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벨벳커튼이 드리워진 킹사이즈 침대에는 하얀 나체가 흐트러진채로 뒤로 손목이 묶인 작은 체구의 여자가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으......으흑"


그녀의 시선이 위로 향해 차갑고 냉정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침대 옆에서 옷을 갖추어 입는 그의 얼굴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기절하진 않았네. 힘들었을텐데."

"풀어주세요..."

"이제야 존대말을 쓰는거야?"

"이제 원하시는대로 하셨으니 제발, 제발 풀어주세요..."

"글쎄."


그가 입술 한쪽만 살짝 올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줄기가 시트로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어야지."

"집에 가고싶어요... 선배님, 제발..."

"선배라."


그가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이젠 오빠라고 불러야지. 안그래 예린?"

"선우선배..."

"입 다물어. 2년전, 그날부터 넌 쭉 내거였어. 니가 바꿀 수 있는게 아니야. 알아들었어?"

"흑....."

"니네 엄마가 우리 아버지랑 결혼한 것 따위로 내가 멈출거란 생각은 그만두는게 좋아. 난 너 놓아줄 생각 전혀 없으니까."


그가 그녀를 밀어내자 손목에 묶인 그의 벨트가 그녀의 연약한 살을 파고들었다.


"아윽..."


그녀가 아픔을 못이기고 신음소리를 내자 그의 얼굴에 다시 욕정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묘한 소리로 흥분시킬래 아침부터?"

"서, 선배... 손이 아파요..."

"그래?"


그가 침대로 다시 다가와 그녀의 손목에 감긴 벨트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풀어주면 다시 반항하려고?"

"......"

"풀어줄테니 이젠 쓸대없이 소리지르거나 도망치기 없기야."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가 그녀의 귓볼을 물었다.


"그래봤자 다시 이렇게 벌을 받겟지만 말이야."

 


고등학교 2학년.


집에서 학교로 또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집으로를 반복하던 성실한 여고 2학년생이던 안 예린.


집안은 부유했지만 심장이 안좋은 아버지가 병원에 드나드시것이 유일하게 고민거리이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여름방학을 2주일 남겨놓은 그날, 회사에서 발작을 일으키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방학내내 정신없이 어머니와 장례와 49제를 치른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져 집에만 틀어박혀 보냇다.


그런 그녀를 보다못한 어머니는 '친구와 놀다오라'며 그녀를 친구들과 근처 풀장에 가도록 허락해주셨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 일이 그녀의 인생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사건이 될 줄을.

 


"여기 물 왜이래. 진짜 오크녀들만 오는 짐승탕이잖아."

"하하, 야 난 하마도 봤다."

"그냥 룸에 올라가서 자다가 밤에 나이트나 가자. 눈 썩겟다, 나가자."


친구들의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며 호텔 풀장의 여자들을 구경중이던 강선우는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원피스 수영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큰 키는 아니지만 다리가 길고 허리가 잘록한게 비율이 정말 잘 맞는 몸매였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흰 피부까지.


"어? 선우 너 어딜보는거야? 저기 저 작은애?"

"......비율 좋지?"

"진짜 비율 괜찮네. 다리도 이쁘고 엉덩이도 귀엽고. 근데 너무 어려보이지 않아?"

"요즘 고딩들중에 저런몸매 가진 버진 없다."

"하긴 주위에서 두고봣겟냐? 크크크"


음흉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친 태윤이 선우의 옆구리를 쿡 찔러보였다.


"좀 꼬시면 방까지 따라올걸."

"스위트룸이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따라올거다."


고등학교때부터 붙어다니기 시작한 핸섬한 외모의 4인방은 나쁜짓이란 나쁜짓은 다 같이 한 악동들이었다.


하지만 빽이 좋은 부모님덕에 단 한번도 경찰서신세를 진적이 없어 주위에서 슬슬 피하는 대상이었다.


대학교 1학년의 얼마남지 않은 여름방학. 돈많고 빽좋은 그들이 하지 못할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번 꼬셔?"


유성의 음흉한 목소리에 네사람은 어느 새 가위바위보를 하고있었다.


이긴사람은 재규였지만 항상 보스격인 선우에게 양보를 하고, 네사람은 어느새 예린을 둘러싸고 있었다.


"혼자온거예요?"

"예? 아뇨, 친구들이랑..."


흘끗 그녀의 친구들을 체크한 네사람은 다른여자애들은 너무 못생겼다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좋아. 얘만 데리고 올라가는거야. 무언의 동의가 오고갔다.


"우리 여기 호텔 방잡고 놀거든요, 있다가 우리랑 같이 노..."


유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려 네사람에게서 멀어진 예린은 친구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풋!"


재규가 닭쫓던 개 표정으로 멍해진 유성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고 그런 재규를 있는힘껏 풀로 밀어버린 유성이었다.


"아푸!!! 김유성 너!!!"

"저 **년이... 어디서 죽을라고 날 무시해..."


잘났기로 소문난 이 4인방의 제안을 거절한 여자는 정말 드물었고 그런만큼 그들의 자존심은 드높았다.


"진정해.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찍은애지 니가 찍은애도 아녔잖아?"


부드럽게 말하는 선우였지만 그의 눈은 사냥감을 쫓듯이 예린에게 고정되어있었다.


"보아하니 곧 나가겟네. 여기... 수영장 출구 지하주차장이랑 연결되어있지?"


나긋한 선우의 목소리에 나머지 셋은 알아들었다는듯 장난스레 경례를 갖다붙였다.

 


"우리 엄마가 태워다주실텐데 무슨 버스야, 예린아."

"응... 그래도 완전 반대잖아 우리집이랑 너희집. 버스타면 15분인걸 뭐."

"정말 괜찮겟어?"

"그럼! 젓은 머리두 말릴겸 조금 걷는건데 뭐."


친구가 태워다준다는것을 마다하고 출구로 나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간 예린은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태윤과 재규에


깜짝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오, 왜이러세요?"

"큭."


퍼억! 재규의 주먹이 그녀의 명치를 강타하며 그녀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이고 지연아, 괜찮아?"

"그러게 맥주 한잔도 못마시는애가 왜 그 칵테일을 다마셔~"


고통에 숨도 못쉬는 그녀를 들쳐맨 두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으윽..."

"참아 참아 엘리베이터에서 토하면 안돼?"

"아 여러분 죄송해요 얘가 토할까봐 그러는데 다음거 타심 안돼요?"


능청스런 두사람의 연기에 사람들이 내리고 그들은 그녀를 들쳐업은채 꼭대기층의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


"진짜 데려왔네?"

"어떻게한거야?"

"어퍼컷 한방을 배 정중앙에... 윽!"


어퍼컷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얼굴색이 변한 선우가 재규의 멱살을 쥐었다.


"기집애들 때리지 말랫지."

"하지만 말로 안들어먹을것 같길래..."

"내가 찍은건데 왜 함부로 건드려. 갈비뼈 나갔음 어쩌려구?"

"아, 아니 배 때린거라 괜찮을거야, 그렇게 세게 때린것도 아니고..."


유성이 두사람을 떼어놓았고 태윤은 소파에 눕혀진채 기절한듯 누운 예린의 얼굴을 덮은 머리칼을 넘겨보았다.


"우와. 재규 너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애를 기절하게 때렸냐? 난 죽엇다 깨도 이쁜애는 못때리겟던데."

"...급하다 보니까."


선우가 태윤을 냉정히 예린의 곁에서 밀어내며 예린을 안아들고 방으로 향했다.


"야, 내가 다음이다?"


재규의 말을 들은듯 말은듯 선우는 굳게 문을 닫아걸었다.

 


30분쯤이 흘렀을까. 예린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며 주위를 살폈다.


'풀장에 갔었는데... 그 다음은... 아윽!'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움츠리던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낯설은 침대에 눕혀져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힉!"

"....일어났어?"


여유롭게 머리를 털며 가운하나 달랑 입고 욕실에서 나온 선우가 그녀의 몸을 눈으로 훑어내렸다.


"너 근데 몸 정말 예쁘더라."

"....누, 누, 누,"

"내 이름은 강선우. 넌 안예린이지? 선아여고 2학년. 아, 가방에 학생증이 있더라."

"저, 저리가, 나, 나, 건드리면 죽어버릴거야!"

"흠...."


선우가 고양이처럼 나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그럼 저 밖에 있는 내 친구 세명이랑 같이 잘까?"

"?!"

"어떻게 할래. 나랑 잘래 아니면 남자 넷에 여자 하나, 그렇게 잘래?"

"......."

"니가 힘들텐데 네사람 상대하려면. 나같은 경우에도 피끓는 청춘인데 그런사람 넷 감당하려면 몸이 안남아날거야."


시트를 손에 감아쥐고 몸을 가린채 덜덜 떠는 그녀에게 다가간 선우가 다시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문, 열까? 나까지 포함해서 네사람 감당이 되겟어?"

"사, 살려주세요..."


그녀의 눈이 공포로 커진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누가 죽인대? 그냥 즐기면 되는거야. 나랑만."

"아, 아저씨..."


아저씨란 말에 선우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누가 아저씨야, 나 너보다 두살뿐이 안많아!"


하지만 예린에게 그런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순진하게 자란 그녀에게는 견뎌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저 아직 남자친구도 못사귀어봤어요, 저, 저 정말... 정말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고싶어요."


덜덜 떨며 눈물을 떨구면서도 자신에게 싹싹 비는 예린을 어이없는듯 바라보던 선우는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너 아직 한번도 못자보았다, 이거야?"

"네. 네. 우리 엄마랑 우리 아빠 이름 걸고 맹세해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지만 이미 선우에게 예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흠...그래? 나 지금까지 한번도 처음인 여자랑은 못자봤거든."

"네?!"

"오늘이 처음이네? 걱정 마. 부드럽게 대해줄테니까."


창문이 있기는 하지만 열리는 창문도 아닐뿐더러 문밖에는 3명의 남자가 더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흑... 흑흑... 제발..."

"조심할께. 응? 천천히 부드럽게 대해줄테니까."

"아, 안돼, 싫어, 아악!"


그가 그녀의 수영복으로 그녀의 손목을 침대 머리맡 기둥에 묶는동안 그녀는 있는힘껏 발버둥을 쳤다.


"가만 안있어? 또 맞을래?"


그의 으르렁거림에 그녀는 공포에 질려 발버둥을 멈추었다.


그가 그녀의 알몸을 입술로 혀로 희롱하는동안 그녀는 '제발 그만...'이라고 흐느낄뿐, 더이상 반항을 하지 못했다.


반항을 하면 당할 폭력도 두려웠고, 혹시나 문을 열면 다른 세명의 남자가 같이 덤벼들까 무서웠다.


"하아...진짜 이뻐. 수영복으로 가렸어도 알아봤어. 이렇게 예쁠줄."


그가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자, 그녀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새끼 드럽게 오래하네."

"그러게. 야, 강선우!"


두시간여 후. 가운을 다시 입은 강선우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나머지 셋은 반색을 하며 방안을 기웃겨렸다.


하지만 그는 냉정한 표정으로 방문을 쿵, 닫고는 나머지 셋을 훑어보았다.


"쟤 이제 내거야. 건들지 마."

"뭐?! 그런게 어딧어 이새끼야, 들어 나른건 난데!"

"내가 먼저 찍었잖아."

"뭐?!"

"좀 봐 줘. 정말 맘에들어서 그래. 거기에 쟤 처음이라 더 이상은 안돼."


평소같지 않은 무거운 목소리에 나머지 셋은 '그럼...나이트 가서 꼬시지 뭐' 하며 꼬리를 내렸다.


담배를 꺼내 물며, 선우는 만족한듯한 그 특유의 나른한 미소로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2-


기절한듯 누워있던 예린은 바깥이 사람들이 준비하고 나가는소리가 들리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을 바라보았다.


조용해진것을 느낀 그녀는 겨우겨우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옷을 갖추어 입기 시작했다.

첫경험으로 인한 하혈과 통증으로 기절할것만 같았지만,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엄마가 분명 걱정하실거란 생각에서였다.


비상용으로 가지고다니던 생리대를 팬티에 붙이고 옷을 챙겨입은 뒤 가방을 챙기는 중 덜컥, 문이 열렸다.


흡 하고 숨을 들이킨 그녀는 고개를 돌려 들어온 사람이 선우임을 확인한 뒤 뒷걸음질을 쳤다.


"흠. 벌써 다 회복된거야?"


대답없이 그를 죽일듯 노려보던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가방을 손에 든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야해요."
"데려다주지. 여기서 멀지도 않던데."


자신을 억지로 취한주제에 뻔뻔함을 넘어선 당당함으로 자신을 집에 데려다주겟다는 남자.


그녀는 바들바들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집 앞. 아무말 없이 그곳까지 자신의 차로 자신을 데려다준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린이 경찰에 신고할까 두려워 이렇게 데려다준걸까?


"니가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도 아무런 증거가 없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그가 빙글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엘리베이터에서 다른애들이 업고있던거? 아마도 카메라에 찍혔겟지만, 그거 니가 취해서라고 하면 그만이야."

"나, 난 술이라곤 입에 대지도 않았어요!"

"시간이 지금 얼마나 지났지? 어이쿠, 벌써 여덟시네. 니가 술을 마신 뒤 깨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나, 나, 병원에 가서 조사받고 다 할거예요!"

"응 응. 하도록 해. 하지만 알아둬, 내가 콘돔을 써서 니가 나한테 당했다는 증거따윈 너한테 한방울도 없다는걸. 아, 오늘 내

홈피에다가 나랑 뒹굴었던 여자애 사진이나 올릴까. 몸매가 환상이었는데. 응? 얼굴은 편집할테니 걱정 마."


그 녀의 얼굴이 소리없이 하얗게 질려갔다.


"사, 사진... 지워주세요."

"니 사진? 나 니 사진 없는데?"
"제 몸 찍은거. 제발... 지워주세요."


선우가 또다시 나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니 몸이라... 그래. 니가 내 말만 잘 듣는담 사진정도는 언제든 지워줄 수 있어."


적당한 피부톤에 갈색으로 살짝 염색한 머리칼. 어찌보면 다정한 인상이지만 그의 표정은 냉철했다.


"안예린. 니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어. 내가 니 사진을 지울지... 말지는."
"거, 거짓말."


그가 예린의 턱을 잡아 거칠게 그에게로 당겼다.


"거짓말? 오늘 당장 인터넷에 사진 올라오는거 보고싶으면 그따위로 말해..."
"제가 어쩌길 바라시는 거예요..."


그녀 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흐느끼며 우는 그녀를 다정히 끌어안으며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하나... 너 이제 내거야. 내가 하라는대로 다 해. 걱정 마. 니네집에서 눈치 못채게 손 써줄테니까."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눈과 마주치자,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둘. 나말고 다른놈 만나면, 너도 벌 받겟지만 그놈은....죽어."


미소를 짓고있지만 눈에 어린 살기는 그가 농담으로 하는말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셋. 니가 만약에 누구한테라도, 나 아닌 누구한테라도 더 의지한다 싶으면..."


그의 큰 손이 그녀의 가녀린 목을 가볍게 조르기 시작했다.


"너도, 그리고 니가 의지하는 그 누구도... 죽여버리겠어."


 

"예린아! 너 어디갔다가 온거야? 수연이네 엄마랑 엄마가 얼마나 걱정한지 알아?"
"응. 엄마..."
"너 왜이리 창백해,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니 실은 버스에 가방을 두고내려서 찾으려고 헤메다가 겨우 찾아서 오는길이야. 죄송해요."
"그러면 전화를 받았던지 했어야지!"
"가방에 있었는걸 전화..."
" 아 그랬니?"

그제서야 한숨을 놓은듯, 예린의 엄마는 딸을 다정히 끌어안았다.

" 엄마가 얼마나 걱정한지 알아? 다음부턴 공중전화로 집으로나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해. 걱정 안하게."
"네 엄마. 죄송해요."

엄마의 따스한 품 안에서도 예린의 귀에는 오직 선우의 냉랭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너도, 니가 의지하는 그 누구도... 죽여버리겟어.'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긴 했지만 2주일 후, 예린은 서서히 그 사건을 잊으려 노력하며 지내고 있었다.


강 선우가 자신의 연락처를 아는것도 아니고, 집을 안다고해도 그 앞에서 기다린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린아, 오늘 끝나고 화진이 생일선물 사러가자."

"그래! 화진이가 좋아할만한거 나 봐놨어."


친구와 함께 팔짱을 끼고 쇼핑갈 생각에 부풀어 하교를 하던 그녀는 교문앞의 낯익은 차에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 왜그래 예린아?"

"......먼저 아트박스로 가면 안될까. 나..."


싱긋 웃으며 운전석에서 손을 흔들어보이는 선우.


"이모가 부르셔서 데리러왔어 예린아. 오늘 제사잖아. 하나뿐인 사촌여동생 이럴때 챙겨줘야지."

"아, 예린이 너... 오늘 아버지... 제사야?"


그 말을 들은 친구가 미안한 표정으로 팔짱을 풀었다.


"제사야? 이야기 하지. 미안해 난 그것도 모르고..."

"아, 아니야. 그게..."

"사촌오빠신가봐. 얼른 가 봐."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슨 제사이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오해한 친구는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왜 찾아온거예요."

"애들이 더 쳐다보기 전에 얼른 타는게 현명할거야."


이를 악 문채로 예린이 선우의 벤츠의 문을 열고 앉았다.


"오늘 만들 수 있는 시간은 맥시멈 몇시간?"

"......삼십분이요."

"큭. 친구랑 아이스크림먹고 수다떠는데 한시간. 쇼핑하는데 한시간. 토탈 두시간정도는 비겟네."


예린이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는것 같았다.


"나, 나 미성년자예요. 나한테 손대는거, 불법이라구요!"

" 흠....."


 그가 생각하는척 표정을 짓더니 그녀의 하얀 허벅지를 오른손으로 슥, 쓸어올렸다.


"너 내가 우스워보여?"


급작스런 그의 손길에 흠칫, 얼어붙었던 예린이 차가 신호에 걸린 사이 문을 열려시도했지만 굳게 걸린 문고리는 꿈쩍도 안했다.


"크크, 너......"


그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쥔 뒤 그녀의 얼굴을 끌어다가 가까이했다.


"아야!"
"너 진짜 날 우습게 본 모양이구나..."


그의 눈이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 놔주세요!"
"얌전하게 말을 들을때까진 안되지."


차 앞의 서랍을 열은 그가 하얗게 빛나는 수갑을 꺼냇다.


"니가 이럴 줄 알고 사왔어."


해맑은, 하지만 잔인한 그의 눈빛에 도망치려 바둥거리던 예린은 달칵, 소리와 함께 한쪽 손목이 문의 손잡이에 고정이되고 말았다.


"아야, 아파..."
"그러게 왜 그랫어. 얌전히 있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아저씨...놔주세요. 제가 아저씨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러세요..."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교복치마로 후둑 후둑 떨어지는것을 즐거운듯이 나른한 웃음으로 바라보는 강선우.


"야... 역시 넌 우는것도 귀여워."


그의 오른손이 교복치마 속으로 들어와 허벅지 사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 생각 가끔 했어?"
"꺄, 하, 하지마세요!"


20 여분 후, 그의 차가 큰 저택 앞으로 가서 서자 차고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내리자. 예린아."


20여분간 그의 손에 시달리며 피하려 노력하다가 수갑에 매인 손목이 다 까진 예린은 더이상 반항할 기운도 없었다.


"배고파?"


이 이상 반항해보았자 더 험한꼴만 당할게 분명하다 생각한 그녀는 얌전히 고개만 저어보였다.


"앉어."


저택은 모던한 가구로 꾸며져있었다. 통유리로 보이는 정원에는 달마시안이 쿨쿨 자고있었다.


"개 좋아해?"


얌전히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큭, 하고 콧웃음을 쳤다.


"저놈은 지 주인인 나랑 울 엄마아빠 빼고는 다 공격하도록 훈련되어있어. 나가는길은 차고를 통해서 뿐이고,
내가 가진 키가 아니면 차고문은 안열려. 정원에서 개한테 먹히기 싫으면 현관으로 나가지 마."


그의 말이 끝난 뒤 큰 달마시안을 다시 보자 팔에 소름이 쭈욱 끼쳐지는 예린이었다.


"이리와. 내 방으로 가자."


그의 방은 넓고 약간은 허했다. 블랙 앤 화이트. 모던한 가구들과 미니 그랜드 피아노.


"피아노 잘 쳐?"
"......."
"필통이 피아노 건반모양이던데 그때보니까."
"좋아해요."
"한곡 쳐봐."


말을 안들으면 또 묶거나 협박당할까 두려움에 떨던 그녀는 조심스레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낭랑한 소리로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강선우는 침대에 누워 머리뒤로 깍지를 낀 뒤 미소를 지었다.


"잘하네."
"..... 감사합니다."
"너한테 반할것같아."


그때까진 그에대한 두려움 뿐이던 예린은 갑작스런 그의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는 당황해했다.


"에, 예?"
"그런말 처음들어봐? 정말 천연기념물이라니까."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침대로 데리고왔다.


"벗을래 아니면 내가 벗겨줄까."
".....이, 이런거....안함....안되나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서 다시 비는듯한 손모양을 해보이는 그녀.


"벗겨달란 소리로군."


나른한 미소를 짓는 선우. 예린은 그가 아름다운 얼굴을 한 악마같다고 생각했다.

 

착하고 다정해보이는 얼굴이지만 냉혹해질때는 무섭기가 그지없는.


"버, 버, 벗을께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눈물을 보이며 옷을 벗는동안 선우는 담배를 피우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 벗었음 이리 와."


나신의 그녀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그녀의 목을 애무하던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듯한 예린의 손을 보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묶어야지 안이러지?"
"아, 아녜요 잘못했!"


그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한손이 가늘은 그녀의 양 손목을 쥐었다.


"아윽...."


그가 혀로 가슴을 애무하자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녀가 몸을 뒤틀자 그가 싱긋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좋아?"


창피함에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가 그의 시선을 피하자 그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어 그의 얼굴로 가져다대었다.


"키스는 해봤어?"
"........"
"처녀긴 했어도 키스정돈 해봤을거 아냐."
"....안해봤어요"
"그래? 그럼..."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살짝 핥는가 싶더니 곧장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그녀의 혀를 농락하던 그가 떨어져나가자 숨도 못쉬던 예린은 가쁜 숨을 내뱉었다.


"하, 하아...하아..."
"요염한 소리내지 마. 지금 참기도 힘들어 죽겟으니까."


그가 그녀의 한쪽 손을 자신의 속옷 속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분신을 쥐게했다.


"터질것같다구."


이렇게 큰 물건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왔었다니. 그녀는 놀랍고 두려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덜아플거야. 원래 처음이 제일 아픈거거든."


다시 그녀의 아래로 내려가 가슴을 집요히 애무하던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그곳을 애무하기 시작하자 예린은 몸을 뒤틀며


그의 손을 피하려 노력했다.


"진짜 침대 네 기둥에 묶여보고싶은건 아니지? 얌전히 있어."


그의 협박에 몸을 뒤로 빼는것은 멈추었지만 흠칫흠칫 이상한 느낌에 그녀의 몸이 떨려오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곳의 윗부분을 만지는 그의 손놀림이 빨라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아, 아핫! 아윽!"
"느껴? 느낄것같애?"


곧이어 절정을 느낀 그녀가 몸을 떨자 그가 손놀림을 멈추고 그녀의 입구를 더듬었다.


"후후...역시 민감한 몸이야. 젓었네."


그의 말을 이해못한 예린이 멍하게 풀린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긴장해 뻗뻗히 굳었다.


"이러지 마. 살살, 힘을 빼야지 너도 안아프지."


그가 그녀를 달래듯이 귀에 속삭였고 부드러운 그의 손길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긴장을 약간 풀었다.


"흐읏!"
"아앗!"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아픔에 얼굴을 일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큭....아, 정말 좋아 니 안....움찔움찔 하는게.... 너 방금 느껴서 그런지 엄청 물어..."


그가 속삭이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번인가 콘돔을 바꾸어가며 그녀의 몸을 희롱한 그가 시계를 보더니 기지개를 키고 일어섰다.


"아, 너 집에 갈 시간이다. 가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예린이 침대에서 일어나 교복을 갖추어 입고 그의 차로 함께 갔다.


그의 집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고작 10여분뿐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 좋았어 예린아. 너 뭐 가지고싶은건 없어?"


하얗게 질린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내자 그가 지갑에서 골드카드 하나를 꺼내더니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가서 뭐든지 너 원하는거 사. 친구들 데리고가서 밥 사주던가."


다시한번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내려서 도망치듯 아파트로 들어가버렸다.


그가 준 골드카드는 시트에 그대로 남겨진 채로였다.


".....그래. 살살 다뤄줄랫더니."


그가 한쪽입술을 올리며 씨익, 비웃고있었다.


"거칠게 나가야지 말을 들어먹겟다 이거지?!"


-3-


예린은 가위에 눌리고 있었다.


"으윽, 흑, 노, 놔주...세...요..."


그녀의 흐느낌조차 입안에서만 맴돌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는 꿈에서조차 선우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따라 내려간 그의 입이 뽀얀 예린의 가슴을 핥아내리며 선우가 그녀를 보고 싱긋 웃었다.


"왜이래? 너도 좋아하고 있으면서. 사실대로 말해봐, 내가 이렇게 하는거, 싫지많은 않지?"

 

 

"예린아?! 예린아. 어머 얘가 뭔 가위를 이렇게 눌려, 얘, 정신 좀 차려봐."

"....엄마."

"그래. 엄마야. 정신이 드니? 물 좀 마셔봐 얘."

"나, 나..."


터져나오는 울음에 예린이 엄마를 부둥켜안고 끅끅 서러움을 토해내었다.


"....알아. 엄마도 니마음 다 알아."


흠칫, 예린은 엄마가 무언가를 눈치챈것일까 두려워 고개를 들었다.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도 힘들어 예린아, 우리 같이 이겨내야지. 그치?"

"......응. 엄마."

"엄마도 아빠 사업 이어서 해나가기 힘들어. 우리 예린이도 주위에서 변한 시선으로 바라봐서 힘들지?"


친구들은 예린을 동정하는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걱정해줄 뿐이었다.


"그런거 아니야."

"엄마한테 거짓말 안해두 돼. 너 요즘...많이 어두워져서 선생님이 걱정이 많으셔."


학교가 끝나면 선우가 기다릴것만 같아 뒷문으로 하교하기 일쑤인 요즘이었다. 하지만 1주일째 연락이 없는 그였다.


"엄마. 나..."


약해진 그녀의 마음이 엄마에게 모든것을 털어놓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순간 그녀의 눈에 핸드폰의 액정이 들어왔다. 자신이 가위에 눌리는 사이 문자가 와있었다.


"....아니야."

"애도, 실없긴. 암튼 힘들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기대."


엄마가 문을 닫고 나간 뒤 예린은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베게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폴더안에는 얼굴은 나오지 않은, 하얀 여자의 나신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예린아, 너 그 소문 들었어?"

"응?"

"우리학교에 근처 공고애들한테 강간당해서 정신병원 간 언니 있다며?"

"그, 그게 무슨소리야?"

"근처 공고애들이 우리학교 3학년언니 여름방학때 강간해서 그언니 정신병원 갔대."

"진짜?!"

"응. 그것두 3명한테 당하고 맞기도 무지하게 얻어맞았다더라."


흥미있게 이야기를 듣던 앞자리 친구들이 돌아앉아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우와 그것들 사람도 아니다."

"걔들도 감방가긴 하는데, 그언니가 수사과정이 너무 혹독해서 정신이 좀 돌았대더라."

"하긴, 그거 자기입으로 어떻게어떻게 당했는지 자세히 진술해야한다며?"

"응 심지어 어떤자세로 어떻게 당했는지까지 말하라고 한대."

"근데 그언니 좀 놀았나봐? 그러니까 그런애들한테 당하지."

"야 좋아서 한것도 아닌데 불쌍하잖아.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

"그런데 왜 따라가 따라가길. 처신을 잘해야지."

"잡혀갔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말은 하지 말자."


예린은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덜덜 떨리는 손을 책상 서랍속에 넣고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예린아, 너 괜찮아? 야 니들은 그러게 그런얘기를 순진한애 앞에서 하면 어떻게해!"

"미안해 예린아."

"참, 근데 예린아, 너 저번에 본 그 사촌오빠 몇살이야?"

"....응?"

"왜 벤츠몰고 너 데릴러 온 사촌오빠 있었잖아."

"....아. 나보다... 두살 많아."

"그럼 대학생이겟네?"


선우집에 갔을때 본 경영학 전공서적들을 떠올리며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대학?"

"어디대학이더라... 까먹었어."

"하하하, 그런걸 다 까먹니? 근데 그오빠 잘생겼더라."

"그래?"

"응. 나중에 나 소개시...아얏, 왜때려 이주연!"

"공부나 해 공부나."


쿨한 목소리로 말한 선머슴같은 인상의 여자애가 털썩 예린의 옆에 앉았다.


"너 요즘 살 빠졌다."

"응? 그래?"

"너 무슨일이야."


알권리가 있다는듯한 당당한 주연의 질문에 피식, 웃고 만 예린은 진지한 주연의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수영장 갔던날 이후로 너 좀 변했어."

"....무슨소리야."

"아버지 돌아가신것 때문에 변한것 치곤 너무 어둡고 심난하다구. 누가 너 괴롭혀?"


뜨끔. 예린은 혹시 주연이 뭔가 눈치를 챈것이 아닐까 두려워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누구야?"

"아냐 주연아."

"너희반애야?"

"아니라니까."

"선생이야?"

"그럴리가 있니?"

"근데 너 왜이래. 왜이리 불안해보이고 어두워 요즘. 보기 안쓰럽게."


차갑고 냉정한 주연이지만 예린과는 어려서부터 단짝이었다. 외동에 울보이던 예린을 항상 달래주던 아이이기도 했다.


"그냥. 집에 한사람 적어진거, 적응하기 쉽지 않네."

"......"


주연이 덤덤히 예린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기네 반으로 돌아갔다.


보이쉬한 주연을 은근히 좋아하는 아이들은 슬쩍 나가는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뒷문으로 나와서 청담공원으로 와. 차 대놨어]


수업이 끝나기 3분전에 온 문자.


어느정도 어제 받은 문자 이후로 예상했던 일이라 별 놀라움 없이 예린은 뒷문으로 향했다.


일주일만의 선우는 머리를 조금 더 잘라서인지 남성스러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왔네."

"....네."

"엄마한테 친구랑 놀고간다고 문자 했니?"

"네."

"오늘 좀 늦는다고 문자보내. 뭐 친구 과외하는거 같이 들어도 됀댓다고 핑계대거나."

"그런건..."


안된다고 말하려던 예린은 그의 냉정한 눈길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민아네 수학 과외선생님 좋대서 오늘 같이 수업받아보고 좋으면 나도 받으려고해. 괜찮아 엄마?]


1분도 안돼 엄마로부터 [그럼 당연하지 과외끝나면 문자해 사랑한다 우리딸] 하고 문자가 도착했다.


"엄마랑 사이 좋은가보네."

"......네."

"집에 들키기 싫지?"


순간, 학교에서 들었던 3학년 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떤자세로 했는지까지 다 말해야...'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녓길래...' '놀았나봐...'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것만 같았다.


"아, 아저씨..."

"또 아저씨? 선우오빠. 앞으론 이렇게 안부르면 혼날줄 알어."

"선우...오빠..."


씨익 선우가 만족한듯 미소를 지으며 예린의 무릎을 더듬었다.


"오늘은 어떤걸 가르쳐줄까? 아마도 수학과외보단 백배는 짜릿할걸."

 


정원의 달마시안이 오늘은 깨어있었다. 일어나 서있는것을보니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큰 개였다.


어릴적 백한마리 달마시안을 보고 귀여워했던 개가 이제는 자신이 도망못가도록 위협하는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며


예린은 그가 준 달콤한 칵테일을 홀짝, 한모금 마셨다.


"맛있지?"

"....네."

"피나콜라다라는거야."

"피나....콜라다요?"

"촌스럽게 콜라도 들어가나요 그런거 묻지 마."


그런질문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엉뚱한 그의 말에 예린은 자신도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 앞에서만 그렇게 웃어."

"네?"

"다른놈 앞에서 그렇게 웃으면, 그새끼 눈 못뜰때까지 패주고 싶을것 같으니까."

"...."


그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동안 예린은 그의 방을 구경했다. 전공서적에 꼼꼼한 필기자국. 글씨가 반듯하니 그의 외모같았다.


착하고, 반듯할것같은 이미지의 남자. 다정해보이는 미소. 하지만 그의 이중성을 아는 그녀는 그 미소에 속지 않았다.


"이리와."

"....옷, 안벗어도 되나요?"

"교복만 벗어."


교복을 그의 의자에 걸은 그녀가 뒤를 돌아서자 그가 팬티한장 달랑 걸친채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한번도 입으로 해본적 없지?"

".....??"

"큭, 남자거 입으로 해본적 있냐고."


그제야 알아들은 그녀가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도리질하자 그가 옆에 두었던 노트북에서 무언가를 클릭했다.


곧 화면에는 어떤 여자가 입으로 애무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예린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그녀의 뒤에서 머리를 잡아 고정시켰다.


"잘 봐둬. 오늘의 레슨이니까."

"시, 싫어요!"

"응? 내가 뭔가 잘못들은것 같은데... 싫어?"

"제발..."

"걱정 마. 난 좋은 선생님이니까. 수학보단 이게 인생에있어서 훨씬 좋은 레슨이라구."


능글거리며 그가 속옷을 내리자 그의 물건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솓았다.


"니 핸드폰에 엄마번호로 내가 니 사진을 보내는걸 원치 않는다면 얌전히 따르는게 좋을거야."

".....흐흑...."

"얼른."


욕지기를 이겨가며 그녀가 그를 어설프게 애무하기 시작하자, 그가 그녀의 머리를 눌러 더 깊이 찔러넣기 시작했다.


"우욱!!"

"아 미안. 너무 심했나? 크크큭."


3분정도가 지나자 그가 그녀의 동작을 중지시켰다. 처음해보는 행위에 턱이 다 얼얼한 예린이었다.


"이젠 니 차례야."

"....네?"

"누워."

"시, 싫어요!"

"또?"

"그건 정말 시....으읍!"


바둥거리는 그녀의 입에 수건을 물리고 교복에 신고있던 반양말로 양손을 고정시킨 그가 그녀의 속옷을 끄집어내렸다.


"시끄럽게 하지 마. 천국을 구경시켜주지."

"으으으--!!"


그의 혀가 그녀의 입구 윗쪽을 자극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터져나오는 신음을 삼키려 노력했다.


싫지만 느껴지는 이상하고 묘한 기분. 자신이 음탕한 여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크큭, 어때? 느끼지 않아? 너, 젓기 시작했어."

"으으응!"


아니라고 반박하며 그녀가 고개를 저어보이자 그가 풋, 웃었다.


"고집부리지 마. 니 몸은 다 보이고 있어. 니가 날 원한다고."


다시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이번에는 물고 빨기까지 하는 그의 행위에 결국 그녀는 절정을 느끼고 말았다.


"후아, 너...무지 젓었어."


그녀는 울며 외치고싶었다. 아니라고, 이건 내 뜻대로가 아니라고.


"오늘은 저번보다 덜아플거야."


속삭이며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는 그. 그녀는 전보다 덜한 통증과 심지어 그가 허리를 움직이자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못견뎌하며 몸을 떨었다. 그는 이런 그녀를 눈치챈듯 입에 물렸던 수건을 빼주었다.


"으읏...너도 조금은 느끼지? 좋지?"

"흑....아앗!"


부드럽게 움직이는 선우의 몸놀림에 자신도모르게 야릇한 신음을 내뱉은 예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서, 어서 느낀다고 말해..."

"...아흑, 그, 그만..."


그녀에게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가 점점 동작을 거칠게 하기 시작했다.


"아, 아파...제발..."

"그러게 쓸대없이 고집부리지 말랫지?!"


자세를 바꾸어가며 두시간여를 그녀를 괴롭힌 뒤, 그가 샤워실을 열고 그녀와 함께 들어섰다.


따듯한 물에 떨고있는 그녀를 목욕시키며 목에, 입술에, 뺨에 끊임없이 키스하는 그.


"너무 예뻐. 진짜 사랑스러워. 절대, 놔주지 않을거야."


그녀는 덜덜 몸을 떨며 얼른 그가 집에 보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를 씻기는것을 마치고 나온 그가 침대 밑에서 큰 선물박스를 꺼내었다.


"풀어봐."

".....?"


타월을 몸에 두른채로 두꺼운 퍼플색 실크리본을 푸르니 검은 샤넬의 미니드레스와 프라다의 쉬크한 하이힐이 들어있었다.


"아, 그 작은 박스건 빅토리아 시크릿거 속옷이야. 얼른 갈아입어. 우리 놀러나갈거니까."

"......?"

"데이트해야지."


방금전까지 침대에서 힘을 다 빼어놓곤 데이트라니.


집에 가고싶던 예린의 어깨가 추욱, 쳐졌다.

 

-4-


그가 사준 옷과 구두를 착용하자 그가 그녀의 손은 잡아 춤을추듯 빙글 돌려보며 휘유~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어울릴 줄 알았어."

"....이거, 비싼것 같은데."

"명품은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거야."


마치 예린이 고가의 명품이라는듯이 그녀의 팔을 스륵, 쓰다듬은 그가 거울앞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곧게뻗은 흰 팔다리가 샤넬의 고급스러운 진주장식의 미니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프라다의 세련된 하이힐은 그녀의 키를 훨씬 커보이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맨얼굴이라 좀 덜 어울리네."


