든 것일 뿐이다. "저기요. 카이? 카이 맞나요? 뭐가 됐든, 나야 어차피 비행기 폭발이라도 해서 한 순간에 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사람이니까. 원한다면 날 쏴도 괜찮아요." "박명주!" "기다려. 난 지금 이 분이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명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치고서 잠시의 틈도 없이 곧장 말을 이었다. "난 지금 솔직히 죽을 만큼 좌절한 상태에요. 저 못된 녀석이랑 결혼하는 게 내 삶의 절대 목표였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어버렸거든요. 완전히 끝장났다구요. 그래도 자살할 용기는 없고 얼떨결에 누가 죽여주면 대충 고맙죠." 명주의 볼은 잔물결같은 경련으로 실룩거리고 있었다. 흥분과 분노와 긴장으로 눈빛이 요란하게 춤춘다. "가까이, 가까이 오지 마, 말란 말이에요." 됐어. 그만 진정해. 류신이 명주에게 팔을 뻗으며 앞으로 확 다가오자 카이는 패닉 상태에 빠진 듯 안절부절하며 사시나무 떨 듯이 부들부들 떨었다. 가까스로 터져나온 카이의 말(과 그 손에 든 총)을 명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쏘든 말든 난 관심도 없어. 그런데 그 전에 그 비싼 대답 먼저 들어두어야 할걸? 방아쇠 당기고 난 이후에는 이미 늦는다는 생각 안 들어요?" "……." "류신아, 어서! 이 분은 대답을 원해." 격앙된 어조로 다다다다 내뱉은 명주는 거의 자신의 옆에 와있는 류신을 깨닫고 휙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명주는 움찔 가볍게 떨었다. 류신은 명주에게서 싸늘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팔을 낚아채 잡아 옆으로 확 밀쳤다. 앗 하는 사이에 명주는 가느다란 비명과 함께 침대 언저리 한쪽 구석에 나동그라졌다. "아무 데나 나서지 마. 명주 네가 끼여들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이야. 어쨌든 대답―" 갑자기 명주가 히스테릭한 높은 소리로 크게 웃기 시작해서 둘의 주의는 일시에 그리로 쏠렸다. "아하하하. 알았어, 이제! 그러면 그렇지. 맞아. 강류신이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어쩐지……." 뜻모를 말을 큰 소리로 계속 되풀이. "이봐요, 카이. 그 대답 내가 대신 해줄까요?" 카이는 조금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명주를 돌아보고 있었다. "저기 걸려있는 저 사진을 좀 봐요." 명주는 침대 맞은편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문을 향해 침대 끄트머리 귀퉁이에 앉은 카이는 그쪽을 보려면 왼쪽으로 고개를 약간 꺾어야 했다. 카이는 명주가 가리킨 액자에 흘깃 시선을 주고는 곧 외면했다. "혹시 봤었어요?" 대답이 없다. "봤었나보네?" 명주가 히죽 웃자 류신은 왠지 소름이 끼쳤다. "누구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명주, 그만 닥쳐!" 류신은 명주와 카이의 손에 들린 총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싫어, 이 나쁜 자식아!" 명주는 독기를 뿜으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요, 카이. 저 사진이 컬러도 아니고 어두워서 잘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닮았거든요. 당신이랑. 아니, 당신이 저 사람을 닮은 거지……." "……." "알았어요?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다구. 당신은 저 사람 대신이거든. 관계가 계속된다고 해도 당신은 영원히 대타야. 저 사람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응? 저게 누구냐면―" "시끄러워!!" 카이의 얼굴이 싯벌개지며 소리를 지른 것과 손에 들린 총이 엄청난 굉음을 뿜은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카이는 발사되는 반동에 밀려 침대 위에 벌러덩 자빠졌고 명주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꺄악 비명을 질렀다. 어설프게 발사된 총알은 빗맞아 목표물이었던 액자의 한 귀퉁이를 살짝 스치고 콘크리트 벽에 박혔다. 액자는 나무틀 한쪽이 처참하게 부서지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유리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사진은 불이 붙어 바깥으로부터 일그러지듯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류신은 재빨리 몸을 던져서 맨손바닥으로 짓이기다시피 누르고 두드려 불씨를 꺼트렸다. 지후와 밖에서 저녁을 먹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라 준석은 좀 긴장하고 있었다. 모처럼 뜻하지 않게 한가한 토요일 저녁에 아무 약속도 없을 때, 하다 못해 어머니가 열 번 들이밀면 한 번은 의무방어라도 해야 하는 맞선 약속조차 없을 때, 썰렁한 아파트에서 혼자 저녁을 챙겨먹기는 상상만으로도 여간 쓸쓸한 노릇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날 왜 넌 만나는 여자 하나 없냐 하는 잔소리나 듣자고 본가로 기어들어가기는 싫고, 혼자 먹기도 싫고, 간만에 일도 없는데 병원에 남아 밍기적거리는 것도 왠지 다른 사람들 눈에 능력없는 놈처럼 보이는 것 같아 싫고. 