그가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였다.


"뭐 20분이면 다 되니까. 차로 가자."


그의 집에 가방과 교복을 둔 채로 그녀가 핸드폰만 달랑 들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가 차를몰아 도착한곳은 연예인들이 많이 다니기로 소문난 5층짜리 헤어살롱이었다.


4, 5층은 VIP전용이라서 유명한 연예인이거나 재벌집 자제들만 드나든다고 소문이 자자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카드 투입구에 그가 VIP카드를 꼳자, 자동으로 5층의 불이 켜졌다.


"??"

"신기해? 눈 동그래진거봐."

"네....신기해요."

"귀찮은 파리들이 안꼬이도록 자동으로 만들어놓은 장치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예린. 방금 샤워해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칼이 청순하기 그지없었다.


아랫도리가 다시 무거워지는듯한 느낌에 그는 그녀를 다시 데리고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어서오세요! 어머! 우리 선우가 여자애를 다 데리고왔네! 얘들아, 이리와봐!"


아마도 친한사인듯한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둘을 맞이했다.


"난리는. 누나, 내 여자친구 머리 피고 화장좀 해줘."

"알았어. 너무 귀엽다 여자친구!!"


처음 신어보는 하이힐에 타이트한 드레스, 거기에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미용실까지.


익숙치 않은 상황에 기가죽은 예린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미용사 언니를 따라갔다.


"안녕? 난 지나라고해. 이름이 뭐예요?"

"예린, 안예린이요."

"이름도 이쁘다. 얼굴도 완전 귀여워."


생글생글 웃으며 지나가 예린의 머리를 드라이하는 사이 큰 메이크업박스를 든 예쁘게생긴 남자가 다가왔다.


"아우, 이언니야? 피부봐, 애기네 애기."

"....?!"


처음보는 게이풍의 남자에 예린은 붉었던 얼굴이 창백해지며 당황해했다.


"난 촬스야. 선우 여친? 흠. 귀엽네."


약간은 질투하는듯이 눈을 내리깔며 예린의 얼굴에 꼼꼼히 베이스를 발라주는 남자.


"화장 안해? 눈썹도 안다듬었네?"

"....네. 안해요."

"요즘 중딩들도 다 하고 다니는 화장을?! 어머 이언니 디게 순진하다, 오호호호!"


찰스의 여성스럽기 그지없는 웃음에 더더욱 창백해지는 예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큭큭 웃으며 예린의 다양한 반응을 즐기는 선우가 있었다.

 


"진짜 이쁘다!"

"내가 했지만 정말 화장 예술이다."

"본판이 되니까."


선우가 짧게 끊어 말하며 찰스에겐 2장, 지나에겐 1장의 10만원권 수표를 건네었다.


"빨리 끝내줘서 고마워."

"언제든지."


미용실을 뒤로한 뒤 차를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선우는 흘끗흘끗 계속 예린을 훔쳐보았다.


"....?? 왜그러세요 선우...오빠?"

"다시한번 불러봐."

"선우오빠."


신호에 걸리자마자 와락, 선우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너무 이뻐 죽겠어. 그냥 데리고 나오지 말걸 그랫어."


데이트를 하자더니 또 갑자기 무슨소리일까. 눈만 깜빡이는 예린의 입술에 그가 길게 입맞춤을했다.


"배 안고파? 여섯신데."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꼬륵-소리가 예린의 배에서 새어나왔다.


"앗, 차, 창피해..."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선우는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배가 대답하네?"

"그, 그런게 아니라..."

"알았어 알았어. 뭐 좋아해? 안좋아하는 음식 없어?"

"....회, 못먹어요."


그의 눈이 심술궂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울상을 짓는 예린의 앞에 최고급 쉐프 스페셜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복회, 참치뱃살스시, 갈치스시, 그 외에도 수십가지 대부분이 날것인 비싼 음식들.


"오늘 배우면 되겟네, 회 어떻게 먹는지."

"저 정말 못먹..."

"못먹어?"

"싫어...."


울먹울먹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예린. 선우가 오징어회를 집어들더니 초장을 살짝 찍어 예린의 입에 가져다대었다.


"자, 시작은 쉬운것부터."

"....흐잉...."


강아지처럼 애처러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예린에게 살짝 마음이 약해지는 선우였지만, 곧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얼른!"


입을열어 겨우 오징어를 받아먹은 예린은 별로 씹지도 않고는 싫은느낌에 그냥 삼켜버렸다.


"담번부터는 그 미용실 안가야겟어."

"??"

"남자놈이 니 얼굴에 손대고."

"게이....였는걸요."

"아무튼."


아까부터 약간 부룽퉁하다 싶더니 혹시 그런이유였던건가. 예린은 어쩐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우가 애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전복!"

"으앙..."


1시간여의 저녁시간동안 예린에게 이것 저것 다 먹게만들은 선우는 만족한듯이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께 문자해. 너 민아랑 저녁먹고 난 담에 민아네 오빠가 데려다주실거라고."

"민아 오빠 없는..."

"빨리."


예린이 문자를 보내는동안 그는 그녀의 흰 목덜미를 살짝살짝 물고 키스하며 움찔거리는 그녀의 반응에 즐거워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두사람.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 원피스를 벗자 그가 그녀를 자신쪽으로 돌려세웠다.


"역시 사이즈가 잘 맞네."


선우가 고른 속옷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예린은 붉어진 얼굴로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 애썼다.


"하아, 더이상 못참겟어."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침대로 향하는 선우. 예린은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는것을 알기에 얌전히 있었다.


가슴 주위를 애무하던 그의 혀가 봉우리를 유린하기 시작하자 예린은 흡, 숨을 들이켰다.


"좋아? 여기?"


그녀가 대답을 안하자 그가 다시 그녀의 민감한 부분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혀의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발가락을 오므리며 몸을 떠는 예린. 그녀의 가슴에서 입을 떼며 다시한번 그녀의


귀에 질문을 속삭이는 선우.


"좋으냐고. 대답 안하면 할때까지 더 할거야."

"....아요...."


어두워지기 시작한 방 안. 예린은 붉다못해 타오르는듯한 자신의 얼굴을 가린채 대답했다.


"다시 한번 말해봐. 얼른."

"....조...아요...."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듯이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춘 선우가 점점 아랫쪽으로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읏!"


그녀가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아랫쪽 속옷을 벗기며 갈라진 틈으로 혀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하윽!!!"


그녀의 허리가 휘며 신음을 내뱉자 선우가 이곳이 그녀의 포인트임을 알아채곤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시, 싫어, 그, 그만, 그만!"


그녀가 몸을 떨며 외쳤지만 멈출 그가 아니었다.


그녀가 절정을 느끼고 몸을 떠는동안 그가 속옷을 벗고 그녀를 뒤로 돌렸다.


"등도 예뻐..."


그녀의 등을 입술로 혀로 쓸어내리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다.


"꺄악!"

"으읏, 너, 역시 최고야... 정말... 니 안 너무 기분좋아..."


그의 허리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에 신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니 목소리...너무 좋아 니 신음소리..."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이며 그녀의 귓볼을 잘근잘근 씹어댓다.


"하아, 나, 쌀것같아, 으윽, 나 더 커진것 느껴?"


그가 음란하게 질문을 해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한다, 으으윽!!"


그의 물건이 그녀의 안에서 벌벌 떠는것이 느껴졌다.


"아아....하아...."


그가 콘돔을 버리고 샤워를 하는동안 예린은 속옷을 자기것으로 갈아입고 교복을 입었다.


"가자."


집 앞. 저 멀리 엄마가 나와서 기다리는것을 본 예린은 사색이 되어 그에게 빌었다.


"여, 여기서 내려주세요. 울엄마 저기서 기다리세요."

"걱정마. 민아네 오빠라고 해놨잖아. 인사드리지 뭐."


뻔뻔하게 그녀의 엄마앞에까지 차를 몰고 간 그가 차에서 내려 예린의 문을 열어주었다.


"엄마."

"예린아, 이쪽은 민아네 오빠?"

"민아네 사촌오빠인 강선우라고 합니다. 숙모님 차상태가 안좋으시대서 근처에 있다가 데려다주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안녕히 들어가세요. 예린이도 안녕."


싱긋 웃은 선우가 차를 몰고 사라졌다. 어두운 바깥덕에 창백한 예린을 눈치 못챈 엄마가 예린을 쿡 찌르며 장난을 쳤다.


"좋았겟어 예린아! 저렇게 훤칠한 오빠가 데려다도 주고."

"뭐, 뭐가..."

"무지 잘생겼던데?"

"난 잘 모르겟던데."

"내숭은 기집애!"


나 방금전까지 저사람한테 당하다가 왔어. 엄마.


죄책감과 답답함에 목이메인 예린은 더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예린아."

"응, 주연아."

"너 혹시 수연언니한테 서화예고 이야기 들은거야?"


쉬는시간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예고얘기라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 하는 예린을 보며 주연은 자신이 잘못짚은것임을 깨달았다.


"아, 아냐. 난 또 서화예고 편입이야기때문에 니가 그렇게 우울한줄 알았지."

"아냐. 그런데 편입이야기라니?"

"......실은 서화예고 2학년 피아노에서 2학년 두명이 이번에 유학으로 빠져나갔거든."

"정말?!"


중3. 몸살로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에서 본 서화예고 오디션. 연주중간에 기침이 나오고 손이떨려 떨어지고 만.


"언제인데 오디션?"

"원서 마감이 이틀후인데?!"

"나 오늘 당장 조퇴하고 원서 넣을래."


예린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디어가 빛나고있었다.


'탈출'

 

-5-

 

"갑자기 무슨소리니 얘?"

"나 서화예고 편입시험볼거라구 엄마."

"지금 원서 혼자 작성해서 넣은거야?"

"응. 담임선생님이 일단 보호자란 도장 찍어주셨어."

"하긴, 니가 거기 떨어지고 3일 밤낮을 울어대서..."

"그만그만! 암튼, 오디션 지정곡 내가 잘하는거니까 다행이지 뭐."

"곡은 뭐니?"

"Beethoven Op.10-3  No.7  1악장하고 Op.31-3  No.18  2악장"

"두개나?"

"Chopin  Etude Op.10 No.8 하고 Etude Op.10 No.10도 해야해."

"쇼팽 에튀드는 너 대부분 잘치잖니."

"베토벤 18번 2악장이 문제지."


하지만 어려운 2악장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든 서화예고로 전학을 가면 학교앞으로 찾아오는 그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이 여전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다음번에 만날때 몰래 그의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지워버리면 될것이다.


"엄마, 만약에 나 서화예고 붙으면... 우리 이사가면 안돼?"

".....왜, 무슨 일 있니?"

"집이....어색해."

".....그래. 엄마도 안그래도 그 생각 했어. 아빠생각 계속 나지?"

"응."

"그래, 너 서화 합격하면 우리 그학교에서 안먼데로 이사가자."


엄마가 예린의 단순한 변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주자 예린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렷다.


계속 포기하지 않고 피아노 레슨을 받아온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해]


띠리리링, 문자음에 액정을 바라본 예린이 뻗뻗히 굳었다.


[학교예요]

[내생각해?]


뻔뻔한 남자. 누가 보면 남자친구인줄 알겟네.


[공부해요]

[내생각 나게 해줄까?]

[수업 들어가서 이제 문자 못해요]

[오늘 3시15분 청담공원]


원서를 접수하고 나오니 서화예고에 재학중인 수연언니가 반가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올린 전공인 수연은


절친인 주연의 친언니이자 엄마끼리도 서로 친해서 사촌언니마냥 자란 사이었다.


"예린아!"

"언니, 오랫만~"

"요즘 왜 우리집 안놀러와. 담주 내 연주회는 올거지?"

"응."

"이뻐졋네, 너 붙으면 애들 텃세 걱정 마. 내가 내 친한 후배들한테 너 잘 돌봐주라고 그럴께."

"편입생은 원래 아무도 안놀아준다던데?"

"누가그래. 내 동생은 예외야."


여성스런 수연은 보이쉬하고 제멋대로인 주연과는 정 반대였지만 두사람 모두 예린을 진심으로 아꼈다.


키가 큰 수연, 주연 자매에 비해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예린은 꼭 막내동생같은 느낌이었다.


"언니가 밥사줄께. 오늘 오전수업에 기사아저씨 안오는날이야."

"밥먹는건 좋은데 나 3시15분까지 청담공원으로 가야해. 약속있어."

"청담공원?"

"응."

"누군데?"

"....나중에 이야기해줄께."


수상한듯 예린을 바라보던 수연이 싱긋 웃더니 예린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래! 암튼 언니가 우리 예린이 합격을 기원하며 점심 쏜다, 가자!"

 


"일찍왔네."

"....네."

"나 보고싶었어?"

"......"

"큿, 싫더라도 대답하는게 좋아. 네-라고."

"네."

"쇼핑가자. 옷이랑 신발, 가방좀 사줄께."

"저번에 산거 있잖아요."

"그거 말고. 다른스타일. 넌 핑크도 어울릴것같고."

"....."


얌전히 그의 말대로 하는것이 그를 방심하게 만들 수 있을것이란 생각에 예린은 얌전히 있었다.


그 전엔 2주일만에, 그리고 얼마전엔 1주일만에 부르더니 오늘은 바로 하루만에 불러내었다.


어쩌면 앞으론 매일 찾아오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주먹을 꼭 쥐었다.


"내려."


2층짜리 큰 멀티샵 안으로 들어선 그는 하이웨스트 청반바지와 베이비핑크의 나시를 골라들더니 그녀에게 건네었다.


"신발은 점원이 줄거야. 이걸로 갈아입어."

"네."


옷을 갈아입고 점원이 준 펑키한 스타일의 구멍이 송송 난 하이힐 스니커즈를 신고 나왔다.


"귀엽네. 일단은 이걸로 입고, 더 사고싶은거 있나 둘러볼래?"


얌전히 고개를 저어보이자 그가 그녀를 어제 그 뷰티살롱으로 다시 데려갔다.


"찰스형. 오늘은 조금 더 밝게 해줘. 내 친구들 만날거니까."

"그래, 오늘 입고 온 옷도 귀엽네! 이 탑 DKNY 신상이지? 백화점엔 아직 안들어왔던데. 바지 BCBG건가봐, 어머! 그럼

니들 압구정 멀티샵 갔던거구나? 죄다 신상이네 신상, 가방이랑 신발은 디젤거니? 귀엽다."

"애가 명품이라 뭘입어도 이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선우. 어제 그녀와 헤어진 뒤 도저히 보고싶은것을 참을 수 없어서


무작정 찾아온건데 약속장소에 불만없이 나와준 그녀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 어쩌면 얘도 날 슬슬 좋아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머리를 세팅펌처럼 고데기로 말아준 뒤 귀엽게 메이크업을 마친 예린은 마치 인형같았다.


"....사랑스럽네."

"그치? 이쁘지?"

"찰스형 최고야. 지나도 고마워."


돈을 건넨 뒤 선우가 그녀를 차에태우고 친구들과 약속장소로 출발했다.


"저번에 본 애들도 있어. 내가 너 내 여자라고 못박아놨으니 별짓은 안할거야. 그래도 혹시 귀찮게 하면 말해. 죽여버릴테니까."


저번에 본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을 때렸던 남자도 있다는건가?


겁에 질린듯한 예린의 표정을 본 선우가 오른손을 내밀어 예린의 왼손을 꼬옥 깍지껴 잡았다.


"나 믿어. 내여자 막 굴리는 놈은 아니니까. 넌 내거구."


그의 손이 뜨거워서, 그리고 자신을 믿기 시작한듯한 그의 눈이 왠지 모를 죄책감을 주어서... 예린은 그의 눈을 마주할수가 없었다.

 

"요, 와썹 맨~"

"태윤아. 인사해."

"제수씨 왔쌉!"

"까불긴. 애들은?"

"다들 안에있어."


4시가 좀 넘은 시간인데 벌써부터 파티를 시작한건지 안에서는 시끄런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파티 주제가 24HOURS야. 24시간 돌리는 파티. 오늘 낮 12시에 시작했고, 내일 낮 12시까지 계속 하는거지. 미친놈들."

"하-하-하! 그래도 개강파티가 이정돈 돼야지!"

"개강한지가 언젠데 지금에서냐."


생각보다 넓은 와인색과 검정색의 실내. 하얀 나무가 인상적인 클럽에는 이미 취한듯한 남녀가 춤을추거나 게임을 하고있었다.


포커, 바카라, 블랙잭등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생정도로 보였지만 대충보아도 명품으로 도배한것이 특징이었다.


"선우! 와, 이 이쁜이는 누구야?"

"내 마스코트."

"완전 귀엽다, 우리 게임하는데 같이할래 sweety?"


지금껏 예린이 보아온 여자중에 제일 다리가 길고 예쁜 여자가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놔, 나중에 그쪽으로 데려갈께."

"꼭 데리고 와! 바이바이, sweet heart!"


키스를 날리며 게임을 하러 가는 여자. 얼굴도 예뻣지만 다리가 정말...길었다.


"다리모델 하는애야. 유성이 엑스고."

"아 네..."

"왜? 부러워?"


흘끗 예린의 기분을 눈치챈듯 그녀를 바라보던 선우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내눈엔 너뿐이 안들어와. 니가 백배 이뻐."

"저어, 근데..."


예린이 곤란한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그가 한쪽눈썹을 살짝 올렸다.


"늦게 들어가기 좀... 그런데..."

"문자보내, 엄마한테."

"......"


지금은 일단 그를 방심하게 만들어야 한단 생각에 핸드폰을 든 예린은 엄마에게 문자가 와있어 열어보았다.


[오늘 비지니스 미팅때문에 부산에 다녀올것 같애. 늦을것 같으니까 문단속 잘하고 자? 사랑해 딸~]


"흠, 오늘....늦게가도 되겟네?"


그의 음흉한 웃음에 예린은 곤란한듯이 고개를 숙였다. 더이상 변명할 거리조차 없어진 것이다.


"이게 누구야, 수영장녀 아냐~"


짓궂은 목소리의 재규가 유성과 함께 둘에게 다가서자 예린은 본능적으로 선우의 등 뒤로 피했다.


"워워워~ 겁먹지 마. 안그래도 선우가 너한테 목숨 건다는거 다 아는데 문제 일으키진 않는다구."

"근데 그렇게 꾸미니까 딴사람같다. 진짜 매력있는데? 선우가 반한게 이해가 가는걸?"


선우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한손으로 안고 바로 향했다.


"진토닉이랑 데킬라 선라이즈."

"옛설~ 이야, 인형아가씨, 안녕?"

"말걸지마."


선우가 눈을 내리깔며 바텐더에게 경고조로 말하자 평소완 다른모습에 놀란듯, 바텐더가 음료를 나른 뒤 다른쪽으로 사라졌다.


"이놈저놈 다 어떻게든 너한테 개수작 걸래는 놈들 뿐이니... 화장실도 맘놓고 못가겟어."


진토닉을 원샷한 선우가 그녀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그냥 하는 말들일텐..."

"그냥 말하는 놈들은 없어. 저놈들도 나처럼 널 한번 맛보면 절대 놓지 못할걸."


부스로 그녀를 데리고 간 그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끌어안았다.


"아...좀 살겟다."

"차, 창피해요, 좀 놔주세요!"

"다들 이러고 노는걸."

"그래두, 시, 싫어요."

"귀엽기는."


과일안주로 나온 체리를 그녀의 입에 쏙 넣더니 깨물도록 하는 선우.


"맛있어?"

"(우물우물)(끄덕끄덕)"

"나도...먹여줘."


그가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더니 혀로 그녀의 입 가득한 체리과즙을 맛보았다.


"으응!"


그녀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보기와 다르게 굉장한 완력의 소유자인 선우는 꼼짝 하지 않았다.


"이야, 화끈한데 여기? 아직 baby doll은 게임할 생각이 없니?"


아까 보았던 그 긴 다리의 여자가 와서 앞자리에 앉았다.


"게임 하자. 뭐하는 중인데."


키스를 마친 선우가 게임에 관심을 보이자 그녀는 웃으며 그들을 게임 테이블로 안내했다.


"오랫만에 텍사스 어때?"

"좋지."


어느새 유성, 재규, 태윤이 각자 예쁜 여자를 대동하곤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긴다리의 여자는 유성에게 슬쩍 눈길을 주고는 딜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팟은 5만 기본. 재미로 하는거니까."


각자의 주머니에서 500~1000만원씩을 칩으로 바꾼 남자들이 주위에 둘러앉았다. 곧 여섯개의 시트가 차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포커의 룰은 알지만 텍사스라는 게임을 모르던 예린에게 선우가 조곤조곤 귓속말로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가 두장씩 카드를 받고, 앞에 오픈하는 다섯장의 카드중 3장과 조합해서 제일 높은패가 이기는거야."

"그럼 우리가 3,4가 있구 앞에 5 6 7이 뜨면 스트레이트 이런거예요?"

"빨리알아듣네."


그는 눈치가 빠른 예린이 귀여워 목에 고개를 묻고 입맞춤을 했다. 평소 선우가 여자들에게 친절하긴 하지만 공공연하게 누군가를


대동하고 나타난적이 없어 미련을 가지고있던 여자들은 질투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자, 난 지금 스페이드 3,10 이 있고 앞에 3카드 오픈은 스페이드 두장과 하트 한장이야. 넌 어떻게할래?"

".....스페이드 한장 더 나오면 플러쉬잖아요."

"그렇지."

"일단은 돈을 더 걸진 않을것같아요."

"하지만 다른사람이 돈을 올리면?"

"......."

"따라갈까?"

"네."

"지면 니가 책임지는거야?"


엄청난 베팅액에 기가 죽어있던 예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보였다.


"하하하, 암튼 알았어. 따라가지. 콜!"


둘이 뭔가를 한참 다정히 속삭이더니 콜을 부르는 선우의 모습에 다들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저거 진짜 맛이 갔구만."

"그러게. 게임할때만큼은 진지하던 녀석이."


다음카드는 하트 제이였다.


"....."

"너 책임져?"

"아직 한장 남았잖아요."

"한장에 모든것을 거는건 바보야."

"하지만..."

"에휴. 그래. 니 뜻대로 하자."


유성이 돈을 올리고 다른아이들은 모두 다이를 외치며 판을 덮었지만, 선우는 콜을 부르며 베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카드. 스페이드였다.


예린은 눈을 굴리며 얌전히 있었고 유성은 자신있게 또다시 거액을 베팅했다.


"너 후회할텐데. 콜이야."

"왜? 플러쉬가 아니면 죽어. 나 스트레이트야."

"니가 말한대로 플러쉬야."


카드가 오픈되자 울상이 된 유성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첫판부터 웬지 스트레이트가 들어온다 했어."

"하하하하, 선우가 럭키돌(lucky doll)을 가져왔잖냐."

"선우야, 한판만 파트너 바꿔서 치자. 내 파트너는 운이 없나봐."


유성의 말에 유성의 옆에 있던 예쁜 여자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미안미안, 장난이야 제니야."

"흥, 못됐어!"


웃고 즐기며 게임을 하던 중 몇잔 마신 칵테일이 취기를 불러와서인지 선우의 무릎사이에 앉아 게임을 지켜보던 예린은 입을 가리고


살짝 하품을 했다. 긴장했던게 약간 풀어져서인지 졸음이 쏟아져왔다.


".....가자. 야, 난 간다."

"지가 다 따고서 가는게 어딧어 이 허슬러야!"

"여기 유성이 니 몫. 니가 제일 많이 잃었지?"


800만원정도를 잃은 유성에게 선우가 자신의 칩에서 500정도를 덜어 건네주었다.


"자."

"됐어...니가 딴건데."

"니게 내거고 내게 니거고. 물론 우리 예린인 말고."

"하하하, 끝까지 챙기기는. 알았어 고마워 임마."


삐졋던것이 풀어진듯 유성이 선우를 문까지 바래다주었다.


"참. 그리고 제니 조심시켜. 얼굴이 생명인 앤데."

"무슨말이야?"

"혜리가 제니 죽어라 노려보더라."

".....끝까지 귀찮게 여기저기 나타나는데 나도 어째야할지 모르겟다."


선우가 유성의 어깨를 탁, 치고 발레파킹이 몰고온 차로 걸어갔다.


"피곤해?"

"괜찮아요. 아까 그 다리 긴 여자분 이름이 혜리....씨예요?"

"응? 응."

"유성씨를 못잊었나봐요."

"큭, 혜리랑 유성인 뭐랄까. 지랄같은 사이야. 깨지고 붙고 서로 질투하게 만들려 다른놈년이랑 붙어먹고."

"......."

"넌 그러지 마."


그가 그녀의 뺨에 속삭인 뒤 길게 입맞춤을 했다.


두근두근. 그녀의 마음엔 온통 어떻게해야 들키지 않고 전학과 이사를 끝낼지에대한 걱정뿐이었다.


그의 집에 도착한 뒤 그가 욕조에 물을 받고는 버블베스 거품을 풀었다.


"근데....저렇게 놀면, 공부는 안해요?"

"응?"

"24시간 파티같은거 하고 그러면..."

"내 친구들은 공부할땐 하고 놀땐 놀지만, 거기 대부분들은 머리에 쓰레기만 들었지. 그 모임 말고 좀더 하이클라스도 있어.

니가 대학생이 되면 데려가주지."


내가 대학생이 될때까지 놔줄생각이 없다는거군. 한숨을 푹 쉬는 예린을 본 그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왜? 입시얘기 하니까 스트레스받어?"

"아, 그냥..."

"음대에 갈 생각이야?"


흠칫, 놀란 예린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왜? 잘치던데, 아깝다."

"그냥 취미라...저는..."


그녀가 흘끗 그의 경영학책을 곁눈질했다.


"경...영학을 목표로 하고있어요."

"왜? 취업때문에?"

"엄마 사업도 돕고싶고..."

"효녀네."


그가 싱긋, 웃더니 담배를 입에 물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난 재즈뿐이 못쳐. 한곡 쳐줄까?"


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레이 찰스의 'Hit the road Jack'을 경쾌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릴적에 잠시 1년정도 루이지애나 할머니댁에 가서 살다가 왔어. 그때 배운 재즈가 지금도 좋아."

".....멋져요."


진심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남자는 많이 보아왔지만, 재즈 피아노를 즐기며 치는 선우는 매력이 넘쳤다.


"반했어?"


선우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길게 예린의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깊어지는 키스에 아찔함을 느끼면서,


예린은 무릎이 풀리는것을 느꼈다.


"다리에 힘 없지?"


그가 그녀의 나시와 반바지를 벗긴 뒤 안아들고는 거품이 가득한 욕조로 들어갔다.


"물, 너무 뜨거워?"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보이는 예린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가 욕조에 앉아 예린을 자기 다리사이에 앉게했다.


그의 흥분한 남성이 엉덩이에 닿는것이 느껴져 예린은 흠칫, 몸을 떨었다.


"걱정마. 여기선 안해. 그냥..."


그가 그녀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 안에서 만져지는 기분은 또 색달랐고 예린은 참지못하고 신음소리를 내었다.


"좋아?"

"으응..."

"제대로 대답해야지."

"네..."

"여기는?"


그가 그녀의 가슴봉우리를 양손가락으로 잡고 살짝살짝 꼬집었다. 그녀의 몸이 떨리며 신음이 새어나오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여기는?"


그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로 또 그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민감한 부분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흑, 그만...."

"귀엽기는"


그가 참지못하고 그녀의 귓볼과 목덜미를 깨물어가며 애무했다.


"아핫, 시, 싫어, 그만..."

"좋다고, 느낀다고 말해."

"으응..."


그녀가 눈물고인 눈으로 도리질하자 그가 다시한번 다그쳤다.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좋다고 말하기 전엔 안멈출거야."

"흐윽...느, 느껴요...이제 그만..."

"좋아?"

"네...."


그녀가 이미 절정을 지나 견디기 힘들정도로 느끼는 중이라는것을 알아챈 그가 그제서야 동작을 멈추고 손을 떼내었다.


"고집부리지 마. 그러게 대답 하랄때 하면 되잖아."

"......"

"느낀다고, 좋다고 말하면 멈춰줄께."

"네..."

"침대로 가자. 나 더이상 못참겟어."


그녀를 높은 침대에 반정도만 눕힌 그가 선 자세로 그녀의 양 다리를 잡은채 그녀의 안으로들어섰다.


"아윽...흑..."

"아, 후우. 좋아..."


그녀의 골반을 잡고 정신없이 허리를 흔드는 그. 예린은 민감한 부위에 그의 남성이 닿을때마다 터져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으윽. 너 엄청 움찔거려...느끼고있는거야?"

"아, 흐응, 읏, 이상해요..."

"기분이 이상해? 자연스러운거야. 그건."


그가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며 더더욱 몸을 밀착했다.


"사랑해, 예린아."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던 예린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듯한 기분이었다.


사랑이라니. 이 행위가 날 사랑해서라구? 아냐. 이건 사랑이 아냐.


"너도 날 사랑하게 될거야. 곧."


그가 그녀를 터트릴듯 꽈악 끌어안았다.


그녀는 '절대 아냐!'라고 외치고싶은것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그녀는 그의 노트북을 열었다.


사진파일에도 문서파일 어디에서도 그녀의 사진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의 핸드폰을 열은 그녀는 사진파일로 들어갔다. 전에 자신이 전송받은 나신의 여자사진을 클릭한 뒤 삭제를 눌러버렸다.


후우... 한숨을 내쉰 뒤 교복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자 샤워를 마친 선우가 상쾌한 향과 함께 그녀에게 다가섰다.


"나 샴푸 바꿨는데. 좋아?"

"....상쾌해요."


민트와 어우러진 남자다운 향기. 기분이 묘해지는 향이었다.


"니가 맘에 든다니 다행이다. 가자."


그가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하며 손목을 잡고 아랫층 차고로 향했다.


"나 이번주는 좀 바쁠것같아. 아버님이 들어오시거든 미국에서. 1주일임 돌아가시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아줘."


얌전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예린. 그는 그녀와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꾸욱 참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조심히 들어가."

"네. 선우오빠두요."


그냥 보내려던 마음이 약해지며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교복 안에 감추어진 자신만이 아는 아름다운


그녀의 여체에 다시 키스하고 만지고 뒹굴고 싶었다.


"헤어지기 싫다."


그의 얼굴에 어린 서운함이 그녀의 죄책감을 증폭시켰지만,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갈께요. 너무 늦었어요."

"가."


3일뒤면 시험이고 일주일이면 좀 급하지만 이사도 끝날지도 모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예린은 집으로 돌아왔다.


-6-

 

예린을 내려준 뒤 혼자인 집으로 가기 싫어 파티로 돌아간 선우에게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야, 저번에 본것보다 훨씬 이뻐졌더라. 꾸며노니까 신인급 연예인필 나던데?"

"그러게. 꾸며도 태가 안나는애들 태반인데. 니가 붙어있어서 그랫지 여기녀석들 절반은 걔한테 눈을 못뗏어."

"키는 작은데말야. 암튼 난 걔 이제부터 비율녀야 수영장녀 아니고. 키는 작아도 비율이 진짜..."

"너 나중에 싫증나면 나한테 넘..."


고개를 돌린 선우의 차가운 시선에 재규가 말을 멈추었다.


"싫증날 일 없어. 그딴 개소리로 기분 잡치지 마."

"아니, 난..."

"재규 너 그만해. 선우 지금 푹 빠졌는데 왜 태클이야."

"재규야, 나랑 게임이나 하러가자."


유성이 재규를 데리고 사라지자 태윤이 선우의 옆에 앉았다.


"완전 반했구나."

"....아마도."

"나 니가 누구 이렇게 좋아하는거 처음본거같아. 진주랑 사귀었을때도 이정돈 아니었잖아."

"진주라. 오랫만에 듣는 이름이네."

"진주랑은 정 반대의 이미지야. 굳이 말하자면, 니네 사촌누나... 아진이 누나 타입이랄까?"


선우의 얼굴이 확 굳더니 앞에있던 술을 한번에 들이켜버렸다.


"강아진얘기 하지 말랫지."

"....미안."

"딴얘긴 다해도 강아진 그여자 얘긴 하지 마."


절친하던 사촌누나와 무슨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치를 떠는걸까. 궁금한 태윤이었지만, 차갑다 못해 어두움이 가득한


선우의 눈은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아, 암튼 예린이랑 너 둘이 잘 어울려. 둘이 잘해봐."

"고맙다."

"애가 부티나더라. 어딘지 모르게."


씨익, 차갑던 표정이 풀리며 선우가 예린을 생각하는지 미소를 짓자 태유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엄마 오셨어?]


흠칫, 잠자리에 들던 예린은 선우의 문자에 오던잠이 다 달아났다.


[네 오셨어요. 이제 자려구요.]

[보고싶다. 잘자.]


혹시 보고싶다는 핑계로 내일 또 학교앞으로 오는것은 아닐까?


두려움인지 설레임인지 모르는 가슴을 안고 예린은 애써 잠을 청했다.

 


"시험 직후에 발표라며?"

"네."

"떨지말고."

"난 안떠는데 엄마 손이 떨리네?"

"얘, 나 사업미팅 다 빵꾸내고 너 응원하러 온거야! 엄마 놀릴래?"

"하하하, 아 딸기아이스크림 먹고싶다."

"끝나면 먹으러가자. 우리딸 진짜 오늘 긴장안했나보네?"


편입시험. 예린은 애써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최선을 다해 시험에 응했다.


다행히 별다른 실수 없이 모든 시험이 끝났고, 10:1의 경쟁률을 뚫고 그녀는 합격할 수 있었다.


"예린아. 너 됐대!"


수연이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공고를 붙이기도 전에 달려와 예린과 예린엄마를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예린아, 엄마 그럼 지금 부동산간다!"

"으응?!"

"오늘 낮에 너 연습하는동안 엄마 집 봐놨거든."


평소에도 충동성이 있지만 이번은 좀 심하다싶을 정도로 행동력이 넘치는 엄마를 보며 예린은 피식 웃고말았다.


"엄마, 진심이야?"

"그럼! 우리 내일 이사야. 이삿짐업체에도 오늘 전화해놔야지. 참, 인터넷이랑 폰은 니가 옮겨?"

"네."


마침 빈집으로 나와있던 지금보다 조금 작은 학교근처 아파트를 계약한 엄마는 이사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리고...예린은 탈출에 성공하길 빌며, 그에게 전화가 올까 두려움에 떨고있었다.

 


"....하아...."

"이녀석, 운전하면서 웬 한숨이야 한숨이! 길 막히는게 하루이틀이냐?"

"그래서가 아녜요 아버지."

"그럼?"


미국에서 오랫만에 들어온 아버지. 부모님의 이혼 이후 고등학교때부터 거의 혼자살다시피 한 선우에겐 그렇다 할 만큼


아버지와 돈독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딱히 자신의 연애이야기를 하기가 껄끄러웠다.


"요즘 만나는 여자앤 없냐? 니네학교 여자애들 요즘 이쁘다던데."


대학생 아들과 대화를 해보려 노력하시는모습이 안쓰러워 선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친한애들은 많은데... 뭐, 좀 관심가는 친구는 있어요."

"뭐하는앤데?"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예요."


아버지가 흐뭇한 웃음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미국 유학시절에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치던 타냐를 짝사랑했단다. 근데 그당시엔 루이지애나에 아시안남자가

흑인여자한테 관심을 보인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대부분이 흑인인 동네라서 역인종차별이 존재했거든."

"아... 그래서 결국 고백 못하셨어요?"

"흑인들은 대부분 탄탄한 몸매인데, 타냐는 정말 갸냘펏어. 흑인치고는 많이 검은편도 아니었고. 그래서 고정팬들이

존재했는데 그중 한놈이 타냐를 스토킹하다가... 결국 그놈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들엇다. 내가 졸업하고 한국에 온 뒤였지."


얼굴도 본적이 없는 타냐라는 여자에 갑자기 예린이 오버랩되었다. 피아노를 치고 돌아가는 예린을 스토커가...


"너 안색이 좋지 않구나."

"네. 어제 밤에 잠을 설쳐서..."

"내가 시차적응 못해서 밤새 왔다갔다 해서 니가 못잤나보구나. 미안하다."


사실은 아버지의 소음보다는 예린에대한 그리움때문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녀의 희고 오목조목한 얼굴. 가녀린 목을 따라 내려가면 자신의 손에 딱맞는 그녀의 예쁜 가슴.


그리고 곧은 등과 날씬한 허리.... 몸에비해 긴 편인 그녀의 매끈한 다리.


그가 만지면 터져나오는 갸냘프고 안타까운 신음소리. 흥분하지 않을수가 없는...


계속, 계속 그녀를 옆에 두고싶다.


결혼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던 자신이지만 요즘들어서는 만약 세상에 이런 감정이 존재한다면 언젠가 그도 결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야, 무슨생각을 그렇게하는거냐? 밥이 코로들어가겠다."

"아, 아녜요 아버지."

"내가 오늘 만날사람은 예림전자 새로 부임한 여사장이라더라."

"아, 그 오븐업체요?"

"응. 미국으로 발을 넓히고 싶어해서 우리랑 손을 잡으려고해."


예림. 예린을 떠오르게만드는 이름이다.


애써 지워내려던 그녀가 다시 떠올라 둥실,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양손을 깍지 끼고 그 위에 고개를 얹은채 새침히 그를 바라보는 예린.


"이녀석, 너 정말 넋이 나간거니?"

"에? 네?"

"안되겟다. 오늘 미팅은 나 혼자 나갈테니 넌 먼저 들어가도록해. 수면부족인것같구나."


'아뇨. 아버지. 전 수면부족이 아니라 예린부족이예요.'


아버지에게 차 키를 뺏기고(운전하며 졸까봐) 택시로 집으로 돌아가던 선우는 충동적으로 운전사에게 방향을 예린의 집쪽으로


바꾸어달라고 부탁한 뒤 핸드폰 폴더를 열고 문자를 보냇다.


[어디야. 지금 집 앞으로 나와.]


그녀의 집 앞에서 문자를 기다리며 그녀의 그림자라도 보일까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그는 30분이 지나도 오지않는 답장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장 안나와?]

[9시에 벌써 자는건 아니지?]

[나 40분 기다렸다]

[못나오면 못나온다고 답장 해야하는거 아냐?]

[너 죽었어.]


1시간 후. 머리 끝까지 화가난 상태의, 건드리면 누구든 죽여버릴듯한 표정의 강선우는 그녀의 집 앞을 떠나고 있었다.

 


"야, 고딩인데 어디 함부로나올 수 있었겟냐? 어떤애들은 밤에 전화도 못받게한대."

"혜리 니말은 맞지만.... 그래도 건방져."

"혹시 무슨일 있어서 핸드폰 압수당한걸수도 있잖아."


하긴, 요전 며칠간 자신이 늦게까지 화장과 머리까지 하게하곤 놀러다니게 만들었던것이 생각나 선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털털한 성격의 혜리가 풋, 웃으며 선우의 샷잔 가득 양주를 부었다.


"그 베이비걸이 그렇게 좋아? 우리 선우 많이 컷네. 누구 좋아할줄도 알고."

"....마시자."

"참, 진주도 합석해도 돼?"


진주라는 이름에 선우의 한쪽 눈썹이 찡그려졌다.


"진주? 일본에 있을애가 왜?"

"학교 힘들다고 때려친 모양이야. 온지 1주일 됐어."

"하긴, 그 급하고 불같은 성격에 무슨 유학이냐 유학이."

"그래, 급하고 불같은 성격이라 드럽게 미안하다. 근데 니가 내 성격에 왈가왈부 할 처지인가? 이중인격 강선우?"


어느새 나타나 뒤에 서있던 진주가 가방을 선우의 옆에 털썩 내려놓은 뒤 혜지의 옆에 앉았다.


진한 눈썹과 큰 키. 괄괄한 목소리까지. 고등학교때와 하나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달라진게 있다면 사자갈기같은 빨간머리 정도랄까.


"일본가서 헤비메탈 하다가왔냐? 웬 고추장색 머리야."

"니놈은 머리가 맥주색이다? 얼마나 쳐마셨길래 머리까지 그모양이냐?"


풋, 혜리가 웃음을 터트리고 곧 세사람은 재회의 축배를 들었다.


"진주야, 참, 선우 여자친구 생겼다? 아주 귀여운 고등학생 베이비돌."

".....여자친구?!"


진주의 눈이 선우의 눈과 마주쳣다. 그리고 진주는 아주 잠시, 고등학교시절의 두사람을 회상했다.

 


"그러니까. 내가 널 좋아하는걸 아니까 너랑 사귀자고? 아니, 사귀는 척만 하자고?"

"응."

"왜?"

"애들한테 고백받고 거절하기 귀찮아."

"하하하하, 뭐냐 너 강선우. 보기랑은 다른부류였네."

"너는 원래 특이한애고. 나진주."


전혀 여자로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친구로 지낼 수 있을것 같아서라며 자신을 <방패>로 정해버린 강선우.


그리고 그것을 재미로 받아들였던 자신.


연애라는것은 원래 더 좋아하는사람이 지기 마련이라서...고등학교 2년만에 그녀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할 수밖에 없었다.


"왜 사귀는척 그만하잔건데?"

"나도 연애좀 해보려구."

"그래? 그럼 그만하지 뭐. 그동안 고마웟어."

"....내가 한게 뭐가있다고."


그래도 가끔 방과후에 애인인척 친구들 틈에 끼워 데리고 놀아주면 내가 얼마나 설레이고 기뻣는지 아니?


하지만 니 주위에 끊이지 않는 여자들, 그리고 니 친구들이 벌이고 다닌다는 나쁜짓들.


만약에 내가 니 진짜 여자친구라면 모두 감수하고 널 받아들였겟지만... 난 그냥 '척' 이었을뿐인걸.


그래서 니 곁에서 하루라도 빨리 멀어지려 결정한 일본유학. 하루하루 니가 보고싶어 타들어가던 내 마음.


다 정리되어서, 이젠 모두 정리했다고 생각하고 돌아온건데. 오자마자 들리는건 니 연애소식이니?


진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공부 열심히 하고, 돈 모자라면 언제든 SOS알지?"

"안모자라요 아버지."

"....미국으로 올 생각은, 아직도 없는게냐?"

"네. 한국에서 학교 마칠생각이예요."

"엄마한테는....가끔 연락 하니?"

"네. 잘 지내신대요 아저씨랑."

"그래."


씁쓸한 표정으로 마지막 담배를 태운 선우의 아버지가 공항으로 들어섰다.


"잘 지내라, 우리아들."


어색하게나마 선우를 끌어안은 아버지가 등을 토닥였다.


'다음번에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예린이와 같이 만나야겟다'


아버지의 출국에 섭섭한 기분에서도 선우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생각뿐이었다.

 

 

[며칠전에 문자씹었지. 오늘 3시 15분이야. 청담공원]


3시 반. 문자를 보낸지는 30분이 지났다. 인내심의 한계에 달한 그가 결국 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거신번호는 없는번호이거나 잘못걸린 전화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걸..."


선우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다시한번 예린의 번호를 눌렀다. 똑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씨B....번호를....바꾸었어?"


허탈하게 미소를 지어보인 그가 전화기를 조수석에 내동댕이쳤다.


"....그래. 나랑 게임을 하시겟다?"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꽉 잡은 그의 눈은 배신감과 상처로 검게 빛나고있었다.


-7-

 


예린은 새 교복에 익숙해졌고 수연언니와 친분이 있던 같은학년 친구들과 가까워졌다.


예고에 전학온지도 두달이 다 지나 곧 기말고사 시즌이 시작될것이라 시험공부에 매진인 하루하루였다.

 


전학온 후 주연을 제외한 예전학교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그남자, 강선우라면 반드시 예린의 친구들을 캐내어서라도 자신의 편입사실을 알아낼것이 분명했다.


예린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이 기울어 잠적했다는 헛소문이 선아여고에 떠돌았지만 모든 사실을 아는 단 한사람,


주연만은 예린의 부탁을 존중해 아무에게도 예린에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왜 다른애들한테 너 예고간거 이야기하지 말라는거야?"

".....그냥, 알리고싶지 않아. 그렇게 하면 안될까?"


어딘지 모르게 간절하던 예린의 눈동자.


"그래. 말 안할께. 하지만 언젠가 나한테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줘야해."

"....약속해. 주연아."


무슨일이기에 도망치듯이 편입시험을 본것이며 전화번호까지 바꾼걸까?


학교 친구들과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던 예린의 교우관계를 생각하며 주연은 편두통이 생길것만 같았다.

 


"여기 일단 강남구, 송파구, 서초구에 고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온 여학생 명단."

"....이름을 개명했을지도 몰라, 안씨만 추려."

"이름을 개명해?! 야, 아주 소설을 써라 강선우!"

"안씨 다해서 두명인데 하나는 은광 하나는 경기."

"둘 다 지방에서 온걸로 되어있던데?"

"....둘 다 아냐."


심부름센터를 통해 조사한 서류를 소파에 던지며 선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참 이상한애다. 내가 보기엔 너 싫어하는것같지도 않던데, 참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속은 모르는거야."

"찾을거야."

"찾아서 한번 혼내줄까? 다같이?"


전부터 예린을 탐내던 재규의 음흉한 눈빛에 선우가 차갑게 응대했다.


"아니. 내거니까. 나한테 돌아오게 만들거야."

"....."


유성, 태윤, 재규 모두 선우의 집착에 두 손 다들었다는 표정으로 쓸모없어진 서류를 정리했다.


"서울 시내 고등학교 다 뒤지라고 해. 아니, 지방까지."


그로부터 한달여를 '전학생'명단을 뒤진 심부름센터는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전학생과는 다른 파일에 끼워져있던 예린의 '편입생'파일때문이었다.

 


"다녀오세요 엄마."

"우리 예린이 걱정되서 엄마가 어떻게 지내지? 오늘부터 우리 예린이 겨울방학인데."

"그래두 진짜 중요한 미팅이잖아. 주인공인 예림전자 사장이 빠지면 어떻게해."

"그래. 예린이도 아빠한테 엄마 지켜주라고 기도할거지?"

"응. 아빠가 엄마를 따라가서 나 좀 실컷 빈둥거리게 냅두라고 그럴거야."

"하하하하, 엄마가 선물 많이 사올께. 엄마 2주후에 돌아옴 데리러 나와?"

"네. 잘 다녀오세요 엄마."


손을 흔들며 공항에서 엄마를 배웅한 예린은 가슴한켠이 싸하니 시려오는것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에 흠칫, 주위를 둘러본 뒤 집쪽으로 가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진짜라니까!! 방금 광진구쪽 가는 공항버스 탔어!!"

"....알았어. 버스번호 불러."


캐나다 여행을 가려다가 예린을 공항에서 발견한 유성이 흥분한 목소리로 선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침착히 버스번호를 받아적는 선우의 눈이 번득였다.


'안예린... 절대 놓치지 않겟어.'

 


꾸벅꾸벅 편안한 좌석에 졸던 예린은 집앞에 도착해 졸린눈을 비비며 버스에서 내렸다.


"아웅..."


기지개를 켠 뒤 목이말라 편의점으로 들어간 그녀는 따뜻한 녹차를 골라든 뒤 조금 출출해 삼각김밥을 하나 들고 계산대로...


탁. 예린은 삼각김밥과 녹차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강선우. 그가 계산대 바로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고있었다.


"다 골랐어?"


그가 예린이 떨어트린 녹차와 김밥을 줏어 계산대에 놓더니 캔맥주 여섯개, 프링글스를 합해 계산을 했다.


"나가자."


다정히 미소짓는 그의 눈 뒤에 지옥같은 불꽃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가 떨려 제대로 걸을수도 없었다.


"....똑바로 걸어."


꽈악, 그녀의 팔을 잡고 귀에 속삭이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그의 분노를 짐작하게 했다.


그가 차 뒷문을 열고 산 물건을 싣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때가 아니면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예린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떨리는 다리때문에 얼마 도망가지도 못해 넘어진 그녀를 비웃듯이 일으켜세운 그는 그녀를 차에 실었다.


그의 집으로 가는 내내 히스테릭하게 떠는 그녀를 아무말없이 바라보는 선우.


"....내려."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그가 차고로 연결되는 문을 닫은 뒤 열쇠로 문을 걸었다.


"....내가 그동안 널 너무 쉽게 대했던것 같아."

"사, 살려주세요."


그에대한 두려움에 제대로 반항조차 못하고 끌려온 예린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있었다.


"주위에서 얼마나 날 비웃었는지 알아?"

"자, 잘못했어요..."


한걸음 한걸음 그가 다가오자 뒷걸음질치던 그녀는 소파에 발이 걸려 주저앉고 말았다.


"후우...일단은..."


그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아까샀던 캔맥주를 따라왔다.


"술 한잔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해보자고."


폭력을 쓸까봐 두려워하던 예린은 의외인 그의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배."


그가 잔을 부딛친 뒤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왠지 안마시면 안될것같아 몇모금을 들이킨 예린은 왠지 모르게 어지러운 기분에 자꾸 눈이 감겨졌다.


"졸려?"

"....아, 아녜...."

 


아니라고 하려고 했던듯한 기분인데. 그녀는 등에 느껴지는 푹신한 느낌에 실눈을 떠 자신이 선우의 침대에 있음을 확인했다.


"으응..."


몸이 뜨거웠다. 열이나는것이 아니고 그녀의 몸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애타하고 있었다.


"약효가 생각보다 빠르네."


속옷하나 달랑 걸친 그가 몸을 못가누는 그녀의 청바지와 티, 속옷을 슥슥 벗겨내었다.


"이런방법까지 쓰고싶진 않았지만."


카메라로 가서 앵글을 조정한 그가 레코딩 버튼을 눌렀다.


"뭐, 추억거리 겸 영화를 한번 찍어보자고."


예린은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어지러운데다가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최음제야 니가 맥주랑 마신거."


그녀의 귀에 살짝 속삭인 그가 씨익 웃더니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거칠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뜨겁게 얽혀오는 그의 혀가 그녀의 보드라운 혀를 휘감았다. 신음소리가 새어나오자 그가 그녀의 가슴을 모아쥐었다.


"천번도 더 꿈꿨어, 너랑 다시 하는거..."


그의 혀가 그녀의 봉우리를 양쪽으로 오가며 희롱하는동안 그녀는 시트를 움켜쥐며 평소의 배로 느껴지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좋지? 그 약, 몸을 아주 민감하게 만들어준다더라고."

"흐윽...."

"거기에 5시간 후엔 몸 안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고말이야."

"싫어...제발..."

"5시간동안 즐겨보자고."


그가 그녀의 입구를 자신의 남성으로 문질렀다. 약효때문인지 이미 미끌거리는 입구에 만족하며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좋아, 역시..."

"흐으, 아, 싫어, 그만,"

"니 몸을 봐. 날 원하고있다구. 이렇게...안을 움찔거려가며...아아..."


최음제때문에 강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몸은 그의 흥분을 더욱 가폭시켰다.


"아핫, 나, 한다!!"

"아읏!"


그가 동작을 빨리하자 예린은 죽을것만 같았다. 민감해진 그녀의 안쪽은 그녀에게 견디기 힘들정도의 오르가즘을 주고있었다.


"하아..."


콘돔을 뺀 그가 샤워실에 가 씻고오는가 싶더니 기운없이 누운 그녀의 가슴위로 타고 올랐다.


"빨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미약하게나마 반항을 하려했지만 그가 들이대자 어쩔 수 없이 그의 분신에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으읏, 좋아...니 혀...아, 녹는것같애...더 돌려가면서, 옳지."


오르가즘과 약에 취해 몽롱한 그녀는 그가 지시하는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하아...좋았어... 우리 서로 해줄까?


그가 눕더니 그녀를 가볍게 들어 그의 위에 꺼꾸로 앉도록 했다.


"얼른 해. 입으로."


그녀가 그의 분신에 입을 다시 가져다대자, 그가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입구 윗쪽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 그만..."

"말하지 말고 계속 입으로 해."


눈물을 흘리며 예린의 입술은 그의 분신에게 진하게 키스를 했다.


"아, 나 더이상 안되겠어."


그녀를 자신의 위에 앉도록 하며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다. 안이 꽉 찬듯한 느낌에 그녀는 죽을듯 신음소리를 내었다.


"오...오빠, 나, 그만, 으윽, 흑...제발 그만..."

"시끄러워. 아직 시작도 안한거야 우리."


그가 아래에서 그녀의 골반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면서도 느끼고있는 자신이 싫었다.


"좋지? 니 안에서 나를 얼마나 빨아들이고있는지 알아? 아, 정말 죽을것같애."

"흐윽, 그런, 말, 흑, 하지마요"

"왜, 스스로가 음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싶지 않은거야?"

"시, 싫어...흑..."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도 동작을 오히려 격하게 하던 그가 두번째로 콘돔을 갈았다.


"이번엔 어떤자세로 해볼까? 침대에 앉아봐."


그녀가 침대에 앉자 그가 그녀를 안아올렸다.


"다리감아."


그녀가 고개를 젓자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물었다.


"아야!"

"얼른 다리감아."


흐느끼며 그에게 다리를 감자 그녀를 안은채로 그가 돌진해 들어왔다.


"아앗!"

"흐읏, 이거 정말 깊게 들어가네"


그가 일어서자 그녀의 체중때문에 더욱 깊게 들어오는 그. 그녀는 흐느끼며 놔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가벼운편인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는 계속해서 돌진하던 그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힘들어?"

".....네...."

"그럼 왜 도망갔어?"

"......"

"도망치지 마."

"......"

"지난 세달동안 남자랑 데이트하거나 잔적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젓자 그가 그녀의 입술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넌 내거야, 안예린."

 


이미 유성에게 들어 예린의 어머니가 오늘 출국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던 선우는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핸드폰 밧데리를 분리해둔 뒤 곤히 잠이든 그녀의 곁으로 가 그녀의 손을 얼굴로 가져다가 대었다.


따스한 손바닥에 뺨을 대고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의 얼굴은, 씁쓸했다.


"왜...자꾸 도망치려고 하는거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춘 뒤 그는 오랫만에 편안한 단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8-

 

 

싱긋, 웃으며 그가 핸드폰을 켜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엄마가 도착하셔서 전화하실텐데. 안받으면 걱정하시겟지?"

"....네."


핸드폰 뒤에 붙은 곰돌이 모양의 플라스틱. 그녀가 없던 장식이 생겨 이게 뭐냐는듯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작은 모니터를 켜보였다.


"구시대 소련에서 스파이들이 쓰던거래. 옥션에서 싸게 구입한 추적장치야. 재밋지? 반경 10킬로미터까진 추적이 가능해.

특별히 리폼해서 곰돌이 모양으로 만든거야, 안떨어지는 본드이니까 뗄 생각은 꿈도꾸지말고. 만의 하나라도 내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으로 빠져나가면 친히 니네학교 홈피에 동영상이 뜰줄알어. 아, 혹시 엄마랑 어디 시골에 가거나 할 경우? 걱정 마. 나한테

미리 말하면 내가 니 10키로 반경 안으로 가있을거니까."

"하, 하지만..."

"지금 말대답 할 상황이라고 생각해?"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참, 이건 선물이야. 예고로 편입한거 축하해."


그가 그녀의 귀에 티파니의 자그만 하트 귀걸이를 끼워주었다.


"엄마 언제오셔? 거짓말 할 생각은 말고."

".....2주일 후요."

"그래?"


그가 일어서더니 기지개를 켰다. 전에 보았을때보다 약간 마른듯한 모습에 예린은 혹시 자신때문에... 라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이 악마같은 남자가 자신때문에 고민했을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럼 2주일동안은 나랑 동거하는거네?"


그가 예린을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이중인격자. 야누스같은사람. 저 달콤하고 선해보이는 얼굴 뒤로 나한테 온갖 더러운짓을 해대던.


눈물이 치밀어올라 고개를 돌린 예린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싫어?"


순식간에 어두운 표정으로 변한 그가 침대로 그녀를 밀었다. 쓰러진 그녀를 덮친 그가 거칠게 그녀가 두르고있던 타월을 벗겨냈다.


"꺄앗!"

"소리지르면 또 물거야?"


이미 화장실에서 쇄골 윗부분 목덜미의 그가 깨문 멍을 확인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았다.


"따라서 말해... 오빠를 원해요."

"......"


그가 거칠게 그녀의 아랫쪽 민감한 부분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으!"

"얼른. 더 거칠게 하기전에."

"....오빠를....원해요...."

"그래? 그러면 원하는대로 해주지."


그가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가슴 윗부위를 깨물며 세게 빨아들였다.


"아앗!"


아픔에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밀어낸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타월로 묶었다.


"아프지? 묶어놔야 또 날 밀어내지 못하지."

"오빠....제발....잘못했어요, 잘못했,아앗!!!!"


그녀의 쇄골아래서부터 가슴의 봉우리 직전까지 수개의 키스마크를 만들은 그는 그제야 만족한듯이 그녀의 가슴을 간질였다.


"내거란 표시를 찍어둔 것 뿐이야."

"흐흑...."


흐느끼는 그녀의 눈물을 핥으며 그가 귀에 속삭였다.


"....나가자. 데이트하러."

 


그의 집에 잡혀들어간것이 오후 1시경이었는데, 나올때 보니 어느새 시계가 밤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또....회먹게요?"

"뭐? 하하하하, 진짜 그래버린다 너."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보이는 예린. 청바지에 얌전한 잠바를 입은 그녀는 작은 키덕에 더욱 어려보였다.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자 너."

"이 시간에요? 동대문 가게요?"

"그딴데 안가."


그가 혜리에게 전화하자 할일없어 놀러나갈까 빈둥거리던 그녀는 반색을 하며 자신의 집으로데려오라 난리를 쳤다.


"가자, 전에 봤지 내친구 혜리?"

"....다리 긴 언니...."

"하하하, 그래, 다리 긴 언니."


혜리가 혼자사는 원베드룸 아파트는 깔끔했다. 옷이 워낙에 많은 그녀는 거실에 침대를 놓고 하나뿐인 베드룸을 옷장으로 쓰고있었다.


"오랫만이야 베이비돌!"

"네....언니."

"이리와. 내가 옷 골라뒀어."


워낙에 큰 키인 혜리의 딱붙는 긴 돌체앤가바나 티셔츠는 작은키인 예린에게 미니드레스가 되었다.


"이거 이쁘지?"


선홍색의 몸에 붙고 목이 파인 미니드레스는 선우가 찍어놓은 키스마크들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붉은 드레스와 붉은 키스마크의 조화가 색스럽다 생각하며 선우가 씨익 웃어보였다.


"오, 오빠 이건... 목에... 자국 다 보이는..."

"이걸로 하지. 혜리 너한테 빚졌다."


잠시 후, 혜리에게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은 예린은 선우가 가져온 예전에 사준 프라다의 힐을 신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너희 오늘 어디가?"

"일단 밥먹게."

"나 있다가 1시에 클럽 P 오픈식에 가는데, 재규랑 태윤이도 올거야."

"그래, 있다보자."

"명단에 너희도 올려논다? 바이바이 스위티~"


두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혜리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문을 닫았다.


푸욱, 한숨을 내쉬자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눈을 마주쳤다.


"한숨나와, 나랑있으니까?"

"아, 아니요 드레스가 어색해서..."

"왜? 니가 내거라는, 나랑 조금 전까지 뒹굴다 나왔다는 증거가 모두에게 보여서?"


그의 적나라한 말에 그녀가 창백하게 질리자 달래듯 선우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난 세상사람 모두가 니가 내거라는것을 알았으면 좋겟어."

"......"

"너를 포함해서."


마지막 말을 으르릉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 선우가 두려워, 예린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남자라면 그 동영상을 온세상에 퍼트리고도 남을것이다.


그녀가 자신의것이라는 증거이니까.

 


저녁을 간단한 파스타로 먹은 두사람은 클럽 P로 향했다.


게스트리스트에 올라있던 두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기도는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크크큭, 야, 너 혜리가 니 이름 뭘로 적어놨는지 알아?"

"뭐....라고요?"

"베이비돌."


그가 가지고 노는 인형취급을 받는것같아 기분이 약간은 상한 예린이었지만 친절했던 혜리를 생각하며 그냥 넘기기로 했다.


"요, 선우! 비율녀!"

"....진짜 잡아왔네."


캐나다로 여행을 떠난 유성을 제외한 두사람이 싱긋 웃으며 VIP룸에서 그들을 반겼다.


저번에 본 여자들과는 또 다른 여자들이 그들의 곁에 붙어앉아 있었다.


"유성이가 벌써 까발렸냐? 입싼자식."

"유성이덕에 잡은거잖아, 그자식 캐나다 안갔음 공항에서 비율녈 어떻게 찾았을거야?"

"선우한테 벌 많~이 받았나보네?"


그녀의 목과 가슴윗쪽에 수없이 찍힌 키스마크를 보며 재규가 씨익 웃자 예린이 붉어진 얼굴로 머리칼로 자국들을 가리려 노력했다.


"애 놀리지 마. 오프닝이면 뭐 행사 하나? 가수 누구온다는데?"

"뭐 요즘 잘나가는 애들 몇 부르는거지. 재규 엑스도 온단다."

"연아?!"

"응. 장연아."


재규의 표정이 굳더니 말없이 담배만 빨아들였다. 엑스가 오는것이 안달가운듯 보였다.


"진주도 온다는데? 니 엑스."

"....말조심해."


예린의 얼굴이 굳어지자 선우가 태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엑스 아냐. 고등학교때 따라다니는 애들 귀찮아서 사귀는척 한거야."


묻지도 않은 그녀에게 다급히 변명을 하는 그를 보며 태윤과 재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건방진 여자는 끌고가 여럿이 혼내주기도 하고, 관심 가면 사귀다가도 들러붙으면 잔인하게 차버리는 선우답지 않았다.


"진짜야. 진주는 그냥 남자친구같은거야. 같이 자도 아무일 안생길것같은 애라구."

"넌 나만없음 나에대해 까대냐?"


뒤에서 들려오는 진주의 시큰둥한 목소리. 예린은 고개를 돌려 룸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진주를 바라보았다.


큰 키. 사자갈기같은 붉은머리가 야성적이고 도발적인, 짙은 눈썹의 드세보이는 미녀가 타이트한 가죽치마와 딱 붙는 탑을입고


들어서고 있었다. 마른듯한 혜리와는 다르게 근육이 좀 있는 늘씬한 다리에서 건강미가 느껴졌다.


"왔냐?"

"어. 얘가 그 베이비돌?"

"인사해 예린아. 오빠 고등학교 동창이자 여친인척 해주었던 고마운 언니야."

"안녕하세요."


진주는 예린을 보고 살짝 놀랐다. 어리다는것은 알았지만 선우가 데리고 놀던 아이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여리고 귀여운 인상.


하지만 섹시한 원피스가 어울리는 굴곡있는 가슴. 슬쩍 바라보던 그녀는 예린의 가슴에 찍힌 키스마크들을 보곤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만든것인지 색이 진한 자욱들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오랫만에 선우가 온다는 소식에, 그리고 여자친구와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에 조금이라도 기대를 하고 차려입고 나온 자신이 한심해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한잔 해. 좋아하잖아, 보드카 크렌베리."


진주에게 잔을 건네는 선우를 바라보던 예린은 왜인지 불편한 마음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을 찾아다녔다면서 전 여자친구를


여기에 부른 이유는 무엇이란말인가? 방금 전까지 자신을 안고 뒹굴다가 여기와선 또 다른여자에게 술을 권하다니.


"우리 예린이 이리앉아."


의자에 깊이 앉은 선우가 그녀를 벌린 무릎 사이에 앉혔다. 다른사람들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 행동에 당황한 예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주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이 가시는것이 느껴졌다.


"술 뭐줄까?"

"....저번에 만들어준거도 되나요?"

"피나콜라다?"

"콜라 안들어가는 그거."


자신이 만들어준 칵테일에 했던 농담까지 기억하는 예린에 기분이 좋아진 선우는 그녀의 머리칼에 고개를 묻고 꼬옥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샴푸냄새. 자신의 것과 같은... 갑자기 그의 몸이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흥분시키지 마."

"제, 제가 뭘..."

"이뻐죽겟어."


바로 옆에서 둘을 지켜보던 진주가 불편한 한숨을 내쉰 뒤 화장실로 갔다.


"오빠, 저두 화장실..."

"데려다줄께."


화장실로 예린을 들여보낸 뒤 선우는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볼일을 본 후 손을 씻던 예린은 화장실의 화장대 앞 소파에앉아 담배를 피우는 진주를 발견했다.


꾸벅, 어색하게 목례를 하자 진주가 훗 웃으며 담배곽을 열어보였다.


"필래?"

"아, 아뇨. 저 필줄 몰라서..."

"배울래?"

"아뇨...."

"쫄기는. 너 진짜 귀엽구나."


슥, 진주가 시원하게 웃는 얼굴로 예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선우가 죽고 못사는 이율 알것 같았다.


"선우랑 나 고등학교때 사귀는 척 한건 맞는데, 진짜 별거 아녔어. 친구라 편의봐준것뿐야."

"네... 저 신경 안써요."

"질투 안해?"

"질투는... 연인들끼리 하는거잖아요."

"무슨소리야? 너 선우랑 사귀는사이 아냐?"

"......"


어두운 예린의 표정.


"이상하다 야 묻는데 대답 안하니까. 썰렁하게."

"....사귀는거....아니예요."


그러고보니 이상하게 든 목의 멍과 자세히보니 든 손목의 붉은 생채기.


"너 혹시"

"...."

".....강선우 이 #새끼. 그새끼가 이런거야?"


하얗게 질린 예린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녜요, 아녜요 언니."

"웃기지마. 선우랑 그 친구들, 나쁜짓 뒤로 하고 다니는거 다 알아."

"......."


후두둑, 예린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을 급히 옆에서 티슈를 집어 닦아주며 진주는 예린을 끌어안고 위로했다.


"그래서 연락 끊었던거야?"
"......."

"선우가 널 찾으러 다닌다고 소문 들었어. 언제 찾은거야."

"오늘요. 엄마 배웅갔다가... 공항에서..."

"김유성 이 @팔놈... 그놈 맞지? 그놈이 선우한테..."


말없이 떨며 고개를 끄덕이는 예린. 정의심 강한 진주는 도저히 가만 있을수가 없었다.


"이 씨..."

"어, 언니 그냥 아무말도 하지 마세요. 저, 저..."

"너 그놈한테 뭐 약점 잡혔어?"


진주의 반응으로 보아 선우의 편이 아닌 아군이 되어줄것 같은 생각에 예린은 이를 악물고 겨우겨우 말했다.


"오늘..."


순간 밖에서 선우가 소리를 질렀다.


"안예린, 죽었냐?! 큰거면 더 기다릴테니까 대답만 해!!"

"지, 지금 나가요!!"


급히 눈물자욱을 닦은 예린이 나가려 하자 진주가 예린의 핸드폰을 낚아채었다.


"난 니편이야. 어떻게든 도와줄께. 니가 가능한 시간에 아무때나 전화해."


번호를 급히 입력한 뒤 떨리는 가슴으로 예린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왜이리 오래걸렸어?"

"사람이 좀 있어서..."


그녀를 안고 길게 입술에 입맞춤을 한 선우가 속삭였다.


"이젠 절대 떨어지기 없기야?"

"......"

"어차피 2주동안은 나랑 붙어있겟지만."


진주가 화장실을 나와 방에 들어가려다가 슬쩍, 예린을 바라보며 윙크를 했다.


예린은 선우가 눈치를 못챌만큼만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9-

 

"이 원피스는 어떠세요?"

"....어울리네. "


3일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키스마크때문에 파인옷을 입기 싫은 예린이었지만, 선우는 그녀의 의견을 무시한채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할 밝은 레드계열의 튜브탑 원피스를 모스키노에서 골랐다.


"머리띠만 아까 올리비에에서 본 그 도톰한 화이트로 하면 완벽한 크리스마스 룩이겠다."


선우 자신도 알마니의 블랙수트, 블랙셔츠에 페레가모의 크리스마스 트리 무늬의 넥타이를 하고 약간은 들떠보였다.


"이 귀걸이 귀엽다. 루돌프네? 한번 해볼래?"


크리스마스 한정판으로 나온 샤넬의 사슴과 눈꽃 모티브의 귀걸이까지 치장을 마치고 구찌의 크림색 스웨이드 부츠를 신은 예린은


'도대체 이 많은 돈을 다 어디서 나는걸까' 하며 궁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네 아빠 미국사신댓죠?"

"응. 지금은 DC사셔. 워싱턴 알지?"

"돈, 많이 주시나봐요."

"하하하. 한 200만원 보내주시나, 한달에?"

"근데 오빤 어떻게 이렇게 돈 많이 써요?"

"....알고싶어?"

"네."

"로또."

"진짜요?!"


예린의 놀란표정을 보며 그가 푸웃,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장난이야. 주식이랑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미국 아파트 건물로 시작해서, 미국에서 부동산이랑 주식투자해."

"....그럼 오빠가 돈 버는거구나."

"왜? 철없이 부모돈 짜내어서 너한테 쓸까봐 걱정돼?"


사실 카드빚때문에 자살하는 사람 많다던데 이렇게 쓰다가 큰일나면 어쩌나 걱정한것도 사실이었다.


"걱정마. 나 머리하난 좋으니까, 니가 평생 쇼핑이나 집이나 차나, 물질적인걸론 걱정 안하고 살게 해줄께."


'....그럼, 내 마음은요? 나도 대학에 가서 친구들이랑 미팅도 하고 놀러도 다녀보고 싶은걸요. 무엇보다, 난 오빨 사랑하지 않아요.'


답답한 마음에 얼굴표정이 어두워진 예린은 뷰티샵에서 화장과 머리를 마친 뒤 파티장소인 한남동의 고급 빌라로 향했다.


1차로는 고급 와인파티에서 저녁을 먹고 그의 친구들을 만나서 조인한 뒤에 2차로 홍대의 새로생긴 멤버쉽 클럽을 간다고 했다.


"이야, 우리 베이비돌 오늘 스타일 끝나는데?"


밖에선 그냥 집인것같지만 프라이빗 레스토랑인 이곳. 잔잔한 크리스마스음악을 재즈로 편곡해 흑인밴드가 연주하고있었다.


"혜리언니! 저번에 옷 잘 입었어요. 여기..."

"그냥 가져두 되는데!"

"드라이클리닝했어, 그냥 가져다가 걸면돼. 그리고 여기선물. 예린이랑 같이 고른거야."

"꺄~마크제이콥스 신상 향수! 땡큐!"


향수를 수집하는 혜리는 좋아서 생긋 웃으며 선물을 받아들었다.


"진주야, 여기!"


붉은 딱붙는 드레스를 입은 진주와 흰색 원피스에 초록색 보석으로 포인트를 준 혜리. 마치 커플처럼 어울렸다.


"하하, 둘이 커플룩같아."

"아하하하, 강선우! 저기를 보고 말해."


재규와 태윤이가 들어서는데, 둘 모두 흰 계열 남방, 붉은 타이를 하고있었다.


"저거야말로 커플룩 아냐?"

"....바보자식들."


두사람이 모두가 앉은 테이블로 조인하고 난 뒤 어디클럽이 제일 좋은지, 2차로 갈곳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식사 내내 예린은 대화에 못끼고 꿀먹은 벙어리마냥 얌전히 앉아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화장실로 향했다.


진주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예린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왔다.


"언니!"

"잘 지냇니?"

"네..."

"그래. 얘기해봐."


진주가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화장실의 화장대의자에 앉아 예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진주를 바라보았다.


"언니. 저 언니 믿어도 되는거죠?"

"응."

"....저....비디오 찍혔어요."

"!!"


진주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리 나쁜짓을 한다고 해도 사진도 아닌 비디오라니. 선우가 무슨 연예인 매니저라도 된단말인가.


"진짜...로?"

"....네."

"어쩌....다가....만약에 억지로 당하는 비디오라면 걱정하지 마. 경찰에 신고하면 지도 잡혀가는데 설마 그걸 어디 올리..."


예린이 울기 시작했다. 눈에서 뚝뚝 무릎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본 진주가 티슈를 건네며 예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언니, 그 비디오... 억지로... 당하는것처럼 안보일거예요..."

"응?!"

"나... 그때 오빠가 준거 마셨는데... 정신을 차릴수가 없어서..."

"그, 그자식 너한테 약먹였어?!"


고개를 끄덕인 예린이 무릎에 얼굴을 묻다시피 하곤 끅끅 울어댓다. 선우를 만난지 거의 반년만에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진실이었다. 그런 그녀를 다정히 안아주며 진주는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것만 같았다.


"어디다가 두었는진 알아? 선우성격에 누구한테 그거 맡기진 않았을거야."

"아마... 방 어딘가에 있겟지만 오빠가 항상 붙어있어서..."

"알았어.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테니까."


아무것도 모자란것이 없는 부유한집의 아들이면서 왜 이런행동을 하는것일까. 진주는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은것 같아서


자리로 돌아간 뒤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와인만 들이켰다.

 


선우의 친구들이 준 선물은 다양했다. 재규는 백화점 20만원권 상품권, 태윤은 불가리의 커플향수, 혜리는 커플 스파 이용권,


진주는 자신이 직접 만들은 팔찌 두개를 내놓았다.


"와, 언니 이거 언니가 만든거예요? 이쁘다... 가운데는 유리?!"

"유리를 녹여서 만든거야 가운데는."

"일본가서 금속공예 배운다더니 진짜였네."


다들 진주가 만든 섬세하고 예쁜 팔찌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사실 선우에게 주려고 했던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앞으로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주려고 일본에서부터 만들어온 팔찌였다.


만약 예린이 선우의 곁을 떠날거라면 팔찌를 돌려달라 부탁할것이고 착한 예린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것이란것을 진주는 알고있었다.


선우가 팔찌를 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론 설레이는 진주.


'예린이가 그 비디오만 손에 넣으면... 그리고 사라져준다면... 그때는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겟어."

 

 

며칠 뒤. 크리스마스파티 이후 각자 망년회를 돌아다니던 이들이 뉴이어 파티를 위해 다시 뭉쳤다.


"선우야. 너 엄마 올해는 안오셔? 매년 겨울마다 베이징은 너무 춥다고 들어오시더니."

"응. 아저씨랑 1월 11일에 들어오셔."


예린의 엄마가 귀국하는 날은 1월 10일이니 예린이 집으로 돌아간 뒤 방문하도록 일부러 날짜를 조정해둔 선우였다.


"그래? 몇시 비행긴데?"

"? 왜?"

"내 친구도 딱 그날 맞춰서 베이징서 들어오는데."

"아, 송희?"

"응."

"아마도 엄만 1시비행이랫으니, 4시에 공항 도착하시겟지. 집에서 3시쯤 출발하면 넉넉해. 왜, 내가 송희 픽업해줄까?"

"아니야. 송희네 부모님 나가실거랫어, 같은 비행긴가 했지. 걔는 더 일찍 들어올거래."


진주는 연락이 끊긴 송희의 핑계를 대며 선우의 집이 비는 시간을 조사했다.