이래저래 마땅치 않았다. 이런 날 지후가 약속이 없어서 자신과 함께 해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저히 두고볼 수 없어서 자신이 같은 아파트, 마주보는 동으로 가깝게 이사온 다음에도 없었다. 지후는 일이 너무 바쁘거나 아니면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만나야 할 사람인지 같이 자야 할 사람인지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우울의 극치를 달릴 때조차 지후는 혼자 자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시기, 어떤 상태에 놓여있든 지후는 항상 스스로를 가만두지 못하고 끊임없이 혹사시켰다. 준석은 그것이 불안했다. 과로하고 지친 몸에서 건강한 심리 상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분장애로 인해 본인의 의식으로 피로가 확실히 전달되지 못하고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 한다 할지라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몸은 마음도 도와주지 않는 그 피로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 하물며 지후에게는 병이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낫지 않는. 소리없이 서서히 죽음으로 이르는 병. "뭐해? 음식 앞에 놓고 제사 지내냐?" "어? 아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복성스럽게 바쁜 숟가락질을 하는 지후를 준석은 밥 먹는 것도 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지후는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먹는 모습도 굉장히 예뻤다. 소담스러우면서도 깔끔한 입놀림. 우아한 동작. 모든 것이 다 예뻤다. "빨리 먹어." "응." "식으면 맛없으니까." 조금 챙겨주는 듯한 소리를 하고 지후는 멋쩍은 지 엷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에 준석은 황홀한 기분이 되어 그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지후는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았고 말도 많았다. 솔직히 지후의 무드가 상승하면 온몸에서 빛이 뿜어나오는 것 같았다. 얼굴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피부에는 화색이 돈다. 원래 보는 사람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지독히 아름다운 얼굴인데 후광이 비치는 듯 찬란한 빛마저 감돌아 그 주위까지 환해지는 것이다. 저것이 자연스러운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업적으로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석은 역시나 그 빛에 매료되곤 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졌을 때 그 좋은 기분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역시 지후 본인이다. 저렇게 온몸으로 밝게 들뜬 기분을 마구 발산하게 될 정도인데 본인이 그걸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이해는 하지만 저 상태대로 방치해두는 것은 의사의 책임을 망각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지후의 어머니가 말년에 정신분열증으로 고통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후의 저 병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었고 가벼이 볼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아참. 소연이 귀국했다던데?" 준석은 오늘 학교 때 알고 지내던 친구를 병원에서 만났었다. 지후가 예전에 고등학교 때 그 서클 모임에서 알게 되어 대학 3학년 때까지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과 친구였는데 준석에게 소개를 해주어 좋게 말하면 더블데이트, 나쁘게 말하면 지후 커플의 들러리로 넷이서 함께 자주 만나 영화도 보러다니고 놀러도 다니고 했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서 그냥 이성친구 정도로 지내다가 지후가 임소연이라는 그 여자친구와 깨졌을 무렵부터 서서히 멀어졌었지만 최근에 이 친구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만나 얼굴을 가끔 보게 되었다. "알고 있어." 지후는 더할 나위없이 밝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혼하고 돌아온 거라고." 준석은 왠지 괜히 얘기했다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지후의 기분이 너무 좋다. 둘은 그다지 좋지 않게 끝났었고 한동안은 지후 앞에서 그 비슷한 이름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다음 주중에 한번 보기로 했어." "어, 그래?" 준석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누가 먼저 보자고 했어?" "물론 내가." 지후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돌아왔다고 누가 그러길래 전화번호 좀 달라고 해서 내가 연락했어. 조만간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정상적인 상태의 김지후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조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걱정스럽다. "와, 역시 여름이 되니까 해가 길어져서 좋네. 여덟시가 다 됐는데 아직도 환해." 지후가 식당 홀을 가로질러 열린 문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주가 하지였을걸?" "그랬었나? 아, 그렇군. 그럼 이미 낮이 짧아지기 시작한 거구만. 이렇게 섭섭한 일이!" "그렇지." 지후는 정말로 섭섭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밥을 먹다말고 벌떡 일어나 출입문 앞으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로. 바깥에는 가로등이 막 켜져 있었고 밝은 불빛 때문에 오히려 주위가 조금 어둑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녁때라 덥지도 않고 바람이 정말 시원해. 딱 좋다!" 지후는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쳐 식당 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았다. 준석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좀 당황해서 갈팡질팡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둘을 번갈아보다가 준석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인다. "그만 먹고 얼른 나와. 집까지 뛰어가자!" 집까지는 차로 가도 4, 5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미쳤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제안이었다. 준석은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싫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석이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지후는 그것도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벌써 혼자 한참 앞으로 달려나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빨리 와!" 뒤를 돌아보고 환히 웃으면서 크게 소리를 지른다. 같이 길을 건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부 쳐다보는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의사한테 안 보여도 되겠어?" 발갛게 한가득 부어오른 손바닥에 약을 바르고 있는 류신에게 민혁이 물었다. 불꽃에 지글지글 그슬린데다 유리 파편에 마구 베이기까지 한 상처는 보기에도 처참했다.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됐어. 안 갈 수 없겠다 싶으면 내가 알아서 갈 거야. 지금은 모든 게 다 귀찮아." 류신은 정말 모든 게 다 귀찮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연고를 휙 내던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저, 거기 블라인드 좀 내려줘. 눈이 부셔." "완전히 하인 취급이구나." "하기 싫으면 하지 말던지." 민혁은 블라인드를 내렸다. 거대한 그림자 속에 들어간 것처럼 거실은 금세 컴컴해졌다. "다 내리진 마. 너무 어두워." "그럼 어느 만큼까지 내려?" 상황이 상황인지라 불평을 꾸욱 참고 묻는다. 갑자기 연락 받고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집 안에 경찰이 있어서 놀랐고 엉망이 된 침실을 들여다보고 또 한번 놀랐다. 그 다음부터 온갖 뒤치다꺼리에 류신이 시키는 대로 카이(다독거리면서 물어보니 메이드를 매수해서 숨어들었다고 했다)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돌아와보니 명주는 자신이 준 진정제를 먹고 잠들어 있었고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의연해 보이던 류신은 온몸의 힘이 주욱 빠져나간 것처럼 소파에 멍하니 널브러져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보고 류신이 맨 먼저 한 말은, [왜 또 왔어? 그냥 가지]. "적당히. 알아서." 류신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알아서 하라는 인간이 제일 무서워." 뒤에서 나는 소리에 류신과 민혁은 동시에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잠깐 눈 붙이고 깨어난 명주가 손님방으로부터 걸어나오고 있었다. "알아서 해달라는 클라이언트 치고 알아서 해줘서 만족하는 꼴을 못 봤어. 