"근데 그거 알아? 장연아 쇼핑몰에 투자했다가 5천 날렸대."

"뭐어?! 정말?"

"어쩌다가 그랫대?"

"원래 거기가 가짜 팔기로 유명한덴데..."


주위사람의 가쉽으로 이야기의 화제를 돌린 진주는 머릿속으로 예린의 비디오를 찾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며칠사이 헤쓱해진 예린을 보니, 가여웁다는 생각에 더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진주야. 웬일이야?"

"좋은거 갖고왔지!"


좋아하는 호가든 맥주를 양손 가득 든 진주를 보자 박수까지 쳐가며 좋아하는 혜리였다.


"오늘 호가든 딱 땅겼는데!!"

"내가 니 마음 읽는 도사잖냐."

"들어오십쇼~"


둘이 앉아 감자칩을 오물거리며 맥주를 한병씩 들고 영화채널을 틀었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것만 같아 혜리는 기뻣다.


"둘이 고등학교때 자주 이랫지?"

"그러게. 우리 둘 다 오방 삭아보여서 술사는데 민증검사 안하고."

"하하하하"

"있지 혜리야."


시작하던 영화에서 시선을 돌린 혜리는 진주의 심각한 얼굴에서 무언가 중요한 말이 나올것을 짐작했다.


"무슨일이야?"

"선우랑 예린이, 둘이 좋아서 사귀는거 아닌거...알아?"

"그래? 하긴 선우가 더 좋아해보이긴 했어. 왜, 예린이 이상한애란 소문이라도 들은거야? 착하던데?"

"예린이 선우 좋아서 사귀는거 아냐. 걔 목에랑 손목에 멍자국 봤어?"

"하하하, 얘두? 남자랑 하다봄 그런거야 당근 생길수도 있지."

"선우가 예린이한테 약먹이고 비디오찍은걸로 협박해서 지금 계속 붙들려있어. 예린이한테 직접 들은거야."


한 5초간, 사고회로가 정지된듯이 스톱모션으로 굳어있던 혜리가 고개를 도리질쳤다.


"무슨 헛소리야!"

"너도 알거야. 걔들 나쁜짓 뒤로 하고 다니는거."

"하지만 그정돈 아냐!"

"우린 걔들을 다 몰라. 유성이도 너랑 사귀면서 애들이랑 진효여고 나대던 애 혼낸다고 다같이..."

"그만! 그만해."


과거의 상처가 드러나자 혜리가 인상을쓰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 만약에 선우가 예린이 그걸로 약점 쥐고 사귄대도 증거도 없고..."

"선우 방에 증거가 있을거야. 그런물건 절대 자기곁에서 떨어트려둘 애가 아냐."

".......어떻게하려고."


이미 마음을 정한 진주를 아는 혜리가 계획을 물었다.


"선우 11일에 엄마 모시러 공항으로 갈거야. 3시에 출발하면 출발하는거 확인하고 집에 들어가서 뒤지려고."

"너 미쳤어!! 기억 안나, 선우네 미친개!! 우리 다 죽이려고 날뛰던 그 무서운 개!!"

"누가 현관으로 들어간데? 선우네 세콤 깔렸는데. 왜 선우가 고등학교때 집에다가 열쇠 두고왔다고 차고 위 담장으로 걸어서 지 방까지

들어갔던거 기억해? 거긴 세콤도 안깔려서 경보도 안울린다고 지가 지 입으로 말했잖아. 너도 나랑 같이있었어. 기억나지?"


너무 좁은 담장을 중심을 잡고 걷는 선우를 조마조마하며 바라보던것을 기억해낸 혜리가 고개 다시한번 도리질쳤다.


"안돼! 너무 위험해!!!"

"그럼 저렇게 붙들려서 점점 야위어가는애 바라보고만 있으라고? 예린이 자살이라도 하면?"


마음씨 착한 혜리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가 우선이었다.


"어, 어쨋든 안돼!"

"너 전에 나한테 말한적 있지, 갱한테 붙들려서 자살하려고 했을때 목숨걸고 너 구해준 사람 있다고."


혜리의 눈이 흐려졌다.


"나 좀 도와줘. 너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받은적이 있다면 이럴때 다른사람 도움으로써 갚는거야."

"......"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자마자 아버지 사업때문에 호주로 이민가게된 혜리는 주니어하이(중학교)에 진급한 뒤로도 학교와 친구들에


적응을 못하고 겉돌았다. 딱히 따돌림을 당하는것은 아니었지만 이렇다 할 친구가 없고 부모님은 일때문에 바빠 방과후면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녀. 갱스터의 똘마니이던 학교 상급생들과 가까워진것은 이때부터였다.


그중 보스격인 남자애가 그녀를 좋아했고 열넷이 되던 해 연인이 된 그에게 혜리는 자신의 첫키스와 첫경험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윗선에 공급할 물건에 손을대는 잘못을 저질러 같이 그의 집에 있던 그녀와 함께 갱들 앞으로 끌려갔다.


"....Kill him."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남자친구는 머리 반쪽이 날아가며 시체가 되었다.


"꺄아악, 니이이익!! 닉!! 아악, 놔 이 개새씨*놈들아!!!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손이 묶인채로도 기어가려하는 그녀를 본 갱들은 15살이라기엔 성숙한 그녀의


늘씬하게 빠진 몸매를 눈으로 훑어내며 음흉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왜이래, 이거 놔, 아악!!"


악을 쓰며 발버둥치는 그녀의 뺨을 솥뚜껑같은 손으로 때리고 옷을 찟어낸 뒤 돌아가며 그녀를 범한 그들.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그녀를 범하지 않았던, 그중 제일 어리던 남자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껴 몰래 그녀를 도망시켰다.


그녀가 갱과 마약에 관련된것을 알게된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신변을 걱정해 그녀만 한국으로 피신을 시켰고, 결국 혜리는


아픈 기억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었다.

 


"...그래. 도와주자. 내가 뭘...하면 되는데?"

 


어두운 방안에는 두사람의 뜨거운 숨결만이 오고갔다. 그녀의 위에서 가슴에 입을 맞추어가며 끊임없이 그녀의 안으로 돌진하는 선우.


"사랑해 예린아, 아아, 너무 좋아..."

"흣, 이, 이제 그만..."

"안돼. 내일이면 너 집으로 가는걸. 오늘은 절대 놓아주지 않을거야."

"하앗, 아윽!"

"느낀다고 말하면 좀쉬게해줄께."

"느, 느껴요..."


그녀의 떨림으로 절정을 짐작한 그가 동작을 조금 느리게 하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후우... 뭐 좀 마실래?"

"....물요."

"알았어."


오늘 벌써 2시간째이지만 전혀 지치지 않는 그. 지난 2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예린에게 덤비는 선우때문에 예린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힘없이 풀린 다리때문에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기운 없어? 뭐 먹을래?"

"아뇨..."


입맛이 없어 무얼 먹어도 많이 먹을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거워서였다.


"자, 입 열어."

"......?"


입을 열자 그가 달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쇼콜라를 입에 넣었다.


"맛있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슬퍼보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가 곁에만 있어준다면 그에게 그런건 상관없었다.


"이리와."


그가 쇼콜라가 아직 남은 그녀의 입에 진하게 키스를 하며 그녀를 품에 안고 누웠다.


목의 멍은 사라졌고 몇개 남은 키스마크도 희미해지고있었다.


"내일 엄마 오시지? 우리엄마도 내일 모레 오셔. 오시면 같이 밥먹을까? 시간 정해서 연락줄께."

"......"


진주언니가 선우가 숨긴 DVD를 어떻게든 찾아준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이미 새 학교와 새 집 주소까지 알아내고 핸드폰에


추적장치까지 붙인 남자인데, 그 비디오가 없다고 해서 자신을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다.


아니, 잡아다가 또 찍을지도 모르는 남자이다.


"무슨생각해?"

"....아무것두요."

"아무것도?"

"....네."


난 니 옆에 있으면서도 니생각뿐이야. 선우는 이말을 삼키며 서운한 마음에 그녀를 또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 잠시 쉬기로..."

"쉬는거 이제 그만하지, 우리 시간도 없는데?"


그가 가슴의 봉우리를 물고 혀로 간질이자 그녀가 시트를 휘어잡았다.


"하읏!"

"느끼지?"

"싫어..."

"느끼면서 왜 싫다는거야?"

"그만해요, 오빠, 저 정말 기운이 하나도..."

"넌 가만 있기만 하면 돼."


계속되는 그의 애무에 민감해진 그녀의 몸을 느낀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구를 더듬었다.


"이렇게 젓은 주제에... 음탕한 여자처럼..."

"싫어, 흐흑...."


그의 심술에 결국 그녀가 눈물을 보이자 악마처럼 웃으며 그가 아랫쪽으로 입술을 옮겼다.


"너무 좋다고, 지금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말하기 전엔 절대 안멈출거야."

"아, 안돼! 아앗!!!"


그녀의 그곳을 손가락으로 희롱하며 민감한 부위를 핥아대자 그녀는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흘렸다.


"조, 좋아요, 제발 그만!! 흐흑, 제발, 그만!"

"뭔가 빠졌는데?"

"느, 느껴요.. 오...오르가즘, 느껴요 오빠, 제발, 그만..."


아쉬운 표정으로 멈추며 그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 그만하기로 했잖아요...오빠..."

"내가? 아, 입으로 하는것만 멈추기로 한거지."

"거, 거짓말쟁이...아앗!!"


그가 미끌거리는 그녀의 좁은 틈으로 또다시 파고들었다.


"하아, 역시, 너 느낀담에 넣으면 어떤지 알아?"

"흐흑....하아,"

"니가...날 막 빨아당겨... 조이면서..."

"싫어..."

"입으로는 싫다면서 아래론 날 빨아들인다고... 이 색녀..."


그대로 새벽까지, 그에게 잠도 못자고 시달린 그녀는 4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기운이 빠진 그에게서 벗어났다.


샤워실에서 그의 손길을 씻어내며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진주언니... 주연아... 엄마... 흐흐흑... 누구라도... 도와줘..."


-10-

 

예린의 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히고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길. 선우는 착찹한 심정을 감출수가 없었다.


2주일동안 붙어지내고 나니 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집에 돌려보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그녀다. 1년만 지나면...생각을 하는 선우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대학생 되면 혼자 살 생각 있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예린을 보며 선우가 씨익 웃었다.


"뭐, MT다 뭐다 해서 핑계 댈 거리 많아지니까. 괜찮을거야."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대답을 대신 한 예린이 창 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아무말이 없었다. 선우는 운전 내내 오른손으로


예린의 왼손을 잡고선 틈이 날때마다 손등에 뽀뽀를 했다.


"다 왔다."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예린.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가야해요."

"전화받어. 못받는 상황이면 문자 1분 안에 보내. 안그럼 어디던지 찾아갈거야."

"....네."


기운없이 대답한 예린이 내려 공항으로 들어갔다. 예린은 자신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선우를 느끼며 도망치듯 서둘렀다.


"엄마!!"

"예린아, 생각보다 비행기가 일찍 도착했어. 근데... 너 왜이리 말랐어? 2주동안 밥도 안챙겨먹은거야?"

"....엄마가 없으니까 밥도 맛이 없더라."

"기집애 아직도 애기야 나 없다고 밥도 안먹구. 얼른 나가자, 엄마가 맛있는거 사줄께."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오며, 예린은 아직도 선우가 어딘가에 숨어 지켜볼것만 같아 불안했다.

 


-예린아. 전화 받을 수 있어?

"진주언니, 저 집이예요."

-엄마는 잘 돌아오셨구?

"네에."

-잠시 나올래? 너희집 삼#아파트지?

"네."


집 앞으로 나간 예린은 손을 번쩍 들어보이는 진주와 빨간 스포츠카에 앉아있는 혜리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내일 우리 선우네 가서 니거 DVD 찾아올거야. 혜리가 나 운전해서 데려다줄거고."

"....너무 위험해요 언니."

"걱정 마. 암튼 내일 선우가 전화하거나 하면 무조건 모르는일인거야."

"네, 언니."


예린의 손목에 팔찌를 본 진주가 살짝 예린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리구... 저기, 이거 나 주면 안될까? 커플팔찌라서 선우한테 주려고. 내가 만든거라 떨어져있게 하기 싫어서."

"아! 네... 여기요 언니."


크리스마스 이후로 무의식중에 안풀고 하고있던 팔찌를 그제서야 인지한듯, 예린은 팔찌를 건네주었다.


"고마워."

"아니예요 언니."

"그럼 내일 저녁에 문자할께."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는것이 될줄 모르는 진주와 예린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다음날, 2시 50분부터 선우의 집 앞에서 잠복을 하던 두 여자는 선우의 차가 차고에서 나와 사라지자 집 앞에 주차를 했다.


"개는 자나봐. 조심해?"

"나 알잖아. 몸 날랜거. 중고등학교 6년 계주선수 출신 나진주!"

"하하, 암튼."


진주가 심호흡 후 펄쩍 뛰어 담을 잡은 뒤 반동을 이용해 올라갔다.


화이팅을 입모양으로만 한 혜리는 조마조마 해가며 좁은 담을 걸어서 선우 방 창문까지 가는 진주를 바라보았다.


울리는 진동에 진주의 전화를 받은 혜리는 과연 선우가 어디에 그것을 두었을까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혹시 액자같은거 뒤에 끼운거 아냐?"

"아닐걸. 그 성격에."

"책같은거 틈이나."

"아, 그럴수도 있겟네."


책틈을 뒤지던 진주는 노트북에 시선을 던졌다.


"....노트북 CD넣는데 열어볼까?"

"그래!"


노트북 CD의 버튼을 누르자, 안에 하얀 DVD가 한장 들어있었다.


"한장 있는데 타이틀이 없어."

"플레이 해봐."


노트북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쏟아져나오는 예린과 선우의 정사에 진주는 숨을 흡, 들이켰다.


동영상의 소리를 듣고 짐작한 혜리가 굳은 진주를 눈치채고 얼른 지시를 내렸다.


"....맞구나, 얼른 가지고 나와 진주야!"

"응"


전화를 끊고 떨리는 손으로 시디를 주머니에 넣은 진주는 창문으로 나와 다시 좁은 담장위를 걷기 시작했다.


무사히 도착해 일단 혜리에게 시디를 건네고 담장 아래로 내려가려던 진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전화. 나 전화 두고왔다."

"어디에?! 방에?!"

"응."

"미쳤어!!"

"다시 갔다올께."

"아휴, 나진주!!"


다시 뒤돌던 진주는 잠에서 깬 달마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으르르르르르르르"

"개 깻다."

"진주야, 가지 마!"

"그럼 강선우가 내 폰 보고 내짓인거 다 알텐데?"


2미터 담장 위를 조심조심 걷는 진주. 개는 목줄에 묶인채 거품까지 내뱉어가며 미친듯이 짓어댓다.


뚝, 덩치 큰 달마시안의 몸부림을 견디다가 못한 목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진주쪽으로 돌진한 달마시안이 점프를 했다. 진주의 발목을 물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벨런스를 무너트리기엔 충분했다.


"어, 어어..."


허우적, 개의 돌발에 놀랐던 진주가 담장 아래로 털썩 중심을 잃고 떨어지고 말았다.


"끼악, 진주야!!"


순간 혜리의 머릿속에 선우 집 근처에 사는 태윤이 떠올랐다. 태윤의 단축번호를 누르는동안 개는 진주의 다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집에서 샤워 후 놀러온 재규와 비디오게임중이던 태윤은 다급한 혜리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야, 무슨소리야??"

-얼른 선우네로 와 진주 죽어!!


선우라면 어머니 모시러 공항에 갔을텐데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어쨋든 두사람은 서둘러 선우네로 향했다.


진주의 다리를 물어뜻어 뼈가 다 드러나게 해놓은 달마시안이 이번에는 진주가 얼굴을 감싼 팔을 물어뜻었다. 밖에서 지켜보며


울부짓는 혜리의 모습에 지나가던 피자배달원이 멈춰서 119를 불러주었다.


"으아앙....진주야, 진주야, 누, 누가 좀... 누가 좀..."


혜리는 절박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조용한 주택가라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르르르, 크앙!"

"아악-----"


개가 물어뜻은 팔의 힘줄이 끊어진건지 움직이지 않았다.


물어뜻긴 팔로 감싸지 못한 목을 결국 잔인하게 물어뜻은 달마시안. 진주는 손목의 팔찌를 보며 선우를 떠올렸다.


'그래도...나 마지막에 너랑 같은 팔찌를 하고 죽는구나.'


진주의 눈앞이 새까매졌다.

 


공항에서 엄마와 권교수님(엄마의 새남편)을 모시고 집으로 오던 선우는 집에 가까워질수록 커져가는 사이렌 소리에 왜인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집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구급차와 경찰. 테이프가 쳐진 정원. 그리고 열려있는 문.


"무슨일이죠?"

"집 주인 되십니까?"

"네."

"저기... 여떤 여성분이 자택에 무단으로 침입하시려다가 개에 물려 사망했습니다."

"네에?!"

"개는 워낙에 사나워 안락사를 시킬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일이니 선우야. 응?"


엄마가 권교수의 품에서 놀라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선우는 '어떤여성분...'이란 말에 단 한사람뿐이 떠올릴수가 없었다.


"제가 아는사람인지 신원을 확인해도 될까요."

"네, 사건청취를 해야하니 후에 경찰서로도 동행 부탁드립니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선우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예린일것이다. 바보같은 여자. 나에게서 벗어나려 시디를 찾으러 왔다가 죽은것이다.


병원에 도착한 그를 안내한 의사는 흰 시트로 덮인 긴 몸을 보여주었다.


"....아직 닦지 못해서 핏자국이 좀 남았을텐데."

"괜찮습니다."


예린이라기엔 너무 길다. 선우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시트를 걷자 보이는 빨간 머리칼. 상처투성이 얼굴... 다친 얼굴이지만 여전히 미인이다.


선우의 눈에서 투툭,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누군지 아시는 분입니까?"

"제 전 여자친구입니다."

"인적사항좀..."

"이름은 나진주, 주소는..."


선우의 눈물에 의사가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를 했다.


하지만 선우의 눈물이 시신이 예린이 아닌데에 대한 안도감의 표현인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태윤과 재규는 아직도 덜덜 떠는 혜리를 달래고 있었다. 두사람이 갔을때는 이미 너무 늦어 숨을 거둔것이 분명했던 진주.


경찰차가 오는 소리에 태윤이 복잡해지는것을 피하기 위해 혜리를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


"무슨일이야, 왜 진주 거기 들어간거고."

"....예린이 만나야해."

"뭐?!"

"예린이. 만나야해."

"왜?"

"진주... 이것때문에... 흐흑..."

"너 왜이래? 미쳤어?"

"다... 다 니들 때문이야! 니들이 나쁜짓만 안하고 다녔어도, 이런일 없었어!"

"진정해봐. 혜리야!"

"흐흑...선우가 예린이 비디오로 찍었대서 진주가 그거 찾아서 예린이 주려다 죽은거야. 알아?"


두 남자는 서로를 벙하니 바라보다 혜리를 쳐다보았다.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니들도 몰랐던거야? 하하, 강선우 개*끼..."

"근데 왜 진주가 그걸..."

"예린이가 불쌍하고 지가 좋아하는 선우가 싱글로 돌아오길 바란거지, 바보. 바보같은 나진주..."

"그래서, 찾았어?"

"어. 다 와서 시디는 나한테 주고, 진주가 핸드폰 방에 두고와서 돌아가려다가 떨어진거야."

"그 미친개..."

"예린이 만나야해. 이 시디에서 모든게 시작된거니까 이 시디 끝내야지. 당사자 손으로."

"그런다음엔?"

"....나 호주에서 여기로 도망온거 알지?"

"응..."

"이젠, 여기서 호주로 갈 차례야."

"왜?"

"너무 큰 죄를 저질렀어. 친구가 죽어가는데 도와주지 못한 죄."


전에 남자친구가 눈앞에서 죽을때도, 친구가 개에 물려 죽을때도. 아무 도움조차 주지 못한 혜리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여기."


창백할대로 창백한 얼굴의 혜리가 재규의 차에서 내려 예린에게 시디를 건네었다.


"진주 목숨이랑 바꾼거야. 가치가 있기를 바래."

"....? 네?"

"진주 선우네 개에 물려 죽었어 오늘."

"무슨..."

"아마 뉴스에도 나올거야 워낙 큰 일이니까. 나 곧 호주로 가니까 앞으로 볼일은 없겟네."


뒤돌아서 차에 탄 혜리가 사라지고 예린은 떨리는 손으로 시디를 바라보았다.


파창, 시디를 깬 뒤 발로 밟고 밟아 조각조각을 낸 예린은 혜리가 한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오늘 낮 3시반경, 전 남자친구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려던 20세 여성이 개에 물려 숨지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숨진 20세 나모양은 고교시절 남자친구였던 친구 20세 강모군의 집에 들어가려..."


가물가물하다 눈앞이...생각하며 예린은 티브이 앞에 서있다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영양실조에 빈혈에. 엄마가 맘대로 집도 못비워. 담부턴 할머니 와계시게 할거야."

"응 엄마."

"링겔 아프지? 난 이거 너 낳을때 맞는데 간호원이 얼마나 핏줄을 못찾아 헤메던지."

"아팟겟다."

"그래서 엄마 주사바늘 공포증 생겼잖아."


빙긋 웃어보이는 예린. 하지만 얼굴 가득한 슬픔에 엄마는 마음이 안좋았다.


"엄마 옆에 있는데두 왜이리 기운 없어 우리딸?"

"아냐. 몸 좀 나아지면 얼른 가서 피아노 쳐야지."

"이리와."


따뜻히 안아주는 엄마의 품 안에서도, 예린은 시원히 웃던 진주의 얼굴을 지울수가 없었다.


'미안해....언니....'

 

"이게 무슨일이냐! 또 하필임 니네 엄마 돌아오신 날에!"


울며불며 애가 뉴스에 나왔다고 큰일이라고 난리친 엄마 덕에 미국에서 급히 귀국한 아버지는 오랫만에 마주하는 아들과


전 부인,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 넷이 어색한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 친구가 제게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몰랐어요."

"그애가 이상한거지 니 잘못이 아냐. 하지만 주위가 좀 시끄럽겟구나."

"....일단 학교에 휴학 신청 하고 나가자. 미국에서 반년만 있으면 조용히질거야."

"반년으로 안돼요 선우아빠. 1년은 있어야지 사람들이 조용해지지."

"아, 아니면 너네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 신청하는것은 어떻겟니?"


선우의 학교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있는 권교수의 말에 선우의 부모는 찬성했다.


"캐나다 토론토 York 대학에 1년짜리 비지니스 과정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으니 그거면 딱일거야."

"정말 잘됐네 거기서 학위도 따고, 한국 조용해질동안에."

"그래. 아버지랑도 멀지 않으니 가끔 주말에 놀러오기도 좋고."


선우역시 몰려든 기자의 행열과 이웃의 시선에 질린터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복잡한 일들때문에 예린에게 전화도 못한 선우는 집에 돌아와 책상을 치우다가 진주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잠깐. 그러면... 집에 들어오려다가 담장에서 떨어진게 아니라 집에서 나가다가 떨어진거야?!'


냉랭하게 굳은 표정의 그가 다급히 노트북으로 다가섰다. 절대 유출되면 안되는 시디가 들어있어야 하는 노트북.


하지만 노트북의 시디란은 텅 비어있었다.


'그럼 진주가 시디를 가지고 갔다고? 왜? 설마... 예린이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자주 화장실을 같이갔던 그 둘. 아직 자신에게 미련이 있는듯 하던 진주가 혹시 예린을 싫어할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가까이 지내는듯 해 안심했던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냐, 그래도 그런것까지 친하지도 않은 진주에게 말을 하진 않았을거야.'


진주의 핸드폰을 열은 그는 문자란에서 예린과 진주사이의 문자를 읽었다. 그의 손이 떨려왔다.


'나진주 이 나쁜년... 죽어 마땅한년. 나랑 친구로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예린이 편을 들어? 그리고 안예린... 진주한테

그런것까지 말을 해서, 이런 일이 나게 만들어?! 내게서 그렇게까지... 벗어나고 싶던거야?!'


비틀, 그는 쓰러질것만 같아 침대에 누웠다. 어차피 1년간 나가있기로 결정난것. 이참에 그녀를 잊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 그래. 안예린. 내가 너에게 주는 기회야. 1년간 떨어진 후에도 내가 널 원한다면...'


뿌득... 진주의 핸드폰을 부러트리며 그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땐 널 절대 놓아주지 않겟어.'

 


혜리언니가 마지막으로 예린에게 보낸 문자에는 선우가 부모님 뜻에 따라 토론토로 1년간 유학가게 되었으니 안심하라고 써져있었다.


1년이라. 그러면 고3동안에는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것인가.


"예린아, 자, 니차례야."


어딘지 모르게 겨울동안 성숙해진 예린의 연주를 들으며 예린의 교수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프롤로그-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교문을 나서며 예린은 학교를 뒤돌아보았다.

 

마지막날이라 장난을 친 친구들덕에 밀가루투성이가 된 교복.


그래도 오늘 이후론 입을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 시원섭섭 했다.

 

겨우 1년 몇개월을 다녔을뿐인 예고, 친절했던 친구들(수연언니에게 부탁받은) 덕에 무난히 학교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원하던 학교에 수시로 합격을 한 예린을 질투하는아이들도 많았지만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분위기는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예린아!”

“주연아. 수연언니.”

“이런날 하필이면 출장길에서 폭설때문에 못돌아오실게 뭐래니? 니네 엄마두 속이 타실거다.”

“하하하. 난 괜찮은데. 울엄마뿐 아니라 북미 라인이 다 그렇대.”

“여기 꽃다발. 너 좋아하는 아이리스.”

“와, 예쁘다… 고마워 언니. 언니뿐이 없다.”

“난 좀 실용적인거. 자.”

 

주연이 슥, 내밀은 작은 상자에는 DKNY의 심플한 손목시계가 들어있었다.

 

“이런 비싼걸…”

“울 아빠 출장길에 면세서 사다주라고 부탁한거라 사실 돈은 안들었어.”

“울아빠가 너 이뻐하는거 알지? 우리집 막내가 너잖아 예린아.”

“어, 그럼 나 주연이 동생 되는거야?”

“키로 따지면 내가 맏이인데.”(주연)

“요게 언니한테 까불고있어?”(수연)

 

주위사람들은 눈에 뜨이는 세사람- 큰 키에 여성스러워지기 시작한 주연과 청순한 수연, 귀여운 예린- 을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암튼 이제 수연언니 후배네?”

“응, 너두 자주 놀러와… 자취생활 힘들겟다 주연아.”

 

나란히 수연이 재학중인 Y대에 합격한 주연과 예린.


하지만 주연의 과는 원주캠퍼스에 위치해 집에서 독립생활을 하게된 주연이었다.

 

“집은 둘러봤어? 내가 자주 놀러갈께.”

“언니 차 얻어타구와.”

“그 말은 나도 자주 오란 소리렷다? 이 언니는 바쁜몸이시라구~”

“아 그럼 예린이 얼른 운전면허 따라. 언니차 몰고와.”

“이게?!”

 

수연과 주연이 투닥거리는것을 보며 예린은 깔깔 밝게 웃었다.


 

 

 

“엄마!”

“우리딸!”

공항에 마중나온 딸을 끌어안으며 졸업식에도 참여 못해준게 미안해 예린의 엄마는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미안해 우리딸…”

“아냐, 무사히 잘 돌아왔으니까 괜찮아.”

 

미국시장에 진출을 시작한 예림전자는 처음 6개월간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해서


한달에 2주일은 미국 지사에 출장을 나가야 하는 예린의 엄마, 방여사였다.

 

남편이 남긴 사업을 물려받아 많은 거래처가 여자와는 사업을 안한다며 거래를 끊었을때 진출하게된 미국,


그리고 그 사업을 도와준 고마운 미국 리테일업체의 강사장…


처음에는 단순한 사업 파트너였던 두사람은 그녀가 미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점점 가까워져, 지금은 연인이 된지


반년이 다 되어갔다.

 

“기억하지? 저번에 한번 뵌 강사장 아저씨. 아저씨 아녔음 엄마 아직도 미국에 있었을거야. 티켓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니까.”

“안녕하세요.”

 

예린은 강사장과 엄마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임을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서로 챙겨주기 바쁜 두사람을 보며, 만에 하나 엄마가 재혼한다고 해도 반대할 의사가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2년이 채 안되긴 했지만, 그간 심장이 안좋은 아빠의 병수발에 힘들던 엄마,그리고 돌아가신 뒤


사업을 물려받아 힘들어하던 그녀를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수연언니랑 주연이가 졸업식에 왔는데 다들 주연이 쳐다보느라…”

“아직도 꽃미남 분위기가 나니 주연이는?”

“이젠 좀 덜한데. 그래두 걔 분위기가 좀 묘하잖아 엄마.”

“가슴은 좀 생겼니? 주연이 유난히 절벽이잖아.”

“엄만 강사장님 앞에서!”

“아차, 하하…”

“전 괜찮습니다.”

 

자식뻘인 자신에게 처음만난날에도 꼬박꼬박 존대말을 쓰던 강사장을 좋게 보고있던 예린은 다른사람들 눈에는


자기들이 평범한 사이좋은 가족으로 보일거란 생각에 웬지 쑥쓰러웠다.

 

“아저씨, 저한테 말 놓으세요. 저 너무 어색해요.”

“그래, 성훈씨.”

 

그제야 크흠, 하며 예린에게 ‘짐은 내가 다 드마. 이리 줘.’ 하고는 붉어진 얼굴로 택시로 가는 강성훈.

 

풋, 쑥스러움을 타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두 여자는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야, 여기야 여기!”

“강선우!”

 

2시간여 후. 공항의 게이트로 몰려든 세 남자는 선우가 모습을 나타내자 흥분해 손을 흔들어댓다.

 

“…왔냐.”

“이자식, 진짜 오랫만이다!”

“연락도 자주 안하고 나쁜놈!”

“전화는 왜이리 안받아!”

 

세사람의 투정을 나른한 미소로 받아치며 선우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오늘 일정은?”

“안피곤해?”

“1년만의 서울이라.”

 

선우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싱긋 친구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한번 뒤집어놔야지.”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네 남자는 차의 창문을 열고 아우~! 소리를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일로 모이는거래?”

 

스키부의 일원인 수연은 신입생 모집회를 앞두고 예린을 꼬셔 들게 할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녀가 속한 스키부는 산입생들의 지원서를 받아 그중 추려내는데, 그 기준이 재력과 외모인 것으로 유명했다.

 

어찌되었던 수연도 잘사는 집의 조금은 철없는 아가씨라 잘난사람끼리의 모임을 싫어하지 않았다.

 

“강선우라고 너도 소문들어서 알고있지?”

“아, 나 입학하기 직전에 유학간 선배?”

“응. 그선배 돌아왔대. 태윤선배랑 유성선배 기분 무지 좋더라. 오늘 환영회한대.”

 

학교안에서만큼은 좋은 선배의 가면을 쓴 태윤과 유성. 학교 밖에서는 플레이보이로 악명을 떨치는 그들이었지만,

 

학교 안에서만큼은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착한남자의 가면을 쓰고 다녔다.

 

학교가 다른 재규가 학교안에서 함부로 이여자 저여자 건드렸다가 교수에게까지 찍히는것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근데 그사람 그렇게 멋져?”

“응. 완전 반듯하게 잘생겼어. 사진 못봤어? 저기 벽에 봐봐.”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는 수연으로선 딱히 끌리지 않았지만, 정말 괜찮은 남자라면 예린에게 소개시킬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와, 진짜 잘생겼네. 유성선배나 태윤선배보다 낫다.”

“그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연은 선우를 예린에게 소개시키고 싶어졌다.

 

 

 

입학식 직후, 여대생답게 굽이 살짝 있는 구두와 플레어스커트에 여성스런 카디건을 입은 예린이 수연을 찾기위해


스키부의 부실문을 노크했다.

 

“저기, 여기 이수연언니 찾으러 왔는데요.”

“응? 들어와 일단.”

 

귀여운 예린의 얼굴에 호감을 가진 여자부원은 일단 예린을 들어오라 했다.

 

“귀엽네. 신입생? 수연이랑 아는사이야?”

“네, 친구 언니구… 고등학교 선배세요.”

“무슨과니?”

“피아노요.”

“아, 어쩐지. 난 지희야. 양지희.”

“저는 안예린이예요.”

“수연이가 얘기한 귀여운 동생이 넌가보구나.”

“네?”

“이번에 지가 아는 귀여운 동생 입학한다구 우리 부에 들게한다고 들떳거든.”

“아…네.”

“여기 일단 입부서야.”

 

이 부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희가 시키는대로 입부서를 작성한 예린은 얼결에 처음본 지희에게 끌려서


점심을 같이하러 가고 있었다.

 

“지희언니! 예린아! 어디가?”

“수연아!”

“언니!!”

“예린이 너 부실로 오랫더니…”

“너가 늦게와서 내가 밥먹일라고 데리고 나가는 중이었어. 너도 같이가자.”

“언니가 쏘는거? 아싸!”

 

수연이 밝게 웃으며 두사람 사이로 팔짱을 꼈다.

 

 

세사람이 식당으로 향하는것을 멀리서 바라보던 선우는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역시. 끊지 못할 인연이야.”

“응? 뭐가?”

“아냐. 태윤아. 가자.”

 

태윤과 선우가 탄 차는 세사람을 지나쳐 교문으로 향했다.


-2부 1-

 

"자, 우리 스키부의 히어로, 강선우의 귀국과 복학을 축하하며, 위하여!"

"위!하!여!"


스키부 전통 방식의 건배를 한 아이들이 선배의 선창에 맞추어 큰 목소리로 외친 뒤 술을 원샷했다.


수연은 예린이 '엄마랑 강사장님 만나야한다' 며 가버려 이 모임에 못데리고온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긴, 강성훈 사장님 소문에 오래전에 이혼하고 혼자사신댓구, 예린네 엄마두 상처한 과부인데. 두사람 잘 됐음 좋겟네.'


맥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은 힐끗 선우쪽을 곁눈질 하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싱긋, 해맑게 웃어보이는 선우의 미소에 1년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수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예린일 데려왔어야했어!'


속으로 중얼거리는 수연의 테이블로 맥주잔을 든 강선우가 다가왔다.


"오랫만이야, 지희누나. 이 친구들은 지금 2학년?"

"응. 인사해. 여긴 이수연, 음악과 바이올린 전공이고, 저기는 신방과 구세민이고...."


지희의 설명이 이어지며 다들 인상좋은 선우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에 Toronto York University에서 Schulich 비즈니스 스쿨 일년간 교환학생으로 있다가 온 강선우라고해. 복학하면 이중 몇

친구들은 나랑 같이 수업들을지도 모르겟네. 친하게 잘 지내자. 나한테 잘보이면 밥도 잘사준다?"


선우의 말에 다같이 웃으며 건배를 하는 아이들.


이 날, 수연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성격 좋고 잘생긴 강선우라는 선배에게 매료되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 술을 마실거라 집에 차를 두고 온 수연은 택시를 기다리다가 '빵빵' 하는 경적에 돌아보았다.


"나 대리시켜서 가는데, 집 어디니? 데려다줄까?"


선우가 매끈한 외제차의 앞창문을 열고 웃어보인다.


"진짜요?"

"응, 타. 집 어디니?"

"강남요."

"나도. 난 서초. 같이가면 되겟네. 기사님, 추가금액 드릴테니까 부탁드립니다."


안그래도 밤늦게 택시타기 불안했던 수연은 얼른 뒷좌석에 올라탔다.


"앞으로 집에갈때 선배들한테 데려다달라고 그래."

"차 있는 선배들은 다들 먼저 가거나 너무 늦게까지 노셔서요."

"이제 집 같은쪽인거 알았으니까 내 차 얻어타, 난 항상 대리 부르거든. 어, 지희네? 지희야!! 너두 강남이지?"


선우가 다시 앞 창문을 열고 지희를 불러 데려다준다고 태웠다.


수연의 마음속에서 선우에 대한 포인트는 100점을 향해 플러스되고 있었다.

 


"그런데 수연언니, 나 스키 잘 못타는거 언니두 알잖아."

"언니가 다 가르친대두."

"힝..."

"암튼, 오늘 신입생 환영회는 절대 빠지면 안돼. 선배중에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 있는데 완전 멋지다구!"

"그래?"

"응. 내가 남자친구만 없으면 정말 그냥 확 데쉬하고싶은데, 아까워라!"

"언니두~"

"암튼. 오늘 꼭 와. 진짜 진짜 멋져."

"알았어 알았어."

"선우선배옆에 앉혀줄테니까 말 많이 걸구 그래. 아니, 얌전한애 좋아할래나?"


순간, 예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그사람 이름, 선우야?"

"응. 강선우."


더더욱 하얗게 질린 얼굴의 예린을 보며 수연은 깜짝 놀랐다.


"어머, 너 체한거 아냐? 얼굴 급 하얘..."

"응 괜찮아."


강선우라는 이름이 설마 하나인것도 아닐텐데. 예린은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아무리 악연이라지만 설마 자신이 거미줄에


달려드는 나비마냥 그가 다니는 학교로 진학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 나 강의시간이다."

"나두. 언니가 있다가 데리러갈께."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수연. 예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가 끝난 후 예린과 그 외 스키부 신입부원들은 스키부 부원들이 렌트한 술집으로 향했다.


작지만 고급스런 인테리어의 술집에 집결한 남자여섯, 여자 여섯의 신입부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10학번 신방과 백장미 입니다! 스키탄지는 15년이 다 되어가고 중학교 아마추어 선수권 은메달 경력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10학번 경영학과 곽준영입니다! 작년 스노우보드 챔피온쉽 고교부......"


신입생들이 자기소개를 하는데도 뒤돌아 앉은 선우와 태윤, 유성. 신입생에 정신이 팔린 선배들을 그런 그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희는 그런 세사람을 바라보며 이상한 마음에 신입생을 보라 눈치를 줬다.


"10학번 음악학부 피아노과 안예린입니다. 사실 스키 초보중 초보입니다. 배우고싶어 들어왔으니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수줍은듯 얼굴을 붉혀가며 소개를 끝낸 예린은 선배들을 돌아보다가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강선우. 김유성. 박태윤. 세사람이 예린이 소개를 시작함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예린의 다음아이가 소개를 시작해 선배들의 주의는 그 아이로 돌아가서 아무도 예린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자 그럼 올 한해도 즐겁게 보냅시다! 신입생을 환영하는 의미로 다같이 박수!!"


박수소리가 쏟아졋지만 예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선우와 그 일행 모두 분명 예린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다른 후배들에게 더 관심이 있는듯 보였다.


"자, 앉아. 후배들 테이블당 3명씩 들어가서 앉고, 30분마다 다른테이블로 이동하면서 선배들 얼굴 익히는거야."


선배 여럿이 앉은 4 테이블에 3명씩 들어가서 다시 자기소개를 하고 술을 받아마시는 것은 스키부의 전통이었다.


첫테이블때는 멀쩡하지만 마지막인 4번째 테이블 즈음에는 정신없이 취해 기절하기 마련인, 혹독한 연례행사이기도 했다.


예린은 긴장해 뻗뻗히 굳은채 첫번째 테이블로 들어갔다. 순서대로면 3번째 테이블에 선우와 그 친구들이 앉아있었다.


"귀엽네, 예린이라구? 피부봐, 애기야 애기~ 이 언니두 니 나이땐!"

"웃기시네, 니 신입생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내가 있는데. 예린이처럼 피부 좋은적은 한번도 없네요. 으아악!!"

"또 꼬집히기 싫으면 입조심해!"


하하하하...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눈치를 살피며 점점 초조해진 예린. 술을 많이 받아마셨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취하지도


않았다. 그런 예린을 보고 선배들은 '보기보다 술 잘하네'라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드디어 세번째 테이블. 앞의 두 테이블에서 술을 많이 얻어먹은 다른 두 신입생은 얼굴이 붉어지고 촛점이 흐려진 상태였지만


창백한 얼굴의 예린은 멀쩡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집중적으로 술을 부어주는 선배들.


"자, 마셔! 전 테이블에서 많이 안줬나봐?"

"쭉쭉!!"


예린과 다른 신입생들에게 질문이 이어졌지만 선우와 그의 친구들은 다른 두명에게만 약간의 관심을 보일뿐, 예린에겐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는척을 해오면 어떻게 해야할까 긴장해 위까지 아파오던 예린은 아무일 없이 세번째 테이블이 끝나고


네번째 테이블로 가자, 풀린 긴장에 갑자기 취해서 네번째 테이블에 있던 수연의 어깨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마, 얘!! 어째..."

"어쩐지, 저런 타입은 한방에 픽 간다니까."

"수연아 니가 좀 데려다줘야겟다."

"네 언니. 좀 도와주세요."


수연이 택시를 잡아 예린을 태워 사라지는것을 흘끗 곁눈으로 본 선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1달간 스키부 사람들과 주 2회씩 모임을 가졌지만 강선우는 예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른 선배들, 심지어 태윤, 유성과는


몇번 이야기를 나누고 말을 튼 예린이었지만 유난히 강선우는 예린을 투명인간마냥 지나쳐다녔다.


"오늘 선우선배가 밥 사준대, 같이가자."

"응? 장미야 난 연습때문에..."

"무슨소리야! 꽁짜밥은 대학생활의 로망스라구!"


같은 동아리친구 장미덕에 얼결에 끌려간 레스토랑. 장미 말고도 신입부원 3명이 더 와있었다.


"장미왔니? 앉아, 얼른 주문 시켜."

"선우선배 감사합니다!"

"이야!! 여기 비싼데..."

"맘껏 시켜. 같은 과에 후배들은 너희같이 살갑지가 않아서. 내가 복학한 이유도 있고."

"그냥 걔네말구 저희랑만 친하게 지내요 선배!"

"걔네말구 너희만 밥 사주란 소리렷다?"

"하하하 눈치도!"


다들 선우를 편안하게 대했지만 유난히 예린은 말이 없었다. 유학갔다가 돌아온 선우와 같은학교 같은동아리에서 선후배로 만나게


될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던 그녀. 그리고 그녀를 모른척 무시하기 시작한 그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배는 근데 여자친구 안사귀세요?"

"응... 사실, 유학가기 전에 좀 상처받아서."


무언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올것 같은 생각에 음식에 집중하던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일... 있었어요?"

"뭐.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이유없이 연락을 끊고 사라졌지. 몇달을 찾다가 포기했는데, 다시 만나게 된거야. 우연히.

원하는건 뭐든 들어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라서 난 자존심도 없이 무릎을 꿇었는데... 내 친구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가며

나랑 헤어지고 싶어하더라. 난 그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떠났어, 잊기위해서."


슬픈 목소리와 우수에 잠긴 눈동자. 남자후배중 감수성 예민한 아이 하나는 눈에 눈물까지 고였다.


"선배...그런일이."

"사람 감정이란게 다 같지는 않잖아. 내가 좋아하는게 그사람을 괴롭히는 거라면 내가 떠나 마땅한거였지."

"그 여자 참 이상하네요! 선배같은사람 어디서 또 찾는다구!"

"맞아요 선배! 제가 아는 누나중에 이쁘구 성격 좋은사람 딥따 많으니깐요, 제가 책임지고 소개팅 될때까지 해드릴께요!!"

"오오~ 선우선배 좋겟다! 나두 연상 좋아하는데 난 안돼?"

"니가 선우선배 반만 따라가면."

"뭐!"


웃고 떠드는 네사람과 달리 그릇위의 음식을 바라보는 예린은 분노하고있었다. 전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예린과의 일을


모두에게 이야기하는 선우. 각색을 그럴듯 하게 해 자신이 희생양인양 말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


"저.... 실은 오늘 가족이랑 약속이 있어서요. 먼저 갈께요."


선우가 잡을까 두려워하며 일어난 예린은 선우의 시큰둥한 반응에 쇼크를 먹었다.


"응, 잘가. 얘들아, 2찬 어디로 갈까?"

"선배, 선배, 나이트나이트!!"

"꺄호!"


....나는 있으나 마나라는건가. 예린은 왜인지 모르게 분한 느낌에 빨개진 얼굴로 택시를 잡았다.

 


그런 선우의 반응은 동아리 활동과 술자리에서 계속되었다. 다른 후배들은 곧잘 데려다주는 그였지만 예린만큼은 예외였다.


다른 후배들과는 연락을 자주 하며 밥을 사주고 술자리를 같이했지만 그 술자리에서도 예린에게만큼은 말을 걸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매끄러운 매너에 다들 눈치채지 못했지만 당사자인 예린은 점점 그의 행동이 거슬렸다.


5월 1일. 예린의 생일. 같은 과 친구 3명과 스키부 사람들이 다같이 축하해주고 있었다.


"저번달 장미 생일때 선우가 꽃이랑 향수 사줬지? 건우 생일때도."

"그녀석 은근 주위사람 챙기기 좋아해."


그가 끌고가 사주었던 선물들을 생각하며 예린은 혹시 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페의 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일파티가 끝날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연과 장미가 시간과 장소까지 문자로 보내놓았음에도.


"선우선배 오늘 바쁘나봐?"

"그러게. 소개팅하나?"


안와서 다행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하던 예린은 어딘지 모르게 서운한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선우 너네학교 스키부에 안예린 들어왔다며?"

"어."

"여전히 이쁘냐? 이젠 안 건드린다며?"

".....재규 너 그건 왜 묻는데."

"그냥, 혹시 너 완전 관심 끈거면 내가 좀 데리고 놀라고. 태윤이랑 유성이가 너 이제 걔한테 관심 없다길래."

"내가 한번이라도 니 엑스 건든적 있냐?"

"응? 아...난 그냥~"

"장연아가 너랑 깨고 나서 클럽에서 나 좋다고 들러붙고 했을때도 내가 흔들렸냐?"

"......왜 심각해지고 그래."

"일단 안예린 얘기 하지 마."

"뭐야, 너 아직도 걔한테 미련있냐? 진주 일 다음에도...컥!"


재규가 앉은 소파로 뛰어올라 한쪽 팔로 재규의 목을 벽으로 밀어붙이는 선우. 놀란 태윤과 유성이 두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


"왜이래 강선우!! 야!!"

"이거놔!!"

"케...엑..."

".....지금 이순간부터 니 입에서 한번이라도 더 안예린 얘기 나옴... 가만 안둬."


선우가 물러서자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재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사람이 달라붙는데에도 꼼짝 않던 선우의 완력이 두려워서였다.


"아, 그리고 분명히 얘기해두는데 나 안예린 싫증난거 아냐."


선우의 말에 눈이 동그래진 세남자, 그런 그들을 향해 선우가 냉소를 지어보였다.


"....요즘 얼마나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지 몰라. 슬슬 내가 관심 없어지자 초조해하고 있거든."


-2부 2-


"우리엄마 요즘 나날이 예뻐진다?"


예린은 화사하게 크림색 투피스를 입은 엄마와 함께 강성훈과 함께 저녁을 하기로한 레스토랑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덧 아빠가 돌아가신지 2년. 젊은 나이에 결혼해 이제 겨우 40인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예린이었다.


"아저씨, 오랫만이예요!"

"예린이 왔니? 앉으렴. 이제 확실히 대학생 티가 나는구나."


뭔가 할말이 있는듯한 두사람. 예린은 그동안 어느정도 짐작을 했던 일이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저기, 예린아. 아저씨랑 엄마... 둘이..."

"재혼이야기라면 난 찬성. 울엄마 혼자 늙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이야길 못꺼내고 땀만 뻘뻘 흘리던 엄마와 아저씨가 안쓰러워 예린은 먼저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그래? 그럼 다행이구. 고맙다 예린아."

"아녜요, 아저씨....아니, 앞으론 아버지라고 해야하나. 저두 생각 많이 해봤는데, 돌아가신 아빠한테처럼 아빠아빠 하고 부르긴

힘들것 같아요. 그냥... 조금 딱딱해도 앞으로 두분 결혼하시면 아버지라고 부를께요."

"정말 고맙다."


예린이 혹시라도 반대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두사람은 눈녹듯 사라진 걱정에 행복해보였다.


'아빠, 엄마 이해하지? 엄마 아직 40인데 너무 오랜세월 혼자 지내게 할 수 없잖아... 아빠도 이해해줘.'


약간은 서운하지만 그럴수록 더 밝게 강성훈과 엄마에게 미소짓는 예린이었다.


"참, 결혼하면 우리 아저씨네 집으로 이사간다?"

"네~"

"아저씨네 집 되게 좋아. 정원도 있구, 차고에 차도 3대나 들어가구."

"아 근데...."


강성훈이 조금 복잡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앞으로 예린이한테 오빠가 생기겟네."

"네. 아저씨 아들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응, 너랑 같은학교란다."

"네?!"

"하하하. 놀랄 줄 알았어. 내일 다같이 만나자꾸나."


궁금해진 예린이었지만 내일 소개시킨다는 소리에 더이상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으며 얌전히 저녁식사를 했다.

 


"내일... 내가 얘기한 분이랑 그분 딸이랑 같이 식사할거야. 시간 좀 비워놀래?"

"네 아빠. 그럼 이 집으로 두분이 이사들어오시는건가요?"

"응. 니가 좀 불편하겟지만...."

"아뇨, 전 상관 없어요. 제 방이 바뀌는것도 아니고."

"딸이 너랑 같은 학교란다."

"그래요? 무슨과?"

"피아노."


예린과 같은 과에 다니는 여동생이 생긴다니, 이용가치가 있을거란 생각에 선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신입생인가요?"

"응. 이제 1학년이지."


아버지의 핸드폰이 울려 더이상의 대화는 없었지만 선우는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들어 자주 자신을 야속하다는듯이 바라보는 예린. 조금만 더 있으면 그녀도 깨달을것만 같았다. 그녀도 자신을 사랑한다는걸.


시작이 삐뚤어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것 뿐이지,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게될것이다.

 


"예린아."

"아저씨. 아저씨도 늦으신거예요? 하하."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먼저 도착한 예린의 엄마와 선우가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연주회에 다녀온 예린은 급히 들어서다가 성훈을


만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따님 이름이...예린이라구요?"

"어머, 우리 딸이랑 알아요?"


그시간. 선우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예린이 엄마와 자신의 아버지가 재혼을 한다고? 그럼, 둘이 이제


남매가 된다는 이야기인가? 절대 찬성할 수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고개돌린 그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 예린과 눈이 마주쳤다.


"!!!"


흡 숨을 들이키는 예린. 그런 예린을 눈치챈 강성훈이 아는사이냐고 물어왔다.


"동아리...선배예요."


힘들게 대답을 한 예린이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동아리에서 한마디도 안하는 선우가 이 자리에서조차 자신에게 그럴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앞으로 선우와 자신이 남매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동아리 선후배라고? 그럼 둘이 친하겟네."

"하, 학년이 달라서요~"

"앞으로 선우가 예린이좀 잘 챙겨줘요. 덜렁이야 덜렁이~"

"엄마....두...."

"예린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요. 모두한테 친절하고 귀여워서 다들 좋아해요."


부드럽게 말하며 예린을 향해 웃어보이는 선우. 예린은 그의 다정한 태도에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선우 인기 많지? 예린아."

"네.... 후배랑 선배랑 다들 좋아해요. 밥도 잘 사주시구...."


나만 제외하구요. 하고 덧붙이고싶은것을 꾹 참으며 예린은 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빙긋 미소짓는 그의 얼굴을 보며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져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


"정말 다행이다, 둘이 친한 사이라서. 근데 동아리에서 둘이 남매인거 알아도 괜찮겟어?"

"괜찮아요. 요즘 재혼이 흠도 아니고."


선우의 말에 예린은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성훈아저씨는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예린 자신도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선우가 오빠? 앞으로 강선우의 집에서 같이 살아야만 한다고?


"예린아, 내것도 좀 먹어봐."

"아, 네....선우선배."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오자 자신의 연어스테이크를 맛보라며 덜어주는 선우.


그런 둘을 바라보며, 친 오누이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 예린엄마와 강성훈이었다.

 


선우가 친구 생일이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린도 곧 엄마와 아저씨의 데이트를 방해하기 싫어 일어났다.


호텔 로비로 나오는데 선우가 벽에 기댄채 서있다가 손을 슥, 들어보였다.


"집에 가는거야?"

"...기다린거예요?"

"응. 넌... 이 결혼 찬성이니?"


예린에게서 나올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 여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그녀와 자신이 앞으로 연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선우에게 날라온 화살같은, 너무도 상처가 되던 그녀의 대답.


"네. 전... 우리엄마랑 성훈아저씨, 너무 잘 어울리는것 같아요. 선배도 축복해주셨음... 좋겟어요."


그는 담담한 표정 뒤로 아파하며 생각했다.


'역시...시간이 모자랐어. 2달, 아니, 1달만 더 있었어도... 아니, 이게 우리 운명인거지.'


그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한 표정. 예린은 혹시나 선우가 결혼을 반대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선배님도 반대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랑 가족이 되는것은 불편하겟지만..."


다른 의미로 너와 가족이 되고싶었어, 이말을 씹어 삼키는 선우의 마음은 타들어가는것만 같았다.


"집에 데려다줄께."

"....네."


그가 운전하는 옆모습을 흘끗 보며 예린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혹시 자신을 어디론가 데리고가는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녀를 집 앞에 내려놓은 선우는 '잘들어가' 한마디를 끝으로 사라졌다.


"치... 뭐야."


왜인지 모를 불만에 예린은 괜시리 죄없는 아파트 유리문을 팍, 밀며 들어갔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그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선우는 달라져있었다. 예린에게도 다른 후배들처럼 말을 걸고 다정히 대해주기 시작했다.


'이제 남매가 될거라 이건가.'


의외로 그의 다정함이 불편하지 않았다. 곧 그녀도 그와 모임에서 일상대화를 주고받는것에 익숙해졌다.


"선배, 케찹 묻었다!"

"어, 어디?"

"인사했대요~인사했대요~"

"하하하, 뭐야 너~!"


장미와 선우의 장난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하하 웃었지만, 장미의 머리를 살짝 장난으로 때리는 선우의 모습에 예린은 왜인지


모를... 이상한,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장미 넌 선우선배한테 존대말 안쓰더라?"

"뭐? 하하. 나 말고도 선후배에 존칭쓰는애 거의 없잖아 우리 동아리. 너도 수연언니, 지희선배랑 말 놓잖아."


그러고보니 자신도 선우를 제외한 다른 선배들과는 말을 트기도 한 사이인것이 기억나 예린은 괜히 쑥스러워졌다.


"선우선배 그런거 신경 안써. 너두 말 놔."

"....그럴까."


은근슬쩍, 다음번 동아리 모임. 예린은 일부러 선우의 건너편에 앉아 선우에게 말을 놓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선배! ㄴ...나 맥주병좀!...요."

"?? 응 여기."

"선배......여기."


요 자가 나오려는것을 꾹 참으며 예린이 그에게 앞접시를 건네었다. 그는 뭔가 이상한듯 그녀를 살폈다.


"너 어디 불편해?"

"아니...요"

"근데 왜 이리 말을 더듬어?"

"예린이가 선우선배한테 말 놔도 돼는지 궁금해하더라구. 그래서 그런거지?"


주책없이 장미가 나서서 높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다들 와하하 웃어댓다.


"그러고보니까 예린이 선우한테 꼬박꼬박 존칭을 쓰더라?"

"그러게, 말 놔 예린아. 선배, 얘가 쑥스러워서 그런가봐."


수연이 웃으며 예린을 두둔했지만 예린은 빨개진 얼굴로 앞에 놓인 포크만 바라보았다.


"짠?"


선우가 내밀은 잔에 예린이 잔을 들어 가져다대었다.


"짠..."


챙, 잔이 부딛치며 선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히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름방학 방학식날. 수연, 주연과 만난 예린은 선우와 자신이 곧 남매가 된다고 이야기했다.


"뭐어?!"


속으로 예린과 선우가 잘 되기를 은근히 계속 바라고있던 수연의 얼굴은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선우라면 수연언니가 너랑 잘되야된다고 그러던, 그 잘생긴 남자?"

"수연언니!"

"아니 난... 그래두 뭐 이제 남매이니까."


그래. 이제 남매지. 예린은 모르던 사실을 깨달은 마냥, 마음 한구석이 아파오는것을 애써 무시하며 커피를 마셨다.


"너 그사람 좋아하던건 아니지?"


예린에 대한 일이라면 눈치 100단인 주연이 그런 예린을 눈치챈듯 대놓고 물어왔다.


"아냐! 얘는... 그냥, 동아리 선밴걸."

"그리고 이젠 오빠고."


덧붙이는 주연의 눈이 날카로워서 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의 구름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어?!"

"진짜?!"

"....말도안돼."


세사람의 반응은 주연과 수연보다 과격했다. 태윤, 유성, 재규는 선우의 '예린과 남매가 된다'는 말에 놀라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진짜 진짜야?"

"그럼 뭐겟어."


재규가 푸핫, 웃음을 터트리며 소파 옆으로 굴렀다.


"하하하하하, 너 그럼 완전 새된거네? 강선우, 새됐어."

"글쎄. 잘 생각해봤는데, 가족이 된다는거 나쁜일만은 아니더라고."


냉랭한 선우의 목소리. 고개를 돌린 세사람은 선우의 차가운 표정에 얼어붙었다.


"가족이란거. 곁에 항상 붙어있고 챙겨주고 참견하는게 당연한거지."


씨익. 미소짓는 선우였지만 그를 아는 세남자는 그 미소가 선우의 가장 위험한 상태임을 알기에 아무말 하지 않았다.


-2부 3-


예린엄마와 강성훈의 결혼식은 작은 교회에서 조촐하게 지인들만 참석한채로 치루어졌다.


바이올린을 켜는 수연과 피아노를 치는 예린의 모습은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다 해서 20명만이 참석한 조용한 예식이 끝난 후, 두사람은 2주간의 허니문을 향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자, 그럼 다 같이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오늘 축의금 받은거 우리 뒷풀이 비용으로 쓰라고 그러셨어."

"진짜 선우선배?! 우리 고기 먹으러 가자 고기! 예린이도 고기 먹구싶지?"


의외로 식탐이 있는 수연이 예린의 옆구릴 찔러가며 고기를 외쳤다.


어른들은 모두 떠나시고 선우, 주연, 예린, 수연. 이렇게 네사람은 고깃집으로 향했다.


"근데... 선우오빠. 오빤 안어색해? 갑자기 남이던 예린이가 여동생이 되는건데."


오늘 처음만난 주연의 뜬금없는 질문에 선우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쎄, 아예 한번도 본적 없는 여자애가 여동생이 된것보다는 동아리 활동 하면서 어느정도 친분이 있던 예린이가 동생이 된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 생각해봐, 아예 모르던 사람이 같은집에 살면 어색하겟지만 예린이랑 난 엠티, 술자리에 식사도 자주 같이한

사이라서 같은 식탁에서 밥먹구 같은집에서 지내는거 많이 어색하지만은 않을거야. 아, 나만 그런가?"


선우가 예린이를 눈웃음 치며 바라보았다. 예린은 왜인지 붉어진 얼굴을 '숯불이 너무 뜨겁다' 하며 물수건으로 가렸다.


"예린이랑 선배랑 밀어줄 생각이었다구 나는~"

"언니, 취했어. 아까부터 술을 물마시듯 마시더라니~울언니 좀 취한거니까 이해해. 원래 술마시면 실없어져 이사람."

"이게 언니한테~!! 근데 주연아 진짜 둘이 잘 어울리지 않...읍!"


주연이 자기가 먹으려던 쌈을 수연의 입에 푹, 넣어버렸다. 예린은 왜인지 쑥스러워 화장실을 다녀오겟단 핑계로 일어나 잠시


밖에 나와 시원한 밤공기를 쐬고 있었다.


"수연이 말 신경쓰여?"


돌아보니 선우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예린의 뒤에 따라나와있었다.


"아니, 무슨...그런말... 신경 안써."

"신경쓰지 마. 이제 남매인데 우리. 그치?"

".....응. 선배."

"나 이거 피우고 들어갈건데, 기다려줄래?"


고개를 끄덕인 예린은 달에 비친 그의 단정한 옆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흠칫, 그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것 같아 시선을 돌린


그녀는 자신도 모를 이상한 설레임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애들 가면, 우리 둘이 술 한잔 더할까?"


유혹과도 같은 그의 한마디. 검은 그의 눈동자에 매료된 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응.' 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주연과 수연을 데려다준 선우가 차를 몰아 한적한 칵테일바로 그녀를 안내했다. 구석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본 예린은 온통


영어로 된 복잡한 칵테일 이름들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겟어 선배."

"그래? 그럼 내가 시켜줄께."


그가 시킨 칼루아 밀크를 홀짝, 들이키며 예린은 결혼식때 긴장했던 몸이 노곤해지는것을 느꼈다.


"이거 맛있다."

"그래? 이번엔 과일맛 나는것중에 시켜줄까?"


자신은 토닉워터만 마시며 그녀에게 블루하와이, 팜므파탈, 위스키 샤워등등 독한 칵테일을 시켜주는 선우.


그녀는 선우와 대화가 즐거워 취하는줄도 모르고 나오는대로 칵테일을 마시다가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배, 근데 나 피곤해."

"그래? 차에서 좀 자. 난 술 안마셨으니까 데려다줄께."


그가 조수석 시트를 잠자기 좋게 내려준 뒤 운전하기 시작하자, 예린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음..."


차가 멈춘듯한 느낌에 눈을 뜬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낯설은 풍경에 아연실색 했다.


"여, 여긴 어디야?"

"남이섬 근처야. 뭐, 방학때 오는 별장같은거."

"여긴 왜..."

"여기서 자고 내일 놀다 가자."


예린은 얼결에 차에서 내려 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 약간 어두운 실내분위기의 2층의 통나무집인 별장은 누군가가 관리한듯


깔끔한 상태였다.


"하아, 이제 나도 술 한잔 해야지. 맥주 더 마실래?"


아직 취기가 안가신 예린이었지만 이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다. 집에 데려다준다더니 갑자기 웬 별장이란 말인가.


"나... 집에 가고싶어."

"안예린."

"선배, 얼른..."

"기억해?"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은 이미 예린에게 다정하게 대하던 대학 선배가 아닌, 예린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그 남자였다.


"난 너한테 기회를 주었어. 내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기회. 그걸 마다하고 내 앞에, 내가 다니는 학교에, 내가 들어있던 동아리에,

그걸로 모자라 내 가족의 일원이 되겟다고 나타난것은 너야."

"선배... 자, 장난치지 마..."


예린은 다리가 풀려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한채 떨기 시작했다.


"선배라."


순간,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 현관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게 걸린 현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린은 절망한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폭력을 쓰고싶지 않아. 하지만 널 믿을 순 없으니 얌전히 있어줘."

"왜....이러는거야. 나한테 관심도 없었으면서."

"널 테스트한거야. 니가 나한테 느끼는 감정이 전혀 없으면, 내 무관심에 반응하지 않으면 널 놓아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서운한

얼굴로, 내 관심을 바라면서 내곁에 머무는 널 보고... 니가 조금 있으면 깨달을 줄 알았어. 너도 날 원한다는걸."

"아냐!"


그녀가 고개를 도리질쳤다.


"아니라고 하고싶겟지."


그가 웃으며 한걸음 다가오자 예린은 흠칫, 벽쪽으로 물러섰다.


"너는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어."

"선...으읍!"


그의 거친 키스에 그녀는 가슴을 밀어내며 저항했다. 하지만 거칠게 파고들어 부드럽게 그녀의 혀를 탐하는 그의 테크닉에, 예린은


안그래도 힘이 없던 다리가 풀려 스륵, 벽에 기댄채로 주저앉고 말았다.


힘없이 앉아있는 그녀를 안아든 그가 2층으로 향하자 그녀는 몸을 틀어 반항하려 했다.


"계단에서 떨어짐 너나 나나 다칠텐데. 조심하지?"


비웃는듯한 그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그녀는 자신을 장난감 다루는듯한 그의 태도가 화나서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2층의 방문은 열려있었다. 붉은 벨벳커튼이 4면으로 드리운 킹사이즈의 침대. 예린은 다시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이거 놔!!"


그녀를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은 그가 거칠게 셔츠를 벗고 침대로 들어왔다.


"고등학생때는 꼬박꼬박 존대말 쓰면서 선우오빠 선우오빠 하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피하려던 그녀는, 하나로 묶은 머리를 잡혀 다시 그에게 키스당하기 시작했다.


"으으읍!!"


옷 위로 그녀를 더듬으며 거칠게 키스하던 그가 욕망으로 흐려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예린은 심장이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이...이러지 마, 선..."


투득, 그녀의 흰 셔츠를 찟어낸 그가 브래지어를 내리고 그녀를 입술로 탐하기 시작했다. 예린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머리를


밀어내자 그가 고개를 들어 씨익 웃어보였다. 그의 차가운 웃음에 잠시 그녀가 얼어붙은 사이, 그가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벨트로


그녀의 양 손목을 등뒤로 묶어버렸다. 예린은 그에게 붙들려 묶이며 고통에 비명을 수차례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러니까 옛날생각나네. 그치?"

"선, 선배..."

"몸이... 더 성숙해졌어."


1년 사이 조금 더 성숙해진 그녀의 몸을 경이롭다는듯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저녁식사할때 밖에서 날 뜨겁게 바라보던 니 시선."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시선에서 확신했지. 너도... 날 원한다고."

"아니야... 아, 아니예요 선배님... 제발..."


순간 예린의 머릿속에 엄마와 강사장이 떠올랐다. 자신과 선우가 사이좋은 남매가 될거라 생각하는 두사람을 생각하니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서, 선배... 우리 부모님을 생각해봐, 이런일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텐데."

"그래. 실망하실거야."

"그치?"


그녀의 얼굴에 비친 실낱같은 희망의 빛은, 그의 다음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밀을 잘 지켜야지. 알겟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여기, 민감해?"

"하읏!"


그가 그녀의 민감한 봉우리를 입에 넣고 혀로 굴렷다. 그녀는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몸을 뒤틀며 신음을 참아내자 그가 비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지 두고보자구."


그의 입술이 점점 내려가 그녀의 갈비뼈를 핥아내렸다. 흐읍, 숨을 들이키며 예린은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았다.


"제발, 지금이라도 멈춰줘... 제바..아흣!"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둔덕 사이 갈라진틈을 애무하기 시작하며 입술로 가슴양쪽을 오가며 희롱했다.


"아앗!!"

"그래... 니 신음소리... 너무 그리웠어...어서, 더... 더..."


자신의 신음소리가 그를 더욱 흥분시킨다는것을 알면서도 예린은 멈추지 못하고 소리를 내었다. 빨라지는 그의 손놀림은


그녀를 곧 절정에 닿도록 만들었고 그녀가 몸을 떨며 소리를 흘리는것을 그는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흣...아...하아, 하아..."

"오랫만이라 더 느낀건지... 아주... 많이 젓었어..."


그가 미끌거리는 그녀의 입구를 더듬은 다음 다시 그녀의 둔덕사이로 손가락을 옮겼다.


"한번 더 느끼게 해줄께."

"시, 싫...아읏..."


두번이나 그녀를 절정에 달하도록 괴롭힌 그가 잔인하게 웃으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오랫만이라... 오늘은 재우지 않을거야."

"선배, 제발, 안돼요...아앗!!"


그가 들어오자 그녀는 벨트가 파고드는데에도 불구하고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녀의 골반을 꽉 잡은채 허리를 움직이는


그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아앗! 흐흣...으으..."

"하아, 1년만이라 그런지... 타이트하네... 그래도 엄청 젓어서 미끌거리니까... 안아프지?"

"그만, 흐흑..."

"울어도 소용 없어. 넌 내거야, 안예린. 누구한테도 안줘."


그의 번득이는 눈이 두려워 예린은 눈물조차 멈춰버렸다.

 


그렇게 2일동안 자다가 깨나기만 하면 덤비는 그에게 묶인채로 밤낮으로 유린당한 예린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으......으흑"


그녀의 시선이 위로 향해 차갑고 냉정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침대 옆에서 옷을 갖추어 입는 그의 얼굴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기절하진 않았네. 힘들었을텐데."

"풀어주세요..."

"이제야 존대말을 쓰는거야?"

"이제 원하시는대로 하셨으니 제발, 제발 풀어주세요..."

"글쎄."


그가 입술 한쪽만 살짝 올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줄기가 시트로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어야지."

"집에 가고싶어요... 선배님, 제발..."

"선배라."


그가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이젠 오빠라고 불러야지. 안그래 예린?"

"선우선배..."

"입 다물어. 2년전, 그날부터 넌 쭉 내거였어. 니가 바꿀 수 있는게 아니야. 알아들었어?"

"흑....."

"니네 엄마가 우리 아버지랑 결혼한 것 따위로 내가 멈출거란 생각은 그만두는게 좋아. 난 너 놓아줄 생각 전혀 없으니까."


그가 그녀를 밀어내자 손목에 묶인 그의 벨트가 그녀의 연약한 살을 파고들었다.


"아윽..."


그녀가 아픔을 못이기고 신음소리를 내자 그의 얼굴에 다시 욕정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묘한 소리로 흥분시킬래 아침부터?"

"서, 선배... 손이 아파요..."

"그래?"


그가 침대로 다시 다가와 그녀의 손목에 감긴 벨트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풀어주면 다시 반항하려고?"

"......"

"풀어줄테니 이젠 쓸대없이 소리지르거나 도망치기 없기야."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가 그녀의 귓볼을 물었다.


"그래봤자 다시 이렇게 벌을 받겟지만 말이야."


-2부 4-


"여기가 니가 살던 집이야?"


부모님의 신혼여행 사이에 선우의 집으로 이사들어가게 된 예린은 이삿짐 업체 직원들과 같이 나타난 선우에 당황했다.


"선, 아니, 오빠. 근데 여긴 왜..."

"흠. 짐은 다 싼거야?"

"네..."
"말 놓으라니까. 남매끼리."


씨익. 선우가 웃으며 예린의 손을 잡았다.


"여기 다 정리하고 이사람들이 알아서 할거야. 나가자, 바람쐬러."


예린은 먼지투성이 손을 씻고 군말없이 선우를 따라나섰다. 또 고집을 부리거나 하다가 그의 '벌'을 받게될까 두려웠다.


"안더워? 남방이라 얇긴 한데..."

"손목이..."


그가 묶었던 손목에 든 멍때문에 반팔을 입을 수 없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긴팔을 입고있었다.


"누가 니 멍 보고 뭐라고 하기라도 할까봐? 겁많기는. 옷 사줄께, 나가자."

"괜찮..."

"니 옷 취향 너무 고리타분해. 대학교 1학년이 아니라 중학교 1학년이라구."

"....."


그렇게 자신이 센스가 없던가 하고 약간은 토라진듯 뺨이 통통해진 예린이 귀여워 선우는 품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너 그렇게 귀여운 표정 나 말고 딴사람한텐 보여줌 안돼?"

"......"

"뭐든지 원하는건 다 사줄께."


차를 몰아 그가 도착한곳은 수입명품만 취급하는 멀티샵이었다. 선우를 따라들어간 예린은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넓은 매장에


살짝 기가죽어 선우의 소매를 잡았다.


"어머, 강선우씨 오셨어요."

"네. 이 친구 옷장을 좀 채워줘야 해서요."

"여자친구세요? 너무 이쁘다~"

"하하. 노코멘트. 진은 25사이즈. 숏팬츠나 롱팬츠 상관없어요. 트루나 락엔리퍼블릭으로 부탁해요. 브라사이즈 32에 C컵,

하의는 엑스스몰. 패드들어갔거나 프릴많은건 안돼요. 상의는 주미씨가 알아서 준비해주시구요. 정장 이번시즌거 도나카란

좋던데요? 베이지랑 블랙으로 일단 보여주세요. 신발은 230, 싸보이는 디자인이나 장식 많은건 패스. 이번에 들어온 선글라스랑

가방도 라인별로 보여주세요."


그로부터 1시간을 탈의실을 오가며 그 앞에서 패션쇼를 벌인 예린은 입는 옷에마다 붙어있는 어마어마한 가격표에 숨이 막혔다.


"처음에 입은 트루진, 두번째 입은 허드슨진, 다섯번째 입었던 세븐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었던 락엔리퍼블릭으로 할께요.

상의는 두번째, 네번째, 다섯번째거 빼고 다. 속옷은 이미 제가 골라두었구요. 신발은 샤넬거랑 발레시아가, 미우미우, 루이비통.

선글라스 마지막에 쓴 4가지 빼고 전부. 가방은 처음 들었던거 두개랑 마지막에 든거 두개. 그렇게 주세요."


평소 단골이었던 선우이긴 하지만 이번 쇼핑의 규모는 엄청난 것인지라 계산을 하는 내내 점원들이 선망의 눈으로 예린을 바라봤다.


2천만원이 넘는 계산서에 입이 딱 벌어진 예린이었지만 태연한 표정의 선우는 골드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점원들에게 90도각도로 인사를 받으며 가게를 나선 두사람.


"오빠, 너무 돈 많이 썻어."

"왜? 너한테 쓰는건 하나도 안아까워. 괜찮아."

"하지만 너무 큰 돈이었는..."

"하룻밤 도박으로도 잃을 수 있는 돈이야. 내가 산 주식이 오르면 한시간만에 벌 수도 있는 금액이고."

"....그래두."


걱정스런 예린의 표정. 자신을 염려한다는 생각에 선우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마워. 그래도 너한테만큼은 뭐든지 최고로 해줄거야. 니가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다른 아무것도 필요없어."


이미 그를 겪을대로 겪어본 예린은 그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우 진짜 예린이 걔 포기한걸까?"

"재규 너 신경 꺼. 그리고 선우한테 그얘기 꺼내지 말고."

"하지만 김유성 너도 알잖아. 선우 요즘 여자 안만나. 지네 부모 신혼여행 간 사이에 예린이 이사들어간다던데, 둘만 있는 그 집에서..."

"이제 여동생인데 설마 뭘 어쩌겟어. 하긴, 예린이 걔 이제 남자만나긴 글렀다."

"그치?"

"진짜 포기한걸까? 저번에 가족이면 얼마든 참견할 수 있다며 웃는데 나 섬뜩했다."

"안포기하면? 선우 걔 지네아버지랑 친하진 않아도 많이 따르잖아. 아버지 한국오면 딱 붙어다니는거 보면 모르냐?"

"하긴, 그 큰 산업 물려주신다고도 그러고."

"태윤이 넌 왜 아무말 없냐?"


예린이에게 보이던 집착. 친구인 나진주가 죽은 다음에도 버리지 않던 그 집착을 가족이라고 해서 버릴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태윤은 다른아이들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아냐. 아무것도."

"암튼 예린이가 남자만나면 발악이야 하겟지. 그래도 뭘 어쩌겟어? 어떤놈인지 앞으로 걔가 만날 남자 불쌍하다."

"그러다가 유학이라도 가버리면 어쩔라구."

"선우 그놈이 머리가 얼마나 좋은데 그렇게 내버려 둘것같애?"