기피 유형 1호야." 류신은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고 민혁은 씨익 웃으며 대꾸를 해주었다. "할 수 없잖아. 네 일이 그런걸. 클라이언트를 고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아직은. 하지만 계속 회사를 키워나가다 보면 또 알아? 충분히 고를 수 있는 입장이 되겠지." "오, 그러셔?" 민혁이 웃으며 덧붙였다. "제발 그렇게 되어라. 나한테 떨어지는 건 없겠지만." "최소한 괴롭히지는 않을 테니까."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류신이 받아친다. "시끄러. 넌 말할 자격 없어." "자격은 모르겠고. 일단, 말할 기운이 없다." 류신이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뿜어 민혁은 류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색이 아주 안 좋았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처럼 뜨겁다. 상당히 뜨겁다. "냉혈동물 열 받았네." "뭔 소리야. 이건 또." 류신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에 얹힌 손을 탁 쳐냈다. "너 혹시 온몸이 나른해서 꼼짝하기 싫고 마디마디 구석구석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막 쑤시고 머리도 좀 멍하면서 지글지글 끓는 것 같고 기타등등 하지 않냐?" "대충 비슷." "그게 바로 몸살 감기라는 거다." "몰라, 난. 그런 거." 퉁명스러운 류신의 대답에 명주가 픽 하고 웃었다. 류신은 좀 황당하다는 듯이 명주를 돌아보았다. "넌 그만 돌아가. 당분간 네 얼굴 안 보고 싶다." "나는 네 얼굴이 뭐 보기 좋은 줄 아니?" 명주가 발끈해서 외쳤다. "그럼 빨리 가." "내 맘이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일도 바쁠텐데." "내 일은 네가 챙겨주지 않아도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은 붙들어매시지?" "걱정이라기 보다는……. 관두자." 몸도 안 좋은 녀석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다가 마른기침을 서너 번 연거푸어 한다. "오빠는 서울에 왜 안 왔었어? 취소될 거 알고 있었어?" 명주의 분풀이는 이제 민혁에게로 화살이 돌려졌다. " "내가 알았을 턱이 있냐. 나도 바쁜 몸이야. 가족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고 결혼식에나 가면 됐지 약혼식까지 뭘 챙겨." 민혁은 최대한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 신경써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명주는 민혁을 한번 째려보고 창가로 걸어갔다. "결혼이고 나발이고 앞으로 그 얘기는 다시 거론하지 않겠어. 나도 지겹다 이제." "잘 생각했다." 민혁이 말했다. "강류신. 그 대신 아까 그 총 기념으로 나 줘. 그럼 모든 일을 싹 잊어주마." "그건 네가 갖다 뭐하게?" 류신은 입을 굳게 닫고 있었기 때문에 대꾸해주는 것은 계속 민혁의 몫이 되어 있었다. "기념이라고 했잖아." "총 가지고 비행기를 어떻게 탈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민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 돼." 류신이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왜?" "안 된다면 안 돼." "간수는 잘 할게.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잘 가지고 갈 테니까. 너처럼 쓰잘데없이 총알 집어넣어두는 일도 없을 거고." 총알 없는 총이 총이냐. 류신이 불쑥 내뱉는다.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이 난리를 겪은 것도 결국 저 녀석의 무식할 만큼 단순한 원칙 때문이라고 민혁은 생각했다. 아무리 앤티크한 수집품들이라지만 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어야 하고 자동차는 시동만 걸면 바로 달릴 수 있어야 하며 시계는 무조건 정확한 시간을 가리켜야 한다. 한 평생 서랍 속에만 들어있을 지언정 류신이 가지고 있는 시계들은 멎어있는 법이 없었다. 모두 일률적으로 초단위까지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며 계속 현재를 달린다. "네가 위험한 짓을 하든 말든 난 상관없다. 내가 꽤 아끼는 수집품이야. 그래서 안 돼." "같은 걸로 또 사면 되잖아. 찾아보면 있을 거야." 명주는 대단히 집요했지만, "필요없어." 류신의 고집은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구해다 줄게." "그럼 그걸 네가 가지면 되겠군. 저건 안 돼." 만만치 않은 둘의 실랑이를 민혁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가, "대체 왜?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끝내 포기하지 않는 명주의 물음에 류신이 뭔가 말할 듯한 느낌이 들어 호기심에 귀를 바싹 기울였다. "아주 오래 전에 어느 굉장히 유명한 미국인이 저 총에 맞아 죽었어. 똑같이 생긴 놈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바로 그 총은 세상에 하나 뿐이야. 