"하긴, 부모님이 허락 못하도록 화려한 언변을 펼칠거다."

"말빨이 좋잖아. 참, 이거봐봐. 얼마 전에 내가 꼬신 여자앤데 애가 얼굴은 별론데 말을 참 조곤조곤 이쁘게해."

"그래? 그래도 난 얼굴 안이쁘면 별로."


그들의 화제는 요즘 만나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뭐해."

"옷 정리요."

"또 존대말."

"정리해."

"도와줄까?"

"응?"

"으아, 이거 완전 중딩. 안돼. 이것두. 으익, 너 진짜 이런걸 입었던거야?"

"편해서 집에서..."

"당장 버려."


냉정한 표정의 선우가 2층 자기방의 바로 옆인 예린의 새 방으로 들어왔다. 전에 살던 집에서 가져온 화이트톤의 예린의 가구가


텅 비어있던 방안을 채우자 선우는 마음까지 꽉 찬 느낌이었다.


"이것도 안돼."

"하지만..."

"토달지 마."


심술궂게 말을 잘라버린 그가 예린의 옷중 자신의 취향이 아니거나 낡은 옷들을 박스로 던져넣었다.


"이런거 입지 마."

"아빠가 사주신것도 있..."

"이제부턴 내가사준것만 입어."


돌아가신 아빠가 사준 원피스조차 촌스럽다며 허락않는 모습에 예린의 눈이 젓어들었다.


"울지마."


선우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울면 벌줄거야."


'벌'이란 단어에 예린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선우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정리한거야? 힘들었지?"

"응..."

"뭐 먹고싶은거 있어?"

"사오게?"

"해줄께. 나 시푸드 파스타 하나는 잘하거든."


선우가 요리를 할줄 안다니. 예린의 동그래진 눈을 바라보며 그가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추었다.


"약간 맵게 해줄까? 해산물 잘먹지?"

"익히기만 해줘 제발..."


아직도 못먹는 회를 억지로 먹이던것에 질렸던 기억이 생생한 예린은 기도하는 모양으로 손을 만들어보였다.


"하하하, 귀엽긴. 기다려 곧 해줄께."


그가 1층 부엌으로 사라지고 예린은 기지개를 켠 뒤 반쯤 열린 그의 방 문을 열어보았다.


여전히 허전한 방. 가지런히 정리된 큰 책장을 바라보던 예린은 다이어리같은 큰 수첩을 보고선 자기도모르게 수첩을 꺼내들었다.


팔락팔락, 필기체의 영어로 쓴 그의 오래전 일기. 아마도 그가 어릴적 미국에 살았을때 쓴것인듯 했다.


끼워진 사진들에는 밝은 얼굴로 웃는 그와 그의 할머니인듯한 사람, 강성훈과 그의 전처, 그리고... 여자아이.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닮은듯한 분위기에 예린은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오빠."

"응? 거의 다 돼가."

"이 사진, 오빠랑 할머니, 아저씨랑 이분이 오빠 어머니시지? 여자애는 누구...어마!"


그가 들고있던 국자를 탱-소리나게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무서워 예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냐, 나 영어 잘 못해서 내용 하나두 안보구 그냥 사진 들어있는것만..."

"이리 내."


예린이 사진을 건내자 떨리는 손으로 그가 가스렌지의 불꽃에 사진을 가져다가 대었다. 사진은 순식간에 재가되고 매캐한 냄새만이


사진이 그곳에 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다 태우고 버린줄 알았는데. 쓸모없는게 나오네."

"....왜...."

"가족이 다같이 있는 사진 보기 싫거든."


냉정한 표정이던 선우가 애써 웃어보이며 국자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의 동요하는 모습을 본 예린은 그가 단순히 그런 이유로 놀라지


않았었을거란걸 알았다. 그 여자애가 관련있는것은 확실한데, 선우는 형제 없이 외동으로 자랐다고 들었다.


남매는 아니었을게 분명한, 선우보다 약간 더 나이가 들어보이던 여자아이. 과연 누구일까.


"얼른 포크들고 와. 같이 먹자."

"응."

 


그날 밤, 선우의 품안에서 잠들어있던 예린은 흠칫거리는 선우에 놀라 잠을 깨었다. 가위를 눌리는듯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채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예린은 그의 손을 주물렀다.


"오빠! 오빠!"

".....누나...."

"오빠?!"

"....아진...."


아진?


확실하게 들린 이름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벌떡!! 일어났다. 가위가 풀린듯 했다.


"으앗!! 하아, 하아..."

"오빠. 정신차려."

"나, 나, 물좀."

"응."

"하아."


그가 욕실로 들어가 식은땀에 젓은 몸을 닦아내고 나왔다. 예린은 잠이 다 깨어 침대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잠 깨워서. 하아, 나도 잠 다 깻는데 우리 술한잔 하러 나갈까."

"이시간에? 지금 두신데?"

"권형재라구, 권재규 형이 바 하는데 언제든 문 열어준다?"

"하아... 알았어 옷 입을께."


옷을 갖추어 입으면서도 예린의 마음속에서는 한 이름만이 메아리쳤다.


아진...

 

"오랫만이다."

"다들 여기있었네?"

"예린아 오랫만! 이사 잘 했어?"

"네..."


이제는 동아리 선배인 태윤과 유성이 아는척을 하며 예린을 반겼다. 재규는 인사만 하고 선우가 두려워 고개를 돌렸다.


"자려다가 잠도 안오고 해서 여동생 데리고 놀러왔어, 형."

"니 동생? 아, 재혼하셨다며 그쪽 딸..."


재규의 형인 형재가 예린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자 선우가 으르릉거리는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예린이 건드리면 형 지금 만나는 여자들한테 형 몇다린지 다 분다."


진짜 그랫다가는 주변이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복잡연애의 대명사 형재가 손을 털고 물러섰다.


"오케이, 안건드릴테니 비밀유지."

"거래성립."


예린은 둘이 무슨말을 하는가 싶어 자리에 앉아 고개를 갸웃 하고 있다가 태윤에게 물었다.


"태윤선배, 선우오빠랑 안지 얼마나 됐어요?"

"응? 한 7년 다돼가. 중3때부터니까."

"혹시..."


궁금한 표정의 예린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진... 이란사람 혹시 선우오빠 여자친구였나요?"

"아진? 그건 선우 사촌누나 이름인데?"

"그래요?"

"응. 무지 친했어. 선우네 같이 살았었구. 우리보다 세살 위였어."

"지금은 왜 같이 안살아요?"

"미국갔거든. 그런데 그건 왜?"

"아, 아뇨 사진을 봐서..."

"그런데 그 누나 너랑 좀 닮았어.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쿵, 예린의 심장이 요동쳤다. 역시 그 여자가 아진이란 사람이다. 아릿하게 아파오는듯한 가슴의 통증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배, 짠!"

"그래~ 너 술 늘었구나?"

"천천히 마셔."


선우가 예린을 걱정했지만 가슴의 통증을 달래려 술을 들이킨 예린은 결국 선우에게 업혀오고 말았다.

 

 

-2부 외전, 강아진 상편-

 


-10년 전-


정신병원에 형을 입원시킨 후 경찰서에서 알려준 여성보호센터로 향하는 강성훈과 그의 부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자그마치 4년간을 친딸을 성노리개로 삼다니. 아무리 죽은 부인의 판박이라지만, 이건 아니잖아. 지방에 쳐박혀서 가족과도

연락을 끊더니, 겨우 온 연락이 친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해 입건? 정신병이라지만 미쳐도 단단히 미친거지..."


친아버지에게 9살때부터 4년간 성적으로 학대당한 강아진을 데리러 가는 두사람은 저 멀리 보이는 회색건물에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겨우 13살인 아진. 옆집에 새로 이사온 신혼부부가 밤마다 나는 소리에 수상히 여기다가 아진을 데리고 여성보호단체로 가서


상담을 받도록 권고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아진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사실을 털어놓았고 성훈의 형 채훈은 곧


경찰에 입건되었다. 경찰에서는 횡설수설거리는 채훈을 정상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아...진아?"

"작은아빠? 작은아빠!! 작은엄마!!"


반가움 가득한 눈으로 강아지마냥 달려와 안기는 아진. 9살 이후로 못봐서 애기같던 모습만을 기억하던 성훈과 민주(성훈부인)은


고등학생이래도 믿을듯한 긴 머리의 성숙한 소녀의 모습을 한 아진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굉장한 미인이던 죽은 엄마를 빼닮은 창백할만큼 흰 피부의 미녀로 자란 그녀. 허리아래로 찰랑거리는 매혹적인 긴 검은머리.


겨우 중학교 1학년인 그녀이지만, 그 경국지색의 미모는 그대로 드러나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집착과 금단의 끝, 번외편. -악요녀(惡妖女), 강 아진.-

 

아진은 성훈의 집에 도착할때까지 조곤조곤 예쁜 목소리로 새처럼 재잘대었다. 어른의 모습을 하고있어도 아직은 아이란 생각에


성훈과 민주는 그녀가 안쓰럽고, 또 하나뿐인 조카가 당했던 일이 안타까워 잘해주고 싶었다.


"아진아. 근데 짐 가방이 그것뿐이니?"

"네. 이것뿐이예요."

"옷은..."

"이거가 다인데..."


기죽은듯 고개를 숙이는 아진의 모습에 민주가 아진의 손을 꼭 잡았다.


"내일 작은엄마가 아진이 옷 사줄께. 우리 아진인 이뻐서 뭐든지 잘 어울릴거야."


눈물까지 고여서 웃어보이며 좋아라하는 아진. 성훈은 부인이 아진에게 다정한것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선우야! 아진이누나 왔어."

"어 진짜?! 누나!!"


어릴적 친적모임때마다 자신을 놀아주던 누나를 기억하는 선우는 반가움에 우다다다 뛰어와 폭! 아진의 품에 안겼다.


"선우야."


달콤한 목소리. 선우는 고개를 들어 성숙해진 아진의 모습을 확인하고도 망설이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누나, 누나는 내 바로 옆방이야. 우리 엄마가 이불도 새로 샀는데 나비모양인데 진짜 이뻐."


아진은 앞으로 자신이 쓸 방을 둘러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예뻐. 고마워. 감사합니다 작은아빠, 작은엄마!"

"뭐 그런걸가지고... 아진아, 밥먹자. 우리 오늘 외식하자."


아진을 데리러 갔다오느라 밥할시간이 없었던지라 모두가 같이 근처의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우와, 이것두 맛있어보이구, 저것두 맛있어보여요... 어쩌지?"

"누나 그러지 말구 다 시켜. 나랑 나눠먹음 돼잖아."

"그러게? 선우와 나누어먹으면 되는거구나?"


활짝 웃은 아진에게 주문을 받은 직원. 몇몇 직원들은 이미 아진의 미모를 확인 후 흘끗흘끗 선우네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저, 화장실좀요."

"그래 다녀와."


화장실을 가던 아진은 아까부터 자신을 흘끔거리던 레스토랑 매니저를 발견하자 생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예요?"

"아, 이쪽으로... 따라와요."


화장실로 아진을 안내한 그가 돌아서려 하자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왜 계속 나 쳐다봤어요?"

"에, 예?"

"나 쳐다보았잖아요."

"무, 무슨..."

"이렇게 하고싶어서?"


그녀가 그의 손을 봉긋한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숨을 흡 들이쉰 그가 주위를 확인하자 아진이 나긋이 속삭였다.


"여기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곳 없어요?"

"따, 따라와요."

 


15분쯤, 화장실을 간 아진이 안돌아오자 걱정이 된 민주가 그녀를 찾으려 일어설 때였다.


"어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직원용 화장실 다녀왔어요."

"그래?"

"줄이 어쩌나 긴지... 기다리다가 죽을것 같아서 직원 붙들고 부탁했더니 데려가주셨어요."


저쪽을 지나던 매니저가 붉어진 얼굴로 흘끗 아진을 돌아보았다.


창고에서 한 짧은 정사. 그것도 미소녀와... 상상만으로도 다시 아랫도리가 뻗뻗해지려고 했다.


'나 용돈좀 줘요. 있는대로. 네?'


정사 후에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전화번호를 받아간 그녀.


그녀에게 준 10만원은 아깝지 않았다. 앞으로 전화만 온다면... 하고 생각하는 그는, 이미 아진의 포로였다.

 


"잘 자, 아진아."

"안녕히 주무세요."


저녁먹은 후 티비를 보며 담소를 나누는 가족과 50평형의 넓은 아파트에 자신의 방에서 지낼날이 올 줄이야.


아진은 쿡쿡 웃으며 베게를 끌어안고 뒹굴었다.


단칸방에서 냄새나는 아버지와 지낸것이 어제같은데. 이제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다.


'그사람들 말대로 신고하길 잘했어'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통해 '성'에대해 알게된 아진. 하지만 타고나길 요염하게 타고난 그녀는 사실 아버지와의 그것도 즐기며


컷다. 그리고 그녀가 5학년이 된 해,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닌 그해 부임한 교생의 하숙집에 찾아가 관계를 맺었다.


그는 아진에게 새 운동화를 사주고 새 학용품을 사주었다. 돈이 없어 항상 싸구려만 쓰던 아진은 그렇게 자신의 몸이 새 '물건'과


바꾸어질수 있다는것을 알게되었다.


그가 서울로 돌아간 이후로도 가끔 내려오면 그녀는 그를 만나고 용돈을 받았다. 3만원, 5만원. 작은 금액이었지만 아진에겐


큰 돈이었다. 아이들은 항상 볼품없는 물건만 가지고다니던 아진이 자신들과 같은 물건을 가지고다니자 더이상 아진을 가난하다


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진은 그걸로 모자랐다. 더, 더 좋은 물건을. 더 좋은 삶을 살고싶었다.


6학년이 된 해에 옆집에 이사온 부부가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수상히 여기기 시작했다. 아진은 눈치챗지만 태연히 행동했다.


그리고 중 1. 아진은 작은아빠가 신문에 난것을 보았다.


[상장된 미국 리테일업체의 강성훈 사장].


실패자에 가난뱅이인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른, 성공한 사람.


이런 사람이 우리 아빠였더라면... 그랫다면 난 다른삶을 살았을텐데.


"아진아, 있니? 옆집 아줌마랑 아저씨야. 저기... 잠시만 문 열어볼래? 우리가 아진이 도와주려고 하는건데..."


순간, 아진의 눈이 번득였다.

 


선우가 사는 부자동네의 사립 중학교는 전학생이 드물어 아진의 전학은 큰 이슈였다.


예쁜 얼굴에 키도 크고 신은 신발과 가방, 학용품도 좋은 브랜드인 아진에게 많은 아이들이 접근했다.


사람들 앞에서 얌전하고 조용한척 하는 아진. 그것이 학교에서 안전히 가는 방법임은 이미 초등학생때 깨달은 그녀였다.


"강아진 진짜 이쁘지 않냐? 키 커서 난 선밴줄 알았어."

"근데 좀 조용하더라 보기랑 다르게."

"난 그래서 더 좋던데."


여자아이들도 나대지않고 얌전한 아진이 괜찮아보여 친구가 되고 싶어했고, 예쁘지만 범생이란 말에 많은 노는 아이들은 관심을


끊었다. 하지만 그 중에 3학년의 주효범은 예외였다.


"강아진."


방과 후. 집으로 가려하는 그녀를 불러세우는 효범.


"너 내 여자친구 해라."

"전 고등학생 되기 전엔 남자친구 안사귈건데요?"


당돌한 대답. 3학년에서도 제일 싸움도, 공부도 잘하는 부잣집 아들인 효범은 아진에게 이미 한눈에 반한 터였다.


"그리고 집에 통금있어서 4시까진 들어가야해요."

"4시?! 초딩도 그것보단..."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구요."


가볍게 말을 끊고 긴 머리를 살랑, 하며 그를 지나쳐버리는 그녀. 그는 감히 손목을 잡을 생각조차 못하고 굳어있었다.

 

 

"하아, 근데. 너 이름이... 뭐야? 난... 진도야. 구진도."


쉬는날, 마침 전화 온 아진에게 자신의 집으로 와달라 부탁한 매니저 진도는 아진의 조각같은 나신을 핥으며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난, 아리. 김아리예요."


가방에 있던 원피스로 갈아입은 아진은 태연히 이름을 거짓말하며 그를 그녀의 몸 속으로 유도했다.


한시간여 후, 매니저가 지갑을 뒤져 돈을 꺼냈다. 저번의 두배나 되는 금액에 아진이 생긋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전화 없어?"

"집이 엄해요. 저번에도 몰래 샀다가 빼았겨서..."

"고등학생이지?"

"네. 집에서 용돈을 안줘요."

"왜?"

"친딸이 아니니까. 나, 작은아빠네 얹혀살거든요."


측은한 표정의 진도. 그를 다정히 안으며 아진이 속삭였다.


"한달에 두번정도는 계속 만날 수 있어요. 친구네 놀러간다고 속이고..."

"응, 난 그거면 돼."


교생선생님보다 더 잘생기고 테크닉 좋은 돈줄이 생겼다는 생각에 아진은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추며 웃어보였다.

 


"야, 아진!! 강아진!!"

"후우."

"한숨이냐 보자마자? 강아진, 오늘부터 내가 집에 데려다줄께."


옷을 갈아입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새 돈줄을 물색하려던 아진은 귀찮음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요?"

"왜라니. 너처럼 이쁜앤 나처럼 힘센 남자가 집에 데려다주는거야."


장난스런 효범의 말을 무시한채, 그녀가 타탁 달리더니 문을 닫으려던 마을버스로 쏙 들어가벼렸다.


"아, 앗! 가, 강아진!! 야아!!"


혀를 메롱 내밀어보이는 아진을 기가막힌듯 쳐다보는 효범을 보며 주위 아이들은 배꼽을 잡았다.


아진은 옷을 갈아입고 혼자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귀를 어려서부터 뚫어놓은 아진은 귀걸일 좋아했다. 백화점을 둘러보던 중 저


멀리에서 남자 여럿이 돌아다니다가 귀걸이를 구경하는 아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우와, 이쁘다. 너 이거 사려고?"


보스격인 권병재가 그녀에게 말을 걸며 위아래로 완벽한 아진의 몸매를 훑어보았다.


"사던 말던."


좀 어려보인다는 생각에 돌아서려던 아진. 그런 아진의 앞에서 지갑을 연 병재가 가볍게 플레티넘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가져. 어울려."


자기 지갑에 있던 20만원으론 못살것이 분명하던 30여만원짜리 귀걸이를 망설임조차 없이 사준 남자.


아진은 눈을 깜빡이며 얌전히 귀걸이를 받아들었다.


"오늘 나랑 놀아주면 더 좋은거 사줄께."

"....더, 좋은거?"


생긋, 웃은 아진이 병재에게 팔짱을 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진은 중학교 2학년이, 선우는 5학년이 되었다.


병재, 식당 매니저 진도, 그리고 채팅으로 만난 중년의 남자.


이렇게 셋을 돈줄로 잡은 아진은 학교에서는 완벽한 얌전한 부잣집 공주님이었다.


하지만 학교가 끝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식당매니저와 뜨거운 정사를 즐긴 뒤 병재와 술집과 나이트에 드나들었고, 가끔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는것이 아닌 중년의 아저씨와 호텔 스위트룸에서 뒹굴어주고 거액을 받았다.


성숙해보이는 그녀의 외모와 오묘한 분위기는 그들 모두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강성훈은 미국을, 민주는 중국에 볼일이 있어 집을 비운 어느날이었다.


아진은 갑자기 남자의 몸이 그리워져 병재와 진도에게 연락해보았지만 둘 다 바쁜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축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선우가 더워하며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야, 이리 좀 와볼래?"

"응 누나. 왜?"


샤워를 마친 선우는 순순히 누나의 방으로 향했다.


"이것좀 봐, 너 이런거 본 적 있어?"

".....으, 응....."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운 남자와 여자의 선정적인 움직임.


키가 자라기시작해 이젠 아진과 같은 167의 선우. 아진은 곱상히 생긴 선우를 귀엽게 여기고 있었다.


"근데 누나 이런거 보는거 들키면 혼날텐데."

"안혼나. 안들키면 돼... 누나가... 가르쳐줄까?"


아래쪽이 이상하게 빧빧해지는 느낌에 선우가 몸을 꼬자 아진은 선우가 왜 그러는지 눈치채고 선우의 그곳으로 손을 향했다.


"이렇게 흥분했으면서. 너 여자 알몸 본적 없지? 실제로?"

".....으응."

"후훗... 귀여워."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그대로, 아진은 선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 여기를 만지면 내가 기분이 좋아져...응, 그리고 내가 흥분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미끌거리게 젓어들고."


선우는 얼굴을 붉히며 무언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아진이 훌훌 옷을 벗자 드러나는 눈부시게 하얀 살결.


그리고 아름다운 핑크색 가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나, 그래두 우리... 이러는건..."

"아냐 선우야. 누나가 시키는대로 얌전히 따르면 너도 기분이 좋아질거야."

"안돼 누나...아읏!"


그녀가 그의 위로 앉으며 그를 자신의 뜨거운 몸으로 집어넣었다. 그녀가 움직일때마다 느껴지는 쾌감에 선우는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그녀는 선우가 절정을 느끼자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닦아주었다.


"조금 더 하고싶었는데. 좀만 참지. 하긴, 넌 처음이니까."


선우는 그녀가 자신을 닦아주는 손길에 다시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감지한 아진이 생글, 웃었다.


"다시 커지려고 하는데? 좋아, 이번엔 니가 위에서 해 선우야."

"누, 누나 나..."

"내가 다 가르쳐줄께."


손으로 선우의 그곳을 능숙하게 문지르며, 아진은 선우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2부 외전, 강아진 하편-

 

강아진을 중심으로 있던 4명의 남자는 처음과는 달리 벨런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리야. 너 왜 나한테 일주일에 한두번만 연락하는거야? 공부하느라구?"

"집에 들키면 안돼거든, 병재오빠."

"그럼 내가 하교길 데려다주거나..."

"나 학교에서 노는애로 찍히기 싫어, 미안해."


병재가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길 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아리, 너 그냥 집 나와서 나랑 살자."

"진도오빠, 나 졸업은 해야지."

"내가 투잡을 뛰어서라도 너 대학까지 다 보내줄께. 사랑해, 결혼하자."


후우, 아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이제 진도까지 자긴에게 집착을 보인단말인가.


"아리 집 얻어줄까?"

"네? 아저씨?"

"집 말이야. 내가 좋은 오피스텔 얻어줄테니..."

"집에 들킬일 있어요? 저 안돼요 그런건. 그런거면 우리 그만만나요."

"내, 내가 잘못했어 아리야."


심지어 중년의 아저씨도 아진에게 서서히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심한 한사람은 바로 주효범. 바로 옆 사립교고로 진학한 그는 아진을 방과후마다 따라다녀 아주 질색하게 만들었다.


하루는 진도와 팔짱을 끼고 아이스크림을 사서 진도 집으로 향하는데, 주효범이 앞을 가로막았다.


"강아진!! 너, 너 이자식 뭐야!!"

"응? 아리야, 아는애니?"

"너 지금 원조하는거야?! 이 아저씬 뭐냐고?"

"뭐? 원조? 하, 참 기막혀서. 나 얘랑 결혼할사이다. 됐냐? 애송이, 꺼져."

"겨, 결혼?! 지금 나이가 몇인데 결혼이야!!"

"졸업할때까지 기다릴거야."

"뭐어!!!"


혹시나 자신의 나이가 나올까 두려워 아진은 진도의 팔을 이끌었다. 20대 중반인 진도였지만 효범에겐 아저씨 이상으론 안보였다.


뒤돌아 진도의 팔짱을 끼고 사라지려는 아진. 효범은 자신도 모르게 길거리에 버려진 깨진 보도블럭을 집어들었다.


"이익--! 이얏!!"


퍼억, 머리를 강타당한 진도였지만 쓰러지지 않고 뒤돌아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아진은 하얗게 질려 도망쳤다.


이 사건으로 머리를 잘못다친 진도는 반신불수가, 그리고 효범은 소년원에 가게된다.

 


아진은 귀찮던 두사람이 없어져 다행으로 생각하며 다시 돈줄을 물색하려 했다.


그러던 중, 학교에 선배였던 효범이 아진이 웬 아저씨를 만나 그남자를 때리고 소년원에 가게되었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태연히 부정하던 아진이었지만, 소문의 중심이 효범에게 그 말을 직접 전해들은 친구들이라 소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작은아빠, 작은엄마... 흑, 저 요즘 말도안돼는 소문때문에... 따돌림 당해요..."

"뭐어?!"

"흐흐흑, 저두 선우 이번에 미국갈때 같이 가면 안돼요?"

"아진아..."


이렇게 이쁘니 소문에 안 시달릴리가 있나, 하고 성훈부부는 아진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6학년으로 올라가던 선우와 중3으로 올라가던 아진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 선우는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에 잠을 못자고 뒤척이다가 아진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근데 그 사람은 괜찮아? 더 나아지진 않을거래?"

"누구? 주효범?"

"아니, 진도라는 사람."

"응, 죽을때까지 몸 반 못움직인대. 불쌍하지만 어쩌겟어."


냉랭한 아진의 목소리. 하지만 그조차 선우에게는 '그사람을 사랑하던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을 주었다.


어리고 다루기 쉬운 선우에게 자신의 남자관계를 자랑하듯이 이야기해준 아진. 아직 어린 선우는 아무말 없이 아진의 편을 들었다.


'누나는 외로운 사람이라 여러명이 필요한것 뿐이야. 그리고 난 누나가 원하는것을 다 들어줄 능력이 아직 없으니까.'


선우 안에서 처음 싹튼 사랑은, 이렇게 삐뚤어져 있었다.


'내가 커서 돈이 많아지면, 그러면 누나에겐 나만 필요할거야. 공부를 많이하면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된댓어.'


이미 신문의 경제면을 거의 이해하며 읽을정도로 똑똑해진 선우, 그런 영리하고 귀여운 선우를 아진은 인형처럼 아꼈다.

 


할머니댁에서 Elementary School로 가게된 선우. 이미 한국에서부터 원어민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아놓은 상태라 언어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아진도 선우와 같이 과외를 받아서, 이미 말문도 귀도 트인 상태였다.


하이스쿨에 아진의 전학은 작은 폭풍을 일으켰다. 모든 남자아이들이 섹시하면서 청순한 그녀의 등장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한국에서 다니던 사립학교완 다른 퍼블릭스쿨의 거친듯한 이미지에 그녀는 살짝 쫄아들었다.


'몸 사리고 다녀야겟다.'


반에서 반으로 옮겨다니는 익숙치 않은 수업방식에 그녀가 조금 당황스러워할때 그녀의 옆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가섰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그 그룹이 이 학교에서 잘나가는 편일것이며(다른아이들이 눈도 못 마주치니까) 그중 보스격인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것을 알았다. 하지만 요녀 아진은 눈을 내리깔며 이런저런 질문들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So are you going to ignore me all the time like that?(그래, 그런식으로 계속 사람 무시하려고?)"


그제야 눈을 들어 자신을 맑고 큰 눈으로 바라보는 아진. James는 가슴이 쿵-내려앉는것을 느꼈다. 흑인이 많은 이 학교에서


아시안을 중심으로 뭉친 그룹의 보스격인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그의 카리스마에 먼저 반해 접근하기 마련인데,


오늘 전학온 여리여리해보이던 동양인 계집애는 그에게 관심도 없어보였다. 하긴, 자신에 대해 몰라서일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Do you wanna be my friend?"(나랑 친구하고싶어?)

"Maybe. I'm kind of interested about you, newcomer."(어쩌면. 뭐, 좀 관심이 생기거든, 전학생.)

"Sorry. I'm not interesting. Go and find something else."(미안. 난 관심없어. 다른것을 찾아보도록 해.)


도도한 그녀의 모습에 제임스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진은 방과 후 집으로 가려 스쿨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너, 한국계였다며?"


약간은 2세특유의 발음을 섞은 한국말로 어제 그 아이, 제임스가 빨간 오픈카에 탄채로 말을 걸어왔다.


"타, 데려다줄께."

"....흐응."


컨버터블(오픈카)은 처음 타보는것이라 호기심이 동한 아린이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옆자리에 다가섰다.


"여자친구 없어?"

"헤어진지 두달?"

"딴여자랑 싸우기 싫어. 애들이 그걸로 나 미워하는건 더 싫고."

"걱정마. 누구도 너 함부로 못해, 나랑 사귀면."


그거 나쁘지 않군. 생각한 아린은 곧 그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제임스는 순진해보이던 아진과 첫 잠자리에서 그녀에게 푹 빠져들어버리고 말았다.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고 침실로 끌어들인것은


분명 자신인데, 밑에서 쾌감을 못이기고 신음해야할 그녀가 오히려 위에서 리드를 하고있었다.


"하아, 좋아, 조금 더 빠르게..."


지금껏 자 보았던 어떤 여자들보다 아름다운 몸과 끝내주는 테크닉. 오는여자 안막고 가는여자 안잡던 그는, 처음으로 아진을


'가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는 아진도 자신을 똑같이 바라고 사랑하길 원했다.

 


"아진누나, 누나?"


아진의 방에 빌려주었던 후디를 받기위해 들어간 선우는 아진의 옷장 안을 뒤지다가 현관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키키, 옷장에 숨어있다가 방에 들어오면 왁!! 놀래줘야지.'


그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남자친구 제임스와 함께였다.


"집에 아무도 없네."

"말 돌리지 마. 오늘 그 Niggar(깜둥이)랑 뭔 수작을 한거야?! 그자식 너한테 파티 쿠폰 줬지? 갈거야?"

"안가. 제임스 두고 내가 어디가."

"진짜야?!"

"당연하지...후후..."


그를 침대에 눕히고 키스하는 아진. 옷장속에서 숨을 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는 선우.


"나 한번 묶여서 해보고싶어."

"뭐?! 하하하, 이 Kinky Girl."

"Nasty and Naughty 아진."

"하하하하"


그가 웃으며 장난으로 그녀를 그녀가 신고있던 스타킹으로 침대에 묶었다. 선우는 묘한 느낌에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떼지 못했다.


"하아, 더 흥분돼... 더, 더 거칠게..."

 


짜악-!! 그녀의 하얀 뺨이 붉게 물들며 고개가 팩 돌아갔다. 제임스는 그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흑인들이 열은 파티에 가서


약을 한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중 자신과 친한 흑인 여자아이들이 챙겨주지 않았으면 누구에게 끌려가 당했더라도


한마디도 못할 상황이었다.


"너 왜 거기 간거야. 안간다며!!"

"하지만 너도 파티때 약 하잖아, 나도 해보고싶었어."

"안좋은거라 넌 배우게 하기 싫었어."

"기분 좋던데 뭐. 나중에 같이 하자. 약 먹고 해보고싶어."

"너 정말... 넌 아무것도 몰라. 그거 위험한거야."

"흐응. 난 좋기만 하던데."


이미 약이 주는 몽환적 느낌에 빠져들기 시작한 아진. 선우는 그런 아진과 제임스의 대화를 엿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긴 아니다. 아진은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약이 없는 세상으로 가야만 한다.


결국 얼마 후 선우는 부모와의 통화에서 아진이 약에 손을 대는것 같다고 슬쩍 비추었다.

 


"선우 너지."

"누나, 왜그래."

"니가... 작은아빠랑 작은엄마한테 그랫지. 나 약한다구."

"뭐?"


부모님이 거의 1년만에 미국으로 방문한 그날, 아진을 병원에 데려간 성훈부부는 약물 양성반응이 나온 아진에 실망해 돌아왔다.


"내가 제임스랑 붙어다닌게 질투났어? 너도 다른 남자들과 똑같구나. 날 가지고 구속하려 들던 남자들과."


눈에 어린 독기. 선우는 깜짝 놀랐다. 항상 자신을 귀여워해주던 그런 아진이 아니었다.


"겨우 1년만에 돌아가게 되다니. 다 니덕이야 선우야. 고마워."


냉정한 얼굴로 씨익 웃어보이는 아진.
 

선우는 몰랐다. 그날 아진이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부모에게 독기를 품었음을.

 


한국에 온 아진. 고등학생이 된 그녀는 여고로 진학해 문제없는 얌전한 학교생활을 시작했고 그런 그녀를 보며 민주와 성훈은


마음을 잡은것이라 생각해 안심했다. 중학생이 된 선우는 태윤과 친해져 자주 같이 집에 놀러오곤 했다.


"아진누나 안녕!"

"태윤이 왔구나."


부드럽게 웃으며 과일을 깎아주는 아진. 태윤은 선우에게 아진같은 누나가 있어 부럽다고 투정을 부려댓다.


전과 달리 아진은 남자에대한 이야기를 선우에게 하지 않았다.


선우는 이제 만나는 남자가 없는가보다 단정을 지었고 그래서 더더욱 아진이 좋아졌다.

 


"하아, 외국에 1년 있다 오더니 더 이뻐졌어, 아리."

"으응, 아저씨, 나 돈 좀 더 주면 안돼요 오늘?"

"왜?"

"나... 살게 있는데 돈이 없어서..."

"그래 내가 더 챙겨줄께. 자주 만나줘 제발..."


연락을 끊었던 중년 아저씨를 만난 아리는 그에게 받은 돈으로 도청장치를 샀다.


집의 전화기 근처마다 장치를 한 그녀는 곧 민주가 권교수란 남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있다는것을 알아냈다.


권교수와 플라토닉하게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가정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던 민주.


그런 그녀의 대화를 녹음해가며 아진은 '파멸'을 계획하고 있었다.

 


"집이 완공되었어. 이제 곧 이사갈거야."


건축학 강사인 민주가 설계한 집. 3년만에 완공된 집에 쏟은 그들의 정성은 이루 말 할수 없었다.


선우와, 그리고 아진과 같이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살 생각에 부부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누가 행복하게 놔둘줄 알고'


아진은 냉랭히 웃으며 테이프를 꺼내들었다.


자신이 토막토막 녹음해둔 민주와 권교수의 '오해하기 딱 좋은' 대화만을 녹음 한 테이프.


중 3인 선우도 분명 부모의 불화가 있다면 입시에 영향이 있겟지 하고 생각하며 아진은 봉투에 테입을 넣었다.

 


선우의 부모는 그 테입을 발단으로 다투기 시작하더니, 1년만에 도장을 찍었다.


아진은 가증스럽게도 그시간 내내 선우옆에서 '다 잘될거야' 라며 선우를 위로해주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아진은 대충 짐을 꾸려 사라졌다. 미국으로 간다는 쪽지만을 남기고.


그녀가 간 뒤 뒷뜰 정원을 관리하다가 파뭍혀있는 도청장치를 발견한 선우는 얼어붙었다.


'강아진, 너였어? 아버지에게 테이프를 보내 엄마가 불륜인양 떠든게, 너였단 말이야?! 1년간 괴로워하던 날 위로하던... 니가...

니가 바로 우리집을 파탄나게 만든 장본인이었던거야?!'

 


선우는 변했다.


여자아이들을 가볍게 대했으며 누구에게도 본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양 가면을 쓰고 가짜 여친을 내세워 여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학교 밖에서는 온갖 악행에 주도해서


건방지거나 주제를 모르는 년은 여럿이 모욕을 주고 상처를 줘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다 똑같다. 특히 강아진처럼 더럽던 년은 구해줄 가치도 없다. 평생 그 바닥에서 썩어야지만 한다.

 


"할머니, 오랫만이예요."

"선우야..."


할머니가 울고있었다.


"아진이가 죽었다. 약물과용이래... 지금 니네 아빠한테도 연락해서 아빠가 병원으로 가고계셔. 엘에이라더라."

"....무슨...."

"아진이 여권에 비상연락이 아직 내 번호였나봐. 나한테 연락이 왔어. 아진이... 흑, 그 가여운것."


선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마냥 그녀를 증오해온 시간이 허무해졌다.


그가 대학생이 된지 1주일 된 날의 일이었다.

 


"여기 물 왜이래. 진짜 오크녀들만 오는 짐승탕이잖아."

"하하, 야 난 하마도 봤다."

"그냥 룸에 올라가서 자다가 밤에 나이트나 가자. 눈 썩겟다, 나가자."


친구들의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며 호텔 풀장의 여자들을 구경중이던 강선우는 저 멀리 보이는 하얀 원피스 수영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순진해 보이는 얌전한 디자인.


긴 머리칼과 하얀 피부는 그에게 강아진을 잠시 떠오르게 했지만 귀엽고 키가 작은, 아진과는 또 다른 그녀였다.


"어? 선우 너 어딜보는거야? 저기 저 작은애?"

"......비율 좋지?"

"진짜 비율 괜찮네. 다리도 이쁘고 엉덩이도 귀엽고. 근데 너무 어려보이지 않아?"


강아진이 저 나이일때를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지은 선우.


"요즘 고딩들중에 저런몸매 가진 버진 없다."

"하긴 주위에서 두고봣겟냐? 크크크"


하지만 음흉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친 태윤이 반갑지 않았다.


강아진은 죽었다. 강아진을 닮긴 했지만, 저 아이는 순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꼬시면 방까지 따라올걸."
"스위트룸이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따라올거다."


다른친구들의 맞장구를 들으며 선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만에 하나라도 니가 순수한 여자라면, 내것으로. 나만의 것으로 만들겟어. 강아진처럼 더럽혀지도록 버려두지 않을거야.'


-2부 5-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가, 강아진에 대한 모든거야."


태윤에게서 예린이 아진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우.


그는 잠에서 깨어난 예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강아진에 대해 모두 이야기 해주었다.


"그럼... 부모님의 이혼도..."

"강아진의 손바닥에서 놀아난거랄까. 우리엄마, 소심해서 바람을 피울 여잔 아니었어. 아빠랑 자주 다투면서 권교수랑 가까워진거지.

그 테이프 나도 몰래 들어봤는데 2년동안 우리 엄마와 권교수 대화내용중 오해할 소지 있는부분만으로 기가막히게 편집되어있었어.

강아진이 잔머리 잘 굴리는건 알았지만 그런일 저지를만큼 우리한테 독기를 품었다는건 몰랐지. 나도, 우리 부모님도."

"그럼 그사람... 미국의 전 남자친구한테 간거야?"

"한 2개월 같이 살다가 다투고 다른남자와 같이 라스베가스로 가서 살았어. 쇼걸로 일하다가 또 갱스터 두목 눈에 띄어서 그남자

첩으로 살다 부하랑 눈맞아서 돈 들고 엘에이로 도망쳤지. 약물과다로 죽었다지만 경찰에서는 타살 의혹도 제기했어. 뭐랄까,

굵고 짧게 살은 여자란 생각이야 지금은. 1년 넘게 그녀가 우리 부모 싸우게 만들어놓고 날 위로하던걸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꺼꾸로 솓는것 같긴 하지만, 마지막을 생각하면 벌받은거니까."


다른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한 선우. 예린은 그런 선우가 낯설어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오빠. 그래두 오빠 첫사랑이잖아. 안슬펏어? 안울었어?"

".....내가 왜울어 그런 악녀를 위해서."

"하지만 오빠 그사람 좋아하고 의지했다면서. 그러니까, 울고싶으면 울어도 돼 오빠."


예린의 맑은 눈이 그의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그의 가슴 한켠이 지잉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진과 닮은 여자. 하지만 아진과는 180도로 다른 그녀, 예린이 자신을 위로하고있다. 슬퍼해도 괜찮다고.


툭, 뻗은 예린의 손목으로 선우의 눈물이 떨어졌다.


"이리와 오빠."


자신보다 한참 작은 예린의 품에 안겨서 선우는 그간 쌓아왔던 설움을 씻어내듯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의 이혼이 자신의 탓인양 생각이 될때마다, 아진이 죽이고싶만큼 미울때마다 쌓인 분노와 울분.


작디작은 예린의 따뜻한 품은 그의 설움을 모두 받아주고있었다.

 


"예린아, 엄마왔다!"

"엄마, 아버지, 오셨어요."


복잡한 공항에 나오지 말라는 말에 집에서 부모님의 저녁을 둘이 함께 준비한 예린과 선우.


성훈과 주영(예린엄마)은 이미 사이좋은 남매의 모습을 한 두사람이 기쁘고 반가웠다.


"우와, 이거 니가 다 준비한거니? 선우야?"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예린인 요리 못하거든."

"엄마, 나도 많이 도왔다 뭐!"

"포크 놓고 그릇 세팅이나 했겟지 뭐."


딱 알아맞춘 엄마덕에 얼굴이 새빨개진 예린. 나머지 세사람은 그런 예린의 모습에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앉으세요 스파게티 다 불겟어요."

"엄마, 전에 오빠가 스파게티 해줬는데 너무 맛있어서 내가 이거 또 해달랜거야."

"선우 예린이 밥도 해주었어? 그냥 아주머니께 차려달래지."

"식구도 얼마 없는데 아주머니가 뭐 식사까지 챙겨주세요. 괜찮아요."


네사람이 오붓이 앉은 식탁은 훈훈하기 짝이없었다.


그리고 선우는 식사틈틈이 예린의 손을 테이블밑으로 들키지 않게 잡았다.

 


"너 변했어."

"응? 주연아?"

"아앗! 이거, 이번시즌건데. 한국에 딱 2개 들어온거라 나도 못구한 이 희귀품을 어디서 난거야?!"


수연이 예린의 새 가방을 탐내며 살피는동안, 주연은 예린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여자냄새가 나는게, 너 연애하지?"

"어머, 진짜루?! 예린이 연애해??? 누구랑? 어떻게 만난거야!"


호들갑을 떠는 수연의 입에 오렌지주스잔에 꽂힌 빨대를 갖다 물린 주연은 어딘지 모르게 변한 예린이 탐탁치 않았다.


"흠... 뭐랄까. 그것도 그냥 연애가 아니라 나한테 말 못할 연애 같다는거지."

"무슨... 아니야 주연아."

"아니야?"

"아니야."

"근데 난 왜이리 찝찝할까. 전에없이 바빠지고 문자도 자주 안하는 너. 옷차림이며 분위긴 사랑에 빠진 여인네인데 남자친구

보여준단말은 한마디 없고. 거기에 못보던 명품이 등장하고."

"아, 이건 선우오빠가 단골 가게 갔다가 예뻐서 하나 사준거야."

"하나? 내가 본것만도 세개째인데?"

"그냥, 좀 잘 사줘."

"강선우 너 좋아하는것같아."


얌전히 오렌지쥬스를 들이키던 수연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주연의 등을 짝~! 소리나게 때렸다.


"아얏! 언닛!"

"이기집애 못하는말이 없어. 선우오빠가 예린이 이뻐하는게 질투나니? 선우선배, 절대 법에 어긋날짓 할 사람이 아냐. 내가

장담한다구! 하물며 이제 여동생인 예린이한테 흑심을 품어? 야, 주연이 너 글 잘쓰는건 아는데 이건 좀 아니다?!"

"흥, 언니야말로 눈뜬 장님 아냐? 어떤 오빠가 여동생한테 명품을...아얏, 아야!! 진짜 아파!!"

"나한테 저번에 루이비통 가방 뜻어낸 니년도 있잖냐!!"

"그거야 내기에서 진거구! 아, 그만때려!"


수연의 등살에 주연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예린은 두사람을 향해 밝게 웃었지만 무릎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래? 눈치 백단이네 주연이란애."

"아무래도 유치원부터 붙어다닌 친구이니까..."

"자주 만나지 마. 들키진 않는대도 너도 마음 불편하잖아."


선우는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예린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녀의 코에,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그러는데, 나 당분간 오빠가 사준것들 하고다니지 말..."

"안돼. 싼물건 니 몸에 걸치는거 싫어."


그가 자신의 품에 예린을 가두었다. 작은, 그리고 사랑스러운 그녀.


"선우야, 자니?"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예린은 하얗게 질렸지만 선우는 이불 아래로 그녀를 넣고 태연히 대답했다.


"아뇨, 들어오세요."

"우리 내일 미국가거든. 아마 한 1달정도 머물것같아. 예린이 좀 잘 챙겨줘, 알았지?"

"네, 걱정마세요."


이불속에서 선우에게 꼭 붙어 떨고있는 예린을 눈치채지 못한채 예린의 엄마는 생긋 웃으며 문을 닫았다.


"가셨어, 나와."

"........"

"너 울어?"

"....오빠, 나 무서워."

"무서워하긴, 우리 부모님 자주 집 비우시잖아. 그리고 원래대로면 너랑 내가 먼저만났어.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행복하고, 우린

우리대로 행복하면 되는거야. 그것뿐이야."

"하, 하지만..."

"사랑해."


그의 손이 그녀의 잠옷 안으로 스륵, 들어와 부드러운 가슴을 감싸안았다. 예린은 신음소리를 참으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안돼, 오빠, 엄마 다시 올라오심...."

"다시 안오셔."


가슴을 애무하는 손길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예린은 신음을 참는것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으..."

"사랑해, 사랑해 예린아."

"으...."

"사랑해"


그녀를 안으면서 그녀의 귀에 천만번도 더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그.


달빛아래, 곤히 잠든 그의 품을 빠져나오며 예린은 고민했다.


'내가 가진 감정은 과연 어떤걸까. 난 선우오빨 사랑하는걸까? 아니면 단순히 두려워하는걸까.'


그에대한 감정은 정리하기 힘들만큼 종류가 많았다. 공포, 애틋함, 다정함, 두려움, 반항심, 동정, 미우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선우오빠. 난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는걸까.'

 


"선우선배랑 예린이, 요즘들어 부쩍 자주 붙어다니는것 같애."

"몰랐어? 저 두사람 부모님끼리 여름방학때 재혼하셔서 이제 남매야."

"뭐? 진짜? 그래서 저렇게 친해진거구나."

"응. 근데 둘이 진짜 잘 어울리지 않냐?"

"그러게. 아깝다 남매라서."

"둘이 좋아하기라도 했으면 금단의..."

"남의 이야기라고 함부로 하지 마. 선우선배 좋은 사람이야."


평소 선우를 동경하던 장미가 같은 동아리인 건우에게 헛소리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선우선밴 좋겟다. 예린이처럼 이쁜 여동생도 생기고."

"흠, 나도 좀 이쁘지 않냐?"

"넌 이쁘긴 한데 너무 나대서 싫어. 예린이처럼 얌전하고 다소곳한 애가 딱 여동생으로 삼고픈... 끼약!"


난간위를 걸으며 빈정거리던 건우를 팍! 옆으로 밀어버린 백장미는 선우와 예린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선우선배! 예린아!"

"어, 장미네~"

"오랫만이다 장미야."


방학 전에는 분명 자신과 더 친했던 선우선배가 이제는 남매란 이유로 예린이와 더 가까워진듯 보였다.


"서, 선배. 우리 오늘 볼링치러 갈건데, 낄래?"

"아니. 나 예린이 커튼 사러가는데 같이 가줘야 해서."

"응? 그래... 아, 나도 같이 가줄까?"

"아니. 커튼 사서 실으려면 뒷좌석에 공간이 필요해서 너 못태워, 다음번에 같이 놀자 장미야."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두사람. 손을 잡고있지 않은데도 연인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치이, 뭐야. 지네 부모가 결혼했지 지네가 결혼했나. 왜 신혼분위기가 풍겨... 칫."


잔뜩 토라진 장미는 저 멀리 건우가 바람맞은 자신을 가르키며 웃어대는것을 보고는 한대 쥐어박으러 달려갔다.

 


"장미도 데리고 오지... 커튼 트렁크에 실으면..."

"진심이야?"


선우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예린에게 질문했다. 예린은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랐다.


"진심이면 내 눈 보고 말해."

"이러지마..."

"얼굴 돌려."


고개를 돌린 예린의 붉어진 얼굴. 선우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뺨에 쪼옥 입을 맞추었다.


"장미 데려오면 둘이 데이트 할 수 없잖아. 난 신혼부부라고 하면서 커튼 고를 예정이었다구."

"커튼 하나 고르는데 무슨 거짓말을..."

"잠시 꿈을 꾸는것도 죄인가."


허무한듯이 말하는 선우의 눈이 외로워보여서 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선우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그런표정 하지마."

"....사랑해."

"......"


그가 사랑한다고 하면 예린은 항상 말문이 막혔다.


그가 바라는 대답은 알고있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모르는, 바보같은 그녀였다.

 


"아앗, 오빠... 나, 느낄것같애... 지금..."

"하아, 나도, 지금...아앗!!!"


그녀의 파르르르 떨리는 몸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으며 그는 그녀 안에 가득이 자신을 채워넣었다.


"흐읏, 오빠... 이제 그만..."


그녀안에 잔뜩 쏟아부었는데에도 그의 분신은 줄어들지 않고 더, 더 그녀를 가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예린아, 사랑해..."

"하아, 오빠..."

"난 너 죽으면 따라죽을거야... 절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돼..."

"그, 그런말... 하지마..."


하지만 그의말은 어느정도 그녀에게 '감정'에 대한 잣대를 주었다.


강선우가 죽는다면, 자신은 과연 그를 잊고 살아갈 수 있을것인가.


"하으, 오빠, 이제 그마안..."

"조금만 더... 아, 너무 좋아 예린아, 허릴 조금만 더 들어줘..."


가늘은 그녀의 허리를 들어올리며 그는 조금 더 그녀의 안으로 들어오려 움직여댓다.


'오빠가죽는다면, 그런다면...'


그의 단정한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지채 자신의 몸에 집중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사랑해' 속삭이며 손을 잡아 키스하는 선우.


'전에는 이 사람이 세상에 없기를 바랬는데'


그녀는 점점 견딜 수 없이 느껴지는 오르가즘에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가 눈치채고는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핥았다.


"아으으, 예린아아아..."


그의 움직임이 미친듯이 빨라졌다. 예린은 부서질듯 움직이면서 그에게 속삭였다.


"오빠, 나도 오빠가 많이... 좋아..."

"정말? 진짜 좋아?"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자신을 두려워하고 도망치기를 갈망하던 그녀가 자신의 손 안으로 얌전히 날아들자, 선우는 세상을 손 안에 넣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겟어."

"걱정마. 니가 사랑이라고 믿을때까지 내가 곁에 있을거야. 난 평생 니곁을 떠나지 않을거니까."

"....하지만, 앞으로 오빠도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야만 하잖아."

"그런건 걱정하지 마. 우리 결혼하지 말고 이렇게 둘이 연애하면서 평생 살자."


평범하게 남편과 아들하나 딸하나 낳고 큰 집에서 고양이랑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싶던 예린의 작은 꿈.


선우를 마음에 담기 시작한 순간, 예린의 꿈에는 챙-하고 잔금이 가기 시작했다.

 

-2부 6-

 

"안녕하세요."

"어머, 주연아!! 오랫만이야 얘... 이젠 너도 숙녀티가 나는구나? H일보에 취직했다는 이야긴 들었어."

"뭐... 아직은 수습기간이예요. 예린인 몇번째인가요?"

"응, 세번째. 예린이 드레스 못봤지? 아주 내 딸이지만 오늘 꾸며놓고 보니 진짜 인형같아."

"고슴도치같아요 이모. 비단결 내새끼~"

"하하하하, 그래. 수연이도 오늘 호주에서 전화해서 예린이 졸업연주 잘하라고 응원햇다더라."

"언닌 나한테보다 예린이한테 전화를 더 자주한다니까요."


강성훈이 다가와 주영의 손을 잡았다. 주연은 꾸벅, 성훈에게 인사를 한 뒤 주영과 함께 연주회장으로 입장했다.


예린의 차례. 아이보리색의 실크드레스를 입고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쓴 예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예린의 연주를 감상하다가


고개를 돌려 성훈 옆의 선우를 확인한 주연은 선우의 황홀한듯 예린을 바라보는 시선에 쯔쯧 속으로 혀를 찼다.


'귀신은 속여도 내 눈은 못속여, 저게 여동생을 바라보는 오빠의 눈이라고? 지금껏 숨겨온것도 용타.'


베이스가 미국인 아버지의 사업을 위해 미국시민권을 택한 선우는(민주가 2세여서 선우는 미국에서 태어남) 아버지 사업의


한국지부를 맡아 건실하게 운영해나가는 중이었다. 이상태대로면 10년정도 후, 선우가 30대 중반이 되어 모든 사업을 물려받고


강성훈은 목표대로 이른 은퇴를 해서 여행을 하며 주영과 노후를 보내는것이 목표였다.


"선우오빠, 오랫만."


항상 선우를 만날때면 까칠한 주연. 그런 주연이 살짝 눈엣가시이지만 겉으로는 항상 친절한 선우가 상냥히 미소지었다.


"그래, 오랫만이야 주연아."

"사업은 잘 배우는중?"

"응. 이번에 푸드앤코와 정식 계약을 맺었어."


한국에서는 미국으로 나가려는 업체를, 미국에서는 한국에 진출하려는 업체를 돕고 커미션을 받는 아버지의 산업을 키울 남자.


'아깝다, 강선우. 니가 예린이 오빠가 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널 싫어하진 않았을거야.'


훤칠하니 잘생긴 선우가 나타나자 알아챈 후배 여학생들이 곧 아는척을 하며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예린에게 줄 꽃다발을


든 채로 여자들에게 파묻히는 그가 보기 싫었던 주연은 곧 그의 곁으로 다가서 팔짱을 끼며 여자들을 흘겨보았다.


"일행 있는거 안보여요? 성가셔."


뾰족한 주연의 태도에 '뭐야 저 멀대처럼 큰 여잔' 하면서 물러나는 후배들.


푸하하, 웃음을 터트린 선우는 그런 주연의 모습에 진주가 겹쳐지는것을 느꼈다.


'그래, 어딘지 내가 이주연을 대하기 껄끄럽던 이유... 진주를 닮아서도 있었어. 어쩌면 그래서 예린이 진주를 쉽게 믿기도 했겟지.

자기 베스트인 애랑 성격적으로나 외모적으로 많이 닮아있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이주연은 눈앳가시이다, 그에게는.


"오빠, 이거 나 주려고 가져온거야? 엄마, 나 중간에 반짝이가 자꾸 건반에 떨어져서 지금 손이랑 다 반짝거려, 어떻게해?"

"흥분했어? 왜이리 말이 빨라. 반짝이 엄마가 리무버로 닦아줄께."

"응... 오빠, 꽃 들고있어야해? 나 손 닦구 메이컵 수정만 하구 아버지랑 다같이 사진찍자."


생글생글 웃는 예린은 오늘 연주가 무사히 끝나 기분이 최고조로 달해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명품으로 예린일 길들일거죠?"


예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에게만 들릴정도인 작은 목소리로 주연이 선우를 비꼬았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클로에? 마크 제이콥스? 얼마전에 예린이 옷장을 보니 내가 알던 애가 아니더라구요. 내가 알던 예린이는

저렴한 물건도 소중히 여기고 깨끗이 쓸 줄 아는 애고, 그렇게 자라왔는데. 무슨 된장녀 옷장마냥 명품으로 넘치더군요. 대학4년간

오빠가 얼마나 잘~ 길들였는지 보는것 같아서 기분이 참 그랫어요. 왜 예린이를 바꾸려고 하는거죠?"


"....무슨소린지 모르겟네. 난 예쁜 여동생이 생긴게 좋아서 자주 선물을 사준것 뿐이야."


"그래요? 어떤 오빠가 한달에 하나씩 300만원이 훌쩍 넘는 가방을 사주고 명품옷으로 옷장을 채워주나요? 오빠덕에 예린이는

다른애들 다 한다는 그 흔한 레슨과외 한번 안해보고 졸업까지 하게되었어요. 오빤 그게 예린일 보호하려고 하는것이라 여기죠?

하지만 나에겐 예린이 날개를 꽁꽁 묶어두고 세상과 떨어진곳에 가두려는걸로밖에 안보여요. 부모님이 출장이다 뭐다 바쁘다보니

대학생인 예린이에게 신경을 안쓰고, 그런 예린일 곁에 붙들어두려는 오빠. 참 유치해요. 초등학생 연애방법이랄까."


"역시 미래의 기자답게 신랄하네."


"네, 제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신랄하죠."


순간 두사람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홱, 고개를 돌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 생각했는데... 화장을 고치고 온 예린이 어느새


뒤에서 두사람의 대화를 엿듣고서는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이주연."

"어."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너한테 말했잖아. 너 내 친구인데 그것도 못믿어?"

"....너 솔직히 무지 수상해."


속에 든 말을 감출줄 모르는 주연이 결국 때와 장소-예린의 졸업연주회장-를 가리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너도 좋아하는거 아냐? 제 3자인 내가 봐도 아는데 니가 4년가까이 모른다는거 말이 안되잖아! 이렇게 말도 안돼는 관계를

나한테까지 거짓말하면서 유지하고 싶어하는거라면, 넌 이미 내가 아는 예린이가 아냐."


냉랭한 분위기의 세사람. 곧 주연의 부모와 예린의 부모가 담소를 나누다가 세사람을 불렀다.


"얘들아, 사진찍자!"


굳은 표정의 주연, 억지로 웃는 예린, 얼굴은 자연스럽게 웃지만 속으론 불꽃이 들끓던 선우.


예린의 졸업연주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예린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부모님과의 식사 후 형재형이 운영하는 바로 예린을 데리고 온 선우.


하지만 딱딱히 굳은 예린은 그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않은채 묵묵히 칵테일잔만 꾸준히 비워나갔다.


"너 정말 나랑 말 안할거야?"

"....."

"예린아."

"....."


그때였다. 취한듯한 섹시한 여자가 선우의 옆으로 접근하더니 흐드러지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 애기는 오빠한테 관심 없나본데, 나랑 놀래?"

"....말 걸지 말고 다른데 가서 놀아. 귀찮게 하지 말고."


고개를 돌린 선우의 잘생긴 이목구비에 더 구미가 당긴 여자가 아예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왜? 나랑 놀자. 쟨 딱 보기에도 찌질이인데."


순간, 선우가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세게 잡은 그의 손 사이로 여자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허부적거리며 그의 팔을 뿌리치려는 그녀의 머리 위로 예린의 잔에 남아있던 칵테일이 흘러내렸다.


"찌질? 너 지금 누구한테 찌질이랫어?"

"오빠 그만해! 놔줘!"

"하지만 이년이 지금 너한테..."

"이러지 마."


예린이 침묵을 깨고 나서자 선우가 움켜쥐었던 턱을 던지듯 놓았다.


"괜찮아요?"


선우에게 당한 모욕에 벌벌 떨며 분노한 여자가 선우가 아닌 예린을 죽일듯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형재형."

"무슨일이야? 좀 소란하던데."

"저년이랑 저년 친구들 다 내보내."

"쟤들이 뭐 사고쳤어?"

"와서 예린이한테 시비걸었어."


시비를 걸다니, 오히려 시비를 걸은것은 선우쪽이 아니던가. 예린은 기가막힌 표정으로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너한테 찌질하다고 했잖아."

"....겨우 그걸로 그렇게 사람 모욕주면 어떻게 해."

"나한텐 막해도 돼. 너한텐 안돼."


예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녁 내내 그녀는 주연과 선우 사이에서 고민하고있었다. 선우가 자신을 놓아줄리도 없지만, 선우를


이미 마음속에 담아두기 시작하면서 친구와 가족을 저버려야만 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두려워하고있던 그녀였다.


"....나, 주연이랑 연락 안할거야."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아주 큰 결정임을 알고있던 선우는 예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

"....나도."


선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항상 사랑한다는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예린에게서 처음 나온 대답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나도, 사랑해..."


눈물을 흘리며 예린은 그렇게도 부인하던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뉴욕에 내게 된 지사야. 최소 반년간은 가서 물샐 틈 없이 관리해야지만 기반이 잡힐듯 싶구나."

"걱정마세요 아버지. 한국에선 제가 튼튼히 받쳐드릴께요."

"그리고 예린이 말이다, 본인은 대학원을 다니겟다고 하지만 예린엄마는 유학을 생각하던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쿵, 하고 울린 심장과는 달리 선우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요즘은 한국 대학원도 좋다고 들었어요. 전 딱히 유학을 권하고싶진 않네요."

"그래? 하지만 아버지 생각에도... 음악이란것이 원래 유학파들이 주도하는 세계라."


예린이 자신의 곁에서 하루만 멀어져도 그리움에 애가타는데, 유학을 떠난다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전 여자 혼자 보내는 유학 반대예요. 안좋은 길로 빠지는 친구들도 많고..."


말끝을 흐리는 선우. 성훈은 아진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시큰해졌다. 그래, 아진이처럼 망가지는 아이도 있었지.


"니가 옳구나. 그래. 너무 위험해."


아버지가 자신이 유도한대로 아진을 떠올린듯 마음을 접자 그제서야 한숨을 놓은 선우.


하지만 산넘어 산이 기다릴것이라곤 그도, 예린도 상상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강예린 양 댁이죠?"


부모님의 재혼으로 예린은 강예린으로 개명되어 졸업엘범에 실린 상태였다.


"무슨일이시죠?"

"어머님 계신가요?"

"어머니 해외 나가셔서 반년은 있다가 오십니다. 전해드릴 메모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저기... 혹시 예린씨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분이 있으신가요?"

"....혹시, 마담뚜같은거세요?"


선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빈정거리자 상대방이 당황한듯 부인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좋은 혼처에서 예린양의 졸업엘범을 보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세요. 산성계열사의 아드님이신..."

"예린인 이미 정해진 혼처가 있습니다. 주위에도 그렇게 전하세요."

"어머, 어디의 누ㄱ...."


달칵. 전화기를 내려놓은 선우의 눈이 불타고 있었다.

 


"원래 다 그런거야. 음대생에 학벌좋아. 얼굴이뻐. 집안좋아. 뭐 이정도 되면 괜찮은 스펙이지 강예린."

"....그래? 그럼 앞으로 계속 이렇게 선이 들어온다는건가?"

"선 뿐만이 아니라 주위에서도 접근이 치열해질걸. 어떤 마담뚜들은 친구 통해서 소개팅인척 접근하기도 해."

"뭐!?"

"선이라고 하면 부담스러워 하니까 친구를 돈으로 매수해서 소개시키는거지."

"무섭네. 근데 태윤이 넌 뭐 이런것들을 그렇게 잘아냐?"

"우리 사촌누나 셋이 다 예린이랑 같은과 선배님들이시다. 내가 뭘 모르겟냐? E여대는 더 심하대더라."


후우... 한숨을 쉰 강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피곤하고 걱정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분명 주위에서 가만 안둘텐데."

"....넌 걔랑 결혼할 수 없어. 알고있잖아."

"알아. 하지만..."

"그럼 놓아주어야지. 예린이 가정도 못꾸리고 평생 니 그늘에 살게할거야?"

"......."


어두운 표정의 선우. 태윤은 선우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2부 7-

 

같은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한 예린과 아버지 사업의 한국지부를 키워나가는 선우는 함께하는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언제든 깨질듯한 그 행복이 두려웠다.

 

 

선우는 틀어 막고 막아도 비집고 새어나온 사람들이 학교에서, 길에서, 전화로, 예린에게 접근할까 두려웠다.


잘나가는 선우 아버지의 산업과 결혼으로 든든한 연을 맺고싶어하는 많은 집안들.


거기에 예린은 좋은 학교를 졸업한 미인이어서 더 그 접근이 집요했다.

 

 

"예린아."

"?"


화창한 봄날. 예린은 정원에 앉아 들꽃을 들여다보며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너, 약혼해라."

"무, 무슨... 우린 그런거 안돼잖아, 오빠."

"아니."

"아니긴... 법적으로 분명히 금지..."

"나 말고."


선우가 웬 남자의 사진을 들어보였다.


"이녀석."

 


태윤의 사촌동생이라는 태언을 처음 만난 날. 예린은 사진보다 훨씬 곱상한 그의 외모에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170이 겨우 되는 키. 마른 몸매. 그리고... 여자라고 해도 믿을만큼, 예쁘디 예쁜 얼굴.


"반가워요, 난 박태언이라고 해요."

"전..."

"강예린. 알아요, 들어서."


나긋한 행동. 색스럽기까지 한 몸짓을 지닌 이상한 남자.


선우가 '가짜약혼남'이 되어줄 남자를 구했다면서 만나보라 해서 나왔지만 예린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왜 이런 연극을 해주시기로 한건가요."

"음... 날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예쁘세요."

"그쵸? 알아요. 그리고..."

"네?"

"게이."

"아, 네..."

"나, 게이예요. 동성연애자. 저쪽 테이블에서 혼자 커피 마시는 남자가 내 애인~"

"네에?!"

"모르고 나왔구나 자기."

"그, 그런말은 한마디...도..."

"그래서, 부모님께 연기해줄 애인이 필요해요. 커버해줄."

"아, 그렇군요."

"그쪽은 원래 사귀던 사람이 부모끼리 결혼으로 인해 오빠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측은한 표정의 태언이 톡톡,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비극의 여주인공. 딱 그거야 자기는... 내가 도와줄께요."

"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 예린에게 자신의 핸드폰번호를 알려준 그는, 그녀에게 다정히 웃으며 인사하고 사라져갔다.


"...어땟어?"


뒤를 돌아보니 선우가 와있었다. 예린은 화가나고 기가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오빠, 이게 무슨일이야. 약혼이라니. 게이인 남자랑?!"

"3년만 기다려."

"뭐?"

"3년 안에 해결 지을께. 그때까진 태언이랑 약혼한걸로 해줘. 나도 이렇게 하고싶지 않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

"3년안에 뭘 어떻게 해결지을건데."

"그 안에 아버지사업을 모두 인수받고, 두 분이 은퇴하셔서 세계여행을 떠나신다면..."

"그런다면?"

".....평생, 같이 있을 수 있어."


울컥 눈물이 나기시작해 예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우리 부모님이 나 결혼 안하고 평생 혼자사는것 두고 보실거같아? 태언이랑 결혼이라도 하라는거야?"

"그 방법도 생각해보지 않은건 아냐."

"뭐어?!"

"태언이랑 결혼하면 더 좋다는 생각도 했지. 계속 우리는 우리대로 사랑을 할거니까. 하지만 게이라고 해도 다른놈이 너랑 한 집에

산다는건 내게 큰 고통일거고, 너도 싫을거라는거 알아. 그래서 이 방법을 택한거야. 약혼으로 시간을 벌자. 3년, 더도 덜도 말고

따악, 3년만 기다려줘."

"그렇게 평생 같이 있으면? 오빠, 내 꿈은? 나, 어려서부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게 제일 큰 꿈이었어. 내 꿈은 생각도 안하고 그냥

평생 오빠의 그늘의 여자로 살아가라고? 게이랑 약혼에 결혼이라도 해서? 너무 이기적이잖아, 이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4년을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을 터트리듯이 외치고 만 예린은 커피숍에서 나와 빠른 걸음으로 호텔 로비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예린아!!"


그가 외치며 따라왔지만,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출발하고 있었다.


"제길...."


발레파킹 시켜두었던 차를 급히 찾아 따라가보았지만 이미 사라진 그녀.


"으아아아!!"


쾅, 핸들을 내리친 선우의 눈에도 답답함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흐음. 모처럼 혼자왔다 했더니 술만 마시고 이 오빠는 아는척도 안해주고."

"......."

"무슨일 있어 예린아씨?"


볼때마다 예린아씨라 놀리는 재규의 형, 형재가 바에앉은 예린의 옆에 은근슬쩍 다가왔다.


"저 오늘 기분 안좋아요, 죄송해요."

"아냐 그럴수도 있지 뭐."


뽀얀 살결. 키는 작지만 몸매가 괜찮던 예린을 전부터 눈독들여왔지만 하도 선우가 으름장을 놓아 손도 하나 까딱 못했던 형재.


이렇게 혼자와서 술을 마시는 예린이 '날 잡아드십쇼' 하는듯이 보이는 그였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예린인 참 착하게 생겼어."

"그래요?"

"응. 그래서 지켜주고싶어."


작업에 들어가며 형재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빠랑 둘이... 한잔 할까?"


잘생긴 형재였지만 이미 선우의 곁에서 그의 본질이 바람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파악하고 있던 예린은 훗, 하고 웃으며


빈 잔을 들어 바텐더를 불렀다.


"오빠. 죄송해요. 전 오빠랑 즐길만큼 개방적이지도 못하고 그런 오빠농담 유들유들히 받아넘길만큼 넉살도 없어요. 그냥 저... 혼자

술마시고 가도록 내버려두시면 안될까요?"

"....그러는게 좋을거야, 형. 지금 예린이가 그 말 안했으면 형한테 한방 날리려던 중이었으니까."


어둠속에서 으르릉거리는 야수같은 목소리. 형재는 뒤에 서있는 분노에 찬 선우를 돌아보곤 식은땀이 흐르는것을 느꼈다.


"하, 하하하... 오빠가 데리러왔네, 예린아. 난 그럼 이만..."


자신보다 세살이나 어린 선우지만 주위사람에게 그의 전력을 들어 알고있던 형재는 지레 겁을먹고 사라졌다.


"혼자 술마시지 말랫잖아."

"헤어질까, 우리."

"헛소리 하지마."

"응. 나도 오빠랑 헤어지면 힘들어. 안돼."

"그러니까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내가 박태언이랑 결혼했다 이혼할까? 그럼 또 결혼하라구 안그럴텐데."

"장난치지마. 태언이는 그냥 시간벌기 용이야."

"3년 뒤엔 뭐가 달라지는데?"

"....예린아. 내가 널 사랑하는건 알지?"

"응. 그거 하나는 알지. 지독하도록..."


유리구슬같은 예린의 눈물이 톡, 빈 칵테일잔으로 떨어졌다.

 


예린을 눕히고 나가려는 선우의 옷깃을 살짝, 붙잡은 그녀.


"....자. 피곤하지 않아? 오늘 많이 울어서..."

"안아줘."

"....괜찮겟어?"

"모든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도록... 세상에 오빠랑 나, 둘 뿐이 없는것처럼... 안아줘."


안타까움. 그리고 절실함.


6년간, 그 긴 세월동안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하며 쌓아온 애증과 사랑이 녹아든 예린의 애절한 표정에


선우의 가슴은 깨어지는것마냥 아팠다.


"....사랑해."


선우가 그녀에게 입술을 맞추며 그녀의 잠옷을 벗겨냈다. 그녀의 목에 뜨겁게 입을 맞추며 꽉, 그녀를 끌어안은 그는 곧 그녀의


민감한 가슴으로 내려가 능숙하게 가슴끝을 간질였다.


"하으, 오빠..."


그녀는 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신음했다. 그 신음에 자극을 받아 더 강하게 애무하는 선우.


"나도, 나도 오빠없인... 살 수 없어..."

"3년만 기다려줘. 내가 반드시, 우리 미래로의 해결책을 찾을께..."


그녀의 귀에 절절히 속삭이며 그가 뜨겁게 젓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허리를 반달처럼 휘며 예린이 신음을 내뱉었다.


"하아!"

"아으...예린아, 너 오늘... 다른때보다 더 뜨거워... 몸 속이..."

"아아, 오빠..."


그녀의 뒤에서 들어간 그가 손을 앞으로 뻗어 손가락으로 그녀의 민감한 둔덕 사이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하으, 그, 그마안..."


절정을 느끼는 그녀의 조여드는 느낌에 그도 어느덧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예린아, 사랑해, 사랑해....아으으으"

"아앙, 아핫, 오빠아..."

 


"우리 아들이 만나는 아가씨가 있대서 설마 했는데, 이렇게 참한 아가씨를 사귀다니. 정말 반가워요, 예린양."

"별말씀을요..."


태언의 부모는 예린의 부모가 돌아오는대로 약혼식을 올리자며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태언이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주위의 의심에 마음고생을 했던지라 갑작스레 나타난 예린은 너무나 반가운 존재였다.


"잘 만나뵙고 왔어?"

"......"


데리러 온 선우의 차에 올라타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예린. 선우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비며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갈까? 쇼핑할래?"

"오빠."

"응?"

"나, 이제 뭐 사주려고 들지 마."

"....왜?"

"내 마음 알잖아. 오빠가 물건으로 사지 않아도, 내 마음은 오빠거란거."


흠칫, 선우가 차를 세웠다. 예린이 맑은 눈에 자신을 가득 담은채 바라보자, 선우는 울고싶어졌다.


"그런거 아냐. 물건으로 산다니."

"오빠는 항상 내가 기분이 안좋으면 뭔가 사주려고해."

"그런거 아냐."

"근데, 내가 진짜 바라는건... 이렇게, 가짜 약혼자 부모님께 거짓으로 사귄다고 말하고 와서 더럽혀진 사람처럼 느껴질때...내가

정말로 바라는건.... 비싼 물건이 아니야. 그냥, 날 오래 안아줘. 오빠가 그래주었으면 해."

"예린아."


목이 메인 선우는 예린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두사람은 교통경찰이 주차딱지를 떼려다 안에 사람이 있어 기막혀 할때까지, 서로를 안고있었다.

 


"오랫만이네."

"응. 거의 1년만이야."


마음을 정리한 예린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맑고 예뻣다. 주연은 담배에 손을 뻗어 불을 붙인 뒤 연기를 길게 들이마셨다.


"후우.... 그래. 금단을 선을 넘은 기분이 어때."


이미 모든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주연에게 이리저리해서 이렇게 된거라 설명할 생각이 아예 없던 예린은 그냥 미소를 지어보였다.


"응, 나 행복해. 사랑받고 있거든."

"하!"


어려서부터 예린의 모든것을 알고 커왔다고 자부하던 주연은 예린의 반응에 놀란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 제정신이 아닌거야. 그자식한테 브레인워시(Brainwash:세뇌) 당한거라구! 강선우, 알아보니까 고등학교때도 친구들이랑

좀 놀거나 건방진 애들은 돌려가면서 따먹고 폭행에 기물파손에 아주 인간말종이더라. 지금은 인간인척 탈을 쓰고 니앞에서

명품 좀 사주고 달콤하게 대해준다고 해서 그놈이 변한건줄알아?! 정신차려 안예린! 니 성이 강예린으로 변한 순간 너도

변했어. 멍청하게 남자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녀서 금단의 선까지 넘은, 바보같은 애로 변해버렸다구!!"

"주연아."


흥분해 좀처럼 잘 안붉어지는 얼굴까지 벌개진 주연과는 달리 여유로운 예린의 표정.


"금단? 만난건 우리가 먼저야. 주연아, 나 선우오빠랑 고등학교때부터 아는사이였어. 그래, 그때부터 끌렸던 것 같아. 그런

우리가 모르는사이에 부모님이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시게 되었구, 난 우리가 헤어질 수 있을줄 알았어. 그런데... 아냐. 처음엔

오빠가 날 더 좋아했는데, 지금은 우리 서로가 없으면 죽을것만큼 서로를 원하고 사랑해."

"사랑?! 역겨워... 안예린, 니가 지금 하는짓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야. 금단이라구!"

"나도 내가 안예린으로 남아서, 선우오빠랑 마음껏 연애하고 결혼했음 좋겟어. 하지만... 이미 난 강예린이야. 성 한글자가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바뀔수는 없는거잖아. 안씨를 강씨로 바꾸었다고 해서 내가 다시 태어나는건 아니야. 변한건 주위

상황과 사람들이지, 내가 아니야. 난 그대로 내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접어, 그 감정."