당연히 구할 수 없지." 류신의 목소리에서는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를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사람이 누군데?"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고. 내가 이 나라에서 일하는 동안은 가지고 있을만한 물건이야. 가끔 제법 유용하거든. 좀 유치하지만." "……." "물론 심리적으로." 확실히 해두듯이 류신이 덧붙였다. 누굴까 생각하다가 아, 하고 민혁은 손가락을 딱 퉁겼다. "그게 박물관에 있어야지 왜 여기 있어?!" 눈치챘는지 표정이 싹 달라진 명주가 묻자, "너, 박물관 소장품 중에 진품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냐." 민혁이 거들었다. 명주는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아까의 긴박한 대치 상황에서 류신이 가장 걱정했던 대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니 민혁은 풋, 하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자신도 남의 나라에서 장사하는 입장으로 가끔 열받게 하는 새끼들이 있을 때 그런 물건이 있으면 나름대로 재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네 나라 사람들의 어떤 상징과도 같은 누구누구를 쏘아죽인 총을 나는 갖고 있다……. "나는 잠깐 한숨 자야겠어……," 류신은 소파에서 일어나 한쪽 옆에 세워두었던 망가진 사진 액자를 집어들고 거실을 걸어나갔다. 사진은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불에 타들어간 것은 다행히 주변 배경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소년은 아슬아슬하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남아있었다. "류신아. 윤희원 아줌씨한테 부탁해서 그 사진 새로 뽑아다줄까? 액자도 똑같은 걸로 해줄게." 민혁이 묻자 류신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됐어." 의외의 대답. "정말?" "괜찮아. 사진보다는 실물이 좋으니까." 앗. 민혁은 명주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눈치챈 낌새는 엿보이지 않았지만 명주는 류신의 발언에 확실히 안테나를 세우고 있었다. "어디서 잘 거야? 설마 네 침실은 아니겠지? 열이 상당하던데 약 나부랭이라도 안 먹어도 되겠냐?" 민혁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 침대는 내 방에 있으니까 거기서 자야지. 이딴 거는 푹 자면 낫는 거야. 약은 필요없어. 들어간다." 피곤함이 물씬 풍기는 뒷모습이었지만 보무는 당당했다. 민혁은 저 지친 몸을 움직여가는 은근히 경쾌한 스텝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뭉클한 감정과 묘한 부러움들이 구름처럼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걱정이다."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명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했다. 그리고 류신은 자러 들어간지 30분도 채 못 되어 커다란 스포츠백 하나를 어깨에 메고 갑자기 방에서 뛰쳐나왔다. 청바지와 티셔츠에 운동화. 잠깐 운동이라도 하러 가는 것같은 차림새였지만 가방은 뭐가 가득 들었는지 제법 뚱뚱했다. "나 급하게 가야 할 데가 생겨서. 당분간 이 집은 형에게 맡겨놓고 갈게. 비밀번호도 알고 키도 갖고 있지? 언제 돌아오게 될지는 아직 몰라. 하루 이틀이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어. 그 동안 이 집 마음대로 이용해도 좋아. 팔아먹지만 마. 후후. 침실벽을 수리해야 하는데……. 그건 일단 갔다와서 처리하고. 회사에는 내가 지금 가면서 전화할 거고……." 듣고 있기만 해도 숨이 넘어갈 페이스로 류신은 마치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한 달 사이에 겁나게 야윈 얼굴에는 아까는 찾아볼 수 없었던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섬광처럼 날카롭게 번쩍이는 눈빛. 미묘한 엷은 미소. "명주, 너는 빨리 돌아가. 할 얘기 있다던 거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는데 내가 지금 좀 급해. 그 얘기 아직도 꼭 해야 할 거면 좀 나중으로 미루자. 그럼 나 간다." 갑자기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떨떨하기만 해서, "야! 너 어디 가는 거야?!" 류신이 문을 열고 나설 즈음에야 민혁은 간신히 정신을 챙겨 물어볼 수 있었다. 류신은 잠깐 멈칫하더니 민혁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쏙 빨려들 듯한, 조금은 수줍게도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찾았어." 그리고 쾅. 문이 열렸다 닫히고 나니 정말 류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순식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