"주연이 너도 접을래야 접을 수 없는 감정 느낀적 있을거 아니야."

"그래도 가족에게는, 아니야."

"내가 너에게 바라는건 단 하나야. 이해하진 않아줘도 좋으니까, 날 미워하지 말아줘."


다정히 웃으며 예린이 일어섰다.


"야, 안예린!"

"....주연아."


예린의 눈에 고인 눈물. 주연은 따라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앉아있었다.


"나도, 내가 안예린이고 오빠가 강선우라서 그냥 축복받으며 사랑하고싶어. 그거 포기하기 참 힘들었으니까...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으니까... 나 미워하지 마. 너를 저버리는것이 아니라 내 사랑을 택하는것 뿐이야."

"너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주연의 눈에도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런 가시밭길을 택해서 걸어가는데, 너를 찟고 상처줘서 더 아프게만들, 그런길을 택하는건데!"

"길을 선택한건 내가 아니었지만,"


예린이 주연의 눈물을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난 그 길과 사랑에 빠졌어."


-2부 8-

 

"....페이크 약혼자 치곤 너무 여리여리 한거 아냐? 이래서 누가 믿겟어."

"흥, 이언니 진짜 말하는거 싸가지에 밥말아먹었네. 아우, 재수없어."


누가 누구보고 재수없대? 하는 표정의 주연의 어깨를 토닥여 진정시킨 예린이 태언을 향해 미소지었다.


"주연이가 말은 거칠어도 착한애야, 이해해 태언씨."

"흥, 착하긴 자기가 착하지. 저 눈 찟어진거 봐. 아후, 사나워."

"뭐어?!"


기가막혀 씩씩거리는 주연의 모습에 건너편에 태언과 같이 앉아있던 선우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주연이 임자 제대로 만났네."

"선우오빠!"

"미안, 미안. 예린아, 와인 뭘로 할래?"

"소비뇽? 저번에 마신 캐나다산도 좋더라."

"그럼 잭 트리거로 시킬께. 태언이도 술 좋아해?"

"응... 그냥 좀 즐겨~"


잘생긴 선우가 말을 걸때면 눈을 내리깔고 내숭떠는 표정을 짓는 태언. 그런 태언이 재수없어서 치를 떨려하는 주연.


예린과 선우는 독설가 주연을 아무말 못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인지라 그 상황이 즐거웠다.


"일단, 내가 확실히 하고싶은건 무슨일이 생기던간에 난 아군이 되기로 한거라는거. 그러니까 무슨일이던 내 핑계 대."


예린의 진심어린 고백 이후 긴 고민을 한 주연은 선우를 철저히 신뢰하는 예린의 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저 가짜 약혼자년은 마음에 안들지만."

"야, 약혼자년? 아우, 말도 정말 로우클라스야 로클라스~ 아우, 재~수없어."


앙드레김을 떠오르게 만드는 느끼한 태언의 본모습에 주연은 속이 다 느끼해지려 했다.


"야, 가짜! 너 예린이네 부모님 앞에서도 그딴식으로 행동하면 당장 파혼이야, 알어?!"

"무슨말씀이십니까."


부모님 앞에서 철처히 자신을 숨기고 살아온 태언은 그동안의 연기가 몸에 배인터라 완벽한 남성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을 해보였다.


"아, 저, 저 이중인격... 지킬박사와 하이드같은년."

"우리 같은 배를 탄 일행이 아니던가. 한잔 하세."


태언이 내밀은 잔에 어거지로 건배를 하는 주연의 일그러진 표정에 예린, 선우 커플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술잔이 오고 간 다음, 주연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3년동안 예린이한테 기다리라고 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 3년간 무엇을 어쩔 예정인지는 왜 말 안해주는거야?"

"3년정도 걸리거든, 법적 절차가."

"일단 내가 알기론 한국에선 일단 한번이라도 남매였던 전적이 있다면 만약 부모가 이혼한다고 해도 혼인 불가야."

"응."


선우가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고 난 미국시민이고."


선우를 제외한 세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그럼 미국에서는 피 안섞인 남매는 합법으로 결혼도 가능해?"


급작스럽게 끼어든 태언이 언짢은 주연이었지만 어쨋든 자신이 질문하려던것도 그것이었다.


"아니."


선우의 대답과 동시에 예린, 주연, 태언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갔다.


"하지만 변호사를 통한다면 가능해. 물론 시간이 좀 걸리지만 미국은 주마다 법이 다르다는거 알고있지?"

"응, 알아."

"알라바마, 콜로라도 주의 결혼법에는 '입양아'간의 결혼을 막는 조항이 없어. 그래서 일단 내 변호사가 그쪽 법률을 조사중야."


순간, 태언이 꿈에 젓은듯한 얼굴로 예린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자기, 너무 좋겟다. 근데 프로포즌 언제 받은거야?"

".......??"

"지금 결혼얘기 하는거 보니까 받은지 꽤 되었지? 근데... 반진?"


네사람 모두 아무말 없이 썰렁한 분위기로 30초간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어머, 어머 이게 뭐야, 세상에 말도안돼!!"


술에 취한듯 얼굴이 붉어진 태언이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세상에 청혼도 안하고 결혼얘기를 해?! 여자의 로망인 프로포즈를 뭘로 보는거야 선우씨! 아우~ 매너 정말 꽝이야. 심지어 우리

그이인 테리씨두 나한테 반지줄때 얼마나 이쁘게 이벤트를 열어줬는데. 아, 나 실망스러워서 같이 못있겟어. 흥!"


투덜거리며 태언이 와인바에서 나가버렸다. 주연은 예린이 어떤표정을 하고있는지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창밖을 보고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 예린. 어색한 침묵에 결국 주연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중에 봐 두사람. 연락줘."

 


집으로 오는 내내 예린은 말없이 한강 야경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쓸쓸해보여 선우는 가슴이 아팠다.


"....예린아."

"잘께."

"이리와."


자신의 방으로 가려던 예린을 안고 선우가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만약에 해결책을 찾으면 그때 청혼할 생각이었어."

"알아."

"이해하지?"

"해결책이 없다면??"


예린의 공허한 표정이 마음에 안들어 선우는 그녀를 안으며 달래려 노력했다.


"해결책이 없긴 왜없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진 니가 더 잘 알잖아."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와의 결혼도 포기하겟단 소리지."


차갑게 말한 예린이 뒤를 돌아 방으로 들어가 쾅, 문을 닫았다.


"그게 아냐, 문 열어봐."

"내일 말해. 나 좀 피곤하네."


자신이 예린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르는것같아 서운해진 선우는 곧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운 예린의 베게가 눈물로 젓어들어가고 있었다.

 


2일 후, 부모님이 반년만에 귀국하셨다. 예린과 선우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사온 주영은 예린이 만나는 사람이 있단 이야기에 정색을


하며 반가워했다. 대학교 내내 남자친구 한번 제대로 못사귀던 예린의 눈이 너무 높은걸까 걱정중이던 그녀였다.


"어떻게 만난거야?"

"선우오빠 친구 사촌동생."

"아, 그래? 어떤친구니 선우야?"

"옷 디자인하는 착실한 친구예요. 집안도 의류업계이고."

"그래? 언제 소개시킬거야? 당장 약속잡자."


기뻐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는 두사람이었지만 예린에게 쏟아지는 맞선공세에 대항하기 위해선 태언이 필요했다.


바로 다음날, 예린은 집에서의 식사에 태언을 초대했다.


선우같이 듬직한 미남이 등장할것으로 기대했던 주영과 성훈은 실망한 눈치였지만, 곱상한 외모완 다르게 남자다운 태언의


모습에(명연기였다) 한숨을 놓았다. 체구가 작긴 했지만 작은 예린과 둘이 잘 어울리는것 같기도 했다.

 


"약혼식 언제야?"

"....다음주 일요일."


주연은 예린의 방에서 패디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너 전에는 이런거 신경두 안쓰더니. 변했어."

"흠, 너 내 흉내라도 내는거야? 내가 너한테 쓰던 말투 카피한것 같은데?"

"응. 주연이 요즘... 연애하지!!"

"연애?"


갸웃, 고개를 끄덕인 주연이 슬쩍 미소지었다.


"혼자 좋아하는것도 연애라면, 벌써 2년째구나."

"뭐어?!"

"가끔 방학때만 들어오는 오빠가 있어."

"유학생이야?"

"응."

"어머! 너 왜 나한텐..."

"사귀는것도 아니고 짝사랑인걸."

"그래두! 고백은 아직 못하구?"

"못해."

"왜?"

"수연언니 친구중에 마리언니 알지?"

"응."

"사겨, 그사람이랑."


예린은 그 자리에 굳고말았다. 마리라면 수연이 가끔 끌고 나타나던 귀엽게 생긴 언니라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뭐?!"

"임자있는 남자라구."

"그, 그런데 짝사랑..."

"의붓남매보단 낫지."

"....그러게."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이긴, 하고 예린을 쳐다본 주연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예린에 놀라 얼른 끌어안고 달랬다.


"....미안, 내가 나빳어."

"아냐. 사랑하는 남자가 아닌 다른남자랑 가짜로 약혼하는 나보단, 여친있는 남자 짝사랑하는 너가 정상이야."

"내가 정상이라고? 뱀의 혀를 가진 독사녀라 불리는 내가?"

"적어도 금단의 관계는 아니잖아."

"걱정마. 내가 너 강선우랑 맺어지도록, 확실히 밀어줄거야."

"....흐흑...."


약혼식을 앞두고 마음이 약해진 그녀가 안쓰러워 주연은 패디큐어가 뭉그러지는줄 모르고 주저앉아 예린을 위로했다.


"선우오빠."

"가니?"


퍽! 주연의 기습적인 주먹이 선우의 옆구리에 꽂혔다.


취미로 킥복싱을 배우는 그녀라, 선우는 흡! 하고 옆구리를 붙들었다. 여자치곤 상당히 강한 펀치였다.


"윽, 너, 왜..."

"예린이한테 눈물나게 만들지 마. 강한척 해도 이런상황 얼마나 마음아프겟어? 잘해주라고. 어??"

"......"


할 말이 없는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밤 11시 50분.


"예린아, 예린아."


자던중이던 예린은 선우의 속삭임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빠?"

"쉬이--"

"내 방엔 왜? 엄마아빠도 계신데 들키면..."

"얼른 나와. 부모님 주무시니까 발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고."


조심 조심 예린은 까치발로 선우와 함께 차고로 향했다.


차고문을 닫은 두사람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휴-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어디가게? 술먹고싶어?"

"따라와."


선우가 운전해 간곳은 바로 내일, 약혼식이 거행될 작은 교회.


"....여기는 왜."


선우가 차 트렁크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내었다.


"원래 신랑은 보면 안돼는거래. 그래서 주연이랑 태언이가 3시간을 싸우며 고른거야."


어느새 저 구석에 숨어있던 주연과 태언이 손을 흔들어보였다.


"가서 갈아입고 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예린은 박스를 가지고 작은 방으로 가 열어보았다.


짧고 슬림한 베라왕의 하얀 웨딩드레스. 어깨까지 내려오는 베일과 예쁜 티아라. 루부탱의 흰색 보석 하이흴.


따라들어온 주연의 도움에 예린은 준비되어있던 신발과 드레스로 갈아입고 가벼운 메이크업을 했다.


주연과 걸어나오니 어느새 턱시도로 갈아입은 선우가 저 멀리, 목사님과 함께 단상 앞에 서있었다.


"잘 못치니까 원망 마."


투덜거리며 피아노로 다가간 주연은 그래도 그간 열심히 연습한 결혼행진곡을 치기 시작했다.


태언이 다가와 예린의 손을 잡아 선우에게로 안내하듯이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고마워."


예린의 손을 넘겨받으며, 선우가 태언을 향해 미소지었다.


"....오빠...."

"예린아."


목사님이 무어라고 설교를 하시며 예식을 진행했지만 예린의 귀엔 자신의 심장박동뿐이 들리지 않았다.


선우도 마찬가지인듯, 두사람은 이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듯 신비로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었다.


"신랑, 강 선우 군은 신부 안 예린양을 맞아 사랑으로 보살피며 백년해로 할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신부, 안 예린 양은 신랑 강 선우군을 맞아 믿고 사랑하며 백년해로 할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두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선우가 품속에서 까르띠에의 반지를 꺼내 예린의 넷째손가락에 끼웠다.


"....아, 난....준비를...."


선우가 손을 들자 거기엔 이미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오빠."

"사랑한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두 연인이 집안의 반대로 이리 몰래 결혼해야 한다니. 안익수 목사는 아픈 마음에 눈물을 훔쳐내었다.

 


일요일 아침.


어젯밤의 일이 꿈만같아 잠에서 깬 예린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없다. 그가 준 반지가, 꿈이 아니라면 있어야만 할 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어났니? 얼른 준비하고 미용실로 가야지. 샤워하고 나와."


엄마의 등살에 예린은 반지를 찾아볼 시간조차 없이 대충 샤워를 한채 집을 나섰다.


미용실에서도 계속 가방을 뒤지는 예린을 이상한듯 바라보는 엄마.


"너 왜그래?"

"아, 아냐..."


꿈이었던것일까. 달빛과 촛불아래 로맨틱하고 영화같던 그 결혼식은.


얼마나 선우랑 결혼이 하고싶엇으면 그런 꿈까지 꾸니, 예린, 이 바보.
 

스스로가 쥐어박고싶을만큼 한심해 눈시울이 붉어지던 예린은 울 시간도 없이 약혼식장으로 배달되어갔다.


"아유, 우리 예린이 이쁘기도 하네."


태언의 부모가 예린을 칭찬하며 주위사람들에게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는동안도 예린의 마음은 사라진 반지와 꿈이었던것 같은


결혼식에 가있었다. 분명, 이 교회에 와서 선우오빠랑...


"그러면 약혼반지 교환식이 있겟습니다."


눈물을 보이기 싫어 감정을 컨트롤하려 노력하는 예린.


순간, 태언이 품 안에서 어제 예린이 본것과 같은 빨간 까르띠에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제 꿈에 본 디자인과 똑같은 반지를 꺼내 그녀에게 끼워주었다.


'내가 예지몽이라도 꾼건가?'


어안이 벙벙하던 예린은 고개를 흘끗 돌려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넷째 손가락에는, 그녀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2부 9-


"....나, 꿈인줄 알았어."

"뭐가?"

"결혼식."

"무슨 꿈이야. 우리 사진까지 찍었잖아."

"아, 맞다."

"태언이 역시 센스있더라, 사진 우리 이메일로 넣어준댓어."

"응..."


약혼식을 끝낸 뒤 태언과 친구들과 보낸다고 속이고 선우와 둘이 교외로 나온 여행.


바닷바람이 찬지 몸을 부르르 떠는 예린을 감싸안은 선우가 둘의 왼손을 겹쳐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결혼반지 기념."

"헤헤."

"그렇게 좋아?"

"응... 오빠 그동안 나 선물 많이 사주었지만 반진 처음인걸."

"반지는... 특별하니까."

"죽을때까지 끼고있을께."

"죽을때까지 곁에있을께."


석양에 비친 두사람의 긴 실루엣이 하나로 겹쳐졌다.

 

 

"이번 일은 선우 네가 해결해주어야지만 될 것 같구나."

"네?!"

"법적인 소송이 걸려있어서 매우 복잡해. 패소하면 우리 회사의 신뢰도가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성훈은 뉴욕지사가 이중계약으로 인해 4개월은 족히 걸릴 소송이 걸리자 후계자인 선우의 능력을 시험할 겸, 그에게 뉴욕으로 가


이번 일을 해결할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인수인계도 해야하고..."

"내가 한국에 머무마."

"......."


아버지의 고집은 죽었다 깨나도 꺾을 수 없다는것을 아는 선우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회사는 문제가 아니다. 예린과 떨어져 지내야만 한다는것이 문제이다. 비밀리에 두사람만의 결혼식을 올린지 겨우 2달, 남들같으면


행복한 신혼을 보낼 이때에 미국의 변호단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초조해하고 있는 그였다.


변호단에게 좋은 소식이 온다면 부모님에게 사실을 설명하고 미국으로 가 식을 올리고 살 예정이었다.


물론 부모님이 쉽게 허락할리도 없고, 반대하실것에 대비해 선우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것을 포기하는것도 생각중이었다.


"...네, 가겟습니다."

 


"안 돼."

"예린아, 이번에 가서 내가 변호단을 만나서 빠르게 일 처리를 하도록..."

"싫어. 떨어지면 죽어버릴거야."


대학원을 휴학하고 자신을 따라 미국을 가겟다는 예린. 가짜 약혼이긴 하지만 얼마전 약혼식까지 올린 예린이 자신의 장기출장에


따라온다면 주위에서 과연 뭐라고 할것인가. 선우는 고집을 부리며 화가나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예린을 달랬다.


"지금은 우리한테 시간이 필요해. 내가 최대한 빨리 계약 성사시키고 돌아올께."

"안됀단말이야!!!"


빽, 아래층에까지 들릴지도 모를정도로 소릴 지른 예린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선우.


"너 정말~"

"이어...아이아애...(싫어...같이갈래...)"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 선우는 가슴이 시려와 그녀를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걱정 마. 내가 널 사랑하는건 너가 더 잘알아."

"....미워....미워...."

"미안해, 미안...."


선우는 아버지가 예린과 그녀의 엄마를 소개시킨 그날을 떠올렸다.


왜 그때 죽도록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랫더라면 이렇게 예린일 상처주고 아프게 만들지는 않았을텐데...


"미워, 가면, 흑, 싫어, 오빠."

"....우리, 결혼 이미 한 사이야. 그치?"

"......."

"결혼한 사이에 출장도 안보내줄거야?"

"....안된단말이야...."


안그래도 살얼음판을 걷는듯이 불안한 그와의 사랑에 약해질대로 약해진 예린은 선우와 떨어져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법적인것만 남았지 너 이미 내 부인이야. 목사님까지 증인도 세명이나 있구."

"......"

"사랑해, 사랑해..."


예린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흐느꼈다. 그를 태연히 보내줘야만 하는데... 잘 다녀오라고 웃으며 말해야 하는데.


"다녀올께."

"....매일, 전화해야해?"

"응."

 


선우의 출장 이후,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가는 예린을 보며 예린의 엄마, 주영은 마음이 안좋았다.


"선우가 없어서 그러나, 예린이가 기운이 없네요."

"다 큰애가 뭘... 태언이랑 다투기라도 했나보지."


태언이와 연애를 하는것은 맞을까? 주영은 마음이 복잡했다. 오히려 선우와 있을때가 더 생기가 넘치지 태언이랑 있을때면 뭔가


조심스러운 예린. 태언의 눈빛과 행동도 어딘가 어색한것이 예린을 진정 사랑하는 남자같지가 않았다.


약혼을 너무 서두른것같아 예린에게 '파혼'을 물었을때 극구 반대하던 딸의 낯설은 모습.


"예린이 데리고 기분전환겸 쇼핑이라도 다녀와."

"....그럴까나."


예린을 데리러 방으로 들어간 주영은 낮잠을 자는 예린의 모습에 깨우러 가까이 다가갔다.


"엎드려서 컴퓨터는..."


피식, 웃으며 노트북을 치우려던 그녀는 손이 닿자 다시 켜진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딸의 홈페이지.


자신도 딸과 일촌이라 웬만한 사진은 다 보았다고 생각해왔는데, 처음보는 낯설은 사진란이 있었다.


<With Love>

<My Wedding>


비공개로 된 사진란.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약혼식을 웨딩이라 표현한것인가 궁금해하며, 마이웨딩란을 클릭했다.


"......?"


어두운 교회 안을 찍은 사진. 약혼식을 한 그곳이 맞긴 하지만 이 촛불들은 뭐란말인가. 약혼식은 밝은 낮이었고 날씨도 맑았어서


교회 안은 창문을 통한 햇볕만으로도 충분히 밝았음을 기억하는 그녀였다.


다음사진으로 넘어간 그녀는 베일을 쓰고 미니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에 '누구지' 하고 계속 스크롤바를 내렸다.


그 다음사진.


저 멀리 아웃오브 포커스로, 촛점을 흐리게 해 찍힌 남자.


대충 보기에도 태언이 아닌것만은 확실했다.


다음페이지로 넘어가려던 순간, 터치패드에 익숙치 않았던 그녀는 <With Love>란을 실수로 클릭해버렸다.


'아휴, 역시 마우스에 익숙해서...'


처음 있는 사진은 두사람의 손이 겹친, 석양을 배경으로 한 커플링 사진.


잠든 예린의 반지와 비교하며 흐믓히 바라보던 주영은 갑자기 드는 이상한 느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왜 태언이랑 둘이 반지 같은 디자인으로 안했니?'

'요즘 그러는게 어딧어 엄마. 서로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선물해주는게 요즘 유행이야.'

'흐응, 그래?'

'그럼, 요즘세대는 다 그래. 커플링 유치하잖아.'

 


....그럼, 이 사진은 뭐란말인가.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기로 예린만큼 가늘은 손가락을 가진 태언.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라 그렇구나 하며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 사진에 남자는 대충 보기에도 남자답게 예린이보다 훨씬 큰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에 놀라며 주영은 조심조심 스크롤을 내려 다음사진을 보았다.


'?? 선우랑 찍은거네??'


그러면 이 커플링은 누구란말인가.


다음페이지로 넘어갈때까지, 모든 사진은 선우와 같이이거나 선우를 찍은 사진들뿐.


'누구지, 도대체.'


그리고 그 다음페이지로 넘기려던 그녀는 예린과 선우의 클로즈업 된 사진에서 멈칫 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클릭해 확대한 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두사람의 손에,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


주영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냐, 아냐, 아닐거야.'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까치발로 예린의 노트북을 전원코드를 빼며 몰래 들고 나오고있었다.


무선인터넷이 1층까지 되기때문에 1층 소파에 앉아 주영은 <My Wedding>을 다시 클릭했다.


촛점이 흐리게 나온 남자, 그리고 다가갈수록 뚜렷해지는 그 남자는 바로 강선우.


듬직한, 자신의 양아들인,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는 그.


그리고 뒷모습만 나오던, 베일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 여자의 앞모습은-


자신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딸, 예린이었다.


'안돼!!!!!'

 


파랗게 질린 주영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긴급히 돌아온 성훈은 신경불안을 보이며 입술이 터지도록 깨물고 있는 주영을 보고


질겁을 하며 신경안정제를 급히 찾아 먹였다.


"무슨일이야. 왜이래, 주영이. 응?"

"여보, 나, 우리, 어떻게해. 응? 어떻게 하지?"

"무슨일이길래 당신 이러는거야? 애들한테 무슨 일 생겼단 연락이라도 받은거야?"

"아냐, 아니란말야. 어, 어허허어엉...."


노트북을 손으로 가르키며 서럽게 울어대는 주영. 성훈은 노트북을 클릭해 예린의 홈피를 보며 무슨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뭐?"

"......"


주연이 말없이 사진을 하나하나 클릭해 확대해가며 손으로 가리켰다.


"선우잖아, 그게 뭘 어...쨋...."


두사람의 웨딩사진을 '장난이겟지' 라고 생각하려던 성훈은, 클로즈업 된 사진에서 두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감쪽같이 속였을까.


사랑에 빠진, 서로의 눈에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둘의 표정.


연기나 억지로 만들어지는 표정이 아님을 연륜으로 알 수 있던 성훈과 주영은 땅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그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엄마! 내 방에 노트북 엄마가...."


밤새 선우와 통화 후 낮잠에 빠졌던 예린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다가 굳었다.


선우가 그리워 홈피에 들어가 그의 사진을 보다가 로그아웃을 안한채로 낮잠이 들었던것뿐인데.


지금,


그녀의 엄마와 새아버지가,


그녀의 모든 비밀이 든 홈페이지를 열어보며...


낯설은 시선으로 예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2부 10(완결편)-


선우는 핸드폰을 꺼내 한국에서 걸려온 아버지의 번호를 확인 후 잠이 덜 깬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저예요."


수화기 너머의 아버지의 격앙된 목소리가 계속될수록 전화기를 잡은 그의 손에 핏줄이 솓아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전화를 끊지마자, 샤워를 마친 그는 변호단의 어제 마지막 연락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Hey, congratuation!!! We got the solution, Sunwoo!'


"예린아."


낮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선우의 눈은 강한 의지와 함께 빛나고있었다.

 

 

예린은 방에 감금된채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폰, 노트북, 방에 있던 전화기까지 모두 가져가버린 엄마덕분에 주연과 태언에게 연락조차 못한지 3일.


특히 선우와 이렇게 연락도 없이 떨어져 있어본것이 너무 오랫만이라 그의 목소리가 그리워진 예린은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오빠, 내가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줘..."


중얼거린 그녀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예린의 엄마가 들어왔다.


"1주일 후에 유럽으로 갈거야. 엄마랑 같이 학교 알아보자. 선우연락처 모두 바꾸도록 할거니까 몰래 전화해도 소용없어."

"....엄마, 나...."

"떨어져서 몇년만 있으면 다 잊혀질거야. 아직 니가 어려서 몰라서 그래. 떨어져있으면 마음도 멀어지고 다 헤어지게 되어있어."

"그거, 엄마 자신한테 하는소리야 아니면 나한테 하는소리야?"

"?!"

"난 안그래. 나 못그래 엄마. 언제부터인진 모르지만, 엄마가 새아버지 만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우리 서로 좋아하고 사랑했어.

처음엔 오빠만 그런줄 알았구 가끔 오빠 생각 날때마다 나 내 감정을 부인했어. 근데 이젠 아냐 엄마. 나 오빠 사랑해."


고개를 흔들며 주영은 예린의 손을 잡았다.


"착각일 뿐이야."

"사랑이 착각이라면 난 착각끝에 태어난 아이겟네?"

"무슨소리야."

"엄마도 아빠 심장 약한것 알면서도 사랑했고 마지막 같이했잖아. 외할머니가 만약에 알았다면 반대하셨었을거야. 하지만 엄만

아빠 건강상태 비밀로 해가면서 결혼했잖아. 엄마, 나 선우오빠랑 외국에 나가서 둘이 결혼하고 살께. 허락해줘."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

"죽고싶지 않아."

".....뭐?"

"죽어, 우리 둘 다. 아마도 내가 더 약하니까, 떨어트려 놓으면 원앙처럼 하나가 먼저 죽을거야. 아마도 내가 죽은 다음엔

선우오빠겟지. 부탁하나만 할께.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담 우리 같은곳에 뿌려줘 엄마. 죽어서라도 함께있게 해줘."


하얗게 질린 주영은 담담한 예린의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끼쳤다.


이런일을 미리 예상햇다는듯이 행동하는 예린.


자신의 배에서 나온 그 아이가 아닌듯, 죽음에 대해서도 너무나 태연한 태도.


"너, 정말 미쳤구나."

"한달. 내가 버틸 최대의 시간이야. 오빠 사진도 목소리도 흔적도 없이 내가 버틸 시간."

"무슨소리야?!"

"어떻게든 죽으려고 할거야. 오빠랑 나, 윤회라는거 믿거든. 자살이던 뭐던, 죽어서 다시 만나려고 할거야."

"미쳤어, 미쳤어 너!"

"응. 엄마, 나 오빠 없으면 죽어. 지금은 미친것 뿐이지만 곧 죽어. 어차피 허락 안해줄 줄 알았어. 도망쳐서 살기도 무서웠어, 나.

그렇게 도망쳐서 살아간대도 엄마랑 새아버지한테 미안해서 행복해도 괴로웠을거야. 차라리 이렇게 들키고 그리워하며 죽는게

나아. 다음생엔 꼭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면, 그러면 이렇게 운이 없지는 않겟지? 만난건 우리가 먼전데,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어. 오빠의 사랑법이 삐뚤어졌어서, 내가 깨닫는게 늦어져버렸어. 이제 어차피 곧 끝나. 곧 끝날거야."


이미 모든것을 포기한듯한 예린의 눈물에 엄마의 가슴은 무너져내렸다.

 


"주연아, 마중나와줘서 고마워."

"별말씀. 그럼 이제 법적 절차는 모두 해결 된거고. 예린일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된다 이거군."

"응. 태언이네 부모님 난리도 아니라며."

"예린이네 엄마 눈치 백단이야. 그전부터 태언이랑 예린이 사이 연인같지 않다고 의심하셨어. 태언이네 집엔 예린이가 갑자기

유럽의 학교로 더 공부하러 가게되어서 약혼 없던일로 하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는데, 이게 무슨 경우냐며 태언이네 부모님

난리도 아니야. 암튼 오빠거 한국 핸드폰 해지되고 회사폰도 전화번호 다 바뀌었다며? 예린인 지금 집에 감금상태야. 내일 모레

유럽으로 출국인데,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우리 엄마도 몰라. 아마도 예린이네 엄마가 따라가서 몇개월을 같이살며 감시할거야."


후우, 주연과 선우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연아."

"응?"

"너 우리편인거 예린이네 엄마가 아니?"

"아니?"

"니네 부모님 오늘 뭐하셔?"

"엄마아빠 일본가셨는데."


선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너 사고한번 쳐라."

 


핸드폰의 진동에 전화를 받은 주영은 평소의 침착함은 간데없이 다급하고 떨리는 주연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이모! 나, 여기 강변북로인데... 옆차가 끼어들어서 피하다가 그만 사고내고 말았어."

"어머, 강변북로 어디쯤?"

"여의도부근이예요. 아이 씨... 취재가다가 급하게 몰아서인지, 차도 많이 찌그러지고 강변북로라 택시도 안잡히네. 나 사고난거

첨이라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겟어. 거기에 곧 경찰 올텐데 나 좀 다친것두 같구... 여자 혼자라 불안해서..."

"알았어. 너 어디쯤인지 정확하게 불러. 이모랑 이모부가 금방 갈께."

"고마워요. 엄마아빠 일본간 사이에 이러니까 전화할 사람이 이모뿐이더라구."


사실 독설가이긴 해도 직업이 기자에 나름 주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인맥이 넓은 그녀였지만, 주영이 집에 있는 이상


예린을 데리고 나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작전완료]


선우에게 문자를 보낸 주연은 싱긋,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달칵, 부모님이 나가는듯 현관문 소리가 들렸지만 4일째 먹을것을 거부하며 링겔에 의지하고있는 예린은 창문을 내다볼


기운조차 없었다. 부모님이 외출하실땐 방에 단 자물쇠를 걸고 가시기 때문에 어차피 탈출 할 수도 없다는것을 아는 그녀였다.


"오빠..."


심술궂게 자신이 좋아하는 회를 예린에게도 가르치려 들던 그. 같이 자주 간 덕에 지금은 그녀도 조금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마지막으로 그와 갔던 레스토랑이 생각났다. 날 회가 아닌, 반쯤 익힌 회로 만든 초밥이 있던 곳이었다.


거기 입구에 우리 사진이 걸려있을텐데, 오픈 기념으로 커플의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찍어 벽 한면 가득 걸어놓은...


텅! 텅! 텅!


예린의 방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


혹시 도둑이라도 든것인가. 예린은 이불을 끌어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오..."


예린은 목이 메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바짝 마른, 야윈 예린의 모습에 선우는 다급히 뛰어가 그녀를 안았다.


"미안,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흐....으....끅...."

"여권챙기고 얼른 옷만 입어, 주연이가 시간 버는동안 출국 마쳐야해."

"응."


여권을 챙기고 머리를 대충 묶은 뒤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예린은 그동안의 공복때문에 어지러워 선우에게 기대었다.


그녀를 업고 뛰어내려온 선우는 기다리던 태언의 차에 그녀를 태우고 공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쩜좋아, 자기 너무 말랐다... 어떻게해."


운전실력이 뛰어난 선우가 운전을 하고, 오랫만에 예린을 보는 태언은 야윈 예린의 얼굴에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난 괜찮아 태언씨. 약혼건 미안해. 내 실수로..."

"아냐, 난 괜찮아. 내가 더 미안하지 뭐. 그리고 결혼사진에 나도 나왔는데 나도 한패인거, 부모님이 다 아실걸?"


공항에 다와가던 선우는 태언의 그말에 퍼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예린아, 울지마."


부모님에게서 도망친다는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는 예린에게 선우가 빙긋, 미소지었다.


"오빠, 오빤 안미안해?"

"부모님 우리 용서하신거야."

"뭐?"

"....일단 출국수속 마치자. 그리고 설명해줄께."


선우는 짐을 부친 뒤 태언과 작별인사를 하고 예린을 데리고 출국심사대로 향했다.


만의하나라도 엄마와 새아버지를 만날까 두려워 떠는 예린과는 달리 선우의 태도는 여유가 넘쳤다.


"오빠."

"응?"

"도대체 무슨말이야. 용서라니."

"태언이가 한 말 기억나?"

"무슨?"

"결혼사진에 태언이, 자신이 나온것을 보고 한패인것을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아셨을거라던 말."

"응."

"그 결혼사진은 대부분 태언이가 찍었지."

"응."

"그 중 주연이가 찍은것에 태언이가 나온거고."

"....?"


어딘지 모르게 선우의 말뜻을 알것도 같아 예린은 고개를 갸웃 했다.


"태언이가 찍은것엔 당연히 주연이도 나왔을거야."

"...!!"


예린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결혼사진에 뒷배경으로 피아노 치는 주연이가 나왔을건 당연한거야. 바로 우리 뒤였으니까. 오늘 주연이가 전화했을때 의심없이

두분이 자리 비워준건... 나한테 널 데리고 도망갈 기회를 일부러 주신거구. 도저히 용납할수는 없지만, 용서하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거야. 나 솔직히 주연이가 우리편인거 모르시거라고 지금껏 생각했는데 우리가 바보였어."

"그, 그럼..."


예린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면세점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선우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예린을 흘끗거렸다.


"행복해지자."

"....응."

"그게, 우리에게 기회를 준 두분에 대한 보답이야."

"....응, 오빠..."


출국을 위해 게이트로 향하는 두사람.


굳게 잡힌 두손이 그들의 결심을 말해주는것만 같았다.

 


"여보, 나왔어."

"자기야? 미안한데, 런더리(세탁) 다 됐음 가지고 올라와줄래? 나 지금 소스 옆을 지켜야해서~"


파스타 소스를 만들던 예린의 부탁에 세탁물을 가지고 올라온 선우는 갑자기 팡! 하고 터진 폭죽에 깜짝 놀랐다.


"으왁!"

"아! 깜짝야.... 무슨일이야, 새로운 제자라도 들어온거야?"


낮에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피아노 선생님인 예린. 처음에는 딸리던 영어실력도 반년이 지나가며 늘기 시작해,


친절한 그녀에게 레슨을 받는 아이들이 이젠 열손가락을 채워가는 중이다.


"아니. 나...."


임신 테스트 스틱을 들어보이는 예린. 붉게 쳐진 십자가 모양은 임신 양성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거짓말."

"진짜?"

"진짜?!"

"진짜야!!"

"와~하하하. 예린아아!!!"


그녀를 와락 끌어안은 그가 그녀를 들어 빙글빙글 돌리다가 그녀가 임신중이란 사실을 깨닫곤 얼른 내려놓았다.


"아, 몸 조심해야지. 일단 누워! 누워있어! 이런건 나 주고!"


예린이 든 나무주걱을 빼앗으며 그녀를 소파로 몰아가는 선우.


"어이구, 임신때 적당한 가사활동은 괜찮다고 나와있네요!"

"그래도 안돼!"

"흠, 나한테 반항하신다?"

"......."

"애기한테 일러줄거야."

"안돼!"

"아하하하~"


그녀를 와락 안으며 행복감에 젓어있던 선우가 갑자기 디카를 가져와 임신테스트스틱을 찍어보였다.


"....부모님께, 사진 보낼거야."

"......"

"내년쯤, 손주 보러 오시라고."

"그래."


예린의 눈에 눈물이 일렁이자 선우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꼬옥, 그의 반쪽인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우, 너무 퐌타스틱이다. 집이 무슨 동화에 나오는것같아."

"더 멋진 성같은 것도 있었는데 예린이가 이 집에 반해서."

"역시 선우는 리치가이야. 테리, 자기는 언제 돈벌어서 나 이런 집 사줄거야? 하긴, 난 집보단 로프트가 좋아. 후훗..."


남자친구와 예린을 방문한 태언과 주연, 수연. 임신 5개월로 넘어가 살짝 나온 배로 예린이 과일과 차를 내오자 선우가 닥달을 한다.


"예린아! 앉으라니까... 내가할께."

"괜찮아. 내가할래."


두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던 수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주에서 석사를 마친 그녀는 이번에 한국에서 선을 봐야만 한다.


나도 이 두사람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줄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언니, 무슨생각해?"

"....아냐. 근데 주연이 너 진짜 아무리 생각해두 건방져. 어떻게 언니를 1년이나 속이니?"

"말 안한거지 속인거야?"

"안하긴 왜 안해 자매끼리."


예린과 선우의 사이를 함구하던 주연이 못내 서운해 수연은 동생이 너무도 얄미웠다.


"우리 다같이 사진찍자!"


예린과 선우를 중심으로 태언, 태리, 수연, 주연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두달쯤 뒤에 방문하기로 한 부모님을 생각하며 예린은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

 


"오빠."

"응?"

"나, 놓지 않아주어서 고마워."

".....무슨소리야."

"내가 놓으려고 할때마다, 잡아줘서 고마워."

"내가 너무 무섭게 해서 그런건걸."

"오빤 사랑의 방법을 모르던것 뿐이야."

".....사랑의 방법."

"이젠 알지?"

"니가 가르쳐주었으니까."


집착이 아닌 사랑을.


....사랑해.